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핫플' 포도뮤지엄…김희영 "공감전 3탄, 치매 조명" "결국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거대한 흐름속에서 사라져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삶은 참 잔인하거나 지독할 수 도 있고 풍성할 수도 있었다…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터무니 없는 은총이 감사하다."(파스칼) 미술 전시장은 '치유의 공간'이다. 번뇌와 슬픔을 녹이고 산산이 부서진 기억과, 날 선 추억도 뭉클함으로 되살아난다. '감정적인 생기'를 돌게 하는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선물 같은 전시'다. 제주 포도뮤지엄(총괄디렉터 김희영)에서 마련한 올해 첫 전시로, 노화 가운데서도 인지 저하증(치매)을 조명한다. 회화, 설치, 영상 등 예술가 10명의 작품은 시간에 쫓기는 좀비 같은 삶을 구원 시킨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2021),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2022) 전시에 이은 '공감 전시' 3탄으로, 철학적이고 공감각 넘치는 깊이감을 전한다. 생로병사, 생멸의 운명을 가진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과 존엄함을 발견하게 한다. 특히 몰입형 설치미술로 선보인 '테마 공간'은 예술이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는지를 느끼게 한다. 100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6미터의 거대한 배롱나무는 전시장에서 부활해 생명의 순환성과 회복력을 전한다. 심장박동처럼 울리는 오케스트라 현들의 편안하고 장엄한 선율과 함께 어우러진 작품은 사랑의 마음을 이어지게 한다. 녹음이 우거진 숲 한 가운데 생명의 기운을 머금어 싹을 틔우고, 초록 잎이 무성해지고, 화려하게 꽃을 피우다가 노쇠한 겨울을 맞이한 후 모든 여정을 마치고 별이 되어 돌아가는 장면이 삶처럼 반복된다. 지난해 포도뮤지엄에서 진행한 ‘추억의 비디오’ 공모전에 참여한 관객들의 실제 비디오 영상도 등장해 공감력을 더한다. ◆포도뮤지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치매와 기억의 탐구 "모든 날 중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한번도 웃지 않은 날이다." 주름진 손으로 백발을 빗고 있는 흑백 사진과 함께 노란벽에 써 있는 글은 김희영 총괄 디렉터가 "이 전시를 해야겠다고 용기를 갖게 한 문구다." 치매를 매개로 기억과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예술적인 시각으로 탐구하는 이 전시는 기억이 무너지는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김희영 디렉터는 "고령화 시대 어느 나라이든 남녀노소 똑같이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치매"라며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치매 초기 진단을 받으면서 더욱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전시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캐나다 개념 미술가 알란 벨처(Alan Belcher)의 도자기로 만든 '바탕 화면'으로 시작해 천경우의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로 끝맺음하는 전시는 알찬 포도알처럼 엮어져 진정성이 전해진다. ▲루이스 부르주아 ▲셰릴 세인트 온지 ▲정연두 ▲민예은 ▲로버트 테리엔 ▲더 케어테이커 & 이반 실 ▲데이비스 벅스 ▲시오타 치하루 등 10명의 작품이 하나의 이야기로 흡입력 있게 연결되어 전시 연출력이 돋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20세기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세계적 조각·설치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밀실 1'이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어 눈길을 끈다. 미국 글렌스톤 뮤지엄 소장품으로 김희영 디렉터의 '초심 정신'이 통했다. "턱도 없을 것이라며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는데, 흔쾌히 대여해줬다"며 설렘을 보인 김 디렉터는 "복원 전문사가 비행기를 타지 않고 작품과 함께하겠다는 각오로 인천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는데, 뮤지엄의 역할을 하는 적극적인 모습에 감동 받았다"면서 "작품을 공개했을 때 마치 마녀가 살아 나온 것 같은 기운이 전해졌다"고 소개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문짝들이 벽처럼 둘러 서있는 작품은 문틈 사이로 들여다 보게 한다. 앙상하고 낡은 철제 침대, 유리병과 의료 도구들, 각종 물건들이 가득한 내부는 누군가의 고립된 세월과 위축된 심리를 압축해 보여준다. 루이스 부르주아가 유년 시절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 공간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두려움도 서려 있다. ◆참여 작가들 "모든 작품 감정적으로 서로 연결…아름다운 전시" 18일 제주 포도뮤지엄에서 만난 참여 작가들은 전시에 만족한 모습이었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작가 데이비스 벅스는 "이번 전시가 생로병사의 주제와 맞닿아 있으면서 폭넓은 분야를 커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들과 기억과 추억에 대해 많이 대화했는데 누군가 '기억이란 현재가 만들어낸 부속물'이라고 했다며 이 표현을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가 실재하고, 실재하는 과거가 계속 진화하는 것"이라는 그는 "사실 기억도 과거도 단지 현재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하고 시뮬레이션하는지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조각난 캔버스와 합판으로 파란 하늘과 초록 들판의 풍경을 선보인다. 전통적인 의미의 풍경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도 여전히 또 다른 풍경을 펼쳐내는 작품이다. 작가는 파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해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상실,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한국 전시를 위해 특별히 새로 제작한 세라믹' jpg 연작'과 파란색 신작을 설치한 캐나다 토론토에서 온 알란 벨처는 "이번 전시를 보면서 하나의 스토리를 쭉 경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수년간 방치되었던 노트북을 다시 켠 것처럼 깨진 이미지 파일들을 벽면에 즐비하게 전시한 그는 한때 존재했지만 더 이상 기억해 낼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무력감을 상기 시키며 '기억이 사라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기억과 인지 상실의 주제로 작업해온 이반 실 작가는 "이 전시는 당연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는 다양한 작품들의 조합이 흥미롭다"면서 "모든 작품이 명시적인 메시지를 건네지 않고도 연결되는 점이 좋다"고 했다. 설치미술가 민예은은 치매로 인한 쪼개진 기억을 시각화했다. 바닥이 없이 모서리가 날카로운 천장과 벽으로만 이뤄진 작품은 중력에서 벗어나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로버트 테리엔 작품과 함께 선보이는데 마치 한 작품처럼 어울린다. 민 작가는 "로버트 테리엔 재단 관계자들도 '두개의 작품이 브라더 앤 시스터 같다'는 이야기를 해줬다며 저도 세트로 묶여서 같이 다니고 싶다"는 기분 좋은 바람을 전했다. 생전 로버트 테리엔과 함께 작업했고 그가 별세 후 재단에서 일하며 이번 전시에 무제(패널룸)를 설치한 폴 채르윅과 딘 애니스는 "이번 전시를 관람하며 밴 다이어그램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모든 작품들이 강력한 개성을 갖고 있고 동시에 감정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매끄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전시"라고 평했다. 로버트 테리엔은 미국 출신 현대미술 작가로 평범한 사물의 크기를 확대하거나 축소해 일상적 풍경을 낯선 풍경으로 바꿔 놓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2019년 작가의 작고 이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2년 가나아트에서 개인전이 열린 바 있다. 이반 실 작가는 "소리와 회화를 같이 연출하는 공간으로 무엇이 가장 좋을까 뮤지엄측과 지속해서 대화하며, 다양한 아이디어가 순환할 수 있게 이번 전시를 구성했다"면서 "기억과 인지가 소실되어가는 과정 속 현실의 급변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어둡고 폐쇄된 원형 극장 같은 공간에서 회화 연작과 향수를 자극하는 멜로디(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와 함께 작품을 선보인다. 기억이 점점 소실되어 가는 초현실적인 그림은 부드러운 조명으로 인해 영상을 보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전한다. 그는 "결국 누군가 인지 저하를 겪게 되면 가장 슬퍼하는 사람들은 남은 가족들로, 지금까지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런 느낌을 진지하고 약간 암울한 느낌의 공간으로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아이가 되어버린 엄마의 흑백 사진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뭉클함을 전하는 사진 작가 셰릴 세인트 온지는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와 함께 만든 작품을 아름다운 제주에서 선보일 수 있어 영광"이라며 환한 모습을 보였다.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된 제 작품을 보며 새로운 의미가 전달되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고, 엄마와 함께 한 내 작품을 보면 기운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는다"며 흡족해했다. 쉐릴 세인트 온지의 어머니는 2015년 혈관성 치매를 진단 받았다. 농장에서 수십 년 간 함께 살아온 모녀가 공유하던 추억과 감정은 어머니의 기억과 함께 점점 상실되어 가는 듯해 작가는 사진 작업을 중단했다. 그러다 나른한 햇살이 창에 스며드는 어느 날 오후에 문득 작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변했다. 어머니의 삶 속에서 가볍고도 명랑한 순간들을 포착하기로 결심했다. 작가가 아이폰과 대형 카메라로 담아낸 어머니 모습은 장난꾸러기 아이 같고, 수줍은 소녀 같기도 한 노인의 모습이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됐다. 김희영 총괄 디렉터는 "초고령화 사회에 점차 많은 인구가 겪게 될 인지 저하증이 처참한 질병이 아닌 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사회적 공감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전시를 기획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이 따뜻하게 교차되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아름다운 날들을 함께 그려갈 수 있기를 소망 한다"고 전했다.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에 이어 2층에서 보너스 같은 전시도 펼친다. 포도뮤지엄 새 프로젝트인 '아카 인 포도'를 진행, 김지영·강서경의 작품을 전시했다. 예술을 통한 지역적 경계를 넘는 대화와 연결의 장을 추구, 아시아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소개할 예정이다. 전시는 20일부터 1년 간 열린다. ◆제주 포도뮤지엄은? 제주 안덕면에 위치한 포도뮤지엄은 겉으로 작아보이지만 내부는 길게 이어진 대형 전시장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동거인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이 총괄 디렉터를 맡아 2021년 4월 개관했다. 미래의 가치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다목적 공간을 표방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 가운데서 주제를 선정해,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나누고 타인의 입장에 공감해 보자는 취지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전시에 풍부한 서사를 부여하고, 현대미술을 보다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게 해 여행객들의 '제주 핫플'로 부상했다. 2021년 4월 개관전인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은 12만 명이 관람하며 입소문을 탔다. 군중 심리에 선동이 가미 되었을 때 혐오가 탄생하는 해악성을 탄탄한 구성으로 풀어내 호평 받았다. 2022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빠’로 관람해 화제가 된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전시는 이주민과 소수를 향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드러내며 이들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보고 공감해 볼 것을 제안했다. 포도뮤지엄 소장품인 세계적인 인기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27명의 광대가 등장하는 설치 작품을 전시해 특히 주목 받았다. 당시 7월 초 종료 예정이었던 전시를 연장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2개월 연장과 무료 개방을 하기도 했다. 2024/03/19
힙 한 미술관 스페이스 K, 핫 한 화가 에디 마티네즈 "작업하는 게 즐거워요. 즐겁게 봐주세요." 13일 스페이스K에서 만난 미국 화가 에디 마티네즈(47)는 화려하고 발랄한 그림과는 달리 묵직하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작업 세계에 관한 질문에 뜸을 들이며 느릿하게 말했지만 '한 방'이 있었다. 자신은 맥시멀리스트로서 빠르고 속도감 있게 작업하는 스타일로 드로잉을 선택했을 뿐이고,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실제로 작가는 항상 펜과 종이를 들고 다니며 드로잉을 한다. 이날도 작은 종이에 낙서처럼 그려낸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에디 마티네즈의 작품은 속도감 넘치는 선과 대담한 색상이 돋보인다. 화면 안에는 작가가 일상에서 영감 받은 나비, 꽃병, 테니스공, 블록헤드(Blockhead) 등 다양한 모티프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같은 작업 방식에 대해 그는 ‘같은 그림이지만 다르게 그리기 위한 연구’라고 부른다. "이미지를 다르게 이해하기 위해 대상에 대한 선입견을 벗겨내는 시도"라고 했다. 미술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 세계에 들어온 그는 모든 일상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작업할 때 발생하는 쓰레기, 물티슈, 껌, 캔버스 천 조각 같은 일상 속 물건들을 화면에 콜라주 하며 독특한 질감의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드로잉은 회화와 조각,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작업의 원동력입니다. 30년, 35년, 어쩌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 삶에서 항상 변함없는 것이었고, 드로잉 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처로서 주변 환경 속에서 나와 연결되는 방법이었습니다." 드로잉과 색감이 폭발하듯 에너지가 넘치는 그림은 동시대 현대인들을 홀리고 있다. 미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는 세계에서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유명세답게 전속 갤러리는 4곳(티모시 테일러(영국), 미첼이네즈 네시(미국), 블룸(미국-일본), 막스헤츨러(독일))으로 컬렉터와 작품 수요를 관리하고 있다. 이번 한국 전시에도 이 갤러리 디렉터들이 직접 내한 작가를 챙기고 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으로 뜨고 있는 작품값은 100호 크기 3억5000만 원 선에 거래된다. 2018년 뉴욕 브롱스 미술관(The Bronx Museum), 2019년 디트로이트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Detroit)과 상하이 유즈 미술관(Yuz Museum), 등에서 개인전을 열며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이탈리아의 내륙국인 산마리노 공화국 전시관의 대표 작가로 선정됐다. 동시대 미술계에서 존재감을 보이는 그가 베니스비엔날레 전시 전 서울로 왔다. 강서구 마곡동 코오롱 문화예술 나눔공간 ‘스페이스K 서울'에서 한국 미술관 첫 전시를 개최한다. ◆ ‘스페이스K 서울'서 한국 미술관 첫 전시 14일 스페이스K에서 개막하는 전시는 '투 비 컨티뉴드(To Be Continued)'를 주제로 구상과 추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시기 및 주제별로 전시했다. 천장고 3m~10m 200평 규모의 전시장에 대결하듯 걸린 에디의 작품도 힘이 만만치 않다. 우선 색과 선으로 밀어붙인 작품은 발길을 끌어들인다. 2m, 3m, 6m가 넘는 압도적인 크기로 거대한 공간을 누르고 있다. 한국 전시를 위해 공개한 ‘만다라(Mandala)’ 연작은 오래된 것을 참조해 재탄생시키는 작가의 성향이 담겼다. 그의 드로잉 기법과 함께 어우러져 역동성이 돋보인다. 원판(圓板) 혹은 원륜(圓輪)이라는 뜻을 가진 만다라(mandala, 曼茶羅)는 불교와 힌두교에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하는 그림이다. 그는 오랫동안 동양 철학과 종교, 특히 다양한 불교 종파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항상 티베트 불교의 모래 만다라 수행을 좋아했다"면서 "티베트 불교에서 3주 또는 1달 동안 모래 만다라를 만들고 작업이 끝나면 바로 지워버리는데, 이 점이 정말 흥미롭다"고 했다. "수행은 덧없음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깨달은 그가 그려낸 만다라 시리즈는 음식이 있는 둥근 그릇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만다라 시리즈는 탁자 시리즈나 부플라이 시리즈처럼 일종의 수단입니다. 여러가지 모양과 색을 넣을 수 있는 구조물 같기도 하고, 그냥 마음에 들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만다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다라가 그릇의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화이트 아웃' 기법으로 무장한 신작 '은하계 같은 풍경 - 로지아(Loggia)에서 바라보다'가 압권이다. 가로 6.7m 세로 3m가 넘는 크기의 화이트 색으로 덮은 듯한 그림으로, 나뭇잎, 버섯, 꽃, 눈 등 익숙한 형태가 시각적 불협화음 속에 뒤섞여 있다. 에디는 이 작업은 반려견 때문에 시작된 작업이라고 했다. "강아지 프란시스가 죽던 날 많은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프란시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리다보니 색을 다양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흰색으로 덮었고 다시 그릴 수 있었죠. 프란시스는 서서히 가려졌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그려져 있습니다. 며칠 연속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완성됐습니다." 흰색으로 지우는 일명 '화이트 아웃'기법이 탄생된 배경으로 이번 개인전에 내놓은 신작 '은하계 같은 풍경'은 화이트아웃 시리즈의 일부로 제작됐다. "LA에 있는 갤러리 ‘BLUM’의 야외 정원을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몇 년 전 그곳에 하루종일 앉아서 그곳에 있는 모든 식물을 그렸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시작이었죠." '화이트 아웃'기법은 선에 집중하는 작업인데, 선을 억제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더하기와 빼기, 정의하기와 지우기를 반복한 작품은 '재생 화법'이기도 하다. '화이트 아웃'시리즈에서 사용한 기법을 다른 형식의 작품에도 적용해 지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드러남‘에 대한 연구로 다시 시작된다. 화가이면서 아트핸들러(운송)로도 활동하며 생의 의지와 활기를 온 몸으로 각인하는 에디 마티네즈는 일상적인 사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시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비슷하지만 또 다른 그림들을 지속적으로 그려오고 있는 그는 이번 전시 제목 'To be Continued'과 닮은 모습이다. 그는 "모든 것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렸던 것을 다시 가져와 그리는 데 관심이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은 계속 발전하고 진화하며 왔다 갔다 하죠. 그림도 마찬가지 같아요. 모든 것에 완성이란 없으니까요." 한국 관람객들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쿨 하게 답했다. "저는 그림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럼에도 한국에서의 전시 의미에 대해 그는 '기쁨'의 마음을 전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제 아들 아서가 태어난 이후로는 작업에 많은 ‘기쁨’이 있어요. 이 기운은 스튜디오 밖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제 작품은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어요. 관람객들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무언가를 찾기를 바랍니다." 한편 스페이스K는 최근 몇년간 '강서의 최고 미술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2021년 헤르난 바스 전시에 2만7000명이 관람해 화제를 모은 이후 네오 라우흐·로사 로이 부부 전시, 다니엘 리히터 전시까지 히트하면서 국내 핫 한 전시장으로 입소문이 나고 있다. 올해 첫 전시로 기획한 ‘에디 마티네즈’ 개인전도 새 봄을 맞아 활기 넘치는 작품으로 관람객들의 발길을 모을 것으로 전망된다. 선과 색이 꿈틀거려 자유분방함과 에너지가 넘친다. 사진 찍기 딱 좋은 그림이다. 전시는 6월16일까지. 관람료 5000원~8000원. 2024/03/13
"내장을 다 꺼낸 전시"…갤러리현대, 도윤희·김민정·정주영 '풍경' "삶도 그렇잖아요. 내가 옛날에 왜 그랬는지 지금 아는 게 있잖아요. 작업을 할 때는 그냥 했는데 지금 보니 내가 그래서 그때 그런 작업을 했구나를 알고… 이번 전시는 여러가지로 좋았어요."(도윤희 작가) "이번 작품 꺼내 본 게 20년이 넘어요. 그대로 있을까 궁금했을 정도였죠. 거울 보는 느낌이랄까요? 쑥스럽기도 해요. 그런데 저한테 매우 의미있는 전시에요. 선배님(도윤희)옆에 제 작품이 걸려서 영광이고요."(정주영 작가) 갤러리현대에서 처음으로 기획한 여성 작가 3인전(김민정, 도윤희 정주영)은 경쟁력 있는 '여성 화가'들의 미학적 성취를 재조명하는 측면에서 새로운 전시다. 팔리는 그림, 신작전이 아닌 과거 작품을 되돌아보는 한편 작품의 생명을 과거에서 현재로 부활시켰다. 12일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도윤희·정주영 작가는 서로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보는 듯 반가워했다. 정 작가가 "이번에 나온 작품은 20년 만에 꺼낸 것"이라고 하자 옆에 있던 도윤희 작가는 "나는 30년 만"이라며 마치 소녀들의 수다처럼 말했다. 또 정 작가가 영광이라고 하자 도 작가는 "작업을 지속하면 만날 수 있다"며 현실적인 직언으로 여성 화가의 삶을 압축했다. 옛날 작품을 다시 보여주는 것은 작가로서 쉽지 않은 일이다. 도윤희 작가는 "작품은 내밀하게 내면의 현실을 표현하는거다. 전시를 하는 건 작업실 안에서 내장을 다 꺼내듯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거다. 그래서 전시할 때는 힘들다"고 하면서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에서 내장을 다 꺼낸 것"이라고 했다. ◆갤러리현대, 새 프로젝트 ‘에디션 R’ 갤러리현대의 이번 도윤희(63), 김민정(62), 정주영(55) 여성 작가 3인전은 올해 전 세계 미술시장의 트렌드와 맞닿아있다. 어느 해보다 여성 작가들의 도약이 돋보이는 현시점에서 K 아트의 위상과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다. 세 작가는 모두 갤러리현대 소속 작가로 각기 개인전을 연 바 있지만, 세 명의 작가 작품을 동시에 선보이는 건 처음이다. 갤러리현대는 "새 프로젝트 ‘에디션 R’은 작가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창작 행위의 지평을 살피고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미적 여정을 보다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경험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3명 작가의 과거 작품을 묶은 이번 전시 타이틀은 '풍경(風景)'이다. 한자어로 풀면 ‘바람이 만드는 경치’라는 의미지만 전시에 나온 작품은 일반적인 풍경화가 아니다. 현실과 그 너머의 비가시적인 풍경까지 주제를 폭 넓게 아우르며 초기 주요 작품들을 소개한다. ◆도윤희, 김민정, 정주영 '풍경'은? “제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삶입니다. 작가의 주제는 작가의 원인이고, 페인팅은 내적 현실의 반영입니다. 그래서 그림은 작가의 내면 현실의 반영이며, 전시는 타인의 시선에 저의 내면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도윤희 작가) 도윤희 작가는 일상이 그림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다양한 기법의 추상회화를 통해 시적인 시각 언어를 구축해 왔다. 2007년 스위스 갤러리바이엘러에서 아시아 작가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는 도윤희의 1996년부터 2009년까지의 작업은 흑연 드로잉 위에 바니시를 반복적으로 칠한 독특한 질감과 깊이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밤은 낮을 지운다'(2007-2008), '천국과 지상의 두 개의 침묵은 이어져 있다'(2004), '어떤 시간은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2008-2009)와 같은 시구 같은 제목은 그의 일기에서 나왔다. 도 작가는 "삶에서 마주하는 현상과 물질 등 인간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에 시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했다. “제가 생각하는 풍경이란, 내 마음과 머릿속을 완전히 비운 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상태가 내 마음과 눈에 투영되어 그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됐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럴 때 그 풍경이 나를 통해, 선이나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작업으로 전유됩니다.”(작가 김민정) '풍경' 전에서 소개된 김민정 작품은 불로 태워 독창적인 조형미가 돋보이는 익히 알려진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작가가 이탈리아에서 머물며 완성한 작업들이다. 먹과 수채 물감의 관계, 얼룩과 번짐 효과를 극대화한 일련의 수묵 채색 추상 작품을 발표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1991년 이탈리아로 떠나 밀라노 브레라국립미술원에 입학한 그는 영상과 사진 작업이 주를 이루던 당시 학업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통해 익숙하게 다뤄온 한지를 재료로 삼았다. “본다는 것은 개인의 감각적 경험을 넘어 집단의 기억, 회상을 통해 전통이나 원형의 문제를 수반한다고 봅니다. ‘봄’의 행위가 광학 장치와 비교되고 기억의 문제도 디지털 데이터화되는 지금의 환경에서, 여전히 본다는 것은 인간의 지각과 인식체계가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정주영 작가) 정주영 작가는 이번 전시 3명중 가장 막내 작가지만 중견 화가로 ‘산의 작가’로 통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작가는 산의 풍경을 캔버스로 옮겨 그렸다. 이번 전시에도 산 같지 않은 산 작품을 선보였는데, 1995년에서 1997년 사이 작가가 암스테르담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 김홍도, 시중대 (부분)'(1998), '김홍도, 가학정 (부분)'(1996), '정선, 인왕제색 (부분)'(1999)은 김홍도와 정선이 현실을 옮겨 놓은 회화의 일부분을 확대한 작품이다. 진경과 실경, 관념과 실재, 추상과 구상 사이에 놓인 이중적인 ‘틈’ 회화의 세계를 제시한다. 전시는 13일부터 4월14일까지 열린다. 2024/03/12
'불의 기운'에 빠진 장인정신…김수수 '색면 추상' "처음엔 무식했어요.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오기로 작업했죠." 2018년 중국 최고의 미술종합대학인 북경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신문을 보다 뛰쳐나갔다. "뜨거운 기운이 지면을 뚫고 나오는 듯한 용광로의 열기를 직접 보고 싶었어요. 그 길로 신문 속 공장에 달려갔는데 일반인 통제구역이라 위험하다고 거절을 당했고 사진 찍는 것도 거부해 낙담했죠." 평소 숫기도 많고 말이 없는 편이지만, 뜨거운 아우라를 내는 불빛을 잡고 싶은 욕심이 컸다. 중국 유학 시절 몸에 베인 현장 확인 습관이 발동됐다. 항상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남기던 '사실주의 훈련' 덕분이다. 간식을 사 들고 가 몇 날 며칠 현장 근로자들을 설득을 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꼭 필요하다." 결국 문이 열렸다. 그렇게 마주한 용광로의 '불'은 신비롭고 황홀했다. "용광로가 열리면서 뜨거운 열기가 온 천지에 터져 나오는 광경과 불의 색이 주변 환경과 융합되는 장면…와우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허공과 바닥을 순식간에 하나의 기운으로 아우르는 불의 기운. 가슴속에서 진심 뜨거운 감흥이 올라왔다. 그 '불의 색'은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정신이 데인 것 같은 강렬한 충격도 잠시,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거리낌 없이 불을 조율하는 직원들의 모습에 또 깜짝 놀랐다. "불길이 뜨거운데 여러 쇳덩이를 넣고 녹인 뒤 다시 새로운 쇳덩이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더라고요." 불의 형상을 담기 위해 현장에서 스케치를 수없이 했고, 불의 기운과 불을 다스리는 '장인 정신'을 화폭에 녹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불의 기운에 집중하고 사족을 다 빼자 결국 추상이었다. 이렇게 나온 '불' 작업은 2018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비구상 부분에서 대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517점이 응모한 미술 대전에서 뽑은 대상(1명)은 27세 최연소 작가의 수상으로도 화제가 됐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며 작업합니다." 화가 김수수(31)는 'MZ 작가' 중 '색면 추상화'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팝아트와 풍경화를 주로 작업하는 요즘 화가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내공 가득한 작품을 보고 중견 작가로 오해하다 앳된 얼굴의 작가를 만나면 깜짝 놀란다. 꽃 중의 최고의 꽃 '불꽃'에 빠져버린 그는 불꽃을 숭고함의 뿌리로 본다. 자신을 압도한 불꽃의 모습을 구상화로 표현하지 않고 영혼을 갈아넣은 듯한 추상화로 보여주는 이유다. 언뜻 '사각형의 색면 추상'의 거장 마크 로스코의 작품과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알고 보면 아하~한다. 붉은 용광로가 입을 벌린 모양을 검은 사각의 화면에 담은 것. 그 안에 붉은색의 불꽃과 타고 남아 재가 되는 과정을 회색과 흰색의 대비로 전한 모습이다. “용광로를 마주한 순간 오로라처럼 온갖 색깔의 열기를 내뿜는 장면에서 인생의 필름이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그는 "그 찰나의 느낌들을 가장 단순하며 강렬하게 옮긴 것이 지금의 그림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마크 로스코가 색채의 미감에 주목했다면, 제 그림엔 불을 대면한 이들의 순결한 노동의 참 의미를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용광로에서 느낀 강렬한 기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때의 강렬한 불빛의 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로지 '불의 기운'을 전달하는데 집중했다. 용광로 문은 단순미로 살렸다. 뜨거운 불길이 일렁이는 문이 닫히고 열리는 모습을 사각의 형태에 가둠과 동시에 불길의 모습은 쓸어 내리는 듯한 붓질로 표현했다. 특히 검고 검은 바탕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은 각고의 실험 결과다. 현장을 반영한 재료의 고민에서 탄생했다. 용광로 공장에서 볼 수 있는 금속성의 거친 느낌을 내고 싶었다. 여러 재료의 실험을 거쳐 유화 물감과 탄소, 흑연을 혼합해 그 느낌을 살려냈다. 탄소와 흑연을 이용하면 그림 표면이 미세하게 반짝이는데, 화려한 반짝임보다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와 흡족했다. 허투루 나오는 작품은 없다. 탄탄하고 꼼꼼한 붓질로 완벽성이 돋보인다. 작은 먼지나 티끌도 허락하지 않는다. 한 작품의 바탕 색만 20번 이상을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그 위로 올린 색층도 수없이 반복하며 두께감의 무게와 함께 매끈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 작품에도 노동, 그러니까 장인 정신을 담고 싶었어요." 마치 용광로 앞에서 근무하는 직원처럼, 하루 종일 반복적인 일을 똑같이 수행한다. 작품은 크기와 상관없이 단번에 한 붓으로 최종 마무리하는 일필의 채색기법이 압도적이다. 단 번의 붓 터치를 위해 여러 개의 붓을 이어 2m가 넘는 특별한 붓을 직접 제작해서 사용한다. 그렇게 한번에, 또 반복해서 칠해진 화면은 곱고 진한 색감으로 단정함도 뽐낸다. 오기로 시작한 작업은 수행이 되고 있다. 전업 작가지만 회사원처럼 오전 7시 작업실로 출근해 퇴근을 반복하며 붓 질과 씨름한다. 밥 먹는 시간 외엔 모든 시간의 그물망을 그림 작업으로 채운다. 지난 2년 간 400점을 그려낼 정도로 '일 벌레'다. "한 때 뭔가 보여줘야겠다며 오기로 작업하며 스스로 짐이 되기도 했어요. 이렇게 살다 안되겠다 싶어 불교 공부를 했어요. '내려 놓기'를 배우며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 하려는 마음조차 내려 놓으니 진정한 원동력이 생기더라고요. 매일 하는 그림 작업은 제 일이자 취미입니다. 그림 그리는 일이 무엇보다 좋아요." 올해 홍익대 대학원 회화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그는 신작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오는 13일부터 24일까지 홍익대가 서울 인사동에서 운영하는 갤러리H 1~3층 전관에서 40여 점을 선보인다. '불'시리즈에 이은 신작 '불티' 시리즈와 디지털라이징 전문가 어라운즈 이창민 대표와 함께한 디지털 아트 영상 작업도 공개한다. 새 작품 '불티' 시리즈는 단어 그대로 용광로에서 터져 나오는 불티와 재에서 영감을 받았다. 점 사이에 선이 존재하고 점과 선이 면이 되어 공간을 이루는 작업이다. 불티의 상승 이미지가 완벽히 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보인다. "'불티' 에서도 '불' 작업에서 행한 수십 번의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노동의 숭고함을 전달하려 노력했어요. 첫 초심을 갖게 한 노동자들의 땀을 작품에 옮기기 위해 수많은 노동의 시간을 넣으려 집중했습니다." "용광로 안에서 들끓는 쇠의 모습을 인생의 다양한 현상들에 결부시켜 그 요체를 뽑아내는 작업은 현대미술에서 강조되는 개념적인 측면, 철학의 영역에 발을 담근 것이다."(미술평론가 윤진섭) 시간의 나이테를 쌓아가듯 온 몸과 마음을 녹인 그야말로 작가의 삶이 육화(肉化)된 '김수수 색면 추상'이 진지하고 묵직한 에너지를 전하는 배경이다. "제가 용광로를 처음 봤을 때의 그 강렬한 느낌을 제 작품을 통해 관람객도 느끼신다면 바랄게 없습니다."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묵묵히 배경을 칠하고 칠하기를 거듭하며 반복의 힘을 기른 그는 침묵에 익숙한 고요한 분위기다. 화가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극한 직업이다. 쇳덩이도 녹이는 용광로의 강렬한 불꽃이 결국 불티로 날리며 사라지는 것을 담아내며 최고의 긴장감을 경험한 그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다. “결국 제 작품은 쉼 없이 반복되는 조형적 행위를 거쳐 추상과 구상, 허상과 실상의 경계를 극복한 인생의 긴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커다란 용광로 안에서 분출하기도 하고, 녹아내리기도 하는 모습이 생멸하는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온갖 감정들로 때가 묻고, 많은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덕지덕지 굳은살로 뒤덮인 우리의 삶도 일 순간에 덧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수수 작가는 화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왔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중국으로 유학, 북경 중앙미술대학교 유화과를 졸업(2017)한 후,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 회화과 석사 졸업(2021), 올해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졸업을 앞두고 있다. 2014년 제4회 대한민국 호국미술대전 대상, 2018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최연소로 대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고, 2019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처음으로 20대 작가에게 내준 대형 개인전을 개최해 주목 받았다. 2024/03/09
이상남, '유혹의 예술가'…썸타는 글로벌 화랑 페로탕 인생은 유혹이다.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드는 환상적인 힘', 그 '유혹의 마라톤'에 한 화가가 올라섰다.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 이상남. '기하학 추상 화가'로 이름이 있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낯설다. 미술계 평론가들도 '그 옛날 이상남?'이라고 다시 물을 정도다. 하지만 올해 2024년은 달라질 듯하다. 20년 간 한국 전시를 이어왔던 PKM갤러리와 연을 끊었다. 새해 벽두 그는 프랑스에 본점을 둔 세계적인 화랑 페로탕(Perrotin)과 손잡고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아카데믹하게 치렀던 이전 전시와는 다르다"며 "그림을 팔아보겠다"는 욕망이다. 1978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1981년 뉴욕으로 떠나 이방인과 경계인의 삶을 미끄러지듯 살아냈다. 올해 나이 일흔 살. 40여 년 간 미치도록 그렸다. 그림 그리는 재미에 빠졌던 화가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사로잡고 싶다. 날아오를 준비는 끝났다. "페로탕과의 첫 전시가 참 재미있네요. 이번 전시는 극장 무대처럼 꾸몄습니다."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있는 페로탕 서울 전시장은 이국적이다. 해외 작가들의 전시가 잇따랐던 덕분인지, 이번 전시도 한국 작가 전시가 아닌 듯한 분위기다. 미국 뉴욕과 경기 안양의 작업실을 오가며 이번 작품을 구상했다. 입구는 색과 기호들이 빠진 순한 작품으로 시작해서 안쪽과 2층 전시장은 마치 기계가 그린 듯 정교하고 치밀한 'SF 세계' 같은 그림으로 연출했다. ◆세계적인 화랑 페로탕, 서울서 한국 작가 개인전 이례적 페로탕의 이번 한국 작가 개인전은 이례적이다. 한국에 진출한 글로벌 화랑들이 자사 작가들의 전시 만으로 한국을 공략하고 있는 가운데 열린 이 전시는 한국 시장을 대하는 외국 화랑의 태도와도 맞물려 주목된다. 백효정 페로탕 서울 총괄 디렉터는 "한국 작가 개인전은 2019년 삼청점에서 박가희 작가 이후 이번이 두 번째"라며 "이번 이상남 개인전은 한국의 단색화 이후 발굴하는 한국 미술의 새로움을 조명하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인 화랑인 만큼 작가 선정과 전시는 엄격하다. 백 디렉터에 따르면 전시를 열기까지 각 지점의 큐레이터들과 브레밍 스토밍을 열고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이번 이상남 전시도 회의를 통해 "독창적이다"라는 지배적인 평가 속 전시가 추진됐다. 작품만 보고는 '젊은 작가인 줄 알았다'는 신선한 호평부터 '그림을 직접 봐야겠다'는 의견까지 나와 세계 미술시장을 휘감고 있는 페로탕에 '이상남' 이름 석자는 각인됐다. 이상남도 이 점에 매료됐다. "세계 각국의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일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놀랐다"는 그는 "한국 화랑들과 달리 페로탕은 SNS 팔로워 수만 해도 60만 명이 넘는다"며, '페로탕이 픽'한 자부심을 보였다. 프랑스계 화랑인 페로탕은 2016년 서울에 진출한 '외국 화랑 1호'다. 파리, 홍콩, 뉴욕, 서울, 도쿄, 상하이, 두바이 등 7개 도시에 분점을 둔 페로탕은 프리즈 아트페어가 상륙하는 서울에 공을 들였다. 강북 삼청동에 이어 2022년 강남 도산공원과 호림박물관 사이에 두 번째 전시 공간을 열었다. 한국에 진출한 외국 화랑이 ‘서울 2호점’을 열어 화제가 됐지만 ‘페로탕 도산파크’를 개관한 후 지난해 삼청점은 폐관했다. 페로탕은 '친한파 갤러리'다. 한국 작가를 적극적으로 후원·홍보하는 글로벌 화랑이다. 박서보·정창섭·이배 작가를 전속 작가로 맺어 해외 무대에 꾸준히 알렸다. 지난해 리움미술관에 바나나를 걸어 화제가 됐던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소속 작가로 페로탕은 타카시 무라카미, 피에르 술라주, 장 미셸 오토니엘, 엘름그린 & 드라그셋 등 세계 유명 작가들을 관리하며 세계 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백효정 총괄디렉터는 "이번 전시로 이상남 작가와 전속 작가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페로탕과 전속 계약을 맺기 위해선 다섯 번의 전시를 더 해야 한다"며 앞으로 홍콩, 파리 등에서 전시를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이상남의 120호 크기 작품 값은 10만 달러 선에 책정됐다. 페로탕의 전속 작가 혜택은 특별한 건 없다. '글로벌 메가 갤러리'에 속했다는 소속감이 큰 에너지다. "전세계 주요 8개 도시에 (2월에 문을 여는 LA지점 포함) 걸쳐 지점을 갖고 있는 갤러리인 만큼, 서구권과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작가들의 작품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게 강력한 무기다. ◆이상남 "내 작품, 낡은 개념 추상화 아닌 추상을 해부한 추상화" “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합리와 비합리, 아날로그와 디지털, 회화와 건축, 미술과 디자인 사이의 샛길을 건든다. 그 사이에서 산다. 회화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저 그림 얼마짜리야?'는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다. 화가는 이제 명예 만으로 살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이상남도 이제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 페로탕과의 전시는 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의지다. 그림 만큼은 자신 있다. "옛날 낡은 개념의 추상이 아니고 또 하나의 추상화로 추상을 끊임없이 연구해나가는 작가이자 새로운 작품"이라는 자부심이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적 추상'에 대해 '추상의 해부학'이라고 했다. "추상이라는 살갗을 들쳐서 해부하고 있다"며 "진정한 의미의 추상을 해석하고 사유하는 작가"라는 입장이다. '추상의 해부'는 역사가 깊다. 1981년 뉴욕으로 건너가기 전 실험 미술 전시회에 참여하며 눈을 떴다. 1972년, 1974년 앙데팡당 전시에 참여하면서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사진 매체를 활용해 '창문' 시리즈를 선보였다. 1970년대는 20대 이상남에게 회화에 대한 실험과 이론적 질문을 끝없이 제기하고 자신의 미학관을 찾아 나갔던 시기였고, 앙데팡당전 등을 통해 트렌드를 이끄는 박서보와 이우환의 반전통적인 예술의 방식과 매체를 고민하던 때였다. 1979년 제15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국제적 행보를 넓혀나갔다. 1981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린 'Korean Drawings Now'라는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그는 뉴욕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런데 뉴욕은 한국에서 열기였던 미니멀리즘과 개념 미술이 사라지고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 신표현주의, 에릭 피슬이나 데이비드 살레 등이 제작한 회화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상남은 다양한 개념과 미술가, 미술 기관 등이 범람하는 뉴욕의 미술계에서 다시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웬만해선 알아주지 않는' 나라에서 그만의 언어와 차별화를 위해 영혼을 갈아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1997년 현대화랑에서 연 귀국 전시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차별화했다. 숫자, 부호, 문자나 암호 등과 같은 기호들이 존재하는 특유의 ‘설치적 회화(installation painting in situ)’를 정립해나갔다. 40년 이상 축적한 이미지는 외계적인 느낌까지 풍긴다. 기계 내부 설비 장치나 건축 설계도처럼 보이지만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고 있는 21세기 우리의 삶 자체를 투영했다. 즉흥적이고 가벼워진 현재 미술 시장에서 추상의 추상을 해부한 모더니즘적이고 개념적인 그의 작품은 어찌 보면 비평가들의 '마지막 만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평론가 정연심 홍익대 교수가 "삶의 궤적과 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압축된 마음의 풍경화(compressed landscape)이다"라고 쓴 진지한 서문이 그렇다. "이상남의 작품은 형식적으로 보면 기하학적 추상 작업이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이미지의 형태도 내용도 서로 고정된 관계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생기는 의미의 균열과 파열이 생겨난다. 이 균열은 때로는 긴장과 위트를 유발하는데, 그의 그림이 뚜렷한 형태들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많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의 속성을 이상남은 신추상의 방식으로 기하학적 풍경화를 만들어낸다"고 평했다. ◆복잡한 이유? "다만 몇 초라도 붙잡기 위해" 그림은 사람이 그린 것 같지 않다. 마치 기계가 뽑아내거나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한 것 같아 봐도 봐도 믿기지 않는다. 색들의 다른 풍경이 전개되고 톱니바퀴 같은 기호들이 맞물려 미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기에 매끈한 작품은 실제로는 노동집약적인 공력이 들었다. 칠하고 덮고 갈아내기를 50~100회 반복하는 수행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됐다. 그는 "마치 공예가처럼 특정한 이미지들을 조합 시켜서 다듬고 갈고 덮고…이러한 작업들을 반복하면서도 예기치 않는 일이 벌이는 쾌감에 더욱 충실 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색깔의 낯섦을 주면서 끌고 가는 것. 오히려 그 길로 가본다. 실수가 다른 걸 보게 만드는 게 허다하다. 모든 것은 기획 돼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래서 작품은 한번에 나오지 않는다. 3개월 6개월 1년이 걸리기도 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싹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엄청난 아이콘과 색깔, 형태 등 수천, 수만 개의 양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겹쳐 놓으면 예상치 않은 결과가 나온다. 99%는 전략적이고 논리적이지만 1%의 세계는 전혀 모른다. 운에 맡긴다. 던져 놓고 부셔 버린다. "쌓아 올리다가 싹 부셔 버리고 주시해보는 것. 뭔가 살아있고 예측하지 못한 것이 나올 때 매력을 느껴 또다시 만들어 나간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이상남은 '유혹의 예술가'로서 여백을 두지 않는다. "빈 공간도 많고 미니멀한 작품을 하는데 생각들이 많아지더라"며 "관람자의 자기 의식이 투영되는 늪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이라고 했다. 그는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며 '이거 같네, 이거 같네'하며 자기들의 얘기를 엮어 나가는 게 재미있다"며 "뭔가 강요하지 않고 참여 시켜서 넌지시 보여주는 작품"이라면서 어렵게 보지 말라고 했다. "이건가?" 하는 생각이 낚시다. "무용수들이 예기치 않게 사건들을 전개해나가는 것처럼 슬쩍 비켜나가고 미끄러져 나가, 보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것. 다만 몇 초라도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것, 그게 나한텐 중요하다." 뉴욕에서 무용과 연극을 유독 많이 봤다는 그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인 요소와 매력적인 요소가 자신의 작품에 많이 반영된 것 같다고 했다. 작품 내용에 대해 말을 아끼는 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상징을 물었더니 "선과 곡선의 싸움은 통합으로 완성된다"는 힌트를 줬다. "직선은 죽음, 곡선은 삶을 상징한다. 그래서 중성적인 색을 많이 쓴다. 원색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요소보다는 감싸주고 중화 시키는 색을 쓰는 이유다." 미국에서 동료 작가들이 '이상남의 기하학을 보면 뭔가 다르다'는 평가를 한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전했다. "마르쉘 뒤샹이 마치 큰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것처럼, 컨템포러리 아트가 답을 알게 되면 볼게 없는데 너의 작품은 또 다른 것들이 아침마다 발견되는 재미가 있다"는 것. 결국 그는 "내 위치는 작품과 관객의 중간에서 지휘하고 매칭하는 역할"이라며 "관객들을 기하학적 이미지로 보여지는 바다에 빠트리고 싶은 재미를 느끼고 싶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만들 수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에 찬 미소를 보였다. 정밀한 그림처럼 그는 녹슬지 않는 손맛을 자랑한다. 매일 매일 밥 먹듯 하는 드로잉 덕분이다. "피아니스트가 손을 풀기위해 매일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화가인 나는 머리하고 손하고 어색해지지 않게 매일 매일 스케치를 한다. 지금까지 그린 것 만해도 1만 장이 된다. 스스로 만들어낸 색도 수백 가지다. 색을 담은 수첩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붓 질을 했는데 붓 질을 안 한 것처럼 보이고, 그렸는데 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마술 같은 이상남 표 그림의 힘'이다. 매끈하고 미끈한 작품. 장인처럼 일하지만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작가로서 경제성은 피해갈 수 없는데 업으로 하니까 무조건 그린다'는 그는 무식하게 일한다고 했다. 작업실에서 7일 간 박혀있는 그에게 미련하다는 동료들의 말에 이제는 쉬는 날은 쉬기로 했다. "머리를 비워야지. 맨날 그림 생각만 하니까 다른 일을 못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그림에 푹 빠진 전업 화가의 면모를 보였다. "살아가면서 재미를 느끼면 빠지지 않나요?. 똑같은 거지. 무엇이든 가치 이전에 재미를 느끼는 거지. 다 그렇게 하지 않나요?" 복잡다난한 그의 그림은 '그 모든 것의 장르'를 품었다.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순간부터 그의 계략에 빠져든다. "완성되는 작업이 아닌 골치가 아프게" 작업하는 그는 여전히 '청춘의 샘'을 가동하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상징과 기호를 생각 장치로 묶어 놓은 그는 "내 작품의 낯섦에서 (관객들이) 몇 초 간 사유 할 수 있다면 바랄게 없다"고 했다. 그의 바람은 성공적이다. 작품은 눈길과 발길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프랑스계 화랑인 만큼 전시 제목은 'Forme d’esprit(마음의 형태)' 프랑스어로 달았다. 보면 볼수록 생각이 확장되고 미끄러지는 '이상남 그림의 신세계'가 열릴 것인가? 이제 페로탕의 은밀하고 우아한 '마음의 형태'를 보여야 할 때가 시작됐다. 전시는 3월16일까지. 2024/01/27
올 한해 경매시장 반토막…쿠사마 누른 고미술·이우환 '외화내빈(外華內貧)'. '프리즈키아프'로 화려했지만 정작 미술시장은 썰렁했다. 경매시장은 그야말로 반토막이 났다. 올해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의 연 매출 규모가 불황기였던 2019년 수준인 약 1535억 원에 그쳤다. 총 낙찰률은 51.2%’로 나타났다. 27일 사단법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이사장 김영석)와 아트프라이스(대표 고윤정)가 발표한 2023년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연말 결산에 따르면 올해 경매시장 낙찰총액은 약 1535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5년 간 비교할 때 최저치의 낙찰총액 규모다. 2022년 약 2360억 원, 2021년 약 3294억 원, 2020년 약 1153억 원, 2019년 약 1565억 원 이었다. 국내 미술품 경매사 8개 경매사(서울옥션, K옥션, 마이아트옥션, 아트데이옥션, 아이옥션, 라이즈아트, 에이옥션, 칸옥션)에서 1월부터 12월 말까지 진행한 온오프라인 경매의 분석결과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이는 각 국내 경매사(해외법인 포함)의 순수미술품 외 모든 항목별 낙찰결과를 합산한 것이다. 서울옥션 제로베이스는 제외됐고, 이브닝 경매는 포함됐다. 또한 에이옥션 온라인(12/27)과 아이옥션 온라인(12/29)은 집계 일정상 제외됐다. ◆총 출품작은 2만7814점·총 낙찰률 51.2%…5년 간 최저 전체 집계 결과 총 출품작은 2만7814점·낙찰작 1만4238점·낙찰률 51.2%’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5년 간 평균 60% 이상이었던 것에 비해 가장 낮은 낙찰률로, 낙찰작품 역시 가장 적은 수치다. (▲2022 총 출품작 3만985점 낙찰 1만8468점 낙찰률 59.6% ▲2021 총 출품작 3만2955점 낙찰 2만2235점 낙찰률 67.47% ▲2020 총 출품작 3만276점 낙찰 1만8349점 낙찰률 60.61% ▲2019 총 출품작 2만5962점 낙찰 1만7279점 낙찰률 66.55%) ◆낙찰총액 1순위는 K옥션…평균 낙찰률은 서울옥션이 높아 K옥션(약 581억 원)이 서울옥션(543억 원)을 근소한 차이로 앞섰다. 연속 2년을 앞섰던 서울옥션이 1위를 내줬지만, 연간 평균 낙찰률에선 56.9%로 K옥션의 40%를 크게 앞질렀다. 이는 약 9800점을 출품해 약 3900여 점 낙찰한 기록으로 전체 평균 낙찰률 51%와도 큰 차이를 보인 결과다. 메이저 경매사의 고전이 미술 경매시장 전반의 침체로 이어지는 현상으로 보인다. 경매사별 상위 5순위 비중도를 살펴보면, ‘K옥션 38% → 서울옥션 35% → 마이아트옥션 19% → 아트데이옥션 3% → 아이옥션 2%’순이다. 상위 2순위 메이저 경매사 합산이 73%를 기록해, 80~90%였던 예년에 비해 비중이 크게 줄었다는 점이 큰 변화다. 이는 전체 최고 낙찰가 70억원 작품이 고미술을 전문으로 유통해온 마이아트옥션에서 판매한 점이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낙찰총액은 이우환, 쿠사마 누르고 1위 탈환…2위는 조선백자·고미술 강세 낙찰 총액은 이우환 화백이 약 134억 6555만원(낙찰률 약 59%)으로 1위를 탈환했다. 지난해 1위는 쿠사마 야요이(약 276억7436만원)었다. 반면, 낙찰가 1위는 단일 작품 최고가 기록은 절대적 강자였던 쿠사마 야요이를 누르고 조선백자인 백자청화오조룡문화 70억원이 차지해 큰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최고 낙찰가 1위는 쿠사마 야요이(약 64억2000만원)로 쿠사마는 2020년부터 1위를 차지했었다. 올해는 특히 최고 낙찰가 1~3위가 조선시대 작품이며, 1위와 3위가 조선백자라는 점이 특별하다. 그동안 약세를 보였던 고미술품이 강세를 보인 점이 눈에 띈다. 조선시대 작품들이 8점을 올려 크게 활약했다. 낙찰 가격 상위 30순위에 조선백자는 6점이 올라 존재감을 과시했다. 다소 앞선 전망일 수도 있겠지만, 향후 전통미술의 선전 여부가 미술시장의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변수로도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낙찰총액 30순위 작가 중 생존작가는 12명 30순위에 생존작가 12명이 올라 눈길을 끈다. 특히 지난 10월에 작고한 박서보 화백까지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비중이다. 1위 이우환을 비롯해 6위를 차지한 이배(본명 이영배),15위 이건용, 17위 하종현, 21위 최영욱, 22위 정상화, 23위 이강소, 24위 우국원, 26위 정영주, 27일 김종학, 28위 전광연, 30위 이왈종이 올라있다. 단색화 위주의 작가들 비율이 낮아지고, 다양한 성향의 작가와 작품이 고르게 편성된 점도 주목된다. 그만큼 단색화 열풍에 의존했던 시장이 이젠 다양화된 수요자의 기호가 반영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불황을 모르는 것처럼 최근 2년간 호황기를 누렸던 미술시장이 급랭하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매수심리가 얼어붙으면서 내년도 관망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진단이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김영석 감정위원장은 “올해 미술시장은 사회 전반의 총체적인 경기둔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결과로 내년까지 미술시장 경기 회복은 더딜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지속되는 불황의 그늘을 해소할 방안이 무엇인지 총체적인 점검과 미술계의 협력이 시급한 시점”이라고 전했다. 2023/12/27
한진섭 "바티칸 550년 간 빈자리에 딱 맞아…죽어도 여한 없다" 550년 간 빈자리였다.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우측 외벽에 기적이 벌어졌다. 지난 9월16일 4.5m 높이의 아치형 벽감(벽면을 안으로 파서 만든 공간)을 가린 흰 천이 벗겨지자 고개를 들고 바라보던 사람들이 모두 한 목소리를 냈다. 'emozione'(감동). 갓 쓴 한복 입은 김대건 신부 성상.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하얀 대리석으로 나타난 신부는 이전부터 있었던 듯 그 자리에 딱 들어맞았다. 가톨릭 성인 중 동양 성인의 성상이 설치된 것은 가톨릭 교회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바티칸 곳곳에 설치된 1000 여 개의 성인들 조각상은 전부 서양 사람 조각이어서 더욱 독보적이다. "조각상이 설치된 곳은 프란치스코, 베네딕토, 도미니코 등 수도회 설립자 성인들의 성상이 모셔진 곳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가장 좋은 명당자리가 베드로 성당이 지어진 지 500년이 지나도록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했어요. 마치 우리의 김대건 신부를 위해 이 자리를 비워 놓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한 조각가'로 유명한 한진섭(67)은 김대건 성상 축복식이 거행되는 그 날 눈이 벌게지도록 울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너무 너무 감격스럽고 말로는 표현 안되는 벅참에 눈물만 쏟았어요." 그는 특히 "한국 신자들만 알고 있는 김대건 신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어서 정말 정말 행복했다"며 여전한 감동의 여운을 전했다. 한복 입은 김대건 성상은 2000년 가톨릭 교회의 전통도 바꿨다. 축복식 주례를 담당한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 총책임자이자 예술성 장관인 마우로 감베티(Mauro Gambetti) 추기경은 "지금까지는 베네딕토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등 수도회 설립자 성인상들이 이곳에 세워졌는데 김대건 신부를 시작으로 각 민족과 나라를 대표하는 성상을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실 것”이라고 공표했다. 로마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 덕분이다. 김대건 신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그는 2021년 바티칸에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바티칸에 김대건 성상을 세우고 싶었던 소망을 추진했다. 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성상 봉헌 의사를 밝혔는데 한국 최초 신부이자 순교자였던 김대건 신부를 알고 있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꺼이 허락하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기적…이태리 작가에서 한국 작가로 교체 '누가 만드느냐'가 문제였다. 교황청의 결정이 떨어지면서 가장 바빠진 사람은 바티칸 미술 담당 수석 사제였다. 아시아 최초 성인이 550년 간 비어있던 자리에 놓여지게 되면서 성상 제작 추진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 그는 제일 먼저 이태리 작가를 선별하면서 "바티칸 벽감 조각 전체의 통일성을 위해 이탈리아 조각가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동을 건 건 유흥식 추기경이었다. "한국의 성인은 한국 작가가 만들어야 정신과 혼이 담겨야 한다"며 바티칸을 설득했다. "한국 조각가가 과연 이 엄청난 조각상을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유 추기경은 강경했다. "한국 성인의 조각은 한국 조각가가 제작해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결국 2022년 10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김대건 신부님 조각상 비용을 국내 천주교 모든 교구가 함께 지원하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바티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조각상 제작이 공식화 되었고 한국 작가 찾기가 시작됐다. ◆"바티칸 내세운 3가지 조건 신기할 정도로 맞아" “어쩌면 제게 일어났던 일들이 결국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기 위한 훈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최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지난 2년 간 김대건 성상을 제작하고 설치하기까지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몇번을 울컥했다. 갱년기 나이 탓도 있지만, 김대건 신부 이야기를 하면 소년처럼 해맑은 표정이 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25세였어요. 순교 하신 나이가…김대건 신부에 대해 공부해보니 담대하고 신앙심이 엄청 깊은 분인데, 뚝심도 있고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면서 포용력도 있고요. 그 담대함과 용기, 그러면서 겸손하고 인자한 그 부드러운 느낌을 표현하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그는 김대건 신부 성상 제작을 맡은 건 신기한 일이자 기적의 연속이라고 했다. 하지만 바티칸이 내세운 조건은 그를 부르는 듯 했다. 1. 천주교 신자여야 하고, 2. 이태리 대리석 산지인 까라라에서 작업을 해봤고, 3. 구상적인 돌 작업을 해야 했다. 한진섭은 3가지 조건이 모두 맞아 떨어져 추천이 됐다. 2021년 12월, 바티칸 교황청에서 "성상 제작을 위해 필요한 자료를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모든 일이 신기했어요. 저는 사실 48년 간 돌 작업을 해온 조각가지만 사실적인 조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2년 전부터 우연히 한 성당의 의뢰로 한덕운 토마스 복자상을 조각했고, 대전교구청이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김대건 신부 조각상을 제가 제작했었거든요." 그렇게 바티칸에 낼 서류도 갖춰졌고 대전교구청 성상 제작에 쓰였던 모형을 약간 변형하여 3개의 안을 바티칸에 제출했다. ◆십자가 든 모습에서 두 팔 벌린 자세로 결정…현장서 신기 "깜짝 놀랐어요. 가로 세로 비율이 딱 맞는 거에요." 2022년 7월, 바티칸에서 1,2차 심사를 통과해 최종 성상 제작 작가로 결정됐다. 두 팔을 벌리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형태의 모형, 가슴에 손을 모으고 있는 형태의 모형, 왼손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 동적인 형태, 오른손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 것으로 자세를 교정한 모형 중 최종적으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채택됐다. 처음에는 오른손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 자세가 선정됐는데, 설치 장소가 외부인점을 고려했을 때 눈과 비, 바람, 햇빛에 노출돼 시간이 지나면서 색감 등 변형의 우려가 있어 탈락됐다. "처음엔 어떻게 생긴 공간인지도 몰랐어요. 모형을 가지고 성상이 설치될 현장에 가보니 제가 제출했던 자료가 비례가 벽감에 딱 맞는 거에요.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죠." ◆대리석 원석…가장 어려운 '돌 찾는 일' 술술 풀려 바티칸에서 착수한 첫 번째 업무는 대리석 원석을 찾는 일이었다. 작품의 높이가 무려 3m70cm, 폭이 1m80cm여서 대리석 블록은 그보다 더 커야 했고 길이가 최소 4m 폭이 2m가 넘는 거대한 원석을 찾아야 했다. "거대한 조각상을 만들 돌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별 하나를 찾아내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학교 운동장의 몇 배나 되는 넓은 평지에 수천 개의 원석들이 촘촘히 쌓여 있는데 그 중 하나를 골라야 했어요" 1985년 카라라 국립미술아카데미 조소과를 졸업하고 10여 년간 카라라에서 작업했던 그의 인맥이 힘이 됐다. 당시 동창들 몇몇은 카라라 교수가 됐고 같이 유학했던 친구들은 지역 유명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 동창이 성상을 만든다"며 발 벗고 돌 찾기를 나섰고, 그렇게 5개월 만에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에서 대리석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 속보다 더 알 수 없는 게 돌 속입니다.” 무늬나 크랙(금)이 없어야 한다. 조각이 갈라지거나 떨어져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이미 작업 중이라도 중단하고 새 돌을 찾아야 한다. 가슴을 졸이며 찾아낸 돌은 색상이 아름답고 무늬가 없고 크기도 대리석으로 땅과 닿아 있는 아래쪽을 확인하기 위해 대형 기중기로 들어 올리니 아래쪽에도 금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OK STAGETTI' “제가 김대건 신부님 성상으로 만든 돌은 미켈란젤로가 작업한 스타투아리오(Statuario) 대리석보다 더 단단하고 색상도 더 하얗고 좋습니다." ◆부담감 바짝 긴장 속 작업…4m 높이 사다리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해 지난 5월부터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두루마기 입은 모습을 돌로 표현하는 데 이탈리아 조각가들은 한복의 구조와 모양새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모형을 보고 비슷하게 만들지만 정확한 표현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진섭은 김대건 조각상의 아래쪽부터 가슴 부분까지 한 땀 한 땀 조각을 해 나갔다. 이전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정교한 사실 조각이었다. 실제로 김대건 성상은 신발, 한복 바지, 대님에서 영대와 두루마기를 맨 끈에 이르기까지 얇은 천이 바람에 살짝 휘날리는 듯한 섬세함에서는 사실 조각의 극치를 보여준다. 손등에는 피부 속 보이지 않는 뼈대와 혈관까지 표현했고, 손가락 마디의 주름과 손톱도 이보다 더 정교할 수 없을 정도다. 전체와 부분 모두 대리석 조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뼈대와 살갗처럼 느껴진다 "동양 최초, 아시아 최초로 성인을 만드니까 어깨가 너무 무거웠어요. 한진섭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전체가 문제가 되면 안되잖아요. 베드로 대성전이 망가지면 안되고. 설치 때까지 매일 매일 기도를 드리고 작업을 했어요. 한국에서도 기도와 응원을 보내 힘이 됐고요. 그러면서 저는 느꼈어요. 김대건 신부가 저와 함께 하고 있음을. 분명 제 옆에 계셔주셨어요." 작업을 하다가 그는 4m 가까운 높이의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단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고, 그는 이 또한 기적이라고 했다. "김대건 신부님이 떨어질 때도 받쳐주었다"고 믿고 있다. ◆설치…"김대건 신부가 여긴 내 자리야 뒷걸음질로 들어간 느낌" "완성되기까지 바티칸 미술 담당 수석 사제가 가장 걱정이 많았는데 결과적으로 박수를 많이 쳐주셨어요." 9월5일 작품을 설치할 벽감 아래에는 집 한 채도 들어설 수 있을 것 같은 철봉으로 만들어진 기초공사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대형 크레인으로 김대건 조각상을 들어 올려서 설치를 위해 미리 준비한 벽감 앞에 내려놔야 했다. 이 때 조각은 정확하게 벽감의 중앙에 놓여야 하고 바닥과 180도 수평이 유지되어야 파손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첫 번에 공중에 들려진 조각이 벽감의 중앙에 정확하게, 그리고 살포시 내려왔다. 장인들은 기계를 쓰지 않고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조각을 조금씩 안쪽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그 날 일꾼들도 바티칸 직원들로 전원 교체되었다. 벽감 안에 넣는 작업 방식은 2000년 전 로마시대부터 사용했던 비누칠 방식이라고 했다. 신기한 일이 또 벌어졌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 벽감 안에 쏘옥 들어갔어요. 너무 밀어 넣으면 빼지도 못하는데 한 번에 수평도 딱 맞았고, 마치 김대건 신부님이 '여긴 내 자리야' 하며 뒷걸음질해서 들어간 느낌이었어요." 그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딱 맞았다"면서 "정말 신기하고 기적 같은 일"이라면서 또 뭉클해 했다. ◆생생한 25세 청년 신부 부활…가장 어려웠던 건 얼굴 조각 머리에 쓴 갓부터 얼굴을 거쳐 갓끈과 두루마기와 저고리의 동정, 두루마기를 묶은 끈, 옷고름, 턱 밑에 단단히 묶은 갓끈, 양팔을 벌린 한복의 자연스러운 주름, 매끈한 영대. 마치 대리석에서 꺼낸 것 처럼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살아났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정점은 얼굴이다. 그는 25세에 순교한 '청년 김대건 신부'를 표현하고자 했는데 얼굴 조각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얼굴에는 이목구비와 외모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 성인의 혼을 담아야 했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용감하며, 담대한 모습에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성품과 영혼까지 불어넣어야 하는데, 정말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서양미술사학자인 고종희 한양여자대학 명예교수는 "잘생긴 코, 살짝 다문 입에서 성인의 기백이 느껴졌다.마지막 화룡점정은 눈동자"라면서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은 김대건 신부의 용감함과 담대함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눈을 통해 완성되었다"며 "한진섭은 김대건 신부의 겉모습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까지 보여준 것"이라고 극찬했다. 성상의 백미는 또 있다. 뒷모습도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됐다. 이태리 조각가들은 뒤는 안보이니 대리석 그대로 둬도 된다고 했지만 한진섭은 뒷모습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곱게 떨어지는 도포자락에 묶은 끈의 주름까지 그대로 실제처럼 보인다. 좌대는 대한민국의 높아진 위상을 전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라는 명문이 훈민정음체를 응용한 서체(디자이너 김진선)인 한글로 새겨졌다. 원래 영문 서체도 김진선씨의 서체가 쓰여질 예정이었지만 바티칸이 원한 'Times New Roman'서체로 바뀌었다. 이 몇 줄의 명문이 결정되기까지도 한 달이 걸렸다고 한다. 왼쪽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문장이 찍혀있다. "요즘 페이스북에 보니 사람들이 바티칸에서 보고 찍은 김대건 성상 사진이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대한민국 자부심이 느껴진다는 글과 함께요. 작가로서 저도 자부심도 느끼고 역사적인 일입니다. 제가 1981년에 유학 갔을 때는 못사는 나라라고 업신여겼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우리나라 국력은 강국입니다." 한국 작가 최초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신부 조각상을 세우고 돌아온 그를 위해 가나아트센터가 10년 만에 한진섭 개인전을 열었다. 많은 사람들과 이 감동을 다시 나누고 인간애와 사랑이 넘치는 한진섭의 예술세계를 조명한다. 바티칸에 설치된 것과 동일한 형태의 60cm 크기 김대건 신부상을 비롯해 바티칸에 제출했던 네 가지 구상 모형과 소품 위주의 성상(聖像) 조각등 약 30여점을 내년 1월14일까지 선보인다. 한진섭은 "작고 두 번 하니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60cm 크기 성상 작업이 더 어려웠다"며 "이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바티칸의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내 힘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고 했다. "지금도 정말 그 거대한 성상을 어떻게 만들었지 싶다"는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 채 연신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한진섭은 김대건 신부를 만들려고 태어났다' 이렇게 밖에 생각이 안 들어요. 조각가로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2023/12/16
붓질의 격렬한 애무 '재현의 욕망'…이광호 'BLOW-UP' "화가로서 나의 눈은 아주 미세한 수풀 한 줄기까지,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재현의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국제갤러리에서 9년 만에 개인전을 연 이광호(55·이화여대 교수)의 그림은 여전히 관능적이다. 원초적인 손맛이 강렬한 추상과 환영의 세계로 초대한다. 한국 대표 '극사실주의 화가'의 변신일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작품도 가장 극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더욱 더 보고자 하는 '눈의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죠." 화가는 보통 사진을 찍어 보고 그림을 그린다. 이번엔 습지 사진을 계속 확대했다. 벌려질수록 수풀 한 줄기의 이미지는 사라졌다. "대상이 제거된 추상적 형상을 발견하는 것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리는 과정에서는 언어와 생각이 배제된 상태가 되고 오로지 손끝의 감각에 몰입해서 붓질을 하게 됩니다." 손이 눈이 된 셈이다. 그동안 칭찬 같은 '사진 같다'는 말은 화가로서 서운했다. "이젠 추상의 세계로 갔냐고요?" 그가 입을 앙 다물고 웃었다. "저는 추상적으로 그리는 게 아닙니다. 사진을 극단적으로 확대하면 깨짐, '노이즈'가 생기는데, 그 '노이즈'까지 그린 것입니다. 분명한 극사실화죠. 그런데 추상화처럼 보인다면 이번엔 '사진 같다'는 말을 들을 것 같진 않네요." ◆인물→선인장→풍경화…"어떻게 칠하느냐 문제" "이제는 그림을 그리고 있구나. 한 단계 발전했다는 생각입니다." 예고 미대를 나온 그가 '진짜 화가'가 된 건 16년 전이다. 이광호의 첫 전시는 2007년 국제갤러리에서 3인 회화 그룹전으로 시작됐다. 흔한 초상화 같은 '인터뷰(Inter-View)' 연작을 선보였는데, 이때까지는 몰라봤다. 2010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선인장' 연작에서 폭발했다. 화폭을 지배한 빨강 초록의 거대한 선인장은 촉수 달린 외계 생물체처럼 넘실거리며 모든 감각을 압도했다. 신경을 건드리는 고양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섹시한 그림'은 '이광호' 이름 석 자를 미술시장에 올려 세웠다. 이후 2014년 풍경화에 도전했다. 제주 곶자왈에서 발견한 덤불숲을 보면서다. 서로 곡선으로 한 덩어리로 뒤엉킨 그림은 생명력이 강렬했다. 에로틱함이 장착된 그림, 풍경화지만 풍경화가 아니다. 멀리서 보면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형상이 없다. 이번 신작도 그렇다. "결국은 ‘어떻게 칠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머리가 아닌 ‘눈’과 ‘손’의 영역입니다." 그는 "회화에서 '매너(Manner)'라는 말이 있다"며 붓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테크닉과 구별되는 것으로 전수 받을 수도 없고,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 화가만이 지닌 고유함이고 그에 따른 흔적의 어떤 느낌입니다." ◆이광호 'BLOW-UP'…'눈의 욕망' "그 풍경은 바로 제가 회화로 표현하고자 하는 신비롭고도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캐플러트랙(Kepler Track)의 등산로를 1시간 정도 올라가다 나타난 '습지'에 마음을 빼앗겼다. 2017년도에 우연히 발견한 후 여러 번 방문해서 촬영했다. 인적이 없어 숨소리와 새 소리만 들렸다. ‘고요한 시선’으로 습지를 관찰했다. 다양한 색의 이끼와 무수한 수풀, 하늘과 구름이 비치는 수면, 구름이 움직이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은 붓질의 욕망을 자극했다. "회화의 기본기부터 다시 돌아보고자 했습니다." 캔버스의 천과 바탕칠(ground)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 동대문에서 생천을 구입해서 캔버스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올의 굵기가 다른 천에 바탕칠을 달리 적용해보기도 했다. 채색 이전의 준비 과정에 따라 물감의 흡수 정도가 달라지고 붓질할 때의 촉각적 감각이 달라지고 호흡의 느낌이 달라졌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재현의 기술을 넘어선 매너의 문제입니다." "저 만의 붓질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그는 "이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이번 전시의 방법론적 주제는 '붓질 연구(A Study for Applying Paint)'"라고 했다. ◆붓은 애무의 도구…'붓질 연구' "저는 다양한 붓의 특성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나에게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어루만지는’ 행위이고 붓은 그 ‘애무의 도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붓의 존재감을 새롭게 확인할 때 화가로서 큰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것도 묘사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나빠졌고 지금은 ‘선인장 시리즈’처럼 분명한 외곽선을 지닌 대상을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풍경으로 대상이 변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면, 윤곽의 구분이 약화 되면서 대상의 재현적인 측면 보다 내 감정의 흔적들이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시력의 한계에 반응하면서 적절한 붓질을 궁리하게 된 거죠." 이번 작품은 전통적인 회화 기법도 녹였다. 윤곽의 표현을 실험한 'encaustic' 기법이다. 밀랍(wax)에 안료를 섞은 고체물감을 불에 달구어 화면에 고착 시켰다. 화면 위의 물감이 녹으면서 윤곽이 섞이는 우연적 효과가 흥미로운 작업이다. ◆60개로 만든 '하나의 그림'…공간 경험 이번 전시 제목은 'blow-up'. 1966년 개봉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제목을 인용했다. 시선의 욕망과 시각적 진실에 의문을 던지는 영화의 메시지와, 습지 사진을 확대한 이번 신작과 용어의 개념이 맞닿아 있다. 국제갤러리 안쪽 전시장에는 1년 여간 작업한 이광호의 대규모 풍경 회화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하나의 그림(one picture)'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전시는 가로 세로 90·81㎝ 크기 직사각형의 60개의 작품을 3cm 간격으로 연결해서 설치했다. 각각의 캔버스가 전체 풍경 이미지의 일부이자 또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작품이다. 사진으로 구획한 이미지를 다시 일정 간격을 지닌 60개의 캔버스 프레임으로 모듈화 했다. "독립된 프레임이 갖는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 1개의 작품을 떼어봤는데요. 이렇게 되면 상상의 영역에서 프레임 밖의 풍경, 더 나아가 전시 공간 밖으로 공간이 무한히 확장될 수도 있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공간의 느낌을 경험 하는 게 이전 전시와는 다른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습지 사진을 따로 또 같이 그려낸 'BLOW-UP'은 '응시의 잔혹한 변증법'이다. 체험된 시점과 사진적 시점은 시각적인 것의 광란이다. 붓질이 극렬하게 어루만진 쾌감이 화폭에서 진동한다. '눈의 욕망'이 빚은 완벽한 환영이다. 아물아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보이는 것들을 산란 시키는 '이광호 그림'은 욕망과 통제를 벗어난 관음증의 표출이다. 구상성과 추상성의 합체로 덧없는 찰나의 순간을 밀착해 버린 영원성, 공간적 초월성이 압도한다. 19세기 '회화는 죽었다'고 반란한 사진에 대한 복수처럼 보인다. 늘 품고 다니는 그의 아바타 ‘꿩’을 승리의 깃발처럼 그림속에 심어놨다. 전시는 2024년 1월28일까지. 2023/12/15
갑자기 숨죽인 미술시장…조정기냐 침체기냐 국내는 물론 세계 미술시장이 조정기에서 침체기 양상으로 들어서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호황기를 누린 미술시장이 올 들어 매수 관망세가 짙어지고 있다. 경매시장도 활기를 잃었다. 낙찰률이 예년과 달리 반토막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경기불황 속에도 성장세를 유지했던 미술시장이 갑자기 숨죽이고 있는 모양새다. 시장 전문가들은 고물가·고금리 속 투자와 매수 심리가 위축, 작품 거래량이 감소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11월 발표한 Art Basel과 UBS 보고서에 따르면 수집가들은 미술품 구매에 점점 더 신중을 기하고 있다. 2800명의 고액자산가(HNW)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이 보고서에서 2023년 개인 수집가들은 다른 금융 자산에 비해 미술품에 소요되는 자금 비중을 2022년 24%에서 2023년 19%로 낮췄다. 미술품 판매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도 드러났다.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판매할 의향을 밝힌 수집가는 전체 비중의 26%로 2022년 보고된 39%에 비해 감소한 수치를 나타냈다. ◆숨죽인 미술시장…3분기 경매시장 낙찰률 급감 한국미술품 감정연구센터가 발표한 '2023년 3분기(7~9월) 미술시장분석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외 낙찰률 하락세가 완연하다. 올해 3분기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서울옥션·케이옥션·마이아트옥션)의 낙찰 총액은 259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3.5% 떨어졌다. 판매 작품 수(414점)와 낙찰률(65.51%)은 각각 14.67%, 10.23% 낮다. 10억 이상에 낙찰된 작품은 총 5점으로, 이 가운데 3점은 고미술이며, 이우환과 야요이 쿠사마 작품이 각각 1점이었다. 해외 미술품 경매 시장도 마찬가지. 지난 10월 5~6일 진행된 소더비와 필립스의 홍콩 경매 판매 총액은 10억6000만 홍콩 달러(약 1779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5.45% 감소했다. 올 봄 경매와 비교하면 28.11% 급감한 수치다. 유명 대가의 작품은 팔리지만 가격이 높게 치고 나가지 못하고 있다. 10월5일 열린 소더비홍콩 경매에서 3490만 홍콩 달러(약 471억원, 수수료 포함)에 낙찰된 모딜리아니의 ‘폴레트 주르댕’이 보여준다. 이 작품은 2015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4281만 달러(약487억원, 수수료 포함)에 낙찰, 당일 경매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아시아의 구매력 상승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소더비는 이 작품의 낙찰가를 4500만 달러(약 609억원)로 추정했지만 2015년 보다 낮은 가격에 낙찰되면서 실질적으로 손해를 보고 판매를 한 결과를 보였다. 또한 같은 날 경매에 출품 된 40점 중 10점이 유찰 되기도 했다. 한국미술품 감정연구센터 정준모 대표는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경합을 이루며 거래되었던 작품들이 하한가 선에서 겨우 낙찰되거나 유찰이 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며 "이런 양상이 지속되면 침체기는 가속화된다. 결국 가격을 조정해서라도 팔겠다는 판매자가 나서고 이후부터는 가격 하락의 급물살을 탈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에 따르면 조정기는 공급 부족 현상에서부터 시작된다. 호황기 최고점을 찍었던 작품들은 그 가격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리다. 미술시장 애널리스트 이호숙 대표는 "시장 상황에 맞게 움직이고자 하는 구매 수요는 하락하기를 기다리게 되는데, 일정 기간 동안은 조금의 양보도 없이 이들의 욕구가 대립하게 되며 보합세를 유지하게 된다. 이같은 분위기는 경매를 해야하는 경매사들이 협상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돤다"면서 "때문에 높은 가격에 출품 된 작품들이 맥 없이 유찰되고, 낙찰율이 하락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최적의 매각 타이밍을 놓쳤던 기존 수요 모두 관망세로 돌아서 거래 급랭으로 시장이 침체기로 접어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아트페어도 열기 식어…런던보다 파리서 판매 급증 오픈런까지 보였던 '프리즈+키아프' 국내 아트페어 시장도 지난해와 달리 열기가 식은 모습을 보였다. 관람객은 많았지만 매출에 영향을 주는 고객이 아니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국내 미술시장이 매출 1조원 대를 첫 돌파했다는 보도와 달리 올해는 거래 금액이 발표되지 않았다. 다만 미술문화 향유층은 급증했다. 프리즈와 키아프 측에 따르면 키아프 관객 수는 전년대비 15% 상승, 8만여 명이 방문했고, 프리즈 또한 방문객의 수가 7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앞서 개최된 싱가포르의 아트SG(4만3000여 명)와 일본 겐다이 도쿄(2만여 명)보다 많은 숫자고 아시아 최고의 미술 행사인 아트바젤 홍콩(8만6000여 명)과 비슷하다. 미술시장은 경기와 정부 정책과 연동된다. 구매력의 관건은 세금 정책과 운송, 보관, 교통 등의 인프라의 경쟁력이다. 지난 10월 열린 '프리즈 런던'과 '아트바젤 파리'가 증명한다. 런던보다 파리에서 매출이 뛰었는데, 이는 정부의 지원과 브렉시트로 인해 변동된 세금 정책 등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브렉시트 전에는 유럽 미술 수집가들이 관세 없이 런던에서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이후 영국에서 EU 회원국으로 미술품을 보내려면 작품 가격의 5~20%가 관세로 붙고 각종 서류 작업 등 복잡한 행정 절차 또한 거쳐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예술품 구입 시 다른 EU 회원국보다 낮은 수준인 5.5%의 세금을 낸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갤러리들도 이러한 조건들을 따져서 보다 좋은 작품들을 파리에 선보였고 매출 성장을 견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조각투자 논란 속 시장 위축…가격 산정 근거가 문제 미술시장 관망세 속에서 '조각 투자' 시장 또한 리스크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적극 투자는 주춤세다. 2018년부터 자본시장의 규제를 받지 않는 조각투자가 등장했지만 증권여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2021년 11월, 증권선물위원회는 조각투자를 투자계약증권으로 판단했다. 이에 조각투자사들은 사업을 중단했고 2022년 4월, 조각투자 등 신종 증권 사업 관련 가이드 라인에 준하여 투자자 보호 조치안을 마련하여 제출하도록 해 지난 7월 제재가 면제됐다. 면제를 받은 조각투자사는 투게더 아트, 열매컴퍼니, 서울옥션블루, 테사 4개사와, 추가 면제된 바이셀 스탠다드와 알티너스, 총 6개사다. 하지만 '가격의 적정성 문제'가 발생하면서 1호로 투자이행증권을 발행한 투게더아트가 20일만에 자진 철회 했다. 투게더 아트는 공모 자금 7억9000만원을 조달해 미국 작가 스탠리 휘트니의 작품 'Stay Song 61'을 7억2000만원에 취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최대주주인 케이옥션에서 취득 가격을 높게 산정할 수 있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문제가 됐다. 이같은 자진철회는 소싱, 발행, 감정, 보관, 관리, 처분을 발행사 및 연관 회사에서 담당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는 사례였다. 정준모 대표는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검증의 자격을 부여받은 감정평가사가 조각투자발행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평가한 가격을 그대로 받아서 인증해주는 구조적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편 미술시장의 흐름(2000년부터 2023년)을 뒤돌아보면, 2006-8년/2020-2022년의 뚜렷한 호황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양상이 거의 유사한 패턴으로 형성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꼭지점에 이르러서는 일정 기간 보합세를 이루다가 급격히 하락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이후 완만한 상승선을 따라 가다가 일정 시점에서 또 다시 정점을 찍는 호황기 시장에 이르게 되며 이후에는 또 같은 양상이 반복된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술시장 분석보고서를 분기별로 제출하는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는 "현재 시장은 놀랄 만큼의 위기도 아니다. 기간으로만 본다면 오히려 다시 일상적인 시장으로 되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고 짚었다. MZ 컬렉터들의 등장으로 미술시장이 과열된 건 사실이다. 플렉스(Flex·자기과시)의 최고 수단이지만 '아트테크'는 보는 만큼이 아닌 아는 만큼 돈 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悅乎)아라, 미술품은 장기 투자다. 파는 것도 사는 것만큼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림은 귀로 듣고 사면 안된다. 조정기이든 침체기이든 차분해진 시기, '그림 공부'하기 딱 좋은 시기다. 2023/11/11
대림미술관, 리움미술관 아성 도전…"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잠자던 대림미술관이 도발하듯 깨어났다. 피 한방을 넣은 '사탄 운동화'와 소금 한 알만한 초소형 명품 가방, 빨간 '아톰 부츠'로 '셀럽시장'에 기발함을 선사한 '미스치프(MSCHF)'를 서울에 모셔(?)왔다. 10일 개막하는 대림미술관의 'MSCHF: NOTHING IS SACRED'는 악동 그룹 '미스치프'를 전 세계 최초로 미술관으로 이끌어낸 전시다. 미스치프가 생산해 낸 인터랙티브 게임, 오브제, 회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분야의 100여 점이 총망라됐다. 상업씬에서 성공을 누린 미스치프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 세워 올해 초 '마우리치오 카텔란'으로 화려하게 재개한 리움미술관에 도전장을 내민 분위기다. 물론 리움미술관보다는 대림미술관이 선배다. 1996년 대림건설이 대림문화재단을 설립해 2002년 대림미술관을 개관했고, 2004년 삼성문화재단이 리움미술관을 열었다. 메세나 기업의 앞선 행보였지만, 규모와 전시 기획력 면에서 리움미술관에 뒤쳐졌다. 반면 대림미술관은 고상한 미술관의 틀을 깨고 리움미술관 보다 먼저 대중과의 접점을 넓혔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이라는 비전(Vision)으로 동시대 핫한 작가와 패션·디자인 전시를 잇따라 개최 흥행해, '젊은 미술관', '줄 서는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사립미술관의 전시 경쟁은 문화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즐거운 동행'이다. 상반기 리움미술관 카텔란 전시가 'MZ들의 놀이터'였다면, 하반기 대림미술관 '미스치프' 전시는 잘파세대(Z+Alpha)의 필람코스로 인증될 듯하다. ◆권위 도발 대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약과 '미스치프는 ‘장난짓(mischief)’이라는 이름처럼 유쾌하지만, 시비를 거는 도발적인 작품들로 반전 재미를 선사한다. 권위에 도발하고 조롱하는 현대미술 대가 마우리치오 카텔란도 '미스치프'에 비하면 '꼰대' 분위기다. 카텔란이 작품을 직접 만들어 예술과 권위를 비꼬았다면, 이들은 일상의 상품과 제품을 비틀어 쥐락펴락한다. 감히 건들 수 없었던 상식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를 접목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사회적 현상의 일부분을 꼬집어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살 수 있다." 미스치프는 명품브랜드, 식품, 의약품, 도서 등 장르를 넘나들며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인 작품들을 통해 상업성과 희소성의 이중적 특성을 간파한다. 래퍼 릴 웨인(Lil Wayne), 프로듀서 디플로(Diplo) 등 유명 셀럽들이 앞다투어 인증샷을 올려 화제가 된 빅 레드 부츠(BIG RED BOOT)로 대중들에게 특히 알려졌지만, 나이키 에어맥스 97을 커스텀하여 제작한 예수 신발(JESUS SHOES)과 '사탄 신발(SATAN SHOES)'을 나이키와 협의 없이 출시해 법정 분쟁에 휘말리면서 화제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도발적인 ‘시비’…돈 버는 재주도 탁월 미스치프는 세상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경계를 무너뜨린다. 욕망, 투기, 보상, 강박적 집요함 등으로 사회적 문제를 꿰뚫는다. ‘우리에게 논란은 오히려 각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단단하게 만들고 더 많은 관심을 받게 하는 수단일 뿐’이라며 전진하고 있다. ‘예수 신발(Jesus Shoes)’은 예수님과 컬래버레이션을 한다며 나이키 에어맥스 97 에어솔 부분에 성수를 넣고 판매,2019년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신발로 등극했다. 이에 더해 래퍼 릴 나스 엑스(Lil Nas X)와 협업하여 만든 나이키 운동화 에어솔에 진짜 사람 피 한 방울을 넣어 만든 신발 ‘사탄 신발(Satan Shoes)’ 666켤레를 선보이기도 했다. 돈 버는 재주도 탁월하다. 미스치프는 극도로 낮은 해상도로 '블러' 처리된 돈뭉치 모양의 피규어를 20달러, 한화 약 3만 원에 판매했고 이는 단 몇 분 안에 매진되었다. 다양한 국가의 에디션으로 선보인 ‘블러(Blur)시리즈’는 충동구매의 극단적인 끝을 실험한 작품이라고 밝혔다.(한국의 화폐 5만 원권 단위의 에디션을 출시하기도 했다.) 또한 소금 한 톨보다 작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루이비통 가방을 경매로 선보여 원래 가격의 4배가 넘는 6만3000달러, 한화 약 8400만 원에 판매되어 화제를 일으켰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버킨백의 가죽을 해체하고 가공하여 만든 대중적인 아이템 버켄스탁 샌들 ‘버킨스탁(Birkinstock)’을 선보여 최고가 9000만 원대로 판매한 바 있으며, 현실의 제약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밝힌 만화 아톰 부츠 ‘빅 레드 부츠(Big Red Boot)’ 등을 선보여 유명 스타들의 소장욕구를 자극했다. ◆미스치프 장난 짓…예술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예술은 건들 수 없는 것일까?" 이 생각에 신발 업체 뿐만 아니라 팝아티스트 전설 앤디 워홀과 데미언 허스트도 당했다. '어쩌면 앤디 워홀의 ‘요정’ 진품 (Possibly Real Copy Of ‘Fairies’ by Andy Warhol)'이라는 제목으로 미스치프가 구입한 앤디워홀 진품 1점과 가품 999점을 섞어서 누구도 진짜를 알 수 없는 구조로 모두 판매한 바 있다. 또 세계적인 아티스트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스팟 페인팅 시리즈 중 하나인 L-Isoleucine T-Butyl Ester(2018)을 구매한 뒤 작품의 88개의 점을 각각 오려내어 총 88점의 작품과 그 틀을 되팔며 7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또 방탄소년단(BTS)의 입대를 소재로 게임 프로그램인 ‘BTS IN BATTLE’을 출시하기도 했다.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발표해 매진되고 다신 재판매(리셀) 열풍을 일으키는 미스치프의 화제와 논란의 상품들은 현대인의 물질적 소유와 소비 심리를 찌르며 예술로 올라서고 있다. '벽에 붙인 바나나' 등 그동안 미술계에서 도발의 권위자였던 카텔란과 한 식구가 되어 '짓궂은 장난'은 현대 미술사를 새롭게 쓸 것으로 보인다. 카텔란이 전속으로 있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갤러리인 페로탕(Perrotin)갤러리가 미스치프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지난해 11월 페로탕 뉴욕에서 개인전도 연 바 있다. ◆"건드지 못할 성역 없다 집착같은 열정" "힘 있는 사람 자꾸 건드려야 세상이 변한다"는게 이들의 야심찬 전략이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8일 한국 기자들을 만난 미스치프 멤버 3명은 "팀원들이 탐색하는 공통의 언어는 무엇인가를 창출해 내는데 집착 같은 열정이 있다"며 "예술가 디자이너 개발자 변호사 등 20여 명이 모인 미스치프는 세상이 정의할 수조차 없는 퍼포먼스 아트를 실행하는 그룹"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건드리지 못할 성역,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예술, 종교, 기술 등 보편화된 사회 분야의 인식을 타파하는 이들의 상품이 이제 작품으로 변신 우월함을 과시하는 전시가 아이러니하다. 현대미술은 자본주의 첨병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1층에 굿즈 판매 매장을 둔 대림미술관은 2~4층에서 전시를 펼친다. 대담하고 발칙한 성경책 같은 전시 도록도 압권이다. 전시는 2024년 3월31일까지. 관람료 3000~1만7000원. ◆미스치프(MSCHF)는? 2019년 가브리엘 웨일리(Gabriel Whaley), 케빈 위즈너(Kevin Wiesner), 루카스 벤텔(Lukas Bentel), 스테픈 테트롤트(Stephen Tetreault)가 설립한 아티스트 콜렉티브로 미국 뉴욕의 브루 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스치프는 스스로를 ‘무엇’이다 정의 내리지 않고, 다양한 범주의 한정판 작품을 홈페이지에 2주마다 ‘드롭(Drop)’하는 방식으로 도발적이면서도 위트 있는 작품을 선보이며, 작품마다 화제와 논란을 일으키며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제까지 당연시 해온 대중문화와 사회적 관습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을 선보인다. 또한, 미스치프의 행보에는 항상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예술, 오브제, 기술 및 사회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미스치프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지속해서 선보이며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팬덤을 만들어 내고 있다. 2023/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