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 요절한 '낙서화가 최고봉' 바스키아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 '낙서'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대표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1960~1988)가 다시 부활했다. “나는 전설”이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바스키아는 '현대미술 전설'이 됐다. 1988년, 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바스키아는 동시대에도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패션 문화 아이콘으로 사랑받고 있다. 1980년대 초 미국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바스키아는 생을 마감하기까지 8년동안 약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왕관·저작권 기호©...낙서같은 그림 약 1380억원, 미국작가 최고 낙찰가 “내 어릴 적 꿈은 만화가였다.” 어릴적 그의 어머니는 바스키아를 데리고 뉴욕의 주요 미술관을 함께 다녔다. 그때 다빈치(Leonardo da Vinci)부터 피카소(Pablo Picasso)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화룰 감상하며 미술사에 입문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부학적인 인체 모습과 내장 기관들, 강조된 팔과 다리의 형태는 7세 때 당했던 사고와 연관된다. 바스키아는 1968년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내장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비장을 떼어내는 큰 수술로 장기간 병원에 머물렀던 바스키아는 어머니가 선물한 해부학 입문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을 보면서 해부학적 형상에 관심을 보였다. 이후 바스키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보면서 사고를 발전시켰고 이러한 지식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연결되면서 뼈와 해골, 신체 기관이 그대로 노출되는 독창적인 도상으로 나타난다. 바스키아 그림은 SAMO, 왕관, 저작권 기호©, 슈퍼맨에서 나온 알파벳 ‘S’, 공증인(Notary)을 의미하는 ‘NOTA’ 가 그려져있는게 특징이다. 위대함을 나타내는 도상들과 그가 존경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와 음악가들의 이미지를 결합해 새로운 방식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바스키아의 예술세계는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텍스트와 자유로운 드로잉이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바스키아는 화면에 텍스트를 쓴 후 그 위에 선을 긋거나 덧칠을 해서 글자를 지워나간다. 가려진 문구들을 읽어내기 위해 더욱 집중해서 보게 만드는 바스키아의 지우기 전략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무의식적으로 포착된 단어들과 이미지들을 나열해 익살스럽고 부조리한 의미를 생성시키는 그의 작품은 알파벳과 단어, 문장과 드로잉을 자유롭게 조합해 회화의 영역을 확장했다. 언어 체계가 가진 사회적 약속의 틀을 깨는 바스키아의 텍스트와 자유로운 드로잉은 사회적 편견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에너지로 점철되어 있다. 고상함과 저급함을 뒤섞고 시간의 흐름과 공간, 인과관계를 뒤엎는 퍼즐같은 작품은 20세기 시각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장 미셀 바스키아는 누구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를 뛰어넘는 그림값을 자랑한다. 201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바스키아의 1982년작 회화 '무제'는 1억150만달러(약 1380억원)에 낙찰돼 미국 작가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나는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다. 단지 아티스트일 뿐이다.” 초기에는 그저 '낙서 같은 그림'으로 치부됐다. 뉴욕거리에 낙서나 하고 돌아다니는 '불량 청소년' 이미지였다. 1978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하던 바스키아는 브루클린과 소호 거리 곳곳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시작한다. 친구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흔해 빠진 낡은 것(SAMe Old shit)’이라는 뜻을 담은 ‘SAMO© (세이모)’를 만들어 낙서 그림에 사인처럼 박았다. 간결한 문구에 담긴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SAMO©는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백인들로 뒤덮인 소호 지역의 갤러리들은 그들의 색다른 행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스키아는 1978년 말부터 친구 알 디아즈와 입장차이로 결별했으나, SAMO©라는 글자는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큐레이터의 안목 지원...1982년 '낙서 미술가'→세계적인 작가로 바스키아는 우편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클럽 57(Club 57)과 머드 클럽(Mudd Club)에서 활동하면서 영화제작자이자 음악가, 큐레이터인 디에고 코르테즈(Diego Cortez)를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진다. 바스키아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코르테즈는 그의 작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소개로 바스키아는 정식 미술판에 발을 디뎠다. 1980년 제니 홀저(Jenny Holzer), 케니 샤프(Kenny Scharf), 키키 스미스(Kiki Smith) 등이 참여한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스 스퀘어 쇼 The Times Square Show'와 1981년 뉴욕 PS1의 '뉴욕/뉴 웨이브 New York/New Wave'에 참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이 미술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19명의 미술가가 1600점 이상을 출품한 '뉴욕/뉴 웨이브' 전시에서 주목받았다. 바스키아는 자동차, 비행기, 도식적인 해골, 해부학적 인체 형상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공존하는 15점을 출품, 미술계에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 1982년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언더그라운드 '낙서 미술가'에서 미국 화단의 떠오르는 신인 아티스트로 급부상한다. 같은 해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의 초대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하루 만에 모든 작품이 팔려나갔고,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 중 하나인 '카셀 도큐멘타 7'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 나갔다. ◇당대 스타 앤디워홀과 만남+죽음...27세 약물과다로 사망 바스키아는 '팝아트 황제' 앤디워홀을 만나면서 예술세계관을 확장한다. 1982년 10월 4일, 앤디 워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바스키아는 워홀과 인사를 나눈 뒤 작업실로 돌아가 워홀의 초상화를 그리고 바로 다시 가져와 워홀에게 보여주었다. 고고한 예술영역에 얽매어 있지 않은 그림. 이때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와 함께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갤러리스트 브루노 비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의 제안으로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까지 세 명이 함께 시작한 협업 프로젝트는 1984년부터 워홀과 바스키아 둘만의 작업으로 진행됐다. 워홀이 먼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면 바스키아가 마지막으로 거친 붓질로 글씨를 쓰고 지워 작품을 완성했다. 워홀에 의해 창조된 대중문화의 상품 이미지들은 바스키아에 의해 지워지고 채워지면서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했다. 바스키아는 실크스크린 화면에 유화, 아크릴 물감, 스프레이 등을 대담하게 사용하고 여러 단어들을 써 내려가면서 다양한 의미를 생성하는 작품을 완성했다. 이들은 1985년까지 2년간 15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공동으로 제작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바스키아는 워홀을 의지하고 존경했으며 워홀에게 바스키아의 젊은 에너지는 새로운 예술적 동력이 되었다.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는다. 바스키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았다.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Abidjan)으로 이주할 결심을 한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이주를 엿새 앞둔 8월 12일 약물 과다로 유명을 달리한다. ‘거리의 이단아’에서 ‘세계 화단의 유망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의 8년은 불꽃처럼 강렬했다. 그가 남긴 드로잉, 회화와 조각 작품, 3000여점은 그를 '반항하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재생하고 있다. ◇롯데뮤지엄 '장 미쉘 바스키아•거리, 영웅, 예술'전 8일 개막 '죽어도 죽지 않는 화가'가 된 바스키아는 불안한 코로나 시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낙서같은 그림은 아이같은 순수함과 해방감을 선사하며 몰입하게 한다.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바스키아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장 미쉘 바스키아 •거리, 영웅, 예술' 전을 주제로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사진 작품 등 150 여점을 선보인다. 뉴욕 거리에서 시작된 SAMO© (세이모)시기를 기록한 사진 작품을 중심으로 바스키아의 초창기 작품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과 함께한 대형 작품도 전시된다. 두 명의 전설적인 천재 화가의 독창적인 작업 방식이 교차하는 협업 작품 5점이 공개됐다. 또한 앤디 워홀 일기에서 발췌한 바스키아와 함께 한 기록들을 통해서 두 거장이 나눈 친밀한 일상의 모습도 만나볼수 있다. 워홀의 기계적인 이미지에 바스키아의 저항적이고 즉흥적인 붓질을 결합해, 대중문화와 물질주의의 양면적 모습을 폭로하는 두 천재 화가의 역동적인 예술세계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아이가 그린듯 낙서같은 그림은 이젠 그림을 넘어 옷, 컵,악세서리, 문구류까지 점령해, '바스키아 예술은 일상'이 됐다. 이번 전시는 삶의 부조리한 가치에 의문을 던지며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누구보다 긴 여운을 남긴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전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시간별 관람 인원을 제한하여 사전예약제로 진행한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입장권을 구매할수 있다. 한편 바스키아 전시의 오디오 가이드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앱을 통해 들을 수 있다. K-POP 대표 아티스트 EXO 찬열과 세훈이 보이스 앰버서더로 참여하여, 전시 내용을 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들려준다. 전시는 2021년 2월7일까지. 2020/10/07
김기창 부인? '20세기 한국 대표 화가' 우향 박래현 77년전 시작된 이야기다. 남성 화가들이 약진하던 시대에 어깨를 나란히 했던 한 여성 화가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은 그야말로 한국화가들의 경쟁장이었다. 1922년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명 '선전'으로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거쳐갔다. 허백련 김은호 이용우 김용진의 입상을 시작으로 이상범 잉응로 김기창 장우성등이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지금은 국내 한국화단의 거목들로 한국미술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화가들이다. 남성화가들의 승승장구속 1943년 열린 조선미술전람회는 깜짝 놀랐다. 총독상에 뽑힌 그림은 '단장', 여성화가였다. 이름은 박래현. 신여성 화가의 존재감은 한국화의 새 이름이었다. ◇1943년 '단장' 조선미전 총독상 ...신 여성화가 박래현 탄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경성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193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이듬해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사범과 일본화에 입학했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받은건 대학교 4학년때다. ‘거울을 보는 여성’을 그린 작품 제목은 단장(화장). 당시 박래현의 하숙집 딸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이런 그림은 일본 미인도에서 즐겨 다루어지던 화풍이었다. 배경이 없는 큰 화면에 검은 옷의 소녀와 붉은 화장대만 마주 보도록 대담한 구성이 눈길을 끈다. 화장대 위의 화장솔과 소녀의 손에서는 섬세한 세부묘사를 놓치지 않았다. 인물화에서 탄탄한 기초를 쌓은 박래현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화 여성 화가로 스타로 부상한 그의 '세계관'은 사랑과 함께 확장됐다. 우향 박래현(1920~1976)은 한국화 1호 부부다. 총독상을 탄 '단장'은 박래현의 인생도 새롭게 '단장'시켰다. 조선미전 시상식을 위해 귀국했다가 한 남자를 만났다. 훗날 '바보산수'로 유명해진 김기창. 1938년 조선미전에서 수상한 그림 선배였다. 1947년 김기창과 결혼은 당대 화제였다.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한 박래현과 청각장애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김기창의 연애사는 지금도 '미술계 전설'로 남아있다. ◇사랑 고백도 먼저...김기창과 '부부화가' 국내 최초 '부부전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당시 선전의 추천작가였던 김기창에게 인사를 하러 간게 인연이었다. 종아리가 예쁜 박래현에 반했지만, 가진게 없어 남자는 주저했다. 훤칠한 김기창의 외모에 반한 건 박래현이었다. 청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화가로 살 수 있게 해달라" 여자가 먼저 사랑고백을 하자 일곱살 많은 화가 김기창은 박래현에 푹 빠졌다. "각자의 예술세계를 인정하되 간섭은 하지말자" 그 약속과 함께 1946년 남산 민속박물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년후 국내 최초로 부부전시도 열었다. 금슬은 공고했다.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운보 김기창과 12회의 부부전을 열었고 중진 동양화가들과 백양회를 결성하여 동양화단을 이끌었다. '박래현' 하면 유명한 그림은 교과서에도 나와 익숙한 '노점'이다. 마치 피카소가 그린 것 같은 입체파 분위기가 나는 그림. ◇'노점' 1956년 대통령상 수상...한국화단 스타화가 등극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노점'은 1956년 탄생했다. 그해 11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남편 김기창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친정인 군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을때를 그린 그림이다. 박래현은 피난생활을 하면서 입체주의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화풍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을 보여준다. 시장을 오가며 마주친 평범한 풍경을 그렸지만 담채의 맑은 색상,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색면, 예리한 필선에서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긴다. 평소 생활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색상의 배합에 예민한 감각을 집중했던 여성화가 박래현의 성향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노점'이 그려진 그 해 1956년은 박래현의 전성기였다. 막내딸을 출산하고 네 아이의 엄마가 되기도 했지만 붓을 놓지 않았다. 5월에 김기창과 나란히 부부전을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화풍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한 달 뒤엔 6월에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화가 부인→4명 아이의 엄마...화가로서 3중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촉망받는 신 여성 화가의 번민은 컸다. 화가에서 부인이 되고 엄마가 됐지만, 화가는 포기할수 없는 일이었다. 늘 가사에 쫓겨 작품 제작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며 고뇌는 깊어졌다. "내가 예술가라 할 수 있는가" 고민도 잠깐,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을 쪼개어 가며 작품을 제작했고, 부부전과 백양회 회원전을 중심으로 의욕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달랐다. 사람들은 그를 ‘김기창의 아내’, ‘김기창과 같은 길을 가는 부인’이라 불렀다. 그렇다고 가사의 굴레와 김기창의 그늘에 갇히지 않았다. 생활 속에서 예술의 주제, 재료, 기법을 찾아내며 새로운 동양화를 탐구했다. 매년 부부전을 함께했고 많은 수의 합작도를 제작했다. 대부분 소품으로 그린 화조화인데, 전성기때인 1956년에 그린 4폭의 연폭 병풍 '봄C'(아라리오컬렉션)가 남아, 부부의 예술열정을 전한다. 167×248cm 크기 보기 드문 규모의 합작도다. 많은 수의 합작도가 전해지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예술가 부부’로서 사회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던 이들의 그림이 인기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950~1960년대 전성기…미국 유학 판화가 변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56년은 박래현과 김기창이 입체주의를 수용한 새로운 양식의 동양화를 선보이면서 화단에 큰 획을 그었던 해이다. 연이어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56년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노점'으로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해외를 여행하며 시야를 넓히고 추상화로 작품을 전향했다.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작업하고 싶다" 아이 낳고 키우며 그림을 그리며 입버릇처럼 나온 말.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석하고 남편 운보와 중남미를 여행한 뒤였다. 남편은 아내의 그 허한 심정을 알아봤다. "그림을 계속 그려라" 1969년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이가 4명, 나이 49세였다.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와 봅 블랙번 판화연구소에서 들어가 한국화가 아닌, 새로운 조형 작업을 실험했다. 동판을 긁고 파서 색을 입혀 한국적 소재를 기하학적으로 풀어내는 추상판화는 한국 작가 최초 시도였다. 1974년까지 뉴욕에 머물며 판화와 타피스트리 작업에 몰두했다. 이후 다시 동양화 작업을 재개하고 미국의 판화전에 참석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을 펼쳤으나 갑작스럽게 간암이 발병하여 1976년 1월 타계했다. ◇태피스트리·동판화 작업 활동중 56세 간암으로 타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2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부유한 대지주의 장녀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 화가가 된 신 여성. 우향 박래현은 근대기 여성화가 첫 세대 작가로 한국미술사를 개척했다. 식민지 시기 일본화를 수학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회화를 모색했고,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감할 수 있는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를 탐구한 미술가다. 특히 섬유예술이 막 싹트던 1960년대 박래현이 선보인 태피스트리와 다양한 동판화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1970년대에 선보인 판화 작업들은 한국 미술에서 선구적인 작업으로 꼽힌다.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박래현은 낯설다. 가부장제 시대는 ‘박래현’이라는 이름대신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화가 김기창의 아내’라는 수식이 더 크게 부각됐다. 화가이자 화가의 아내였던 박래현이 아닌 20세기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여성작가로 부활한다. 하다만 작업을 두고 56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그림과 함께 살아나고 있다. ◇화가는 불멸의 삶… 탄생 100주년 기념전 '박래현, 삼중통역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0년 올해는 박래현 탄생 100주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100주년을 기념한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을 덕수궁 전관에서 29일 개막했다. '예술가 박래현'의 성과를 조명한다. 그의 선구적 예술작업이 마땅히 누렸어야할 비평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전시다. 회화, 판화, 태피스트리 등 작품 총 138점이 35년 만에 대거 공개됐다. 전시명인 ‘삼중통역자’는 박래현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표현한 명칭이다. 미국 여행에서 박래현은 여행가이드의 영어를 해석하여 다시 구화와 몸짓으로 김기창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여행에 동행한 수필가 모윤숙이 그 모습에 관심을 보이자 박래현은 자신이 ‘삼중통역자와 같다’고 표현했다. 박래현이 말한 ‘삼중통역자’는 영어, 한국어, 구화(구어)를 넘나드는 언어 통역을 의미하지만, 이번 전시에서의 ‘삼중통역’은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라는 세 가지 매체를 넘나들며 연결지었던 그의 예술 세계로 의미를 확장했다. 이 전시는 근대기 신 여성 화가였던 박래현의 도전을 따라간다. 1부 한국화의 ‘현대’, 2부 여성과 ‘생활’, 3부 세계여행과 ‘추상’, 4부 판화와 ‘기술’로 선보인다. 미술사학자인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오랫동안 박래현의 작품을 비장(秘藏)했던 소장가들의 적극적 협력으로 평소 보기 어려웠던 작품들이 대거 전시장으로 ‘외출’했다”고 전했다. 화가는 '불멸의 삶'이다. 그것을 빛내는 건 소장가들. 이번 전시도 박래현 그림을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소장가들의 '사회공헌' 덕분이다. 결국 미술품은 개인의 것이 아닌 공공미술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오는 10월8일 10월 오후 4시부터 약 40분간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연구사의 작품 설명이 미술관 유튜브에서 중계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박래현 전시는 미술관 누리집(mmca.go.kr)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무료 관람할 수 있다. 2021년 1월 3일까지. 2020/09/30
BTS RM도 사간 '달항아리' 도예가 권대섭의 '사발' "오늘도 조선사발 500년의 맥은 여전히 힘차게 흐르고 있다." 나선화 전 문화재청장은 미술사학자답게 도예작가 권대섭의 '사발'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발의 그 내면은 조선의 선비 문화처럼 청렴하고 단순 소박한 듯 하면서도 화려하려 현대미와 상통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전통의 맥박이 힘차게 뛰면서 예술성으로 현대와 미래를 관통한다"고. 사발 그릇 하나 놓고 웬 호들갑이냐고 할수 있다. 요즘에야 흔한게 사발 그릇 아닌가. 한때 풍미했던 '플라스틱 그릇' 시대를 넘어 '도자 그릇'이 식탁을 점령한지도 오래다.도예 공방도 활성화돼 취미로 그릇을 만드는 2030세대도 많다.이들은 사발을 만들어 국그릇 밥그릇으로 쓰며 손맛과 흙맛의 오묘함을 느낀다고 했다. 이런측면에서 서울 이태원 박여숙 화랑에서 도예가 권대섭이 열고 있는 '사발'전은 어떤 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발은 흔히 찻사발이라고 해서 다도용 그릇으로 통용되고 있다. 권대섭은 "사발은 차(茶)를 마실 때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두루 쓸 수 있다”면서 “옛 것을 많이 보고 내 나름 소화한 후 사발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박여숙화랑 '사발'전 100점 전시...권대섭은 누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난해 50cm 이상 크기의 대형 달항아리를 선보였던 도예가 권대섭(68)은 이번 전시에 사발 100점을 내놓았다. "일본에서 사발을 귀히 여기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사발이 외면받고 있다"며 사발 전시의 의미를 달았다. 일본에서 도자 공부를 하며 우리 도자의 흔적을 찾아나선 이력이 있다. 홍익대 미대 서양화 출신으로 도예가로 변신한 건 인사동에서 우연히 발견한 조선 백자 달항아리 때문이었다. 그 소박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겨 일본으로까지 건너갔다. 한국의 도자기 역사와 백자 항아리의 형태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일본으로 간 것이 아이러니하다. 1979년 일본 오가사와라 도예몬에서 도자 수학을 하고, 규수 나베시마로 5년간 조선 도공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조선시대 관요가 있던 경기도 광주에 가마를 짓고 도요지를 찾아다녔다. 그 옛날 도공들이 폐기했을 파편(사금파리)을 모으고 연구했고, 연구를 거듭했다. 이후 1995년 전시를 시작으로 현대 도예가로 길을 다졌다. 그의 항아리가 주목받은 건 2015년, 2018년 벨기에 안트워프의 악셀 베르보르트에서 백자 항아리 개인전을 열면서다. 해외에서 먼저 알아본 권대섭의 달항아리였다. .2018년 10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달항아리는 52500 파운드에 낙찰(한화 약 9700만원)되며 '달항아리 작가'로 유명세를 탔다. 권대섭은 조선 백자 항아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구현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높이가 45cm를 넘는 강건한 항아리로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중에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한국의 도자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박여숙화랑을 통해 도예가 권대섭의 본격 마케팅이 시작됐다. 2017년 한국민속박물관의 '봄놀이 – 산, 꽃, 밥', '공예 트렌드페어', '키아프' 등 국내의 여러 전시와 아트페어에서 '백자 시리즈'를 선보이고, 컬렉터들을 사로잡았다. '한국 미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조선 '달항아리'의 몸값(2019년 서울옥션 31억 낙찰)이 치솟으면서 권대섭의 달항아리도 인기를 끌었다. 그의 달항아리는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멕시코의 멕시코 국립 박물관, 러시아 국립 박물관, 방글라데시 국립 박물관과 한국의 삼성 리움 미술관, 호림박물관, 민속박물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부수어 버린다'...권대섭의 항아리와 사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에게는 익숙한 옛날 물건인 항아리와 사발은 어떻게 예술품이 됐을까. 도예는 '불의 미학'이다. 권대섭은 이를 ‘자연의 도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전통 장작가마를 고집하는 작가는 조수도 없이 혼자 불의 미학과 상생하고 있다. 기대에 미치지 않는 항아리를 버리는데 주저함이 없다. "좋은 작품을 가마에서 꺼낼 때는 즐거움을 느끼고 말을 거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는 그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부수어 버린다"고 했다. 보통 1년에 겨우 6점의 백자 항아리를 완성작으로 빚어 낸다고 한다. 박여숙 화랑 박여숙 대표는 "최근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이들이 늘어나면서 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를 굽고, 사발을 만들지만 오늘날의 정신과 감각을 담아 구워내는 작가들은 많지 않다"며 "그렇기에 현대 도예가 권대섭의 존재는 각별하다"고 극찬했다. "그는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을 더해 우리시대의 정신이 담긴 달항아리와 사발을 만든다. 그래서 더욱 더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우리에겐 생활용품 '막사발'...일본 건너가 보물 대접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실 사발은 우리나라에서 '막 사발'이라 해서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평상시 매일 쓰던 그릇이니, 그냥 '사발 그릇'일 뿐이었다. 우리 사발 그릇들은 옛날엔 개밥그릇으로도 쓰여져, 70년대 고미술상들이 '개집부터 살펴봤다'는 이야기가 있다. 개밥 그릇이 알고 봤더니 '이조백자'였다는 거짓말같은 실화가 전해진다. 그렇다면 '사발'은 어떻게 예술품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일까. 사발에 예술성의 눈을 뜨게 한 건 일본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도를 즐기는 일본에서는 우리 '사발'을 '다완'이라 부르며 이를 매우 귀히 여긴다. 우리 사발은 본래 차를 마시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98)의 차 스승이었던 센노 리큐(1522~91)는 조선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조선 사발에 매료되어 이를 기반으로 ‘와비차’(侘び 또는 寂び, 侘茶)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전통적인 차문화에 독특한 불교의 선(禅)을 접목시켜 완성한 와비차가 그 뜻과 정신을 담아낼 그릇을 발견했는데 꾸밈없고 수수한 조선의 사발이었다. 당시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부족했던 일본에서 특히 간결하고 소박한 오늘날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가까운 ‘와비차’에는 중국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다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해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가고 조선 백자를 비롯해 사발이나 대접을 노획해 갔던 것도 이 소박하고 꾸밈없는 조선 도자의 치장하지 않은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조선 사발의 발견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다. 이렇게 우리의 생활용 물건인 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예술품으로 귀한 보물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 각양 각색으로 만든 사발 100점을 선보인 도예가 권대섭은 "사발을 일상에서 많이 사용해야 한다"는 바람을 담았다. "오늘날 우리 일상에서 사발을 많이 사용해 고유의 문화까지 되살려야 한다"는 그는 "사발을 많이 사용하다보면 사발이 왜 좋은지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손맛, 흙맛 불맛으로 빚어낸 크고 작은 사발은 그야말로 예술품의 경지에 올라 평범함보다 아찔함을 전한다. 전시에 나온 사발 가격은 100만~300만원에 판매한다. 한편 도예가 권대섭은 방탄소년단(BTS) 리더 RM 덕분에 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RM은 지난해 10월 박여숙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찾아와 달항아리 한점을 구매했다. RM은 당시 구매한 달항아리를 품에 안고 므훗한 미소를 지은 사진을 SNS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전시에 선보인 권대섭의 달항아리는 지난 7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 추정가 2000만~4700만원에 나와 한화 약 5000만원(HKD 320,000)에 낙찰된바 있다) 박여숙화랑은 이번에도 RM이 '다완(사발)'을 사갔다면서, "한국적인 미에 관심이 많다는 RM은 김환기, 윤형근과 더불어 권대섭 작가를 한국적 작가로 꼽았다”는 말도 잊지 않고 알렸다. 20대의 높은 안목일까, 유명세를 따르는 '돈질'일까. 2년만에 '미술시장 큰 손'으로 떠오른 RM의 관람 행보에 미술시장 희비가 엇갈리고 있어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다. (물론 '글로벌 아이돌'이 전시장을 찾아 작품을 보고 구매까지 이어져 환호와 긍정적인 반응이 크다. 세계적인 'BTS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전 빅뱅의 멤버들이 비싼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해외경매사와 큐레이팅하며 미술시장을 들썩였지만 연예인의 반짝 효과로 끝난 사례가 있었다. 미술컬렉터로서의 젊은 작가를 후원 발굴하거나 꾸준한 관심이 이어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는 평가다 ) 권대섭 '사발'전시는 10월22일까지. 2020/09/25
민중미술 대표작가 최민화의 변신 "그 최민화?!..." 민중미술 대표 작가로 유명한 화가 최민화(66)가 국내 대형 상업갤러리와 손을 잡았다. 최민화 개인전 'Once Upon a Time'. 9월2일부터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펼친다. 이 최민화 개인전에 대해 미술을 알만한 사람들은 깜짝 전시라는 반응이다. 80년대를 이끈 민중미술 작가들이 21세기 들어 시들해졌고 설 무대도 줄어든 가운데 그나마 가나아트, 학고재에서 이들 작가 전시가 가끔 열렸지만 갤러리현대는 이름처럼 현대적인 그림만 취급했기때문이다. '돈되는 그림'의 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국내 최고 화랑인 현대화랑에서 최민화의 전시는 "세상 많이 변했네"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결국 이 전시는 '돈이 되는' 그림으로의 진입과 국내 현대미술사에 최민화의 작업을 다시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전시로 평가받을 전망이다. 갤러리현대는 "작가와 갤러리현대가 함께 하는 첫 개인전"이라며 "작가가 1990년대말 처음 구상하고 20여 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동명의 연작 만을 모은 첫 번째 전시"라고 강조했다.60여 점의 회화와 40여 점의 드로잉과 에스키스가 함께 선보인다. 그래서일까. 이전 민초들을 담은 까칠한 '분홍' 연작과 달리 '노란빛'으로 화사한 신작 그림은 '어쩐지 상업적(?)'이다. 저항적인 이전 작품과는 달리 세련된 분위기도 풍긴다. 단색화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신선한 그림으로 미술사적 의미를 넘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전시장 작품만 봐서는 '최민화 그림' 같지 않다. 한국 현대사의 부조리한 현실과 실존적 고민을 인물화로 포착해온 작가의 이번 전시는 최민화의 세계관이 '신화-역사화'로 확장됐음을 알린다. ◇'민중미술 대표 작가' 최민화는 누구...'민중은 꽃이다' 본명은 최철환. 1954년 서울 출신으로 신일중학교때 문예부, 미술반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만평을 그렸다. 그때 "처음으로 유화물감을 사용해보기도 했다." 이후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홍익대학교 미술교육학과에 진학, 서양화를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교 미술교사로 지내다, 80년 광주 사태를 접한후 달라졌다. 84년 운동권 선후배들과 '서울미술 공동체'를 만들며 '민중미술 작가'로 뛰어들었다. 이름도 바꿨다. ‘민중은 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최민화(崔民花)’를 예명으로 지었다. 그 이름처럼 최민화의 작품 속 주인공은 언제나 ‘민중’, 즉 이 시대를 하루하루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작품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증언이다. 1976년 선보인 '부랑' 연작은 시작이다. ‘잘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 숨 가쁘게 진행된 근대화로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부랑자’의 모습을 강렬한 색채와 표현주의적 붓질로 담은 작품이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입체 작품으로 표현한 '시민'을 '서울현대미술제'에 출품했지만 안기부의 검열로 강제 압수되었다. 1981년 한국을 떠나 미국과 멕시코에 거주했고, 이듬해 1년 2개월 동안의 해외 거주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부각된건 이한열 열사 영결식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이한열의 노제에서 사용되었던 걸개그림 '그대 뜬 눈으로'가 주목되면서다. 가로 7m 세로 2.3m의 대작. 그는 이 작품을 "하루만에 오열하며 그렸다"고 했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작업도 변해갔다. 6월 항쟁과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7년을 기점으로 순수 회화 작업으로 복귀한 그는 1988년 '부랑'연작을 마무리하고, '분홍'(1989-1999) 연작을 발표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권력을 향한 저항과 운동의 승리냐 실패냐의 기로에 놓인 인간의 조건을 성찰한 작품이다. 이어 50대가 된 작가가 동시대를함께 사는 청춘들이 도시를 방황하며 배회하는 유령 같은 모습을 회색빛이 강조된 쓸쓸한 분위기의화면에 그린 '회색 청춘'(2005-2006) 연작으로 끊임없이 붓질해왔다. 민중미술 작가로 ‘근대적 인간 조건의 억압’에 맞서는 작업을 하던 그의 사고가 확장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중반부터라고 했다. 태국과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한국의 전통적 서사와 그에 걸맞는 상징적 이미지의 부재를 절감했다는 것. '부랑', '분홍', '유월', '회색 청춘' 등 문제적 연작을 이어가던 최민화는 '분홍' 연작을 마무리하던 1990년대 말부터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고대 시공간을 캔버스로 소환했다. 이번 전시 타이틀로 나온 새로운 연작 'Once Upon a Time'(옛날 옛날에)이다. ◇'Once Upon a Time'2003년 첫 공개...방대한 한국적 도상 작업 이 연작의 일부는 2003년 대안공간 풀(현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처음 공개된바 있다. 당시 '조선상고사 메모'(2003~) 연작을 발표하며, 역자학자가 아닌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화가의 창조적 관점에서 머나먼 옛 이야기를 한국적 ‘도상’으로 만드는, 방대하며 무모할 정도로 야심에 가득 찬작업에 돌입했음을 세상에 알렸다. '조선 상고사 메모' 연작은 그야말로 역사를 증거하는 메모였다. 영화 홍보용 브로마이드나 상품 광고 포스터, 다른 사진가의 확대 복사한 사진 등 대량 생산된 이미지 위에 유화 물감으로 웅녀와 해모수, '공무도하가'와 '서동요'의 주인공 등을 그려 놓았다. 21세기에 들어 최민화는 미술사와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도상을 폭넓게 활용하며 메타 회화적 실험을 진행해 갔다. 인물화, 역사화, 풍경화 등 연작의 밑그림을 하나둘 발전시켜 2010년부터 새 연작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 연작은 2018년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으로 열린 대구미술관에 회고전에서 첫 선을보였다. 이번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은 연작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는 전시다. ◇'Once Upon a Time'(옛날 옛날에), 삼국유사 뼈대로 탄생 이전과 다른 작품처럼 보이지만 작가 최민화는 “내게 신화를 다루는 일은 오늘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작가는 "고대를 제대로 읽고, 알고, 느끼고, 보기 위해서는 국경과 민족, 인종과 종교 등을 엄격히 구분 짓는 서구의 근대적 역사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대의 풍요로운 상징 형식과 심오한 문화적 유산들을 당대의 회화적 언어, 나아가 우리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 짓는 일이 이번 연작의 목표이자 제작 의도다." 새 연작 'Once Upon a Time'은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고조선에서부터 후삼국까지의 유사(遺事)를 모아 편찬한 역사서 '삼국유사'를 서사적 뼈대로 삼았다. "역사서에 담긴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건국 신화, 그렇게 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을 먹여 살린 영웅의 탄생과 고난, 성장과 성공의 감동적 드라마, 생(生)과 사(死), 성(聖)과 속(俗), 농경과 유목의 삶이 혼재한 고대의 풍속과 생활문화, 희로애락이 깃든 인류 보편적인 흥미로운 이야기에 특별히 주목했다." 경계가 해체된 이미지의 조합, 변주, 배치, 생성은 최민화 특유의 방법론이다. 최민화는 이 연작을 위해 동서양의 신화적 종교적 도상들의 형체와 상징성을 다년간 연구했고, 1년에 1,2회 정도의 배낭여행을 떠나 본 광경을 내면화하며 수많은 드로잉과 에스키스를 완성했다. 동서고금을 대표하는 도상과 색감의 습합, 몇 개의 선만으로 캐릭터의 성격이나 장면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과감한 드로잉이 압도한다. 그려지는 대상과 비워 둔 배경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시각적인 구성이 특징인데 최민화는 이를 "그려진 여백”이라고 했다. 그림에는 동서양 미술사의 수많은 이야기가 엮여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민화와 풍속화, 도속화와 탱화의 한국 미술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인공을 사실적으로 구현한 르네상스 회화, 힌두교와 무슬림의 종교 미술을 종횡으로 아우른다. 화면은 '숨은그림찾기'처럼 신화의 인물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한다. 환웅이 웅녀에게 마늘과 쑥을 건네는 단군 신화의 장면은 이브가 사과를 먹자며 아담을 유혹하는 성서의 한 장면과 중첩된다. 또 달빛 아래 밀애를 나누는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이 신라 시대 향가 '서동요' 속 선화 공주와 서동의 모습으로 인용되고 변주된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속 인왕산을 배경으로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 속 인물들이 한 화면에 놓이는가 하면, 르네상스 회화 속 근육질의 남성상이 민화를 장식하던 잉어, 거북, 복숭아, 소나무, 학, 오리, 산호초, 괴석, 연꽃, 영지, 사슴 등의 아름다운 길상문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신세계로 펼쳐진다. 색상도 무지개빛처럼 다채롭다. 그동안 분홍, 빨강, 회색, 마젠타 등의 특정 색채를 사용한 것과 달리, 이번 연작에서는 선명한 파스텔톤의 색감으로 완성했다. 한국의 오방색 전통과 힌두 문화의 문화적 색감을 혼성했다. 캔버스의 물성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고 예리한 필선도 눈길을 끈다. 물감을 엷게 칠하는 최민화만의 방식으로 한국화의 세필 기법을 연상시킨다. 마치 고대의 시공간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재생되는 분위기와 효과를 불러온다. 미술사학자 김계원은 "'Once Upon a Time'연작은 최민화가 누구보다 고도의 필력(筆力)과 기예를 갖춘 작가임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고대의 시공간과 그곳을 무대로 대서사의 장대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번 작품은 절제가 돋보이는 인물화와 붓질의 능숙함에 그림 보는 맛을 제대로 전한다. 근경과 중경, 원경 사이에서 몇 개의 겹을 이루듯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밀도 높은 화면에 끌려가듯 눈을 못떼게 한다. 민중들의 애달픈 모습을 무심히 담아온 그가 21세기 '신화 역사화'로의 확장된 붓질은 '신화의 인물들을 통해 동시대성을 확보하고 공감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상업화랑과 손잡은 덕도 크다. 갤러리현대의 전시 연출은 못난 그림도 '있어빌리티'하게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지하 전시장에는 40년간 이어온 작가의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열정과 탐구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다양한 질감의 종이와 캔버스, 나무판 등에 그려진 드로잉과 에스키스를 통해 만화, 퍼포먼스, 걸개그림 등으로 이어진 회화적 매체에 대한 작업이 연대기처럼 소개됐다. 전시는 10월11일까지. 관람은 무료. 2020/08/29
영국에 호크니 있다면 한국엔 김보희 있다 “잘 훈련된 손(Hand), 사물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각(Eye), 그리고 이를 지치지 않고 만들어 나가는 열정(Heart)의 세 가지가 화가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생존작가중 가장 비싼 작가인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83)의 말이다. 2018년 '예술가의 초상'(1974)이 1019억원에 낙찰되면서 더 유명세를 탄 그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어 한국에서도 대박을 터트렸다. 젊은 시절 미국 LA로 건너가 팝아트의 선두주자로 활약하던 그는 노년에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영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골마을 숲길을 눈에 보이는대로 그려내 주목받았다. 폭 12m, 높이 4.5m로 거대한 풍경화. "광활한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표현하려니 어쩔수 없었다"고 했다. 덕분에 숲길을 걷는듯한 느낌을 제대로 선사했다. 국내에도 호크니 같은 삶을 사는 화가가 있다. 서울에 살다 2000년대 중반 제주도로 내려가 자연에 둘러싸여 사는 한국화가 김보희(68)화백이다. 3년전 이화여대에서 25년간 재직한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고 실컷 그림을 그렸다. ◆'잘 훈련된 손'...제주에 살며 전업작가 전업작가로 제주에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좋아서, 재미있어서, 눈이 부셔서 그렸다." 제주도의 풍광은 삶의 터전이자 영감의 원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법칙을 온 마음으로 느끼며 낮과 밤, 하루 하루를 자연속에서 살아냈다. 마음을 따라간 그림은 기운생동한다. 초록의 싱그러움과 생명의 환희가 넘친다. "자연의 질서에 느낀 신비로움"을 특유의 반복적 세필과 시간의 결로 담아낸 그림은 햇살보다 눈부시다. 터질 듯 부풀어오른 열매 하나, 씨앗 한 톨은 그 자체가 생명력으로 가득한 하나의 우주다. ◇금호미술관, 김보희 개인전 'Towards' 김 화백은 동양화 매체를 기반으로 구상 풍경 회화의 지평을 넓혀왔다. 사실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한 대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추상적 배경을 한 화면에 구성한다. 그래서 그림은 사실적인데 환상적이다. 금호미술관이 15일 개막한 김보희 초대전 'Towards'는 40년 화업의 진수를 보여준다. 2019년~2020년에 제작된 신작과 대형 회화가 전시됐다. 1층 전시장에는 김화백이 정원에서 가까이 마주한 대상들을 담은 6점의 회화가 걸렸다. 8개의 캔버스를 연결하여 하나의 장면으로 선보인 'The Terrace'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테라스 앞의 풍경을 담고 있다. 가로 3m, 세로 5m가 넘는 대형 그림으로 마치 초록숲이 울창한 테라스에 있는 기분이다. 하나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아 보이지만(평원법) 발 밑에 자리 잡은 듯한 테라스는 약간씩 어긋난 바닥의 경계면으로 시점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동양 산수화의 전통적인 시점 처리 방식에 따랐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숲길에 화판을 놓고 숲길을 그렸듯, 김 화백도 테라스에서 계속 거닐면서 풍경을 바라본 그 시선을 그대로 담아냈다. 감상자도 같은 풍경 안에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한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원근법이나 카메라의 시점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해법을 동양 산수화와 폴 세잔의 다시점에서 찾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김보희 화백은 우리 전통 산수화의 방식을 보정없이 제시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사물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각'...자연만물과 함께하는 무위자연 작가는 무위자연의 질서를 따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만물을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존중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예찬을 강조했던 시기를 지나, 자연의 본질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삶과 죽음, 유와 무 등 상반된 개념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개념 자체를 자연 그 자체의 본성으로서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화면에 담는다. 금호미술관 지하 1층 바깥 전시장에 전시된 'The Seeds' 시리즈는 아름다운 형태와 무늬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거대하게 부푼 씨앗이 생경하지만 2016년부터 소재로 가져온 씨앗은 자연의 순환 체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씨앗을 실제로 관찰하여 그리거나 상상해서 창조하기도 하는데, 꽃을 피우기 위해 혹은 열매를 맺기 위해 분투하는 씨앗의 강인한 생명력을 담고 싶었어요."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상상력이 더해져 씨앗의 원초성에 오롯이 투영된다. "정해진 법칙에 따라 발아하고 꽃을 피우는 객체가 아닌 자연의 섭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생명"이라는 것을. 씨앗부터 꽃, 그리고 시들어진 꽃잎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은 'Self Portrait' 작품이 보여준다. 씨앗에 빠진 것도 자연의 순환을 이해하면서다. "한 생명의 시작을 알리지만 동시에 꽃과 열매가 소멸해야만 얻을 수 있는 씨앗처럼, 자연은 순환의 질서 속에서 생을 유지하기 때문이죠." 김 화백은 "시간의 흐름에 빗겨 나지 못하고 점차 변해가는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이 나와 닮았다"고 했다. 빛 바랜 듯한 배경 위로 꽃의 주기를 정밀하게 그려냈다.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의 주기 속에서 우리 삶의 본질을 발견하고 담담히 받아들인 작가의 내면이다. ◆'지치지 않고 만들어 나가는 열정'...2년간 시간 함축한 'The Days' '생로병사' 육체와 달리 무한 반복을 거듭하며 흐르는 시간과 풍경을 형상화한 작품도 있다. 제주 풍경 위로 숫자가 겹쳐진 'Towards'는 문자를 활용한 작품으로, 전시 타이틀로 쓴 신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월의 흐름이 달력과 나이의 숫자로 파악된다는 사실에 흥미가 생기더군요." 나무는 그 나무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부터 줄기, 그리고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온전히 감내해 온 시간을 함축하고 있다. 결국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주의 진리를 품고 있는 하나의 매개체"라는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의 지난한 작업으로 이어졌다. 화가로서의 열정은 초록의 푸르름이 압도적인 'The Days'에 녹아있다. 27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제작했다. 화면 왼쪽엔 새벽 바다, 오른쪽 상단엔 밤하늘이 있다. 화면 속 꽃과 열매는 현실 세계에서는 하나의 계절에 함께 피어나지 못하는 것들이 한자리에 어우러졌다. 2년에 걸쳐 작업한 이 작품 속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만든 세계이자 심상의 풍경이다. "나무와 풀과 꽃들이 뿜어내는 푸르름은 있는 그대로의 살아있음과 생명 있는 것들의 표식이다. 눈부시게 빛나며 생명력을 뽐내는 식물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풍광은 제주의 풍광을 주제로 작가가 써 내려간 한 편의 대서사다"(기혜경 관장) ◇제주풍광에 매료 자연에 천착한 한국화가 김보희 1974년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당시 화단은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조였다. 1980년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제1회 김보희 개인전을 열고 미술계에 데뷔한 그는 '동양화가'로 불렸다. 하지만 그 틀에 갇히지 않았다. 동양화가 추구하는 자연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공감했지만 필요에 따라 서양화의 재료를 적절히 활용했다. 동양화라는 한정된 매체에서 초월하는 풍경화의 새 장르를 열어제쳤다. 수묵과 채색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재료 사용. 원경에서 근경으로 다채롭게 구사되는 화면의 구성은 어느 한쪽 문법에 귀속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풍경을 완성했다. 1980년대 인물과 정물, 그리고 풍경 등 비교적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었던 김보희는 1990년대부터 자연을 소재로 좀 더 견고하게 작업을 구축해 갔다. "자연은 문명 이전 생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는 대상이자, 인간에게 사색과 관조를 유도하는 하나의 세계"라는 화두에 천착했다. 1970년대 신혼여행으로 온 제주도에 마음을 뺏겨 "언젠가 여기에 작업실을 짓고 그림만 그릴거야"는 말은 씨가 됐다. 2005년부터 거처를 제주도로 옮겼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지나 눈에 들어온 자연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보고 또 보고 느낀 자연풍경을 화면에 겹겹이 쌓아 올린다. 엷게 여러 번 올려진 물감은 동양화 특유의 질감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자연 그대로의 형태와 색을 재현하려는 그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과감한 색면과 세필의 중첩으로 현대 채색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다 풍경' 시리즈, 원형의 자연으로서 동식물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를 구현한 'Towards'시리즈는 그렇게 탄생했다. 원시림같은 초록의 정원숲과 씨앗의 솜털까지 되살린 그림은 보는 순간, '아~'하게 하면서 숨통을 틔운다. 미술비평가 심상용은 "김보희가 상상력으로 그려낸 세계는 '현실을 해독(解毒)해 사색의 삶을 되돌려놓는 정원"이라고 했다. 숲과 숲의 식물들과 정원. 초록의 낙원은 '회복과 치유의 해독된 풍경'이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동화되어 물아일체의 경지로 나아간 김보희 화백의 진심이 전해진다. 일상의 소중함을 더없이 깨닫는 코로나 시대, 끝없는 관심과 관찰로 담아온 그림은 사랑이다. 거대하고 눈부시게 반짝이며 고요와 평안을 주는 작품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 삶은 더불어 산다는 것.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자." 전시는 7월 12일까지. 2020/05/16
벽에 붙인 바나나는 어떻게 1.5억짜리가 되었나 #'예술이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바나나를 작품이라 내걸은 놈이나 그걸 1.5억이라고 책정한 놈들이나, 뭐든간 작품을 먹어치운 놈이나...' # '나도 어제 이거 5개 거실에 붙여놨다 7억 벌었다' # '저걸 1억주고 사는 사람은 뭐냐' 지난 9~10일 뉴시스가 보도한 "1.5억원짜리 '바나나 작품' 꿀꺽한 예술가" 기사가 낳은 댓글은 '리얼리즘의 극치'다. 그 예술가의 궁금증보다, '그 바나나가 대체 뭐길래 1.5억이나 하는가'가 더 초점. 댓글의 압권은 '저걸 돈주고 산사람이 진정한 예술가네!'다. '1.5억원짜리 '바나나 꿀꺽' 사건은 지난 7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벌어졌다. 이 아트페어에 참가한 페로탕 갤러리 부스 벽에 강력한 덕테이프로 붙여진 '바나나'를 한 행위 예술가(데이비드 다투나)가 입안으로 삼켜버린 것. 갤러리의 충격 속 작품을 먹어치운 그는 한 술 더 떴다. 뉴욕에서 기자회견까지 열어 "배가 고파서 먹었다"며 이걸 "'헝그리 아티스트' 퍼포먼스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작가에게 미안하지 않다. 예술로 대화하는 것"이라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식된 예술가의 면모를 보였다. 이름 탓이었을까? 코미디언 같은 예술가를 끌어당겨, '아트'를 코미디(comedy)로 만들어버린 바나나 작품 제목은 '코미디언'이다. 문제의 바나나가 먹혀 버린 후 몇 분 만에 페로탕 갤러리는 곧바로 새 바나나를 붙여 놓았지만, 결국 제거(?)해야했다. 소문이 나자 관객들이 몰려들어 셀카 사진을 찍는 바람에 주변 작품의 안전 문제를 위협한 것. 원래 바나나, 그러니까 '코미디언' 작품은 떼먹히기 전에 12만달러(한화 1억5000만원)에 팔렸다. 따지고 보면 갤러리측은 아쉬울 게 없다. 팔아야 하는 아트페어에서 이미 팔았고, 화제의 사건으로 작품과 작가를 세계 만방에 알렸으니, 손안대고 코 푼격으로 일석삼조 효과를 누렸다. 그래도 전시장에서 조기 철수는 쉬운 결정은 아니다. 세계 유명화랑 명성을 자랑하는 페로탕 갤러리의 입장은 어땠을까? '바나나 작품'을 내건 페로탕 갤러리 캐서린 위스니에프스키(Katharine wisniewski) 디렉터는 뉴시스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아트페어 마지막날이었던 8일(일요일),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함께 전시장에 '코미디언'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걸 유감스럽게 생각했다"고 전했다. 캐서린 위스니에프스키는 "작가와 나는 아트바젤 마이애미측의 권고에 따라 결국 그날 아침 9시에 바나나 작품을 제거했다"면서, "이렇게 기억할만한 모험(?)에 참여해주신 분들에게 정말로 감사함을 전한다"고 여유를 보였다.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이번 일에 대해 혹여 '짜고 치는 이벤트'가 아닌가 하는 뉘앙스에 "바나나를 먹어치운 퍼포먼스 예술가와 연계돼 있지 않다"며 먼저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 '코미디언', 바나나 작품 자체에 대한 상태를 정확히 이야기 할 수 있다"면서, '벽에 붙인 바나나 한개가 왜 1억5000만원이나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대신했다. "당신도 개념 예술(conceptual art)에서 '진품 증서(certificates of authenticity))'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것"이라면서 "바나나 '코미디언'은 진품 증서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 작품이 마우리치오 카텔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서죠. 그 '진품 증서'에는 바나나 작품 설치에 대한 정확한 지시 사항이 포함되어 있어요. 개념 예술에서 진품 증서가 없다면, 그저 물질적 표현과 묘사에 불과할 뿐이잖아요. 결국은 진품 증서를 가져가는 것이 곧 작품 자체를 소장하는 것입니다" 바나나는 사라졌지만 진품증서가 있으니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어차피 바나나는 언젠가는 썩어 없어진다는 '발상'의 장치다. 페로탕측에 의하면 그 바나나는 세계 무역을 상징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고전적 유머 장치다. 세계를 들썩거린 '코미디언' 바나나는 분명 1.5억 보다 더 비싸질 것이란 전망이다. 훗날 경매에 오른다면, 수십배 높은 가격에 매겨져 다시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게 국내 미술시장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유는? 작가의 유명세 때문이다. 바나나가가 먹혀버린 이벤트까지 더해 '진품 증서'는 언제든 바나나를 벽에 붙일수 있고, 그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며, 그게 바로 '현대 미술'이다. 이쯤되면 '예술 참 쉽죠 잉~' 이지만 미술시장 역사가 증명한다. '코미디언 바나나' 작품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은 1917년 4월 시작됐다.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는 미국 뉴욕 '앙데팡당'전에 화장실 소변기가 등장했다. 검정 물감으로 'R. Mutt'라고 쓰인 소변기는 작품 제목이 '샘'이라 했다. 전시 감독들은 이게 작품이냐며 갑론을박을 벌였고, 급기야 '변기' 출품과 관련 투표까지했다. 결국은 “그것은 전혀 미술품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샘'을 전시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대중들에게는 실제로 한번도 보이지 않은채 '변기'는 그야말로 핫이슈가 됐다. '본래의 자리에 있으면 매우 유용한 물건이겠지만, 어떤 정의에 의해서도 그것은 예술작품이라 할수 없다'며 치워진 변기가 부활한건 컬렉터 덕분이다. 당시 뉴욕 미술계를 주름잡던 컬렉터 아렌스 버그 부부가 사들였다. 하지만 그 변기를 잃어버리면서 개념미술의 원조가 탄생한다. 그 때 소변기를 출품한 마르셀 뒤샹은 새로 변기를 구입해 서명하고 아렌스 버그에 다시 제공했는데, 이때 변기는 '오브제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지킨 것'이라고 해석됐다.'코미디언 바나나'가 '바나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의 컨셉'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페로탕갤러리측의 말은 결국 마르셀 뒤샹의 샘, 그러니까 '변기'가 파생시킨 바나나다. 일반적인 상점에서 산 기능적인 물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미술의 맥락에 들어온 뒤샹표 '레디메이드(ready-made)'의 발명이었다. 소변기 '샘'의 위력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영국미술가 500명이 ‘지난 20세기 100년간 후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20세기 작품’ 1위로 뽑은 작품이다. '위대한 천재 예술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눌렀다. '이게 작품이냐'며 쓰레기 취급됐던 소변기는 몸값도 올렸다. 1917년 굴욕시기를 거쳐 82년이 지난 199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1700만 달러(한화 약 200억)에 낙찰됐다. 뒤샹의 작품 중 최고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이 소변기는 1917년 제작된 바로 그것도 아니고 1964년에 새로 만든 8번째 에디션(복제품)이었다. '바나나'를 벽에 붙인 작가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조각가이자 행위예술가인 마우리치오 카텔란(59)이다. 세계적인 유명화랑 페로탕갤러리 소속으로 그의 이름만으로 미술계에서는 명성을 입증한다. 지난 9월 '18K 황금 변기' 작품을 공개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이 작품은 도난 당해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지만 황금으로 도금된 변기는약 480만 파운드(약 7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생가 블레넘궁에서 전시 중에 도난당한 '황금 변기'는 인간의 탐닉과 지나친 부를 풍자하는 작품으로 20만원짜리 밥을 먹든, 2000원짜리 밥을 먹든 배설이 되는 건 같다는 의미다. 20세기 미술을 발칵 뒤집어놓은 뒤샹의 후예답게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아이디어 하나로 예술하는 '풍자의 대가'다. 위트와 역설적 유머, 종교 · 정치 · 사회활동 · 미술계에 이르기까지 기존 권위에 대한 풍자와 조롱으로 유명세를 구축했다. 1992년 밀라노에서 열리는 단체전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자, 경찰서에 도둑맞은 작품에 대한 신고서를 쓴 후 그 신고서를 다시 갖고 와 액자에 넣어 전시하기도 했고, 암스테르담의 한 갤러리에서 진행중이던 전시물을 통째로 옮겨 다시 설치를 했는데, 절도행위로 취급받자 그는 자리만 바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무릎을 꿇고 기도 중인 아돌프 히틀러를 미니어처 상으로 만들어 히틀러의 로마 가톨릭교를 풍자적으로 조롱했고, 7m 길이의 축구게임기계를 재현해 이탈리아인들의 축구에 대한 국가적인 집착과 그 부패상을 간접적을 비판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그럴 정도로 영리하지는 못했다'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미술전공자도 아니다. 어렸을때부터 한 곳에 오래집중하지 못했다고 한다. '뉴요커' 의 전속 미술평론가 캘빈 톰킨스는 ‘아주 사적인 현대미술’책을 통해 마이루치오 카텔란을 '판의 규칙을 깨뜨려버리는 말썽꾼'이라고 표현했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히틀러, 관 속에 누운 케네디, 운석 조각을 맞고 쓰러진 교황 등 카텔란은 ‘이게 예술인가?’ 싶은 의구심을 일으키는 작품들, 충격적이고 잊을 수 없는 이미지들을 내보이지만 대개의 관객들은 그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하지만 일단 웃고 나서 그 뒤에 숨은 사회적 의미들을 곱씹게 하는 묘한 작품들이다" “전 관람객에게 말을 거는 경향이 있는데, 생각을 많이 하는 식으로는 아니에요. 그건 이상하잖아요. 저는 태생부터 멍청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그렇더라도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조금씩 배우고 있죠. 제가 일반적인 미술계에서 벗어나 다양한 유형의 관람객을 아우르는 가능성에 혹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제가 작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품이 바로 대장이에요. 아니면 여주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네요. 작품은 저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상당한 고뇌를 안겨줍니다. 제가 만든 것이 무엇이든, 그건 제가 아닌 제 안의 무언가에서 나온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것의 주인은 아니죠.” (아주 사적인 현대미술, 마우리치오 카텔란 인터뷰중 p.230) '대체 그 바나나가 무엇이길래 1.5억짜리인가', '예술이란 뭘까?'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세상 모든 기성 체계를 풍자하는 그의 재능에 설득당한 것이다. 여전히 아리송한 '개념예술'의 승리다. 하지만 최종 승자는 작가도 갤러리도 아니다. 기사에 달린 댓글처럼 '저걸 돈주고 산사람이 진정한 예술가네!'다. 결국 작가와 화랑이 부르는게 값인 작품가격()은 컬렉터가 만드는 것이다. 2019/12/12
"밑천없는데 유명세 괴로웠다"...'미술계 아이돌' 문성식의 '욕망' 그가 아저씨로 나타났다. 수줍어하던 앳된 청년의 모습은 말할때마다 움직이는 포동포동한 손가락에 머물러 있었다. 불혹에 이르른 그는 진지함이 더해져 보였다. 2005년, 스물 다섯살에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 주목받았고, 2007년 세계 최고의 미술장터인 바젤아트페어에도 출품,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으로 호평받으면서 일약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국내 3대 메이저 화랑인 국제갤러리가 전속 계약을 맺고 프로모션했다. 하지만 작품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자의식과 고집이 강한 진지한 태도로 한 작품에 보통 5~6개월가량 걸리고 철학적인 성찰로 3년간 붙들고 있는 작품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느림의 작업이 몸값 비싼 작가로 올려세웠다. 화랑주와 컬렉터가 애가 타게 기다리는 흔하지 않은 작품이다. 2011년 국제갤러리에서 첫 전시 후 8년 만에 국제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문성식(39)작가다. 나이 때문일까? 30대 초반의 세밀하고 치열한 그림과는 달리 뭉근해졌다. 다소 서정적이었던 지난 전시 '풍경의 초상'(2011)과는 전혀 다른 '욕망의 진화'를 보여준다. '아름다움, 기묘함, 더러움'으로 물들어 있다. "생각이 변하더라. 난 모든 걸 다 그리는 작가다. 세계와 우주를 포함한 모든 것. 섬세하게 관찰로 포착된 그림이다." 오랜만에 여는 그의 개인전에 국제갤러리는 두 팔 벌려 환영한 모습이다. K2과 K3 두 전시장을 온전히 내준채 그의 그림, 크고 작은 150여점을 여유있게 전시했다. 이번 전시는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초기 회화에서 벗어나 드로잉 매체에 새롭게 접근했다. 전통과 현재, 동양과 서양을 잇는 '회화의 고유한 정체성'을 추구하고자 시도하는 신작이다. '변해도 추락하고 변하지 않아도 추락한다'는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의 어록은 작가들에게 피할수 없는 화두다. 인기있는 작품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생계와 연결되기 때문. 대개 화가들이 10년주기로 작품이 변하지만 성공한 케이스는 많지 않다. '대표 시리즈'를 이어가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주제와 기법이 확연히 바뀐 문성식의 이번 전시는 미술시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13년전 미술시장 호황기때 '물 들어올 때 배 띄워라'는 속담처럼, 번갯불에 콩 튀듯한 스타작가들은 타다 만채 사라졌다. 메이저 상업화랑에서도 느리고 진지하게 자신만의 세계로 작업을 확장하고 있는 '문성식의 행보'가 주목받는 이유다. 청년 스타작가에서 아저씨로 성숙해진 '화가의 인생 비법'은 무엇일까? ◇호기심 천국...'아름다움' 어릴 때부터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 "사람을 구경하고 관찰하고 특이한 것을 포착하고 그려냈다. 초기에는 서정시같은 드로잉 작업, 다큐같은 세밀하고 모든 요소를 다 그리는 가학적인 작품을 해왔다. "198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1998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수학했다. 세필화로 그리는 드로잉 페인팅은 이질감, 한계가 느껴졌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2년 전, 부산에 내려갔다. 장미꽃에 빠졌다. 집앞 조그만 자투리땅에 장미를 심어서 3년 정도 키웠다. 1년동안 장미의 사이클을 관찰했다. 그러면서 또 궁금증이 생겼다. 왜 나는 꽃에 꽂혀있을까? 사람들은 왜 사랑하면 꽃을 줄까? 그 의미가 무엇일까? 어린시절 아버지의 행동도 기억났다. 아버지는 포도농장을 했다. 그런데 어느 한 해는 농장에 작물을 심지않고 튜울립 꽃을 심었다. "우리(자식)를 위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장미꽃을 관찰하면서 보니 장미의 생로병사는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장미에 더 매료됐다. 꽃은 식물의 성기. 번식하기 위해 꽃잎을 활짝 편 채 나비가 수정해주기를 기다린다. 나비가 날아온다. 꿀이 터지고 벌레가 꼬이고, 벌레를 쫓는 새들이 날아든다. 그 사이에는 거미가 꽃과 가지 사이로 거미줄을 치고 은거하고 있다. 문성식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끌림‘이다. 태생적으로 인간사와 주변 만물을 연민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장미꽃을 보니 "모든 존재들은 욕망대로 살고 있었다." 그렇게 목격한 저장된 기억들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그는 "그냥 살고 있는, 자기 의지대로 살고 있는 상태의 순간을, 내 몸을 도구로 밀착시켰다"고 했다. 전시 제목인 '아름다움. 기묘함. 더러움'의 출발점이 된 장미 연작의 제목은 '그냥 삶'이다. 사람이나 곤충이 꽃에 이끌리는 근원적 ‘당김’에 관심을 갖고 시작한 작품으로 이번 개인전을 통해 처음 선보인다. ◇그냥 삶...기묘함 "내 조형의 엣센스는 무엇인가?" 3년전쯤 고민이 깊어졌고 갈길을 잃었다. 어디로 갈지 몰랐다. 대학시절 초기에 그린 연필드로잉을 떠올렸다. "정말 뭣모를때 그린 것인데 지금봐도 너무 잘 그렸다. 이젠 그 시절이 지나서 지금은 안된다" 그래서 거기서 해답을 찾았다. "선이라는 요소가 나의 엣센스"라는 것. 그러다 옛 그림에서 길을 발견했다. "겸재 정선이 현대에 살고 있으면 어떤 그림을 그릴까?" "종이와 먹이라는 재료. 조선의 미학이 서구미학과는 다른 맛이 있다. 나는 보리굴비맛 같다고 느낀다. 또 15세기 이탈리아 화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벽화, 프랑스 라스코 동굴 벽화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 "옛날 그림이 주는 감흥을 느꼈다."는 그는 "벽화를 보면서 오래됐는데 현대적이다. 그것을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당시에는 재료가 좋지 않기 때문에 층위가 보이기도 하고 레이어가 떨어져 나오는 것에 매료됐다" 그렇게 "조선의 옛그림과 서구의 옛그림을 현대의 나라는 도구를 써서 만들어보겠다"는 기묘한 착상은 '동양화와 콜라보한 벽화같은 그림'으로 탄생됐다. 인간 의지의 흔적과 생명력이 고스란히 고착된 느낌을 내기 위해 검은 바탕에 젯소를 바른 후 날카로운 도구로 이를 긁어 떼어내기를 반복했다. 의지와 우연이 혼재된 선을 얻어내면 과슈로 채색해 완성했다. "이 작품은 내가 수고를 가장 많이 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가장 큰 그림 가로 5m, 세로 2m에 담긴 '장미 연작'은 오래된 피멍이 든 것처럼 처절하다. 더 이상 회화와 드로잉의 구분은 의미 없다. 1년반이나 시간을 투자한 '두꺼운 드로잉'이다. 긁어서 책색하고 다 그려진 상태에서 젯소를 또 올리고 또 긁어내고. 연속적인 실수의 행위는 우연찮게 테크닉을 상승시켰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그렸다. 단지 긁는 행위가 대변하는 ‘의지’와 떨어지는 파편들이 보여주는 ‘우연’이 공존할 따름인 작업은 동양화(매화)의 구도를 차용하는 동시에 벽화의 질감을 표방하며 현대적인 세련미로 시공간을 아우른다. 문성식은 전시장에 걸고서야 "애썼다. 토닥여주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는 "소극적인 추상성이 보이는 이 작품을 하면서 앞으로 더 추상적인 작업으로 나아갈 것 같다"고 예고 했다. ◇이게 뭔 짓일까?...더러움 장미 연작과 함께 걸린 '분홍색 그림'은 하얀 전시장을 붉어지게 한다. 뒤엉킨 남녀의 신체를 묘사한 과슈 드로잉 24점이 한 벽을 차지하고 있다. "포로노를 구글로 검색해서 나온 이미지를 그렸다" 그는 "성행위가 아름다운 행위이기도 하고 이상한 행위이기도 하고 씨앗을 어떤 곳에 넣는 몸짓이 기이한 모습이기도 하고 더러움 느낌도 있다"면서 "야하려고 그리건 아니다. 이게 뭔짓일까? 왜 우리는 이런 형태로 진화했을까? 그런 궁금증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분홍색 그림은 야릇함보다 기괴함으로 보인다. 한 번의 붓질로 슥슥 엷게 그려낸 '분홍 몸짓'은 그의 콤플렉스가 담겼다. 루이스 부르주아와 반고흐를 좋아한다고 했다. "부르주아의 드로잉에서 현대적이고 원초적임을 본다"는 그는 "루이스 부르주아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오래기간 동안 무명으로 살면서 내공이 쌓은 선이 대단해, 그의 드로잉을 선생님처럼 배운다"고 했다. 반고흐도 예술의 정수는 "인간적이고 아이다움"이라고 했다. "고흐를 좋아하는 것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리는 선의 싱싱함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느끼고 흉내내고 싶은 예술가"라고 꼽았다. 그러면서 스타작가로서 고충도 털어놨다. "한국에서 입시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빨리 알려진 작가가 됐다. 내공을 쌓을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그게 내 콤플렉스다."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참가 후 "영 아티스트 띄우는 분위기에 올라타게 되면서 내적으로 괴로웠다." 그는 "미술시장에 진입하면서 뭐가 뭔지 모르고 휩쓸렸다. 시장에 알려지면서 자의식이 생겼다. 미술계에서 원하는걸 해야하는 분위기와, 또 보편적이지 않는걸 해야 하는 분위기도 있었다"면서 "나도 그래야 되나?"로 번뇌했다. "당시 밑천이 없는 상태였다. 위태위태하게 여기까지 왔다. 인기였던 세밀화 향나무도 많이 그릴 수가 없었다. 예술성은 연필드로잉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국제갤러리는 나한테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였다"고도 했다. 젊은 작가로서 마음도 급했다. 하지만 길이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웠던 그림과 달리, 자신의 작업은 '가학적이었다'는 의외의 표현을 쓰며 "그동안 힘들게 그렸다"고 했다. 작가의 고뇌속에서도 큰 손 화랑인 국제갤러리는 장기전에 강했다. 그는 "전속이라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내가 작품을 많이 그려내지 않았는데도. 많이 기다려줬다"며, "믿고 기다려준게 감사하다"고 했다. '미술계 아이돌', '미술 천재' 소리를 들었던 그는 "지금의 변화는 오래도록 편하게 작업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했다. 세밀화에서 뭉쳐진 장미꽃으로, 유화 바탕을 연필로 긁어 그린 '그저 그런 풍경'으로 자유로워진 이유다. 화가로 살아가는 방법도 터득했다. "내가 만족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 생긴대로 살아야 한다. 내 밑천대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도달한거다" 왜냐하면 "제대로 가지 않으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아름다움과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 풍경, 연약한 생명들의 미동을 읽어낸 그는 보편적인 오늘의 현실의 기록자다. 그 사이에 "동서양의 미감이 합체된 인도그림에서 수혈을 받고 싶다"는 '문성식의 욕망'이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다. 화가의 권위는 그림에서 나온다. 예술에 대한 충실성, 독특한 회화적 세계를 구축한 '아름다움. 기묘함. 더러움' 전시는 31일까지 이어진다. 2019/12/09
'미술판 도깨비' 금보성의 '1억 상금' 미술판에 '도깨비'가 있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정확한 건 미술시장이 불황으로 치달을때 등장했다는 것. 2012년, 서울 평창동에서 35년 역사를 가진 그로니치 화랑이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다. 그 문을 다시 열어 '갤러리 평창'으로 문패를 바꾸면서 알려졌다. 금보성, '젊은 화랑주' 이름은 불과 1년만에 떠올랐다. 그해 30억원에 부동산에 나온 김흥수 미술관을 매입하면서다. 2013년 '김흥수 미술관' 간판은 '금보성 아트센터'로 바꿔 달았다. 2012년 11월13일 장수현 관장이 별세하고, 김흥수 화백이 살아있던 때였다. 김 화백이 빚에 허덕여 미술관이 헐값에 팔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후 2014년 '한국의 피카소'로 유명했던 김흥수 화백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김흥수 미술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신 '금보성 아트센터'를 남겼다. 땅값 비싼 평창동에 미술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도깨비'로 불리는 금보성(54)대표 덕분이다. "원래는 '김흥수미술관'으로 그대로 하려고 했는데 김흥수 화백님 때문에 이름을 바꿨어요." 건물이 매각 되고 김흥수 화백은 갈데가 없었다. 미술관뿐만 아니라 김 화백의 자택까지 팔렸기 때문. 금보성 대표는 "그러면 여기 계세요" 했고, 김 화백은 그 자택에서 그대로 기거했다. 미술관에 있던 김 화백 그림이 다 빠지던 어느 날 화백이 말했다. "내가 자네를 모르는데 내 이름을 쓰면 되나..." "앗 걱정 되시면, 화백님 이름을 안쓰겠습니다. 제 이름을 쓰겠습니다." "내 본명이 김보성이다. 등록을 하려니까 '의리~' 김보성이 있어 등록이 안돼더라. 그래서 성씨인 김(金)을 '금'으로 바꿔 금보성이라고 했다." '금보성아트센터'를 개관했다고 알리자 '자장면집 이름 같다'는 소리가 더 많이 들렸다. 그는 되레 "자장면을 사줄테니 많이 오라"고 했다며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자장면집 같은 금보성이 '도깨비'로 회자 되기 시작한 건 2016년부터다. 총 상금 1억. 미술판에 세상 없던 최고의 상금을 내건 '한국작가상'을 제정했다. 신진, 유망작가가 아닌 60세 이상 작가들이 대상이었다.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가지면서도 소외되고 저평가된 작가를 찾는 공모전이다. 1회 선정 작가는 전주 모악산 기슭에서 작업하는 유휴열(70)화백. 58여년간 작업에 매진하며 한국미에 천착해온 내공이 인정받는 순간이었고, 지역작가로만 알려진 '유휴열' 이름 석자를 미술판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2018년 2회 '한국작가상'에 이흥덕 작가가 선정되면서 '금보성아트센터'에 이목이 쏠렸다. '한번 하고 말겠지'라는 시선과 달리 '1억 상금' 공모가 이어지자 도마에 올랐다. '전시만 해주고 상금은 안준다'등 의구심의 소문이 고개를 더 들었다. (사실과 달랐다. 1회 수상작가인 유휴열 화백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며 의미있는 일을 하는데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시도 하고 두툼한 평론집까지 받고 1억을 받아 화실을 증축했다고 했다.) 그래서 만났다. 1억 상금 '한국작가상'은 왜 만들었는지, 돈은 어떻게 충당하는지, '도깨비'같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억 '한국작가상' 왜 만들었나 ▲2015년이었다. 영국에서 '석유 부자'를 만났는데, 내가 화가라니까 그림 팔러왔냐고 묻더라. 그러면서 한국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있냐고 했다. 얼결에 백남준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가 '바보 아니냐'면서 '남준백'이 어떻게 한국사람이냐고 반문하더라. 태어난 곳이 한국이라고 한국 작가냐, 왜 남의 나라 사람을 이야기하냐고 했다. 충격이었다. -정말 충격이다. 이때는 우리나라 단색화가 세계 미술시장에 주가를 올린다고 하던 때인데...그 사람이 너무 한국미술을 모르는 것 아닌가. ▲아니다. 영국에서 주식펀드를 주무르는 사람이 소개해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세계 재벌급 부자다. 귀국해서 고민했다. 정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찾아봐야겠다. 서울대-홍대 교수 말고, 작품 하나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작가. 그래서 시작했다. -그런데 왜 60세 이상의 작가를 대상으로 한건가. ▲진짜 '한국다움'이 묻어나길 바랐다. 나이보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본 경험이다. 1회때 유휴열 화백을 선정하자 '잘했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지방작가를 선정했다고 욕도 들었다. 하지만 '한국작가상'의 정체성과 맞는 작가였다. 선정까지는 1년이 걸린다. 6개월은 공모, 6개월간 치열한 심사가 이뤄진다. 100명 이상의 작가가 공모했다. 최종 작가가 선정하면 10여명의 평론가들이 후보의 작업실을 방문한다. 장르는 상관없지만 작품수를 헤아린다. 기본적으로 5000점이상 되어야한다. -조건이 까다롭다 ▲평생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대개 중견작가들 작품은 기본 1000점은 넘지만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작가는 많지 않다. 최종 후보 작가로 올라왔어도 작업실에 작품이 없으면 탈락한다. 그래서 수상 작가가 되기까지는 쉽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해 뽑은 2회 수상자인 이흥덕 작가도 훌륭하다. 한국미협과 공동으로 작년에 시상식을 가졌지만 오는 20일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신작 전시와 함께 시상식이 열린다. 21세기 풍자도 같은 이흥덕 작품은 '한국적 팝 아트'로 민중미술을 떠나, 시대성과도 맞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작가상'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해외에서 한국 작가가 누구냐고 물었을때 머뭇거리지 않고 소개할만한 작가를 발굴 육성하는 거다. 어디에 내놔도 열심히 작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 유휴열, 이흥덕 화백은 세계 만방에 소개해도 가능성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화가가 대통령이 될수 없지만,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다. -화가가 국가라니... ▲스페인 갔을때 어디를 가나. 피카소 미술관에 들르지 않나. 세계의 문화강국은 화가들이 먹여살린다. 파리 루브르, 오르세, 노르웨이 뭉크미술관...21세기에는 작가 한 명 한 명이 국가이자 나라다. 그래서 유휴열은 화가가 아니라 '국가'이고, 이흥덕도 이제 '국가'와 같은 존재다. 피카소 그림을 보러 스페인을 가는 것처럼 한국에 유휴열, 이흥덕을 보러오게끔 해야 한다. 미술시장, 작가들을 조명하는 것은 좋은데 단색화 시대처럼 만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다. 다양한 작가들의 그림을 인정하고 소개하는 '다양한 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을 화랑이나 아트딜러가 해야한다. -1억 상금이 화제다. ▲사실, 1억 상금 한국작가상 공모전은 총 2억8000만원이 든다. 1억은 작가에게 지급되고 나머지는 전시비와 평론집 제작에 투입된다. 1회 유휴열 평론집은 총 40여명의 인사들이 작품에 대한 평을 썼다. 평론비만 1인당 100만원으로 4000만원이다. 미술평론가뿐만 아니라 철학자 시인 법조인 목사 교수 등에 의뢰해 글을 받았다. 한 명의 작가를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글을 쓴 평론집은 처음일 것이다. 국내 모든 잡지에도 광고를 한다. -평론비가 4000만원. 그렇게까지 돈을 쓰는 이유가 있나 ▲개인당 단 돈 100만원이지만, 우리 작가를 꼭 기억하게 하고 싶어서다. 물론 계산하면 돈이 아깝다. 주위에선 평론 수십명을 해서 무슨 의미가 있냐고들 하지만, '한국작가상과 작가를 평론가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보람이 있었나. ▲1회때 유휴열 화백 평론을 일면식도 없던 홍익대 서영희 교수에 글을 부탁했을때다. 서 교수가 왜 나를 선택했냐고 물었을때, 피카소 미술관에서 근무했었지 않나, '죽은 피카소와 싸울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유 화백을 만난 서 교수는 이런 사람이 왜 아직까지 무명이냐, 이렇게 좋은 작가가 무명인게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유휴열의 작품:삶과 놀이의 화엄세계'를 주제로 거의 논문급으로 평을 썼다. 바로 이 점이다. 이렇게 제도권에 없지만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작업하는 우리 작가를 알리고 싶다. 다양하게 글을 실은 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작가가 그린 우리 그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궁금했다. 유명 대학을 나오고 메이저갤러리에서 속해 있어야만 관심을 받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가 많다. 이들이 돌아가시면 어쩔 것인가. 때가 되면 '한국작가상' 작가를 모시고 세계 미술시장을 노크할 예정이다. -1억 상금,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인가 ▲미술판은 존경하는 어른이 필요한 시대다. 작업을 묵묵히 하는 진정한 화가를 조명하고 싶다. 젊은 신진작가들만 찾는 화랑계 추세로 원로작가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곰삭음의 시간을 견디며 우리다움을 표현해내고 지켜오면서 한국 미술을 발전시켜오는 이들의 공적을 빗대어 볼 때 1억 원이라는 상금은 결코 많은 돈이 아니다. 작업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싶다. -후원도 없다. 개인이 주는 1억 상금, 어떻게 마련하나. ▲전적으로 내 사비로 준다. 그림을 통해 벌었으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도와줘야겠다는 의지다. 주변에서도 미쳤다고 한다. 미술관도 대관하면 돈을 벌고, 그림도 팔면 나누면 되는데 왜 초대전만 하고 그림팔린 돈도 다 돌려주느냐고 한다. 그러면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한번 해보니 되더라. 1년 해보니 괜찮았다. 2년째도...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진짜 내가 그린 그림을 팔아서 상금을 마련한다. '무슨 돈으로 하냐'고 의아해 하지만, 돈이 생기니까 한다. 빚내서는 안 한다. -미술판이 불황으로 힘들다고 하는데 거꾸로 간다. ▲내가 그로니치 화랑을 인수할 때도 미술시장은 어려웠다. 경기가 안좋아서 그 화랑이 문을 닫았는데, '갤러리 평창'을 할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왔다. 해외 관광객도 방문해 늘 붐볐다. 그래서 더 큰 공간이 필요해서 찾고 있는데, 마침 김흥수미술관이 매물로 나온 거였다. 헐값에 샀다고 하지만, 리모델링만 10억이 더 들어갔다. -금보성 자금에 대한 흉흉한 소문도 있다. ▲나도 들었다. 세 가지가 있던데. 첫번째는 재벌 마님의 후원, 두번째는 펀드를 받았다, 세번째는 조총련 돈을 쓰고 있다.는 말이 세간에 돌고 있더라. 정확이 이야기하겠다. 재벌 마님 후원? 그건 절대 아니다. 난 결혼도 했다(부인은 동갑내기로, 이불회사를 운영한다) 생각보다 내가 자산이 많다. 회사도 운영하고 부동산도 있다. 펀드? 수익이 나야하는데 무료 전시하는데 무슨 이익이 나나. 이것도 아니다. 조총련 돈? 내가 일본에 오랫동안 있어서 그런 소문이 난 것 같은데 조총련이 공짜로 왜 돈을 퍼주겠나. 1억 상금때문에 3년 넘게 세무조사를 받고 있지만 문제가 없다. 당당하다. -그림만 팔아서 미술관을 운영하고 상금을 주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대학 1학년때 첫 전시를 연 후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개인전만 58회 열었다. '한글 시리즈' 작품은 구상 비구상 공공미술까지 넘나든다. 30년 넘게 작업하며 쌓아온 고객층도 다양하다. -'한글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유명세는 없지 않나. ▲금보성이 되기까지 7개의 가명을 썼다. 가장 많이 알려진게 '금요비'다. 화가가 되기전 시인이었다. 그 이전엔 목사였다. 신학대를 졸업했고, 15년간 해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한글 시리즈'는 시를 쓰면서 착안했다. 시를 쓰다보니 시에 색을 올리면 그림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미술학원도 다니지 않았고, 누구에게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다. 한글을 풀어 퍼즐처럼 만들고 색을 칠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상, 비구상으로 변했다. 그렇게 한글 시리즈는 윷놀이, 아리랑 시리즈로 진화했고 '한글 작가'가 됐다. -잘 팔리는 비법이 있나. ▲내 휴대폰에 있는 고객만 1만여명이 넘는다. 이 친구가 잘 하고 있나 없나 관심있게 봐주는 거다. 페이스북에 지속적으로 내 활동을 일기쓰듯 알린다. 누굴 만나고 누구 전시를 하는지 몰래하지 않고 다 공개한다. 한국작가상 시상식이 돌아오네, 어떤 작가가 상을 타네를 다 알고 있다. 그들이 도와준다. 한때 내 그림을 가지고 있으면 성공한다는 말이 돌았다. 재벌 정치인 군인 언론인 기업인 심지어 스님도 내 그림을 사갔다. 수십년전부터 맺어온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글로 그림을 그린 그림. 한글 그림은 그 자신만을 위한 그림이다. 이름을 풀어 퍼즐처럼 맞춰 기운생동을 색칠한다. 누군가는 부적같은 그림이라고도 한다. 돌잔치는 물론 기념일때마다 주문이 들어온다. 윷놀이, 아리랑시리즈로 접목한다. 예를 들어 박현주를 아리랑시리즈로 해달라고 하면 행복하고 즐겁고 축제처럼 이름을 분리시킨다. 윷놀이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윷을 던져 후두둑 떨어지는 것처럼 이름을 분리해 신명나게 만든다. 그 사람의 이름에 축복을 해주는 거다. 하나밖에 없는 내 그림. 맞춤형 그림이다. 그러니 살 수 밖에 없지 않나. -예술은 지난한 작업이라고 하는데, 그림 참 쉽게 한다. ▲왜 그림을 어렵게 그리나. 편하고 쉽게 한다. 이름을 배열해야 하니 조수도 없다. '문자도'같은 개념이지만 다른 구조다. 선으로 드로잉하는거다. 머뭇거림 없이 두두둑 하면서 슥슥 그린다. 어젯밤에도 100호짜리 4점을 했다. 아무런 어려움 없다. 1분도 안걸린다. 컬렉터와 이야기를 하면 금방 머릿속에 싹 들어온다. 그 사람 에너지에 따라 채도를 배열하면 끝이다. 내가 그렸던 그림을 사가는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맞는 그림을 그려서 주는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한다. 한글로 하니까 더 의미있다. 어려울 것 하나도 없다. 손이 생각보다 빠르다. 금방 그린다. 즐겁게. 얼마든지 작업을 할 수 있다. 누군가는 한글이니까 쉽게 하지 하지만, 이 방법이 나오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틈틈히 늘 그림을 그린다. 저 자두도 내가 그렸다.(벽에 걸린 자두는 진짜 자두처럼 감쪽같다. 추상화 한글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이다) 작가를 도와주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는 그는 자신은 화가라고 강조했다. "한글 시리즈를 더욱 흥이나고 아름답게 진화시켜 세계인들과 교감하고 싶은 게 꿈입니다"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 화가를 돕는다. 참 아이러니하다. ▲나도 신기하다. 목사의 길을 가던 나에게 하느님은 왜 그림을 그리게 했는지 모르겠다. 2012년 갤러리를 시작하면서 현재까지 1만6000명의 전시를 했다. 상금을 주는 것도 계속한다. 1억 상금 말고도, 올해의 작가상 3500만원 등 청년작가 지원뿐만 아니라, 전봉건 문학상 등 총 10개의 상금을 지원한다. 5년째 비행경비 숙소를 다 제공하는 해외평론가 세미나도 열고 있다. '머니게임'이 치열한 미술판에서 돈을 퍼주는 그는 긍정의 힘이 원동력으로 보인다.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움을 표현했다. "작가들이 이 멀리 평창동 골짜기까지 와서 전시를 하니 감사할 따름이죠. 갤러리가 밥 먹을 힘만 있으면 우리 화가들을 알려야 합니다. 케이팝이 한류를 만들어 세계를 흔드는 것처럼 우리 한국미술도 그런 시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분명 될 수 있어요." -돈 안되는 일만 하고 있다. 왜 혼자 이런 일을 할까, 후회는 안해봤나. ▲옛날 일제때 간송 전형필이 우리나라 작품을 못빠져나가게 했는데, 지금은 작가를 해외 진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림으로 번 돈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미술관을 예배당으로 쓰지 않고 작가들 전시를 무료로 열어주고 있는 것도 그 이유다. 내가 미술판에 봉사할 수 있는 곳이다. 셈을 안하고 싶다. 상을 주는 곳이 많지만 기억이 안난다. 그게 오히려 감사하다. 잊어버리니까 좋은 것 같다. 내년에는 '김흥수 미술상', '황창배 미술상'도 만들 계획이다. "상을 너무 남발하는 거 아니냐고요? "작가들이 잘 살 수 있다면, 또 유족들이 화가의 명예를 높이는데 도와주고 싶어요. 쥐어짜서 하는 저보다는 어느 기업인이 눈을 조금만 돌리면 더 크고 폼나게 할 수 있겠죠. 누군가는 꼭 해야하는데, 누구도 안하니 제가 하는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제 몫을 하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하냐고 물으면 답이 안나와요. 하하하" 2019/11/18
'거미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 '지구 공생법' 거미줄에 걸려든 그는 1973년 아르헨티나 투쿠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업협동조합에서 일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 의미를 지닌 '협동' 단어 때문에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로 의심 받았다. 부모는 유럽으로 망명, 이탈리아 베니스 근처에서 11년간 살았다. 이국땅에서 어린시절 맞닥뜨리건 거미였다. 몇백 년 된 집 다락방에는 수많은 거미가 드글거렸다. 그때 그는 "과연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누구일까?"를 상상했다. 이 생각은 지금의 그를 만들어냈다. 거미와 함께 거미집을 만드는 '스파이더+맨' 설치 미술가로 급부상한 토마스 사라세노 작가다. 자신은 손 하나 안대고 거미가 만들어낸 '거미줄'을 전시장에 선보여 주목받고 있다. 그 유명한 '거미 작업'을 들고 서울에 왔다.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연다. 전시 개막일인 30일 서울에 온 그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당초 '내한 하지 않는다'는 공지와 달리 이날 베를린에서 1박2일 일정으로 날아왔다. 다음날 바로 스페인 마드리드로 간다는 그에게 너무 짧은 일정이지 않냐고 하자 "이렇게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좋긴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탄소 배출에 기여를 해야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마음이 개운치 않다"고 했다. 거미와 함께 하면서 자연환경주의자가 됐다. 그의 스튜디오는 작업을 하면서 늘 이렇게 하면 얼마나 쓰레기가 나오는지, 환경오염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살피는 일이 생활화가 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시에 직접 비행기를 타고 오지않아도 되는 웹(아라크노만시)을 개발한 이유"라고 했고, 또한 "설치미술품들을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옮길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있다"며 환경의 예술적 실천가로 진지함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전시장에도 오지않는 거만한 아티스트라고 받아들일까봐 비행기를 타고 왔다"며 한국 관객들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그는 "나의 작품은 정말 예전에는 세상에서 간과했던 작은 아름다움을 인지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거미집을 전시장에 내놓은 건 "실험적인 작업"이라고 했다. "거미줄(집)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물음도 있지만 "이러한 작품으로 미술사적 구분을 짓는 선을 왔다 갔다 하는 경계의 자유도 흥미롭다"고 했다. '스파이더+맨'으로서 그는 거미를 협력가로 칭했다. "내가 거미와 컬래버레이션을 하는게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나와 함께 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스튜디오에는 거미가 대략 120~150마리가 함께 한다고 했다. 작가의 거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거미줄의 추상적인 3차원 구조를 우주, 공동생활, 사회성, 생존 등의 이슈와 연루된 하나의 징후로 해석하면서 시작했다. 그는 거미망의 모티브와 모델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며, 인공적인 환경에서 거미를 키우는 실험을 진행했다. 거미와 관련된 그의 대표 프로젝트는 거미망 전문가들의 학제 간 네트워크인 ‘아라크노필리아(http://arachnophilia.net/)’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거미망의 유형을 보관하고, 스캔해 디지털로 아카이브하고 있다.그저 작업에 ‘활용’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거미망의 멸종에 대항하는 생태학적 보관소로 발전 중이다. 그는 "거미 종은 1억6천년이상 살아있었기 때문에 나보다 지구에 대해 알거라 생각한다"면서 "거미가 나한테 말하는 것 같다고 했다. '토마스야 너는 지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 자신을 “사라세노는 행성 지구 그 너머에 살며 작업한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행성 지구 그 너머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작은 종, 거미를 주인공을 내세워 작업하게 만든 작품 '콘서트'는 압권이다. 갤러리현대 전시장 2층 검은 커텐을 헤치고 칠흑같은 어두운 공간을 조심조심 들어가면 상상도 못한 작품이 펼쳐져 있다. 다이아몬드꼴로 친 하얀 거미집이 공중에 둥실 떠 있다. 한줄기 빛속에 드러난 거미줄은 의외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인간들의 호기심을 빨아들인다. "휴대폰이나 조명을 먼저 보지 말고 어둠에서 익숙해져라" 더듬 더듬 눈을 밝히자 작가가 말했다. "이제 거미줄을 보면 먼지의 움직임까지 느낄 수 있다"면서 "이 작품은 이 세상에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가 같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하얀 거미줄을 비춘 한줄기 빛은 벽면에 둥근 보름달이 되어 거미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빛줄기를 따라잡는 건 보석처럼 반짝이는 먼지 입자들. 숨막히는 고요함속 갑자기 딩동동동동 소리가 울려퍼진다. 먼지의 움직임이 잡혔다는 신호다. "먼지의 진동 주파수와 거미망에 있는 거미가 움직이는 진동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상호작용이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는 것 같아 작품 제목이 '콘서트'로 지었다고 한다. 현재 작품에 앉아있는 거미는 우리나라에서 공수된 무당거미다. 다른 종의 거미 2~3마리가 일주일에서 4주, 길게는 8주에 걸쳐 만든 거미줄은 층층이 방사형으로 퍼져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 알지못할 경계심을 사그라들게 한다. 꺼름칙한 고정관념을 슬쩍 흔들리게도 한다. 인간이 구현못할 하이브리드 건축물로 인식된다. 이 정도 생각까지 도달하면 그가 거미와 만든 작업은 성공한 셈이다. 그의 작품 세계 핵심 키워드는 ‘공생’. 그는 오늘의 환경과 기후 문제를 고민하며 가까운 미래에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거미의 시점으로 세상을 본다는게 큰 차이다. 자연세계으로 관점이 바뀐 건 동양사상이 탑재된 덕분이다. 불교에 관심이 많고 하루 2번 명상을 한다고 했다. "명상을 하면서 햇살 한 줄기에도 새로운 시각이 펼쳐진다는 것을 느꼈다. 불균형과 관계를 확장하는 아름다움을 전파하는데 내 작품이 이바지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큰 꿈을 갖고 있는 것보다 내 자신부터 수행을 해야겠다는 관점에서 작업하다보니 이런 작품이 나왔다" "거미가 되고 싶지만" 실은 거미보다 거미줄, 그러니까 "거미줄의 창작물에 관심이 더 많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연구된 거미줄들은 유명한 과학연구지에도 등록됐다. "이런 연구들은 거미만 연구했던 과학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레퍼런스가 되기도 한다"면서 "그래서 거미줄의 연구가 더 신기했다. 이를 통해 정보의 영역이 조금 더 확대되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예술가로서 과학자같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는 "내가 과학자라면 파리 협약이라던지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있는 강대국의 상황을 보면 참담할 것 같다"며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술로서 작품을 통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세상을 바꾼다면 작가로서 성공한 것이 아닌가"라고 여긴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종과 조화롭게 살기위해서는 큰 변화가 필요한 시급한 때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성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하는 자세를 통해서 세상의 새로운 정보, 또 그 정보를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을 만들어 낼수 있지 않을까요?" 먼지를 소리로 잡아낸 이유도 "지구상에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도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장치다. "먼지라는 것. 목소리가 없는 존재들이 어떤 소리를 낼까에 대해 생각을 한 건" 환경오염과 맞닿아 있다. "지구상에서 매 순간 아홉명의 사람들이 공중의 질에 따라서 기관지 문제로 죽는 사람이 있다는데, 먼지가 우리의 움직임이나 숨(호흡)에 따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시각을 바꾸게 하고 싶었다." 어릴적부터 거미줄의 아름다움에 빠졌다는 그는 "거미를 해충으로 박멸시키는 인식을 내 작품이 바꾸게 하고 있다"며 "진짜 보니 아름답지 않은가"라며 반문했다. 1박2일도 못자랄 정도로 거미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그는 분명 "이 곳 어딘가에도 거미줄이 있을 것"이라며 창고문을 열다 흥분하며 소리쳤다. "아, 여기 거미줄이 3개나 있다." 금방 거미줄을 찾아낸 반가움이어서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거미줄을 갤러리 정중앙에 내놓고 '너희들이 아티스트야'라고 기회를 준다면"이라고 하다가 "거미들이 받아들일지 모르지만"이라며 거미의 시선으로 말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할 수도 있고 비좁은 창고로 다시 들어가 숨을 수도 있다"면서 "거미줄을 봤을때 치우려고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다시 거미가 된 듯 강조했다. "기후변화로 여러 생태계가 파괴되고 멸종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먼지라는 것은 생명의 초기 단계다. 또 거미줄은 인간과 긴밀하게 연결된 웹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부터는 거미줄을 봤을때 집착하면서 청소하지 말고 함께 공존하는 것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거미줄을 예술로 승화시킨건 건축가 이력도 한몫한다. 원래는 건축학도였다.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해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 회사에서 근무했다. 1999년 미술을 복수 전공하기 위해 다시 학교에 진학, 200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에서 유학했다. 예술가 토마스 바렐(Thomas Bayrle)과 벤 판베르컬(Ben van Berkel), 건축가 피터 쿡(Peter Cook)에게 수학한 그는 2002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2003~2004년 이탈리아 베니스 IUAV(Design and Production of Visual Arts)에서 공부하면서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세계적인 설치미술작가 올라퍼 엘리아슨과 만나면서 환경문제에 대해 사고가 확장됐다.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거미줄처럼 미세하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대형 설치작품을 선보이면서 이름세를 알렸다. 칼더 프라이즈를 수상한 후 2011년부터 국제무대의 새로운 스타로 도약했다. 2012년 미국 MIT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한 첫 미술가로도 기록되어 있다. 비선형 형태의 모듈 구조물 하이브리드 건축 공간인 '공중정원' 작가로 유명하다. 거미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지만, 이번 전시에는 그의 지구에 대한 인류의 윤리적 태도에 관한 매우 급진적인 개념이 담겼다. 지하 전시장은 사라세노의 건축적 실체를 경험하는 장이다. 건축가로 훈련받은 그는 20세기 건축의 경계를 허문 위대한 실험자의 계보를 자신의 작품에 빠르게 흡수시켰다. 하늘에 떠다니는 주거 형태는 어떤 모습을까? 국가의 경계와 지역의 한계를 벗어난 초국가적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 이런 질문에서 시작된 작품은 스파이더맨이 쏘아올린 듯한 공중 도시 풍경을 선사한다. 전시장 양 벽면을 감싼 월페이퍼 작품 'Seoul cloud Cities'는 제목처럼, 서울의 익숙한 풍경과 작가가 오랫동안 지속해온 연구 프로젝트 '클라우드 시티즈'를 결합한 장소 특정적 작품이다. 대안적인 형태의 도시성(urbanism)과 SF영화의 무대처럼 부유하는 거주지를 꿈꾸는 작가의 도전을 시각화한 연작이다. 남산타워, 롯데타워, 63빌딩 등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축물과 수많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서울의 풍경위로 사라세노가 꿈꾸는 ‘구름 도시들’의 모습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가상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거미에서 인간으로, 먼지에서 구름으로, 구름에서 도시로, 빛에서 어둠으로, 지구에서 우주로... 건축, 환경학, 천체, 물리학 열역학, 생명과학, 항공엔지니어등을 가로지르는 그의 작업세계는 미래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보인다. 과연 '인류세' 이후에 동시대의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토마스 사라세노의 개인전에서 느껴볼 수 있다. 전시는 12월8일까지. 2019/10/31
매달린 조각의 경쾌한 반사...신한철의 '증식' 미술관이 아닌 화랑, 갤러리에서 조각전이 뜸해진지 오래다. 조각은 일단 크고 무겁고 거대함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동시대 조각은 공공미술 '거리 미술'로 나가 도시의 풍경을 잠식하고 있다. 미술애호가들이 조각보다 회화를 선호하는 탓도 있다. 화랑가는 '조각전보기를 돌 처럼'하고 있다. 이런 추세속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현대화랑이 튀어올랐다. 지난 7월 조각가 박상숙의 개인전을 21년만에 열어 주목받았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풍선처럼 부풀게 만든 대형 조각전이었다. 그 전시는 박상숙 작가보다 조각을 지배했던 브론즈와 대리석의 영광을 이젠 스테인리스 스틸로 넘겨준 시대라는 것을 입증했다. 반짝임과 동시에 반사반사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스테인리스 스틸은 동시대 무엇보다 매혹적인 재료다. 동시대 세계미술시장을 접수하고 있는 미국 현대미술가 제프쿤스나 인도 출신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무기도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제프 쿤스가 1986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약 1m 높이 '토끼' 조각은 지난 5월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9110만달러(약 1084억원)에 낙찰되어, 현존 작가의 작품가격()으로는 가장 비싼 예술품이 됐다. 쿤스의 작품은 2011년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 옥상에 거대한 '보라색 하트 모양' 사탕 작품 '세이크리드 하트'가 설치되어 있다. 또 아니쉬 카푸어는 미국 록펠러 건물앞에 '하늘 거울'(2006),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있는 '구름 문' (2004)을 설치해, '마법같은 거울 조각'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최고 미술관 이태원 삼성 리움 미술관 정원에도 세워져 있다. 높이 15m, 73개의 스테인리스 스틸공이 마치 알알이 포도송이가 세워진 것 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는 반짝임을 자랑한다. 이런 유명세탓에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은 모두 제프 쿤스나 아니쉬 카푸어 작품으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그도 전시장에서 늘 이런 소리를 듣는다. "제프쿤스 같다, 아니다. 아니쉬 카푸어 같은데?" 차별화가 생명인 미술계에서 조각가 신한철(61)은 면역력이 강했다. 그 무성한 말들을 스테인리스 스틸 재료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요. 그 색은 제프쿤스가 많이 쓴 색이죠. 저도 그게 내 작품과 적합하다 생각해서 차용을 했어요." 붉은색과 보라색, 미술 좀 안다고 한다면 바로 '제프 쿤스'가 떠오르는 그 색을 한 '풍선같은 작품'앞에서 그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옷(색)을 입히면 가볍고 비조각적인 느낌이 있어요. 그렇게 조각의 무거움을 떨쳐버리는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지난해부터 KIAF등 아트페어에 선보여 눈길을 끌어온 '신한철의 증식'이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웅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올해 환갑이다. 70, 80세를 준비하며 이제야 작가로 가는 것에 시동을 걸었다"며 흰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빨간 풍선을 묶은 것 같은 작품이 그를 품어내며 수십명으로 분신시켰다. "안에는 비어 있어요. 가볍죠" 그가 가느다란 선에 매달린 뭉친 원들을 손가락으로 툭 건들자, 흔들 흔들 움직인다. 뉴턴처럼 중력의 법칙이 적용됐다. "무게중심이 딱 맞았어요. 결국 균형이 잘 맞았다는 것인데 무중력적인 상태를 느끼게 하지 않나요?" 과학과 직관은 가벼움의 미학에 날개를 달았다. 빨강, 초록, 보라색...가는 선 하나에 중심을 잡고 있는 원형 뭉터기들은 발레리나 몸짓처럼 우아함도 발산한다. 동시대 미술은 모방과 차용의 치열한 경쟁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 무한반복속 새로운 시선, 새로운 발견이 힘이다. 수년간 훈련하다보니 이젠 어떤 형태도 딱 세울 수 있게 됐다는 그는 원래도 '구(sphere, 球)작가'였다. 변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올해로 환갑의 작가가 가벼워진 건 수십년간 무거움의 터널을 지나왔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할때도 그랬다. "동기들이 조형적으로 풀어낸 조각으로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고 다들 잘나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영, 감을 못잡고 헤매었다." 대학때부터 '생명의 에너지'가 화두였다. '이것을 어떻게 구현 할 것인가' 몰입과 번뇌는 구(원형)로 이르렀다. "구를, 동양의 정신성인 음과 양의 합일된 생명체로 보자" 작업이 풀렸다. 그때부터 흙으로 원형을 끊임없이 만들었고, 구는 작업의 모티브가 됐다. '생명의 에너지'로 풀어낸 구는 1997년 첫 개인전에 선보인 후 작업실에서 빛이 났다. 수십개의 구가 구르던 작업장에 현대화랑 박명자 대표가 방문하면서다. 크고 작은 구들을 발견한 박 대표는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된다며 1999년 개인전을 열었고, 그때부터 '구 작가'가 됐다. 이후 급기야 쟁쟁한 선배 조각가들을 제치고 전쟁기념관 6.25전쟁 상징조형물 제작 작가로 선정됐다. '6.25전쟁 상징 조형물'은 80억 프로젝트로, 그가 3년간 투지를 발휘한 역작이다. 2003년 전쟁기념관 입구 중앙에 자리 잡은 조형물은 '청동검과 생명수 나무'를 제목으로 높이가 27m에 달한다. 그 때에도 '신한철의 구'는 하늘 높이 솟은 청동검의 받침으로 쓰였는데, "유구한 역사와 민족의 번성을 기원하는 정화수를 형상화했다." 40대 초반 온 힘을 6.25 상징 조형물에 다 쓴 그는 '생명의 에너지'의 변신을 추진했다. '구의 현대성'의 자기분석에 돌입했고, 그 이미지를 유지한채 그렇게 크고 작은 구 형태의 증식이 시작됐다. "'누구 누구 모작같네'라는 말에 개의치 않아요. 구로 만든 작품은 어쩌면 제프쿤스나 아니쉬 카푸어보다 더 먼저 썼지만 제가 노출이 안된거잖아요." 그는 "나는 구를 발명한 작가"라는 자부심이 있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 조각품 심의할때 원형으로 된 작품은 다 떨어졌을 정도로 '구=신한철'로 각인 됐었다"며 '구 작가'로서 이젠 '구의 변용'을 선언했다 "구는 하나의 오브제이니까 이제는 누구나 쓸수 있는 것이고, 또한 포스트 모던시대에 차용도 예술입니다. 저는 그동안 6m짜리 구도 만들어봤어요. 이젠 구를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기에 이르른거죠." 생명의 에너지를 담은 '구의 변신'은 점점 '신한철'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내 작품은 증식된 형태의 구의 이미지로 만들어진겁니다. 그래서 형태가 같은게 하나도 없어요." 실제로 크고 작고 그보다 작고, 그보다 좀 더 큰 구들로 '증식'한 작품은 서로 뭉쳐 떨어지지 않고 어우러져 '신비의 조합'을 보인다. '생명의 에너지'를 화두로 힘, 운동, 성장, 삶의 순환을 호흡하며 40여년간 자기존재를 확인해온 작가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증식'한 새로운 버전에 "'건강한 생명체'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부조화가 심하지 않나요? 이념, 경제 갈등...조화를 이루려면 계층간, 가족간, 세대간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해야합니다. 이 중 뭐가 하나가 없다고 하면 균형이 깨지는 거죠. 같은 형태 없이도 완벽하게 서 있는 내 작품은 조화이고 공존을 보여줍니다. 다름과 다양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조각가로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공공미술에 취해 갤러리에 들어오지 못한 조각 전시. 그는 15년만에 갤러리에서 여는 전시를 위해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어필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조각은 모두 중력의 시녀다. 세워지는 조각, 그는 모더니즘에서 방향을 찾았다. 구의 형태는 바꿀수 없었다. "작가들이 안 건드린게 뭘까?" 그래서 "결국은 뒤집은 겁니다. '세운다'라는 전통을 깨고 중력을 거슬러 매달은 거죠." 전시장 천장에서 탄생한 듯 거꾸로 매달린 구의 '증식은 SF영화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 같다. 현대적이면서 세련된 분위기로 '시대성을 뛰어넘는 듯한 조화'도 보여준다. 매달렸지만 편안하게 보이는건 그의 '번뇌의 덩어리'가 가벼워진 덕분이다. "알수 없는 과학자처럼 크기와 배치를 면밀히 계산해 나온 작품"이라는 그는 재치있는 시각으로 자신의 조각에 생기를 선사했다. 둥근 오브제에 조화와 공존의 모든 것을 품고 무엇으로도 변태(metamorphosis)하며 반사 반사하는 작품앞에서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왜 작품을 투명하게 하느냐고 물어보는데, 할 말이 있다"며 화랑주를 슬쩍 바라보며 의외의 말을 전했다. "사실, 나는 이것을 움직이게 하고 싶었어요. 관객들이 와서 잡아보고 돌려보다 떨어지면 다시 붙이고, 그런 일이 생겼으면 했는데..." "작품의 본래 형태미만 강조하는 시대는 과거 얘기잖아요. 모두 친절했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신작이 작품이 관객들과 좀 더 가깝게 접근하기를 바랐다. 조각의 무거움과 위엄을 떨쳐낸 작가는 '비싼 작품 만지지 마시오'라는 화랑의 무언의 메시지도 떨쳐내고 싶은 마음이다. "만져보세요. 절대 안 떨어져요. 하하하~" (화랑 주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산뜻하게 변신해 '응시의 진지함'을 다채롭게 반사하는 신한철의 '증식'전은 19일까지 이어진다. 2019/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