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로 1750억' 코디최 NFT 작품 깜짝...어떤 그림이길래? 6930만 달러(한화 773억원)에 낙찰돼 NFT 미술계의 대부로 등극한 미국 작가 비플(Beeple) 작품 보다 2배 더 비싼 작품이 한국에서 선보여 주목받고 있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코디최(60)의 작품이다.2019년 디지털페인팅 '하드믹스'시리즈2 전시 이후 3년만에 NFT 작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1999년 데이터베이스(DB) 페인팅 연작 '애니멀 토템(Animal Totem)' 중 1점을 NFT(Non-Fungible Token-대체불가토큰) 작품으로 내놨다. 가격이 무려 7만이더리움(약 1750억원)이다. 알록달록한 원숭이 2마리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디지털 아트다. 한화로 1750억. 이 작품값은 현재 '살아있는 작가중 최고 비싼 예술가' 1위인 제프쿤스의 '토끼'(약 1082억-2019년 미국 크리스티 경매 낙찰)도 뛰어넘는 금액이다. 이 작품가격은 어떻게 책정된 것일까.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는 "코디최는 디지털 아트의 선구자이자 원조"라는 것을 강조했다. 코디최가 1999~2000년에 작업하고 최근 NFT화 한 데이터베이스 페인팅(Database Painting)의 원본 디지털 파일 및 디지털 파일의 원본성에 대한 논의가 공론화되기 한참 전에 작업했다는 것. 이번 전시에는 당시에 전시를위해 그물망 캔버스에 대형 프린트로 제작했던 실물 작품들을 다시 공개한다. 코디 최는 이 작품을 아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1999년 동물원에 다녀온 일곱살 아들이 컴퓨터로 호랑이와 정글 이미지 파일 등을 붙이는 걸 봤다. 이후 그는디지털 공간 내에서 데이터를 축적하고 확장시키고 중첩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하는 회화에 있어서 창조란 작가의 순수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선택 이전에 존재한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쪽으로 기반이 옮겨져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회화 구축을 뜻한다. NFT로 디지털 아트시장은 거래 내역과 가격이 투명하게 공개되어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국내 메이저 상업화랑으로는 처음으로 NFT 작품을 전시하는 박경미 대표는 "데이터들의 결합으로 이뤄진 디지털 창작물(이미지, 음원, 영상 등)에 무단 복제 및 위변조를 막고 원본성을 입증하는 장치 NFT 덕분에 가상 세계의 작품도 아우라를 획득, 디지털 아트의 진본성과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면서 코디최의 작품은 이전 국내에서 선보인 NFT 작품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디지털의 창작 개념을 내세우거나 미학적 토대를 견고히 하는 NFT 작품을 아직 찾아볼 수 없는 게 현 상황"이라며 "단순히 디지털 기술로 제작하거나 기존 회화를 디지털화한 것은 진정한 디지털 아트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코디최는 지난 5월 아트바젤홍콩에 호랑이를 표현한 NFT 작품 '애니멀 토템' 연작을 같은 가격(1750억)에 출품했지만 팔리지 않았다. 7만이더리움(약 1750억원)이라는 작품 가격 책정에 국내 미술품 감정위원들은 "작품값은 말 그대로 작가 호가"이라며 "눈먼 투자자가 나타나 팔린다면 그야말로 대박이지만 이 같은 엄청남 가격 책정은 감정이 불가하다"는 입장들을 전했다. 그러면서 "상업화랑에서 선보인 NFT 작품은 새로운 미술 시장 구조변화에 대해 상기시켜주는 구실의 노이즈마케팅으로도 볼수 있다"는 의견도 보였다. 전시는 13일까지. 코디 최는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되어 국내에서 알려졌다. 고려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미국 아트센터디자인대학에서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1990년대 중반 뉴욕 다이치 프로젝트 개인전The Thinker, December, Deitch Projects, 1996, 프랑스마르세유 현대미술관 개관 기념 그룹전 L'ART AU CORPS: le corps exposéde Man Ray ànos jours, MAC, 1996 등으로 일찍이 국제적작가로서 명성을 다졌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뉴욕대학의 객원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그가 집필한 현대문화전문 비평서 '20세기 문화 지형도'(2006), '동시대 문화 지형도'(2010) 등은 국내 미술문화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피터 핼리, 마이크 켈리, 로버트 로젠블럼 존 C. 웰치맨 등 서구 유명 미술인들의 개인 컬렉션에 코디 최의 초기 데이터 베이스 페인팅들이 소장되어 있다. PKM갤러리 전속 작가로 지난 2019년에 개인전을 연바 있다. 2021/07/13
'이게 정말 그림?' 환장하겠네...이진용의 '환상적 리얼리즘' '이 책은 책이 아니다' 2017년 학고재 개인전에서 귀신같은 붓놀림 그림으로 화제가 됐던 이진용(60)작가가 4년만에 개인전을 연다. 이번엔 서울 이태원 박여숙화랑에서 펼친다. 오는 7월1일부터 여는 전시는 '환상이 스며든 현실, 이진용의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환상적 리얼리즘'. 마치 마술사 공연같은 제목처럼 그의 그림은 대환장할 분위기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정말 이걸 붓으로 그린거라고?' 속엣말이 튀어나올 정도다. 안경을 눈썹위로 올리고 바짝 다가가 다시 봐도 눈을 비빌 그림이다. 분명 유화로 그린 그림 맞다. 진짜 책처럼, 사실감 있게 부피나 재질감까지 느껴지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sim)을 구현한 ‘회화’의 진수다. 배경이 있다. 화가 이진용은 부산 출생으로 동아대학교 예술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조소를 전공하고 페인팅에 천착해온 그의 작품은 데뷔 초기부터 현재까지 40여년이 흐르는 동안 다른 작가들의 회화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부피감(Mass)을 지녀 시각적인 질량감(Visual Weight Feeling)이 있는 독특한 화면을 구사한다. 회화의 재료를 선택하는데도 유화물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그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작품을 창작해왔다. 작품 주제는 주로 자신이 모아 소장하고 있는 수집품(Collection)에서 선택해 주제로 차용한다. 책, 열쇠, 여행가방, 목판활자, 화석 등 다양한 오브제들을 수집해오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컬렉션을 작업하는 스튜디오에 가득 채우고, 그런 컬렉션을 매일 보며 자신이 느껴온 감정과 세월의 흔적 그리고 실질적인 외양까지 캔버스에 담아낸다. 이렇게 탄생한 이진용 작가의 작품은 사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사진이 줄 수 없는 붓으로만 이루어 낼 수 있는 표현적인 터치가 살아있는 분명한 그림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그림속 책들은 마술을 부린다. 한참을 보고 있으면 헌 책방 고유의 냄새가 느껴지고, 손으로 만지면 바스러질 것 같은 촉감마저 스멀거리게 하면서 눈만 아니라 오감을 자극한다. 책은 오래되어 더 이상 제목이 무엇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다. 하드커버 양장본의 표지에 압인으로 제작된 음영까지 표현한 그의 섬세하면서 대담한 붓터치는 감탄을 넘어서게 한다. 세필이 아닌 제법 넓은 붓으로 한 획, 한 획 터치를 통해 켜켜이 쌓아 올린 유화가 주는 특유의 마티에르는 “어떤 형상을 그리려고 한 게 아니라 대상의 본질이나 시간의 축적을 표현한 것”이라는 작가의 이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진용은 1984년 부산의 로타리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일반적인 평면회화 작업부터 나무 혹은 돌을 이용한 조각이나 에폭시를 이용한 오브제와 꼴라주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선보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 1993년 개인전으로 인연을 맺은 박여숙화랑과 함께 아트 쾰른, 아모리 쇼, 시카고 아트페어에 참가했고, 국내외 다양한 비엔날레와 초대전을 비롯하여 약 40여회의 개인전과 80여회 그룹전에 참여했다. 작품은 현재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박물관, 미국의 LA Artcore, 서울시립미술관, 호암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시는 7월31일까지. 2021/06/26
일필휘지 내공에 '그려진 그림'...이강소 화백 '몽유' "세계가 계절에 따라서 우주만물이 동서남북으로 춘하추동으로 순환합니다. 우주의 심포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속에 우리가 서로 구조되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 세계 속에서 먼지처럼 떠돌아 다니면서, 서로 소통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능하고, 좋을 것인가. 그래서 제가 택한 방법은 예술이었고, 또 회화였고, 이런 여러가지 방법론이었습니다." 이강소 화백이 '일필휘지(一筆揮之) 회화'의 내공을 보여준다. 1990년대 말부터 2021년까지 완성한 회화 30여 점을 들고 '몽유(夢遊, From a Dream'로 돌아왔다.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16일 개막하는 몽유전은 '화가 이강소'의 진면목을 확인하기 위해 마련된 신작전이다. 역동적인 붓질과 과감한 여백. 여러 층위로 칠한 거친 추상적 붓질이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대체 무엇을 그린 것일까. (미술시장 블루칩 이우환의 바람 시리즈가 언뜻 스치기도 하지만 결이 달라보인다) 갤러리현대는 "평면의 캔버스에 무한의 공간성을 구현한 실험적 신작 회화"라며 "이번 전시는 이강소가 지난 20년 넘게 전개한 회화적 언어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강소 화백과 갤러리현대의 상생은 3년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2018년 이강소의 개인전 '소멸'을 개최해, 그의 1970년대 역사적 실험미술 작품을 집중적으로 재조명했다. 이듬해, 갤러리 현대는 이탈리아 베니스 팔라초 카보토에서 그의 초기 설치와 비디오, 근작 회화와 조각 등을 아우르는 특별전 'Becoming'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선보여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사를 논하며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다. 그는 19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설치, 퍼포먼스, 사진, 비디오, 판화, 회화, 조각 등 매체에 구애받지 않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치며 특정 사조나 형식적 방법론에 안주하지 않았다. ‘회화는 무엇인가?’ 이강소 화백의 화두다. 그것을 쫒기위해 다종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천착해왔다. 1970년대 선보인 실험적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작품도 결국 '회화의 개념'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무언가를 그리는 대신, 찢고 벌거벗은 채 회화의 밑바닥을 헤쳤다. 캔버스천의 실밥을 한 올씩 뽑거나 찢어서 물질로서의 회화와, 회화의 평면성을 동시에 제시하기도 했고, 자신의 벌거벗은 신체 곳곳에 붓으로 물감을 칠하는가 하면, 캔버스용으로 쓰이는 광목천으로 물감을 닦고 그 천을 바닥에 펼친 '페인팅(이벤트 77-2)'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린다'는 것을 행위로 나타내기도 했다. 모니터 화면의 안쪽에서 밖을 향해 모니터의 면을 물감을 묻힌 붓으로 천천히 칠하며 그 모습을 상영하는 비디오 작품을 등장시켜 신선한 충격을 가했다. 미술평론가들은 "가장 오래된 매체인 전통적 회화 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허상인 이미지의 실체를 드러내 객관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갤러리현대 1층 전시장은 춤추는 듯한 붓질로 날아갈 듯한 리듬감을 전한다. 빠른 붓 놀림으로 굵은 선을 표현한 '청명' 연작 3점과 '강에서'(1999) 연작 3점을 소개한다. 이 작품들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기(氣)’의 양상이 잘 나타난다. 만물의 기운을 붓으로 시각화하는 것은 작가로서 이강소에게 큰 과제였다. 그는 "보이지 않는 ‘기(氣)’가 존재한다고 믿고, 항상 '기’를 이미지로 남기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지하 전시장과 2층 전시장에서는 역동적인 획과 대담한 여백의 다채로운 변주에 집중한다. 붓과 손, 감정과 정신이 혼연일체를 이룬 변화무쌍한 붓질이 강렬하다. 좌에서 우로 화면을 가로지르며 툭툭 던져지고, 캔버스와 싸우듯 격렬한 파장을 일으키며 ‘일획의 미학’을 전한다. 옛 문인화의 전통을 품으며, 동시대 회화의 언어성을 풍성하게 확장한 모습이다. 지하 전시장의 폭 5m의 작품 '허-14012'(2014), '청명-20062'(2020), '청명-20063'(2020), 2층 전시장의 '청명-16124'(2016), '청명-17010'(2017) 등은 소용돌이치는 어떤 풍경이다. 2층 전시장은 호흡이 정리된다. 이강소의 작품에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새와 배 등의 형상이 드러난 작품이 전시됐다. 새, 사슴, 배 혹은 산, 집 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색과 농담을 달리한 추상화된 붓질이다. '그려지다 만 듯'한 몇 개의 선만으로 이뤄진 '이강소 회화'의 특징이다. '무엇을 그렸나'는 중요치 않다. 이 화백은 "오리로 보든 배, 사슴으로 보든 상관없다. 보는 사람이 인지하고 즉시 사라지는 환상일 뿐이다. 각자 자신이 판단하고 느끼고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이번 전시에는 회색·무채색과 달리 강렬한 주홍 채색이 사용된 '청명' 연작이 나와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러 차례 겹쳐진 붓질로 다층화된 추상의 공간으로 역동적이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전한다. 이강소 화백은 "스스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입자와 에너지, 이곳과 저곳, 있음과 없음, 나와 너 등 그 모든 시공간의 찰나를 마치 신선처럼 '왔다리 갔다리'하다 그려진 예상하지 못한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붓질"이라고 했다. 마치 춤추는 무술같은 그림이 묘하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매 순간마다 조금씩 낯선 저에 의해 그려지는 회화들과 붓질들의 느림과 빠름을 경험해 봤습니다. 습관적인 붓질로부터 조금씩이나마 벗어나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시는 8월1일까지. 이강소는 194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생때 ‘청운회(淸雲會)’라는 그룹을 결성해 경북공보관 화랑에서 전시를 기획했다. 1961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한 후 ‘신체제’라는 미술 연구 모임을 결성하며, 본격적으로 현대미술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0년대 ‘신체제’, ‘A.G.그룹’, ‘서울현대미술제’ 등의 미술 운동을 주도하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특히 1974년부터 김영진, 최병소 등과 함께 '대구현대미술제'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85년 국립경상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립대학교에서 객원 교수 겸 객원 예술가로 지냈으며, 1991년부터 2년간 뉴욕 현대미술연구소(PS1)의 국제스튜디오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2002년 제3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영국 런던 빅토리아앤알버트미술관, 일본 미에현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호암미술관 등 세계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2021/06/16
모범택시 갑질회장이 화가?...백현진, '말보다는' 개인전 진짜 모습? 그런 건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진짜다. 백현진(49)은 '밝은 어두움'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똘끼 충만 독특한 배우로 존재감이 강렬하던 그가 화가로 등장, 맑은 모습을 보였다. 3일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최근 화제의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갑질 회장'으로 나와 변태같은 소름 끼치는 연기로 긴장감을 폭발시킨 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배우가 아닌 화가로 PKM갤러리에서 3년만에 전시를 연다. 2019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이라는 다소 거창했던 제목과는 달리 이번 전시는 '말보다는'을 타이틀로 달았다. 백현진은 "전시장에서 인상적인 텍스트를 본적이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며 "관람객이 각자 보고 들리는 대로 관람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그래서 전시장에는 작품을 설명하는 일체의 텍스트가 없다. 이번 전시 '말보다는'은 3년간 리얼타임속 부지불식간에 그린 작업이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 조각, 설치, 음악, 비디오, 공연, 대본, 퍼포먼스, 연기’로 구성되며, 총 60개의 작품이 전시된다. 구작 회화 3점을 제외하고 모두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신작으로 회화 44점, 설치작품 9개, 음악 4곡, 비디오와 대본 각각 한 편씩과 조각 1점이다. 그림은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희한하게 좋아보인다. 그게 백현진표 그림이다. 이번 작품에는 사람 형상이 빠져있는게 특징이다. 무의식속에서 일어나는 심상의 변화를 즉흥적으로 담아낸다. 수수께끼 같은 도상과 현란한 색채, 감정의 날 것 그대로가 투영된 빠른 붓터치가 방점이다. 그는 "내 그림에 대해 이게 '무슨 그림이냐, 이건 모르겠는데, 무슨 뚱딴지야'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쓸모가 있든 무엇이든 아니든 받아들인다"면서 "그 또한 예술적 경험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치부했다. 홍익대 조소과를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왕따'라서 거의 나가지 않았다"는 그는 조각을 전공하다, 음악가가 되고, 가수지만 화가가 되어 유명 화랑과 미술관을 제대로 통과하며 붓질도 멈추지 않고 있다. "저는 제 일을 보는 겁니다" 화가 설치미술과 음악가 배우. 동시다발적으로 활동하지만 "나는 아티스트이든 배우이든(이런게)하나도 안중요하다. 그냥 내 일을 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역병의 시대를 맞아 안해본 생각도 해보며 미술가로서도 생각하게 됐다"면서 "왜 이렇게 물건을 만들어낼까? 이렇게 계속 만들어내도 괜찮을까 지겨워 죽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했다. "배우는 몸뚱아리로 기록된걸 디지털화화고, 음악은 쿨한데, 미술이 (마음에)걸렸다"는 것. 그러다 자신이 쓰고 있는 '유화'라는 재료에 눈을 돌렸다. "알고보니 유화는 영원을 욕망한 상징이더라." 지겨워죽겠는데, 작업실에 수두룩한 유화를 보며 '내돈내산'인데 갖다버리기도 아깝고, 또 있는 것을 버리는 것도 그렇고, 버리는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사라지는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화가로 일한 이후 처음으로 조수를 고용, 구글링해 이미지를 추출하고 유화로 다시 그려 '생분해 가능한 것'이라는 작품으로 변신시켰다. PKM갤러리와 전속 의리파다. 1999년 인디밴드시절에 만난 PKM 박경미 대표의 안목으로 '작가 백현진'의 이력이 세련되게 이어지고 있다. (PKM갤러리는 국내 대표 기획화랑으로 아무나 개인전을 열어주지 않는 상업화랑이다.) 그는 원래 개성 강한 뮤지션으로 유명했다.1994년 장영규 원일과 함께 '어어부 프로젝트'를 결성해 '인디계의 반칙왕' 등이라 불리며 음악계에 눈도장을 찍었다. 개성 강한 캐릭터처럼 '무대포' 기질도 보였다. 1999년 영화 '반칙왕'에 우연히 오브리 밴드 멤버중 한명으로 출연한 것이 배우로 이어졌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이상한 상무'로 눈길을 확 사로잡았던 그는 최근 배우로 집중한 분위기다. 처음부터 카메라 울렁증은 없었다고 했다. "그냥 기계가 기록을 하는구나. 냉장고 앞, 선풍기 앞에 서 있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후 독립영화에 출연했고 2000년 장률 감독의 '경주' 출연이후 배우 시장에서 연락이 오고 있고, 마다하지 않고 출연한다고 해 소속사가 말릴 정도로 입장이 바뀌었다고도 했다. 그는 하정우 솔비 조영남등과 묶여 '연예인 화가'로 불리는 것에 "나 떴다"고 우스개 소리를 할 정도로 여유를 보였다. "어떤 사람이든 그림 그리는 건 환영한다"고 과장하듯 말했다. 가수로서 이번 개인전을 위해 특별 제작된 음악들도 선보인다. 각 전시장별로 QR 코드, 또는 스피커를 통해 송출되며 공감각적인 환경을 연출한다. 전시 일환으로 퍼포먼스와 라이브 음악 공연이 오는 19일과 7월 3일에 펼쳐지고, 전시의 연계 출판물로 소책자, 포스터, 카세트테이프 한정판 패키지가 6월 중순에 출간된다. 작가 마음대로 그린 그림. 굳이 따진다면 '추상표현주의'에 가깝지만 그 또한 큰 의미가 없다. 백현진이 "뱃속 편하게, 홀가분하게 끝낸" 그 기운이 전해진다. '저것도 그림이냐'고 수군대던 시절도 있었지만 백현진 그림은 '말보다는 실견'이 필요하다. '알듯 모를 듯 한데 편안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있어빌리티'한 현대미술의 묘미다. 전시는 7월3일까지. 2021/06/03
[인터뷰]윤범모 관장 "제 생에 이런 컬렉션은 두 번 다시...행복한 관장 실감" "주변에서 행복한 관장이라고 하던데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복 받은 관장이다. 2019년 미술관장으로 임명된 후 이전 관장들과는 달리 순탄하게 근무하며 행운의 여신까지 함께하는 분위기다. 개관 52년 사상 처음으로 미술관 누구도 상상 못했던 '이건희 컬렉션'이 넝쿨째 굴러왔다. 삼성가에서 1488점을 기증했다. 4월28일 삼성에서 고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을 미술관에 기증한다고 발표한 이후 바로 작품이 반입됐다. 현재 과천관 수장고에 안착했다. 7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윤 관장은 "꿈도 못꿨는데, 이러한 대량 작품의 기증은 우리 일생에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운 참 기록적인 쾌거"라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온 '이건희 컬렉션'은 회화 조각 공예 드로잉 판화 등 근현대미술사를 총망라했다. 김환기 박수근 장욱진등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 238명의 1369점과 피카소, 샤갈, 르느와르 등 외국 근대 작가 8명의 작품 119점이다. 유영국의 작품이 187점으로 가장 많고, 이중섭 작품이 104점, 유강열 68점, 장욱진 60점, 이응노 56점, 박수근 33점, 변관식 25점, 권진규 24점 순으로 집계됐다. 또 모네, 고갱, 피카소,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마르크 샤갈 등 해외 거장 작품들도 포함되어 국립현대미술관은 처음으로 이들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게 됐다. 모두 조건없는 기증이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을때 윤 관장의 바람은 소박했다. "그저 우리 미술관에 빠진 부분을 채웠으면 좋겠다. 근대기 대표작가의 작품 100점 만 와도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현재 국립미술관인데도 김환기의 제대로 된 '점 시리즈'가 없거든요 . 아시다시피 고가품이고 미술관 1년 작품 구입 예산 2~3년 치를 합쳐야 김환기 대표작 하나 살 정도 밖에 안 되니까. 꿈을 꿀 수가 없었죠." 국립현대미술관의 1년 미술품 구입 예산은 48억원 안팎이다. 하지만 내심 바라기만 했던 일이 현실로 이뤄지면서 윤 관장은 '행복한 관장'으로 불린다. 미술관의 제1은 소장품 확보인데, 그 어려운 일이 윤 관장 임기내에 저절로 들어오면서 미술관 새 역사의 신기록을 세운 관장이 됐다. 1000점 이상의 대량 기증은 사상 처음으로 '이건희 컬렉션' 덕분에 미술관 소장품은 1만점을 시대를 맞이했다. "소장품 8500점 무렵에 우리는 언제 1만점을 돌파하냐며 직원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다른 외국 유수의 미술관을 보면 소장품이 10만점이다 20만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부러울 뿐이었지요. 우리는 1만점도 안 되는 데 언제 따라가야 하는가 이런 부끄러운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죠" 50여년간 미술관 총 소장품은 8782점. 그동안 피카소등 내로라하는 작품 하나 없어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자존감이 낮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 국립현대미술관도 1만점 소장품 시대에 진입했다"는 윤 관장은 "주변에서 행복 관장 행복 관장하는데 각별히 행복 관장임을 더 느끼고 있다"며 뿌듯함을 보였다. '이건희컬렉션'으로 소장품 1만점 시대를 맞은 미술관은 한국 근대미술사의 빈 공백을 메꾸는 한편 수준 높은 한국 근대미술을 해외에 소개하는 기회가 마련됐다. 윤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중 근대미술 컬렉션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도약시켰다"는 점이 이번 기증의 가장 큰 의의라고 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의 유족에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특히 두 분의 용단에 의해서 이뤄진 일"이라며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에 감사하다"고 했다. 윤 관장은 삼성가와 인연이 있다. 1984년 중앙일보사 신사옥이 새로 문을 열면서 아트홀과 갤러리를 새로 열었는데 당시 갤러리 개관 실무 책임을 윤 관장이 맡았다. 그는 "당시 중앙일보사 상무 직함이었던 홍라희 전 리움관장이 갤러리를 담당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그 인연이 저로 하여금 미술계 현장에서 지금까지 일을 하게 했고 또 오늘 이런 자리까지 이어지게 된 것 같아요." 윤 관장은 1982년 미술 평단에 등단한 이후 30여 년간 근대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기획자로 활동했다. 호암갤러리 큐레이터, 가천대 교수를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로 활동하다 관장이 됐다. 근대미술사학자인 그는 이번 '이건희컬렉션'에 더 큰 감동을 했다. 희소가치가 높고 수집조차 어려웠던 근대기 소장품이 이번 기증으로 크게 보완되어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한국화가의 ‘대표작’이 대거 기증되어 미술관의 한국화 컬렉션 질을 현격히 높였다는 평가다. 이상범이 25세에 그린 청록산수화 '무릉도원도'(1922), 김은호의 초기 채색화 정수를 보여주는 '간성(看星)'(1927), 김기창의 5m 대작 '군마도'(1955) 1975년 출판물에 등장했다가 행방이 묘연했던 이중섭의 흰소(1953~54) 등이 미술관으로 들어왔다. 수집예산이 적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좀처럼 구입하기 어려웠던 박수근, 장욱진, 권진규, 유영국 등 근대기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골고루 망라되어 있고 근대미술 희귀작도 압권이다. 나혜석의 진작으로 확실하여 진위평가의 기준이 되는 '화녕전작약'(1930년대), 여성 화가이자 이중섭의 스승이기도 했던 백남순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 '낙원'(1937), 총 4점밖에 전해지지 않는 김종태의 유화 중 1점인 '사내아이'(1929)도 소장품으로 합류했다. 그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중, 1950년대 이전까지 제작된 작품은 960여 점에 불과했다. 윤 관장은 "이번 이건희 컬렉션중 김은호, 박래현, 김기창, 김종태, 백남순 작품 등은 1992년도에 출판된 호암미술관 소장 한국근대미술 명품 부록에도 소개된 삼성에서 아끼는 대표 작품들"이라며 "이번 기증품의 수준을 제고시키기 위해 삼성에서 아끼는 작품까지 흔쾌히 내놓아 더욱 감사하다"고 했다. 외국작가의 작품은 8명의 작품(119점)이지만 금액으로 따지면 천문학적 금액이다. 인상파 화가 모네의 '수련'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작품과 유사한 그림이 446억(소더비 경매)에 낙찰된바 있어 현 시가는 500억대로 추정되고 있다. 윤 관장은 "해외 거장들의 작품이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됐다는 사실도 상징적"이라며 "모네, 고갱, 피카소,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마르크 샤갈 등 거장의 작품들을 국내에서도 만나보게 된 의미가 크다. 이 가운데 피카소의 도자기는 112점으로 이 작품으로만 개인전을 치를만한 규모"라고 말했다. 이건희 컬렉션 특징은 어떨까. 윤범모 관장은 "한마디로 동서고금이 망라되었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우리 한국 근현대 미술과 서양의 현대 미술까지 두루두루 아우르는 광폭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르, 시대 또 작품의 성격 등 야주 다양성이 특징이다. 특히 젊은 작가의 배려, 지원 이런 점도 특기사항이 아닌가싶다"며 "오랜 시간 열정과 전문성이 스며든 컬렉션의 결과로 제 생에 이런 컬렉션은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 관장은 "미술관 컬렉션이 양적·질적으로 대폭 성장하고 해외미술관과 견줘도 될 만하다"며 "내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에서 열리는 한국 근대미술전에도 이건희컬렉션 중 일부를 선보여 수준 높은 한국 근대미술을 해외에 소개하는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수장고에 입고된 이건희컬렉션은 기증작품 검수, 상태조사, 등록, 촬영, 저작권 협의와 조사연구등을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조사와 분류가 끝나면 미술관 공식홈페이지에 공개된다. 공식 명칭은 ‘이건희컬렉션’으로 전시, 출판 등 활용시 작품기본정보에 함께 명기된다. 미술관 소장품 1만점 시대를 연 '이건희 컬렉션'중 1만번의 등록 번호를 가질 작품도 귀추가 주목된다. 미술관은 "입고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겠지만 1만번째 번호는 상징성이 있어 어떤 작품이 될 것인지 설렌다"고 했다. 현재 미술관 100번째 소장품은 박수근의 '할아버지와 손자'이고, 1000번째 작품은 배륭 작가의 회화 '구가시리즈 83'이 등록되어 있다. 윤 관장은 "이건희 컬렉션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새롭게 쓰게하는 컬렉션"이라며 "앞으로 어떻게 소장하고 관리할 것인지가 숙제로 평생 수집한 미술품을 국민의 품으로 보내준 고인과 유족의 정신을 기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삼성가의 기증과 관련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문체부는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이건희 미술관'이 될지 미술계의 바람인 '근대 미술관'이 될지는 아직 정해진 바 없다. "이건희 컬렉션중 최고 작품을 꼽는다면요?" 모든 작품이 소중하다. 공식적으로 답변하기 어렵다고 머뭇거리던 윤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저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입니다.5m가 넘는 ‘벽화'크기의 대작으로, 한때 중앙일보사에 걸려 있었던 작품이었죠. 1980년대 이후 실견이 불가능했어요. 이번에 미술관에 기증되어 다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 작품의 가치는 환산하기쉽지 않죠. 아마 요즘 경매에 내놓는다면 시작가는 300억~400억 되지 않을까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는 김환기가 한국전쟁 시기부터 즐겨 그렸던 소재로, 평생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조선 백자를 들거나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환도한 후 자주 등장하는 ‘광화문’으로 상징되는 조선 건축과 길거리의 노점상, 꽃과 새 등 그가 즐겨 그린 1950년대의 소재들이 총출동해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은 7월 덕수궁관에서 개최되는 '한국미, 어제와 오늘' 전에서 도상봉의 회화 등 일부 작품이 첫선을 보인다. 이어 오는 8월부터 내년 3월까지 세 차례에 나뉘어 공개될 예정이다. 2021/05/08
'광부와 화가' 황재형의 '막장 리얼리즘'…회천(回天)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광부 화가'로 불렸다. 1982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그해 가을 강원도에 정착했다. 강원도 정선 함백과 강릉의 정동 탄광촌 신입적자(일용노동자)로 일했다. 온 몸은 닦아도 닦여지지 않는 검정이 진득했다. 3년간 쇠락한 폐광촌과 강원도의 풍경을 몸에 새긴 그는 태백, 삼척, 정선에서 일하는 탄광 노동자들 일상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황지 330', '목욕(씻을 수 없는)'(1983), '식사'(1985) 등을 발표하며 갱도, 선탄부의 광구와 마스크, 광부의 작업복, 때 묻은 전표 등으로 현실을 대변했다. 1980년대 중반 건강상의 이유로 광부 생활을 접었지만 그의 화폭은 여전히 탄광촌의 삶을 살았다.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광부가 되었고, 현실을 형상화하는 방편으로 실생활에서 탈각한 사물을 화면으로 끌어내는 데 몰두했다. '광부화가'로 삶의 무게와 부조리를 피에 새긴 그는 리얼리즘 화가 황재형(69)이다. 그가 탄광촌의 일상과 삶을 리얼리즘 시각으로 그려낸 작품 65점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걸렸다. 황재형은 “막장(갱도의 막다른 곳)이란, 인간이 절망하는 곳이다. 막장은 태백뿐 아니라 서울에도 있다”며 민중미술을 지향한 작가는 "그 때 기억이 삶의 진실이자 연민"이라고 했다. 4일 개막한 이번 전시 타이틀은 ‘회천(回天)’. ‘천자(天子)나 제왕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다’ 또는 ‘형세나 국면을 바꾸어 쇠퇴한 세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황재형은 "인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그것의 회복을 꿈꾸는 메시지를 이번 전시에 담았다"고 밝혔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높이 2m가 넘는 그림 '황지 330'은 그가 현타(현실 자각타임 줄임말)를 느낀 작품이다. 낡고 헤진 작업복은 1980년 황지탄광에서 매몰사고로 사망한 광부의 작업복이다. 작업복의 오른쪽 가슴께에 자수로 새겨진 ‘황지330’ 명찰과 왼쪽 포켓에 달린 신분카드를 통해 옷의 주인을 알 수 있지만 ‘330’이란 숫자는 이 노동자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익명의 존재임을 명확히 한다. 이 작품은 1982년 제5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했고 ‘임술년’ 창립전에서도 선보여 주목받았다. '임술년'은 황재형이 중앙대학교 회화과 복학생들과 함께 1982년에 결성한 단체로 형상성이 강한 회화를 선보이며 현실의 부조리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했다. 이번 전시는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광부화가’의 정체성 안에서 황재형이 집적해온 예술적 성취를 조망한다. ‘광부와 화가(1980년대~)', '태백에서 동해로'(1990년대~)'실재의 얼굴(2010년대~)’등 총 3부로 선보인다. 1부에서는 인물 작품이, 2부에서는 풍경 작품이 주를 이루고, 3부는 인물과 풍경을 함께 선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전시공간을 통해 ‘사실성’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점진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3부 ‘실재의 얼굴’ 전시장은 2010년대 황재형이 지역을 벗어나 초역사적 풍경과 보편적인 인물상을 그리고, 1980년대에 천착했던 주제를 머리카락을 이용해 새롭게 풀어내는 시기를 담고 있다. 화면에는 탄광촌의 광부와 주변 풍경이 재등장하는 한편 세월호나 국정농단 사건과 같은 동시대 이슈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은퇴한 광부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아버지의 자리'(2011~2013), 광부의 초상을 머리카락으로 새롭게 작업한 '드러난 얼굴'(2017), 흑연으로 역사의 시간성을 표현한 '알혼섬'(2016) 등이 공개됐다. “광부화가 황재형이 그려낸 사실적 인물과 광활한 대자연, 초역사적 풍경은 오늘의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 전시는 지난 40년 동안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현실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한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보고 한국 리얼리즘의 진면목과 함께 미술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8월 22일까지. 2021/05/04
박서보 화백 부인? 수필가 윤명숙...'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의 아내이자 삼남매의 어머니로 살아왔던 그가 팔순 넘어 위풍당당하게 세상에 나왔다. 83세, 윤명숙. 누군가의 아내와 어머니를 넘어 독보적 에세이스트로 '나로 말할 것 같으면─Yes, I am'를 출간했다.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충북 청주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을 마치고 중퇴했다. 20세에 화가 박서보와 결혼하고 아내와 엄마로만 지냈다. 미술협회전, 홍익여류화가전 등에 그림을 출품하기도 했으나 붓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2006년 '문학미디어'에 단편 '오렌지의 기억'을 발표한 후 꾸준히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 "나는 요즘,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그릴 수 있는 소묘에 재미 붙였다. 주위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 중에서 만만한 놈을 골라 그린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오랫동안 방치한 감각이, 종이 위에서 연필을 움켜쥐고 우왕좌왕하는 손이,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신바람 나게 그렸어도 영 신통치 않다. 그래도 잡동사니들과의 잡담이 즐거워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길이 그리워서 나는 계속 그린다."(p.6, 「작가의 말」중에서) 이 책 '나로 말할 것 같으면'은 삶의 이력에서 나오는 연륜을 회한이 아닌 유쾌함 가득한 이야기로 풀어냈다. 코로나 시국과 노년의 삶을 담담히 서술하다 과거 전쟁 통의 피난생활, 전후의 궁핍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끈다. "결혼하고 4년 동안, 6개월마다 정신없이 이사를 다니다가,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장만한 곳이, 신촌에서도 제일 환경이 고약한 철길 옆이었다. 화물 기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연탄가루를 휘날리며 지나다녔다. 우린 바로 그 철둑 밑에 방 둘 부엌 하나 딸린 무허가 집을 산 것이다. 연탄 공장 바로 코앞, 먼저 살던 집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조금 비켜난 것은,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p.233, 「철길 옆 판잣집」 중에서) 경제력이 없던 가장이었지만 단색화 거장으로 이제 높은 작품값도 자랑하는 박 화백은 "현대미술 운동한답시고 가정을 알뜰히 보살피지 못한 나 대신 아이들 대학 갈 때마다 부엌에서 새우잠 자곤 하던 당신. 틈틈이 글을 쓰는 것 같더니, 자랑스럽다. 내 아내"라고 응원했다. 부부는 닮았다. 50여년간 '묘법'을 그리며 팔순이 넘어 단색화로 봄날을 맞은 남편 박서보 화백처럼 부인 윤명숙도 팔순이 넘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욕심이 있다. "단언하건대, 난 죽기 전에 신나게 글을 써보고 싶다. 더 욕심내자면 그림도 다시 그리고 싶다. 그리하고도 또 남은 욕심이 있다. 나의 작은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도 열고 싶다. 아니면 글과 그림을 모아 자그마한 화집을 꾸며보고 싶다.버킷 리스트 1이다." 300쪽, 알마 출판, 1만6000원. 2021/02/27
82세 '경이로운 화가' 윤석남, 여성독립운동가 14인 복원 올해로 만 82세. 3년만에 전시장에서 만난 화가 윤석남은 여전히 생생했다. 2018년 팔순에도 개인전을 열어 화제였는데, 이번엔 100세 시대를 증명하듯 더욱 '경이로운 화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림 말고는 할 게 없어서요." 윤석남은 지난 3년간 '싸우는 여자들'을 보며 행복했다.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그림만 그렸다. "왜 목숨을 바쳐서까지 독립운동을 했을까?" "나라면 목숨을 바쳤을까?" 이 의문과 질문을 화폭에 녹여 담아낸 그림은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으로 탄생했다. "초상은 역사속 흉상을 참고했지만 인물들의 모습은 제 머릿속 상상으로 그린 겁니다." 17일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 선보인 작품은 '여성주의 작가' 윤석남의 '결정판'이다. 본궤도에 오른 채색 여성초상화를 보여준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 연작과 대형 설치 작업을 함께 걸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14인(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은 일제강점기 여성운동과 구국을 위한 항일운동에 투신한 여성들이다. 학고재 본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박자혜(1895~1943)의 초상을 만난다. 독립운동가 신채호(1880~1936)의 아내다. 붉은 유골함을 가슴에 안은 초상은 괴팍하게 일그러진 얼굴이다. 윤석남은 "남편의 죽음에 슬픔과 분노가 차오른 표정을 담은 것"이라며 붉은 유골함은 피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박자혜는 1919년 3·1운동 당시 간호사로서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하였고, 만세 시위와 동맹파업을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대중에게는 그 이름이 아직 낯설다. 전시장 중앙 벽면은 피빛 붉은 저고리를 입고 한쪽 팔을 높이 뻗은 김마리아(1892~1944)의 초상. 기개가 충만하다. "이번 초상 작품중 가장 가슴에 와닿은 인물은 김마리아에요. 조선인으로서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두려움 없이 행동한 그 정신에 존경심을 담았어요." 김마리아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널리 신망 받은 인물이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선언문을 기모노 속에 숨겨 국내로 들여와서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적극 가담했다. 이 일로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고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고질병을 얻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자마자 활동을 재개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아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하고 조직을 확대하던 중, 동지의 배신으로 검거돼 또 한 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남자현은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인물이다. 윤석남이 그린 초상은 4번째 손가락이 잘린채 붕대를 감은 모습이지만 결연한 모습이다. 남자현은 1919년 3·1운동 직후 아들과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군 단체 서로군정서에 들어갔다. 만주 일대에서 교육운동에 힘쓰는 한편, 사이토 총독 암살을 기도하는 등 무력투쟁에도 앞장섰다. 또한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운동가들의 분열을 막기 위해 두 번이나 혈서를 썼으며,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는 왼손 무명지를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이라는 혈서를 써서 자른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보냈다.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건강이 악화돼 6개월여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출감 직후인 1933년 8월 22일 숨을 거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윤석남의 인물 채색화는 고운 세필로, 강하게 그려낸 게 특징이다. 원래 아크릴로 서양화 재료로 작업하던 그는 10년전 채색화로 돌아섰다.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후였다. "그 초상화를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 "나는 바보같이 살았구나"를 깨달으며 서양화 재료를 버렸다. 그렇게 채색화를 배우고 작업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왜 행복한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행복해요." 정면을 응시하는 당당한 눈빛에 매료되어, 여성의 시선을 드러내는 채색화를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2018년 학고재에서 선보인 '윤석남' 전시는 2015년경부터 그려온 채색화 연작을 최초로 발표한 자리였다. 전시 제목에 걸맞게 자화상을 다수 출품했다. 1982년도에 연 첫 전시부터 줄곧 어머니와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자신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처음이었다. “자랑스러운 나의 엄마”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것이 많았으나 자신을 드러내기가 못내 망설여졌다는 그가 고운 세필을 쥐고, 강렬한 필치로 스스로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주위의 벗들을 그린 초상 연작을 OCI미술관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수년간 개인의 삶을 돌아본 윤석남이 이제 역사 속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복원한다. 채색화를 그리며 과거의 복식 등을 참고하고자 한국의 초상화를 모은 책을 구입했다. 방대한 분량 속 여성의 초상은 가장 뒤편에 이름도 없이 단 두 점 실려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그려진 그림이었다. “왜인지 울화가 치밀었다.” 어려운 시대, 나라를 위해 싸운 여성들의 삶을 조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기록에 근거하여 그려야 하는 작업의 특성상 자료가 많지 않아 난항을 겪기도 했다. 윤석남은 역사가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화폭에 기록하기로 했다. 남아 있는 사진 자료를 참고하여 얼굴을 묘사하고, 각 인물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배경과 몸짓을 구상해 그려 넣었다. 윤석남의 초상에서 인물의 손은 크고 거칠게 표현된다. 손은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그 사람의 전체를 상징한다. 붓을 꼭 쥐고 초상을 그리는 화가도 그 투박한 '손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서문을 쓴 김현주 추계예대 교수는 "윤석남은 여성독립운동가 14인의 얼굴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알려주는 상황의 묘사나 단서를 통해 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며 "얼굴 중 특히 눈을 통해 내면의 기운이 전달된다고 생각해 항상 생생하고 강렬한 눈의 묘사를 중요시 여겨왔다. 얼굴 다음으로 손은 실행 수단으로서 크고 중요하게 묘사됐다"고 소개했다. 윤석남은 제일 먼저 작은 사이즈로 얼굴 드로잉을 하고 인물의 특성을 파악한 뒤에야 원본 크기의 초본을 만들어 한지에 옮기고 채색으로 마무리한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얼굴 드로잉과 소형 초상이 대형 초상화와 나란히 전시되어 초상화의 제작 과정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여성들. 그 여성들을 다시 불러낸 윤석남은 "앞으로도 조명할 인물이 많다"며 "역사 속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그림으로 복원해내는 작업을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100인의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을 그리는 것을 장기 목표로 삼았다. 윤석남은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각오다. 학고재 우찬규 대표는 "윤석남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채색 초상화'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며 "후대에도 남겨져 전해질수 있는 작품들로 의미가 있어 독립기념관 등 미술관에서 더욱 주목해 관람해줬으면 한다"고 바랐다. 김현주 추계예대 교수도 "윤석남의 초상화는 여성의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할 것"이라며 "초상화의 수가 많을수록 그 효과는 커지리라 생각한다. 그 초상화를 통해 윤석남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민족과 국가가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하는 ‘자립’이 무엇인지 진중하게 묻고 있다"고 전했다. 전시는 온·오프라인에서 동시 개막한다. 학고재 본관에서는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등 14인을 그린 채색화와 연필 드로잉을 선보인다. 그림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핵심적인 어록과 설명을 함께 붙여 이해를 높이고 있다. 본관 안쪽 방을 가득 채운 나무로 만든 설치 작품 '붉은 방'(2021)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4월3일까지. 2021/02/17
반백살 화가·전시기획자·영화감독의 '검질 상생'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화가, 전시 기획자(평론가), 영화감독이 방바닥에서 뒹굴뒹굴 하며 중얼거렸다. 3명 모두 반백살을 살았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고, 영화를 만들었다. 날마다 같은 날을 넘기며 밥 먹듯 일을 했다. "내가 벌써 50이야~" 살아온 세월만큼 단단해질줄 알았는데 새로운 길로 가지 못했다. 2018년 겨울, 제주에서 일이 벌어졌다. 그 날은 무덤앞에서 말을 삼켰다. 죽음은 나이 순이 아니다. 가장 어린 영화감독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떴다. 슬픔의 강을 건너고 온 탓이었을까.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내가 그리고 싶은대로" 화가가 화가 차듯 말하자, 영화감독이 설렁하게 말했다. "제주로 내려와" 전시기획자도 끼어들었다. "그런다면 집을 구해줄게" 한밤중 바람 소리는 거셌다. 창문은 바람에 멱살을 잡힌 듯 몇번씩 흔들렸다. 익숙함에 길들여진 지천명의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벌써 제주살이를 시작한 3명은 소년들처럼 낄낄댔다. 마침 제주 사는 영화감독 윗집이 비어 있었다. 얼결에 '집을 구해준다'고 말한 전시기획자는 말이 씨가 됐다. "화가 한번 키워보자" 책임감은 연세(1년 월세)로 지불됐고, 화가는 결정을 해야했다. '가족은, 학교(강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덕지덕지 붙은 삶의 무게도 '화가의 길'에서는 녹아내렸다. "진정, 그림만 그려보자" 2019년, 4월. 서울서 타고 다니던 자동차에 물감과 캔버스, 희망을 가득 싣고 제주행 배에 올랐다. 그의 작품 제목 '인스턴트 풍경(Instant Landscape)'처럼 즉흥적으로 시작된 제주살이는 1년간 이어졌다. 반백살에 흔들린, 화가 김남표(50)·전시기획자 김윤섭(51)·영화감독 민병훈(51) 이야기다. #중독된 세월의 독을 푸는 건 일상의 반복이다. 초심. 가족을 떠나 나를 비우고, 화가의 새로운 습관을 채우자 두려움이 앞섰다. 매트리스에 성경책 하나. 텅빈 작업실은 의욕이 충만했다. 프랑스 파리를 떠나 시골 오베르에서 자연을 그렸던 고흐처럼 날마다 화구를 메고 산으로 숲으로 바다로 들어가 화판을 폈다. "나가서 보니 대상이 보이지도 않고 그림도 안보이고 바람은 불고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죠." 예중, 예고, 미대를 거쳐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지만 스튜디오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야외에서 작업한 건 초등학교 사생대회 이후 처음이었다. 거친 굉음이 온종일 떠나지 않는 거대한 채석장부터, 온몸을 모기에 물어뜯기며 이름 모를 수풀(검질) 속을 뒤졌다. 거대한 환경에 맞게 제작한 대형 이젤을 들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여명과 낙조의 이미지에 심취했다. 땅거미가 지면 숙소에 돌아와 그림을 봤다. "그러면 뭔가가 아, 이거 내가 했나? 할 정도로 묘하게 선물을 받는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예술은 술로 풀었다. 민 감독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그림 이야기, 영화 이야기를 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그 얘기들은 모티브가 됐고 용기가 됐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않아서, 모든 날이 좋아서 웃고 아파하며 그렇게 매일 즉흥적이고 새롭게 화가의 운명을 다졌다. 먹고 자고 그리고...그리고 먹고 자고. 제주에서 야생동물처럼 화가살이를 한 김남표는 "화가는 노동자"라고 했다. "어떠한 목표나 계획을 하고 제주 작업을 시작한건 아니다." 제주 화가살이를 결심한 건 영화감독 민병훈 때문이다. 연민이었다. "혼자두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컸다. "나도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겪었지만 형이 겪고 있는 상황(부인을 사별한)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고, 그런 형을 보면서 옆에 있어주고도 싶었어요. 또 내가 다시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게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죠." 둘은 10년전 장흥아뜰리에서 만나 작업의 결이 맞은 '예술적 동지'다. "그림은 혼자 그릴수 있지만 환경의 변화, 영향들은 스스로에 영향을 줄수 없어요. 민 감독과 작업을 해오면서 운이 좋을 정도로 깊은 영감을 받았어요." 민병훈 감독은 화가의 길에 동행했다. 제주를 뒤져 풍경속으로 화가를 안내했고, 그 모습을 앵글에 그렸다. 그렇게 담은 장면으로 영화 '팬텀'을 찍었다. 김 작가가 아내와 사별한 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큐와 드라마가 섞인 영화다. 내년에 개봉한다. "내가 보는 시각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 재미도 예술가들만의 재미가 아니라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민 감독은 김남표의 그림에 대해 "그림을 보고 난 후 가슴이 먹먹하고 아림과 동시에 두근두근 떨려오기도 오랫만이었다"며 "그의 그림은 영화적"이라고 했다. "내년에 개봉하는 영화 '팬텀'은 화가 김남표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가 그린 그림이 액자구성으로 보여진다. 김남표는 풀떼기 같은 화가다. 숲에 있어야 되지만 또 있으나마한 풀 같은 유연한 화가다. 그의 그림은 무언가의 너머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 분명 관람객도 교감할 것으로 본다." #친구는 또 하나의 세상과 만나는 경험이다. "동지애였다." 화가의 제주살이 집을 구해준 김윤섭 전시기획자도 반백살의 묘미를 실감한 터였다. 정신없이 살다 느닷없이 다가온 암 선고에 세상이 깜깜해졌다. "무얼 하고 살았나. 무엇을 해야하나." 수술을 하기까지의 시간은 '인생의 앎'을 선사했다. 되돌아본 삶은 "늘 생각만 하다 끝났고 주춤거렸다." 화가 김남표를 보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듯 했다. "갈등과 방황이 끝나고 재충전되어서 또다른 인생 2막이 되면 그 자체가 또 나에 대한 재충전이기도 하고, 솔직한 마음이 그랬다." 미대를 졸업하고 미술판에서만 살아온 김윤섭 전시기획자는 마당발이다. 민병훈 감독과 친구로 화가들에 관심이 많은 민 감독을 장흥 아뜰리에에 소개하면서 민 감독은 김남표와 이어졌다. 김윤섭 기획자는 미술시장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다. 정부의 미술품 가격 심의위원으로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심사했고 작품값을 산정하기도 했다. '빈익빈 부익부' 미술은 어느새 '돈'이 되어 잘팔리는 작가만 팔리는 시스템이 작동했다. "미술품을 사치품으로 보는 것. 작품이기 이전에 상품을 만드는 것, 화가가 창작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전락되는 것이 안타깝죠." 김 기획자는 "창작자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건 창작의욕을 북돋아 주는 것"이라며 "현재 우리 미술시장은 화가에게 술권하는 사회"라고 지적했다. "인기 상품을 쏟아내야 하는 생산자로 전락한 화가들의 현실은 인기 절정인 30~40대를 지나 50대에 이르러 인생의 변곡점이 되는데 재충전의 시기에 낭떠러지에 있다"며 "현실이 녹록치 않으면 자본 논리에 타협하고 안주하거나 주저앉는다"고 했다. 미술가는 생산력이 떨어지면 무직자다. 30~40대 미술 생태계에 적응하면서 달려왔는데 빠르게 변하는 시장은 50대가 되면 더 이상 친절하지 않다. 중견작가들의 무대가 적은 이유다. 작품값은 젊은 작가보다 비싸고 작품 변화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숨고르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우울한 화가들이 50대다. 김 기획자는 "동병상련으로 나이 50에 느낄 수 밖에 없는 공감대가 아트 프로젝트로 이끌었다"며 "화가 김남표의 행보에 아낌없는 지원을 할 방법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트 프로젝트는 성과를 내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작가 인생 프로젝트"라며 "화가로서 어떻게 자신의 변별력을 개척해나가고 또 다른 가능성을 되찾으면서 비전을 보여줄 것인가를 위해 초심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례이고 싶다"고 했다. 서울 강남 청담동에 아이프라운지를 개관한 김 기획자는 지난 19일 김남표의 개인전을 개막했다. 아이프라운지와 같은 건물 3층에 있는 호리아트스페이스(대표 김나리)와 함께 ‘김남표의 제주이야기―Gumgil(검질)’을 2개층에 나눠 전시하고 있다. #"나이 50은 큰 숫자는 아니지만 인생의 감정을 알게 돼고 그림에 대한 감정을 조금씩 넣고 싶어하는 애틋한 마음이 있다." ‘김남표의 제주이야기―Gumgil(검질)’은 화가의 새로운 설렘이 담겼다. "이번 전시는 상황 설정부터 화가가 연기하지 않고, 화가 스스로 '화가다워지려고 노력하는 지점'에서 출발했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고민하던 김남표는 제주도 검질(잡초 넝쿨의 제주 방언)에서 그림 인생의 변곡점을 발견했다. "나무에 여러층이 섞여 있는 덩쿨은 오랫동안 추구한 질감이었다. 덩쿨을 그리자 내 그림을 보던 제주 사람들은 '검질을 그렸네'라고 하더라. 그 '검질'이라는 말이 내가 추구한 '감각의 질감'과 굉장히 와 닿는 뉘앙스였다." 붓 대신 손가락과 면봉으로 그리는 작가는 '검질'을 화폭에 옮겨놓은 듯 그려냈다. 이미 미술계에서도 '잘 그리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지만 이번 그림은 현장에서 느낀 감흥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스케치 없이 순간적으로 그려요. 붓을 사용하지 않고 면봉이나 비미술적 재료를 좋아합니다. 익숙한건 기술적 미감에 치중하게 하죠. 그래서 면봉을 주로 선호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유화작품 30여점(파스텔 기법 3점)이 선보인다. 호리아트스페이스는 10호에서 150호까지 다양한 크기의 20여점이 전시됐다. 제주의 검질 풍경을 배경이지만 김남표의 상징중의 하나인 호랑이와 표범 혹은 얼룩말이 함께 등장한다. 이전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 배경들은 상상에 의존한 것이 아닌 제주에서 보고 느낀 풍경이 담겼다. 아이프라운지에는 퍼즐처럼 대형 화면을 이루는 '셀(cell) 시리즈' 3점을 공개했다. 또 아이프안에 마련된 '그림 명상 스튜디오'에는 검질, 노을, 사슴 등이 등장하는 작품 3점이 조용히 걸려 명상을 통한 내면 바라보기’ 시간도 제공한다. 셀 작업은 ‘25×25cm’ 53조각으로 만든 '검질 풍경'(세로185×가로270cm), 68조각으로 구성된 야외 풍경(세로106×가로445cm), 84조각으로 완성된 올빼미 작품(세로185×가로320cm)은 일명 '쪼개기 공법'으로 나온 독창적인 기법이다. 제주 아외에서 사생할 때 물든 온 몸의 감각적 풍경을 조각조각 상상력으로 구현한 작가의 분신술 같은 작품이다. 김 작가는 "검질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보면 음습하다. 마치 우리의 삶을 이루는 하루하루가 ‘추상’인 것과 같은 이치 같았다"며 "하루하루에는 불편한, 치열함 부조리함이 있지만 전체 한 장면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르는 마음이 미술적 언어로 가능하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셀(조각)작업은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어 독특하다. 전체적으로는 풍광을 그린 구상 작품으로 보이지만 셀 하나 하나는 추상으로 변신한다. 이번 ‘김남표의 제주이야기’ 전시는 새로운 작품의 유통방식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고 있다. 유명작가의 비싼 작품을 투자 목적으로 여러사람들이 ‘쪼개서 구매하는 공동구매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김남표 작업의 '공동소장' 방식은 나눔과 지속의 연결고리로서 흥미롭다. ‘셀(cell) 시리즈’ 중 53조각으로 구성된 한 점을 공동소장 방식으로 판매한다. 40조각을 개인이 따로 따로 구매할수 있다. 나머지 13조각은 작가와 기획사 쪽이 보관한다. 구매자는 최소 1조각에서 최대 4조각까지 구매할 수 있어 최소 10명에서 최대 40명의 컬렉터 그룹이 형성된다. 이들에겐 전시를 기획한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의 지속적인 사후 서비스가 제공된다. 정기적인 작가와의 만남, 소장자 간의 멤버스 데이, 소장품의 교환 이벤트, 작가의 드로잉 수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적인 ‘팬클럽’ 역할까지 발전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새로운 개념의 패트런(patron-후원)으로 작가와 소장가의 꾸준한 만남과 응원이 이어질 수 있게 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1년간 제주 화가살이를 하고 제주 작업이 전시까지 이어진 화가 김남표는 "요즘 더 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림의 방향도 보이고, 무언가 하고 싶다는 걸 느낀다"며 "작가로서 이렇게 행복한 것 없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화가처럼 연기했던 부분들에 반성적 태도의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이 50이 되면 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햐 하는 시기지만 그 역시도 혼자는 불가능하다. 동료가 있어야 하고, 따갑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야 하고, 고유함보다는 질문이 있어야 하고, 답이 있어야 어우러질수 있는 게 전시이다. 이젠 그것이 전시의 조건"이라고 했다. 뒤돌아 볼때 어른이 된다. 반백살이 넘어 찐우정을 발휘한 화가와 기획자 영화감독은 '일상의 위대한 힘'을 깨달았다.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 조각이 모여 일상이 되어 풍광이 되고 그렇게 어우러진 조화는 함께, 같이라는 상생의 미학을 전한다. 결국 내공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전시를 본 한 유명 미술 컬렉터는 "작가적인 힘이 느껴져서 보기 좋다. 예뻐서 잘 팔리는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작가다움과 무게감이 있어 독특해 사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전시는 12월18일까지. 2020/11/21
낸시랭 '아모르파티'…터부 요기니·스칼렛 페어리 진흙탕을 빠져나와서일까. 말갛게 보이는 얼굴은 아기같은 표정이었다. 사기 결혼으로 얼룩진 '관종의 최후'. 혹자는 그렇게도 비난했지만 갈기갈기 찢긴 채 고통의 시간을 통과해온 그녀는 무소의 뿔처럼 단단해졌다. "만족스럽고 행복해요. 아트에 올인한 만큼 개인적으로 힘든 부분도 안느껴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제 작품을 통해서 희망을 얻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제가 더 행복해요." 낸시랭 '스칼렛 페어리'전은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4일 개막한 이 개인전은 올해에만 세번째 전시다. 그럼에도 서울 마포 합정동 진산갤러리에 사람들이 줄을섰다. "올 한해 개인전만 3개, 개인사적 때문에 전시를 못한 것을 몰아붙여서 하고 있어요. 한해에만 세번의 전시는 처음해봤는데, 아이고 다시 안할려고요. 진짜 힘들어요~하하앙" 애교와 넉살 사이를 오가며 말을 풀어내는 낸시랭(45)과 '팝아티스트'로 마주했다. ◆'아모르 파티'..."나는 아티스트" "'낸시랭 다음 개인전도 기대된다'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전시장 문은 쉬지 못했다. 닫힌 문은 열리고 닫히며 이쪽과 저쪽을 이어줬다. 거울을 통과하면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영화처럼, '터부 요기니(Taboo Yogini)'가 있는 '낸시랭의 세계'는 그야말로 현실계가 아닌 '외계 세계'다. 로보트 건담의 몸에 여자 아이의 얼굴을 한 '터부 요기니'는 낸시랭의 분신이다. 이번 전시에는 우주공간에 떠 있던 '터부 요기니'가 3D로 탄생되어 박격포같은 총을 들고 활짝핀 꽃들을 지키고 있다. '터부 요기니'는 '신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인 메신저'다. ‘요기니(Yogini)’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원에서 ‘천사’ 또는 ‘사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낸시랭이 만들어낸 '터부 요기니'의 탄생 이야기는 이렇다. 터부 요기니는 항상 변형된 모습과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사실 지구상에 있으면 안되는 금기된 존재다. 신과도 동일한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지만 막강한 파워의 능력을 함부로 사용 할 수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더욱더 금기시된 존재다. 하지만, 이것은 그 금기를 깨고 나타나 오직 인간들의 꿈을 이루어주고 죽는다. 죽음으로 희생을 치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존재는 죽는 순간 또다시 다른 새로운 '터부 요기니'로 부활한다. '터부 요기니'는 탐욕을 자극한다. '72.7×53cm' 캔버스에 살아나 전시때마다 팔려나간다. 주문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잡지에서 오려낸 백인 여자 아이 얼굴은 변형이 가능하다. 사업가는 자신의 딸 얼굴을 그려달라고 하고 또 어떤 연예인은 자기 얼굴을 넣어달라고 한다. 많은 사람의 꿈이 이뤄지기 바라는 마음에 10여년간 가격을 올리지 않았지만 최근 50만원을 올려 550만원에 판매한다. 터부 요기니. '백인 소녀' 얼굴을 오려붙여 만화같고 인형놀이 같은 작품이지만 살펴보면 심오하다. 건담 로봇의 양쪽 날개는 거대한 심장 모양이 달려있고, 팔에는 샤넬백이 들려있다. 1215라는 숫자화 된 암호가 반복되게 찍혀있고 왼쪽 하단에는 건담로봇 프라모델도 붙어 있다. "'심장 날개'로 보이는 건 뇌의 해부학적 단면을 구성한 건데 '깊은 고통'을 메타포적으로 표현한거죠. 꿈을 이루려면 뜨거운 심장, 차가운 두뇌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샤넬 백'은 취향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압구정 키드'로 부잣집 딸내미로 살아온 그녀는 20대에 명품백을 대놓고 들고 다녀 욕을 먹었다. 그림만 보여주는 작가들과는 달랐다. 원래 갖고 있는 것들을 숨기지 않았다. 방송물을 먹으며 연예인 같은 아티스트는 더 튀어올랐다. 작품에까지 샤넬백을 오려 넣으며 욕망을 더 부채질했다. "사랑이 넘치는 신과 인간과 중간 사이 영적 메시지인 '터부 요기니'는 인간의 꿈을 이루고 죽고 또 다른 터부 요기니로 부활하죠. 샤넬백을 들고요. 하하. 개인적인 취향이기도 하지만 꿈으로 가기까지는 욕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위해 '명품 굿즈'를 넣은거에요. 명품은 옛날부터 찬양했고 좋아했던거니까." 요기니 밑에 달린 '프라모델'은 왜 있냐고요? "재네들은 터부 요기니의 팅커벨같은 존재에요. 프라모델은 제가 도색도 하나 하나 다했어요(매트하고 세련된 컬러'가 돋보인다) 사실 터부 요기니도 인간들의 꿈을 이뤄주기 힘들어 해요. 그래서 이중장치를 썼죠. 오락할 때 파워먹을때 같이 싸워주는 존재라고나할까요." 10여년 넘게 이어오는 '터부 요기니'는 낸시랭의 삶과 이어지고 있다. 최근 작품에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 또 총들이 발견된다. 김학철 연세대 교수(신학박사)는 "근래 작가의 터부 요기니는 작가의 트라우마를 여실히 반영한다"고 했다. "왼손의 칼날이 그러하다. 작가는 오른발에서 나오는 것이 하늘을 날 때 나오는 빛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추진체의 불꽃의 끝은 그렇게 뾰족하지 않을뿐더러 불꽃 자체가 그렇게 날이 선 듯 각져 있지않다. 역시 왼팔에 뾰족한 나사가 있다. 오른손에 들려 있는 총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2020년 작품인 M212 역시 경첩과 연결된 나사가 오른팔에 있다. 이 그림의 왼쪽 하단에는 해골이 등장한다. 갑옷이나 무기는 방어를 위한 것, 곧 위험을 막는 일종의 ‘가시’다. 해골은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면서 "이 작품들은 트라우마로 인한 액팅 아웃 일까, 아니면 헤쳐나가는 길에 서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하며 "후자"라고 봤다. 의외로 낸시랭은 씩씩했다. 보랏빛 배경의 큰 꽃잎에 앞에서 4개의 날개를 펴고 헤쳐나온 듯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그림처럼 전사로 거듭났다. "'언니가 대신 싸워주리라'며 비장함이 있죠. 전 외동딸이라 잘 모르는데, 동생이 맞고 들어오면 언니나 오빠가 형이 '누구야, 누가 내 동생을 때렸어~'하고 싸우러 나가는 그런 마음, 내가 대신 해주리라 상처를 치유해주리라며 다짐하는 내면이기도 해요." 무엇이든 현대미술이 되는 동시대에서 자신의 상징을 갖는 작품은 흔치 않다. 차별화가 생명인 작가들의 세계에서 독창성은 그야말로 최대 무기다. 그런면에서 '터부 요기니'를 창조해낸 낸시랭의 감각적인 재능이다. ◆스칼렛 시리즈...'판타지→페어리' 낙인 찍힘에 대한 질문 2019년부터 시작된 새로운 신작 '스칼렛 시리즈'는 사회적 낙인(Stigma) 찍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작가로서 자신이 겪은 극심한 아픔을 '여성’이라는 약자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게됐다. "극심한 가정폭행과 포르노리벤지 협박, 사기결혼, 이혼녀 등 오늘날의 글로벌 SNS시대에 버튼하나로 ‘사회적 낙인’이 주홍글씨처럼 스칼렛이 되어버림을 작품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애교섞였던 목소리가 강직해졌다. "스칼렛을 통해 전세계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불합리한 고통과 사회적 관점에 대해 질문하고 있지만 대립이 아닌 공존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에서 차용한 ‘스칼렛(Scarlet)’ 연작은 채도가 매우 높은 빨강색이란 뜻처럼 밝고 화려하다 . '스칼렛 연작'은 사진같은 그림으로 알려진 하이퍼리얼리즘 기법으로 제작됐다. "코로나 시대여서 집콕하며 작업에 몰두할수 있었다"는 그는 '극사실화 끝판왕'의 진수를 발휘했다. 미술시장에서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홍대 출신답게 붓자욱 하나 흔적없는 작품이다. 시간과의 싸움, 반복되는 노동과 수행처럼 얻어진 결과다. 젯소칠 후에 사포질, 또 젯소칠을 한다. 그 위에 컴퓨터로 정밀하게 구성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스케치한 후 유화물감으로 세세하게 채색한후 바니시 작업으로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깊은 곳에서 상통한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격형'이 물질의 현실을 초월하여 대상이 없는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다시 말해 대상이 없으니 지향할 정신마저 비우려는 무(無)를 향한 노력이듯 하이퍼 리얼리즘은 온전히 대상을 몰입하여 자신의 주관을 멈추려는 것이다." 김학철 연대 교수는 "낸시랭의 꽃은 상처받지 않을 듯이 화려하고 한껏 피었다. 놀랍지 않은가"라며 낸시랭의 긍정적 에너지를 평가했다. 특히 "지난해보다 스칼렛 연작들의 채도와 명도가 확연히 낮아지는데 이는 '화려함'에서 '성숙함'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 개인전에는 평생 처음으로 작업했다는 캔버스 200호 사이즈 대형 유화 작품도 선보였다. 활짝 펴 만개한 붉은 꽃은 도발적이고 공격적이다. 노란 암술이 우뚝 선 꽃잎 안에서 총을 들고 있는 터부 요기니와 접신하는 장면이다. 대립이 아닌 공존을 의미한다. '사진같은 그림' 앞에서 정말 혼자 그린 것 맞냐고 몇번을 묻자 "내가 혼자 다 한거다"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조수를 쓰려고 했지만 월급을 못주니까 같이 할수 없었다고 했다. 다만 디지털 컴맹이어서 밑그림을 구성할때 그래픽 어시턴트가 도와주는 것 빼곤 오리고 붙이고 드로잉하고 그리고 스탬핑 찍고 작업하는 모든 과정을 "내 손으로 하나하나 작업한다"고 강조했다. "안 믿는것 같아서 이번 작업은 동영상을 찍어서 SNS에 공유 했어요." 특히 표면이 반짝이는 거대한 작품앞에서 자화자찬했다. 개막식때 동료 작가들이 와서 "낸시야 진짜 잘했다"라고 칭찬했다"면서 "레진 작업은 기포가 생기고 균일하는게 매우 힘든데, 반듯하게 잘 나왔다"며 스스로 만족감을 보였다. 낸시랭은 2002년 홍익대 미대 대학원을 졸업한후 2003년부터 주목받았다.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와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펼친 ‘초대받지 못한 꿈과 갈등-터부요기니’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때문이었다. 가부끼 분장을 하고 (깽깽이)바이올린을 켜는 그녀는 온 몸을 드러낸 패션으로 더욱 화제가 됐다. 모두가 벗은 몸이라고 소비됐지만 자신은 '빅토리아 시크릿'을 입었다며 '패션을 입었다'고 했다. 이후 미술잡지보다 패션잡지에 소개되며 방송계에 진출, 정작 아티스트보다 연예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극도의 솔직함'으로 비난과 찬사를 받아왔지만 심장박동은 전시장에서 더 뛰었다. 홍익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학사 석사를 졸업했으며, 2001 대학원때 첫 개인전을 시작, 22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의 디렉터 드미트리 살몬(Dimitri Salmon)이 기획한 프랑스 앵그르 미술관 2009‘앵그르 인 모던(Ingres in Modern)’전시에 대한민국 최연소 작가로 초대되어 베이컨, 앵그르, 피카소 등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작품들과 함께 나란히 작품 전시를 했다. 세계적인 락그룹 2003린킨파크(Linkin Park) 워너뮤직(Wanner Music), 패션그룹 2005루이 비통(Louis Viutton)과 함께 캔버스 페인팅 작품, 비디오 작품으로 아트 콜라보레이션 작업들도 선보였다. 전시 이력만 A4 용지 2장을 넘어갈 정도다. 홍익대 미대 96학번으로 당시 지도교수였던 故 이두식 교수는 '작가는 개인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개인전은 혼자 오롯이 도마 위에 올라간다. 아티스트는 그렇게 해야 발전된다"는 말을 철떡처럼 귀에 붙였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또래 작가보다 전시횟수가 많았다. 방송을 하면서도 1년에 개인전을 꼭 치뤘다. 날라리 연예인같은 이미지때문에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아 속상하고 억울했지만 개의치 않는다고도 했다. 결국 '작품에서 드러나니까.' "이두식 교수님이 '한 학번에 아티스트 한명만 나와도 많이 나오는 거다'라고 말씀하셨을땐 몰랐어요. 그때 이해 못했는데 지금은 무슨 말인지 알아요. 당시 120명이 동기였는데 작품 활동하는 친구는 많지 않아요. 대학시절 7명이 몰려다녔는데 저만 작업하고 있어요. 경제적인 이유 등 각기 다양한 환경속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해나가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던 소녀는 엄마가 반대하던 화가가 됐다. 해외출장이 잦았던 부모님 덕분일지도 모른다. 무남독녀, 어린시절 늘 혼자 놀았다. 사방 벽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놓으면 엄마는 화내지 않았다. 대신 벽지를 새로 싹 바꿔줬고, 한계없는 풍요는 자신감과 상상력을 키웠다. 엄마의 재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청담동 음주가무 여왕'으로 휩쓰는 사이 집안은 망했고, 엄마는 17년간 암투병하다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상상도 못했던 현실. 돈이 없다는 절박함속 '생계형 아티스트'가 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혼자 사는 법을 배웠다. 피가 철철 터지고 나서야 깨달은 건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것. 엄마. 아직도 '엄마'를 떠올리면 손이 떨리고 절로 눈물이 난다. "저를 너무 사랑하셨어요. 엄마가 침대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우리 낸시 내가 죽으면 어떡하니....했던 말이 너무 생각나요." 하나밖에 없는 딸.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사람을 잘 믿는 저를 보며 했던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땐 와닿지 않았는데, 제가 힘든 일을 겪으면서 그 말의 뜻이 다시 생각났죠. 엄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언니라도, 오빠라도 있었으면...." 낸시랭은 눈물을 멈췄다. '터부 요기니, 난 팝아티스트다." 결혼과 이혼, 비난과 조소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헤매지 않은 건 '아트의 힘'이다. "믿음과 아트가 있어 견딘다"고 했다. "제가 '터부 요기니'작품을 통해서 창조해낸 건 '아트'잖아요. 아티스트란, 선택받은 존재로서 세상에 무언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자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터부요기니가 저를 치유하고 나아가게 한 만큼 희망과 좋은 에너지를 주고 있으니까 제 작품을 보는 모든 분들이 힘을 얻어서 꿈을 이루시고 행복하고 고통을 헤쳐나갔으면 좋겠어요. " 그림은 구원이었다. 고립과 고독 속에서 빛나는 어둠을 봤을까. 사고무친 (四顧無親)그녀는 스스로를 토닥였다. "낸시야, 2020년 신작으로만 치룬 3개의 전시, 너 진짜 끝내주게 잘했다. 수고했다." 20호에서 100호 120호 200호까지 18점을 선보인 '스칼렛 페어리' 전시는 27일까지. 2020/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