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다시 깨운 광주비엔날레와 김선정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오후 5시 30분. 검은 마스크를 쓴 20여명이 구 광주국군병원속으로 들어갔다. 사위는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 울긋불긋 단풍든 키 큰 나무들과 깨진 창문틈까지 자란 초록 풀들, 구석 구석 건물을 감싼 담쟁이 덩쿨들이 그동안 만끽한 자유를 숨긴채 딱 달라붙어있다. 텅빈 건물은 사막보다 더한 황량함과 공포감도 전한다. 건물 뒷편을 걸어 계단을 통해 올라온 구 국군광주병원 본관 2층 대강당은 어둠의 세상이다. 해질 녘 창문 빛을 통해 드러나는 방들은 켜켜이 쌓인 먼지에 점령되어 있다. 페인트가 너덜너덜 벗겨진 벽, 누군가 놓고간 허리 보호대, 반쯤 열린 창문틈에 걸린 바지, 발에 밟히는 담배 꽁초들이 새삼 오싹하게 한다. 숨죽여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짧은 비명소리도 간혹 터진다. 먼지쌓인 당구대와 어두운 세면장에서 갑자기 당구공이 스르르 움직인다. 병원 강당에서는 사람도 없는데 스크린이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인기척은 공포체험같은 경험을 선사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즐길수 없다. 관람객들의 발걸음은 이곳에 오기전보다 더 무겁다. 40여분간 관람이지만 38년전 역사로 들어간 기분이다. 태국 현대미술가이자 실험영화 감독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tchatpong Weerasthakul)의 작품 '별자리'가 2018광주비엔날레 핫 이슈로 부상했다. 꼭 봐야할 전시로 입소문 나면서 전국에서 관람객이 찾아오고 있다. 20명 제한인데, 주말에는 50명 넘는 날도 있다고 한다. '국군광주병원은 광주 시민의 기억을 먹고 존재한다'고 파악한 아피찻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기반을 둔 미국 영화 작가 스탠 브래키지를 오마주, 건축적 형태로 리메이크하듯 그림자 잔상을 찾았다"고 했다. 작품은 병원 안에 쌓인 먼지나 유리 조각 하나 손대지 않고 그대로의 공간에서 당구공과 스크린을 이용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흔을 보여준다. 광주비엔날레 GB커미션을 통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구 국군광주병원(5·18사적지 23호)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당한 시민들이 치료를 받았던 곳이다. 2007년 전남 함평군으로 이전하면서 문을 닫고 폐쇄됐다. 2014년 11월에 국방부에서 광주시로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병원 옛터의 산책로를 개방했지만, 병원 건물을 개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휴관일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국군병원 아피찻퐁 전시 관람은 매일 오후 5시 30분, 7시 두차례 진행된다. 10여년간 죽어있던 건물을 심폐소생한 건 예술이다. 아무도 몰래 움직이는 당구공처럼 '지금도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듯한 작품을 통해 다시 5.18민주화운동을 상기시킨다. 국군병원 맞은편 폐허인 붉은 벽돌 교회도 오랜만에 활기다. 풀숲속 하얀 십자가를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는 '국광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은 거울들이 매달려 있어 흠짓하게 한다.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참여 작가로 영국 권위 미술상인 터너프라이즈에 두 번 노미네이트된 마이크 넬슨의 작품으로 거울을 통해 시간과 역사의 울림을 전한다. 매달린 거울 작품을 내놓기까지 작가는 몇차례 내한, 텅빈 병원을 걸어다녔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만 있지 않다'는 불편한 느낌을 느꼈다고 한다. 다른 존재의 형체가 반복적으로 보였는데, 건물안 수많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더 강렬해졌다. 그 효과는 작가를 더 불안하게 했고, 내가 왜 거기에 있고 그 건물 자체가 왜 남아 있는지를 스스로 묻게했다. 벽면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던 모든 이의 눈이 담겨 있는 60여 개의 거울을 떼어내 교회에 걸었다. 오래된 교회에 거울을 다시 거는 작업을 통해 작가는 일종의 배출 작업으로 과거의 연옥으로부터 탈출하게 했다고 전했다. 축적된 시간의 증거이자 역사로 증언자인 병원 거울은 세상밖으로 나와 또 다시 역사를 재생한다. 현대인과 마주한 거울은 이제 휴대폰속으로 들어가 그 자체로 역사를 저장하게 한다. SNS를 통해 활발하게 공유하는 밀레니얼 세대도, 외국 관광객도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새롭다. "유명 감독 아피찻퐁과마이크 넬슨의 작품을 감상하러 왔다가 깨지고 낡은 병원이 왜 그대로 남아있는지, 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 의미를 알게 되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입을 모은다.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살린 작품들을 본 오월어머니집 회원들은 “그날 이후 오지 못했던 곳인데 오월의 영혼을 달래준 거 같다”며 "광주비엔날레가 올해로 12회째인 데 오월정신을 구현한 의미 있는 비엔날레"라고 평하고 있다.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2018 광주비엔날레'가 초심으로 돌아간 분위기다. 두번째 방문해 찬찬히 돌아본 광주비엔날레는 창설 배경과 정체성을 각인시키며 역사의 축적과 성찰, 치유의 묵직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95년 9월 20일 개막한 제1회 광주비엔날레 ‘경계를 넘어’를 환기시키는 이번 비엔날레는 '상상된 경계들'을 주제로 11명 큐레이터가 동시대 화두를 시각적으로 다채롭게 펼쳐냈다. 43개국 165작가가 참여 300여점을 쏟아낸 전시는 광주비엔날레 창설배경인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담은 작품들이 두드러진다. 광주비엔날레의 정체성을 반영해 아시아 작가의 참여도 69%를 차지, 여성·이주·노동등 아시아 현대미술의 첨예한 현장을 접할 수 있다. 개막전 북한미술전시로 화제였지만, 개막후 달라졌다. 공개되지 않았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사적지 2곳이 더 인기다. 옛 국군병원과 함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에 의해 사용되었던 구 전남도청회의실인 5·18민주평화기념관 3관도 발걸음이 모아지고 있다. 민주평화기념관 영어 독일어 도슨트는 작품을 설명할때마다 북받치는 아픔에 눈시울을 붉혔고, 해외 관광객들이 공감대를 이뤄 눈물을 보인다고 한다. 이 2곳 말고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전일빌딩과 광주비엔날레 5·18민주화운동기록관도 2018광주비엔날레 기간 시각 문화 현장이 되어 5.18 현장을 국내외에 알리며 화해와 치유의 장이 되고 있다. '금기의 벽'을 깬 건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54)의 열정 때문이다. "이번 비엔날레를 계기로 국군병원과 전남도청회의실을 시민들에게 개방한 건 당시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하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불도저 스타일이다. 일단 밀어붙이는 성격인 김 대표는 '개방은 안된다'는 광주시청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잠깐 공간만 보겠다며 열쇠를 받아든 김 대표는 미리 불러들인 마이크 넬슨, 아피찻퐁등 세계적인 설치미술작가들과 함께 국군병원에 들어갔다. '세월의 묘지'같은 건물은 작가들의 신작 욕망을 자극했고, 그걸 알아챈 김 대표는 시청을 설득했다. 수십차례 찾아가 결국 개방 허가를 받고 작가들에게 공간을 내줬는데, 아픔이 서린 건물이어서인지 으스스한 에피소드를 방출했다. 사진작가 백승우는 혼자 건물을 찍으러 갔다가, 아무도 안보이는데 저벅저벅하는 발걸을 소리에 놀라, 그 다음부터는 스텝들과 함께 움직였다. 알고보니 동네 주민이었는데, 그 사람도 열린 문으로 몰래 들어왔다가 누군가 사진을 찍고 있어 깜짝 놀라 숨어있었다고 한다. 또 영상 설치작업은 고사를 지낸후에야 연결이 됐다. 소주를 뿌리는 고사를 지내지 않은 작품은 작동이 되지 않아 개막전까지 애를 먹었다. 결국 다시 고사를 지내자 아무탈없이 지금까지 작동이 잘되고 있다고 한다. 유난히 폭염이었던 여름 모기떼가 극성이어서 한방만 물려도 부풀어 올라 긁느랴 고생했고, 작품을 설치하는 작가들도 방방마다 쌓인 먼지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전기도 끊긴 건물에서 전기를 이어 다시 옛날 그 모습 그대로의 형광등을 켜고 무너진 천장 더미안에 영상을 선보인 건 기적이라는 자체 평가다. 2018광주비엔날레 ‘GB커미션’은 광주정신의 지속가능한 역사와 이를 둘러싼 담론의 시각화를 위한 신작프로젝트다. 1980년 국가가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전시 무대로 삼아 민주·인권·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전에도 시도 되지 않았던 전시로, 1980년 5 · 18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를 문화예술로 치유·승화시킨다는 광주비엔날레 창설 배경을 실천했다. 전시 중반 정도 달려가는 2018 광주비엔날레는 유료 관람객 13만명을 넘어섰다. 지난 주말 방문한 전시장은 교복입은 중고등학생들이 넘쳤다. 비엔날레측은 "예전처럼 동원령은 하지 않는다"면사 "평일에도 전라도 지역 학생들의 관람이 이어져 하루에 3000~5000여명이 방문하고 있다"고 밝혔다. 광주비엔날레 CEO이자 예술감독인 김선정 대표는 "마치 인사하는 일본 고양이가 된 듯하다"면서도 즐거운 모습이다. 하루에 날마다 10여차례 VIP 방문객을 맞이하며 인사하고 작품투어를 진행한다. 19일 오후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만난 김 대표는 하이톤의 목소리로 말도 빨리했다. 이날 오전에도 정신 없었다. 광주시청 회의에 참석한 후 대만에서 온 문화부 차관을 맞고, 해외미술관과 미술관계자들의 잇딴 방문으로 전시장과 식당, 본관과 아시아문화전당, 국군병원을 오갔다. 광주비엔날레 역사상 최초 여성 대표인 김 대표는 소탈함과 겸손함으로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 운동화를 신고 나타나 어디든 빠르게 움직이며, 누구와도 격의없이 이야기한다. 비엔날레 본관 전시장에서 무슨 작품인지 모르겠다는 학생들에게 스스럼 없이 다다가 작품설명을 해주고, 이해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함께 활짝 웃었다. 이전 대표들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분위기지만, 또 알고보면 깐깐한 CEO로 직원들은 피곤(?)하다. 수십년 전시기획자로 전시 프로세스를 꿰뚫고 있기때문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CEO 마인드까지 발휘, 전시부터 인쇄까지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다. 자신을 내려놓고 솔선수범하는 대표를 이제는 적극 지원하는 직원들은 오뚜기처럼 새벽에 일어나는 김대표를 '강철 체력'이라고 했다. (김대표는 초등학생때 피겨스케이팅 운동선수로 활동한 것이 큰 힘이라고 했다) 화장도 안한 얼굴로 바지에 남방을 걸치고 분주히 움직이는 그는 선머슴 같은 모습으로 '잰더리스(genderless)'다. 또 TV속 미술관장과 사모님 이미지도 확 깬다.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의 딸이면서, 이수그룹 김상범 회장 부인이고, 아트선재센터 관장이었다. (서른살 아들을 둔 엄마로, 따지고 보면 최강동안이다.) "엄마(정희자)때문이에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엄마가 유학을 떠났어요. 저희 남매는 할머니 손에 컸는데 그때부터 자립심이 길러진 것 같아요."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일찍감치 화가의 길은 아니라고 여긴 그는 대학 4학년때 결혼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남편을 따라 간 미국에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만났다. 백남준의 소개로 휘트니 미술관 인턴십을 하면서 큐레이터의 길로 들어선 그는 '미술판 인맥의 여왕'이 됐다. 1993년부터 아트선재센터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10년 SeMA 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전시 총감독, 2012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등을 역임했다. "그때 만났던 작가들, 그때 일했던 경험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서 "이번 광주비엔날레도 그때 만나 연결됐던 작가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했다.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에 선정될 정도로 큐레이터로서 승승장구한 그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장직에 거론되기도 했지만 공모하지 않았다. "할 생각도 없었고, 광주비엔날레 대표로서 광주비엔날레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다. "20여년전에 아시아 최초로 만들어진 광주비엔날레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비엔날레 창립 정신과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정신을 현대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광주비엔날레만의 정체성을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2018 광주비엔날레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다." '’영혼의 치유를 책임진다’는 뜻의 큐레이터 역할도 제대로 발휘했다. 11명의 큐레이터와 함께 만들어낸 '2018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의 아픔을 보듬었다는 평이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 공동 예술감독에서 5년후 광주비엔날레 대표가 된 그는 그동안 난해하다는 비난과 비판을 받아온 광주비엔날레 정체성을 재확립했다. 1995년으로 소환해 개최지 광주의 공간성에 대한 탐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받고 있다. GB커미션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선보인 파빌리온 프로젝트도 해외미술관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팔레드 드쿄 장드 르와지 관장과 김성원 큐레이터가 시민회관에 선보인 전시도 장소성에 기반한 작품을 선보여 주목을 받고 있다. 80년대 전성기였던 시민회관도 쇠락해 방치되다 몇년전 리모델링한후 연 첫 전시로, 팔레드도쿄 관장이 선택한 공간이다.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마치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처럼 해외미술계에서 자국 작가를 홍보하기 위한 전략적 공간으로, 호주에서도 신청이 들어올 정도여서 광주비엔날레측은 계속 운영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예술의 역할은 죄의식을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길잡이로, 결국 예술은 일상적 삶에서 진정한 가치에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가을 광주전역을 광주비엔날레로 물들인 김 대표는 보는 사람마다 1박2일정도 와서 비엔날레를 보고 광주 음식도 즐기라고 강권한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얘기다. "베니스비엔날레나 아트바젤등 해외 유명 큰 행사들은 대부분 비싼 돈을 내고서도 2박3일, 4박5일 아트투어를 가는데, 정작 우리 국민들은 광주비엔날레를 찾지 않고 미술계 관계자들도 하루왔다 그냥 가는게 아쉽다"고 했다. 그래도 "요즘엔 입소문이 나서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오는 관람이 이어지고 있다며 비엔날레 기간이 짧다"는 아쉬움을 전했다. 1995년 9월 20일 개막, 2년마다 9월에 개막하는 광주비엔날레도 광주 정신을 잇는 행사이니 만큼 5월 개막도 고려해볼만 하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제정된 만큼 5월부터 세계 미술인들을 광주로 모이게 해 화해와 치유, 역사적문화적 공간으로서의 광주로 재탄생하게하는 것은 어떨까.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도 5월 개막해 11월까지 6개월간 열린다. (그러려면 관광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바다가 있어 이국적인 부산과 달리 광주는 호텔과 먹거리 연계가 아쉽다.) 상근직으로 주중에는 광주에서 살고 있는 김 대표는 토요일 오후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이젠 광주집이 더 편하다"는 그는 "시리얼로 아침을 떼우는 남편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남편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임기는 ‘3년 무제한 재임’으로 다시 2020년 광주비엔날레를 준비해야 한다. '광주 정신'을 깨운 '2018 광주비엔날레'는 11월11일까지다. 이제 3주 남았다. [email protected] 2018/10/21
삿됨 없는 여인상...최종태 '영원의 갈망' "온 세상을 돌고 돌았다. 팔십이 될 무렵에서야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도가 잔잔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기나긴 밤을 지새울 때 별들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입었다." 아흔을 앞둔 그는 “이제야 아름다움의 원천은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얻기를 갈구하는 것, 행복이란 것도 바로 이 기쁨일 것이다. 모든 가치는 기쁨으로 통한다. 그것이 신의 한 쪽 모습이 아닐까." 신(神)을 이야기하는, 그를 설명하기위해서는 20여년전으로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다. 1999년 종교간 벽 허물기가 한국종교들의 숙제였다. 당시 법정(1932~2010) 스님은 누구 못지않게 그 숙제를 풀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서울 성북동의 유명 요정을 위탁받아 절로 개창한 길상사에 세울 관음보살상을 한 조각가에게 의뢰했다. 2000년 길상사 설법전 앞에 세워진 '관음보살상'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화제였다.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작품은 그야말로 금기의 벽을 허물었다. 개원법회 때 고 김수환 추기경이 개원축사를 했고, 승려와 수녀가 만드는 음악회가 열리고 종교를 초월한 화합과 만남의 장이 됐다. 성모상 같은데 머리에 화관을 쓴 '여자 부처'였다. 여섯 개의 봉우리가 솟은 관을 쓰고 있는 관음보살상은 국보 제83호 삼산관반가사유상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부처상을 순진무구한 여인으로, 관음상과 성모상을 하나로 합체시킨 건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조각가 최종태(86·서울대학교 명예교수)였다. 당시 성당 성물 제작에 한창이었던 최종태는 법정스님의 의뢰를 받고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젊은 날 불경을 공부했을 무렵 우연히 성경이 손에 잡히자,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통독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성경에 빠져들었다는 그는 조각가로서 관음상과 성모상의 조형미는 하나로 다가왔다. "성모마리아가 되었건, 관음보살이 되었건 다른 것은 외향이지 본 뜻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 "그러니 예술도 종교도 근원으로 가는 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 '여인상'에 천착해 온 최종태는 성상 조각의 대가로 더 이름을 알렸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단순한 선, 평면성과 정면성을 갖는 조각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초월한 형태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1958)출신으로 국내 추상조각의 대부 김종영(1915~1982)의 제자이자, 단순한 동화같은 그림 장욱진(1917~1990)의 문하생이다.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 중심과 주변, 예술과 종교 등을 갈라서 나누지 않고 끌어안았다. 예술적 실천을 통해 본질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다가가고자 긴 시간을 겪어냈다. 1980년대에 사회적 불안을 작품으로 표현한 '도끼형 여인상'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고요하고 순수한 정신성'을 지향했다. 늘 '조각이란 무엇인가?'가 화두였다.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계속됐다. 그러다 쉰 흔살이 되든 해, 어떤 날 아침 눈을 막 뜨는 순간이었다. 그는 ‘조각이란 모르는 것이다’ 하는 환한 답이 왔다며, "내 평생 그때처럼 기쁘고 신나는 날은 다시 없었다"고 했다. 지난 11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23회 개인전을 열고 있다. 근래에 제작된 채색 목조각과 이전에는 시도 되지 않았던 대형 파스텔화와 조각의 분신 드로잉을 대거 선보였다. 볼펜, 사인펜, 연필 등으로 그린 소묘화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모던보이 같았다.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입은 그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자신의 조각상 하나하나를 애정있게 바라보고 매만졌다. 그러자 얌전하게 서 있는 작품들이 표정을 달리하며 마주했다. 평범한 할아버지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는 세상 만물 이치에 통달한 도인 같았다. 1932년생 대전 출생으로 서울에서 산지 60여년이 됐지만 느릿느릿한 말투와 충청도 사투리는 여전했다. ▲드로잉 속 여인은 누구인가. -글쎄. 서양에서도 그걸 자꾸 물어. 누구 얼굴이냐고. 그때도 '한국사람'이라고만 했지. 누굴 보고 그린 적이 한번도 없어. 미술대학 1학년때부터 그랬어. 머릿속에 있는 것, 평소에 본 걸 그리는 거지. 이번 전시 개막식때 김병기 화백이 '한국사람 얼굴이다' 그러더라고. 맞아 한국사람이지. 전시장에서 한 작품 한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좋다'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다리를 모아 앉아 있는 여인상은 테라코타 같다. -테라코타 같이 보이는데, 흙물을 칠한 거야. 옹기 만드는 흙(점토)을 접착제(본드)를 개서 바른거지. 코팅이 되어서 비가와도 괜찮아. 안에는 나무야. 페인트를 안하고 흙물을 칠한거지. ▲작품에는 철에 소금을 칠해 부식을 낸 것도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편인가. -어딘가 흠이 있으니까…. 칠을 하는 작품이 된 거지. 처음엔 칠할 생각을 한 건 아녀. 오래 하다보니까 채색 목조가 됐어. 자연스럽게 이뤄졌지. 이 하얀 것은 백토로 한거여. ▲어떤 나무로 조각하나. -은행나무가 많아. 깎기가 좋지. 연하고. 그리고 은행나무는 좀이 안먹어 오래둬도 되는 특성이 있어. 그래서 한 것은 아닌데. 결이 없어서 좋아. 저 쪽에 칠 안한 나무가 그대로 있어. 보면 알거야. ▲빨간치마, 초록 저고리를 입은 여인상은 둥근 탈을 쓴 안동탈춤이 생각난다. -조선풍속인데 옛날 시집가기 전에 홍삼을 입은 거여. 새색시지. 서양사람 냄새가 없지. 순 조선사람이여. 이를 연구하는데 60년 걸렸어 단번에가 아니라, 오래 걸리는거여. ▲두 사람 얼굴인데 한 손으로 합장했다. 일타쌍피다. -두 사람을 하게 된 것도 50년 됐네. 1967년 무렵부터 연속적으로 했지. 왜 했냐고? 그건 나도 모르지. 혼자 놀면 외로워 둘이 된거 같아. 손은 하나로 왜 합장했냐고? 나도 몰러. 그냥 되는 거여. "미술사를 보면은 이렇게 비슷하게 붙이는 게 있는지는 몰라. 내가 세계 미술사 5000년 속에서 붙이는 조각을 나 혼자했다고는 할 수 없어. 과거 아프리카에도 있을 수가 있지. 하지만 난 그런걸 보고서 한 것은 아녀. 두 사람 붙인 것도 몇십년 됐어. 따로 따로 하다가 붙었지. 나무를 깎다가 자연스럽게 붙은거여~." ▲턱을 고인 이 여인상은 반가사유상이 생각난다. -반가사유상이 좋아서 이렇게 되는 것 같어. 그림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나 혼자 되는게 아니여. 역사하고 상관있지. 어떤 사람이 나 혼자 했다고 하는건 함부로 믿을게 아녀. 내 머릿속에 세계가 연결되어 있어. 어떤 하나가 아니라 동양도 있고, 서양도 있고 아프리카도, 멕시코도 있고, 다 있는거여. 나보고 설명하라고 하면 괴로워. 어떤 걸 얘기해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는 '반가사유상'을 예찬했다. 1967년부터 반가사유상에 빠져 50년째 좋아한다고 했다. ▲왜 반가사유상인가? -세계미술사에서 좋은 걸 뽑으라하면 '반가사유상', '석굴암', 일본에 있는 '백제관음입상'이다. 왜 좋으냐고? 한 가지 예만 들자면 고대 그리소 조각은 형태미여. 반가사유상은 정신을 갖고 있지. 아주 높은 정신을 가진 어떤 형상… 비너스는 그게 없다. 석굴암 불상이나 반가사유상은 세계 조각사에서 최고여. 양면(형태+정신)을 갖고 있다고. 그렇다고 턱에 팔을 괸 포즈를 한 작품이 반가사유상을 생각하면서 한 건 아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나도 몰라. 찰나 순간에 달렸지. 모두 미술사하고 연결이 되는 거여. 그런데 결국은 나도 반가사유상 거기에 가고 싶은 거여.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것. 거기로 가고 싶은 건데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녀. 내가 그 경지에 가야지. ▲여인상은 대개 슬퍼보인다.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그래? 하더니 말을 멈췄다. -내 작품이 '슬픈끼'가 있어. 최근 몇 년 동안 한 작품에는 그게 벗겨졌다고 생각했는데... 86년에 서양에서 전시를 하는데 한관람객이 나한테 와서 "왜 이렇게 슬픈 모습을 하고 있냐"고 묻더라고. 나는 그때도 그걸 상당히 벗겼다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본거여. 그래서 다시 보니까 방 전체가 슬퍼보이더라고. 그래서 밖에 카페에서 한참을 울다왔어. 그러고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래?....왜 그렇게 됐나. 어렵게 살아서 그려. 우리 시대가. 난 일본시대 살고, 해방 보고 6.25를 봤자녀. 또 집이 어렵게 살아서 그게 묻은것 같애. 그걸 벗어나려고 몇십년을 했는데...그런데 아직도 있다면은...내가 보기엔 많이 벗겨진 것 같은데, 그런데 용케 잘도 봤네. 허허허~" 전시장에는 '명상의 공간' 같은 방이 따로 마련됐다. 은행나무 그대로를 깎은 조각이 기도하 듯 서 있어 경건함을 전한다. 장승 같고, 엄마같기도 하고, 또 성모상 같기도 한 모든 형상이 아우러지는 모습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그래서 예술가라고 하는 것은 뭐를 공부하는거면 세계미술사는 기본이여. 또 거기서 벗어나야 되는 거여. 벗어나야 내 작품이여. 그런데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거냐면, 죽었다 깨어나야 돼." "세계 미술사에서 벗어나야 내 그림이 된다"는 그는 "내가 얼마만큼 벗어났나"가 궁금하다고 했다. "정신력과 모든 체력을 소모해서도, 예술가가 안될 확률이 더 많아. 나도 그게 됐는지 안됐는지는 몰라. 난 어느 정도 됐다고 보거든. 그거를 사람람들이 봐야 돼. 얼만치 벗어났나. 나는 후배들 그림 보면 그게 보여. 넌 여기 있다, 여기 있다... 나를 그렇게 봐줘야지. 나는 어디있을까. 아~허허허." 여인상들은 한국사람 얼굴이기도 하지만 세계인의 얼굴이다. 모딜리아니의 긴 얼굴 형상이 떠오르는 조각앞에서 '모딜리아니'를 이야기하자 그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세계미술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지만, 또 다 연결돼야지. 어디든지 다 연결되면서 거기로부터 떠나야돼. 잘 생각해보셔. 내 조각에는 아프리카도, 이태리도, 현대도 있지. 내가 다 공부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메이면 안된다 이거여. 거기서부터 벗어나야해. 화가는 그런 공부를 하는거여." 손오공 예를 들었다. "손오공이 진리를 찾아서 인도를 가는데 별별 요괴를 만나잖아. 손오공처럼 나도 긴 터널을 지나왔어. 별별 요괴들과 싸워서 다 이겨야돼. 예술가는 그래서 승리한 사람이여." 그는 20세기 대표 현대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를 좋아한다. '먹빛의 자코메티' 화문집을 낼 정도였다. 사르트르가 자코메티에 대해 쓴 "저 사람은 승리하고 있다"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예술가는 터널의 싸움을 다 이겨내서 승리한 사람'이라는 거지. 예술가는 그걸 해야돼." 작품은 인물상에 치중되어 있지만 작가는 삶의 본질과 진실된 내면을 작업에서 찾고자 했다. "많은 것을 보고 다 소화한 연후에야 내 눈이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사물이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준다. 예술가는 참 모습을 그려야한다." "그걸 80이 될 무렵에야 알았다"고 했다. "혼자 노력으로 되는게 아니여. 별, 풀, 나무 모든 인류 다 도움으로 왔지. '온 세상을 돌고 돌았다....기나긴 밤을 지새울 때 별들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입었다' 이 말은 거짓말이 없어. 확실하게 내 속에 있는 것을 정리한 거여. 발로 못 갔으면 책으로도 다 돌았어. 나는 거짓말 안해." 이제사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는 그는 "지금은 내 형태들이 조용 하다는 얘기다. 내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 형태에는 한국의 역사가 배어 있어. 굉장히 많이 있지. 보는 사람은 봐." 그러면서 100세가 넘은 김병기 화백이 자신의 전시를 보고 한 마디로 '한국인의 얼굴'이라고 표현한 것에 매우 만족해했다. 그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괴테)는 말을 새기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 "선배들이 어떻게 그리나 살피다가 일제시대 미술을 보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한 일, 민속미술로부터 고급미술에 이르기까지 연구했다. 그리고 중국 미술, 아시아 미술, 제 3세계권의 미술을 총체적으로 검토했다." 예술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돼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우리나라처럼 식민시대를 살고 동족전쟁을 겪고 여러 가지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그것과 예술이 무관하다는 말은 설득력이 모자란 것 같다"며 여인상과 성상 조각가로만 알려진 작가의 의외의 면도 보였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스승의 품에서 벗어나는 일과 세계 미술사로부터의 자유였다"는 그는 "둘 중에서 스승(김종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불경인 금강경에 보면 집착하는 바가 없으면 자유로워진다는 '음무소주'(應無所住)라는 말이 있다. 피카소다 비너스다 반가사유상이다 집착이 되지않고 거기서 부터 나와야 된다는 얘기다. 공자는 '사무사'(思無邪)라 했다. '삿됨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다. 예수도 성경에 이야기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얘기는 자유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결국은 석가모니나 공자나 예수나 똑같은 말을 했다. 어디고 메인 바가 없는 마음을 찾아라 이거여. 쉽게 말하면 욕심이 없어야돼." 어떻게 욕심을 없앨수 있냐고? "그러니까 그걸 다 정리하면 '승리'라는 단어를 줘도 된다는 거여.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얘기지. 그림도 마음이 깨끗한 연유에 되는 것이지."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둥글둥글한 푸른 섬이 인상적인 대형 파스텔화앞에서 깨끗한 마음이 된 듯했다. "내가 1970년대 학생들하고 일년에 한번씩 수학여행을 갔어. 저긴 남해섬을 갔을때인데 그때 작게 그린 것이 있었어. 최근에 그걸 보고 그렸어. 머릿속에 있는걸 지금까지도 계속 그리는 거여. 저런 섬이 있는 것이 아니여. 틀렸대도 할 수 없어. 내가 만든 섬이지. 내가 만들면 되지 안될게 뭐 있나.허허허." 유한한 인생을 살기때문에 무한을 꿈꾼다. 말로 다 되는 AI시대, 인간 정신은 삭막해지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더 위세다. 단지 인간의 형상일뿐인데 경건한 감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최종태 조각은 '힐링 선물'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시구가 떠오른다면, 놓치기 아까운 전시다. '영원의 갈망'을 타이틀로 40여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가나아트센터 1, 2, 3관에서 11월 4일까지 이어진다. [email protected] 2018/10/14
"예술가의 양심"...이종구 '광장-봄이 오다' 임옥상도, 홍성담도 그렸다. 민중미술작가라면 놓칠수 없다. '광화문 촛불 혁명'이 또다시 그림으로 나왔다. 지난해 9월 제일 먼저 선보인 임옥상의 '광장에, 서’는 흙을 물감 삼아 그린 촛불 그림으로 '기념비적인 역사기록화'로 평가받고 청와대 로비에 걸렸다. 홍성담은 이순신의 전법인 학익진(학의 날개를 펴서 감싸는 진형)모양으로 촛불시위 항쟁을 역동적인 구도로 담아냈다. 이번엔 더 직설적이다. 앞선 두명의 민중미술작가도 깜짝 놀랄 만큼 강렬하다. 촛불을 형상하는 수천개의 노란 점들속에 '이게 나라냐' '내려와 박근혜' '박근혜 즉각 퇴진'을 쓴 붉은 피켓과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이 담긴 액자는 유리가 깨진 채 맨 끝 밑에 붙였다. 하지만 늦게 나온 탓일까. 이미지 시대에 신선함보다 식상함도 감돈다. "방식이 다르지만 서로 각자 그렸는데 전시를 누가 먼저 하느냐죠. 제일 먼저 한게 이기는 거죠. 뒤에 하면 그걸 넘어서야 되기 때문에…" 이종구 화백(61·중앙대 미대 교수)도 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역사의 기록으로, 증거로 남기고 싶었다." 굳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려야겠냐 혹평해도, 마땅히 "감수하겠다"는 의지였다. 화가로서 미학적인 부분을 손해보면서까지 '책에 각주'를 달 듯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낸 건 "예술가의 양심"때문이다.. "작가도 시민이고, 사람이다. 작품과 다른게 아니다. 둘 중에 하나가 다르면 예술가가 아니다. 내가 직접 참여했고, 양심에 의해서 그린 그림이라 부담도 없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쾌하게 했을 뿐이다. 응어리가 풀어졌다." 이종구의 '광장-16,894,280개의 촛불' 작품은 그 날의 함성과 구호가 들리는 듯하다. 45개의 작품을 이어 붙인 가로 5m가 넘는 대작으로 광화문 촛불 시위의 힘, 즉 단결된 시민의 힘으로 탄핵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수감되기까지 7개월 동안 23회에 걸친 촛불 광장에 참여한 총 1689만4280명 시민들의 총체적인 촛불 혁명 과정과 모습을 형상화했다. 광화문의 역사적 흐름을 촛불이 물결치는 듯 그렸고, 시위에 쓰였던 스티커를 주워모아 콜라주했고, 피켓에 자주 등장했던 문구들을 중간중간 배치하여 시간의 흐름과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이 화백은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4월까지 총 23회의 시위가 진행되었는데, 나도 10여차례 광장에 나가 촛불을 밝혔다"며 "'광장' 연작은 말할 것도 없이 그 해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싸운 거룩한 시민들의 초상화이자 기록화"라고 강조했다. 격변의 시기, 리얼리즘 작가들은 불꽃이 된다. 민중미술이 탄생한 이유다. 엄혹한 세상에 맞서 그림으로 투쟁한다. 이 화백도 그 중 한명이다. '리얼리스트 화가'로 30년째 붓을 잡고 있다. 1976년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8년 인하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80년대 5.18 광주항쟁과 민주화 운동등 한국 사회 변혁의 흐름에서 그는 '리얼리스트 화가'를 택했다. 1980년대 이전 미니멀리즘과 추상화가 대세였던 흐름과 정반대로 '극사실주의 화풍'으로 비판적 리얼리즘에 불을 붙였다. 1986년 그림마당 민에서 연 '땅의 사람들'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농촌 현실 문제를 고발, '농민화가'로 유명세를 탔다. 정부미 쌀포대에 주름진 농부 초상화를 그려낸 작품은 산업사회를 맞이한 농촌의 초상이자 기록이었다. 고향인 충남 서산 오지리 마을 농부들을 화폭에 담아내며 자본주의 팽창으로 황폐화되어가는 농촌 공동체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농민의 삶'은 이 땅의 현실과 역사다. 20세기 후반 한국 농촌사회의 냉철한 기록을 담은 그림으로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당시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종구는 농민들이 어떻게 거덜나고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가를 그려온 거의 유일한 화가"라며 "이종구는 단순히 농민화가가 아니라 동시대 진실을 그리고자 했던 유럽의 진실주의(verism)혹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연장선에 위치한다고 하겠으며, 적어도 그런 화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미술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고 호평한바 있다. '농민 화가'에서 '소 작가'(2009)로 변했던 그가 다시 드러난 건 세상이 혼란스럽다는 증거다. 리얼리스트 화가, 그를 다시 현장으로 불러들인건 그 만큼 참담했고 암울한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9년만에 연 이종구 개인전 '광장-봄이오다'는 과거로 돌아간 타임머신같다. 벌써 잊어버린 참담했던 4년전으로 우리를 이끈다. 서울 삼청로 학고재 갤러리에 지난 2년간 제작한 신작 33점이 걸렸다. 촛불 시위를 다룬 광장 연작과 함께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을 일일이 그려냈다. 학생들의 단체사진이 이어져 걸린 전시장은 순간, 숨을 멎게 한다. "이번 전시는 근래의 시간과 공간에서 시작된 예술적 기록이자 증언이며 상상의 결과물들이다. ‘별이 된 세월호의 아이들’을 깊은 바다 속에서 인양하는 마음으로 '학교가자'를 작업했고, 광화문 촛불현장에서 수집한 포스터 등을 증거로 제시하여 아이들을 세상에 부활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과 선생님을 그려낸 초상화만 500여명이 된다. 단원고는 그 당시에 남자 반과 여자 반이 각각 5반씩이었고, 총 학생수가 350여명이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 그 중 75명만이 생존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렸는데, 학교에 가서 영정 사진이 책상에 있어 놀라고 충격받았다. 혼자서 교실을 보는 것 자체가 힘들고 무섭더라." 그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해남에 있는 세월호 지나가던 뱃길 임하도(林下島)에 가서 3개월간 희생자의 넋을 추모하며 '학교 가자, 1반~10반 – 세월' 연작(10점)을 그렸다. 그림인데 진짜 단체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를 구한 정차웅 군도 있다. "초상화는 눈빛만 약간 달라도 입술이 조금만 달라져도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정확히 그리려고 했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를 그린 작가다. '봄이 왔다' 연작은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로 구현된 작품이다.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판문점 만남을 보고 나서 여름 내내 그렸는데 뒷 배경이 백두산 천지다. 마치 9월 20일 두 정상이 천지에서 함께 할 것을 예견이라고 한 것일까. 그는 "판문점 대신 상상의 영역으로 배경을 백두산 천지로 그렸는데, 실제 현실이 돼 놀랐고 감동이 컸다"고 했다. 그러나 "워낙 갑작스럽고도 감동적인 역사적 사건이어서 채 가시지 않은 격정의 감정으로 시작되어 완성도에 앞서 다소 추상적인 감상이나 민족적 감상주의를 드러낸 면이 없지 않다"고 고백했다. '노골적이다 기록적이다'를 구분하기 전에 섬세한 붓질로 완성된 그림들은 정성을 칭찬할 수 밖에 없다. 화려한 날만 역사가 아니다. "기록화"로 가져온 이번 전시는 이 땅을 지키는 소시민의 삶과 역사, 결국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알려준다. "그가 주목한 것은 그들이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잠든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광장으로 불러내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바꾸게 만든 구원자로서의 면모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봄의 근원은 바로 그들로부터 온 것이다."(소설가 방현석) 4년전 위암 수술을 받았기 때문일까. 자기애적 태도도 보인다. 그림 곳곳에 자신과 가족들의 얼굴까지 그려넣었다. 문구가 비어있는 붉은 카드를 든 '광장-가족' 작품은 모두 환히 웃고 있지만 경고를 하는 듯 하다. "촛불혁명으로 탄생시킨 정부지만 권력을 사유화하거나 한다면 사정없다. 거시적인 것에 밀려 미시적인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복지문제등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해주길 바란다. 항상 사람을 중심에 두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날카롭고 비판적인 시각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 그러면서도 "시행착오는 당연히 있다"며 문재인 정권에 기대감을 보였다. "저도 40년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 봄이왔다 연작중 두 정상 만나는 배경 하늘색을 다섯번이나 칠했어요. 한번에 절대 안나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주로 황갈색풍 농촌 그림으로 '농민 화가'로 불렸지만 붉은색과 푸른색이 많은 이번 전시로 30여년간 붙어있던 '농민 화가' 타이틀을 뗄 것 같다. 그도 그 수식어가 "싫다"고 했고, '민중 작가'라는 호칭은 "과분하다"고 했다. "사회적 약자와 사회 현실을 그리는데 한 가지 수식어로 규정해버리면 단순해진다며 틀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농민화가는 내게 편협한 말이다. 그냥 '화가'로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또 '서양화가'로 불리는 것에 대한 시골 고향 친구들의 반응도 전했다. "야 네가 왜 서양화가냐? 네 그림이 오지리 사람들 그리고 소 그리는데...?" 그는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면서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특히 한지로 그리는데 서양화가로 분류된 건 잘못된 말"이라며 이분법적으로 단순 구분된 미술장르를 현실적으로 지적했다. 우리시대 역사적 사건을 대하 소설처럼 완성해낸 그는 환갑이 지났지만 여전히 날이 서있다. 4년전에 비해 20kg이 빠져 깡마른 체구로 더욱 날카로워 보인다. 이전 작품과 화풍(색상)이 달라진 이번 작업들에 대해 이 화백은 "다시 말하지만 미학적 완결성보다 시대의 서사와 내용을 더 중요시하고 강조 한 측면이 크다"고 했다. "그것은 내가 1980년대 초 그림을 시작하면서 다짐했던, 우리 시대의 현실과 역사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로서 나의 예술적 책임과 임무를 다하겠다는 생각의 확인과 실천이다." 현장 속으로 들어가 '단순히 화가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것, 살아있는 예술을 만들겠다'는 의지다. 그는 이제 '농민 화가'에서 '기록 화가'로 자기 길을 다시 만들고 있다. "앞으로도 거듭 우리시대의 역사와 현실과 현장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작가로서 역할을 다 하고자 한다. 나의 궁극적인 예술적 지향은 인간다운 삶의 가치와 세상에 있으므로." 전시는 10월21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10/01
'돌 조각' 살아있는 전설 전뢰진과 제자들 12일 서울 인사동 선화랑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국내 최고 원로 예술가들인 대한민국 예술원회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미술계 유명인사들도 속속 들어섰다. 내로라하는 초로의 조각가들이 북적였다. 이날 400여명이 북새통을 이룬 전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최근 좀 처럼 볼 수 없던 개막식 풍경이어서 1990년대 화랑가를 연상케 했다. 당시 전시 오픈일인 매주 수요일이면 미술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누가 누가 전시한다고 하면 그 전시를 찾아 축하하고 거나한 뒷풀이가 이어져 주변 식당들도 호시절을 누렸다. 사라진 옛날 전시 개막식을 재생한 건 '돌 조각가' 전뢰진 작가때문이다. 올해로 구순(90)인 작가의 '구순 기념 특별 기획 초대전'이 열렸다. 조각가 전뢰진은 국내 '돌 조각'의 대가로 고졸미와 소박함이 어우러진 '따듯한 조각'의 창시자다. 선화랑에서 1994년 정년퇴임 전시 이후 26여년만에 연 이번 전시는 사제지간 끈끈한 사랑으로 마련됐다. 전뢰진과 제자들은 각별하고 유별나다. 제자들이 모여 변치않고 선생님을 챙긴다. 2년전에는 전뢰진의 미수(88)를 기념하기 위해 제자들이 '전뢰진 작품집'을 발간했다. 제자들은 "전뢰진 선생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조각예술의 표본"이라고 이구동성이다. "작품집 만드는 것 조차 만류해 어렵사리 만들었다"는 제자들은 "머리에 목에 수건 질끈 동이고 작은 체구에 무거운 돌과 싸우며 차가운 돌에 온기의 생명을 불어넣는 조각가로서 65년간 한길을 걸어온 선생님의 모습은 예술"이라고 입을 모았다. 올해도 제자들이 뜻을 모았다. 선생은 전시도 책도 내는 것을 거듭 만류했지만 90세를 맞은 선생님을 위한 한 마음이었다. '전뢰진 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초대 회장은 80이 넘은 제자 김수현, 부회장은 70이 넘은 제자 고정수가 추대됐고, 강관욱, 김경옥,한진섭, 김성복, 전덕제등이 위원으로 나섰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지난 5월 제자들이 선생의 옛 집을 뒤졌는데 생각지도 못한 드로잉 400여점을 발굴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에 그린 드로잉 뭉치들을 찾아냈다.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세계를 증명한다"며 "기적같다"고 했다. 이렇게 찾아낸 드로잉은 67년만에 첫 공개됐다. 전시장에는 액자에 담긴 드로잉 100여점이 걸렸다. 전시 타이틀은 '조각일로 사제동행'전. 전뢰진 대표 조각 15점과 제자 20명(강관욱, 고경숙, 고정수, 권치규, 김경옥, 김성복, 김수현, 김영원, 김창곤, 노용래, 박옥순, 박헌열, 이일호, 이종애, 전덕제, 전소희, 전용환, 정 현, 한진섭, 황순례)의 조각도 함께했다. 이날 고종희 미술사학자가 쓴 단행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도 출간, 전뢰진 사인회도 열렸다. 개인주의로 사제지간이 무너진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어서 이번 전시는 더욱 특별하다. 스승에 대한 '무한 존경'을 보이는 제자들과 그 제자들의 뜻을 기꺼이 받은 스승은 이날 막걸리를 연신 마셨다. "인연은 일부러 만들수 없어. 저절로 만들어지는 거야." 구순 조각가 전뢰진은 모든 것은 '인연'과 '팔자'라며 말길을 열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구순의 조각가는 작품처럼 간단 명료하게 말을 이었다. 질문을 받을때마다 두 손을 양쪽 귀에 대고 귀를 모아 집중했다. (5학년때 같은반 친구가 귀를 찔러 피가 난후 고막이 터져서 지금도 오른쪽 귀가 덜 들린다고 한다.) "돌 조각을 왜 하냐고? 만들어서 되어 가는게 재미있어서 좋지. 안팔려도 좋아. 내 작품이니까. " 옆에 있던 제자 조각가 한진섭은 "돌 작업하면 남의 손을 빌리기도 하는데 선생님은 아직도 여전히 손수 작업한다"고 했다. "조수 없이 혼자하는 이유가 있나. 재미로 하는거지. 혼자하면 또 경비가 안들지. 자기가 일하면 돈이 안들잖아.허허"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나. "시간은 저리 가라다. 1년 걸린다고 해서 다른 사람 주고, 돈 주고 만들고 싶지 않다. 2년을 걸려도 내가 만들고 싶다. 고집이다. 작가는 고집 있어야 돼, 똥고집." 그러면서 "인연을 저버리면 불행해진다"고 했고 예술을 하는건 '팔자'라고 했다. 또 모든 것에 '고마워'했다. "(내 작품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해해줘서 더 고마워. 나를 만들어준 천지조물주가 고마워. 내가 저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수완을 준 건 하늘의 일이지. 하느님에 고마워. 그렇다고 내가 종교믿는 사람은 아니다. 괜히 또 내가 잔소리 하네. 미안해요. 허허." -왜 돌조각만 했나 "나도 모르겠어. 인연인가봐. 하고 싶었어. 해야겠다 의무감에 한 건 아니야. 어떤 때는 하다가도 '어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어' 하면서도, 에휴 내 팔자지~그러면 마음이 가라앉아. 왜 술마시면 마음이 좋아지잖아. 그것 같애. 그래서 모든건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아." -브론즈나 다른 조각 유혹이 없었나. "고생끝에 낙이 있는거지. 돌을 깨는 고생을 하면서도 보람있는 일이구나, 내가 이걸 만들 팔자구나, 잘 만들어야지 위로하면 작품이 잘돼. 싫은 거 억지로 만들면 안돼. 만들긴 만드는데 결과가 역시 나타나. 조각가가 되려고 태어났나, 살다보니까 되는 거지. 환경을 저주하면 마음이 불안해." -돌이 왜 좋나. "돌은 성질이 참 고와. 돌이 거칠다고 생각하는데 그거 아니야. 연한 돌에 강한 망치를 주면 부숴져버려. 강한돌에 연한 망치를 하면 쪼아지지가 않아. 돌에 따라 강도와 속도가 달라. 그건 해본 사람이 알지, 안해 본 사람은 몰라. -제자들이 많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제자들이 있는데, 그래도 조각을 하는 제자가 찾아와. 그게 고마운거야. 조각중에서도 (팔을 휘두르며)이거(돌조각)하는...그것이 인연인가봐." -제자들은 왜 선생을 찾아올까. "나를 보고 싶어서도 왔겠지만, 내가 작품을 제작하고 있나 궁금해서였을거야." -찾아오는 제자들한테 뭐라고 했나. "열심히 해, 그러면 뭐가 돼도 돼." -왜 조각을 하게 됐나. "나도 몰라. 하고 싶어. 이쾌대 연구소에서 데생을 배우고 대학가서 조각을 하니까 하고 싶었어.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아진하워 대통령 방문때 선물용으로 갖고 가면서 알려졌지.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그때부터 더 조각을 열심히 했어. 인연이 있어야돼. 인연이." -가족, 여성, 동물만 조각하는 이유는. "몰라. 그냥 그걸 하고 싶어. 어려운 건 만들고 싶지 않고. 잘 만드는걸 만들고 싶어. 나도 모르게 만들어져. 그게 다 팔자인가봐."(모자상은 전뢰진이 가장 즐겨 그린 주제다. 전뢰진에게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일 수도, 평생 그의 곁을 지켜준 아내(김한정)일 수도 있다. 동갑의 아내는 오늘 행사를 위해 양복과 넥타이, 구두까지 챙겨줬다고 한다. 재킷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금빛 뱃지가 달려있었다.) 전뢰진은 제일 좋아하는 돌은 대리석이라고 했다. 서양 것보다 익산에서 나오는 대리석을 사용한다. "대리석은 속에 짬(결)이 없어 좋다. 화강석보다 용이해. 하다가 부러지는 경우는 없어. 화강석은 결이 있다면 눈에 안보이는데 금이 가지. 나중에 떨어진다고. 대리석은 그게 없어. 다 고와." 제자 한진섭은 "선생님 작품은 가짜가 없다"며 "정과 망치로 쪼아 나온 작품은 손 터치에 강약이 있어서 카피가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다. 현재까지 전뢰진은 돌조각 500여점을 만들었다고 한다. 67년간 1년에 5~10여점씩 탄생시킨 셈이다. 제자들은 "이 숫자는 작가 혼자 평생 작업한 결과로, 엄청난 양"이라고 했다. 단 하루도 작업을 하지 않은 날이 없다. 작품은 모두 팔려 나갔다고 했다 -혼자 작업하는데 손 안 아픈가. 팔은 어떤가. "안 아파. 내가 좋아서 하는데 손이 아파, 그러면 이거 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안 아프면, 이거 해도 괜찮구나 하는거지."(손은 가늘고 고와 보였다. 만져보니 부들 부들했다.) 제자 한진섭이 부연설명했다. "사모님이 결혼후 평생 동안 아픈적을 못 봤대요. 술을 많이 드셔서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진 적은 있지만,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간 적은 없어요. 술을 엄청 드시는데 간이 좋으신지 알코올 분해능력이 대단합니다." 막걸리 애주가로 유명한 전뢰진은 술을 의인화했다. "술은, 마시고 싶어 마시지, 아마 또 술도 나를 마시고 싶어해, 서로 합의가 돼서 마시는 거지. 나는 마시고 싶은데 술이 나를 싫어하면 안 넘어가. 써서 안 넘어가. 쟤(술)도 내가 좋으니까 마셔주는가봐. 마셔 본 사람은 알아. 술도 또 나를 좋아해요. 이상하죠? 허허. 근데 마셔봐. 그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할거야. 요즘엔 장수 막걸리를 1병반만먹어. 전에는 3병을 마셨어. 나이는 먹는데 술 양은 줄어. 다 그럴거야." -'선생님은 술만 빼면 성자'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들 얘기하는데, 술을 마시는게 더 좋다 이거야. 성자가 되는 거보다 술 마시는게 더 좋아. 술을 근심스럽게 마시면 건강에 안좋을 걸. 기분좋게 마시면 소화가 잘 되는 거 같아. 아, 술은 작업 끝나고 마셔야지.. 술 먹고 하면 작품도 안돼고. 잘한 것 같은데 어딘지 서툴러. 마셔 본 사람은 알지." -선생과 약주를 함께하지 않으면 좋은 제자가 될수 없다고 하는 말도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한테 올때는 전 교수가 술을 하겠지. 나도 곁들어서 술을 해볼까라는. 술 생각 안나는 제자들은 오기 어려워해 내가 자꾸 주니까. 선생이 주는 술 안받아 먹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내가 나쁘지. 알면서도 자꾸 주게돼. 첫째는 주고 둘째는 안주면 마음으로 섭섭해. 그렇다고 싫다고 자꾸 주는 사람은 아니야. 술이 왜 술인지 알아? 술술 넘어가서 술이잖아." -제자들 전시는 평생 빼놓지 않고 다녔다. "제자들에게도 보람이 있고 나도 가야 마음이 시원해. 안가면 숙제가 남은 것같고 미안하지. 가지못할 사정이 생기면 할수 없구나, 운명이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일부러 안 갈수는 없지. 중간에 가면 작가는 보지 못해도 보고 오면 마음이 후련해. 내 생각에는 평생 지킨거야." 이번 전시 하이라이트는 드로잉이다. '전뢰진 단행본'을 낸 고종희 미술사학자는 "전뢰진 드로잉은 이중섭 박수근 못지않게 한국인의 정서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며 "동서양 미술사, 회화 조각을 넘나드는 그의 상상력과 예술에 감탄하면서 드로잉을 한 점 한 점 선정할때마다 그 아름다움과 따뜻함, 참신한 발상과 유머에 감탄을 거듭했고, 소름이 돋은 적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이나 루브르 박물관등 대형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드로잉관과 판화관이 따로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전뢰진 드로잉 전시를 계기로 드로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면 한다"고 바랐다. 조각가 한진섭은 이번 드로잉 전시가 의미있는 것은 "선생님의 소중한 모형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개 작가들은 돌조각을 하기전 드로잉을 하고 모형을 만듭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모형이 드로잉입니다. 공간 입체에 대한 능력이 탁월하시다. 드로잉에 정면, 평면 그려서 바로 돌조각을 합니다. 항상 주머니에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며 생각나는대로 드로잉합니다. 정면 하나로도 입체를 다 작업하십니다." -왜 드로잉을 그렸나. "그냥 하고 싶어서. 기억은 자꾸 희미해지는데, 드로잉을 보면 그때 했던 일들이 생각나. 그걸 보고 만들면 조각이 되기도 하지. 생각난다고 다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고, 생각난 것 중에서 다시 작품을 하려고. 그려보고, 안되면 놔두고." 조각가 전뢰진의 원래 꿈은 화가였다. 당시 서양화가 거장이던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물방울 작가 김창열과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도안과에 입학했다 6.25 전쟁발발로 학업이 중단됐다. 1953년 고교 은사인 홍일표 선생의 권유로 조각을 했다. 그후 홍익대학교에 편입, 윤효중에게 조각 수업을 받으며 석조각을 시작했다. 이후 윤효중 교수의 심부름이 인생전환이 됐다. 석공들을 감독하는 일을 대신하다 돌 조각의 세계에 들어섰다. 28세인 대학 3학년때 반도호텔 분수를 제작하면서 정이나 망치 쓰는 법을 석공에게 배웠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아진하워 대통령 방문때 선물용으로 갖고 가면서 '돌 조각가'로 주목받았다. 1956년 홍익대 조각과를 졸업하고 1961년 국전 추천작가로 선정됐다. 1963년부터 홍익대 조각과 교수로 1994년 홍익대에서 정년퇴임,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교수시절 별명이 '쪼쪼쪼 선생'이었다. 3학년 실기실 옆에 있던 선생 작업실에서 항상 나는 '쪼쪼쪼...'하는 망치 소리때문이었다. 제자 중에는 홍익대 조소과 출신이 아닌 기능올림픽 선수 출신들도 있다. 이들은 현재 석공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석장이 된 사람들도 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구상조각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 '돌 조각계 살아있는 전설'이다. 부산 태종대 '모자상', 서울 삼성역 무역센터 앞 '가족', 한양대 본관 앞 '사자상', 테헤란로 개통 기념탑, 남산 3호터널 개통 '독수리 기념탑' 등이 그의 작품이다. 특히 '모자상'은 태종대 자살바위에 설치한 후 자살률이 떨어져 유명세를 탔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절대로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셨어요. 이제 나이가 들어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제자들은 왜 이렇게 작가를 좋아할까. 제자들은 선생, 전뢰진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크신 분이다. 악의가 없고 질투가 없다. 선생을 댁까지 모셔다드리면 꼭 택시비를 주셨으며 받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으셨기 때문에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한다. 한번도 흔들림이 없었고 남의 삶을 기웃거리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확신이 있었다." 선생댁에서 기숙하며 몇 년 동안 조각을 배웠다는 한 제자는 또 이렇게 전했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 작업을 도와드렸고, 주말에는 내 작업을 했다.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닮고자 노력했다. 좋은 작품을 하려면 먼저 좋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의 인격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칠순의 제자 조각가 고정수는 "선생님은 국내 조각사의 보석같은 존재라며 잘 써 달라"고 부탁했다. "선생님은 생활철학이 용수철입니다. 한 때 휘어져도 딱 멈춰요. 오죽하면 교수회의때, 잘나가는 작가가 "당신은 19세기 작가야"이렇게 폄훼해도 "나보고 19세기 작가래~" 그 말만 했을 뿐이지 아무런 반감을 안보였어요. 남을 비방하지 않아요. 우리 선생님은 또 유명해지기를 싫어하세요. 회고전 같은 것 하지 말래요. 왜 작품을 괴롭히냐고. 잘 가있는데..."라고. 새해가 되면 선생댁은 세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온 제자들로 시끌벅적하다고 한다. 올해도 정년한지 25년이나 지났지만 구순이 된 노 스승을 찾은 제자들의 변함없는 새해 풍경이 이어졌다고 했다. "진정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한 제자는 선생이 수양버들을 닮았다고도 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래서 줏대가 없어 보일때도 있어요. 모든 이에게 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석조각만을 하고 살았던 선생은 허름한 작업실에 다소곳이 앉아 돌을 쪼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술도 좋아했지만 작품이 항상 우선이었다. 모든 것을 다 양보했으나 조각 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던 선생에 대해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하다'고 했다. 성자의 대다수는 특별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작은 일을 평생 성실하게 산 사람들이다. 작가와 작품은 하나다. 돌은 전뢰진을, 전뢰진은 돌을 닮았다. 오랜 시간이 빚은 정직한 작업, 흰 색의 돌 조각에서 '쪼쪼쪼'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전시는 29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9/13
'예술은 미끼 삐끼'...최정화 '손오공 작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이 전에 없이 인기다. 보기만 해도 홀린다. 가던 발길도 당겨, '자석 미학'을 발휘한다. 알록달록 방사형의 거대한 모양이 마당에 우뚝 서있다. 360도 어디에서 봐도 회호리 치듯 꽂히는 희안한 설치물 앞에서 모두 같은 말을 읊조린다. '기가 막히네~' '뭐지?' 하고 왔다가 빵~웃음꽃을 터트리게 하는 이 설치물은 설치미술가 최정화(57)의 '민들레' 작품이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부터 찜통, 프라스틱 대야, 후라이팬등이 모여 존재감을 발산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던가. 버려지거나, 버려질뻔한 위기에서 대탈출한 식기 7000여개가 뭉쳐 '풀 파워'를 장착했다. 높이 9m, 무게 3.8톤으로 합체된 식기들의 거대한 반란이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18' 작가로 선정되어 만든 최정화의 신작. 지난 3월부터 '모이자 모으자'(Gather Together)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진행, 가정에서 버려지는 생활용품을 수집해 만들었다. "작품은 내 것이 아니다. 그 판단도 내 몫이 아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4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최정화는 "'최정화'라는 가짜가 탄생하는 '최정화 손오공' 작전에 동원되는 전시"라고 했다. 민머리의 '삼장법사'같은 모습의 그가 '손오공 작전'이라니. 무슨 뜻일까. "수천만명의 최정화가 생기는게 '신화의 탄생'이다. 개인의 신화가 가장 큰 신화다. 부인해도 되지만 제도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정말로 좋고, 나쁘고는 모두 다를 것이다. 내 작품은 미학적일수도, 상징적일수도, 조형적일수도, 막가파일수도 있다. 각자의 최정화를 기념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작전이다." 그는 '쌓기 신공'으로 현대미술을 희롱한다. '하찮은 사물'들의 둔갑술로 '예술이 별거냐'며 꼬집는다. 1990년대 플라스틱 소쿠리를 거대한 탑처럼 쌓아올려 알록달록 형형색색, '형설지공(螢雪之功) 일취월장했다. 플라스틱 바구니, 돼지저금통, 빗자루, 풍선 등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소비재를 예술로 재탄생시키는 그의 작업방식은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며 급속한 경제성장이 빚어낸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을 은유한다. 작품 앞에서 사진촬영이 가능한 예술을 하고 싶었다. 1994년부터 '퍼블릭 아트'를 하게된 이유다. '썬데이서울'(1990), '쑈쑈쑈'(1992) 등 단체전부터 ‘올로올로’(1990), ‘스페이스 오존’(1991), ‘살바’(1996)와 같이 먹거리, 음악, 전시, 공연, 세미나가 어우러지는 젊은 세대의 공간도 디자인해 작가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 건축가까지 넘나들었다. 1990년대 역동적으로 변모한 한국 소비문화의 중심에서 클럽문화, 대중문화를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와 현대미술과 대중문화의 관계를 긴밀하게 엮어왔다. 시대를 읽는 작가의 독창적인 조형어법은 당시 주류담론이었던 민중미술과 모더니즘이라는 양극화에서 벗어나 한국 현대미술의 외연을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지역성과 보편성을 담아내는 작가로 주목받았다. '운명이 다한 사물'과 최정화는 한 몸이 됐디. 40여녀간 동거동락이다. 일단 줍고 모으고 본다는 그는 "이젠 물건들이 그냥 따라온다"고 했다. 그의 주문은 일상이 예술 '生生活活(생생활활)'. 플라스틱 소쿠리, 양은 냄비, 몽돌, 빨래판은 그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조명이 되고 성전이 된다. 일반 가구는 그냥 쌓았다, 해쳐모여 할수 있다. 그래서 "난 작업을 한적 없다. 여태껏 미술이라고 생각한적도 없다"며 예술로 둔갑한 사물들의 접합을 민망케한다. "작가의 역할, 예술의 역할은 예술을 빼면 예술이 된다는 것. 일상이 예술이다. 반예술, 비예술이 예술을 만든다. 그것을 증명하는 여러분 마음이 나의 아트가 된다. '유어 아트 마이 아트'"라고 노래하듯 말했다. ‘꽃, 숲’(Blooming Matrix)을 부제로 펼치는 이번 전시회는 '민들레', '꽃, 숲', '어린 꽃', '꽃의 향연' 등을 선보인다. 전시장은 기능을 잃어버린 사물이 부활하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작품의 제목인 ‘꽃, 숲’은 작가가 각지에서 수집해온 물건이 모여 조화를 이룬다. 밝음과 어두움이 대비하는 공간 속 수직으로 세워진 '146개의 꽃탑'은 쌓기 신공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바닥에는 색동천과 거울 같은 반사판이 둘러쳐져 현란함과 혼란함이 공존한다. 마치 '21세기 성황당'처럼 보인다. 그동안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풀어낸 그의 작품은 야외에서 건물앞에서 활기차게 펼쳐졌다. 국내는 기본 해외에서도 광장, 백화점, 공원에 거대한 과일나무와 꽃나무를 설치하며 미술판을 가볍게 접수해왔다. 2014년 문화역서울284를 '총천연색' 플라스틱 소쿠리(바구니)로 물들인바 있다. 오는 11월에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 4'에도 나온 세계에서 가장 럭셔리한 7성급 호텔 버즈 알 아랍 로비에 7m짜리 꽃나무를 설치할 예정이다. '미술관 전시가 안 어울린다'고 하자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생각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미술관용 전시 좀 해보자. 당신들이 원하는 전시 해줄게. 한번 쇼를 해보자"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나 "원없이 풀어내지 못했다. 더 하고 싶은데 더 못했다"며 '미술판의 야생동물' 같은 습성을 드러냈다. "과천미술관에도, 경복궁에도 하고 싶었다. 여기 저기 더 많이, 미술관에 안들어와도 볼수 있는 각자의 개인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걸 하고 싶었는데, 미술관에서 다음 기회에 하자고 하더라."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영란 학예연구관은 "전시틀은 빼기가 묘미인데, 작가는 더하기만 있다"고 하자, 그는 "파주에 작업실 겸 창고가 있다. 냄비 그릇뿐만 아니라 가구 자개장까지 많은 짐이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죠?"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전이다. 2014년부터 10년간 매년 1인의 우리나라 중진작가를 지원하는 연례 프로젝트다. 전시장안에는 146개의 꽃숲과 더불어 '어린 꽃'도 눈길을 끈다. 금빛, 은빛의 화려한 유아용 플라스틱 왕관을 활용한 작품으로 눈부신 거울면 위에 설치되어 7m를 힘겹게 오르고,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끝내 오르지 못하는 이 왕관을 통해 세월호 침몰로 희생당한 어린 생명을 추모하고자 제작했다. 반짝이는 미러 시트 위에 놓인 왕관은 작가가 어린 생명에게 씌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선택한 소재로 슬픔과 안타까움을 담은 추모의 의미가 다른 일체의 언급이나 수사대신 최정화 특유의 방식으로 재현됐다. 이와 함께 밥상탑, 밥공기로 만들어진 '꽃의 향연', 무쇠솥, 항아리 등으로 만들어진 '알케미', 빨래판으로 이루어진 '늙은 꽃' 그리고 화려한 색채로 쌓여진 '세기의 선물'에서는 물건의 수집과 축적, 시간이 쌓인 재료 사용 등 작가만의 독특한 방식이 담겨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성(聖)과 속(俗)이 한자리에서 어떻게 '속성'이 될수 있을까를 보여준다. 명품관이나 일반관이나 동전의 앞과뒤 처럼 똑같은 것이다. 버린 물건과 다시 태어나는 물건의 순환에 대한 이야기.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현란함과 혼란함, 성과 속이 한데 어우러져 '우주적 비빔밥' 미학을 보이는 이번 전시는 그 들뜸을 눌러주는 공간도 마련됐다. 작가가 일명 '명상의 공간'이라고 이름 붙인 공간은 '꽃 숲'의 뒤편을 흰천으로 둘러 공간을 분산시켰다. 앞에서 알록달록 각양각색의 사물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건넨다면, 뒤편은 쌓은 사물들의 그림자로 차분하게 한다. "모두가 앞면만 보는데 벽과 그늘, 빛과 그림자 전체가 하나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명상의 공간이다. 그런데 그 또한 기준은 없다. 알아서 즐기시라." '쌓기'의 달인, 그에게 '쌓기'란 무엇일까? 그는 "염원과 애도"라고 정의 했다. "시간의 축적이라고도 하지만, 쌓는다는 것은 너무 의미가 많다. 쌓기는 원시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쌓는 건 전 세계가 동일하다. 기독교, 이슬람 첨탑의 양식도 쌓는것 아닌가. 나무도 탑이고 쌓인 것도 탑이고, 이 쌓기는 땅에서 하늘로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먹이를 잘 잡게, 농작물 잘 되게 해달라는, 결국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는 염원으로 그 양식과 내용을 빌려서 쌓는 것"이라며 마당에 설치된 작품 '민들레'에 염원이 많이 담긴 곳이니까, 수능 시험 합격 기원도 여기 와서 빌면 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제안도 했다. 7000개의 다양한 식기를 모아 만든 마당에 설치된 거대한 작품 '민들레'는 '민(民)들(土)레(來)'라는 의미가 담겼다. 최정화는 이 작품앞에 시를 지어 비석도 만들었다. "텅빈 내가 먹던 그릇, 너를 먹이던 그릇, 네게 힘을 내주어주고 남과 더불어 살라는 밥 그릇 땅과 하늘사이 찬란한 빛이 되었습니다 먹이고 먹는일을 돌보시는 어머니 당신께 이 빛을 바칩니다.'라고 써있다. "예술은 미끼와 삐끼"라고 주장하는 그는 "결국 예술은 호객행위를 하는 거다.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래서 미술작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미술만 하지말아라. 다른 것 다 해도 된다. 제발 딴짓 좀 하라"고 일갈했다. 작가 최정화는 사물들과 함께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사물은 극에 달하면 그로부터 반전한다는 뜻)했다.일상과 예술,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넘어 '키치(kitsch)작가'에서 ‘국내 대표 설치미술가’ 로 진화했다. 삭은 양푼이 탑이 되듯 그의 작품은 이제 이 시대 모든 것과 통한다. 그래서 '4차원 입체 민화'라고도 한다. 이름없는 무명화가들이 만들어낸 민화처럼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모두가 함께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나는 모아만 놓았을뿐이다. 이번 전시에는 찌그러진 냄비는 기본, 청동기, 고려, 신라,조선 시대 물건들과 아프리카 태국 스톡홀름 남미등 모든 시대와 나라의 것이 섞여있다. 우주적 비빔밥, 한정식 밥상, 묵히고 삭힌 젖갈이 된다. 각자 알아서 골라먹우면 된다. 예술이라는 건 몰라도 된다. 즐기고 자기 생각을 가져가면 된다." 근엄하고 조용했던 미술관을 경쾌하고 웃기게 '정화'시킨 최정화 작가는 "앞으로 우리가 알던 예술은 없어진다"고 자신했다. 이번 전시도 수많은 사물들이 쌓여 북적북적 하지만 결국 간단한 이야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기념비입니다. 당신은 훌륭합니다." 2019년 2월 10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9/04
'호모데우스' 같은 윤석남...팔순 자화상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 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HOMO DEUS)로 바꾸는 것이다." 전 세계 베스트셀러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가 지난해 출간한 '호모 데우스'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화가(예술가)를 '호모 데우스' 같다면 무리일까. 하지만 이 사람을 직접 본다면 수긍할 수도 있을 것 같다. 1939년생. 팔순이 된 화가 윤석남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나이 팔십 먹었다고 허리가 꼬부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런 고정관념은 버리세요" 30일 서울 학고재 갤러리에서 만난 윤석남은 '팔순 할머니'라는 이미지를 깜박 삭제시켰다. 할머니처럼 절대 안보이는 스타일이다. 줄무늬 남방에 진바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린 옷차림. 지금 20~30대가 입어도 무방한 패션이다.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의 옷을 입어 부담스럽고 어색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다. 20년은 젊어 보이는, 60대라고 해도 믿을 외모다. 노화를 제대로 극복했다. 그는 "내 주변엔 이런 사람 많다"면서 "고정 관념을 깨라"고 다시 지적했다. 대개 화가들은 또래 보다 젊어보인다.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안에 있는 것을 쏟아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남자 화가들은 대기만성형이다. "친구들이 은퇴하고 뒷방 신세 될때 여전히 현역"이라며 혈기 왕성하다. 젊어서 못 본 빛도 찬란하게 쏟아져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딱 적용된다. 3~4년전 단색화 열풍으로 뜨겁게 부상한 팔순의 화가들이 예다. 국내 '페미니즘 미술 대모'로 불리는, 팔순의 윤석남의 행보도 국내 미술사에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외모 뿐만 아니라 작업 열정이 만개했다. 최근 영국 테이트 미술관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되면서 '아시아 페미니즘의 대모'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부장적인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반기를 드는 페미니즘 움직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로 꼽혔다. 국내외 미술계 러브콜도 이어졌다. 오는 11월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열리는 단체전에 참여하고, 2019년에는 아트바젤 홍콩에 참가한다. 이에 앞서 오는 9월 4일부터 서울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제 24회 개인전을 연다. ◇ 독학으로 그린 그림, '페미니즘 미술 대모'가 된 윤석남 만주에서 태어나 6살 때 한국으로 온 윤석남은 한국 현대여성의 삶을 대변한다. '석남'이라는 이름은 아들을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졌다. 6남매, 둘째인 그의 이름 덕분인지 밑으로 남동생 셋이 태어났다. 10살에는 화가, 그 이후엔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미스 윤'이 됐다.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후 50여 년전 직장 생활을 했다. 직업은 회사 타이피스트. 컴퓨터 등장으로 타이피스트가 사라졌지만 50~60년대 최고의 직업이었다. 회사에서 악명이 높았다. '일개 타이피스트가 인사를 안한다'는 수군거림이었다. "남성 중심 회사였다. 복도를 지나가면 얼굴 마주칠까봐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는 윤석남은 "남자한테 정말 인사하기 싫었다"고 했다. 그렇게 8년을 견뎠고, 회사를 그만뒀다. 결혼 때문이었다. "그 당시 여자는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 두는 게 원칙같은 세상"이었다. 결혼도 하고 먹고 살만한데 30대 초반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그때는 남편이 꽤 돈을 번 중산층 가정이었다. "남들 보기엔 행복한데 나는 불안하고 불운하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다. "그게 왜 그런지 이유도 없이 그랬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데 내면은 상충되는 감정. "먹고 사는 게 해결이 되니까, 그전 까지는 노동을 무지 많이 했는데...그런 게 왔을까?"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럼에도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할까. 살아 있는 의미가 뭐지?" 고민은 10년간 이어졌다. 어느 날 남편에게 "그림을 해야겠다"고 하니 "하슈~누가 말려?"했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주부로, 남편의 아내로, 딸을 둔 어머니로서 한계를 벗고 나를 찾기 시작한 그림이었다. "그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내가 살아있었을까?"라며 그림을 천직처럼 여겼다. 나이 마흔이었다. 붓을 잡고, 그림 그리러 간다며 미국으로 1년간 유학도 다녀왔다. 뉴욕(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 생활은 테크닉보다 눈을 뜨게 해줬다. 그림은 당시 미대 모 교수 작업실에서 드로잉과 회화 교습을 두달 간 배운게 전부다. 이후 아파트 방을 터서 작업실을 만들었다. 습작의 대상은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가 단골 모델이었다. 2년간 밤낮없이 미친 듯이 그린 후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단순한 취미로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을 드로잉이나 조각적 설치, 회화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고발'해 낸 작품이었다. 독학으로 깨우쳐 거칠게 나온 그림은 '여성에 대한 관습적 인식에 역행'하면서 '선구적 페미니스트'로 떠올랐다. "페미니즘 작가? 난 전혀 아니었다. 1979년도 4월 처음으로 전시를 했는데, 그때는 여성주의 페미니즘 말 자체도 어색했다." 단지 "정말 살기위해서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여성으로 살기위해." 1985년 작가 김인순과 김진숙과 함께 ‘시월모임’전을 연 것이 '페미니즘 작가'로 등극한 계기가 됐다. 당시 ‘시월모임’전은 관훈미술관에서 열렸는데, 그의 작품 '무제'는 민중미술의 맥락 내에서 해석됐다. 일을 하고 있는 노인의 얼굴이나 손을 부분적으로 투박하게 그린 작품이었다. 윤석남은 "그 전시때 한국의 여성문화운동팀과 만났다. 그때 비로소 내가 왜 그렇게 발버둥쳤는지를 알게 됐다"고 했다. "나는 여성으로서 몸소 그걸 느낀거고, 그들은 공부를 한거였다. 그때부터 나도 서양의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내가 왜 이런 의식을 하게 된 것일까에 대한 자각이 뼈에 다가왔다. 아마 그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흐지부지 살지 않았을까하는 공포심이 있다." ◇늘 엄마 생각 '어머니'는 윤석남 힘의 원천 "나이 마흔에 그림을 시작하면서도 내 자신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서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39세에 남편을 잃고 아이가 여섯딸린 어머니는 향년 95세까지 질곡의 삶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윤석남은 "나의 어머니는 이조시대때 여성의 삶을 가지고 계셨다. 자신은 굶을 지라도 거지가 지나가면 불러다가 밥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며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존경하는 존재다. 늘 엄마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윤석남의 출세작이다. 1980년대 작업 시작 당시부터 어머니를 모델로 인물, 초상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인물화는 '어머니' 연작으로 이어졌다. 투박한 나무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 회화적이기도 하고 조각적이기도 하며, 나무를 이어붙인 콜라주처럼 보이면서도 입체감과 평면성을 동시에 지닌 당시에는 기이하고 독특한 작품이었다. 작가 개인의 어머니로 비춰졌지만, 점차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상징성과 보편성을 띤 ‘어머니’로 아이콘화되었다. '어머니' 시리즈로 1996년 여성 최초로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고, 1996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설치 작품을 선보여 국제적인 여성작가로 주목받았다. 50살이 넘으면서 "나도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도전한게 '핑크 룸' 연작이다. '있어빌리티한' 중산층 가정의 주부의 반란을 꾀하는 작품이다. 온통 핑크로 도배되어 현란하다. 핑크색 구슬이 깔린 바닥위에 핑크색 쇼파, 핑크색 한복 치마를 두른 여인의 형상이 거울과 마주한 작품.벽 주변에는 핑크색 종이로 오려붙인 다양한 모습이 정렬되어 붙어 있다. (붓을 잡고 종이를 오려 둘째, 셋째 손가락이 굽어 있다) "핑크색은 아름답지만 내 작품의 색은 '형광 핑크'다. 아름다운 게 아니라 날카롭고 불안한게 느껴져 선택한 색이다. 내 삶이 그랬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데 내면은 불안한, 혼란스웠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탈리아풍 3인용 핑크색 쇼파는 의자 다리에 동물의 긴 발톱이 달린 듯 서 있다. 작가는 "화려해보이지만 의자의 쇠 발톱이 나의 불안한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핑크룸'은 작가의 불안감에서 나왔지만 사회적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으로 읽혔다. 핑크를 강요하는 유년 시절의 기억에 맞서는, 사회적 통념을 해체시키는 예술적 제언으로 파고들어 '페미니즘 대표 작가'로 더욱 자리매김하게 된 작품이다. 미술비평가인 정연심(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는 "윤석남은 '여성의 시각'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온 여성들에 대한 억압된 기억을 개인적 서사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며, 특히 '핑크룸'의 경우 "여성의 방은 흔히 규방 문화를 상징하는 듯한데, 윤석남은 여성을 실내의 공간, 가정이라는 공간에 가둠으로써 여성을 공공의 장소로, 개방된 공간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던 한국의 현실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 것"이라고 평했다. ◇어머니에서 이제 내 이야기로... '자화상' 전시 학고재갤러리 신관에 펼친 개인전은 민화를 응용한 채색 기법으로 완성했다. 윤석남 작가가 40여년만에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 신작 전시이자, 채색화로 선보이는 첫 전시다. 민화풍의 자화상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지각했던 그림이 아니라, 마음과 감성에 호소하는 민화의 특징을 이용한다. 서양의 추상 회화보다는 우리 전통과 문화에 더 긍지를 갖고자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기존에 사용하던 매체를 뛰어넘는 시도를 선보인 신작들은 현역 작가로서 윤석남의 힘을 보여준다. 그동안 김만덕, 허난설헌, 이매창 등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은 역사적 여성 인물을 작품 속에 등장시켜왔다. 40년 동안 여성 이야기만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자꾸만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을 그리려고 했지만 절대 그려지지 않았다"면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속에서 스러져 간 한국여성을 끌어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혼을 끄집어내서 하고 싶은데 아직 능력밖인지 안되고 있다"며 뜸을 들이는 중이라 했다. "10여년 전 최초 여성노동가를 작업해보라고 해서 작업은 했지만, 발표는 하지 않고 있다. 감정이입이 확 되지 않는데 가짜로 그림을 그릴 순 없다"고 했다. 2015년 이후 윤석남은 민화에 큰 관심을 가졌다. 지금까지 나무 위에 여성들의 모습을 묘사해온 윤석남의 새로운 시도다. "민화가 버려진 보물 같다"며 "서민들의 소소한 생활과 감정이 있는 그대로 느껴진다"고 했다. "물고기가 공중을 새처럼 날아다니고... 있을 수가 없지만 얼마나 자유스럽나. 이조 시대 때 억압된 상태에서도 불구하고 밝은 그림이 나온건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채색화에 빠졌"다는 그는 "채색화를 그리기 싶어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팔순의 나이에도 팔순 같지 않고 할머니 같지 않은 윤석남의 '동안' 비결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기위해 40년째 매일 1시간 30분씩 걷기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 외엔 그림 때문에 늘 바쁘게 움직인다. 서울 집에서 경기도 화성 작업실을 매일 출퇴근 하며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팔순이 된 올해에도 '내가 누구인지' 자신을 초상화로 그려내고 몰두했다. '페미니즘 대표 작가'로 가부장적인 문화를 깨고 왔지만, 아직 변화는 멀었다고 했다. 젊은 여성들을 만나보면 의식적인 면에서 독립적이지만 직장, 결혼 문제로 고민이 많아 답답하다고 했다. 자신은 다시 태어나면 "결혼은 안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이 30대 중반에 결혼 안한다고 했을 때 만세를 했다"며 두 팔을 들어올려보였다. 50대 후반인 딸은 사진작가로 현재 미혼이다. "자기가 싫다는데 왜 강요를 하냐요?. 비애국적이지만 딸에게도 너 하나 안한다고 나라는 망하지 않아"라고 했다고 전했다.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묻자 간단했다. "그냥 너 답게 살아." 그러면서 "아니, 꼭 결혼을 해야 돼요?"라고 반문했다. 여느 팔순의 할머니들과는 다른 반응이다. 그가 다시 물었다. "내가 이상한가요?"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 이후의 존재라면, 윤석남은 '페미니즘 미술 대모'로 여성들을 행복하고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호모데우스'같은 예술가다. 한국의 여성 미술가로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40여년간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남성 미술가들이 주목해주지 않았던 소소한 이야기, 여성들이 차별당한 이야기, 그냥 피식 웃게 하는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로 여성들과 공감하며 이끌어왔다. 여성작가로 성공한 거 아니냐고 하자, "그런게 성공이 아니라, 작가로서 끝까지 지속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했다. 이번 개인전은 윤석남이 타인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 마주하고자 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여든이 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작업 뒤에 서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이자 여성 그 자체로 자신을 작업 속에 나타나려고 시도했고, 그 시도를 전시 주제로 잡아 처음 선보이는 것이 이번 전시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진정 바로보자'는 의지로 보인다. 침묵을 깨고 일어나기 시작한 여성들을 응원한다. 자화상은 '자신과의 대화법'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 윤석남 자신의 당당한 모습이 돋보인다. ‘인형' 같은 여성이 아니라, 자신감 넘치는 '여성 본연'을 만날 수 있다. 투명하고 생동감이 굽이치는 백발의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전시는 10월 14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8/31
한국화가 이영지의 '찬란한 슬픔의 봄' 같은 그림 '시간은 차갑게 식혀주고, 명확하게 보여준다.'(마크 트웨인) 한국화가 이영지(43)의 작품이 그렇다. 점점점 찍어 완성한 푸른 나무, 짙푸른 풀밭과 오솔길은 '시간의 그물망'이다. 온전히 시간에 내준 작품은 구김살없다. 나뭇잎 하나 하나는 물론 꽃점들과 풀줄기들이 오롯이 존재감을 발한다. 시간을 뚫고 나온 작품이어서일까, 보는 순간 마음을 잡아챈다. 초록의 싱그러움과 화사함에 눈길을 뺏기지만 화폭에서 내뿜는 공력에 갇힌다. 은은하게 발색하는 한국화의 깊이감이다. 장지위에 분채로 나온 작품은 한땀한땀 수놓는 장인 정신과 통한다. 한국화는 밑작업이 시작의 반이다. 여러겹 붙이 장지 위에 반수처리를 하고 그 위에 반복적인 아교 처리를 수차례 덧칠해야 색칠을 할수 있다. 시간을 견디기 위한 조치다. 장지지만 색이 변하고 좀이 스는 것을 좀 더 늦추기 위한 '항산화 효과'로 작가는 이 과정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처리한다. 덕분에 초록색과 노랑색등 장지위에 노니는 오방색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10여년간 그려온 '나무 그림'이 서울 인사동 터줏대감 화랑 선화랑에 걸렸다. 그동안 '작은 화랑'에서 주로 선보여 그림은 보였지만, 이름은 부각되지 않았던 작가의 의미있는 변화다. 선화랑(대표 원혜경)이 주목한 작가를 선보이는 기획시리즈 '예감'전(2016년)에 선정된후 선화랑과 인연을 맺었다. 화랑내 그룹전과 아트페어를 통해 소개하다, 작가의 14회 개인전을 펼친다. '테스트는 끝났고, 컬렉터도 확보됐다'는 화랑의 자신감이다. 22일 선화랑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 이영지는 자신의 그림같았다. 연약하면서도 화사한 작품처럼 양면성이 공존했다. 그동안 화랑가에 선보였던 '이영지표 그림'은 이파리가 풍성하지만 가지는 앙상한 '나무 그림'이다. 반면 이번 전시에는 풀숲과 화사한 꽃들이 함께하는 풍성한 화면이 눈에 띈다. 웬지 쓸쓸함이 감돌던 이전 '나무 그림'과 달리 촉촉해진 느낌이다. "제 그림에는 슬프고 아픈 것을 안넣으려고 했어요. 제가 그냥 그림을 딱 봤을때 한점 한점에서 행복하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작가는 "그동안 오만했었다"고 털어놨다. "내 그림을 사랑해주고, 좋아해주니, 나는 누군가를 힐링 시켜주는 작가구나"라며 작업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제가 제 그림에서 치유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결국은 내가 좋아서 하는게 행복한거지, 누군가를 위해서 한다는 건 아니구나를 알고 반성했죠." "그동안 참 행복을 쫒을려고 노력했어요. 그냥 내 주변에 있었던 건데, 어떻게 하면 행복하지? 나는 뭘하면 행복하지?를 생각했던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생각을 내려놓고 보니, 일상이 행복이라는게 보이더라고요." 인생은 '희로애락 칵테일'이다. 안도현의 시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 처럼 생명있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 작가는 일찍 그것을 경험했다. 찬란한 기쁨속에는 거대한 슬픔도 함께한다는 것을. 작가가 처음 선보인 '나무 그림'은 큰 나무 하나가 정중앙에 자리했는데, 나뭇 가지처럼 가볍게 떠있는 모습이었다. 건조하면서도 외로운, 웬지 '덧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은 서정성이 도드라졌었다. 앙상하면서도 풍성한 나무 그림은 '망각'에서 탄생했다. "대학원시절 엄마가 교통사고가 나서 갑자기 돌아가셨고, 2년후 아버지가 등산하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두번을 연달아 겪다보니 멘탈붕괴가 와서 어떻게 살아가야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난 아니야, 난 아니야'라는 생각이 지배했고, 잊으려고 애썼다. 외동딸로 사랑을 듬뿍받고 자랐다. 고등학교시절 아침 잠이 많아 눈을 못뜨면 엄마는 입을 벌려 밥을 떠 먹여줬고, 아버지는 머리를 말려줬다. 그런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았던 철부지 딸이 대학에 가고 이어진 일상에서 불행이 닥쳤다. 엄마의 아침 인사 '잘 갔다와~' 말은 영원히 멈췄다. 작가는 "갑작스런 부모님의 죽음 이후 어딜가도 안슬프더라"면서 친구나 지인들의 누군가가 병원에서 아파서 돌아가신 것을 보고 우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병석에 있었지만 오래 오래 이야기했잖아. 오래 그 사람을 봤잖아'라는 생각을 하며 남의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슬픈 것은 다 슬픈 것이더라'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다시 붓을 잡으면서 '두근두근 쿵쿵쿵' 감정이 살아났다. 나무를 그리고, 새 두마리를 그려넣으면서 부모님 생각을 한다. 늘 주변을 맴도는 새들은 작가를 위로하고 보살피며 화폭에서 정을 나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면서 울컥울컥할때가 아직도 많다는 작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림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다양한 감상자의 몫이지만, 진정성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지난해 전시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할머니가 작가의 그림앞에서 울고 있었다. 주변에서 놀라고 작가도 당황했다. 사연이 있었다.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내고 집안에만 칩거하던 할머니를 딸이 억지로 끌고나온 자리였다. 할머니는 작가의 그림을 보며 '아들이 바구니에 열매를 가지고 날아오고 있다'면서 마음에 들어했고, 작품을 구매했다. 작가는 "이후 그 작품을 매일 보면서 행복해하신다는 말을 듣고 화가로서 보람있다"고 했다. 그림을 보며 부모님 생각에 울컥하던 작가가 말했다. "몇살쯤 되면 마음이 가라앉아요?" 라고 선배에게 물었더니 "그런게 어딨니. 그냥 참고 살아야지"라고 하더라면서 "모두의 삶이 살아 있음을 알게 하는 것에 중요함을 느낀다"고 했다. 삶은 점에서 시작하고 한 점은 존재, 두 점은 선, 세 개의 점은 면으로 변화하는 것과 같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무를 그릴 때 이파리를 점처럼 하나하나 담아 존재감을 중요하게 표현한다. 이파리들이 모여 나무가 되었지만, 나무로 탄생하는 그 순간에 멈출 수 있는 시간을 '새'라는 이미지를 통해 의인화했다. 시간이 머물지 않고 흐르도록 하고자 하는 의미다. 10년간 나무를 그렸지만 여전히 새롭다고 했다. 성신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1998년 1회 개인전을 연 이후 2006년 나무 그림을 알렸고, 2011년부터 1년마다 개인전을 열었다. 쉬지않고 그려온 작품에 마니아층도 있은 물론, 아트상품 제안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은 아트상품을 할 것은 아니다며 미뤄놨다면서 "그냥 지금은 하나밖에 없는 그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을 보였다. "제 작품은 정적인 공간이지만 각자 다른 시간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요. 누군가에게는 과거를, 또 다른 이에게는 미래로, 현재로 보이기를요... 화면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과 감정에 따라 다른 시간을 보겠지만 결국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그게 뭐냐고요?" "사람마다 움직이는 시간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다르고 좋음과 나쁨이 다 다르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시간을 느낄수 있다는 것, 또 각자의 조금씩 다른 삶이 있으니 그에 충실하면 되죠. 지금, 살아 있으니까요." 짧은 시간과 유한한 삶을 찬란한 봄 처럼 화폭위에 붙들어 맨 전시는 9월8일까지 이어진다. 타이틀은 '네가 행복하니 내가 행복해'다. [email protected] 2018/08/22
'칼 맛' 아는 작가 송진화 '지금 여기' '분노가 재산'이었던 여자는 그 재산을 탕진했다. 옷을 벗어던진 채 식칼을 가슴팍에 겨누던 여인은 이제 '우리의 날은 아름다웠다'며 활짝 웃고 있다. 불과 3년만이다.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랄도 할 만큼 하면 해소되니까. 모두 뽑아냈다고 해야하나요." 나무 조각가 송진화(55)가 나지막이 말했다. 16일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만난 작가는 한결 여유로워보였다. 강렬한 작품처럼 '쎈 언니' 포스의 작렬함도 감춰졌다. "딸을 결혼시켜서 마음이 자유로워져서일까요? 좀 달라진 것 같다고 하네요." 3년만에 여는 이번 신작 개인전은 덤덤하고 담담하다. "목까지 차오르는 울컥하는 느낌을 풀어내고 싶은 마음에 식칼을 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깎아서 선보이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내 마음, 내 감이 느끼는대로 표현했다"는 이전 작품과 달리 "지금의 상황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속에서 바글거리고, 지글거리는 것을 후벼파내 섬뜩하게 쏟아냈다면 이번 작품은 전시 타이틀(Here and now)처럼 '지금 여기'에서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한다. 작품속 여인드 하얀 이를 드러내 활짝 웃거나 골똘히 생각을 하고, 반려묘들과 물구나무를 서며 신난 모습이다. 작품들은 영락없이 작가다. 긴 속눈썹에 공들인 눈과 달리 따져보면 얼굴은 엽기다. 코와 입이 없기도 하고, 코가 없는 조각이 태반이다. "눈빛만으로 모든 걸 보이겠다"는 자신감이었는데, 작가는 "코와 입이 없는지도 모르고 조각했다"고 했다. "지난 2012년 전시때 한 관람객이 코가 없다고 해서, 작품을 제작한지 12년만에 저도 그때야 알았어요." 반면 손가락과 발가락은 극사실화 못지않다. 주먹을 쥐고, 치마를 쥐어잡은 손가락은 보는 사람까지 힘이 들어갈 정도로 실제같은 에너지가 넘친다. "무의식 속에 행동하는 손은 솔직함이 잘 드러나기 때문에 손을 조각할 때 공을 더 들입니다." 송진화 작가는 나이 마흔에 첫 전시를 열며 '경단녀'를 탈피했다.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수묵화로 전시를 열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결혼하고 출산하며 자연스럽게 그림은 멀어졌지만, 붓이 아닌 톱과 칼을 잡은 건 "몸을 움직여야하는 체질"이었기 때문. 한국화가에서 2009년 처음 선보인 나무조각전은 파격적이었다. 깨진 소주병에 걸터앉아 서 있고, 식칼 위에서 서커스 하듯 서 있던 여성 조각은 그야말로 '여성을 위한 굿판' 같은 전시로 돌풍을 일으켰다. 일상의 불안과 서글픔을 강하게 드러내며 솔직하게 여성들에겐 카타르시를, 남성들에겐 공포와 두려움을 선사했다. "한국화를 하면서 재미가 없었어요. 80년대 초부터 '동양화란 무엇인가?' 화두였어요. 서양화기법으로 한지에 그린다고 동양화일까?등 무수한 생각과 고민끝에 멈춰 공백이 길었는데 2006년부터 나무를 깎아 작업하면서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게 됐어요." 우연히 목조각인 꼭두를 본게 시작이었다. "내가 갖고 싶을 것을 만들어 본 것"이 나무 조각을 하게 된 계기다. 나무는 주로 소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참죽나무, 향나무를 사용한다. 나무마다 특성을 살리고, 고유의 결과 옹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를 구매하는 것은 아니다. 쓸모없는 것들을 주워온다.(그래서 대형조각이 없다) "이제는 보기만해도 버려진 나무에서 여인의 모양과 흔적이 보인다"는 작가는 '돌 속에서 형상을 끄집어 내는'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심정과 통한다. "큰 톱을 들고 나무를 칠때의 그 느낌은 통쾌합니다. 이 과정만큼은 작품이 밀려 조수가 생겨도 넘기지 않을겁니다. 톱으로 치고 칼로 파내는 그 칼 맛이 여전히 좋습니다." 그의 조각은 나무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결과 옹이를 살려 나무 고유의 자연적 특성이 드러나 자연친화적이다. 나무로 조각된 여인상은 재료의 물성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자아내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살아온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게 하고, 마치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는 듯하다. 여인상은 나무의 거친 표면이 살아있기 보다는 대체로 단아하게 다듬어졌다. 특히, 얼굴 부분은 매끈하고 광택이 나도록 완벽하게 다듬는 마감처리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작품에 따라 그 기법을 달리하여 자신만의 효과적인 표현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Here and now(2018)은 나무의 결을 극대화시켜 얼굴을 표현함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전하고, '덤벼!'(2017)의 경우 여성이 입은 옷자락은 면적인 요소를 강조하여 깎는 방식으로 단조로움을 벗어나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들은 매력적이고 위트 있는 표정과 몸짓의 아이로 등장, 인물들의 존재감을 강조했다. 분노로 울고 불고 난리치며 굿풀이 같던 이전과 달리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강렬했지만 공포감으로 선뜻 구매하기 어려웠던 이전 작품과 달리 활짝 웃으며 얌전하면서도 힘있는 작품은 소장욕구를 부르는게 큰 수확이라는게 갤러리측의 입장이다. 작가 송진화는 "인생이란 열심히 살아야하고 가치 있고 보람차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며, 정말 그렇게 묵묵히 살아왔다"고 했다. 힘들고 마주하기 싫었던 순간들을 견뎌가며 자신에게는 매우 혹독하게 채찍질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격려하고, 내가 어디에 놓여있는지 바라보며 ‘여기, 지금’을 누리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말처럼 이번 작품들은 지난(과거) 것에 대한 해소 과정이자, 삶 속에서 생기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녹여낸 것이다. 17일부터 펼치는 이번 전시에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제작한 작품 총 25점을 보여준다. 지난 전시에 공간을 마치 연극무대와 같이 연출하여 이야기가 있는 전시구성을 선보였다면, 이번에는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재료의 물성과 작품의 내용, 조형적 특징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다. 작가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 모습과 꼭 닮은 존재를 친구처럼, 자식처럼 함께 담아냈다. 짐이 될 수도 있지만 서로 위로가 되고 의지되는 존재를 통해서 삶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상실감, 외로움을 치유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래도 여전히 섬뜩함의 흔적은 남아있다. 여인 조각의 머리 색깔의 붉은 색은 "피가 말라붙은 색"으로 작가의 예민하고 감수성이 뛰어난 증서같은 표시다. 특히 굵직하면서도 섬세하고 유려하게 파낸 '칼 맛'은 송진화 조각의 '참 맛'을 느끼게 해준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는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첫 귀절이 떠오르는 전시다. 이전 송진화의 강렬한 조각에 취했다면 심심해 보이는 작품이지만 세월앞에 장사없다. 가슴이 뻥 뚫린채, 배시시 활짝 웃는 조각이 말한다. '시간이 약이라고...' 전시는 9월 19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8/16
65년만에 예술가가 점령한 DMZ 캠프그리브스 미술은 개인과 공동체의 치유를 위해 존재한다. 일상에서 숭고에 대한 자각은 대개 찰나에 이루어지고 무작위로 찾아온다. 예술, 특히 미술 작품을 볼때다.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예술은 인간의 조건인 고난을 웅대하고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유리한 관점을 제공한다." 미군 막사에서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신한 'DMZ 캠프 그리브스'는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해빙무드인 남북 관계속 가장 먼저 주목받고 있는 DMZ에 부동산개발업자가 아닌 예술가들이 점령한 건 위로와 치유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캠프 그리브스'는 파주시 민간인 통제구역 내, 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1953년부터 2004년까지 미군기지로 사용되었던 공간이다. 2004년 마지막 주둔부대인 제 506연대 철수 이후 캠프 그리브스는 평화, 생태, 문화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군 시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체험형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오는 11일 ‘캠프 그리브스 DMZ 평화정거장(DMZ 피스플랫폼) 사업’의 메인 행사인 예술창작 전시를 개막한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추진하는 사업이다. 8일 미리 가 본 '캠프 그리브스 DMZ 평화정거장' 전시는 서늘한 아름다움으로 분단 국가의 아픔을 다시 상기 시켰다. 금지 구역 '캠프 그리브스'로 가는길은 묘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서울 광화문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거리. 내비게이션에 '통일대교'를 찍고 가는 길은 파주로 들어서면서 4차선에서 3차선, 2차선으로 좁아지며 최북단 도로로 안내한다. 녹슨 가시철망이 이어지는 임진각→판문점 도로 간판을 따라 들어선 통일대교는 더 이상 세차게 달릴수 없다. 검문을 통과해야 입장할 수 있다.(주민등록증은 필수지참) 판문점과 가까운 곳, 65년만에 공개된 DMZ '캠프 그리브스'는 평화롭게 보였다. 초록으로 우거진 수풀,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짱짱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한 여름을 농축되게 연출했다. "예측하지 못하는 반전을 이루는 컨셉으로 접근했다." '캠프 그리브스 DMZ 평화 정거장' 이은경 예술총감독은 "장소성에 초점을 두고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DMZ가 문화예술 상징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추진되는 전시이니 만큼 분단의 아픔을 가진 이 장소를 예술작품으로 중화시키겠다"는 의지였다. 이 총감독은 "캠프그리브스는 전쟁의 역사라는 가치와 문화 인터렉션 접목, 안보 역사 체험보다 미래지향적인 공간으로 변모시켜 젊고, 가족단위 관람객이 올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생성했다"고 소개했다. 미군이 쓰던 막사와 탄약고, 볼링장등을 그대로 전시장으로 활용한 공간은 '민통선안의 미술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장소성에 집중한 전시기획력을 보여준다. '예술창작전시'는 전쟁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DMZ를 평화와 놀이의 공간이자, 평화지대로 재탄생시켰다. 탄약고, 정비고, 미디어 프로젝트와 '평화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총 17개 작품을 선보인다. 김명범, 박찬경, 정문경, 정보경 등 초청작가 4인과 강현아, 박성준, 시리얼타임즈(강민준, 김민경, 송천주), 인세인박, 장영원, 장용선 등 공모 선정작가 6인(팀)이 DMZ와 캠프그리브스의 역사와 공간특수성을 재해석했다. 캠프그리브스의 미군시설 중에서도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었던 탄약고는 '놀이터'로 탈바꿈했다. 김명범 작가는탄약고 프로젝트 #1을 통해 '플레이그라운드' 시리즈를 국내에서 첫 공개하며,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탄약고 한 가운데 미끄럼틀과 그네가 설치됐다. 미끄럼틀은 한쪽 벽으로 쏠려 있어 남과 북의 두 방향으로만내려갈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미끄럼틀 위의 하얀 수건은 실제로 캠프그리브스에서 사용되었던 물건으로, 항복, 영역표시, 경계 등의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또한 다른 탄약고에는 거대한 나무같은 뿔을 자랑하는 사슴 한마리가 자리하고 있다. 작가가 미국에서 박제해온 사슴으로, 1989년에 지은 군사 시설물인 탄약고의 정체성을 잊게 할 정도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전한다. 미군이 사용했던 퀀셋 막사를 리뉴얼한 전시관에는 미디어작가 박찬경의 '소년병', 다큐멘터관에는 장용선 작가의 Treasure N37°53'56.8212" E126°43'43.2192'과 선보인다. 퀀셋막사는 비품실, 화장실 및 샤워실, 보일러실, 중대사무실, 저장고와 보급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원형 그대로의 형태와 내부가 보존된 퀀셋막사를 직접 볼 수 있는 곳은 캠프그리브스가 유일하다. 박찬경의 '소년병'은 애잔함과 슬픔을 전한다. 기존 12분짜리 작업을 덧대 16분으로 늘인 이 작품은 어린 소년병을 통해 북한의 이미지를 서정적이면서 여린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다. 군대를 벗어난 가상의 북한 소년병이 책을 읽고, 노래를 읊조리다가 휴식을 취한 모습을 느린 화면으로 반복하는데 그속에서 나오는 북한 인기곡 '휘파람' 노래는 소년의 모습과 어우러지면서 비가(悲歌)처럼 들린다. 막사를 떠났는데도 이 노래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정도로 강렬하다. 이은경 예술총감독은 "시적이고 서정적인 전시를 만들고 싶어 이 작품을 꼭 전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장용선의 작품도 DMZ에서 어울리지않을 만큼 서정적이다. 캠프그리브스에 이전부터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재료들을 작업의 오브제로 사용하고 캠프그리브스의 좌표값을 작품명으로 명명했다. 캠프그리브스 한 켠에 뒹굴고 있었던 군대물품인 윤형 철조망 끝에서 강아지풀 조명이 뻗어져 나와 캠프그리브스를 낭만적으로 밝힌다. 예술창작전시의 또 다른 섹션인 'DMZ 평화의 정원'은 DMZ와 캠프그리브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볼링장에 인터랙티브로 설치된 박성준 작가의 시리얼타임즈 작품은 전쟁 게임 같다. 작품 'your flame II'는 새의 다양한 울음소리로 가득한 공간에서 관람객이 센서를 지나가는 순간, 전쟁의 한복판으로 인도한다. 이라크 전쟁 때 벌어진 어둠 속에서의 총격 장면은 이곳이 과거에 한국전쟁의 중심지였음을 상기시킨다. 정문경 작가의 'Full square', 'fort'는 전쟁과 군대의 강압적인 이미지를 부드러운 헌 옷들로 채워 유연하게 뒤바꾸면서 고통스러운 전쟁의 기억을 아련한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뒤덮는다. 정보경 작가는 '미사일금지구역', '탕탕탕탕탕, □□□□'을 통해 좀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캠프그리브스를 평화지대로 설정하고 있다. 인세인박 작가는 캠프그리브스 입구에 'ism! ism! 'ism!'이라는 네온 조각을 설치하여, DMZ를 만들어낸 전쟁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라는 과거의 산물을 무지개처럼 보이게 한다. 장영원 작가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대전차 방호벽이 이제는 기능을 상실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전락해 버린 상황을 작가적 시선으로 해석하여,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전쟁 공포 이데올로기 ‘유사시(有事時)’가 허구였음을 밝히고 있다. DMZ의 생태와 장소 특수성을 결합한 작업으로 강현아 작가의 '기이한 DMZ 생태 누리공원'은 캠프그리브스 산책로에서 선보인다. DMZ에 서식하는 동식물로 가정한 상상의 동물들을 통해 DMZ라는 특수한 자연환경 속에서 70여 년간 상 상의 진화를 해온 동식물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예술창작전시 기간 동안 캠프그리브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17점의 작품 대다수는 반영구적으로 설치된다. 전시기간 동안 정비고와 스튜디오 BEQ에서 오픈스튜디오와 아티스트 워크샵 등 다양한 부대행사도 열려 관람객과 소통할 예정이다.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캠프 그리브스는 송중기 송혜교 주연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촬영한 곳으로 한류 관광지로도 탈바꿈했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2013년 민간인들을 위한 평화안보 체험시설로 리모델링하여 민간인 통제구역내의 유일한 체험형 숙박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캠프그리브스 유스호스텔로 변경되어 1박2일 청소년수련활동 인증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통일에 대한 열망과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지 잘알게 되었다", "항상 이런 평화가 지속되면 좋겠다.이번 DMZ활동을 통해 평화의 중요성과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고등학생들의 후기가 남아있다 이번 '캠프그리브스 DMZ 평화정거장 사업 예술창작 전시'는 잊고 있었던 분단국가의 무사태평한 의식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예술작품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평화의 중요성이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전시는 2019년 7월 31일까지. 2018/08/08
'침묵의 화가' 윤형근 깨운 김인혜 학예연구사 기록은 기억을 이긴다. 그는 예견했을 것이다. 이런 날이 올 것을… "1967년부터 한 장소에서 살아서인지 많은 작품과 자료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어요. 1928년 출생인데 당시 가족사진부터 1944년 청주상업학교 교련수업 사진, 1951년 미군부대 근무 시절 등 성장 시기별 사진부터 엽서 편지 전시 포스터 신문기사 등이 빼곡히 있었는데 이분 생애가 처음 알려지는 사실과 상당히 놀라운 일들이 많아 흥미로웠어요."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44)학예연구사가 그의 이름에 시달린 건 9년 전이다. 2009년 어느 날 미술계 재야의 고수가 다짜고짜 찾아왔다. "이 사람 전시를 해야 한다"며 강추했다. "피래미 학예사인데 나한테 왜 이러지?" 신뢰하고 존경하는 분의 말이었지만 시큰둥했다. "단색화 작가? 단색화 많은 작가중의 한 사람?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존경심'에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 사람을 존경할 수가 있나. 저 분이 존경하는 저 분이 궁금해졌죠." 공부를 시작했다. 구술 채록과 평론가들의 이야기, 아카이브를 조사할수록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의 작품은 외국으로 계속 팔려나가는 상황. 더 이상 안되겠다 싶었다. 단색화 위상도 높아진 시점에서 "이제 미술관에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됐다. '피래미 학예사'였던 그는 이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직 16년차가 됐다. 2010년 아시아 리얼리즘, 2012년 덕수궁 프로젝트, 2016년 유영국, 절대와 자유 그리고 2016년 :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만들며 역량을 넓혀왔다. 그렇게 전시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건 2년 전이다. 김인예 학예사는 "제가 그동안 기획한 작가들(이중섭·유영국 등)중 사상의 차원이 가장 큰 것 같다. 알면 알수록 내가 너무 작아진다"고 했다. 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3, 4, 8 전시실에서 윤형근 회고전이 개막한다. 2007년 윤형근 사후 최초로 미술관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다. 작가 사후 유족이 보관해온 미공개작을 포함한 작품 40여점, 드로잉 40여점, 아카이브 100여점이 선보인다. 1980년 광주항쟁으로 인해 탄생된 작품을 포함하여 네덜란드에서 공수한 지금껏 공개 되지않았던 작품도 나왔다. 특히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해외작가들의 전시가 이어지는 서울관에서 펼쳐 이례적이다. 그동안 과천관과 덕수궁관에서 열렸던 국내 근현대 작가들의 전시와는 다른 분위기다. '단색화가'중 가장 조용하던 윤형근 화백의 부활이다. 현재 살아있는 단색화가들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 왜 윤형근(1928~2007)일까?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윤형근 작가를 제대로 조명하면 한국미술의 풀릴 수 있는 실마리가 많다"며 "진짜 단색화 원조는 윤형근 작가"라고 말했다. "그 분을 단색화 틀안으로 넣기에는 너무나 옹졸해져요." 단색화로 일본 화랑계에 첫 진출한 화가라는 것. 미니멀리즘 모노크롬이 대세인때 1974년 한국을 방문한 미술평론가 조셉 러브가 윤형근 작품을 보고 한 눈에 빠졌다. "한국 시골의 김칫독처럼 단순하고 흙냄새가 풍긴다"며 일본 도쿄화랑 야마모토 타카시에게 소개했다. 1976년 도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이 전시 서문을 이우환이 썼다. 원로 미술평론가 오광수 뮤지엄산 관장도 "그가 단색화작가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은 별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면서 "꾸밈없고 침묵하는 그 무엇'이라고 했을 때의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의 작품은 단색화와 공유된 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집단으로서의 단색화와 일정한 거리를 지니고 있는 이유"라고 했다. 윤형근은 생전에도 말이 없는 작가로 '침묵의 화가'로 불린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조명한 윤형근의 삶은 그대로 한국역사다. 점잖고 진중한 이미지와 달리 어두운 시대 울분과 서러움을 삭이며 삶을 살아냈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윤형근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그러나 언젠가는 공개될 것을 예상하고 꼼꼼하게 모아 두었던 자료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며 "알면 알수록 우리나라의 위대한 작가"라고 강조했다. 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왜 이렇게 어둡게 그린 것인지 좀처럼 알수 없었던 그림. 누렇게 변한 작가 노트와 일기가 이제야 말하고 있다. "내 그림은 나의 똥이요 몸이요 얼굴이요 가슴이다. 화가 극도로 났을때 독한 내 무엇이 십분 화면에 베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일기를 쓰듯이 그날그날 기록해 보는 것이 내 그림이요 흔적이다."(윤형근, 1984) ◇윤형근(1928~2007)은 누구? 1928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6남2녀 차남으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참혹했던 역사적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파평윤씨 문정공파 대장손으로 아버지 윤용한은 경성고보 출신 지식인이었지만 식민지 시기 낙향, 서예와 사군자를 그렸던 문인화가였다. 어쩌면 금수저 출신이지만 식민지탓에 군국주의를 경험하며 녹록치않은 인생이 이어졌다. 1945년 청주상고를 졸업한 후 미원금융조합에 취직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어 사직서를 내고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 가출하듯 서울로 상경했다. 미술로 입문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1947년 서울대 미대 1회로 입학했지만,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 후 제적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학창시절 시위 전력(前歷)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 중 미술동맹에서 스탈린 김일성 초상화 등을 그려 돈을 벌었고,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유신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했던 학생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레닌 모자를 쓴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총 3번의 복역과 1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극도의 분노와 울분의 경험은 그를 화가로 이끌었다. 1980년까지 파출소에 등록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 미술교사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품 제작을 시작한 건 그의 나이 만 45세였다. ◇ 스승이자 장인 김환기 넘고 싶었던 화가 그의 그림은 묵직하다.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형상을 절제한 채 짙은 청색과 다갈색을 기조로 수평 혹은 수직의 획만을 허용한 그의 작업은 조용하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미를 가지고 있다. 색띠에서 번져 나오는 선염의 미묘한 진행은 화면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게 특징이다. 면포나 마포 그대로의 표면 위에 하늘을 뜻하는 청색(Blue)과 땅의 색인 암갈색(Umber)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을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것들이다. 누리끼리하고 검은 화면의 그림을 작가는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다. '천지문'이라 지은 이유에 대해 1977년 1월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내 그림의 구도는 문(門)이다."는 일기를 남겼다. 처음부터 어두운 작업은 아니었다.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수화 김환기(1913~1974)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채를 사용했었다. 작업이 변한건 1973년 ‘반공법 위반’의 누명을 쓰고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온 후 색채를 잃게 됐다. 김환기와 윤형근은 특별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졌다. 윤형근이 처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입학시험을 보러 간 날 시험감독관이 김환기였다. 그 후 윤형근이 제적당하고 홍익대학교로 편입할 때에도 홍대 교수였던 김환기가 그를 이끌었다. 그러다 1960년 윤형근이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은 장인-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윤형근은 평생 김환기를 ‘장인’이 아닌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김환기 또한 윤형근을 신뢰와 존중으로 대했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이들은 나이차이가 불과 15살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면에서는 선후배처럼 가까웠고, 어려운 시기 외로운 화가의 길을 함께 걸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동지애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윤형근은 김환기의 죽음을 통보받고 '너무나 불쌍하고 뭔지 모르게 한없이 원통해서 밤새도록 통곡을 했다"고 회고한 일화를 전했다. 윤형근은 김환기를 넘고 싶었다. 1974년 10월 윤형근은 김환기 작고 소식을 들은 후 자신의 아뜰리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벽 한쪽에는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걸려있고, 그 옆에는 윤형근의 '천지문' 신작들이 붙어있다. 바로 그 사이에서 윤형근은 슬리퍼를 신은 채 주먹을 불끈 쥐고 당당한 자세로 서서 정면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다. 김인예 학예연구사는 " 이 사진은 김환기에서의 출발과 김환기로부터의 결별을 동시에 선언하는 윤형근의 야심찬 기록"으로 봤다. 윤형근은 김환기 작품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잔소리가 많고 하늘에서 노는 그림"이라고. 윤형근은 1977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그림은 잔소리를 싹 뺀 외마디소리를 그린다. 화폭 양쪽에 굵은 막대기처럼 죽 내려 긋는다. 물감과 널찍한 붓 그리고 기름, 면포나 마포만이 내 작품의 소재다. ...왜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깨끗한 작업과정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젊은 시절 전란속에서 살아오다 보니 안정된 화실에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그의 작품은 김환기의 것과는 달리 하늘에서 노닐지 않는다면서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는 서정을 대신해서 그의 흙빛깔 작품들은 훨씬 더 인간의 피와 땀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윤형근 작품은 간결해서 '잔소리'를 찾을 수 없다. 색채는 엄버와 블루 두가지뿐. 천조차도 평범한 마포나 면포일뿐이며 불투명한 백색 도료를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표면에 슬쩍 바른 것이다. 후기 작품은 한층 더 간결해져 색채는 미묘한 차이가 제거된 순수한 검정색으로 변했다. '회화라든가 표현이라든가 형상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지각 너머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같은 그림이다. ◇사선(死線)을 넘어선 화가...추사-요셉보이스 존경 "내 작품은 내가 살아온 고난의 세월 이야기를 함축시킨 것이지. 그래서 내가 요셉 보이스를 좋아하는거야. 그 사람 작품보면 죽음의 그림자가 싹 지나갔어. 섬뜩한데가 있어. 그건 뭐냐면 그 사람의 인생이 사선(死線)을 넘어섰기 때문이지. 그걸 넘어섬으로써 차원이 제일 높이 올라가는거야. 그 이전에는 다 잔소리에 불과하고 죽느냐 사느냐 그 차원에서 엄청나게 차원이 올라간다 이거야. 나는 1950년대에 살아남은 사람이고,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가 엄청난데 200만이 죽었어. 사선에서 살아남고 잉여 인간 같이 살아가면서 다시는 내가 타락할수 없는 인간이라는 그런 진리로 인해서 그렇게 살아온 그런 무서운 고비를 넘은 사람이에요."(생전 인터뷰중) 2007년, 그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해에, 그는 20여 점의 연작을 남겼다. 1970년대 작업 초기에 즐겨 썼던 하얀 면포를 다시 꺼내들어, 그는 단 두 개의 검은 사각형을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이렇게 비스듬히, 때로는 저렇게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그리고 때로는 더욱 지친 듯, 쓰러질 듯 기대어 놓기도 했다. "지상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윤형근의 이 말은 무섭도록 엄숙한 진리이며서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어쩐지 담담한 위로로 들린다. 전시는 묵묵하고 담담한 그림뿐만 아니라 윤형근의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꾸몄다. 윤형근의 생활공간과 작업실을 전시장에 옮겨왔다. 그가 사랑했던 목가구와 목기, 도자기와 토기 등 조선의 공예품들이 가득하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김환기의 그림, 엄혹한 시기에 함께했던 최종태의 조각, 그리고 도널드 저드의 작품 등이 함께 했다. 그와 관계 맺었던 인물들, 사물들, 그리고 윤형근 자신의 일기, 노트, 사진, 드로잉 등 각종 아카이브를 통해, 윤형근이 추구했던 정신세계,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미술관 전시와 갤러리 전시의 차이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작업실에는 추사의 글씨가 담긴 오래된 나무액자가 걸려있는데 그가 존경했던 추사 김정희가 추구했던 불계공졸의 세계, 소박한 경지를 추구했다"며 "천진난만하며 때로 다소 서툰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조선의 미학이 윤형근이 작품을 통해 진실로 다다르고 싶어했던 경지였다"고 평가했다. 윤형근은 그동안 미술시장에서 일명 '단색화 4인방'(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윤형근)으로 불리며 이름이 계속 회자됐다. 단색화의 급부상으로 사후에 작품값이 20배 정도 상승한 '블루칩 작가'로 꼽힌다. 지난해 1월에는 세계 최정상급 갤러리인 뉴욕 데이빗 즈워너 갤러리에서 연 초대 개인전에서 작품이 모두 팔려 화제를 모았다. 국제적인 인지도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윤형근이 어떤 작가인지 뒷전이었다. '단색화 잘 팔리는 작가', '김환기 사위'로 'PKM갤러리 작가'로만 알려진 화가 윤형근의 생애와 작품세계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숙고하게 만든다. '순수한 그림일수록 어렵다'. 누렇고 까만 심심하기까지 한 그림은 알고보면 '대교약졸(大巧若拙)'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리지 않았으면 몰랐을 면모다. 결국 작가를 살리고 묻히는건 기획자(큐레이터)다. '얼마에 팔렸다'로 떠들썩한 미술시장은 작품은 없고 돈만 보인다. 우리 작가의 위대함을 알리고 공유하게 하는 건 미술관의 역할이다. 윤형근은 장인 김환기 앞에서 미소를 지을 것 같다. 국내에서 가장 비싼작가 1위(85억) 김환기도 못한 개인전을 작가로서 최고 명예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으니 말이다. '김환기 대세'인 국내 미술시장은 이제 은근히 반격하는 윤형근의 한판승부를 예고하고 있다. 사후에도 장인과 사위가 벌이는 미술판의 독특한 경쟁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윤형근은 장인 김환기 선생 5주기인 1979년 7월 25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몹시 무더운 날이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고, 허무할 소다." 2007년 12월 28일, 향년 79세 윤형근도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격랑의 시대 사연이 그림 속에 다 녹아있다. '퇴색한 것 같은, 탈색한 것 같은 그런 빛깔'. 그림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전시는 12월16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