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숨죽인 미술시장…조정기냐 침체기냐 국내는 물론 세계 미술시장이 조정기에서 침체기 양상으로 들어서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호황기를 누린 미술시장이 올 들어 매수 관망세가 짙어지고 있다. 경매시장도 활기를 잃었다. 낙찰률이 예년과 달리 반토막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경기불황 속에도 성장세를 유지했던 미술시장이 갑자기 숨죽이고 있는 모양새다. 시장 전문가들은 고물가·고금리 속 투자와 매수 심리가 위축, 작품 거래량이 감소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11월 발표한 Art Basel과 UBS 보고서에 따르면 수집가들은 미술품 구매에 점점 더 신중을 기하고 있다. 2800명의 고액자산가(HNW)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이 보고서에서 2023년 개인 수집가들은 다른 금융 자산에 비해 미술품에 소요되는 자금 비중을 2022년 24%에서 2023년 19%로 낮췄다. 미술품 판매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도 드러났다.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판매할 의향을 밝힌 수집가는 전체 비중의 26%로 2022년 보고된 39%에 비해 감소한 수치를 나타냈다. ◆숨죽인 미술시장…3분기 경매시장 낙찰률 급감 한국미술품 감정연구센터가 발표한 '2023년 3분기(7~9월) 미술시장분석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외 낙찰률 하락세가 완연하다. 올해 3분기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서울옥션·케이옥션·마이아트옥션)의 낙찰 총액은 259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3.5% 떨어졌다. 판매 작품 수(414점)와 낙찰률(65.51%)은 각각 14.67%, 10.23% 낮다. 10억 이상에 낙찰된 작품은 총 5점으로, 이 가운데 3점은 고미술이며, 이우환과 야요이 쿠사마 작품이 각각 1점이었다. 해외 미술품 경매 시장도 마찬가지. 지난 10월 5~6일 진행된 소더비와 필립스의 홍콩 경매 판매 총액은 10억6000만 홍콩 달러(약 1779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5.45% 감소했다. 올 봄 경매와 비교하면 28.11% 급감한 수치다. 유명 대가의 작품은 팔리지만 가격이 높게 치고 나가지 못하고 있다. 10월5일 열린 소더비홍콩 경매에서 3490만 홍콩 달러(약 471억원, 수수료 포함)에 낙찰된 모딜리아니의 ‘폴레트 주르댕’이 보여준다. 이 작품은 2015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4281만 달러(약487억원, 수수료 포함)에 낙찰, 당일 경매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아시아의 구매력 상승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소더비는 이 작품의 낙찰가를 4500만 달러(약 609억원)로 추정했지만 2015년 보다 낮은 가격에 낙찰되면서 실질적으로 손해를 보고 판매를 한 결과를 보였다. 또한 같은 날 경매에 출품 된 40점 중 10점이 유찰 되기도 했다. 한국미술품 감정연구센터 정준모 대표는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경합을 이루며 거래되었던 작품들이 하한가 선에서 겨우 낙찰되거나 유찰이 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며 "이런 양상이 지속되면 침체기는 가속화된다. 결국 가격을 조정해서라도 팔겠다는 판매자가 나서고 이후부터는 가격 하락의 급물살을 탈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에 따르면 조정기는 공급 부족 현상에서부터 시작된다. 호황기 최고점을 찍었던 작품들은 그 가격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리다. 미술시장 애널리스트 이호숙 대표는 "시장 상황에 맞게 움직이고자 하는 구매 수요는 하락하기를 기다리게 되는데, 일정 기간 동안은 조금의 양보도 없이 이들의 욕구가 대립하게 되며 보합세를 유지하게 된다. 이같은 분위기는 경매를 해야하는 경매사들이 협상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돤다"면서 "때문에 높은 가격에 출품 된 작품들이 맥 없이 유찰되고, 낙찰율이 하락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최적의 매각 타이밍을 놓쳤던 기존 수요 모두 관망세로 돌아서 거래 급랭으로 시장이 침체기로 접어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아트페어도 열기 식어…런던보다 파리서 판매 급증 오픈런까지 보였던 '프리즈+키아프' 국내 아트페어 시장도 지난해와 달리 열기가 식은 모습을 보였다. 관람객은 많았지만 매출에 영향을 주는 고객이 아니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국내 미술시장이 매출 1조원 대를 첫 돌파했다는 보도와 달리 올해는 거래 금액이 발표되지 않았다. 다만 미술문화 향유층은 급증했다. 프리즈와 키아프 측에 따르면 키아프 관객 수는 전년대비 15% 상승, 8만여 명이 방문했고, 프리즈 또한 방문객의 수가 7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앞서 개최된 싱가포르의 아트SG(4만3000여 명)와 일본 겐다이 도쿄(2만여 명)보다 많은 숫자고 아시아 최고의 미술 행사인 아트바젤 홍콩(8만6000여 명)과 비슷하다. 미술시장은 경기와 정부 정책과 연동된다. 구매력의 관건은 세금 정책과 운송, 보관, 교통 등의 인프라의 경쟁력이다. 지난 10월 열린 '프리즈 런던'과 '아트바젤 파리'가 증명한다. 런던보다 파리에서 매출이 뛰었는데, 이는 정부의 지원과 브렉시트로 인해 변동된 세금 정책 등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브렉시트 전에는 유럽 미술 수집가들이 관세 없이 런던에서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이후 영국에서 EU 회원국으로 미술품을 보내려면 작품 가격의 5~20%가 관세로 붙고 각종 서류 작업 등 복잡한 행정 절차 또한 거쳐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예술품 구입 시 다른 EU 회원국보다 낮은 수준인 5.5%의 세금을 낸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갤러리들도 이러한 조건들을 따져서 보다 좋은 작품들을 파리에 선보였고 매출 성장을 견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조각투자 논란 속 시장 위축…가격 산정 근거가 문제 미술시장 관망세 속에서 '조각 투자' 시장 또한 리스크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적극 투자는 주춤세다. 2018년부터 자본시장의 규제를 받지 않는 조각투자가 등장했지만 증권여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2021년 11월, 증권선물위원회는 조각투자를 투자계약증권으로 판단했다. 이에 조각투자사들은 사업을 중단했고 2022년 4월, 조각투자 등 신종 증권 사업 관련 가이드 라인에 준하여 투자자 보호 조치안을 마련하여 제출하도록 해 지난 7월 제재가 면제됐다. 면제를 받은 조각투자사는 투게더 아트, 열매컴퍼니, 서울옥션블루, 테사 4개사와, 추가 면제된 바이셀 스탠다드와 알티너스, 총 6개사다. 하지만 '가격의 적정성 문제'가 발생하면서 1호로 투자이행증권을 발행한 투게더아트가 20일만에 자진 철회 했다. 투게더 아트는 공모 자금 7억9000만원을 조달해 미국 작가 스탠리 휘트니의 작품 'Stay Song 61'을 7억2000만원에 취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최대주주인 케이옥션에서 취득 가격을 높게 산정할 수 있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문제가 됐다. 이같은 자진철회는 소싱, 발행, 감정, 보관, 관리, 처분을 발행사 및 연관 회사에서 담당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는 사례였다. 정준모 대표는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검증의 자격을 부여받은 감정평가사가 조각투자발행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평가한 가격을 그대로 받아서 인증해주는 구조적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편 미술시장의 흐름(2000년부터 2023년)을 뒤돌아보면, 2006-8년/2020-2022년의 뚜렷한 호황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양상이 거의 유사한 패턴으로 형성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꼭지점에 이르러서는 일정 기간 보합세를 이루다가 급격히 하락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이후 완만한 상승선을 따라 가다가 일정 시점에서 또 다시 정점을 찍는 호황기 시장에 이르게 되며 이후에는 또 같은 양상이 반복된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술시장 분석보고서를 분기별로 제출하는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는 "현재 시장은 놀랄 만큼의 위기도 아니다. 기간으로만 본다면 오히려 다시 일상적인 시장으로 되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고 짚었다. MZ 컬렉터들의 등장으로 미술시장이 과열된 건 사실이다. 플렉스(Flex·자기과시)의 최고 수단이지만 '아트테크'는 보는 만큼이 아닌 아는 만큼 돈 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悅乎)아라, 미술품은 장기 투자다. 파는 것도 사는 것만큼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림은 귀로 듣고 사면 안된다. 조정기이든 침체기이든 차분해진 시기, '그림 공부'하기 딱 좋은 시기다. 2023/11/11
대림미술관, 리움미술관 아성 도전…"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잠자던 대림미술관이 도발하듯 깨어났다. 피 한방을 넣은 '사탄 운동화'와 소금 한 알만한 초소형 명품 가방, 빨간 '아톰 부츠'로 '셀럽시장'에 기발함을 선사한 '미스치프(MSCHF)'를 서울에 모셔(?)왔다. 10일 개막하는 대림미술관의 'MSCHF: NOTHING IS SACRED'는 악동 그룹 '미스치프'를 전 세계 최초로 미술관으로 이끌어낸 전시다. 미스치프가 생산해 낸 인터랙티브 게임, 오브제, 회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분야의 100여 점이 총망라됐다. 상업씬에서 성공을 누린 미스치프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 세워 올해 초 '마우리치오 카텔란'으로 화려하게 재개한 리움미술관에 도전장을 내민 분위기다. 물론 리움미술관보다는 대림미술관이 선배다. 1996년 대림건설이 대림문화재단을 설립해 2002년 대림미술관을 개관했고, 2004년 삼성문화재단이 리움미술관을 열었다. 메세나 기업의 앞선 행보였지만, 규모와 전시 기획력 면에서 리움미술관에 뒤쳐졌다. 반면 대림미술관은 고상한 미술관의 틀을 깨고 리움미술관 보다 먼저 대중과의 접점을 넓혔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이라는 비전(Vision)으로 동시대 핫한 작가와 패션·디자인 전시를 잇따라 개최 흥행해, '젊은 미술관', '줄 서는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사립미술관의 전시 경쟁은 문화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즐거운 동행'이다. 상반기 리움미술관 카텔란 전시가 'MZ들의 놀이터'였다면, 하반기 대림미술관 '미스치프' 전시는 잘파세대(Z+Alpha)의 필람코스로 인증될 듯하다. ◆권위 도발 대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약과 '미스치프는 ‘장난짓(mischief)’이라는 이름처럼 유쾌하지만, 시비를 거는 도발적인 작품들로 반전 재미를 선사한다. 권위에 도발하고 조롱하는 현대미술 대가 마우리치오 카텔란도 '미스치프'에 비하면 '꼰대' 분위기다. 카텔란이 작품을 직접 만들어 예술과 권위를 비꼬았다면, 이들은 일상의 상품과 제품을 비틀어 쥐락펴락한다. 감히 건들 수 없었던 상식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를 접목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사회적 현상의 일부분을 꼬집어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살 수 있다." 미스치프는 명품브랜드, 식품, 의약품, 도서 등 장르를 넘나들며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인 작품들을 통해 상업성과 희소성의 이중적 특성을 간파한다. 래퍼 릴 웨인(Lil Wayne), 프로듀서 디플로(Diplo) 등 유명 셀럽들이 앞다투어 인증샷을 올려 화제가 된 빅 레드 부츠(BIG RED BOOT)로 대중들에게 특히 알려졌지만, 나이키 에어맥스 97을 커스텀하여 제작한 예수 신발(JESUS SHOES)과 '사탄 신발(SATAN SHOES)'을 나이키와 협의 없이 출시해 법정 분쟁에 휘말리면서 화제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도발적인 ‘시비’…돈 버는 재주도 탁월 미스치프는 세상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경계를 무너뜨린다. 욕망, 투기, 보상, 강박적 집요함 등으로 사회적 문제를 꿰뚫는다. ‘우리에게 논란은 오히려 각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단단하게 만들고 더 많은 관심을 받게 하는 수단일 뿐’이라며 전진하고 있다. ‘예수 신발(Jesus Shoes)’은 예수님과 컬래버레이션을 한다며 나이키 에어맥스 97 에어솔 부분에 성수를 넣고 판매,2019년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신발로 등극했다. 이에 더해 래퍼 릴 나스 엑스(Lil Nas X)와 협업하여 만든 나이키 운동화 에어솔에 진짜 사람 피 한 방울을 넣어 만든 신발 ‘사탄 신발(Satan Shoes)’ 666켤레를 선보이기도 했다. 돈 버는 재주도 탁월하다. 미스치프는 극도로 낮은 해상도로 '블러' 처리된 돈뭉치 모양의 피규어를 20달러, 한화 약 3만 원에 판매했고 이는 단 몇 분 안에 매진되었다. 다양한 국가의 에디션으로 선보인 ‘블러(Blur)시리즈’는 충동구매의 극단적인 끝을 실험한 작품이라고 밝혔다.(한국의 화폐 5만 원권 단위의 에디션을 출시하기도 했다.) 또한 소금 한 톨보다 작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루이비통 가방을 경매로 선보여 원래 가격의 4배가 넘는 6만3000달러, 한화 약 8400만 원에 판매되어 화제를 일으켰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버킨백의 가죽을 해체하고 가공하여 만든 대중적인 아이템 버켄스탁 샌들 ‘버킨스탁(Birkinstock)’을 선보여 최고가 9000만 원대로 판매한 바 있으며, 현실의 제약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밝힌 만화 아톰 부츠 ‘빅 레드 부츠(Big Red Boot)’ 등을 선보여 유명 스타들의 소장욕구를 자극했다. ◆미스치프 장난 짓…예술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예술은 건들 수 없는 것일까?" 이 생각에 신발 업체 뿐만 아니라 팝아티스트 전설 앤디 워홀과 데미언 허스트도 당했다. '어쩌면 앤디 워홀의 ‘요정’ 진품 (Possibly Real Copy Of ‘Fairies’ by Andy Warhol)'이라는 제목으로 미스치프가 구입한 앤디워홀 진품 1점과 가품 999점을 섞어서 누구도 진짜를 알 수 없는 구조로 모두 판매한 바 있다. 또 세계적인 아티스트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스팟 페인팅 시리즈 중 하나인 L-Isoleucine T-Butyl Ester(2018)을 구매한 뒤 작품의 88개의 점을 각각 오려내어 총 88점의 작품과 그 틀을 되팔며 7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또 방탄소년단(BTS)의 입대를 소재로 게임 프로그램인 ‘BTS IN BATTLE’을 출시하기도 했다.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발표해 매진되고 다신 재판매(리셀) 열풍을 일으키는 미스치프의 화제와 논란의 상품들은 현대인의 물질적 소유와 소비 심리를 찌르며 예술로 올라서고 있다. '벽에 붙인 바나나' 등 그동안 미술계에서 도발의 권위자였던 카텔란과 한 식구가 되어 '짓궂은 장난'은 현대 미술사를 새롭게 쓸 것으로 보인다. 카텔란이 전속으로 있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갤러리인 페로탕(Perrotin)갤러리가 미스치프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지난해 11월 페로탕 뉴욕에서 개인전도 연 바 있다. ◆"건드지 못할 성역 없다 집착같은 열정" "힘 있는 사람 자꾸 건드려야 세상이 변한다"는게 이들의 야심찬 전략이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8일 한국 기자들을 만난 미스치프 멤버 3명은 "팀원들이 탐색하는 공통의 언어는 무엇인가를 창출해 내는데 집착 같은 열정이 있다"며 "예술가 디자이너 개발자 변호사 등 20여 명이 모인 미스치프는 세상이 정의할 수조차 없는 퍼포먼스 아트를 실행하는 그룹"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건드리지 못할 성역,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예술, 종교, 기술 등 보편화된 사회 분야의 인식을 타파하는 이들의 상품이 이제 작품으로 변신 우월함을 과시하는 전시가 아이러니하다. 현대미술은 자본주의 첨병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1층에 굿즈 판매 매장을 둔 대림미술관은 2~4층에서 전시를 펼친다. 대담하고 발칙한 성경책 같은 전시 도록도 압권이다. 전시는 2024년 3월31일까지. 관람료 3000~1만7000원. ◆미스치프(MSCHF)는? 2019년 가브리엘 웨일리(Gabriel Whaley), 케빈 위즈너(Kevin Wiesner), 루카스 벤텔(Lukas Bentel), 스테픈 테트롤트(Stephen Tetreault)가 설립한 아티스트 콜렉티브로 미국 뉴욕의 브루 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스치프는 스스로를 ‘무엇’이다 정의 내리지 않고, 다양한 범주의 한정판 작품을 홈페이지에 2주마다 ‘드롭(Drop)’하는 방식으로 도발적이면서도 위트 있는 작품을 선보이며, 작품마다 화제와 논란을 일으키며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제까지 당연시 해온 대중문화와 사회적 관습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을 선보인다. 또한, 미스치프의 행보에는 항상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예술, 오브제, 기술 및 사회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미스치프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지속해서 선보이며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팬덤을 만들어 내고 있다. 2023/11/09
현란한 골법용필 극치…학고재, 박광수 '구리와 손' 우글우글 붓질이 폭주하는 그림은 '야성의 부름'에 응답하듯 잠자던 본능을 일깨운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를 굴레의 소용돌이를 휘감으며 원시에서 문명으로 문명에서 원시로 내달리게 한다. 그 한복판을 지배하고 있는 건 인간으로, 현란함과 혼란함을 온몸에 두른 채 볼수록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펼치는 박광수 작가의 개인전 '구리와 손'은 오랜만에 신선하고 독특한 회화의 맛을 전한다. 우글거리는 화려한 색채와 필치에도 선들이 생동하는 '골법용필(骨法用筆)’ 드로잉이 돋보인다. 화면을 가득 채운 현란한 채색과 기운 넘치는 속도감, 짜임새와 무게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전 아크릴 작업에서 벗어나 유화로 그려진 작품은 작가의 말처럼 "기름기가 더해져" 진득하고 담백해졌다. 평면속에서도 입체감을 전하는 그림은 작가가 만든 붓놀림 기법이 만든 흔적이다. 물감을 더하고 지워내 동서양 회화의 장점을 압축했다. 미술사의 레퍼런스가 화면 구성에 작동된 그림은 장르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이다.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유년기에 숲과 자연을 사랑했다는 마음이 스며있다. 이진명 미술평론가는 "현대미술에서의 구상적 회화(figurative painting)임에도 산수화의 구성이 보이는가 하면,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회화에서처럼 사물과 환경이 주인공과 일체화되는 형식에 근접한다"며 "기하학과 수학으로 계산하는 서구의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과 달리 산수화는 산속을 거닐며 화가가 온몸으로 느꼈던 풍경의 생생한 생명적 체험을 그려낸 것처럼 박광수의 체험적 화풍은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고 평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많은 경우 본인이 처한 가혹한 상황을 감내해 내고 있다. 그 끝은 대부분 실패인데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림에서 색들이 충만하게 매혹적이기도 위협적이기도 하며 서로 간의 강렬한 충돌로 그 세계가 극단적이길 원한다."(작가 노트) '구리와 손'이라는 다소 엉뚱한 개인전 제목에 대해 학고재는 "‘구리(銅, copper)’와 ‘손(手, hand)’은 문명의 시원과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했다. “그림 안에는 불완전한 덩어리와 그것을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만드는 또 다른 덩어리인 인간이 등장합니다.” 반짝이고 산화하며 연청색으로 변해 가는 구리의 색에 매료되었다는 작가는 이번 작품에 구리의 색을 인간의 손과 발에 입혔다. 만드는 자, 만들어진 자 모두를 '덩어리’로 통칭하며 작가가 이 둘의 관계를 표현하며 파생되는 여러 의미들을 내포한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손을 가리켜 눈에 보이는 뇌'라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숨이 멎을 정도로 현란함의 극치를 보이는 그림은 작가의 '뇌 같은 손'의 울부짖음이자, 진흙탕 같은 세상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화가의 야성미에 홀리게 한다. (보일 듯 말듯한 그림 속 인물들의 손이 유독 크고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는 게 흥미롭다) 학고재 갤러리는 "박광수는 현재 국내외 미술 시장의 뜨거운 반응을 끌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술관 등 미술계 관계자의 관심을 집중 시키는 대표적 청년 작가"라며 "이번 전시 작품(100호 크기 1000만 원 선)은 벌써 판매가 끝났다"고 전했다. 전시는 12월9일까지. ◆박광수 작가는? 198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2008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금호미술관(서울), 인사미술공간(서울), 두산갤러리(뉴욕, 서울), 신한갤러리(서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두산레지던시 뉴욕,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인천아트플랫폼 등 주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제5회 종근당 예술지상, 제7회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정부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2023/11/08
"대한민국 자수를 다 망쳐?"…섬유예술 혁신한 이신자 "그때는 손꾸락으로 했냐 발꼬락으로 했냐고 했어" 이젠 한국 섬유예술의 거목이 된 '태피스트리(tapestry)' 1세대 작가 이신자(대한민국 예술원 회원)는 여전히 앞선 모습이다. 2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만난 이신자 화백은 1930년생, 아흔 셋의 나이가 무색했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채 세련미를 풍겼다. 자수를 파격적인 '섬유 예술'로 진화시킨 혁신가답게 할머니 모습이 아니었다. 검정 원피스에 나무를 형상화한 작품 브로치를 달고 기하학 무늬가 수놓은 검정 스타킹에 구두를 신어 쨍쨍한 각선미를 과시했다. 청력 기능이 약간 떨어졌지만 기억력은 생생했다. "선생님이 없었어. 혼자 하다보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니까…자수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욕했죠. 대한민국 다 망친다고." 1950년대 당시, 한 땀 한 땀 섬세하게 수를 놓은 자수가 보편적인 시대, 이신자의 자수는 그야말로 황당했다. 듬성듬성, 투둑투둑 엉성하게 실을 꿰매고 붙이듯 한 작업은 혹평 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대한민국 자수는 이신자가 다 망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파격은 신세계를 열었다. 자수인들이 보기에 듬성하고 웃기는(?)자수 병풍 작품과 천을 투박하게 이어붙인 아플리케 작품으로 1956년(제5회)과 1958년(제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30세에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다. 1965년 신문회관에서 연 1회 개인전은 '실과 바늘을 사용해서 만든 그림 같이 보인다'는 언론의 호평 속에 주목 받았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바탕은 창호지 구긴 것 아니면 나무 망사 등 천에만 의존하던 옛법을 버렸고 실도 명주실 아닌 노끈,푸대자로, 올 등 굵기와 질을 골라가며 변화 많게 사용하고 있어 이 현재 자수는 실과 바늘을 사용해서 만든 그림같이 보인다. 수법이 무척 재미있고 창의적이다"라고 썼다. "그 시절에 자수는 그저 화가들의 그림을 받아서 놓는 게 대부분이었거든." 이신자 화백은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사실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잘 몰라서 모든 것(재료)을 다 쓰니 그렇게 됐다"며 "선생님이 있었거나 자수학과 출신이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자수 같은 작업을 하지만 그는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이다. "1970년대에 외국에서 가서 보니까 패티스트리가 굉장히 눈에 들어온게" 시작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대신 저렇게 짜는 걸 해봐야 되겠다 해서 한 거죠."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떠냐, 저떠냐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아쉽기는 했지요. 모든 것은 내 스스로가 했어요. 실도 털실 몇 가지 종류밖에 없어 애들 옷 사서 그거 풀어서 쓰기도 하고…직조기가 없었으니까 못 박아서 그냥 그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했어요." 국립현대미술관(관장 김성희)은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를 22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최한다. 태피스트리, 염색, 드로잉 등 새로운 표현과 재료를 사용한 작품을 재조명한다. 작가 이신자는 1970년대 섬유예술이라는 어휘조차 없던 시절에 ‘태피스트리’ (tapestry)를 국내에 소개하는 효시적 역할을 하며, 한국 섬유예술의 영역을 구축하고 확장한 주역이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초기작부터 2000년대 작품 90여 점과 드로잉, 사진 등의 아카이브 30여 점을 통해 이신자의 작업 세계관을 살펴볼 수 있다. 1965년 첫 개인전때 놀라움을 선사한 '실로 그린 그림' 같은 신기함은 여전하다. 옛날 '이걸 손가락으로 했냐'는 비난은 이젠 "이걸 진짜 손으로, 어떻게 했냐"는 감탄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파괴적 혁신'은 열정과 성실함이 힘이다. "나는 그냥 잔 적이 없어요. 다음 작품을 뭘 할까? 그러면 어떤 천을 쓸까? 이러한 방법을 할까? 머릿속으로 해보고는 생각이 나면, 일어나서 스케치를 해두곤 했죠." 초기 작업에는 전통적인 섬유 소재 대신 밀포대, 방충망, 벽지, 종이와 같이 일상의 재료와 한국적 정서가 담긴 평범한 소재가 활용됐다. 작품은 거칠지만 자유롭고 대담한 시도들을 엿볼 수 있다. '장생도'(1958), '도시의 이미지'(1961), '노이로제'(1961) 등 크레파스나 안료를 칠하고, 천을 덧대는 기법인 아플리케(appliqué)를 하여 캔버스의 바탕을 새롭게 바꾸어 나가며 한국 섬유미술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냈다. "태피스트리라는 게 뭔지도 잘 몰랐어요. 그냥 실을, 물감으로 생각해서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1972년 국전에 출품한 '벽걸이'(1971)는 국내에 처음 선보인 태피스트리 작품으로 전통적인 태피스트리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독특한 재질감과 입체적 표현을 만들어냈다. 이후 작품에는 강렬한 색상의 대비로 신비감을 더하고, 간결하지만 대담한 기하학적 구성이 독특하다. 거대한 크기에 담아낸 작품은 '실로 그린 추상화'로 보인다. 한국 섬유미술의 개화기’라 일컬을 만큼 국내 섬유 미술계가 새 국면을 맞이한 1984~1993년대 작품은 설치미술까지 나아갔다. '숲의 왕자'(1987)와 같은 의상 디자인과 무대막 등의 작품은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표현 방법이 압권이다. 19m에 이르는 대작 '한강, 서울의 맥'은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고자 3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이다.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한강의 물줄기를 중심으로 올림픽 주경기장, 63빌딩, 워커힐 등 서울의 일부를 구상적으로 다루되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흑과 백이 결합된 회색 톤에 스푸마토(sfumato)풍으로 빛을 은유하듯 이미지를 투영했다. 붓 대신 손으로 태피스트리 수묵화를 그려내며, 아주 세밀한 명암 표현으로 태피스트리 고유의 특성을 제대로 살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동시대 예술로 보면 어쩌면 한물간 구닥다리 작품이지만 실물로 보는 작품은 경이롭다. 이 화백의 작업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전시는 인간의 손길이, 편견없는 생각이 고정관념을 깨고 세상을 한 단계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매일 꾸준하고 순수한 반복의 행위가 어떻게 예술혼으로 이끄는지, 그 지난한 고통을 뚫고 희열을 맛 본 작품의 위대함을 전한다. 회고전은 이신자의 작품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4부로 나누어, 각 시기별 한국 섬유미술사의 변천사와 작가의 작품세계의 변모상을 함께 살펴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작품의 뒷면까지 볼 수 있는 입체적인 전시 연출로 작품 속을 거닐며 감상할 수 있다. 평생 고된 노동같은 수작업을 해온 작가는 고령의 나이에도 식지 않은 열정을 보였다. "아직 작업할 수 있는 의욕이 있다"며 "건강하면 젊은 사람들이 하는 작업을 지금도 하고 싶다"고 했다. "" 전시는 2024년 2월18일까지. 관람료 2000원. 2023/09/21
흥분·쏠림 사라진 '프리즈'…반전 없는 '키아프' '돈은 빛이다.' '2023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이 극명하게 보여줬다. 코엑스의 1,3층 같은 전시장인데 같은 작품도, 같은 부스도 달랐다. '조명발' 차이다. 프리즈가 마치 명품관 처럼 보이는 배경이다. 디테일의 차이는 작품 가치도 변하게 한다. 입구에서 떨어진 부스들은 약간 어두운 분위기로 빨려들게 한다. 각 부스들은 세심한 조명 설치로 은은하면서도 작품에 집중력을 높였다. 프리즈 런던의 팀들이 내한 전시장을 설계하고, 각 부스별 인테리어는 작품을 위한 조명으로 완성됐다. 반면 키아프는 입구부터 속을 다 보여주듯 펼쳐지는 부스들로 산만했다. 형광등으로 쏟아지는 '조명발'과 오밀조밀 좁고 강약 없는 분위기는 '아웃렛 같다'는 반응이다. 프리즈는 심리전이 무기다. 빛의 조절로 주목도를 높여 감정과 소비의 미덕을 자극한다. 여기서 '지금 당장 사야 한다'는 브랜드의 힘이 발휘된다. 문을 열자마자 데이비즈 즈워너가 쿠사마 야요이의 ‘붉은 신의 호박’을 77억에, 하우저앤워스가 니콜라스 파티의 그림을 16억6800만 원(1,250,000 USD)에 팔아 치우는 배경이다. 이 두 화랑을 포함한 글래드스톤, 페이스, 리만머핀, 화이트 큐브 등 세계적인 유명 화랑들은 지난해에 이어 100억 대 매출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자본주의 시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아트페어에서 더 뚜렷하다. '미술품 쇼핑'은 큰 손 부자들의 '플렉스(자기만족을 위한 소비)'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머니 게임장'으로, 'VIP 먼저 모시기'가 열리는 이유다. 키아프와 프리즈가 동시에 문을 열었지만 달라 보이는 건 관점의 차이이기도 하다. 키아프가 화랑협 회원 화랑들을 위한 행사라면, 프리즈는 컬렉터들을 위한 행사다. 프리즈 서울을 운영하는 패트릭 리 디렉터는 지난해와 달리 전시 환경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입출구를 3개로 늘려 편안한 동선과 시간 예약으로 쾌적한 관람을 할 수 있게 사소한 부분까지 챙겼다. 덕분에 올해는 사람이 많아도 한산해 보였다. 키아프는 '프리즈 특수'를 위한 회원 화랑의 대거 참여로, 좁은 부스가 더욱 북적이는 현상을 보였다. 아웃렛 같고 명품관 같은 차이는 투자의 차이다. 기획력도 '머니 싸움'이다. 키아프 부스가 1000만 원 선이라면 프리즈 부스는 3000만 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작은 차이, 작은 변화는 결국 2~3배의 돈의 차이가 갈랐다. 잔치는 끝났다. 키아프는 10일 폐막한 방문객은 5일간 총 8만 명 이상이 다녀갔고, 이는 작년 대비 약 15% 증가한 수치라고 밝혔다. 키아프에는 총 20개국 210개 갤러리가 참가했다. 작년 17개국 164개 갤러리가 참여했던 것과 비교하면, 같은 장소에서 비좁게 열렸다는 것도 반증한다. 특별전과 젊은 작가들을 선보인 'Kiaf PLUS'도 옹색했다. 코엑스 그랜드볼룸과 코엑스 복도에서 열린 이 행사들은 키아프서울 전시장과 동선이 한번에 이어지지 않아 '특별한 빛'이 덜 났다. "작년보다 다채로움으로 기획력이 향상됐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키아프 서울을 운영한 한국화랑협회 황달성 회장은 "프리즈의 긍정적 효과가 크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많다"며 자책했다. 황 회장은 "국내외 기업과 미술관이 프리즈에만 올인 해 메인 스폰서를 못 구하고, 예산 부족으로 미디어 아트전이나 채색화 특별전의 규모와 공간 확보를 못한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한편 프리즈 서울은 6~9일까지 나흘간 7만 여명이 방문했다고 밝혔다. 프리즈의 헤드라인 파트너로 LG전자가 참여, 김환기의 작품을 재현하며 눈길을 끌었다. '프리즈 효과'는 아트페어 기간, 다양한 미술 행사가 열려 문화계에 활기를 선사했다. 디아재단, M+, LACMA, 델피나 등 세계적인 미술관 인사들과 중국 큰손, 미주유럽 컬렉터 2만 여명이 방문, 전시장 뿐만 아니라 호텔, 맛집 등이 '아트 특수'를 누렸다. 특히 서울 한남동, 청담동의 주요 갤러리와 미술관에서는 밤 늦게까지 문을 열고 파티를 펼쳐 '아트바젤 홍콩' 못지 않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키아프와 2차전을 치른 프리즈 서울은 여전히 여유감이 넘쳤다. 작년처럼 오픈런도 없었고, 쏠림 현상도 적었지만 미소를 장착한 채 장사를 마쳤다. 초고가와 유명 작품이 지난해와 달리 덜하다는 지적에도 "올해 120여개 갤러리는 자기들의 타깃에 맞춰서 최고의 작품을 갖고 왔다"며 한국 미술시장을 파악한 분위기다. 그러면서 조각품을 특화한 '프리즈 조각'전도 신설할 계획을 밝혔다. 프리즈의 폭스 CEO는 "서울에서도 야외 조각 프로그램을 신설·운영하는 방안을 한국 정부와 논의하고 있다"면서 "프리즈 서울 기간 서울에서 벌어지는 여러 이벤트를 보고 '서울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재확인했다"고 했다. 프리즈는 영국 런던 리젠트 파크에서 해마다 10월 여는 ‘프리즈 런던’에서 행사장 밖 야외에 조각 작품을 별도의 섹션으로 꾸린 ‘프리즈 조각’(Frieze Sculpture)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에서 자신감이 붙은 프리즈는 몸집을 더욱 키우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전통 아트페어인 '뉴욕 아모리쇼'와 '엑스포 시카고'를 인수했다. 프리즈는 키아프와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적 관계"라고 했다. '상생 관계'가 아니다. 프리즈와 키아프의 5년 간 공동 개최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다. 아시아 진출을 노리던 프리즈와 국제화를 엿보던 키아프의 야심이 공생하고 있지만 '키아프'라는 한국 '토종 아트페어'의 대항은 2차전에도 힘겨워 보인다. 3층의 프리즈가 '서울시 유럽구'같은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성황을 보일때 키아프에 8만 여명이 북적인 건 한국미술시당을 살리려는 미술 애호가들의 응원과 사랑 덕분이다. 화랑과 작가, 컬렉터의 미술 수준이 섬세하게 발전하는 곳이 아트페어의 긍정효과다. '총성 없는 미술 전쟁'의 효과는 국내 미술계 전반에서 나타났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 개최로 국내 미술 시장 규모는 1조원 대를 돌파했다. 2021년(7563억 원)보다 37% 증가한 금액으로 지난해 아트페어에서 3000억 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2020년(3279억 원)과 비교하면 무려 3배 이상 급성장해, 작년에 '죽 써서 프리즈 줬다'고 키아프를 지적한 배경이다. '프리즈'의 서울 진출로 아트바젤 홍콩을 위협할 정도로 한국 미술판은 확장됐다. 몇군데 대형화랑의 기획력과 연출력으로는 부족하다. 키아프가 프리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다채로움을 위한 '정(情)의 문화'가 아닌 '엄격한 잣대'의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 아직 3번의 기회가 남았다. 한국화랑협회는 아시아 미술시장을 반전시킬 '키아프 브랜드' 전략을 재구축할 때다. 2023/09/11
'아니쉬 카푸어'의 반전…잔혹한 아름다운 세계 삶은 이토록 격렬한 것인가. 모든 걸 쏟아내어 터져 버린 듯 붉은 피빛으로 점철된 화면은 기묘한 충동을 꿈틀거리게 한다. 폭력적이고 잔혹하며 원초적이고 성적인 기운까지 터트려 불안정한 감각을 촉발시킨다. '미술이 아름답다고?' 그런 생각은 집어치우라는 듯 고정관념을 희롱한다. 보는 이의 신체적 감각까지 시험하는 지극히 자극적인 이 작품의 작가는 이전 이미지를 확 깬다. 매끈하게 반짝이며 반사하는 작품을 선보여온 아니쉬 카푸어 작품이다.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클라우드 게이트', 리움미술관 앞마당에 15m 높이의 73개 스테인리스 스틸공으로 세워진 조각 '큰 나무와 눈'(2009)으로 유명한 작가다. 1954년생 인도 뭄바이 출신으로 1990년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작가로 선정되어 주목 받은 아니쉬 카푸어는 ‘21세기 가장 선구적인 작가’로 평가 받는다. 2012년 아시아 처음으로 리움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어 한국에도 알려진 그는 2003년부터 국제갤러리와 손잡고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2016년 이후 7년 만에 국제갤러리에서 여는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은 팬데믹 시대에 작업한 작품들로 선보인다. 모두가 갇혀있던 시대, 작가로서 '살아있음'의 몸부림이었을까? 붉은 피빛의 회화 작품은 코로나 사태에 작업실에서 몰두하면서 탄생했다. 내면의 욕망이 폭발한듯 강렬하고 표현주의적이다. 유화, 섬유유리 및 실리콘으로 제작돼 날 것의 상태를 구현해 유혈이 낭자한 내장을 연상시킨다. 혐오와 공포감까지 자아내는 탓일까. 물감이 피처럼 터져 캔버스 위에 진득하게 흩뿌려지고 발라진 회화는 묘한 쾌감까지 진동케한다. 마치 엄청난 무력에 의해 그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흐려진 물질의 존재감은 섬뜩하지만 매혹적으로 다가오는게 독특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붉은색으로 무장해 생의 격렬함을 뿜어내는 작품에 대해 국제갤러리 윤혜정 디렉터는 "아름다움과 잔혹함, 아름다움과 두려움은 늘 공존한다"며 "피빛은 원초적인 생명력, 여성적인 창조의 힘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같은 측면에서 아니쉬 카푸어의 형식 언어를 구축하는 핵심 자원인 붉은색은 생의 맹렬한 숭고미를 일관되게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피빛 회화'의 흥분감은 그의 대표적인 '검정 작품' 앞에서 다시 침묵하게 한다. '있는데 없는', '보이는데 안 보이는' 블랙홀 같은 검정 조각은 모든 것을 삼키는 '잔혹한 마술'이다. 분명 옆에서 바라보면 삼각뿔이 보이는데 다시 앞으로 가면 평면으로 압착되어 시지각을 어지럽힌다. 빛 뿐만 아니라 모든 소리마저 흡수시켜 각 오브제의 표면에 안착해 '검은 구멍'으로 일체화된다. 빛을 99.6% 흡수해 '세상에서 가장 검은색'으로 불리는 '반타블랙' 덕분이다, 카푸어가 이 물질을 예술 작업에 사용할 수 있는 독점권을 갖고 있어 '카푸어 블랙'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구현하는 '검은 조각'의 있고도 없는 '물질의 비물질화'는 카푸어 작업의 핵심이다. "무언가를 가시화하는 방식에 대한 역사인 반면, 나는 그와 정반대의 일, 즉 무언가를 어떻게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천착했다. 내 작업의 핵심은 무엇이 물질적이며 무엇이 그 물질을 초월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미와 추로 뒤덮은 화화와 조각, 물질성과 정신성으로 가득찬 작가의 작품 세계는 예술의 초월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다. 자극적이고도 섹시하게 물질의 ‘사이(in-between)'의 상태를 포착해내는 그는 스스로 '조각하는 화가'라고 부른다. 벽에 걸린 4점의 거대한 덩어리 조각도 압권이다. 얇은 천으로 둘러싼 덩어리들은 지질학적 조직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괴물의 해부학적 내장의 모양같기도 하다. 카푸어를 대표하는 색채인 진한 빨강과 검정을 입은 조각 작품들 중 특히 두 점은 '그림자(Shadow)'와 '섭취(Ingest)'라는 제목을 통해 미술과 마술 사이, 괴이함이 소용돌이치는 잔혹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초대한다. 국제갤러리 K1, K2, K3 전 공간에 걸쳐 조각, 페인팅, 드로잉을 망라한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은 K아트의 선전속 K갤러리의 위상을 보여준다. 세계적인 화상과 컬렉터들이 모이는 프리즈서울+키아프서울(9.6~10)기간 '필수 관람' 코스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전시는 10월22일까지. ◆작가 아니쉬 카푸어는? 1954년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런던과 베니스에 거주 및 활동하고 있다. 최근 이탈리아 베니스의 갤러리 델 아카데미아 디 베네치아와 팔라조 맨프린(2022), 영국 옥스포드 현대미술관(2021), 중국 선전 현대미술 및 도시계획 박물관(2021), 영국 노포크 호턴 홀(2020), 독일 뮌헨 모던 피나코텍 미술관(2020),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펀다시온 프로아(2019), 중국 베이징 중앙 미술관 및 황실 사원 아카데미(2019), 포르투갈 포르투 세랄베스 현대미술관(2018), 멕시코 시티 현대미술관(2016),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2015)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90년 제44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영국 대표 작가로 참여해 'Void Field'(1989)를 선보이며 프리미오 듀밀라(Premio Duemila)를 수상했고, 이듬해 영국의 권위 있는 예술상인 터너 프라이즈(Turner Prize)를 받았다. 카푸어의 작품은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돼 주요 상설전시로 소개되고 있으며, 고유한 공공미술은 전세계 곳곳에서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2023/08/30
"키아프+프리즈 2차전...中 큰 손 왕서방 기대감" 황달성 vs 패트릭 리 "더 이상 당할 수 없다"(키아프 황달성 회장) vs "성공을 기원한다"(프리즈 패트릭 리 디렉터) 키아프(KIAF)와 프리즈(Frieze)의 2차전이 시작됐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 미술장터’가 오는 9월 다시 요동친다.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이 9월6일부터 10일까지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총성없는 문화 전쟁'을 벌인다. 작년보다 56곳이 증가한 총 330개의 국내외 화랑들이 집결한다. 첫 회 판매고를 올린 하우저앤워스,데이비드즈워너, 페이스, 리만머핀, 화이트 큐브 등 세계적인 화랑들도 재참가한다. 지난해는 프리즈의 완승으로 키아프는 '안방까지 뺏겼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코로나 사태인 2021년 키아프는 650억 대 매출을 기록하며 몸집을 키우던 때였다. 2022년 '공동 개최' 전략적 제휴는 프리즈의 화끈한 '서울 침공'으로 막을 내렸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듯한 위력이었다. 7만명 이상이 방문한 '프리즈 돌풍'은 긴가민가하던 '아트테크'에 불을 지폈다. 덕분에 10여 년 간 4000억 원대로 제자리걸음 하던 국내 미술시장 규모는 1조 원 대를 넘어섰다. 키아프는 '악마와의 계약'을 한 셈이다. 프리즈와 5년 간 코엑스에서 공동 개최해야 할 운명이다. 아시아 진출을 노리던 프리즈와 국제화를 엿보던 키아프의 야심이 미술판을 서울로 돌렸다. 올해는 지난해 팬데믹으로 못 온 중국의 ‘큰 손’ 컬렉터들까지 대거 방문할 예정이어서 벌써 뜨거운 한판승부를 예고하고 있다. '이 날만 기다렸다'는 투자자들 탓에 국내 경매시장 낙찰률까지 떨어졌다는 후문이 돌 정도다. 실제로 얼리버드로 오픈한 티켓은 하루 만에 매진됐고, 화랑들조차 25만 원 짜리 프리뷰 티켓 구하기도 '하늘에 별따기'라고 했다. 키아프를 운영하는 한국화랑협회 황달성 회장과 프리즈 서울을 진행하는 패트릭 리 디렉터는 "올해 아트페어도 성공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시아 시장에서 새로운 갤러리들이 꾸준히 새로 개장하고 있는데 이는 아시아 시장의 잠재력을 보이는 반증"이라며 "특히 올해는 일본과 중국 컬렉터들이 들어올 예정이어서 전시 기획력을 더 높였다"고 했다. ‘경쟁 구도’를 피할 수 없지만 양측은 "홍콩과 벌이는 '아시아 미술시장의 패권'을 서울로 가져오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23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의 전략을 들어봤다. ◆키아프 서울:20개국 210개 갤러리 참여..."젊은 작가 발굴 소개의 장" "올해는 젊은 작가를 통해 역동적인 한국 미술 현장을 선보여 프리즈 서울과 차별화한다." 키아프 운영위원장인 황달성 회장은 "키아프는 젊은 작가를 발굴·소개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초점을 맞췄다. "키아프만의 젊음과 역동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신작 중심으로 행사를 꾸렸다"며 '프리즈 쏠림 현상'을 설욕하겠다는 의지다. "물론 프리즈의 작품과 가격차가 있어 상대적으로 위축이 될 수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젊은 작가를 찾으려면 프리즈 서울보다 키아프로 올 수 있게 하겠다"는 목표다. 올해 22회째를 맞은 키아프는'몸집을 불렸다. 지난해보다 46곳이 늘어난 210개 갤러리(국내 137개·해외 73개)가 참가한다. 이는 올 초 협회장 선거에서 1표 차로 승리한 황 회장의 화합과 상생의 결과이기도 하다. 국내 화랑 증가는 '보은 차원'이라는 지적도 나왔지만 화랑협회는 이번 참가 화랑 심사는 6차까지 거치며 신중했다고 밝혔다. 키아프는 'K 아트'의 저력을 다지는 '선택과 집중'을 강화한다. 특히 △키아프 플러스 △키아프 하이라이트 △키아프 특별전 등 8개 프로그램으로 프리즈에 맞불 작전을 펼친다. 지난해 세텍에서 열렸던 '키아프 플러스'가 코엑스로 들어온다. '따로 국밥'처럼 운영됐던 부작용을 탈피, 키아프와 같은 장소에서 연합, 젊은 작가들의 세를 뽐낼 예정이다. ‘키아프 하이라이트’는 올해 신설됐다. 황 회장은 "참여 작가들의 홍보와 지원에 힘쓰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으로 '키아프 하이라이트 어워드'를 제정한다"며 "3명 작가를 선정하여 코엑스의 후원으로 3000만 원의 창작 지원금을 수여한다"고 했다. 특별전은 한국미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조망하는 2개의 전시로 마련했다. 미디어 강국의 강점을 살린 '뉴미디어 아트 특별전'과 전통 한국화의 영광을 재현하는 '박생광·박래현의 '그대로의 색깔 고향' 전이다. "키아프가 추구하는 미래 지향적인 성향을 보여줌과 동시에 키아프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전통 한국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장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심었다. 황 회장은 "키아프는 젊은 작가를 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작년에 제기되었던 아쉬운 점을 최대한 보완하고, 올해는 더욱 발전적인 페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특히 정부와 서울시, 유관 기관 등이 적극 협력하고 있어 큰 힘이 되고 있다"며 막바지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협회 미술행사에 정부와 유관기관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아트페어가 미술 올림픽'처럼 치뤄지기 때문이다. 세계 유수의 갤러리와 세계젝인 미술기관, 파워 컬렉터들 등 수 만명이 방문, 문화 인프라 확장은 물론 관광과 유통 산업까지 이어진다. 국가 대 국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사 선수(작가)들과 문화 수준을 경험하고 경쟁하는 장이다." 키아프 서울은 화랑협회가 운영하는 세계 이례적인 국제아트페어다. 세계 3대 아트페어인 스위스 아트바젤, 영국 프리즈, 프랑스 피악이 전 세계 '토종 아트페어'를 삼키며 각 나라별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식 페어'에 대항하고 있다. 키아프 서울은 코엑스 A, B홀과 그랜드 볼룸을 포함한 1층 전체를 사용, 9월6~10일까지 열린다. ◆프리즈 서울:120개 갤러리 참가...70개 아시아 갤러리 포커스 "올해는 70여 개의 아시아 갤러리에 주목해달라." 패트릭 리(Patrick Lee) 프리즈 서울 디렉터는 "프리즈 서울이 아시아 미술시장의 플랫폼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프리즈 서울 개최 후 서울이 아시아에서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예술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글로벌 그룹의 디렉터로 거시적인 안목을 보였다. "좋은 아트 페어는 컬렉터와 큐레이터 간의 상호 연계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데, 프리즈가 아시아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성장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했다. 이는 "올해 처음 참여하는 아시아 갤러리들이 증가한 것이 반증"이라며 "아시아 갤러리들의 서울 진출은 한국의 미술시장에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있을 것"이라며 여유감을 보였다. 2023 프리즈서울에는 30여개국 120여 개의 갤러리가 참여한다. 이중 메인 섹션에 아시아에 기반을 둔 갤러리 70곳이 부스를 차린다. 한국에서는 갤러리바톤, 국제갤러리, 학고재, 갤러리현대, PKM갤러리가 지난해에 이어 이름을 올렸고, 가나아트가 첫 참가한다. 아시아 기반 젊은 갤러리의 솔로 부스를 선보이는 '포커스 아시아 (Focus Asia)'와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예술 작품을 아우르는 프리즈 마스터스(Frieze Masters) 특별 섹션이 볼거리다. 지난해 600억 대 피카소 작품 등 미술관급 작품을 선보인 마스터스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올해 프리즈 마스터스는 고대 유물부터 희귀 필사본과 서적, 20세기 걸작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예술을 한자리에 모아 국내외 컬렉터들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시카고 그레이 갤러리는 프리즈 서울의 첫 참가를 기념해 짐 다인, 데이비드 호크니, 알렉스 카츠, 하우메 플렌자, 맥아서 비니언, 레온 폴크 스미스, 에블린 스태팅거 작가 작품을 소개한다. 또 폴 세잔, 헬렌 프랑켄탈러, 루시안 프로이트, 앙리 마티스, 조안 미첼, 파블로 피카소, 에곤 실레, 윌리엄 터너 등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 작품도 들어온다. 키아프가 참여 갤러리의 수를 대폭 늘린 것과 달리 지난해와 비슷하게 120개 갤러리를 유지한 패트릭 리 디렉터는 '전시 환경 디테일'에 집중했다. 작년 '멸치 떼처럼 쓸려 다닐 정도로' 북적였던 공간을 개선했다. "2개의 입출구였던 전시장은 3개의 문을 열어 동선을 관리, 쾌적한 관람에 신경을 썼고 행사의 사소한 부문까지 챙겼다. 관람객들은 크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갤러리들의 노출도와 운송, 보관 장소, 케이터링 메뉴까지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글로벌한 감각을 자랑하지만 프리즈도 시작은 미미했다. 2003년 영국 런던에서 벼룩시장처럼 임시 텐트를 치고 문을 열었다. '예술은 백만장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기치와 신진 작가들의 '신선한 미술'로 흥행하며 세계 3대 아트페어로 등극했다. 글로벌 스포츠 및 엔터테인먼트 기업 Endeavor의 자회사 IMG 그룹 네트워크에 속해 있다. 2014년 프리즈 뉴욕, 2019년 프리즈 LA에 이어 2022년 서울까지 진출했다. 프리즈 서울을 이끄는 리 디렉터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갤러리현대 전무 출신이다. 프리즈 서울의 흥행에 힘입어 LG올레드(LG OLED)가 공식 후원사로 참여한다. 프리즈의 글로벌 리드 파트너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는 도이치뱅크(Deutsche Bank)가 지원을 계속한다. 리 디렉터는 “특히 올해는 엔데믹으로 일본, 중국 컬렉터들도 대거 방한이 예정되어 있어 기대감이 크다"며 "한국이 가진 전반적인 에너지에 대해 높은 평가가 있었고 참가 갤러리들의 수준도 높은 만큼 다양한 부대 행사를 통해 관람객들이 예술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을 극대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트페어는 '머니게임, 미술 장사'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프리즈가 한국 미술시장을 싹쓸이한다는 지적도 있다. 리 디렉터는 단순하게 장사로만 보는 건 편견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아트 페어는 담론을 제시하고 플랫폼 형성을 목적으로 개최한다"며 "프리즈는 단순한 미술장터가 아니다"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물론 세일즈 역시 성공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술 담론과 플랫폼 형성 여부에 따라 성공적인 아트 페어인가 아닌가 결정된다. 아트 페어를 통해 새로운 관객, 새로운 미술이 형성되고 흡수되는 결과가 도출되기도 한다. 덕분에 고객들의 수준이 섬세하게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관람객과 작가와 화랑과 의미 있는 관계, 건강한 미술 세계의 커뮤니티 형성이 목적인 프리즈는 이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2023 프리즈 서울은 코엑스 3층 C, D홀에서 6~9일까지 열린다. 2023/08/19
카텔란도 놀랄 김범 세계관…'임신한 망치~노란 비명 지르기' 김 범? 누구지? 갸우뚱하는 순간부터 전시가 시작된다. 허리가 휠 정도로 휘몰아치게 달리는 치타 영상으로 맞이한다. KBS '동물의 왕국' 한 장면을 따 온 영상은 이 전시의 핵심이다. 아 그 '동물의 왕국!'쯤으로 여기고 무심코 지나가면 안된다.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13년 만에 김범(60) 작가를 전시장으로 끌어낸 리움미술관 김성원 부관장은 "김범은 1990년대 한국 동시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작가"라며 "이번 전시는 김범의 작업을 주의 깊게, 오래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실제로 치타와 영양이 쏜살같이 내달리는 장면은 알고 보면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다. 영양이 치타를 쫓는 장면이다. 김 범 작가가 "약육강식의 세계가 뒤바뀌면 어떤 세계가 될까?"라는 의심에서 재편집한 영상으로 우리의 고정관념에 도발한다. 김 범 작가는 미술시장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들과 미술학도들에겐 전설적인 작가로 알려져있다. 그의 독특한 작품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전시가 없어 작품을 쉽게 볼 수 없는 작가였다. 25일부터 리움미술관 하반기 새 전시로 펼치는 김범 개인전은 김범의 1990년대부터 2010년 중반까지 회화부터 해외 소장품 등 국내에서 만나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을 포함하여 총 70여 점을 전시한다. 작품은 장난스럽게 보인다. 반면 자세히 보면 관습을 뒤집는 유머와 부조리한 제안이 허를 찌른다. 그렇다고 '엄근진’(엄격·근엄·진지)관람은 금물이다. 요즘 MZ세대를 관통하는 트렌드인 '병맛(맥락없고 어이없는)코드'가 깔렸다. 사물을 의인화로 비튼다. 생명이 없는 사물을 마치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물활론적 세계관'이 담겼지만 전시장에 나와서인지 어설픈 '아재 개그'와는 차원이 다르다. '임신한 망치'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배불뚝이 망치'일 뿐이고 기형의 망치인데, 제목이 한 몫 한다. '임신한 망치'라 붙여놓자, 그렇게 보인다. 공구가 지닌 생산적 기능성을 동물적 생명력과 연결 시켜 웃음을 유발시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럼 누가 임신시킨 거지?" 뿐만 아니다.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2010),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2010), '새라고 배운 돌' 등의 ‘교육된 사물들’ 연작은 '병맛'을 넘는다. 피식 웃다가 '현타'오게 하는 작품으로 돌과 배에게 열심히 강의하는 선생들의 진지함이 향수를 자극하면서 새삼 각인된다. 교육 과정의 맹점과 교육된 현실의 ‘부조리’를 뒤돌아 보게 한다. 상반기 리움미술관에서 연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를 봤다면, 우리나라에도 카텔란 못지않은 작가가 진작에 있었다는 게 새롭다. 카텔란이 정치 종교 예술의 권위와 신념에 대해 노골적으로 도발했다면 김범은 이 모든 것들을 해학적으로 비틀어 깨닫게 한다. 특히 카텔란의 '노란 바나나'와 김범의 '노란 비명 지르기'는 비견 할 만하다. 카텔란이 바나나 1개 달랑 벽에 붙여 놓고 어차피 썩을 바나나도 작품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현대 미술계의 현실을 조롱했다면, 김 범의 '노란 비명 그리기'는 예술가로서 한 수 위다. '으아아악~' 힘껏 소리를 지르며 한 획씩 추상화 그리는 법을 가르치는 튜토리얼 영상은 보는 순간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1990년대 '미술 참 쉽죠' 유행어를 남긴 '밥 아저씨'를 패러디해 작품을 생산하지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해학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이상과 관념을 포착하는 불가능한 과업에 매진하는 예술가의 애환을 드러낸다. 배우가 소리를 지르며 한 획 한 획 칠해진 그림은 결국 '노란 단색화'가 되어 이번 전시장 벽에 걸려있다. 이번 전시 제목은 '바위가 되는 법'이다. 김범 작가의 아티스트 북 '변신술'(1997)에 수록된 글의 제목으로 생존을 위한 자기 변화와 가변적인 인간의 모습을 주제 삼아 독자에게 다양한 생물이나 사물이 되는 법을 지시한다. 영어로 쓰여진 글씨 작품 앞에 선 관람자는 지시어를 따라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행동하게 만든다. 도구 없이도 누리는 '인터렉티브(Interactive)' 전시라고 할 수 있다. 김성원 부관장은 “김범의 작업은 보이는 것과 그 실체의 간극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의 결과라 할 수 있다”며 “특유의 재치로 우리를 웃게 만들지만 농담처럼 툭 던진 의미심장한 이미지는 자기성찰의 장을 열어주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제안한다”고 소개했다. 30년 전에 부조리를 주시하며 '돌아이' 기질을 보였던 작가의 철학적 반항이 이젠 웃음 코드로 다시 세상과 접속하고 있다. 돌멩이, 주전자, 다리미 등을 이용한 소박한 표현과 덤덤한 유머로 무장해 우리의 삶과 산다는 것에 대해, 미술에 대해 질문하며 가치를 부여하고 있어 신선하다. 이미 30대에 사물들의 체험 삶의 현장 같은 드라마를 만들며 세상에 달관한 듯한 그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사진도 내보이지 않았다. 작가들의 꿈의 공간 리움미술관에서 초대한 개인전이자 13년 만의 전시인데도 김범 작가는 기자 간담회에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형식적인 것을 싫어한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제작한 고 김세중 조각가와 김남조 시인의 아들이다. 전시는 12월3일까지. 카텔란 전시는 무료였지만 김범 전시는 관람료를 받는다. 1만2000원에 사전 온라인 예약해야 한다. 2023/07/24
'하얀 그림' 정상화 화백의 신화..'반복·노력일지'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중) "매일매일 새로운 걸 하려고 했는데 매일매일 똑같은 게 나왔다." 일명 '하얀 그림'으로 유명한 91세 정상화 화백(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은 시지프(Sisyphe)와 닮았다. 바위 하나를 산 정상까지 쉬지 않고 굴려 올리고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뜯어내고 메우기'를 무한 반복한다. 50여 년간 한결같다. 흰색을 바르고, 뜯어내고 메우고, 뜯어내고 메우는 그의 반복되는 작업은 우리의 삶 자체다. 누군가에게는 '의미없는 짓'으로 보이지만, 그는 이 무한 반복을 즐겁게 했다. 아무 의미 없는 이 세상에서 또 뜯고, 메우고, 또 뜯고 메우며 삶을 이어갔다. 팔순이 넘어 빛이 났다. '한국의 그림' 단색화가로 세계 미술시장에 이름을 올렸다. 코로나19 사태에도 그의 그림은 '힐링 아트'로 주목받았다. 2020년 런던 레비고비 갤러리에서 개인전,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하얀 그림은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호평이다. 2년 만에 다시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연다. 현대화랑과의 의리는 40여 년 째 이어지고 있다. 그가 파리에서 활동할 때 박명자 회장이 그의 작품에 매료되어 1983년 첫 개인전을 열며 '정상화'를 알렸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에서 2014년 이후 10년 만에 펼친 개인전으로 1970년대 작품부터 근작까지 40여 점을 소개한다. ◆무엇을 그렸나?..."내 그림은 무한한 숨결" "90이 넘어서도 개인전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1일 개막식을 앞두고 만난 화백은 정정했다. 몇년 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는 소문과 달리 지팡이도 없이 나타난 그는 깨끗한 모습이었다. 무한 작업한 흔적은 얼굴에 있었다. 형형한 눈빛과 입을 꾹 다문 표정은 '고집쟁이 노인'처럼 보이게 했다. "그림 이야기를 해야 밥맛이 돈다. 그림 생각 하는 것 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 샴페인과 와인을 곁들인 점심에서 정 화백은 그림 이야기로 신이 났다. "무엇이든 질문하라"고 했다. '그림이 어딨습니까?' 숱하게 들어온 물음을 다시 묻자 (박진영 처럼)이렇게 말했다. "나만의 삶과 공기에 물들어 있어요. 그날, 그 계절이 들어있지요. 날씨, 공기, 감정이 섞여있어요." 무엇을 그리셨나요? "나의 숨결을 그렸지요.' 그는 "바르고 말리고 접고 뜯어내고, 메우고 다시 뜯어내고 메우고...매순간 똑같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라면서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것을 총동원했고, 면, 공간, 그 양상 등...내 몸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했다"고 말했다. 같아 보이는 그림이지만 그에겐 새로움이 동력이다. 국전을 반대하며 1950년대 결성해 앵포르멜 운동을 펼친 현대미술가협회와 '악뛰엘'(1962)이념 정신이 있다. "불필요한 걸 가미 시킬 필요가 없는 그냥 전위성이다. 이건 이래야만 한다 등 구구한 잔소리하면 안돼, 그냥 확 밀어 들어가는 거지. 무서운 게 없었으니까. 그땐 관전도 싫지 돈도 싫은 거야. 우리들 아니었으면 요즘 젊은 세대는 못해. 우리였기 때문에 한국 화단에 역사에 남았고 세계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계기가 된 거지. 그나마도 (현대미술가협회)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새로운 일에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주축이 됐다고 봐요." ◆"지우고 다시하는 것에 희열 감동" 조용한 그림이지만 입체주의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시절 그린 그의 자화상이 보여준다. "안되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지우고 다시 한다. 지우고 다시 하는 것에서 면이 생기고 공간이 생기는 것에 희열이 있고 느낌이 나에게 감동적이었어요." 1932년 경북 영덕 출생으로 마산중학교 2학년때 그림에 빠졌다. 우연히 미술실을 지나가는데 하얀 석고가 보이고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뭔가 느낌이 있었다. 그림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학교 방과 후 그림만 그렸고, 사생대회에서 늘 상을 받았다. 중학교 4학년때 학제가 개편되면서, 마산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대학시험은 6.25 사변이 나고 였다. 동란이 심각할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였다. 서울이 부산으로 환도하던 때, 서울대도 부산으로 왔다. 1953년도에 부산에서 서울대에 입학했다. 1년 있다가 서울로 갔다. "학도병 친구들은 죽은 사람이 많아. 용케...나는 집에서 그림만 그리고 밖을 나가지 않았어." 그는 대학 4학년 졸업식보다 앞서 '미술 선생님'이 됐다. 인천사범학교 선생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문공부 장관이 발령한 선생이어서 월급도 달랐다. 화폐개혁 전이어서 꽤 두툼했다. 자료 사고 캔버스도 사고, 못 사서 못했던 재료를 마음대로 샀다. 현대미술협회도 참가해서 남이 못하는 것을 했고, 학생이라는 제약에서 해방됐다. 국전, 관전 국민 세금가지고 하는거 철폐해야 한다'는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가와의 대화 중) 현대미술가협회, 앵포르멜 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새로운 미술 흐름에 올라탔다. 표현주의 앵포르멜이 한창이던 시기 일본으로 갔다. 이웃나라 일본에 구타이(구체미술)가 앵포르멜과 같은 행동파였다. 우리보다 앞서 있던 일본, 고베였다. "7년 간 있으면서 구타이 작가들과 접촉해서 보니 우리하고 별 다른 게 없었구나를 터득했다." 일본에서 개인전을 하던 그때가 전성기였다. 1962년 첫 개인전 '원시'는 그렇게 나왔다. 지금의 '백색 회화'가 시작된 시대다. '전부 드러내고 부풀어 오르면 터져내고 쓸어내는' 평면적이면서 입체적인 그림의 시작은 전쟁을 겪은 충격이 바탕이 됐다. "파괴성은 아니다.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 '폐허'는 허물어진 상황이다. 요철이 올라왔던 상황이 전부 가라앉아 없어져 버린, 완전히 평면화 되버린 상황이다. 있던 게 없어진 허탈감, 이런 것들이 정신적으로 상당히 충격이 컸지요." 거무죽죽한 그림에서 변한 '백색'은 일본에서 나왔다. "그 동기는 작업속에서 자연적으로, 백색으로 돌아간 거다. 점차 색이라는 것에 대한 부담감, 색이 내용에 장애가 된다는 결론에 의해서 점점 색을 억제하다 보니 백색으로 돌아선 거다." 이후 1977년 프랑스 파리로 가 20년 간 살았다. "새로운 흐름, 자극이 됐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일본 고베 시기에 진행된 화풍의 완성도를 향해 모든 집념이 고취됐다. 이전의 백색의 격자 무늬 작품에서 좀 더 나아가 검은색, 푸른색, 적색 등 다양한 색, 단색화를 선보이게 됐다. "백색, 하얀 그림은 좋긴 한데 집에 걸면 밋밋하다는 거야. 그래서 푸른색, 빨간색으로 그려 달라는 주문이 많았지." 1992년 11월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1996년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을 짓고 자리 잡은 후 그곳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하얀색 전부 다르다. "이 작업은 같으면 안돼" 하얀 그림은 격자무늬로 완성된다. 정교한 밀도 속에서 각각의 그리드가 독립된 개별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어울려 조화로운 화면을 구축한다. 그의 평면은 이제 무한대로 끝없이 멀리 들어간다. 그래서 결국 캔버스가 드러난다. "이 작업은 색이 같으면 안돼." 흰색은 모두 같은 색이 아니다. 메워져 있는 것은 하나의 톤이다. 그는 "색깔이 전부 다르고 톤의 질도 모두 다르다"고 했다. "나를 받아들이는 색이 있고, 나를 멀리하는 색도 있어요" 조수 한 명 없이 반복의 흐름을 이어오고 있다. "오롯이 나 혼자 작업합니다. 나는 일 시키면서 못한다. 성품이 그래요. 옆에 사람이 있으면 소리를 지릅니다." 무작위적인 행위. "사실 고달프다. 요즘엔 기력이 없어 못한다. 3~4시간 캔버스를 잡고 있으면 툭 떨어진다." 정 화백은 "내 작품은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모두 봐줘야지, 단순히 보고 흘러버리면 안된다"고 했다. 그는 "오고 가고, 오고 가고, 오고 가는 것을 작가가 만들기 위해서는 전부 질서와 순서가 있다"면서 "작가의 일은 그런 거다 금방 나오는 게 아니다"고 했다. 작품이 되기까지 6개월 이상 소요된다. "과정 과정 과정 연결이 완성체"라고 강조했다. "내 그림, 내용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보고 느끼면 그대로 끝이에요." 어떻게 봐야 하냐고 하자 "쓱 지나 가는 게 아니고 발을 멈추고 보는 것에 대한 느낌, 생각을 내 그림에 둔다면 내 그림은 완전히 성공한 거"라고 했다. "생활 속에서 언젠가 본 사람을 통해서 내 그림을 생각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좋은 겁니다." 사실, 미술 애호가들은 '하얀 벽지'를 볼 때마다 그의 그림이 떠올라 '벽지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맞아요. 현대미술을 알려고 하지 말고 같이 생활에 더불어 살면 돼요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거든. 추상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겠어요?" 와인 한잔을 다 비워 얼굴이 불그스레해진 그는 "건강은 타고 나지만 그림은 타고 난 게 아니다"며 젊은 화가들에게 조언도 남겼다. "" 또 미술애호가들에도 당부했다.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세요. 문화가 달라집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때 그의 말처럼 "입에 거품 물게 가난했던 시대"를 뚫고 평생 그림만 그려온 그는 "아버지한테도 이긴 그림"이라고 했다. "학창시절 아버지는 내가 그리던 그림을 뺏어 대문 앞에 집어던졌고, 미대를 가는 걸 반대했었다." "그래도 화가 하길 잘했지요. 그 선택을 최고로 했다. 다른 것 했으면 난리가 날 뻔 했다"면서 뿌듯함을 보였다. 딸, 아들에 이어 손녀까지 그림을 그린다며 행복하다고 했다. 구순이 넘은 화가로서 자부심, '예술이란 무엇이냐'고 묻자 "웃기네!"라고 생뚱맞게 표현했다. 그는 "예술은 정말 '웃기다'"라면서 흰 그림처럼 공간을 떠도는 고독한 생각을 전했다. "웃기다는 것은 좋은 말입니다. 장난 아니다"라며 "그림은 참 신기한 거다"며 혼잣말처럼 되새겼다. "내 꿈이요? 아직도 재밌는 그림 많이 그리고 싶어요. 그림 그리는 게 가장 즐거워요." 전시는 7월16일까지. 2023/06/04
우리 한국화 흥망성쇠와 '동산방 박주환' 좋은 그림은 혼자 보는 것이 아니다. 공공자산이다. 성공한 화가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난다.' '광주 화단의 전설' 의제 허백련(1891~1977), 한국화 라이벌 거장 변관식(1899~1976)과 이상범(1897~1972), 월전 장우성(1912~2005), 서세옥(1929~2020)등 거장들은 죽지않고 부활한다. 이들을 되살리는 건 미술품 수집가다. 동산방 컬렉션이 증명한다. 지금은 시들하지만 40~50년 전 '동양화{한국화)'의 위력은 'K-팝' 못지 않았다. '풍류의 끝판왕'으로 시서화의 정점을 찍으며 70~80년대 '화선지 화백'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 고관대작의 '귀한 선물'이었고, 품위의 상징 이었다. 당시 화가들과 상생한 이들은 화랑주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그림을 팔며 화가를 키웠다. 그 중심에 인사동 ‘동산방 화랑' 박주환 사장이 있었다. 박 사장은 1961년 동산방 표구사를 연 이후 1974년 동산방 화랑을 개관했다. 청전 이상범과 월전 장우성, 천경자, 박노수 등 국내 내로라 하는 동양화가들이 단골 손님이었다. 동산방에서 전시는 곧 스타 작가 데뷔장이기도 했다. 한국화의 혁신을 이룬 민경갑·이종상·송수남 등이 동산방 화랑을 통해 알려졌다. 동양화 표구의 독보적인 실력으로 '표구는 동산방'으로 유명했다. 훗날 진위 논란이 불거진 천경자의 ‘미인도’도 동산방 표구였다. ◆'한국화 산실' 동산방 화랑...故 박주환 회장 화랑협회 산파-기증문화 이끌어 동산방 화랑은 인사동 화랑가를 거점으로 한국화 전문 화랑으로 거듭났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개인전은 물론 '한국 동양화가 30인 초대전'(1977), '제3전'(1989) 등 괄목할 만한 그룹전의 기획·전시로 당대 화가들의 예술적 발전과 성취를 도모하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화랑은 단순한 장사가 아니다. 작가를 발굴하고 선보이고 사주고 판매하며 교감시켜 시대를 나아가게 하는 문화사업이다. 당시 한국화 작가들은 청토회, 한국화회, 신수회 등 미술 단체 활동을 통해 현대 한국화단의 예술적 전망과 실천 방향을 도모하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묵림회(1960-1964)의 활동과 수묵화 운동(1980년대)은 동양 전통 수묵화의 정신성과 질료적 표현의 가능성을 연구함으로써 현대 한국화의 추상적 실험을 이끌었다. 모두 동산방 화랑의 역할이 컸다. 가난한 화가들을 키우며 몸집이 커진 동산방은 한국화의 흥망성쇠와 결을 함께한다. 국내 1세대 화랑주인 동산방 박주환 사장의 더 큰 공로는 기증문화의 물꼬를 튼 데 있다. 1971년 청전 이상범의 ‘초동’(1926)을 예산이 부족했던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면서 화랑의 작품 기증문화를 이끌어냈다. 그는 1975년 한국화랑협회를 창립한 산파로, 제 2대(1978~1981)와 6대 회장(1987~1991) 화랑협회장을 역임했다. '아파트 세상'으로 급변하면서 한국화는 서양화에 밀렸고, 동산방 화랑의 영광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화랑은 대를 이었지만 옛날의 동산방이 아니었다. 2020년 동산방 화랑 박주환 회장은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현재 동산방 화랑은 제17대 한국화랑협회장을 지낸 아들 박우홍 대표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박우홍 대표는 아버지의 유산이자, 우리문화 유산인 그림을 기증하는 큰 결심을 했다. 지난 2021년~2022년, 2회에 걸쳐 국립현대미술관에 ‘동산 박주환 컬렉션'이름으로 209점을 기증했다. 한국화 154점을 포함한 회화 198점, 조각 6점, 판화 4점, 서예 1점 등이다. 이 기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화 소장품 수는 총 1542점이 되어 보다 폭넓은 한국화 연구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동녘에서 거닐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펼친 '박주환 컬렉션'특별전은 기증된 209점 중 90여 점의 한국화 대표작을 선보인다. 기증작 중 192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한국화의 변모와 실험의 단층들을 보여준다. 전시 제목에서 ‘동녘’의 의미는 기증자의 호인 ‘동산(東山)’을 기념하는 동시에 해가 떠오르는 이상향의 자연을 상징한다. 근대 이래 한국화가들이 꿈꾸고 그려온 삶의 세계와 비전을 조망한다. 사진사이자 사군자 화가로서 한국 근대미술의 미적 가치를 탐구한 김규진(1868~1933)부터 현대인의 삶을 수묵으로 표출하는 유근택(1965~)에 이르기까지 작가 57인의 예술적 실천을 통해 한국미술, 특히 한국화의 시대적 변천과 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근현대 한국 미술사의 생생한 현장으로, 미술을 공부하거나 애호가들이 놓치면 안될 전시다. 전시실 밖 회랑 공간에서는 동산방 표구와 동산방화랑이 걸어온 발자취를 아카이브와 인터뷰 영상을 통해 조명한다. 아카이브에서 표구 디자인 개발 등으로 한국화가들의 작품 활동을 뒷받침한 동산방 표구의 행적도 확인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는 근 50년 역사의 한국화 전문 화랑의 수장이 수집한 작품의 기증으로 미술관 한국화 연구 기반의 확장과 함께 국내 수집가들의 기증 문화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동산방 컬렉션'은 기증 문화를 알리는 전시지만 단순한 전시는 아니다, 한국화의 대표작을 한자리에 모은 이 전시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한국화의 저평가속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가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전시는 한국미술의 우수성을 가늠하는 기준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작품의 소장가가 전통 한국 미술에 대한 최고의 식견을 지닌 전문가였고,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과 친밀한 관계는 물론 작품 활동에 직접 후원을 하며 수집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2024년 2월 12일까지. 관람은 무료. 2023/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