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그 '최면의 힘' 여전히 새롭다…김창열 작고 3주기 물방울인가 아닌가. 아무리 가까이 들여다봐도 믿기지 않는다. 들여다 보면 볼수록 한 점 물감의 흔적 뿐이다. 캔버스 화면에서 마술을 부린듯한 물방울 그림은 기묘하고 경이롭고 여전히 매혹적이다. 생전 물방울을 그렸던 화가 김창열(1929~2021)화백은 무엇을 그리려 했던 것일까. “예술의 본질은 결국 일루전(Illusion)일 텐데, 이것을 재검토해 보려는 게 나의 예술입니다.” 그도 어느날 환상(Illusion)속에서 '물방울'을 선택했다. 1969년 뉴욕에서 파리로 예술의 터전을 옮겨 간 김창열은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서 생활했다. 1971년 어느 날 아침, 재활용 하기 위해 물을 뿌려둔 캔버스에서 반짝이는 물방울. 그 찰나의 순간은 위대한 발견의 시작이었다. 그가 물방울을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캔버스를 뒤집어놓고 직접 물방울을 뿌려 보았어. 꺼칠꺼칠한 마대(麻袋)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의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造形的) 화면이 성립되고도 남질 않겠어. 여기서 보여진 물방울의 개념, 그것은 하나의 점이면서도 그 질감(質感)은 어떤 생명력(生命力)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움의 발견 이었어. 점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감도(感度)라 할까, 기적으로 느껴 졌어.”(『공간』,1976년 6월호) 1976년 현대화랑 개인전을 앞두고 11년 만에 고국에 온 김창열은 미술평론가 이일과 동료 작가 박서보와 나눈 대담이다. 1972년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서 그의 물방울이 처음 소개된 이후 '김창열의 물방울은 ‘최면의 힘을 갖고 있다'며 떠들썩했다. '물방울 화가'의 서막을 연 순간이었다. 물방울은 환상이다. 1970년대 나타나는 물방울들은 대체로 실제 물방울이 캔버스 위에 맺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초기의 이 물방울들은 실제처럼 영롱하게 그 빛을 발하며, 중력을 거스른 채 존재감을 드러내며 맺혀 있다. 이 시기의 물방울들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김창열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로 구축됐다. 물방울에 매료된 김창열은 물방울에 미쳤다. 마(麻)천, 모래, 신문, 나뭇잎, 그리고 한자 등 실제 위에 물방울을 그려 놓으며 실재와 가상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중성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물방울도 응답했다. 중력과 시간을 거스르며 영롱하게 맺혀 있던 물방울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맺혀 있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표면에서 흐르고 흡수되며, 물방울이 갖는 다양한 물리적인 형상으로 변화한다. 1979년작 '물방울'에서는 물방울들이 화면 한가득 맺혀 있다. 그중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화면 위에 맺혀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언뜻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물리법칙을 따르고 있는 '기이한 물방울'의 모습이다. '물방울 CSH27-1'(1979)에서는 물방울의 점도가 달라진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같은 물방울이지만 끈적하면서 밀도 있는 느낌을 보이는 이 물방울들은 작가가 다양한 물방울의 성질들을 연구하고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한지 작품들에서는 동양의 전통 사상을 작품에 녹여내려 했다. 붓으로 천자문을 여러 번 겹쳐 쓰면서 빼곡한 글씨와 한지 특유의 질감이 어우러져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어릴 적 먹으로 글씨 연습을 하듯 천자문을 가득히 적는 내용적 측면과 더불어, 재료적 측면에서도 해외 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와중에도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으려는 한국화가 김창열의 의지다. 평생 물방울만 그렸지만, 같은 물방울은 없다. 70년 후반과 80년 이후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한 화면에서 물방울들의 점도와 흐르는 속도를 서로 다르게 하거나, 혹은 중력을 다르게 적용하거나, 아니면 다양한 재질 위에서의 물방울들을 통해 사실인 듯 보이나 철저하게 조형화된 화면을 보여 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많은 물방울을 연구하면서 이를 더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는 지지체를 찾는 실험에 몰두했다. 글자를 비롯한 다양한 표면과 물방울이 상호 작용하는 다양한 연출들을 살펴보면 작가가 가졌던 수많은 고민과 치열함, 조형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을 엿볼 수 있다. 물방울은 표면의 글자를 확대하거나, 가리거나, 혹은 지워내기도 한다. 글자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글자 위에 색을 칠한 후 글자 부분만 뜯어내는 기법을 사용하거나, 글자 부분만 비워놓고 색을 칠하는 등 다양한 기법 실험을 관찰할 수 있다. '회귀 DRA97009'(1997)에서는 물방울 옆에 먹으로 글자가 지워져 있는데, 이는 마치 물방울의 그림자처럼 기능하며 제3의 공간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평면이 아닌 표면 위에 물방울들을 놓고, 표면과 글자, 글자와 물방울과의 관계를 탐구하며 다차원적인 화면 구성을 시도했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다. ‘수행’, ‘성찰’, ‘회귀’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많은 영혼에 대한 ‘레퀴엠’ 등 서사를 품고 마술같은 미술로 명상과 치유의 공간으로 나아갔다. 김창열 화백 작고 3주기를 맞아 '물방울 그림'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현대는 김창열 개인전 '영롱함을 넘어서'를 열고 마대 위 물방울이 처음 등장하는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10년대 제작된 근작까지 김창열 화백의 예술 여정을 회고할 수 있는 주요 작품 38점을 선보인다. 이 작품 중에는 방탄소년단 RM이 소장 한 작품도 나와 있다. RM은 윤형근, 유형국과 달리 생전의 김 화백과 만나 작품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구매한 작품을 어느 작품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며 이번 전시 섭외에 선뜻 내놓았다는 후문이다. 갤러리현대와 김창열 화백의 인연은 사후에도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1976년 현대화랑은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 중인 김창열 화백의 초대전을 개최하며, 그의 물방울 작품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했다. 이후 김 화백의 마지막 전시가 된 'The Path'(2020)까지 열 네 번의 전시를 함께하며 반세기 동안 소중한 인연을 이어 왔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김창열 화백의 열다섯 번째 개인전이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에 이어 김창열 화백의 작품을 대를 이어 조명하고 있는 도형태 갤러리 현대 대표는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작고 3주기 전시가 아니다"며 "추상화의 시대가 저물고 이젠 구상화의 시대가 오고 있는 흐름 속에서 전 세계에서도 볼 수 없는 물방울화, 초현실 구상화의 면모를 재조명하기 위해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김창열 화백은 1971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물방울을 선택한 이후, 물방울(Illusion)과 물방울이 존재하는 표면(Real)의 관계를 통해 예술의 본질을 평생에 걸쳐 재검토해 왔다. 전시 제목 '영롱함을 넘어서'는 처음 물방울을 대면했던 그 순간의 영롱함을 화면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온 작가의 조형적 의지의 표상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1970년대 물방울을 또다시 뛰어넘어야 했던 50년간의 미적 여정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수행에 가까운 물방울을 통한 예술의 본질, 즉 일루전(Illusion)에 대한 도전과 이를 통해 당도하고자 했던 조형적 아름다움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시는 6월9일까지 열린다. 관람은 무료. 2024/04/24
전기톱 작가 김윤신 "이런 순간 상상도 못해…나를 완전히 미술로 내놓겠다"[2024베니스비엔날레] "이런 순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90세 전기톱 조각가로 유명한 김윤신 작가가 베니스비엔날레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7일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본전시관에서 만난 김 작가는 "그동안 작업만 하면서 비엔날레 전시는 생각도 못했는데…이렇게 많은 분들이 축하를 해주고…이제부터가 아니겠어요?"라며 자신감에 찬 '백발의 카리스마'를 보였다. 2024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참가해 전기톱으로 썰고 깎아 만든 나무 조각과 대리석(돌)조각을 선보인 김윤신은 휘황찬란한 현대미술작품속에서 정중동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시 입구에서 바로 이어지는 김윤신의 작품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수많은 회화를 병풍 삼아 전시장 한 가운데에 목조각들이 설치됐다. 김윤신 작가는 "다른 작품들은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인데, 나는 거꾸로 돌아간 거 같다"며 "내 작품 속 내용은 원초적이다. 내가 그것을 찾아가지 않았나 싶다. 이젠 나를 완전히 미술을 통해서 내놓겠다"고 했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잊지 않고 계속해서 찾아준 예술감독 아드리아노 페드로사(Adriano Pedrosa)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1974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이후로 오로지 작업에만 매진해왔는데, 무려 50년이 지나 이런 크고 중요한 전시에 초대되리라곤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2024년이 내게 큰 행운이 깃든 해인 만큼,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세상에 응답하고자 한다." 구순의 나이에도 아르헨티나와 한국을 오가며 영원한 이방인을 자처하는 김윤신의 세계관은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다. 이번 본 전시에서도 이 연작에 속하는 4점의 나무 조각과 4점의 돌 조각을 선보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탄생한 출품작 중 나무 조각 4점은 소나무 혹은 호두나무와 같은 원목을 사용한 반면 나머지 돌 조각 4점은 오닉스(onyx)와 재스퍼(jasper)와 같은 준보석이 재료다. 원목과 준보석을 조각하는 과정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재료의 속살과 표면의 시각적인 대조와 조화가 이번 출품작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강인한 동시에 예리한 작가적 접근이 돋보이는 본 조각 작업들은 낯선 땅과 마주한 '이방인'이 새로운 소재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개발해온 과정을 선명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주제와도 완벽하게 만난다. 김윤신 작가는 올해 초 국제갤러리와 리만머핀 갤러리와 공동 소속 계약을 체결하며 60여 년 예술 인생 처음으로 주요한 상업 갤러리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생애 첫 전속을 맺은 김 작가는 국제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오는 28일까지 선보인다. 1970년대부터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합이합일 분이분일'의 철학에 기반한 목조각 연작과 함께 꾸준히 지속해온 '회화 작업'등 총 51점을 국제갤러리 서울점 K1과 K2 공간에 전시했다. 한편 김윤신 전속인 국제갤러리는 이번 본전시에 전속인 수퍼플렉스도 선정되어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수퍼플렉스는 1993년 결성된 이래 민주주의, 기후, 도시, 난민 등의 범세계적 주제를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다뤄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Foreigners, Please Don’t Leave Us Alone With The Danes!'(2002)를 재해석한 작업을 소개한다. 지난 2002년 수퍼플렉스는 난민을 상대로 배타적 태도를 취하던 코펜하겐 정부를 비판하고 난민 이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이방인들이여, 제발 우리를 덴마크인과 홀로 남겨두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코펜하겐 도심 곳곳에 부착했다. 정치 포스터가 보통 주변환경에 묻혀 본연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착안, 공공장소 표지판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주황색 배경과 그와 대비를 이루는 검은색 텍스트로 디자인한 이 작업은 외국인, 이민자, 난민, 디아스포라 등의 주제에 대해 경종을 울려왔다. 실제 포스터 형태의 작업은 2002년 이후로 덴마크 내에서만 10만 장 이상 배부되었으며, 2018 광주비엔날레를 포함 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활발히 전시된 바 있다. 한편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은 '이방인은 어디에나(Stranieri Ovunque – Foreigners Everywhere)'를 전시 주제로 총감독 아드리아노 페드로사(Adriano Pedrosa)가 직접 큐레이팅하는 본전시에 한국 작가 김윤신, 이강승(미국 LA) , 작고 화가 이쾌대, 장우성까지 4명을 포함하여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총 330명의 작품 수천 점을 전시했다. '미술계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은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의 프리뷰를 거쳐 오는 20일 공식 개막, 일반 관람객들의 전시 관람이 시작된다. 오는 11월 24일까지 약 7개월간 이어진다. 2024/04/18
친구 아들 손에 닿은 슬픈 이중섭…'시인 구상의 가족' 70년 만에 경매 이중섭의 '시인 구상의 가족'이 70년 만에 경매에 출품 됐다. 1955년 이중섭이 시인 구상에게 준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를 통해 소개된 적 있다. 미술품 경매사 케이옥션은 "24일 오후 4시 여는 4월 경매에 이중섭의 1955년 작품 '시인 구상의 가족'을 출품한다"며 "시작가는 14억 원이 매겨졌다"고 12일 밝혔다. 4월 경매 도록 표지로도 장식한 이 작품은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1955년, 이중섭은 서울의 미도파화랑(1955.1.18-27)과 대구의 미국공보원(1955.4.11-16)에서 연 개인전이 흥행하자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가족들과 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정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신문의 호평과 절반 이상의 작품 판매가 이뤄지며 성공적인 전시로 보였지만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작품 판매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없게 됐다. 희망이 좌절된 이 때 이중섭은 오랜 친구인 구상의 왜관 집에 머물러 있었다. 구상이 아들과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자 자신의 아들이 생각났다. 약속한 자전거를 사주지 못한 부러움과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그 행복한 가족의 현장에 있던 자신의 모습을 화면 우측에 덩그러니 그려 넣었다. 시인 구상에 의하면 자신이 아이들에게 세발자전거를 사다 주던 날의 모습을 이중섭이 스케치하여 “가족사진”이라며 준 것이라 한다. 케이옥션에 따르면 이 작품 속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화면 왼쪽 끝에서 구상의 가족을 등지고 돌아선 여자아이로, 이소녀는 구상의 집에서 의붓자식처럼 잠시 머물던 소설가 최태응의 딸로 이중섭은 소녀와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특징은 이중섭의 손이 원근법을 무시하고 구상 아들의 손과 닿아 있는 것이다. 이중섭의 다른 작품에서도 길게 늘어난 팔이 가족, 동물, 타인들과 연결되는데, 이는 그만의 고유한 기법으로 현실을 잊고 싶은 이중섭 마음 속 이상 세계인 듯하다. 수없이 연필로 그은 선위에 유화물감으로 칠한 필력에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새겨있다. 한편 케이옥션은 4월 경매에 이중섭 작품을 비롯해 김환기 뉴욕 시대 점화 작품(시작가 35억 원)등 총 130점 약 148억치를 선보인다. 이번 경매에는 앙리 마티스의 아티스트북이 국내 경매에 최초로 출품되어 주목받고 있다. 추정가 9억5000만~12억 원에 나온 이 책은 20점이 완전한 세트로 출품되는 일이 드물어 희소성이 높다는 평가다. 2024/04/12
뮤지엄 산 점령한 알록달록 수도승…우고 론디노네 개인전 “나는 마치 일기를 쓰듯 살아있는 우주를 기록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계절, 하루, 시간, 풀잎 소리, 파도 소리, 일몰, 하루의 끝, 그리고 고요함까지.” 스위스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가 2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다. 2022년 국제갤러리에서 2m가 넘는 알록달록 청동 조각을 선보여 주목 받은 그 조각들과 또 다시 내한했다. 한솔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뮤지엄 산(관장 안영주)에서 우고 론디노네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 'BURN TO SHINE' 전시를 9월18일까지 개최한다. 뮤지엄 산에서 여는 우고론디노네의 최초의 전시로 백남준관, 야외 스톤가든을 아우르며 조각, 회화, 설치, 영상을 포함한 4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우고 론디노네는 “매일 자연을 볼 수 있고, 도시의 소음이 없는 뮤지엄 산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이상적”이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전시는 전체가 하나의 포괄적인 작업으로, 작가가 지난 30여 년의 작품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성찰해 온 삶과 자연의 순환,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더불어 형성되는 인간 존재와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2년 전 하얀 전시장에 갇혔던 거대 청동 조각은 뮤지엄 산 야외와 백남준관에 세워져 자연광과 함께 엄숙함까지 자아낸다. 자연을 통한 정신적 사유를 추구하는 론디노네의 이 같은 시도는 '수녀와 수도승(nuns+monks)'시리즈에서 새로운 정점에 이른다. 백남준관에는 4m 높이의 '노란색과 빨간색 수도승(yellow red monk)'이 원형의 천정으로 내려오는 자연광 아래 중세 시대 성인(聖人)의 엄숙함으로 관객을 맞이하며 야외 스톤가든에는 6점의 수녀와 수도승이 정원의 자연석과 어우러져 선사시대의 거대한 돌기둥을 연상시킨다. 3m가 넘는 이 기념비들은 청동으로 주조 되었지만 작은 규모의 석회암 모형을 기반으로 제작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돌은 내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재료이자 상징"이라며 이같이 설명했다. "2013년 록펠러 광장에서 선보인 '휴먼 네이처(human nature)'의 석상 작품에서부터 시작되었고 2016년 네바다 사막에 설치한 '세븐 매직 마운틴(Seven Magic Mountains)'으로 이어졌다. 두 작업 모두 자연석을 아름다움과 사유의 대상으로 탐구하고 감상하려는 시도로서,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바깥세상과 내면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매우 사적이며 명상적인 시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통해 나는 본다는 것이 물리적인 현상인지 혹은 형이상학적인 현상인지에 상관없이 그것이 어떤 느낌이고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조각을 만들었다." '수녀와 수도승' 역시 이러한 내면세계와 외부 자연 사이의 이중적 성찰을 이어 나간다. 한 사람이 바라보는 외부 세계가 그의 내적 자아와 분리될 수 없듯이, '수녀와 수도승'은 여러 층위의 의미들이 서로 가깝고 먼 곳에서 진동하며 작품을 바라보는 이에게 순수한 색채와 형태, 규모에 완전히 몰입되는 감각적 경험과 더불어 동시대적 숭고함을 선사한다. 이번 전시에는 불꽃이 타버리고 어둠과 함께 다시 시작되는 영상 '번 투 샤인(burn to shine)'(2022)이 무한 반복으로 재생되는 한편 푸른색 유리로 주조된 11점의 말 조각 시리즈가 함께 전시된다. 세계 각지 바다의 명칭을 제목으로 삼는 이 작품들은 실물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각 작품마다 고유의 푸른색을 지닌다. 동시에 작품의 중앙에는 투명한 수평선이 말의 실루엣을 가로지르며, 이들은 곧 각각의 바다 풍경을 온전히 담은 그릇으로 거듭난다. 우고 론리노네의 말 조각들은 작가가 지난 30여 년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탐색해 온 공간, 시간, 그리고 자연의 개념을 상징한다. 각 작품은 물, 공기, (말의 형태로 표현된) 흙, 그리고 불이라는 4원소의 결합체로서, 이는 유리라는 물질로 응축된다. 반면 작품들은 완벽하게 마감된 유리 표면을 넘어 무한한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데, 전시장 곳곳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무한한 푸른빛을 비추며 ‘빛의 풍경’을 창조하는 프리즘이 된다. 이 안에서 수직적이고 불투명한 관객의 존재는 마치 환영과 같은 말 사이를 이동하며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뮤지엄 산 관계자는 “오늘날 세계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에서 우리는 삶, 인간, 그리고 자연이라는 세 꼭짓점이 조화롭게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삶을 성찰하는 총체적 예술을 표방하는 작가의 작품이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우고 론디노네는? 1964년 스위스 출생으로 동시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회화, 드로잉,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폭넓은 매체를 다룬다. 파리 퐁피두 센터(2003),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2006),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2013), 상해 록번드미술관(2014), 파리 팔레 드 도쿄(2015), 로마 현대미술관(2016), 님 까레다르 미술관(2016), 버클리미술관(2017), 마이애미 배스미술관(2017),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2021), 멕시코시티 타마요 현대미술관(2022), 프랑크푸르트 쉬른 쿤스트할레(2022), 파리 프티 팔레(2022), 제네바 미술역사박물관(2013), 뉴욕 스톰 킹 아트센터(2023), 프랑크푸르트 슈테델미술관(2023)에서 개인전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2007년에는 제5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스위스 국가관 작가로 참여했다. 2024/04/08
김윤신 '구순의 봄'…전기톱 든 할머니 조각가 '니들이 전기톱 맛을 알어?' 전기톱을 든 '할머니 조각가'가 현재 미술 세상을 접수하고 있다. 일명 '전기톱 조각가.' 공포 영화 제목 같지만 실제 상황이다. 아르헨티나에서 40년 간 나무를 썰었다. 아흔 살이 된 올해도 여전히 전기톱을 들고 썰고 다닌다. "나이? 그런 걸 왜 생각해? 나이가 들어서 못한다? 그런 것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구순에 어느 해보다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맞은 조각가 김윤신은 걸크러쉬 매력을 뽐냈다. "한국에 오니까 주변에서 그 나이에 일을 하다니, 저렇게 무거운 톱을 들다니, 그래요. 듣고 보니 새삼 내가 나이를 이렇게 먹었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나는 나이 상관없이 그냥 작업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열심히 작업하다가 딱 가는 거, 그게 내 소원이에요. 허허.” ◆아르헨티나서 만난 나무가 너무 좋아서…"묶였다" "내가 이 나라에서 전시하게 해 다오!" 김윤신은 직진했다. 아르헨티나 대사관과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을 찾아가 다짜고짜 밀어붙였다. 동양 여성의 당당함에 놀랐지만 미술관 관장도 만만치 않았다. "작품을 보여 줘야지요?" "두 달 간 시간을 주세요." 한국에서 교수(상명대)로 살다 1984년 아르헨티나 조카 집에 놀러 가면서 일이 벌어졌다. "아름드리 나무가 여기저기 있는데, 너무 부럽더라고요. 단단하니 나무가 너무 좋더라고. 당시 우리나라에 굵은 나무가 없었거든요." 쓰러져 있는 나무를 주워서 길거리에서 나무를 잘랐다. 활톱으로 나무를 써는데 동네 사람들이 전기톱을 쓰라고 추천했다. 그렇게 전기톱과 인연도 시작됐다. 굉음과 썰림의 미학이 이어진 두 달, 2개의 작품을 끝냈을 때 미술관 관장이 와서 보고 감동을 했다. "내가 30년을 관장 생활을 했지만 껍질을 붙인 채로 속살과 겉 살의 공간의 차이를 두면서 제작한 나무 작품은 처음 봤다. 전시 합시다." 전기톱으로 썰고 망치로 두드리면서 1년 동안 30여 점을 만들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 야외에서 펼친 전시는 그야말로 난리법석이 났다. "여기저기서 전시를 하자고 연락이 오고 신문에도 많이 소개도 되다 보니까…묶였어요." 초청 받은 전시가 3년이나 이어졌다. 선택의 갈림길에 들어섰다. '예술가가 될 것인가, 교수로 남을 것인가.' "내가 내린 결정은, 나는 예술가로 남을 것이다. 그때 결정이 된 거다. 그 순간부터 한번도 쉰 적이 없어요. 계속 작업을 하게 되니까." 우편으로 상명여대(조소과)에 사직서를 보낸 후 40년을 아르헨티나인, 예술가로 살았다. 1959년 홍익대학교 조소과 졸업 후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1969년 귀국해 10여 년간 대학교수로 활동했고, 한국여류조각가회를 설립했던 1세대 조각가의 이민은 한국 미술계의 '인재 유출'이기도 했다. '단단한 나무'는 김윤신을 강하게 했다. 작품 안에 건축적 구조와 응집된 힘이 표현됐다. "섬세하게 정돈된 수천 년 역사의 동양적 사고와 남미대륙의 강인한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무 찾아 삼만리'가 이어졌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멕시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에서 머물며 새로운 나무를 찾았고, 오닉스와 준보석을 만나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탐구를 지속했다. 200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김윤신 미술관(Museo Kim Yun Shin)을 개관했다. '나무 조각가'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18년 주아르헨티나 한국문화원에 김윤신의 상설 전시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예술가는 이거야.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계~속 작업하는, 이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예술이라는 건 작가가 직접 해야 한다고 봐요. 내 작품은 한 번도 누구의 손을 거쳐본 적이 없어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하는 거예요." ◆생애 첫 국공립미술관 개인전 대박…상업화랑 첫 전속계약까지 지난해 남서울시립미술관 전시가 대박이 터졌다. 생애 첫 국내 국·공립미술관에서 연 개인전이었다. '김윤신 발견'이라며 열광적인 호평이 이어졌다. 이 전시를 관람한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과 미국의 세계적인 화랑인 리만 머핀 대표가 김윤신에 날개를 달았다. 생애 첫 상업화랑 2곳과 동시에 전속 계약을 맺었다. "1세대 여성 작가인데도 이제껏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작가를 만나 향후 활동을 논의했고 직접 전시를 추진했다. 이 뿐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행사인 2024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 참여 작가로 선정, 4월에 베니스로 진출한다. "한국에 돌아올 계획은 없었어요. 아르헨티나에 멋진 공동묘지에 한 자리 예약도 해두었는데…” 한국의 1세대 여성 조각가인 1935년생 '할머니 조각가' 김윤신의 대반란이 시작됐다. 상업화랑과 베니스비엔날레서 러브콜은 '한국에서 더 일해 보라'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최근 40년 간 삶의 터전이었던 아르헨티나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40년 묵은 짐과 1000여 점의 작품은 아직도 '한국 행 배'에 머물러 있다. 오기까지 4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4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멈추게 됐네요. 이제 지구 전부가 저의 전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힘이 닿는 데까지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 分一)’…'회화 조각' "전시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처음부터 합(合)과 분(分)이에요. 합은 나하고 재료가 서로 충분히 이해를 하는 것이죠." 197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김윤신의 조각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작품의 제목이다. 나무마다 달라서다. "냄새가 향기로운 것도 있고, 생명적인 느낌을 주는 것, 단단한 것, 조금 연한 것, 껍질이 거칠게 있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이 나무가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가를 며칠 동안 보는 거에요." 그러다 딱 느낌이 왔을 때 톱을 들고 나선다. 전기톱과 정신의 합일의 순간, 거침없이 공간이 만들어진다. 손처럼 터치한 톱의 미감은 투박하면서도 원시적인 생명력을 발한다. "하나와 하나가 합이 돼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서 또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남잖아요. 그게 '분分'이라는 거에요. '두 개가 하나가 돼서 각각 또 하나를 만든다'는 그런 내용이죠." “합(合)과 분(分)은 동양철학의 원천이며 세상이 존재하는 근본이다. 나는 1975년부터 그런 철학적 개념을 추구해오고 있고, 그래서 나의 작품에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 分一)’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두 개체가 하나로 만나며,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는 의미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서처럼 계속적으로 무한대적으로 합과 분이 반복된다. 나의 정신, 나의 존재, 그리고 나의 영혼은 하나가 된다." 나무를 사랑하는 작가가 초월적 존재에 닿고자 하는 정서는 '염원'이다. 어린 시절 바라본 어머니의 기도에서 비롯됐다. 사라진 오빠를 위해 물을 떠 놓고 기도하며 돌을 쌓던 어머니의 모습은 심상에 각인됐다. "예술 공부를 하면서 미술이 단순히 형태가 아니라 엄마의 보이지 않는 세계, 정신과 혼이 드러나는 것임을 깨달았지요." 이런 기억을 토대로 ‘기원쌓기’가 탄생했고, 다시 나무를 쌓아 올린 형태나 T자 모양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후 형식적 변주는 '합이합일 분이분일' 연작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알가로보(Algarrobo)라는 나무를 좋아해요. 단단하고 묵직하고 생명력 있는 나무죠. 재료 자체가 자연 그대로 살아 있어서 좋아요."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알가로보 나무,라파초 나무, 칼덴 나무, 유창목, 케브라초 나무, 올리브 나무 등 다양한 원목이 그의 손을 거쳐 다채로운 형태의 ‘기도’가 된다. 특히 톱질을 통해 드러나는 나무의 속살과,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려둔 나무의 거친 껍질이 이루는 시각적 대조는 '김윤신 조각'의 특징으로 차별화됐다. 토속성과 원시성, 추상성을 넘나드는 무기교의 조각이다. ◆화판에 회화·목조각에 채색..'회화 조각 세계에 알리고 싶어" "조각과 그림은 사실 떨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4월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를 앞두고 국제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목조각 연작과 ‘회화 조각’까지 51점을 4월28일까지 선보인다. ‘회화 조각’은 코로나19 사태 때 만들어진 작품이다. "당시 60세 이상 노인은 꼼짝 없이 안에만 있어야 했어요." 좋은 재료를 구하는 것이 힘들어지자, 일상 주변의 나무 조각들을 모아 작업하는 새로운 방식에 몰두했다. 목재 파편이나 폐목을 재활용해 자르고 붙여 색을 칠했다. 심심하니까 시작된 작업은 산골 마을에서 혼자 놀았던 어린시절로 돌아가게했다. 울타리에서 빼낸 수수깡을 잘라 안경과 소도 만들고, 초를 녹여 물감 비슷한 걸 만들어서 그림을 그렸던 그때처럼나뭇조각에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렸다. "예술이라는 건 어디서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알았지요." 목조각에 시도한 채색은 남미의 토속 색과 한국의 오방색에서 영감을 받은 회화 조각은 '기법만 다를 뿐 결국 조각과 그림은 같은 것'이다. '회화 조각'은 회화와 조각을 잇고 나누는 또 하나의 ‘합이합일 분이분일’을 보여준다. “그림을 해야 조각을 하고, 조각을 함으로써 그림을 그릴 수 있지요. 내게 조각과 회화는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김윤신의 회화는 화려하고 쨍쨍하다. 원색의 색감으로 완성된 작품은 멕시코 여행을 계기로 아스테카의 흔적을 입기도 하는 등 환경과 심경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제 삶의 흔적을 그대로 표현할 뿐 다른 걸 가미하거나 표현하는 게 아니거든요. 주어진 내 환경, 내 생활 모든 것이 전부 다 내 삶이에요. 그러니 내 삶 전체가 표현되는 거죠.” '이루어지다', '내 영혼의 노래', '원초적 생명력', '기억의 조각들', '진동' 등의 제목의 회화 작업은 판화를 전공한 이력에서도 비롯됐다. 나이프로 물감을 긁는 기법으로 원시적 에너지를 표출하거나, 물감을 묻힌 얇은 나무 조각을 하나하나 찍어내 구사한 다양한 색상의 선과 자유분방한 면을 통해 강인한 생명력의 본질을 찬양한다. “앞으로 조각을 이어붙인 '회화 조각'이라는 것을 연구하려고 결심을 했어요. 이 작품을 세계 미술사에 남기고 싶어요." 뒤늦게 세계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구순의 ‘라이징 스타’는 다시 젊어지고 있다. 예술은 새로운 걸 창작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거다. 찰나의 순간을 작품에 잡아내고 있는 김윤신은 황금보다 귀한 '지금'에 충실한다. "예술이 뭐냐고요?"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끝이 없어요. 끝이 없고 완성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요. 매일 아침과 저녁이 반복적으로 오잖아요. 그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죠. 똑같아요. 시작과 끝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그냥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죠." 2024/03/23
'제주 핫플' 포도뮤지엄…김희영 "공감전 3탄, 치매 조명" "결국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거대한 흐름속에서 사라져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삶은 참 잔인하거나 지독할 수 도 있고 풍성할 수도 있었다…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터무니 없는 은총이 감사하다."(파스칼) 미술 전시장은 '치유의 공간'이다. 번뇌와 슬픔을 녹이고 산산이 부서진 기억과, 날 선 추억도 뭉클함으로 되살아난다. '감정적인 생기'를 돌게 하는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선물 같은 전시'다. 제주 포도뮤지엄(총괄디렉터 김희영)에서 마련한 올해 첫 전시로, 노화 가운데서도 인지 저하증(치매)을 조명한다. 회화, 설치, 영상 등 예술가 10명의 작품은 시간에 쫓기는 좀비 같은 삶을 구원 시킨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2021),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2022) 전시에 이은 '공감 전시' 3탄으로, 철학적이고 공감각 넘치는 깊이감을 전한다. 생로병사, 생멸의 운명을 가진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과 존엄함을 발견하게 한다. 특히 몰입형 설치미술로 선보인 '테마 공간'은 예술이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는지를 느끼게 한다. 100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6미터의 거대한 배롱나무는 전시장에서 부활해 생명의 순환성과 회복력을 전한다. 심장박동처럼 울리는 오케스트라 현들의 편안하고 장엄한 선율과 함께 어우러진 작품은 사랑의 마음을 이어지게 한다. 녹음이 우거진 숲 한 가운데 생명의 기운을 머금어 싹을 틔우고, 초록 잎이 무성해지고, 화려하게 꽃을 피우다가 노쇠한 겨울을 맞이한 후 모든 여정을 마치고 별이 되어 돌아가는 장면이 삶처럼 반복된다. 지난해 포도뮤지엄에서 진행한 ‘추억의 비디오’ 공모전에 참여한 관객들의 실제 비디오 영상도 등장해 공감력을 더한다. ◆포도뮤지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치매와 기억의 탐구 "모든 날 중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한번도 웃지 않은 날이다." 주름진 손으로 백발을 빗고 있는 흑백 사진과 함께 노란벽에 써 있는 글은 김희영 총괄 디렉터가 "이 전시를 해야겠다고 용기를 갖게 한 문구다." 치매를 매개로 기억과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예술적인 시각으로 탐구하는 이 전시는 기억이 무너지는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김희영 디렉터는 "고령화 시대 어느 나라이든 남녀노소 똑같이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치매"라며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치매 초기 진단을 받으면서 더욱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전시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캐나다 개념 미술가 알란 벨처(Alan Belcher)의 도자기로 만든 '바탕 화면'으로 시작해 천경우의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로 끝맺음하는 전시는 알찬 포도알처럼 엮어져 진정성이 전해진다. ▲루이스 부르주아 ▲셰릴 세인트 온지 ▲정연두 ▲민예은 ▲로버트 테리엔 ▲더 케어테이커 & 이반 실 ▲데이비스 벅스 ▲시오타 치하루 등 10명의 작품이 하나의 이야기로 흡입력 있게 연결되어 전시 연출력이 돋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20세기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세계적 조각·설치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밀실 1'이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어 눈길을 끈다. 미국 글렌스톤 뮤지엄 소장품으로 김희영 디렉터의 '초심 정신'이 통했다. "턱도 없을 것이라며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는데, 흔쾌히 대여해줬다"며 설렘을 보인 김 디렉터는 "복원 전문사가 비행기를 타지 않고 작품과 함께하겠다는 각오로 인천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는데, 뮤지엄의 역할을 하는 적극적인 모습에 감동 받았다"면서 "작품을 공개했을 때 마치 마녀가 살아 나온 것 같은 기운이 전해졌다"고 소개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문짝들이 벽처럼 둘러 서있는 작품은 문틈 사이로 들여다 보게 한다. 앙상하고 낡은 철제 침대, 유리병과 의료 도구들, 각종 물건들이 가득한 내부는 누군가의 고립된 세월과 위축된 심리를 압축해 보여준다. 루이스 부르주아가 유년 시절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 공간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두려움도 서려 있다. ◆참여 작가들 "모든 작품 감정적으로 서로 연결…아름다운 전시" 18일 제주 포도뮤지엄에서 만난 참여 작가들은 전시에 만족한 모습이었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작가 데이비스 벅스는 "이번 전시가 생로병사의 주제와 맞닿아 있으면서 폭넓은 분야를 커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들과 기억과 추억에 대해 많이 대화했는데 누군가 '기억이란 현재가 만들어낸 부속물'이라고 했다며 이 표현을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가 실재하고, 실재하는 과거가 계속 진화하는 것"이라는 그는 "사실 기억도 과거도 단지 현재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하고 시뮬레이션하는지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조각난 캔버스와 합판으로 파란 하늘과 초록 들판의 풍경을 선보인다. 전통적인 의미의 풍경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도 여전히 또 다른 풍경을 펼쳐내는 작품이다. 작가는 파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해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상실,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한국 전시를 위해 특별히 새로 제작한 세라믹' jpg 연작'과 파란색 신작을 설치한 캐나다 토론토에서 온 알란 벨처는 "이번 전시를 보면서 하나의 스토리를 쭉 경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수년간 방치되었던 노트북을 다시 켠 것처럼 깨진 이미지 파일들을 벽면에 즐비하게 전시한 그는 한때 존재했지만 더 이상 기억해 낼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무력감을 상기 시키며 '기억이 사라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기억과 인지 상실의 주제로 작업해온 이반 실 작가는 "이 전시는 당연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는 다양한 작품들의 조합이 흥미롭다"면서 "모든 작품이 명시적인 메시지를 건네지 않고도 연결되는 점이 좋다"고 했다. 설치미술가 민예은은 치매로 인한 쪼개진 기억을 시각화했다. 바닥이 없이 모서리가 날카로운 천장과 벽으로만 이뤄진 작품은 중력에서 벗어나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로버트 테리엔 작품과 함께 선보이는데 마치 한 작품처럼 어울린다. 민 작가는 "로버트 테리엔 재단 관계자들도 '두개의 작품이 브라더 앤 시스터 같다'는 이야기를 해줬다며 저도 세트로 묶여서 같이 다니고 싶다"는 기분 좋은 바람을 전했다. 생전 로버트 테리엔과 함께 작업했고 그가 별세 후 재단에서 일하며 이번 전시에 무제(패널룸)를 설치한 폴 채르윅과 딘 애니스는 "이번 전시를 관람하며 밴 다이어그램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모든 작품들이 강력한 개성을 갖고 있고 동시에 감정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매끄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전시"라고 평했다. 로버트 테리엔은 미국 출신 현대미술 작가로 평범한 사물의 크기를 확대하거나 축소해 일상적 풍경을 낯선 풍경으로 바꿔 놓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2019년 작가의 작고 이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2년 가나아트에서 개인전이 열린 바 있다. 이반 실 작가는 "소리와 회화를 같이 연출하는 공간으로 무엇이 가장 좋을까 뮤지엄측과 지속해서 대화하며, 다양한 아이디어가 순환할 수 있게 이번 전시를 구성했다"면서 "기억과 인지가 소실되어가는 과정 속 현실의 급변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어둡고 폐쇄된 원형 극장 같은 공간에서 회화 연작과 향수를 자극하는 멜로디(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와 함께 작품을 선보인다. 기억이 점점 소실되어 가는 초현실적인 그림은 부드러운 조명으로 인해 영상을 보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전한다. 그는 "결국 누군가 인지 저하를 겪게 되면 가장 슬퍼하는 사람들은 남은 가족들로, 지금까지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런 느낌을 진지하고 약간 암울한 느낌의 공간으로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아이가 되어버린 엄마의 흑백 사진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뭉클함을 전하는 사진 작가 셰릴 세인트 온지는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와 함께 만든 작품을 아름다운 제주에서 선보일 수 있어 영광"이라며 환한 모습을 보였다.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된 제 작품을 보며 새로운 의미가 전달되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고, 엄마와 함께 한 내 작품을 보면 기운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는다"며 흡족해했다. 쉐릴 세인트 온지의 어머니는 2015년 혈관성 치매를 진단 받았다. 농장에서 수십 년 간 함께 살아온 모녀가 공유하던 추억과 감정은 어머니의 기억과 함께 점점 상실되어 가는 듯해 작가는 사진 작업을 중단했다. 그러다 나른한 햇살이 창에 스며드는 어느 날 오후에 문득 작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변했다. 어머니의 삶 속에서 가볍고도 명랑한 순간들을 포착하기로 결심했다. 작가가 아이폰과 대형 카메라로 담아낸 어머니 모습은 장난꾸러기 아이 같고, 수줍은 소녀 같기도 한 노인의 모습이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됐다. 김희영 총괄 디렉터는 "초고령화 사회에 점차 많은 인구가 겪게 될 인지 저하증이 처참한 질병이 아닌 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사회적 공감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전시를 기획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이 따뜻하게 교차되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아름다운 날들을 함께 그려갈 수 있기를 소망 한다"고 전했다.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에 이어 2층에서 보너스 같은 전시도 펼친다. 포도뮤지엄 새 프로젝트인 '아카 인 포도'를 진행, 김지영·강서경의 작품을 전시했다. 예술을 통한 지역적 경계를 넘는 대화와 연결의 장을 추구, 아시아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소개할 예정이다. 전시는 20일부터 1년 간 열린다. ◆제주 포도뮤지엄은? 제주 안덕면에 위치한 포도뮤지엄은 겉으로 작아보이지만 내부는 길게 이어진 대형 전시장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동거인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이 총괄 디렉터를 맡아 2021년 4월 개관했다. 미래의 가치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다목적 공간을 표방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 가운데서 주제를 선정해,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나누고 타인의 입장에 공감해 보자는 취지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전시에 풍부한 서사를 부여하고, 현대미술을 보다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게 해 여행객들의 '제주 핫플'로 부상했다. 2021년 4월 개관전인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은 12만 명이 관람하며 입소문을 탔다. 군중 심리에 선동이 가미 되었을 때 혐오가 탄생하는 해악성을 탄탄한 구성으로 풀어내 호평 받았다. 2022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빠’로 관람해 화제가 된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전시는 이주민과 소수를 향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드러내며 이들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보고 공감해 볼 것을 제안했다. 포도뮤지엄 소장품인 세계적인 인기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27명의 광대가 등장하는 설치 작품을 전시해 특히 주목 받았다. 당시 7월 초 종료 예정이었던 전시를 연장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2개월 연장과 무료 개방을 하기도 했다. 2024/03/19
힙 한 미술관 스페이스 K, 핫 한 화가 에디 마티네즈 "작업하는 게 즐거워요. 즐겁게 봐주세요." 13일 스페이스K에서 만난 미국 화가 에디 마티네즈(47)는 화려하고 발랄한 그림과는 달리 묵직하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작업 세계에 관한 질문에 뜸을 들이며 느릿하게 말했지만 '한 방'이 있었다. 자신은 맥시멀리스트로서 빠르고 속도감 있게 작업하는 스타일로 드로잉을 선택했을 뿐이고,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실제로 작가는 항상 펜과 종이를 들고 다니며 드로잉을 한다. 이날도 작은 종이에 낙서처럼 그려낸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에디 마티네즈의 작품은 속도감 넘치는 선과 대담한 색상이 돋보인다. 화면 안에는 작가가 일상에서 영감 받은 나비, 꽃병, 테니스공, 블록헤드(Blockhead) 등 다양한 모티프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같은 작업 방식에 대해 그는 ‘같은 그림이지만 다르게 그리기 위한 연구’라고 부른다. "이미지를 다르게 이해하기 위해 대상에 대한 선입견을 벗겨내는 시도"라고 했다. 미술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 세계에 들어온 그는 모든 일상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작업할 때 발생하는 쓰레기, 물티슈, 껌, 캔버스 천 조각 같은 일상 속 물건들을 화면에 콜라주 하며 독특한 질감의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드로잉은 회화와 조각,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작업의 원동력입니다. 30년, 35년, 어쩌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 삶에서 항상 변함없는 것이었고, 드로잉 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처로서 주변 환경 속에서 나와 연결되는 방법이었습니다." 드로잉과 색감이 폭발하듯 에너지가 넘치는 그림은 동시대 현대인들을 홀리고 있다. 미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는 세계에서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유명세답게 전속 갤러리는 4곳(티모시 테일러(영국), 미첼이네즈 네시(미국), 블룸(미국-일본), 막스헤츨러(독일))으로 컬렉터와 작품 수요를 관리하고 있다. 이번 한국 전시에도 이 갤러리 디렉터들이 직접 내한 작가를 챙기고 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으로 뜨고 있는 작품값은 100호 크기 3억5000만 원 선에 거래된다. 2018년 뉴욕 브롱스 미술관(The Bronx Museum), 2019년 디트로이트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Detroit)과 상하이 유즈 미술관(Yuz Museum), 등에서 개인전을 열며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이탈리아의 내륙국인 산마리노 공화국 전시관의 대표 작가로 선정됐다. 동시대 미술계에서 존재감을 보이는 그가 베니스비엔날레 전시 전 서울로 왔다. 강서구 마곡동 코오롱 문화예술 나눔공간 ‘스페이스K 서울'에서 한국 미술관 첫 전시를 개최한다. ◆ ‘스페이스K 서울'서 한국 미술관 첫 전시 14일 스페이스K에서 개막하는 전시는 '투 비 컨티뉴드(To Be Continued)'를 주제로 구상과 추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시기 및 주제별로 전시했다. 천장고 3m~10m 200평 규모의 전시장에 대결하듯 걸린 에디의 작품도 힘이 만만치 않다. 우선 색과 선으로 밀어붙인 작품은 발길을 끌어들인다. 2m, 3m, 6m가 넘는 압도적인 크기로 거대한 공간을 누르고 있다. 한국 전시를 위해 공개한 ‘만다라(Mandala)’ 연작은 오래된 것을 참조해 재탄생시키는 작가의 성향이 담겼다. 그의 드로잉 기법과 함께 어우러져 역동성이 돋보인다. 원판(圓板) 혹은 원륜(圓輪)이라는 뜻을 가진 만다라(mandala, 曼茶羅)는 불교와 힌두교에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하는 그림이다. 그는 오랫동안 동양 철학과 종교, 특히 다양한 불교 종파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항상 티베트 불교의 모래 만다라 수행을 좋아했다"면서 "티베트 불교에서 3주 또는 1달 동안 모래 만다라를 만들고 작업이 끝나면 바로 지워버리는데, 이 점이 정말 흥미롭다"고 했다. "수행은 덧없음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깨달은 그가 그려낸 만다라 시리즈는 음식이 있는 둥근 그릇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만다라 시리즈는 탁자 시리즈나 부플라이 시리즈처럼 일종의 수단입니다. 여러가지 모양과 색을 넣을 수 있는 구조물 같기도 하고, 그냥 마음에 들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만다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다라가 그릇의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화이트 아웃' 기법으로 무장한 신작 '은하계 같은 풍경 - 로지아(Loggia)에서 바라보다'가 압권이다. 가로 6.7m 세로 3m가 넘는 크기의 화이트 색으로 덮은 듯한 그림으로, 나뭇잎, 버섯, 꽃, 눈 등 익숙한 형태가 시각적 불협화음 속에 뒤섞여 있다. 에디는 이 작업은 반려견 때문에 시작된 작업이라고 했다. "강아지 프란시스가 죽던 날 많은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프란시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리다보니 색을 다양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흰색으로 덮었고 다시 그릴 수 있었죠. 프란시스는 서서히 가려졌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그려져 있습니다. 며칠 연속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완성됐습니다." 흰색으로 지우는 일명 '화이트 아웃'기법이 탄생된 배경으로 이번 개인전에 내놓은 신작 '은하계 같은 풍경'은 화이트아웃 시리즈의 일부로 제작됐다. "LA에 있는 갤러리 ‘BLUM’의 야외 정원을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몇 년 전 그곳에 하루종일 앉아서 그곳에 있는 모든 식물을 그렸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시작이었죠." '화이트 아웃'기법은 선에 집중하는 작업인데, 선을 억제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더하기와 빼기, 정의하기와 지우기를 반복한 작품은 '재생 화법'이기도 하다. '화이트 아웃'시리즈에서 사용한 기법을 다른 형식의 작품에도 적용해 지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드러남‘에 대한 연구로 다시 시작된다. 화가이면서 아트핸들러(운송)로도 활동하며 생의 의지와 활기를 온 몸으로 각인하는 에디 마티네즈는 일상적인 사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시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비슷하지만 또 다른 그림들을 지속적으로 그려오고 있는 그는 이번 전시 제목 'To be Continued'과 닮은 모습이다. 그는 "모든 것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렸던 것을 다시 가져와 그리는 데 관심이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은 계속 발전하고 진화하며 왔다 갔다 하죠. 그림도 마찬가지 같아요. 모든 것에 완성이란 없으니까요." 한국 관람객들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쿨 하게 답했다. "저는 그림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럼에도 한국에서의 전시 의미에 대해 그는 '기쁨'의 마음을 전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제 아들 아서가 태어난 이후로는 작업에 많은 ‘기쁨’이 있어요. 이 기운은 스튜디오 밖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제 작품은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어요. 관람객들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무언가를 찾기를 바랍니다." 한편 스페이스K는 최근 몇년간 '강서의 최고 미술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2021년 헤르난 바스 전시에 2만7000명이 관람해 화제를 모은 이후 네오 라우흐·로사 로이 부부 전시, 다니엘 리히터 전시까지 히트하면서 국내 핫 한 전시장으로 입소문이 나고 있다. 올해 첫 전시로 기획한 ‘에디 마티네즈’ 개인전도 새 봄을 맞아 활기 넘치는 작품으로 관람객들의 발길을 모을 것으로 전망된다. 선과 색이 꿈틀거려 자유분방함과 에너지가 넘친다. 사진 찍기 딱 좋은 그림이다. 전시는 6월16일까지. 관람료 5000원~8000원. 2024/03/13
"내장을 다 꺼낸 전시"…갤러리현대, 도윤희·김민정·정주영 '풍경' "삶도 그렇잖아요. 내가 옛날에 왜 그랬는지 지금 아는 게 있잖아요. 작업을 할 때는 그냥 했는데 지금 보니 내가 그래서 그때 그런 작업을 했구나를 알고… 이번 전시는 여러가지로 좋았어요."(도윤희 작가) "이번 작품 꺼내 본 게 20년이 넘어요. 그대로 있을까 궁금했을 정도였죠. 거울 보는 느낌이랄까요? 쑥스럽기도 해요. 그런데 저한테 매우 의미있는 전시에요. 선배님(도윤희)옆에 제 작품이 걸려서 영광이고요."(정주영 작가) 갤러리현대에서 처음으로 기획한 여성 작가 3인전(김민정, 도윤희 정주영)은 경쟁력 있는 '여성 화가'들의 미학적 성취를 재조명하는 측면에서 새로운 전시다. 팔리는 그림, 신작전이 아닌 과거 작품을 되돌아보는 한편 작품의 생명을 과거에서 현재로 부활시켰다. 12일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도윤희·정주영 작가는 서로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보는 듯 반가워했다. 정 작가가 "이번에 나온 작품은 20년 만에 꺼낸 것"이라고 하자 옆에 있던 도윤희 작가는 "나는 30년 만"이라며 마치 소녀들의 수다처럼 말했다. 또 정 작가가 영광이라고 하자 도 작가는 "작업을 지속하면 만날 수 있다"며 현실적인 직언으로 여성 화가의 삶을 압축했다. 옛날 작품을 다시 보여주는 것은 작가로서 쉽지 않은 일이다. 도윤희 작가는 "작품은 내밀하게 내면의 현실을 표현하는거다. 전시를 하는 건 작업실 안에서 내장을 다 꺼내듯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거다. 그래서 전시할 때는 힘들다"고 하면서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에서 내장을 다 꺼낸 것"이라고 했다. ◆갤러리현대, 새 프로젝트 ‘에디션 R’ 갤러리현대의 이번 도윤희(63), 김민정(62), 정주영(55) 여성 작가 3인전은 올해 전 세계 미술시장의 트렌드와 맞닿아있다. 어느 해보다 여성 작가들의 도약이 돋보이는 현시점에서 K 아트의 위상과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다. 세 작가는 모두 갤러리현대 소속 작가로 각기 개인전을 연 바 있지만, 세 명의 작가 작품을 동시에 선보이는 건 처음이다. 갤러리현대는 "새 프로젝트 ‘에디션 R’은 작가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창작 행위의 지평을 살피고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미적 여정을 보다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경험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3명 작가의 과거 작품을 묶은 이번 전시 타이틀은 '풍경(風景)'이다. 한자어로 풀면 ‘바람이 만드는 경치’라는 의미지만 전시에 나온 작품은 일반적인 풍경화가 아니다. 현실과 그 너머의 비가시적인 풍경까지 주제를 폭 넓게 아우르며 초기 주요 작품들을 소개한다. ◆도윤희, 김민정, 정주영 '풍경'은? “제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삶입니다. 작가의 주제는 작가의 원인이고, 페인팅은 내적 현실의 반영입니다. 그래서 그림은 작가의 내면 현실의 반영이며, 전시는 타인의 시선에 저의 내면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도윤희 작가) 도윤희 작가는 일상이 그림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다양한 기법의 추상회화를 통해 시적인 시각 언어를 구축해 왔다. 2007년 스위스 갤러리바이엘러에서 아시아 작가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는 도윤희의 1996년부터 2009년까지의 작업은 흑연 드로잉 위에 바니시를 반복적으로 칠한 독특한 질감과 깊이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밤은 낮을 지운다'(2007-2008), '천국과 지상의 두 개의 침묵은 이어져 있다'(2004), '어떤 시간은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2008-2009)와 같은 시구 같은 제목은 그의 일기에서 나왔다. 도 작가는 "삶에서 마주하는 현상과 물질 등 인간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에 시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했다. “제가 생각하는 풍경이란, 내 마음과 머릿속을 완전히 비운 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상태가 내 마음과 눈에 투영되어 그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됐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럴 때 그 풍경이 나를 통해, 선이나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작업으로 전유됩니다.”(작가 김민정) '풍경' 전에서 소개된 김민정 작품은 불로 태워 독창적인 조형미가 돋보이는 익히 알려진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작가가 이탈리아에서 머물며 완성한 작업들이다. 먹과 수채 물감의 관계, 얼룩과 번짐 효과를 극대화한 일련의 수묵 채색 추상 작품을 발표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1991년 이탈리아로 떠나 밀라노 브레라국립미술원에 입학한 그는 영상과 사진 작업이 주를 이루던 당시 학업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통해 익숙하게 다뤄온 한지를 재료로 삼았다. “본다는 것은 개인의 감각적 경험을 넘어 집단의 기억, 회상을 통해 전통이나 원형의 문제를 수반한다고 봅니다. ‘봄’의 행위가 광학 장치와 비교되고 기억의 문제도 디지털 데이터화되는 지금의 환경에서, 여전히 본다는 것은 인간의 지각과 인식체계가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정주영 작가) 정주영 작가는 이번 전시 3명중 가장 막내 작가지만 중견 화가로 ‘산의 작가’로 통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작가는 산의 풍경을 캔버스로 옮겨 그렸다. 이번 전시에도 산 같지 않은 산 작품을 선보였는데, 1995년에서 1997년 사이 작가가 암스테르담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 김홍도, 시중대 (부분)'(1998), '김홍도, 가학정 (부분)'(1996), '정선, 인왕제색 (부분)'(1999)은 김홍도와 정선이 현실을 옮겨 놓은 회화의 일부분을 확대한 작품이다. 진경과 실경, 관념과 실재, 추상과 구상 사이에 놓인 이중적인 ‘틈’ 회화의 세계를 제시한다. 전시는 13일부터 4월14일까지 열린다. 2024/03/12
'불의 기운'에 빠진 장인정신…김수수 '색면 추상' "처음엔 무식했어요.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오기로 작업했죠." 2018년 중국 최고의 미술종합대학인 북경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신문을 보다 뛰쳐나갔다. "뜨거운 기운이 지면을 뚫고 나오는 듯한 용광로의 열기를 직접 보고 싶었어요. 그 길로 신문 속 공장에 달려갔는데 일반인 통제구역이라 위험하다고 거절을 당했고 사진 찍는 것도 거부해 낙담했죠." 평소 숫기도 많고 말이 없는 편이지만, 뜨거운 아우라를 내는 불빛을 잡고 싶은 욕심이 컸다. 중국 유학 시절 몸에 베인 현장 확인 습관이 발동됐다. 항상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남기던 '사실주의 훈련' 덕분이다. 간식을 사 들고 가 몇 날 며칠 현장 근로자들을 설득을 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꼭 필요하다." 결국 문이 열렸다. 그렇게 마주한 용광로의 '불'은 신비롭고 황홀했다. "용광로가 열리면서 뜨거운 열기가 온 천지에 터져 나오는 광경과 불의 색이 주변 환경과 융합되는 장면…와우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허공과 바닥을 순식간에 하나의 기운으로 아우르는 불의 기운. 가슴속에서 진심 뜨거운 감흥이 올라왔다. 그 '불의 색'은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정신이 데인 것 같은 강렬한 충격도 잠시,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거리낌 없이 불을 조율하는 직원들의 모습에 또 깜짝 놀랐다. "불길이 뜨거운데 여러 쇳덩이를 넣고 녹인 뒤 다시 새로운 쇳덩이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더라고요." 불의 형상을 담기 위해 현장에서 스케치를 수없이 했고, 불의 기운과 불을 다스리는 '장인 정신'을 화폭에 녹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불의 기운에 집중하고 사족을 다 빼자 결국 추상이었다. 이렇게 나온 '불' 작업은 2018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비구상 부분에서 대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517점이 응모한 미술 대전에서 뽑은 대상(1명)은 27세 최연소 작가의 수상으로도 화제가 됐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며 작업합니다." 화가 김수수(31)는 'MZ 작가' 중 '색면 추상화'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팝아트와 풍경화를 주로 작업하는 요즘 화가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내공 가득한 작품을 보고 중견 작가로 오해하다 앳된 얼굴의 작가를 만나면 깜짝 놀란다. 꽃 중의 최고의 꽃 '불꽃'에 빠져버린 그는 불꽃을 숭고함의 뿌리로 본다. 자신을 압도한 불꽃의 모습을 구상화로 표현하지 않고 영혼을 갈아넣은 듯한 추상화로 보여주는 이유다. 언뜻 '사각형의 색면 추상'의 거장 마크 로스코의 작품과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알고 보면 아하~한다. 붉은 용광로가 입을 벌린 모양을 검은 사각의 화면에 담은 것. 그 안에 붉은색의 불꽃과 타고 남아 재가 되는 과정을 회색과 흰색의 대비로 전한 모습이다. “용광로를 마주한 순간 오로라처럼 온갖 색깔의 열기를 내뿜는 장면에서 인생의 필름이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그는 "그 찰나의 느낌들을 가장 단순하며 강렬하게 옮긴 것이 지금의 그림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마크 로스코가 색채의 미감에 주목했다면, 제 그림엔 불을 대면한 이들의 순결한 노동의 참 의미를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용광로에서 느낀 강렬한 기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때의 강렬한 불빛의 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로지 '불의 기운'을 전달하는데 집중했다. 용광로 문은 단순미로 살렸다. 뜨거운 불길이 일렁이는 문이 닫히고 열리는 모습을 사각의 형태에 가둠과 동시에 불길의 모습은 쓸어 내리는 듯한 붓질로 표현했다. 특히 검고 검은 바탕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은 각고의 실험 결과다. 현장을 반영한 재료의 고민에서 탄생했다. 용광로 공장에서 볼 수 있는 금속성의 거친 느낌을 내고 싶었다. 여러 재료의 실험을 거쳐 유화 물감과 탄소, 흑연을 혼합해 그 느낌을 살려냈다. 탄소와 흑연을 이용하면 그림 표면이 미세하게 반짝이는데, 화려한 반짝임보다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와 흡족했다. 허투루 나오는 작품은 없다. 탄탄하고 꼼꼼한 붓질로 완벽성이 돋보인다. 작은 먼지나 티끌도 허락하지 않는다. 한 작품의 바탕 색만 20번 이상을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그 위로 올린 색층도 수없이 반복하며 두께감의 무게와 함께 매끈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 작품에도 노동, 그러니까 장인 정신을 담고 싶었어요." 마치 용광로 앞에서 근무하는 직원처럼, 하루 종일 반복적인 일을 똑같이 수행한다. 작품은 크기와 상관없이 단번에 한 붓으로 최종 마무리하는 일필의 채색기법이 압도적이다. 단 번의 붓 터치를 위해 여러 개의 붓을 이어 2m가 넘는 특별한 붓을 직접 제작해서 사용한다. 그렇게 한번에, 또 반복해서 칠해진 화면은 곱고 진한 색감으로 단정함도 뽐낸다. 오기로 시작한 작업은 수행이 되고 있다. 전업 작가지만 회사원처럼 오전 7시 작업실로 출근해 퇴근을 반복하며 붓 질과 씨름한다. 밥 먹는 시간 외엔 모든 시간의 그물망을 그림 작업으로 채운다. 지난 2년 간 400점을 그려낼 정도로 '일 벌레'다. "한 때 뭔가 보여줘야겠다며 오기로 작업하며 스스로 짐이 되기도 했어요. 이렇게 살다 안되겠다 싶어 불교 공부를 했어요. '내려 놓기'를 배우며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 하려는 마음조차 내려 놓으니 진정한 원동력이 생기더라고요. 매일 하는 그림 작업은 제 일이자 취미입니다. 그림 그리는 일이 무엇보다 좋아요." 올해 홍익대 대학원 회화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그는 신작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오는 13일부터 24일까지 홍익대가 서울 인사동에서 운영하는 갤러리H 1~3층 전관에서 40여 점을 선보인다. '불'시리즈에 이은 신작 '불티' 시리즈와 디지털라이징 전문가 어라운즈 이창민 대표와 함께한 디지털 아트 영상 작업도 공개한다. 새 작품 '불티' 시리즈는 단어 그대로 용광로에서 터져 나오는 불티와 재에서 영감을 받았다. 점 사이에 선이 존재하고 점과 선이 면이 되어 공간을 이루는 작업이다. 불티의 상승 이미지가 완벽히 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보인다. "'불티' 에서도 '불' 작업에서 행한 수십 번의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노동의 숭고함을 전달하려 노력했어요. 첫 초심을 갖게 한 노동자들의 땀을 작품에 옮기기 위해 수많은 노동의 시간을 넣으려 집중했습니다." "용광로 안에서 들끓는 쇠의 모습을 인생의 다양한 현상들에 결부시켜 그 요체를 뽑아내는 작업은 현대미술에서 강조되는 개념적인 측면, 철학의 영역에 발을 담근 것이다."(미술평론가 윤진섭) 시간의 나이테를 쌓아가듯 온 몸과 마음을 녹인 그야말로 작가의 삶이 육화(肉化)된 '김수수 색면 추상'이 진지하고 묵직한 에너지를 전하는 배경이다. "제가 용광로를 처음 봤을 때의 그 강렬한 느낌을 제 작품을 통해 관람객도 느끼신다면 바랄게 없습니다."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묵묵히 배경을 칠하고 칠하기를 거듭하며 반복의 힘을 기른 그는 침묵에 익숙한 고요한 분위기다. 화가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극한 직업이다. 쇳덩이도 녹이는 용광로의 강렬한 불꽃이 결국 불티로 날리며 사라지는 것을 담아내며 최고의 긴장감을 경험한 그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다. “결국 제 작품은 쉼 없이 반복되는 조형적 행위를 거쳐 추상과 구상, 허상과 실상의 경계를 극복한 인생의 긴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커다란 용광로 안에서 분출하기도 하고, 녹아내리기도 하는 모습이 생멸하는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온갖 감정들로 때가 묻고, 많은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덕지덕지 굳은살로 뒤덮인 우리의 삶도 일 순간에 덧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수수 작가는 화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왔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중국으로 유학, 북경 중앙미술대학교 유화과를 졸업(2017)한 후,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 회화과 석사 졸업(2021), 올해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졸업을 앞두고 있다. 2014년 제4회 대한민국 호국미술대전 대상, 2018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최연소로 대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고, 2019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처음으로 20대 작가에게 내준 대형 개인전을 개최해 주목 받았다. 2024/03/09
이상남, '유혹의 예술가'…썸타는 글로벌 화랑 페로탕 인생은 유혹이다.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드는 환상적인 힘', 그 '유혹의 마라톤'에 한 화가가 올라섰다.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 이상남. '기하학 추상 화가'로 이름이 있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낯설다. 미술계 평론가들도 '그 옛날 이상남?'이라고 다시 물을 정도다. 하지만 올해 2024년은 달라질 듯하다. 20년 간 한국 전시를 이어왔던 PKM갤러리와 연을 끊었다. 새해 벽두 그는 프랑스에 본점을 둔 세계적인 화랑 페로탕(Perrotin)과 손잡고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아카데믹하게 치렀던 이전 전시와는 다르다"며 "그림을 팔아보겠다"는 욕망이다. 1978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1981년 뉴욕으로 떠나 이방인과 경계인의 삶을 미끄러지듯 살아냈다. 올해 나이 일흔 살. 40여 년 간 미치도록 그렸다. 그림 그리는 재미에 빠졌던 화가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사로잡고 싶다. 날아오를 준비는 끝났다. "페로탕과의 첫 전시가 참 재미있네요. 이번 전시는 극장 무대처럼 꾸몄습니다."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있는 페로탕 서울 전시장은 이국적이다. 해외 작가들의 전시가 잇따랐던 덕분인지, 이번 전시도 한국 작가 전시가 아닌 듯한 분위기다. 미국 뉴욕과 경기 안양의 작업실을 오가며 이번 작품을 구상했다. 입구는 색과 기호들이 빠진 순한 작품으로 시작해서 안쪽과 2층 전시장은 마치 기계가 그린 듯 정교하고 치밀한 'SF 세계' 같은 그림으로 연출했다. ◆세계적인 화랑 페로탕, 서울서 한국 작가 개인전 이례적 페로탕의 이번 한국 작가 개인전은 이례적이다. 한국에 진출한 글로벌 화랑들이 자사 작가들의 전시 만으로 한국을 공략하고 있는 가운데 열린 이 전시는 한국 시장을 대하는 외국 화랑의 태도와도 맞물려 주목된다. 백효정 페로탕 서울 총괄 디렉터는 "한국 작가 개인전은 2019년 삼청점에서 박가희 작가 이후 이번이 두 번째"라며 "이번 이상남 개인전은 한국의 단색화 이후 발굴하는 한국 미술의 새로움을 조명하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인 화랑인 만큼 작가 선정과 전시는 엄격하다. 백 디렉터에 따르면 전시를 열기까지 각 지점의 큐레이터들과 브레밍 스토밍을 열고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이번 이상남 전시도 회의를 통해 "독창적이다"라는 지배적인 평가 속 전시가 추진됐다. 작품만 보고는 '젊은 작가인 줄 알았다'는 신선한 호평부터 '그림을 직접 봐야겠다'는 의견까지 나와 세계 미술시장을 휘감고 있는 페로탕에 '이상남' 이름 석자는 각인됐다. 이상남도 이 점에 매료됐다. "세계 각국의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일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놀랐다"는 그는 "한국 화랑들과 달리 페로탕은 SNS 팔로워 수만 해도 60만 명이 넘는다"며, '페로탕이 픽'한 자부심을 보였다. 프랑스계 화랑인 페로탕은 2016년 서울에 진출한 '외국 화랑 1호'다. 파리, 홍콩, 뉴욕, 서울, 도쿄, 상하이, 두바이 등 7개 도시에 분점을 둔 페로탕은 프리즈 아트페어가 상륙하는 서울에 공을 들였다. 강북 삼청동에 이어 2022년 강남 도산공원과 호림박물관 사이에 두 번째 전시 공간을 열었다. 한국에 진출한 외국 화랑이 ‘서울 2호점’을 열어 화제가 됐지만 ‘페로탕 도산파크’를 개관한 후 지난해 삼청점은 폐관했다. 페로탕은 '친한파 갤러리'다. 한국 작가를 적극적으로 후원·홍보하는 글로벌 화랑이다. 박서보·정창섭·이배 작가를 전속 작가로 맺어 해외 무대에 꾸준히 알렸다. 지난해 리움미술관에 바나나를 걸어 화제가 됐던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소속 작가로 페로탕은 타카시 무라카미, 피에르 술라주, 장 미셸 오토니엘, 엘름그린 & 드라그셋 등 세계 유명 작가들을 관리하며 세계 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백효정 총괄디렉터는 "이번 전시로 이상남 작가와 전속 작가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페로탕과 전속 계약을 맺기 위해선 다섯 번의 전시를 더 해야 한다"며 앞으로 홍콩, 파리 등에서 전시를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이상남의 120호 크기 작품 값은 10만 달러 선에 책정됐다. 페로탕의 전속 작가 혜택은 특별한 건 없다. '글로벌 메가 갤러리'에 속했다는 소속감이 큰 에너지다. "전세계 주요 8개 도시에 (2월에 문을 여는 LA지점 포함) 걸쳐 지점을 갖고 있는 갤러리인 만큼, 서구권과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작가들의 작품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게 강력한 무기다. ◆이상남 "내 작품, 낡은 개념 추상화 아닌 추상을 해부한 추상화" “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합리와 비합리, 아날로그와 디지털, 회화와 건축, 미술과 디자인 사이의 샛길을 건든다. 그 사이에서 산다. 회화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저 그림 얼마짜리야?'는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다. 화가는 이제 명예 만으로 살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이상남도 이제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 페로탕과의 전시는 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의지다. 그림 만큼은 자신 있다. "옛날 낡은 개념의 추상이 아니고 또 하나의 추상화로 추상을 끊임없이 연구해나가는 작가이자 새로운 작품"이라는 자부심이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적 추상'에 대해 '추상의 해부학'이라고 했다. "추상이라는 살갗을 들쳐서 해부하고 있다"며 "진정한 의미의 추상을 해석하고 사유하는 작가"라는 입장이다. '추상의 해부'는 역사가 깊다. 1981년 뉴욕으로 건너가기 전 실험 미술 전시회에 참여하며 눈을 떴다. 1972년, 1974년 앙데팡당 전시에 참여하면서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사진 매체를 활용해 '창문' 시리즈를 선보였다. 1970년대는 20대 이상남에게 회화에 대한 실험과 이론적 질문을 끝없이 제기하고 자신의 미학관을 찾아 나갔던 시기였고, 앙데팡당전 등을 통해 트렌드를 이끄는 박서보와 이우환의 반전통적인 예술의 방식과 매체를 고민하던 때였다. 1979년 제15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국제적 행보를 넓혀나갔다. 1981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린 'Korean Drawings Now'라는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그는 뉴욕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런데 뉴욕은 한국에서 열기였던 미니멀리즘과 개념 미술이 사라지고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 신표현주의, 에릭 피슬이나 데이비드 살레 등이 제작한 회화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상남은 다양한 개념과 미술가, 미술 기관 등이 범람하는 뉴욕의 미술계에서 다시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웬만해선 알아주지 않는' 나라에서 그만의 언어와 차별화를 위해 영혼을 갈아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1997년 현대화랑에서 연 귀국 전시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차별화했다. 숫자, 부호, 문자나 암호 등과 같은 기호들이 존재하는 특유의 ‘설치적 회화(installation painting in situ)’를 정립해나갔다. 40년 이상 축적한 이미지는 외계적인 느낌까지 풍긴다. 기계 내부 설비 장치나 건축 설계도처럼 보이지만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고 있는 21세기 우리의 삶 자체를 투영했다. 즉흥적이고 가벼워진 현재 미술 시장에서 추상의 추상을 해부한 모더니즘적이고 개념적인 그의 작품은 어찌 보면 비평가들의 '마지막 만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평론가 정연심 홍익대 교수가 "삶의 궤적과 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압축된 마음의 풍경화(compressed landscape)이다"라고 쓴 진지한 서문이 그렇다. "이상남의 작품은 형식적으로 보면 기하학적 추상 작업이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이미지의 형태도 내용도 서로 고정된 관계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생기는 의미의 균열과 파열이 생겨난다. 이 균열은 때로는 긴장과 위트를 유발하는데, 그의 그림이 뚜렷한 형태들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많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의 속성을 이상남은 신추상의 방식으로 기하학적 풍경화를 만들어낸다"고 평했다. ◆복잡한 이유? "다만 몇 초라도 붙잡기 위해" 그림은 사람이 그린 것 같지 않다. 마치 기계가 뽑아내거나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한 것 같아 봐도 봐도 믿기지 않는다. 색들의 다른 풍경이 전개되고 톱니바퀴 같은 기호들이 맞물려 미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기에 매끈한 작품은 실제로는 노동집약적인 공력이 들었다. 칠하고 덮고 갈아내기를 50~100회 반복하는 수행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됐다. 그는 "마치 공예가처럼 특정한 이미지들을 조합 시켜서 다듬고 갈고 덮고…이러한 작업들을 반복하면서도 예기치 않는 일이 벌이는 쾌감에 더욱 충실 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색깔의 낯섦을 주면서 끌고 가는 것. 오히려 그 길로 가본다. 실수가 다른 걸 보게 만드는 게 허다하다. 모든 것은 기획 돼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래서 작품은 한번에 나오지 않는다. 3개월 6개월 1년이 걸리기도 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싹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엄청난 아이콘과 색깔, 형태 등 수천, 수만 개의 양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겹쳐 놓으면 예상치 않은 결과가 나온다. 99%는 전략적이고 논리적이지만 1%의 세계는 전혀 모른다. 운에 맡긴다. 던져 놓고 부셔 버린다. "쌓아 올리다가 싹 부셔 버리고 주시해보는 것. 뭔가 살아있고 예측하지 못한 것이 나올 때 매력을 느껴 또다시 만들어 나간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이상남은 '유혹의 예술가'로서 여백을 두지 않는다. "빈 공간도 많고 미니멀한 작품을 하는데 생각들이 많아지더라"며 "관람자의 자기 의식이 투영되는 늪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이라고 했다. 그는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며 '이거 같네, 이거 같네'하며 자기들의 얘기를 엮어 나가는 게 재미있다"며 "뭔가 강요하지 않고 참여 시켜서 넌지시 보여주는 작품"이라면서 어렵게 보지 말라고 했다. "이건가?" 하는 생각이 낚시다. "무용수들이 예기치 않게 사건들을 전개해나가는 것처럼 슬쩍 비켜나가고 미끄러져 나가, 보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것. 다만 몇 초라도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것, 그게 나한텐 중요하다." 뉴욕에서 무용과 연극을 유독 많이 봤다는 그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인 요소와 매력적인 요소가 자신의 작품에 많이 반영된 것 같다고 했다. 작품 내용에 대해 말을 아끼는 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상징을 물었더니 "선과 곡선의 싸움은 통합으로 완성된다"는 힌트를 줬다. "직선은 죽음, 곡선은 삶을 상징한다. 그래서 중성적인 색을 많이 쓴다. 원색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요소보다는 감싸주고 중화 시키는 색을 쓰는 이유다." 미국에서 동료 작가들이 '이상남의 기하학을 보면 뭔가 다르다'는 평가를 한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전했다. "마르쉘 뒤샹이 마치 큰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것처럼, 컨템포러리 아트가 답을 알게 되면 볼게 없는데 너의 작품은 또 다른 것들이 아침마다 발견되는 재미가 있다"는 것. 결국 그는 "내 위치는 작품과 관객의 중간에서 지휘하고 매칭하는 역할"이라며 "관객들을 기하학적 이미지로 보여지는 바다에 빠트리고 싶은 재미를 느끼고 싶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만들 수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에 찬 미소를 보였다. 정밀한 그림처럼 그는 녹슬지 않는 손맛을 자랑한다. 매일 매일 밥 먹듯 하는 드로잉 덕분이다. "피아니스트가 손을 풀기위해 매일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화가인 나는 머리하고 손하고 어색해지지 않게 매일 매일 스케치를 한다. 지금까지 그린 것 만해도 1만 장이 된다. 스스로 만들어낸 색도 수백 가지다. 색을 담은 수첩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붓 질을 했는데 붓 질을 안 한 것처럼 보이고, 그렸는데 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마술 같은 이상남 표 그림의 힘'이다. 매끈하고 미끈한 작품. 장인처럼 일하지만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작가로서 경제성은 피해갈 수 없는데 업으로 하니까 무조건 그린다'는 그는 무식하게 일한다고 했다. 작업실에서 7일 간 박혀있는 그에게 미련하다는 동료들의 말에 이제는 쉬는 날은 쉬기로 했다. "머리를 비워야지. 맨날 그림 생각만 하니까 다른 일을 못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그림에 푹 빠진 전업 화가의 면모를 보였다. "살아가면서 재미를 느끼면 빠지지 않나요?. 똑같은 거지. 무엇이든 가치 이전에 재미를 느끼는 거지. 다 그렇게 하지 않나요?" 복잡다난한 그의 그림은 '그 모든 것의 장르'를 품었다.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순간부터 그의 계략에 빠져든다. "완성되는 작업이 아닌 골치가 아프게" 작업하는 그는 여전히 '청춘의 샘'을 가동하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상징과 기호를 생각 장치로 묶어 놓은 그는 "내 작품의 낯섦에서 (관객들이) 몇 초 간 사유 할 수 있다면 바랄게 없다"고 했다. 그의 바람은 성공적이다. 작품은 눈길과 발길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프랑스계 화랑인 만큼 전시 제목은 'Forme d’esprit(마음의 형태)' 프랑스어로 달았다. 보면 볼수록 생각이 확장되고 미끄러지는 '이상남 그림의 신세계'가 열릴 것인가? 이제 페로탕의 은밀하고 우아한 '마음의 형태'를 보여야 할 때가 시작됐다. 전시는 3월16일까지. 202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