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내장이 걸린 십자가…장파 ‘Gore Deco’ 도발 한국 작가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장파(44)의 회화는 익숙한 규범에서 과감히 탈주한다. 한국 회화가 오랫동안 외부 풍경·추상 자연·정서적 여백을 중심으로 미학을 구축해왔다면, 그는 정반대로 ‘육체의 내부’를 전면에 세운다. 장기, 구멍, 성적 이미지, 살덩이의 덩어감이 화면을 점령하는 이른바 ‘wet한 회화’-서구 표현주의나 라틴아메리카 바디 페인팅에서는 낯설지 않지만, 한국 미술사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장면이다. 핑크–살구–장기색으로 이어지는 층위는 해부학보다 더 해부학적이고, 감각보다 더 감각적이다. 장파는 피부를 벗기고 내부를 펼친 뒤, 그것을 곧장 우주의 지도처럼 확장한다. 화면 곳곳에 새겨진 ‘hole’, ‘love’, ‘origin of the world’ 같은 단어들은 몸의 입구·상처·섹슈얼리티·탄생의 출구·권력의 통로를 한데 엮는 기호다. 한국 여성 작가들에게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감각을 장파는 과감히 열어젖혔다. 국제갤러리는 이 급진적 감각을 정면으로 끌어안으며 9일 개인전 ‘Gore Deco’를 개막했다. K1·K2 전시장에는 동명 회화 연작을 비롯해 드로잉, 동판화, 실크스크린 벽화 등 약 45점이 펼쳐진다. 국제갤러리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장파와 전속계약을 맺고, 그의 미학적 실험을 장기적 파트너십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 “시각은 가장 우위적인 감각… 그 위계를 찢고 싶었다” “시각은 사실 가장 우위적인 감각이에요. 후각·촉각·내장의 감각에 비하면 위계적으로 맨 위에 놓인 감각이죠.” 장파는 자신의 미학적 세계관을 설명하며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를 호출했다. “바타유는 눈·성기·항문·장기처럼, 보통 위계가 매겨지는 기관들을 동일한 지평에서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저 역시 눈과 내장, 생식기 같은 기관들을 뒤섞어 하나의 연속된 현상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감각의 위계를 해체하는 일이다. 시각과 비시각, 고귀함과 저속함, 숭고와 혐오-회화를 지배해온 이 모든 이분법은 그의 화면에서 조용하면서도 기습적으로 붕괴한다. ◆ 장파 작가는? 화가 장파는 2006년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와 미학을 함께 전공했고, 2017년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초기부터 회화 구조와 몸의 언어를 동시에 탐구해온 그는 인천아트플랫폼(2020), 두산갤러리 뉴욕(2017), 소마미술관(2016), OCI 미술관(2011) 등에서 개인전을 열며 ‘감각의 위계’를 뒤흔드는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견고히 구축해왔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202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24), 송은(2023), 아르코미술관(2023), 서울시립미술관(2015) 등 주요 기관의 그룹전에서 주목받았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작업하며, ‘육체–감각–장식’이라는 세 축을 통해 동시대 회화의 감각 구조를 재편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K1-뒤집힌 삼각형, 내장이 걸린 십자가 K1 전시장에 들어서면 삼각형 캔버스들이 공간을 지배한다. 성삼위일체의 상징, 원근법의 질서를 뜻하던 삼각형은 장파의 손에서 과감히 뒤집힌다. 십자가는 더 이상 영적 기호가 아니다. 내장의 질감으로 장식된 ‘여성화된 성물’로 변모한다. 마치 내장이 걸린 교회 안으로 들어선 듯한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 벽면을 감싸는 실크스크린 벽화는 고대 건축의 프리즈를 연상시키며, 역사 속 여성 재현의 이미지사와 장식의 위계를 한 화면에 응축한다. 십자가 형태의 작품은 거의 ‘몸의 성상화(Iconification of Flesh)’에 가깝다. 구멍은 단순한 구멍이 아니라 세계가 처음 열리는 인터페이스, 존재가 통과해야 하는 문과 관문이다. 구원이 상징하던 구조와, 장기가 드러내는 존재의 조건은 장파의 화면에서 하나의 패턴으로 서로 뒤엉킨다. ◆ K1 2층 해골보다 배경이 더 강하다…색채와 장식의 반란 2층에 오르면 관람객은 즉시 충돌을 마주한다. 해골보다 먼저 눈을 훑는 것은 화면 전체를 뒤덮는 폭발적 색채다. 이는 장파가 의도적으로 배경을 형상보다 앞세우는 전략이다. 금속 하드웨어, 머리카락, 스티커, 거즈 같은 비전통적 재료들이 캔버스에 부착되며 ‘고귀한 재료’와 ‘비천한 물질’의 구분은 여기서 무력화된다. 고통의 흔적은 장식이 되고, 상처는 문양이 된다. 이는 파괴가 아니라 압도적인 시각적 쾌감으로 전환된 반란이다. K2에서는 여성혐오 이미지, 에밀리 디킨슨의 문장, 파편화된 신체가 한 장면에서 충돌한다. 눈, 입술, 항문, 상처… 이 전시의 핵심 구조는 ‘구멍(hole)’이다. 구멍은 통로이자 문지방, 기억의 입구이면서 몸의 취약성과 힘을 동시에 드러내는 존재론적 장치다. 여기서 몸은 더 이상 피해의 대상이 아니다. 고통은 장파의 손에서 유머·조롱·유희로 비틀리며 새로운 감각으로 재탄생한다. 그 웃음은 위로가 아니라 폭력적 질서에 생긴 균열이다. ◆ ‘문담피'의 노골화에 저항 캔버스 위에는 해부된 장기, 피어싱, 문신, 담배, 성형, 낙태의 기호가 한 장면에 뒤엉킨다. 여기에 장파는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여성혐오를 겨냥해 생산된 은어를 그대로 가져온다. 작품 제목 ‘Gore Deco: Tattoo, Cigarette, Piercing'도 그 연장선이다. “댓글창에서 혐오 언어가 활활 타오르는 걸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반격’의 기분이 들어요. 20대 내내 그 언어를 실시간으로 겪으며 자랐으니까요.” 텍스트와 기호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한 세대가 통과해온 감각의 지형도다. ◆ “몸은 세계를 통과하는 장치”… 금기 이후의 회화 장파는 자신을 “영페미니즘의 쇠락과 인터넷 혐오 언어의 전면화를 동시에 목격한 세대”라고 말한다. 발달장애를 가진 오빠와 함께 성장하며 계급·성별·장애가 교차하는 폭력을 가족 단위에서 체감했다고도 전했다. 그의 회화 속 몸은 언제나 통과 중이다. 열리고, 해부되고, 뒤집히고, 다시 봉합된다. 파괴가 아니라 다시 태어나기 위한 해체다. ◆ 장파의 회화가 결국 묻는 것 장파의 거대한 화면은 하나의 신체를 묘사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신체를 거쳐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포털에 가깝다. 여성 형상, 젠더 기호, 심장, 뱀, 지문, 작은 태양 같은 도상들은 하나의 거대한 '퀴어 바이오-신화(bio-myth)'로 결집한다. 살과 신화가 얽힌 장파의 그림은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 괴물이면서 동시에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그 잔혹한 진실을 끝내 외면하지 못하게 만든다. ◆ ‘위계를 찢어버린 회화’가 던지는 질문 육체의 내부와 장식의 외부, 혐오의 언어와 웃음의 전략, 숭고와 저속함이 뒤섞인 장파의 세계는 결국 이렇게 묻는다. 어떤 감각이 더 고귀하고, 어떤 감각이 더 저급한가. 그 위계를 결정해 온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위계를 찢어버린 이후의 회화는 어떤 몸을, 어떤 세계를 그릴 수 있을까.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더 생긴다. 장파의 도발적 이미지 앞에서, 남성 관람객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기괴함? 불편? 혹은 설명할 수 없는 ‘데자뷔 같은 당혹’? 오랫동안 여성 신체를 바라보는 관습적 시선에 기대온 감상법이 이 전시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파의 화면에서 남성의 시각적 권력, 오랫동안 미술사를 지배해온 그 시선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붕괴한다. 그 ‘당황–흥미–저항–몰입’의 스펙트럼이야말로 이번 전시가 촉발하는 가장 현재적 도발이며, 올 연말 한국 시각예술 현장에서 가장 뜨겁게 흔들릴 질문이다. 전시는 2026년 2월 15일까지. 관람 무료. 2025/12/09
서울은 지금 인상주의의 계절…액자까지 작품 올겨울 서울은 인상주의의 수도다. 서울 주요 미술관들이 동시에 대형 인상주의 전시를 선보이며, 도심 전체가 보기 드문 ‘인상주의 시즌’에 돌입했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국립중앙박물관의 기획전이 겹친 것은 이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서울이 아시아 미술 전시 허브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는 신호”라고 평가한다. ◆세종문화회관, 600년을 관통하는 서양 회화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의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까지’는 미국 샌디에이고미술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으로, 65점의 서양 회화가 최초로 대규모 해외 반출됐다. 특히 100년 동안 외부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던 상설 컬렉션 25점이 포함돼 미술계의 관심을 모았다. 1520년경 베르나르디노 루이니의 ‘막달라 마리아의 회심’,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리스도의 체포’ 등 르네상스부터 초기 모더니즘까지 600년 회화의 변화를 따라가는 구성이 특징이다. 세종미술관의 문이 열리는 순간, 공기는 단숨에 16세기 르네상스의 온도로 바뀐다. 단순한 명작 나열을 넘어 인상주의가 등장하기까지 서양 회화의 빛·구도·사유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흐름’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내년 2월22일까지 열린다. ◆예술의전당, 르누아르와 세잔의 ‘두 개의 빛’ 예술의전당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세잔·르누아르’는 오랑주리 미술관 소장품이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전시다. 유화 51점과 사진·영상 70여 점을 운송하기 위해 비행기 4대가 투입되는 등 전례 없는 규모를 갖췄다. 이번 전시는 인상주의의 두 대표 화가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폴 세잔의 작품을 주제별로 병렬 배치해 비교 감상이 가능하도록 했다. 르누아르는 부드러운 색채와 인간의 온기를, 세잔은 형태·질서를 강조하며 회화의 구조를 탐구했다. 이번 전시는 두 화가가 인상주의 안에서 얼마나 다른 시각언어를 구축했는지를 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한가람디자인미술관서 내년 1월까지다. ◆국립중앙박물관, 인상주의의 ‘기술과 실험’ 국립중앙박물관의 ‘빛을 수집한 사람들’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로버트 리먼 컬렉션에서 회화·드로잉 81점을 선별해 소개한다. 이 전시의 강점은 ‘명작 감상’보다 인상주의가 어떤 기술적 실험을 통해 탄생하고, 어떻게 초기 모더니즘으로 이어졌는가를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연구형 구성에 있다. 리먼 컬렉션은 두 세대에 걸친 수집가의 안목이 축적된 컬렉션으로, 프랑스 미술과 인상주의의 핵심 변화를 포착해 온 사적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전시는 고갱·르누아르·세잔 등의 작품을 통해 색은 어떻게 해체되고, 빛은 어떻게 분절되며, 형태는 어떻게 재구성되었는가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실에서 내년 3월 14일까지 열린다. ◆왜 지금, 인상주의인가 세 전시가 동시에 열린 것은 서울의 문화적 위상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분석이 나온다. 첫째, 해외 주요 미술관들이 한국을 아시아 관람객의 중심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반출이 어려운 작품들이 한국을 향하는 사례가 늘며 전시 유치 경쟁에서도 서울의 비중이 커졌다. 둘째, 세계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며 인상주의 회화가 다시 주목받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감정·빛·위로의 요소를 가진 인상주의는 위기 시기일수록 관객 유입이 높다는 특징이 있다. 셋째, 세 전시의 구성 자체가 “이번이 아니면 다시 보기 어렵다”는 희소성을 가진다. 관계자들 역시 “동일 구성으로 재편성이 불가능한 수준의 조합”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전시를 봐야 할까 전체 미술사 흐름을 보고 싶다면 → 세종문화회관.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까지의 600년 대서사를 파악할 수 있다. 인상주의 핵심 화가를 비교하고 싶다면 → 예술의전당. 세잔과 르누아르의 빛·구조·감정의 차이를 읽는 자리다. 인상주의를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 국립중앙박물관. 빛·색·형태의 원리를 해부하는 연구형 전시다. 지금의 서울은 유럽 미술관이 선택한 하나의 ‘정거장’이다. 세종에서 인상주의의 뿌리를 보고, 예술의전당에서 인상주의의 두 심장을 보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상주의의 기술을 본다면 유럽 미술관에 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더 이상 남지 않는다. 그리고 놓치기 쉬운 즐거움이 하나 더 있다. 세 전시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액자 자체가 시대의 흔적을 품고 있다. 19세기 특유의 장식적 목재 프레임은 오늘날의 미니멀한 액자와 달리, 화면의 빛과 호흡을 함께 품어내며 또 하나의 시각적 층위를 만든다. 액자까지가 작품으로 느껴진다. 올겨울 서울은 그 자체로 ‘인상주의 올인원 패스’다. 19세기 유럽 회화의 가장 깊은 결을 서울 한가운데서 경험하는 일, 이 또한 K-문화의 힘이다. 2025/12/06
신상호 "반복은 No, ‘무한변주’가 내 체질"…흙으로 재부팅한 60년(종합) 흙은 한 번 굽히면 사라지는 재료지만, 어떤 예술가에게는 끝없이 되살아나는 세계의 문이다. 올해 일흔여덟, 한국 현대 도예의 지형을 바꾸어 온 신상호는 그 문을 반세기 넘게 두드려왔다.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회고전 ‘신상호: 무한변주’ 제목 그대로, 흙의 무한한 변주(變奏)를 실감하는 자리다. 전통 도자에서 출발해 조각·회화·건축으로 끝없이 확장해 온 그의 궤적을 도자·조각·회화·설치 160여 점으로 조망한다. 전시를 기획한 윤소림 학예연구사는 신상호를 “구상·추상의 구도를 고민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의 핵심 축은 호기심·경외·생명성”이라고 설명했다. “어떤 형식에도 고정되지 않는 작가”라는 말은 이번 전시에서 명확해진다. ◆ “나는 같은 방법을 반복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날 과천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상호는 특유의 꾸밈없는 어조로 자신의 작업 세계를 정리했다. “점 찍으면 평생 점 찍고, 물방울 하면 평생 그것만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한 방법에 안주할 수가 없어요. 흙을 만지면 새로운 의문이 생기고, 그 의문을 따라가면 또 다른 길이 열립니다.” 그 말은 작품 곳곳에서 그대로 읽힌다. 도자기, 도자 조각, 추상 회화, 건축 타일까지 뻗어가는 작업들은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다채롭다. 흙의 질감과 빛, 추상적 패턴, 생명체의 울림이 결합된 작업들은 그가 말한 ‘흙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입증한다. 그가 말한 또 하나의 핵심 문장은 이번 전시의 존재론적 바탕을 요약한다. “흙은 보관되지 않는 자원입니다. 아이디어도 보관되지 않죠. 둘이 만나면 계속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젊은 도예가들에게는 이렇게 당부했다. “어렵다는 이유로 멈추지 마세요. 극복하면 어렵지 않아요. 넘어서면 새로운 것이 되고, 자기 것이 됩니다.” ◆ ‘흙의 예술가’가 걸어온 60년…도예 국제화의 출발점 신상호의 작업은 한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이력은 그 자체로 한국 도예의 현대화 과정이다. 1965년 홍익대 입학과 동시에 이천의 장작가마를 인수해 전통 도자를 익힌 그는, 국내 최초로 가스가마를 들여오며 “전통에 과학을 더한 현대 도예”를 직접 개척했다. 그는 전통을 단순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개념’으로 봤다. 일본 백화점 전시를 비롯해 국제 도예전, 화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한국 도예의 국제화를 몸으로 열어젖혔다. 1980년대 이후 그는 도예의 규범을 과감히 벗었다. 도자 조각의 개척자로 흙으로 동물 형상을 빚어낸 ‘꿈’·‘아프리카의 꿈’ 연작은 흙을 생명체의 에너지를 담는 매체로 바라본 대표작들이다. 이후 도자 타일을 이용한 외벽 설치 ‘구운 그림’, 센트럴시티 ‘밀레니엄 타이드’, 금호아시아나 사옥 외벽(현 콘코디언 빌딩) 등 건축과의 결합까지 이어졌다. 그의 변주는 전통 → 조각 → 회화 → 건축 → 회화적 도자 → 생명·추상 결합으로 이어진다. 흙에서 출발하지만, 흙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흙이 언어가 되고, 빛이 되고, 또 다른 예술이 되는 과정이다. ◆ 손가락 자국, 적층된 색, 조각된 화면…장르가 무너진 회화적 도자 이번 전시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회화적 패널들이다. 손가락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표면, 수십 번 구워낸 색의 적층, 흙의 양감을 밀어 올린 화면. 회화인지 조각인지 장르가 무너진 작품들이다. 흙의 질감과 빛, 추상적 패턴, 생명체의 울림이 섞인 작품들은 그가 말한 ‘흙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거대한 토템 형태의 얼굴은 도자이면서 조각이고, 동시에 회화다. 이 '장르 해체의 지대'야말로 신상호가 60년간 밀어붙여온 본질적 질문, '흙은 무엇을 담을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강렬한 답변이다. ◆ “도예과 폐과 1순위였던 시절…이제 흙의 시대가 돌아온다” 신상호는 도예의 생존을 위해 싸워온 세대다. “홍익대 21개 학과 중 도예과가 항상 폐과 1순위였어요. 정말 억울하고 분했죠. 그래도 도예의 생존력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근의 변화를 ‘기적’처럼 바라본다. “요즘 젊은 세대에서 도예 관심이 커졌대요. 정말 고맙고 기쁘죠. 흙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재료니까요.” 몇 달간 파주 작업실과 과천을 오가며 전시를 준비했다는 신상호는 “정말 행복했다”고 했다. 그 말은 단순한 소감이 아니다. 이번 회고전은 한 예술가의 수고와 열정이 만들어낸 기록이며, 한국 도예가 세계적 현대미술의 언어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전시는 내년 3월 29일까지. 2025/11/26
피라미드가 수신한 박종규 ‘영원의 코드’…"이집트 현재진행형 문명국" 이집트 기자 사막에 피라미드가 두 겹으로 서 있다. 뒤로는 7000년 전 석조 피라미드가, 앞으로는 빨강·노랑·파랑 3원색 구조물이 또 다른 피라미드의 윤곽을 그린다. 사각 프레임 안 삼각 구조물이 사막의 수평선을 가르고, 바닥에 박힌 아크릴 미러 조각은 돌처럼 빛을 튀긴다. 한국 작가 박종규의 신작 대지미술 ‘영원의 코드(Code of the Eternal)’가 고대 유산과 디지털 시대를 동시에 호출하는 순간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기자 피라미드(Pyramids of Giza)에서 가을마다 열리는 국제현대미술제 ‘포에버 이즈 나우(Forever Is Now)’가 15일(현지시간) 공식 개막했다. 아프리카·중동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야외 국제전으로 꼽히는 이 행사는 이집트 비영리 플랫폼 아르 데집트(Art D’Égypte)가 주최하고, 이집트 외교부·문화부·관광유물부의 후원과 유네스코 협력으로 열린다. 올해는 10개국 작가 10명(팀)이 참여했으며, 한국 작가로는 박종규가 유일하다. 피라미드 앞에서 신작을 선보이는 것은 지난해 강익중에 이어 두 번째다. ◆피라미드의 수학, 사막 위 디지털 구조로 다시 서다 “피라미드는 한국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역사·언어·문명 간의 지속적인 연결을 예술로 표현하기에 완벽한 장소다." 박종규의 ‘영원의 코드’는 피라미드 고유의 기하학적 비례, 한국·이집트 고대 서사를 디지털 언어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빨강, 노랑, 파랑색의 정사각형 철 프레임 속 삼각형 구조는 실제 피라미드의 각도와 높이, 변 길이에서 도출한 수학적 수치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겉으로는 추상적이지만, 그 안을 이루는 수열은 임의로 뽑은 숫자가 아닌 ‘고대 피라미드의 비례 코드’다. 삼각의 구조물 앞 모래 위에는 약 1000개의 아크릴 미러 점(dot)이 흩어져 있다. 햇빛을 받으면 픽셀 노이즈처럼 반짝이는 이 점들은 작가가 쓴 시 ‘단군이 파라오에게 보내는 상상의 편지’를 모스 부호로 암호화한 결과물이다. 박종규는 이를 “감상용 텍스트가 아니라, 피라미드가 별자리를 통해 신에게 말을 걸던 것처럼 ‘위에서 보라고 쏘아올린 교감의 언어’”라고 설명했다. 설치물 옆 비석에는 이 암호가 영어·아랍어로 번역돼 새겨져 있다. 현장에서 만난 그는 피라미드 앞에서 작품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두고 “시간이 겹쳐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수천 년 전의 기하학과 제가 만든 디지털 구조가 한 화면처럼 이어져, 피라미드가 제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1년 전 답사에서 이미 전체 구조를 머릿속에 그려두었지만, 실제 설치 과정에서는 사막의 모래바람과 현지 제작 방식의 차이를 견디며 “이집트라는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했다”고 말했다. 사막 위에 놓인 기하학 구조와 바닥을 이루는 도트 언어는 그 자체로 한국과 이집트, 고대와 디지털, 신화와 정보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장면을 만든다. 박종규는 동양적 사고가 “보이지 않는 질서와 순환을 읽는 감각”에 기반한다며, 이번 작품에 단군 신화의 문장을 모스 부호로 암호화해 넣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아날로그 언어를 디지털 언어로 전환해, 시공간을 초월한 교감 언어로 다시 쏘아 올리는 장치”라고 정의했다. “한국이 디지털 문명의 중요한 리더로 성장한 지금, 그 감각과 언어를 피라미드라는 인류 문명의 원점 앞에서 다시 발화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박종규 작품을 본 김윤섭 미술평론가는 박종규 작업의 ‘언어성’을 짚었다. “피라미드에서 추출한 숫자열과 단군 신화를 모스 부호로 암호화한 구조는 단순 설치가 아니라 문명 간 언어 교환에 가깝다”며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시대 전환의 경계에서 양쪽을 중계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말했다. 김 평론가는 “모스 부호처럼 시대·국가·종교를 초월한 공통 기호를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 점이 독창적”이라며 “디지털 언어가 결국 1과 0의 구조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조형적으로 환기시키는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번 작품은 전시용 이벤트가 아니라, 디지털 세계를 기반으로 축적해온 박종규 작업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깊이를 더한다”고 덧붙였다. ◆ 박종규 작품이 ‘미래 문명’의 언어가 되는 이유 이규현 큐레이터는 올해 '포에버이즈 나우' 전시의 핵심 키워드를 “디지털과 영원”이라고 규정하며, 박종규가 이를 가장 명확히 구현한 작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피라미드의 수학, 디지털 노이즈, 단군 신화가 한 구조로 엮인 작업”이라며 “고대 문명 한가운데서 K-아트가 자신만의 언어로 발언하는 드문 장면”이라고 말했다. 이규현 큐레이터는 사실상 이집트 현장에서 한국 미술의 ‘민간 외교관’이다. 지난해 강익중의 ‘한글 신전’에 이어 올해 박종규의 ‘영원의 코드’까지, 그는 한국 작가들을 최초로 피라미드 앞으로 세워 ‘K-아트’를 고대 문명 중심부로 진입시켰다. 그는 “7000년 문명과 현대예술을 연결하는 일, 그 사이에 한국 예술을 세우는 건 국가 브랜드 확장과 직결된다”고 했다. 이어 “이집트는 단 한 번도 변두리였던 적이 없는 문명국이며, 지금도 지정학·문화·종교 모든 측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나라”라며 “한국 예술이 세계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집트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명의 관문’”이라고 말했다. ◆ 고대 문명(이집트) × 미래 문명(한국)…이집트가 노린 큰 그림 이집트가 피라미드를 문화외교 무대로 삼는 데는 분명한 전략이 있다. 기자 피라미드 단지는 2023년에만 1470만 명이 찾았고, 이는 이집트 전체 관광객 수와 거의 동일하다. 2024년에는 방문객이 약 1570만 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는 2028년까지 관광객 30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라미드 앞에서 국제 현대미술제를 연다는 것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다. 문화·관광·국가 브랜드를 하나로 묶어 세계에 발신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올해 개막식은 세 개의 피라미드가 동시에 보이는 지점을 특별 개방해 진행됐다. 지난해 스핑크스 앞 개막보다 훨씬 강력한 상징 자본을 활용한 셈이다. ‘포에버 이즈 나우(Forever Is Now)’는 이 전략의 최전선에 배치된 국제전으로, 이집트는 고대 문명의 절대적 상징 위에 현대미술과 각국 작가를 올려놓으며 “이집트는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 문명국”임을 증명하려 한다. 최근 개관한 ‘이집트 대박물관(GEM)’과 피라미드 현대미술제의 정례화는 이러한 국가 전략을 뒷받침하는 수단이다. 관광 수입·해외 송금·수에즈운하 통행료라는 기존 경제 구조의 한계를 넘어, 고대 문명을 21세기형 문화산업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이집트를 모르면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문명의 원점에서 벌어지는 문화외교 ‘포에버 이즈 나우’는 단순한 야외 설치전이 아니라, 문명의 원점과 오늘의 예술을 직접 연결하는 문화외교의 장이다. 전시를 주최한 나딘 압델 가파르(Nadine Abdel Ghaffar) 아르 데집트 설립자는 “포에버 이즈 나우는 고대 이집트 역사와 현대미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글로벌 대화의 장”이라고 설명했다. 고대 피라미드가 더 이상 ‘과거의 박물관’이 아니라, 세계 각국 작가들이 참여하는 문화외교 무대로 재가동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맥락에서 최병선 주이집트 총영사는 “이집트를 알지 못하면 세계사의 축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이곳은 7000년 문명의 발원지이자, 지금도 아랍권 최대 인구(1억 2000만 명)를 가진 지정학의 중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흔히 알려진 5000년보다 더 깊은, 선사시대를 포함한 7000년의 문명 연속성을 품은 나라가 바로 이집트”라며 “처음부터 중심부였던 문명국이 다시 글로벌 예술의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10개 언어가 말하는 ‘영원’…피스톨레토·살라 엘 마스리 등 참여 올해 전시에는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VHILS, 리사이클 그룹, 나딤 카람, 브라질의 아나 페라리, 프랑스–베냉의 킹 우데크핑쿠, 이집트 작가 살라 엘 마스리 등이 함께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피스톨레토는 아르테 포베라의 대표 작가로, 반영(reflection)과 참여를 강조해온 인물이다. 사막에 놓인 그의 스테인리스 구조물과 둘레의 바위들은 일종의 현대적 제의 공간처럼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드러낸다. 피라미드의 거대한 석조 구조와 대구를 이루며 고대의 무게와 현대의 가벼움이 교차하는 경계를 만든다. 특히 카이로 출신 작가 살라 엘 마스리의 설치는 이번 전시의 ‘신화적 무게’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고대 왕이 쓰던 반지를 거대한 스케일로 확대한 구조물로, 정면에는 커다란 환(環)이 뚫려 있다. 관람객이 그 안쪽에 서면 양옆에서 마아트(Maat)가 심장을 재는 고대의 심판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집트에서는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워야 피라미드 너머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었다. 엘 마스리는 이 오래된 사후 세계의 서사를 현대 조각 언어로 다시 불러내 사막 위에 거대한 ‘균형의 눈’을 세웠다. 박종규의 이번 피라미드 프로젝트는 씨아이에스(CIS)와 공익재단 아이프칠드런(AIF)의 후원이 더해져 완성됐다. 기술 산업과 공익 예술이 함께 만든 이 구조물은, 고대 문명의 발원 앞에서 또 하나의 ‘미래 언어’를 쏘아 올렸다. 해 질 무렵, 피라미드는 신화의 출구처럼 빛났다. 사막의 바람이 잠시 멎는 사이, 10개의 작품은 각각의 방식으로 ‘영원’을 말했고, 피라미드는 그 모두를 묵묵히 받아 적는 듯했다. 전시 제목 ‘포에버 이즈 나우(영원은 지금)’은 그 순간 더 이상 전시의 표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가 미래에게 보내는 재발신된 메시지, 지금 이곳에서 다시 가동되는 문명의 선언에 가까웠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이어진다. 2025/11/16
'돌의 틈에서 빛으로'…알록달록 돌아온 박은선, '치유의 공간' 알알이 매달려 기둥을 이룬 구슬이 색색의 빛을 낸다. 멀리서 보면 알사탕처럼 가볍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묵직하다. 대리석이다. 단단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달라졌다. “그때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 깨달았어요.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결국 작품뿐이었죠.” 코로나19로 세상이 멈췄던 시기, 조각가 박은선은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의 집에 머물며 가족과 함께 ‘멈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절망의 시대 속에서 희망을 전하기 위해 돌에 빛을 심기 시작했다. ‘무한 기둥–확산(Colonna Infinita–Diffusione)’은 조명이 되어 빛을 낸다. 대리석 구 내부에 LED 조명을 넣어, 돌의 결 사이로 은은히 스며드는 빛을 구현했다. 자연석이 인공의 빛을 걸러내며 만들어내는 조각의 광채는 부드럽다. 작가는 “가짜가 아닌 진짜 희망의 빛”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 조각은 사람과 나누는 일”이라 말한다. 팬데믹 이후 그의 작품은 ‘무한’보다 ‘공유’를 향했다. “조각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겁니다. 나 혼자만의 세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는 세계로 열려야죠.” 11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조각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그리고 존재를 통해 다시 희망을 이야기했다. 12일부터 여는 박은선 개인전은 2023년 이후 국내에서 3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자, 2008년 인사아트센터 전시 이후 17년 만에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다. 대리석, 브론즈, 알루미늄으로 변주한 조각 작업들을 비롯한 조각작품 22점과 회화 작업 19점까지 총 41점을 선보인다. ◆ 돌의 틈, 숨통이 되다 박은선은 대리석과 화강암을 층층이 쌓고 깨뜨려 틈을 만든다. 그에게 그 틈은 단절이 아니라 삶의 숨통이자 빛의 통로다. “멀쩡한 돌을 깨뜨리고 틈을 만드는 건 나뿐일 겁니다. 하지만 그 틈이 바로 생명의 숨입니다.” 전시장 입구에는 높이 3m 30cm의 대형 신작 ‘Generation–Evoluzione(생성–진화)’가 우뚝 서 있다. 균형과 상승의 조형미를 품은 이 조각은 인간의 성장과 회복을 상징하며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세 개의 구가 세워진 화강암 조각은 무거워 보이지만, 각각 따로 움직이며 아슬아슬한 긴장을 만든다. 대표작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은 두 가지 색의 돌을 반복적으로 중첩해 만들어진 수직적 조형물이다. 그가 쌓고, 깨고, 다시 붙이는 행위를 반복하는 이유는 균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 위해서다. 번갈아 쌓인 대리석의 줄무늬는 리듬이 되고, 일부러 만든 틈은 해방의 공간이 된다. ◆ 벽의 여백을 본 조각가, 회화를 시작하다 “조각이 공간을 다 채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벽이 비어 보였어요.” 그가 회화를 시작한 이유다. 박은선에게 캔버스는 또 하나의 돌, 또 하나의 조각 재료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보다 던지고, 붙이고, 뜯어내며 조각하듯 회화한다. 이번 전시의 먹화 신작 ‘Untitled’는 수직적 기둥의 형태를 평면에 옮겨온 작품이다. 마(麻)로 짠 캔버스 위에 먹이 자연스럽게 번지며, 물성과 정신성이 교차하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먹의 농담이 번지며 시간의 흔적과 물질의 감각이 교차하고, 돌의 무게가 사라진 자리에는 여백의 차분한 호흡이 남았다. ◆ 이탈리아가 사랑한 한국 조각가 1965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박은선은 199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카라라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이후 30년 넘게 피에트라산타에 머물며 작업해왔고, 지금은 이탈리아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콘티니 갤러리의 전속 작가다. 피렌체, 로마, 피에트라산타 등 주요 도시의 광장에서 개인전을 열며 ‘이탈리아가 사랑한 한국 조각가’로 불린다. 그는 “절벽 끝에 서 있는 듯한 순간이 많았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버티다 보니, 결국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대표작 ‘무한 기둥’은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한 ‘2024–2025 한·이 상호문화교류의 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로마 곳곳에 설치되어 국가 간 문화교류의 상징이 되었다. 지난 5월, 대리석 조각의 본산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중심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 ‘Atelier Park Eun Sun'을 열었다.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설계했으며, 이탈리아에 한국 작가의 이름을 딴 공간이 세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한 2026년 10월에는 전라남도 신안 자은도에 마리오 보타와 협업한 ‘인피니또 미술관(Infinito Museum)’이 개관할 예정이다. ◆ 치유의 공간에서 빛으로 전시 제목 ‘Spazio della Guarigione’는 ‘치유의 공간’을 뜻한다. 박은선은 단단한 돌의 균열과 틈에 빛을 스며들게 하며 인간 내면의 회복과 성장, 그리고 존재의 숨결을 은유한다. 그의 조각은 멀리서 보면 묵직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가볍다. 돌이지만 움직이고, 소리까지 난다. 무게와 균형, 정적과 동적의 경계가 한 몸 안에서 반전처럼 공존한다. 박은선은 단단한 돌 속에서도 ‘움직이는 생명’을 보여준다. 야외에는 5m 높이의 ‘무한 기둥–증식(2019)’과 ‘무한 기둥–연속(2025)’ 등 대형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가나아트센터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박은선은 “내 작품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숨쉬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조각은 이제 시간의 기록을 넘어, 나눔과 공유로 인간의 존재감을 실천하는 희망의 조각이 되었다. 전시는 2026년 1월 25일까지 열린다. 2025/11/11
‘조용한 진실의 표면’…변웅필 ‘아무렇지 않은 날들’ 하루의 빛이 물감 위로 스며든다. 붓은 천천히 움직이고, 공기마저 멈춘다. 서울 삼청동 호리아트스페이스에 걸린 변웅필의 신작들은 조용하지만 고도의 집중으로 빚어진 시간의 표면이다. 그는 스스로를 “특별할 것 없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결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그 안에는 수천 번의 호흡, 끝없는 반복, 그리고 ‘거짓말하지 않는 회화’에 대한 단단한 신념이 스며 있다. ◆선의 통제, 면의 고요 “선을 남기는 선이 면화(面化)되는 거예요. 얇은 면이 선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죠.” 변웅필의 회화는 선과 면의 경계를 해체한다. 유화의 점성과 두께 때문에 한 번에 그을 수 없기에 그는 수십 번의 반복으로 선을 완성한다. “막 그리는 건 싫어요. 통제하고 싶어요.” 그에게 선은 흔적이 아니라, 수련의 궤적이다. 그의 화면에는 서로를 마주보거나, 가볍게 부비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파스텔톤으로 눌러 앉은 얼굴들은 따뜻하지만 묘하게 긴장돼 있다. 퀴어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그것은 성적 코드라기보다 관계의 온도에 관한 회화적 실험이다. 서로의 경계를 흐리며 맞닿은 얼굴들은 결국 ‘나’와 ‘너’의 거리를 탐색하는 작가의 방식이다.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다. 변웅필의 인물들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얼굴들’이다. 하루를 다 버티고도 여전히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의 초상, 그게 얼마나 묵직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진실의 회화, 노동의 리듬 “화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 뿐이에요.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아야죠.” 변웅필은 붓질하는 사람이다. 화가로서의 정직한 태도는 화면에 고스란히 남는다. 그의 화면은 방향이 일정하고, 얼룩이 없다. 얼룩 하나, 흔적 하나 없는 그의 평면은 진실 그 자체의 표면이다. 매끈한 표면은 우연이 아니라 수천 번의 의도다. 그는 말한다. “화가니까, 내가 만족해야 마감할 수 있어요.” 변웅필에게 회화는 하루의 노동이자 삶의 리듬이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하루의 공기와 색을 마주하는 일. 그것이 그에게는 예술이고 생이다. ◆붓질하는 노동자, 장인의 정신 그의 진심은 회화의 태도로 이어진다. 작업실에서 하루에도 여러 개의 붓이 사라진다. “붓 하나로 두 번 못 써요. 다 쓰고 부러뜨릴 때 쾌감이 있어요.” 그 쾌감은 낭비가 아니라 소진의 미학이다. 그는 캔버스도, 나무 액자도 직접 짠다. “짜고 나면 운동 끝난 다음 같은 기분이에요. 내가 작가로서 뭔가를 해냈다는 감정이 들어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 손이 닿아야 완성되는 일. 그에게 붓질은 노동이고, 마감은 신앙에 가깝다. ‘그림보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 변웅필은 묵묵히 화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타 작가에서 중견 작가로 성장했지만, 그 발 아래는 오히려 더 단단히 정박돼 있다. ◆아무렇지 않은 것들의 존엄 이번 전시에는 인물과 사물이 함께 등장한다. ‘SOMEONE’이 얼굴이었다면, ‘SOMETHING’은 이름 없는 사물이다. 둘 다 색과 형태를 담는 그릇일 뿐이다. 그는 그릇을 구별하지 않는다. 모두가 동등하게 존재하는, 아무렇지 않은 세계다. “변웅필 작가는 4년의 시간 동안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회화 언어를 발전시켜왔다.” 호리아트스페이스 김나리 대표는 “이번 전시는 ‘SOMEONE’에서 ‘SOMETHING’으로 확장하는 전환점”이라고 했다. 전시장 한편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너는 너 대로 나는 나 대로 아무렇지 않은.” “마주 불어오는 바람이 아무렇지 않은.” 변웅필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무심함이 아니라 존중의 상태다. 비교도, 위계도, 욕망도 없이 존재들이 공존하는 세계. 그의 그림은 그 세계의 기록이다. ◆아무렇지 않은 날들의 선언 이번 전시 ‘아무렇지 않은 날들’은 그가 견고하게 지켜온 진실의 회화에 대한 선언이다. 특별하지 않기에 진솔하고, 반복되기에 더 깊어지는 색의 리듬. 그는 말한다. “진짜 별거 아닌 걸로 봐주면 좋겠어요. ‘편하다’, ‘좋다’, 그 정도면 돼요.” 감동을 받든, 비판을 하든, 모두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의 그림은 관객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보고 싶은 대로 봐요. 그저 보면 돼요. 그것이면 충분해요.” 전시는 12월 6일까지 열린다. 2025/11/06
아트바젤·프리즈 사막 위의 미술전쟁…오일머니를 컬처머니로 홍콩이 지고, 서울이 뜨자 이제 세계 미술의 무대는 사막으로 옮겨가고 있다. 세계 양대 아트페어, 아트바젤(Art Basel)과 프리즈(Frieze)가 잇따라 중동 진출을 공식화하면서, ‘사막 위의 미술전쟁’이 예고됐다. 아트바젤은 지난 5월 카타르스포츠투자청(QSI)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내년 2월 카타르 도하 문화지구 ‘므쉐이렙(M7)’에서 ‘아트바젤 도하(Art Basel Doha)’를 출범한다고 밝혔다. 이어 5개월 뒤인 10월 13일, 프리즈는 아부다비 문화관광부(DCT Abu Dhabi)와 손잡고 2026년 11월 ‘프리즈 아부다비(Frieze Abu Dhabi)’ 개최를 공식화했다. 두 페어의 대결은 단순한 시장 확장이 아니라, ‘포스트 아시아’ 시대의 문화 패권 경쟁으로 번지고 있다. ◆ 지는 홍콩, 뜨는 서울 한때 ‘아시아 미술의 수도’로 군림했던 홍콩의 전성시대가 저물고 있다. 정치적 불안과 규제 강화, 임대료 급등, 중국 본토 컬렉터의 이동 제약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메가 화랑들이 잇따라 철수했다. 페이스(Pace)는 H Queen’s 빌딩의 전시장 운영을 종료했고, 페로탕(Perrotin)은 빅토리아독사이드 공간을 닫았다. 레비 고르비 데이안(Lévy Gorvy Dayan) 역시 2024년 말 홍콩 지점을 폐쇄했다. 이들은 “홍콩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며 서울·도쿄·싱가포르로 중심을 옮기는 추세다. 서울은 그중에서도 단연 중심이다. ‘프리즈 서울’의 성공적 정착은 아시아 미술시장의 활력을 입증했고, 그 에너지가 이제 중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오일머니에서 컬처머니로…사막의 르네상스 중동은 지금 ‘석유에서 예술로’의 대전환을 추진 중이다. 루브르 아부다비는 지난해 140만 명의 관람객을 모으며 중동 문화 르네상스의 상징이 됐다. ‘구겐하임 아부다비’는 2026년 개관을 앞두고 있으며, 도하의 문화복합공간 M7은 카타르의 ‘국가비전 2030’ 아래 창조산업의 허브로 떠올랐다. 리야드–도하–아부다비로 이어지는 ‘사막의 예술 삼각축’은 세계 미술시장의 새로운 전선이다. 중동의 국부펀드와 문화정책은 ‘오일머니’를 ‘컬처머니’로 전환하며, 글로벌 미술의 판을 새로 짜고 있다. ◆프리즈, 아부다비 아트 인수…“아트바젤보다 한발 늦고, 한층 깊게” 프리즈는 단순히 새 페어를 여는 것이 아니라, 기존 ‘아부다비 아트(Abu Dhabi Art)’를 통째로 인수했다. 2008년 창설된 아부다비 아트는 11월, 역대 최대인 140개 갤러리가 참가하는 마지막 독립 버전을 선보인 뒤 2026년부터 공식적으로 ‘프리즈 아부다비’로 리브랜딩된다. 작년 가을에는 아트바젤이 약 2000만 달러 인수설로 협상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결국, 프리즈가 그 경쟁에서 승리한 셈이다. 프리즈의 이번 행보는 ‘문화 리더십’을 강화하려는 아부다비 문화관광부(DCT Abu Dhabi)의 전략과 맞물린다. DCT 회장 모하메드 칼리파 알 무바라크는 “2008년 창립된 아부다비 아트의 자연스러운 진화”라고 밝혔다. ◆ 프리즈의 새 주인, 오일머니의 자본 이번 인수 뒤에는 헐리우드 거물 아리 엠마누엘(Ari Emanuel) 의 등장이 있다. 그는 올해 5월, 프리즈를 엔데버(Endeavor)로부터 인수하고 ‘마리(MARI)’라는 새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프리즈 외에도 마드리드·마이애미 테니스 오픈, 자동차 경매사 Barrett-Jackson 등을 소유한다. 파이낸셜타임즈등 외신에 따르면 엠마누엘은 20억 달러(약 2조7000억 원) 의 투자금을 확보했으며, 투자자에는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와 놀랍게도 카타르투자청(QIA) 이 포함됐다. 즉, 프리즈의 뒤에는 이미 오일머니가 흐르고 있다. ◆아트바젤 도하 vs 프리즈 아부다비…사막 위의 예술전 아트바젤 CEO 노아 호로비츠는 “도하는 중동·북아프리카 예술의 새로운 허브가 될 것”이라며 “작가와 갤러리, 컬렉터가 교차하는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프리즈 CEO 사이먼 폭스는 “아부다비의 문화적 리더십과 예술에 대한 헌신이 이번 협력의 토대”라며 “프리즈의 글로벌 플랫폼으로 지역 예술을 세계 무대로 확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페어 모두 문화 외교·투자·브랜드·관광이 결합된 초국가적 프로젝트다. 아트바젤이 도하에서 문을 열고, 프리즈가 아부다비를 이어받는다. 결국 사막 위에서 맞붙는 건 두 ‘예술 기업’이지만, 그 뒤에는 국가 단위의 전략과 자본이 맞선다. ◆그리고 서울…아시아의 교차점 사막으로 향하는 미술시계 속에서도, 서울은 여전히 아시아의 교차점이다. ‘프리즈 서울’이 만들어낸 활력은 아시아 시장의 중심을 다시 북쪽으로 끌어올렸고, 그 에너지는 이제 사막까지 번지고 있다. 결국, 사막 위에서 춤출 것은 예술이 아니라 자본이다. ‘사막 위의 미술전쟁’은 글로벌 자본과 문화정책, 예술 생태계가 얽힌 새로운 패권의 무대다. 오일머니가 합세한 이 자본주의의 신전(新殿)에서, 예술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트페어는 더 이상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다. 그곳은 세계가 움직이는 속도와 욕망이 교차하는, 가장 뜨거운 현장이다. 2025/10/14
‘슬픈 전설’ 천경자, ‘찬란한 전설’ 첫 페이지 열었다 다시, '천경자'다. 한국화 거장 천경자(1924~2015) 작고 10주기를 맞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서울미술관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가 '위작 논란'의 그림자를 넘어, 진짜 천경자의 얼굴을 마주하게 한다. 2006년 갤러리현대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이후 20년 만에 열리는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23일 서울시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만난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은 “이번 전시는 정말 쉽지 않았다. 생전 ‘고약한 화가’라는 소리를 들었던 천경자가 지금도 여전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 기자가 ‘천경자의 재조명은 시효의 끝에 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전시를 준비했다”며 “흔쾌히 작품을 내준 소장가들과 미술관, 옥션사에 감사를 전하지만, 두 번은 하기 어려운 전시”라고 강조했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위작 논란’, ‘미인도 사건’이라는 말은 더 이상 천경자 작가를 따라다니는 단어, 수식어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건은 91페이지 책의 한 장에 기록된 하나의 해프닝. ,선생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떠나셨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천경자 작가를 더 이상 '위작 논란'이나 '한(恨)을 그리는 여자 작가'가 아닌 근대사의 큰 풍랑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해 낸 한 명의 위대한 예술인으로 추앙하고자 합니다."(서울미술관 )[[[[:newsis_inyoung_center_end:]]]] 안진우 서울미술관 이사장은 “유족 모두가 어머니를 향한 향수를 짙게 지니고 있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전시를 준비했다”며 “천경자를 더 이상 ‘위작 논란’이나 ‘미인도 사건’이 아닌 한 명의 예술가로 바라봐 달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천경자는 위작 논란과 유족 반발로 인해 대규모 회고전이 쉽지 않았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상설 전시장이 있지만, 지난해 탄생 100주년 전시는 고향 전남 고흥에서만 열려 거장의 위상에 비해 아쉬움이 컸다. 30여 년간 한국 미술계의 아픈 그림자였던 ‘미인도’ 위작 논란은 최근 대법원 판결로 유족 패소가 확정되며 법적 공방에 종지부를 찍었다. 법원이 진위를 직접 판단한 것은 아니지만, 검찰 감정의 정당성을 인정한 셈이다. 이제는 ‘위작’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예술가 천경자의 작업 세계 자체로 돌아가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38억 원에 낙찰된 이중섭 ‘황소’를 소장한 국내 미술계 큰손이자 서울미술관 설립자인 안 회장은 천경자 작품도 12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2, K옥션 2019년 9억 원 낙찰) 역시 그의 소장품이다. 그는 “천경자의 91페이지 인생은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남겨야 한다”며 "논란이 된 '미인도'를 과감히 빼고, 거장의 삶과 예술을 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대표 채색화 80여 점을 한자리에 모으는 과정에서 아쉬운 일화도 있었다. 대여를 추진하다 끝내 불발된 작품이 있다. 붉은 색채가 강렬한 '볼티모에서 온 여인' 작품이다. 이전에 눈여겨본 작품이었지만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서경배 회장 컬렉션에 들어가 아쉬움이 남았다. “꿈속에도 나온 작품”이었던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 빌려오려 했으나 최종적으로 무산됐다. 대신 서 회장은 ‘사월이’를 보내 전시에 힘을 보탰다. 안 회장은 해당 이미지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내놓지 않았다. 그는 “그림도 다 인연 따라 움직인다”는 철학으로 그 아쉬움을 받아들였다. 천경자의 작품은 경매 시장에서도 높은 가치를 입증해왔다. ‘초원Ⅱ’(1978)는 2018년 20억 원에 낙찰돼 작가 최고가를 기록했고, ‘정원Ⅱ’는 17억 원, ‘테레사 수녀’는 8억8000만 원, ‘막은 내리고’는 8억6000만 원, ‘놀이’는 8억3000만 원에 거래됐다. 여성 화가로서 드물게 10억 원대 시장을 형성한 위상이다. ◆20년 만의 회고전, 150여 점 집결 이번 전시는 작가의 대표 화업인 채색화 80여 점을 비롯해 저서, 도서 장정, 성장 과정과 제작 노트, 여행기 사진과 편지 등 150여 점의 아카이브를 망라했다. 서울미술관은 1000평 규모 제1전시장을 8개 파트로 구성했다. 자화상·가족, 여인의 얼굴, 여행과 풍경, 문학과의 대화, 한과 슬픔, 영혼과 종교, 화려한 여정, 그리고 추모 공간으로 나눴다. 관람객이 직접 작가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참여 존도 마련했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세상을 비추는 여인 鏡子 전라도 남단 고흥에서 태어난 천옥자(千玉子)는 1941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경자 (鏡子)로 이름을 바꿨다. 더 넓은 세상을 비추는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채색 인물화와 풍물화로 대별되는 천경자 화백의 예술세계는 1969년을 기점으로 잡아 그 이전을 꽃과 여인을 주로 한 채색화 시기, 그 이후는 세계를 기행하며 스케치해서 그린 풍물화 시기로 볼 수 있다..(중략) 천경자 화백은 45세부터 70세까지 열세번에 걸쳐 해외 스케치 여행에 나섰다. 40대 후반에 타히티에서 시작해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50대에 사하라와 킬리만자로의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횡단했으며, 5년 후 다시 정열의 땅 인도와 신비의 땅 중남미 기행에 나서 아마존 밀림지대까지 누볐다. 미국과 영국 여행에서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 화폭에 담았다.(극단생활 정중헌 대표)[[[[:newsis_inyoung_center_end:]]]] [[[[:newsis_inyoung_center_start:]]]]근현대에 이르러 탁월한 여성 미술가들이 앞다퉈 나오기 시작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세계 미술계의 흐름을 그 선두에서 이끌어가고 있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성차별적인 문화와 편견이 강고했던 시기에도 온몸으로 이에 저항하며 이른바 ‘유리 천장’을 허문 위대한 선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단연 천경자를 으뜸으로 떠올리게 된다. 천경자는 예술가로서, 여성으로서, 나아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평생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아름다움과 진실을 고집스럽게, 비타협적으로 그려나간 예술가다. 그것만 해도 그는 우리 문화사가 찬사를 보내야 할 위대한 업적을 쌓은 존재라할 수 있다. (평론가 이주헌 전 서울미술관장)[[[[:newsis_inyoung_center_end:]]]] 전시장 벽에 걸린 대표작과 작가의 목소리, 시인과 평론가들의 평가가 어우러진 전시는 마치 천경자 삶 전체가 하나의 무대처럼 구성돼 있다. 모든 전시 공간마다 천경자와 인연이 있거나, 해당 주제를 대표할 수 있는 외부 인사가 글을 남겼다. 서울특별시 오세훈 시장,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 극단생활 정중헌 대표,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실장, 삼성출판박물관 김종규 관장, 서울미술관 초대관장을 지낸 이주헌 미술평론가 등이 참여해, 각기 다른 시선으로 천경자의 화업을 조명했다. 이들의 글은 전시를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든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천경자 선생님이 1969년 신문회관에서 전시할 때 나는 소품 한 점을 갖고 싶어 좀 깎아달라고 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다. 1970년 4월 4일 현대화랑을 개관하는 날 바로 그 작품, '하와이 가는 길'을 손수 보자기에 싸 오셔서 선물로 주고 가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긴 생머리에 우아하게 잘 어울리는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택시를 잡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평생 자가용 한 번 타지 않으셨다. 1990년 현대화랑 20주년 축하 글에서 “화랑이란 화가라는 태아의 탯줄이요, 태반이라며 많은 화가들을 배출해 주었으면 한다”며 나를 격려하시던 선생님이 새삼 그리워진다. (갤러리현대 회장 박명자)[[[[:newsis_inyoung_center_end:]]]] '내 찬란한 전설의 101페이지'라는 타이틀로 마지막 방을 장식한 공간의 영상에서 그의 육성이 울린다. “그림 그리고 죽어야 되겠어요.” 관람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이다. 전시 공간마다 그림을 그리고 있고, 활짝 웃고 있는 젊은 천경자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실감케한다. 이번 특별전은 단순 회고전을 넘어 귀환의 축제를 지향한다. 11월 중순에는 ‘데일리아트’와 함께하는 '길 위의 미술관' 투어가 열린다. 천경자가 살며 작업했던 서울 서촌을 직접 걸으며, 교유했던 문인·예술가들의 흔적과 공간을 되짚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12월 6~7일에는 서울미술관에서 연극 '슬픈 전설의 화가'가 상연된다. 무대 위에서 천경자의 생애와 예술을 다시 만나게 되는 자리로, 전시와 공연이 어우러져 ‘위대한 귀환’을 기념하는 축제가 될 예정이다. 서울미술관은 관람객을 위해 무료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 따뜻한 목소리의 이금희 아나운서가 천경자의 주요 작품을 소개하고, 소설가 박경리가 남긴 헌사 '천경자를 노래함'을 낭송한다. 여기에 안 회장이 직접 녹음한 ‘모시는 글’이 담겨, 천경자 전시를 개최한 진심을 전한다. [[[[:newsis_inyoung_left_start:]]]]1998년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간 천경자는 2003년 뇌일혈로 쓰러져 길고 지난한 투병생활을 시작한다. 2015년 8월 6일, 한국 문화판을 뒤흔들고 호령 치던 여걸 천경자는 91페이지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모험가, 트렌드 세터, 도발적인 러브스토리, 사후까지 이어진 숱한 스캔들까지. 화려한 삶을 뒤로 천경자는 한줌의 재가 되어 생전에 사랑했던 강아지들과 산책하던 뉴욕 허드슨 강가에 뿌려진다.[[[[:newsis_inyoung_left_end:]]]]천경자가 생전에 스스로를 '슬픈 전설'이라 불렀던 말은 결국 씨가 되어 그의 삶을 덮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절필까지 가져온 위작 논란 그 슬픔을 넘어 새로운, 찬란한 전설의 시작을 선언한다. 사회에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화가, 베트남전 최초의 여성 종군 작가, 1969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림을 남긴 방랑자. 그리고 맛깔나는 글을 남긴 수필가로도 기억되는 한국 채색화의 거장. 다시 보니 K-아트의 선봉이자 대장부다. 천경자가, 천경자 했다. 작품으로 보여준 이번 전시가 이를 증명한다. '천경자는 한국 미술사의 영원한 전설'이다. 전시는 2026년 1월 25일까지 열린다. 2025/09/23
1000억 대 프리즈 vs 8만 명 키아프…두 서울 아트페어의 명암 아트페어는 미술품을 모아놓고 세계 각국 갤러리들이 벌이는 전쟁터다. 자본주의의 최전선, 그 판은 결국 상위 2%가 좌우한다. ‘얼마에 팔렸나’라는 머니게임은 파워 작가를 거느린 메가 갤러리들의 잔치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자신 있게 판매 리스트를 내걸고, 동시에 작가를 알리는 데도 게으르지 않다. 서울은 지난 4~5일간 두 얼굴을 보여줬다. 프리즈 서울은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미국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품이 약 62억 원에 판매됐고, 현장에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딸 말리아가 직접 찾아와 응원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이벤트’로 소비된 셈이다. 특히 하우저앤워스는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브래드포드, 루이즈 부르주아, 이불 등 전속 작가들이 한국 미술관과 갤러리를 동시에 누비며, 미술관·갤러리·아트페어 3박자를 맞춘 전략적 행보를 펼쳤다. 이는 컬렉터를 겨냥한 철저한 맞춤 공략이자, 서울을 동시대 미술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신호다. 공식 매출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글로벌 메가화랑들의 수십억 원대 거래가 이어지며 총 1000억 원 이상이 오간 것으로 관측된다. 나흘간 7만 명이 몰리며 프리즈 서울은 ‘세계 미술 캘린더’에 확실히 이름을 올렸다. 5일간 열린 키아프는 해외 화랑 비중을 30%까지 끌어올리며 국제 아트페어로서 면모를 강화했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대만, 미국, 태국, 스페인 등 다양한 국가의 갤러리들이 참여해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8만2000명의 관객과 활발한 중저가 거래로 선전했지만, 여전히 프리즈의 그늘과 ‘체급 차이’라는 현실은 드러났다. 홍보에서도 온도차가 뚜렷했다. 프리즈 서울은 공격적 마케팅을 이어간 반면, 키아프는 알리기를 주저하는 ‘조심 마케팅’으로 분위기를 갈랐다. 행사 전 공동 기자회견에 이어 프리즈는 개막 직후 사이먼 폭스 CEO가 한국 기자들과 만나 판매 열기와 향후 전략을 강조했다. 반면 키아프는 VIP 응대에 치중하며, ‘프리즈 뒤를 따라가는 듯한 뒷북 이미지’를 남겼다. 사이먼 폭스는 “김혜경 여사의 방문은 매우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한국 미술 시장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정부에 간접적으로 먼저 화답했다. 이어 “미술 시장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전반적으로는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며 고가 매매 성과를 부각시켰다. 프리즈 서울 관련 기사는 개막 직후부터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공동 개최에서, 한국 화랑 30곳이 프리즈 서울에 입성한 것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는 프리즈의 치밀한 ‘서울 침공 전략’으로도 읽힌다. 12곳만 키아프에 동시 참가했고, 나머지 18곳은 키아프를 포기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프리즈 부스비는 1억5000만 원대, 키아프는 최대 8000만 원 선. 불황 속에서 두 곳을 모두 치르기엔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럼에도 화랑들이 프리즈를 택하는 건 글로벌 무대가 주는 ‘프리미엄 효과’ 때문이다. ‘빈익빈 부익부’ 속 한국 미술시장의 구조적 문제도 여전하다. 작품 판매 가격이 공개되는 순간 세무 추적을 우려해 갤러리들은 노출을 꺼린다. 화랑협회 측 역시 “구매자가 특정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가격 공개를 회피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프리즈는 판매 여부나 가격을 전면적으로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고급스러운 관례’로 포장한다. 글로벌 메가화랑들은 개별 세일즈 리포트를 언론에 흘리며 초고가 매매를 경쟁적으로 알린다. ‘얼마에 팔렸다’는 정보가 곧 뉴스가 되고, 다시 마케팅으로 환원되는 구조다. 한국화랑협회 이성훈 회장은 “프리즈 서울에서는 초고가 매매가 주목받았지만, 키아프는 국내 화랑 중심이라 수십만~수백만 원대 거래가 많아 화랑에는 실질적 도움이 된다”며 “올해는 부스 퀄리티가 높아지고 동선도 쾌적했다”는 평가를 전했다. 불황 속에서도 두 아트페어가 선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미술 소비가 ‘구매’에서 ‘경험’으로 전환되면서, 프리즈의 셀럽 효과와 키아프의 대중 관람객 유입이 흥행을 이끌었다. 아트바젤 홍콩의 불안정 속에 서울이 아시아의 새로운 허브로 자리 잡으며 해외 갤러리와 컬렉터의 발길도 집중됐다. 여기에 LG와 KB금융 등 기업 후원이 맞물려 시장의 버팀목이 됐다. 소비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VIP 프리뷰로 문을 열고, 셀럽과 세계 미술계 인사 명단을 공개하며 ‘위상이 높아진 행사’임을 과시했다. 특히 영부인과 연예인 방문 소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긴 줄이 늘어섰다. 전시장 앞 풍경은 이제 작품을 향한 경배라기보다, ‘맛집 줄’을 닮아 있었다. 미술은 더 이상 소유만의 영역이 아니다. 1인 가구의 확산, 스마트폰 속 무한한 이미지, 1만 원짜리 포스터와 굿즈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시대. 경험을 산다는 감각이 시장의 새로운 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트페어 피로감’은 뚜렷하다. 전 세계 도시마다 페어가 쏟아지고 풍경이 비슷해지면서, MZ세대는 ‘대형 쇼핑몰’ 같은 인식 속에 매력을 잃고 있다. 프리즈 서울이 막을 내리기도 전에 뉴욕에서는 아모리쇼가 개막했고, 컬렉터들은 다시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프리즈 서울은 이제 아트바젤 홍콩이 쥐고 있던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을 서서히 대체하고 있다. 2022년 키아프와 공동 개최로 출범해 서울을 글로벌 미술시장의 한 축으로 끌어올리며 관광까지 아우르는 문화 행사로 성장했다. 코엑스가 리모델링에 들어가지만, 프리즈와 키아프 모두 내년에도 코엑스 개최를 확정하며 서울을 중심 무대로 고수했다. 그러나 공동 개최는 내년 단 한 번만 남았다. 사이먼 폭스 프리즈 CEO는 “서울이 아시아 미술 허브로 도약하며 5년, 10년 이상 지속되기를 바란다”며 서울을 떠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미 약수동에 ‘프리즈 하우스’를 개관해 1년 내내 상설 전시를 열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면 키아프는 “회원들과 투표를 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원론적 답변만 반복하며 향후 행보를 저울질하고 있다. 세계 미술시장이 75조 원 규모로 추산되는 가운데, 1조 원 남짓한 한국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무대에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도 프리즈 서울의 성과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프리즈는 서울에 맞춰 전략적으로 튜닝됐다”며 “이제 프리즈 없이는 키아프가 공생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프리즈가 서울을 세계의 지도 위 축제로 새겨 넣을 때, 키아프는 여전히 계산기만 두드리며 그 곁을 서성인다. 아트페어는 그림을 보기만 하는 전시장이 아니라, 자본이 충돌하는 전쟁터다. 언제까지 우리는 ‘빈익빈 부익부’라는 낡은 위로에 안주할 것인가. 그 순간 권력은 외부 플랫폼에 집중된다. 이제 문제는 감상이 아니라 거버넌스다. 키아프가 가격·세금·홍보에서 표준을 세우지 못한다면, 내년 이후 서울 미술의 서막은 프리즈가, 본문은 해외 메가화랑이 써 내려갈 것이다. 서울은 빛났지만, 내일의 서술자가 프리즈만 된다면 한국 미술은 곧 들러리에 머물 것이다. 2025/09/08
김수자, 거울과 보따리 한국적 초현실로…SK 선혜원 개방 첫 전시 ‘보따리 작가’ 김수자(68)가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한옥에서 ‘호흡’한다.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였던 전통 한옥 선혜원(鮮慧院)이 문을 열고 첫 전시로 김수자를 초대해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 1.0’을 선보인다. 포도뮤지엄(총괄디렉터 김희영)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세계적으로 활동해온 김수자의 작품이 한국 전통 건축물에 설치되는 첫 사례이자, 그의 서울 복귀전이다. 지난 7월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 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한 김수자는 회화와 바느질,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집과 정체성, 그리고 인류 보편의 문제를 사유해 온 세계적 작가다. 1990년 첫 개인전 이후 ‘이동’과 ‘몸’을 주제로 전통 보따리와 영상, 설치,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왔다. ◆선혜원, 또 다른 보따리 2일 서울 삼청동 선혜원에서 만난 김수자는 “선혜원은 또 다른 보따리”라고 말했다. “‘경흥각의 문을 여는 순간, 이건 두말할 것 없이 거울 작업이라 내가 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통 건축과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1990년대 양동마을에서 시작된 보따리 작업 이후, 그는 줄곧 건축 속 새로운 설치를 꿈꿔왔다. “보따리의 건축적 해석이 이번 ‘호흡’의 출발점”이라는 설명처럼, 건축 자체는 하나의 보따리로 재해석되고 관객은 그 안에서 자연스레 퍼포머가 된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경흥각 바닥을 거울로 채운 '호흡–선혜원'(2025)은 수백 년 된 소나무로 만든 한옥의 천장, 서까래와 지붕을 반사시키며 실제와 허상이 겹쳐지는 체험을 만들어낸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관객은 거울 위를 걸으며 발 딛고 선 자리가 또 하나의 하늘이 되고, 자기 자신조차 허공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압도감을 마주한다. 조선시대 왕실의 품격을 간직한 전통 한옥 전각 경흥각은, 김수자의 거울 설치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흐르며 사유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작가는 “한옥 공간의 거울 작업은 외국인 관객이 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전통 건축이 품은 시간성과 거울 설치가 만들어내는 초현실적 압도감은 세계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한국적 초현실’이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을 ‘거울 왕국’으로 만들었던 '호흡'과는 또 다른 울림이다. ◆보따리, 기억의 껍질 김수자는 “거울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자기 자신은 비추지 않는다.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매체”라며, 이를 ‘펼쳐내는 바늘(Unfold Needle)’에 비유했다. 덮는 보따리와 펼치는 바늘 사이에서 인간은 감춤과 드러남 사이를 호흡한다. 그는 “‘호흡’은 결국 인간의 허스크(husk), 즉 몸의 기억과 삶의 흔적을 담는 껍질”이라며 “보따리와 호흡은 물질과 비물질, 기억과 시간, 삶과 패션(의복), 그리고 몸을 하나의 구조로 묶는 작업”이라고 덧붙였다. 삼청원 지하 복도에 놓인 3개의 '보따리', 독일 마이센 도자기와 협업한 '연역적 오브제–보따리'(2023), 평면 작업 '땅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2023) 등은 이러한 철학을 확장한다. 소박한 보따리는 결국 이주와 디아스포라, 삶의 전환기를 담아내는 이동식 보금자리다. 감싸는 행위는 곧 시간과 이동, 만남에 대한 명상이 된다. “숨 쉬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하는 증거다.” 김수자가 선혜원에서 펼친 '호흡'은 결국 우리 삶의 근원적 리듬을 되묻는다. 3일 개막하는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이어진다. ◆선혜원은?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로 출발해 인재 교육의 장으로 쓰이다, 2025년 4월 그룹 연구소 겸 컨벤션 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SK는 역사적 공간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선혜원 아트프로젝트’를 출범했고, 김수자의 개인전이 그 첫 무대를 장식했다. 무엇보다 SK가 전통 한옥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대 예술과 접목해 대중에게 개방한 것은 기업 문화공간의 모범적 사례로 읽힌다. 전통과 현대, 사적 공간과 공공의 영역을 이어주는 플랫폼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낸 셈이다. 한편 이번 김수자 전시는 ‘프리즈 서울’ 기간 지역 연계 행사 ‘삼청나잇’과도 연결된다. 4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선혜원을 야간 개방해 한옥의 정취 속에서 전시를 즐길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이 예정돼 있다.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열린다. 네이버에서 ‘선혜원’을 검색해 예약하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