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택시 갑질회장이 화가?...백현진, '말보다는' 개인전 진짜 모습? 그런 건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진짜다. 백현진(49)은 '밝은 어두움'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똘끼 충만 독특한 배우로 존재감이 강렬하던 그가 화가로 등장, 맑은 모습을 보였다. 3일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최근 화제의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갑질 회장'으로 나와 변태같은 소름 끼치는 연기로 긴장감을 폭발시킨 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배우가 아닌 화가로 PKM갤러리에서 3년만에 전시를 연다. 2019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이라는 다소 거창했던 제목과는 달리 이번 전시는 '말보다는'을 타이틀로 달았다. 백현진은 "전시장에서 인상적인 텍스트를 본적이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며 "관람객이 각자 보고 들리는 대로 관람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그래서 전시장에는 작품을 설명하는 일체의 텍스트가 없다. 이번 전시 '말보다는'은 3년간 리얼타임속 부지불식간에 그린 작업이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 조각, 설치, 음악, 비디오, 공연, 대본, 퍼포먼스, 연기’로 구성되며, 총 60개의 작품이 전시된다. 구작 회화 3점을 제외하고 모두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신작으로 회화 44점, 설치작품 9개, 음악 4곡, 비디오와 대본 각각 한 편씩과 조각 1점이다. 그림은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희한하게 좋아보인다. 그게 백현진표 그림이다. 이번 작품에는 사람 형상이 빠져있는게 특징이다. 무의식속에서 일어나는 심상의 변화를 즉흥적으로 담아낸다. 수수께끼 같은 도상과 현란한 색채, 감정의 날 것 그대로가 투영된 빠른 붓터치가 방점이다. 그는 "내 그림에 대해 이게 '무슨 그림이냐, 이건 모르겠는데, 무슨 뚱딴지야'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쓸모가 있든 무엇이든 아니든 받아들인다"면서 "그 또한 예술적 경험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치부했다. 홍익대 조소과를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왕따'라서 거의 나가지 않았다"는 그는 조각을 전공하다, 음악가가 되고, 가수지만 화가가 되어 유명 화랑과 미술관을 제대로 통과하며 붓질도 멈추지 않고 있다. "저는 제 일을 보는 겁니다" 화가 설치미술과 음악가 배우. 동시다발적으로 활동하지만 "나는 아티스트이든 배우이든(이런게)하나도 안중요하다. 그냥 내 일을 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역병의 시대를 맞아 안해본 생각도 해보며 미술가로서도 생각하게 됐다"면서 "왜 이렇게 물건을 만들어낼까? 이렇게 계속 만들어내도 괜찮을까 지겨워 죽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했다. "배우는 몸뚱아리로 기록된걸 디지털화화고, 음악은 쿨한데, 미술이 (마음에)걸렸다"는 것. 그러다 자신이 쓰고 있는 '유화'라는 재료에 눈을 돌렸다. "알고보니 유화는 영원을 욕망한 상징이더라." 지겨워죽겠는데, 작업실에 수두룩한 유화를 보며 '내돈내산'인데 갖다버리기도 아깝고, 또 있는 것을 버리는 것도 그렇고, 버리는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사라지는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화가로 일한 이후 처음으로 조수를 고용, 구글링해 이미지를 추출하고 유화로 다시 그려 '생분해 가능한 것'이라는 작품으로 변신시켰다. PKM갤러리와 전속 의리파다. 1999년 인디밴드시절에 만난 PKM 박경미 대표의 안목으로 '작가 백현진'의 이력이 세련되게 이어지고 있다. (PKM갤러리는 국내 대표 기획화랑으로 아무나 개인전을 열어주지 않는 상업화랑이다.) 그는 원래 개성 강한 뮤지션으로 유명했다.1994년 장영규 원일과 함께 '어어부 프로젝트'를 결성해 '인디계의 반칙왕' 등이라 불리며 음악계에 눈도장을 찍었다. 개성 강한 캐릭터처럼 '무대포' 기질도 보였다. 1999년 영화 '반칙왕'에 우연히 오브리 밴드 멤버중 한명으로 출연한 것이 배우로 이어졌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이상한 상무'로 눈길을 확 사로잡았던 그는 최근 배우로 집중한 분위기다. 처음부터 카메라 울렁증은 없었다고 했다. "그냥 기계가 기록을 하는구나. 냉장고 앞, 선풍기 앞에 서 있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후 독립영화에 출연했고 2000년 장률 감독의 '경주' 출연이후 배우 시장에서 연락이 오고 있고, 마다하지 않고 출연한다고 해 소속사가 말릴 정도로 입장이 바뀌었다고도 했다. 그는 하정우 솔비 조영남등과 묶여 '연예인 화가'로 불리는 것에 "나 떴다"고 우스개 소리를 할 정도로 여유를 보였다. "어떤 사람이든 그림 그리는 건 환영한다"고 과장하듯 말했다. 가수로서 이번 개인전을 위해 특별 제작된 음악들도 선보인다. 각 전시장별로 QR 코드, 또는 스피커를 통해 송출되며 공감각적인 환경을 연출한다. 전시 일환으로 퍼포먼스와 라이브 음악 공연이 오는 19일과 7월 3일에 펼쳐지고, 전시의 연계 출판물로 소책자, 포스터, 카세트테이프 한정판 패키지가 6월 중순에 출간된다. 작가 마음대로 그린 그림. 굳이 따진다면 '추상표현주의'에 가깝지만 그 또한 큰 의미가 없다. 백현진이 "뱃속 편하게, 홀가분하게 끝낸" 그 기운이 전해진다. '저것도 그림이냐'고 수군대던 시절도 있었지만 백현진 그림은 '말보다는 실견'이 필요하다. '알듯 모를 듯 한데 편안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있어빌리티'한 현대미술의 묘미다. 전시는 7월3일까지. 2021/06/03
[인터뷰]윤범모 관장 "제 생에 이런 컬렉션은 두 번 다시...행복한 관장 실감" "주변에서 행복한 관장이라고 하던데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복 받은 관장이다. 2019년 미술관장으로 임명된 후 이전 관장들과는 달리 순탄하게 근무하며 행운의 여신까지 함께하는 분위기다. 개관 52년 사상 처음으로 미술관 누구도 상상 못했던 '이건희 컬렉션'이 넝쿨째 굴러왔다. 삼성가에서 1488점을 기증했다. 4월28일 삼성에서 고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을 미술관에 기증한다고 발표한 이후 바로 작품이 반입됐다. 현재 과천관 수장고에 안착했다. 7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윤 관장은 "꿈도 못꿨는데, 이러한 대량 작품의 기증은 우리 일생에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운 참 기록적인 쾌거"라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온 '이건희 컬렉션'은 회화 조각 공예 드로잉 판화 등 근현대미술사를 총망라했다. 김환기 박수근 장욱진등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 238명의 1369점과 피카소, 샤갈, 르느와르 등 외국 근대 작가 8명의 작품 119점이다. 유영국의 작품이 187점으로 가장 많고, 이중섭 작품이 104점, 유강열 68점, 장욱진 60점, 이응노 56점, 박수근 33점, 변관식 25점, 권진규 24점 순으로 집계됐다. 또 모네, 고갱, 피카소,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마르크 샤갈 등 해외 거장 작품들도 포함되어 국립현대미술관은 처음으로 이들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게 됐다. 모두 조건없는 기증이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을때 윤 관장의 바람은 소박했다. "그저 우리 미술관에 빠진 부분을 채웠으면 좋겠다. 근대기 대표작가의 작품 100점 만 와도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현재 국립미술관인데도 김환기의 제대로 된 '점 시리즈'가 없거든요 . 아시다시피 고가품이고 미술관 1년 작품 구입 예산 2~3년 치를 합쳐야 김환기 대표작 하나 살 정도 밖에 안 되니까. 꿈을 꿀 수가 없었죠." 국립현대미술관의 1년 미술품 구입 예산은 48억원 안팎이다. 하지만 내심 바라기만 했던 일이 현실로 이뤄지면서 윤 관장은 '행복한 관장'으로 불린다. 미술관의 제1은 소장품 확보인데, 그 어려운 일이 윤 관장 임기내에 저절로 들어오면서 미술관 새 역사의 신기록을 세운 관장이 됐다. 1000점 이상의 대량 기증은 사상 처음으로 '이건희 컬렉션' 덕분에 미술관 소장품은 1만점을 시대를 맞이했다. "소장품 8500점 무렵에 우리는 언제 1만점을 돌파하냐며 직원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다른 외국 유수의 미술관을 보면 소장품이 10만점이다 20만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부러울 뿐이었지요. 우리는 1만점도 안 되는 데 언제 따라가야 하는가 이런 부끄러운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죠" 50여년간 미술관 총 소장품은 8782점. 그동안 피카소등 내로라하는 작품 하나 없어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자존감이 낮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 국립현대미술관도 1만점 소장품 시대에 진입했다"는 윤 관장은 "주변에서 행복 관장 행복 관장하는데 각별히 행복 관장임을 더 느끼고 있다"며 뿌듯함을 보였다. '이건희컬렉션'으로 소장품 1만점 시대를 맞은 미술관은 한국 근대미술사의 빈 공백을 메꾸는 한편 수준 높은 한국 근대미술을 해외에 소개하는 기회가 마련됐다. 윤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중 근대미술 컬렉션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도약시켰다"는 점이 이번 기증의 가장 큰 의의라고 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의 유족에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특히 두 분의 용단에 의해서 이뤄진 일"이라며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에 감사하다"고 했다. 윤 관장은 삼성가와 인연이 있다. 1984년 중앙일보사 신사옥이 새로 문을 열면서 아트홀과 갤러리를 새로 열었는데 당시 갤러리 개관 실무 책임을 윤 관장이 맡았다. 그는 "당시 중앙일보사 상무 직함이었던 홍라희 전 리움관장이 갤러리를 담당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그 인연이 저로 하여금 미술계 현장에서 지금까지 일을 하게 했고 또 오늘 이런 자리까지 이어지게 된 것 같아요." 윤 관장은 1982년 미술 평단에 등단한 이후 30여 년간 근대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기획자로 활동했다. 호암갤러리 큐레이터, 가천대 교수를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로 활동하다 관장이 됐다. 근대미술사학자인 그는 이번 '이건희컬렉션'에 더 큰 감동을 했다. 희소가치가 높고 수집조차 어려웠던 근대기 소장품이 이번 기증으로 크게 보완되어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한국화가의 ‘대표작’이 대거 기증되어 미술관의 한국화 컬렉션 질을 현격히 높였다는 평가다. 이상범이 25세에 그린 청록산수화 '무릉도원도'(1922), 김은호의 초기 채색화 정수를 보여주는 '간성(看星)'(1927), 김기창의 5m 대작 '군마도'(1955) 1975년 출판물에 등장했다가 행방이 묘연했던 이중섭의 흰소(1953~54) 등이 미술관으로 들어왔다. 수집예산이 적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좀처럼 구입하기 어려웠던 박수근, 장욱진, 권진규, 유영국 등 근대기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골고루 망라되어 있고 근대미술 희귀작도 압권이다. 나혜석의 진작으로 확실하여 진위평가의 기준이 되는 '화녕전작약'(1930년대), 여성 화가이자 이중섭의 스승이기도 했던 백남순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 '낙원'(1937), 총 4점밖에 전해지지 않는 김종태의 유화 중 1점인 '사내아이'(1929)도 소장품으로 합류했다. 그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중, 1950년대 이전까지 제작된 작품은 960여 점에 불과했다. 윤 관장은 "이번 이건희 컬렉션중 김은호, 박래현, 김기창, 김종태, 백남순 작품 등은 1992년도에 출판된 호암미술관 소장 한국근대미술 명품 부록에도 소개된 삼성에서 아끼는 대표 작품들"이라며 "이번 기증품의 수준을 제고시키기 위해 삼성에서 아끼는 작품까지 흔쾌히 내놓아 더욱 감사하다"고 했다. 외국작가의 작품은 8명의 작품(119점)이지만 금액으로 따지면 천문학적 금액이다. 인상파 화가 모네의 '수련'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작품과 유사한 그림이 446억(소더비 경매)에 낙찰된바 있어 현 시가는 500억대로 추정되고 있다. 윤 관장은 "해외 거장들의 작품이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됐다는 사실도 상징적"이라며 "모네, 고갱, 피카소,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마르크 샤갈 등 거장의 작품들을 국내에서도 만나보게 된 의미가 크다. 이 가운데 피카소의 도자기는 112점으로 이 작품으로만 개인전을 치를만한 규모"라고 말했다. 이건희 컬렉션 특징은 어떨까. 윤범모 관장은 "한마디로 동서고금이 망라되었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우리 한국 근현대 미술과 서양의 현대 미술까지 두루두루 아우르는 광폭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르, 시대 또 작품의 성격 등 야주 다양성이 특징이다. 특히 젊은 작가의 배려, 지원 이런 점도 특기사항이 아닌가싶다"며 "오랜 시간 열정과 전문성이 스며든 컬렉션의 결과로 제 생에 이런 컬렉션은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 관장은 "미술관 컬렉션이 양적·질적으로 대폭 성장하고 해외미술관과 견줘도 될 만하다"며 "내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에서 열리는 한국 근대미술전에도 이건희컬렉션 중 일부를 선보여 수준 높은 한국 근대미술을 해외에 소개하는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수장고에 입고된 이건희컬렉션은 기증작품 검수, 상태조사, 등록, 촬영, 저작권 협의와 조사연구등을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조사와 분류가 끝나면 미술관 공식홈페이지에 공개된다. 공식 명칭은 ‘이건희컬렉션’으로 전시, 출판 등 활용시 작품기본정보에 함께 명기된다. 미술관 소장품 1만점 시대를 연 '이건희 컬렉션'중 1만번의 등록 번호를 가질 작품도 귀추가 주목된다. 미술관은 "입고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겠지만 1만번째 번호는 상징성이 있어 어떤 작품이 될 것인지 설렌다"고 했다. 현재 미술관 100번째 소장품은 박수근의 '할아버지와 손자'이고, 1000번째 작품은 배륭 작가의 회화 '구가시리즈 83'이 등록되어 있다. 윤 관장은 "이건희 컬렉션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새롭게 쓰게하는 컬렉션"이라며 "앞으로 어떻게 소장하고 관리할 것인지가 숙제로 평생 수집한 미술품을 국민의 품으로 보내준 고인과 유족의 정신을 기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삼성가의 기증과 관련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문체부는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이건희 미술관'이 될지 미술계의 바람인 '근대 미술관'이 될지는 아직 정해진 바 없다. "이건희 컬렉션중 최고 작품을 꼽는다면요?" 모든 작품이 소중하다. 공식적으로 답변하기 어렵다고 머뭇거리던 윤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저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입니다.5m가 넘는 ‘벽화'크기의 대작으로, 한때 중앙일보사에 걸려 있었던 작품이었죠. 1980년대 이후 실견이 불가능했어요. 이번에 미술관에 기증되어 다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 작품의 가치는 환산하기쉽지 않죠. 아마 요즘 경매에 내놓는다면 시작가는 300억~400억 되지 않을까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는 김환기가 한국전쟁 시기부터 즐겨 그렸던 소재로, 평생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조선 백자를 들거나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환도한 후 자주 등장하는 ‘광화문’으로 상징되는 조선 건축과 길거리의 노점상, 꽃과 새 등 그가 즐겨 그린 1950년대의 소재들이 총출동해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은 7월 덕수궁관에서 개최되는 '한국미, 어제와 오늘' 전에서 도상봉의 회화 등 일부 작품이 첫선을 보인다. 이어 오는 8월부터 내년 3월까지 세 차례에 나뉘어 공개될 예정이다. 2021/05/08
'광부와 화가' 황재형의 '막장 리얼리즘'…회천(回天)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광부 화가'로 불렸다. 1982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그해 가을 강원도에 정착했다. 강원도 정선 함백과 강릉의 정동 탄광촌 신입적자(일용노동자)로 일했다. 온 몸은 닦아도 닦여지지 않는 검정이 진득했다. 3년간 쇠락한 폐광촌과 강원도의 풍경을 몸에 새긴 그는 태백, 삼척, 정선에서 일하는 탄광 노동자들 일상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황지 330', '목욕(씻을 수 없는)'(1983), '식사'(1985) 등을 발표하며 갱도, 선탄부의 광구와 마스크, 광부의 작업복, 때 묻은 전표 등으로 현실을 대변했다. 1980년대 중반 건강상의 이유로 광부 생활을 접었지만 그의 화폭은 여전히 탄광촌의 삶을 살았다.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광부가 되었고, 현실을 형상화하는 방편으로 실생활에서 탈각한 사물을 화면으로 끌어내는 데 몰두했다. '광부화가'로 삶의 무게와 부조리를 피에 새긴 그는 리얼리즘 화가 황재형(69)이다. 그가 탄광촌의 일상과 삶을 리얼리즘 시각으로 그려낸 작품 65점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걸렸다. 황재형은 “막장(갱도의 막다른 곳)이란, 인간이 절망하는 곳이다. 막장은 태백뿐 아니라 서울에도 있다”며 민중미술을 지향한 작가는 "그 때 기억이 삶의 진실이자 연민"이라고 했다. 4일 개막한 이번 전시 타이틀은 ‘회천(回天)’. ‘천자(天子)나 제왕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다’ 또는 ‘형세나 국면을 바꾸어 쇠퇴한 세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황재형은 "인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그것의 회복을 꿈꾸는 메시지를 이번 전시에 담았다"고 밝혔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높이 2m가 넘는 그림 '황지 330'은 그가 현타(현실 자각타임 줄임말)를 느낀 작품이다. 낡고 헤진 작업복은 1980년 황지탄광에서 매몰사고로 사망한 광부의 작업복이다. 작업복의 오른쪽 가슴께에 자수로 새겨진 ‘황지330’ 명찰과 왼쪽 포켓에 달린 신분카드를 통해 옷의 주인을 알 수 있지만 ‘330’이란 숫자는 이 노동자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익명의 존재임을 명확히 한다. 이 작품은 1982년 제5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했고 ‘임술년’ 창립전에서도 선보여 주목받았다. '임술년'은 황재형이 중앙대학교 회화과 복학생들과 함께 1982년에 결성한 단체로 형상성이 강한 회화를 선보이며 현실의 부조리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했다. 이번 전시는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광부화가’의 정체성 안에서 황재형이 집적해온 예술적 성취를 조망한다. ‘광부와 화가(1980년대~)', '태백에서 동해로'(1990년대~)'실재의 얼굴(2010년대~)’등 총 3부로 선보인다. 1부에서는 인물 작품이, 2부에서는 풍경 작품이 주를 이루고, 3부는 인물과 풍경을 함께 선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전시공간을 통해 ‘사실성’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점진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3부 ‘실재의 얼굴’ 전시장은 2010년대 황재형이 지역을 벗어나 초역사적 풍경과 보편적인 인물상을 그리고, 1980년대에 천착했던 주제를 머리카락을 이용해 새롭게 풀어내는 시기를 담고 있다. 화면에는 탄광촌의 광부와 주변 풍경이 재등장하는 한편 세월호나 국정농단 사건과 같은 동시대 이슈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은퇴한 광부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아버지의 자리'(2011~2013), 광부의 초상을 머리카락으로 새롭게 작업한 '드러난 얼굴'(2017), 흑연으로 역사의 시간성을 표현한 '알혼섬'(2016) 등이 공개됐다. “광부화가 황재형이 그려낸 사실적 인물과 광활한 대자연, 초역사적 풍경은 오늘의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 전시는 지난 40년 동안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현실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한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보고 한국 리얼리즘의 진면목과 함께 미술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8월 22일까지. 2021/05/04
박서보 화백 부인? 수필가 윤명숙...'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의 아내이자 삼남매의 어머니로 살아왔던 그가 팔순 넘어 위풍당당하게 세상에 나왔다. 83세, 윤명숙. 누군가의 아내와 어머니를 넘어 독보적 에세이스트로 '나로 말할 것 같으면─Yes, I am'를 출간했다.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충북 청주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을 마치고 중퇴했다. 20세에 화가 박서보와 결혼하고 아내와 엄마로만 지냈다. 미술협회전, 홍익여류화가전 등에 그림을 출품하기도 했으나 붓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2006년 '문학미디어'에 단편 '오렌지의 기억'을 발표한 후 꾸준히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 "나는 요즘,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그릴 수 있는 소묘에 재미 붙였다. 주위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 중에서 만만한 놈을 골라 그린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오랫동안 방치한 감각이, 종이 위에서 연필을 움켜쥐고 우왕좌왕하는 손이,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신바람 나게 그렸어도 영 신통치 않다. 그래도 잡동사니들과의 잡담이 즐거워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길이 그리워서 나는 계속 그린다."(p.6, 「작가의 말」중에서) 이 책 '나로 말할 것 같으면'은 삶의 이력에서 나오는 연륜을 회한이 아닌 유쾌함 가득한 이야기로 풀어냈다. 코로나 시국과 노년의 삶을 담담히 서술하다 과거 전쟁 통의 피난생활, 전후의 궁핍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끈다. "결혼하고 4년 동안, 6개월마다 정신없이 이사를 다니다가,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장만한 곳이, 신촌에서도 제일 환경이 고약한 철길 옆이었다. 화물 기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연탄가루를 휘날리며 지나다녔다. 우린 바로 그 철둑 밑에 방 둘 부엌 하나 딸린 무허가 집을 산 것이다. 연탄 공장 바로 코앞, 먼저 살던 집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조금 비켜난 것은,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p.233, 「철길 옆 판잣집」 중에서) 경제력이 없던 가장이었지만 단색화 거장으로 이제 높은 작품값도 자랑하는 박 화백은 "현대미술 운동한답시고 가정을 알뜰히 보살피지 못한 나 대신 아이들 대학 갈 때마다 부엌에서 새우잠 자곤 하던 당신. 틈틈이 글을 쓰는 것 같더니, 자랑스럽다. 내 아내"라고 응원했다. 부부는 닮았다. 50여년간 '묘법'을 그리며 팔순이 넘어 단색화로 봄날을 맞은 남편 박서보 화백처럼 부인 윤명숙도 팔순이 넘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욕심이 있다. "단언하건대, 난 죽기 전에 신나게 글을 써보고 싶다. 더 욕심내자면 그림도 다시 그리고 싶다. 그리하고도 또 남은 욕심이 있다. 나의 작은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도 열고 싶다. 아니면 글과 그림을 모아 자그마한 화집을 꾸며보고 싶다.버킷 리스트 1이다." 300쪽, 알마 출판, 1만6000원. 2021/02/27
82세 '경이로운 화가' 윤석남, 여성독립운동가 14인 복원 올해로 만 82세. 3년만에 전시장에서 만난 화가 윤석남은 여전히 생생했다. 2018년 팔순에도 개인전을 열어 화제였는데, 이번엔 100세 시대를 증명하듯 더욱 '경이로운 화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림 말고는 할 게 없어서요." 윤석남은 지난 3년간 '싸우는 여자들'을 보며 행복했다.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그림만 그렸다. "왜 목숨을 바쳐서까지 독립운동을 했을까?" "나라면 목숨을 바쳤을까?" 이 의문과 질문을 화폭에 녹여 담아낸 그림은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으로 탄생했다. "초상은 역사속 흉상을 참고했지만 인물들의 모습은 제 머릿속 상상으로 그린 겁니다." 17일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 선보인 작품은 '여성주의 작가' 윤석남의 '결정판'이다. 본궤도에 오른 채색 여성초상화를 보여준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 연작과 대형 설치 작업을 함께 걸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14인(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은 일제강점기 여성운동과 구국을 위한 항일운동에 투신한 여성들이다. 학고재 본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박자혜(1895~1943)의 초상을 만난다. 독립운동가 신채호(1880~1936)의 아내다. 붉은 유골함을 가슴에 안은 초상은 괴팍하게 일그러진 얼굴이다. 윤석남은 "남편의 죽음에 슬픔과 분노가 차오른 표정을 담은 것"이라며 붉은 유골함은 피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박자혜는 1919년 3·1운동 당시 간호사로서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하였고, 만세 시위와 동맹파업을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대중에게는 그 이름이 아직 낯설다. 전시장 중앙 벽면은 피빛 붉은 저고리를 입고 한쪽 팔을 높이 뻗은 김마리아(1892~1944)의 초상. 기개가 충만하다. "이번 초상 작품중 가장 가슴에 와닿은 인물은 김마리아에요. 조선인으로서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두려움 없이 행동한 그 정신에 존경심을 담았어요." 김마리아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널리 신망 받은 인물이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선언문을 기모노 속에 숨겨 국내로 들여와서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적극 가담했다. 이 일로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고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고질병을 얻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자마자 활동을 재개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아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하고 조직을 확대하던 중, 동지의 배신으로 검거돼 또 한 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남자현은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인물이다. 윤석남이 그린 초상은 4번째 손가락이 잘린채 붕대를 감은 모습이지만 결연한 모습이다. 남자현은 1919년 3·1운동 직후 아들과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군 단체 서로군정서에 들어갔다. 만주 일대에서 교육운동에 힘쓰는 한편, 사이토 총독 암살을 기도하는 등 무력투쟁에도 앞장섰다. 또한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운동가들의 분열을 막기 위해 두 번이나 혈서를 썼으며,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는 왼손 무명지를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이라는 혈서를 써서 자른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보냈다.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건강이 악화돼 6개월여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출감 직후인 1933년 8월 22일 숨을 거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윤석남의 인물 채색화는 고운 세필로, 강하게 그려낸 게 특징이다. 원래 아크릴로 서양화 재료로 작업하던 그는 10년전 채색화로 돌아섰다.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후였다. "그 초상화를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 "나는 바보같이 살았구나"를 깨달으며 서양화 재료를 버렸다. 그렇게 채색화를 배우고 작업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왜 행복한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행복해요." 정면을 응시하는 당당한 눈빛에 매료되어, 여성의 시선을 드러내는 채색화를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2018년 학고재에서 선보인 '윤석남' 전시는 2015년경부터 그려온 채색화 연작을 최초로 발표한 자리였다. 전시 제목에 걸맞게 자화상을 다수 출품했다. 1982년도에 연 첫 전시부터 줄곧 어머니와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자신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처음이었다. “자랑스러운 나의 엄마”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것이 많았으나 자신을 드러내기가 못내 망설여졌다는 그가 고운 세필을 쥐고, 강렬한 필치로 스스로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주위의 벗들을 그린 초상 연작을 OCI미술관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수년간 개인의 삶을 돌아본 윤석남이 이제 역사 속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복원한다. 채색화를 그리며 과거의 복식 등을 참고하고자 한국의 초상화를 모은 책을 구입했다. 방대한 분량 속 여성의 초상은 가장 뒤편에 이름도 없이 단 두 점 실려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그려진 그림이었다. “왜인지 울화가 치밀었다.” 어려운 시대, 나라를 위해 싸운 여성들의 삶을 조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기록에 근거하여 그려야 하는 작업의 특성상 자료가 많지 않아 난항을 겪기도 했다. 윤석남은 역사가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화폭에 기록하기로 했다. 남아 있는 사진 자료를 참고하여 얼굴을 묘사하고, 각 인물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배경과 몸짓을 구상해 그려 넣었다. 윤석남의 초상에서 인물의 손은 크고 거칠게 표현된다. 손은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그 사람의 전체를 상징한다. 붓을 꼭 쥐고 초상을 그리는 화가도 그 투박한 '손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서문을 쓴 김현주 추계예대 교수는 "윤석남은 여성독립운동가 14인의 얼굴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알려주는 상황의 묘사나 단서를 통해 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며 "얼굴 중 특히 눈을 통해 내면의 기운이 전달된다고 생각해 항상 생생하고 강렬한 눈의 묘사를 중요시 여겨왔다. 얼굴 다음으로 손은 실행 수단으로서 크고 중요하게 묘사됐다"고 소개했다. 윤석남은 제일 먼저 작은 사이즈로 얼굴 드로잉을 하고 인물의 특성을 파악한 뒤에야 원본 크기의 초본을 만들어 한지에 옮기고 채색으로 마무리한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얼굴 드로잉과 소형 초상이 대형 초상화와 나란히 전시되어 초상화의 제작 과정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여성들. 그 여성들을 다시 불러낸 윤석남은 "앞으로도 조명할 인물이 많다"며 "역사 속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그림으로 복원해내는 작업을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100인의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을 그리는 것을 장기 목표로 삼았다. 윤석남은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각오다. 학고재 우찬규 대표는 "윤석남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채색 초상화'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며 "후대에도 남겨져 전해질수 있는 작품들로 의미가 있어 독립기념관 등 미술관에서 더욱 주목해 관람해줬으면 한다"고 바랐다. 김현주 추계예대 교수도 "윤석남의 초상화는 여성의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할 것"이라며 "초상화의 수가 많을수록 그 효과는 커지리라 생각한다. 그 초상화를 통해 윤석남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민족과 국가가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하는 ‘자립’이 무엇인지 진중하게 묻고 있다"고 전했다. 전시는 온·오프라인에서 동시 개막한다. 학고재 본관에서는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등 14인을 그린 채색화와 연필 드로잉을 선보인다. 그림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핵심적인 어록과 설명을 함께 붙여 이해를 높이고 있다. 본관 안쪽 방을 가득 채운 나무로 만든 설치 작품 '붉은 방'(2021)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4월3일까지. 2021/02/17
반백살 화가·전시기획자·영화감독의 '검질 상생'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화가, 전시 기획자(평론가), 영화감독이 방바닥에서 뒹굴뒹굴 하며 중얼거렸다. 3명 모두 반백살을 살았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고, 영화를 만들었다. 날마다 같은 날을 넘기며 밥 먹듯 일을 했다. "내가 벌써 50이야~" 살아온 세월만큼 단단해질줄 알았는데 새로운 길로 가지 못했다. 2018년 겨울, 제주에서 일이 벌어졌다. 그 날은 무덤앞에서 말을 삼켰다. 죽음은 나이 순이 아니다. 가장 어린 영화감독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떴다. 슬픔의 강을 건너고 온 탓이었을까.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내가 그리고 싶은대로" 화가가 화가 차듯 말하자, 영화감독이 설렁하게 말했다. "제주로 내려와" 전시기획자도 끼어들었다. "그런다면 집을 구해줄게" 한밤중 바람 소리는 거셌다. 창문은 바람에 멱살을 잡힌 듯 몇번씩 흔들렸다. 익숙함에 길들여진 지천명의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벌써 제주살이를 시작한 3명은 소년들처럼 낄낄댔다. 마침 제주 사는 영화감독 윗집이 비어 있었다. 얼결에 '집을 구해준다'고 말한 전시기획자는 말이 씨가 됐다. "화가 한번 키워보자" 책임감은 연세(1년 월세)로 지불됐고, 화가는 결정을 해야했다. '가족은, 학교(강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덕지덕지 붙은 삶의 무게도 '화가의 길'에서는 녹아내렸다. "진정, 그림만 그려보자" 2019년, 4월. 서울서 타고 다니던 자동차에 물감과 캔버스, 희망을 가득 싣고 제주행 배에 올랐다. 그의 작품 제목 '인스턴트 풍경(Instant Landscape)'처럼 즉흥적으로 시작된 제주살이는 1년간 이어졌다. 반백살에 흔들린, 화가 김남표(50)·전시기획자 김윤섭(51)·영화감독 민병훈(51) 이야기다. #중독된 세월의 독을 푸는 건 일상의 반복이다. 초심. 가족을 떠나 나를 비우고, 화가의 새로운 습관을 채우자 두려움이 앞섰다. 매트리스에 성경책 하나. 텅빈 작업실은 의욕이 충만했다. 프랑스 파리를 떠나 시골 오베르에서 자연을 그렸던 고흐처럼 날마다 화구를 메고 산으로 숲으로 바다로 들어가 화판을 폈다. "나가서 보니 대상이 보이지도 않고 그림도 안보이고 바람은 불고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죠." 예중, 예고, 미대를 거쳐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지만 스튜디오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야외에서 작업한 건 초등학교 사생대회 이후 처음이었다. 거친 굉음이 온종일 떠나지 않는 거대한 채석장부터, 온몸을 모기에 물어뜯기며 이름 모를 수풀(검질) 속을 뒤졌다. 거대한 환경에 맞게 제작한 대형 이젤을 들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여명과 낙조의 이미지에 심취했다. 땅거미가 지면 숙소에 돌아와 그림을 봤다. "그러면 뭔가가 아, 이거 내가 했나? 할 정도로 묘하게 선물을 받는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예술은 술로 풀었다. 민 감독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그림 이야기, 영화 이야기를 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그 얘기들은 모티브가 됐고 용기가 됐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않아서, 모든 날이 좋아서 웃고 아파하며 그렇게 매일 즉흥적이고 새롭게 화가의 운명을 다졌다. 먹고 자고 그리고...그리고 먹고 자고. 제주에서 야생동물처럼 화가살이를 한 김남표는 "화가는 노동자"라고 했다. "어떠한 목표나 계획을 하고 제주 작업을 시작한건 아니다." 제주 화가살이를 결심한 건 영화감독 민병훈 때문이다. 연민이었다. "혼자두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컸다. "나도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겪었지만 형이 겪고 있는 상황(부인을 사별한)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고, 그런 형을 보면서 옆에 있어주고도 싶었어요. 또 내가 다시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게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죠." 둘은 10년전 장흥아뜰리에서 만나 작업의 결이 맞은 '예술적 동지'다. "그림은 혼자 그릴수 있지만 환경의 변화, 영향들은 스스로에 영향을 줄수 없어요. 민 감독과 작업을 해오면서 운이 좋을 정도로 깊은 영감을 받았어요." 민병훈 감독은 화가의 길에 동행했다. 제주를 뒤져 풍경속으로 화가를 안내했고, 그 모습을 앵글에 그렸다. 그렇게 담은 장면으로 영화 '팬텀'을 찍었다. 김 작가가 아내와 사별한 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큐와 드라마가 섞인 영화다. 내년에 개봉한다. "내가 보는 시각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 재미도 예술가들만의 재미가 아니라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민 감독은 김남표의 그림에 대해 "그림을 보고 난 후 가슴이 먹먹하고 아림과 동시에 두근두근 떨려오기도 오랫만이었다"며 "그의 그림은 영화적"이라고 했다. "내년에 개봉하는 영화 '팬텀'은 화가 김남표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가 그린 그림이 액자구성으로 보여진다. 김남표는 풀떼기 같은 화가다. 숲에 있어야 되지만 또 있으나마한 풀 같은 유연한 화가다. 그의 그림은 무언가의 너머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 분명 관람객도 교감할 것으로 본다." #친구는 또 하나의 세상과 만나는 경험이다. "동지애였다." 화가의 제주살이 집을 구해준 김윤섭 전시기획자도 반백살의 묘미를 실감한 터였다. 정신없이 살다 느닷없이 다가온 암 선고에 세상이 깜깜해졌다. "무얼 하고 살았나. 무엇을 해야하나." 수술을 하기까지의 시간은 '인생의 앎'을 선사했다. 되돌아본 삶은 "늘 생각만 하다 끝났고 주춤거렸다." 화가 김남표를 보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듯 했다. "갈등과 방황이 끝나고 재충전되어서 또다른 인생 2막이 되면 그 자체가 또 나에 대한 재충전이기도 하고, 솔직한 마음이 그랬다." 미대를 졸업하고 미술판에서만 살아온 김윤섭 전시기획자는 마당발이다. 민병훈 감독과 친구로 화가들에 관심이 많은 민 감독을 장흥 아뜰리에에 소개하면서 민 감독은 김남표와 이어졌다. 김윤섭 기획자는 미술시장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다. 정부의 미술품 가격 심의위원으로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심사했고 작품값을 산정하기도 했다. '빈익빈 부익부' 미술은 어느새 '돈'이 되어 잘팔리는 작가만 팔리는 시스템이 작동했다. "미술품을 사치품으로 보는 것. 작품이기 이전에 상품을 만드는 것, 화가가 창작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전락되는 것이 안타깝죠." 김 기획자는 "창작자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건 창작의욕을 북돋아 주는 것"이라며 "현재 우리 미술시장은 화가에게 술권하는 사회"라고 지적했다. "인기 상품을 쏟아내야 하는 생산자로 전락한 화가들의 현실은 인기 절정인 30~40대를 지나 50대에 이르러 인생의 변곡점이 되는데 재충전의 시기에 낭떠러지에 있다"며 "현실이 녹록치 않으면 자본 논리에 타협하고 안주하거나 주저앉는다"고 했다. 미술가는 생산력이 떨어지면 무직자다. 30~40대 미술 생태계에 적응하면서 달려왔는데 빠르게 변하는 시장은 50대가 되면 더 이상 친절하지 않다. 중견작가들의 무대가 적은 이유다. 작품값은 젊은 작가보다 비싸고 작품 변화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숨고르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우울한 화가들이 50대다. 김 기획자는 "동병상련으로 나이 50에 느낄 수 밖에 없는 공감대가 아트 프로젝트로 이끌었다"며 "화가 김남표의 행보에 아낌없는 지원을 할 방법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트 프로젝트는 성과를 내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작가 인생 프로젝트"라며 "화가로서 어떻게 자신의 변별력을 개척해나가고 또 다른 가능성을 되찾으면서 비전을 보여줄 것인가를 위해 초심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례이고 싶다"고 했다. 서울 강남 청담동에 아이프라운지를 개관한 김 기획자는 지난 19일 김남표의 개인전을 개막했다. 아이프라운지와 같은 건물 3층에 있는 호리아트스페이스(대표 김나리)와 함께 ‘김남표의 제주이야기―Gumgil(검질)’을 2개층에 나눠 전시하고 있다. #"나이 50은 큰 숫자는 아니지만 인생의 감정을 알게 돼고 그림에 대한 감정을 조금씩 넣고 싶어하는 애틋한 마음이 있다." ‘김남표의 제주이야기―Gumgil(검질)’은 화가의 새로운 설렘이 담겼다. "이번 전시는 상황 설정부터 화가가 연기하지 않고, 화가 스스로 '화가다워지려고 노력하는 지점'에서 출발했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고민하던 김남표는 제주도 검질(잡초 넝쿨의 제주 방언)에서 그림 인생의 변곡점을 발견했다. "나무에 여러층이 섞여 있는 덩쿨은 오랫동안 추구한 질감이었다. 덩쿨을 그리자 내 그림을 보던 제주 사람들은 '검질을 그렸네'라고 하더라. 그 '검질'이라는 말이 내가 추구한 '감각의 질감'과 굉장히 와 닿는 뉘앙스였다." 붓 대신 손가락과 면봉으로 그리는 작가는 '검질'을 화폭에 옮겨놓은 듯 그려냈다. 이미 미술계에서도 '잘 그리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지만 이번 그림은 현장에서 느낀 감흥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스케치 없이 순간적으로 그려요. 붓을 사용하지 않고 면봉이나 비미술적 재료를 좋아합니다. 익숙한건 기술적 미감에 치중하게 하죠. 그래서 면봉을 주로 선호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유화작품 30여점(파스텔 기법 3점)이 선보인다. 호리아트스페이스는 10호에서 150호까지 다양한 크기의 20여점이 전시됐다. 제주의 검질 풍경을 배경이지만 김남표의 상징중의 하나인 호랑이와 표범 혹은 얼룩말이 함께 등장한다. 이전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 배경들은 상상에 의존한 것이 아닌 제주에서 보고 느낀 풍경이 담겼다. 아이프라운지에는 퍼즐처럼 대형 화면을 이루는 '셀(cell) 시리즈' 3점을 공개했다. 또 아이프안에 마련된 '그림 명상 스튜디오'에는 검질, 노을, 사슴 등이 등장하는 작품 3점이 조용히 걸려 명상을 통한 내면 바라보기’ 시간도 제공한다. 셀 작업은 ‘25×25cm’ 53조각으로 만든 '검질 풍경'(세로185×가로270cm), 68조각으로 구성된 야외 풍경(세로106×가로445cm), 84조각으로 완성된 올빼미 작품(세로185×가로320cm)은 일명 '쪼개기 공법'으로 나온 독창적인 기법이다. 제주 아외에서 사생할 때 물든 온 몸의 감각적 풍경을 조각조각 상상력으로 구현한 작가의 분신술 같은 작품이다. 김 작가는 "검질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보면 음습하다. 마치 우리의 삶을 이루는 하루하루가 ‘추상’인 것과 같은 이치 같았다"며 "하루하루에는 불편한, 치열함 부조리함이 있지만 전체 한 장면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르는 마음이 미술적 언어로 가능하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셀(조각)작업은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어 독특하다. 전체적으로는 풍광을 그린 구상 작품으로 보이지만 셀 하나 하나는 추상으로 변신한다. 이번 ‘김남표의 제주이야기’ 전시는 새로운 작품의 유통방식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고 있다. 유명작가의 비싼 작품을 투자 목적으로 여러사람들이 ‘쪼개서 구매하는 공동구매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김남표 작업의 '공동소장' 방식은 나눔과 지속의 연결고리로서 흥미롭다. ‘셀(cell) 시리즈’ 중 53조각으로 구성된 한 점을 공동소장 방식으로 판매한다. 40조각을 개인이 따로 따로 구매할수 있다. 나머지 13조각은 작가와 기획사 쪽이 보관한다. 구매자는 최소 1조각에서 최대 4조각까지 구매할 수 있어 최소 10명에서 최대 40명의 컬렉터 그룹이 형성된다. 이들에겐 전시를 기획한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의 지속적인 사후 서비스가 제공된다. 정기적인 작가와의 만남, 소장자 간의 멤버스 데이, 소장품의 교환 이벤트, 작가의 드로잉 수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적인 ‘팬클럽’ 역할까지 발전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새로운 개념의 패트런(patron-후원)으로 작가와 소장가의 꾸준한 만남과 응원이 이어질 수 있게 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1년간 제주 화가살이를 하고 제주 작업이 전시까지 이어진 화가 김남표는 "요즘 더 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림의 방향도 보이고, 무언가 하고 싶다는 걸 느낀다"며 "작가로서 이렇게 행복한 것 없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화가처럼 연기했던 부분들에 반성적 태도의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이 50이 되면 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햐 하는 시기지만 그 역시도 혼자는 불가능하다. 동료가 있어야 하고, 따갑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야 하고, 고유함보다는 질문이 있어야 하고, 답이 있어야 어우러질수 있는 게 전시이다. 이젠 그것이 전시의 조건"이라고 했다. 뒤돌아 볼때 어른이 된다. 반백살이 넘어 찐우정을 발휘한 화가와 기획자 영화감독은 '일상의 위대한 힘'을 깨달았다.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 조각이 모여 일상이 되어 풍광이 되고 그렇게 어우러진 조화는 함께, 같이라는 상생의 미학을 전한다. 결국 내공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전시를 본 한 유명 미술 컬렉터는 "작가적인 힘이 느껴져서 보기 좋다. 예뻐서 잘 팔리는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작가다움과 무게감이 있어 독특해 사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전시는 12월18일까지. 2020/11/21
낸시랭 '아모르파티'…터부 요기니·스칼렛 페어리 진흙탕을 빠져나와서일까. 말갛게 보이는 얼굴은 아기같은 표정이었다. 사기 결혼으로 얼룩진 '관종의 최후'. 혹자는 그렇게도 비난했지만 갈기갈기 찢긴 채 고통의 시간을 통과해온 그녀는 무소의 뿔처럼 단단해졌다. "만족스럽고 행복해요. 아트에 올인한 만큼 개인적으로 힘든 부분도 안느껴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제 작품을 통해서 희망을 얻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제가 더 행복해요." 낸시랭 '스칼렛 페어리'전은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4일 개막한 이 개인전은 올해에만 세번째 전시다. 그럼에도 서울 마포 합정동 진산갤러리에 사람들이 줄을섰다. "올 한해 개인전만 3개, 개인사적 때문에 전시를 못한 것을 몰아붙여서 하고 있어요. 한해에만 세번의 전시는 처음해봤는데, 아이고 다시 안할려고요. 진짜 힘들어요~하하앙" 애교와 넉살 사이를 오가며 말을 풀어내는 낸시랭(45)과 '팝아티스트'로 마주했다. ◆'아모르 파티'..."나는 아티스트" "'낸시랭 다음 개인전도 기대된다'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전시장 문은 쉬지 못했다. 닫힌 문은 열리고 닫히며 이쪽과 저쪽을 이어줬다. 거울을 통과하면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영화처럼, '터부 요기니(Taboo Yogini)'가 있는 '낸시랭의 세계'는 그야말로 현실계가 아닌 '외계 세계'다. 로보트 건담의 몸에 여자 아이의 얼굴을 한 '터부 요기니'는 낸시랭의 분신이다. 이번 전시에는 우주공간에 떠 있던 '터부 요기니'가 3D로 탄생되어 박격포같은 총을 들고 활짝핀 꽃들을 지키고 있다. '터부 요기니'는 '신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인 메신저'다. ‘요기니(Yogini)’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원에서 ‘천사’ 또는 ‘사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낸시랭이 만들어낸 '터부 요기니'의 탄생 이야기는 이렇다. 터부 요기니는 항상 변형된 모습과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사실 지구상에 있으면 안되는 금기된 존재다. 신과도 동일한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지만 막강한 파워의 능력을 함부로 사용 할 수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더욱더 금기시된 존재다. 하지만, 이것은 그 금기를 깨고 나타나 오직 인간들의 꿈을 이루어주고 죽는다. 죽음으로 희생을 치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존재는 죽는 순간 또다시 다른 새로운 '터부 요기니'로 부활한다. '터부 요기니'는 탐욕을 자극한다. '72.7×53cm' 캔버스에 살아나 전시때마다 팔려나간다. 주문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잡지에서 오려낸 백인 여자 아이 얼굴은 변형이 가능하다. 사업가는 자신의 딸 얼굴을 그려달라고 하고 또 어떤 연예인은 자기 얼굴을 넣어달라고 한다. 많은 사람의 꿈이 이뤄지기 바라는 마음에 10여년간 가격을 올리지 않았지만 최근 50만원을 올려 550만원에 판매한다. 터부 요기니. '백인 소녀' 얼굴을 오려붙여 만화같고 인형놀이 같은 작품이지만 살펴보면 심오하다. 건담 로봇의 양쪽 날개는 거대한 심장 모양이 달려있고, 팔에는 샤넬백이 들려있다. 1215라는 숫자화 된 암호가 반복되게 찍혀있고 왼쪽 하단에는 건담로봇 프라모델도 붙어 있다. "'심장 날개'로 보이는 건 뇌의 해부학적 단면을 구성한 건데 '깊은 고통'을 메타포적으로 표현한거죠. 꿈을 이루려면 뜨거운 심장, 차가운 두뇌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샤넬 백'은 취향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압구정 키드'로 부잣집 딸내미로 살아온 그녀는 20대에 명품백을 대놓고 들고 다녀 욕을 먹었다. 그림만 보여주는 작가들과는 달랐다. 원래 갖고 있는 것들을 숨기지 않았다. 방송물을 먹으며 연예인 같은 아티스트는 더 튀어올랐다. 작품에까지 샤넬백을 오려 넣으며 욕망을 더 부채질했다. "사랑이 넘치는 신과 인간과 중간 사이 영적 메시지인 '터부 요기니'는 인간의 꿈을 이루고 죽고 또 다른 터부 요기니로 부활하죠. 샤넬백을 들고요. 하하. 개인적인 취향이기도 하지만 꿈으로 가기까지는 욕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위해 '명품 굿즈'를 넣은거에요. 명품은 옛날부터 찬양했고 좋아했던거니까." 요기니 밑에 달린 '프라모델'은 왜 있냐고요? "재네들은 터부 요기니의 팅커벨같은 존재에요. 프라모델은 제가 도색도 하나 하나 다했어요(매트하고 세련된 컬러'가 돋보인다) 사실 터부 요기니도 인간들의 꿈을 이뤄주기 힘들어 해요. 그래서 이중장치를 썼죠. 오락할 때 파워먹을때 같이 싸워주는 존재라고나할까요." 10여년 넘게 이어오는 '터부 요기니'는 낸시랭의 삶과 이어지고 있다. 최근 작품에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 또 총들이 발견된다. 김학철 연세대 교수(신학박사)는 "근래 작가의 터부 요기니는 작가의 트라우마를 여실히 반영한다"고 했다. "왼손의 칼날이 그러하다. 작가는 오른발에서 나오는 것이 하늘을 날 때 나오는 빛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추진체의 불꽃의 끝은 그렇게 뾰족하지 않을뿐더러 불꽃 자체가 그렇게 날이 선 듯 각져 있지않다. 역시 왼팔에 뾰족한 나사가 있다. 오른손에 들려 있는 총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2020년 작품인 M212 역시 경첩과 연결된 나사가 오른팔에 있다. 이 그림의 왼쪽 하단에는 해골이 등장한다. 갑옷이나 무기는 방어를 위한 것, 곧 위험을 막는 일종의 ‘가시’다. 해골은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면서 "이 작품들은 트라우마로 인한 액팅 아웃 일까, 아니면 헤쳐나가는 길에 서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하며 "후자"라고 봤다. 의외로 낸시랭은 씩씩했다. 보랏빛 배경의 큰 꽃잎에 앞에서 4개의 날개를 펴고 헤쳐나온 듯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그림처럼 전사로 거듭났다. "'언니가 대신 싸워주리라'며 비장함이 있죠. 전 외동딸이라 잘 모르는데, 동생이 맞고 들어오면 언니나 오빠가 형이 '누구야, 누가 내 동생을 때렸어~'하고 싸우러 나가는 그런 마음, 내가 대신 해주리라 상처를 치유해주리라며 다짐하는 내면이기도 해요." 무엇이든 현대미술이 되는 동시대에서 자신의 상징을 갖는 작품은 흔치 않다. 차별화가 생명인 작가들의 세계에서 독창성은 그야말로 최대 무기다. 그런면에서 '터부 요기니'를 창조해낸 낸시랭의 감각적인 재능이다. ◆스칼렛 시리즈...'판타지→페어리' 낙인 찍힘에 대한 질문 2019년부터 시작된 새로운 신작 '스칼렛 시리즈'는 사회적 낙인(Stigma) 찍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작가로서 자신이 겪은 극심한 아픔을 '여성’이라는 약자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게됐다. "극심한 가정폭행과 포르노리벤지 협박, 사기결혼, 이혼녀 등 오늘날의 글로벌 SNS시대에 버튼하나로 ‘사회적 낙인’이 주홍글씨처럼 스칼렛이 되어버림을 작품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애교섞였던 목소리가 강직해졌다. "스칼렛을 통해 전세계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불합리한 고통과 사회적 관점에 대해 질문하고 있지만 대립이 아닌 공존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에서 차용한 ‘스칼렛(Scarlet)’ 연작은 채도가 매우 높은 빨강색이란 뜻처럼 밝고 화려하다 . '스칼렛 연작'은 사진같은 그림으로 알려진 하이퍼리얼리즘 기법으로 제작됐다. "코로나 시대여서 집콕하며 작업에 몰두할수 있었다"는 그는 '극사실화 끝판왕'의 진수를 발휘했다. 미술시장에서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홍대 출신답게 붓자욱 하나 흔적없는 작품이다. 시간과의 싸움, 반복되는 노동과 수행처럼 얻어진 결과다. 젯소칠 후에 사포질, 또 젯소칠을 한다. 그 위에 컴퓨터로 정밀하게 구성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스케치한 후 유화물감으로 세세하게 채색한후 바니시 작업으로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깊은 곳에서 상통한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격형'이 물질의 현실을 초월하여 대상이 없는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다시 말해 대상이 없으니 지향할 정신마저 비우려는 무(無)를 향한 노력이듯 하이퍼 리얼리즘은 온전히 대상을 몰입하여 자신의 주관을 멈추려는 것이다." 김학철 연대 교수는 "낸시랭의 꽃은 상처받지 않을 듯이 화려하고 한껏 피었다. 놀랍지 않은가"라며 낸시랭의 긍정적 에너지를 평가했다. 특히 "지난해보다 스칼렛 연작들의 채도와 명도가 확연히 낮아지는데 이는 '화려함'에서 '성숙함'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 개인전에는 평생 처음으로 작업했다는 캔버스 200호 사이즈 대형 유화 작품도 선보였다. 활짝 펴 만개한 붉은 꽃은 도발적이고 공격적이다. 노란 암술이 우뚝 선 꽃잎 안에서 총을 들고 있는 터부 요기니와 접신하는 장면이다. 대립이 아닌 공존을 의미한다. '사진같은 그림' 앞에서 정말 혼자 그린 것 맞냐고 몇번을 묻자 "내가 혼자 다 한거다"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조수를 쓰려고 했지만 월급을 못주니까 같이 할수 없었다고 했다. 다만 디지털 컴맹이어서 밑그림을 구성할때 그래픽 어시턴트가 도와주는 것 빼곤 오리고 붙이고 드로잉하고 그리고 스탬핑 찍고 작업하는 모든 과정을 "내 손으로 하나하나 작업한다"고 강조했다. "안 믿는것 같아서 이번 작업은 동영상을 찍어서 SNS에 공유 했어요." 특히 표면이 반짝이는 거대한 작품앞에서 자화자찬했다. 개막식때 동료 작가들이 와서 "낸시야 진짜 잘했다"라고 칭찬했다"면서 "레진 작업은 기포가 생기고 균일하는게 매우 힘든데, 반듯하게 잘 나왔다"며 스스로 만족감을 보였다. 낸시랭은 2002년 홍익대 미대 대학원을 졸업한후 2003년부터 주목받았다.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와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펼친 ‘초대받지 못한 꿈과 갈등-터부요기니’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때문이었다. 가부끼 분장을 하고 (깽깽이)바이올린을 켜는 그녀는 온 몸을 드러낸 패션으로 더욱 화제가 됐다. 모두가 벗은 몸이라고 소비됐지만 자신은 '빅토리아 시크릿'을 입었다며 '패션을 입었다'고 했다. 이후 미술잡지보다 패션잡지에 소개되며 방송계에 진출, 정작 아티스트보다 연예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극도의 솔직함'으로 비난과 찬사를 받아왔지만 심장박동은 전시장에서 더 뛰었다. 홍익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학사 석사를 졸업했으며, 2001 대학원때 첫 개인전을 시작, 22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의 디렉터 드미트리 살몬(Dimitri Salmon)이 기획한 프랑스 앵그르 미술관 2009‘앵그르 인 모던(Ingres in Modern)’전시에 대한민국 최연소 작가로 초대되어 베이컨, 앵그르, 피카소 등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작품들과 함께 나란히 작품 전시를 했다. 세계적인 락그룹 2003린킨파크(Linkin Park) 워너뮤직(Wanner Music), 패션그룹 2005루이 비통(Louis Viutton)과 함께 캔버스 페인팅 작품, 비디오 작품으로 아트 콜라보레이션 작업들도 선보였다. 전시 이력만 A4 용지 2장을 넘어갈 정도다. 홍익대 미대 96학번으로 당시 지도교수였던 故 이두식 교수는 '작가는 개인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개인전은 혼자 오롯이 도마 위에 올라간다. 아티스트는 그렇게 해야 발전된다"는 말을 철떡처럼 귀에 붙였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또래 작가보다 전시횟수가 많았다. 방송을 하면서도 1년에 개인전을 꼭 치뤘다. 날라리 연예인같은 이미지때문에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아 속상하고 억울했지만 개의치 않는다고도 했다. 결국 '작품에서 드러나니까.' "이두식 교수님이 '한 학번에 아티스트 한명만 나와도 많이 나오는 거다'라고 말씀하셨을땐 몰랐어요. 그때 이해 못했는데 지금은 무슨 말인지 알아요. 당시 120명이 동기였는데 작품 활동하는 친구는 많지 않아요. 대학시절 7명이 몰려다녔는데 저만 작업하고 있어요. 경제적인 이유 등 각기 다양한 환경속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해나가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던 소녀는 엄마가 반대하던 화가가 됐다. 해외출장이 잦았던 부모님 덕분일지도 모른다. 무남독녀, 어린시절 늘 혼자 놀았다. 사방 벽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놓으면 엄마는 화내지 않았다. 대신 벽지를 새로 싹 바꿔줬고, 한계없는 풍요는 자신감과 상상력을 키웠다. 엄마의 재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청담동 음주가무 여왕'으로 휩쓰는 사이 집안은 망했고, 엄마는 17년간 암투병하다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상상도 못했던 현실. 돈이 없다는 절박함속 '생계형 아티스트'가 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혼자 사는 법을 배웠다. 피가 철철 터지고 나서야 깨달은 건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것. 엄마. 아직도 '엄마'를 떠올리면 손이 떨리고 절로 눈물이 난다. "저를 너무 사랑하셨어요. 엄마가 침대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우리 낸시 내가 죽으면 어떡하니....했던 말이 너무 생각나요." 하나밖에 없는 딸.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사람을 잘 믿는 저를 보며 했던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땐 와닿지 않았는데, 제가 힘든 일을 겪으면서 그 말의 뜻이 다시 생각났죠. 엄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언니라도, 오빠라도 있었으면...." 낸시랭은 눈물을 멈췄다. '터부 요기니, 난 팝아티스트다." 결혼과 이혼, 비난과 조소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헤매지 않은 건 '아트의 힘'이다. "믿음과 아트가 있어 견딘다"고 했다. "제가 '터부 요기니'작품을 통해서 창조해낸 건 '아트'잖아요. 아티스트란, 선택받은 존재로서 세상에 무언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자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터부요기니가 저를 치유하고 나아가게 한 만큼 희망과 좋은 에너지를 주고 있으니까 제 작품을 보는 모든 분들이 힘을 얻어서 꿈을 이루시고 행복하고 고통을 헤쳐나갔으면 좋겠어요. " 그림은 구원이었다. 고립과 고독 속에서 빛나는 어둠을 봤을까. 사고무친 (四顧無親)그녀는 스스로를 토닥였다. "낸시야, 2020년 신작으로만 치룬 3개의 전시, 너 진짜 끝내주게 잘했다. 수고했다." 20호에서 100호 120호 200호까지 18점을 선보인 '스칼렛 페어리' 전시는 27일까지. 2020/11/07
27세 요절한 '낙서화가 최고봉' 바스키아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 '낙서'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대표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1960~1988)가 다시 부활했다. “나는 전설”이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바스키아는 '현대미술 전설'이 됐다. 1988년, 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바스키아는 동시대에도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패션 문화 아이콘으로 사랑받고 있다. 1980년대 초 미국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바스키아는 생을 마감하기까지 8년동안 약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왕관·저작권 기호©...낙서같은 그림 약 1380억원, 미국작가 최고 낙찰가 “내 어릴 적 꿈은 만화가였다.” 어릴적 그의 어머니는 바스키아를 데리고 뉴욕의 주요 미술관을 함께 다녔다. 그때 다빈치(Leonardo da Vinci)부터 피카소(Pablo Picasso)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화룰 감상하며 미술사에 입문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부학적인 인체 모습과 내장 기관들, 강조된 팔과 다리의 형태는 7세 때 당했던 사고와 연관된다. 바스키아는 1968년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내장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비장을 떼어내는 큰 수술로 장기간 병원에 머물렀던 바스키아는 어머니가 선물한 해부학 입문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을 보면서 해부학적 형상에 관심을 보였다. 이후 바스키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보면서 사고를 발전시켰고 이러한 지식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연결되면서 뼈와 해골, 신체 기관이 그대로 노출되는 독창적인 도상으로 나타난다. 바스키아 그림은 SAMO, 왕관, 저작권 기호©, 슈퍼맨에서 나온 알파벳 ‘S’, 공증인(Notary)을 의미하는 ‘NOTA’ 가 그려져있는게 특징이다. 위대함을 나타내는 도상들과 그가 존경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와 음악가들의 이미지를 결합해 새로운 방식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바스키아의 예술세계는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텍스트와 자유로운 드로잉이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바스키아는 화면에 텍스트를 쓴 후 그 위에 선을 긋거나 덧칠을 해서 글자를 지워나간다. 가려진 문구들을 읽어내기 위해 더욱 집중해서 보게 만드는 바스키아의 지우기 전략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무의식적으로 포착된 단어들과 이미지들을 나열해 익살스럽고 부조리한 의미를 생성시키는 그의 작품은 알파벳과 단어, 문장과 드로잉을 자유롭게 조합해 회화의 영역을 확장했다. 언어 체계가 가진 사회적 약속의 틀을 깨는 바스키아의 텍스트와 자유로운 드로잉은 사회적 편견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에너지로 점철되어 있다. 고상함과 저급함을 뒤섞고 시간의 흐름과 공간, 인과관계를 뒤엎는 퍼즐같은 작품은 20세기 시각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장 미셀 바스키아는 누구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를 뛰어넘는 그림값을 자랑한다. 201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바스키아의 1982년작 회화 '무제'는 1억150만달러(약 1380억원)에 낙찰돼 미국 작가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나는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다. 단지 아티스트일 뿐이다.” 초기에는 그저 '낙서 같은 그림'으로 치부됐다. 뉴욕거리에 낙서나 하고 돌아다니는 '불량 청소년' 이미지였다. 1978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하던 바스키아는 브루클린과 소호 거리 곳곳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시작한다. 친구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흔해 빠진 낡은 것(SAMe Old shit)’이라는 뜻을 담은 ‘SAMO© (세이모)’를 만들어 낙서 그림에 사인처럼 박았다. 간결한 문구에 담긴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SAMO©는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백인들로 뒤덮인 소호 지역의 갤러리들은 그들의 색다른 행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스키아는 1978년 말부터 친구 알 디아즈와 입장차이로 결별했으나, SAMO©라는 글자는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큐레이터의 안목 지원...1982년 '낙서 미술가'→세계적인 작가로 바스키아는 우편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클럽 57(Club 57)과 머드 클럽(Mudd Club)에서 활동하면서 영화제작자이자 음악가, 큐레이터인 디에고 코르테즈(Diego Cortez)를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진다. 바스키아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코르테즈는 그의 작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소개로 바스키아는 정식 미술판에 발을 디뎠다. 1980년 제니 홀저(Jenny Holzer), 케니 샤프(Kenny Scharf), 키키 스미스(Kiki Smith) 등이 참여한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스 스퀘어 쇼 The Times Square Show'와 1981년 뉴욕 PS1의 '뉴욕/뉴 웨이브 New York/New Wave'에 참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이 미술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19명의 미술가가 1600점 이상을 출품한 '뉴욕/뉴 웨이브' 전시에서 주목받았다. 바스키아는 자동차, 비행기, 도식적인 해골, 해부학적 인체 형상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공존하는 15점을 출품, 미술계에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 1982년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언더그라운드 '낙서 미술가'에서 미국 화단의 떠오르는 신인 아티스트로 급부상한다. 같은 해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의 초대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하루 만에 모든 작품이 팔려나갔고,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 중 하나인 '카셀 도큐멘타 7'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 나갔다. ◇당대 스타 앤디워홀과 만남+죽음...27세 약물과다로 사망 바스키아는 '팝아트 황제' 앤디워홀을 만나면서 예술세계관을 확장한다. 1982년 10월 4일, 앤디 워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바스키아는 워홀과 인사를 나눈 뒤 작업실로 돌아가 워홀의 초상화를 그리고 바로 다시 가져와 워홀에게 보여주었다. 고고한 예술영역에 얽매어 있지 않은 그림. 이때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와 함께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갤러리스트 브루노 비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의 제안으로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까지 세 명이 함께 시작한 협업 프로젝트는 1984년부터 워홀과 바스키아 둘만의 작업으로 진행됐다. 워홀이 먼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면 바스키아가 마지막으로 거친 붓질로 글씨를 쓰고 지워 작품을 완성했다. 워홀에 의해 창조된 대중문화의 상품 이미지들은 바스키아에 의해 지워지고 채워지면서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했다. 바스키아는 실크스크린 화면에 유화, 아크릴 물감, 스프레이 등을 대담하게 사용하고 여러 단어들을 써 내려가면서 다양한 의미를 생성하는 작품을 완성했다. 이들은 1985년까지 2년간 15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공동으로 제작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바스키아는 워홀을 의지하고 존경했으며 워홀에게 바스키아의 젊은 에너지는 새로운 예술적 동력이 되었다.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는다. 바스키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았다.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Abidjan)으로 이주할 결심을 한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이주를 엿새 앞둔 8월 12일 약물 과다로 유명을 달리한다. ‘거리의 이단아’에서 ‘세계 화단의 유망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의 8년은 불꽃처럼 강렬했다. 그가 남긴 드로잉, 회화와 조각 작품, 3000여점은 그를 '반항하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재생하고 있다. ◇롯데뮤지엄 '장 미쉘 바스키아•거리, 영웅, 예술'전 8일 개막 '죽어도 죽지 않는 화가'가 된 바스키아는 불안한 코로나 시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낙서같은 그림은 아이같은 순수함과 해방감을 선사하며 몰입하게 한다.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바스키아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장 미쉘 바스키아 •거리, 영웅, 예술' 전을 주제로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사진 작품 등 150 여점을 선보인다. 뉴욕 거리에서 시작된 SAMO© (세이모)시기를 기록한 사진 작품을 중심으로 바스키아의 초창기 작품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과 함께한 대형 작품도 전시된다. 두 명의 전설적인 천재 화가의 독창적인 작업 방식이 교차하는 협업 작품 5점이 공개됐다. 또한 앤디 워홀 일기에서 발췌한 바스키아와 함께 한 기록들을 통해서 두 거장이 나눈 친밀한 일상의 모습도 만나볼수 있다. 워홀의 기계적인 이미지에 바스키아의 저항적이고 즉흥적인 붓질을 결합해, 대중문화와 물질주의의 양면적 모습을 폭로하는 두 천재 화가의 역동적인 예술세계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아이가 그린듯 낙서같은 그림은 이젠 그림을 넘어 옷, 컵,악세서리, 문구류까지 점령해, '바스키아 예술은 일상'이 됐다. 이번 전시는 삶의 부조리한 가치에 의문을 던지며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누구보다 긴 여운을 남긴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전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시간별 관람 인원을 제한하여 사전예약제로 진행한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입장권을 구매할수 있다. 한편 바스키아 전시의 오디오 가이드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앱을 통해 들을 수 있다. K-POP 대표 아티스트 EXO 찬열과 세훈이 보이스 앰버서더로 참여하여, 전시 내용을 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들려준다. 전시는 2021년 2월7일까지. 2020/10/07
김기창 부인? '20세기 한국 대표 화가' 우향 박래현 77년전 시작된 이야기다. 남성 화가들이 약진하던 시대에 어깨를 나란히 했던 한 여성 화가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은 그야말로 한국화가들의 경쟁장이었다. 1922년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명 '선전'으로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거쳐갔다. 허백련 김은호 이용우 김용진의 입상을 시작으로 이상범 잉응로 김기창 장우성등이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지금은 국내 한국화단의 거목들로 한국미술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화가들이다. 남성화가들의 승승장구속 1943년 열린 조선미술전람회는 깜짝 놀랐다. 총독상에 뽑힌 그림은 '단장', 여성화가였다. 이름은 박래현. 신여성 화가의 존재감은 한국화의 새 이름이었다. ◇1943년 '단장' 조선미전 총독상 ...신 여성화가 박래현 탄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경성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193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이듬해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사범과 일본화에 입학했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받은건 대학교 4학년때다. ‘거울을 보는 여성’을 그린 작품 제목은 단장(화장). 당시 박래현의 하숙집 딸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이런 그림은 일본 미인도에서 즐겨 다루어지던 화풍이었다. 배경이 없는 큰 화면에 검은 옷의 소녀와 붉은 화장대만 마주 보도록 대담한 구성이 눈길을 끈다. 화장대 위의 화장솔과 소녀의 손에서는 섬세한 세부묘사를 놓치지 않았다. 인물화에서 탄탄한 기초를 쌓은 박래현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화 여성 화가로 스타로 부상한 그의 '세계관'은 사랑과 함께 확장됐다. 우향 박래현(1920~1976)은 한국화 1호 부부다. 총독상을 탄 '단장'은 박래현의 인생도 새롭게 '단장'시켰다. 조선미전 시상식을 위해 귀국했다가 한 남자를 만났다. 훗날 '바보산수'로 유명해진 김기창. 1938년 조선미전에서 수상한 그림 선배였다. 1947년 김기창과 결혼은 당대 화제였다.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한 박래현과 청각장애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김기창의 연애사는 지금도 '미술계 전설'로 남아있다. ◇사랑 고백도 먼저...김기창과 '부부화가' 국내 최초 '부부전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당시 선전의 추천작가였던 김기창에게 인사를 하러 간게 인연이었다. 종아리가 예쁜 박래현에 반했지만, 가진게 없어 남자는 주저했다. 훤칠한 김기창의 외모에 반한 건 박래현이었다. 청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화가로 살 수 있게 해달라" 여자가 먼저 사랑고백을 하자 일곱살 많은 화가 김기창은 박래현에 푹 빠졌다. "각자의 예술세계를 인정하되 간섭은 하지말자" 그 약속과 함께 1946년 남산 민속박물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년후 국내 최초로 부부전시도 열었다. 금슬은 공고했다.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운보 김기창과 12회의 부부전을 열었고 중진 동양화가들과 백양회를 결성하여 동양화단을 이끌었다. '박래현' 하면 유명한 그림은 교과서에도 나와 익숙한 '노점'이다. 마치 피카소가 그린 것 같은 입체파 분위기가 나는 그림. ◇'노점' 1956년 대통령상 수상...한국화단 스타화가 등극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노점'은 1956년 탄생했다. 그해 11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남편 김기창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친정인 군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을때를 그린 그림이다. 박래현은 피난생활을 하면서 입체주의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화풍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을 보여준다. 시장을 오가며 마주친 평범한 풍경을 그렸지만 담채의 맑은 색상,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색면, 예리한 필선에서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긴다. 평소 생활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색상의 배합에 예민한 감각을 집중했던 여성화가 박래현의 성향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노점'이 그려진 그 해 1956년은 박래현의 전성기였다. 막내딸을 출산하고 네 아이의 엄마가 되기도 했지만 붓을 놓지 않았다. 5월에 김기창과 나란히 부부전을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화풍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한 달 뒤엔 6월에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화가 부인→4명 아이의 엄마...화가로서 3중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촉망받는 신 여성 화가의 번민은 컸다. 화가에서 부인이 되고 엄마가 됐지만, 화가는 포기할수 없는 일이었다. 늘 가사에 쫓겨 작품 제작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며 고뇌는 깊어졌다. "내가 예술가라 할 수 있는가" 고민도 잠깐,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을 쪼개어 가며 작품을 제작했고, 부부전과 백양회 회원전을 중심으로 의욕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달랐다. 사람들은 그를 ‘김기창의 아내’, ‘김기창과 같은 길을 가는 부인’이라 불렀다. 그렇다고 가사의 굴레와 김기창의 그늘에 갇히지 않았다. 생활 속에서 예술의 주제, 재료, 기법을 찾아내며 새로운 동양화를 탐구했다. 매년 부부전을 함께했고 많은 수의 합작도를 제작했다. 대부분 소품으로 그린 화조화인데, 전성기때인 1956년에 그린 4폭의 연폭 병풍 '봄C'(아라리오컬렉션)가 남아, 부부의 예술열정을 전한다. 167×248cm 크기 보기 드문 규모의 합작도다. 많은 수의 합작도가 전해지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예술가 부부’로서 사회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던 이들의 그림이 인기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950~1960년대 전성기…미국 유학 판화가 변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56년은 박래현과 김기창이 입체주의를 수용한 새로운 양식의 동양화를 선보이면서 화단에 큰 획을 그었던 해이다. 연이어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56년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노점'으로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해외를 여행하며 시야를 넓히고 추상화로 작품을 전향했다.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작업하고 싶다" 아이 낳고 키우며 그림을 그리며 입버릇처럼 나온 말.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석하고 남편 운보와 중남미를 여행한 뒤였다. 남편은 아내의 그 허한 심정을 알아봤다. "그림을 계속 그려라" 1969년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이가 4명, 나이 49세였다.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와 봅 블랙번 판화연구소에서 들어가 한국화가 아닌, 새로운 조형 작업을 실험했다. 동판을 긁고 파서 색을 입혀 한국적 소재를 기하학적으로 풀어내는 추상판화는 한국 작가 최초 시도였다. 1974년까지 뉴욕에 머물며 판화와 타피스트리 작업에 몰두했다. 이후 다시 동양화 작업을 재개하고 미국의 판화전에 참석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을 펼쳤으나 갑작스럽게 간암이 발병하여 1976년 1월 타계했다. ◇태피스트리·동판화 작업 활동중 56세 간암으로 타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2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부유한 대지주의 장녀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 화가가 된 신 여성. 우향 박래현은 근대기 여성화가 첫 세대 작가로 한국미술사를 개척했다. 식민지 시기 일본화를 수학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회화를 모색했고,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감할 수 있는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를 탐구한 미술가다. 특히 섬유예술이 막 싹트던 1960년대 박래현이 선보인 태피스트리와 다양한 동판화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1970년대에 선보인 판화 작업들은 한국 미술에서 선구적인 작업으로 꼽힌다.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박래현은 낯설다. 가부장제 시대는 ‘박래현’이라는 이름대신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화가 김기창의 아내’라는 수식이 더 크게 부각됐다. 화가이자 화가의 아내였던 박래현이 아닌 20세기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여성작가로 부활한다. 하다만 작업을 두고 56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그림과 함께 살아나고 있다. ◇화가는 불멸의 삶… 탄생 100주년 기념전 '박래현, 삼중통역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0년 올해는 박래현 탄생 100주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100주년을 기념한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을 덕수궁 전관에서 29일 개막했다. '예술가 박래현'의 성과를 조명한다. 그의 선구적 예술작업이 마땅히 누렸어야할 비평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전시다. 회화, 판화, 태피스트리 등 작품 총 138점이 35년 만에 대거 공개됐다. 전시명인 ‘삼중통역자’는 박래현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표현한 명칭이다. 미국 여행에서 박래현은 여행가이드의 영어를 해석하여 다시 구화와 몸짓으로 김기창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여행에 동행한 수필가 모윤숙이 그 모습에 관심을 보이자 박래현은 자신이 ‘삼중통역자와 같다’고 표현했다. 박래현이 말한 ‘삼중통역자’는 영어, 한국어, 구화(구어)를 넘나드는 언어 통역을 의미하지만, 이번 전시에서의 ‘삼중통역’은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라는 세 가지 매체를 넘나들며 연결지었던 그의 예술 세계로 의미를 확장했다. 이 전시는 근대기 신 여성 화가였던 박래현의 도전을 따라간다. 1부 한국화의 ‘현대’, 2부 여성과 ‘생활’, 3부 세계여행과 ‘추상’, 4부 판화와 ‘기술’로 선보인다. 미술사학자인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오랫동안 박래현의 작품을 비장(秘藏)했던 소장가들의 적극적 협력으로 평소 보기 어려웠던 작품들이 대거 전시장으로 ‘외출’했다”고 전했다. 화가는 '불멸의 삶'이다. 그것을 빛내는 건 소장가들. 이번 전시도 박래현 그림을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소장가들의 '사회공헌' 덕분이다. 결국 미술품은 개인의 것이 아닌 공공미술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오는 10월8일 10월 오후 4시부터 약 40분간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연구사의 작품 설명이 미술관 유튜브에서 중계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박래현 전시는 미술관 누리집(mmca.go.kr)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무료 관람할 수 있다. 2021년 1월 3일까지. 2020/09/30
BTS RM도 사간 '달항아리' 도예가 권대섭의 '사발' "오늘도 조선사발 500년의 맥은 여전히 힘차게 흐르고 있다." 나선화 전 문화재청장은 미술사학자답게 도예작가 권대섭의 '사발'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발의 그 내면은 조선의 선비 문화처럼 청렴하고 단순 소박한 듯 하면서도 화려하려 현대미와 상통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전통의 맥박이 힘차게 뛰면서 예술성으로 현대와 미래를 관통한다"고. 사발 그릇 하나 놓고 웬 호들갑이냐고 할수 있다. 요즘에야 흔한게 사발 그릇 아닌가. 한때 풍미했던 '플라스틱 그릇' 시대를 넘어 '도자 그릇'이 식탁을 점령한지도 오래다.도예 공방도 활성화돼 취미로 그릇을 만드는 2030세대도 많다.이들은 사발을 만들어 국그릇 밥그릇으로 쓰며 손맛과 흙맛의 오묘함을 느낀다고 했다. 이런측면에서 서울 이태원 박여숙 화랑에서 도예가 권대섭이 열고 있는 '사발'전은 어떤 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발은 흔히 찻사발이라고 해서 다도용 그릇으로 통용되고 있다. 권대섭은 "사발은 차(茶)를 마실 때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두루 쓸 수 있다”면서 “옛 것을 많이 보고 내 나름 소화한 후 사발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박여숙화랑 '사발'전 100점 전시...권대섭은 누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난해 50cm 이상 크기의 대형 달항아리를 선보였던 도예가 권대섭(68)은 이번 전시에 사발 100점을 내놓았다. "일본에서 사발을 귀히 여기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사발이 외면받고 있다"며 사발 전시의 의미를 달았다. 일본에서 도자 공부를 하며 우리 도자의 흔적을 찾아나선 이력이 있다. 홍익대 미대 서양화 출신으로 도예가로 변신한 건 인사동에서 우연히 발견한 조선 백자 달항아리 때문이었다. 그 소박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겨 일본으로까지 건너갔다. 한국의 도자기 역사와 백자 항아리의 형태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일본으로 간 것이 아이러니하다. 1979년 일본 오가사와라 도예몬에서 도자 수학을 하고, 규수 나베시마로 5년간 조선 도공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조선시대 관요가 있던 경기도 광주에 가마를 짓고 도요지를 찾아다녔다. 그 옛날 도공들이 폐기했을 파편(사금파리)을 모으고 연구했고, 연구를 거듭했다. 이후 1995년 전시를 시작으로 현대 도예가로 길을 다졌다. 그의 항아리가 주목받은 건 2015년, 2018년 벨기에 안트워프의 악셀 베르보르트에서 백자 항아리 개인전을 열면서다. 해외에서 먼저 알아본 권대섭의 달항아리였다. .2018년 10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달항아리는 52500 파운드에 낙찰(한화 약 9700만원)되며 '달항아리 작가'로 유명세를 탔다. 권대섭은 조선 백자 항아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구현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높이가 45cm를 넘는 강건한 항아리로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중에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한국의 도자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박여숙화랑을 통해 도예가 권대섭의 본격 마케팅이 시작됐다. 2017년 한국민속박물관의 '봄놀이 – 산, 꽃, 밥', '공예 트렌드페어', '키아프' 등 국내의 여러 전시와 아트페어에서 '백자 시리즈'를 선보이고, 컬렉터들을 사로잡았다. '한국 미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조선 '달항아리'의 몸값(2019년 서울옥션 31억 낙찰)이 치솟으면서 권대섭의 달항아리도 인기를 끌었다. 그의 달항아리는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멕시코의 멕시코 국립 박물관, 러시아 국립 박물관, 방글라데시 국립 박물관과 한국의 삼성 리움 미술관, 호림박물관, 민속박물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부수어 버린다'...권대섭의 항아리와 사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에게는 익숙한 옛날 물건인 항아리와 사발은 어떻게 예술품이 됐을까. 도예는 '불의 미학'이다. 권대섭은 이를 ‘자연의 도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전통 장작가마를 고집하는 작가는 조수도 없이 혼자 불의 미학과 상생하고 있다. 기대에 미치지 않는 항아리를 버리는데 주저함이 없다. "좋은 작품을 가마에서 꺼낼 때는 즐거움을 느끼고 말을 거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는 그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부수어 버린다"고 했다. 보통 1년에 겨우 6점의 백자 항아리를 완성작으로 빚어 낸다고 한다. 박여숙 화랑 박여숙 대표는 "최근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이들이 늘어나면서 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를 굽고, 사발을 만들지만 오늘날의 정신과 감각을 담아 구워내는 작가들은 많지 않다"며 "그렇기에 현대 도예가 권대섭의 존재는 각별하다"고 극찬했다. "그는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을 더해 우리시대의 정신이 담긴 달항아리와 사발을 만든다. 그래서 더욱 더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우리에겐 생활용품 '막사발'...일본 건너가 보물 대접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실 사발은 우리나라에서 '막 사발'이라 해서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평상시 매일 쓰던 그릇이니, 그냥 '사발 그릇'일 뿐이었다. 우리 사발 그릇들은 옛날엔 개밥그릇으로도 쓰여져, 70년대 고미술상들이 '개집부터 살펴봤다'는 이야기가 있다. 개밥 그릇이 알고 봤더니 '이조백자'였다는 거짓말같은 실화가 전해진다. 그렇다면 '사발'은 어떻게 예술품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일까. 사발에 예술성의 눈을 뜨게 한 건 일본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도를 즐기는 일본에서는 우리 '사발'을 '다완'이라 부르며 이를 매우 귀히 여긴다. 우리 사발은 본래 차를 마시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98)의 차 스승이었던 센노 리큐(1522~91)는 조선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조선 사발에 매료되어 이를 기반으로 ‘와비차’(侘び 또는 寂び, 侘茶)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전통적인 차문화에 독특한 불교의 선(禅)을 접목시켜 완성한 와비차가 그 뜻과 정신을 담아낼 그릇을 발견했는데 꾸밈없고 수수한 조선의 사발이었다. 당시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부족했던 일본에서 특히 간결하고 소박한 오늘날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가까운 ‘와비차’에는 중국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다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해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가고 조선 백자를 비롯해 사발이나 대접을 노획해 갔던 것도 이 소박하고 꾸밈없는 조선 도자의 치장하지 않은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조선 사발의 발견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다. 이렇게 우리의 생활용 물건인 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예술품으로 귀한 보물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 각양 각색으로 만든 사발 100점을 선보인 도예가 권대섭은 "사발을 일상에서 많이 사용해야 한다"는 바람을 담았다. "오늘날 우리 일상에서 사발을 많이 사용해 고유의 문화까지 되살려야 한다"는 그는 "사발을 많이 사용하다보면 사발이 왜 좋은지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손맛, 흙맛 불맛으로 빚어낸 크고 작은 사발은 그야말로 예술품의 경지에 올라 평범함보다 아찔함을 전한다. 전시에 나온 사발 가격은 100만~300만원에 판매한다. 한편 도예가 권대섭은 방탄소년단(BTS) 리더 RM 덕분에 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RM은 지난해 10월 박여숙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찾아와 달항아리 한점을 구매했다. RM은 당시 구매한 달항아리를 품에 안고 므훗한 미소를 지은 사진을 SNS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전시에 선보인 권대섭의 달항아리는 지난 7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 추정가 2000만~4700만원에 나와 한화 약 5000만원(HKD 320,000)에 낙찰된바 있다) 박여숙화랑은 이번에도 RM이 '다완(사발)'을 사갔다면서, "한국적인 미에 관심이 많다는 RM은 김환기, 윤형근과 더불어 권대섭 작가를 한국적 작가로 꼽았다”는 말도 잊지 않고 알렸다. 20대의 높은 안목일까, 유명세를 따르는 '돈질'일까. 2년만에 '미술시장 큰 손'으로 떠오른 RM의 관람 행보에 미술시장 희비가 엇갈리고 있어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다. (물론 '글로벌 아이돌'이 전시장을 찾아 작품을 보고 구매까지 이어져 환호와 긍정적인 반응이 크다. 세계적인 'BTS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전 빅뱅의 멤버들이 비싼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해외경매사와 큐레이팅하며 미술시장을 들썩였지만 연예인의 반짝 효과로 끝난 사례가 있었다. 미술컬렉터로서의 젊은 작가를 후원 발굴하거나 꾸준한 관심이 이어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는 평가다 ) 권대섭 '사발'전시는 10월22일까지. 2020/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