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의 화가' 이배 "가난해서 택한 재료, 이젠 유럽서 우리문화 환기" 바베큐를 굽거나, 천연 가습제로 쓰는 일상용품인 '숯'의 위대한 변신이다. 김춘수의 시 '꽃'처럼 '다만 새까만 탄소 덩어리에 불과했던 숯은 화가의 손이 닿자 예술'이 됐다. '숯'이라는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이 독특한 작품은 유럽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파리 페르네브랑카 파운데이션(2014), 생테티엔 현대미술관(2011), 베이징 투데이 아트미술관(2009)등 프랑스 뉴욕 중국 등 유수 미술관에서 50여회 초대전이 열렸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며 1995년 국내 미술계에 소개된 작품은 2000년 가장 권위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2013년 한국미술비평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하며 한국 화단에서도 인정 받았다. 지난해에는 유럽 최대의 동양예술품 박물관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숯’이라는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을 통해 ‘한국 회화’를 국제무대에 선보이며 가장 ‘동양적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 도불한 후 파리, 뉴욕, 한국을 오가며 활동 하고 있는 이배(60 본명 이영배)화백이다. 이 화백은 지난 10여년 전부터 최근까지 검정과 '크림 빛' 흰색의 서체적 추상회화들을 주로 선보여왔다. 2000년대 초 '숯' 자체를 이용한 재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검은 숯가루와 숯덩어리를 공중으로 던지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고, 그 이후 아크릴 미디엄과 검은 안료를 사용해 밀랍을 연상시키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입체적인 회화를 선보였다. 압권은 숯을 잘라 캔버스 화면에 붙이는 ‘이수 뒤 푸'(Issu du Feu)다. ’불의 근원'이라는 뜻의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절단한 숯 조각을 나란히 놓아 접합 한후 표면을 연마하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수백개 숯의 단면이 화면을 가득 메워 다양한 방향의 각도에 따라 각각 다른 빛으로 반짝인다. 마치 숯 덩어리 묶음 작품을 단면으로 잘라놓은 모습을 띈 것 같기도 한데 나무 결 같기도하고, 나무테 같기도 한 세밀하고 섬세함이 돋보인다. 또 숯가루를 짓이기고 아크릴을 녹여 화면에 두껍게 붙이는 '랜드 스케이프'(landscape) 시리즈도 인기다. 숯의 본질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다양한 조각적 형태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아크릴 미디엄이 섞인 숯가루로 모티브를 그린후 그리는 과정을 반복하면 2차원의 단순한 평면이 아닌 3차원적인 입체감으로 조용한 울림을 선사한다. 또 소용돌이같기도 하고, 떠다니는 부호 같기도 한 서체같은 추상화는 개념에 집중한 듯한 시간의 깊이와 여유가 느껴진다. '숯의 화가'로 유명하지만, 처음부터 숯 작업을 한 건 아니었다. 물감을 버리고 '숯'을 재료로 선택한 건 가난 때문이었다. 홍익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대 프랑스로 건너갔다. 1991년 '소나무 협회'를 창립하는등 화단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지만 경제적으로 힘이 들었다. 물감 살돈이 늘 부족했다. 과거 그의 작품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쏟아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층층히 유화물감을 축적시키는 작업이었다. 당시 그는 유화물감과 캔버스등의 과중한 재료비를 감당해 낼 길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물감대신 목탄으로 이것 저것 드로잉 하는 것에 만족하는 상황에 이르렀을때 우연히 그의 작업실 근처에서 헐값으로 판매하는 숯포대를 발견하면서 눈이 떠졌다. 이 화백은 "어릴때부터 그림을 배우면서 뎃생을 한다던지 할때 주로 목탄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런 기억의 한 일부분으로 숯이 나한테 첫번째로 관심을 끌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숯이 어떤 화학적인 재료가 아닌 자연으로부터 왔다는 것과 어릴때 시골(경북 청도)에서 태어났고 성장하며 자연에서 자라왔던, 성장기 속에 잠재해있던 감성이 잘 만난 것이라고나 할까요." '한국인'이라는 원천을 일깨우며 이배를 일으킨 숯은 이배와 함께 부활했다, 검게 타버린 숯의 소멸에서 영원으로 나아갔다. 그는 "숯은 모든 물성, 모든 물질의 마지막 모습"이라며 "검정색의 깊이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숯은 얼핏보기에 아주 빈약하고 상당히 하찮은, 우리의 일상에서 늘 볼 수있는 재료입니다. 이 하찮고 일상적인 하나의 재료일지라도 숯에 어떤 예술적인 감성을 넣었을때 그것이 역동적으로 상당히 화려하고 아주 부유하고 굉장히 찬란하게 발광하며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숯'을 사용하기 시작한 초창기 관심은 우선 사람의 인체였다. 메마르고 접착력이 없는 숯으로 화면위에 인체를 그려내는 것은 수십 번 반복되는 덧칠을 요구하는데, 덧칠과정에 숯가루를 접착시키기위한 방법도 고안했다. 송진으로 된 아교나 수용성 미디엄을 사용하게됐다. 이 접착용제의 사용으로 숯이 무엇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화면에 직접적으로 붙게 되어 스스로 의미체로 탄생했다. 숯 조각 하나하나를 붙이는 일은 엄청난 노동과 끈기를 요하는 작업이다. 특히 2000년에 나온 숯 조각 하나하나를 붙이는 ‘이수 뒤 푸' 시리즈는 노동 집약적이다. "바베큐용 숯의 절반을 쪼개어 그 절반을 캔버스 화면에 마치 모자이크를 붙이듯하는 이 작업은 오랜시간이 걸립니다." 작업을 하다보면 '숯 검정'이 되기 일쑤다. 단순하게 붙이기만 하는게 아니다. "저는 이 숯을 어떻게 붙이느냐를 계산합니다. 숯이 가지고 있는 특성, 나무가 가지고 있는 재질과 마지막으로 남은 탄소의 재질, 효과등을 생각해 모양에 따라 퍼즐을 맞추듯이 붙여나가지요. " 그는 작업을 하면서 "카오스를 정렬한다"고 했다. "큰 의미에서 보면 숯은 자연으로부터 왔고, 굉장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카오스적인 재질을 갖고 있다"면서 "이런 카오스적인 재질을 내 생각과 내 개념을 어떻게 잘 접목시키는가를 퍼즐처럼 맞추는 게 작업의 의미"라고 전했다. 숯은 상징적 의미가 강할 뿐 아니라 고유한 한국문화를 재발견하게 하는 재료다. 이 화백 작업에서의 숯은 일차적 질료외에 검정이라는 동양적 감성을 2차적 질료로 아우르고 있다. 그는 "모든 색을 포용한 검은 색에는 한 가지의 검은 빛깔이 아닌 백가지의 색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검정색,흑백의 작업이지만 '단색화가'라는 인식을 허문다. "숯은 사실 단색으로 보이지만 숯에는 수 많은 색깔이 있고 거기에는 색의 수 많은 다양성이 포함 되어있습니다. 숯이 불로 부터 왔다라는 그런 의미를 더 생각하면 모든 색을 흡수하고있는 것이 숯이고 또 숯 그 자체만으로도 검정톤의 수 많은 뉘앙스가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숯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숯으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숯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이것을 가지고 예술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블란서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예술은 현실과 이상을 엮는일'이라고 했는데 그말에 공감합니다." "화가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선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예술은 우리의 연약한 상상력을 북돋는 일'이기도 하지요.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예술이 무엇인지 알기위해서 어쩌면 내가 예술을 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면에서 이 화백은 "한국사람으로서 숯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양사람이 숯을 가지고 하는 작업과 제가 하는 작업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숯은 서양이 보는 단순히 어떤 물성의 세계를 가진게 아닙니다. 동양의 먹의 문화권은 동북아시아의 중국과 한국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수묵의 세계가 숯에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서구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현대 사회에서, 또한 도시문명 안에서, 동양인으로서 이 자연에 대한 물성을 나의 문화권과 연결 관계를 어떻게 맺을수 있을까라는 것이 내 작업의 화두입니다." 검은색의 근원 '숯'은 동양 문화요소에서 '이배 의 숯'이라는 새로운 조형언어로 치환됐다. '숯'은 영어로는 차콜(charcoal)로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china)와 좋다는 콜(coal)의 합성어로 알려져있다. 중국에서 숯을 약으로 먹는 것을 알고, 서양인이 복용해본후 몸이 좋아져서 나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유럽에서 '숯'은 이배의 '이수 뒤 푸'(Issu du Feu)이거나 '랜드 스케이프'(landscape)로 불린다. 이 배 화백이 지난 18일 부산 조현화랑에서 13년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숯을 재료로 한 2000년대 초기 회화중 대표작 10여점과 신작을 선보인다. 이 화백에게 숯은 물질로서 숯을 지나 회화적 수단인 동시에 그의 회화의 본질이자 귀결점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숯이 융화된 '검은 색'의 위용을 보여준다. 블랙홀같기도 한 검은색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어가게 한다. 우연히 발견한 재료지만, 작품은 우연에 의한 것은 없다. 많은 숙고를 거치고 오랫동안 데생을 통해 탐구한 결과물이다. '서예에 가까운 획, 곡선 혹은 부호들을 연상시키는 형태들은 오직 검은 색을 구현하기 위해서만, 검은 색에 육체를 부여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극도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형태, 놀라운 에네르기를 내포한 작업은 단순한 회화에서 벗어났다. 특히 그 자체로 항균·흡착·습도·정화 효능까지 스며 실용적이면서도 독창적인 현대미술의 참 맛을 전한다. 이 배 화백은 "'숯'작품을 단순히 기법적인 부분이나 하나의 특이한 재료로만 보지 말아달라"고 조심스런 당부를 전했다. "숯 작업은 우리 문화의 깊은 토양에서부터 비롯 된 것입니다. 1970년대에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 마샬 맥루한이 쓴 '미디어는 메세지다'라는 책을 대학시절에 읽은 적 있습니다. 그것은 '숯'이라는 하나의 재료가 곧 '문명권의 메세지'로서 의미화 시킬수 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제 작품을 보시는 분들에게 '숯 작품'이 우리 문화에 대한 근간을 환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시는 2017년 1월 8일까지 이어진다. [email protected] 2016/11/20
50년째 엄마등에 매달린 아이 백영수 화백 '창가의 모자','산동네의 모자', '들판의 모자', 아이는 엄마등에 꼭 붙어있다. 아이를 업어서일까. 엄마의 얼굴은 모두 가로로 된 계란형으로 기울어져 있다. "엄마는 사랑입니다. 아름다움이지요." 유난히 등에 꼭 매달려 엄마와 한 몸같은 그림, '창가의 모자' 앞에서 백영수 화백이 느릿느릿 말했다. "아이하고 엄마는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아이는 엄마 품을 생각하고 엄마는 아이를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 "아이가 50년째 엄마 목에 매달려 있는거에요" 백화백의 그림자가 된 부인 김명애 여사는 "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 같다"고 대신 말했다. 백화백이 두살때, 엄마는 남편을 잃었다. 오빠가 있는 일본으로 아이를 데리고 간 엄마의 나이는 고작 스물살도 안됐다. "그렇다보니 엄마 사랑을 잘 못받지 않았나 싶어요." 백화백이 유독 '모자상'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 부인은 "모성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고 넌지시 얘기했다. "이전에도 싸리문가에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있는 그림, 백일몽을 그렸었어요. 이후 1971년 딸을 낳고 달라진 것 같아요. 1976년부터 모성을 표현하고 싶어하더라고요." 고개를 왜 가로로 하고 있냐고 묻자 백화백은 "생각하는데 똑바로 있으면 이상하잖아"라고 했다. 부인은 "이 사람은 그림속 아이처럼 늘 몽상에 젖어 있고, 자기세계에 충실한 사람"이라며 남편을 힐끗 보고 웃었다. 50년째 '모자상'에 매달려 있는 그는 이제 엄마 등 대신 휠체어에 앉아 있다. 올해로 95세, "다른 사람은 다 죽었는데 나만 운이 좋아 살아있다"는 그는 1947년 결성된 '신사실파'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작가다. 백화백은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나 1940년 일본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 사이토요리 선생에게 유화를 배웠다. 1944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귀국, 목포고등여학교와 목포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다.1946년 25세에 조선대학교 총장으로부터 미술과 창설을 의뢰받는 등 남도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7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등과 함께 '새로운 사실을 표방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해방후 최초로 추상적 경향의 화풍을 추구했다. 1950년대 후반 격정적인 화풍을 지난 앵포르멜과는 달리 대체로 서정적인 추상의 세계로, 신사실파는 한국 추상회화 형성과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70년대 당시 화가들의 로망은 파리였다. 백화백도 경기 의정부 집을 남겨두고 1977년 파리로 날아가 '재불화가'로 30년간 살았다. 나라 인종 구분이 없는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담긴 '모자상'은 파리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블란서 요미우리 전속작가로 생활비 걱정없이 살았으니까요." 2011년, 34년만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백 화백이 귀국 비행기에서 연필로 그린 그림은 세월이 흘러도 아이같은 순수함이 넘친다. 여전히 엄마등에 업혀있는 아이, 입가에 수염이 자랐다. 백화백은 수염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이게 나야"라고 했다. 그림속 인물은 얼굴을 가로로 (모로)돌린채 아련한 애수가 흐른다. 2012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화업 70주년 개인전을 연후 4년만에 개인전을 연다. 구순이었던 그때와 달리 화백은 몸이 부쩍 쇠약해졌다. 귀도 어두워졌고, 입도 어눌해져, 혼자서 걷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리는건 잊지 않았다. 종이만 있으면 색연필로, 연필로 그린 그림은 더 단순해지고 순해졌다. 부인은 백순을 바라보는 아니 엄마등에 매달린 아이가 내려온 것처럼 쪼그려 앉아 천진난만한 세계에 빠졌다고 했다. 지난해 목욕탕에서 넘어진후 거동이 불편해졌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앉아있는 곳 어디서나 꾹꾹 눌러 그림을 그린다. 항상 주머니만한 빈노트와 색연필을 꺼내 천천히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린다. 그리는게 지겹다싶으면 종이상자를 펴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른걸 만들어냈다. 색감이 고운 작은 종이박스는 그의 장난감이 됐다. 그래서 빨간 말같은 콜라주작업도 탄생했다. 하지만 흰 종이에 여전히 그려지는 건, 엄마와 아이가 붙어있는 그림이다. 그림을 본 윤진섭 평론가는 "한마디로 놀이의 세계에 푹 빠져 이해를 초월한 탈속의 세계에 도달 한 듯 하다"고 전했다. "빨강 파랑 노랑 녹색등 몇가지 색펜으로 사각형 가장자리를 뺑 둘러 점을 찍은 작품은 여백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무심의 경지는 아마 그처럼 인생 경론의 극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면 얻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 무심의 경지야 말로 백영수가 70여년의 화업을 통해 체득한 달관과 체념의 결과일 것이다." "백화백의 드로잉전을 했으면 좋겠어요." 부인의 바람이 아트사이드 이동재 사장에 전해졌다. 이동재 사장은 "올 초 백화백님과 그림을 보는 순간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소외된 작가 발굴과 지원은 화랑의 역할"이라고 했다. 단색화와 팝아트로 쏠림현상이 심한 화랑가다. 특히 중소상업화랑에서 잊혀지고 있는 근현대작가를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이례적이다. "지난해에 사인을 잊어버렸어요. 한글로 쓰는 백.영.수를 잃어버린 듯해요. 이를 악물고선 선 하나를 긋는데 부들부들 떨면서 그리더라고요. 그런데 전람회를 한다니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 올초까지 그린 드로잉, 콜라주를 액자에 담아 40여점을 걸었다. 20일 전시장에서 만난 백영수 화백과 김명애 여사는 아이가 된 듯했다. 휠체어에 앉아 무심한 표정의 백화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너무 고맙고, 기분이 좋아요. 화가가 좋은 전람회하는 것 만큼 좋은 일이 어디있습니까?" 또 느리면서도 또박또박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더 사랑해주세요." 전시는 23일부터 10월 23일까지 열린다. [email protected] 2016/09/21
'회화란 무엇인가' 신성희의 '마대 페인팅' '마대'(麻袋)도 몰랐을 것이다. '쌀자루'거나 '흙자루'같은 비루한 처지였지만, 어느새인가 예술품 재료로 등극해 일명 '금수저'가 됐다. 요즘엔 보기 힘든 '희귀한 자루'기도 하다. 단색화 선두로 팔순의 하종현 화백을 봄날을 맞게 한 것은 '마대 페인팅'이다. 누런 마대에 물감을 밀어넣어 배어나온 '접합'시리즈. 1974년, 가난 때문에 택한 재료였지만 '마대'는 하종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마대의 보은'이 빛난 건 40년후다. 2014년부터 하종현의 '마대 페인팅'은 '한국의 단색화'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였다. '마대 자루'가 화가를 만나 '신분 세탁'이 된 셈이다. 상남자처럼 굵고 거친 삼실로 짠 '마대'의 생김새 덕분이었다. 그런데, 하종현 화백 말고도 '마대'에 반한 작가가 또 있었다. 하 화백이 한창 마대 작업을 하던 그 시기인 1970년대 중반, 신성희 화백(1948~2009)도 캔버스가 아닌 올이 성근 마대위에 마대를 그리며 본격적인 마대 작업에 주력했다고 한다. 채색 캔버스를 잘라 엮는 일명 '누아주'(nouage)작가로 유명한 신성희의 다른 면모다. 캔버스에 색점, 색선, 얼룩 등을 그리고, 그 바탕을 잘라 그 띠로 엮고 묶어 그물망을 만드는 누아주(프랑스 어로 ‘맺기’‘잇기’라는 뜻) 시리즈는 신성희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적인 입체구조를 만들어내는 '누아주'는 '회화적 조각' 또는 '조각적인 회화'로 평면 회화에 대한 물음과 도전, 회화를 넘어서 회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화를 넘어선 '누아주'. 그 시작은 성경구절과 같다. '시작은 미약 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1970년대 흔하게 보였던 '마대'였다. 신성희 화백이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주력했던 '마대 시리즈'가 첫 공개됐다.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이 '표면과 이면'을 타이틀로 그동안 공개 된 적이 없었던 캔버스 뒷면을 그린 작품 등 '마대 페인팅' 3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파리로 건너간 80년부터 82년까지 '마대 위에 캔버스 뒷면'을 그린 작품은 최초 공개다. 거친 마대 캔버스와 그 위에 쌓아 올린 물감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극사실모노크롬 이다. 미니멀리즘을 대변하는 신성희의 초기작 중에 중요한 '마대 시리즈'는 실물의 마대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됨으로써 표면적인 회화형식에 대한 신성희의 독창적인 해석을 엿볼 수 있다. 신성희의 첫 마대작업은 1974년경으로 파악된다. 당시는 국제적으로는 각종 포스트미니멀리즘이 유행하고 극사실주의가 대두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미니멀리즘과 이우환과모노하의 영향으로 단색화가 주도해가던 때다. 강태희 미술사가에 따르면 "특히 근대적인 미술 전통을 타기 하고 가공하지 않은 물질을 소재로 특정한 상황과 관계를 검증한 모노하의 미학과 논리는 이우환의 존재를 매개로 우리나라 미술계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던 시기"다. 결과적으로 '캔버스의 물성 자체를 주목'하는게 당시 트렌드였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물질이 화면에 부가되거나 결합되는 양상이 생기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마대의 앞 뒤 면을 활용하여 모노크롬과 물성을 결합시킨 하종현의 선도적인 작업은 여러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인 자극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신성희가 캔버스 대신 마대를 택한 것은 당시 분위기상 자연스런 일이었지만, 일차적으로는 '강렬한 물성과 공기가 통하는 성긴 조직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신성희는 하종현과는 다른 방법을 취했다. 하종현이 마대를 바탕으로 모노크롬 화면을 그리는 대신 신성희는 마대 자루에서 나온 '올'을 극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 위에 물감을 쌓았다. 페인트의 물성으로 화면은 상당한 입체감과 부피감을 지니게 되면서 '새로운 종류의 단색조 화면'을 탄생시켰다. 처음 한동안은 얇은 캔버스에 마대의 느낌이 나는 극사실모노크롬 작업들을 했고, 마대 위에 그린 마대의 올이 두드러지는 본격적인 마대작업은 제목이 '회화'로 바뀌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신성희의 마대 페인팅은 진짜 올인지, 그림인지 헛갈리는 작품이다. 첫 마대작업은 특별히 거칠고 너플너플한 마대의 올이 강조되고 하단부는 물감이 칠해지지 않은 채 마대의 결이 노출되어 있다. 올을 그리기보다는 물감이 올과 함께 뭉쳐있는 듯한 느낌이다. '확장 Expansion' 은 마대 페인팅의 초기 작품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한 동안은 얇은 캔버스에 마대의 한올 한올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업을 했다. 작품은 마대가 풀려나간 흔적보다 마대에서 풀려나온 실이 더 길게 확장되어 있다. 신성희는 '확장'이후 본격적으로 마대 작업에 몰입했다. 이후 마대 작업의 작품 제목을 '회화'라고 붙였다. 마대 특유의 재질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반복적인 붓질을 가했던 정교함이 특징이다. 실제 마대 위에 그려낸 마대의 이미지와 부분적으로 비워둔 여백, 음영 또는 직선의 이미지를 대비시킴으로써 실상과 허상을 교차시키고 '회화는 결국 착각, 환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강태희 미술사가는 "평면 캔버스에 그려진 자연스러운 3차원의 이미지는 일루전을 전제하기에 모더니즘 미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반성의 대상이었고 극사실주의 역시 이런 추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면서 "마대 위에 마대를 재현하는 것은 실재와 허상, 대상과 재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회화의 영역과 그 문법을 점검하는 근본적인 일에 속한다"고 했다. "당시 착시에 대한 관심이 대두된 것은 일본과 미국에서 극사실주의 미술이 등장한 것과 시기적으로 비슷했는데 대내외적인 이런 경향이 신성희로 하여금 평면과 입체 사이에 개입하는 일루전이나 착시와 인식의 관계에 깊이 천착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 1971년 대학 졸업 후 10여 년을 국내 화단에서 활동한 신성희는 1980년 프랑스로 건너가 마대 작업의 장중한 모노크롬을 버리고 채색한 캔버스 천을 좁게 잘라 캔버스에 박아서 붙이거나 또 캔버스 틀에 엮는 작업으로 전진해갔다. “나는 화폭에 무엇을 갖다놓는 문제에 앞서 장소의 문제를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갖다놓고 싶은 것은 대체로 3차원적인 형상인데 비해 놓여질 곳은 캔버스나 종이 같은 2차원적 평면이기 때문이며 이 두개의 상반된 개념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1983년, 신성희 작가노트 중에서) 신성희의 '마대 페인팅'은 '단색화 같다', '단색화다'는 트렌드를 넘어섰다. 회화가 가진 화면의 평면성 물질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끊임없이 실험하고 탐구 했던 1970년대의 '마대 작업'은 21세기에도 '회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email protected] 2016/08/23
데미언 허스트 조수였던 '대작' 작가의 반란 폭염때문일까. 커다란 가슴을 드러낸 홀딱 벗은 여인들이 장악한 호러물같은 그림이 다 팔려나갔다. 한국에 처음 온 영국 작가 데일 루이스(35)의 그림이 시원하게 홈런을 날렸다. 지난달 27일 독일에서 온 초이앤라거 갤러리가 서울 첫 개관전으로 선보인 작가다. 전시 개막하기도 전에 8점이 '솔드아웃'됐다. 작은 그림도 아니다. 가로 4m 세로 2m로 '함부로 애틋하게' 소장할 수 없는 크기다. 여체의 심란한 형상들과 기괴한 자세로 뒤엉켜 있는 사람들의 포즈와 장면들로 딱 보면 헉하는 그림이어서 더 놀랍다. 독일에 이어 서울에 첫 분점을 낸 초이앤라거 갤러리도 깜짝 놀랐다. 파리와 영국 독일을 오가는 이 갤러리 대표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팔기보다 "이런 그림도 있다 보여주자"고 선택한 작가였다. 전조 증상은 있었다. 지난 3월 부산에서 연 '아트부산'에서 였다. 거대한 그림을 펼치던 중이었다. 꽃그림과 단색화 등 '보기 좋은 그림들'속에서 루이스의 그림은 좀 민망하기까지 했다. 빨간 입술색이 피흘리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맨몸에 괴상한 자세로 춤추는 듯한 그림을 벽에 거는 순간이었다. "이 그림 파는 거예요?" "아~. 네." 딱 2점만 가져온 그림, 다시 안에 있는 그림을 꺼내야 하나 생각이 스칠때, 손님이 다시 물었다. "또 다른 그림 있어요?" 그렇게 '보여주자'고 가져온 그림을 순식간에 팔았고, 서울 첫 개관전에 데일 루이스를 자신있게 들이댄 것. 단색화에 꽂혀있는 한국시장에서 모험을 건 배짱이었다. '호러물'같은 그림이지만, 알고보면 달라진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풀꽃' 싯귀처럼 이 그림이 그렇다. 개관전에 선보인 대표작 ‘HOPE STREET’를 보자. 중앙에 있는 거대한 여인이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공격을 받고 있다. 여인의 얼굴에 길다란 빨간혀를 내밀고 핣는 남자의 손은 이미 여인의 가슴에 올라가 있다. 늑대같은 얼굴을 한 형상은 여인의 머리카락를 잡아채고 있고, 주변에는 모든것이 발기된 듯 솟아있다. 전체적으로 신산스럽고 섬뜩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그림, 뼈대있다. 피렌체의 궁정화가 브론지노가 그린 매너리즘의 대표작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Venus, Cupid, Folly and Time)’에서 비롯됐다. 우아하고 고혹한 자태를 뽐내는 원작의 비너스가 '불길해보이는 여인'으로 변신했다. 폭력적이고 성(性)적인 현시대를 그로데스크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중세 시대 그림에서 따온 작품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백인, 남성,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재해석됐다. 사회의 냉혹함과 악의적 요소들을 화면에 드러내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블랙코미디스럽다. 아크릴, 오일, 오일 스프레이를 이용한 대형 회화에는 현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선과 악, 혼란과 무질서 부조리 등을 거침없는 붓질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미 세계적인 컬렉터인 사치컬렉션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작가는 영국에서 유망주로 부상중이다. 작가 이력이 흥미롭다. 세계적인 스타작가 데미언 허스트의 '조수'였다고 한다. 허스트는 죽음과 부패를 표현한 포름알데히드 설치작품으로 터너상을 수상한후 영국 현대미술의 부활을 이끈 작가다. 2008년 10월 런던 소더비에서 열린 그의 신작 경매에서 223점의 작품 중 218점이 낙찰돼 2280억원이 넘는 수익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영국 미술시장을 발칵 뒤집고, 세계 미술시장을 점령한 허스트는 알고보면 '대작 작가'다. 그는 장인정신을 거부한다. '누가 만드느냐' 보다 '어떤 컨셉으로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한 작가다. 데일 루이스는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을 '대작(代作)'하다 그만뒀다. 6개월간 일하면서 차가운 공장에 와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허스트는 자기 작품을 전혀 손도 대지 않았다. 작품이 완성되면 와서 서명만 했을 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데일 루이스는 "나의 작품은 나만의 개인적인 창조물이어야 했고 나 만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30명의 조수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는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이것이 나의 창작력을 거의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다. 남의 그림을 그려주던 '대작'의 후유증은 컸다. 그 경험은 회화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스페인의 발렌시아에 가서 1년간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붓을 잡은 건 런던으로 돌아와 라킴 쇼 (Raqib Shaw)의 스튜디오에서 다시 조수 일을 시작하면서였다. 그곳은 허스트의 스튜디오와는 딴판이었다. 4년 반동안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데일 루이스는 "그곳에서 나만의 스타일과 목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미술계의 비지니스 측면을 보면서 현재 활동할 수 있는 준비 작업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했다. '대작'(代作)하다가 '내 작품은 내 손으로 그리겠다'며 시작된 '대작'(大作)은 그래서 힘이 넘친다. 즉흥적이고 직접적이다. 순발력있게 리듬감을 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작가도 한국에서 자신의 그림이 다 팔렸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하다. 그림 8점은 영국에서 돌돌 말아와, 한국에서 '왁구'했다. 그림을 바닥에 펼쳐놓고 캔버스 틀에 맞춘 작업도 직접 했다. 이쯤되면 영국에서 온 '대작'작가의 반란이다. '대작'과 '위작(僞作) 논란으로 숨죽인 국내 미술시장에선 이례적인 현상이다. 몇몇 블루칩 작가에게만 치우쳐 있던 미술 소비 풍조에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걸까. 아트마켓의 글로벌화에 발맞춰 국내 컬렉터 기호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걸까. 초이앤라거갤러리 최선희 대표는 솔드아웃된 작품앞에서 "일종의 본능적인 느낌아니냐"고 했다. "한국이나 외국 컬렉터들이나 다양한 작품을 많이 봐온 컬렉터들은 그림을 알아보는 힘이 있다"는 것. 그림 8점이 팔렸다고 웬 호들갑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일에서 온 신생갤러리가 영국 신예작가를 데려와 '기괴한 그림'을 다 팔았다는 건 한국화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화랑은 유망한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게 가장 기본적인 순기능이다. 하지만 수년전부터 경매시장의 활기로 화랑은 생기를 잃은지 오래다. 경매장이 컬렉터와 작품을 끌고 갔다고 한탄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위작'으로 술렁여 국내 화랑가는 개점휴업상태다. 인사동 한 화랑주는 화랑 운영도 어려워 월마다 '돌려막기'로 연명하고 있다고 할정도다. 단색화 열풍으로 다른 그림은 팔리지도 않는 상황이다. 작가 발굴은 언강생심이라는게 화랑들의 목소리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신생갤러리 초이앤라거를 보면 희망도 보인다. 국내 미술시장도 어느덧 국제적 트렌드에 민감한 시장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데일 루이스' 현상이 새로운 활기를 찾는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점차 다양해져 가는 수요자(컬렉터)기호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선, 화랑이 얼마나 부지런히 작가발굴에 나서고, 작가의 잠재된 비전을 제시하는냐에 달렸다. 손가락만 빨고 있다간 외국에서 온 화랑, 외국 작가에 우리 작가 자리마저 빼앗길것 같은 우려다. 잘 팔린 단색화도 잊고, 잘나가는 경매장도 잊고 위작의 파장도 잊고, 화랑은 심기일전할때다. 작가가 살아야 화랑도 산다. 팔리는 그림만 팔아서는 승산없다. 화랑 운영,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영화 대사로만 따라할 말이 아니다. [email protected] 2016/08/02
K옥션 '54억' 최고가 낙찰, 누가 가장 이득일까 인생도 '타이밍', 경매도 '타이밍'이다. 54억. 국내 미술품 최고가를 낙찰시킨 K옥션 이상규 대표(55)는 의외로 덤덤했다. 미술시장에서 '조용한 성품'으로 알려진 이 대표는 '일희일비'않는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원칙주의자다. 은행원 출신(신한·하나)이다. 2005년 당시 서울옥션 김순응대표의 러브콜로 미술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후 2012년 K옥션 대표가 됐다. 6월 28일 경신한 '54억'은 서울옥션의 후발주자인 만년 2위 K옥션의 설움을 떨쳤다. 2005년 창립후 10년만에 맛본 쾌거다. 국내 미술품경매사는 서울옥션과 K옥션 양대 경매사 체제로 2곳의 독과점 시장이다. 엎치락 뒤치락 하지만, 경매사의 원조이자 코스닥 상장사인 서울옥션을 쉽게 제칠수 없는 상대다. 이상규 대표가 덤덤한 이유는 '2등의 여유'이기도 하지만 길게 내다 본 믿음때문이다. 장사의 최대 전략은 신용과 의리라고 본다. 앞서 달리는 서울옥션 덕분이기도 하다. 지난 4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의 작품이 48억6750만원에 팔리면서 위기는 기회가 됐다. 양대 경매사의 질주로 좋은 작품을 가진 개인 소장가는 아쉬울게 없다. 다만 타이밍이 문제. 서울옥션이 보유한 최고 낙찰가 작품보다 더 큰 대작을 소유한 사람에 '설득의 미학'이 작용했다. 264cm×208cm크기에 역대 보기드문 푸른 전면 점화. K옥션 이상규 대표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K옥션에 들어온 작품. 놓치면 안된다. 추정가 45억짜리에 걸맞게 호가의 위상도 필요했다. '1억으로 올라가냐, 5000만원씩 올라가냐'고민했다. 위작혼란과 불황인 미술시장 상황으로 1억씩 오르기는 눈총을 받을 것 같았다. 5000만원씩 올라가자. 문제가 생겼다. 한번도 말해본적 없는 금액. 스페셜리스트(경매사)는 발음이 꼬였다.45억5000만원, 오천만원씩 올라갑니다. 50억, 50억5000만원. K옥션 손이천 경매사는 "50억이라는 숫자를 해보지 않아 입에서도 익숙치 않았고, 오천만원씩 올리는 숫자도 발음이 어색해 맹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28일 경매당일, 42번째 김환기'무제 27-VII-72 #228'가 올라왔을때, '감'이 왔다고 했다. '이 작품 팔립니다' 말은 안했지만, 이미 경매장에서 누군가의 에너지가 강하게 나왔다는 것. 45억으로 시작, 45억5000만원, 50억, 5000만원씩 호가한 작품은 순식간에 50억이 됐고, 경매장은 숨을 죽였다. '스타와 주인은 마지막에 온다'고 했던가. 3~4번의 경합이 이어지자 현장에서 누군가 여유있게 패드를 들었다. 순식간에 54억에 멈춘 상황. 경매사는 그와 눈을 떼지 못했고, 그도 패드를 내리지 않았다. 결국 그 현장 응찰자에게 낙찰됐고, 망치를 탕탕 내리쳤다. "경매의 묘미죠. 아무도 예측못합니다. 늘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이죠" 이상규 대표는 "이 작품이 낙찰될 걸로 자신했지만, 이렇게 가슴 졸이며 지켜봤던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54억. 낙찰로 김환기의 작품도 최고가를 경신했지만, K옥션도 경매사의 역사를 다시썼다. 국내 최고 낙찰가 보유 경매사가 됐기 때문. 양대 경매사의 최고가 싸움은 섭외부터 시작된다. 얼마나 좋은 작품을 먼저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추정가를 높게 부른다고, 희귀작품이라고 다 팔리는 건 아니다. 이번에 같이 출품된 채색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세상에 첫 공개된 희귀 보물급인데도 유찰됐다. 그래서 '때(時)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최고 낙찰가 기록을 보유한 회사는 얼마나 이득이 있을까. 경매 출품작은 팔고 사는 사람이 10%씩 수수료를 내야한다. 옥션사는 수수료 장사다. 54억이니까 일반적으로 5억4000만원씩 11억8000만원을 버는 셈이지만, 이렇게 정확할순 없다. 이상규 대표에 따르면, '파는 사람'이 최고다. 팔려고 내놓기 까지 '설득과 기다림의 미학'은 돈으로 환산된다. 아쉬울게 없는데 작품을 내놓은 소장가에게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 일종의 서비스다. 결국 54억의 최종 승자는 '판 사람'이다. 경매장에서 패드를 든 사람은 당연히 '심부름꾼'이다. 배팅은 이미 계산된 전략이고, 자신있게 패드를 든 건 '아바타'이기 가능하다. 패드를 든 사람은 안다고 한다. 패드의 '미친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음을. '진짜 사는' 사람은 그래서 경매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미술시장을 흔든 54억짜리 작품. 낙찰금액은 지불됐을까?. K옥션은 답대신 이렇게 말했다. "수십억에 달하는 작품값은 단박에 입금이 안됩니다. 아, 할부는 아닙니다. 약 3주간 기다립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바로 현금결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K옥션 상반기(4회) 경매실적은 지난해보다 따뜻하다. 이번 54억 최고 낙찰로 363억9278만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상반기(4회)매출 실적은 297억3391만원이었다. [email protected] 2016/07/04
'위작시비' 이우환 작품값은 떨어졌을까? "13점은 틀림없는 내 작품". 이우환화백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떨떠름'하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위작'이라고 결론냈던 국과수와 민간 감정위원들만 황당한게 아니다. 이를 바라보는 미술인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웬지 석연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 인천공항에서부터의 행보도 도마에 올랐다. '대한민국이 나한테 왜 이러냐"며 버럭버럭 화를 내는 화백의 모습에 '실망했다'고 했다. '명상적이고 고급스러운' 작품과 달리 거친 말과 태도에 깜짝 놀랐다는 사람들이 많다. '위작논란'속에 세계적인 화가이자, 원로 화백의 여유감을 기대하는건 무리라는 입장도 있다. 작가만 보면 끝날줄 알았던 위작의혹은 이제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진행중이다. '13점은 내 작품'은 이 화백의 어떤 작품보다 '강력한 퍼포먼스'로 남았다. ◇“아무 일도 안했는데 언론이 논란을 키웠다”? 이 화백은 '위작 논란'을 키운건 언론이라고 비난했지만 그 논란을 자초했다. 2년전부터다. 미술시장에서 '위작' 논란이 솔솔 나올때 화백은 "내 고유의 호흡으로 그리기에 모방하기 어렵다”며 자신했고, 기자도 경찰도 만나지도 않았다. '위작의혹'을 언론이나 경찰에 밝혀달라는 대신, 자신이 직접나서 '진위 감정서'를 써주며 그림을 유통시켰다. 급기야 '위조된 감정서'까지 붙은 작품이 K옥션 경매에서 5억원대에 낙찰되면서 미술시장에서만 떠돌던 '위작의혹'은 '국민 사건'으로 확대됐다. 3일간 진행된 화백이 직접한 '감정'도 보자. 첫 날 하루 '판단이 안선다'며 보류했다가, 하루 쉬고 다음날(29일)다시와 '13점은 모두 내 작품'이라고 했다. 그 다음날(30일) 이례적으로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딱 보면 안다, 작가들은 1분만 봐도 내건지 아닌지 안다'며 '내 말을 믿어달라'고 했다. 음모론도 피웠다. 화가는 "경찰 1명이 살그머니 13점중 4점은 위작이라고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 4점은 위작범이 그렸다는 그림이다. 하지만 화백은 그 그림도 '분명, 틀림없는 내 그림'이라고 했다. 화백은 "내 작품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럴수 있냐"며 마치 경찰이 사건을 조작하려고 회유한 것 같은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당연히 경찰은 발끈했다. 뒷통수를 맞았다는 분위기다. 경찰에 따르면 화백은 감정 과정에서 확대경을 쓰지 않았으며 작품을 살핀 시간도 10초 내외에 그쳤다. 2분의 단독 면담은 있었지만 회유 사실은 없었다고 강력 부인했다. 때문에 "위작으로 지목받은 13점은 '저만의 호흡, 리듬과 색채로 만든 분명한 저의 그림'"이라는 주장도 힘을 못낸다. 서성록 한국미술품평가원 감정위원장은 한 방송에 나와 "현재로선 위작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뒀다. 그는 "이 13점의 작품이 진품이라면, 이것이 어디에 출품됐고, 누구한테 넘어갔고, 작품 제작 목록을 작가 측에서 제공해야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경찰의 의뢰로 감정에 참여했던 최명윤(69)국제미술과학연구소장은 “진품이라는 이 화백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2012년부터 이우환 그림 가짜가 유통된다는 심증을 갖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면서 "한국과 일본에 5개 정도의 위조조직이 있다"고 밝혔다. 이 말을 뒷 받침하는 건 현재 위작범으로 붙잡힌 현모씨는 지난달 일본에서 잡혀왔다는 사실이다. 미술시장관계자들은 화백이 하루 쉬고 다시 한 감정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다. 모 화랑과 입을 맞춘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수억대를 지불한 컬렉터들의 안위와 작품값을 보호하려는 의도라는 소리가 더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작품값은 어떨까. 한동안 국내 미술품 양대경매사의 표지그림까지 장식하던 이우환 그림은 지난해부터 앞표지에서 자취를 감췄다. 단색화 열풍으로 '동기 화백'들(박서보 하종현 정상화 등) 작품값이 치솟을때도, '이우환'이름은 보도자료에도 잘 등장하지 않았다. 시장에서 '위작 논란중'인만큼 경매사들의 신중 마케팅이었지만, 경매장에서는 이우환의 '조용한 흥행'은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우환 작가 최고가는 2012년 홍콩 경매에서 기록된 1977년 작 '점'으로 21억3000만원이다. 이우환의 작품값은 떨어졌을까?. 따져보니, 희한하게도 더 올랐다. 뉴시스가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함께 경매에 나온 이화백의 출품작수와 낙찰수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이우환 작품은 위작시비에 휘말린 시점에서도 여전히 강세를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작시비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2015년에는 한 해 낙찰총액이 117억5000만원으로, 2014년 86억원에 비해 급상승한 수치다. 이는 과거 가장 호황기였다는 2006~2008년의 낙찰총액(약 337억) 연평균에 육박하는 것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예술도 '메이킹'이다. 미술시장도 '노이즈 마케팅'이 유효함을 증명한 셈이다. 매도와 매수가 활발하다. 2014년부터 2016년 올 상반기까지 평균 80% 이상의 낙찰률을 기록했다. 2014년 105점이 출품 74점이 팔렸고, 위작시비가 정점에 올랐던 2015년에 140점이 출품되어 124점이 팔려 낙찰률 88.57%를 기록했다. 국내 미술시장이 가장 활황이었던 2006년 2007년때보다 높은 낙찰률이다. 2006년에 55점이 나와 40점(72%), 2007년 157점중 120점(76%)이 낙찰됐다. 2007년은 물감만 묻으면 팔린다는 국내 미술시장 호황기였다. 올해 상반기에도 낙찰총액이 약 33억원으로 낙찰률은 90%에 육박한다. 반면,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아직 전체를 따지기는 힘들지만 상반기 이우환 출품작은 39점으로 매우 저조한 편"이라며 "이는 위작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의 후폭풍이 크게 작용한 것같다"고 풀이했다. 하지만 39점중 34점이 낙찰됐다는 것은 프로비너스(작품출처)만 확실하다면 여전히 매세가 있다는 점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위작의혹'으로 사건의 추이에 따라 관망세가 이뤄지고 있음도 보여준다. 실제로 출품작품수와 낙찰수만을 비교해보면, 가장 호황기인 2007년(157-120-76%)과 2015년(140-124-89%)이 큰 차이가 없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투명성과 신뢰도가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 지 짐작되며, 이번 위작시비의 향방이 시장에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 요소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김영석 이사장은 “이우환 작품의 평균 호당가격을 살펴보면 작년 기준 1000만원이 웃돈다. 이 역시 가장 호황기였던 2006~2008년의 호당 평균가(1129만원)에 어느 정도 근접하고 있다”며 “오히려 불안정한 틈을 타고 일부 전문 컬렉터들은 확실한 출처만을 골라 좋은 조건으로 이우환 작품을 수집하려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또한 최근 몇 년간 국제무대에서 큰 활약을 보인 시점과도 맞물려 있어, 이우환 화백 개인의 작가적 역량이 국내 경기변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설명이다. 유명 작가에게 위작 논란은 숙명이다. '국민화가' 이중섭,박수근도 시달렸다. 천졍자는 25년째 위작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비싼 작품값'때문이다. 명품도 '짝퉁'때문에 골치다. 수천만원 에르메스백은 수백만원짜리 짝퉁백이 있다. '그 돈 주고 그런 가방을 왜 사냐'고 하지만,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그게 진품이 아니라는 건 자신들은 안다. 제대로 된 진품은 제값을 주고 사도 아깝지 않다고 한다. 컬렉터들도 화랑주도 안다. 진품은 절대 싸게 팔지도, 싸다고 사지도 않는다. '똑같아 보이고', '좋아보이는' 위세로 허세를 감춰도 양심은 속일수 없다. '13점은 틀림없는 내 작품'이라며 '묻지마 진품'을 외친 이우환 화백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앞으로 작업 하면 얼마나 하겠냐. 나는 답답하고 고통스러워 죽겠다"고 했다. "국제적으로도 작품거래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술시장에 떠도는 말이있다. '진위'감정만 하면 감정나고, 이름때문에 '우환'이 생겼다고. 그래서 정부에게 화살을 돌린다. 단색화 작가들처럼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에서 큰 호평을 받는 작가의 경우 작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대의적인 차원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원로작가나 작고작가의 경우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 작품량이 적지 않다. 최소 1000여 점에서 1만 여점도 넘을 수 있다. 이번 이우환 화백의 경우처럼 위작시비나 객관적인 재평가 과정을 위해서라도 관련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채널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이다. [email protected] 2016/07/02
'한강의 기쁨' 잡은 조영남의 무염치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낭보가 터진 날, 조영남 '대작(代作)' 논란은 씁쓸하다. 세계 권위의 맨부커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대작(大作)'의 영광이 '대작'에 묻혔다. 문단의 기쁨을 미술이 휘저어놓은 셈이 됐다. 이는 '염치의 문제'다. 미술계는 진중권 교수가 앤디워홀을 예를 들며 개념미술이나 미술사적으로의 접근은 과분하다는 반응이다. 진 교수가 "앤디 워홀은 '나는 그림 같은 것을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 것처럼 워홀은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는다"고 당당히 밝혔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조영남의 작품을 구입했었다는 한 컬렉터는 "그가 10만원주고 그려온 그림"이라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A씨가 8년간 작품의 90%를 그렸다"는 폭로가 어쩌면 핵심이다. 조영남은 감췄다. 10만원을 주고 그리면서, 자신이 혼자 그린 것처럼 하고 판매를 한 것이 문제다. 네티즌이나 미술계 반응이 싸늘한 이유다. 조영남이 “화가들은 조수를 다 쓴다. 오리지널은 내가 그린 것으로 내가 갖고 있고 그걸 찍어 보내 주면 똑같이 그려서 다시 보내 주는 게 조수”라고 해명했지만, 그는 전시를 열때나, 인터뷰에서도 조수와 함께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적이 없다. 문제가 터지자 "무명 화가 A씨에게 세밀하고 디테일한 작업을 요구한 것은 맞지만, 대부분 A씨가 그렸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만 강조하고 있다. 미술시장에서 유명 작가들이 조수를 쓰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다. 공급과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현대미술의 흐름'이다. 차별화된 작품, 그 작가만의 창조된 작업의 한 과정으로도 본다. 노동력만을 제공하고 합당한 대가를 제공하며, 수십명의 조수를 두고 있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는다. 어찌보면 혼자만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닌 '일자리, 고용 창출'도 하고 있는 셈이다. '미술계에서 관행'이라고 하지만 조영남의 경우는 다르다. 방송에 나와 시시콜콜 사생활을 드러내며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 조수 자랑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노래로 따지고 보면 '립싱크'다. 가수가 리사이틀을 하는데, 똑같이 생긴 사람에게 10만원을 주고 몰래 무대에 서게 한 것과 같은 모양새다. 조영남은 스스로 가수 겸 화가라며 '화수'라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화가는 아니다'는게 화상, 작가들의 생각이다. 반면 조영남의 '화투그림'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조영남표' 작품이다. 별볼일 없는 일상 용품을 화폭에 올려놓는 순간, 미술작품이 됐다. '레디메이드(ready-made)' 미술의 창시자 마르쉐 뒤샹(1887~1978)도 박수칠만한 작품이다. 그래서 '콘셉트 있는 작품'이라는 두둔도 있다. 뒤샹은 '회화는 망했다'며 변기를 전시장에 갖다놓고 오직 사인 하나만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바꿨다. 복제의 복제, 기성품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놓은 이 변기는 현대 자본주의, 대량 생산 시대, 화가의 손을 해방시킨 장본인이다. 개념미술의 탄생이다. 조영남은 방송에 '화투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자주 노출시켰다. 다시 말해, 조영남 대작 논란은 '염치의 문제'다. 조영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그린 것 처럼 하고 그림을 팔았다. 매니저 외에는 그 누구도 10만원을 주고 그려온 그림이라는 걸 몰랐다. "하청을 줘 내가 손보고 팔았다"고 그 과정을 표현했다면,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조영남을 잘 안다는 한 전시기획자는 "대작이 법적으로 문제없지만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했다. '잘했다, 잘못했다' 개념이 아니라 "장르(가수화가)를 넘나들면서 직접 못 그리면 그리지를 말아야지"라고 지적했다. '화가'와 '연예인 화가'는 이마트와 화랑의 차이와 비슷하다. 인테리어 작품은 이마트에서 살수 있다. 현재 완성되어 있는 '상품'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화랑, 미술관에서 작품 구입은 그 작가의 미래의 비전과 가치까지 사는 것이다. 작가들은 '예술에 혼을 바친다'. 10년, 20년 무명을 견디고, 목숨걸고 작업을 한다. '연예인 화가'들은 유명세만으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작가들에게 상실감을 제공했다. '수백만~수천만원짜리 작품이 '솔드아웃'됐다고 기사로 도배되며 진짜 화가들의 기를 꺾기도 했다. 이번 사태는 가수겸 화가의 자업자득이다. 몰래 '대작'한 그림을 두고 '미술계 관행이냐 사기냐'는 논쟁의 가치도 없다. 돈 문제, 감정 문제가 있다면 법에서 해결할 문제다. [email protected] 2016/05/17
1623억 불렀던 그 청년, 신홍규 "뉴욕서 한국작가 발굴 보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스물일곱살 청년은 거침없다. 세계미술시장 한복판 뉴욕에서 '젊은 갤러리스트'이자, 아트바젤, 아모리쇼 등 세계 유명아트페어에서 VVIP로 대접받는다. "불과 3년만에 모든 스토리가 다 써진셈이죠" 2013년 뉴욕 맨해튼에서 3개의 신갤러리(shin-gallery.com)를 운영하고 있는 신홍규 대표다. 지난달 31일 서울에서 만난 그는 "3일전에 생일이 지나 미국나이로 26세가 됐다"고 했다. 소년같은 앳된 모습이 보였다. 최근 아트바젤홍콩을 관람하고, 한국을 방문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거나, 대학원에 다니거나, 취업에 성공한 신입사원정도쯤 되는 나이다. 그의 말처럼 '3년만에 써진 이야기'. 어떻게 미국에서 유명해지고, 미술시장에서 대접받는지, 일단 그 배경을 먼저 소개한다. (그는 이 이야기를 하지않았다. 자신의 '자서전에 쓰겠다'며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선 알려주지는 않았다.) '신홍규'라는 이름 석자가 떠오른건 2015년 11월 9일이다. 이날 한화로 1972억원에 팔려 세계 미술품경매 최고 낙찰가 2위에 오른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때문이다. 당시 뉴욕 록펠러 플라자에서 열린 크리스티경매는 뜨거웠다. '누워있는 나부'에 7명이 경합하며 예상가인 1158억원을 훌쩍 뛰어넘었는데, 누군가 1623억(1억4000만달러)를 불렀다. 경매장은 잠시 깜짝 놀란듯 숨을 죽였고, 젊은 청년, 그가 새주인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다시 1억7040만달러(1972억원)를 전화로 부른 중국인 컬렉터 류이첸이 작품을 낙찰받았다. 판세가 뒤집혔지만, 작품값을 올리며 숨죽이게한 젊은 청년에게 집중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그 청년을 밝혀냈다. 뉴욕의 젊은 미술품 딜러로 알려진 한국인 청년 신홍규였다. 이미 지난 2013년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경매에서 1억 달러를 불러 경매사에서 주목받고 있던 그는 모딜리아니와 WSJ덕에 뉴욕 미술계에서 '한국인 청년 아트딜러'로 유명해졌다. 진심이든 허세든 어쨌든 '배짱'전략이 통한 셈이다. '재벌집 자식이네', '스폰서가 있어 대행만 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1600억, 정말 구입하려고 했던 것이냐고 묻자 "그 이야기는 자서전에 쓸 것"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이 이야기가 담긴 책은 이미 쓰고 있고 올해안에 나올 것"이라면서 이 책은 자신이 정한 목표중의 하나라고 햇다. 자신이 살아온 첫번째 이야기를 25세에 내고, 두번째는 50세에 내겠다는 것이다. 타깃이 분명하면 흔들림이 없다고 했던가. 지난 3년간 뉴욕 미술계에서 주목받아온 덕분인지 자신감이 넘쳤다. 울산 출신으로 어릴때부터 명화수집을 했다. 중학교때부터 '우키우예 판화'를 수집하다 만난 이준 리움부관장과는 아직도 친분을 유지한다고 했다. 고등학교때 미국으로 유학왔고, 이후 미국 댈라워에이 대학에서 미술품복원을 전공, 2015년 졸업했다. 아트딜러, 갤러리스트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하면 저것보다 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학 2학년때인 어느날 첼시거리를 걷고 있었다. 수많은 골동품이 즐비한 벼룩시장을 보며 지나갔다. 어릴적부터 명화를 봐오고, 대학에서 복원을 공부하고 있어서인지 작품의 기법과 관리상태가 눈에 띄었다. 그러다 한 갤러리에 들어갔다. 작품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엘 그레코 회화, 로트렉 드로잉보다 비싸다니…'. "현대미술품값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젊은작가들이 많이 활동하는 맨하튼 로우이스트사이드로 갔다. 60여평 공간에 신 갤러리 간판을 달았다. "부모님이 보증을 서 3억을 대출받았어요." 한국인으로서 한국작가를 발굴하겠다는 의지가 쎄졌다. '좋은 작가'가 있다는 일본으로까지 날아가 현경 작가를 발견했다. 홍콩크리스티 스타작가 김동유 작가의 제자였다. 패션을 공부하러 일본에 유학온 현경은 교토시립예술대학 대학원 미술연구과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박사까지 마친 후였다. 모리미술관 큐레이터에 뽑혀 샌프란시스코 전시에 참여할 정도로 유망주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면 어떻겠냐". 신 대표의 배짱이 시작됐다. 느닷없는 제안이었는데 현경 작가도 받아들였다. 기세등등하게 뉴욕에서 펼친 현경의 개인전은 의외였다. 유명 평론가들이 매체에 글도 썼는데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아트페어도 갔다. 한점도 안팔렸다. "반응은 좋은데 판매가 안돼요. 한점도 안팔리니 다시 포장해오려니까 너무 슬프더라고요." 당시 대학교 2학년 학생이기도 했던 신대표는 대학 수업도 해야할 처지여서 시간은 금쪽같았다. "왜 판매가 안돼지?"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작가 작업실도 따로 없었다. 갤러리 지하 미팅룸이 작업실이됐다. "현경작가가 3개월간 미친듯이 작업했어요. 5점이 나왔는데 이 다섯점이 현경작가는 물론 신갤러리를 살리게 됐죠." 사텐이라는 천을 전기 인두로 녹이고 겹치고 녹이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평면작업은 회화라기보다 조각에 가깝다. 작품에 드러나는 얼굴형태는 슬픔, 기쁨, 즐거움 등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데 어우러진 샤머니즘적인 에너지를 전해 작품을 보고 눈물흘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레이디 가가와 함께하는 프로듀서들이 현경작품을 본후 콜라보레이션전이 열렸고, 이후 작품은 날개를 단다. 프레드릭 와이즈만 아트파운데이션, 브룩클린 뮤지엄 등에서도 구입해갔다. 현경의 작품값을 올리게 된것도 신대표의 도박같은 배짱이 움직였다. 소더비 경매에 출품했다. 추정가 1만5000불이었던 작품은 5만불에 팔렸고, '동양에서 온 여자 작가'작품이라는 매스컴보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 한점은 그 경매에서 구입을 못했던 타이완 컬렉터(아시아 작품을 수집하는)가 갤러리에 와서 직접 구매해갔다. 이후 현경 작가는 유명세를 탔고, 미국 뉴욕미술계의 유망 작가로 활동판을 넓혔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한국 작가'를 발굴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해졌다. 2년전 미국에서 서울 종로의 한 작업실을 찾아왔다. 5평짜리 공간, 그곳에서 젊은 작가가 미친듯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린다'는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근민 작가(33)였다. "그림은 기괴했지만 제 마음을 움직였어요. 그 자리에서 드로잉이 얼마냐고 하자 5만원이라고 하더군요. 한국에서는 이런 그림 안좋아한다면서." 드로잉 3점을 15만원에 산후, 그에게 물었다. "뉴욕에서 전시하지 않을래요?" 정신착란증세가 있어 매일 약을 먹고, 환각상태에서 본 기억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그의 작품은 뉴욕에서 기를 폈다. 지난 3개월간 연 전시는 아트포럼지에 소개되며 화제가 됐다. 특히 현경 작가로 주목받은 후여서 신갤러리의 전시기획은 뉴욕 매체에서 자주 다뤘다. 이근민 개인전은 드로잉 퍼포먼스 쇼 형태의 전시로 선보였다. 7m 벽에 종이를 붙여놓고 날마다 그려나가는 작업과 전시분위기에 "앤디워홀, 바스키야가 작업하는 것 같은 모습"이라는 평을 받았다. 완성된 작품은 아모리쇼에 출품해 판매했다. 작가들도, 신대표도 신이났다. 신 대표는 자신의 '특별한 직감'을 믿는다. "정말 좋은 작품앞에 가면 가슴이 뛴다"면서 현경과 이근민의 작품도 특별함이 있었다고 했다. 무명의 젊은 작가를 발굴하며 '나비효과'까지 누린 그는 3곳의 전시장을 내고, 다양한 장르로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뉴욕미술계에서 독특한 전시기획으로 평론가들의 눈길도 사로잡고 있다. 지난해에는 'Salon de Mass-age'라는 이름을 내걸고 마사지업소처럼 전시장 내부를 꾸민 뒤 홍보해 아트넷 등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젠 아트포럼 아트넷 월스트리트저널 등에서 한달전부터 연락이 와요. 무슨 전시를 하느냐고." 절로 된 것은 아니다. 처음엔 세계 유명 매체에 무작정 메일을 띄었다. 한국에서만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작가 발굴도 중요하지만, 큐레이션을 어떻게 하느냐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에요. 전 틀을 깨뜨리면서도 재미을 추구합니다." 뉴욕미술계에서 주목받은 후 디카프리오 등 유명 배우나 세계적인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행보도 넓어지고 있다. 그는 미국 중국의 작가들이 확장되는 것은 커넥션의 힘이라고 봤다. "작가와 갤러리스트들은 서로서로 추천도 하면서 상생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해나갑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은 좀 다르다고 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뚝 끊긴다"며 발전안보다는 '이것아니면, 저것이다'는 극단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트페어에서 VVIP로 초대받아 굵직한 미술품도 수집한다는 그는 "세계적인 아트페어나 미술관 파티에서 한국인 컬렉터는 볼수가 없다"면서 "아트페어에 오면 VVIP컬렉터들은 작품을 선점하기위해 리스트를 보느라 수다떨 시간은 많지 않다"고 했다. 그는 작가와 함께 여는 전시가 무엇보다 즐겁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전시를 할수 있을까. 새로운 작가는 어디 있을까'가 늘 고민이다. 지난주 한국에 와 홍익대에서 특강을 했는데 "한국은 젊은 작가가 살아가기 어려운 분위기"라는걸 느꼈다면서 한국 화랑이 왜 젊은 작가를 발굴하지 않는지, 단색화로만 쏠려있는 미술시장이 의아하다고 했다. 그는 강의에서 "젊은 우리끼리 뭉쳐야 한다. yba가 스타트한 것처럼, 꿈을 크게 가져달라고 했다"면서 "우리가 미래다' 혼자서만 하면 안되는 세상"이라고 했다. 친구와 경쟁하는 것은 좋지만 팀이 되어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라고 조언했다는 것. '미술품의 의사'가 되기위해 '미술품복원'을 공부했지만 이제 그는 '세계적인 갤러리스트'를 꿈꾼다. 리움미술관을 보면서 '호텔 로비'같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는 무겁고 권위있는 미술관보다 스토리가 있고 재미있는 미술관, 살아있는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보였다. 이미 계획을 세웠다. 40세에 한국 경주에 레지던시가 있는 미술관을 짓겠다고 했다. "해외의 인맥을 활용해 30대 스타작가들을 경주로 오게할겁니다. 외국의 핫한 작가들이 한국에서 작업하며 강연도 하고 프로젝트도 해, 결국 한국의 작가를 세계에 알리는 허브를 만들계획입니다." 특히 "서울작가뿐만 아니라 지방작가들도 교류할수 있게 고여있는 물들을 순환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미술판에 뛰어든지 3년, 겁없는 청년의 질주가 이어질지 주목되고 있다. 현경, 이근민에 이어 뉴욕에서 새롭게 날개를 필 새로운 작가는 누가 될까. '젊은 피'답게 그는 '하면된다'는 사심없는 무대포 정신이 강하다. "왜요?. 제가 해봤고 해냈기 때문이죠." 두려움없이 행동하는 그의 열정이 운명의 만남을 주선하고있다. [email protected] 2016/04/04
'실그림' 손인숙 작가 "한국에선 반대했지만 파리에서 환대 "'한국 자수의 문화적 침략'이다" 지난해 9월 프랑스 르몽드신문 문화면에 한국에서 온 전시가 대서특필됐다. 프랑스 파리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전시된 '실그림 작가' 손인숙(64)의 작품때문이었다.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된 이 전시는 프랑스인들을 매료시켰다. 유럽에서 가장 큰 동양미술관으로 콧대높은 기메박물관은 이례적으로 지하철역마다 '실 그림'전시 현수막을 잇따라 내걸고 적극 홍보도 펼쳤다. 기메박물관은 이집트 종교와 고미술품, 그리고 아시아 국가를 소재로 1889년 설립됐다. 이곳 한국관에는 소더비 경매에서 13억원에 팔린 고려시대 작품 '수월관음도' 등이 전시돼있다. 전통자수 기법으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손인숙의 '실그림'작품은 '한국 여인의 엘레강스-신비스러움'을 프랑스에 선사하며 화제가 됐다. '꼭 봐야할 전시'로 꼽히며 '독창적이고 아름답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지난 3월 17일까지 6개월간 이어진 전시는 다시 러브콜을 받았다. "우리도 전시하고 싶다"며 프랑스 니스에 위치한 동양미술관이 작품을 잡았다. 기메박물관에서 전시된 250점 그대로 니스 동양미술관으로 옮겨 오는 5월부터 프랑스 남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해외에서 먼저 알아보고 있다. '자수의 품격'을 높이고 금의환향한 '실그림 작가' 손인숙씨를 서울 개포동 예원 실그림문화재단에서 만났다. "서른아홉살때 이사온 아파트에요. 이곳에서 수행하듯 작업을 한 곳이기도 하죠" 60여평 아파트에 둥지를 튼 예원 실그림문화재단 전시장에 들어서면 깜짝 놀란다. 한땀 한땀 '실로 그린 그림'은 상상 그 이상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수'의 모습이 아니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기본, 거대한 산수화처럼 펼쳐진 10폭 병풍과 자개빛깔처럼 수를 놓은 옷장까지 익숙한 자수의 개념을 깨트린다.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작품을 만들수 있을까." 작품을 보고 매료된 이기수 전 고려대총장은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았다. 이 이사장은 "이런 작품이 5000여점이나 있다고 해 더욱 감동 받았다"고 했다. '알파고 시대', 바늘에 실을 꿰어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60년간 욕심안내고 작업만 해왔어요. 고통스럽지않았냐고요?. 힘은 들었지만 고통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7살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 덕분이다.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어머니는 '전인교육'의 선봉자였다. "그림을 그려도 나만의 그림을 그리게했지요. 항상 칭찬했어요. 잘못됐다고 야단치지도 않으셨죠." 10살때부터 바늘을 잡았다. '실로 그리는 그림'에 미쳤다. 뒤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십장생도, 병풍등으로 꽃피는 자수는 세월이 갈수록 시공간을 초월했다. 이화여대에 '자수과'가 있다는 것도,어머니를 통해서였다. 72년도에 자수과에 입학한 후에도 작업 욕심은 하늘을 찔렀다. '풍경화'과제가 나오면 남들이 1점 할때 20점을 했다. 당시 표구를 맡기면 동산방화랑 박주환 사장은 "이 학생은 큰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어린시절부터 어머니는 나중에 '문화가 힘'이 되는 세상이 된다고 하셨어요." 손 작가는 어머니의 말을 직심으로 들었다. 대학 졸업후 개인전도 잇따라 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욕심내지 말라, 창작하는데 영혼을 다하라. 교수도 하지말고 인간문화재하지도 말라." 는 말을 깨달았다. 마흔때부터 몰두하고 칩거했다. 수틀은 우주였다. 고통을 바늘에 꿰어서 한땀 함땀 꿰어 그려나갔다. 특정시대나 화풍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손끝에서 나오는 '손인숙표' 예술로 점점 진화해갔다. '기회는 준비된자에게 온다'고 했다. 환갑이 지나 열린 프랑스 전시는 우연히 시작됐다. 2013년 겨울,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피 마카리우 이사장과 프랑스 장식미술관 올리비아 가베 관장이 한국에 왔다. 한불 전시기획자이자 실크로드 한불대표이사인 김효정 박사가 자리를 주선했다. "좋은 작품이 있는데 한번 보러가자". 둘은 "그럼 딱 30분만 보자"라고 했다. 리움· 대림미술관에 갈 계획이었다. 자수, '실그림'을 본 두명의 외국인은 이후의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오전 9시30분에 들어와 오후 4시에 나갔다. 마카리우 기메박물관 이사장은 "다른 곳에서 이런걸 봐본적이 없다"며 극찬했다. 특히 자수로 그려나간 산수화 병풍 앞에서 “이건 사람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움직인 것 같다. 빛을 잡아다가 밀어 넣은 것 아니냐”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파트 전시장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소피 마카리우 이사장이 말했다. "전시 한번 해봅시다." 다니엘 올리비에 전 주한 프랑스 문화원장이 징검다리가 됐다. 작품을 본 그도 '실그림'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올리비에는 "자수도 모르고 미술작품도 많이 알지못하지만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느꼈다"면서 "주한 문화원장으로서 한국 작가를 발굴하고 후원하는게 내 역할이고 소명"이라고 후원자로 나섰다. "한국의 많은 작가들이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를 하는데 민간인들의 교류는 많지 않았지요. 한국민들이 갖고 있는 성품과 삶을 프랑스에 알려주고 싶었지요."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생겼다. 민간교류 차원에서 지원을 받기위해 정부에 후원을 요청하면서다. '한불 상호교류의 해' 조직위원회에서 '중국 자수'라고 반대했다는 것. 다니엘 원장과 소피 이사장은 당황했다. "중국자수? 한국자수" 우리는 모른다. '미인도'를 새롭게 볼수 있게 한 한국의 전통문화 자수를 예술로 승화한 한국 여인의 규방문화를 알리고 싶다"며 전시를 추진했고, 결국 다니엘 전 주한 프랑스 문화원장이 한불수교 130주년 공식행사 인증을 따냈다. 김효정 박사는 "프랑스측에 정말 감사했다"면서 "손인숙의 작품을 통해 조선시대 여인들의 삶, 이전과 삶과 현대의 삶을 보여주는 '한국의 안방'을 타이틀로 전시를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옛 귀족의 저택을 개조한 기메박물관에서 전시는 병풍 걸개 장식 복식 노리개 보자기등으로 웅장하면서도 화려하게 한국여인의 삶과 문화를 한눈에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작품이 한국을 떠나기까지 정작 작가는 마음 고생을 했다. "프랑스 전시에 갈 생각을 안했었다"는 작가는 "어머니 다음으로 숙제를 풀어준 사람이 이기수 전 고대총장"이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이 된 이기수 전 고대총장은 "안가면 안된다. 후원받게 해주겠다"며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한·불수교 130주년 특별전을 성황리에 마치고 온 다니엘 올리비에 전 주한 프랑스 문화원장은 "손인숙 작품은 한국적이고 여성적이다.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적인 감각을 느꼈다"면서 "어제에도 맞출수 있고, 미래에도 뭔가 줄수 있는 영감을 주는 '영원성'이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자수'가 그냥 '자수 정도'가 아닌 이유다. 보는 순간 중독세를 보이는 작품은 실을 통해 오늘을 재현하고 미래로 나아간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손인숙 작가를 '전통 장인'이 아닌 '예술가'로 평가한다. 한땀 한땀 실로 꿴 풍경화 산수화는 본을 떠 그린 게 아니다. 새로운 창조가 들어가 있다. '자수'와 다른점이다. 붓대신 바늘과 실로 그린 그림이다. 색색의 실로 그린 그림이어서 더욱 신비롭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실의 꼬임도 다르다. 마치 빛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반짝인다. '실로 그린 그림'만 있는게 아니다. '손인숙 표', 그를 예술가로 칭하는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에 있다. 그림에 맞게 제작된 액자, 그림속 인물들이 매듭으로 나와 하나로 완결된 궁극의 콜라보레이션이다. "35년 넘게 장인들과 손발을 맞춰 호흡해왔다"는 작가는 "내 작품은 피와 땀으로 만든 작품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이 많다"고 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허투루는 없다. 액자 뒷면도 배를 갈라서 잠금장치를 하고, 2년정도 삭인 풀을 쓴다. 액자 고리(장석)도 액자에 맞게 맞출 정도다. "이 또한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습관이에요. 잘못되면 항상 다시하게 했지요. 장인들과 많이도 실랑이 했지만 제 작품은 정직합니다. 고집스럽다고 하지만 정직하게 살고 싶어요." 전통문화가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장인들도 맥이 끊겨, 대를 잇지 못한다. 전수받기도 힘들지만, 생계로 먹고 살기는 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문화 융성'을 국정기조로 내세웠지만 여전히 문화예술인들은 배고픈 실정이다. '실그림'예술로 한국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전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기수 예원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은 '대한민국 헌법'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 이사장은 "헌법 제 1장 9조를 보라"며 손바닥만한 77쪽짜리 '대한민국 헌법 책'을 건넸다. '제 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민족문화이 창달에 노력하여야한다.' 고 적혀있다. 그는 '헌법 전도사'다. 국회의원을 만나면 헌법 46조를 읽어보라고 한다"면서 "최근 김무성 의원을 만나 국회에서 헌법 130조 전문을 다 읽고 이를 지키는 의원이 되겠다고 맹세를 해야한다고 주문했다"면서 "국회의원은 물론 국민들은 대한민국 헌법을 읽고 대한민국의 가치를 제고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말고 국민의 행복을 위한 기본을 지키자는 것.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도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며 '문화의 힘'을 강조했다. 이제 '문화 콘텐츠'는 미래성장 동력이다. 문화대국 프랑스에서 환대받고 온 손인숙 작가는 평생 해온 실그림 작업을 문화유산을 만들겠다는 욕심이다. 이미 박물관건축 허가도 받았다. 세계 10대 박물관에 작품을 기증할 계획도 있다. 손 작가는 "세계 곳곳 박물관에서 한국관은 중국, 일본관보다 초라하다는 소리를 20년 전부터 들어왔다"며 "이제는 '실그림'으로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 영혼을 바쳐 작업했기때문에 자부심이 있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국민들께 나누어준다는 생각으로 해왔지요." '실그림'은 바늘과 실로 무한세계를 넘나든다. 환갑이 훌쩍 지나 세계미술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손인숙 작가는 더 열정이 넘치고 있다. "작업요? 멈출수 없죠. 항상 새로운 컨텐츠로 보는 사람들에게 물음표를 주고 싶어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마법같은 '실그림'은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서 만나볼 수 있다. 010-2380-4153 [email protected] 2016/03/30
'100세 화가' 김병기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백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가요 '100세 인생' 노래가 뜬 건 '100세 시대'이기 때문이다. 노래 가사처럼 '팔십세에 저 세상에서 데리로 오거든 자존심 상해서 못간다고 전해라'는 세상이 됐다. 지난해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소설로 영화로 나와 웃음폭탄을 선사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설같은 일이 국내 미술판에 벌어졌다. 만으로 100살된 노인이다.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개인전을 여는 화가다. 이 '100세 화가'도 '창문넘어~100세 노인' 알란 같다. 세상 밖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 인생의 참맛을 겪은 알란처럼 그도 그렇게 세상밖을 떠돌며 살다, 50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일어나게 될일은 일어날 일, 미리 쓸데없이 걱정해봐야 소용없다" 는 알란 처럼 과거나 현재의 불행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이중섭?. 김환기? 모두 친구였지. 그런데 죽은 사람이야기를 뭐하러 해. 그들은 옛날사람이야. 과거라고" "나는 오늘의 세한도를 그리는 사람이야." 1916년생. 올해로 만 100세가 된 김병기 화백은 "난 100세 노인이 아니야. 그렇게 쓰면 안돼~." 라며 "난 오늘을 그리는 작가"라고 강조했다. 18일 만난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햄이 든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붉은 와인을 마셨다. "주스같아서 요즘 자주 먹는데 맛이 있다"며 한잔을 권했다. 100세를 살면서 기쁨과 슬픔, 환희, 고독등 힘든 일을 겪고 지나왔지만 그는 젊은이 못지 않다. '살아있는 20세기의 역사'라고나 할까. 100세에도 붓을 놓지 않은 화백으로 기록될 국내 화단의 최고령 화백이다. 인터뷰가 길어지자 매니저가 나와 "어젯밤도 샜는데, 피곤하시지 않냐"고 물었다. 개인전을 위해 아직 못다한 그림을 그리는 중이라고 했다. 김 화백은 "생각이 젊은 사람과 이야기하니 즐겁다"며 "새로운 생각을 하면 늙지않는다"며 말을 이었다. 노란 넥타이, 조끼까지 갖춘 검은 양복을 입은 그는 화가보다 지식인같다. "옛날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손사래를 쳤지만, 100세 노인의 인생 역정이 궁금했다. 1916년 4월 10일 평양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본에서 유화를 배워 한국에 서양화의 씨앗을 심은 화가중 한 명인 김찬영(1893~1960)이다. 집안엔 화집과 미술잡지 화구들이 널려있었다. "아랫목 위에 늘 놓여있던 여인 그림을 보며 미술가의 꿈을 키웠다" 어린시절 '책읽는 소년'으로 통했다고 한다. 아버지, 형들이 보던 문학책과 미술잡지에서 프랑스의 인상파, 상징주의에 눈을 떴다. 열여섯살, 어머니가 사준 물감과 화구를 들고 그림을 그렸고, 열여덟살인 1933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석고상 데생수업은 지루했다. 2년후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다시 입소했다. 피카소 등과 어울려 전위 미술을 하다 귀국한 미술계 총아 후치타 쓰쿠하루가 선생이라는 이유였다. 거기서 김환기를 만났고, 이중섭 유영국등과 함께 새로운 미술세계를 접했다. 1948년 월남해 한국 추상미술의 정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월남 전에는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을, 후에는 한국문화연구소 선전국장과 종군화가단 부단장 등을 지냈다. 서울대 강사, 서울예고 설립 초기 미술과장으로도 일했다. 인생 변화는 1965년 한국미술협회 3대 이사장일때 왔다. 당시 한국 최초 국제전 심사위원이자 상파울루 비엔날레 커미셔너로 김창열, 정청섭, 박서보 작품을 들고 나가 한국의 모노크롬을 세계에 알렸다. 이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행을 택했다.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실체를 본바닥에서 체험하고 싶었다" 뉴욕을 거쳐 사라토가에 정착했다. 한국인은 커녕, 미국인도 많지않은 미국의 동서부 시골에 틀어박혀 외로움과 고독감에 직면했다. 그렇게 대자연을 그리면서 선과 선의 엇갈림으로 표상되는 추상화 작업을 50여년간 펼쳐왔다. 고독함은 그리움이었다. "잠시도 한국인이 라는 생각 떠난 적 없었다. 그리움 이상으로, 내게 정신적인 문제의 초점은 동양적 사고에 와 있다"는 걸 직감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후 "한국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싶었다."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나섰다. 지난 3월 평창동 주택 겸 작업실을 김화백에게 마련해줬다. 이날 인터뷰중에도 들라클르와, 세잔, 피카소, 앤디워홀, 김정희의 그림세계를 넘나들었다. 또 가장 좋아한다는 블란서 시인 폴 발레리와 아폴리네르의 시를 또박 또박 외우기도 했다. 특히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를 암송한 그는 이 시 때문에 파리를 가고 싶어했는데, 80세에 꿈을 이뤘다고 했다. 1996년 파리에 있는 가나화랑 레지던시 '씨테'에 1년간 머물며 작업했다. "미술이야기, 작품이야기만 하고 싶다니까." 하루에 작업량은 얼마나 될까.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그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낮에도 밤에도 그리고 안 그릴때도 있고, 신명이 나면 새벽 3시까지도 그리지." 피카소를 불러왔다. "피카소는 밤에 그린다고 하더라. 영감이 떠올랐다고. 나도 젊어서는 피카소처럼 밤에 그렸어. 낮에는 잘 수 밖에 없었지." 김 화백은 "그런데 그거 다 옛날 이야기야. 지금은 '무의'하지 않는 노자 철학에 흥미를 느껴. 뒤샹은 그림은 안그리고 채스만 뒀다고 해. 그게 그림을 하는 것이야. 삶을 편하게 하는게 일을 안하는 것이 아니거든. '무의의 철학' 난 뒤샹의 사고에 공감하는 것이 있어" 다시 노자 이야기로 갔다. "나는 뒤샹과 달리 노자의 '도가도비상도 (道可道非常道)'에 감동을 받아. 현재의 미술이 어떤 양식에 빠져있거든. '말할 수 있는 도(道)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라'는, 도(진리)는 말로써 한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에 관심이 있어." "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환경에 살고 있다"면서 그는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 즉 극한 상황을 반영할 줄 알아야 새로운 무엇이 나온다. 그림도 그렇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세계에서 화가로 가장 유명한 피카소도 93세에 생을 다했다. 백푸더퓨처 영화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기억력은 물론 자신의 작품을 하는 이유를 논리적인 사고로 풀어낸다. 일반적인 우리나라 할아버지 모습이 아니다. 놀라움과 신기함이 교차해 건강비결을 물었다. "부정 의식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는 거지." "부정 의식을 오래 두지 말고 긍정으로 바꿔야해. 부정적인 생각을 오래하면 병이 된다고." "건강에 대해서는 묻지 마라. 작품이야기를 하자." 화폭에 그려진 그림은 날카롭다. 부벽준(산수화에서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측필을 이용해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같다. 무엇을 그린건지, 쉽게 알수 없다. 그는 "나는 추상주의자도, 추상을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며 완전한 추상도, 형상도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그림을 두고 추상성을 통과한 뒤에 나온 '형상성'이라고 했다. 예민하고 날카롭게 등장하는 선들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형태들, 빠른 붓자국이 반복된다. 그는 "덧칠한 선이 아니라 순결하게 내려 긋는 선"이라고 했다. 물감의 색면이 만들어낸 평면성은 입체적으로 보인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선과 선사이로 인물들이 보이기도 한다. 최근작 '공간 반응'이 눈에 들어왔다. 양쪽에 직각으로 내려진 빨간 선이 화면을 강렬하게 분할시키고, 날카로운 선들은 검은 화면을 리듬감 있게 연출하고 있다. "이 그림?.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거야." 작품 '공간 반응'은 "북한의 상태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 디아스포라(이산 유대인)로 살아온 또 분단 국가에 살고 있는 현실감이 다가왔다. "나는 평양사람이야. 북한이 다 굶어죽지않고 그런것하고 있어서 놀라움이 있지." 그는 북한이 수소폭탄을 만들고 로켓을 쏘는 것을 보며 이 작품을 그렸다고 했다. "싸움나면 다 죽는다. 한미연합군사훈련도 평화유지를 하려고 하는거지. 북한을 칠수도 없어. 북한이 좋다고는 할수 없지만, 생명에 위협을 주는 일을 누구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린거야." 16세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림. 횟수로 84년간 화가로 살아오고 있다. '그림이 무엇이냐'고 묻자 "허허~내 질문이 바로 그 질문"이라고 했다.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 그러면 '무엇을 그리고 있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살아있는자의 위엄'을 보였다. "나는 사는 시간, 현실하고 관계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그걸 그리고 있지." 그러면서 "예술은 인간을 진화시킨다"고 했다. "인간의 정신적인 작용이 진화로 만들고 있다"는 김 화백은 "예술이 학문과 더불어 인간을 진화시키는 건 하나의 '팩트'"라고 했다. '진화'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물건을 여기로 옮긴다는게 아니야. 그건 진화하고는 직접 관계는 없어. 무역업자가 여기 물건을 저기로 옮기는 건 진화하고는 관계가 없지. '방법에 대한 연구', 그게 진화와 관계있다고. 학문과 과학이 진화했지. 연구하면 그 다음 학설을 만들고 박사가 되고 그게 진화화는거야." 하지만 "예술은 진화하는게 아니야. 변화하는거지. 그리스의 작품이 르네상스보다 낡은건가?. 낡은게 아니라 변화한거잖아," 2년전인 99세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순간을 뜨뜻미지근하게 보내면 안 되고 적극적으로 뜨겁게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는 '나이많은 사람이 늘 하는 소리거니…'했다. '동시대, 오늘을 살고 있는' 김 화백은 뜨겁게 살아왔다. 오는 25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 바람이 일어나다' 개인전을 연다. 전시 타이틀은 '항상 새로운 것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 첫 구절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에서 따왔다. 1947년 죽음을 각오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끝없이 되뇌였던 시 구절이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김 화백의 구작과 신작 50여점을 전시한다. "바다가 세로로 보인다고~. 또 산을 그리다보면 뚱딴지가 되기도 하지. 우리 시대는 무한히 많은 메타포에 살고 있어. 뭐가 보이네, 안보이네, 내 그림을 유치하게 보면 안돼. 더 이상 손댈수 없어 미완성채로 두려고 해. 미완성이 완성이야." 전시는 25~5월 1일까지. 02-720-1020 [email protected] 2016/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