봄 몰고은 '옛날 그림'의 마력...'도상봉·장욱진'展 제대로 '그림 맛'을 전한다. 매끈하고 사진같은 '요즘 그림'이 아닌 텁텁한 물감 맛이 진득한 '옛날 그림'이 새 봄을 몰고 왔다. 도상봉(1902~1977), 장욱진(1917~1990)의 사후 첫 2인전이 열린다. 서울 인사동 노화랑(대표 노승진)이 6일부터 펼치는 이 전시는 우리 '근현대 대가'의 면모를 뽐낸다. 도상봉과 장욱진은 국내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이다. 국내 주요 컬렉터들의 빼놓을수 없는 그림으로 생전 인기를 구가했고, 이젠 비싼 가격표를 달고 경매장이나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이 됐다. '한국미'가 바탕인 공통점이 있지만, 도상봉과 장욱진의 화법은 완전히 다르다. '라일락'꽃 그림으로 유명한 도상봉이 정직하고 섬세하게 정물과 풍경을 그렸다면, '아이같은 그림' 장욱진은 사물을 최대한 생략해 유쾌한 동화처럼 담아냈다. '그림 맛'이 다른 배경이 있다. 도상봉은 서양화 도입기의 기술적인 과정으로서 아카데믹한 훈련을 쌓은 모범형이다. 장욱진은 초창기 서양화 과정을 지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성장한 일탈형의 예술가다. "도상봉이 모범형의 대표적인 작가란 것은 당시 아카데미즘의 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미술학교(현 동경대학 예술학부) 교육 시스템에 영향을 충실히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에 비하면 장욱진은 한국인의 일본 유학이 보편화되었던 30년대 후반에 해당되는 경우로서 미술수업의 초기적 현상을 벗어나 비교적 자유스럽게 미술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시기에 미술가로서의 길에 들어선 경우다."(오광수 미술평론가) 독보적인 화풍을 구축한 두 명의 화가는 우리나라 서양화의 근대화 시점과 같이 한다. 도상봉은 함경남도 홍원읍 남당리 출생, 함경보통학교를 나온 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서 공부했다. 일본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했지만, 1년 후 동경미술학교로 옮겨 미술공부를 했다. 나비넥타이를 즐겨했던 그는 새로운 유화기법을 알리고자 ‘숭삼화실’이란 이름의 유화교실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기도 하였고, 해방 후에는 숙명여대에 잠시 재직하기도 했다. 정적이고 고전적인 화풍과 달리 미술의 대 사회적 저변확대와 제도 마련에 열정을 가졌던 운동가적인 면모를 갖춘 화가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55년부터 대한미술협회 위원장,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전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며 미술계 제도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백자와 라일락을 소재로 다룬 정물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감을 화폭에 담으려는 깊은 관조(觀照)'를 보여 준다. 백자 항아리와 그 속에 꽃이 가득히 꽂힌 심플한 구도로 화면을 채웠다. 그래서 '한국 인상파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과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고전적 사실주의와 한국적 아카데미즘의 원형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같은 그림' 장욱진은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의 거장 중 한 명이다. 아카데믹한 예술영역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조형의 진폭을 보여줬다. 충청남도 연기 출신이다. 양정고보 3학년으로 편입했고, 조선일보 주최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수상을 계기로 집안 어른의 후원을 받아 1939년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1944년에 졸업한 이후 귀국하여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1952년까지 동인전 활동을 했다.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맡았으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잠깐 재직하기도 했지만 덕소, 수안보 등 조용한 시골을 찾아 평생 작업에만 매달렸다. 그는 일상의 풍경과 소재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압축하여 표현했다. 까치, 가족, 새, 나무, 마을, 아이 등 지극히 소박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순수함과 선함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초연한 예술세계를 정립했다. 점차 스며드는 듯한 묽은 안료의 구사와 이에 걸맞은 자유분방한 표현이 특징으로 순발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포착되어 그려졌다. 먹물의 농담과 붓의 움직임, 결의 모양에 따라 모필의 일회성을 표현함으로써 장욱진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생전 '나는 심플하다'고 주장했는데 절제와 요약에서 말년에 자유와 해방으로 나아갔다. 그림은 풋풋한 기운 속에 해학이 넘치는 장면이다. 마을 앞으로 난 길에는 아이와 강아지가, 때로는 소와 새가 등장한다. 마을의 노인이 나타나고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가족들의 모습등 자연과 인간이, 인간과 동물이 어떤 위계나 어떤 차별도 없이 어우러지는 '귀의의 세계'가 펼쳐진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도상봉이 우리의 백자를 자신의 화면 속에 부단히 들였다든가 장욱진이 우리 전 시대의 풍경을 되살려놓았다는 단순한 사실만이 아니라 이들은 예술을 관류하는 소박함과 격조, 균형과 자유의 구현이란 정서의 공감에서 우리 미술을 한층 풍부히 가꾼 독창적인 작가들"이라고 평가했다. 도상봉·장욱진의 명작중 명작 20점이 모인 이 전시는 40년 인사동 터줏대감 노화랑 노승진 대표의 연륜이 빛을 냈다. 미술관이 아닌 상업화랑에서 흔치 않은 기획전으로 '근현대 대가-비싼 작가' 작품 섭외는 신용과 인맥의 힘이다. 보험가액만 30억치다. 이 전시는 그림이 안팔려 불황이라는 국내 화랑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대표 그림'인양 유명해진 단색화만 그림이 아니다. 작품값에 밀려 사라지는 옛날 작가와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의 아름다움을 재조명해야 할 때다. 미술은 감각을 깨운다. 기계에 의존하는 시대에도 손 맛 그림이 죽지 않는 이유다.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대세가 아니다. 그림은 정서를 회복하게 하고 옛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한다. 죽은 그림도 살려내는게 화랑의 임무다. 화폭을 터트릴듯 만개한 라일락, 천진한 동심의 세계가 빼꼼히 고개 내민 봄을 일어서게 하고 있다. 전시는 20일까지. 관람은 무료. [email protected] 2019/03/03
안병광 회장의 서울미술관 '미술관 부심' 2인자라면 서러울 남자가 있다.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 설립자 안병광(62) 유니온 약품 회장이다. 조선 말기 왕족 정치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을 품고 있는 미술관이다. 2012년 8월, 4만9500㎡(1만5000평) 지상 3층 지하 3층 규모로 개관했다. 원래는 유니온 약품 사옥 부지를 지으려 했지만 문화재인 석파정 때문에 미술관을 짓게 됐다. 개관 전시에 이중섭 유화 '황소'(1953)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6000만원에 팔렸던 그림으로 안 회장이 국내 'VVIP 컬렉터'라는 사실이 공개되어 주목받았다. 이 때문에 세무조사를 받았다. '그림 산 게 죄가 아닌데' 가슴앓이를 했다. '비싼 황소가 있는 미술관'이지만 '석파정 미술관'으로 더 유명하다. 겸재 인왕산 그림속으로 들어온 듯한 석파정은 보는 그대로 사진작품이 된다. 빼어난 풍광이 압권으로 미술관 관람객이 꼭 찾는 공간이다. 그래서 건물 주변도 신경쓴다. 수백 년 나이를 자랑하는 모과나무, 회화나무, 산수유 등은 안동, 영주, 구례 등에서 공수했다. 사랑채, 별채, 안채 등 건물 4채로 구성된 석파정 한옥엔 안 회장 부부가 산다. 폐가로 변해가던 150년된 고택을 65억원에 인수해 2년간 20억원을 들여 보수 공사를 했다. "문화재를 지킨다"는 자부심이 크다. 최근 석파정 아래에 또 하나의 미술관을 지어 개관했다. 총면적 990㎡(300평)에 지상 3층 규모로, 통유리창인 2층 전시장은 석파정이 그림처럼 담긴다. 신관은 청년 작가들에게 기회를 더 제공할 예정이다. 전시장도 벽을 툭 터서 작가들이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게 설계했다. 큐레이팅 욕심도 냈다. "미술관을 유한 마담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감성적인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초심을 살렸다. 신관 개관전은 안 회장이 직접 기획했다. 김환기 이우환 정상화 박서보 김창열 서세옥 곽인식의 대형 작품을 건 '거인' 전시는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진다. 경매사에서 극진히 대접할 만한 고퀄리티 작품들이다. 당장 팔아도 수억, 수십억은 받을만한 작품값도 튕겨진다. 특히 김환기의 푸른 점화 '십만 개의 점 04-VI-73 #316'이 미술관 설립이래 첫 공개돼 눈길을 끈다. 김환기 작품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한국 회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명작이다. 층고 5m로 200호 대작들이 여유롭게 걸렸다. 국내 최고 화가들의 대형 회화는 그림 보는 맛을 제대로 전한다. 달항아리(이천도예명장 권영배)도 함께 어우러져 우리 전통도자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한다. 모두 안 회장이 구입한 소장품이다. 미술품 경매시장은 2000억대로 판이 커졌지만 국내 컬렉터들은 베일에 싸여있다. 기업의 비자금 조성 등 돈세탁 이미지 때문이다. 이런면에서 안 회장의 비싼 소장품 공개는 이례적이다. 툭 까놓고 '나 이런 작품 있다'고 하는 자랑이다. 색안경을 끼게 할 빌미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대놓고 작품 공개는 '팔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미술관 운영은 '행복 끝 고통 시작'이다. 소장품 전시와 입장료만으로 유지하기 힘들다. 미술관 개관 후 2~3년도 채 못가서 카페나 음식점으로 변하는 이유다. 서울미술관도 개관 후 3년간 34억원 적자가 났다. 미술관 등록도 안해 정부 지원금도 받지 못한다. 소장품은 500여점이 넘어 미술관 등록 요건은 충분하지만 '자력 갱생'하겠다는 의지가 크다. 미술관으로 등록이 되면 전기세 감면이난 세제혜택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원금에 의존하다보면 자립도가 떨어지고, 요건에 맞춰야 할 간섭으로 정부나 지자체 눈치를 보게 된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큰 손 컬렉터'가 미술관 설립 등, 사회적 공공역할에 적극적으로 기여 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석파정은 권력과 권세의 상징이었다. 갑과 을의 비굴함이 뒹구는 정치와 이념의 공간이었다. 그런 땅을 문화공간으로 바꾼건 30년간 컬렉터로서 누린 기쁨을 나누고픈 마음에서다. '미술품은 공공재'라는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그림의 힘을 안다. 강렬한 경험 덕분이다. 1983년 26살 제약회사 골찌 영업사원 시절, 비를 피해 들어간 액자가게 처마 밑에서 이중섭 '황소' 그림을 보면서다. 뼈만 앙상하게 남았는데도 앞으로 세차게 전진하려는 '황소'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주머니에 있던 7000원을 털어 사진으로 인화된 '황소'를 사면서 이런 꿈을 꿨다. "내가 돈을 벌면 이런 그림 한 점 샀으면 좋겠다." 1988년 의약유통업체 유니온약품을 설립, 연간 매출 5000억원대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7년 후인 2010년 52세때 '진짜 그림' 황소를 낙찰받았고, 미술관 건립도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림은 사람들을 부른다. 1년에 2회 다양한 기획전으로 주목받았다. 개관 7년, 연간 15만명이 관람하는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미술관 사업은 사익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물건을 파는 장사가 아니다. 돈이 많아서, 그림이 많아서 할수 있는 사업도 아니다. 자기만족으로 시작한 '자존감의 끝판왕'사업이지만 결국 사회 공헌 소명감이 없으면 실현하기 힘들다. 어찌보면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현대의 독립투사들'이다. 백범 김구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文化)의 힘"이라고 했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제약회사 꼴찌 직원에서 사장이 되고 컬렉터가 되어 미술관을 만든 그는 '문화의 힘'을 안다. "서울미술관을 통해 문화강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경기 침체속 몸집을 불려 따가운 시선도 있다. '황소'가 키운 뚝심으로 버텨왔다. 관람객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는 그가 행복한 모습으로 이 노래를 들려줬다. '알몸으로 태어나서/옷 한 벌은 건졌잖소/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email protected] 2019/01/23
무서운 신예 화가 김수수 "용광로에서 인생 봤다" 2019년 기해년, 60년 만에 찾아온 황금돼지해, 누구보다 원대한 꿈을 갖고 힘찬 날갯짓을 하는 젊은 작가를 만났다. 올해로 스물여섯 살, 화가로 공식 데뷔하는 무서운 신예다. 오는 15일 서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2018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수수 작가다. '불-침묵의 언어'를 타이틀로 색면 추상화 50여점을 전시한다. 조선일보미술관이 20대 작가에 전시장을 내준 건 처음있는 일이다. 공간(150평)이 큰 탓에 그동안 중견 원로작가들이 주로 전시했다. 초대전이 아닌 대관전이지만 이 미술관에서 전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윤진섭 미술평론가가 서문을 써주신 게 힘이 됐어요. 운이 좋았고요"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인 윤진섭은 한국의 '단색화'를 세계미술시장에 알린 평론가다. 단색화(Dansaekhwa)의 영어 단어를 고유명사로 만들었다. 비평가인 그가 서문(작품평)을 썼다는 건 작품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평론가 윤진섭은 "20대 중반 젊은 나이에 굴지의 공모전에서 그의 작품이 주목받고 구상과 비구상 작품을 넘나드는 광폭(廣幅)의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특히 "캔버스에 담아낸 내용은 나이에 비해 노숙하며 세련됐다. 덧없는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환기시켜 준다"고 평했다. 김수수 작가는 지난해 하반기에만 국내를 대표하는 공모전인 2018 단원미술제 본상과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그림은 '불'의 연작이다. 시리즈 제목과 달리 뜨거움보다는 서늘한 추상화다. 작품은 적, 청, 황, 흑, 백 등 오방색이 한 화면에서 다양한 변주를 이루고 있다. 음과 양 등 상반된 ‘극과 극의 하모니’를 시각화시켰다. 국내 미술시장에 열풍을 일으킨 '단색화'와는 결이 다르지만, 젊은 작가의 흔치않은 색면화여서 주목된다. 현재 국내 젊은작가들은 대개 팝아트, 극사실화 작업을 하고 있는 추세다. 곱고 진득하게 칠해진 추상화 앞에서 그는 "불의 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2년전 한 일간지 신문의 기사를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장면에 꽂혔어요. 화면을 꽉 채울 만큼 엄청난 불길을 마주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묘한 흥분감이 일었죠. 무작정 사진 속의 장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충남 논산 연무읍 알루텍 공장에 있는 용광로였다. 단단했던 쇳덩이들이 벌건 쇳물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물처럼 녹아내려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장면은 그를 얼어붙게 했다. "용광로가 열리면서 뜨거운 열기가 온 천지에 터져 나오는 광경과 불의 색이 주변의 환경과 융합되는 장면은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멈춘채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온갖 감정들로 때 묻고, 많은 관계 속에 상처받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로 덕지덕지한 우리의 삶도 일순간에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용광로 안에서 들끓는 쇠의 모습에서 우리의 인생을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용광로에서 본 인생의 흥망성쇠와 생멸에 대한 순환의 법칙, 그 감흥은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졌다. “물과 흙이 불을 만나 단단한 도자기가 되고, 아무리 단단한 돌이나 쇠라도 불을 만나 다시 원형의 본체로 녹아내리는 모습을 최대한 압축하면서 단순미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시뻘건 용광로 앞에서 직접 체험한 '불'은 빛의 색인 오방색으로 파생됐고, 온종일 쇳덩이를 때리는 노동자처럼 그도 '그림 노동자'가 됐다. "용광로에서 본 감동은 불의 색감과 장인정신을 뿜어내는 노동자들의 모습입니다. 용광로의 문이 열리면서 허공과 바닥을 순식간에 하나의 기운으로 아우른 벌건 '불'색은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감흥을 전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시뻘겁고 뜨거운 용광로에서 거리낌 없이 불을 조율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야말로 장인정신을 느꼈습니다. 용광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저 또한 쇳덩어리를 매일 두드리는 노동자들의 행위와 같아지더라고요" '불'을 화폭에 담기 위해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아침 7시, 직장인 처럼 작업실로 출근해 하루종일 화폭과 씨름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이 평등하고 곱게 쌓이게 하는 건 시간이 약이었다. "작품을 보면 몇시간씩 작업하냐고 물어보는데, 실은 잘 모르겠어요. 낮과 밤, 몇시간의 구분은 제게 무의미해요." 무엇을 그렸는지 어려운 추상화지만 알고보면 쉽다. 작품속 붉은색과 흰색은 쇳덩이와 흰 재이기도 하고, 불이기도 하다. 검은 것(고체)이 붉은 상태(액체)를 거쳐 흰색(기체)으로 변환되는 과정은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쇠퇴해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순환과정을 색으로 표현했다. 용광로의 불을 통해 인생의 요체를 깨달은 작가의 색면화에 대해 윤진섭 평론가는 '후기 단색화'로 규정했다. "김수수의 색면회화는 가령 미국의 거대한 대지성을 암시하는 바넷 뉴먼(Barnet Newman)의 색면회화(Color Field Painting)가 지닌 숭고미의 표출과는 다르다. 수없이 바탕색을 칠하는 행위의 반복성은 건조의 기다림에 따른 시간의 추이, 즉 시간성이 개입돼 있는 바, 이 부분은 전기 단색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반복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들끓는 불의 이미지를 단색으로 잠재우기 위해 붓도 제작했다. 대형 붓 5~6개를 묶은 2m가 넘는 붓으로 단번에 긋는 작업을 수행한다. 화면 전체를 한 번의 붓질로 덮는 ‘전면일필법(全面一筆法)’이 특기다. 대략 10호(53×45cm) 이하의 소품이든, 100호(162×130cm) 이상의 대작이든 예외는 없다. “화면의 크기에 따라 일필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편편한 붓 여러 개를 나란히 붙인 특수한 붓을 자체 제작해서 사용합니다. 비록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서양화이지만, 마치 화선지에 일필의 흔적으로만 완성하는 동양 전통회화의 ‘일필휘지 기법과 생략의 ‘여백정신을 염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마지막 완성 단계에서 발휘되는 내리긋기의 간결하고 단순한 미학은 작품의 명상적 깊이를 더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작품의 주제를 ‘몰아(沒我)’로 삼았다. "굳이 ‘자기를 잊고 있는 상태’ 혹은 ‘자신을 숨기거나 특성을 없애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들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색조로 절제된 미감을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몰아일체의 작업은 감정 싸움의 승리에서 나온다. 그는 "혼자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힘든 건 감정 다스리기"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붓이 어긋나면 화가 나요. 그런데 또 잘 그려지면 기분이 막 좋아지고. 여러가지 감정들이 있는게 처음에 힘들었어요. 왜 갑자기 화가 났다가 기뻤다가 하는지, 그런 기분에 또 화가 났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계속 생각했어요. 화가 나면 화가 난 만큼, 기쁘면 기쁜 만큼 표현하니 그런 기분이 상쇄돼서 편안한 상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에 감정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어요." 용광로에서 발견한 인생, 끊임없는 붓질은 수행(修行)이었다. 몰입을 통해 평정심을 찾고 숙고하며 성장한 덕분일까. 20대 중반인 그는 "이젠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편하다"며 원로 화백같은 말을 내뱉었다. '화가'가 되기 위해 달려온 길은 치열하다. 최근 '서울대 의대'를 가기 위한 입시 교육 현실을 다룬 방송 드라마 'SKY 캐슬'이 보여주듯 '요즘 애들'의 자기관리는 부모의 배경과도 연관있다. 김 작가도 중학교때부터 입시미술을 공부했다. 이미 초등학교 4학년때 '제5회 전국학생 사생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경력을 관리했다. 1993년생 외동아들이다. "커서 뭐가 될래?" 물으면 ‘화가’였다. 3살 때부터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친구였다. “그것만 있으면 온종일 그림만 그렸던 것 같아요” 화가이자 미술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이기도 했다. 전시장에서 그림을 보는건 숙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때 대학 선택 갈림길에 섰다. 유학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한국 보다, 미국이나 중국의 대학교로 진학하고 싶었다. 미술계에 있는 아버지 지인들은 중국을 추천했다. 2011년 중국 북경중앙미술대학 유화과에 입학했다. 1950년 개교한 중앙미술학원은 청화대학 미대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입학하고 싶은 1순위 미대다. "10명이 정원이었는데 싱가포르인, 저 한국인 2명을 빼고는 모두 중국인 학생이었어요." 처음으로 부모와 떨어진 삶의 생애 처음으로 고생과 직면케 했다. '그림'과 '언어'는 가장 힘든 숙제였다. 중국에서 내로라 하는 그림 실력으로 입학한 친구들의 작업태도는 한국보다 더 치열했다. "모두 오늘만 살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분위기입니다" 덕분에 자극이 됐다. 하루 14시간씩 그림에 몰두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중국 친구때문이기도 했다. 가난한 친구는 학교가 최고의 연습실이었다. 모델과 재료가 제공되고 이젤이 있는 학교를 떠나면 안되는 친구의 간절함은 그에게로 옮겨왔다. 특히 유화과 교실은 한국과 달리 천장에 등이 없다. 자연광으로만 그림을 그린다. 방학때는 화가의 집에서 중국어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다. 오로지 그림을 위한 유학생활은 공모전에서 두각을 냈다. 한국에서 군대를 마치고 시도한 공모전에서 대상(2014년 제4회 대한미국 호국미술대전)을 수상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중국에서도 학기중인 3학년때 2016년 홍군대장정 80주년전 3등상 (중국 북경 중국미술관)을 수상했다. 2017년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온 건, 미국 유학 준비 때문이다. 그 사이 도전한 공모전은 화가의 길을 굳게 다지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지난 1년간 그린 작품만 200여점에 달한다. "제게 그림은 여러 생각들을 동시에 품고 있는 정중동(靜中動)의 제 고요한 심연을 옮기는 과정입니다." 단순한 그림이지만 ‘한 번의 붓질’로 쓸어내려 완성시키기까지 스스로를 담금질했다. 단단한 쇳조각이 불을 만나 물처럼 본연의 형체를 벗어버리듯, '불' 연작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을 녹여냈다. 생애 첫 개인전을 앞둔 그는 "아직도 덤덤하다"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다. “화면에 무엇인가 구체적인 상황이나 형상을 표현한다기보다,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절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평소 화면을 마주하고 잠시 눈을 감거나, 심호흡을 자주 했는데,이는 감정을 절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습관이었습니다. 관람객들이 제 작품을 보고 그 사소한 감정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괜찮다'라든지, 어? 나도 그리겠는데'라는 그런 반응도 제게 무척 소중함으로 다가올 거예요. '기대하지 말자'라고 마인드 컨트롤 하고 있는데 전시가 다가오니까 설레네요. 하하" 100세 시대, 비교적 일찍 화가로 데뷔하는 그에게 그림은 '소확행'(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다. 고행과 수행사이 젊은 작가가 탄생시킨 침묵의 언어’, 단순한 추상 회화가 전한다. “노동은 소중하고 반복은 힘이 세다”는 것을. 빠르게 변하는 세상속 끈기도 재능이다. 삶은 과정의 연속,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자신이다. 준비된 사람이 운도 기회도 잡는다. 전시는 21일까지 [email protected] 2019/01/11
'소변기' 뒤샹전 서울 오게 한 '기증의 힘'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5년 여름, 스물일곱살 뒤샹은 전쟁에 휩싸인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이미 1913년 아모리쇼에서 입체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로 명성을 얻은 후여서 예술가의 스튜디오가 밀집해있던 브로드웨이가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뉴요커가 된 그는 예술가·작가·지식인 무리로 늘 북적이는 컬렉터 루이스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 모임에 합류했다. 체스를 잘했던 그는 이 그룹에서 스타로 부상했고 아렌스 버그 부부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아파트와 스튜디오를 제공하며 물심양면 지원했다. 뒤샹은 '작가가 손수 만든 것'을 중시하는 기존의 관념에 반기를 들었다.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면서 자신의 작업방식도 바꾸겠다고 다짐한다. 서른살 때, 세상을 뒤집었다. 그때 뒤샹은 뉴욕의 현대 미술을 위해 예술가가 운영하는 포럼인 독립예술가협회 창립멤버였다. 젊고 패기만만한 독립예술가협회가 민주주의와 수용성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수호하는지를 시험했다. 1917년 4월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는 협회 첫 전시 '앙데팡당'전에 이름을 감추고 철물점에서 구입한 화장실 소변기를 출품했다. 작품 제목을 '샘'이라 쓰고, 'R. Mutt'라고 검정 물감으로 서명을 했는데, 이 사인은 뉴욕 변기 제조업자인 리처드 머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전시 감독들은 이게 작품이냐며 갑론을박을 벌였고, 급기야 '변기' 출품과 관련 투표까지 하기 이르렀다. 당시 협회 위원이자 뒤샹의 후원자인 수집가 아렌스 버그는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며 변기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조직위원회측은 “그것은 전혀 미술품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샘'을 전시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대중들에게는 실제로 한번도 보이지 않은채 '변기'는 그야말로 핫이슈가 됐다. '본래의 자리에 있으면 매우 유용한 물건이겠지만, 어떤 정의에 의해서도 그것은 예술작품이라 할수 없다'며 치워진 변기는 후원자이자 옹호론자인 아렌스버그 부부 덕분에 부활했다. 전시장에서 치워진 '굴욕 변기'를 아렌스 버그 부부가 사들였고, 또 잃어버리면서 복제의 복제가 시작됐다. 뒤샹은 새로 변기를 구입해 서명하고 아렌스 버그에 다시 제공했는데, 이때 변기는 '오브제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지킨 것'이라고 해석됐다. 원작과 복제품의 차이는 무엇인가. 뒤샹이 쏘아올린 이 질문은 20세기 현대미술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변기'는 개념미술의 원조가 됐다. 일반적인 상점에서 산 기능적인 물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미술의 맥락에 들어온 뒤샹표 '레디메이드(ready-made)'의 발명이었다. 소변기 '샘'의 위력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영국미술가 500명이 ‘지난 20세기 100년간 후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20세기 작품’ 1위로 뽑은 작품이다. '위대한 천재 예술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팝아트 황제'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두 폭'을 누른 뜻밖의 결과였다. '이게 작품이냐'며 쓰레기 취급됐던 소변기는 몸값도 올렸다. 1917년 굴욕시기를 거쳐 82년이 지난 199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1700만 달러에 낙찰됐다. 뒤샹의 작품 중 최고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이 소변기는 1917년 제작된 바로 그것도 아니고 1964년에 새로 만든 8번째 에디션(복제품)이었다. 20세기 현대미술사 혁명을 이끈 그 소변기 '샘'을 실물로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에서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1일 마르셀 뒤샹전이 개막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현대미술사 최대 논란을 일으킨 남성용 소변기 '샘'부터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 첫번째 레디메이드(ready-made) 작품 '자전거 바퀴' 등 150여점을 직접 볼 수 있다. 소변기 '샘'은 유리관에 쌓여 성전처럼 모셔졌다. 그 당시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대체 저것이 왜 예술이란 말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뒤샹은 '세상의 모든 회화는 보완된 레디메이드이고 동시에 아상블라주 작품'이라고 했다. 제품 쓰임새의 차이,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을 가져와 새로운 제목과 관점 아래 그 쓰임새가 사라지도록 한 것, 뒤샹이 그걸 해냈다. 화가의 전통적 역할에 대한 거부였다. 손재주를 작품에서 배제해 아이디어 자체를 전면에 내세운 레디메이드는 예술의 지적인 가치를 앞세운다. 쓰임새를 지닌 물건에서 벗어나 제조 상품들을 바라보는 경험, 예술적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시킨 것이다. 변기 '샘'을 계속 바라보면 뒤샹과 생전 함께 활동하며 그를 질투했던 피카소가 "그들(현대미술가)은 뒤샹의 가게를 약탈해 포장만 바꿀 뿐"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한다. 변기 제목이 '샘'인 것도 아이러니다. 현대미술이 샘솟듯 변기는 20세기 미술의 화수분이 됐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유산은 로버트 라우센버그, 제스퍼 존스, 리처드 해밀턴 앤디워홀, 제프쿤스등 팝아티스들을 비롯해 신사실주의와 플럭서스와 연관된 작가들에 의해 계승됐다. '키네틱 아트' 또한 뒤샹의 기계적인 실험을 발전시킨 장르다. 미디어아트 선구자 백남준은 평생 넘어서야 할 벽으로 뒤샹을 꼽으며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아트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이뤘다"고 할 정도였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게 하고, 작가 사후에도 세계 순회전을 할수 있는 건 후원자 덕분이다. 뒤샹의 후원자이자 수집가인 아렌스버그 부부의 공이 크다. 그들은 뒤샹 작업에 관여하기도 했고 수많은 작품을 구입했다. 화가에서 레디메이드 발명가로, 설치가로 조각가로 사진작가등으로 변신할 수 있게 후원한 월터 아르센 버그는 어떤 사람일까. 마르셀 뒤샹 회고록에 따르면 "아르센 버그는 하버드 출신으로 충분히 먹고 살 돈이 있는 시인이었다. "단테를 위해 그는 책 한권을 썼는데, 물론 자비 출판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출판하고 싶어하는 츨판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 재단 또는 이와 유사한 것을 하나 설립했는데, 세익스피어 연극을 쓴 사람이 사실은 베이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죽고난 뒤에도 비서들이 계속 세익스피어의 암시를 찾는 연구를 할 수 있게 돈을 남겼다. 과학적으로 전혀 유효하지 않은 연구였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1950년대 아렌스버그 부부는 회화 조각등 '뒤샹 컬렉션' 200여점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때도 뒤샹과 함께 작품을 기증할 미술관을 선정했다고 한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필라델피아 미술관 티모시럽 관장은 "그 이유는 그리스 신전처럼 생긴 미술관 전경 덕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뒤샹은 신전처럼 보이는 필라델피아미술관을 보고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이 미술관이 내 작품을 영구히 보존할수 있을 것 같다는 서신을 보냈고 이후 기증이 결정됐다" 실제로 뒤샹은 자신의 작품이 한 기관에 소장되기를 원해 작품의 복제, 전시, 소장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한다. 이 과정에서 뒤샹은 작품 설치 쿠레이팅 과정에 참여했고, 그의 최후의 작품인 '에탕 도네'는 뒤샹 사후 1969년 이래로 필라델피아 미술관에만 전시돼왔다. "예술가라면 진정한 대중이 나타날 때까지 50년이고 100년이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대중만이 제 관심사입니다."(마르셀 뒤샹) 티모시럽 관장은 "1954년 10월 아렌스버그 부부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기증한 모던 아트 컬렉션이 대중에 첫 선을 보인후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뒤샹 미술관'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샹 작품의 집대성이라 할 아렌스버그 컬렉션 기증은 필라델피아 미술관 역상에 이정표가 되는 대사건이었다. 덕분에 필라델피아미술관은 모던아트에 관심있는 예술가와 학자들의 성지가 됐다"고 자부심을 보였다. 1875년 펜실베이니아 미술관으로 설립된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938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같은 규모로 미국의 7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기증의 힘으로 이뤄진다. 티모시 럽 관장은 "25만점의 소장품은 80%가 컬렉터들의 기증품"이라며 "서유럽 고전회화인 존슨 컬렉션과, 근대회화의 아렌스 버그 부부 컬렉션, 타이손 컬렉션 등을 유치한 이후 모마미술관 못지않은 방대한 근대미술관으로 부상했다"고 소개했다. 이번 '마르셀 뒤샹전'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대표 컬렉션이 해외로 나온 첫 사례다. 일본 한국 호주등 아시아 순회전을 결정한 것과 관련, 티모시 럽 관장은 "아시아 예술가 100명이면 100명 모두 뒤샹의 작업에 영향받았다고 하더라"면서 "아시아에서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더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과 일반 대중들이 책에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차이가 있어 이렇게 우리가 직접 나섰다"며 뿌듯해 했다. 그는 "뒤샹의 대표 작품뿐만 아니라 수많은 드로잉과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 등 그의 아카이브를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은 처음"이라며 "한국인들은 행운"이라고도 했다.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키는 건 수집가(컬렉터)라는 말이 있다. 화랑이 작가를 발굴하지만, 결국 작가를 키우는 건 컬렉터다. 컬렉터가 있어야 작가도 살고 화랑도 살고, 그래야 미술시장에 피가 돈다. 특히 미술관에 작품 기증은 국가를 위한 일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이 '뒤샹 미술관' 성지가 되어 세계 관광객과 예술인들을 이끄는 것처럼 미술관 수준은 소장품이 가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관 예산이 관건이지만 해결책은 ‘미술품 기증’이 꼽힌다. 우리나라는 국민 1인당 소득 3만달러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미술품 수집가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않다. 물론 불법 상속의 목적이나 비자금 조성에 이용되는 사회적인 이슈들로 미술품 컬렉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킨 배경도 있다. 개인컬렉터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은 2018년 현재 등록된 작품 8200점중 기증작품이 3786점으로 46%를 차지하고 있다. 연평균 50~100점이 기증되며 해마다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소장품 예산도 늘고 있다. 2013년 31억에서 2017년 61억, 올해 2018년 74억원이었다. 반면 지난 5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 화백의 '붉은 점화'(1972년) 6200만 홍콩달러(약 86억3000만원)낙찰된 것과 비교하면 정부 미술관 소장품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미술품 기증·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 정책이 절실하다. 미술품 기증이 가장 활발한 미국은 기증 미술품 시가 기준해 최소 30%, 최대 90% 가깝게 세제혜택을 제공한다고 알려졌다. 1917년부터 민간기부와 민간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기부가 비영리단체를 통해 공공복지를 위해 쓰일 경우 세금을 대신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미술관 기증 미술품의 평가액만큼 세금을 공제해 주는 법률’인 언더우드 관세법(underwood tariff)의 시행으로 미술관에 대한 기부 및 기증사례가 급증했다. 미국 정부의 문화예술지원을 위한 ‘기부금 세제지원 제도’의 성공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미국 정부의 ‘문화와 예술 분야의 육성정책’은 재벌 견제용으로도 적극 활용될 만큼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뒤샹 사후 50년에도 그의 대표작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한국을 찾은 것처럼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에 대한 기증문화가 활성화되어야 할 시점이다. 미술품은 결국 국가자산으로 보존되고 후대에 물려지는 운명이다. 미술품 '소장'(수집)으론 한 명을 만족할 수 있지만, 기증은 수 만, 수백만명을 만족시킬 수 있다. 현대미술사 흐름을 바꾸고 고정관념을 깬 수천, 수억짜리 작품을 한자리에서, 단돈 4000원에 볼 수 있게 하는 '미술품 기증의 힘'이다. 전시는 2019년 4월 7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12/21
마리 관장 "3년간 행복했다...뒤샹전 보러 올 것" 21세기형 신인류 노마드족(Nomad). 스페인에서 온 남자 이야기다. 1966년 스페인 이비사 섬에서 태어났다. 어업과 농업에 의존하는 섬에서 아버지는 트럭기사로 일했다. 한때 관광지에서 히피들이 몰려 살았던 지역으로 그는 농촌과 히피, 두 세계 사이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1930년대부터 철학자 발터 벤야민과 예술가 볼프강 슐츠, 라울 하우스만, 윌 파버 등 유명인이 방문할 정도로 독일 프랑스 관광객이 많았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에 모두 떠나버렸고 섬은 히피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10대 후반이었던 1980년대는 여름철 가장 인기 있는 클럽 지역으로 부상했다. 나이트클럽 열기가 여전히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비사섬은 지금도 신나는 음악과 365일 파티가 열리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어린시절 프랑코 독재 경험과 민주화 과정을 거쳤고 바르셀로나로 유학을 갔다. 바르셀로나대학에서 철학·교육학을 전공했다. 스무세살때부터 노마드가 시작됐다. 그를 계속 이동시킨 건 미술이다. 처음 간 곳은 브뤼셀. 1989년 벨기에 브뤼셀 현대건축박물관 큐레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비테 드 빗 현대미술센터 예술감독, 베니스비엔날레 스페인관 큐레이터로 지냈고 2008년부터 2015년까지 7년간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철학·교육학을 전공했지만 어린시절 드나들었던 미술관 덕분이다. 고향 이비사 섬에는 1969년 건축된 스페인 제2의 현대미술관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1987년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미술에 빠져들었고 업으로 삼게 됐다. "당시 나에겐 예술이 로큰롤보다도 매력적이었다." 유럽권에서만 이동하던 그가 지구 한바퀴를 돌았다. "안냥하십니까. 저는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2015년 12월 14일, 서울에 등장한 그의 첫 인사였다. 한국말이었다. 파격과 충격을 몰고온 국립현대미술관장. 국내 첫 외국인 관장 입성이었다. 그가 오기전 미술관은 1년 2개월간 표류상태였다. 전임 관장은 학예사 부당 채용으로 직위해제됐고 미술관은 학연과 지연 수렁속에 빠져있었다. 유럽에서도 '외국인 관장'이었던 그는 한국 첫 '외국인 관장'이라는 부담감은 크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미션을 줬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만들어라' 3년이 흘렀다. '미술계 히딩크'로 화제였지만 기대와 기대사이 실망도 컸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고 했던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의 명언처럼 그도 말을 남겼다. "나는 더 일하고 싶다" "미술관장의 3년 임기는 짧다. 제가 한국에서 뗀 첫 발걸음이 두 번째 발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한다" 좌절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9월 11일 '연임 불가' 통보를 했다. 이후 다시 미술관장 공모가 진행됐고 16명이 응모, 12월 현재 3명(김홍희 이용우 윤범모) 후보로 압축된 상태다. 많은 매체들이 '떠나는 마리 관장'을 타이틀로한 인터뷰를 쏟아냈다. 벌써 한국을 떠난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마리 관장은 여전히 근무중이다. "이미 할 말은 다했고 떠나는 마당에 더 할말이 없다"는 그와 지난 6일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겸재 정선 그림같은 인왕산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관 집무실. 외국인 관장이 앉아있는게 이젠 자연스럽다. 책꽂이에는 전시 도록이 이전보다 많이 들어찼다. 오는 20일 언론에 공개후 22일 개막하는 마르셀 뒤샹(1887~1968)도록이 벌써 꽂혀있다. 개막일에도 나와지 못해 눈총받았던 그간 전시 도록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그러니까. 3년 걸렸다." 그가 말했다. "일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성과를 내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다"면서도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은게 있다"고 했다. "앞으로 미술관은 긍정적인 성과를 낼수 있고, 더 큰 훌륭한 전시로 보여질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만 본다면 과천관에서 연 사진 문명전,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의 대규모 전시가 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미술관 직원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가 이미 긍정적인 성과로 보여지고 있다." "물론 언어부문이 개선돼야 하는게 먼저 보이겠지만 관장이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떤 점을 잘 해왔나 강조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며 전시 이야기로 이어졌다. 큐레이터 출신 마리 관장은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마르셀 뒤샹'전은 '마리표 전시'가 열매맺은 결과다. 2016년 여름부터 추진했다. 지난해 봄 개막예정인 앤디워홀전과 추진중인 피카소전이 자금 문제로 엎어지면서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준비했다. 기대가 실망이 될때 비난이 쏟아진다. 예산과 내부 구조적인 문제가 컸지만 시행착오는 교훈을 선사한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굵직한 전시를 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 작가를 보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중요한 세계 유명 미술거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마르셀 뒤샹은 현재의 현대미술의 모습이 된 토대가 된 인물로 20세기 개념미술 선구자다. 뒤샹은 미술의 창조와 해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뒤샹 사후 5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 전시는 한국 첫 전시이자 아시아태평양지역 역대 최대 전시다.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 150여점이 들어온다. 대표작인 '샘'과 뒤샹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진 '에탕 도네'가 디지털로 구현된다. "뒤샹의 가장 훌륭한 컬력션을 모아놓은 전시이기 때문에 어느 전시보다 중요도가 특별히 높다." 이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마리 관장의 네트워크 힘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과는 20년이상 가깝게 지내온 기관이다. 그래서 순회전이 일본에서 개최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으로 가져오게 됐다. 이동 경로에 있어서 자금적인 메리트가 있겠다 생각했고 제안했고 성사됐다. 한국은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대형 전시를 기획해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리 추진된 만큼 운송료와 보험료도 절반으로 줄였다. 같은 지역의 기관과 파트너쉽을 맺고 외부 기업으로부터 후원도 받았다. "향후에도 해외순회전을 같이 주최하고 끌어오는 협업하는 기관이 늘어난다면 미술계 중심이 미국 유럽쪽이 아닌 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올 가능성이 크다"는게 그의 전망이다.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문명전' 예를 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미국 사진재단과 기획한 대규모 사진전으로 국내 전시이후 해외 순회전을 한다. 중국 베이징 올렌스 현대미술센터(2019년),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2020년), 프랑스 마르세유 국립문명박물관(2021년) 등 10여개 유명 미술관으로 들어간다. "우리 미술관이 시작의 발을 떼고 주최하고 수출하는 전시다. 이런 점에서 전시를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밖으로 내보내는 전시 수출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가능해진 것이다. 또 수준 높은 도록도 해외 서점에 유통할수 있게 됐다. 그래도 3년 걸렸다" 마리관장이 스위스 출신의 사진 전문 기획자 윌리엄 유잉(전 로잔 엘리제 사진미술관장)과 “10년 전부터 구상한 전시"로 사진을 통해 인류 문명을 해석한 전시는 호평을 얻고 있다. 또 현재 전시중인 단색화 거장 윤형근 전시도 이탈리아 순회전을 추진중이다. 이쯤되면 그에게 주어진 '세계속의 한국 미술관' 미션은 절반의 성공이다. 3년간 그는 매 전시때마다 나와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기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어 "아름답고 훌륭한 전시다. 많이 홍보해 달라"는 주문까지 할 정도로 문장이 늘어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독일어·이탈리아어·네덜란드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해 "한국어도 금방 배울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지만 언어장벽은 높았다. '마리 관장은 말이 안통해 안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마리 관장은 "한국어 발음은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한국어가 복잡한 면도 있지만 한국어를 익히지 못한 가장 큰 장애물은 따로 있다"며 한국어를 많이 배우지 못한게 큰 아쉬움이라고 했다. "3년 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모든 관심과 정신이 미술관에 쏠려야 할 정도로 업무량이 많았다. 사실 이 나이에 새로운 언어에 습득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런 걸 쏟을수 있을만큼의 여분의 시간이 많지 않았다.나의 모든 뉴런 세포가 미술관에만 집중했다. 하하" 한국에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월요일 출근했다 정신차리고 나면 금요일 저녁이고, 토요일에 힘들었다 쉬다가 일요일 보내면 월요일 아침이 지났다. 한번 눈을 감았다 뜨면 금요일에 와있고 한국에서는 다른곳에서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미술관 세계회를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했다. 실제로 외국인 관장이 오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은 국제적인 미술관으로 시동을 걸었다. 외국 작가 참여 전시가 늘고 세계 미술계 유명 큐레이터들이 집결했다. '슈퍼휴머니티’, ‘미술관은 무엇을 연구하는가’ 같은 국제심포지엄을 통해 지적 담론을 생산하는 기관이자 현대미술과 문화에 대한 이슈를 토론하는 플랫폼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내수용에서 수출용으로 미술관의 변화는 '외국인 관장'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빨리빨리' 성과 분위기속에서 조기 사임설 위기도 있었다. 한국미술 국제화와 관련 성과가 미미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때마다 마리 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업무 프로세스 혁신에 힘썼고, 이를 기반으로 훌륭한 전시와 프로그램을 선보이겠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 언론사에 2번(2017~2018년 전시 라인업에 대한 해명과,연임불가 통보받았다는)이나 공개 편지를 보내는등 소통 강화에도 적극적이었다. 미술관에서 40여개나 열렸던 전시를 줄였다. "퀄리티를 높이고 학예사들이 충분히 연구하고 준비할 시간을 줘야한다"는 취지로 학예직의 전문역량을 강화하고 전시를 보다 내실화했다. 마리 관장 취임후 2016년 29개, 2017년 27개, 2018년 25개 전시를 기획 추진, 새로운 해외 전시들이 잇따랐다. '예술이 자유가 될 때: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 '신여성 도착하다'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리처드 해밀턴', '역사를 몸으로 쓰다', '아크람 자타리', '문명: 우리가 사는 방법'전에서 '마르셀 뒤샹'전등까지 이어진다. 관람객수가 해마다 늘어났다. 2015년 208만명에서 2016년 221만명, 284만명(2017)을 돌파했다. 해외 전시만 많이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그런 의견을 들을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미술을 해외미술계와 단절시킨다는 의미일까?” 다양한 곳에서 일해왔지만 모든 기관들이 해외 전시를 보여주면 지역내에는 충분한 관심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역내 미술계에 속해있거나 소외받았다고 느끼는 경우다. 그는 단호했다."그런 의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한국사회는 해외미술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할 것이고, 또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바도 아닐 것"이라면서 "해외미술계와 연관성이 떨어지고 고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방향은 아니다"라고 잘랐다. 그래서 미술관장직 3년은 짧다는 주장이다. 소장품의 질적 개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3년에 한 번씩 기관장을 교체하면 일관된 수집정책을 수립할 수 없다. 공공미술관은 아주 느린 속도로 소장품 규모를 키워가야 하는 동시에 분명한 가이드라인과 목적이 수반되어야 한다"며 "또한 소장품의 수로 미술관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성과를 평가하기에 3년은 정말 너무 짧다. "영국 테이트 미술관은 니콜라스 세로타 관장이 27년 재임했다. 미술관은 장거리 마라톤 주자이지 단거리 스프린터가 아니다." 결정권과 재량권을 가진 히딩크와 달리 미술관 규정에 갇혀 제약을 받았다는 아쉬움도 있다. "축구는 경기 하나하나에 대한 전략이 중요하지만 미술관은 장기 기획과 연구, 안정성과 연속성이 중요하다. 후임 관장에게는 목표를 성공시킬 수 있는 시간과 도구가 주어지길 바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지난 3년은 제 커리어에 있어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기였다. 매우 소중하고 활기찬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세대의 유럽인들은 교과과정에서 아시아에 대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새로운 발견과 끊임없는 배움이 잇따랐던 3년이었다." "3년동안 매우 행복했다"며 미술관 직원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국립미술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매우 큰 행운이었다" 가장 행복했던 때는 미술관에 처음 일을 시작해서 모든 직원들을 만나고 3개관을 둘러보았을 때였다. "3년간 함께 진행했던 모든 전시가 매우 보람 있었다. 가끔 나의 요청이 쉽지 않았을텐데 현실화시켜준 노력에 대해 감사드린다. 제가 직원들을 통해 많이 배웠던 것 만큼 직원들도 나를 통해서 뭔가를 배웠길 바란다. 더불어 어떤 순간, 관계에 있어서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니 만큼 이해해 달라. 결과가 항상 중요하다고 말한 만큼 그 부문을 크게 봐달라" 그러면서 "후임 관장이 와서 우리가 함께 이뤄놓은 베이스를 끝까지 잘 즐길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남겼다. 연임은 불발됐지만 마리관장은 3년 임기를 모두 채운 관장으로 기록된다. 지난 10여년간 개방형 직위제 이후 임명된 국립현대미술관장들은 부침이 심했다. 불명예 퇴진이 잇따랐다. 2003년 임명된 김윤수 전 관장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임기를 1년 남겨 두고 2008년 해임됐고 대우전자 CEO 출신 배순훈 전 관장(2009~2011년)은 임기 4개월을 앞두고 자진 사퇴했다. 정형민 전 관장(2012~2014년)은 임기를 마치고 서울관 개관 작업을 위해 1년 연장된 상태에서 직위해제됐다. 1969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반백년이 흘렀다. 과천관 덕수궁관 서울관에 이어 청주관이 개관한다. 국립현대미술관 2018년 예산은 724억원, 학예인력 135명의 거대 미술관이다. 아시아의 원로 격인 근현대미술관이자 아시에서도 규모가 큰 미술관으로 꼽힌다. 덩치는 커졌지만 조직구조는 80년대에 머무르고 있다. 미술계는 현대미술을 홀대한다는 입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직이 차관급인 반면, 국립현대미술관장직은 국장급이다. '임기제 고위공무원 나급’으로 미술관에 파견나온 문체부 기획단장과 같은 급수다. 연봉은 각종 수당을 합쳐야 1억원 안팎이다. 연봉으로만 따지면 '미술계 히딩크'로 불릴수 없는 구조다. 히딩크는 2002년 월드컵 축구 감독으로 10억원 안팎을 받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위상과 권한, 임기 등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대와 홍대 파벌 구원투수로 왔던 그는 이제 다시 '미스터 션샤인(이방인)'으로 떠난다. 임기 만료일은 오는 13일. 이미 글로벌 헤드헌팅 업체에서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장직 러브콜을 해오는 상태지만 모두 미뤄뒀다. 한국을 떠난 이후에 진지하게 이야기하자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미술관 업무를 정리하는 것과 향후를 대비하는 것을 같이 진행할수 없다"는 이유였다. 아쉬움속 미련을 털어서일까. 애정이 넘친다고 하자 "계약직이니 업무에 충실한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자신이 추진한 마르셀 뒤샹전을 뒤로 하고 떠나는 그는 "개막은 못보고 가지만, 내년 2월 한국에 방문해 꼭 관람할 것"이라고 했다. 오는 17일 취업비자 만료로 부인과 함께 스페인행 비행기를 탄다. 첫 외국인 관장으로 한국 미술계에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킨 그는 "한국을 떠난 다음 목적지는 버케이션(vacation)"이라며 눈을 찡긋했다. "한국 예술은 매우 우수하고 흥미롭습니다. 한국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제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 예술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했기를 바랍니다. 감싸함니다." [email protected] 2018/12/09
'국민화가' 박수근 작품은 왜 유찰됐나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시대는 끝난 것일까. 11년만에 다시 최고가를 경신할지 관심이 높았던 터여서 싱겁게 끝난 '유찰'은 미술시장에 적잖은 충격을 가하고 있다. 케이옥션에서 21일 열린 경매에서 박수근 ‘시장의 사람들’은 시작가 39억원에 올랐지만 단 한명도 응찰하지 않았다. 추정가는 40억원에서 55억원이었다. '국민화가'의 굴욕이기도 하지만, 여파는 크다. 그동안 박수근은 이중섭과 함께 국내 양대 경매사를 견인하며 경매시장을 불붙게 했었다. 경매 때마다 박수근 vs 이중섭 매치로 낙찰만 되면 국내 최고 낙찰로 1,2위를 다퉜다. 물론 10여년전 일이지만, 올해 다시 존재감이 꿈틀댔다. 이중섭 대표 작품 '소'가 8년만에 경매장에 나와 47억원에 낙찰되면서다. 지난 3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18억원에 시작, 치열한 경합끝에 이중섭 '소'는 11억4000만원이나 몸값을 불려 새 주인을 찾았다. 2010년 경매에서 35억6000만원에 낙찰된 작품으로, 추정가는 20억~30억짜리였다. 이 때문에 11년만에 최고가에 도전한 박수근 작품도 기대감이 증폭 됐었다. 현재 박수근 최고 낙찰가는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빨래터'(1950·세로 37㎝ 가로 72㎝)다. 그렇다면 '시장의 사람들'은 왜 유찰됐을까? 추정가 40억~55억원이라면 최소 40억원은 받을수 있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작품도 '박수근 표' 기법이 모두 담긴 수작으로 평가됐다. 위작의 위험도 없다. 박수근을 존경하던 국외 소장자가 40년 가까이 간직하다 한국인에게 되판 것이라고 옥션측이 확인하고 발표했다. 박수근 작품의 독특한 특징도 있다. 시장을 찾은 여성 12명을 굵은 선으로 담아내, 박수근 작품 중 인물이 유독 많이 등장한 것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왜 이중섭 작품처럼 새 주인을 찾지 못했을까? 미술시장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다. 일단 '크기'가 문제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시장의 사람들'은 세로 24.9㎝·가로 62.4㎝다. 요즘 말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의 준말)가 떨어진다는 것. '소품인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는 것이다. 만약 2m가 넘는 크기였으면 달라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측면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는 김환기 작품은 모두 200~300호 크기다. 서진수(강남대 교수)미술시장연구소장은 "박수근 관련 호재가 없는 상황에서 작은 크기에 너무 높은 가격대가 무리였다"고 했다. 경기불황 탓은 아니라는 반응이다. 김환기의 1973년 작 ‘22-X-73 #325’가 30억원에 낙찰됐기 때문이다. 케이옥션 마케팅 전략 부재라는 평도 있다. 김환기 시대, 시장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지적이다.컬렉터들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이다. 특히 수십억대가 오가는 작품은 '머니 게임'이 치열한데, 큰손 컬렉터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 전략 부재도 주요 실패 요인중 하나라는 것. 실제로 미술시장이 다각화된 만큼 현실적인 치밀한 마케팅 전략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은 "좋은 작품만 수배하면 당연히 팔릴 거라는 논리를 지양하고, 섭외된 작품을 누구에게 어떻게 판매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사전 마케팅 수립이 철저해야한다"고 했다. 경매에서 유찰은 곧 작품에 빨간줄, 상처가 생긴 것과 같은 흠이기 때문이다. '김환기 대세'가 큰 이유다. 같은 값이면 김환기 작품을 선호하는 심리가 크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현재 국내 경매시장 최고가 낙찰 기록은 김환기가 1위부터 6위까지 장악하고 있다. 김환기 작품은 당장 팔아도 돈이 되지만, 박수근 작품은 타이밍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내수용과 해외용의 차이다. 국민화가 박수근 작품이 국내에서 인기였다면, 김환기 작품은 세계성을 획득, 해외 경매에서도 낙찰되고 있는 점이 근거다. 지난 5월 85억에 낙찰, 국내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 작품도 서올옥션 홍콩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했다. 결국 "트렌드에 밀렸다"는게 설득력 있다. 김영석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위원장은 "지난 10여년간 작품값을 조사하고 시가 감정한 경험으로 비춰보면 작품값은 시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수근의 작품이 완전한 구상화는 아니지만 전통적인 풍으로, 지금 시대는 구상보다 추상 시대"라며 "단색화가 국내 미술판을 바꾼게 주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현재 대세인 김환기 작품과 비교할때 시대성과 작품성에 차이가 커, 인테리어측면과 투자측면에서도 큰 손들이 선뜻 나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난 80년대 미술시장을 주름잡았던 한국화 6대가(이당 김은호, 심산 노수현, 심향 박승무, 소정 변관식, 청전 이상범, 의재 허백련)도 그렇게 저물었다는 것. 실제 현재 경매시장에서 6대가들의 작품은 현대미술작품값의 1/10 수준을 밑돈다. 케이옥션도 인정했다. "큰 손들은 이미 박수근 수작을 보유하고 있어 판매가 쉽지 않다"고 했다. 큰손들이 움츠린 것은 경매 예고가 화를 불렀다는 지적도 있다. '돈 세탁' 창구로 인식된 미술시장에서 세간의 이목을 끈 작품이 40억이상에 팔린다며 누군가 신상 털리고 세무조사와 함께 그림 가진 적폐로 몰릴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접은 것이라는 의견도 내놓았다. '박수근은 유찰되고 김환기를 낙찰'된 것과 관련 정준모 미술 비평가는 "'박수근 경매'한다고 예고되면서 이미 누가 이 작품을 가져갈까에 대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는데, 상대적으로 김환기는 조용하게 시작하지 않았냐"면서 "욕심은 나지만 낙찰받기에는 너무 경제외적인 부분에서 부담이 커서 큰 손들이 주저했을 듯하다. 오히려 경매 끝나고 애프터 세일에서 경합이 붙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의견도 보였다. 결국 경매는 '리세일' 장이다. 럭셔리하고 비싼 중고 장터다. 시장 흐름을 끌고 가는 것은 화랑전시, 아트페어, 비엔날레다. 구매한 그림을 다시 되파는 경매가 미술시장을 이끄는게 아니다. 경매는 시장을 뒤쫒아가는 것으로 이제 김환기 이후, 어떤 작가를 프로모션하고 마케팅해야할지를 화랑에서 고민해야 할 때다. 한편, 박수근 작품이 유찰된 케이옥션 11월 경매 낙찰률은 77%(146/190), 낙찰총액 115억(114억7100만원)기록했다. 70%가 넘는 낙찰률은 경기불황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날 30억에 팔린 김환기의 1973년 작품 '22-X-73 #325'가 최고가를 기록했다. 고미술 최고가는 송석 이택균 '책가도'로 5억6000만원에 낙찰됐다. [email protected] 2018/11/22
그렇게 누빔이불도 현대미술이 된다...이슬기 '다마스스' '웬 이불?...' 그림처럼 보이는 이불 앞에서 멈칫하고 있을때였다. "이게 무슨 속담으로 보여요?" 독특한 인상의 작가가 화려한 누빔 이불 앞에서 질문을 던졌다.(짧은 커트머리에 알록달록 원피스를 입고 빨간 스니커즈에 회색빛 스타킹을 신었다. 안경너머에는 핑크+초록색을 칠한 눈화장이 눈길을 끈다.) 벽에 걸린 이불앞에서 동상처럼 생각이 굳어지고 있을때 그가 한방 더 먹였다. "다섯살짜리 조카는 2개나 맞췄는데..." 난망함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순간 작가가 말했다. "'불난집에 부채질한다'에요." 그야말로 '헐~'이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보이는 이불이다. 흰 바탕에 빨강 파랑 초록 주황이 기하학적으로 어우러져 '고상한 추상화'로 인식한 생각의 틀을 깬다. '속담으로 만든 이불' 작품이라는 건 '제목'이 알려준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이슬기(46)작가다. 말을 할수록 세상 엉뚱함이 폭발하는 작가인데,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뛰어나다.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 펼친 개인전은 '다색화의 향연'이다. 그냥 보면 전통오방색을 쓴 '색면 추상화'로 보이지만 반전있다. 누빔 이불을 벽에 걸거나 바닥에 펼친 셈인데 '있어빌리티'(있어 보이게 만드는 능력)기술이 탁월하다. (물론 전시장에 있는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제목만 붙이면 현대미술이 되는 세상속에서 '이불 전시'가 새삼 특이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작가들이 만든 작업이 모두 작품이 되는 건 아니다. 상업성과 예술성에 눈 뜬 화랑주의 안목이 재능과 기능을 부활시킨다. '누빔 이불'은 작가가 2014년부터 통영 누비장인과 진행해온 '이불 프로젝트:U'다. "1992년 프랑스 파리에서 누군가에게 누비이불을 선물 받았어요. 아무 생각없이 잘 쓰다가 ‘다른 프랑스 친구들한테 선물로 사주면 좋아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 방문할 때마다 이불을 사러 갔었는데, 지금은 더이상 안 만든다고 하더라구요. " 그래서 이불을 직접 만들게 됐다. "아예 누빔방향까지 고려를 해서 말이죠. 새로 만든 옛날 이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색깔의 근원을 찾다가 오방색을 접했고, 이불 문양으로는 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속담을 기하학적으로 해석하여 반영했어요. 그 이불을 덮고 자면 그 이불이 사용하는 이의 꿈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2002년 한국-프랑스 교류 전시에 프랑스 작가로 초대돼 한국에서 전시한 후 전통 소재와 문양, 빛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있다. 곱고 예쁜 색으로 치장한 이불 작품은 그야말로 한땀 한땀 장인정신이 배어있다. '불난집에 부채질한다'를 비롯해 '엎질러진 물', '싹이 노랗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등 우리 전통 속담을 작가의 아이디어로 스케치해 장인들에 전달하면 통영 누비장인이 진주명주에 바느질 해 만든다. 화려한 색에 취해 다가가면 색과 색 문양과 문양을 맞춘 선들이 반듯하고 질서있게 뽐을 낸다. 따지고 보면 장인이 만든 누빔 이불인데, 작가가 속담을 불어넣자 예술작품으로 둔갑했다. 완벽한 화음을 고조시키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작가가 감독한 결과다. "장인들이 힘들어하더라고요. 이 선과 선을 맞추느랴고요." 작가가 가리키는 선을 보니 선들은 규칙적으로 어긋나있거나, 결을 달리한다. 이야기의 흐름을 전하기 때문이다. 특유의 해학적인 시선, 기하학적 패턴과 색의 힘을 통해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원초적으로 되돌려 놓는다. 손 안대고 코 푼격이지만, 아이디어가 우선인 세상이다. 그렇게 보면 장인과 협업한 누빔이불은 완벽한 추상화이자 개념미술로도 장르를 탈주한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난생 처음 작업한 '나무 체 프로젝트 O'도 소개한다. 프랑스 중부 지역 나무 체 장인과 협업한 작품으로 친환경 공공미술 가능성을 제시한다. 조명과 함께 어울린 '나무 체' 작품은 2m 높이에 설치하여 위로 올려다보게 한다. 가로 88cm 원형 형태로 30년된 너도밤나무로 제작했다. '나무 체 프로젝트 O'는 '아재 개그'처럼 만들어졌다. 작품 제목 오(O)는 하늘을 뜻하는 'Au Ciel'에서 'au'와 동일한 발음에서 시작됐다. '색깔의 무게를 재다'는 뜻을 담았는데 곡물 계량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쌀의 양을 재는 단위인 ‘되’가 사각의 형태로 측량된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보아소 (boisseau)’라는 원형 나무통으로 곡물을 측량한 것에 착안했다. "그 원형 모양과 나무 체 모양을 접목시키고, 원을 나눈다는 생각으로 조각을 구성했어요. 무게를 재는 기구는 보통 아래에 위치시키는데, 저는 머리 위에 위치시켜 기능이 있을법한 ‘보아소’를 연상시키는 조각으로 변형한 것입니다." 작가는 원의 안쪽의 틀을 나눈 뒤, 틀의 안쪽 만을 오방색으로 채색했다. (작가는 회화 작가가 아니라 조각가라고 했다) 아래에서 위로 쳐다볼 수 있게 한 작품은 한글 ‘여,우,아,이,요’ 등의 모음을 연상시키는 문양이 들어있다. 작가의 엉뚱한 재치를 엿볼 수 있다. "배가 고파도 예술가가 된 것을 한번도 후회해 본 적 없다"는 작가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은 전시장에도 구현됐다. 갤러리현대 1층에 들어서면 노란 은행잎이 깔려있다. 일명 '은행잎 프로젝트 B'로 가로 6m, 세로 12m 규모의 전시장 바닥을 은행잎으로 가득 채워, 밟을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낙엽밟는 소리도 들려준다.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으로 은행잎의 의미, 일반적인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은행잎을 보면 하나인데 둘이죠. 동서양이 합쳐있다는 말도 있어요. 또 괴테가 그랬어요. 은행잎은 하나였던 것이 갈라진 것이 아니라 잎사귀 두개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고...벽의 보라색과 대비되어 은행잎처럼 이중 인간이 되어봤으면 합니다. 전시장 색으로 늦가을에 갤러리에서 누리는 힐링 효과도 있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은행잎을 자세히 보면 결이 있다. 누빔이불의 세로줄과도 연결된다. 강박증같은 작가의 깨알 디테일로, 작가는 "관심있으면 모든게 다 연결된다"고 했다. 서울 출생의 이슬기 작가는 1992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하며 활동 중이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서 수학했다. 4년전 갤러리 현대 도형태 대표가 파리에서 만나 기발하고 독특한 작가에 반해 전시를 추진했다. 멜버른의 빅토리아 내셔널 갤러리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2001년 대안공간 파리 프로젝트룸(Paris Project Room)을 설립하고 운영한 바 있다. 최근에는 명품업체 에르메스(Hermes)와 함께 리미티드 에디션 캐시미어 퀼트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진행했다. 또 가구전문 브랜드 이케아(IKEA)와 진행한 아트 러그 프로젝트에서 출시되는 러그는 2019년 봄에 한정 기간 동안 판매가 될 예정이다. 장인들과 누빔 이불을, 30년된 너도밤나무로 '나무체'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결국, 전통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질문하게 하며 다가서게 하는 것 '미술의 힘'이기도 하다.) "한 작업이 다른 작업을 불러 오는 것 같아요. 이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리가 쓰는 물건들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더 나아가 생각해봤고, 인간이 제일 처음 사용했을 법한 것들을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바구니 프로젝트 W'가 나왔죠. 지금까지 발견한 가장 오래된 테라코타 그릇 표면에 있는 지푸라기 흔적으로 고고학자들은 인간이 처음으로 바구니 형태를 만들었고, 그 안에 흙을 빚어 넣어 그릇 모양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그렇게 바구니는 원시시대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형태도 변한 적 없이 쓰는 것입니다. 문화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르지만 공통된 점이 많습니다. '나무 체' 또한 그런 큰 둥근 모양을 이제는 더 이상 만들 수 없는 기계가 사라지면서 없어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작됐어요. 그래서 장인의 노하우를 빌려 인간과 물건의 근본적인 관계를 제 방식으로 작업해 공동체의 공공 장소로 이끌어 내는 것이 제겐 무척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다마스스' 전시 제목도 튄다. 알고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쉽게 알아 먹을 수 없는 현대미술의 묘미가 담겼다. "다마스스 다마스스 다마스스 수리 수리 다마 다마 스스쓰윽 다마 수수 옥수수 다마스 다마스쿠스 수리수리마수리 아브라 카다브라... ‘다마스스’는 언어의 원초적 움직임을 확장시켜 제가 만든 주문입니다. ‘다마스스’라는 말을 퍼뜨려 우리만의 염원을 만들고자 하는 뜻이 있어요. 그럼 그 우리는 누구일까요. 저는 한 줄 한 줄을 이불에 박아 주시는 통영 누비 장인들을, 또 난쟁이 야자수의 말린 새순 이파리 하나 하나를 엮으시는 멕시코 바구니 장인들을 생각합니다. 흐흐흐흐흐허헝~앗, 한국에선 이렇게 웃지말라고 했는데...경박스럽다고...이히히히힝~" 전시는 12월23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11/13
먹을수 없어 더 비싼 사과...윤병락 사과 130여년전 사과는 그림이 됐다. '사과 작가'는 세잔이 원조다. 프랑스 화가 폴 세잔(1839~1906)이 40년 동안 보고 또 보고 그린 사과는 큐비즘의 문을 열었다. 사과가 모델이 된 건 변덕을 부리지 않아서다. 움직임도 없고 쉽게 썩지도 않고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도록 보고 있어도 화를 내지 않았던 사과 덕분에 세잔은 피카소가 존경하는 '현대미술 아버지'로 등극했다. 미술사의 물꼬를 바꾼 사과는 15년전 서울에서 다시 마술을 부렸다. 경북 영천에서 자란 화가 윤병락이 늘 보고 먹다 그린 사과는 21세기 현대인의 지갑을 열었다. 고향에서 흔했던 나무 궤짝에 담아 그린 사과는 불티나게 팔렸고 '그냥 화가'는 일약 '사과 작가'로 등극했다. “나는 순간의 사과가 아니라 진짜 사과를 그리고 싶다"며 몰두한 세잔의 사과가 투박한 화석같다면, 윤병락의 사과는 매끈해 먹음직스럽다. 단단한 터치로 형태에 집중하고 전통 원근법을 깬 건 공통점이다. 세잔이 사과로 파리를 정복했다면, 윤병락은 사과로 대한민국 미술시장을 정복했다. 그렇게 15년째 '사과=윤병락', '윤병락=사과'로 살고 있다. 사과철인 10월~11월 매년 개인전을 여는 사과 작가 윤병락(50)은 올해도 어김없다. 빨간 홍옥과 푸른 사과를 또 궤짝에 담아왔다. 오는 7일부터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선보인다. 대개 화가들이 2~3년만에 개인전을 열고 신작 발표를 하는 것과 달리, 윤병락은 매년 똑같은 사과로 승부를 건다. 지겨울법도 한데 이상하게 신선하다는게 특이하다. "요즘은 브랜드 만들기 쉽지 않잖아요. '사과 작가'라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상태에서 그걸 떨칠 필요는 없죠. 그안에서 변화를 주고 새로움을 시도하고 있어요." 그래서일까, 매년 나오는 '윤병락 표' 사과는 탐스러움을 넘어 SF 영화처럼 환상적인 비주얼을 자랑한다. 얼굴만한 사과한알이 튀어 나올 듯하고, 나무 궤짝에서 우르르 쏟아지는 듯한 입체감도 보인다. 사과를 전시장에 건 노화랑 노승진 대표는 "올해 사과는 서로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싸우는 것 같다"면서 "모두 잘나게 그려진 사과들이 더 맛깔스럽고 풍요롭게 보인다"며 진짜 사과를 수확한 듯 말했다. 노 대표는 "사과를 샀던 사람들이 계속 사고 또 산다"면서 "사과 그림은 매일 봐도 안질린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그는 "매년 똑같아 보이는 사과지만 매년 다르다"면서 '사과 컬렉터'들도 그걸 알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사과 그림을 집에 걸어놓으면 부자가 된다'는 풍수 인테리어도 한몫했다.) 작가도 사과 덕분에 '부자 화가'가 됐다. '사진같은 그림' 실력은 구상화의 본고장 대구에서 연마됐다. 초등학교 2학년때 미술실기대회에서 상을 탄후 화가가 되겠다는 장래희망이 생겼다. 성장한 후 미술공모제부터 격파해나갔다. 경북대 3학년때 제1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93)특선을 시작으로, 1998년 제 18회 '대구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구상 화단에 윤병락 이름 석자를 새겼다. 대학졸업후인 1995년 고금미술연구회 선정작가로 초대되어 첫 개인전을 열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구상화가들 천지인 대구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0년에 가마솥뚜껑, 주판, 가위 등 옛 물건을 화폭에 담아내는 '보물찾기'시리즈를 발표하며, 극사실화를 이어나갔다. '그림 좀 그리는 사람' 에서 '사과 작가'로 변신한 건 2004년. 당시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마니프서울국제아트페어 첫 참가는 그를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작가로 만들었다. 그림을 걸자마자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국내 미술시장 최대 호황(2006~2007)과 맞물려 '없어서 못파는 그림'이 됐다. 2007년 옥션에서 30호짜리 '풋사과'가 1250만원에 낙찰되면서 스타작가 대열에 올라 작품값도 뛰기 시작했다. 2006년 호당 15만원선에서 불과 1년만인 2007년 25만원으로 급상승, 유명 중견·원로작가들의 작품값을 눌렀다. 불과 10여년전 미술시장은 젊은작가들의 대반란시기였고 윤병락도 그 열풍을 움켜진채 승승장구했다. 그에게 기적을 선사한 사과는 고향이 준 선물이다. 사과로 유명한 경북 영천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사과는 몸에 박혔다. '좋아하는 것을 그려볼까' 하며 선택한 사과는 '이브의 사과'가 됐다. 사과보다 더 사과같은 그림은 외면하기 힘든 달콤한 유혹으로 미술애호가들을 홀리며 윤병락을 '사과 작가'로 만들었다. '스타는 망하기 위해 성공한다'는 말이 있다. 미술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뜨겁게 부상한 많은 스타 작가들이 사그라들었다. 젊은 작가들에게 '돈 맛'은 무한 리필되지 않았다. 팝아트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림도 유행을 탄다. 극사실화·하이퍼리얼리즘이 뜨면 이후 추상화가 뜬다. 수십년간 반복됐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다. 단색화가 느닷없이 뜨면서 미술시장이 정리가 됐다. 지난 몇년간 단색화만 그림인 양 국내외 미술계와 옥션에서 대접받았다. 이중섭 박수근 시대에서 김환기 시대로 넘어간 배경이기도 하다. 덕분에 화랑과 작가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다'는 불황의 늪에 빠졌다. '사과 작가'는 살아남았다. "아직도 찾는 사람이 많아 주문(2년치)이 밀렸다." 윤병락에게 사과는 '밥벌이'다. 밥먹듯 사과를 그렸다. 포도농원을 운영한 부모님의 땀방울을 보며 '노동의 신성함'을 체득한 그는 농부처럼 작업했다. 가장으로서, 전업작가로서 지속가능한 성장의 해법은 성실함이다. 매일 똑같이 끊임없이 그릴 수밖에 없다. 반복은 디테일에 힘을 준다. 그래도 "사과는 그리면 그릴수록 어렵다"고 했다. 빨강과 녹색의 사과는 상큼하고 환하게 빛난다. 너무나 생생해서 꺼내서 먹고 싶을 정도다. 진짜 사과같아 놀라움을 선사하지만, 작가에게 '미술은 마술'이다. 얼굴만한 사과들을 채워 거대한 스케일로 압도하는 그림은 재현과 모방을 넘어선다. 하이퍼리얼리즘 회화로 보이지만, 기계적인 그림은 아니다. 매끈하게 처리되는 극사실화는 붓터치를 없애는데, 그는 터치를 살린다. 그래서 사과의 결이 보이거나 나무의 결이 보여 손 맛이 난다. 서양화지만 동양화기법이 융합됐다. 캔버스가 아닌 한지에 그려내 스며든 색감의 무르익었다. 작가는 패넬(화판)을 톱으로 잘라 윤곽을 정한 후 그 위에 삼합 장지를 부착한 다음 메디움으로 칠해 바탕 처리를 하고 그림을 그린다. 천으로 이루어진 캔버스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장지에 유채를 사용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유채물감으로 그렸는데도 매우 투명해 사과의 신선도나 실재감이 고취된다. 맑고 깨끗한 색채와 표면처리는 작가의 노동집약적인 손맛 덕분이다. 동양화처럼 위에서 내려다 보는 부감법(俯瞰法)으로 처리, 벽에 걸린 작품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사과가 쏟아질 것같은 긴장감을 전한다. 사과들은 캔버스안에서 바글거리지 않는다. 4각의 그림틀을 벗어나 전시장 벽면을 캔버스로 활용한다. 사과 상자와 사과 자체를 트리밍 하듯 오려서 그대로 벽에 걸었다. 그러니까 사과 궤짝이 땅바닥에 놓인 것처럼 전시장 흰 벽이 사과그림의 무한공간이 되는 셈이다. 나무 궤짝에서 굴러 떨어진 듯한 사과를 조금 떨어진 거리의 벽에 걸거나, 혹은 전시장 바닥에 놓아두는 공간 연출력이 가능해, 사과 궤짝에 담긴 진짜 사과를 보는 듯한 생생함과 생경함을 동시에 전한다. 그의 '사과 그림'에 대해 평론가들이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재현 회화를 벗어났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예술은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도구'라고 했다. 그림만으로 기억을 재생할 수 있게 해주고, 우리의 삶을 빗대어 보여준다. ('사과 그림'은 내게 어린시절로 돌아가게한다. 허리춤에 사과를 슥 문지른 후 아삭 한 입 베어물던 아빠의 등 뒤엔 엄마의 잔소리도 쏟아진다. '왜 또 씻지 않고 먹는거야~ 애들이 따라한다고~'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눈을 찡긋하던 지금은 없는 아빠의 모습이 재생되어 그리움을 전한다.)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그의 그림을 보고서야 우리는 매일같이 대하는 사과가 얼마나 근사한지 또 우리가 얼마나 멋진 세상에 살고 있는 지 새삼 깨닫게 된다”고 했다. 미술평론가 고충환은 "'사과 그림'은 일루전을 넘어서 현실을 넘보고 현실과 겨루는 것"이라고 극찬했다. 작가는 현실적이다. "사과 때문에 나도 밥먹고 살게 됐고, 자리를 잡았다. 이걸 통해서 행복을 찾는거다." 윤병락은 "사과 그림을 산 사람들이 매일 볼때마다 기분 좋다고 하고 새롭다고 하니까, 나도 행복하다. 그래서 더 신나게 그린다"고 했다. 그동안 1000점을 그렸다. 새로움에 대한 압박감은 있지만 매너리즘은 없다. 변덕부리지 않은 사과처럼 작가도 의리맨이다. "사과는 계속 그리겠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는 올 여름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그려낸 2m가 넘는 대작 10점 등 20여점을 전시한다. 먹을 수 없어 더 비싼 사과다. 작품값은 100호(160cm×130cm) 크기가 4200만원이다. 전시는 20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11/05
5.18 민주화운동 다시 깨운 광주비엔날레와 김선정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오후 5시 30분. 검은 마스크를 쓴 20여명이 구 광주국군병원속으로 들어갔다. 사위는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 울긋불긋 단풍든 키 큰 나무들과 깨진 창문틈까지 자란 초록 풀들, 구석 구석 건물을 감싼 담쟁이 덩쿨들이 그동안 만끽한 자유를 숨긴채 딱 달라붙어있다. 텅빈 건물은 사막보다 더한 황량함과 공포감도 전한다. 건물 뒷편을 걸어 계단을 통해 올라온 구 국군광주병원 본관 2층 대강당은 어둠의 세상이다. 해질 녘 창문 빛을 통해 드러나는 방들은 켜켜이 쌓인 먼지에 점령되어 있다. 페인트가 너덜너덜 벗겨진 벽, 누군가 놓고간 허리 보호대, 반쯤 열린 창문틈에 걸린 바지, 발에 밟히는 담배 꽁초들이 새삼 오싹하게 한다. 숨죽여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짧은 비명소리도 간혹 터진다. 먼지쌓인 당구대와 어두운 세면장에서 갑자기 당구공이 스르르 움직인다. 병원 강당에서는 사람도 없는데 스크린이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인기척은 공포체험같은 경험을 선사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즐길수 없다. 관람객들의 발걸음은 이곳에 오기전보다 더 무겁다. 40여분간 관람이지만 38년전 역사로 들어간 기분이다. 태국 현대미술가이자 실험영화 감독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tchatpong Weerasthakul)의 작품 '별자리'가 2018광주비엔날레 핫 이슈로 부상했다. 꼭 봐야할 전시로 입소문 나면서 전국에서 관람객이 찾아오고 있다. 20명 제한인데, 주말에는 50명 넘는 날도 있다고 한다. '국군광주병원은 광주 시민의 기억을 먹고 존재한다'고 파악한 아피찻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기반을 둔 미국 영화 작가 스탠 브래키지를 오마주, 건축적 형태로 리메이크하듯 그림자 잔상을 찾았다"고 했다. 작품은 병원 안에 쌓인 먼지나 유리 조각 하나 손대지 않고 그대로의 공간에서 당구공과 스크린을 이용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흔을 보여준다. 광주비엔날레 GB커미션을 통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구 국군광주병원(5·18사적지 23호)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당한 시민들이 치료를 받았던 곳이다. 2007년 전남 함평군으로 이전하면서 문을 닫고 폐쇄됐다. 2014년 11월에 국방부에서 광주시로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병원 옛터의 산책로를 개방했지만, 병원 건물을 개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휴관일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국군병원 아피찻퐁 전시 관람은 매일 오후 5시 30분, 7시 두차례 진행된다. 10여년간 죽어있던 건물을 심폐소생한 건 예술이다. 아무도 몰래 움직이는 당구공처럼 '지금도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듯한 작품을 통해 다시 5.18민주화운동을 상기시킨다. 국군병원 맞은편 폐허인 붉은 벽돌 교회도 오랜만에 활기다. 풀숲속 하얀 십자가를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는 '국광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은 거울들이 매달려 있어 흠짓하게 한다.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참여 작가로 영국 권위 미술상인 터너프라이즈에 두 번 노미네이트된 마이크 넬슨의 작품으로 거울을 통해 시간과 역사의 울림을 전한다. 매달린 거울 작품을 내놓기까지 작가는 몇차례 내한, 텅빈 병원을 걸어다녔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만 있지 않다'는 불편한 느낌을 느꼈다고 한다. 다른 존재의 형체가 반복적으로 보였는데, 건물안 수많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더 강렬해졌다. 그 효과는 작가를 더 불안하게 했고, 내가 왜 거기에 있고 그 건물 자체가 왜 남아 있는지를 스스로 묻게했다. 벽면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던 모든 이의 눈이 담겨 있는 60여 개의 거울을 떼어내 교회에 걸었다. 오래된 교회에 거울을 다시 거는 작업을 통해 작가는 일종의 배출 작업으로 과거의 연옥으로부터 탈출하게 했다고 전했다. 축적된 시간의 증거이자 역사로 증언자인 병원 거울은 세상밖으로 나와 또 다시 역사를 재생한다. 현대인과 마주한 거울은 이제 휴대폰속으로 들어가 그 자체로 역사를 저장하게 한다. SNS를 통해 활발하게 공유하는 밀레니얼 세대도, 외국 관광객도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새롭다. "유명 감독 아피찻퐁과마이크 넬슨의 작품을 감상하러 왔다가 깨지고 낡은 병원이 왜 그대로 남아있는지, 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 의미를 알게 되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입을 모은다.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살린 작품들을 본 오월어머니집 회원들은 “그날 이후 오지 못했던 곳인데 오월의 영혼을 달래준 거 같다”며 "광주비엔날레가 올해로 12회째인 데 오월정신을 구현한 의미 있는 비엔날레"라고 평하고 있다.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2018 광주비엔날레'가 초심으로 돌아간 분위기다. 두번째 방문해 찬찬히 돌아본 광주비엔날레는 창설 배경과 정체성을 각인시키며 역사의 축적과 성찰, 치유의 묵직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95년 9월 20일 개막한 제1회 광주비엔날레 ‘경계를 넘어’를 환기시키는 이번 비엔날레는 '상상된 경계들'을 주제로 11명 큐레이터가 동시대 화두를 시각적으로 다채롭게 펼쳐냈다. 43개국 165작가가 참여 300여점을 쏟아낸 전시는 광주비엔날레 창설배경인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담은 작품들이 두드러진다. 광주비엔날레의 정체성을 반영해 아시아 작가의 참여도 69%를 차지, 여성·이주·노동등 아시아 현대미술의 첨예한 현장을 접할 수 있다. 개막전 북한미술전시로 화제였지만, 개막후 달라졌다. 공개되지 않았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사적지 2곳이 더 인기다. 옛 국군병원과 함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에 의해 사용되었던 구 전남도청회의실인 5·18민주평화기념관 3관도 발걸음이 모아지고 있다. 민주평화기념관 영어 독일어 도슨트는 작품을 설명할때마다 북받치는 아픔에 눈시울을 붉혔고, 해외 관광객들이 공감대를 이뤄 눈물을 보인다고 한다. 이 2곳 말고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전일빌딩과 광주비엔날레 5·18민주화운동기록관도 2018광주비엔날레 기간 시각 문화 현장이 되어 5.18 현장을 국내외에 알리며 화해와 치유의 장이 되고 있다. '금기의 벽'을 깬 건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54)의 열정 때문이다. "이번 비엔날레를 계기로 국군병원과 전남도청회의실을 시민들에게 개방한 건 당시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하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불도저 스타일이다. 일단 밀어붙이는 성격인 김 대표는 '개방은 안된다'는 광주시청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잠깐 공간만 보겠다며 열쇠를 받아든 김 대표는 미리 불러들인 마이크 넬슨, 아피찻퐁등 세계적인 설치미술작가들과 함께 국군병원에 들어갔다. '세월의 묘지'같은 건물은 작가들의 신작 욕망을 자극했고, 그걸 알아챈 김 대표는 시청을 설득했다. 수십차례 찾아가 결국 개방 허가를 받고 작가들에게 공간을 내줬는데, 아픔이 서린 건물이어서인지 으스스한 에피소드를 방출했다. 사진작가 백승우는 혼자 건물을 찍으러 갔다가, 아무도 안보이는데 저벅저벅하는 발걸을 소리에 놀라, 그 다음부터는 스텝들과 함께 움직였다. 알고보니 동네 주민이었는데, 그 사람도 열린 문으로 몰래 들어왔다가 누군가 사진을 찍고 있어 깜짝 놀라 숨어있었다고 한다. 또 영상 설치작업은 고사를 지낸후에야 연결이 됐다. 소주를 뿌리는 고사를 지내지 않은 작품은 작동이 되지 않아 개막전까지 애를 먹었다. 결국 다시 고사를 지내자 아무탈없이 지금까지 작동이 잘되고 있다고 한다. 유난히 폭염이었던 여름 모기떼가 극성이어서 한방만 물려도 부풀어 올라 긁느랴 고생했고, 작품을 설치하는 작가들도 방방마다 쌓인 먼지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전기도 끊긴 건물에서 전기를 이어 다시 옛날 그 모습 그대로의 형광등을 켜고 무너진 천장 더미안에 영상을 선보인 건 기적이라는 자체 평가다. 2018광주비엔날레 ‘GB커미션’은 광주정신의 지속가능한 역사와 이를 둘러싼 담론의 시각화를 위한 신작프로젝트다. 1980년 국가가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전시 무대로 삼아 민주·인권·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전에도 시도 되지 않았던 전시로, 1980년 5 · 18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를 문화예술로 치유·승화시킨다는 광주비엔날레 창설 배경을 실천했다. 전시 중반 정도 달려가는 2018 광주비엔날레는 유료 관람객 13만명을 넘어섰다. 지난 주말 방문한 전시장은 교복입은 중고등학생들이 넘쳤다. 비엔날레측은 "예전처럼 동원령은 하지 않는다"면사 "평일에도 전라도 지역 학생들의 관람이 이어져 하루에 3000~5000여명이 방문하고 있다"고 밝혔다. 광주비엔날레 CEO이자 예술감독인 김선정 대표는 "마치 인사하는 일본 고양이가 된 듯하다"면서도 즐거운 모습이다. 하루에 날마다 10여차례 VIP 방문객을 맞이하며 인사하고 작품투어를 진행한다. 19일 오후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만난 김 대표는 하이톤의 목소리로 말도 빨리했다. 이날 오전에도 정신 없었다. 광주시청 회의에 참석한 후 대만에서 온 문화부 차관을 맞고, 해외미술관과 미술관계자들의 잇딴 방문으로 전시장과 식당, 본관과 아시아문화전당, 국군병원을 오갔다. 광주비엔날레 역사상 최초 여성 대표인 김 대표는 소탈함과 겸손함으로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 운동화를 신고 나타나 어디든 빠르게 움직이며, 누구와도 격의없이 이야기한다. 비엔날레 본관 전시장에서 무슨 작품인지 모르겠다는 학생들에게 스스럼 없이 다다가 작품설명을 해주고, 이해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함께 활짝 웃었다. 이전 대표들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분위기지만, 또 알고보면 깐깐한 CEO로 직원들은 피곤(?)하다. 수십년 전시기획자로 전시 프로세스를 꿰뚫고 있기때문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CEO 마인드까지 발휘, 전시부터 인쇄까지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다. 자신을 내려놓고 솔선수범하는 대표를 이제는 적극 지원하는 직원들은 오뚜기처럼 새벽에 일어나는 김대표를 '강철 체력'이라고 했다. (김대표는 초등학생때 피겨스케이팅 운동선수로 활동한 것이 큰 힘이라고 했다) 화장도 안한 얼굴로 바지에 남방을 걸치고 분주히 움직이는 그는 선머슴 같은 모습으로 '잰더리스(genderless)'다. 또 TV속 미술관장과 사모님 이미지도 확 깬다.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의 딸이면서, 이수그룹 김상범 회장 부인이고, 아트선재센터 관장이었다. (서른살 아들을 둔 엄마로, 따지고 보면 최강동안이다.) "엄마(정희자)때문이에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엄마가 유학을 떠났어요. 저희 남매는 할머니 손에 컸는데 그때부터 자립심이 길러진 것 같아요."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일찍감치 화가의 길은 아니라고 여긴 그는 대학 4학년때 결혼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남편을 따라 간 미국에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만났다. 백남준의 소개로 휘트니 미술관 인턴십을 하면서 큐레이터의 길로 들어선 그는 '미술판 인맥의 여왕'이 됐다. 1993년부터 아트선재센터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10년 SeMA 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전시 총감독, 2012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등을 역임했다. "그때 만났던 작가들, 그때 일했던 경험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서 "이번 광주비엔날레도 그때 만나 연결됐던 작가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했다.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에 선정될 정도로 큐레이터로서 승승장구한 그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장직에 거론되기도 했지만 공모하지 않았다. "할 생각도 없었고, 광주비엔날레 대표로서 광주비엔날레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다. "20여년전에 아시아 최초로 만들어진 광주비엔날레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비엔날레 창립 정신과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정신을 현대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광주비엔날레만의 정체성을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2018 광주비엔날레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다." '’영혼의 치유를 책임진다’는 뜻의 큐레이터 역할도 제대로 발휘했다. 11명의 큐레이터와 함께 만들어낸 '2018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의 아픔을 보듬었다는 평이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 공동 예술감독에서 5년후 광주비엔날레 대표가 된 그는 그동안 난해하다는 비난과 비판을 받아온 광주비엔날레 정체성을 재확립했다. 1995년으로 소환해 개최지 광주의 공간성에 대한 탐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받고 있다. GB커미션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선보인 파빌리온 프로젝트도 해외미술관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팔레드 드쿄 장드 르와지 관장과 김성원 큐레이터가 시민회관에 선보인 전시도 장소성에 기반한 작품을 선보여 주목을 받고 있다. 80년대 전성기였던 시민회관도 쇠락해 방치되다 몇년전 리모델링한후 연 첫 전시로, 팔레드도쿄 관장이 선택한 공간이다.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마치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처럼 해외미술계에서 자국 작가를 홍보하기 위한 전략적 공간으로, 호주에서도 신청이 들어올 정도여서 광주비엔날레측은 계속 운영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예술의 역할은 죄의식을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길잡이로, 결국 예술은 일상적 삶에서 진정한 가치에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가을 광주전역을 광주비엔날레로 물들인 김 대표는 보는 사람마다 1박2일정도 와서 비엔날레를 보고 광주 음식도 즐기라고 강권한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얘기다. "베니스비엔날레나 아트바젤등 해외 유명 큰 행사들은 대부분 비싼 돈을 내고서도 2박3일, 4박5일 아트투어를 가는데, 정작 우리 국민들은 광주비엔날레를 찾지 않고 미술계 관계자들도 하루왔다 그냥 가는게 아쉽다"고 했다. 그래도 "요즘엔 입소문이 나서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오는 관람이 이어지고 있다며 비엔날레 기간이 짧다"는 아쉬움을 전했다. 1995년 9월 20일 개막, 2년마다 9월에 개막하는 광주비엔날레도 광주 정신을 잇는 행사이니 만큼 5월 개막도 고려해볼만 하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제정된 만큼 5월부터 세계 미술인들을 광주로 모이게 해 화해와 치유, 역사적문화적 공간으로서의 광주로 재탄생하게하는 것은 어떨까.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도 5월 개막해 11월까지 6개월간 열린다. (그러려면 관광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바다가 있어 이국적인 부산과 달리 광주는 호텔과 먹거리 연계가 아쉽다.) 상근직으로 주중에는 광주에서 살고 있는 김 대표는 토요일 오후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이젠 광주집이 더 편하다"는 그는 "시리얼로 아침을 떼우는 남편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남편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임기는 ‘3년 무제한 재임’으로 다시 2020년 광주비엔날레를 준비해야 한다. '광주 정신'을 깨운 '2018 광주비엔날레'는 11월11일까지다. 이제 3주 남았다. [email protected] 2018/10/21
삿됨 없는 여인상...최종태 '영원의 갈망' "온 세상을 돌고 돌았다. 팔십이 될 무렵에서야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도가 잔잔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기나긴 밤을 지새울 때 별들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입었다." 아흔을 앞둔 그는 “이제야 아름다움의 원천은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얻기를 갈구하는 것, 행복이란 것도 바로 이 기쁨일 것이다. 모든 가치는 기쁨으로 통한다. 그것이 신의 한 쪽 모습이 아닐까." 신(神)을 이야기하는, 그를 설명하기위해서는 20여년전으로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다. 1999년 종교간 벽 허물기가 한국종교들의 숙제였다. 당시 법정(1932~2010) 스님은 누구 못지않게 그 숙제를 풀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서울 성북동의 유명 요정을 위탁받아 절로 개창한 길상사에 세울 관음보살상을 한 조각가에게 의뢰했다. 2000년 길상사 설법전 앞에 세워진 '관음보살상'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화제였다.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작품은 그야말로 금기의 벽을 허물었다. 개원법회 때 고 김수환 추기경이 개원축사를 했고, 승려와 수녀가 만드는 음악회가 열리고 종교를 초월한 화합과 만남의 장이 됐다. 성모상 같은데 머리에 화관을 쓴 '여자 부처'였다. 여섯 개의 봉우리가 솟은 관을 쓰고 있는 관음보살상은 국보 제83호 삼산관반가사유상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부처상을 순진무구한 여인으로, 관음상과 성모상을 하나로 합체시킨 건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조각가 최종태(86·서울대학교 명예교수)였다. 당시 성당 성물 제작에 한창이었던 최종태는 법정스님의 의뢰를 받고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젊은 날 불경을 공부했을 무렵 우연히 성경이 손에 잡히자,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통독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성경에 빠져들었다는 그는 조각가로서 관음상과 성모상의 조형미는 하나로 다가왔다. "성모마리아가 되었건, 관음보살이 되었건 다른 것은 외향이지 본 뜻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 "그러니 예술도 종교도 근원으로 가는 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 '여인상'에 천착해 온 최종태는 성상 조각의 대가로 더 이름을 알렸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단순한 선, 평면성과 정면성을 갖는 조각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초월한 형태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1958)출신으로 국내 추상조각의 대부 김종영(1915~1982)의 제자이자, 단순한 동화같은 그림 장욱진(1917~1990)의 문하생이다.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 중심과 주변, 예술과 종교 등을 갈라서 나누지 않고 끌어안았다. 예술적 실천을 통해 본질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다가가고자 긴 시간을 겪어냈다. 1980년대에 사회적 불안을 작품으로 표현한 '도끼형 여인상'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고요하고 순수한 정신성'을 지향했다. 늘 '조각이란 무엇인가?'가 화두였다.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계속됐다. 그러다 쉰 흔살이 되든 해, 어떤 날 아침 눈을 막 뜨는 순간이었다. 그는 ‘조각이란 모르는 것이다’ 하는 환한 답이 왔다며, "내 평생 그때처럼 기쁘고 신나는 날은 다시 없었다"고 했다. 지난 11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23회 개인전을 열고 있다. 근래에 제작된 채색 목조각과 이전에는 시도 되지 않았던 대형 파스텔화와 조각의 분신 드로잉을 대거 선보였다. 볼펜, 사인펜, 연필 등으로 그린 소묘화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모던보이 같았다.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입은 그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자신의 조각상 하나하나를 애정있게 바라보고 매만졌다. 그러자 얌전하게 서 있는 작품들이 표정을 달리하며 마주했다. 평범한 할아버지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는 세상 만물 이치에 통달한 도인 같았다. 1932년생 대전 출생으로 서울에서 산지 60여년이 됐지만 느릿느릿한 말투와 충청도 사투리는 여전했다. ▲드로잉 속 여인은 누구인가. -글쎄. 서양에서도 그걸 자꾸 물어. 누구 얼굴이냐고. 그때도 '한국사람'이라고만 했지. 누굴 보고 그린 적이 한번도 없어. 미술대학 1학년때부터 그랬어. 머릿속에 있는 것, 평소에 본 걸 그리는 거지. 이번 전시 개막식때 김병기 화백이 '한국사람 얼굴이다' 그러더라고. 맞아 한국사람이지. 전시장에서 한 작품 한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좋다'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다리를 모아 앉아 있는 여인상은 테라코타 같다. -테라코타 같이 보이는데, 흙물을 칠한 거야. 옹기 만드는 흙(점토)을 접착제(본드)를 개서 바른거지. 코팅이 되어서 비가와도 괜찮아. 안에는 나무야. 페인트를 안하고 흙물을 칠한거지. ▲작품에는 철에 소금을 칠해 부식을 낸 것도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편인가. -어딘가 흠이 있으니까…. 칠을 하는 작품이 된 거지. 처음엔 칠할 생각을 한 건 아녀. 오래 하다보니까 채색 목조가 됐어. 자연스럽게 이뤄졌지. 이 하얀 것은 백토로 한거여. ▲어떤 나무로 조각하나. -은행나무가 많아. 깎기가 좋지. 연하고. 그리고 은행나무는 좀이 안먹어 오래둬도 되는 특성이 있어. 그래서 한 것은 아닌데. 결이 없어서 좋아. 저 쪽에 칠 안한 나무가 그대로 있어. 보면 알거야. ▲빨간치마, 초록 저고리를 입은 여인상은 둥근 탈을 쓴 안동탈춤이 생각난다. -조선풍속인데 옛날 시집가기 전에 홍삼을 입은 거여. 새색시지. 서양사람 냄새가 없지. 순 조선사람이여. 이를 연구하는데 60년 걸렸어 단번에가 아니라, 오래 걸리는거여. ▲두 사람 얼굴인데 한 손으로 합장했다. 일타쌍피다. -두 사람을 하게 된 것도 50년 됐네. 1967년 무렵부터 연속적으로 했지. 왜 했냐고? 그건 나도 모르지. 혼자 놀면 외로워 둘이 된거 같아. 손은 하나로 왜 합장했냐고? 나도 몰러. 그냥 되는 거여. "미술사를 보면은 이렇게 비슷하게 붙이는 게 있는지는 몰라. 내가 세계 미술사 5000년 속에서 붙이는 조각을 나 혼자했다고는 할 수 없어. 과거 아프리카에도 있을 수가 있지. 하지만 난 그런걸 보고서 한 것은 아녀. 두 사람 붙인 것도 몇십년 됐어. 따로 따로 하다가 붙었지. 나무를 깎다가 자연스럽게 붙은거여~." ▲턱을 고인 이 여인상은 반가사유상이 생각난다. -반가사유상이 좋아서 이렇게 되는 것 같어. 그림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나 혼자 되는게 아니여. 역사하고 상관있지. 어떤 사람이 나 혼자 했다고 하는건 함부로 믿을게 아녀. 내 머릿속에 세계가 연결되어 있어. 어떤 하나가 아니라 동양도 있고, 서양도 있고 아프리카도, 멕시코도 있고, 다 있는거여. 나보고 설명하라고 하면 괴로워. 어떤 걸 얘기해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는 '반가사유상'을 예찬했다. 1967년부터 반가사유상에 빠져 50년째 좋아한다고 했다. ▲왜 반가사유상인가? -세계미술사에서 좋은 걸 뽑으라하면 '반가사유상', '석굴암', 일본에 있는 '백제관음입상'이다. 왜 좋으냐고? 한 가지 예만 들자면 고대 그리소 조각은 형태미여. 반가사유상은 정신을 갖고 있지. 아주 높은 정신을 가진 어떤 형상… 비너스는 그게 없다. 석굴암 불상이나 반가사유상은 세계 조각사에서 최고여. 양면(형태+정신)을 갖고 있다고. 그렇다고 턱에 팔을 괸 포즈를 한 작품이 반가사유상을 생각하면서 한 건 아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나도 몰라. 찰나 순간에 달렸지. 모두 미술사하고 연결이 되는 거여. 그런데 결국은 나도 반가사유상 거기에 가고 싶은 거여.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것. 거기로 가고 싶은 건데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녀. 내가 그 경지에 가야지. ▲여인상은 대개 슬퍼보인다.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그래? 하더니 말을 멈췄다. -내 작품이 '슬픈끼'가 있어. 최근 몇 년 동안 한 작품에는 그게 벗겨졌다고 생각했는데... 86년에 서양에서 전시를 하는데 한관람객이 나한테 와서 "왜 이렇게 슬픈 모습을 하고 있냐"고 묻더라고. 나는 그때도 그걸 상당히 벗겼다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본거여. 그래서 다시 보니까 방 전체가 슬퍼보이더라고. 그래서 밖에 카페에서 한참을 울다왔어. 그러고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래?....왜 그렇게 됐나. 어렵게 살아서 그려. 우리 시대가. 난 일본시대 살고, 해방 보고 6.25를 봤자녀. 또 집이 어렵게 살아서 그게 묻은것 같애. 그걸 벗어나려고 몇십년을 했는데...그런데 아직도 있다면은...내가 보기엔 많이 벗겨진 것 같은데, 그런데 용케 잘도 봤네. 허허허~" 전시장에는 '명상의 공간' 같은 방이 따로 마련됐다. 은행나무 그대로를 깎은 조각이 기도하 듯 서 있어 경건함을 전한다. 장승 같고, 엄마같기도 하고, 또 성모상 같기도 한 모든 형상이 아우러지는 모습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그래서 예술가라고 하는 것은 뭐를 공부하는거면 세계미술사는 기본이여. 또 거기서 벗어나야 되는 거여. 벗어나야 내 작품이여. 그런데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거냐면, 죽었다 깨어나야 돼." "세계 미술사에서 벗어나야 내 그림이 된다"는 그는 "내가 얼마만큼 벗어났나"가 궁금하다고 했다. "정신력과 모든 체력을 소모해서도, 예술가가 안될 확률이 더 많아. 나도 그게 됐는지 안됐는지는 몰라. 난 어느 정도 됐다고 보거든. 그거를 사람람들이 봐야 돼. 얼만치 벗어났나. 나는 후배들 그림 보면 그게 보여. 넌 여기 있다, 여기 있다... 나를 그렇게 봐줘야지. 나는 어디있을까. 아~허허허." 여인상들은 한국사람 얼굴이기도 하지만 세계인의 얼굴이다. 모딜리아니의 긴 얼굴 형상이 떠오르는 조각앞에서 '모딜리아니'를 이야기하자 그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세계미술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지만, 또 다 연결돼야지. 어디든지 다 연결되면서 거기로부터 떠나야돼. 잘 생각해보셔. 내 조각에는 아프리카도, 이태리도, 현대도 있지. 내가 다 공부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메이면 안된다 이거여. 거기서부터 벗어나야해. 화가는 그런 공부를 하는거여." 손오공 예를 들었다. "손오공이 진리를 찾아서 인도를 가는데 별별 요괴를 만나잖아. 손오공처럼 나도 긴 터널을 지나왔어. 별별 요괴들과 싸워서 다 이겨야돼. 예술가는 그래서 승리한 사람이여." 그는 20세기 대표 현대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를 좋아한다. '먹빛의 자코메티' 화문집을 낼 정도였다. 사르트르가 자코메티에 대해 쓴 "저 사람은 승리하고 있다"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예술가는 터널의 싸움을 다 이겨내서 승리한 사람'이라는 거지. 예술가는 그걸 해야돼." 작품은 인물상에 치중되어 있지만 작가는 삶의 본질과 진실된 내면을 작업에서 찾고자 했다. "많은 것을 보고 다 소화한 연후에야 내 눈이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사물이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준다. 예술가는 참 모습을 그려야한다." "그걸 80이 될 무렵에야 알았다"고 했다. "혼자 노력으로 되는게 아니여. 별, 풀, 나무 모든 인류 다 도움으로 왔지. '온 세상을 돌고 돌았다....기나긴 밤을 지새울 때 별들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입었다' 이 말은 거짓말이 없어. 확실하게 내 속에 있는 것을 정리한 거여. 발로 못 갔으면 책으로도 다 돌았어. 나는 거짓말 안해." 이제사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는 그는 "지금은 내 형태들이 조용 하다는 얘기다. 내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 형태에는 한국의 역사가 배어 있어. 굉장히 많이 있지. 보는 사람은 봐." 그러면서 100세가 넘은 김병기 화백이 자신의 전시를 보고 한 마디로 '한국인의 얼굴'이라고 표현한 것에 매우 만족해했다. 그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괴테)는 말을 새기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 "선배들이 어떻게 그리나 살피다가 일제시대 미술을 보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한 일, 민속미술로부터 고급미술에 이르기까지 연구했다. 그리고 중국 미술, 아시아 미술, 제 3세계권의 미술을 총체적으로 검토했다." 예술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돼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우리나라처럼 식민시대를 살고 동족전쟁을 겪고 여러 가지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그것과 예술이 무관하다는 말은 설득력이 모자란 것 같다"며 여인상과 성상 조각가로만 알려진 작가의 의외의 면도 보였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스승의 품에서 벗어나는 일과 세계 미술사로부터의 자유였다"는 그는 "둘 중에서 스승(김종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불경인 금강경에 보면 집착하는 바가 없으면 자유로워진다는 '음무소주'(應無所住)라는 말이 있다. 피카소다 비너스다 반가사유상이다 집착이 되지않고 거기서 부터 나와야 된다는 얘기다. 공자는 '사무사'(思無邪)라 했다. '삿됨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다. 예수도 성경에 이야기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얘기는 자유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결국은 석가모니나 공자나 예수나 똑같은 말을 했다. 어디고 메인 바가 없는 마음을 찾아라 이거여. 쉽게 말하면 욕심이 없어야돼." 어떻게 욕심을 없앨수 있냐고? "그러니까 그걸 다 정리하면 '승리'라는 단어를 줘도 된다는 거여.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얘기지. 그림도 마음이 깨끗한 연유에 되는 것이지."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둥글둥글한 푸른 섬이 인상적인 대형 파스텔화앞에서 깨끗한 마음이 된 듯했다. "내가 1970년대 학생들하고 일년에 한번씩 수학여행을 갔어. 저긴 남해섬을 갔을때인데 그때 작게 그린 것이 있었어. 최근에 그걸 보고 그렸어. 머릿속에 있는걸 지금까지도 계속 그리는 거여. 저런 섬이 있는 것이 아니여. 틀렸대도 할 수 없어. 내가 만든 섬이지. 내가 만들면 되지 안될게 뭐 있나.허허허." 유한한 인생을 살기때문에 무한을 꿈꾼다. 말로 다 되는 AI시대, 인간 정신은 삭막해지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더 위세다. 단지 인간의 형상일뿐인데 경건한 감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최종태 조각은 '힐링 선물'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시구가 떠오른다면, 놓치기 아까운 전시다. '영원의 갈망'을 타이틀로 40여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가나아트센터 1, 2, 3관에서 11월 4일까지 이어진다. [email protected] 2018/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