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철회...마리 관장과 혁신안 국립현대미술관의 법인화가 전면 백지화됐다. 지난 10여년간 추진되어온 일이다. 발표는 느닷없이 나왔다.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맞이 중기 운영 혁신 계획'안을 밝히면서다. 이날 혁신안 관련, 기자 간담회를 연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법인화가 철회됨에 따라 미술관이 아시아의 중심 미술관으로 도약하기 위한 혁신안을 담아낸 '국립현대미술관 중기 운영혁신 계획'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언제, 왜' 법인화가 철회됐는지에 대한 명확함도 없이 나온 말이었다. 마리관장은 "(법인화 관련)내 생각을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마리 관장은 취임 초 미술관 법인화를 찬성하는 쪽이었다. 법인화가 된다면 국현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내 모든 지식과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그렇다면 왜 마리 관장이 내년 운영계획안을 발표하는 것일까. 마리 관장의 임기는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다. 정확히 오는 12월 13일, 3년 임기가 끝난다. 통상, 그동안 기관장이 바뀌면, 조직문화와 정책이 바뀌는 관례 측면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혁신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일하는 방식을 바꾼다'는게 핵심이다. 전문성과 개방성, 공공성을 강화하는 한편, 3~5년 앞선 전시기획을 추진해 ‘연구→ 수집→ 전시→ 출판’의 선순환 시스템을 정착시킨다는 목표다. 심도 있는 프로그램의 운영을 위해 전시 수를 줄인다. (실제로 올해만 25개 전시가 이어진다. 지난해에는 40여개를 펼쳤다. "전시는 많은데 볼게 없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특히 국내외 미술계와 보다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협업하는 시스템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2021년부터 시작되는 미국 미술관 순회전을 목표로 7월부터 '한국 실험 미술'에 대한 조사 연구에 들어간다. 또한 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으로 과천과 서울관 덕수궁관 3관 통합 실시되는 '20세기 이후 한국미술:광장'전은 한국 전시후, 미국 미술관으로 해외 전시가 추진된다. 이는 신설되는 해외 전문가 연수프로그램과 연동, 국제 미술계에서 한국미술의 위상을 강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는 "내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50주년을 맞는다. 아시아에서 최장의 역사를 지닌 미술관이 되고, 물리적으로 봐도 3개사를 합쳐도 큰 규모를 자랑한다. 올해 말 청주관을 개관하면 세계적인 규모를 갖춘 미술관이 된다. 이런 규모를 갖춘 미술관이라면 제대로 된 국제적으로 나아가야 할 타이밍"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마리 관장은 연임하는 것일까? 다시 "왜 이 시점(공모를 거친다면, 3개월정도 남은 임기)에 미술관 중장기 계획을 발표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마리 관장은 "임기와 상관 없이 법인화와 관계없이, 미술관의 중기적인 운영계획은 지켜줘야 한다"면서 "이 중장기 계획은 논리적으로 맞는 일이다. 후임 관장의 자율적인 선택을 제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임이 와도 이 미술관의 방향성은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0년간 진행하던 법인화가 중단되면서, 미술관의 체질변화를 원하고 있다. 이 혁신 계획안은 '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어디의 요청인가?" 이 때, 마이크를 잡고 한 남성이 일어섰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박위진 기획운영단장. "마리 관장 임기와 관계없이 미술관을 쇄신하라는 문체부 본부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고 부연 설명했다. 깜짝 등장한 그는 "마리 관장 임기는 3~4개월 남은게 아니고, 정확히 6개월 남았다"며 "법인화 검토 중단하면서 미술계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쇄신 계획을 수립해서 시행하라는 장관의 요구가 있었다"고 밝혔다. 박 기획단장은 문체부가 미술관에 파견한 공무원이다. 지난 9월 부임한 박 단장은 "자신이 미술관에 온 것도 바로 이 미션을 수행하라는 방안을 갖고 왔다"면서 "어떻게 미술관을 정상화 시키고, 예측 가능한 미술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혁신안은 "마리 관장의 연임프로젝트나, 관장의 의지에 의해 말하는게 아니다"면서 "미술계 쇄신에 대한 강력한 미술계 요구를 수용하는 본부 차원의 요구가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짚었다. 법인화 철회와 관련, 박 단장은 "문체부에서 법인화는 중단하자는 건 최근(며칠전) 결정된 것"이라며 "행자부와 협의중이다. 법인화 결정은 우리(문체부)가 결정할수 있는게 아니다. 최종 결정은 행자부에서 한다"고 했다. 미술관은 그렇다면 10년간 헛발질한 셈이다. 중단 이유는 무엇일까. 박 단장은 "법인화로 인해서 미술관 발전이 지연되고 있다"고 꼽았다.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면서 "법인화를 예산과 인력 통제 수단으로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인화를 찬성하는 사람도 많지만 조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되다보니 '예측가능한 미술관'이 되지 않더라"면서 "예측가능한 미술관이 되기위해 쇄신책을 발표하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측 가능한 미술관'을 반복하던 그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개막식까지 나오지 않은 전시 도록이 문제였다. "전시하면서 도록도 안나오는 미술관이 미술관이냐. 새 관장이 와서 내년 전시계획 세우고 졸속으로 준비해서 가야 되느냐."고 지적했다는 문체부 장관의 말을 전했다. 미술관은 억울하다. 미술관 법인화는 2009년부터 추진되어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마치 미국 뉴욕 모마 미술관처럼, 미술관을 선진화하려했던 정책이다.법인화를 위해 조직을 개편하며 예산을 써오며 10년간 들이대기만 했다. 그동안 계속 야당(현 여당)이 반대했다. '미술관 법인화' 추진은 정부 정책의 사생아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유인촌씨가 문체부 장관이 되면서 법인화가 논의됐다. 국립현대미술관 강승완 학예실장은 "MB정책이었다. 고이즈미 내각때 작은 정부 한것처럼 우리도 추진됐다"며 2009년 당시 미술관 법인화 실태를 파악하러 일본에도 갔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10년간 결정이 안나고 결론이 안나니 힘들었다"면서, 이 같은 결정이 속시원하다는 입장이다. 강 실장은 "문체부가 유일하게 기관에 법인화 기관이 없어 10년간 협력없이 추진은 정말 힘들었다"면서 법인화 철회와 관련, "인프라가 없다. 기부문화가 없기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국립미술관도 2002년에 법인화 했는데, 다시 돌릴려고 한다"면서 "기업이 돈 있으면 자기 미술관 짓고, 작가들도 자기 미술관 짓는다. 우리나라는 공동으로 환원하는게 없는게 문제"라고 했다. 또다른 문제점도 제기됐다. 박위진 기획단장은 "법인화 가치는 독립채산제로 하라는 것이다. 내가 펀딩해서 인력도 내맘대로 채용하고 융통성있게 하라는 것이다. 책임운영기관으로 인사와 예산을 관장한테 부여하는게 원칙이다. 관장을 누가 뽑느냐가 중요하다"면서 "그동안 법인화 이사회 구성은 장관이 하는 걸로 되어있다. 이사회를 장관이 뽑는 거니 제대로 될수 없지 않나"라고 했다. 법인화가 물거품이 되면서 조직-직제개편이 다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박 단장은 "법인화 철회가 되면 전문임기제는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했다. MB정책이었던 ‘미술관 법인화’도 적폐청산일까. 10년간 4명의 관장이 바뀌고도 추진되다, ‘촛불 정부’에 철회됐다. 그렇다면 마리 관장은 어떻게 될까. 파격적인 ‘미술관 1호 외국인 관장’은 박근혜 정부때 탄생했다. 마리 관장은 마음을 비웠다는게 주변의 이야기다. 운영계획안 발표전 한 매체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마리 관장 연임을 반대'한다는 미술전문가 18명 중 9명의 입장을 전했다. "마리 관장 재임 기간을 잃어버린 3년”이라며 혹평했다. "한국말도 못하고, 국내 미술에 대한 이해가 없어 우리 미술사와의 맥락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공모 결과를 무산시키면서 석연치 않게 꺼낸 카드라는 사실까지 환기시켰다. 마리 관장은 어찌보면 서울대와 홍대파로 나뉜 희생타이자, 국내 미술계의 구원투수였다. 스페인에 살던 그가 내정됐을때도 찬반이 뜨거웠다. '대한민국 예술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외국인에게 맡겨서는 안된다"는 반대 입장과, "학연때문에 나뉜 미술계에 외국인이 낫다"는 옹호론이 있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장 출신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임명되기까지 쉽지 않았다. 2015년 12월 13일 '미술계의 히딩크'로 애칭을 얻고 우려반 기대반으로 지난 세월이 3년이 됐다. 굵직한 대형 전시가 엎어지면서 신뢰도가 추락했지만 외국인 관장이 오면서 해외 네트워크 구축이 활발해졌다는 평가는 내외부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날 개관 50주년 중기 운영혁신 계획을 발표한 마리 관장은 "미술관의 한계치를 시험중"이라며 "앞으로 쓴소리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 미술계에서 미술관장 임기 3년은 짧다는 의견은 일치한다. 전시 기획추진만 2~3년 걸리는데, 해볼라 하면 자리를 빼는 건 전시기획 지속력과 연결성이 없어 문제라는 것. 강승완 학예실장은 "미술관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조직이 안정되어야 하고 중장기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시를 앞두고 사람이 바뀐다. 이건 말이 안된다"며 “지난 10년간 즉흥적으로 해왔다"고 토로했다. 강 실장은 "관장 자체의 임기가 짧아, 중기 계획이 성립되지 않는다"면서 "미술관 공신력이 바닥"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운영계획 발표중 내후년 것은 몰라도, 내년 전시 기획건은 모두 픽스됐다"고 전했다. 새 관장이 오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해외 유명 미술관장의 임기는 기본 10년 이상이다. 호주 현대미술관/ Elizabeth Ann Macgregor OBE 관장(1999~현재 18년때 재직중) ,뉴욕 메트로폴리탄/필립 드 몬테벨로/1977~2008(31년 재직), 도쿄도 사진미술관/ 후쿠하라 요시하루/ 2000.11~2016.3(약 16년 재직)관장이 장수하며 미술관을 이끈바 있다. 마리 관장의 임기는 따지고 보면 석달 남았다. 연임이냐 아니냐는 3개월전에 통보된다. 2015년 12월 14일 부임됐기 때문에 9월경이면 결정난다. 연임 여부가 결정되면 9월 공모절차는 진행되지 않는다. 2015년 미술계 내로라하는 인사 15명이 접수했지만, 당시 '적격자 없다'며 4개월간 진행된 관장 공모가 백지화된 바 있다. 마리 관장은 “해외 유수 미술관은 성공적 성과를 내거나 좋은 리더십을 보여준 관장이라면 최소 10년은 관장직을 수행하며 미술관을 이끈다”며 연임 의지를 드러냈었다. 올 초 '2018 전시 라인업'을 발표하면서다. 그는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미술관으로 도약시키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더 일하고 싶다.” [email protected] 2018/06/26
'연필 회화'의 정점...차영석 '우아한 노력' 주위는 적막하다. 사람은 커녕,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기 파주의 외딴 작업실. 아침 9시, 열고 들어온 문은 어둑어둑해질때까지 침묵에 빠진다. 책상에 앉은 남자는 꼼짝도 안한다. 적막을 깨는 건 연필. 뽀족하게 무장한 연필과 샤프가 기계처럼 움직이며 분주하다. 한개의 연필이 힘이 빠질때마다 새로운 생명이 빛을 발한다. 용무늬 화병, 운동화, 찻잔, 분재가 살아나 자리를 지킨다. 그렇게 하루 10시간 꼬박 앉아 혼자인 남자는 늘 "외롭다." 말 한 마디를 안하고 지나는 하루, 이렇게 매일이 반복된다. 힘들고 지친다. 그래도 멈출수 없다. "지치지만 않으면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자리가 있다. 그런 순간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날마다 늘 노력한다." 그 순간이 왔다. 파주의 작업실에서 연필과 씨름했던 그림이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초대한 전시, '차영석 개인전'이 20일부터 열린다. 차영석 작가(41). 종이위에 연필로 마법을 부리는 그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이라는 단어가 절로 튀어나온다. 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를 마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를 졸업했다. 2009년 금호영아티스트로 선발되어 금호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후 '연필 작가 차영석'이 됐다. 이번 전시는 12번째 개인전이다. 전시는 '우아한 노력'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외로움을 견디고 나와서일까. 전시장에 조명을 받은 그림은 모두 기세가 당당하다. 그림이 아니라 장인이 만든 수예품같다. 평면의 그림인데 마치 비단실로 한땀한땀 짜올린 수예처럼 도톰하게 올라와 융단같은 부드러움까지 전한다. 오로지 연필로만 수놓은 작업. 작가가 되기전 경험이 한몫했다. "대학교 1학년때부터 미술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오래 했어요. 그때 석고 소묘를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했었죠. 질려서 다시는 안하겠다고 했는데.... 다시 연필을 잡게됐죠." 대학을 8년 다녔다. 한예종 입학전에 영남대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대구로 간 유학생. 21살때부터 돈을 벌어야 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학비를 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던 4학년때. 미술학원 강사를 하며 입시를 치뤘고, 한예종에 다시 입학했다. 한예종은 영남대와 달랐다. 과제도 많지만 트렌디한 현대미술을 쏟아붓는 교육에 힘이 들었다. 처음에 잘나가는 현대미술 기법을 따라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내가 뭘 잘할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대학교 3학년, 그때 미술시장 호황이었다 동기들은 그림도 팔고 돈도 버는데, 과제하느랴 시간을 보냈다. 주변에 물었다. "나는 뭘 잘하는 것 같냐" "그림 그림는걸 제일 잘하는 것 같아" 그 말들에 힘을 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용돈이 없다. 재료값은 만만치 않은 상황. 친하게 지낸 학교 판화실 조교가 쓰다남은 판화지를 건넸다. 그렇게 시작됐다. 종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이다. 종이에 연필로 그려보자고 마음 먹자 학교 주변 동네가 달리 보였다. 일상적인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려보면 재미있겠다"고 시작했지만 습관이 방해했다. "어떻게 그리느냐" 이 화두는 새로운 방식을 꺼내왔다. 첫째 지우개를 쓰지말자(수정하지 말자), 둘째 시점을 무시하자, 셋째 빛과 그림자를 그리지 말자. "사물을 그대로, 못 그려도 되니까 그대로 그리자'고 시작한 그림은 처음엔 어색했다. 속도도 느렸다. 안해본 방식이어서 맞다, 틀리다 구분도 안됐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묘한 맛이 있더군요." 2005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건강한 정물'시리즈 첫 출발이다. 그리기라는 어떤 특별한 행위가 아닌 습관처럼 몸에 베인 것들로 어떤 의식적인 개입을 배제하고 특정한 구성 원리 없이 하나하나씩 자연스럽게 더해나간 작업이다. 반복은 힘이 세진다. 거칠던 초기작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더 세밀해지고 더 밀착감이 생겼다. 연필의 스킬도 강렬하다. 직선으로 쓰느냐, 돌려서 쓰느냐에 따라 플랫하고 오돌토돌하게 변신한다. 이번 전시는 차영석 '연필 회화'의 결정판이다. 13년간 익숙해진 기법, "이 방식대로 잘 그려보자"며 한판승부를 냈다. 작가는 사람들이 각자 다양한 이유로 수집하는 사물들에 집중한다. 여행지의 추억을 담기위해 구입한 기념품들, 건강을 위해 마련한 숯, 개인적 취향으로 모은 오브제, 취미 생활인 화초 등 다분히 개인적인 관심과 취향에 따라 수집한 사물들을 화폭에 그려낸 작가는 "일상 사물들은 단순한 개인 욕망의 발현 일 뿐 만 아니라 그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 '우아한 노력'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수집품들을 관찰하고, 채집하여 그린 작품이다. 타인의 수집품들을 취사선택하여 한자리에 모아 그것으로부터 구성한 화면은 기본적으로 우리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담은 정물화나 풍경화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전의 차영석 작가의 작품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하였지만 '우아한 노력'에서 보여주는 작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타인의 수집품을 통해 세계를 관찰하던 시선을 자신의 내부로까지 확장시켜서 수집품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취사선택하고, 그 표면을 차영석 작가의 개인적 취향인 세밀하게 선묘하는 패턴으로 가득 채웠다. "사물의 디테일을 통해서 ‘우아한 노력’의 실체적 의미를 제시하고, 사물을 표현하는 본인의 습관적인 작업방식과 개인적 취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보고자 한다"는 의미다. 만날 사람은 만난다. 외롭고 지쳐도 포기하지 않고 전업작가로 살아온 그는 20여년전 무리에서 봤던 큐레이터를 화랑대표로 다시 만나 개인전을 열어 감개무량이다. "1997년 영남대학생시절, 버스를 빌려 서울에서 열리는 바스키아 전시를 보러왔었죠. 당시 갤러리현대 큐레이터였던 이화익 대표가 작품설명을 해줬거든요. 그때부터 이화익 대표를 알고는 있었죠." 이화익갤러리 이화익 대표는 "10여년 전부터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었다"면서 "급변하는 미술시장속에서 종이와 연필이라는 소재로 차별화된 작품을 선보여온 작가의 이번 전시는 작가의 연필 회화 작품의 정점을 느낄수 있을 것"이라며 작품을 보증했다. 민병직 미술평론가는 "차영석의 우아한 노력은 지금까지 나름의 원리와 방향성으로 지속해온 작가 작업의 궤적들의 발전 확장인 동시에 그동안의 작가의 그릭 행위를 얼마간 종합시킬수 있는 계열화된 연작이라 할수 있을 것 같다"며 "작가의 그리기 행위에 대한 좀 더 자신감있고 당당해진 어떤 면모들. 더욱 더 유연하게 무르익은 자세와 태도들이 느껴진다. 그런면에서 작가만의 고유한 그리기의 문법과 스타일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평했다. 차영석의 '연필 그림'은 '연필 화가'로 유명했던 고 원석연(1922~2003)을 떠오르게 한다. 일생을 연필 한자루에 맡기고 다른 양식의 작품행위를 거부했던 화가로, 특히 개미의 생태계를 조형화한 '개미 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차영석은 '연필 드로잉'이라는 시선을 거부한다. 그에겐 평면 회화다. 연필로 그렸지만 드로잉은 아니라는 얘기다. 드로잉은 진짜 그림이 나오기전 밑그림같은 개념인데, 그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실제로 그림을 보면 안다. 그림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특히 차영석의 연필 회화는 한방이 안된다. 몰아쳐서 나올수 없다. 시간이 만든다. 왜 이렇게 그릴까. "이유는 없어요. 왜?...그림 그릴때 그 순간이 행복해요. 지금은 제 삶의 일부죠. 이걸 해야지만 차영석이 존재하는 상황이고 내 자체 생활입니다.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다? 어렸을때 그런 호기도 있었죠...연필로 작업은 끝이 아니에요. 하나의 과정이죠. 미래를 예상할수 없는데 힌트는?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우아한 노력을 얼마만큼 하는지 달라질테니까요." 전시는 7월14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6/19
'현대판 빌레도르프 비너스' 한애규 테라코타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약 3만년전에 제작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반갑다'고 할만한 조각이 대한민국에 있다. 테라코타로 여인상을 만드는 한애규(65)작품. 유방과 둔부가 과장된 '현대판 빌렌도르프 비너스' 같다.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이야기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빌렌도르프 비너스'처럼 초고도 비만이지만, 거부감없이 '여성성 미학'의 원천을 끄집어낸다. 80년대부터 억압된 여성의 해방과 함께 여성들이 상실해간 인간으로서의 자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결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진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여성을 만들어냈다. 풍만하게 과장된 우람한 여체를 통해 여성들을 흔들었다. 평생 다이어트가 숙명인 것처럼 사는 여성들의 숨통을 터주는가 하면, '여성 자신' 그대로의 의미를 말없이 깨닫게 하며, 그 품에 안겨 쉬고 싶은 충동을 준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감정을 전하는 건 '흙'의 힘이다. 작가가 세상의 비난에도 바꾸지 않은 재료다. "흙은 촉감이 좋다. 젖은 흙은 차갑지만 정서적으로 따뜻한 재료다. 흙을 주무르고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작업실 창유리의 색조가 바뀌곤 한다. 또 흙은 냄새도 좋다. 마치 마른 땅에 소나기가 지나가고 난 후에 나는 풋풋한 흙냄새 같은 젖은 흙냄새가 작업실을 들어설 때마다 느껴져 마음마저 촉촉하게 만든다." '구운 흙'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테라코타(Terra Cotta)는 점토를 원하는 형상대로 빚어 고온의 화력으로 구워내는 방식이다. 1980년대부터 꾸준히 흙을 재료로 작업해 오고 있다. 손으로 흙을 주물러 만드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본능인 모성과 생명의 근원인 자연, 땅과 근원적이고 영원하며 한결같은 무엇이라는 동일함으로 존재한다. 반면 '테라코타'는 아직도 조각계에서 소외중이다. 작가는 "처음 테라코타 작업을 할때 (조각계)주변에서 왕따를 시켰고 오히려 방해를 했다"면서 "내 작업의 스승은 고고학과 유물들"이라고 했다. 조각은 돌과 브론즈라는 전통관념속에 테라코타는 유약도 없이 구워내는 쉬운 작품이라는 인식속에 조각의 위치에 함께 서있지 못하다. 작가는 197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1980년 동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한후 1986년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풍만한 여인상이 테라코타로 나온게 된 건 함경북도 서포항에서 출토된 소조 여인상 '지모신'을 본 후였다. "가나아트에서 개인전 할 때였다. 역사서에 나온 지모신 조각들 형태를 보고, 이것 좀 키워서 만들어야겠다"고 한게 시작이었다. 고고학과 유물에 대한 관심은 '테라코타 여인'은 점점 작가와 동일시되고 있다. 조상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여정처럼 보인다. 3년만에 신작전을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 펼친 '푸른길' 전시에 그 마음을 담아냈다. 이번 전시 '푸른길'은 테라코타 조각을 통해 인류 문명의 교류가 진행되었던 길, 그 길 위에 존재했던 시간과 역사의 흔적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테라코타 조각에는 푸른색 유약 표현이 눈에 띄며, 다양한 종류의 흙과 소성온도의 조절로 고도의 농축된 조형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하 1층 전시공간에는 긴 행렬(17명)이 자리 잡고 있다. 행렬 속에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소재인 여인상을 비롯하여, 동물상, 반인반수(半人半獸)가 등장한다. 여인상인 '조상' 시리즈는 작가 자신의 조상이었던 여인을 상징하고, 말을 형상화한 '실크로드'와 '소'는 인류가 가축화시킨 친숙한 동물을 표현했다. '신화' 시리즈는 상체는 인간이고 가슴 아래부터 뒷부분은 말과 유사한 형태의 반인반수 조각이다. 지상 1층에는 기둥 조각과 파편들을 표현한 작품 '흔적들'이 있다. 이는 지나간 문명의 흔적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현재는 폐허로 남아있지만 찬란했던 한 시절의 이야기를 흔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이 작품은 의자처럼 위에 앉아서 감상할 수 있어 전시 관람의 즐거움을 더하고, 자연스럽게 사유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행렬을 이룬 조각상들에 대해 아트사이드갤러리 이정진 큐레이터는 "한반도의 분단으로 끊어진 북방으로의 길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작품 속 행렬에 등장하는 인물, 동물, 신화, 등과 같이 과거 북방으로의 열린 길을 통해 사람, 동물, 문화 등 인적, 물적 교류의 역사가 이어져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역사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이 시기에 작가의 염원을 담은 '행렬' 작품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을 희망하고 있다. 작가는 "작업할때 남과북이 자유롭게 오고가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고 생각했었다"면서 "1년 전과 판이 바뀐 세상에서 전시를 열자 시류를 타는 사람처럼 돼버렸다"며 궤면쩍다는 표정이다. 전시 준비를 위해 작품은 거의 2년전부터 제작됐다. 작가는 "그때는 박근혜 정권 서슬이 퍼랬던 때"라면서 "남북정상회담과 관계없이 시작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엉덩이가 풍만한 여인들이 반인반수와 함께 긴 행렬을 이끄는 작품은 "한반도로 오는 장면으로, 과거의 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 7~8년전에 읽고 감명받았던 '실크로드를 달려온 서역인' 덕분이다. "그 책에는 신라의 지배층이 터키 정도의 지역에서 왔다는 내용인데, 그런 것을 유물과 증거물을 수집해 역사적 사실들이 맞다고 써낸 책이다. 신라의 지배층이 이를테면 터키에서 정쟁에서 밀려난 프리기아인이라는 것. 알고 보면 우리나라는 아주 먼곳과 교역이 있었다. 그들이 왔었고, 우리가 갔었다. 중국과 한반도라고만 한정됐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고려시대까지 북방으로 교역이 빈번했었다는 걸을 알게 됐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갖고 있었던, 통큰 생각이, 분단이 되면서 쪼잔해지고 지엽적인 것에 침잠되어 잇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혀있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고, 원래 넓은 지역을 오고갔던 우리의 정체성이 있으니까 이것은 반드시 뚫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행렬'을 제작했다"는 작가는 "통일까지는 모르겠다. 내 소관도 아니고, 기차나 다니게 해줬으면 좋겠다. 옛날 교역이 활발했던 것 처럼 막힘없이 뚫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고 했다. 한애규는 다독(多讀)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주경아독한다고 했다. 집과 작업실은 스무걸음 차이에 있다. 그런데도 늦을까봐 초조해하하며 시간을 엄수한다. 아침 9시면 출근, 6시에 칼퇴근해 자칭 '공무원 작가'라는 그는 8시 뉴스를 본 후 늦은 밤까지 책을 읽는다. 한달에 2권 정도 독파한다. 역사책을 즐기는데 책을 통해서 과거의 한 장면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통쾌하다고 했다. "이렇게 재미난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어요" 요즘에는 터키 소설가 요르한 파묵에 빠져있다. "그 사람의 글을 읽고 실망한 적이 없다. 그런 작가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웬지 '사색의 세계'로 이끄는 듯한 작품의 배경이다. 한 작품이 나오기까지 40일이 걸린다. 성형에 20일, 보름은 말리고, 가마에 넣고 4일 정도 뗀다. 물론 하나만 하지 않고 동시에 2점 정도 같이 넣는다. 전시가 많지 않은 이유다. "어느 화랑에서 기획전 하는데 한달 후에 신작 내주세요 하면 불가능하다고 할수 밖에 없죠. 두달 전에는 이야기해야 작품을 출품할수 있어요." 작품은 얼굴 표정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걸 하는 날은 심호흡을 해야돼요. 그냥 쓱쓱 그리는게 아니라. 표정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느날은 한번에 착착 그어지는데, 어느날은 수십번을 그어도 안돼죠. 그날은 게임 끝, 덮어놓고 나옵니다." 이번 작품은 더욱 신경을 썼다. 북방에서 오는 여인들이어서 이전 작품과 달리 눈이 커졌다. 또 처음으로 남자 조각도 1점 내놓았다. '서역인' 제목을 단 남성조각은 추상적으로 "처용을 생각하며 만들었다."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역사서를 참고했고, 서역인이 입은 옷은 '터키청 블루'를 써 '물 건너온 남자'로 포현했다. 높이 90cm, 여인상들은 곡면이 이전보다 강조됐다. 엉덩이와 형태를 더 둥글둥글하고 더 풍만하게 표현했다. 묵직함을 전하는 조각들은 몸통을 두드리면 '통통통'소리가 날 정도로 경쾌함도 있다. 속이 비어 있다. 형태를 비우지 않으면 못구운다. "항아리 만드는 기법처럼 만든다. 속이 두꺼우면 가마속에서 다 터지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가슴과 엉덩이가 뽀족하게 변신한 여성상도 나와있다. 추상적으로 변한 최신작으로 둥글둥글한 여인상과 달리 단순하면서도 짱짱한 긴장감을 전한다. 그래서 아직은 어색해 작품 제목이 '형태 연습'이라고 했다. 흙의 마력에 빠져 만들고 굽고를 반복해온 작가는 최근에야 작가가 되길 잘했다고 여겼다. "주변 친구들 지인들이 다들 은퇴하는데, 나는 은퇴 안 해도 되니..."라며 해맑게 웃었다. 작품은 작가와 흡사하다. 작가는 "우리 집안이 엉덩이가 크다"며 여인 조각상 제목을 '조상'으로 달았다"는 이유라고 했다. "우리 집안에서 농담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옛날에 엉덩이 큰 여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할머니가 되고, 엄마가 되고, 내가 되고, 딸이 됐다고 하죠." "다이어트요? 아유 저도 했죠.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포기가 돼더라고요 하하" 흙생흙사(핡에 살고 흙에 죽는)작가다. 손에서 주물러지는 흙의 감촉에 빠져 30년 넘게 흙에 미쳐있다. 그런데 그 흙이 요즘에 골탕을 먹인다. '테라코타 작가'의 애환이다. "정말 흙(점토)이 문제에요. 온도와 습도등 테크닉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인데, 제일 문제가 흙입니다. 흙이 안받혀줘 힘들어요. 어떤 공장에서 어떤 흙을 사서 쓰는데, 그 흙 품질이 계속 유지가 안돼요. 공장이 중국에서 수입하다가 어떤때는 베트남 흙을 수입해서 섞어서 팔거든요. 이럴 때 작가가 제일 골탕먹죠. 한 가마를 다 버릴때가 있어요. 가능하면 국산으로 하려고 노력했는데 크게 당한 후에 미국 흙을 씁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죠. 이번 작품 '행렬' 맨앞의 여인상은 미국 흙으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전시는 7월19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6/17
오른손으로 유화, 왼손으로 드로잉 그리는 윤상윤 "제가 오른손 왼손 그림을 구별하기 시작한건, 원래 왼손잡이로 태어났는데 어렸을때 그렇듯이 부모님게 혼나고, 오른손으로 바꿔서 숙련을 한 결과에요. 당연히 기계적이고 숙련된 손이 되었는데, 왼손은 그에 반해 좀 더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그림이 나오더라구요." '오른손으로는 유화를, 왼손으로는 드로잉’을 하는 작가' 윤상윤 개인전이 서울 북촌로 갤러리조선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타이틀 'Sine cera'로 2016년 이후 발표하는 신작전이다. 이전 작품과 달리 색이 바랜듯한, 그리다 만듯한 분위기다. 회색조로 밑바탕을 완성한 뒤 색채를 한 겹 한 겹 쌓아올리는 방식인 ‘글레이징(glazing)’ 기법을 썼다. 작가 특유의 바닥에서 일렁이는 물을 표현한건 여전하지만, 색채는 차분해졌다. "재작년부터 인상파 이전의 글레이징이라는 기법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튜브물감이 발견되기 전에는 안료가 비쌌거든요. 고가였기 때문에 안료를 조금만 쓰려고 흑백으로 밑작업을하고, 그 위에 얇게 색의 레이어를 스무번 삼십번 쌓는, 2-3년에 걸쳐서 완성되는 그런 기법을 오른손 그림에 써야겠다는 생각에 글레이징 기법으로 그리게 되었죠." 아카데믹한 분위기가 강한 그림의 배경이다. 전시 제목 'Sine cera'도 같은 맥락이다. 옛날 로마시대 사람들이 도자기나 작품을 속여서 팔 때 금간 부분에 왁스를 메꿔서 한 번에 구워낸. 한 번에 조각된 완벽한 물성인것처럼 속여서 파는 일이 많았다. 이에 반대되는 진실한 도공들은 ‘왁스를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뜻의 ‘Sine cera’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완성도에 대한 진실성을 보증하고자 했다. 현대에 이르러 이 용어는 sincerely 의 어원이 되어 ‘꾸며내지 않은’, ‘(눈속임 없이) 진실된’의 의미가 되었다. 작가는 개념미술과는 다른 ‘진실된 회화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다. 고전적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도 그 이유다. "램브란트와 터너를 좋아한다. 내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할 정도로 현대미술에 감동적이지 않았다." "고전적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은, 당시 미술 수업 광경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에요. 실제 모델을 둘러싸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롤모델이라는 것을 강요받고, 남들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우리나라 미술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해요."2004년 추계예술대학교, 2007~2009 영국 첼시예술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현시대에는 사진을 찍고 찰나를 그리니까 포즈가 자연스러워 보여도 사진처럼 보이는데, 옛날 그림들은 화가가 그림앞에 서있구나를 느껴진다"며 "그림앞에 화가가 서 있는 느낌을 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화면에 옮기기전 모델들에 연극적인 자세와 포즈를 취하게 한다. 그림속 인물들은 작가의 주변에 살고 있는 지인들이다. "아주 모르는 타자를 그리는데에 거부감이 들더라구요. 예를 들면 아프리카 난민이 불쌍하니까 그에 감정 이입은 되지만, 대화를 나눠본적도 없잖아요. 나와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그리면, 그 사람과의 경험과 감정이 드러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실제 사람, 아는 작가, 학생들, 친구들을 그리기 시작했죠." 작가의 오른손 그림은 물과 인물, 그 위의 구조물로 이루어져 한 화면 안에 세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그림의 밑에서부터 무의식의 세계를 대변하는 이드(Id),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에서 이를 조정하는 에고(Ego) 그리고 우리가 매일 수행하는 의식적 자아로서의 슈퍼에고(Superego)다. 우리의 일상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과 합의 지점을 보여주며 작가의 생활이 반영된 스토리텔링이다. "제 작업은 3층 구조를 만드는게 제일 중요한데요, 맨 윗층에서부터 초자아, 자아, 무의식 입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슈퍼에고, 에고, 이드 이런 단계로 구분해서 생각을 하는데요. 옛날 종교화들이 이런 방식을 많이 택하고요. 동양사상에서는, '나무 땅 속 나무 뿌리에서부터 줄기가 자라나 하늘을 향해 이파리를 펼친다' 라는 비슷한 비유적 구조도 있고요. 맨 꼭대기의 초자아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철학적 의미보다는, 제 경험이 반영되어 있어요. " 화면에 많은 책걸상이 표현된 것도 고등학교때 교실 책상에 무릎꿇고 앉는 벌을 받았던 경험에서 나왔다. "신체적으로 매를 맞거나 가학적인 행동이 아니라 단지 그룹에서 떨어트려서 소외감, 고립감을 주면서 벌을 주는 거거든요. 그때 바라봤던 풍경이 이렇게 작업을 하는 원인이 되었어요. 영국 유학갔을때도 완전히 그룹에 속하지는 못하고, 동양인으로서 그들을 관찰했어요. 완전히 그 그룹에 속하는게 아니라, 그 그룹에서 벗어나서 바라보는 풍경. 이런 것들이 재미있었죠. 그래서 이런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 작가의 '왼손 드로잉'에는 얼굴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오른손으로 그린 그림들이 구체적인 얼굴을 드러내며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프로이트적 세계관의 도식이라면, 왼손으로 그려낸 드로잉들은 꿈 속 장면같은 환영처럼 보인다. "선을 처음 긋거나 뭔가 붓이 지나갔을 때 우연히 발견되는 형태를 연결한달까. 그때 그때 제 경험이나 감정들이 그대로 배설되는 느낌. 뭘 먹으면 뭔가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눈으로도 먹고,귀로도 먹고, 촉감으로도 먹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더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온 그림입니다." 오른손, 왼손으로 나눠 작업하는 작가는 "사람이 우뇌, 좌뇌를 다르게 쓴다고 하잖아요. 직관적인 걸 쓸때는 우뇌를 쓰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쓸 때는 좌뇌를 쓴다고 하는데, 내 그림은 동서양이 나눈 것 같은 이분법적"이라며 "오른손은 과거의 전통 기법으로 쌓아올려서 완성하고, 왼손 드로잉은 동양화처럼 경험과 기억에 집중했다가 한 번에 끝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림은 묘하다. 분명 현실의 사람들과 현재의 풍경을 담았지만 정체불명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며 기이한 느낌을 전한다. 이미지로 넘쳐나는 매트릭스같은 세상. “그래서 우리는 결국 영역 안에서 평생 빠져나올 수 없다"며 작가는 이렇게 작가 노트에 썼다. "영역 안에서 수정당하고 길들여져 자신의본질을 잃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착각에서 사는 것이다(사실 이것이 현실이다)." 전시는 13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6/01
그림이란 무엇인가...강요배 '추상(抽象)' 영락없는 촌부(村夫)였다. 허수아비에 입힌듯 옷자락은 헐렁했고, 가죽 혁대는 기댈곳 없어 자꾸만 밑으로 내려앉았다. 휘적휘적 걷다 혁대를 추스렸지만, 다시 허리춤을 벗어났다. 시선을 느꼈을까. "말라붙어서..."라며 엷은 미소를 보였다. 힘이 없던 노인같던 그가 돌변한 건 그림앞에서 서면서다. "'그림이란 무엇인가'가 화두였다" 제주 귀덕면에서 올라온 화가 강요배(65)다. 그가 입을 떼자 촌부처럼 보이던 외모는 고뇌하는 예술가로 이미지가 전환됐다. "포토그라피가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속에서 그것과 차별성이 있는 것이 무엇일까로 출발했다"며 그가 그림앞에 다가가자 어둡던 그림들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서울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본관 전시장 입구에 걸린 '동동(冬東.2017)' 그림을 설명했다. "어둑한 하늘을 그렸다. 제주도는 두껍게 구름이 끼고(겨울에), 구름이 확 뚫리면서 햇빛이 화~후~쏟아진다. 많이 봤다. 하늘이 뻥 뚫린 것 같은...어느날 한 장면이기보다, 경험을 걸러내서 구상을 한 거다. 그렇게 제작된 그림이다." 인상주의(Impressionism)같은 작품이다. 가까이에서는 색과 색이 겹쳐 형상이 보이지 않지만, 뒤로 몇걸음 떨어지면 확연히 보인다. 분명 '언젠가 본 듯한 하늘 풍경 장면'이 떠오른다. 강요배는 "인상적이다는 것은 마음에 확 찍혔다는 것이다. '인상파'라 할때도 상자는 코끼리 '상'자를 쓴다. 그렇다면 상을 끄집어낸다는 뜻인데, 미술사적 용어가 아니라, 그 말 그대로 상(象)을 따라서 그린게 이번 그림"이라고 했다. 25일부터 학고재갤러리에서 3년만에 여는 이번 개인전 주제는 '상(象)을 찾아서'다. 제주 풍경과 제주 작업실에 오가는 고양이와 자연의 벗들을 포착해낸 신작 30여점을 걸었다. 그는 "주역 64괘의 괘상도 '상', 상징의 '상', 철학 영역인 현'상'학을 쓸때도 코끼리 '상'자를 쓴다"면서 "그 '象'이라는 게 '상을 새기고 상을 끄집어 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작업했다"며 유난히 '상'자의 의미를 강조했다. '象'. 한문의 '상'자는 '코끼리를 보지 못하던 옛 시절의 상형문자로, 유골을 보고 만든 그림 글씨'다. '코끼리 상’은 형상, 인상, 추상, 표상 등의 미술 용어에서 ‘이미지’를 뜻하는 글자다. "코끼리를 끌어낸다는게 대단한 것인데, 현시대에서 쓰고 있는 추상(抽象)이라는 개념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추상'은 일반적으로 미술사에서 '구상'과는 반대되는 용어다. 형태가 없는 그림, '무엇을 그렸는지 알수가 없는 그림'을 뜻한다. 한라산 정상의 설경, 파도가 바위를 치고 올라가는 장면, 푸른 하늘의 구름… 전시장에 걸린 그림은 형태는 알수 없지만 어떤 '풍경'이나 장면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는 왜 '상'에 집착하는 것일까. 전시 주제 '상을 찾아서'는 무슨 뜻일까. 그는 '추상', '앱스트랙트(abstrac)'라는 뜻을 재해석했다. "지금까지 추상이라는 말은 오인되어 왔다"고 했다. "라틴어를 봤더니 abstract에는 '축출한다', '끌어낸다'는 뜻이 있었다. 애매하게 그리는 것, 기하학적으로 그리는 것이 '추상'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추상"이라고 강조했다. "요즘엔 포토그라피에 의존하는 수가 많다. 그것은 표피에 말려드는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그러면 복사기 아닌가. 창조하는 것 없이 그냥 자기가 있는 것만 해야 한다. 그 중간이 (기계적인 장치)없어야 한다"며 "정수를 뽑아내는 작동. 강렬한 기억, 바로 그 것, 그것만 잡으면 된다. 그게 추상"이라며 확신에 차 말했다. 강요배의 화론은 내면에 들어온 심상(心象)을 추상(抽象)으로 펼쳐놓는 것이다. 그는 매일 집에서 작업실을 오가며, 외출하고 여행하며 제주의 풍경을 본다. 같은 것을 반복하여 경험하는 것 같지만 날씨와 시간에 따라 다른 장면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 마음에 남은 장면을 기억하고 여과하고 담아두었다가 작품으로 나온게 이번 신작이다. 그러나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구상'처럼도 보인다고 하자, 따지고 보면 "추상과 구상은 반대되는 것도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용어의) 덫에 걸렸다"고 했다. "서양에 꿀리고 싶지 않고, 동양의 것에 그대로 가고 싶지 않은 자존심때문이다. 난 동양에 태어났는데 서양화가로 불린다. 이런 문제... 그래서 '그림이 무엇인지, 내가 동양화가인지, 서양화가인지를 넘어서자고 작업한 게 이번 작품"이라는 것. "추억이라는 것도, 중요한 흐름만 남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기억이라는게 포토그라픽처럼 세세하게 찍히지 않는다. 대충대충 사는 거지. 모든 것을 스캔할 수 없다"면서 "'하이퍼리얼리즘'은 징그럽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말, '그림이란 무엇일까?' "소재들을 빌려오는 것 뿐이지. 내가 어떻게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게 중요한 것 아닌가?"라고 되물으며 "강렬한 요체로 간직한 것. 군더더기를 버리고 단순화하여 명료하게 하는게 '그림'"이라고 딱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 관찰'을 10년간 했다. 발품팔아 지도를 만든 김정호처럼 샅샅이 자연을 돌아봤다. 그러다 굳이 그렇게 그릴 필요가 있을까. 외부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핑겟거리일수도 있다는 것"이라며 "결국 문제는 내 안에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감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움은 외부 사물로부터 발산되는 듯 하지만 내가 그것을 평소와 다르게 바라보는데서 생기는 것"이라며 "사물의 기운생동 또한 사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내 그림은 나와 사물간의 상관적 관찰의 결과물이다." 이태호 미술사학자(서울산수연구소장)는 "형상(形象)’에서 ‘형’은 눈에 보이는 것(Form)을, 상은 마음에 남은 것(Image)을 말한다"면서 "강요배는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기면 되살아난 형상에서 찾는 ‘추상(抽象)’의 본래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묵죽도나 사군자 그림을 추상화의 한 형식으로 본다"는 그는 "사생보다 기억으로 외워서 그린 이번 강요배 그림은 한국인이 표출한 동양적 이미지, 진경화(眞景畵)라 할 만하다"고 평했다. 강요배는 1980년대 민중작가로, 1990년대 제주4·3항쟁 연작을 완성한 '제주 화가'로 유명하다. 1952년 제주 삼양동 출생 강요배는 제주의 아픔이 이름에 서려있다. 강요배의 아버지는 1948년 봄, 제주 4·3 항쟁을 몸소 겪었다. 육지에서 출동한 토벌대는 빨갱이라는 명목아래 사람들을 색출했다. 색출 당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함께 처형당했다. 순이, 철이와 같이 당시 널리 쓰인 이름의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어나갔다. 강요배의 아버지는 그 참담함을 지켜보며 자신의 자식 이름은 절대 남들이 같이 쓸수 없는 이름 글자를 찾아서 尧(요나라 요), 培(북돋을 배)를 써서 '강요배'라고 지었다. 화가의 길은 어린 시절 마을 도서관에서 빌려본 그림책 때문이었다. 197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2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민중미술가'가 된 것은 1981년 ‘현실과 발언’의 동인이 되면서부터다. 현실과 시대, 그리고 역사와 미술의 문제를 고민하며 '인멸도'(1981), '탐라도'(1982), '장례명상도'(1983), '굳세어라 금순아'(1984) 등의 시대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을 발표하며 시대정신과 그것의 미학적 실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서울 창문여고에서 미술교사로 6년간 일하기도 했다. 이후 한겨레 신문에 소설가 현기영의 '바람 타는 섬' 삽화를 그리게 되면서 제주 4·3 항쟁에 대한 강렬한 충격이 일었다. 슬픔과 분노로 얼룩진 4.3 역사화를 완성하고 1992년 '강요배 역사그림-제주민중항쟁사'를 학고재에서 선보였다. 이 전시는 4·3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며 역사 주제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름다운 제주에서 일어난 잔인한 학살은 일반인들에게도 충격을 주었고 제주를 다시 인식하게 했다. 1992년 서울 생활에서 더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한 그는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지도를 들고 제주의 자연을 찾아나섰다. 제주의 역사를 알고 나니 자연 풍경이 조형적 형식이 아닌 감정이 담긴 대상으로 다가왔다. 제주 자연의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지 25년째다. ‘추상(抽象)’으로 꺼낸 제주풍경의 이번 전시는 "회화가 추구하는 본질을 꿰뚫었다'는 평가다. 땅의 역사와 자연의 형질까지 통찰한 작품 세계는 역사, 철학서부터 지리서까지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독서량이 힘이라고 한다. 제주 귀덕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는 이태호 미술사학자는 "주역을 꿰던 강요배는 이제 칸트(Immanuel Kant)의 미학 개념을 소화한 듯하다. ‘무관심성’이나 ‘공통감각’의 칸트 얘기를 유난히 입에 올렸다“면서 "그림에 대한 내 생각이 남들도 공감하고, 모든 이가 그렇게 부담 없이 그림을 그린다면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래서인지 ‘추상’에 대해 이야기를 잇던 그는 “내 그림이 어떻게 보이냐”고 물으며 이전과 달리 궁금증을 보였다. '강렬한 기억의 요체'로 나온 그림은 윤기 없이 거친 느낌이다. 번들번들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탓도 있지만 투박하고 성근 제주의 땅과 돌과 풀, 나무에 어울리는 도구를 나름 개발한 덕분이다. 선들이 거칠게 서걱대는 작품은 빗자루, 말린 칡뿌리, 구기거나 서너 겹 접은 종이 붓을 만들어 쓴다. 1994년 '제주의 자연'전 뒤부터 20년 이상 써온 '종이붓'으로 아픈 역사의 대지를 녹여내고 있다. '강요배 속'에서 끄집어내고 쏟아낸 그림 때문일까. 무게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가벼워 보이는 그는 움푹패인 볼에 검은 눈빛만 형형했다. 그림에 미쳤던 ‘고흐의 상’이 보인다고 하자, 싫지 않은 기색이다. "매력적인 사람이지”라며 쑥스러워하던 그는 “고흐는 독서량이 많았다"면서 허허 웃었다. 이번 전시는 1,2부로 나눠 여는 대형 전시다. '상을 찾아서'는 1부전으로 6월 17일까지 열린다. 2부전은 강요배의 민중미술 역사화를 한 자리에 모은 '메멘토, 동백’전이 6월 22일부터 이어진다. [email protected] 2018/05/28
공중부양한 1.2톤 대리석조각과 박은선 "500만원만 빌려주세요" 자존심 때문에, 가족들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말. 갤러리를 찾아가 손을 벌렸다. "300만원밖에 없는데…" 박여숙화랑 사장이 건네준 그 돈은 '눈물의 씨앗'이 됐다. 1997년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싣고간 '박은선'은 질긴 목숨과 가난의 멍에, 어쩔수 없는 조각가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전쟁 같은 노동'으로 바둥쳤다. "지난 25년 세월동안 작업장에 서 있는게 내 모습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위기감과 긴장감이 힘"이었다. "그걸 놓치면 제 삶이 무너질 것 같았다" 인맥도 없고, 금수저도 아니었다. 피눈물을 쏟아내며 '절망의 벽'을 깨트렸다. "매일 낭떠러지 끝에 서있어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을 거치면서 '파괴하고 해체하고 조립하는' 이런 작업이 완성됐죠" 이젠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한국인 박은선이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억의 스폰을 받아 유럽 각국 대도시에 작품을 설치한 것은 자랑이 아니라 자부심입니다." ‘이탈리아가 사랑하는 조각가’로 불리는 조각가 박은선(53)이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대리석으로 무장한 조각과 함께 온 그가 국내에서 10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 서울 성수동 서울숲갤러리아포레 더페이지갤러리에서 16일부터 20여점을 선보인다. 총 600여평 층고 5.4m 6개의 공간은 리뉴얼 한 더페이지갤러리의 재개관전으로 마치 '박은선 조각'을 위한 맞춤형 공간처럼 보인다. 미술관같은 상업갤러리의 변신 덕분에 '박은선 대형 조각'전이 열리게 됐다. 15일 더페이지갤러리에서 만난 조각가 박은선은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작업"이라며 "머릿속에 항상 꿈만 꾸던 작품, 좋은 전시장을 만나서 이런 전시를 한 것 같다"고 뿌듯함을 보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난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 3점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4~5m 길이로 늘어진, 중력을 거스르는 설치를 통해 보는 순간 압도당하지만 슬쩍 겁도 난다. '혹시 떨어지지 않을까,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까.' 작가가 눈치챘다. "이 작품을 매단다고 하자 건물 관리인이 긴장하고 갤러리 스텝도 겁을 먹었다. 정확히 한 점당 무게는 1200kg, 1,2톤인데, 겁먹는 사람들을 위해 1200kg이 안된다고 처음에 거짓말좀 했다. 하하" 하지만 "이 정도 무게는 무게도 아니다"라고 했다. "유럽에서 작품설치할때는 30톤 넘는 작업도 있다"는 그는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익숙해져 있다"고 했다. "이탈리안인드도 내 작업에 흥미있어 한다"면서 그 이유는 "노동적인 면과 금전적인 모든 걸 해내서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 그걸 신기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수학자처럼 공간과 무게 중력 계산을 철저히 한다. 천정에 특수 장치를 한 뒤 매단 조각이지만 긴장감이 있다. 뒤틀린듯 빈 균열과 흰 대리석 때문일까. 육중함보다 가볍게 떠있는 느낌이다. 넓은 공간에 여백과 함께하는 작품은 관람객을 위한 것이다. "대리석 조각이다보니 서양적이라고 하는데, 완성된 작업에서 오는 느낌은 동양적이다. 난 한국사람이니까. 매달린 기둥 하나 때문에 주변에 놓여있는게 없어야 한다. 동양화에서 난(蘭)을 하나하나 치면서 달라지는 여백처럼, 상상력을 동원시키는 공간이기때문이다. 관객 여러분들이 많은 상상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무한 기둥' 작품은 한국에서 첫 선을 보이는 신작이다. 평생 긴장감과 위기감 속에 살아온 작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박혀있다. 그는 "내 작품들은 이탈리아에서 25년간 살아온 삶 자체"라고 했다. 작가는 경희대 미술대학을 졸업 후 199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카라라 예술국립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이후 한국에 들어왔지만 전업작가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유학까지 갔다왔는데 작품은 팔리지 않고, 결혼한 부인이 생계를 이었다. 남자로서 무능함,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패배감이 자살 직전까지 내몰았다. "마지막으로 살아보자"며 '포장마차나 오뎅장사라도 해볼까'라며 기웃거렸다. 부인 대신 아이들을 돌보며 보내는 하루, 주변에선 "어느 회사 다니다 잘렸냐"며 수군거렸다. IMF 시절이었다. "이대론 안되겠다. 작업해야겠다"고 이탈리아로 향한지 25년째, '작업장 귀신'처럼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는 조각가에겐 천국이다. 작가는 "재료를 찾기 위해 온 곳인데, 실제로 재료뿐만 아니라 주변에 연장과 공구도 30분 거리안에 다 있다"며 만족한다. 피에트라산타는 거대한 대리석 산지와 가까워 세계적 조각가가 몰려든다. 미켈란젤로, 도나텔리, 헨리 무어, 페르난도 보테로 등 세계적인 조각가들이 작업 터로 삼은 곳이다. 평생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살아온 그가 이탈리아에서 반짝인건 10년이 지나면서다. 2007년 7~8월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시 초청으로 ‘베르실리아나 축제의 대규모 야외 조각전에 초대되면서다. 단 한 명의 조각가를 초청하는 행사로, 이전에 헨리무어, 페르난도 보테로 등 세계적인 조각가들이 참여했다. 이후 현재까지 이 축제에 유일하게 초대된 한국 작가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어느 도시에서나 어느 빌딩앞에 새로 들어서도 '항상 있었던 것 같다'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2015년부터 유럽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피사 국제공항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2년간 열었고,포르테바르드요새 박물관, 빌라기를 란다 시립미술관 등에 초대되며 이탈리아에서 ‘박은선’을 각인시켰다. 또 3년마다 여는 스위스 바드라가르츠트리엔날레에 초청돼 세계적 조각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유럽 각지에서 50회의 개인전 및 200여회 이상의 그룹전에 참여한 작가는 한국미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업적을 인정받아 2015년 국민훈장을 외교부로부터 수여받았다. 세계적인 조각 평론가 루치아노 카라멜은 그의 작품에 대해 "외형의 선택에서 이탈리아 예술의 영향이, 넓은 의미로는 동양적, 명확하게는 한국적인 측면이 보인다"며 "추상조각임에도 동양적 미를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동서양이 합체된 작품. 그는 애초부터 "내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안했다"고 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자체가 동양적"이라는 그는 "작품을 제작할 때 여백을 고려하는데 현지에서 그러한 여백이나 기둥에서 보여지는 선 등을 동양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했다. 돌의 결을 따라 의도적인 균열을 만들고 틈을 내는게 이색적이다. 기하학적, 추상적 형상 가운데 부드러운 곡선미를 강조한 그의 작품은 전통조각의 관념을 깼다. 색이 다른 두개의 대리석 판을 켜켜이 쌓아 올리면서 원형, 사각형, 원반과 같은 조각의 외형을 마름질하고 그 과정의 시간들을 겹쳐간다. 작품은 제의에 가까운 수행적 태도를 통해 나온다. 거칠게 파괴된 돌과 정교하게 표면처리된 돌 사이의 긴장은 자연스러움과 인공적인 것, 과학적인 엄격함이 작품 안에 공존하면서 완벽한 균형과 질서 속에 에너지를 상승시킨다. 동양과 서양, 고전과 모던, 균형과 불균형, 통제와 자율성이 대립된 작업은 순전히 '망치'에서 나왔다. "미켈란젤로 시절부터 조각은 대리석 한 덩어리에서 떼 나가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만들던 조각작품을 망치로 깨버렸다. 깨고 나니 느낌이 좋더라. 깨고 부수고 짜맞추면서, 아~ 나와 너무 닮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작업은 깨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깨고 숨통을 열어주며 붙여나간다. "왜냐고요? 돌은 생명이 없어요. 생명이 없는 자연석에 생명을 넣고 싶어 깨는 겁니다." 이번 전시는 '쉼 쉬는 돌의 시간'을 타이틀로 박은선이 유럽에서 일궜던 그의 작업을 총 망라해 보여준다. 다섯 개의 길죽한 조각품이 모여 있는 것과 달리 검은 조각을 따로 빼놓은 전시장 안에서 그가 말했다. "저는 이탈리아에서 스스로 왕따로 자청하면서 살아왔어요. 따로 떨어져 있는 강렬한 검은색은 바로 제 모습입니다. 인종차별하면 넘어가지 않고 덤볐고, 작업하면서 힘들면 부수고 깨고 성격을 그대로 표출했죠. 인생 반을 넘어가면서 말로 상처줬던 주변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어요." 깨지고 비어 날씬하게 세워진 작품들은 스스로 근력있게 탄력성을 보인다. 신전 기둥처럼 또는 외계의 나선처럼 무한 회전해 위로 아래로 파고들 듯 하다. 그는 "작품에서 살아 있는 숨소리, 비명소리를 듣는다"면서, "내 작품에는 100%의 내 삶이 스며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수십 톤의 대형 돌 조각을 보면 모두 무모하다고 입을 모은다. 혼자하면 6개월~8개월. 최근에는 로봇과 3D를 이용해 마름질하면 한 달에서 석 달 정도 걸려 완성되는 작품이다. 인생에 한 방은 없다. 반복의 힘은 무섭다. "매일 같이 작업하다보니 쉬워요. 하루도 끈을 놓지 않고 작업하다보니 내 것이 됐고, 하루 일과가 됐죠." 비틀어진 사각형 조각이 뽀족한 모서리로 서 있는 작품앞에서 그는 "무게 중심이 틀어지면 위험 부담이 많다"며 "작가로서 여전히 25년 전 모습과 똑같이 살고 있다. 제 자리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300만원 들고 이탈리아에 갔을때, 중고 자전거 한대만 있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을 가지고,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그때가 좋았다. 지금은 찾는 사람도, 연락도 많다. 작업만 하고 싶을 때, 절실할때, 그때가 생각난다"고 했다. "아, 돈 갚았냐고요? 그럼요~ 그 다음해 바젤아트페어에서 작품이 솔드아웃됐거든요. 하하하." 서양미술의 핵심, 건축과 조각이 태어난 본토로 들어가 조각가로 희석됐지만, 25년간 정체성을 지켜왔다.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 긴장감과 균형감이 박은선 몸에 체화되면서 해체와 접합의 한 덩어리로 '박은선 조각'을 재탄생시켰다. 25년간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그의 조각혼도 중력을 거스른 '무한기둥' 처럼 '공중부양'을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 작가로 인정받기까지 많은 시간, 오래 걸렸죠. 그래서 지금의 저는, 건방지다고 할 지 모르지만 항상 자신감 있습니다." 그동안 '가벼운 조각' 일색이었던 국내 조각 시장에 '박은선 숨쉬는 조각'이 묵직한 균열을 가하고 있다. ‘박은선 조각이, 은근하게 유럽에서, 선방했다는 것을’. 보고 만지면 느껴진다. 전시는 6월30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5/16
만화 '세일러 문' 추상화로 변신 시킨 윤향로 작가 최근 출판가에 90년대 인기만화였던 '곰돌이 푸’가 베스트셀러 1위를 휘어잡고 있다. 월트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의 대사와 행복 메시지를 엮은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책이다. 90년대 일요일 아침을 함께한 디즈니 만화동산 '곰돌이 푸'를 보고 자란 세대가 현재 30~40대로 소비문화를 이끄는 주역인 덕분이다. 책은 만화의 추억과 힐링의 공감대를 높여 인기를 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술시장은 이미 '만화 세대'가 점령했다. '만화같은 그림'은 팝아트의 또다른 줄기로 뻗어나와 젊은 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자리잡있다. 2000년대 후반에는 진짜 '만화 캐릭터'같은 그림이 캔버스에 들어왔다. '눈 큰 그림' 마리킴의 작품과 한국화로 그려낸 손동현의 슈퍼맨·베트맨·울버린이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며 인기를 끌었다. 급변하는 세상, 그래서 순수회화속 '캐릭터 그림'은 벌써 식상해졌다. 90년대생들의 캐릭터 그림 이후 잠잠했던 미술시장에 10여년만에 진정한 '만화 세대' 작가가 등장했다. 86년생. 4살때부터 미술학원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예고, 미대를 나와 화가가 됐다. 어릴적 TV만 틀면 나왔던 만화는 아이를 지배했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에술종합학교 평면조형전공으로 석사 졸업했지만, 화가로 데뷔 시킨건 만화였다. 다섯번째 개인전을 서울 이태원 P21에서 여는 윤향로(32)작가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작업의 바탕이다. 어릴적 강렬하게 접했던 만화의 이미지를 발췌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변형한 후 캔버스 위에 회화로 그려낸다. 하지만 작품은 전혀 만화같지 않다. 만화의 흔적은 찾아볼수 없는 추상화로 변신했다. "일본의 유명 미소녀 만화 주인공이 변신하거나 악당과 전투할때 에너지 혹은 아우라가 발산되는 장면들이에요." 11일 P21 전시장에서 만난 윤향로 작가는 "만화 주인공보다는 그걸 제외한 장면을 화면 캡처해 추상적인 이미지로 옮긴 것"이라며 "다양한 표면 질감으로 평면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관심있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추상회화 ‘Surflatpictor’시리즈는 만화라는 빼대로 보면 이해가 쉽다. 짙푸른 색감이 압도적인 'Screenshot' 그림의 경우 만화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이 배경이다. 소녀들을 홀리며 유행어가 된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어'라며 변신하는 순간 빛나는 아우라를 캡처한 것. 요즘 말로 '포텐 터지는' 그 장면을 옮겨온 것이다. 세일러문 부터 밍키등 소녀 변신 만화에 빠졌던 작가는 만화 오타쿠는 아니라고 했다. 변신 만화보다 '달의 아이'로 유명한 시즈미 레이코를 좋아한다면서 "소녀 변신 만화 계보도 만들어볼까하는 생각도 해봤다"며 유명 만화 제목을 줄줄이 뀄다. 만화의 한 장면을 추상화로 변신 시킨 윤향로의 작업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어떤 방식으로 추상회화로 만들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됐다. 작업은 IT세대 작가답게 디지털 가공을 거쳐 나온다. 이미지 파일을 자르고 조정하고, 변형하는 도구의 기능과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탐구한다. 선정된 애니메이션 화면을 컴퓨터의 '화면 캡처' 기능을 통해 독립된 개체로 만든다. 이후 디지털 편집 소프트웨어인 포토샵으로 '확대 크롭' 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이미지를 회화로 옮긴다. 이렇게 만들어낸 형상은 붓이 아닌 에어브러시로 캔버스 위에 그려져 디지털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표면에 가깝게 매끈하게 표현된다. 이미지의 에너지 입자를 가져와 추상회화로 내놓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이미지를 추적해 나가는 여정"이라며 컴퓨터의 알고리즘이 유추해 만들어내는 가상의 이미지에 주목한다고 했다. 이전엔 영상과 프린트 작업도 했다. DC코믹 커버 이미지를 그린 작업으로 윤향로 이름을 알렸다. 등장인물들이 제거된 상황에서 남는게 무엇인가. 어떤 풍경이 남아있을까. 사건의 주체들이 빠져나갔을때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해서 그린 그림이지만 만화 덕후들은 단박에 그 장면을 알아보는 그림이다. 윤향로의 이번 개인전 타이틀 ‘Surflatpictor’은 작가가 지어냈다. 초-납작함, 과다한 평평함으로 해석될 수 있는 ‘surflat’과 ‘pictor’의 합성어다. 디지털 이미지의 생산과 편집 방식, 회화 평면의 공간적 확장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을 넌지시 암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사용하는 이미지 변주 방식인 콘텐트 어웨어 기능 자체를 거울의 반사를 이용했다. P21 갤러리 공간에 거울을 설치해 3차원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거울 옆에 설치된 작품은 유리에 UV 인쇄하여 스크린 위 얇고 투명한 이미지를 구현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주한 커다란 거울에,나 자신과 그림이 함께 들어간 듯한 착시를 선사한다. P21갤러리는 좁은 공간이지만 그 공간에 맞게 작품을 제작하고 작품을 설치할수 있어 젊은 작가들이 다양한 실험욕구를 자극하는 전시장이다. 다양한 매체 실험후 2~3년전부터 회화를 집중적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작가는 "나는 이미지를 정리하고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소비됐던 이미지를 수집하는 사람"이라는 그는 "이번에 선보인 작품의 바탕이 된 세일러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당시 유명했던 만화들의 콘텐츠를 가져와서 비트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가 알랭드 보통에 따르면 '미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다. 화가는 무엇을 기념해야 하고, 무엇을 생략해야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90년대 만화를 보고 자란 화가는 삭제된 현실(이미지)을 복구하는 능력자가 됐다. 결국 "예술이라는 것은 자기 인식을 누적시켜 타인에게 그 결실을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만화 이미지를 세련되게 추상회화로 옮겨낸 작가는 "많이 보는게 힘이 된다"며 "앞으로 좋은 작품을 많이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했다. 전시 기화가 잘 주어지지않는 젊은작가들의 곤궁한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다. 작품은 호응을 먹고 큰다. 그림도 보는 만큼 안다. 많이 보고, 많이 봐야 느낀다. 예술을 이해하는 능력을 쌓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전시는 6월 10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5/11
봉이 김선달같은 '모노크롬' 제이콥 카세이 동시대 모노크롬(monochrome)회화 작가들은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같다. 그냥 있는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작품'이라며 팔아먹으니 말이다. 작가들 입장에서는 '아트(art)를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할수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아트'라는게 무엇인가. '삶이 예술' 아닌가. 이미 일상이 예술이 된 세상속에서 '작품'으로 분류되면 고고해져 대중과 거리를 두는 아이러니를 발한다. 모노크롬 그림, 어렵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쉽다. 세계미술용어 사전에 따르면 다색화(polychrome)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일한 색조를 명도와 채도에만 변화를 주어 그린 단색화다. 한가지 색만 쓰는 색채뿐만 아니라 내용, 주제, 선, 형태를 거부하고 전통적 미술 개념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다. 특히 1960~1970년대에 이르러 하나의 주요한 추상회화 양식으로 자리잡았다.이들의 작품은 완벽하게 감정이 여과되었다는 호평을 받은 반면에 '지나친 결벽증에 의한 삭막한 공백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우리나라 단색화가들도 모노크롬의 영향을 받았다. 2000년에 정의된 단색화 이전엔 '모노크롬 화가'로 불렸다. 같은 단색이지만 서양의 모노크롬과 한국의 단색화가 다른 점은 작품에 녹아든 정신성, 몰아일체 수행으로 이뤄졌다는 차이가 있다. 모노크롬 그림은 "나도 하겠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캔버스에 한가지 색만 칠하거나, 칠도 없는 하얀 캔버스 자체를 날카롭게 베거나, 점 하나 찍고도 '대단한 추상화 작가'로 평가 받는다. 반면 '도대체 뭘까', '뭘 그린걸까'로 골치아프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래서 '추상회화'의 고개는 숙여지지 않고 있다. 특히 '미니멀한 모노크롬'은 여전히 동시대 미술을 쥐락펴락한다. 이런 측면에서 '봉이 김선달'같은 모노크롬 작가가 미국에서 날아왔다.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제이콥 카세이(34)다. 서울 통의동 리안갤러리에서 흰색 모노크롬 회화 신작전을 10일부터 펼친다. 리안갤러리 안혜령 대표가 아트바젤등에서 눈여겨보다 5년전부터 섭외해 겨우 성사된 전시"다. 젊은 작가지만 이미 '실버 페인팅'으로 해외 미술계에 떠오른 스타작가다. 2005년 미국 뉴욕대학교(파인아트)졸업후 2008년 뉴욕 유명 갤러리 303갤러리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2009년 뉴욕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에서 작품 매진을 기록하며 주목받았다. 2010년 11월 아트 옥션에 처음으로 나와 30세 이하 미국 작가 경매가 최고를 기록했고, 전 세계 30세 이하 작가 경매가 TOP 10에서 1~6위와 9위를 싹쓸이 했다. 2015년 크리스티 11월 경매에서 50호 크기 2점이 추정가를 뛰어 넘은 한화 1억4624만원에 팔리면서 일약 '실버 페인팅' 작가로 몸값이 높아졌다. 특히 '억만장자 컬렉터' 피노 회장이 제이콥 카세이의 작품을 소장한게 알려지면서 '컬렉션 잇템'으로 떠올랐다. 작품은 아주 간단하다. 제이콥 카세이를 '핫한 작가'로 등극 시킨 '실버 페인팅'은 그야말로 봉이 김선달의 '대동강 물'처럼 나왔다. 리안갤러리에서 만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공장에서 도색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도색을 하던중 반짝이는 '실버색'에 반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색상이라는 생각에 미니멀리즘의 실험을 시작했죠. 사진 작업도 해봤는데 사진은 인화하면 그대로 나오지만, 실버 페인팅은 컨트롤이 불가할 정도로 우연성이 가미된 작업입니다. 페인팅 흐르기에 따라 굳어지는 모습이 불규칙하게 나오는데서 착안해 미니멀리즘의 방향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본 것이죠." '자동차 도색 알바'를 뛰다 원래 있던 은색으로 만든 '실버 페인팅'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불투명한 거울을 연상시키는 카세이의 페인팅 작업은 오늘날 미니멀리즘의 현재 진행형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전기 도금 기술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실버페인팅은 주변의 세상을 흐릿하게 반사하는 거울과도 같다. 색의 움직임은 그림의 표면을 흔들고 빛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실버 페인팅'은 조각인 동시에 회화로도 불린다. 비춰진 자신을 보고 그 다음 자신이 서 있는공간을 보게 하며 상호작용하는 작품은 2차원의 회화이면서도 공간과 상호작용을 하여 3차원성을 갖는 특징을 보인다. “저는 환경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작품을 하고 싶어 페인팅을 선택했습니다. 생각한대로 곧이 곧대로 작업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저를 흥미롭게 하는 부분은 내가 그 장소를 처음에 찾게 됐던 이유와 나의 관심을 사로 잡았던 반응에 대한 의문 제기입니다”. 이번 한국 전시에서는 유명한 '실버 페인팅'은 볼수 없다. 한국에서 첫 개인전인 만큼 최신작을 내놓았다. 리안갤러리 공간에 맞춘 '한국 맞춤형' 작품을 선보인다.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의 흰색 모노크롬 회화지만, 차이가 있다. 오크 나무로 프레임을 짜 다양한 형태로 선보인다. 직사각형을 기본형으로 템플릿 자를 연상시키듯 한쪽 혹은 양쪽 가장자리 선이 오목하거나 볼록한 형태다. 성신영 전시 디렉터는 "카세이의 작품은 단순히 회화라는 하나의 예술적 범주의 차원을 넘어서 회화와 조각의 탈 영역적 양식의 조형적 실험"이라고 했다. 회화의 가장자리 틀을 다루는 방식때문이다. 현대 회화사에서 그림의 엄격한 사각형 틀에서 벗어나 벽 공간으로의 확장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가 시도했지만 카세이의 작품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캔버스는 윤기 없는 완벽한 흰색 모노크롬으로 처리한 반면 오크 목재를 프레임을 사용하여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장자리로 이끌리게 한다. 성신영 디렉터는 "프랭크 스텔라가 시도했던 회화는 공간의 벽, 공간으로의 확장으로 이해되지만, 카세이가 도입한 오크 프레임은 회화 평면 공간을 벽 공간과 완벽하게 분리된 공간으로 만든다"면서 "여기에서 카세이 작품의 이중적 ‘모순’의 미학이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흰색의 회화인데도 다양한 형태의 오크프레임이 두드러져 '미니멀리즘 조각' 같기도 하다. 일정 간격으로 전시장 벽면에 걸리자 작품과 작품 간의 연결고리를 생성시키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환영도 선사한다. 뭔지 모를듯한 카세이의 작품은 결국 전시장 벽면을 '오크 프레임'으로 드러냈다는 얘기다. 흰 전시장 벽을 캔버스에 다시 흰색으로 칠하고 그걸 구분짓기 위해 오크나무로 프레임을 짰다. 그러자, 벽과 벽이 분리되어 그림이 되고, 화면과 틀이 분리되면서 또 하나의 조각(오브제)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모노크롬 회화, 추상회화의 흐름을 잇는 작가인가?라고 묻자 그는 "거창한 사조나, 흐름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며 "그것보다는 물체 본연의 존재를 강조하는 '오브제 미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이번 신작은 '평면을 벗어나려는 회화의 입체화' 시도다. 모노크롬화의 탈을 쓴 오브제 조각이다, 젊은 작가답게 공간에 박제된 그림이 아니라 공간과 감상자의 반응에 반응하는 영리한 작품이다. 무엇을 그렸는지 고민하고 어려워할 필요가 없다. 고정된 감각을 비틀어 지각 경험을 확장시킨 것에 불과하다. 물리적 형태 그 자체에 국한되어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를 환기시킨다는 점이 우월하다. 모노크롬 전통의 틀을 살짝 바꾼 아이디어가 재기발랄하다. 흰색에 프레임 하나 짰을뿐인데 고급스런 작품이 되는, 제이콥 카세이의 모노크롬 회화가 동시대 현대미술시장에서 각광받는 이유다. 이번 신작은 4000~5000만원선이다. 전시는 6월 26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5/10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미디어아트로 개관전 연 이유? 3일 아모레퍼시픽그룹 미술관이 공개됐다. 서울 한강로 신용산역과 연결된 신사옥 1층에 마련된 미술관은 동시대 최첨단 미술의 향연을 보여준다. 개관 기념전은 멕시코 태생의 캐나다 작가 라파엘 로자노 헤머(52)의 작품이 들어찼다. 26년간 기술을 기반으로 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대중과 교감해 온 미디어아티스트다. 이 전시는 작가의 최초 한국 개인전이자, 아시아 회고전이다. 미술관측은 "작가가 강조하는 사람과 관계, 공동체의 가치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추구하는 방향성과 잘 맞기 때문에 첫 기획 전시의 주인공으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공공미술프로젝트를 활발히 펼쳐온 작가답게 전시는 '함께', '다같이'를 추구한다. 미디어아트의 기본은 인터렉티브(interactive)다. 작품은 관람객이 참여해야 완성된다. 작가를 알린 1992년도 초기작 'Surface Tension'(표면 긴장)부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맞춘 신작 5점을 포함, 총 29점을 전시했다. 사옥 1층 미술관 로비부터 작품이 시작된다. 지름 3m의 거대한 3D 원형 조각 'Blue Sun'이 끌어들인다. 지난 10년간 태양에 대해 나사(NASA)와 작가가 협업한 결과물로, 태양 표면에서 포착되는 불꽃과 얼룩, 요동치는 움직임이 원형으로 구현됐다. 작품은 342개의 널에 부착된 25580개의 LED 전구들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오로라같은 신비함을 선사한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과 퀘백 현대미술관의 공동지원으로 제작됐다. 지하 전시장은 그야말로 '한바탕 놀이마당'처럼 연출됐다. 첫번째 작품은 '모래판'이 등장한다. 미국 LA의 산타 모니카 해변에서 진행한 공공프로젝트를 실내로 옮겨와 거대한 인공 해변을 꾸몄다. 70톤의 모래를 깔아놓은 작품은 관람객이 스스로가 주인공이 된다. 신발을 벗고 모래판에 들어가 움직이면 그 자체가 작품이 된다. 미술관측이 작가에게 제안한 작품으로 가장 예상밖의 즐겁고 새로운 작품이어야 한다는 주문이 있었다.서로 만지고 공간을 점유하고 서로 바라보고 함께 있다는 느낌을 경험으로 완성된다. 하나의 놀이로서 관람객을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내는 것이 컨셉이다. 나의 지문을 기록할수도 있는 작품도 있다. 220배로 확대 가능한 전자 현미경과 심장 박동 측정기가 내장된 센서에 손가락을 넣으면, 센서를 통해 지문이 곧바로 화면의 가장 큰 칸에 나타나며 심장박동에 맞추어 진동한다. 지문을 사용한 일종의 죽음의 상징, 즉 메멘토 모리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마치 거대한 영상 회화처럼 보인다. '우리는 같은 사람, 인간'이라는 것을 벅차게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240 개의 투명 백열전구로 구성된 'Pulse Room'은 검은 방의 울림을 심장소리로 완성한다. 전시장 한 켠에 위치한 내장된 센서를 두 손으로 잡으면 심장 박동을 측정한다. 관객이 인터페이스를 잡으면 컴퓨터는 맥박을 감지하고, 참여자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전구가 맥박의 속도에 따라 깜빡이기 시작한다. 인터페이스가 측정한 데이터가 전시장에 방출되는 순간, 모든 전구들은 꺼지고 기록된 시퀀스가 한 칸씩 이동하며 빛을 내며 심장 박동소리로 맹렬하게 화답한다. 전시된 모든 작품들은 키네틱 조각, 생체측정 설치작품, 사진, 상호반응 우물, VR, 나노 기술, 사운드 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최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구현됐다.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뉴스, 문학, 취조실 거울, CCTV와 같은 감시장치 등이 작품 내용을 구성하며, 맥박, 목소리, 지문, 초상, 발화시 공기의 파장, 인체의 움직임, 상대방과의 거리 등 우리의 몸과 움직임이 인터페이스로 활용된다. 데이터 과학 용어이자 이번 전시 제목인 ‘Decision Forest’는 관람객의 선택, 그리고 관람객과 작품의 상호작용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결과값을 의미하기도 한다. 3일 한국 기자들을 만난 라파엘 로자노헤머 작가는 "지난해 4월 방한해 공사중인 신사옥을 보면서 구상한 전시를 완성했다"며 "1992년 최초 작품부터 월드 프리미어 5점이 포함되어 있어서 중간 회고전 성격이다. 한국 관객이 어떻게 봐줄지 긴장되고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캐나다 콘코디아대학교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한 작가는 컴퓨팅 기술을 예술화해 대중과 예술의 쉬운 소통을 주선하고 있다. 최신 기술을 이용하는 미디어아티스트 작가인데 "뉴미디어로 불리는게 싫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은 전혀 새로운게 없다"고 했다. 그는 공공장소에서 컴퓨터, 프로젝터, 사운드 디바이스, 센서, 로봇 등 전자 기기 기술을 이용한 대규모 인터랙티브 설치를 통해 관람객과 실시간 소통하는 작가로 일반인에게 알려졌다. 미디어아티스트로서 "대중을 작품의 일부로 참여시킨 것에 대해 백남준에 빚지고 있다"면서 이번 전시의 한국 관객들의 반응을 더욱 궁금해 했다. 작가는 그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이 작품과 교감하기를 바란다. 스스로 작품 일부가 되어 직접 체험하고 느끼라고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전시가 끝난후에야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즐겼다, 어떻게 반응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 같아요. 작품 전반이 테크놀러지의 양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시여서, 과연 이것이 유희적일지, 무섭고 폭력적일지 그 반응이 무척 궁금합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개관전은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걸린 그림, 세워놓은 조각이 아니라, 미디어아트를 선정한 건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의지다. 관람객이 작품에 끼어들도록 유도하는 전시 작품들처럼 대중과 가깝고 친밀하게 소통하는 미술관이 되겠다는 바람이다. 신사옥과 함께 눈길을 끌지만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은 첫 개관이 아니다. 1979년 태평양박물관이 모태다. 2009년 아모레퍼시픽미술관으로 명칭을 바꿔 경기도 오산과 용인에서 미술관을 운영해오다, 올해 2월 신사옥으로 들어왔다. 우리나라도 '박물관·미술관 1000개 시대'지만 미술관 문턱은 여전히 높다. 서울에만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미술관은 10곳이다. 삼성미술관리움(삼성), 아트센터나비(SK), 아트선재센터(대우), 금호미술관(금호아시아나), 성곡미술관(쌍용), 대림미술관(대림), 한미사진미술관(한미약품), 포스코미술관(포스코),세화미술관(태광그룹), 일우스페이스(한진그룹)등이 있지만 대중들과 공감을 이루는 미술관은 손에 꼽기 힘들다. '누구나 올 수 있는 열린 공간’을 표방하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이 또 하나의 '재벌 미술관'이 될지, '열린 미술관'이 될지는 기획력에 달렸다. 이번 개관전에 초대된 라파엘 로자노헤머 작가가 말했다. "한국에도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가 많다. 문경원·전준호는 물론, 장영혜중공업, 최우람 작가와도 친하다. 그런분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그런면에서 '재벌 미술관'들의 개관전은 늘 해외 작가로 열리는 건 아쉬운 점이다. 전시는 8월26일까지. 관람료 1만2000원. [email protected] 2018/05/03
대충 그렸는데 쿨내 진동...알렉스 카츠 "저는 앤디워홀에 약간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 뛰어납니다." 최근 미국 뉴욕 가고시안갤러리 출판담당이자 베스트 셀러 작가인 데릭 블라스버그와 인터뷰에서 그는 "1960년대 함께 활동했지만 워홀을 파티에서 보기만 했을뿐 어울리지는 않았다"고 했다. "좀 더 문학적인 모임에 속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쩔수 없다. 그의 작품에서는 팝아트 황제 앤디워홀(1928~1987)의 그림자가 있다. 영화 장면같거나, 광고판 같은 그림이다. 특히 남성보다는 여성을 내세운 초상화 같은 작품으로 일명 '카츠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알렉스 카츠(91). 독창적인 초상회화 세계를 구축한 그는 현재 '현대 초상 회화의 거장'으로 불린다. 1960년대 이래 인물초상을 그리며 가장 '뉴욕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앤디워홀이 '미술계 끝판왕'으로 활약했던 1960년대 알렉스 카츠도 뉴욕에 살고 있었다. 미국 산업사회 부흥기와 함께 뉴욕은 TV, 영화, 광고 등 새로운 미디어의 도시이자 바넷 뉴먼, 프란츠 클라인으로 대표되는 색면 추상, 잭슨 폴록의 올오버 페인팅(All over Painting), 제스퍼 존스, 앤디워홀의 팝아트 등 새로운 시각 예술이 공존하는 예술의 도시였다. '부흥의 도시'에서 화가로 살아내야 했던 그는 특정 미술 사조에 편승하지 않았다. 다만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해 섞었다. 색면과 인물의 모습을 결합한 카츠만의 독창적인 '초상화 스타일'을 창조한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과 앤디워홀 팝아트, 또 '액션 페인팅' 잭슨폴록의 기법이 들락날락한다. 가장 큰 특징은 단색의 대형 화면에 인물을 배치하는 것. ‘크롭-클로즈업’의 방식을 이용한 대담한 구도로, 광고 사진이나 영화의 클로즈업 장면 같아 관람자가 인물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이 같은 기법은 '카츠 스타일'이 됐다. 그림은 묘하다. 팝아트도 아니다. 최근에 제작한 작품 '코카콜라'는 브랜드명도 없지만, 색채만으로 코카콜라를 보여주며 여유와 휴식을 나타낸다.앤디워홀의 작품 '캠벨수프', '코카콜라'와 다른 차이다. 워홀의 코카콜라가 대통령도, 마릴린 먼로도 마시는 기회와 평등의 나라의 가치를 보여준다면, 카츠의 '코카콜라'는 평등의 의미보다는 쿨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전한다. 특히 선적인 움직임을 강조하면서 선과 색, 브랜드의 이미지가 결합된 새로운 화면을 보여준다. 캘빈 클라인 속옷을 입은 작품도 마찬가지. 캔버스는 카메라의 프레임이 되고 캘빈 클라인 로고에 담긴 자신감과 세련됨이 독특한 화풍으로 완성됐다. 거장이라고 하는데,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은 대충 그린 느낌이 강하다. 배경도 명암이나 그림자도 없이 단색으로만 칠해져있다. 여성의 동작을 포착하며 순간 순간의 제스추어에 집중하는 그만의 기법이다. 이 때문에 젝슨폴록의 페인팅을 이어받았다는 평이다. 자세히 봐도 더욱 결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균형이 맞지 않고 왜곡된 느낌을 연출한다. 이주은 미술사학자는 "순간 포착을 하기때문에, 카츠가 순간에 봤기 때문에 너무 공들여 그리면 그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며 "카츠가 그린 인물은 현재성에 가두어놓은 작품"이라고 했다. "초상화속에 인물이 가진 상징이 아니라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지속적인 현재 시제속에 머물게하는, 순간적인 아름다움에 감수성을 입힌 작업"이라는 것. 구상과 추상이 혼성되어 있는게 '카츠 스타일'의 매력이다. 배경을 한가지 색으로만 칠해 색면추상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마크 로스코처럼 영혼이 깃든 것은 아니고 '쿨하고 세련되게' 사물을 바라본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물어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장르인 초상화를 가장 아방가르드한 기법으로 재해석해냈다는 평가다. '카츠 스타일'을 한자리에서 볼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롯데뮤지엄은 ‘알렉스 카츠, 모델&댄서’전시를 25일 개막한다. 아시아에서 첫 번째로 개최되는 대형 전시로 초상화, 풍경화, 설치작품(컷아웃)등 70여점을 선보인다. 특히 올해 92 세의 고령에도 열정적으로 작업한 최신작 CK, 코카콜라 시리즈를 세계 최초로 서울에서 공개하는 의미있는 전시다. 전시에는 60여년간 평생을 그려온 영원한 뮤즈인 부인 ‘아다(Ada)’ 작품도 나왔다. 카츠의 화면에서 아다는 우아함과 신비함을 가진 주인공이다. 뉴욕 상류사회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 단색의 대형 화면에 클로즈업된 인물을 배치하는 카츠만의 표현방식은 아다의 고혹적인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했다. 알렉스 카츠는 그의 부인 ‘아다’의 초상화를 250여점 이상 그렸다. 아다를 만난 1957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다를 그려내고 있다. 카츠의 초상화가 인기를 끌수록 아다는 아름다움의 표본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카츠도 자랑스럽다. "아다는 유럽적인 아름다움과 미국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진 완벽한 모델이다. 만약 그녀가 지금보다 2인치만 더 컸다면 미스 아메리카가 되었을 것"이라며 "그녀는 무용수와 같이 풍부한 제스처를 표현해주었다. 나는 진정한 행운아”라고 했다. 아흔이 넘은 그는 여전히 주 7회 매일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전업화가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족을 부양하고 싶었지만 일이 풀리지 않았다. "작가로서 삶을 산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대가들과 경쟁하고 싶었다"고 했다. 늘 거대한 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카츠는 "제품을 생산하고 싶지는 않다"며 워홀의 후예들과는 다르다는 뉘앙스로 선을 그었다. "내 작품들은 전부 다 다른 사이즈의 캔버스에 그려지고 소재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고 자부했다. 간단하고 쉽게 보이는 만화같은 작품이지만 "내 작업의 근간은 사실에 기반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전시 도록에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새로운 댄서 시리즈는 그들이 보여주는 표정과 제스처를 묘사하고 있다"며 "캘빈 클라인과 코카콜라시리즈는 현실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하는 개인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고 밝혔다. 전 세계에서 러브콜하는 작가로 현대미술 대가가 된 알렉스 카츠는 1951년부터 200여 건의 개인전과 500여 건의 단체전을 진행했다. 메트로폴리탄, 모마 미술관, 휘트니, 브루클린,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사치 컬렉션, 테이트 미술관 등 전 세계 100곳의 국공립 미술관에 알렉스 카츠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살아남은 자가 강자다. '팝아트 황제' 앤디워홀보다 오래 살아남은 그는 '세계 10대 화가'로 등극해 동시대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뉴요커'로' 뉴욕 사람들'을 브랜드화해 '뉴욕적인 화가'로 불리는 카츠는 결국 '삶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보편적인 에너지를 보여준다. 왜 현대인들은 '카츠 그림'에 열광하게 됐을까. 현실은 예측할수 없는 변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써놓은 알렉스 카츠의 '쿨내 진동'하는 멘트가 힌트다. "그림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그림이 필요할 뿐. 그림이 바로 당신이 되어야 한다." 전시는 7월23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