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뮤지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김희영 “사랑은 혁명적 에너지” 천장에서 내려온 철근 구조물 속, 1.6톤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모나 하툼(Mona Hatoum)의 'Remains to be Seen'은 전시 첫 장면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붕괴 직전의 건축 잔해 같으면서도, 그 사이를 지나치는 순간 마치 우주를 떠도는 작은 운석처럼 초현실적인 세계로 끌어들인다. 제주 서귀포 포도뮤지엄이 9일 개막한 특별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We, Such Fragile Beings)은 '와우'로 시작해 ‘우와’로 끝나는 감동의 여정을 선사한다. 전시의 출발점은 1990년, 보이저 1호가 64억 km 떨어진 심우주에서 촬영한 지구의 모습이었다. 칼 세이건이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 명명한 그 사진 속 지구는 먼지알갱이보다 작았다. 이 전시를 기획한 포도뮤지엄 김희영 총괄디렉터는 “가끔씩 우주의 스케일을 떠올리는 건 생각의 분모를 키우는 일”이라며, 일상에 갇힌 시선을 우주적 거리로 확장해 보자고 제안한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 당신이 아는 모든 이가 하나의 점 위에 있습니다.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는 64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진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사진 속 지구는 한낱 작고 창백한 푸른 점이었습니다. 그 작은 점 위에서 인류는 태어나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미워하다 결국 사라집니다. 우리는 때로 눈앞의 현실이 너무도 절대적으로 느껴져 일상에 압도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광활한 우주와 비교하면, 인간의 삶은 찰나보다 짧고, 먼지처럼 미미한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 겸허한 인식에서 출발했습니다."(김희영 총괄디렉터) [[[[:newsis_inyoung_center_end:]]]] 이 전시는 무겁고 파격적으로 시작하지만, 작가들의 시선 속에서 아름다움과 희망을 발견하고 폭력에서 치유로 나아가는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총 13명. 제니 홀저(Jenny Holzer), 로버트 몽고메리(Robert Montgomery), 모나 하툼(Mona Hatoum), 마르텐 바스(Maarten Baas), 사라 제(Sarah Sze), 애나벨 다우(Annabel Daou), 라이자 루(Liza Lou), 쇼 시부야(Sho Shibuya), 수미 카나자와(Sumi Kanazawa), 송동(Song Dong) 등 세계적 작가들과 함께 부지현, 이완, 김한영 등 국내 작가들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제1전시실: '망각의 신전' 전시는 의도적으로 불편한 현실부터 직시하게 한다. ‘망각의 신전’이라 이름 붙인 첫 공간은 증오와 폭력이 반복되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지만 작품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베니스비엔날레와 카셀 도쿠멘타를 석권한 모나 하툼, 권력 언어를 해부해온 제니 홀저(Jenny Holzer)가 문을 연다. 하툼은 난민의 시선으로, 홀저는 소셜미디어의 날 선 언어를 296개의 금속판에 각인해 현대사회의 민낯을 고고학 유물처럼 드러낸다. 라이자 루(Liza Lou)는 남아공 줄루족 여성과 함께 인종차별의 상징인 철조망을 수백만 개의 비즈로 덮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옥'을 만들어냈다. 애나벨 다우(Annabel Daou)는 시민 대화에서 길어 올린 일상의 언어로 분열 너머의 공통분모를 '우리'로 통합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2전시실 '시간의 초상' 두 번째 전시실은 시간을 ‘흘러가는 추상’이 아니라, 얼굴과 표정을 가진 구체적 존재로 불러낸다. 네 명의 작가인 수미 카나자와, 마르텐 바스, 사라 제, 이완은 저마다 다른 언어로 시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수미 카나자와(Sumi Kanazawa)는 연필로 빽빽하게 뒤덮인 신문 수백 장을 커튼처럼 이어 붙였다. 하루하루의 흔적이 켜켜이 쌓이며, 반복은 곧 시간의 질량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덜란드 디자이너이자 작가 마르텐 바스(Maarten Baas)는 이번 전시를 위해 시계바늘을 끝없이 조립하는 노동자들의 영상을 선보인다. 끊임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와 손놀림 속에, 초 단위의 칸막이에 갇힌 현대인의 초상이 겹쳐진다. 사라 제(Sarah Sze)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꿈속에서 공유하는, 놀랍도록 닮은 무의식의 풍경을 섬세하게 시각화한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도, 잠든 순간 펼쳐지는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직물처럼 이어진다. 이완은 560개의 흰 시계가 제각각 다른 속도로 째깍거리는 설치를 통해 각자가 체감하는 시간의 불협을 물리적으로 드러낸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처음 선보였던 이 작업은 빠르든 느리든 유일하게 동일한 진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고요하게 각인시킨다. ◆테마공간: 유리 코스모스, 우리는 별의 먼지다 포도뮤지엄의 시그니처인 테마공간이 이번 여정에도 고유의 호흡을 불어넣는다. ‘유리 코스모스’는 밤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수백 개의 유리 전구가 촘촘히 매달린 은하다. 이 전구들은 다양한 폭력의 생존자들과 치유자들이 함께 숨을 불어 만들어낸 유리 구체들이다. 관객이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기둥 센서에 숨을 불어넣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전구가 빛을 띠고, 그 빛이 연쇄처럼 번져 모든 전구가 차례로 깨어난다. 숨은 빛이 되고, 빛은 색이 된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하나둘 켜질 때마다 어둠 속에서 새로운 은하가 태어난다. 그 찰나의 장면은, 개인의 상처와 집단의 치유가 서로를 비추며 또 다른 세상을 함께 빚어낼 수 있음을 조용히 증언한다. 이어지는 ‘우리는 별의 먼지다’는 관객을 우주 한가운데로 이끈다. 거울로 둘러싸인 반원형 공간에 들어서면 LED 패널 수백 개가 벽을 감싸고, 붉은빛이 스며드는 가운데 먼 곳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울린다. 보이저 ‘골든 레코드’의 인사말이 55개 언어로 흐르고, 일출과 석양, 대지와 도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는 영상이 파도처럼 번져간다. 거울 속의 자신은 끝없이 복제되어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무수한 점들 속에 스며든다. 별의 먼지로 태어난 우리가, 서로를 비추는 작은 빛이 될 수 있음을 이 공간은 찬란하게 속삭인다. ◆3전시실:기억의 거울 3전시실은 포도뮤지엄의 ‘ACA in PODO’ 프로젝트로,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의 세계가 은하처럼 모였다. 부지현, 김한영, 송동, 쇼 시부야. 네 명의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서로 다른 언어와 질감으로 던진다. 부지현의 폐집어등은 바닷바람이 멈춘 듯한 하얀 바다를 만들어내고, 김한영의 화면에는 수천, 수만 번의 붓질이 축적한 시간이 빛의 알갱이처럼 박혀 있다. 송동은 베이징 철거 현장에서 건져 올린 낡은 문들을 기대어 세워 서로의 무게를 지탱하게 하고, 쇼 시부야는 뉴욕타임스 매일의 뉴스 위에 인간사의 격렬한 소란과 회화적 평온함을 봉인했다. 모두가 작은 일상의 반복이 품은 위로와 회복의 힘을 이야기하며, “부서진 세상에도 아름다움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은 우리의 소소한 시선 속에 숨어 있다”는 명료한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김한영(70)화백의 화면은 멀리서 보면 단색화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전혀 다른 우주가 열린다. 기름을 거의 쓰지 않은 유화 물감을 붓끝으로 찍어내며 쌓은 뿔 모양의 물감 입자들이 캔버스 위에서 별자리처럼 솟아올라, 트위드 천 같은 결을 직조한다. 김희영 디렉터의 입시미술 스승이기도 한 그는 “10년 전부터 이어온 작업이 이번 전시의 주제와 이렇게 맞물릴 줄 몰랐다”며 환하게 웃었다. ◆야외정원 새 조성 "LOVE IS THE REVOLUTIONARY ENERGY THAT ANNIHILATES THE SHADOWS AND COLLAPSES THIS DISTANCE BETWEEN US.” 야외 정원에는 로버트 몽고메리의 LED 문구가 낮에는 흰빛, 밤에는 환한 빛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2022년 루브르 박물관 튈르리 정원에서도 선보였던 이 한 문장은, 이번 전시의 여정을 관통하는 숨은 축이다. “사랑은 어둠을 소멸시키고, 우리 사이의 거리를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에너지다.” 이는 단순한 휴머니즘의 표어를 넘어, 복잡한 시대와 관계의 맥락에서 묘한 울림을 남긴다. 사랑이 때로는 한 개인의 운명을 바꾸고, 때로는 거대한 구조마저 흔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광고판을 시로 파괴하는 아티스트’로 불리는 몽고메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와 루브르 박물관 등 세계 무대에서 활동해온 영국 작가다. 그의 문장은 온라인에서 2억 회 이상 공유되며, 국경을 넘어 위로와 치유의 불빛을 전해왔다. 결국 이 한 줄은,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의 여정을 끝까지 걸어온 관객에게 사랑이야말로 가장 작지만 동시에 가장 거대한 힘임을 조용히 새겨 넣는다. ◆김희영 세계관 '공감'의 서사 김희영의 큐레이션은 유한한 삶 속에서도 이어지는 생명의 맥박을 감정의 진폭으로 직조한다. 2021년 시작된 ‘공감’ 시리즈의 네 번째 장인 이번 전시는, 7km로 축약한 지구 역사 속에서 불 사용 이후 인류의 시간이 1cm도 안 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압도적 시간 비율 속에서 인간은 한 줌의 ‘별의 먼지’이자, 결코 사소하지 않은 존재임을 빚어낸다. 김희영의 전시는 단순히 재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주제에 맞는 작가와 작품을 찾아내고, 설득해 한 방향으로 이끄는 기획력은 돈만으로 살 수 없는 영역이다. 유명 작가들의 작업을 ‘이 전시여야만 하는 자리’로 불러오는 힘, 그리고 때로는 불편한 시선에도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단단한 태도가 김희영을 전시 기획자로 올려세운다. ‘공감’ 시리즈는 매번 주제를 달리하지만, 그 뿌리에는 변하지 않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김희영은 이를 위해 매 전시마다 다른 장르와 국적, 세대의 작가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의 언어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낸다. 이번 전시는 우주적 시선에서 인간을 바라보되, 발걸음을 멈춰 서로를 비추는 ‘작은 빛’의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한층 확장된 스케일과 깊이를 품었다. 그의 전시는 예술성과 대중성의 경계 위에서, ‘인스타각’을 부르는 오늘의 감각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김희영이라는 이름이 만든 세계관이자, 관객이 함께 살아내는 시간의 기록으로 남는다. 광활한 우주 속, 부유하는 별의 먼지로 태어난 우리는 왜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가. 이 질문의 끝에서, 이번 전시는 서로의 빛이 될 가능성이 고요하지만 환하게 피어난다. 테마공간의 마지막, 벽면에 새겨진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가 조용한 명령처럼 남는다. ◆SK 제주 포도뮤지엄…100만 명 방문 2021년 개관한 포도뮤지엄은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이 총괄 디렉터를 맡아 전시를 펼치고 있다. ‘혐오’, ‘소수자’, ‘노화’처럼 무겁고 예민한 사회적 주제를 감각적으로 풀어내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향한 공감을 이끌어왔다. 덕분에 ‘제주에 가면 꼭 들러야 할 뮤지엄’으로 자리매김했고, 제주의 미술 문화 지형을 새롭게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4년간 누적 방문객은 100만 명을 넘어섰다. 서울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수준의 기획 전시를 선보이는 이곳은, 원래 SK㈜ 자회사 휘찬이 ‘다빈치박물관’으로 운영하던 제주 루체빌리조트 내 전시장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 탄생했다. 지상 2층·지하 1층, 연면적 2653㎡(804평) 규모에, 순수 전시공간만 440평에 달한다. 메인 전시장 1층은 층고 5.4m로, 대형 설치 작업도 거뜬히 품는다. 올해는 관람 경험을 확장하기 위해 주변 환경도 새로 단장했다. 앞뜰과 뒷뜰에 잔디 마당과 야외 공연장을 조성하고, 포도호텔로 이어지는 호젓한 산책로를 열었다. 야외 정원에는 로버트 몽고메리, 우고 론디노네, 김홍석의 조각 작품이 자리하며, 소나무 숲에는 덴마크 아티스트 그룹 ‘수퍼플렉스’의 그네가 곧 설치된다. 이번 전시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은 2026년 8월 8일까지 1년간 이어진다. 관람료 6000~1만 원. 2025/08/10
韓 현대미술, 한한령 넘다…박종규, 광동미술관 ‘외국인 생존 작가’ 첫 전시 “박종규는 동양 철학의 허무와 서양 정보 논리의 이진 체계를 시각 언어로 통합해온 작가입니다.” 중국 광저우 광동미술관 왕샤오창(王绍强) 관장은 박 작가를 ‘시각철학의 실천자’라 칭하며, 이번 전시를 “기술과 신체, 기억과 시간,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시대에, 사라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현존하는 존재들을 다시 감각하는 자리”라고 평가했다. 5일 광동미술관에서 개막한 박종규(59)의 개인전 '비트의 유령들'은 단순한 해외 초대전이 아니다. 광동미술관 개관 이래, 외국인 생존 작가로서는 최초로 바이에탄관 2층 전관을 단독 사용하는 대형 기획전이자, 한한령 이후 사실상 멈춰 있던 한국 현대미술의 중국 진출에 다시 불을 지핀 신호탄이다. 이날 뉴시스와 단독으로 만난 왕샤오창 관장은 “이번 전시는 단순한 작가 초청을 넘어선, 동아시아 예술 네트워크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1997년 개관한 광동미술관(Guangdong Museum of Art)은 중국 제3의 도시 광저우를 대표하는 공공 미술기관이다. 본관·바이에탄관·동산관 등 총 세 개의 전시관을 운영하며, 전체 건축 면적은 약 70,000㎡로,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기준 약 20,000㎡)의 3배를 웃돈다. 박종규의 전시가 열린 바이에탄관은 2021년 새롭게 개관한 신관으로, 중국 내 최신 미술관 건축 양식과 운영 시스템을 반영한 전시 플랫폼이다. 박 작가는 2층의 두개 공간 400여 평을 가득 채워 디지털 노이즈 기반의 회화와 미디어 설치작업을 대규모로 선보인다. 300호 크기의 대형 회화 20여 점, 영상 설치 40여 점을 포함해, 시트지와 물감을 겹겹이 쌓아 제작한 캔버스, LED 전광판, 몰입형 영상 룸 등이 관객을 맞이한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광동미술관은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술관 중 하나예요. 그런 공간에서, 살아 있는 한국 작가로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다는 건 정말 큰 영광이죠. 중국에서 한국 작가가 국가급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것 자체가 아주 드문 일이니까요.” [[[[:newsis_inyoung_center_end:]]]]전시장에서 만난 박종규 작가는 "제 인생에 있어 뜻깊은 전시이고 한국 작가로서도 매우 뜻깊은 전시”라며 감개무량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한국도 중국을 좀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고, 중국도 한국을 그렇게 크게 보지 않는 면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3년에 걸쳐 세 차례의 심사를 통과해 이 전시를 열 수 있었다는 건, 제 인생에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박 작가의 이 말은 단순한 해외 전시를 넘어 양국 문화 교류의 실질적인 가능성과 예술 외교의 장을 열었다는 자부심으로 읽힌다. 전시장 전체는 온통 하얀색으로 꾸며져, 마치 가상세계에 발을 디딘 듯한 비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박종규 작가는 “현실에서 살짝 떠 있는 느낌이었으면 했다”며 의도적인 연출이라고 했다. “인간이 만든 공간이라기보다는, 마치 비인간적인 정제된 세계를 상상하며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의도는 조명과 바닥 연출에도 직접 반영됐다. “실제로 처음엔 조도를 더 밝게 설정했어요. 하지만 미술관 쪽에서 어린이 관객들의 시각 적응 문제로 인해 현재 조도는 당초 계획보다 절반 정도인 45% 수준으로 조정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흰 바닥 위를 걸을 때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걷게 되는 경험을 이끌어내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은, 이번 전시가 '감각을 리셋하는 시각적 플랫폼’임을 시사한다. 광동미술관 개관 이래, 외국인 생존 작가로서는 처음 열리는 개인전. 폭우가 쏟아지던 평일 낮임에도 전시장은 북적였다. 아이 손을 잡은 부모들, 연인, 노년의 관객들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작품 앞에 오래 머물렀다. 전시제 ‘비트의 유령들’이라는 낯선 개념과 달리, 중국 관객들은 이 ‘비가시적 회화’를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중국은 QR코드에 사는 나라예요. 그래서 이 전시는 본능적으로 이해된다"는 한 관람객의 말처럼 디지털 감각에 훈련된 도시인들은 박종규의 유령들을 ‘감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전시장을 찾은 한 20대 남성 관람객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마치 잡음 같은 노이즈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게 시각 언어로 전환되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끊어진 선들, 파열된 단편들이 결국 하나의 시간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경험이었어요.” 그는 작품을 “손끝으로 느껴지는 전자파장 같았다”고 덧붙이며, “소리의 파동 같기도 하고,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그냥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시간과 감각을 체험하는 전시같다"고 했다. 다른 20대 여성 관람객은 “이런 현대적인 방식의 한국 작가 전시는 처음"이라며 "확실히 독특하고 개념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미술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감각으로 연결해주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걸 느꼈다"는 그녀는 이번 전시가 갖는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도 덧붙였다.화가이자 평론가인 왕샤오창 관장은 이번 전시 서문을 직접 쓰고 박종규를 “회화, 설치, 미디어아트를 넘나드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 작가”라고 소개하며, 특히 ‘비트 스트림(bitstream)’ 개념을 박 작가 작업의 핵심 키워드로 짚었다. 그는 "데이터 전송의 리듬을 뜻하는 이 용어는 인간 지각과 존재의 기본 단위로서의 상징으로, 이번 전시에서 디지털 신호, 심장 박동, 의식의 흐름 등 다층적 생명의 리듬을 아우른다"며 이렇게 분석했다. “박종규는 '팬텀(phantom)', 즉 기술사회에서 점차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존재 상태를 조명한다. 디지털 파편으로 구성된 이미지 안에서 관객은 ‘조용히 뛰는 심장’을 볼 수 있고, 지연된 시간의 간극에서는 ‘사라진 몸이 남긴 움직임의 잔향’을 들을 수 있다.” 이 전시는 3년 전부터 준비돼 왔다.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서구 바깥의 감각 회로를 확장해온 박종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 전시가 무산된 뒤 중국과의 협력에 집중했다. 한한령 이후, 중국 국립미술관의 벽을 넘은 첫 번째 한국 작가가 된 박종규는 자신의 회화가 국경을 넘어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준다. “앞으로 우리는 두 개의 세상을 살아야 해요. 현실과 가상.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들. 그것이 제가 말하는 유령입니다.” 중국 첫 진출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박종규는 올해 하반기, 이집트·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더욱 확장할 예정이다. 한편 박종규 작가는 계명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했다. 대구시립미술관과 후쿠오카시립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 아모리쇼 포커스 섹션 선정, 러시아 모스크바국립아카데미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미술관, 멕시코 국립미술관, 쿠바비엔날레 등 국제 무대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제3회 하인두예술상을 수상했다. 광동미술관 박종규 개인전은 오는 10월 8일까지 계속된다. 2025/08/05
박남희 관장 “AI 시대, 백남준은 이미 예언자였다” “진짜 AI는 인간을 닮아야 해요. 백남준은 이미 거기까지 본 사람이죠.”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려는 듯 밀려드는 시대,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오히려 ‘감각’과 ‘상상’을 호출한다. 개관 17주년을 맞은 지금, 그는 인지도와 물리적 한계를 넘어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 ‘연결과 확장’이라는 백남준의 정신을 동시대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박남희 관장을 만났다. 부임 2년 차인 관장은 취임 직후부터 아트센터의 물리적·인지적 한계를 냉정하게 짚었다. “서울에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 협소한 전시 공간, 부족한 예산… 모든 게 센터 활성화의 걸림돌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였습니다. 기업과 지자체를 설득했어요. ‘백남준을 품은 경기도, 그 경기도가 앞장서야 하지 않겠냐’고요.” 현대자동차와의 공동 전시 프로젝트 ‘트랜스-로컬 시리즈’를 통해 3년간 6억 원을 확보했고, 용인시와 함께 9억 원 규모의 기획전 '백남준의 도시'도 성사시켰다. 그는 “단순한 예산 유치가 아니라, 백남준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협력 기반을 만든 일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시 공간 협소…1700여평 별관 추진" 하지만 원형 동선과 피아노 형태의 구조는 전시의 유연성을 떨어뜨린다. 이에 박 관장은 별관 신축을 추진하고 있다. 원래 3400평이었던 부지로 현재 센터 전시공간은 약 700평에 불과하고, 피아노 형태 건축물의 구조상 작품 설치에 제약이 많다. 박 관장은 별관 신축을 공식화하며, 경기도와 함께 3단계 실행계획을 추진 중이다. "기존 부지 옆 언덕에 전용 전시관을 짓고, 현재 건물은 연구와 아카이브 중심으로 재편할 계획입니다. 2032년 탄생 100주년을 목표로 삼았어요.” “21세기 유산 공동체 시대, 기술과 예술이 융합된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백남준이 그렸던 경계 없는 예술, 초연결성, 다성성은 지금이야말로 실현 가능한 언어예요.” 그는 또한 “센터의 가장 큰 과제는 인지도 격차와 인프라의 빈틈”이라며, SNS, 생활형 홍보, 무장애 산책로 조성, 교육 다양화 등 체류형 공간 개선 전략을 강하게 밀고 있다. “젊은 세대가 미디어아트를 이해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것보다, 이곳에 왔기 때문에 백남준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백남준은 예언자였다” “향후 100년 안에, 백남준처럼 예술을 통합적으로 실천한 인물은 다시 없을 겁니다.” "음악에서 출발해 시각예술, 미디어, 무용, 문학, 철학까지… 백남준은 예술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린 ‘총체 예술가’였어요. 더 나아가 동양 철학과 서양 과학(양자역학, 이진법, 라이프니츠 사상)을 넘나들며, 지금-여기의 문제를 통과해 미래를 예감했다. “현재의 기술 조건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실험했고, 그 예술은 늘 소통의 구조를 가졌어요.” 챗GPT와 인간을 비교하는 시대, 박 관장은 백남준의 예술이 “기계와 인간 사이의 간극을 여전히 유효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박남희 관장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기술의 진보보다 더 중요한 건 인간의 직관이며, AI 시대일수록 예술은 더욱 ‘백남준적’이어야 한다는 확신이다. “예술의 미래는 과거에 있어요. 백남준은 예언자였어요. 백남준의 예술은 기술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동시에 인간 그 자체를 드러내는 일이었죠.” 백남준아트센터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미디어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1932~2006)의 예술세계를 기념하고 연구·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경기문화재단 산하의 미술관이다. 2008년 10월 8일 경기도 용인에 문을 열었으며, 지상 3층·지하 2층 약 5600㎡ 규모로 다양한 전시, 교육, 연구를 진행해왔다. 상설전, 기획전 외에도 ‘백남준 예술상’, 방대한 아카이브,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백남준의 예술정신을 동시대에 잇고 있다. 아트센터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정체성 아래, ‘21세기 예술 플랫폼’으로의 진화를 본격화하고 있다. 백남준이 예언한 초연결성과 다성성은 오늘날 더욱 실현 가능한 언어가 되었다. 박 관장은 이 철학을 바탕으로,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 통신사, 정원, 도서관, 은행, 대중예술가 등 예술 밖의 주체들과의 협업은 물론,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한 연대와 교류도 이어간다. 이를 바탕으로 아트센터는 더 많은 실험, 더 많은 연결, 더 많은 참여, 더 많은 공유가 이뤄지는 ‘열린 무대’를 지향한다. 전시, 교육, 체험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동시대 예술의 플랫폼으로 기능하기 위한 실천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의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비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 말은 2002년, 백남준이 경기도와 미술관 건립을 확정하며 직접 도면 위에 남긴 문장이다. ◆"미술관은 소란스러워야…별관 신축 추진” 박 관장이 구상 중인 아트센터의 미래는 ‘조용한 보존 공간’이 아니다. “삼대가 슬리퍼 끌고 놀러 와 전시 보고, 근처 맛집도 들르는 곳, 그게 바로 백남준이 살고 싶던 집이었을 거예요.” “저는 이 공간이 백남준을 기리는 기념관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실험실이 되기를 원해요.” 백남준아트센터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조용한 기관으로 여겨졌지만, 박 관장 부임 이후 전시는 물론 관람객 수, 국제 협력까지 전방위 확장을 꾀하고 있다. 2024년 기준 관람객은 18만 700명을 돌파했고, 올해 상반기만 해도 전년 대비 276% 상승한 12만여 명이 센터를 찾았다. “우리가 백남준을 더 자주, 깊이, 그리고 친근하게 보여줄 공간이 부족했습니다. 당초 3단계로 계획된 센터가 1단계만 완공된 채 멈췄기 때문이죠.” 2032년 백남준 탄생 100주년을 목표로, 국제적 건축가와 함께 랜드마크성 별관을 신축하고, 보이는 수장고·대중 체험 공간·교육시설 등 미래형 인프라를 갖춘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다가오는 2026년 서거 20주기, 그리고 2032년 탄생 100주기를 향해 박 관장은 장기 로드맵을 실현해가고 있다. 현재 센터는 동선의 불편함, 진입로 부재, 외관 혼잡 등 현실적 과제를 안고 있다. 그는 리모델링과 공간 확장, 관람 환경의 대대적 전환을 통해 ‘살아 있는 미술관’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26년 20주기 전시 “창고 속 백남준 꺼내 바람이라도 쐬게 하자” "컬렉터치고 모두가 한두 점씩은 가지고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없었어요. 내년엔 밖으로 꺼내볼까 합니다.” 2026년 백남준 20주기를 맞아, 아트센터는 ‘외부의 백남준’을 모아 전시할 계획이다. 소장자와 갤러리들이 보유한 백남준 작품을 빌려와, ‘백남준이 다시 말하기 시작하는 공간’을 연다는 구상이다. 특히 박 관장은 내년 백남준 서거 20주기를 전환점으로 삼고, 전 세계 유관기관과 연계한 대규모 국제 행사들을 준비 중이다. 2026년에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현대미술관,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미술관과의 공동 전시도 예정돼 있다. 백남준의 목소리를 되살리기 위한 학술심포지엄, 단행본 출간, 연구서 번역 프로젝트도 병행된다. “해시태그는 #NamJunePaikVox. 백남준의 목소리가 언제 어디서나 들리게 하는 거죠. 그를 다시 부른다는 건, 예술이 다시 시작된다는 뜻이니까요.” 그는 '백남준예술학'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제 적인 백남준예술학회를 만들고 백남준의 예술사적 가치를 재논의해야 한다는 의지도 보였다. “다른 나라들은 관련 학교도 있는데, 왜 우리는 백남준 이름을 내건 학회나 교육기관이 없느냐는 생각을 했어요. 국제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왔을 때 그들이 연구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백남준은 단순히 ‘세계적인 미디어 작가’로는 다 담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국가 차원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지원과 장기적인 비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예술상, 이름만 남기지 않기 위한 개편 박남희 관장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백남준예술상’의 리뉴얼을 꼽았다. 2009년 제정된 이 상은 2024년부터 새로운 철학 아래 재정비되었다. “예술가의 이름이 붙은 상이라면, 단순히 작품성만이 아니라 그 예술가가 가진 철학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백남준은 예술가이자 철학자였고, 전쟁과 차별에 반대하며 세계를 연결하려 했죠. 그런 정신을 되살리는 상이 되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리뉴얼된 예술상은 '미술사에 족적을 남기는 혁신’과 함께, ‘인류 평화에 기여한 예술’이라는 가치를 함께 기준으로 삼는다. 그 상의 새로운 첫 수상자는 1936년생의 미국 작가 조안 조나스(Joan Jonas). “조나스는 여성과 생태를 주제로 오랫동안 작업해왔고, 백남준처럼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며, 탈권위적이고 연결적인 예술 세계를 보여준 인물이에요. 예술의 혁신성과 윤리성을 모두 갖춘 존재였죠. 오는 11월 그의 전시를 개최합니다." 앞으로도 이 상은 백남준 이후의 예술정신을 계승하는 예술가들, 그리고 예술을 통해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인물들을 꾸준히 조명할 계획이다. ◆ 예산과 제도의 벽, 그 너머로 하지만 백남준아트센터가 안고 있는 행정적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현재 센터는 경기문화재단 산하 7개 미술관 중 하나로, 기관별 특성과 무관하게 일괄적으로 예산과 인력이 배정되는 구조에 놓여 있다. 2024년 기준 센터의 연간 예산은 약 30억 원. 국제적 교류와 미디어 전문성을 지닌 기관으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각 미술관은 저마다 다른 정체성과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똑같은 기준으로 예산과 인력을 배분받는 건 문제가 있죠. 백남준아트센터는 국제 교류와 미디어 중심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기관입니다. 그 특성에 맞춘 별도 기준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박 관장은 이 문제를 단순한 ‘불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행정적으로 준비하고 제도화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설득하고 변화시켜야 할 과제라고 생각해요. 반드시 가야 할 길입니다.” ◆"나는 Park Namhee…백남준 딸" 박남희 관장은 2023년 가을부터 이 센터의 5대 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종종 자신을 '백남준의 딸'이라 부른다. 영어 이름 ‘Namhee Park’은 백남준(Nam June Paik)과 어딘지 닮아 있다. “제가 영어로는 Park Namhee잖아요. 백남준 선생님은 Nam June Paik. 첫 글자에 두 개가 같다는 건 이건 운명이죠.” 그는 백남준의 딸 같은 존재라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와 함께 일하며,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팀장 면접에서 낙방했지만 이후에도 백남준을 놓지 않았다. 홍익대 예술학 박사 출신으로, 청주공예비엔날레(2013), ACC 교육사업본부장(2016~2020), 제주비엔날레 예술감독(2022), 가파도 AiR 총감독(2023) 등을 거친 실험예술 기획자다. 미디어아트에 대한 오랜 애정과 리더십으로, 취임 2년 차를 맞은 지금, 센터를 새로운 도약의 길로 이끌고 있다. “그의 이름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처음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십수 년을 돌고 돌아 준비했죠.” 그의 말처럼, 박 관장의 이력은 단순한 커리어를 넘어선 일종의 '사적 소명'에 가깝다. 백남준의 정신을 해석하고, 동시대에 이어가기 위한 다층적 실천이었으며, 그 총합이 지금의 관장직으로 이어진 셈이다. “연임에 대해서요? 책임감이 큽니다. 아직 다 못 했어요. 전시, 별관, 글로벌 네트워크… 무엇보다 백남준이라는 이름이 오늘날의 기술과 감각, 그리고 인간의 윤리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박 관장은 임기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연임에 대해 묻자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2000년, 일주아트하우스 시절 ‘미디어아트연구모임’을 주도하며 이 분야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때부터 백남준은 그의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의 화두였다. “운 좋게도 지금, 그 오랜 주제와 함께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요. 백남준은 ‘정보초고속도로’를 예견하며 언제나 새로움을 향해, 고정된 방식을 벗어났죠. 그런 백남준을 연구하고 알리는 일은 저에게 ‘일생일대의 만남’ 같은 일입니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 전시장 1층, 백남준이 남긴 말이 있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지금 미래를 투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장은 여전히 관람객을 붙잡는다. “시간을 눈으로 보게 하고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백남준의 이 말처럼, 박남희 관장 역시 지금 이곳에서 시간을 축적하고 있다. 그에게 백남준아트센터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다. 하나의 ‘시간 실험실’이다. 백남준이 그랬듯, 그는 시간 속에 무언가를 묻고, 키우고, 기다리는 방식으로 이 기관을 운영하고자 한다. 그러니 ‘임기’는 시간의 끝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에 가깝다. 관장직을 맡으며 가장 힘든 점은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연구자로서의 삶을 꿈꾼다. “계속 연구하고 싶어요. 전시도 하고, 책도 쓰고 싶고요.” 박남희가 지키려는 것은 단지 한 예술가의 이름이 아니다. 그가 지키는 것은 그 예술이 남긴 질문, ‘기술 너머의 인간성’이다. 실험성과 대중성을 아우르는 기획, 포용적 감상의 교육, 미디어아트의 미래 생태계 조성까지. 이제 ‘박남희’라는 이름도 ‘백남준의 시간’을 함께 빚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되고 있다. “백남준이 열어준 미래를 지속하고, 더 깊고 넓게 지키기 위해 백남준아트센터는 차분하면서도 활발하게 그의 예술적 유산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일부이자 미래에게 건네줄 ‘지구의 오늘’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그 태도와 방법을 익혀가는 터전. 바로 여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백남준아트센터의 존재 이유겠지요.” 2025/08/03
또 외국인 감독…한국 비엔날레 리더십의 ‘불편한’ 공식 “언제까지 한국의 비엔날레에서 한국 큐레이터들은 역차별을 받아야 하죠?” 익숙하면서도 아픈 질문이다. 모 미술비평가의 이 물음은, 국제적 위상을 자랑하는 한국의 비엔날레에서 정작 한국인 큐레이터는 배제되는 현실을 다시 꺼내 묻는다. 최근 부산비엔날레가 2026년 전시감독으로 아말 칼라프(Amal Khalaf)와 에블린 사이먼스(Evelyn Simons)라는 두 해외 큐레이터를 선정했다. 조직위는 이들이 “사회적 실천과 도시문화, 지역성과 예술 간 관계를 탐구해온 역량 있는 감독”이라며, 여성 큐레이터 듀오이자 중동과 유럽의 복합문화적 배경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했다. 둘은 ‘불협하는 합창(Dissident Chorus)’이라는 주제로 부산 전역을 무대로 한 도시형 융합 전시를 예고했다. 한국 대표 비엔날레에서 반복되는 외국인 감독 인선은, 이제 불편한 공식처럼 여겨진다. 부산비엔날레는 최근 수년간 외국인 공동감독 체제를 이어왔다. 2024년 뉴질랜드 출신 베라 메이와 벨기에의 필립 피로트, 2018년에는 프랑스의 크리스티나 리쿠페로와 독일의 요르그 하이저가 지휘했다. 광주비엔날레도 다르지 않다. 2024년 프랑스 미술평론가 니콜라 부리오, 2026년에는 싱가포르 출신 작가 겸 큐레이터 호 추 니엔이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이쯤 되면 일종의 ‘공식’처럼 굳어진다. 한국의 주요 비엔날레들이 경쟁적으로 외국인 감독을 초빙해온 흐름은 낯설지 않다. 최근 10년 간의 주요 국제 비엔날레를 살펴보면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서울시립미술관) 모두 외국인 큐레이터에게 지휘봉을 맡긴 사례가 대부분이다. ‘글로벌 감각’과 ‘국제적 네트워크’를 이유로 내세운 선택들이지만, 정작 ‘한국의 컨텍스트’를 반영하는 데 있어 오작동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국제화는 중요하다. 낯선 시선이 만드는 창의적 균열과 세계적 연결성은 비엔날레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국제화’가 언제부터인가 ‘로컬의 부재’를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2024 광주비엔날레'다. 당시 예술감독은 프랑스 스타 기획자 니콜라 부리오. 그는 한국 전통예술 ‘판소리’를 모티프로 삼았지만, 정작 그것을 ‘판과 소리(Pan & Sound)’로 번안하며, 한국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감각으로 제시했다. 한국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타자의 해석으로 로컬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비엔날레 리더십의 편향은 예술계 전체의 구조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왜 한국의 비엔날레에서는 한국인 큐레이터가 주도하지 못하는가? 한국 예술의 동시대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보조적 위치에 머물러야 할까? 한국감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6년 부산의 윤재갑, 2021년 광주의 이숙경, 2022년 부산의 김해주 감독. 그러나 이들 역시 테이트 모던 등 유럽 미술계와 중국 미술계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결국 ‘국제 네트워크’가 가장 강력한 선정 기준이라는 점만을 재확인하게 된다. 국제적 인지도가 없는 한국인은 비엔날레 감독으로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전례는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한국감독과의 불협화음도 있었다. 2016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이었던 윤재갑 (중국 하우아트뮤지엄 관장)은 전시 이후 집행위원장과의 갈등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하며 “비엔날레의 독립성과 공공성이 무너졌다”며 연임 반대를 호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는 "국내외에서 많은 조직과 행사를 경험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들이 사무국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폭로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13년에는 심사 1순위였던 한국인 전시기획자 김성연을 제치고 2위였던 프랑스 큐레이터 올리비에 캐플랑이 전시감독으로 낙점되면서 공정성 논란이 일었다. 당시에도 "왜 한국 비엔날레에 한국 감독은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제기됐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외국인 감독 인선을 ‘국제성’이라는 명분 아래 반복되는 외국인 의존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국내에도 리서치 기반의 독립 큐레이터들이 왕성히 활동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좀처럼 비엔날레 리더십의 전면에 나서지 못한다. 이건, 구조적 배제다. 물론 외국인 감독 체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왜 한국 비엔날레에는 한국 감독이 없죠?”라는 질문은 점점 더 뼈아프게 돌아온다. "우리나라의 큐레이터들을 키울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럴 기회를 외국인들에게 내 주는 것이 아쉽다. 외국인이 맡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은 아예 못할 거라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역차별이 문제다." 비엔날레는 세계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세계’에 한국 기획자의 언어와 감각이 배제된다면, 그것은 세계성이 아니라 외면성이다. 외국인 감독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양한 관점과 글로벌 협업이 중요한 오늘날, 국적만으로 자격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흐름이 유독 ‘한국인만 배제되는’ 구조처럼 반복될 때, 그것은 단지 우연이나 실력 차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로컬에서 출발해 큐레토리얼 실천을 축적해온 이들은 좀처럼 ‘공식’의 바깥에 있다. 지방 미술관, 독립공간, 지역 페스티벌에서 묵묵히 현장성과 지역성을 탐구해온 큐레이터들은 매번 자격 밖으로 밀려난다. 기획자로서의 감각과 안목은 ‘국제 전시 이력’이라는 자격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사장된다. 30년 전 창립 멤버로 참여했던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다시 돌아온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제 진입에 방점을 찍어온 30년을 넘어, 이제는 K-미술문화의 정체성을 구축할 때다.” ‘광주 정신’과 ‘예향’의 지역 정체성을 예술로 승화시키겠다는 그의 말은, 로컬 리더십 복권의 선언처럼 들린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비엔날레는 한국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시점이다. 동시대성과 지역성, 두 축을 아우를 한국형 큐레이션과 미학적 자존감이 절실하다. 비엔날레는 시민 세금으로 치러지는 공공행사다. 그러나 기획 방향, 작가 선정, 예산 집행의 과정에서 ‘공공성’보다 ‘브랜딩’과 ‘글로벌화’가 우선되는 건 아닌가. 그리고, 늘 제기되는 질문 하나. “왜 한국의 유능한 큐레이터들은 해외 비엔날레에서만 러브콜을 받을까?” 정작 자국의 비엔날레에서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한국 큐레이터들. 그래서 ‘국내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건, 비엔날레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국제성의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한국 큐레이터는 아직,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 채 문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다시 우리 뿌리를 확인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세계가 공명할 수 있는 지역성이다. 로컬의 언어를 믿고 존중하는 일. 그 지점에서 비엔날레의 미래는 시작된다. 언제까지 한국의 비엔날레에서, 한국 큐레이터들은 무대 밖에 있어야 하나? 이 질문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 우리가 던져야 할 가장 동시대적인 ‘큐레이션’이다. 2025/07/29
윤범모·유홍준 70대 문화기관장의 귀환…경륜인가, 회귀인가 최근 문화계에 익숙한 이름 두 사람이 다시 공공문화기관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에,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됐다. 두 사람 모두 70대 중후반. 문화행정의 경험과 상징성을 갖춘 이들의 귀환은 문화계에 경륜과 안정감을 더할 수 있을까. 아아니면 세대교체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신호일까. 광주비엔날레를 이끌게 된 윤범모(74) 대표는 민중미술 연구를 기반으로 오랜 시간 미술사학자로 활동해왔다. 1995년 비엔날레 창설 당시 특별전 큐레이터로 참여했던 그는, 이번 선임을 통해 30년 만에 다시 같은 무대에 섰다. 국립현대미술관장, 다수의 비엔날레와 대형 전시 기획자로서의 경험은 비엔날레의 정체성 강화라는 재단 측 기대와 맞닿아 있다. 윤 대표는 문재인 정부 시절 국현 관장으로 임명됐으며,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자진 사퇴한 이력도 있다. 2023년 3월, 그는 “시절이 바뀐 지금 내 소임도 끝난 듯해 떠납니다. 할 말은 많지만 참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정권 변화에 따른 간접적인 압박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유홍준(76)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문화재청장을 지낸 뒤,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2022년 대선 당시에는 이재명 후보 캠프에서 K-문화강국위원장을 맡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그는, 문화유산 해설의 대중화에 기여한 대표적 미술사학자다. 이번 박물관장 선임에서도 그의 상징성과 국민적 신뢰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분야에서 뚜렷한 전문성과 이력을 가진 이들의 귀환을 단순히 ‘회전문 인사’로만 보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70대 남성’, ‘국공립기관 경력’, ‘미술사학자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는 현재 공공기관 리더십의 구조가 얼마나 협소한지 또한 보여준다. 동시대 미술계는 급변하는 감수성과 다층적 요구에 응답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젠더 감수성, 탈중심성, 생태 윤리, 기술·미디어 변화 등 새로운 시대적 화두와 감각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리더십이 절실하다. 단지 ‘경험 있는 리더’가 아니라, ‘다르게 듣고 말할 수 있는 리더’가 요구되는 시대다. 특히 공공문화기관의 수장은 단지 행정가가 아니라, 시대와 감각을 매개하는 공적 리더여야 한다. 이제 막 임기를 시작한 두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지난 경험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듣고, 다시 말하는 능력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복귀한 두 기관장은 모두 평론가·전시기획자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윤범모 대표는 국공립관과 비엔날레에서 기획 경험을 쌓은 대표적 현장형 기획자이며, 유홍준 관장 역시 미술평론가이자 문화유산 해설을 통해 대중적 기획과 해석의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일각에서는, 공공문화기관 수장에게 필요한 역량은 기획자형 리더보다 ‘CEO형’ 리더십이라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국립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수백억 원 규모의 조직을 운영하는 기관장의 역할은 단순한 전시 기획이나 방향 제시를 넘어, 기부 유치, 조직 운영, 문화마케팅, 인력 관리 등 총체적 공공경영 능력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과도한 전시 개입은 오히려 전문 학예인력의 자율성과 조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결국 이번 인사는 단지 '누가 다시 왔는가'가 아니라, '그 자리에 무엇이 요구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기관장의 귀환은 세대교체나 경륜의 문제가 아닌, 역할과 리더십 구조에 대한 본질적 재점검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변화하는 문화생태계 안에서, 이들의 리더십이 단절이 아닌 연결, 반복이 아닌 전환으로 작동하길 기대한다. 경륜은 의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감각과 호흡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경험은 금세 과거가 되어버린다. 2025/07/21
'살아있는 조각의 현장' 세렝게티 공존의 미학 세렝게티는 살아있는 조각의 현장이다. 7월 14일 밤,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텐티드 롯지 천막 숙소. 동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뒤척이다가 맞은 새벽. 그리고 오전 8시, 사파리 짚차에 올라 세렝게티에 들어서는 순간, 관광객은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니다. 거대한 야생의 무대에 발을 딛는 그 찰나, 우리는 ‘탐험가’가 된다. 탐험은 곧 발견의 전율로 이어지고, 발견은 본능을 깨운다. 인간은 환호하지만, 동물들은 무심하다. 코끼리도, 기린도, 얼룩말도, 오직 자신에게 집중한다. 이곳에선 모두가 자기 존재의 리듬에 충실하다. 나무, 풀, 바람, 동물… 그들은 이곳의 원주민이다. 방문자인 인간은 다만 경외심을 품은 방문자일 뿐이다. 여긴 말하자면 ‘거대한 야외 조각장’이다. 모든 존재가 저마다의 조형으로 우뚝 서 있다. 기린의 목선, 얼룩말의 무늬, 코끼리의 발걸음, 사자의 침묵까지. 세렝게티는 단지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각의 현장이다. 이 거대한 초원 위에서 인간은 절대 짚차에서 내릴 수 없다.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을 품고 있으며, 동물들은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초원 위 수많은 동물들은 군더더기 없이 산다. 얼룩말은 물가로 다가서기 전 조심스레 경계를 세운다. 대장은 언제나 선두에서 발걸음을 확인하고, 무리 전체의 안전을 확인한 뒤 물을 마신다. 그 경이로운 질서 앞에서 인간은 숨을 죽이고 바라본다. 물소리, 발자국 소리, 그리고 아주 작은 코끝의 경계들. 이들은 ‘협동’이라는 말보다, ‘조화’라는 말에 가깝다. 생존의 리듬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감동의 순간이었다. 기린은 나뭇잎을 뜯어먹으며 풍경이 된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캔버스에 그려진 긴 붓질 같다. 그 우아한 선은 움직이는 드로잉, 살아 있는 선(線)이다. 코끼리는 길을 가로막지 않는다. 코끼리 무리는 마치 고대의 군대처럼 움직인다. 그저 묵직하게 지나간다. 존재 자체로 길이 되는 것이다. 서열, 간격, 속도 모두가 완벽하게 맞물려 있다. 작은 아기 코끼리는 대열의 중앙에, 가장 안전한 위치에서 보호받는다. 그 장면은 마치 대지 위의 살아있는 '고대 조각' 같다. ‘세렝게티는 살아있는 조각의 현장’이라는 문장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다. 하마가 사는 연못에 도착했을 땐, 말로 다 할 수 없는 냄새가 먼저 풍겼다. 고요하지만 결코 평온하지 않은 물 위. 둥그런 머리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물살을 가른다. 이 정적인 무리도 일종의 살아있는 조각이다. 자연은 시각뿐 아니라 후각으로도 조각된다. 아름다움이란 때때로 불쾌함과도 공존한다는 진실을 이 하마들은 말없이 증명했다. 조각은 시각만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전체로 존재를 각인시킨다. 그리고 사자. 햇살과 바람을 이불삼아 대지를 점령한 사자들은 인간의 소리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리 없는 위엄이었다. 죽은 듯이 쉰다, 그것이 사자의 품격이다. 숨 쉬는 정적 속, 생존은 완벽히 작동 중이었다. 죽은나무 그늘 아래 무리를 이룬 채, 때로는 눈만 깜빡이며, 꼬리 한 번 휘저으며 시간을 견디는 존재들. 나른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무리, 가끔 머리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는 그 느릿한 움직임. 움직이지 않기에 더 강하고, 군림하지 않기에 더 위엄 있다. 강함이란 본래 조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드러누운 모습은 마치 ‘자연의 왕’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처럼 보였다. 그 앞에서 인간은 그저 입을 다문 채 숨죽여 바라보는 카메라 뒤의 방문자일 뿐이었다. ‘세렝게티’라는 이름은 마사이족 언어로 ‘끝없는 평야(Siringet)’를 뜻한다. 탄자니아와 케냐에 걸쳐 있는 약 3만㎢ 규모의 생태계로, 지구상에서 가장 광활한 야생동물 서식지 중 하나이며, 198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사파리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다섯 종류(사자, 코끼리, 버팔로, 표범, 코뿔소)의 야생동물을 게임 드라이브하면서 보는 것이 목표로, 표범이 제일 보기 어렵다고 한다. 이곳의 풍경은 수평선을 기준으로,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조각까지도 정교한 조형물처럼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아카시아 나무는 초원의 수호자 같다. 마치 마사이족처럼 대지를 지키고 선 조형물. 멀리서 보면 그늘 하나의 위치까지 계산된 듯, 공간과 생명이 한데 엮인 풍경이 된다. 한낮의 세렝게티. "하마다! 사자다! 코끼리야! 얼룩말이야!" 쉴 새 없이 터지는 탄성은 인간의 것이었고, 평온은 동물의 것이었다. 그 뜨거운 감탄조차 그들의 일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가 관찰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감각. 야생은 구경거리가 아니다.'자연은 말없이 열려 있지만, 결코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인간은 이토록 환호했을까. 기린 하나, 얼룩말 몇 마리만 나타나도 짚차 위에서 터지는 박수와 감탄. 그것은 단지 ‘희귀한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원시성과 야생성, 문명과 제도의 틈에 억눌려 있던 ‘본래의 나’를 깨우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렝게티에서의 환호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내가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짚차 위에서 환호하다, 어느 순간 조용해지는 사람들. 기린과 사자, 얼룩말과 코끼리, 하마까지…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말이 아니라 움직임이었고, 감정이 아니라 태도였으며, 표현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였다. 문명의 도시에서 인간은 스케줄과 의무, 타인의 시선에 얽매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 초원 위에서는,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자기애가 회복되고, 존재감이 되살아나는 곳. 세렝게티는 인간이 스스로를 ‘리셋’하는 공간이다. 이제야 새긴다. 존재란, 그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세렝게티에서의 하루는 하나의 전시였다. 대지라는 갤러리, 동물이라는 조각, 바람이라는 큐레이터, 그리고 인간은 단지 관객이었다. 자연은 연출자가 아니었고, 우연은 곧 질서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또 하나의 이유. 그것은, 인간과 동물이 암묵적으로 맺은 하나의 약속 덕분이다. 이 거대한 초원 위에서 인간은 절대 짚차에서 내릴 수 없다.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을 품고 있으며, 동물들은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서로의 삶을, 서로의 거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약속. 공존의 미학은 '약속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침묵의 예술'이었다. 2025/07/15
안토니 곰리 GROUND, 나를 비추는 조각의 방 “판테온이 닫힌 무덤이라면, GROUND는 열려 있는 무덤이자 생명의 장입니다.” 영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말이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SAN. 플라워 가든 아래로 천천히 이어지는 길 끝에, 땅속 깊이 묻힌 거대한 돔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직경 25미터, 높이 7.2미터. 콘크리트로 빚은 이 원형의 공간은 무덤 같지만, 그 안엔 생명이 숨 쉰다. 지난달 문을 연 ‘GROUND’는 곰리의 세계 최초 상설관이다. 건축가 안도 타다오와 협력해 만든 이 장소는 빛과 철, 침묵과 바람, 시간과 감각이 한 호흡으로 공존하는 조각의 성소다. ◆몸이라는 묘석, 시간이라는 조각 지하로 이어지는 좁고 어두운 동굴 같은 통로를 지나면, 천창 위로 빛이 쏟아진다. 빛은 해시계처럼 공간을 가르고, 곰리의 철제 인체 조각 일곱 점 위에 서서히 내려앉는다. 조각은 눕고, 앉고, 웅크리고 있다. 죽음을 말하는 형상이라기보다, 그저 시간 속에 숨을 고르는 존재들 같다. 곰리는 이 조각들을 "감각의 사건"이라 불렀다. 고정된 오브제가 아니라, 감응을 일으키는 매개이자 거울. 조각을 바라보는 순간, 철이 아닌 '나'라는 존재가 조각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철, 빛, 그리고 믿음 곰리는 철을 선택했다. 피와 태양, 흙의 색을 닮은, 시간과 함께 부식되는 생명 같은 재료. 그가 말했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기억하는 존재입니다.” 이곳에서 철은 더 이상 단단한 금속이 아니다. 빛을 머금은 살아 있는 표면이며, 산소와 대화하는 감각의 피부다. GROUND는 믿음과 초월, 시간과 육체, 기술과 사유가 서로 다른 속도로 교차하며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의 조각에는 늘 '믿음'이 있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네팔과 인도에서의 명상 수행을 통해 몸이 '존재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체화했다고 말했다. ◆조각은 회복의 예술 "우리는 다시 만질 수 있는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곰리는 말한다. 디지털 기기에 잠식된 시대, 사라지는 감각의 복원을 위해 조각이 필요하다고. GROUND는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침묵 속의 조각은 우리의 무게와 위치를 다시 일깨운다.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무언의 언어로 증명한다. GROUND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곰리가 말한 대로, 사물의 장소가 아닌 ‘나’라는 우주의 한 점에서 울리는 파장이다. 2025/07/03
‘영희보다 무서운’ 오징어게임3…‘기호’로 다시 쓴 디스토피아 승자는 죽었고, 돈은 살아남았다. '오징어게임3'은 ‘성기훈의 저항’조차 체계 안에 봉합해 버리는 자본주의의 절대 권력을 드러낸다. 선함은 남았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주인공 성기훈은 태어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의 유산은 살아남은 자가 아닌, 새로 태어나 살아나갈 자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이 결말은 단순한 감동 서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설계한 욕망의 기계 안에 ‘양심’이라는 기능이 어떻게 탑재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게임의 승자는 사라졌지만, 피 묻은 456억 원은 빼돌려지지 않는다. 게임 설계자는 그 돈을 정확하고, 치밀하며, 윤리적으로 분배한다. 그 순간 자본주의의 경악스러운 봉합 능력과, 인간의 무력함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기호는 중립적…그러나 그 위의 죽음은 너무나 구체적 ‘오징어게임’은 인간의 본성과 자본의 시스템을 동시에 해부한다. 야망에 휘청이는 인간들, 자유를 외치지만 결국 시스템의 명령에 복종하는 구조적 노예들, 방향을 잃고 무기력해진 군상들. 성기훈이 아무리 저항하고 외쳐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은 게임을 바꾸지 못한다. 다만 다음 게임에 다시 참여할 뿐이다.” 시즌3는 거대한 서사를 축소해 인간의 비참함과 죽음이라는 필연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우리는 모두 참가자이며, 누군가 추락하고, 누군가는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본은 스스로를 리브랜딩한다. 잔혹한 생존 게임은 어느새 ‘사회복지 기금’ 같은 얼굴로 탈바꿈한다. 무섭도록 합리적이고, 너무도 냉정하게 따뜻한 손길. 우리는 그런 세계를 살고 있다. ◆기하학의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삶은 줄넘기다. 실패하면 죽는다. ‘영희와 철수’가 무표정하게 돌리는 줄넘기 속, 인간은 건너야만 살아남는다. 세모는 총을 든 집행자(폭력), 네모는 규칙을 전달하는 관리자(감시), 동그라미는 말 없는 실무자(노동). 이 단순한 기호들은 결국 인간을 희생의 순환 속에 가두는 디스토피아적 질서의 얼굴이다.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 그것이 ‘오징어게임’의 룰이다. 한때 바우하우스는 이러한 기하 도형에 보편성과 평등의 이상을 담으려 했다. 그러나 ‘오징어게임’은 그것들을 디스토피아의 상징으로 전도시킨다. 유토피아를 꿈꿨던 기하학은, 오늘날 디스토피아의 얼굴이 되었다. 시즌3의 마지막 무대는 붉은 원형 위에서 펼쳐진다. 거칠고 피를 흡수한 듯한 질감, 차가운 조명, 침묵하는 벽. 현대미술관의 하이퍼리얼리즘 설치미술을 떠올리게 한다. 456번은 사라지고, 222번이 새겨진 아기만 남는다. 죽음은 개인을 지우고, 생명은 시스템으로 편입된다. 삶과 죽음은, 기호 위에서 반복되고 순환된다. ◆피로 쓴 철학, 혹은 선의 유산 시즌3는 주인공의 죽음과 함께 마무리된다. 그가 남긴 유산은 새로운 생명에게 넘어간다. 456억은 이번엔 피의 상징이 아니라 미래의 씨앗처럼 쓰인다. 시즌1이 생존의 비극을 말했다면, 시즌3는 ‘생존 이후의 윤리’를 묻는다. “선은 끝내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이 어쩌면 순진한 믿음은, 감독이 아이의 울음으로 관객에게 조용히 남겨 둔 유일한 위로다. 하지만 그 위로는 전처럼 강하게 울리지는 않는다. 뉴욕타임스는 “반복된 공식”을, 할리우드리포터는 “입체성의 실종”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시즌3는 마지막에 다시 묻는다. 이 이야기는 정말 끝났는가? 케이트 블란쳇의 깜짝 등장처럼, '오징어게임'은 또 다른 얼굴, 또 다른 게임으로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동그라미 위에 서 있고, 세모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네모의 감시에 무의식적으로 복종하고 있다. 게임은 끝났지만, 구조는 남았다. 그것이 '오징어게임'이 남긴, 영희보다 무서운 철학이다. 2025/06/30
‘대법원 조각’ 엄태정, 87세에 말하다…“조각은 세계를 건립하는 일” “예술(조각)이 세워지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장소 위에 건립하는 것이다.” 조각가 엄태정(87·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의 13번째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18일 개막한다. 1970년대 대표작부터 신작 조각, 회화, 드로잉까지 총 27점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는, 조각이라는 매체를 통해 존재와 세계를 탐구해온 작가의 철학적 사유를 집약한다. 전시 제목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개념에서 따왔다. 세계는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간과 사물, 장소와 시간이 관계를 맺으며 드러나는 ‘살아 있는 장’이라는 사유다. 그는 ‘법과 정의의 상(象)’(1995)으로 대표되는 대법원 정문 조각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7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조각가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라며 “대법원이라는 물리적 건물이 완성된 이후, 그 상징성과 정신성을 조각이 부여했다”고 회고했다. “대법원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제 작품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각이 세워지면서 예술성과 상징성이 더해졌고, 법의 공간에 신성한 영혼 같은 정신을 부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조각이 세계를 세우는 일이죠.” 엄태정은 조각을 ‘탈마법화된 세계에 저항하는 예술’로 정의했다. 정치화되거나 도덕화된 예술이 아닌, 무의식과 신비, 직관이 머무는 공간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반드시 마법과 영혼, 신비로운 세계가 내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 구리, 청동, 알루미늄 등 다양한 금속을 다뤄온 그는 “쇠의 물성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다"며 "그 안에서의 변화, 열기, 섬광, 밀도는 창작의 충동을 일으킨다”고 했다. 1969년 데뷔 이래 40여 년간 서울대학교 조소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평균 5년 주기로 개인전을 열어왔다. 이번 전시는 1970~80년대 구리 조각부터 최근의 알루미늄, 회화, 드로잉까지 아우르며 작가가 평생 탐구해 온 조형 언어의 변주를 보여준다. 1995년 발표했던 구리·청동 조각을 비롯해, 독일 퀠른 전시에 출품하며 판매했던 ‘사물 망각’ 초기 구리 작업도 함께 선보인다. 수행과 치유라는 일관된 주제 아래, 재료와 형식의 변화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이어진 작가의 작업 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다. 엄태정은 “작가의 세계는 늘 진보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라며 “신작과 구작이 어우러진 이번 전시는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구조로 진화해 가는 현재 진행형 작업”이라고 밝혔다. 그는 1960년대 초부터 조각의 형태와 재료에 관한 지속적인 탐구를 이어왔다. 초기에는 동양적 자연관에 기반한 추상 조각을 선보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철에서 구리로 재료를 전환하면서 조형 언어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90년대에는 조각의 공간성을 보다 심화시켰고, 2000년대 이후에는 조용하고 시적인 미학을 추구하며 알루미늄을 주요 재료로 삼았다. 그의 작업에는 동양철학, 우주론, 자연관이 깊게 스며 있다. 티벳 불교, 이태백의 객정(客情), 철학자 한병철의 관조적 사유까지, 세계를 바라보는 다층적인 관점이 조각에 투영됐다. 특히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나의 아버지”로 칭하며 정신적 계보를 잇고 있다. 네 차례에 걸쳐 브랑쿠시 고향을 방문했고, 수도원 수행과 불심의 전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브랑쿠시는 동양적 사유와 신비, 수행적 예술의 정신을 품은 인물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객정’ 시리즈처럼 유목적 존재로서의 조각도 등장한다. “객정이란, 우주 전체가 손님이라는 뜻입니다. 태양도, 달도, 모두 스쳐 가는 존재죠. 객정은 이태백의 시 제목으로 나이 드니 이 말이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작품 '1000개의 찬란한–막고굴 시대'는 불교적 세계관과 동양적 시간성, 신성과 역사, 수행이 교차하는 장소성을 품는다. 막고굴, 바미얀,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조각의 영적 계보를 암시하며, 조각을 자비와 구원의 공간으로 보여준다. 조각에 그치지 않고 평면으로도 사유를 확장했다. 드로잉과 회화는 작가의 수행적 과정을 담은 도구다. 반복되는 비움과 채움, 섬세한 선과 빛의 조화를 통해 공간성과 시간성이 응축된다. 특히 이번 전시의 평면 작업은 브랑쿠시의 ‘무한주’를 연상시키는 형상으로, 조각과 회화, 사유가 맞닿는 경계를 보여준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무궁무진하다”는 엄태정은 “조각은 우주이며 하늘이고, 땅이고 산이며 인간이며, 강이 될 수도 있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일까지 모두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조각은 세계의 모든 존재를 열어놓는 예술이라는 그의 신념이다. 이번 전시는 조각이 어떻게 존재를 드러내고, 또 다른 세계를 여는 방식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는 “조각 예술은 희로애락을 함께 초대하며, 그 안에서 신성과 상징성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자신의 예술관을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유로 갈음했다. “조각 작품을 제작하여 세워놓음은 봉헌과 찬양이라는 의미에서 세워 놓음이다. 봉헌한다는 것은, 조각이 세워짐으로써 성스러운 예술 작품이 성스러운 것으로서 개시되고 신이 그 현존성의 열린 장으로 들어오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예술의 ‘성스럽게 함’을 뜻한다.” 전시는 8월 2일까지. 관람은 무료. ◆조각가 엄태정은? 1938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 세인트 마틴스에서 수학했다.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연구교수를 거쳐 1981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2013년부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제16회 국전 국무총리상(1967),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1971), 김세중 조각상(1989), 이미륵상(2012) 등을 수상했다. 그동안 게오르그 콜베 미술관(베를린, 독일, 2005), 성곡미술관(서울, 2009), 아라리오갤러리(서울, 천안, 2019),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서울, 2022) 등에서 주요 개인전을 개최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브라질, 1973, 1975), 프리즈 런던 스컬프처(영국, 2019) 등 국제 무대에서도 활동했다. 서울 올림픽공원(한국, 1988), 두브로바 조각공원(크로아티아, 1990), 인천국제공항(한국, 2002), 베를린 총리공관(독일, 2002) 등 국내외 주요 공공장소에 작품이 설치되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등 국내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2025/06/18
제임스 터렐, 17년 만의 귀환…“빛은 제게 일용할 양식입니다” “저는 결국 한 사람의 예술가일 뿐입니다. 제가 하려는 일은 단 하나, 한 조각의 빛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빛의 조형가’로 불리는 미국 작가 제임스 터렐이 서울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다. 11일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빛의 사제’라는 별칭답게 철학적이고 구도자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덥수룩한 흰 수염, 낮은 목소리, 그리고 단정한 눈빛. 터렐은 퀘이커교도다. ‘내면의 빛’을 삶의 신조로 여기는 이 전통은 그가 평생 빛을 탐구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면도를 하지 않는 삶의 태도처럼, 그의 작업은 꾸밈 없이 감각과 인식의 본질을 응시한다. 그는 60여 년간 탐구해온 빛 작업에 대해 “빛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질량과 파동성을 지닌 하나의 사물”이라며 “빛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빛 그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빛은 일용할 양식이다”라고 표현하며, 소리처럼 저장되거나 전송될 수 없는 '빛의 물질성'에 주목했다. 특히 “빛을 소중히 대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그의 강조는 오늘날의 과잉 조명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페이스갤러리는 오는 14일부터 9월 27일까지 서울 전관에서 제임스 터렐 개인전 'The Return'을 개최한다. 2008년 이후 17년 만의 서울 개인전이자, 갤러리 설립 65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프로젝트다. 전시에는 신작 '웨지워크(Wedgework)'를 포함해 장소특정적 설치작 5점, 판화, 드로잉, 사진, 조각 등 총 25여 점이 소개된다. 어둠 속 공간에 교차 투사되는 빛의 평면은 공간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외에도 유리 구조물로 구성된 '글라스워크(Glassworks)' 시리즈, 천문학적 관찰에서 비롯된 사진 및 드로잉, 그리고 장기 프로젝트 '로든 크레이터(Roden Crater)' 관련 작업들이 전시된다. 이 프로젝트는 애리조나 사막의 분화구를 천문 관측소이자 예술 공간으로 전환하는 작업으로, 터렐은 이를 50년 넘게 지속해왔다. 터렐은 전시장 내에서 혼란감이나 구토를 느끼는 관람자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빛의 인식은 소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색을 맥락 속에서 인지하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구성합니다. 어지러움이나 방향 감각 상실은 새로운 인식을 열어주는 자극일 수 있습니다.” 그는 “현실과 사이버 공간의 경계가 흐려진 지금, 지평선이 사라진 세상에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빛은 무언가를 비추는 동시에 가리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밝은 도시의 밤은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들죠”라고 덧붙였다. 터렐은 빛을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닌, “영적인 재료이자 감각적 물질”로 보았다. “빛은 음악처럼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는 그 빛을 ‘먹고’ 살아갑니다. 일반 조명이 아닌, 모닥불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뇌파의 빛이 중요합니다. 인간도 밤의 헤드라이트 앞에 멈춰 선 사슴처럼, 빛에 감응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그는 “빛을 묘사하는 회화의 전통을 넘어, 빛 그 자체를 다루는 조형을 하고 싶었다”며 “1967년부터 빛을 투사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LED 등 기술의 진화 덕분에 이제야 비로소 원하는 형태로 구현할 수 있게 됐다. 오래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웃었다. 제임스 터렐은 194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심리학과 수학을 전공하고 인지심리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조종사 자격증을 지닌 그는 항공 관제와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지각’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예술에 투영해왔다. “빛은 사물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작품을 소장하려는 이들이 자주 묻는 질문을 소개했다. “제가 갖게 되는 건 도대체 뭔가요?”라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답한다. “이곳을 지나가는 빛을 소유하게 되는 거죠.” 예술에 대해선 담담했다. “예술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 일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선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한국은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팝 음악부터 클래식,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경계를 확장해가는 아시아의 강력한 중심이죠.” 그의 한국 사랑은 개인적 인연과도 맞닿아 있다. 터렐의 부인은 한국의 추상화가 이경림 씨로, 두 사람은 예술과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현재 강원 원주의 ‘뮤지엄SAN’에는 터렐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전용 전시관이 운영 중이며, 전남 신안군 노대도에는 세계 최초의 섬 위의 제임스 터렐 미술관이 건립 중이다. 한편 이번 전시는 무료 관람이 가능하지만, 3층 전시는 네이버를 통한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갤러리 측은 “8월 중순까지 토요일 예약은 이미 마감된 상태”라며,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고 밝혔다. 이는 관람객이 명상하듯 작품에 몰입하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빛을 드러내는 작업, 나아가 빛 그 자체를 감각하게 하는 예술. 제임스 터렐의 ‘지각 예술’은 이번 여름, 서울에서 다시 한번 은은하게 발광하고 있다. 202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