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가 수신한 박종규 ‘영원의 코드’…"이집트 현재진행형 문명국" 이집트 기자 사막에 피라미드가 두 겹으로 서 있다. 뒤로는 7000년 전 석조 피라미드가, 앞으로는 빨강·노랑·파랑 3원색 구조물이 또 다른 피라미드의 윤곽을 그린다. 사각 프레임 안 삼각 구조물이 사막의 수평선을 가르고, 바닥에 박힌 아크릴 미러 조각은 돌처럼 빛을 튀긴다. 한국 작가 박종규의 신작 대지미술 ‘영원의 코드(Code of the Eternal)’가 고대 유산과 디지털 시대를 동시에 호출하는 순간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기자 피라미드(Pyramids of Giza)에서 가을마다 열리는 국제현대미술제 ‘포에버 이즈 나우(Forever Is Now)’가 15일(현지시간) 공식 개막했다. 아프리카·중동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야외 국제전으로 꼽히는 이 행사는 이집트 비영리 플랫폼 아르 데집트(Art D’Égypte)가 주최하고, 이집트 외교부·문화부·관광유물부의 후원과 유네스코 협력으로 열린다. 올해는 10개국 작가 10명(팀)이 참여했으며, 한국 작가로는 박종규가 유일하다. 피라미드 앞에서 신작을 선보이는 것은 지난해 강익중에 이어 두 번째다. ◆피라미드의 수학, 사막 위 디지털 구조로 다시 서다 “피라미드는 한국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역사·언어·문명 간의 지속적인 연결을 예술로 표현하기에 완벽한 장소다." 박종규의 ‘영원의 코드’는 피라미드 고유의 기하학적 비례, 한국·이집트 고대 서사를 디지털 언어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빨강, 노랑, 파랑색의 정사각형 철 프레임 속 삼각형 구조는 실제 피라미드의 각도와 높이, 변 길이에서 도출한 수학적 수치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겉으로는 추상적이지만, 그 안을 이루는 수열은 임의로 뽑은 숫자가 아닌 ‘고대 피라미드의 비례 코드’다. 삼각의 구조물 앞 모래 위에는 약 1000개의 아크릴 미러 점(dot)이 흩어져 있다. 햇빛을 받으면 픽셀 노이즈처럼 반짝이는 이 점들은 작가가 쓴 시 ‘단군이 파라오에게 보내는 상상의 편지’를 모스 부호로 암호화한 결과물이다. 박종규는 이를 “감상용 텍스트가 아니라, 피라미드가 별자리를 통해 신에게 말을 걸던 것처럼 ‘위에서 보라고 쏘아올린 교감의 언어’”라고 설명했다. 설치물 옆 비석에는 이 암호가 영어·아랍어로 번역돼 새겨져 있다. 현장에서 만난 그는 피라미드 앞에서 작품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두고 “시간이 겹쳐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수천 년 전의 기하학과 제가 만든 디지털 구조가 한 화면처럼 이어져, 피라미드가 제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1년 전 답사에서 이미 전체 구조를 머릿속에 그려두었지만, 실제 설치 과정에서는 사막의 모래바람과 현지 제작 방식의 차이를 견디며 “이집트라는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했다”고 말했다. 사막 위에 놓인 기하학 구조와 바닥을 이루는 도트 언어는 그 자체로 한국과 이집트, 고대와 디지털, 신화와 정보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장면을 만든다. 박종규는 동양적 사고가 “보이지 않는 질서와 순환을 읽는 감각”에 기반한다며, 이번 작품에 단군 신화의 문장을 모스 부호로 암호화해 넣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아날로그 언어를 디지털 언어로 전환해, 시공간을 초월한 교감 언어로 다시 쏘아 올리는 장치”라고 정의했다. “한국이 디지털 문명의 중요한 리더로 성장한 지금, 그 감각과 언어를 피라미드라는 인류 문명의 원점 앞에서 다시 발화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박종규 작품을 본 김윤섭 미술평론가는 박종규 작업의 ‘언어성’을 짚었다. “피라미드에서 추출한 숫자열과 단군 신화를 모스 부호로 암호화한 구조는 단순 설치가 아니라 문명 간 언어 교환에 가깝다”며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시대 전환의 경계에서 양쪽을 중계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말했다. 김 평론가는 “모스 부호처럼 시대·국가·종교를 초월한 공통 기호를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 점이 독창적”이라며 “디지털 언어가 결국 1과 0의 구조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조형적으로 환기시키는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번 작품은 전시용 이벤트가 아니라, 디지털 세계를 기반으로 축적해온 박종규 작업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깊이를 더한다”고 덧붙였다. ◆ 박종규 작품이 ‘미래 문명’의 언어가 되는 이유 이규현 큐레이터는 올해 '포에버이즈 나우' 전시의 핵심 키워드를 “디지털과 영원”이라고 규정하며, 박종규가 이를 가장 명확히 구현한 작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피라미드의 수학, 디지털 노이즈, 단군 신화가 한 구조로 엮인 작업”이라며 “고대 문명 한가운데서 K-아트가 자신만의 언어로 발언하는 드문 장면”이라고 말했다. 이규현 큐레이터는 사실상 이집트 현장에서 한국 미술의 ‘민간 외교관’이다. 지난해 강익중의 ‘한글 신전’에 이어 올해 박종규의 ‘영원의 코드’까지, 그는 한국 작가들을 최초로 피라미드 앞으로 세워 ‘K-아트’를 고대 문명 중심부로 진입시켰다. 그는 “7000년 문명과 현대예술을 연결하는 일, 그 사이에 한국 예술을 세우는 건 국가 브랜드 확장과 직결된다”고 했다. 이어 “이집트는 단 한 번도 변두리였던 적이 없는 문명국이며, 지금도 지정학·문화·종교 모든 측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나라”라며 “한국 예술이 세계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집트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명의 관문’”이라고 말했다. ◆ 고대 문명(이집트) × 미래 문명(한국)…이집트가 노린 큰 그림 이집트가 피라미드를 문화외교 무대로 삼는 데는 분명한 전략이 있다. 기자 피라미드 단지는 2023년에만 1470만 명이 찾았고, 이는 이집트 전체 관광객 수와 거의 동일하다. 2024년에는 방문객이 약 1570만 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는 2028년까지 관광객 30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라미드 앞에서 국제 현대미술제를 연다는 것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다. 문화·관광·국가 브랜드를 하나로 묶어 세계에 발신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올해 개막식은 세 개의 피라미드가 동시에 보이는 지점을 특별 개방해 진행됐다. 지난해 스핑크스 앞 개막보다 훨씬 강력한 상징 자본을 활용한 셈이다. ‘포에버 이즈 나우(Forever Is Now)’는 이 전략의 최전선에 배치된 국제전으로, 이집트는 고대 문명의 절대적 상징 위에 현대미술과 각국 작가를 올려놓으며 “이집트는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 문명국”임을 증명하려 한다. 최근 개관한 ‘이집트 대박물관(GEM)’과 피라미드 현대미술제의 정례화는 이러한 국가 전략을 뒷받침하는 수단이다. 관광 수입·해외 송금·수에즈운하 통행료라는 기존 경제 구조의 한계를 넘어, 고대 문명을 21세기형 문화산업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이집트를 모르면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문명의 원점에서 벌어지는 문화외교 ‘포에버 이즈 나우’는 단순한 야외 설치전이 아니라, 문명의 원점과 오늘의 예술을 직접 연결하는 문화외교의 장이다. 전시를 주최한 나딘 압델 가파르(Nadine Abdel Ghaffar) 아르 데집트 설립자는 “포에버 이즈 나우는 고대 이집트 역사와 현대미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글로벌 대화의 장”이라고 설명했다. 고대 피라미드가 더 이상 ‘과거의 박물관’이 아니라, 세계 각국 작가들이 참여하는 문화외교 무대로 재가동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맥락에서 최병선 주이집트 총영사는 “이집트를 알지 못하면 세계사의 축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이곳은 7000년 문명의 발원지이자, 지금도 아랍권 최대 인구(1억 2000만 명)를 가진 지정학의 중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흔히 알려진 5000년보다 더 깊은, 선사시대를 포함한 7000년의 문명 연속성을 품은 나라가 바로 이집트”라며 “처음부터 중심부였던 문명국이 다시 글로벌 예술의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10개 언어가 말하는 ‘영원’…피스톨레토·살라 엘 마스리 등 참여 올해 전시에는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VHILS, 리사이클 그룹, 나딤 카람, 브라질의 아나 페라리, 프랑스–베냉의 킹 우데크핑쿠, 이집트 작가 살라 엘 마스리 등이 함께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피스톨레토는 아르테 포베라의 대표 작가로, 반영(reflection)과 참여를 강조해온 인물이다. 사막에 놓인 그의 스테인리스 구조물과 둘레의 바위들은 일종의 현대적 제의 공간처럼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드러낸다. 피라미드의 거대한 석조 구조와 대구를 이루며 고대의 무게와 현대의 가벼움이 교차하는 경계를 만든다. 특히 카이로 출신 작가 살라 엘 마스리의 설치는 이번 전시의 ‘신화적 무게’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고대 왕이 쓰던 반지를 거대한 스케일로 확대한 구조물로, 정면에는 커다란 환(環)이 뚫려 있다. 관람객이 그 안쪽에 서면 양옆에서 마아트(Maat)가 심장을 재는 고대의 심판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집트에서는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워야 피라미드 너머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었다. 엘 마스리는 이 오래된 사후 세계의 서사를 현대 조각 언어로 다시 불러내 사막 위에 거대한 ‘균형의 눈’을 세웠다. 박종규의 이번 피라미드 프로젝트는 씨아이에스(CIS)와 공익재단 아이프칠드런(AIF)의 후원이 더해져 완성됐다. 기술 산업과 공익 예술이 함께 만든 이 구조물은, 고대 문명의 발원 앞에서 또 하나의 ‘미래 언어’를 쏘아 올렸다. 해 질 무렵, 피라미드는 신화의 출구처럼 빛났다. 사막의 바람이 잠시 멎는 사이, 10개의 작품은 각각의 방식으로 ‘영원’을 말했고, 피라미드는 그 모두를 묵묵히 받아 적는 듯했다. 전시 제목 ‘포에버 이즈 나우(영원은 지금)’은 그 순간 더 이상 전시의 표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가 미래에게 보내는 재발신된 메시지, 지금 이곳에서 다시 가동되는 문명의 선언에 가까웠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이어진다. 2025/11/16
'돌의 틈에서 빛으로'…알록달록 돌아온 박은선, '치유의 공간' 알알이 매달려 기둥을 이룬 구슬이 색색의 빛을 낸다. 멀리서 보면 알사탕처럼 가볍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묵직하다. 대리석이다. 단단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달라졌다. “그때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 깨달았어요.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결국 작품뿐이었죠.” 코로나19로 세상이 멈췄던 시기, 조각가 박은선은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의 집에 머물며 가족과 함께 ‘멈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절망의 시대 속에서 희망을 전하기 위해 돌에 빛을 심기 시작했다. ‘무한 기둥–확산(Colonna Infinita–Diffusione)’은 조명이 되어 빛을 낸다. 대리석 구 내부에 LED 조명을 넣어, 돌의 결 사이로 은은히 스며드는 빛을 구현했다. 자연석이 인공의 빛을 걸러내며 만들어내는 조각의 광채는 부드럽다. 작가는 “가짜가 아닌 진짜 희망의 빛”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 조각은 사람과 나누는 일”이라 말한다. 팬데믹 이후 그의 작품은 ‘무한’보다 ‘공유’를 향했다. “조각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겁니다. 나 혼자만의 세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는 세계로 열려야죠.” 11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조각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그리고 존재를 통해 다시 희망을 이야기했다. 12일부터 여는 박은선 개인전은 2023년 이후 국내에서 3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자, 2008년 인사아트센터 전시 이후 17년 만에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다. 대리석, 브론즈, 알루미늄으로 변주한 조각 작업들을 비롯한 조각작품 22점과 회화 작업 19점까지 총 41점을 선보인다. ◆ 돌의 틈, 숨통이 되다 박은선은 대리석과 화강암을 층층이 쌓고 깨뜨려 틈을 만든다. 그에게 그 틈은 단절이 아니라 삶의 숨통이자 빛의 통로다. “멀쩡한 돌을 깨뜨리고 틈을 만드는 건 나뿐일 겁니다. 하지만 그 틈이 바로 생명의 숨입니다.” 전시장 입구에는 높이 3m 30cm의 대형 신작 ‘Generation–Evoluzione(생성–진화)’가 우뚝 서 있다. 균형과 상승의 조형미를 품은 이 조각은 인간의 성장과 회복을 상징하며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세 개의 구가 세워진 화강암 조각은 무거워 보이지만, 각각 따로 움직이며 아슬아슬한 긴장을 만든다. 대표작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은 두 가지 색의 돌을 반복적으로 중첩해 만들어진 수직적 조형물이다. 그가 쌓고, 깨고, 다시 붙이는 행위를 반복하는 이유는 균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 위해서다. 번갈아 쌓인 대리석의 줄무늬는 리듬이 되고, 일부러 만든 틈은 해방의 공간이 된다. ◆ 벽의 여백을 본 조각가, 회화를 시작하다 “조각이 공간을 다 채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벽이 비어 보였어요.” 그가 회화를 시작한 이유다. 박은선에게 캔버스는 또 하나의 돌, 또 하나의 조각 재료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보다 던지고, 붙이고, 뜯어내며 조각하듯 회화한다. 이번 전시의 먹화 신작 ‘Untitled’는 수직적 기둥의 형태를 평면에 옮겨온 작품이다. 마(麻)로 짠 캔버스 위에 먹이 자연스럽게 번지며, 물성과 정신성이 교차하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먹의 농담이 번지며 시간의 흔적과 물질의 감각이 교차하고, 돌의 무게가 사라진 자리에는 여백의 차분한 호흡이 남았다. ◆ 이탈리아가 사랑한 한국 조각가 1965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박은선은 199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카라라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이후 30년 넘게 피에트라산타에 머물며 작업해왔고, 지금은 이탈리아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콘티니 갤러리의 전속 작가다. 피렌체, 로마, 피에트라산타 등 주요 도시의 광장에서 개인전을 열며 ‘이탈리아가 사랑한 한국 조각가’로 불린다. 그는 “절벽 끝에 서 있는 듯한 순간이 많았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버티다 보니, 결국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대표작 ‘무한 기둥’은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한 ‘2024–2025 한·이 상호문화교류의 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로마 곳곳에 설치되어 국가 간 문화교류의 상징이 되었다. 지난 5월, 대리석 조각의 본산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중심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 ‘Atelier Park Eun Sun'을 열었다.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설계했으며, 이탈리아에 한국 작가의 이름을 딴 공간이 세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한 2026년 10월에는 전라남도 신안 자은도에 마리오 보타와 협업한 ‘인피니또 미술관(Infinito Museum)’이 개관할 예정이다. ◆ 치유의 공간에서 빛으로 전시 제목 ‘Spazio della Guarigione’는 ‘치유의 공간’을 뜻한다. 박은선은 단단한 돌의 균열과 틈에 빛을 스며들게 하며 인간 내면의 회복과 성장, 그리고 존재의 숨결을 은유한다. 그의 조각은 멀리서 보면 묵직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가볍다. 돌이지만 움직이고, 소리까지 난다. 무게와 균형, 정적과 동적의 경계가 한 몸 안에서 반전처럼 공존한다. 박은선은 단단한 돌 속에서도 ‘움직이는 생명’을 보여준다. 야외에는 5m 높이의 ‘무한 기둥–증식(2019)’과 ‘무한 기둥–연속(2025)’ 등 대형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가나아트센터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박은선은 “내 작품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숨쉬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조각은 이제 시간의 기록을 넘어, 나눔과 공유로 인간의 존재감을 실천하는 희망의 조각이 되었다. 전시는 2026년 1월 25일까지 열린다. 2025/11/11
‘조용한 진실의 표면’…변웅필 ‘아무렇지 않은 날들’ 하루의 빛이 물감 위로 스며든다. 붓은 천천히 움직이고, 공기마저 멈춘다. 서울 삼청동 호리아트스페이스에 걸린 변웅필의 신작들은 조용하지만 고도의 집중으로 빚어진 시간의 표면이다. 그는 스스로를 “특별할 것 없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결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그 안에는 수천 번의 호흡, 끝없는 반복, 그리고 ‘거짓말하지 않는 회화’에 대한 단단한 신념이 스며 있다. ◆선의 통제, 면의 고요 “선을 남기는 선이 면화(面化)되는 거예요. 얇은 면이 선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죠.” 변웅필의 회화는 선과 면의 경계를 해체한다. 유화의 점성과 두께 때문에 한 번에 그을 수 없기에 그는 수십 번의 반복으로 선을 완성한다. “막 그리는 건 싫어요. 통제하고 싶어요.” 그에게 선은 흔적이 아니라, 수련의 궤적이다. 그의 화면에는 서로를 마주보거나, 가볍게 부비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파스텔톤으로 눌러 앉은 얼굴들은 따뜻하지만 묘하게 긴장돼 있다. 퀴어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그것은 성적 코드라기보다 관계의 온도에 관한 회화적 실험이다. 서로의 경계를 흐리며 맞닿은 얼굴들은 결국 ‘나’와 ‘너’의 거리를 탐색하는 작가의 방식이다.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다. 변웅필의 인물들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얼굴들’이다. 하루를 다 버티고도 여전히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의 초상, 그게 얼마나 묵직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진실의 회화, 노동의 리듬 “화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 뿐이에요.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아야죠.” 변웅필은 붓질하는 사람이다. 화가로서의 정직한 태도는 화면에 고스란히 남는다. 그의 화면은 방향이 일정하고, 얼룩이 없다. 얼룩 하나, 흔적 하나 없는 그의 평면은 진실 그 자체의 표면이다. 매끈한 표면은 우연이 아니라 수천 번의 의도다. 그는 말한다. “화가니까, 내가 만족해야 마감할 수 있어요.” 변웅필에게 회화는 하루의 노동이자 삶의 리듬이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하루의 공기와 색을 마주하는 일. 그것이 그에게는 예술이고 생이다. ◆붓질하는 노동자, 장인의 정신 그의 진심은 회화의 태도로 이어진다. 작업실에서 하루에도 여러 개의 붓이 사라진다. “붓 하나로 두 번 못 써요. 다 쓰고 부러뜨릴 때 쾌감이 있어요.” 그 쾌감은 낭비가 아니라 소진의 미학이다. 그는 캔버스도, 나무 액자도 직접 짠다. “짜고 나면 운동 끝난 다음 같은 기분이에요. 내가 작가로서 뭔가를 해냈다는 감정이 들어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 손이 닿아야 완성되는 일. 그에게 붓질은 노동이고, 마감은 신앙에 가깝다. ‘그림보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 변웅필은 묵묵히 화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타 작가에서 중견 작가로 성장했지만, 그 발 아래는 오히려 더 단단히 정박돼 있다. ◆아무렇지 않은 것들의 존엄 이번 전시에는 인물과 사물이 함께 등장한다. ‘SOMEONE’이 얼굴이었다면, ‘SOMETHING’은 이름 없는 사물이다. 둘 다 색과 형태를 담는 그릇일 뿐이다. 그는 그릇을 구별하지 않는다. 모두가 동등하게 존재하는, 아무렇지 않은 세계다. “변웅필 작가는 4년의 시간 동안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회화 언어를 발전시켜왔다.” 호리아트스페이스 김나리 대표는 “이번 전시는 ‘SOMEONE’에서 ‘SOMETHING’으로 확장하는 전환점”이라고 했다. 전시장 한편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너는 너 대로 나는 나 대로 아무렇지 않은.” “마주 불어오는 바람이 아무렇지 않은.” 변웅필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무심함이 아니라 존중의 상태다. 비교도, 위계도, 욕망도 없이 존재들이 공존하는 세계. 그의 그림은 그 세계의 기록이다. ◆아무렇지 않은 날들의 선언 이번 전시 ‘아무렇지 않은 날들’은 그가 견고하게 지켜온 진실의 회화에 대한 선언이다. 특별하지 않기에 진솔하고, 반복되기에 더 깊어지는 색의 리듬. 그는 말한다. “진짜 별거 아닌 걸로 봐주면 좋겠어요. ‘편하다’, ‘좋다’, 그 정도면 돼요.” 감동을 받든, 비판을 하든, 모두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의 그림은 관객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보고 싶은 대로 봐요. 그저 보면 돼요. 그것이면 충분해요.” 전시는 12월 6일까지 열린다. 2025/11/06
아트바젤·프리즈 사막 위의 미술전쟁…오일머니를 컬처머니로 홍콩이 지고, 서울이 뜨자 이제 세계 미술의 무대는 사막으로 옮겨가고 있다. 세계 양대 아트페어, 아트바젤(Art Basel)과 프리즈(Frieze)가 잇따라 중동 진출을 공식화하면서, ‘사막 위의 미술전쟁’이 예고됐다. 아트바젤은 지난 5월 카타르스포츠투자청(QSI)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내년 2월 카타르 도하 문화지구 ‘므쉐이렙(M7)’에서 ‘아트바젤 도하(Art Basel Doha)’를 출범한다고 밝혔다. 이어 5개월 뒤인 10월 13일, 프리즈는 아부다비 문화관광부(DCT Abu Dhabi)와 손잡고 2026년 11월 ‘프리즈 아부다비(Frieze Abu Dhabi)’ 개최를 공식화했다. 두 페어의 대결은 단순한 시장 확장이 아니라, ‘포스트 아시아’ 시대의 문화 패권 경쟁으로 번지고 있다. ◆ 지는 홍콩, 뜨는 서울 한때 ‘아시아 미술의 수도’로 군림했던 홍콩의 전성시대가 저물고 있다. 정치적 불안과 규제 강화, 임대료 급등, 중국 본토 컬렉터의 이동 제약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메가 화랑들이 잇따라 철수했다. 페이스(Pace)는 H Queen’s 빌딩의 전시장 운영을 종료했고, 페로탕(Perrotin)은 빅토리아독사이드 공간을 닫았다. 레비 고르비 데이안(Lévy Gorvy Dayan) 역시 2024년 말 홍콩 지점을 폐쇄했다. 이들은 “홍콩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며 서울·도쿄·싱가포르로 중심을 옮기는 추세다. 서울은 그중에서도 단연 중심이다. ‘프리즈 서울’의 성공적 정착은 아시아 미술시장의 활력을 입증했고, 그 에너지가 이제 중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오일머니에서 컬처머니로…사막의 르네상스 중동은 지금 ‘석유에서 예술로’의 대전환을 추진 중이다. 루브르 아부다비는 지난해 140만 명의 관람객을 모으며 중동 문화 르네상스의 상징이 됐다. ‘구겐하임 아부다비’는 2026년 개관을 앞두고 있으며, 도하의 문화복합공간 M7은 카타르의 ‘국가비전 2030’ 아래 창조산업의 허브로 떠올랐다. 리야드–도하–아부다비로 이어지는 ‘사막의 예술 삼각축’은 세계 미술시장의 새로운 전선이다. 중동의 국부펀드와 문화정책은 ‘오일머니’를 ‘컬처머니’로 전환하며, 글로벌 미술의 판을 새로 짜고 있다. ◆프리즈, 아부다비 아트 인수…“아트바젤보다 한발 늦고, 한층 깊게” 프리즈는 단순히 새 페어를 여는 것이 아니라, 기존 ‘아부다비 아트(Abu Dhabi Art)’를 통째로 인수했다. 2008년 창설된 아부다비 아트는 11월, 역대 최대인 140개 갤러리가 참가하는 마지막 독립 버전을 선보인 뒤 2026년부터 공식적으로 ‘프리즈 아부다비’로 리브랜딩된다. 작년 가을에는 아트바젤이 약 2000만 달러 인수설로 협상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결국, 프리즈가 그 경쟁에서 승리한 셈이다. 프리즈의 이번 행보는 ‘문화 리더십’을 강화하려는 아부다비 문화관광부(DCT Abu Dhabi)의 전략과 맞물린다. DCT 회장 모하메드 칼리파 알 무바라크는 “2008년 창립된 아부다비 아트의 자연스러운 진화”라고 밝혔다. ◆ 프리즈의 새 주인, 오일머니의 자본 이번 인수 뒤에는 헐리우드 거물 아리 엠마누엘(Ari Emanuel) 의 등장이 있다. 그는 올해 5월, 프리즈를 엔데버(Endeavor)로부터 인수하고 ‘마리(MARI)’라는 새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프리즈 외에도 마드리드·마이애미 테니스 오픈, 자동차 경매사 Barrett-Jackson 등을 소유한다. 파이낸셜타임즈등 외신에 따르면 엠마누엘은 20억 달러(약 2조7000억 원) 의 투자금을 확보했으며, 투자자에는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와 놀랍게도 카타르투자청(QIA) 이 포함됐다. 즉, 프리즈의 뒤에는 이미 오일머니가 흐르고 있다. ◆아트바젤 도하 vs 프리즈 아부다비…사막 위의 예술전 아트바젤 CEO 노아 호로비츠는 “도하는 중동·북아프리카 예술의 새로운 허브가 될 것”이라며 “작가와 갤러리, 컬렉터가 교차하는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프리즈 CEO 사이먼 폭스는 “아부다비의 문화적 리더십과 예술에 대한 헌신이 이번 협력의 토대”라며 “프리즈의 글로벌 플랫폼으로 지역 예술을 세계 무대로 확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페어 모두 문화 외교·투자·브랜드·관광이 결합된 초국가적 프로젝트다. 아트바젤이 도하에서 문을 열고, 프리즈가 아부다비를 이어받는다. 결국 사막 위에서 맞붙는 건 두 ‘예술 기업’이지만, 그 뒤에는 국가 단위의 전략과 자본이 맞선다. ◆그리고 서울…아시아의 교차점 사막으로 향하는 미술시계 속에서도, 서울은 여전히 아시아의 교차점이다. ‘프리즈 서울’이 만들어낸 활력은 아시아 시장의 중심을 다시 북쪽으로 끌어올렸고, 그 에너지는 이제 사막까지 번지고 있다. 결국, 사막 위에서 춤출 것은 예술이 아니라 자본이다. ‘사막 위의 미술전쟁’은 글로벌 자본과 문화정책, 예술 생태계가 얽힌 새로운 패권의 무대다. 오일머니가 합세한 이 자본주의의 신전(新殿)에서, 예술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트페어는 더 이상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다. 그곳은 세계가 움직이는 속도와 욕망이 교차하는, 가장 뜨거운 현장이다. 2025/10/14
‘슬픈 전설’ 천경자, ‘찬란한 전설’ 첫 페이지 열었다 다시, '천경자'다. 한국화 거장 천경자(1924~2015) 작고 10주기를 맞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서울미술관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가 '위작 논란'의 그림자를 넘어, 진짜 천경자의 얼굴을 마주하게 한다. 2006년 갤러리현대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이후 20년 만에 열리는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23일 서울시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만난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은 “이번 전시는 정말 쉽지 않았다. 생전 ‘고약한 화가’라는 소리를 들었던 천경자가 지금도 여전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 기자가 ‘천경자의 재조명은 시효의 끝에 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전시를 준비했다”며 “흔쾌히 작품을 내준 소장가들과 미술관, 옥션사에 감사를 전하지만, 두 번은 하기 어려운 전시”라고 강조했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위작 논란’, ‘미인도 사건’이라는 말은 더 이상 천경자 작가를 따라다니는 단어, 수식어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건은 91페이지 책의 한 장에 기록된 하나의 해프닝. ,선생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떠나셨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천경자 작가를 더 이상 '위작 논란'이나 '한(恨)을 그리는 여자 작가'가 아닌 근대사의 큰 풍랑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해 낸 한 명의 위대한 예술인으로 추앙하고자 합니다."(서울미술관 )[[[[:newsis_inyoung_center_end:]]]] 안진우 서울미술관 이사장은 “유족 모두가 어머니를 향한 향수를 짙게 지니고 있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전시를 준비했다”며 “천경자를 더 이상 ‘위작 논란’이나 ‘미인도 사건’이 아닌 한 명의 예술가로 바라봐 달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천경자는 위작 논란과 유족 반발로 인해 대규모 회고전이 쉽지 않았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상설 전시장이 있지만, 지난해 탄생 100주년 전시는 고향 전남 고흥에서만 열려 거장의 위상에 비해 아쉬움이 컸다. 30여 년간 한국 미술계의 아픈 그림자였던 ‘미인도’ 위작 논란은 최근 대법원 판결로 유족 패소가 확정되며 법적 공방에 종지부를 찍었다. 법원이 진위를 직접 판단한 것은 아니지만, 검찰 감정의 정당성을 인정한 셈이다. 이제는 ‘위작’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예술가 천경자의 작업 세계 자체로 돌아가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38억 원에 낙찰된 이중섭 ‘황소’를 소장한 국내 미술계 큰손이자 서울미술관 설립자인 안 회장은 천경자 작품도 12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2, K옥션 2019년 9억 원 낙찰) 역시 그의 소장품이다. 그는 “천경자의 91페이지 인생은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남겨야 한다”며 "논란이 된 '미인도'를 과감히 빼고, 거장의 삶과 예술을 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대표 채색화 80여 점을 한자리에 모으는 과정에서 아쉬운 일화도 있었다. 대여를 추진하다 끝내 불발된 작품이 있다. 붉은 색채가 강렬한 '볼티모에서 온 여인' 작품이다. 이전에 눈여겨본 작품이었지만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서경배 회장 컬렉션에 들어가 아쉬움이 남았다. “꿈속에도 나온 작품”이었던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 빌려오려 했으나 최종적으로 무산됐다. 대신 서 회장은 ‘사월이’를 보내 전시에 힘을 보탰다. 안 회장은 해당 이미지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내놓지 않았다. 그는 “그림도 다 인연 따라 움직인다”는 철학으로 그 아쉬움을 받아들였다. 천경자의 작품은 경매 시장에서도 높은 가치를 입증해왔다. ‘초원Ⅱ’(1978)는 2018년 20억 원에 낙찰돼 작가 최고가를 기록했고, ‘정원Ⅱ’는 17억 원, ‘테레사 수녀’는 8억8000만 원, ‘막은 내리고’는 8억6000만 원, ‘놀이’는 8억3000만 원에 거래됐다. 여성 화가로서 드물게 10억 원대 시장을 형성한 위상이다. ◆20년 만의 회고전, 150여 점 집결 이번 전시는 작가의 대표 화업인 채색화 80여 점을 비롯해 저서, 도서 장정, 성장 과정과 제작 노트, 여행기 사진과 편지 등 150여 점의 아카이브를 망라했다. 서울미술관은 1000평 규모 제1전시장을 8개 파트로 구성했다. 자화상·가족, 여인의 얼굴, 여행과 풍경, 문학과의 대화, 한과 슬픔, 영혼과 종교, 화려한 여정, 그리고 추모 공간으로 나눴다. 관람객이 직접 작가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참여 존도 마련했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세상을 비추는 여인 鏡子 전라도 남단 고흥에서 태어난 천옥자(千玉子)는 1941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경자 (鏡子)로 이름을 바꿨다. 더 넓은 세상을 비추는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채색 인물화와 풍물화로 대별되는 천경자 화백의 예술세계는 1969년을 기점으로 잡아 그 이전을 꽃과 여인을 주로 한 채색화 시기, 그 이후는 세계를 기행하며 스케치해서 그린 풍물화 시기로 볼 수 있다..(중략) 천경자 화백은 45세부터 70세까지 열세번에 걸쳐 해외 스케치 여행에 나섰다. 40대 후반에 타히티에서 시작해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50대에 사하라와 킬리만자로의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횡단했으며, 5년 후 다시 정열의 땅 인도와 신비의 땅 중남미 기행에 나서 아마존 밀림지대까지 누볐다. 미국과 영국 여행에서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 화폭에 담았다.(극단생활 정중헌 대표)[[[[:newsis_inyoung_center_end:]]]] [[[[:newsis_inyoung_center_start:]]]]근현대에 이르러 탁월한 여성 미술가들이 앞다퉈 나오기 시작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세계 미술계의 흐름을 그 선두에서 이끌어가고 있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성차별적인 문화와 편견이 강고했던 시기에도 온몸으로 이에 저항하며 이른바 ‘유리 천장’을 허문 위대한 선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단연 천경자를 으뜸으로 떠올리게 된다. 천경자는 예술가로서, 여성으로서, 나아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평생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아름다움과 진실을 고집스럽게, 비타협적으로 그려나간 예술가다. 그것만 해도 그는 우리 문화사가 찬사를 보내야 할 위대한 업적을 쌓은 존재라할 수 있다. (평론가 이주헌 전 서울미술관장)[[[[:newsis_inyoung_center_end:]]]] 전시장 벽에 걸린 대표작과 작가의 목소리, 시인과 평론가들의 평가가 어우러진 전시는 마치 천경자 삶 전체가 하나의 무대처럼 구성돼 있다. 모든 전시 공간마다 천경자와 인연이 있거나, 해당 주제를 대표할 수 있는 외부 인사가 글을 남겼다. 서울특별시 오세훈 시장,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 극단생활 정중헌 대표,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실장, 삼성출판박물관 김종규 관장, 서울미술관 초대관장을 지낸 이주헌 미술평론가 등이 참여해, 각기 다른 시선으로 천경자의 화업을 조명했다. 이들의 글은 전시를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든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천경자 선생님이 1969년 신문회관에서 전시할 때 나는 소품 한 점을 갖고 싶어 좀 깎아달라고 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다. 1970년 4월 4일 현대화랑을 개관하는 날 바로 그 작품, '하와이 가는 길'을 손수 보자기에 싸 오셔서 선물로 주고 가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긴 생머리에 우아하게 잘 어울리는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택시를 잡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평생 자가용 한 번 타지 않으셨다. 1990년 현대화랑 20주년 축하 글에서 “화랑이란 화가라는 태아의 탯줄이요, 태반이라며 많은 화가들을 배출해 주었으면 한다”며 나를 격려하시던 선생님이 새삼 그리워진다. (갤러리현대 회장 박명자)[[[[:newsis_inyoung_center_end:]]]] '내 찬란한 전설의 101페이지'라는 타이틀로 마지막 방을 장식한 공간의 영상에서 그의 육성이 울린다. “그림 그리고 죽어야 되겠어요.” 관람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이다. 전시 공간마다 그림을 그리고 있고, 활짝 웃고 있는 젊은 천경자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실감케한다. 이번 특별전은 단순 회고전을 넘어 귀환의 축제를 지향한다. 11월 중순에는 ‘데일리아트’와 함께하는 '길 위의 미술관' 투어가 열린다. 천경자가 살며 작업했던 서울 서촌을 직접 걸으며, 교유했던 문인·예술가들의 흔적과 공간을 되짚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12월 6~7일에는 서울미술관에서 연극 '슬픈 전설의 화가'가 상연된다. 무대 위에서 천경자의 생애와 예술을 다시 만나게 되는 자리로, 전시와 공연이 어우러져 ‘위대한 귀환’을 기념하는 축제가 될 예정이다. 서울미술관은 관람객을 위해 무료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 따뜻한 목소리의 이금희 아나운서가 천경자의 주요 작품을 소개하고, 소설가 박경리가 남긴 헌사 '천경자를 노래함'을 낭송한다. 여기에 안 회장이 직접 녹음한 ‘모시는 글’이 담겨, 천경자 전시를 개최한 진심을 전한다. [[[[:newsis_inyoung_left_start:]]]]1998년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간 천경자는 2003년 뇌일혈로 쓰러져 길고 지난한 투병생활을 시작한다. 2015년 8월 6일, 한국 문화판을 뒤흔들고 호령 치던 여걸 천경자는 91페이지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모험가, 트렌드 세터, 도발적인 러브스토리, 사후까지 이어진 숱한 스캔들까지. 화려한 삶을 뒤로 천경자는 한줌의 재가 되어 생전에 사랑했던 강아지들과 산책하던 뉴욕 허드슨 강가에 뿌려진다.[[[[:newsis_inyoung_left_end:]]]]천경자가 생전에 스스로를 '슬픈 전설'이라 불렀던 말은 결국 씨가 되어 그의 삶을 덮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절필까지 가져온 위작 논란 그 슬픔을 넘어 새로운, 찬란한 전설의 시작을 선언한다. 사회에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화가, 베트남전 최초의 여성 종군 작가, 1969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림을 남긴 방랑자. 그리고 맛깔나는 글을 남긴 수필가로도 기억되는 한국 채색화의 거장. 다시 보니 K-아트의 선봉이자 대장부다. 천경자가, 천경자 했다. 작품으로 보여준 이번 전시가 이를 증명한다. '천경자는 한국 미술사의 영원한 전설'이다. 전시는 2026년 1월 25일까지 열린다. 2025/09/23
1000억 대 프리즈 vs 8만 명 키아프…두 서울 아트페어의 명암 아트페어는 미술품을 모아놓고 세계 각국 갤러리들이 벌이는 전쟁터다. 자본주의의 최전선, 그 판은 결국 상위 2%가 좌우한다. ‘얼마에 팔렸나’라는 머니게임은 파워 작가를 거느린 메가 갤러리들의 잔치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자신 있게 판매 리스트를 내걸고, 동시에 작가를 알리는 데도 게으르지 않다. 서울은 지난 4~5일간 두 얼굴을 보여줬다. 프리즈 서울은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미국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품이 약 62억 원에 판매됐고, 현장에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딸 말리아가 직접 찾아와 응원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이벤트’로 소비된 셈이다. 특히 하우저앤워스는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브래드포드, 루이즈 부르주아, 이불 등 전속 작가들이 한국 미술관과 갤러리를 동시에 누비며, 미술관·갤러리·아트페어 3박자를 맞춘 전략적 행보를 펼쳤다. 이는 컬렉터를 겨냥한 철저한 맞춤 공략이자, 서울을 동시대 미술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신호다. 공식 매출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글로벌 메가화랑들의 수십억 원대 거래가 이어지며 총 1000억 원 이상이 오간 것으로 관측된다. 나흘간 7만 명이 몰리며 프리즈 서울은 ‘세계 미술 캘린더’에 확실히 이름을 올렸다. 5일간 열린 키아프는 해외 화랑 비중을 30%까지 끌어올리며 국제 아트페어로서 면모를 강화했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대만, 미국, 태국, 스페인 등 다양한 국가의 갤러리들이 참여해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8만2000명의 관객과 활발한 중저가 거래로 선전했지만, 여전히 프리즈의 그늘과 ‘체급 차이’라는 현실은 드러났다. 홍보에서도 온도차가 뚜렷했다. 프리즈 서울은 공격적 마케팅을 이어간 반면, 키아프는 알리기를 주저하는 ‘조심 마케팅’으로 분위기를 갈랐다. 행사 전 공동 기자회견에 이어 프리즈는 개막 직후 사이먼 폭스 CEO가 한국 기자들과 만나 판매 열기와 향후 전략을 강조했다. 반면 키아프는 VIP 응대에 치중하며, ‘프리즈 뒤를 따라가는 듯한 뒷북 이미지’를 남겼다. 사이먼 폭스는 “김혜경 여사의 방문은 매우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한국 미술 시장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정부에 간접적으로 먼저 화답했다. 이어 “미술 시장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전반적으로는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며 고가 매매 성과를 부각시켰다. 프리즈 서울 관련 기사는 개막 직후부터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공동 개최에서, 한국 화랑 30곳이 프리즈 서울에 입성한 것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는 프리즈의 치밀한 ‘서울 침공 전략’으로도 읽힌다. 12곳만 키아프에 동시 참가했고, 나머지 18곳은 키아프를 포기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프리즈 부스비는 1억5000만 원대, 키아프는 최대 8000만 원 선. 불황 속에서 두 곳을 모두 치르기엔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럼에도 화랑들이 프리즈를 택하는 건 글로벌 무대가 주는 ‘프리미엄 효과’ 때문이다. ‘빈익빈 부익부’ 속 한국 미술시장의 구조적 문제도 여전하다. 작품 판매 가격이 공개되는 순간 세무 추적을 우려해 갤러리들은 노출을 꺼린다. 화랑협회 측 역시 “구매자가 특정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가격 공개를 회피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프리즈는 판매 여부나 가격을 전면적으로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고급스러운 관례’로 포장한다. 글로벌 메가화랑들은 개별 세일즈 리포트를 언론에 흘리며 초고가 매매를 경쟁적으로 알린다. ‘얼마에 팔렸다’는 정보가 곧 뉴스가 되고, 다시 마케팅으로 환원되는 구조다. 한국화랑협회 이성훈 회장은 “프리즈 서울에서는 초고가 매매가 주목받았지만, 키아프는 국내 화랑 중심이라 수십만~수백만 원대 거래가 많아 화랑에는 실질적 도움이 된다”며 “올해는 부스 퀄리티가 높아지고 동선도 쾌적했다”는 평가를 전했다. 불황 속에서도 두 아트페어가 선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미술 소비가 ‘구매’에서 ‘경험’으로 전환되면서, 프리즈의 셀럽 효과와 키아프의 대중 관람객 유입이 흥행을 이끌었다. 아트바젤 홍콩의 불안정 속에 서울이 아시아의 새로운 허브로 자리 잡으며 해외 갤러리와 컬렉터의 발길도 집중됐다. 여기에 LG와 KB금융 등 기업 후원이 맞물려 시장의 버팀목이 됐다. 소비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VIP 프리뷰로 문을 열고, 셀럽과 세계 미술계 인사 명단을 공개하며 ‘위상이 높아진 행사’임을 과시했다. 특히 영부인과 연예인 방문 소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긴 줄이 늘어섰다. 전시장 앞 풍경은 이제 작품을 향한 경배라기보다, ‘맛집 줄’을 닮아 있었다. 미술은 더 이상 소유만의 영역이 아니다. 1인 가구의 확산, 스마트폰 속 무한한 이미지, 1만 원짜리 포스터와 굿즈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시대. 경험을 산다는 감각이 시장의 새로운 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트페어 피로감’은 뚜렷하다. 전 세계 도시마다 페어가 쏟아지고 풍경이 비슷해지면서, MZ세대는 ‘대형 쇼핑몰’ 같은 인식 속에 매력을 잃고 있다. 프리즈 서울이 막을 내리기도 전에 뉴욕에서는 아모리쇼가 개막했고, 컬렉터들은 다시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프리즈 서울은 이제 아트바젤 홍콩이 쥐고 있던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을 서서히 대체하고 있다. 2022년 키아프와 공동 개최로 출범해 서울을 글로벌 미술시장의 한 축으로 끌어올리며 관광까지 아우르는 문화 행사로 성장했다. 코엑스가 리모델링에 들어가지만, 프리즈와 키아프 모두 내년에도 코엑스 개최를 확정하며 서울을 중심 무대로 고수했다. 그러나 공동 개최는 내년 단 한 번만 남았다. 사이먼 폭스 프리즈 CEO는 “서울이 아시아 미술 허브로 도약하며 5년, 10년 이상 지속되기를 바란다”며 서울을 떠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미 약수동에 ‘프리즈 하우스’를 개관해 1년 내내 상설 전시를 열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면 키아프는 “회원들과 투표를 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원론적 답변만 반복하며 향후 행보를 저울질하고 있다. 세계 미술시장이 75조 원 규모로 추산되는 가운데, 1조 원 남짓한 한국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무대에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도 프리즈 서울의 성과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프리즈는 서울에 맞춰 전략적으로 튜닝됐다”며 “이제 프리즈 없이는 키아프가 공생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프리즈가 서울을 세계의 지도 위 축제로 새겨 넣을 때, 키아프는 여전히 계산기만 두드리며 그 곁을 서성인다. 아트페어는 그림을 보기만 하는 전시장이 아니라, 자본이 충돌하는 전쟁터다. 언제까지 우리는 ‘빈익빈 부익부’라는 낡은 위로에 안주할 것인가. 그 순간 권력은 외부 플랫폼에 집중된다. 이제 문제는 감상이 아니라 거버넌스다. 키아프가 가격·세금·홍보에서 표준을 세우지 못한다면, 내년 이후 서울 미술의 서막은 프리즈가, 본문은 해외 메가화랑이 써 내려갈 것이다. 서울은 빛났지만, 내일의 서술자가 프리즈만 된다면 한국 미술은 곧 들러리에 머물 것이다. 2025/09/08
김수자, 거울과 보따리 한국적 초현실로…SK 선혜원 개방 첫 전시 ‘보따리 작가’ 김수자(68)가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한옥에서 ‘호흡’한다.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였던 전통 한옥 선혜원(鮮慧院)이 문을 열고 첫 전시로 김수자를 초대해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 1.0’을 선보인다. 포도뮤지엄(총괄디렉터 김희영)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세계적으로 활동해온 김수자의 작품이 한국 전통 건축물에 설치되는 첫 사례이자, 그의 서울 복귀전이다. 지난 7월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 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한 김수자는 회화와 바느질,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집과 정체성, 그리고 인류 보편의 문제를 사유해 온 세계적 작가다. 1990년 첫 개인전 이후 ‘이동’과 ‘몸’을 주제로 전통 보따리와 영상, 설치,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왔다. ◆선혜원, 또 다른 보따리 2일 서울 삼청동 선혜원에서 만난 김수자는 “선혜원은 또 다른 보따리”라고 말했다. “‘경흥각의 문을 여는 순간, 이건 두말할 것 없이 거울 작업이라 내가 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통 건축과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1990년대 양동마을에서 시작된 보따리 작업 이후, 그는 줄곧 건축 속 새로운 설치를 꿈꿔왔다. “보따리의 건축적 해석이 이번 ‘호흡’의 출발점”이라는 설명처럼, 건축 자체는 하나의 보따리로 재해석되고 관객은 그 안에서 자연스레 퍼포머가 된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경흥각 바닥을 거울로 채운 '호흡–선혜원'(2025)은 수백 년 된 소나무로 만든 한옥의 천장, 서까래와 지붕을 반사시키며 실제와 허상이 겹쳐지는 체험을 만들어낸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관객은 거울 위를 걸으며 발 딛고 선 자리가 또 하나의 하늘이 되고, 자기 자신조차 허공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압도감을 마주한다. 조선시대 왕실의 품격을 간직한 전통 한옥 전각 경흥각은, 김수자의 거울 설치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흐르며 사유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작가는 “한옥 공간의 거울 작업은 외국인 관객이 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전통 건축이 품은 시간성과 거울 설치가 만들어내는 초현실적 압도감은 세계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한국적 초현실’이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을 ‘거울 왕국’으로 만들었던 '호흡'과는 또 다른 울림이다. ◆보따리, 기억의 껍질 김수자는 “거울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자기 자신은 비추지 않는다.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매체”라며, 이를 ‘펼쳐내는 바늘(Unfold Needle)’에 비유했다. 덮는 보따리와 펼치는 바늘 사이에서 인간은 감춤과 드러남 사이를 호흡한다. 그는 “‘호흡’은 결국 인간의 허스크(husk), 즉 몸의 기억과 삶의 흔적을 담는 껍질”이라며 “보따리와 호흡은 물질과 비물질, 기억과 시간, 삶과 패션(의복), 그리고 몸을 하나의 구조로 묶는 작업”이라고 덧붙였다. 삼청원 지하 복도에 놓인 3개의 '보따리', 독일 마이센 도자기와 협업한 '연역적 오브제–보따리'(2023), 평면 작업 '땅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2023) 등은 이러한 철학을 확장한다. 소박한 보따리는 결국 이주와 디아스포라, 삶의 전환기를 담아내는 이동식 보금자리다. 감싸는 행위는 곧 시간과 이동, 만남에 대한 명상이 된다. “숨 쉬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하는 증거다.” 김수자가 선혜원에서 펼친 '호흡'은 결국 우리 삶의 근원적 리듬을 되묻는다. 3일 개막하는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이어진다. ◆선혜원은?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로 출발해 인재 교육의 장으로 쓰이다, 2025년 4월 그룹 연구소 겸 컨벤션 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SK는 역사적 공간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선혜원 아트프로젝트’를 출범했고, 김수자의 개인전이 그 첫 무대를 장식했다. 무엇보다 SK가 전통 한옥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대 예술과 접목해 대중에게 개방한 것은 기업 문화공간의 모범적 사례로 읽힌다. 전통과 현대, 사적 공간과 공공의 영역을 이어주는 플랫폼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낸 셈이다. 한편 이번 김수자 전시는 ‘프리즈 서울’ 기간 지역 연계 행사 ‘삼청나잇’과도 연결된다. 4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선혜원을 야간 개방해 한옥의 정취 속에서 전시를 즐길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이 예정돼 있다.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열린다. 네이버에서 ‘선혜원’을 검색해 예약하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2025/09/02
분홍빛 ‘강령: 영혼의 기술’…오컬트인가, 인식의 실험인가 서울시립미술관 중앙홀에 들어서자, 관객을 맞는 것은 거대한 도상의 충격이다. 18세기 유럽에서 마녀를 요괴이자 악마를 출산하는 존재로 그려낸 그림(요하나 헤드바 재현작)이 벽면을 채운다. 말의 다리를 가진 여성의 괴기한 신체, 불길처럼 치솟은 머리와 기괴한 표정은 단숨에 시선을 붙든다. 최은주 관장은 “당대 여성에 대한 차별의 기록”이라며, 일부 작품에는 ‘보호자 동반’ 표시를 붙였다고 설명했다. 25일 개막한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은 누군가의 표현대로 “귀신을 불러들이는 전시”다. 제목부터 불안과 금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1층 전시장은 검은 공간으로 갈라져 이어지다 곧 분홍빛으로 전환된다. 벽과 바닥을 감싼 분홍색 벽면에 맞춰 푹신한 카펫까지 같은 색으로 깔려, 강렬한 분홍빛이 전시의 처음과 마지막을 포위한다. 지난해 선정되어 전시를 기획한 3명의 예술감독은 “색은 경험의 매개체다. 색은 언어에 앞서 직접적으로 소통된다. 전시에서 색은 작품을 연결하고 공간을 정의하며 전환을 나타내고 의미를 생성한다. 색은 단순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다”고 설명했다. 2024년, 역대 두 번째 공모를 통해 초대된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예술감독팀은 뉴욕에서 작가, 기획자,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는 안톤 비도클 (Anton Vidokel), 할리 에어스 (Hallie Ayres), 루카스 브라시스키스 (Lukas Brasiskis)다. 분홍색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과잉의 의미를 띠어왔기 때문이다. 무속과 불교의 상징으로, 때로는 서울시 캐릭터 해치의 색으로 소비됐으며, 최근에는 ‘주술 정치’ 논란 속에서 일본 종교와 연결되며 정치적 함의를 덧입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분홍빛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긴장을 호출하는 장치이자, 환대와 불안을 동시에 품은 신호로도 읽힌다. 전시는 그 분홍빛을 앞세워 관객을 ‘강령’의 현장으로 끌어들인다. ‘강령(Seance)’은 원래 영매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의식을 뜻한다. 19세기 말 서구의 심령술 붐 속에서 테이블에 둘러앉아 손을 잡고 영을 부르던 세션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감독들은 이 의미를 뒤틀었다. 억압된 지식, 주변부의 전통, 잊힌 역사, 정치적 죽음까지 불러내는 더 넓은 은유로서, 현실과 비현실, 과학과 영성, 합리와 신비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른 인식틀을 여는 통로’로 강령을 재해석했다. "이번 '강령: 영혼의 기술'은 하나의 질문, '현대미술과 동시대 미술의 발전에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경험은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에서 출발했다." 안톤 비도클 예술감독은 “신세대 예술가들이 샤머니즘, 점성술, 테크노 신비주의 등 기존 지식 체계 바깥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며 “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응답”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맥락도 의식했다. “특정 주술가와 대통령의 관계가 있다는 언론 보도를 면밀히 주시해왔다”는 것이다. 주술 정치의 흔적이 여전히 생생한 이 땅에서 ‘강령’이라는 주제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순수한 것은 없다”며 모든 영적 실천이 치유와 해방의 가능성과 동시에 파괴와 억압의 위험을 안고 있음을 강조했다. 할리 에어스 감독은 “이번 전시는 한국 샤머니즘만을 주목하지 않는다”며, 세계 여러 지역의 영적 실천을 함께 살펴보고 그것이 국가주의적 프로젝트에 오용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했다. 동시에 상업화된 소비를 넘어 또 다른 해석 가능성을 제안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임을 분명히 했다. 루카스 브라시스키스는 ‘영혼의 기술’을 자본주의적·추출주의적 기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근대성의 전개는 과학과 영적 실천의 틈을 넓혔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 틈을 다시 연결하는 시도입니다. 영적 실천을 또 다른 기술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마지막 블랙박스 작업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태국 감독 아노차 수이착폰은 2010년 시위 도중 국가 폭력으로 숨진 청년들을 불러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그의 장편영화 리허설 장면입니다. 과거의 장면을 서울로 불러오며 정의와 치유를 모색하는, 강령적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긴장이 발생한다. “오직 이성으로만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들의 전제는 계몽주의적 틀을 흔들며 예술적 상상력을 확장한다. 하지만 AI까지 발달한 과학문명의 시대에 이는 자칫 “이성을 버리고 미신과 주술에 빠지는 태도”로 비칠 위험이 크다. 한국 사회가 이미 ‘주술 정치’라는 경험을 겪은 만큼, 그 오해는 더욱 예민하다. 그렇다면 관건은 이것이다. 예술이 영적 세계를 탐구하면서도 어떻게 지적이고 비판적인 힘을 유지할 수 있는가. 마녀의 괴상한 형상, 불타는 석상, 자동기술 드로잉, 사이버 마녀 선언문… 장면들은 강렬하지만 설명은 부족하다. 기획자들은 다원성과 리서치를 강조했지만, 일반 관객에게 남는 건 난해함의 피로일 수 있다. ‘연구 전시’는 곧 ‘배제의 장치’가 된다. 전시는 총 11개의 소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대미술의 혁명적 실천과 동시대 미술의 계보를 잇는 영적 실험의 역사를 영화,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 드로잉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통해 조명한다. 전시에 초대된 참여 작가는 50명(팀)이다. 다시 분홍으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공간에서 브라이언트 3세의 의례적 조끼와 아노차 수이착폰의 정치적 희생 소환은 분명 울림을 남긴다. 그러나 동시에 질문이 뒤따른다. 이 소환은 서울이라는 맥락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맞닿아 있는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은 과연 귀신을 부르는 의식인가, 아니면 우리가 외면해온 지식과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행위인가. 감독들이 말하는 억압된 영적 상상력과 이단적 지식의 복권을 통해, 이번 전시가 위기의 시대에 다른 인식의 방식을 제시하려는 실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실험이 얼마나 널리 읽히고, 얼마나 설득력 있게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술은 종교의 어머니”라는 선언으로 전시 기획을 시작한 예술감독들은 이렇게 말했다. “강령으로 무대화된 이번 전시는 마법을 걸고, 매혹하고, 전달하고, 방해하길 원한다. 익숙한 지각의 논리에서 한 발짝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고, 알고, 존재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포털이 되고자 한다.” 예술은 시대의 산물이다. 해석도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순수한 색은 없다”는 말처럼, 다양한 해석의 연결고리로 열려 있다. 서울은 지금, '강령'의 무대다.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낙원상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청년예술청에서 11월 23일까지 이어진다. 2025/08/25
“성급한 컬렉터를 노린다”…미술 사기 매뉴얼 미술 시장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 뒤편에는 어떤 덫이 숨어 있을까? “싸게 준다”는 말은 달콤하지만, 그 순간부터 이미 사기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진짜 좋은 그림은 가격을 깎지 않는다는 말처럼, 미술품 거래 세계에서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은 어쩌면 가장 냉정한 진실이다. 국제 미술 플랫폼 아트시(Artsy)가 최근 발표한 '5 Art Scams Every Art Buyer Should Know-and How to Avoid Them'은 미술 시장에 만연한 사기 유형 다섯 가지를 조목조목 짚으며, 수집가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예방책을 제시했다. 한국에서도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이우환 등 거장들의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만큼, 이번 가이드는 국내 미술 애호가들에게도 의미심장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술 사기는 ‘시장 구조의 투명성’ 문제와 직결된다. 결국 수집가·갤러리·경매사 모두가 프로비넌스 검증, 감정 시스템 보강, 계약 절차의 투명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 다시금 확인된다. ◆위작(Forgeries) 가장 전형적이고 치명적인 사기 유형이다. 작가 친필처럼 꾸며진 위작이나, 조작된 감정서를 동원해 작품을 정당화한다. 미술 시장에서는 작품의 진위 여부 하나가 수십억 원을 오가는 가치를 좌우하기 때문에, 위작은 거래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실제 사례로 2024년 이탈리아에서는 클림트, 달리 등 거장 이름을 도용한 위작 2100여 점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추정 가치만 약 2억6500만 달러. 위작은 단순한 개인 피해를 넘어 시장 신뢰를 송두리째 흔드는 범죄다. ▶예방책: 작품의 프로비넌스(provenance, 소장 이력)를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발급한 감정서를 확인하고, 작가·갤러리가 제작한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와 대조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피싱(Phishing)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덫이다. 유명 갤러리를 사칭한 이메일이나 SNS 계정을 통해, 마치 진품을 급매로 내놓은 것처럼 속인다. 이메일 주소가 미묘하게 다르거나, 맞춤법·문체가 어색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피카소 원화를 단독 판매한다”거나 “은행 계좌를 긴급 변경했다”는 식의 공지 메일이 있다. 실수로 송금했다가는 작품도 돈도 한순간에 사라진다. ▶예방책: 이메일만 믿지 말고 반드시 전화를 통한 교차 확인을 거쳐야 한다. 송금 계좌는 반드시 구두로 확인할 것. 작은 ‘레드 플래그’라도 보이면 즉각 거래를 중단하는 것이 상책이다. ◆가짜 구매자(Fake Buyers) 이번에는 반대로 ‘사는 쪽’을 사칭하는 경우다.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당신의 작품을 원한다”는 제안이 들어오면 솔깃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국의 한 작가는 유명인을 사칭한 사기꾼에게 작품을 넘겼다가, 수년 뒤 그 작품이 경매장에서 엉뚱한 이름으로 등장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예방책: 유명 인사를 내세운 거래일수록 제3자의 검증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계약서 서명, 결제 조건, 대리인의 신원 등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조건이 지나치게 유리하다면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 ◆미끼 상품 & 바꿔치기(Bait-and-Switch) 존재하지 않는 작품을 미끼로 계약을 유도한 뒤, 엉뚱한 작품을 강매하는 유형이다. “원래 주문한 은색 작품은 품절이니, 대신 파란색 작품을 가져가라”는 식이다. 혹은 결제 단계에서 “7만 달러”라던 금액이 “8만 달러”로 교묘히 바뀌는 수법도 있다. ▶예방책: 반드시 갤러리나 판매처에 직접 방문해 작품을 확인해야 한다. 계약서에는 작품명, 이미지, 크기, 가격을 상세히 명시하고, 사후 변경이 불가능하도록 조항을 넣는 것이 안전하다. ◆가격 사기(Pricing Scams) 판화나 에디션 작품에서 특히 빈번하다. 같은 에디션임에도 유통처·출판사에 따라 가격을 과도하게 부풀리거나, 운송비·세관비 명목으로 추가 금액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거래에서는 작품보다 부대 비용이 더 커지는 황당한 상황도 발생한다. ▶예방책: 공식 유통처 시세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운송·보험·세금 내역은 투명하게 증빙을 요구하고, 지나치게 ‘싼 가격’에는 반드시 의심의 눈초리를 가져야 한다. ◆결론: 성급함이 가장 큰 적 아트시는 이 모든 사기 유형의 공통분모를 이렇게 정리한다. “Due diligence, due diligence, due diligence(꼼꼼한 확인)”. 사기꾼들이 노리는 건 늘 ‘성급함’이다. 진정한 컬렉터라면 좋은 작품 앞에서조차 성급해지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신뢰할 수 있는 갤러리·경매사와 거래하고, 의심되는 순간 거래를 멈추는 것이 최선의 방어다. 미술품은 부동산이나 주식보다 더 예민한 자산이다. 작품 하나가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러니 “싸게 준다”는 말이 들리는 순간, 오히려 더 비싸게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림은 ‘가격’으로 사는 게 아니라 ‘진가’로 사는 것임을 잊지 말자. 결국 예술에서 가장 값진 태도는, 가격을 깎는 게 아니라 눈을 높이는 일이다. 2025/08/22
작가와 갤러리 50:50?…불문율의 그림자 “작품을 만든 이는 작가인데, 왜 절반밖에 가져가지 못하는가.” 수십 년간 미술 시장을 지탱해온 ‘50:50 룰’. 작가와 갤러리가 판매 대금을 똑같이 나누는 불문율이 흔들리고 있다. 논쟁은 미국에서 먼저 불붙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한국 시장에도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 분배 구조는 여전히 정당한가. 8월은 늘 뉴욕 미술계가 숨 고르는 달이지만, 올해의 정적은 유난히 무겁다. 미국 아트딜러협회(ADAA)의 대표 행사 The Art Show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페어는 단순한 거래의 장을 넘어, 130년 역사의 비영리 기관 헨리 스트리트 세틀먼트를 위해 지금까지 38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해온 사회적 플랫폼이었다. 그 공백은 곧장 작가, 갤러리, 커뮤니티, 나아가 미술 생태계 전체에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이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페어 취소’가 아니다. 갤러리 비즈니스 모델의 불안정성, 그리고 무엇보다 관행처럼 유지돼온 ‘50:50’ 수익 배분 구조가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사실 ‘50:50’은 한국 화랑시장에서도 오랜 불문율이었다. 작가는 갤러리의 몫을 의심 없이 인정했고, 화랑은 전시 공간과 홍보, 컬렉터 네트워크 제공을 명분 삼아왔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는 다르다. 인스타그램과 온라인 뷰잉룸을 통해 직접 고객을 만나고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는 신진 작가들에게 이 질문은 더욱 예리하다. “갤러리의 기여가 정말 절반에 해당하는가?” 정준모 미술비평가는 이 구조의 뿌리를 짚는다. 그는 “작가들이 수십 년간 각자도생하다가 70줄에 들어서야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면, 그제야 화랑이 절반을 가져가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레오 카스텔리가 젊은 야스퍼 존스와 라우센버그를 발굴해 전 생애를 함께하며 ‘5:5 구조’를 만들어낸 사례를 언급하며, “우리 화랑들은 과연 그 자격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물론 국내 화랑들이 KIAF, 프리즈 서울 등 국제 아트페어 참가 비용을 감당한다는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정 비평가의 지적처럼, 실질적 지원과 관리가 부재한 구조에서 ‘절반의 몫’은 점점 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정 대표는 50:50 구조의 기원 자체를 문제 삼았다. “사실 5:5가 굳어진 건 1990년대 말, 점잖은 화랑들을 중심으로 전속제가 시행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전속 개념도 없이 단기 전속이나 일회성 계약에도 5:5를 적용하는 건 무리지요. 외국은 20~30년에 걸친 전속 관계 속에서 ‘윈윈’하며 만들어진 구조인데, 한국 화랑들은 국제적 관례라는 이유로 분배 문제만 국제 룰을 들이대는 겁니다. 말이 안 되죠. 해외 화랑들은 작가의 미술관 전시를 위해 로비하고 펀딩을 하며, 고객들을 미술관 후원회에 가입시키는 등 온갖 일을 다 합니다.” 국내 화랑들이 KIAF, 프리즈 서울 등 국제 아트페어 참가 비용을 감당한다는 논리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정 대표의 지적대로 실질적 지원과 관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절반의 몫’을 주장하는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 발상에 가깝다. 같은 초대전 타이틀을 달고 열리는 개인전이라도, 갤러리의 투자와 지원 수준은 제각각이다. 한 전시기획자는 이렇게 꼬집는다. “제대로 된 초대 개인전은 ‘도어 투 도어’를 기본으로, 작업실에서 전시장 설치와 반출까지 갤러리가 책임집니다. 개막식 케이터링, 홍보, 도록 제작, 고객 초청 및 관리, 부대 행사, 사후 관리까지 모두 지원하는 것이죠. 그런데 일부 갤러리는 단순히 공간 제공과 엽서 제작만 해놓고도 50% 배분을 요구합니다. 이는 공정하지 못한 사례입니다.” 그는 이번 논의가 단순히 분배 구조의 재검토를 넘어, “제대로 된 지원 체계를 지키는 갤러리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 그리고 컬렉터의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 중견 작가 김남표는 단호했다. “갤러리는 본질적으로 공익이 아니라 비즈니스입니다.” 해외 갤러리가 더 낫다는 환상도 일축한다. “외국에는 갤러리를 견제할 컬렉터가 있지만 한국에는 없습니다. 사실은 갤러리보다 컬렉터가 더 심하죠. (작가인) 우리는 갤러리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어디서든 미술가는 이 조건을 견뎌왔고, 예술은 그 속에서 꽃을 피워왔습니다.” 신생 화랑들은 오랜 ‘룰’을 따르면서도 균열을 내고 있다. 개관 5년 차 호리아트스페이스 김나리 대표는 현실을 짚는다.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화랑은 한 달 전시에 평균 2000만 원을 지출합니다. 결국 작가와 화랑의 역할 분담이 먼저이며, 판매금 배분도 그 비중에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실제로 세계 미술시장은 점점 더 ‘유연한 계약 모델(flexible contract model)’을 모색하는 추세다. 첫째, '슬라이딩 스케일(scaling model)'이다. 신진 작가일수록 갤러리의 투자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갤러리 몫을 높게, 반대로 경력이 쌓이고 시장에서 입지를 확보한 작가일수록 작가 몫을 늘리는 방식이다. 고정된 산식 대신 성장 단계별 분배 구조를 설계하자는 제안이다. 둘째, 매니지먼트형 갤러리 모델이다. 단순히 작품을 판매하는 ‘중개상’이 아니라, 아티스트의 장기적 커리어를 관리하는 파트너로 기능할 때 비로소 50%라는 몫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전시 기획, 국제 무대 진출, 미술관 네트워크까지 아우르는 전방위 지원이 전제돼야 한다는 의미다. 셋째, 디지털 판매 플랫폼이다. 온라인 뷰잉룸과 SNS 채널이 확산되면서 갤러리의 독점적 권위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 작가가 직접 판매망을 구축하는 방식은 더 이상 미래형 가설이 아니라, 이미 시장에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다. 결국 논점은 ‘누가 더 가져가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가’다. 단순한 산식은 이미 무력해지고 있다. 화랑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작가의 동반자인가, 아니면 단순한 유통업자인가. 이 질문은 최근 불거진 ‘미술서비스업 신고제’ 논란과도 맞닿아 있다. 내년부터 시행될 신고제와 ‘재판매 보상청구권(추급권)’은 이 질문을 더욱 예리하게 던질 것이다. 예술 생태계는 단순한 장부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작가와 화랑의 동행, 제도의 뒷받침, 컬렉터의 책임이 삼각형처럼 맞물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미술시장은 여전히 ‘룰’을 두고 공방 중이다. 한국화랑협회 이성훈 회장은 “어영부영 시행되면 한국 화랑은 고사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50:50은 오랫동안 불문율처럼 지켜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 자체가 다시 질문이 된다. 이는 단순히 작가와 갤러리 사이의 ‘돈 문제’가 아니라, 누가 미래 미술 생태계의 주체가 될 것인가를 가르는 더 큰 물음이다. 예술은 시대의 거울이자, 경제의 풍향계다. 그리고 지금, 그 풍향은 확실히 바뀌고 있다. 작가와 갤러리의 싸움은 이미 구시대의 프레임이다. 진짜 경쟁자는 알고리즘과 데이터다. 5:5라는 산식은 더 이상 정의도, 설득력도 되지 못한다. 바뀌지 않는 쪽이 먼저 시장에서 퇴장할 것이다. 2025/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