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RM을 바라봤다, RM은 한국미술로 시선을 돌렸다 윤형근 옆에 도널드 저드가 선다. 김환기의 푸른 점화는 이브 클랭의 파란 스펀지를 만난다. 한국미술을 서양미술에 기대 설명하기 위한 비교가 아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난 작품을 동등한 자리에 세우고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방식이다. 이 낯선 작품들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사람은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김남준)이다. 미술품을 수집해온 RM이 자신의 컬렉션을 처음으로 미술관에 본격 공개한다. 단순한 ‘BTS 스타의 소장품전’은 아니다. 자신이 사랑해온 한국 근현대미술을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SFMOMA) 소장품과 나란히 세워 작품과 작품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RM은 이번 전시를 “꽤 긴 자기소개”라고 했다.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돈과 삶, 노력, 심지어 집의 벽까지 내어주며 만들어온 컬렉션만큼 그 사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집의 이유를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저도 가끔은 제가 왜 이 모든 것들을 모았는지 잘 모르겠다”며 한 섹션의 제목을 ‘I Don't Know, But I Like It’이라고 지었다고 했다. RM에게 가장 중요했던 질문은 두 가지였다. “이것이 정말 나를 움직이는가?” 그리고 “2026년 바로 지금 이 작가와 이 작품이 여전히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가?”였다. SFMOMA는 오는 10월3일부터 내년 2월7일까지 ‘RM x SFMOMA: 비트윈 유 앤드 미(Between You and Me)’를 연다. SFMOMA에 따르면 RM과 미술관 소장품을 합쳐 약 180점이 출품되며, 이 가운데 약 140점이 RM의 개인 컬렉션이다. 미국에서 열린 한국 근현대미술 전시 가운데 손꼽히는 규모다. RM의 이름은 소장자에 머물지 않는다. 전시 공식 크레디트에 ‘큐레이터 RM(김남준)’으로 이름을 올렸다. SFMOMA의 아메리카 카스티요 큐레토리얼 프로젝트 매니저와 김효은 회화·조각 부문 어시스턴트 큐레이터가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작품 선정부터 전시장 글과 작품 설명에도 RM의 손길이 닿았다. 한국어와 영어 오디오 가이드를 직접 녹음하고 전시장에 흐르는 음악도 골랐다. ◆RM이 사랑한 윤형근, 방 하나에 16점 RM의 컬렉션 중심에는 한국 근현대미술이 있다. 윤형근과 장욱진, 유영국, 김창열, 박래현, 권옥연, 김윤신, 도상봉 등 여러 세대의 한국 작가들이 포진한다. 16점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이며 윤형근의 작품 세계가 전시실 하나를 채운다. 윤형근에게 청색은 하늘이고 엄버는 땅이었다. 두 색이 만나고 갈라지는 화면을 그는 ‘천지문(天地門)’으로 설명했다. 한 작가가 평생 밀고 간 색과 화면의 세계가 방 하나를 채운다. 그러나 전시는 한국미술을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세워놓지 않는다. RM의 소장품과 SFMOMA 컬렉션을 서로 마주 보게 한다. 윤형근의 ‘Burnt Umber & Ultramarine’(2001)은 미국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도널드 저드의 ‘To Susan Buckwalter’(1964)와 함께 전시된다. 두 사람은 1991년 실제 만나 교류했고, 저드는 이후 윤형근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는 데 힘을 보탰다. 김환기의 ‘26-I-70’과 ‘15-VII-70 #181’ 등 푸른 점화는 이브 클랭의 파란 스펀지 조각 ‘Éponge(SE251)’과 만난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작업했던 두 작가가 푸른색을 통해 무한과 우주를 향했던 시선이 한 공간에서 교차한다. 도상봉의 ‘개나리’와 조르조 모란디의 ‘꽃’도 함께 놓인다. 일상의 소재를 절제된 색과 형태로 바라본 두 화가의 정물이 국경을 넘어 마주한다. 누가 누구를 설명하기 위해 불려온 것이 아니다. 한국미술과 서구미술을 나란히 세워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닮은 점과 다른 점, 실제 인연과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게 한다. RM의 컬렉션은 이 지점에서 개인의 소장품을 넘어 하나의 시선이 된다. ◆“피카소는 아는데 우리 작가는 몰랐다” RM에게 미술 수집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8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술 수집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2018년 BTS 미국 투어 중 찾았던 시카고미술관을 꼽았다. 교과서에서 봤던 서양미술을 실제로 마주한 그는 피카소와 반 고흐는 알면서 정작 한국 작가들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국 작가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 관심은 윤형근과 장욱진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RM은 “제 컬렉션에는 한국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많다”며 “한국 밖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도 있을 텐데 조금 더 나은 관점과 감각을 보태고 싶은 마음으로 수집해왔고, 그 과정이 이번 전시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그동안 RM이 찾은 미술관과 전시를 팬들이 따라가는 ‘RM 투어’가 생겼다면 이번에는 방향이 달라진다. 세계의 관객들이 RM의 시선을 따라 한국미술을 만난다. RM은 “제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수집을 나누는 자리”라며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모은 컬렉션만큼 그 사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꽤 긴 자기소개가 될 것 같다”고 했다. RM 개인의 미술 사랑을 미국 미술관의 대규모 전시로 확장하는 데 기업과 기관도 힘을 보탰다. 삼성전자가 주요 후원사로 참여하고 한국국제교류재단(KF)도 전시를 지원한다. 빅히트뮤직과 하이브, 하이브 인사이트는 전시 파트너로 함께한다. RM이 이번에 세계에 들려주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그가 사랑해온 한국미술이다. 윤형근과 김환기, 유영국은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들의 그림이 훗날 세계적인 K팝 스타의 컬렉션이 되어 미국 미술관에서 세계와 다시 만나는 날을. 노래 한 곡이 그랬듯 그림 한 점도 한 나라를 알린다. 세계가 RM을 바라보게 만든 K팝. 이제 RM은 그 세계의 시선을 한국미술로 돌려놓는다. 자신에게 쏟아진 세계의 시선을 자신이 사랑하는 문화로 돌려놓는 것. 스타의 영향력은 이럴 때 품격이 된다. 2026/10/01
'허끄곡 모닥치곡' 제주비엔날레…바람·돌·통시도 작품이 됐다[현장] 제주도립미술관이 바람과 제대로 만났다. 거울연못 위에 솟은 주황색 키네틱 아트는 장관이다. 강렬한 색이 먼저 시선을 낚아챈다. 수없이 늘어진 주황빛 리본은 제주의 바람에 온몸을 맡긴 채 쉴 새 없이 흔들린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파브르의 ‘Jeju lava’(2026)다. 제주 용암에서 착안했다. 바람이 리본을 흔들면 수면에 비친 형상도 함께 일렁인다. 매 순간 다른 모습이다. 파브르는 지난해 이곳을 찾았을 때 미술관 앞 수면을 거울처럼 봤다. “물 위에 작품을 설치하고 싶었다”는 그는 제주비엔날레를 위해 용암과 화산의 이미지를 끌어들였다. 가볍고 유연한 리본을 사용하고 바람의 풍속에 대응하도록 구조를 설계했다. 그러나 작품을 움직이는 것은 작가가 아니다. 제주의 바람이다. 바람은 리본을 흔들고 물은 주황빛 형상을 다시 비춘다.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작품 속으로 직접 들어왔다. 작가가 만들었지만 제주가 완성한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변용의 기술(The Art of Metamorphosis)’을 압축한 장면이다. 20개국 69팀이 참여한 비엔날레는 제주도립미술관,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제주아트플랫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레미콘 등 5곳에서 펼쳐진다.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은 섞고, 모으고, 흥을 돋운다는 뜻의 제주어다. 제목은 어렵지만 전시는 어렵지 않다. ◆제주의 옛것을 박제하지 않았다 올해 비엔날레는 화려한 국제성보다 제주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배와 돌, 굿과 신화, 할망의 말과 푸른콩까지 끌어들였다. 그렇다고 옛것을 박제하지 않았다. 추사의 글씨는 회화와 조각으로, 돌은 영상으로, 꼭두는 인공지능으로 옮겨간다. 제주도립미술관은 ‘추사의 견지에서: 유배’를 주제로 추사 김정희와 ‘세한도’에서 출발한다. 현중화, 강요배, 백남준, 이우환, 차학경 등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의 작품을 한 공간에 불러들였다. 유배는 제주만의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야 했던 이동과 단절, 생존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시민갤러리에서는 이진경의 ‘나는 그 초록인가’(2026)가 제주의 아픈 역사를 끌어낸다. 정난주와 제주 민란의 기억을 유목과 먹, 한지, 캔버스, 사운드로 풀었다. 상처의 역사를 재현하는 대신 살아남은 생명력의 색, ‘초록’으로 바꿨다. 제주 출신 이현태의 ‘어 김없 는것과 어긋나는 (거)’(2026)는 소리와 시간을 끌어들인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불규칙한 호흡과 소리가 얽히고 벽에는 보라색과 푸른빛의 형상이 번진다. 눈으로 보던 전시가 귀로 듣는 전시가 된다. '제주 화가'강요배 앞에서는 제주가 삶의 자리로 내려온다. ‘세한도’에서 출발한 전시에 그가 내놓은 것은 뜻밖에도 ‘도새기 통시’(2026)다. 제주 집집마다 있었던 전통 화장실이다. 짙은 거름의 색 속에 까만 돼지 한 마리가 서 있다. 강요배는 고고한 문인정신을 좇지 않았다. 유기물이 발효되고 인분은 거름이 돼 다시 땅으로 돌아갔던 제주인의 삶을 끌어냈다. 냄새까지 밴 생활정서다. 제주의 미학은 아름다운 풍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시에도 있었다. 윤진미의 ‘Inverted City’(2008)와 ‘Untunnelling Vision’(2020)은 실제 제주 돌과 한 공간에서 뒤엉킨다. 뒤집힌 도시 영상과 굿의 강렬한 사운드가 충돌하며, 경계를 넘는 이주와 이동, 전승과 변형의 문화적 힘을 드러낸다. 사람의 호흡은 빛과 소리가 되고, 통시의 기억은 회화가 된다. 제주 돌은 다시 영상과 사운드로 옮겨간다. ‘변용의 기술’이 눈앞의 장면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꼭두가 관객의 말에 반응한다. 전통적인 존재를 유리장에 가두는 대신 오늘의 관객과 말을 섞게 했다. 입구에는 제주 푸른콩을 넣고 소원을 적은 천 주머니가 수북하다. 제주 할망과 해녀의 말이 놓인 자리에 관람객도 자신의 바람 하나를 보탠다. 먹을 것이 귀했던 제주에서 콩은 중요한 식재료였다. 지난해 사전 프로그램의 ‘콩베개’는 이번 본전시에서 관람객이 직접 만드는 콩주머니로 변했다. 미술관 밖에서도 돌은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제주비엔날레 홍보대사인 강연가 김창옥은 돌챙이였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미술관 뒷마당에 사방탑을 쌓았다. 최근 시작한 옻칠 작업을 돌에 입혀 탑 위에 올렸다. 미술관 앞마당의 주황색 키네틱 작품이 생의 기운을 드러낸다면, 뒷마당의 돌탑은 소멸을 이야기한다. 돌은 제주돌문화공원으로 가면 전시의 주인공이 된다. 송필의 ‘실크로드, 전설(Version 2)’(2022)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거대한 돌을 등에 진 산양과 질주하는 말의 형상을 통해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를 오간 문명의 흐름과 이동·정착의 역사를 보여준다. 노진아의 ‘진화적 키메라-가이아’에서는 인간과 기계, 과거와 미래가 기묘한 생명체 안에서 뒤섞인다. 인공지능 두상과 인류 진화의 표본을 결합해 진화를 하나의 계보가 아니라 끊임없이 섞이고 변하는 과정으로 뒤집는다. 돌은 가만히 있지도 않는다. 소리를 내고, 가상공간에서는 화석이 다시 살아난다. 룸톤의 VR ‘에코스피어’는 돌과 화석이 품은 오래된 시간을 가상현실의 감각으로 옮긴다. 오카베 마사오와 미나토 치히로의 ‘TIME RINGS’(2026)는 반대로 손으로 장소의 시간을 더듬는다. 제주와 홋카이도, 히로시마 등 역사적 장소의 표면을 프로타주로 떠내고 그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VR이 돌과 화석의 시간을 가상공간으로 불러낸다면 프로타주는 사람이 직접 장소의 피부를 문질러 기억을 떠낸다. 제주에서 너무 흔해 오히려 보이지 않던 돌이 소리가 되고, 영상이 되고, 가상현실이 되고, 종이 위의 흔적으로 남는다. 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돌이 품은 시간을 여러 감각으로 꺼내놓는다. ◆유배·돌·신화…제주를 ‘방법’으로 원도심에서는 신화와 굿이 등장한다. 예술공간 이아에서 김상돈은 탐라국 건국신화의 삼을나와 심방, 해녀인 네 여신을 교차시킨 ‘거울 속 열쇠들’을 펼친다. 내왓당 무신도와 손유진의 회화, 곽윤주의 굿 영상도 이어진다. 전시장 자체도 변용됐다. 관청 이아의 터는 병원 등을 거쳐 예술공간 이아가 됐다. 아카데미극장은 제주아트플랫폼으로, 제주 최초의 현대식 호텔이었던 명승호텔은 갤러리레미콘으로 바뀌었다. 작품만 변한 것이 아니다. 장소도 변해왔다. 지난 제4회가 ‘표류’를 통해 제주와 남방문화의 연결을 탐구했다면 제5회는 유배와 돌문화, 신화를 파고든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20개국 69팀’이라는 외형보다 제주를 얼마나 깊게 읽었느냐다. 제주를 세계에 보여주겠다고 바깥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유배와 돌, 굿과 신화, 바람과 습기, 할망의 말과 푸른콩까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제주 이야기는 이동과 생존, 기억과 기원, 인간과 자연이라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번진다. 지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올해 예산 20억원 규모의 제주비엔날레는 존폐 논란도 겪었다. 대형 국제비엔날레와 규모와 물량으로 경쟁하기는 어렵다. 결국 승부처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전시’를 얼마나 만들어내느냐다. 그런 점에서 올해는 예년보다 볼거리가 확실히 풍성해졌다. 바람과 돌, 유배와 통시, 굿과 신화까지 제주의 자연과 역사, 생활을 동시대 미술로 풀어내는 방식도 한층 선명하다. 규모보다 제주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가 비로소 자기 색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는 제주도립미술관장인 이종후 예술감독과 독립기획자 이병희 총괄큐레이터가 기획했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는 오는 11월15일까지 열린다. 제주도립미술관은 성인 8000원이며 나머지 4개 전시공간은 무료다. 2026/09/18
300년 묵은 화첩까지 활짝…겸재 정선 216점, 대구에 펼쳤다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216점이 한자리에 펼쳐졌다. 국보 '금강전도'를 비롯해 보물 71점이 나왔다. 금강산과 한양의 명승부터 고사인물화, 화조영모화까지. 청년 정선에서 80대 노년의 정선까지 이어진다.지금까지 한 번도 전면 공개되지 않았던 '경교명승첩'과 '해악전신첩'도 처음으로 전작을 선보인다. 겸재 정선 탄신 350주년을 맞아 대구간송미술관이 16일부터 특별전 '겸재 정선 - 조선의 눈으로 조선을 그리다'를 개최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이 공동 기획했다. 두 재단 소장품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과 개인 소장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총 216점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정선 전시다. 현재 남아 있는 정선의 작품이 정확히 몇 점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허용 대구간송미술관 학예총괄은 “도록을 모두 살펴봤지만 같은 작품인지 불분명하거나 과거 도록에 수록된 뒤 현재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작품도 있다”며 “정선 작품으로 전해지지만 진작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어 현존 작품 수를 정확히 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술계 일각의 '600점가량' 추산에 대해서도 “도록을 전부 조사해 정리했을 때 600점은 아니었다”고 했다. 겸재 정선은 중국의 관념적 산수를 답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조선의 산천을 자신만의 화법으로 그려낸 화가다. 이번 전시는 '진경산수의 대가'라는 이름 뒤에 가려졌던 한 인간 정선의 생애와 70여 년 화업을 따라간다. 전시장도 달라졌다. 4개 전시실을 이번 정선전에 맞춰 다시 꾸몄다. 전통회화 전시에서는 낯선 핑크와 퍼플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비스듬히 세운 벽과 구불구불 이어지는 동선, 영상으로 공간에 변화를 줬다. 216점을 펼쳤지만 빽빽하다는 느낌이 없다. 작품 사이에 여백을 두어 정선의 그림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했다. ◆한 번도 다 펼치지 못했던 화첩…“미술관으로서는 모험” 이번 전시의 백미는 '경교명승첩'과 '해악전신첩'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전면 공개되지 않았던 두 화첩의 회화를 모두 펼쳤다. 작은 화면에 인쇄한 듯 촘촘하게 그려낸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실사 영화를 보는 듯하다. 정선이 벗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주고받으며 한양과 한강 일대 풍경을 담은 '경교명승첩'은 33점 전작을 한자리에서 처음 선보인다. 왜 지금까지 전면 공개하기 어려웠을까. 허 총괄은 15일 언론공개회에서 “전면을 공개해 보여드릴 만한 장소와 전시할 수 있는 조건이 많지 않았고 작품을 보호하는 측면도 굉장히 크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전시를 통해 전면을 공개한다는 것은 미술관 입장에서는 굉장한 모험이기도 하다”며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 화수분처럼 계속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관람객에게 꾸준히 좋은 작품을 보여주려면 전시 횟수를 조절하고 보존도 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물을 한자리에서 보는 것 자체에도 의미를 뒀다. 허 총괄은 “연구서나 도록을 통해 모두 볼 수는 있지만 실물을 봤을 때 받는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며 “연구하는 분들에게도 좋은 기회이고 관람객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300년 된 그림이 지금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거는 이유다. ◆호암이 '정선의 회화' 봤다면 대구는 '정선이라는 사람' 이번 전시는 지난해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정선전과 애초부터 1·2부로 기획됐다. 간송미술문화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같은 전시의 반복은 아니다. 지난해 호암 전시에서는 정선의 회화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중심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와 후대 작가들까지 함께 보여줬다. 대구에서는 주변을 덜어냈다. 정선 한 사람에게 집중했다. 허 총괄은 “이번에는 인물에 집중하자는 생각에 일부를 과감하게 생략했다”며 “온전히 정선에 집중해 216점을 전시한다”고 말했다. 화첩을 보여주는 방식도 다르다. 호암에서는 전시 주제에 따라 '경교명승첩'의 작품을 나눠 배치했다면 이번에는 한자리에서 펼쳐 전체 흐름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전통회화를 엄숙하게 모셔두기보다 관객이 편하게 들어가 오래 보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허 총괄은 “대구에서는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획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만나는 정선의 '대구' 대구에서 열리는 정선전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정선은 60대 후반 영남으로 내려와 하양과 청하에서 현감을 지냈다. 이 시기에는 하양에서 멀리 대구를 바라보며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도 남겼다. 300년 전 정선이 바라본 대구를 오늘의 대구에서 다시 보는 셈이다. 전시는 '진경산수의 대가'라는 이름표 뒤에 가려졌던 정선도 끄집어낸다. 금강산과 한양의 명승뿐 아니라 고사인물화와 화조영모화까지 펼쳤다. 중국의 고사를 그리면서도 풍경과 인물에는 조선의 모습을 집어넣었다. 작은 동물과 일상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도 담겼다. 장수를 기원하고 축하하기 위해 제작한 선물용 그림도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장수를 상징하는 도상을 화면에 담았다. 작은 화면에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세밀한 묘사를 보여주는가 하면 거대한 산수에서는 장대한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허 총괄은 정선의 이 같은 폭넓은 표현력을 설명하며 “겸재 정선은 '그림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년의 금강산과 노년의 금강산 전시의 절정은 금강산이다. 국보 '금강전도'와 보물 '풍악내산총람'이 나란히 걸렸다. 먹으로 압도하는 '금강전도'와 색으로 물든 가을 금강산 '풍악내산총람'을 한 공간에서 비교할 수 있다. 다만 정선의 또 다른 대표작인 국보 '인왕제색도'는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없다. 2021년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작품으로, 현재 이건희 컬렉션 국외 순회전에 나가 있다. 미국 워싱턴과 시카고에 이어 오는 10월 영국박물관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정선은 평생 금강산을 그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청년부터 60대, 70대, 80대까지 같은 명승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어떻게 변했는지 비교할 수 있다. 같은 삼일포를 그린 작품도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젊은 시절에는 날카롭고 세밀했다. 나이가 들수록 붓은 부드러워지고 형태는 과감하게 생략된다. 80대에 이르면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자신이 체득한 필법으로 핵심을 잡아낸다. 더 오래 본 화가가 더 적게 그리기 시작한 셈이다. 216점이라는 숫자가 힘을 발휘하는 대목이다. 대표작 몇 점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한 화가의 변화를 한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다. 허 총괄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한 것은 정선이라는 인물”이라며 “350년 전에 태어난 정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를 상상하면서 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인건 대구간송미술관장은 “K컬처에 대한 관심으로 대중문화뿐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이 주목받는 지금, 고유의 방식과 철학으로 우리 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담아낸 겸재 정선의 작품들은 오늘날 우리 문화를 바라보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한국 문화의 독자성과 보편성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호암미술관 측도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의 예술세계와 인간 겸재의 삶을 한눈에 조망할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에서 지난해 호암의 정선을 봤더라도 대구에서 다시 볼 이유는 충분하다. 216점이라는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정선 한 사람의 생애와 눈의 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 전시의 밀도다. 350년 전 조선의 산천을 자기만의 눈으로 다시 그렸던 정선. 21세기에 다시 만난 그의 그림은 묻는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풍경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전시는 12월27일까지 열린다. 2026/09/15
‘뼈를 갈아 넣은 3년’ 김성희 관장, 박수칠 때 떠난다 박수칠 때 떠난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도호 개인전을 보려는 관람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개막 후부터 이어진 풍경이다. 7일 뉴시스와 만난 김성희(68) 제22대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관람객 행렬에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실제로 숫자는 달라졌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관람객은 346만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2023년 320만명, 2024년 299만명에서 다시 크게 뛰었다. 올해 책임운영기관 평가에서는 미술관 역사상 처음으로 ‘S등급’을 받았다. 그러나 김 관장이 꼽은 3년의 성과는 관람객 숫자가 아니었다. “사람과 재원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어요.” 그가 취임해 가장 먼저 본 것은 ‘없는 것’이었다. 돈이 없었고 사람이 없었다. 정원이 있어도 육아휴직과 병가 등으로 실제 근무 인력은 부족했다. 김 관장은 임기 동안 정원 8명을 늘렸다. 국제교류 등을 담당하는 학예인력 4명, 경력관 3명, 전산인력 1명이다. 서울관 교육동에는 신규 예산 30억원을 확보해 어린이·가족을 위한 상설 공간 ‘MMCA 아이공간’을 만들었다. 취임 3년차 예산은 전년보다 158억원 늘었다. “처음에는 8명 늘린 게 뭐 그렇게 대단한가 했어요. 그런데 미술관 하나를 새로 만들 때 주는 인원이 8~10명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한 명 늘리는 것도 정말 어렵습니다. 기재부에서 돈 따기 어렵고 행안부에서 사람 따기 어려워요.” 김 관장은 이를 “좋은 미술관이 되기 위한 기반 작업”이라고 했다. ◆욕먹었던 허스트전, 54만명 몰리고 30억원대 작품 2점 기증 김성희 체제의 가장 논쟁적인 전시는 지난 3월 연 ‘데이미언 허스트전’이었다. ‘상업적 작가를 왜 국립미술관에서 보여주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전시는 96일간 54만1889명을 끌어모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역대 흥행 기록을 다시 썼다. 김 관장은 허스트를 시장의 스타가 아니라 미술관이 다시 들여다봐야 할 작가로 판단했다고 했다. “미술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재조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스트도 시장을 떠나서 왜 죽음과 신, 의학을 이야기해왔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흥행보다 뜻밖의 결과도 생겼다. 허스트가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 2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김 관장은 두 작품의 가치를 30억원대로 추산했다. 하나는 1999년작 스핀 페인팅 ‘아름답게 폭발하는 막무가내 대혼란과 광기, 무지개의 소용돌이 그리고 죽음의 화산 페인팅’이다. 직경 365.8㎝의 대작이다. 회전하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부어 제작하는 허스트의 대표 연작 ‘스핀 페인팅’ 중 하나다. 또 하나는 2008년작 삼면화 ‘인간은 끝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니’다. 각 패널은 203.2×129.5㎝다. 검고 어두운 화면과 반복되는 원형, 인물 형상이 결합돼 삶과 죽음, 육체와 소멸이라는 허스트의 주요 주제를 다룬다. 김 관장은 허스트가 전시장에서 직접 두 작품을 가리키며 기증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두 작품의 수증심의를 마치고 현재 기증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2008년 삼면화에 얽힌 허스트의 설명을 기억했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은 뒤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제작한 작품이라는 설명이었다. “허스트가 저희 전시 기획과 연출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어요. 무엇보다 한국 관객에게 사랑받은 게 컸던 것 같아요.” 허스트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전시는 중국으로 순회한다. 김 관장은 중국 현지 사정에 따라 죽음과 관련한 일부 작품이 빠져 규모는 다소 축소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전시가 그대로 해외로 순회한다는 의미가 크다. 현재 화제 속에 진행 중인 서도호전 역시 일본과 홍콩 순회가 확정됐다. ◆“조용한 관장? 국현이 앞에 서길 바랐다” 김 관장은 전시기획자 출신이다. 하지만 재임 중 개별 전시에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 미술계에서는 “관장이 너무 조용하다”, “관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나왔다. “조금 억울한 말이긴 한데 괜찮아요. 저는 김성희가 앞에 나오는 것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앞장섰으면 했어요. 나중에 ‘김성희가 노력했더라’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죠.” 취임 당시에는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첫 국립현대미술관장이라는 점을 두고 미술계 일각에서 특정 인맥과 연결된 것 아니냐는 뒷말도 나왔다. 김 관장은 이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해당 인사와 개인적인 친분도 없었다는 설명이다. 미술관 안에서는 김 관장을 ‘외유내강형’으로 꼽았다. 전시는 학예사에게 맡겼지만 조직과 인사에서는 단호했다. 김 관장도 전시 성과의 공을 학예사들에게 돌렸다. “우리 학예사들이 굉장히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했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발제하고 열심히 기획했기 때문에 전시가 잘될 수 있었죠.” 그렇다고 전시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관장이 ‘이 작가 해라, 저 작가 빼라’ 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대신 전체 방향을 맞추는 일은 해야죠.” 허스트전과 같은 시기에 아래층에서 ‘소멸의 시학’을 열도록 큰 방향을 맞췄다. 죽음을 거부하고 영원성을 추구하는 허스트와 소멸을 받아들이는 작품들을 한 미술관 안에서 대비시켰다. 서도호전 역시 한 스타 작가의 성공담으로 끝나지 않도록 '한국 개념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와 시기를 맞췄다. 김 관장이 먼저 손댄 것은 전시보다 조직이었다. “조직이 먼저 안정돼야 방향을 외쳤을 때 같이 뛰어줄 수 있겠더라고요.” 서울·과천·덕수궁·청주 4관 인사를 순환시켰다. 특정 인맥과 ‘줄 세우기’가 생기는 것도 경계했다. 사람의 장점과 업무를 맞추는 데도 공을 들였다. “사람마다 장점이 다릅니다. 그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자리에 놓으면 100%를 해요.” ◆“3년은 너무 짧다…5년은 해야 한다” 김 관장이 가장 아쉬워한 것은 시간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서울·과천·덕수궁·청주 4관을 총괄한다. 관장 직급은 오랫동안 고위공무원단 나급인 2급 국장급에 머물다 2020년 1급으로 격상됐다. 그러나 미술계가 요구해온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같은 차관급에는 미치지 못한다. 직급은 올라갔지만 임기는 3년이다. 수년이 걸리는 해외 전시와 국제 공동연구, 소장품 정책을 시작해 결과까지 보기에는 짧다. 관장에게 권한을 하나 더 준다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뜻밖에도 ‘권한’ 대신 임기를 말했다. “3년은 진짜 너무 짧아요. 5년은 해야 무슨 성과라도 조금 결산하고 갈 텐데, 시작하고 마무리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아쉽습니다.” 아쉬움은 자신이 시작한 일의 결실을 끝까지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제교류와 연구다. ◆“한국미술 국제화, 이제 시작…담론 깔아야” 김 관장은 재임 중 ‘MMCA 리서치 펠로우십’을 만들었다. 세계 미술계의 주요 연구자가 한국에 장기간 머물며 한국 작가와 작품을 연구하도록 하는 사업이다. 첫 초청자는 컬럼비아대 미술사학과 교수 알렉산더 알베로였다. 한국 개념미술을 연구하고 두 차례 강연했다. 다음 초청자로는 하버드대 데이비드 조슬릿 교수가 확정됐다. 기존처럼 해외 학자를 심포지엄에 며칠 초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개월간 소장품을 보고 작가들을 만나게 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학자가 한국에서 장기간 연구하고 글을 써야 그 글이 다시 세계 미술계에서 읽힙니다.” 김 관장이 국제화에서 강조한 것은 시장이 아니라 ‘담론’이었다. 단색화가 국제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은 데 이어 한국 개념미술 등으로 연구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설명이다. “반짝하고 예쁘다고 끝나면 안 됩니다. 학술과 담론을 깔아야 해요. 그런데 이건 한 해 했다고 티가 나는 일이 아니죠. 다음 관장, 그다음 관장 때 꽃을 피울 수도 있어요. 끊지 말고 계속했으면 합니다.” ◆해외 작품 80점 확보…“그래도 국제소장품 8.9%” 국제 소장품 확충도 김 관장이 공을 들인 분야다. 2024~2026년 제임스 터렐, 존 발데사리, 토마스 루프, 필립 파레노, 루이즈 부르주아 등 해외 주요 작가 작품 약 80점을 수집했다. “제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국제미술 소장품이 전체의 8.9%밖에 안 돼요. 너무 빈약합니다.” 해외 작품을 늘리는 이유도 한국미술 국제화와 맞닿아 있다. 세계미술의 흐름 속에서 한국미술을 연구하고 설명하려면 해외 주요 작품을 함께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학예연구실장은 격상해야…“해외연수 시스템도 없다” 3년간 미술관을 운영하며 내부 구조의 한계도 선명하게 봤다. 김 관장은 학예연구실장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격상시켜야죠.” 올해 실제로 고위공무원단 격상을 추진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고위공무원단 정원이 정부 전체 차원에서 관리돼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문체부만의 결정으로 풀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현재 학예연구실장은 전문임기제 가급으로 임기는 2년이다. 전문성을 축적하고 장기적인 학예정책을 펴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학예직의 해외연수 체계가 없는 것도 아쉬움으로 꼽았다. “큐레이터가 해외 미술관에 6개월 정도 체류하면서 아카이브를 연구하고 돌아오면 그게 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자산이에요. 그런데 사람도 부족하고 돈도 없고 그런 시스템도 없습니다.” 전문인력을 키워야 하지만 한 사람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를 메울 인력부터 부족하다. 관장과 기획운영단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협업’을 강조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운영단장은 예산·인사·행정을 맡는 고위공무원단 직위다. 과거 미술계에서는 두 자리의 권한과 역할을 둘러싼 갈등이 거론되기도 했다. “지금은 학예실이 빵빵하기 때문에 협업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요. 예산도 기획운영단이 움직이고 학예실도 콘텐츠와 데이터를 줘야 같이 짤 수 있습니다.” “지금은 두 조직의 관계가 가장 좋아요. 공무원 조직과 학예조직이 소통을 잘하고 있습니다.” 문체부 본부와의 관계도 손봤다.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미술관 직원을 문체부 본부에 파견했다. “얼굴을 봐야 돼요. 스킨십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김 관장은 “문체부 안에서 국현에 대한 이해와 위상도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민간 후원도 크게 늘었다. 후원금은 2024년 16억원에서 2025년 29억원, 올해 40억원으로 늘었다. 올해 기업과 문화재단 7곳을 신규 후원자로 끌어들였다. 민간 후원이 큐레토리얼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자 선을 그었다. “기업이 전시 기획 방향이나 의도에 관여할 수는 없어요.” ◆“그들만의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김 관장이 취임하기 전 국립현대미술관을 보면서 가장 답답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미술계에 있는 나도 전시가 어렵더라고요. 약간 ‘그들만의 세상’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취임 후 전시장 글씨부터 문제 삼았다. 너무 작고 어두워 관객이 읽기 어렵다고 했다. 작품이 너무 많으면 덜어내라고 했다. “큐레이터는 다 보여주고 싶어 해요. 그런데 관객이 숨을 쉬어야 합니다. 작품을 보고 감동도 받고 쉬었다 가야죠.” 반복해서 한 말도 있다. “돈 아껴 써라. 우리 세금이다.”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는 일은 서울관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역미술관 활성화를 위한 ‘MMCA 지역동행’도 새로 만들었다. 경남·전남·전북 등 지역미술관에서 예술영화 상영과 다원예술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청주관은 인근 대학과 군부대, 기업을 연결하는 지역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김 관장이 말한 ‘사랑받는 미술관’은 유명 작가를 데려오고 관람객 숫자를 늘리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서울·과천·덕수궁·청주가 각자의 관객을 만나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완성 못한 안타까움 있지만 후회는 없다” 김 관장은 오는 17일 미술관을 떠난다. 마지막 날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으냐고 물었다. “나가면서 저 경치를 한번 보겠죠. 아무래도 섭섭하겠죠. 매일 눈 뜨자마자 뛰어왔던 기억이 있으니까요.” 관장실 창밖으로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떠올리게 하는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김 관장이 3년 동안 매일 마주한 풍경이다. “3년, 뼈를 갈아 넣어서 일했어요.” “완성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을 것 같아요.” ‘관장 김성희’의 3년은 끝난다. 다시 ‘기획자 김성희’로 돌아간다. 퇴임하면 오랫동안 몸담았던 비영리 예술기관 캔파운데이션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관장 재임 중에는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일부러 발길을 끊었다고 했다. “캔이 제일 재밌어요. 젊은 작가들을 만나서 얘기하면 내가 살 것 같아요. 거기서 받는 에너지가 신선하거든요.” 박수칠 때 떠난다. 이제 다시 젊은 작가들 곁으로 간다. 2026/09/08
중국관 철수·대만관 논란…160억 광주비엔날레, 무엇이 문제였나 제16회 광주비엔날레에서 대만관은 문을 열었고 중국관은 사라졌다. 대만관은 지난 5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개막했다. 명칭 변경을 둘러싼 우여곡절 끝에 'Taiwan Pavilio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대만 측은 한국에서 보내준 지지와 노력에 감사를 표했다. 반면 중국관은 작품 설치 도중 철수했다. 광주비엔날레 30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대만을 동시에 파빌리온에 참여시킨 결과다. 문제는 중국과 대만을 함께 초청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세계의 첨예한 갈등을 예술의 공론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국제비엔날레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느냐다. 양안 관계에서 'Taiwan'이라는 명칭이 갖는 정치적 민감성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중국과 대만을 처음으로 동시에 참여시켰다면 명칭과 참여 자격, 양측과의 사전 협의, 충돌이 발생할 경우 적용할 원칙까지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했다. 그러나 광주비엔날레는 그러지 못했다. ◆'대만관' 바꿨다가 되돌리고…중국관은 철수 논란은 파빌리온 명칭에서 시작됐다. 대만 측은 당초 'Taiwan Pavilion'으로 협의했지만 재단이 명칭을 국립대만미술관(NTMoFA)으로 변경했다고 반발했다. 재단은 국가관이 아닌 기관관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기관명을 사용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내외 미술계에서 '정치적 검열'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재단은 지난달 25일 다시 'Taiwan Pavilion' 명칭 사용을 승인했다. 이번에는 중국 측이 반발했다. 중국관 참여 작가들은 작품 설치를 중단했고 결국 철수했다. 미술계에서 시작된 논란은 전시장 밖으로 번졌다. 중국 광저우시 대표단의 광주 방문 일정이 취소됐고, 여수세계섬박람회에 참여할 예정이던 중국 저장성 저우산시도 이미 설치한 홍보관 운영을 취소했다. 광주시도 소통과 절차에 미비점이 있었다며 사과하고 운영 과정에 대한 점검과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하나의 파빌리온 명칭에서 시작된 문제가 다른 국제행사와 도시 간 교류까지 흔든 셈이다. ◆윤범모 "예술은 예술, 정치는 정치"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지난 4일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중국관 철수를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윤 대표는 자신이 대만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지 않으려고 했고, 중국 측도 재단의 이런 노력을 알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중국관 철수와 대만관 참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예술은 예술, 정치는 정치이니 둘을 겹쳐 보지 말아 달라. 순수 예술 행사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만 C-LAB은 참가 신청을 해 받아들인 것이고, 중국관은 별도로 추진해 관련 기관 간 협약까지 체결한 것"이라며 "중국과 대만을 동시에 초청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본전시와 파빌리온 논란에도 선을 그었다. 파빌리온은 본전시와 별개로 운영되는 행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파빌리온 운영 방식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제비엔날레에서 예술과 정치를 그렇게 쉽게 떼어놓을 수 있을까. 특히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 광주의 민주적 시민정신과 예술적 전통을 바탕으로 출범했다. 세계 각국의 미술을 한자리에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대 사회와 역사에 질문을 던져온 국제미술제다. 파빌리온이 본전시와 별개의 프로그램이라는 설명도 재단의 기획 책임까지 별개로 만들지는 않는다. 파빌리온 역시 '광주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공식 프로그램이다. 파빌리온은 별개라고 했지만 파장은 별개가 아니었다. 대만 C-LAB의 참여와 중국관 추진 경로가 달랐다는 재단의 설명과 별개로, 결과적으로 하나의 비엔날레 안에서 양안 문제가 충돌했다. 사태가 터진 뒤 중국관 철수를 막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와 사전에 이런 충돌 가능성을 얼마나 면밀하게 살폈느냐는 다른 문제다. 30년 된 국제비엔날레라면 많은 나라를 불러들이는 것만으로 국제성을 증명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역사와 정치, 문화적 맥락을 읽고 충돌 가능성을 관리하는 능력 역시 국제비엔날레의 기획 역량이다.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것은 국제화의 부족이 아니라 국제적 감각의 부재였다. ◆작지만 밀도 높았던 본전시…그런데 왜 릴케인가 더 아쉬운 것은 정작 본전시가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호추니엔 예술감독은 올해 본전시 참여 작가를 역대 최소 규모인 22개국 43팀으로 줄였다. 여러 전시장으로 뻗어나가던 기존 방식에서도 벗어났다. 작품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한곳에 집중했다. '확장의 논리' 대신 '집중의 강도'를 택했다. 권병준·박찬경의 신작 '불림'에는 시민들이 모아준 쇠붙이가 작품의 재료가 됐다. 5·18로 삶이 바뀐 오월어머니회는 322점의 그림을 내놓았다. 작품 하나하나를 충분히 볼 수 있는 작지만 밀도 높은 전시였다. 그러나 전시의 밀도와 별개로 이번 비엔날레가 내건 주제를 얼마나 깊이 밀고 갔느냐는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됐다. 주제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아르카익 아폴로의 토르소' 마지막 문장에서 가져왔다. 지난 4일 VIP 사전 개막에서 전시를 관람한 홍가이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비평문 '철학적 신경이 빠진 명령: 제16회 광주비엔날레의 릴케 오독(誤讀)에 대하여'에서 이 지점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홍 교수는 작품이 무가치해서 실망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전시를 지탱해야 할 철학적 핵심이 공허했다"고 지적했다. 릴케의 마지막 문장이 "하나의 철학적 사건으로 사유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슬로건으로 소비됐다"고 비판했다. 호추니엔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릴케의 문장을 '프로그램 없는 요구'라고 설명했다.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왜, 무엇으로 바뀌어야 하는지는 제시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홍 교수는 이에 대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치명적으로 얕다"고 했다. 릴케의 토르소가 관람자에게 삶을 바꾸라고 명령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큐레이토리얼 프레임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43팀으로 줄인 '집중'은 통했다 홍 교수 역시 이번 전시 전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43팀으로 작가 수를 줄이고 전시 전체를 하나의 공간에 집중한 것을 "진정으로 대담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더 많은 작가, 더 많은 공간, 더 많은 작품으로 커져온 비엔날레의 '팽창 모델'을 거부하고 집중을 택한 것은 릴케의 미학적 논리와 공명한다는 평가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었다"고 했다. 전시 설계에서 구현한 집중이 릴케의 존재론적 명령까지 밀고 나가지는 못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광주라는 장소에서 이 문제는 더 무거워진다. 홍 교수는 "광주는 추상적인 도시가 아니다. 5·18의 도시"라고 했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명령에 광주의 시민들은 이미 역사적으로 삶을 걸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오월어머니회 322점의 그림이 등장하지만 그는 5·18의 역사적 무게와 릴케의 존재론적 명령이 충분히 만나지 못했다고 봤다. 결국 이번 비엔날레가 위대한 시와 광주의 비극이라는 "두 개의 깊은 원천"의 권위를 빌리면서도 어느 쪽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160억원 광주비엔날레, 무엇을 바꿔야 하나 중국관 철수와 릴케를 둘러싼 비판은 서로 다른 문제다. 하나는 국제미술행사를 운영하는 판단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전시를 구축하는 큐레이토리얼 철학의 문제다. 하지만 두 논란이 던지는 질문은 한곳에서 만난다. 30년 된 광주비엔날레는 세계와 자신이 선택한 주제를 얼마나 깊이 읽고 있는가. 광주비엔날레재단의 총예산은 약 160억원이다. 이 가운데 전시·행사에 투입되는 예산은 약 40억원이다. 다만 비엔날레 예산은 행사 준비 기간을 포함해 2년에 걸쳐 편성·집행된다. 국내 최대 규모 국제미술행사인 만큼 요구되는 기획과 판단의 수준도 높을 수밖에 없다. 올해 본전시는 규모를 줄이면서 오히려 작품을 보는 힘을 키웠다. '더 많이'에서 '더 깊이'로 방향을 돌린 것은 광주비엔날레가 앞으로 가져갈 만한 변화다. 그러나 국제비엔날레의 경쟁력은 좋은 작품을 불러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세계의 정치·역사적 맥락을 읽는 국제적 판단력이 필요하다. 강렬한 철학적 문장을 주제로 가져왔다면 그것을 전시 전체에서 감당하는 기획의 깊이도 필요하다. 중국관과 대만 C-LAB의 참여 경로가 달랐다는 설명으로 이번 논란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비엔날레 안에서 충돌할 수 있는 정치·역사적 맥락을 얼마나 면밀하게 읽었느냐가 문제다. 릴케를 불러온 것이 문제도 아니다. 그 한 문장이 가진 무게를 끝까지 감당했느냐가 문제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다.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그 질문이 이제 광주비엔날레 자신에게 돌아왔다. 2026/09/07
1200개 유리구슬로 한옥에 거미줄…모나 하툼 “마법 같았다” 1200개의 투명한 유리구슬이 한옥 서까래 아래 거대한 거미줄을 쳤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이슬 맺힌 별자리처럼 아름답다. 한 층 올라가 내려다보는 순간 풍경은 달라진다. 반짝이는 거미줄은 누군가를 붙잡는 덫처럼 다가온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모나 하툼(74)의 'Web'(2025)이다. 서울 삼청동 선혜원에 사소하고 연약한 것들이 시간을 견뎌 만든 풍경이 펼쳐졌다. 포도뮤지엄은 2일부터 10월31일까지 선혜원 아트프로젝트 2.0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를 개최한다. 지난해 김수자의 장소특정적 설치작업 '호흡―선혜원'에 이은 두 번째 프로젝트다. 올해는 모나 하툼과 최성임(49), 김윤수(51) 등 여성 작가 3명이 참여한다. 하툼은 포도뮤지엄과 인연이 있는 작가다. 앞서 제주 포도뮤지엄 전시에 참여해 국내 관객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번에는 제주가 아닌 서울의 한옥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번 전시는 작가를 먼저 선정하고 제목을 나중에 정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디렉터는 1일 기자들과 만나 모나 하툼과 최성임, 김윤수를 먼저 선정한 뒤 세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공통점을 찾아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하툼과의 기존 인연을 이어가는 한편 최성임과 김윤수는 여러 작가를 리서치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찾아냈다. 오랫동안 작업해왔지만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덜 알려진 두 한국 작가를 세계적인 작가 하툼과 나란히 세운 것도 이번 전시의 눈에 띄는 지점이다. 유리와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블, 빵끈, 비닐, 종이 골판지. 서로 다른 세 작가를 잇는 것은 쉽게 지나치거나 버려지는 재료다. 여기에 잇고, 감고, 자르고, 쌓는 반복적인 손의 움직임과 시간이 더해지며 전혀 다른 형태와 물성이 만들어진다. ◆한옥에 거미줄 친 모나 하툼 전시의 시작은 선혜원의 중심 전각인 경흥각이다. 서까래 아래 하툼의 'Web'이 공간을 가로지른다. 수제 투명 유리구를 가느다란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블로 연결한 대형 설치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거미줄은 집이면서 덫이다. 몸을 숨기고 보호하는 공간인 동시에 먹이를 붙잡는 사냥의 장치다. 보호와 포획, 안식과 위험이라는 상반된 성질이 하나의 구조 안에 공존한다. 오래된 한옥에 자신의 거미줄이 펼쳐진 모습을 본 하툼은 만족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툼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작품은 어떤 공간에 설치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진동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과거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거친 공간에 설치했을 때는 작품이 마치 “화성에서 온 외계인처럼” 낯설게 보였다고 했다. 선혜원에서는 달랐다. 그는 “웅장한 한국 전통 한옥의 건축 방식과 자연에서 유래한 재료, 장엄한 기둥과 서까래, 자연 풍경과 함께 작품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며 “그 어느 때보다 더 마법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Web'의 유기적인 구조가 선혜원의 자연스러운 환경에 가벼움과 연약함을 더하면서 이질적으로 충돌하기보다 조화를 이룬다는 설명이다. 1952년 레바논 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계 난민 가정에서 태어난 하툼은 1975년 런던에 머물던 중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런던을 기반으로 퍼포먼스와 영상, 조각과 대형 설치를 넘나들며 집과 신체, 경계와 권력, 개인과 세계의 불안정한 관계를 탐구해왔다. 1995년 터너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18년 프리미엄 임페리얼 조각상을 수상했다. 올해는 독일 함부르거 반호프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하툼은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라는 전시 제목에도 공감을 표했다. 그는 “인간 존재의 위태로움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위태로움을 아름답게 전달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모두의 연약함과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결국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식빵끈이 6.2m ‘황금이불’로…최성임 작가 로비 바닥에는 거대한 황금빛 이불이 펼쳐졌다. 최성임의 '황금이불'(2026)이다. 멀리서는 금빛 돗자리나 직물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재료의 정체가 드러난다. 식빵 봉지를 묶는 금색 빵끈이다. 왜 하필 식빵끈일까. 최성임은 이날 “식빵끈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기보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주변에 보이는 재료가 나의 소재가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이불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내 몸과 가장 먼저 맞닿는 풍경이고, 잠들기 전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는 풍경이자 내 몸보다 더 큰 세계라고 생각했다.” 미술을 위한 특별한 재료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장 가까운 일상의 사물을 작업으로 끌어들였다. 최성임은 “엄청난 선언이나 전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에 일상이 완전히 뒤집혀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황금이불'은 이번 전시 제목에 맞춰 처음 만든 작업도 아니다. 2015년 처음 발표한 초기 작업을 발전시켜 선혜원 공간에 맞게 새롭게 제작했다. 특히 로비를 한옥의 대청마루처럼 안과 밖이 만나는 경계로 봤다. 자신의 몸과 맞닿는 ‘이불’이라는 사적인 세계를 안과 밖이 넘나드는 공간으로 확장했다. 가로 6.2m, 세로 4.8m 규모의 포도뮤지엄 커미션 신작이다. 식탁에서 사용되고 버려지는 금색 빵끈을 하나하나 이어 만들었다. 최성임은 네 아이를 키우며 가사와 돌봄, 창작을 병행해왔다. 생활 가까이에서 발견한 재료를 모으고 연결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1977년생으로 이화여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판화를 전공했다. 회화에서 출발해 조각과 설치로 작업 영역을 넓혀왔다. ◆“왜 발인가”, 땅을 딛고 존재하는 인간…김윤수 작가 지하 1층 회랑에는 푸른 결정체 같은 작은 형상들이 놓였다. 김윤수의 '바람의 표면'(2011~2018)이다. 유모차를 덮는 방풍막으로 사용하는 얇은 파란색 PVC 비닐에 여러 사람의 발바닥 윤곽을 그리고 오려낸 뒤 반복해서 쌓았다. 처음에는 거의 투명했던 비닐이 수없이 포개지면서 깊은 푸른빛과 부피를 얻는다. 처음의 발 모양은 흐려지고 낯선 풍경으로 변한다. 작업은 자신의 발에서 시작해 지인과 주변 사람들의 발로 확장됐다. 왜 하필 발일까. 김윤수는 이날 “우리는 머리나 손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만 발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게 발은 인간이 땅과 만나는 지점이다. 한 발을 딛고 두 발로 서기 위해서는 대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발을 작업에 끌어들였고, 이후 주변 사람들의 발을 수집하며 작업을 확장했다. 2층 하린당에서는 김윤수의 초기 골판지 작업을 만날 수 있다. '바람(투명한 사유에 관한 조각)'(2001)은 멀리서 보면 거대한 토기나 나무 조각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면 반전이 일어난다. 재료는 골판지다. 가늘게 자른 골판지를 오랜 시간 감고 이어 붙였다. 쉽게 눌리고 휘어지는 종이는 반복되는 손길을 따라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굽어지면서 뚜렷한 부피와 존재감을 얻었다. 1975년생 김윤수는 중앙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바람과 빛, 움직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비물질적 요소를 조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해왔다. ◆58년의 선혜원 기억 위에 쌓인 시간 작품이 놓인 선혜원 자체도 시간을 품은 공간이다. SK 창업 회장의 사저였던 이곳은 1968년부터 그룹의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 공간으로 사용됐다. 지난해 새로운 문화공간 선혜원으로 재탄생했다. 현대 건축과 세 채의 한옥이 어우러진 구조다. 온지음 집공방이 한옥 공간의 기획과 설계를 맡고 SKM과 조병수 건축사사무소 등이 협업했다. 올해는 선혜원 개관 이래 처음으로 하린당과 경흥각 2층을 공개하고 전시 영역을 전체 전각과 층으로 확장했다. 관람객은 경흥각에서 'Web'을 아래에서 올려다본 뒤 로비와 지하 1층 회랑, 2층 하린당을 거친다. 마지막에는 경흥각 2층에 올라 다시 'Web'을 내려다본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거미줄과 위에서 내려다본 거미줄은 다르게 보인다. 아래에서는 거미줄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하지만, 위에서는 거대한 그물의 형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보는 위치가 달라지자 같은 작품도 달라졌다. 유리구슬은 거미줄이 되고, 식빵끈은 황금빛 이불이 됐다. 얇은 비닐은 푸른 덩어리로 쌓이고, 골판지는 단단한 조각처럼 몸을 일으켰다. 흔하고 연약한 재료들이 선혜원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얻었다. 전시는 10월31일까지.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이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무료 관람은 네이버 예약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3일 프리즈 서울 연계 행사 ‘삼청 나잇’에는 오후 6~9시 야간 개장하고 크로스오버 그룹 블랙스트링의 공연도 열린다. 2026/09/01
“바젤리츠는 100% 예술가…매일 마지막 날처럼 그렸다” “마지막 전시실은 바젤리츠를 위한 채플(예배당) 같습니다.” 지난 4월 세상을 떠난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2026)의 장남 다니엘 블라우(64)가 서울 광화문 세화미술관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블라우는 게오르그 바젤리츠 사무국·아카이브(Büro & Archiv Georg Baselitz) 대표를 맡고 있다. 29일 뉴시스와 만난 블라우는 “아무런 기대나 선입견 없이 전시를 봤는데 뜻밖에 굉장히 훌륭했다”며 “특히 마지막 전시실은 정말 가슴이 아플 정도로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독일에서 날아와 아버지 바젤리츠의 사후 첫 한국 미술관 전시를 찾은 그는 마지막 전시실을 한동안 바라봤다. 이곳에는 바젤리츠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그린 ‘골드 페인팅’이 검은 벽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블라우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그림은 죽음을 앞둔 노화가의 쇠잔한 그림이 아니었다. 평생 덜어내고 또 덜어낸 끝에 남은 회화의 정수였다. 블라우는 마지막 그림을 물에 떨어뜨린 라임 시럽 한 방울에 비유했다. “물에 라임 시럽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라임 주스가 됩니다. 마지막 그림도 그런 에센스와 같습니다. 한 방울만 남겨 놓으면 나머지 공간은 우리의 상상력이 채우는 것이죠.” ◆“매일 그날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렸다” 바젤리츠는 죽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88세까지 계속 그리게 했을까. 블라우의 대답은 단순했다. “바젤리츠는 100% 예술가였습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 작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의식했느냐는 질문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죽음과 삶의 유한성은 말년에 갑자기 등장한 주제가 아니었다. 블라우는 ‘바니타스(Vanitas)’와 독일어 ‘Vergänglichkeit’를 언급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삶의 덧없음과 유한성이다. 어린 시절 전쟁이 끝난 뒤 목격한 패잔병의 모습부터 말년 거울 속 자신의 늙은 몸까지, 죽음과 소멸은 바젤리츠의 작업을 평생 관통했다. 젊은 시절에는 미술사와 외부 세계에서 죽음의 형상을 끌어왔다. 88세가 된 뒤에는 거울만 봐도 그것이 눈앞에 있었다. 주제는 평생 이어졌다. 그러나 그림은 끊임없이 변했다. 두꺼운 물감과 거친 붓질에서 출발해 마지막에는 하나의 선까지 덜어냈다. ◆“내가 세뇌돼서 좋은 건가, 정말 좋은 그림인가” 세계적인 거장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이었을까. 블라우는 “바젤리츠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복권과도 같았다”고 웃었다. 그러나 행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렬한 예술가, 강한 인물과 매일 함께하고 작업실에서 자란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세뇌’와도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그림을 볼 때마다 자신을 의심했다.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세뇌됐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말 좋은 작품이기 때문인가.’ 1980년대 결혼해 집을 떠난 뒤에도 그는 아버지의 작업실을 자주 찾았다. 갈 때마다 새로운 작품이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놀랐습니다. 바로 판단할 수 없었어요. 며칠 동안 곱씹고 소화한 뒤에야 작품의 질을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블라우는 바젤리츠가 하나의 성공한 방식에 안주하는 작가가 아니었다고 했다. ◆“세상의 오해보다 그림이 막히는 게 더 힘들었다” 바젤리츠는 생전 숱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아들이 본 아버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술가는 사회의 바깥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관객이 자신이 하는 일을 모두 이해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어요. 열린 마음으로 작품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몇 명만 있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쟁과 충돌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토론을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로 받아들였다. 정작 바젤리츠를 괴롭힌 것은 자기 그림이었다. 바젤리츠가 평생 싸운 상대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 그림이었다. 그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방법도 미술이었다. 옛 거장의 판화와 아프리카 미술을 수집하고 바라보며 자신의 작업에서 잠시 벗어났다. ◆다섯 살 아들의 우주는 ‘커피 한 잔’ 미술사에서 1969년은 바젤리츠가 형상을 거꾸로 그리기 시작한 해로 기록된다. 하지만 다섯 살 아들에게 그것은 사건이 아니었다. 당시 가족은 U자 형태의 농가에 살았다. 주거 공간에서 아버지의 작업실까지 가려면 계단을 내려가 마당을 건너고 다시 바깥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어머니 엘케는 어린 블라우에게 종종 아버지에게 가져다줄 커피를 맡겼다. “그때 내 모든 세계, 내 우주는 컵 안의 커피를 쏟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가득 찬 컵을 들고 출발했지만 추운 마당을 지나 작업실에 도착하면 커피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절편 회화를 그리고 형상을 거꾸로 그리고 있었다. 세상은 훗날 그 그림을 파격이라고 불렀지만 어린 아들에게는 그냥 아버지의 그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봤던 ‘나뉜 소 두 마리’도 기억했다. “나는 소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냥 소 그림이 좋았습니다. 왜 이렇게 분절돼 있는지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죠.” 블라우는 바젤리츠의 ‘거꾸로’를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기발한 장치나 단절로 보지 않았다. “아주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전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시장에 걸린 한 작품을 예로 들었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검정과 흰색, 빨강이다. 한참 들여다본 뒤에야 그 속에서 인물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색만 보입니다. 그것만으로 이미 훌륭한 그림이에요. 나중에 형상을 발견하지만 사실 그 형상이 없어도 그림은 훌륭합니다.” 무엇을 그렸느냐보다 그림 자체를 먼저 보게 하는 것. 바젤리츠에게 형상은 어쩌면 그림을 시작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충격은 ‘거꾸로’가 아니라 바젤리츠의 미술 자체” 그렇다면 블라우는 언제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의 거꾸로 그림을 파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답은 예상 밖이었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거꾸로 그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젤리츠의 미술 자체가 논쟁적이었습니다.” 성공은 늦게 찾아왔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미술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일해서 돈을 벌었죠.” 엘케는 1970~80년대 독일 보름스에서 여성 패션 매장을 운영했다. 당시 지역에서는 흔치 않았던 프랑스 디자이너의 옷 등을 소개한 아방가르드한 가게였다. 엘케는 동시에 바젤리츠가 평생 가장 많이 그린 인물이기도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것과 평생 아내를 그린 것이 관계가 있었느냐고 묻자 블라우가 웃었다. 바젤리츠가 아들에게 ‘내 그림에서 엘케는 이런 존재’라고 특별히 설명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자기 작품에 대해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평생 함께 살았고, 평생 그렸다. ◆그림 뒤집기 전에 이미 ‘영웅’을 뒤집었다 이날 인터뷰에 함께한 세계적인 갤러리스트 타데우스 로팍은 ‘거꾸로 그린 화가’라는 수식어만으로 바젤리츠를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습니다.” 로팍이 꺼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제로 아워(Zero Hour·Stunde Null)’다. 바젤리츠가 화가로 출발한 독일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이었다. 건물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정신과 가치, 기존 질서까지 무너졌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말할 만큼 예술의 존재 이유 자체가 근본적으로 질문받던 시대였다. 로팍은 “바젤리츠는 그 ‘제로 아워’에서 독일 미술이 어디로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가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가 특히 중요하게 꼽은 것은 거꾸로 회화보다 앞서 등장한 ‘영웅들(Heroes)’ 연작이다. 전쟁 직후 독일에서 ‘영웅’은 쉽게 꺼낼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나치와 전쟁, 국가주의의 기억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바젤리츠는 ‘영웅’을 그렸다. 다만 그의 영웅은 승리자가 아니었다. 병들고 망가졌다. 누더기를 걸쳤다. 황폐한 땅 위에 선 패잔병 같은 인간이었다. 로팍은 이를 “자신이 속한 나라, 그 시대의 인간적 조건에 대한 정치적 발언”이라고 표현했다. 바젤리츠는 그림을 거꾸로 뒤집기 전에 이미 ‘영웅’이라는 관념부터 뒤집고 있었던 셈이다. 로팍은 “기존의 영웅주의를 의심하고 뒤집으면서 폐허 속에서도 예술이 다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인간의 조건과 예술의 조건을 다시 정의한 화가”라고 평가했다. ◆“바젤리츠 재단 설립 계획 없다” 바젤리츠 사후 별도의 재단이 설립될 것이라는 관측에는 선을 그었다. 재단 설립이 어느 정도 진행됐느냐는 질문에 블라우는 “금시초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아버지가 생전에 자신의 작품과 유산을 관리하는 체계를 이미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별도의 재단을 새로 설립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대신 가족은 바젤리츠가 생전에 구축한 조직과 아카이브를 이어받아 관리하고 있다. 법적인 형태의 재단은 아니지만 작품의 제작 기록과 소장 이력, 프로비넌스(소장 경로) 등을 관리하고 관련 문의에 대응하는 등 사실상 재단이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설명이다. 카탈로그 레조네 작업도 주요 과제다. 바젤리츠는 생전 아카이빙에 강한 관심을 갖고 이를 담당할 인력과 조직까지 갖춰 놓았다고 전했다. 작가는 떠났지만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기록되고 관리될지까지 준비해 놓은 셈이다. ◆그림은 미술사에, 버섯 사랑은 아들에게 미술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들만 기억하는 바젤리츠의 모습을 하나만 들려달라고 했다. 블라우는 1970년대 기숙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 당시 동독에서 휴가를 받아 서독을 방문한 할아버지도 함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자마자 꺼낸 이야기는 그림이 아니었다. “트러플을 찾았다. 우리 찾으러 가자.” 집으로 돌아온 이들은 곧장 근처 숲으로 향했다. 바젤리츠는 나무 아래로 몸을 낮추고 들어가 냄새를 맡으며 트러플과 버섯을 찾아다녔다. 세계적인 화가가 아니라 버섯을 찾아 숲을 헤집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버섯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 취향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저도 버섯과 트러플을 좋아합니다.” 블라우가 웃었다. 미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그림을 뒤집는 법을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 버섯을 좋아하는 마음을 물려받았다. 세계는 게오르그 바젤리츠를 ‘거꾸로 그린 화가’로 기억한다. 아들에게 그는 추운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버지였고, 숲바닥을 헤집으며 트러플을 찾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자기 그림보다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려 했던 ‘100% 예술가’였다. 한편 19년 만의 한국 미술관 개인전이자 바젤리츠 사후 첫 한국 전시인 세화미술관의 바젤리츠전은 하루 평균 500~600명이 찾고 있다. 전시는 12월27일까지 열린다. 2026/08/29
떠나지 않았다면, 그 집을 알았을까…서도호 '회향'[박현주 아트에세이 ㉝] 아버지는 집을 지었다. 아들은 집을 떠났다. 그리고 떠난 아들은 평생 집을 만들었다.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서도호의 ‘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가 자란 곳은 부모가 지은 한옥이었다. 모두가 서양식 아파트를 선망하던 1970~80년대였다. 부모는 거꾸로 한옥을 택했다. 철거되는 옛집의 목재와 창호, 철물을 모았다. 장인을 찾아 집을 지었다. 어린 서도호는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그 집을 떠나는 데는 하루가 걸렸지만, 그 집을 다시 만나는 데는 평생이 걸릴 줄은. 서도호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뉴욕에서 살았고 다시 런던으로 옮겼다. 멀어지자 집이 보였다. 떠나지 않았다면, 그 집을 알았을까. 그는 떠나온 집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벽과 복도, 계단과 문, 전등 스위치와 손잡이까지 떠냈다. 재료는 얇고 반투명한 천이다. 빛이 스며든다. 무거운 건축이 가벼워졌다. 접을 수 있게 됐다. 가방에 넣을 수 있게 됐다. 국경도 건널 수 있게 됐다. 집을 떠난 사람이 집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집은 그를 따라 세계를 떠돌았다. 2018년 런던 웜우드가 육교 위에는 한옥 한 채가 먼 곳에서 날아온 듯 내려앉았다. 땅에 뿌리내려야 할 집이 낯선 도시의 공중에 비스듬히 걸렸다. 사람이 이주하자 집도 이주했다. 하지만 서도호가 옮긴 것은 집만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에서 만든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긴 뒤 그 안에 들어가면 옛날로 되돌아가는 듯한 ‘프루스트 효과’를 느낀다고 했다. 몸은 지금 이곳에 있는데 기억은 그때 그곳으로 간다. 공간을 옮겼는데 시간이 따라왔다. 그래서 그의 투명한 집은 묘하다. 사람은 없는데 사람이 있다. 시간은 지났는데 시간이 남아 있다. 집은 사라졌는데 집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다. 떠나온 집. 다시는 들어갈 수 없는 방. 이제는 없는 사람과 함께했던 자리. 공간을 기억하면 시간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사람이 걸어 나온다. 집은 건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을 지나간 시간. 함께 살았던 사람. 그때의 나. 물론 오늘 우리에게 집은 그렇게 낭만적인 공간만은 아니다. 집은 자산이고 계급이며 때로는 한 사람의 삶을 가르는 숫자가 됐다. 누구에게는 여러 채의 집이 재산이고, 누구에게는 한 채의 집조차 평생 닿기 어려운 꿈이다. 그런데 서도호의 집에는 가격이 없다. 평수도, 시세도 없다. 남는 것은 그곳을 지나간 시간과 사람의 흔적이다. 서도호의 집이 세계 어디에서나 낯설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서울의 한옥이 세계의 낯선 도시에 펼쳐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서도호만의 집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떠나온 고향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부모의 집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이 된다. 가장 개인적인 기억이 가장 보편적인 기억을 건드린다. 한옥에는 국적이 있다. 그러나 그리움에는 국적이 없다. 우리는 떠나는 것을 흔히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에는 멀어져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고향이 그렇다. 부모가 그렇다. 젊음이 그렇다. 가까이 있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이루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거리는 상실을 만든다. 그러나 거리가 시야를 만든다. 서도호는 이번 서울 전시에 ‘회향(回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30년 넘게 세계를 이동하며 집과 기억을 좇아온 작가가 다시 자신의 시작을 바라본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떠나온 집도 예전의 집이 아니다. 그 집을 떠났던 사람 역시 그때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사는 일이 아니라 다시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집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지겨웠던 하루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늘 곁에 있던 사람도 어느새 기억 속에 있다는 것을. 하지만 삶은 지나간 장면을 다시 보여주지 않는다. 때로 예술이 그 일을 한다. 사라진 집을 다시 세우고, 흘러간 시간을 불러오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서도호의 투명한 집 앞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어쩌면 그의 집만이 아니다. 저마다 떠나온 집이다. 그곳에는 아직, 한때 그 집에 살았던 내가 있다. 2026/08/29
검은 물감도 닦지 않았다…화가의 품위 ‘윤형근의 집’ 윤형근은 떠났지만, 그의 바닥은 아직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바닥에 검은 물감이 그대로다. 닦아내지 않았다. 윤형근(1928~2007)이 작업하며 흘리고 밟고 지나간 흔적이다. 검푸른 물감은 40여 년의 시간을 건너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작업실 바닥에 얼룩처럼 남아 있다. 검은 물감이 흩뿌려지고 문질러지고 겹쳐졌다. 새집처럼 복원하지 않았다. 윤형근이 평생 그림을 밀어붙인 시간이 그대로 눌어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위에 그가 쓰던 작업 도구와 시대별 대표작을 놓았다. 그 앞에 서니 윤형근의 그림이 어디에서 나왔는지가 보였다. 캔버스에 내려앉은 검푸른 기둥만큼이나 말이 없고 거칠다. 그림을 그렸던 방과 밥을 먹고 잠들었던 집이 한 건물 안에 있다. 삶과 작업 사이에 문턱이 없었던 화가의 집이다. 윤형근이 살고 작업했던 서교동 주택이 ‘윤형근의 집(Yun Hyong-keun House)’으로 문을 연다. 윤형근 에스테이트가 보존·복원해 오는 9월1일부터 일반에 처음 공개한다. 1층 작업실과 2층 주거 공간을 생전 모습에 가깝게 되살렸다. 가구와 기물의 위치까지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했다. 미술관을 새로 지은 게 아니다. 살던 집을 남겼다. 관의 지원 없이 오롯이 유족이 보존해 문을 여는 ‘윤형근의 집’은 작가 이름을 내건 기존 기념미술관과도 결이 다르다. 화가가 살고 작업한 집 자체를 남겨 그의 시간을 함께 들여다보게 했다. 빨간 벽돌, 나무 바닥, 소목장을 통해 제작한 갈색 집기들. 집 자체가 윤형근의 미감이다. 이 집의 시간은 김환기에서 시작한다. 터는 윤형근의 장인이었던 수화 김환기가 1963년 국민주택으로 분양받았다. 윤형근은 1967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 1983년 기존 주택을 헐고 동생 윤도근 당시 홍익대 건축과 교수에게 설계를 맡겨 지금의 집을 지었다. 이후 20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족과 살며 그림을 그렸다. 설계를 동생에게 맡겼지만 집에는 윤형근의 미감이 깊숙이 들어갔다. 공간의 기능과 형태부터 재료 선택까지 직접 관여했다. 높은 층고와 노출 배관, 전면 유리에는 서구 모더니즘 건축의 간결함이 있다. 목재 천장과 문창살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배어 있다. 자연광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1층 작업실 한쪽 벽 전체를 유리창으로 냈다. 윤형근은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다. 청색과 엄버(Umber)를 섞은 검푸른 안료를 마포나 린넨에 스며들게 하며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화면을 수직으로 가르는 짙은 색면과 안료가 천에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번짐은 그의 작품을 상징하는 조형 언어가 됐다. 윤형근에게 그림은 삶과 분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었다.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작업실 옆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관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한두 장은 거짓말해서 이렇게 만들 수도 있어도 가장 높은 품격을 가진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 아닌가.” 그가 끝내 붙잡은 단어는 ‘품위’였다. “모든 욕심 다 버려야 천진무구한 세계로 들어가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야. 근데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은 해야지.” 그리고 말했다. “그게 인간의 목적인 것 같아.” 완성에 도달했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그곳을 향해 가겠다는 고백이었다. 윤형근의 화면이 갈수록 단순해진 것도 이 삶의 태도와 겹친다. 색은 줄고 형상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검푸른 안료가 화면을 타고 번지고 스며든 흔적이다. 그가 말한 ‘천진무구한 세계’는 무엇을 더 그리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더 버릴 것인가에 가까웠다. “진리에 사는 거. 진리에 생명을 거는 거. 그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잘 그린 그림보다 먼저 바로 서야 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업실 바닥이 압권으로 다가온다. 그곳에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며 살아낸 시간이 남아 있다. 윤형근의 말처럼 작품이 한 사람의 흔적이라면 검은 물감으로 뒤덮인 이 바닥 역시 거대한 ‘윤형근의 흔적’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작가 윤형근’은 ‘생활인 윤형근’으로 이어진다. 가족이 사용했던 거실과 부엌, 안방이 남아 있다. 가구와 도자기, 오디오부터 추사 김정희의 현판, 도널드 저드의 조각까지 그의 취향과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물건들이 원래 자리를 지킨다. 아내 김영숙을 기리는 방에는 그의 그림과 수집품, 김환기·김향안과 주고받은 삶의 흔적도 남았다. 장인이었던 김환기는 윤형근의 정신적 지주였다. 1974년 촬영된 사진 한 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형근이 김환기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 사이에 서 있다. 장인이자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와 윤형근, 그리고 다시 후손으로 이어지는 기억은 이 집에서 한 가족의 역사를 넘어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장면이 된다. 윤형근의 아들 윤성열은 부모의 삶을 이렇게 기억했다. “두 분은 그렇게 다르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겉모습과 생활이 따로 가지 않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사셨던 것 같아요. 생활과 작업을 따로 떼기 힘들었고 그 믿음이 작품에서도 같았습니다.” ‘윤형근의 집’이 흥미로운 이유다. 그림을 걸어놓은 또 하나의 전시장이 아니다. 윤형근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았기에 그런 그림이 나왔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윤형근의 집 개관과 맞물려 PKM갤러리에서는 26일부터 10월3일까지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reimagine Yun Hyong-keun)’가 열린다. 초기부터 말년까지 주요 작품을 한 흐름으로 펼친다. 뉴욕 저드 파운데이션에서도 10월8일부터 내년 1월9일까지 윤형근 개인전이 이어진다. 과거 도널드 저드의 초대로 열린 윤형근 개인전 출품작 가운데 6점을 다시 한자리에 모은 전시다.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에 따르면 윤형근과 저드는 1991년 만나 깊은 교류를 시작했다. 저드가 윤형근의 작업실을 방문한 뒤 미국 텍사스 말파 전시를 제안했다. 말파 전시 직전 저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전시는 예정대로 열렸다. 두 작가가 떠난 뒤에도 인연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윤형근의 집’ 개관 행사에는 저드의 아들 플래빈 저드가 참석한다. ‘윤형근의 집’은 9월1일부터 10월17일까지 예약제로 운영한다. 한 회당 8명만 들어갈 수 있으며 전 회차 도슨트 투어로 진행한다. 관람료는 2만원. 2026/08/25
사인 남기지 못한 ‘백색 묘법’ 3점 한자리에…박서보미술관 개관 생전 박서보(1931~2023)는 자신의 미술관이 생기면 거대한 백색 ‘묘법’ 세 점을 걸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이 서울 연희동에서 현실이 됐다. 새로 문을 연 박서보미술관 3층 전시장에는 그가 직접 골랐던 대형 백색 ‘묘법’ 세 점이 벽을 떠나 나란히 서 있다. 미처 사인도 하지 못한 미완의 완성작이다. 사방에서 스며드는 자연광에 따라 한지의 골과 백색의 깊이가 시시각각 달라지며 압도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2023년 세상을 떠난 박서보가 끝내 보지 못한 자신의 이름을 건 미술관이다.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을 이끈 박서보는 생전 자신의 이름을 건 미술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고향인 경북 예천에서 추진된 미술관 건립은 중단됐고, 3년 전 제주에서는 박서보미술관 기공식까지 열렸지만 현재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제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의 첫 삽을 뜨며 환하게 웃었던 박서보는 2023년 10월14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그해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뒤에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작업을 이어갔던 그였다. 병원으로 향하며 작품을 두고 “배접해 놔라”고 한 말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됐다. ◆연희동 주택가에 스민 '박서보미술관' 18일 언론에 미리 공개된 박서보미술관은 그가 생전 생활하고 작업했던 연희동 작업실 바로 옆에 들어섰다.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약 2000㎡ 규모로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최문규 교수가 설계했다. 약 3년에 걸쳐 완공됐다. 공식 개관은 21일이다. 건물은 박서보의 작품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흰색과 회색을 중심으로 절제된 공간을 만들고 곳곳에 작은 정원을 들였다. 전시장마다 자연광과 정원이 스며들어 묵직한 건축에 숨통을 틔운다. 담백하지만 웅장하다. 작품과 자연, 건축이 한 공간에서 호흡한다. 특히 3층 높이 8m의 정사각형 공간 ‘큐브(cube)’가 압권이다. 반투명 유리를 통과한 자연광이 거대한 백색 묘법 세 점의 표면을 훑는다. 정면에서는 절제된 흰 화면이지만 옆으로 움직이면 한지의 골이 만든 깊이와 그림자가 살아난다. 박서보에게 흰색은 단순한 백색이 아니었다. 표백된 순백이 아니라 조선 백자의 회백색처럼 자연에서 온 색에 가까웠다. 짙은 회색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흰색 물감을 반복적으로 겹쳐 올렸다. 그래서 그의 백색에는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래 어둠이 있고, 그 위로 빛이 올라온다. ◆‘박서보만 보여주는 박서보미술관’ 아니다 미술관의 방향은 개관전부터 분명하다. 개관전은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박서보와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흐엉 도딘(Huong Dodinh·1945~)의 작품 42점을 선보인다. 박서보 25점, 호앙 도딘 17점이다. 전시는 내년 1월3일까지다. 두 사람의 그림은 색감부터 태도까지 묘하게 닮았다. 나란히 놓였는데도 좀처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흐엉 도딘은 광물 안료를 수십 차례 겹쳐 쌓으며 빛이 화면 안에서 드러나는 회화를 구축해온 작가다. 두 사람의 재료와 방법은 다르다. 박서보가 물에 불린 한지 위에 선을 반복해서 긋고 밀어내며 화면을 비워갔다면 호앙 도딘은 안료를 거듭 쌓아 올린다. 한 사람은 선을 반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색을 쌓는다. 그러나 반복과 절제를 통해 화면에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회화는 만난다. 두 작가의 인연은 박서보가 세상을 떠나기 약 3개월 전 시작됐다. 이전까지 서로의 작업을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은 언어도 문화적 배경도 달랐지만 작품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호앙 도딘은 박서보가 생전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가 됐다.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두 사람이 ‘비움’이라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창작은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전시는 지하 2층 ‘SPACE Ø’에서 시작해 지상 2층 ‘SPACE 2’, 3층 ‘SPACE 3’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두 작가의 작품에서 출발해 박서보의 흑색·색채 한지묘법을 거쳐 마지막에는 두 작가의 백색 계열 작품이 만난다. 검정에서 색으로, 다시 백색으로 향하는 동선은 박서보 회화의 변화와 함께 ‘비움이 어떻게 충만이 되는가’를 공간적으로 보여준다. ◆젊은 작가 발굴·여성작가 조명…교육·연구자 지원 박서보미술관은 한 작가의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에 머물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개관전에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흐엉 도딘을 선택한 것도 이 같은 방향과 맞닿아 있다. 유명 작가를 박서보와 병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직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작가, 특히 여성 작가들에게 적극적으로 문을 열겠다는 구상이다. 박서보가 생전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던 태도를 미술관 운영으로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박승호 이사장은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며 박서보가 권위나 관행보다 가능성과 재능을 보고 새로운 작가들에게 길을 열어주려 했던 정신을 강조했다. 미술관은 박서보의 작품과 자료를 연구·보존하는 한편 국내외 작가를 소개하고 교육·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박서보재단은 현재 작품 보존·관리와 아카이브 구축, 전시·출판 등을 진행하고 젊은 창작자와 연구자 지원사업도 펼치고 있다. 박 이사장은 “박서보가 돌아갔음에도 그의 정신이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로 미술관의 방향을 설명했다. ◆정원이 있는 미술관…“아버지가 가장 좋아했을 공간” 그렇다면 박서보 자신이 살아 있었다면 새 미술관의 어느 곳에 가장 오래 머물렀을까. 박 이사장의 답은 작품 앞이 아니라 ‘정원’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박서보에게 행복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는 일이었다. 작업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곳이 자연이었고, 그는 정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버지가 계셨어도 특별한 말씀은 안 하셨을 겁니다.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곳에 가서 한 10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계셨다면, 그게 아마 최고의 칭찬일 것 같아요.” 미술관 1층, 유리 너머로 나무와 풀들이 펼쳐진 공간을 바라보며 박 이사장이 말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여기 앉아 계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한편 연희동 주택가에 자리한 미술관은 개관에 앞서 이웃 주민들을 초청해 바비큐 파티를 연다. 개관 첫날인 21일에는 호앙 도딘과 박승호 이사장이 참여하는 ‘전시 토크’를 개최한다. 9월부터 12월까지 박서보의 일기와 편지를 따라 자신의 문장을 써보는 ‘마음을 채우는 글쓰기’, 명상과 앰비언트 음악, 차와 그림을 함께 경험하는 ‘마음을 비우는 드로잉’ 등 연계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입장료는 5000원. 2026/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