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 '지구 공생법' 거미줄에 걸려든 그는 1973년 아르헨티나 투쿠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업협동조합에서 일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 의미를 지닌 '협동' 단어 때문에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로 의심 받았다. 부모는 유럽으로 망명, 이탈리아 베니스 근처에서 11년간 살았다. 이국땅에서 어린시절 맞닥뜨리건 거미였다. 몇백 년 된 집 다락방에는 수많은 거미가 드글거렸다. 그때 그는 "과연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누구일까?"를 상상했다. 이 생각은 지금의 그를 만들어냈다. 거미와 함께 거미집을 만드는 '스파이더+맨' 설치 미술가로 급부상한 토마스 사라세노 작가다. 자신은 손 하나 안대고 거미가 만들어낸 '거미줄'을 전시장에 선보여 주목받고 있다. 그 유명한 '거미 작업'을 들고 서울에 왔다.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연다. 전시 개막일인 30일 서울에 온 그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당초 '내한 하지 않는다'는 공지와 달리 이날 베를린에서 1박2일 일정으로 날아왔다. 다음날 바로 스페인 마드리드로 간다는 그에게 너무 짧은 일정이지 않냐고 하자 "이렇게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좋긴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탄소 배출에 기여를 해야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마음이 개운치 않다"고 했다. 거미와 함께 하면서 자연환경주의자가 됐다. 그의 스튜디오는 작업을 하면서 늘 이렇게 하면 얼마나 쓰레기가 나오는지, 환경오염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살피는 일이 생활화가 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시에 직접 비행기를 타고 오지않아도 되는 웹(아라크노만시)을 개발한 이유"라고 했고, 또한 "설치미술품들을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옮길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있다"며 환경의 예술적 실천가로 진지함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전시장에도 오지않는 거만한 아티스트라고 받아들일까봐 비행기를 타고 왔다"며 한국 관객들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그는 "나의 작품은 정말 예전에는 세상에서 간과했던 작은 아름다움을 인지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거미집을 전시장에 내놓은 건 "실험적인 작업"이라고 했다. "거미줄(집)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물음도 있지만 "이러한 작품으로 미술사적 구분을 짓는 선을 왔다 갔다 하는 경계의 자유도 흥미롭다"고 했다. '스파이더+맨'으로서 그는 거미를 협력가로 칭했다. "내가 거미와 컬래버레이션을 하는게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나와 함께 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스튜디오에는 거미가 대략 120~150마리가 함께 한다고 했다. 작가의 거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거미줄의 추상적인 3차원 구조를 우주, 공동생활, 사회성, 생존 등의 이슈와 연루된 하나의 징후로 해석하면서 시작했다. 그는 거미망의 모티브와 모델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며, 인공적인 환경에서 거미를 키우는 실험을 진행했다. 거미와 관련된 그의 대표 프로젝트는 거미망 전문가들의 학제 간 네트워크인 ‘아라크노필리아(http://arachnophilia.net/)’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거미망의 유형을 보관하고, 스캔해 디지털로 아카이브하고 있다.그저 작업에 ‘활용’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거미망의 멸종에 대항하는 생태학적 보관소로 발전 중이다. 그는 "거미 종은 1억6천년이상 살아있었기 때문에 나보다 지구에 대해 알거라 생각한다"면서 "거미가 나한테 말하는 것 같다고 했다. '토마스야 너는 지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 자신을 “사라세노는 행성 지구 그 너머에 살며 작업한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행성 지구 그 너머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작은 종, 거미를 주인공을 내세워 작업하게 만든 작품 '콘서트'는 압권이다. 갤러리현대 전시장 2층 검은 커텐을 헤치고 칠흑같은 어두운 공간을 조심조심 들어가면 상상도 못한 작품이 펼쳐져 있다. 다이아몬드꼴로 친 하얀 거미집이 공중에 둥실 떠 있다. 한줄기 빛속에 드러난 거미줄은 의외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인간들의 호기심을 빨아들인다. "휴대폰이나 조명을 먼저 보지 말고 어둠에서 익숙해져라" 더듬 더듬 눈을 밝히자 작가가 말했다. "이제 거미줄을 보면 먼지의 움직임까지 느낄 수 있다"면서 "이 작품은 이 세상에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가 같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하얀 거미줄을 비춘 한줄기 빛은 벽면에 둥근 보름달이 되어 거미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빛줄기를 따라잡는 건 보석처럼 반짝이는 먼지 입자들. 숨막히는 고요함속 갑자기 딩동동동동 소리가 울려퍼진다. 먼지의 움직임이 잡혔다는 신호다. "먼지의 진동 주파수와 거미망에 있는 거미가 움직이는 진동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상호작용이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는 것 같아 작품 제목이 '콘서트'로 지었다고 한다. 현재 작품에 앉아있는 거미는 우리나라에서 공수된 무당거미다. 다른 종의 거미 2~3마리가 일주일에서 4주, 길게는 8주에 걸쳐 만든 거미줄은 층층이 방사형으로 퍼져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 알지못할 경계심을 사그라들게 한다. 꺼름칙한 고정관념을 슬쩍 흔들리게도 한다. 인간이 구현못할 하이브리드 건축물로 인식된다. 이 정도 생각까지 도달하면 그가 거미와 만든 작업은 성공한 셈이다. 그의 작품 세계 핵심 키워드는 ‘공생’. 그는 오늘의 환경과 기후 문제를 고민하며 가까운 미래에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거미의 시점으로 세상을 본다는게 큰 차이다. 자연세계으로 관점이 바뀐 건 동양사상이 탑재된 덕분이다. 불교에 관심이 많고 하루 2번 명상을 한다고 했다. "명상을 하면서 햇살 한 줄기에도 새로운 시각이 펼쳐진다는 것을 느꼈다. 불균형과 관계를 확장하는 아름다움을 전파하는데 내 작품이 이바지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큰 꿈을 갖고 있는 것보다 내 자신부터 수행을 해야겠다는 관점에서 작업하다보니 이런 작품이 나왔다" "거미가 되고 싶지만" 실은 거미보다 거미줄, 그러니까 "거미줄의 창작물에 관심이 더 많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연구된 거미줄들은 유명한 과학연구지에도 등록됐다. "이런 연구들은 거미만 연구했던 과학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레퍼런스가 되기도 한다"면서 "그래서 거미줄의 연구가 더 신기했다. 이를 통해 정보의 영역이 조금 더 확대되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예술가로서 과학자같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는 "내가 과학자라면 파리 협약이라던지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있는 강대국의 상황을 보면 참담할 것 같다"며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술로서 작품을 통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세상을 바꾼다면 작가로서 성공한 것이 아닌가"라고 여긴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종과 조화롭게 살기위해서는 큰 변화가 필요한 시급한 때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성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하는 자세를 통해서 세상의 새로운 정보, 또 그 정보를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을 만들어 낼수 있지 않을까요?" 먼지를 소리로 잡아낸 이유도 "지구상에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도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장치다. "먼지라는 것. 목소리가 없는 존재들이 어떤 소리를 낼까에 대해 생각을 한 건" 환경오염과 맞닿아 있다. "지구상에서 매 순간 아홉명의 사람들이 공중의 질에 따라서 기관지 문제로 죽는 사람이 있다는데, 먼지가 우리의 움직임이나 숨(호흡)에 따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시각을 바꾸게 하고 싶었다." 어릴적부터 거미줄의 아름다움에 빠졌다는 그는 "거미를 해충으로 박멸시키는 인식을 내 작품이 바꾸게 하고 있다"며 "진짜 보니 아름답지 않은가"라며 반문했다. 1박2일도 못자랄 정도로 거미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그는 분명 "이 곳 어딘가에도 거미줄이 있을 것"이라며 창고문을 열다 흥분하며 소리쳤다. "아, 여기 거미줄이 3개나 있다." 금방 거미줄을 찾아낸 반가움이어서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거미줄을 갤러리 정중앙에 내놓고 '너희들이 아티스트야'라고 기회를 준다면"이라고 하다가 "거미들이 받아들일지 모르지만"이라며 거미의 시선으로 말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할 수도 있고 비좁은 창고로 다시 들어가 숨을 수도 있다"면서 "거미줄을 봤을때 치우려고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다시 거미가 된 듯 강조했다. "기후변화로 여러 생태계가 파괴되고 멸종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먼지라는 것은 생명의 초기 단계다. 또 거미줄은 인간과 긴밀하게 연결된 웹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부터는 거미줄을 봤을때 집착하면서 청소하지 말고 함께 공존하는 것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거미줄을 예술로 승화시킨건 건축가 이력도 한몫한다. 원래는 건축학도였다.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해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 회사에서 근무했다. 1999년 미술을 복수 전공하기 위해 다시 학교에 진학, 200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에서 유학했다. 예술가 토마스 바렐(Thomas Bayrle)과 벤 판베르컬(Ben van Berkel), 건축가 피터 쿡(Peter Cook)에게 수학한 그는 2002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2003~2004년 이탈리아 베니스 IUAV(Design and Production of Visual Arts)에서 공부하면서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세계적인 설치미술작가 올라퍼 엘리아슨과 만나면서 환경문제에 대해 사고가 확장됐다.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거미줄처럼 미세하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대형 설치작품을 선보이면서 이름세를 알렸다. 칼더 프라이즈를 수상한 후 2011년부터 국제무대의 새로운 스타로 도약했다. 2012년 미국 MIT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한 첫 미술가로도 기록되어 있다. 비선형 형태의 모듈 구조물 하이브리드 건축 공간인 '공중정원' 작가로 유명하다. 거미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지만, 이번 전시에는 그의 지구에 대한 인류의 윤리적 태도에 관한 매우 급진적인 개념이 담겼다. 지하 전시장은 사라세노의 건축적 실체를 경험하는 장이다. 건축가로 훈련받은 그는 20세기 건축의 경계를 허문 위대한 실험자의 계보를 자신의 작품에 빠르게 흡수시켰다. 하늘에 떠다니는 주거 형태는 어떤 모습을까? 국가의 경계와 지역의 한계를 벗어난 초국가적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 이런 질문에서 시작된 작품은 스파이더맨이 쏘아올린 듯한 공중 도시 풍경을 선사한다. 전시장 양 벽면을 감싼 월페이퍼 작품 'Seoul cloud Cities'는 제목처럼, 서울의 익숙한 풍경과 작가가 오랫동안 지속해온 연구 프로젝트 '클라우드 시티즈'를 결합한 장소 특정적 작품이다. 대안적인 형태의 도시성(urbanism)과 SF영화의 무대처럼 부유하는 거주지를 꿈꾸는 작가의 도전을 시각화한 연작이다. 남산타워, 롯데타워, 63빌딩 등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축물과 수많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서울의 풍경위로 사라세노가 꿈꾸는 ‘구름 도시들’의 모습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가상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거미에서 인간으로, 먼지에서 구름으로, 구름에서 도시로, 빛에서 어둠으로, 지구에서 우주로... 건축, 환경학, 천체, 물리학 열역학, 생명과학, 항공엔지니어등을 가로지르는 그의 작업세계는 미래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보인다. 과연 '인류세' 이후에 동시대의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토마스 사라세노의 개인전에서 느껴볼 수 있다. 전시는 12월8일까지. 2019/10/31
매달린 조각의 경쾌한 반사...신한철의 '증식' 미술관이 아닌 화랑, 갤러리에서 조각전이 뜸해진지 오래다. 조각은 일단 크고 무겁고 거대함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동시대 조각은 공공미술 '거리 미술'로 나가 도시의 풍경을 잠식하고 있다. 미술애호가들이 조각보다 회화를 선호하는 탓도 있다. 화랑가는 '조각전보기를 돌 처럼'하고 있다. 이런 추세속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현대화랑이 튀어올랐다. 지난 7월 조각가 박상숙의 개인전을 21년만에 열어 주목받았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풍선처럼 부풀게 만든 대형 조각전이었다. 그 전시는 박상숙 작가보다 조각을 지배했던 브론즈와 대리석의 영광을 이젠 스테인리스 스틸로 넘겨준 시대라는 것을 입증했다. 반짝임과 동시에 반사반사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스테인리스 스틸은 동시대 무엇보다 매혹적인 재료다. 동시대 세계미술시장을 접수하고 있는 미국 현대미술가 제프쿤스나 인도 출신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무기도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제프 쿤스가 1986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약 1m 높이 '토끼' 조각은 지난 5월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9110만달러(약 1084억원)에 낙찰되어, 현존 작가의 작품가격()으로는 가장 비싼 예술품이 됐다. 쿤스의 작품은 2011년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 옥상에 거대한 '보라색 하트 모양' 사탕 작품 '세이크리드 하트'가 설치되어 있다. 또 아니쉬 카푸어는 미국 록펠러 건물앞에 '하늘 거울'(2006),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있는 '구름 문' (2004)을 설치해, '마법같은 거울 조각'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최고 미술관 이태원 삼성 리움 미술관 정원에도 세워져 있다. 높이 15m, 73개의 스테인리스 스틸공이 마치 알알이 포도송이가 세워진 것 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는 반짝임을 자랑한다. 이런 유명세탓에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은 모두 제프 쿤스나 아니쉬 카푸어 작품으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그도 전시장에서 늘 이런 소리를 듣는다. "제프쿤스 같다, 아니다. 아니쉬 카푸어 같은데?" 차별화가 생명인 미술계에서 조각가 신한철(61)은 면역력이 강했다. 그 무성한 말들을 스테인리스 스틸 재료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요. 그 색은 제프쿤스가 많이 쓴 색이죠. 저도 그게 내 작품과 적합하다 생각해서 차용을 했어요." 붉은색과 보라색, 미술 좀 안다고 한다면 바로 '제프 쿤스'가 떠오르는 그 색을 한 '풍선같은 작품'앞에서 그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옷(색)을 입히면 가볍고 비조각적인 느낌이 있어요. 그렇게 조각의 무거움을 떨쳐버리는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지난해부터 KIAF등 아트페어에 선보여 눈길을 끌어온 '신한철의 증식'이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웅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올해 환갑이다. 70, 80세를 준비하며 이제야 작가로 가는 것에 시동을 걸었다"며 흰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빨간 풍선을 묶은 것 같은 작품이 그를 품어내며 수십명으로 분신시켰다. "안에는 비어 있어요. 가볍죠" 그가 가느다란 선에 매달린 뭉친 원들을 손가락으로 툭 건들자, 흔들 흔들 움직인다. 뉴턴처럼 중력의 법칙이 적용됐다. "무게중심이 딱 맞았어요. 결국 균형이 잘 맞았다는 것인데 무중력적인 상태를 느끼게 하지 않나요?" 과학과 직관은 가벼움의 미학에 날개를 달았다. 빨강, 초록, 보라색...가는 선 하나에 중심을 잡고 있는 원형 뭉터기들은 발레리나 몸짓처럼 우아함도 발산한다. 동시대 미술은 모방과 차용의 치열한 경쟁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 무한반복속 새로운 시선, 새로운 발견이 힘이다. 수년간 훈련하다보니 이젠 어떤 형태도 딱 세울 수 있게 됐다는 그는 원래도 '구(sphere, 球)작가'였다. 변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올해로 환갑의 작가가 가벼워진 건 수십년간 무거움의 터널을 지나왔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할때도 그랬다. "동기들이 조형적으로 풀어낸 조각으로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고 다들 잘나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영, 감을 못잡고 헤매었다." 대학때부터 '생명의 에너지'가 화두였다. '이것을 어떻게 구현 할 것인가' 몰입과 번뇌는 구(원형)로 이르렀다. "구를, 동양의 정신성인 음과 양의 합일된 생명체로 보자" 작업이 풀렸다. 그때부터 흙으로 원형을 끊임없이 만들었고, 구는 작업의 모티브가 됐다. '생명의 에너지'로 풀어낸 구는 1997년 첫 개인전에 선보인 후 작업실에서 빛이 났다. 수십개의 구가 구르던 작업장에 현대화랑 박명자 대표가 방문하면서다. 크고 작은 구들을 발견한 박 대표는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된다며 1999년 개인전을 열었고, 그때부터 '구 작가'가 됐다. 이후 급기야 쟁쟁한 선배 조각가들을 제치고 전쟁기념관 6.25전쟁 상징조형물 제작 작가로 선정됐다. '6.25전쟁 상징 조형물'은 80억 프로젝트로, 그가 3년간 투지를 발휘한 역작이다. 2003년 전쟁기념관 입구 중앙에 자리 잡은 조형물은 '청동검과 생명수 나무'를 제목으로 높이가 27m에 달한다. 그 때에도 '신한철의 구'는 하늘 높이 솟은 청동검의 받침으로 쓰였는데, "유구한 역사와 민족의 번성을 기원하는 정화수를 형상화했다." 40대 초반 온 힘을 6.25 상징 조형물에 다 쓴 그는 '생명의 에너지'의 변신을 추진했다. '구의 현대성'의 자기분석에 돌입했고, 그 이미지를 유지한채 그렇게 크고 작은 구 형태의 증식이 시작됐다. "'누구 누구 모작같네'라는 말에 개의치 않아요. 구로 만든 작품은 어쩌면 제프쿤스나 아니쉬 카푸어보다 더 먼저 썼지만 제가 노출이 안된거잖아요." 그는 "나는 구를 발명한 작가"라는 자부심이 있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 조각품 심의할때 원형으로 된 작품은 다 떨어졌을 정도로 '구=신한철'로 각인 됐었다"며 '구 작가'로서 이젠 '구의 변용'을 선언했다 "구는 하나의 오브제이니까 이제는 누구나 쓸수 있는 것이고, 또한 포스트 모던시대에 차용도 예술입니다. 저는 그동안 6m짜리 구도 만들어봤어요. 이젠 구를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기에 이르른거죠." 생명의 에너지를 담은 '구의 변신'은 점점 '신한철'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내 작품은 증식된 형태의 구의 이미지로 만들어진겁니다. 그래서 형태가 같은게 하나도 없어요." 실제로 크고 작고 그보다 작고, 그보다 좀 더 큰 구들로 '증식'한 작품은 서로 뭉쳐 떨어지지 않고 어우러져 '신비의 조합'을 보인다. '생명의 에너지'를 화두로 힘, 운동, 성장, 삶의 순환을 호흡하며 40여년간 자기존재를 확인해온 작가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증식'한 새로운 버전에 "'건강한 생명체'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부조화가 심하지 않나요? 이념, 경제 갈등...조화를 이루려면 계층간, 가족간, 세대간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해야합니다. 이 중 뭐가 하나가 없다고 하면 균형이 깨지는 거죠. 같은 형태 없이도 완벽하게 서 있는 내 작품은 조화이고 공존을 보여줍니다. 다름과 다양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조각가로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공공미술에 취해 갤러리에 들어오지 못한 조각 전시. 그는 15년만에 갤러리에서 여는 전시를 위해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어필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조각은 모두 중력의 시녀다. 세워지는 조각, 그는 모더니즘에서 방향을 찾았다. 구의 형태는 바꿀수 없었다. "작가들이 안 건드린게 뭘까?" 그래서 "결국은 뒤집은 겁니다. '세운다'라는 전통을 깨고 중력을 거슬러 매달은 거죠." 전시장 천장에서 탄생한 듯 거꾸로 매달린 구의 '증식은 SF영화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 같다. 현대적이면서 세련된 분위기로 '시대성을 뛰어넘는 듯한 조화'도 보여준다. 매달렸지만 편안하게 보이는건 그의 '번뇌의 덩어리'가 가벼워진 덕분이다. "알수 없는 과학자처럼 크기와 배치를 면밀히 계산해 나온 작품"이라는 그는 재치있는 시각으로 자신의 조각에 생기를 선사했다. 둥근 오브제에 조화와 공존의 모든 것을 품고 무엇으로도 변태(metamorphosis)하며 반사 반사하는 작품앞에서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왜 작품을 투명하게 하느냐고 물어보는데, 할 말이 있다"며 화랑주를 슬쩍 바라보며 의외의 말을 전했다. "사실, 나는 이것을 움직이게 하고 싶었어요. 관객들이 와서 잡아보고 돌려보다 떨어지면 다시 붙이고, 그런 일이 생겼으면 했는데..." "작품의 본래 형태미만 강조하는 시대는 과거 얘기잖아요. 모두 친절했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신작이 작품이 관객들과 좀 더 가깝게 접근하기를 바랐다. 조각의 무거움과 위엄을 떨쳐낸 작가는 '비싼 작품 만지지 마시오'라는 화랑의 무언의 메시지도 떨쳐내고 싶은 마음이다. "만져보세요. 절대 안 떨어져요. 하하하~" (화랑 주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산뜻하게 변신해 '응시의 진지함'을 다채롭게 반사하는 신한철의 '증식'전은 19일까지 이어진다. 2019/10/10
[박수근 작품 TOP 10]낙찰총액 191억...김환기·단색화에 밀려 6위 '박수근 불패' 시대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3년전인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장. 시작가 33억원에 출발한 이 작품은 경합이 붙었다. 37×72㎝(20호)에 6명의 여인이 빨래터에 나란히 앉아 빨래를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추정가는 35억. 전화 응찰자들의 경합이 이어지면서 순식간에 가격이 치솟았고, '45억2000만원'에서 멈췄다. 장내는 숨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45억2천만원에 낙찰됐습니다. 탕탕탕~! 망치소리가 울려 퍼지고 동시에 박수 소리도 울려퍼졌다. 그림 한점이 45억. 천둥번개가 친 것처럼 미술시장이,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이었다. 이전 박수근 최고가는 그 해 3월 7일 K옥션 경매에서 25억원에 팔린 1961년 작품 '시장의 사람들'(24.9×62.4㎝)이었다. 이때부터 미술시장은 천지개벽했다. 2006년부터 꿈틀대던 미술시장에 그야말로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45억 빨래터'는 큰 손들의 지갑을 빨아들였다. 너도 나도 그림을 사 '아트 테크' 신조어도 생겼다. 2006~2007년은 국내 미술시장 최대 호황기였고, 그 중심에 박수근(1914~1965)이 있었다. '국민 화가'와 '비싼 화가'의 타이틀을 거머쥔 박수근 '빨래터'는 그러나 시작이자 끝이었다. 45억 낙찰의 기쁨도 잠시, 위작의 도마에 올랐다. 미술품 진위 논란은 법정까지 갔다. 2009년 법원이 ‘진품으로 추정된다’고 판결하면서 일단락됐지만 '위작 의혹'은 깨끗하게 씻어내지 못했다. 이후 박수근 그림은 힘이 빠졌다. 최고가 기록을 보유했지만 점점 시들해졌고 13년째 그 기록은 갱신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다시 최고가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2007년 25억에 낙찰된 박수근의 1961년작 ‘시장의 사람들’이었다. 2018년 K옥션 11월 경매에서 시작가 39억원을 넘지 못하고 끝내 유찰됐다. 박수근의 45억 2000만원 빨래터는 현재 김환기(1~6위, 8위, 10위)에 밀려 국내 미술품 최고가 9위에 자리하고 있다. #박수근의 낙찰가를 분석하면서 놀라운 기록도 발견했다. '45억 박수근' 신기록 당시, 김환기가 조용히 치고 오르는 중이었다. 2007년 45억으로 떠들썩할때, 김환기1957년작 구상화 '달과 항아리'가 30억5000만원에 낙찰되어 작가 기록을 경신하고 있었다. 이후 김환기는 13년간 밀물이 되어 국내 미술시장을 점령했고, 작가 신기록 11년만인 2018년 5월, 85억 낙찰로 국내 미술품 최고가를 자체 경신했다. '위작 의혹'이 폭탄이 된 박수근과 달리, 김환기는 현재까지 위작 의혹없이 자체 발광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점이다. 박수근은 8년간 지킨 1위 자리를, 2015년 빼앗긴 후 다시 못찾고 있다.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47억에 낙찰된 김환기가 매년 최고가 기록을 5차례나 갱신하면서 85억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박수근은 '국민화가'다. 오는 10월 2일 여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 한국적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작으로 출품된다. 박수근이 1960년대 초반에 그린 유화 ‘공기놀이하는 아이들’(43.3×65㎝)이 25억에 경매에 오른다. 2009년 4월 서울옥션 부산경매에서 20억원에 낙찰받은 작품으로 10년 만에 다시 경매시장에 나온 박수근 특징이 함축된 희귀 작품이라는 평가다. 거래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지난 5년간 박수근의 작품은 163점이 경매에 나와 123점이 팔렸다.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5년간 박수근 작품은 약 190억원의 낙찰총액으로 6위를 기록했다. 이는 서울옥션·케이옥션등 국내 미술품경매사 10여곳에서 거래한 낙찰가를 분석한 결과다. 이같은 내용은 뉴시스가 국내 언론 최초로 개발한 작품가격 사이트인 '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 현재까지 팔린 123점중 이우환의 최고가 TOP 10를 집계했다. (그래픽 참고) ▲1.박수근 앉아있는 소녀1960년대캔버스에 유채 74×52.5cm 19억5923만원, 서울옥션 홍콩 2015.10.05 ▲2 박수근 목련 1964 캔버스에 유채 27×54cm 16억4530만원, K옥션 홍콩 2015.05.31 ▲3 박수근 Under Trees 1961 보드에 유채 37.5×26cm 10억5000만원, 서울옥션 2018.09.12 ▲4 박수근 아이 업은 소녀, 하드보드에 유채, 38.2×17.5cm 9억5000만원 서울옥션 2016.03.16 ▲5 박수근 모자 1964 하드보드에 유채 34.2×20.2cm 8억3000만원 K옥션, 2015.12.15 ▲6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캔버스에 유채 33×21cm 8억 서울옥션 2018.12.13 ▲7 박수근 an Old Tree and Children 1964 하드보드에 유채 29.5×21cm 7억2936만원 서울옥션 홍콩 2016.05.29 ▲8 박수근 귀로 1964 하드보드에 유채 16.4×34.6cm 6억8000만원, K옥션2019.05.22 ▲9 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26.3×21.5cm5억8000만원 서울옥션2018.06.20 ▲10 박수근 집골목 (창신동 풍경) 1960 패널에 유채 21.5×26.5cm 5억3000만원 서울옥션 2019.03.12 ★박수근 관전 포인트: 최고가 10순위를 살펴보면 국내 7건, 해외(홍콩)기록은 3건이다. 결국 박수근은 내수시장에 절대 강세라는 점을 보여준다. 미술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시기는 60년대 초반 작품이다. ‘박수근표 마티에르’ 기법이 완성된 시기다. 화강암 표면같은 거친 질감이 특징이다. 5년간 10순위를 소재별로 나눠 보면 나무와 여인(3,6,7,8위)과 목련(5건), 여인(4건) 풍경(1건)으로 나타나, 박수근의 작품가격을 리드하는 소재는 나무와 여인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절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느티나무는 양구 고향마을에 있는 일명 ‘박수근 나무’다. 박완서 소설 ‘나목’에도 나온다. 그의 나무는 전후 세대에서 제 목소리 못 내고 존재감 없었던 ‘남성’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반면, 여성은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는 아이콘이자 주인공으로 읽힌다. 아이를 업고 일하는 엄마의 모습은 비참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상징적이고, 등에 업히거나 노니는 아이는 ‘새로운 희망의 아이콘’으로도 해석된다. 생계가 어려웠던 박수근은 생전 잘 팔렸던 고정적인 소재를 즐겨 그려, 엇비슷한 구성과 유사한 소재의 그림이 여러 점인 경우가 있다. 빨래터 시리즈, 나무와 여인 시리즈, 시장의 여인 시리즈 등이 해당한다. 특히 빨래터 시리즈는 오랜 기간 위작시비에 시달리기도 한 만큼 감정을 꼭 거쳐야 한다. 박수근의 더욱 많은 작품 가격은 뉴시스가 국내 언론 최초로 개발한 작품가격 사이트인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뉴시스가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MOU를 맺고 23일 선보인 작품가격 사이트에는 국내 경매사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국내외 주요작가 200명의 작품가격을 제공한다. 작가당 5년간 거래 이력이 담긴 2만2400점의 가격을 한 눈에 파악 할 수 있다. 10만원에 거래된 이중섭의 황소 판화부터 김환기의 85억3000만원짜리 붉은 점화까지 작품가격이 총망라되어 있다. #클릭☞ 2019/09/26
BTS RM이 광팬...이우환은 누구 이우환 화백(83)이 '흐뭇해했다'고 하니 그의 소개는 아이돌을 앞세워야 겠다. "잘 보고 갑니다. 선생님. 저는 ‘바람’을 좋아합니다” BTS 랩몬스터 RM이 지난 6월 부산미술관 이우환 공간을 찾아 남겨둔 방명록이 화제가 됐다. 부산 팬 미팅 공연을 앞두고 매니저 한 명과 조용히 이우환 공간을 찾았다. 미술관측에 사전 연락도 없는 방문이어서 수석큐레이터 정종효 학예실장은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음에는 먼 발치에서 그의 뒤를 따르다, 필요하면 작품 설명에 도움을 드리겠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는데, "그가 해박한 미술지식을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단순하게 찾은 미술관 관람이 아니었다. 정종효 실장에 따르면 RM은 이우환의 광팬이었다. RM이 최근 이우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프랑스 퐁피두센터 메츠를 가려다 이름이 헷갈려 파리 퐁피두센터로 갔다'고 얘기를 했다는 것. 부산미술관에서도 이우환 작품에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는 BTS RM은 이우환의 바람시리즈를 보면서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고뇌를 고스란히 느꼈다"고 전했다고 한다. (RM이 다녀갔다는 입소문이 나자 미술관 관람객이 4배나 늘었다는 후문이다.) 1994년생, 25살 BTS RM. 그는 어떻게, 그렇게 느낀 것일까? 이우환 화백은 “나의 작품은 무한으로의 통로이며 그 문이다"라고 했지만, 평범한 사람은 그의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그림은 쉬워 보이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다. 점 하나가 있거나, 선을 쭉쭉 그어놓거나, 선들이 바람처럼 움직이는 그림. 대체, 무슨 그림인지 알아먹지 못하는 그림이라는 눈치가 다수다. 그런데,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RM이 좋아한다는 '바람'은 이우환 작품중에서도 현재 최고가로 등극한 '바람 시리즈'다. 이우환의 지난 5년간 최고가는 16억6100만원에 팔린 1990년 제작된 '바람과 함께(With Winds)'다. 2017년 3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낙찰됐다. "창의성 유지를 위해 박물관도 가고 공원도 가고 그런다"는 RM이 반한 화가 이우환은 누구인가. 국내 생존 작가중 가장 비싼 작가다. 김환기에 이어 낙찰총액 2위에 올라있다. 지난 5년간 이우환의 작품은 556점이 경매에 올라 453점이 낙찰된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5년간 이우환 작품은 약 556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서울옥션·케이옥션등 국내 미술품경매사 10여곳에서 거래한 낙찰가를 분석한 결과다. 이같은 내용은 뉴시스가 국내 언론 최초로 개발한 작품가격 사이트인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의 모든 예술은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일종의 ‘암시’다. 점은 그림이 아니라그려지지 않은 여백을 인식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표식일 뿐이다.” 한국 추상미술 거장으로 불리는 이우환은 일본의 전위미술 운동인 모노하를 이끌며 일본에서 자생한 한국 작가로 유명해졌다. '만들지 않는다'에 초점을 맞춘 '모노하(mono-ha·모노파 物派)' 작가였다. 처음엔 인정받지 못했다. 돌, 나무, 흙, 철판 등의 사물에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표현하는 그들을 향해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는 "모노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지 사물을 주변에 던져놓을 뿐"이라고 치부할 정도였다. 창조하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새롭게 제시하는 작품. 그는 미리 예견했을까? '궁극의 단순함이 미학인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50여년째 '모노하' 개념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세계 미술계의 러브콜을 받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종횡무진 전시를 이끌고 있다. 2011년 백남준에 이어 한국 작가로는 두번째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고, 미국 뉴욕 모마, 프랑스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펼쳤다. 세계미술계를 휩쓰는 작가지만, 굴욕의 시기도 있었다. 유명세를 더 획득한 양날의 칼 같은 일이었다. 미술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눈도장을 찍은 건 '위작 사태'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도 아이러니하다. 그는 그때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고 싶게 만드는 대목이다. 2016년 6월, 이우환이 서울경찰청에 들어서는 순간 기자들이 몰렸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총알처럼 빗발쳤다. 위작 논란을 빚은 작품 13점을 최종적으로 살펴본 후 진위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참고인 겸 피해자 신분으로 출석하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맞다"고 거듭 주장하면서 버럭 화를 냈다. 진위에 대한 기자간담회에서도 그는 흥분도를 낮추지 못했다. "국가 권력과 합세해 한 작가를 떡을 만들었다"고 분통을 터트렸고, "내 말을 믿지 않고 이상한 사람들의 말만 자꾸 믿고 있다"면서 "분명 내 작품이 맞다"고 했다. 이 장면은 TV 방송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고집쟁이 할아버지'같은 모습으로 이 사건 이후 '버럭 화백'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큰 화면에 '점 하나'만 있는 대화(Dialogue)연작이 미술계에서 인기 있는 시기여서, 단정하고 세련된 그림과 다른 화백의 모습에 충격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다. 2016년 당시 이우환은 "내 작품이 맞다"며 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위작 의혹 13점을 진품으로 확신하는 것은 '저만의 호흡, 리듬과 색채로 그린 그림 작품'이라고 했다. 이우환 위작 사태는 그의 이름처럼 '미술시장에 우환이 났다'고 할 정도로 논란이 됐다. 천경자 사태와 비견됐다. 감정위원들이 '진품'이라고 할 때, 천경자는 "내 작품이 아니다"고 했고, 이우환은 감정위원들이 '가짜'라고 하는데 "내 작품"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나만의 호흡, 리듬과 색채로 만든 분명한 나의 그림"이 뒤통수를 쳤다. 이 화백의 주장과 달리 1년 후인 2017년 8월 이우환 작품 위작범과 화상은 중형을 피할수 없었다. 이들이 화상등 컬렉터들을 속여 판 작품값은 총 52억원어치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이 화백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등을 모사한 총 9점이었다. 위작문제는 미술시장 존폐에 관한 문제다. 이우환 위작 사태를 기점으로 시장 자율에 맡겼던 정부가 칼을 빼들었다. 위작은 화가 개인뿐만 아니라 시장 전체 결국 국격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우환 위작 논란'이 뜨거웠던 건 그의 작품이 내수용이 아닌 해외용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2007년부터 급부상한 '이우환 그림'은 삼성의 후원을 받아 2014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개인전을 열 만큼 세계 미술계의 러브콜을 받았다. 'K-아트'의 선봉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존재감을 과시했었다. 이우환 화백이 "틀림없는 내 작품'이라며 위작 논란에서도 그가 외친 건 "국제적으로도 작품거래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는 항변이었다. 백남준 이후 세계적인 작가로 등극한 이우환 화백에게 떠들썩한 위작 사건은 그야말로 '나라 망신'이라는 자괴감이었다. 반면 위작논란은 그를 더욱 올려세웠다. 그림은 작품값이 떨어지지 않았고 경매시장에서도 낙찰총액이 급상승했다. 위작시비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2015년에는 한 해 낙찰총액이 117억5000만원을 기록했다. 2014년부터 매년 평균 80% 이상의 낙찰률을 보이며 올해도 이우환 작품은 강세다. 다만 위작이 나왔던 '선으로부터', '점'으로부터 시리즈는 매물이 자취를 감췄고, '바람 시리즈'가 고가 낙찰을 기록하고 있다. 선들이 휘몰아치는 '바람'은 따라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현재까지 이우환 작가 최고가는 2012년 홍콩 경매에서 기록된 1977년 작 '점'으로 21억3000만원이다. '위작 논란'만 불거지지 않았어도 '김환기 독주'를 막을 '블루칩 작품'이었다는 반응이 우세하다. 이 화백은 프랑스 퐁피두센터 메츠에서의 회고전과 상하이 당대예술박물관에서의 3인 기획전에 이어 뉴욕 디아비콘 미술관에서 1년 예정으로 전시를 열고 있다. 전속화랑인 국제갤러리에 따르면 이 화백은 현재 미국 워싱턴의 허쉬혼 박물관 조각정원에서도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있다. 2020년 9월 1일까지 여는 ‘이우환: 열린 공간’전은 미국에서 최대 규모로 열리는 전시로, 박물관 야외 공간 전체를 작가 1인의 작품으로 채우는 것은 허시혼박물관이 1974년 개관한 이후 처음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표작 ‘관계항(Relatum)’ 시리즈의 새로운 조각 작품 10점과 회화 시리즈인 '대화•Dialogue' 4점을 선보였다. 대형 개인전을 잇따라 열고 있는 그를 지난 8월 미국 월스리트저널이 특집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미국 롱아일랜드의 거대한 채석장에서 돌을 찾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기사는 채석장을 빠르게 움직이며 원하는 돌을 찾았고 가끔 손으로 지시를 할 뿐 말은 별로 없었다는 이우환의 작업세계를 보여주며 돌과 바위에 집착하는 이우환의 내면속 이야기를 전했다. 이우환은 어린 시절 고향 함안에서 경험한 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매우 맑고 오염되지 않은 냇가가 있었다. 친구들과 냇가에서 수영을 했고 자주 바위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위에 대한 경험은 내가 읽고 쓰기를 경험하기 훨씬 이전부터 항상 내 속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버럭 화백'의 반전같은 모습이다. 따지고 보면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가식적인 모습을 만들지 못하는 순수한 화가로 이해된다. 화를 내면 바로 표가 나는 그와의 에피소드를 전한다. 지난 2011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때다. 3m에 육박하는 하얀 화면 아래쯤에 회색의 네모난 점(대화-Dialogue)이 하나 있는 그림이었다. 노동집약적인 극사실화보다 너무나 쉬워 보이는 그림 앞에서 질문했다. "이 점은 얼마만에 그린 거에요?" 그러자 그가 순식간에 화를 냈다. 그런 무식한 질문이 어디있냐고. 얼굴이 상기된채 한 참을 바라보던 그는 손을 턱에 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도 얼마만에, 몇시간안에 그리는지를 재차 물어보자, 그가 말했다. '1분이 걸릴 수 있고, 한달이 걸릴 수 있고 1년이 걸릴 수 있다'고. 이우환은 절제와 공존을 지향하는 예술 세계를 펼쳐오고 있다. 그는 "세계가 인간의 손으로 변화하지 않는 사물들로 세워졌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철학은 예술의 자양분이다. 화가이며, 조각가이자, 평론가, 철학자, 문학가, 음악 애호가다. 그는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을 다녔다. ‘미학이나 사회 사상사를 튼튼하게 알아놓아야 나중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마르틴 하이데거, 미셀 푸코, 자크 데리나, 모리스 메를로 퐁티 등의 철학을 공부했다. 1936년 경남 함안태어나 문인으로 알려졌던 황동초(黃童樵, 동초 황견용 선생, 방랑화가, 민화가)로부터 유년기를 통해 시, 서, 화를 배웠다.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196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교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도쿄 사토화랑에서 새로운 시도에 의한 개인전 이후 전위적인 예술 표현을 추구하면서 국제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69년 '사물에서 존재로'라는 논문으로 일본 미술 출판사 예술평론상을 수상했다. 유네스코 미술상(파리), 호암상(서울, 2001년), 세계문화상(13th Praemium Imperiale (Painting), 도쿄, 2001년)등 여러 미술상을 수상, 2007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을 받았다. 이 화백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신있게 말했다. "나의 그림은 끊임없는 반복의 수련가운데 무한이 숨쉬게 되고 기가 충만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림과 공간과 당신이 만나면 신기한 생명의 파장이 여울지는 설렘의 우주가 열릴 것이다." 세계를 누비며 '설렘의 우주'를 열고 있는 RM이 이우환 화백과 통한 것일까? 이우환은 자신의 행위와 외부의 주어진 사물 간의 생산적인 대화에 관심을 갖는다 "전시 공간에서 작품과 마주할 때, 아마도 당신은 긴장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품고 있는 신기한 우주를 느낄지 모릅니다. 요컨대 더 높은 차원의 공간, 무한의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느낌은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고자 노력하는 관계(Relationship)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의 작업은 하나의 특성(Identity)를 재현(Present)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세계와의 만남(Encounter)과 조응(Correspondance)입니다.” "대체 이 점은, 이 돌은 뭐지?"라는 생각이 예술과 '조응'의 시작이다.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파장의 에너지가 강렬한 그의 작품세계가 '대화'를 원하고 있다. 한편 이우환 화백의 5년간 거래된 556억어치, 453점의 작품값은 뉴시스 작품가격 사이트 )'에서 확인 할 수있다. 'K-Artprice’는 국내 경매사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국내외 주요작가 200명의 작품가격을 제공한다. 작가당 5년간 거래 이력이 담긴 2만2400점의 가격을 한 눈에 파악 할 수 있다. #클릭☞ ) 2019/09/25
'85억' 미술시장 황제주...김환기는 누구인가 21세기 한국미술시장 ‘황제주’로 등극한 김환기(1913~1974)가 살아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64년전인 1955년 3월,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그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작정한 다음부터는 마음이 편안하다"면서 "혹시 전람회장에서나 그 밖의 어느 기회에 내 그림의 가격을 물어 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 그림은 안 팝니다' 이렇게 똑똑히 대답하는 것이, 또 대답하고 나서 내 마음은 어찌나 통쾌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림을 안판다'고 말한 것을 통쾌한 일로 여겼던 김환기였다. 그런데 이젠 '안팔수 없는 그림'이 됐다. 매월 경매때마다 그의 그림이 출품된다. 김환기의 작품은 지난 5년간 580점이 경매에 올라 453점이 팔린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5년간 김환기 작품은 약 1413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서울옥션·케이옥션등 국내 미술품경매사 10여곳에서 거래한 낙찰가를 분석한 결과다. 이 같은 내용은 뉴시스가 국내 언론 최초로 개발한 작품가격 사이트인 'K)'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십억대로 치솟는 그림값 속에 타이밍을 노리는 '우량주'는 여전히 숨어있다. 좋은 작품은 아직 안나왔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미술시장을 이끌고 있는 김환기는 누구일까? 큰 키에 선비같은 모습, 멋쟁이 화가였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수화 김환기 형이 기세했다는 전갈을 듣는 순간에도 나는 '멋'이 죽었구나, '멋쟁이'가 갔구나 하는 허전한 생각을 먼저 했었다"면서 "그의 껑청거림이나 음정이 약간 높은 웃음소리나 말소리의 억양도 멋의 소산이라고 할 만큼 그는 한국의 멋으로만 투철하게 60평생을 살아나간 사람"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우리나라 대표 그림으로, 대한민국 미술문화 국격을 높이고 있는 김환기는 그러나 한국에 없다. 그는 미국 뉴욕 맨해튼 북쪽 외곽에 있는 묘지에 이름만 남아 참배객을 맞는다. 그 옆에는 2004년 3월 그를 따라간 부인 김향안(1916∼2004) 여사도 나란히 묻혀 있다. 김향안은 시인 이상의 부인이었다 이혼하고, 김환기와 재혼했다. 아낌없는 내조를 펼쳤던 김향안은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후 김환기 예술의 가치와 영향력을 보존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78년 국내 처음으로 공익재단인 환기재단을 설립했고, 환기미술관을 지었다. 지금의 '김환기 시대'를 맞게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다. 1974년 7월 25일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樹話) 김환기는 뇌일혈로 별세했다. 그 해 7월 7일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뉴욕의 한 병원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1913년 2월 27일 전남 신안 섬에서 태어난 수화 김환기는 '화생화사(畵生畵死.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는)' 떠돌이 인생이었다. 외국에서 삶을 살았지만 한국적 예술혼을 놓지 않았다. 부농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잠시 서울 중동 중학에 진학하기도 했으나 1931년에 일본에 가 도쿄의 니시키시로 중학을 다녔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 들어가 졸업했다. 일본, 프랑스, 미국 등 해외에서 두루 활 동을 하며 한국 근현대 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에서 처음 참가한 작가다. 이때 출품한 작품으로 한국인 최초 명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베니스비엔날레, 휘트니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히는 상파울루비엔날레를 경험한 김환기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는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 광복, 6·25전쟁 등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21회의 개인전을 가지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1959년 귀국해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과 홍익대 미대 학장으로 화단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러나 김환기는 과감했다.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는(知天命) 50의 나이에 한국에서 쌓아온 모든 지위와 풍요와 안정을 버리고 뉴욕으로 갔다. 이곳에서 작고할 때까지 11년 동안 단색조 화면에 같은 단위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 표현하는 점화를 그렸다. 김환기는 '이중섭의 친구'로도 유명하다. 이중섭,장욱진, 백영수, 유영국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한 '모더니스트'였다. 조형적으로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요소의 현대적 번안을 연구한 작가로 국내 화단에서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또한 단색화 열풍 멤버인 윤형근(1928~2007)화백의 장인으로,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했다. 서울대 스승과 제자로 만나, 사위와 장인 사이가 되었지만, 윤형근은 장인이 아니라 평생 '아버지'로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서양적 추상화의 기법을 사용하여 한국적 정서를 서정적 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구현해 냈다고 평가 받는다. 특히 한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후대에 남긴 독보적인 존재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종일 작업에 몰두했다'고 알려진 김환기 화백이 남긴 작품은 현재 1000여점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중섭 화백(총 500여 점 이하 추정), 박수근 (유화 기준으로 200여 점, 총 1000여 점 이하로 추정)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규모의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추상 미술의 태동 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현재 미술시장에서 초강세를 보이는 '전면점화'시리즈는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뉴욕시절에 제작됐다. 점화는 1970년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전면추상회화로 도약한 작품으로 21세기 한국미술의 대표 작품으로 우뚝 선 그림. 그 작품은 뉴욕의 좁은 화실에서 김광섭의 시를 읊으며 점(點)을 찍었다고 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점화는 김환기의 열정적인 종이 매체 탐구로 나왔다. 수많은 종이 작업의 내공 속에서, 커다란 캔버스를 가득 메운 점화의 경건한 감동의 세계가 필연적으로 탄생된 것이다. 전면점화는 맑고 투명한 액체가 종이에 머금으며 마치 화면에서 서서히 새어 나오거나 뿜어나오는 듯 보이는 성질을 그대로 살린 기법이 특징으로, 해외 평론가들은 ‘전면 점화’를 '동양적 추상화'로 평가하고 있다. 1967년 뉴욕에서 김환기는 ‘종이’를 발견했다. 전면점화의 태동이다. "1월 2일. Oil on Paper를 캔버스에 옮겨서 완성. 이 해의 첫 작품인 셈. 선(線)인가? 점(㸃)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 1월 23일. 나는(飛) 점(㸃),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 이런 걸 계속해보자." "2월 20일. 종일 Oil on Paper를 정리하니 꼭 90점이다. 내일 현대미술관에 가기 위해서다. 밤새 아트 인터내셔 널(Art International)과 스튜디오 인터내셔널(Studio International)을 뒤적이다. 예술도 역시 유행이다."(1968년 김환기의 일기 중에서) "1968년대 뉴욕 타임스는 지질(紙質)이 오늘보다 훨씬 좋았다. 하두 종이가 좋아서 신문지에 유채를 시도한 김환기는 종이가 포함한 기름과 유채가 혼합되어 빛갈에 윤기가 돌고 꼭 다디미질한 것 과도 같은 텍스츄어가 나오는 것이 재미난다면서 한동안 종이에 유채작업에 몰두했다. 1967년 말에서 1968년 1,2,3개월동안, 하루에 평균 10여장씩의 작업을 계속했다. 수화는 그 중에서 몇 장을 골라서, 하얀 백지를 사다가 배접을 해서 유리틀에 끼어 보았다. 자기도 놀라게 우수한 작품이었다. 신문지 위에 작업을 충분히 시도하고는 종이에 유채를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다시 캔바스 위에 작업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 배접을 하다말고 그대로 둔 40점을 꺼내서, 종이 보관을 위한 과학적인 과정을 거쳐서 배접을 시켜, 유리틀에 끼다. 종이가 유리에 닿지 않도록 막음 틀을 사이에 끼어서 그림과 유리 사이를 뜨게 하다. 그림은 어제 그린 것처럼 싱싱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1990년 김향안 에세이중에서)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로 예술혼을 바친 김환기는 한국 미술사에서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시대, 왜 '김환기'일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언제나 어제 그린 것을 보는 것만 같은 감동이 일어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든 명화는 현재형으로 다가온다"고.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한편 김환기의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5년간 낙찰된 453점의 작품 가격은 뉴시스가 국내 언론 최초로 개발한 작품가격 사이트인 )'에서 확인할 수 있다. 'K-Artprice(k-artprice.newsis.com)'는 국내 경매사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국내외 주요작가 200명의 작품가격을 제공한다. 작가당 5년간 거래 이력이 담긴 2만2400점의 가격을 한 눈에 파악 할 수 있다. #클릭☞) 2019/09/24
'현대미술 주술사' 양혜규 "접혀진 시간을 폈다" 20세기 유럽 미술계 최대의 문제적 비평가 ‘마테오 마랑고니’는 '회화는 오직 지성만이 감지할 수 있다'고 했다. 미술 대중화 시대에 '어이가 없네~'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유명 작품일수록 해석과 해독이 쉽지 않다. 언어 번역기가 등장한 21세기 최첨단 시대지만 현대미술은 점점 더 '현대인도 못 알아 먹는' 태세다. ‘미술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고대부터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제다. '명화는 아무에게나 말을 걸지 않는다'며 그들만의 리그를 굳건히 하고 있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로 부상한 양혜규(48·독일 슈테텔슐레 교수)의 작품이 그렇다. 처음부터 쉽게 문이 열리지 않는다. 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이후 4년만에 다시 온 그녀의 작품은 더욱 더 혼란스럽다. 국제갤러리에서 처음 펼치는 개인전이 3일 개막한다. 전시 제목은 '서기 2000년이 오면'으로 전시장은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혼돈의 무대다. 현실과 상상이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5m 높이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월페이퍼'에는 마늘, 고추, 짚풀, 불, 소나무, 로봇수술기계 그림들이 하나로 엮어져 전시장을 점령했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방울, 흰색의 대형 블라인드 설치물과 회색의 짐볼이 지구 행성처럼 놓여진 전시장은 희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깔려 압도적인 분위기에 신비함을 고조시킨다. 2일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만난 양혜규는 주술사 같았다. 길게 푼 머리,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의 반은 붉은 색으로 페인팅을 했다. 마치 붉은 마스크를 쓴 것 같은 모습인데, 옆에서 보면 하트 모양으로 보인다. 페이스 페인팅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라는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이 말이 입에서 나오자 세상 무서울 것 없을 것 같은 전사 같은 외모 뒤의 양혜규의 내면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고민 한 것은 '솔직함'이다. 기대에 부응하기 보다 솔직하려고 했다"는 그는 "이번 전시는 양혜규라는 작가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리얼리티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양혜규의 1977년부터 과거부터 2000년대, 현재의 시간이 녹아 있는 이번 전시는 가수 민해경이 1982년에 발표한 노래 '서기 2000년'에서 비롯됐다. 그때는 미래였지만, 지금은 과거인, 그러면서 여전히 미래인 그 노래는 경쾌한 후렴구가 강렬하다. '사바 사바 사바 우리는 행복해~다가오는 서기 2000년을, 모든 꿈이 이뤄지는 해~ 사바 사바 사바 우리는 기다려~' "전시에 들어오기전에 그 노래(유행가)를 들으시고, 전시장에 들어 오시라. 그러면 오른쪽에 제가 동생들과 1977년에 그린 '보물선' 그림이 붙어있다. 시조새와 도깨비들도 등장한다. 그때 어린애가 그린 그림속 시간과 지금의 공간이 섞여 전시를 이끈다” 양혜규는 "기존의 전시에 쓰지 않았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유행가도, 어린시절에 그린 그림을 가져온 것도 처음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2015년 짚풀 작업을 처음 했을때도 지속적인 조각의 군이 될지 일시적인 프로젝트성 작업이 될지 몰랐다. 이런 작품을 계속 할지는 살아봐야 할 것 같다. 하하" 작업은 계속 변화되고 있다.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집적'거리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2011년 '축지법'을 타이틀로 한 전시를 하면서 축지법이라는게 공간 이동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전환'이라고 깨달았다. "가짜일수 있는 논리적인 세계를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서 쉽게 조합할 수 없는 투샷, 이형조합에 관심이 많다" 지역적 경계를 넘어 과거와 현재, 기술과 문화, 자연과 문명이 융합된 벽지 작업 '배양과 소진'은 문화와 민속에 대한 기존 분류법에 반하는 양혜규의 경계없는 순환적 고리가 이어지는 융복합 시선이 담겼다. 초록의 소나무들이 구렁이처럼 넘나들며 환각처럼 이어지는 벽지 작업과, 수많은 방울이 모여 거대한 방울로 움직이는 전시장은 그나마 '새 소리'가 반갑게 들린다. 무엇인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기쁨의 소리'이기도 하다. '새 소리'는 양혜규가 병치한 시공간을 우리도 열어볼 수 있는 흔적이자 기록이다. 그 소리는 일명 '도보다리 회담'의 장면으로 우리를 이동시킨다. 그때, 양혜규는 7시간 늦게 독일에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생중계를 보며 작업실도 안가고 시공간에 빠져들었다. 새 소리만 들리던 그 시간, 21분 정도 분량이었다. 양혜규는 "그 장면을 어떤 매체에 따르면 달 착륙 이후 세계가 실시간으로 봤던 중계방송이라고 하더라"며 "그때 그 장면에 압도됐었다"고 했다. "도보다리에서의 장면, 일종의 림보, 천국과 지옥 사이 중간에 있는 연옥 같은 느낌이었다" 양혜규는 "5000명 가까운 외신기자들이 세계 방방곡곡에 쏘아됐던 중계방송을 시청했지만, 그때 나는 카메라가 보는 시간을 살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새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정적, 굉장히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인데, 그것을 뛰어넘는 국면이 자극적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이번 전시 작품에 들어온 '새 소리'는 시작도 끝도 알 수없는 시공간속 이미지속에서 '현실 세계'임을 증명한다. 작가의 설명을 들어보면 작품의 길 눈이 터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의 문은 쉽게 열리려 하지 않는다. 현대미술은 난해함이 대세이지만, 일부러 어렵게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대체 무슨 작품?, 무슨 의미?' '이런 작품을 왜 하는 거야?'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는 양혜규는 왜 이런 작품을 하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살고 싶어서 한다"고 아리송한 답을 했다. "'미술 골수'로서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양혜규는 전시를 하기까지 한권의 책 만큼 연구하고 공부하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미네아폴리스 워커아트센터, 런던 테이트 모던, 파리 퐁피두센터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1년생, 1990년대까지 서울에서 살다, 독일로 건너갔다. 1994년 독일로 이주 후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학교 슈테델슐레(Städelschule)에서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모교인 슈테텔슐레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독일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볼프강 한 미술상을 수상, 이어 10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수여하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 표창)’ 미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전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한국 작가' 양혜규로 이름을 알렸다. 사우스 런던 갤러리(2019), 몽펠리에 라 파나세 현대예술센터(2018),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2018), 베를린 킨들 현대미술센터(2017), 파리 퐁피두센터(2016), 베이징 울렌스 현대미술센터(2015),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2015),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근현대미술관(2013), 독일 하우스 데어 쿤스트 뮌헨(2012), 미국 아스펜 미술관(2011)과 워커 아트 센터(2009) 에서 전시했다. 특히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단독으로 전시한 양혜규는 시드니 비엔날레와 리버풀 비엔날레(2018), 제12회 샤르자 비엔날레(2015), 타이베이 비엔날레(2014), 제13회 카셀 도쿠멘타(2012), 광주비엔날레(2010)와 같은 대형 국제전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세계에서 전시 러브콜이 이어진다. 오는 10월 21일 열리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 재개관전(현대카드 후원)과, 11월 2일 마이애미 배스미술관에서 개인전 '불확실성의 원뿔 In the Cone of Uncertainty'이 이어진다. 오는 2020년 여름 영국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분관에서 예정된 개인전 등 양혜규의 활동은 북미와 유럽을 아우르며 폭넓게 진행될 예정이다. SF나 심령 영화처럼 이미지가 펼쳐지는 전시장에서 양혜규가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90년대 초까지 산 한국은 생생한 시간이다. 90년대 중반부터는 전후가 다른 시공간을 산 것 같다. 독일로 가면서 제 3세계로 온 것 같았다. 그때는 어린 20대였는데 독일 할머니 전후 세대가 가진 멘탈을 가졌다고 느꼈다"고 했다. 메트릭스 같은 세상. "굉장히 평범할 수 있는 유행가 안에서 접혀진 시간들을 봤다"는 양혜규의 이번 전시는 '시간은 연속적인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2차원의 이미지를 보며 3차원 4차원의 시공간으로 갈 수 있는 건 축지법이 아니라 '생각의 전환'이다. 과거로 접어놨던 시간을 납작하고, 입체적으로 펴낸 이번 작업은 우리가 경험한 것들을 환각처럼 일깨우는 장치다. 뒤죽박죽한 이미지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뒤척이게 하며 촉수를 세우게 한다. 그런면에서 양혜규는 영악한 현대미술 주술사다. 전시는 11월17일까지. 2019/09/02
'시간여행자' 노은님 "화가 팔자" "아무 불편함없이 세상을 반바퀴 돌았어요. 가는데마다, 돌아다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만나면 편했고. 그렇게 돌다보니 세상이 보였어요. '세계가 한 마음 마을'로 사는 것 같아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본대로 느낀대로. 있는대로,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살아왔어요." 파독 간호보조원 출신으로 세계적 화가가 된 노은님(73) 이야기는 '시간여행자'(넷플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아무리 들어도 '신기한 인생'이다. 49년전 병원에서 일하다가 추천서로 미대에 들어갔고, 그림을 그렸다.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 교수를 지냈고, 55세에 독일인 동료 교수와 결혼도 했다. 지금은 독일 서남부 헤센주 미헬슈타트에 1000년이 넘은 고성에 딸린 극장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산다. 한국에서와 달리 독일에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팔자"라고 했다. "독일로 간 것도,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화가 될 팔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림도 주인 만난다고 하지 않나요?. 아무리 유행해도 자기에 맞는 옷을 찾잖아요. 그림 팔자가 있고, 옷도 팔자가 있어요. 만나는게 모두 그런 인연으로 되니까 나는 일부러 힘쓰고 그런걸 쫒아다니지 않아요." 한국에서 보다 독일에서 더 오래 살고 있는 탓일까. 느리고 어눌한 말투와 어깨를 구부리고 천천히 걷는 '노은임'은 그림을 설명할때 간혹 손목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건강한 모습이다. "우울증도 없고, 병도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보면 할머니 나이인데, '천진난만한 그림' 때문인지 늙음의 궤도를 벗어나 있다. '화가가 된 힘'은 무엇일까. ◆과거: 파독 간호보조원에서 독일 국립 미대 입학 1946년 전주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사업가 아버지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지만,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이 기울었다. 갑자기 어머니마저 돌아가면서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경기 포천 면사무소에 취직해 결핵 관리요원으로 일했다. '시간여행자' 조짐은 우연히 '파독 간호사 모집' 신문 광고를 보면서다. 1970년 스물세살, '파독 간호 보조원'에 뽑혀 세상 처음 비행기에 올라탔다. "불안했어요. 비행기 앞으로 버스가 왔는데, 너는 아니니까 타지 말라고 할까봐, 또 내리라고 할까봐 보따리를 움켜쥐고 있었어요." 그 비행기는 다른 시간속으로 들어갔다. 독일 함부르크 항구 근처 시립병원에서 뱃사람을 돌봤다. 낯선 생활이었지만, 독일인들은 정이 많아 웃고 지낸날이 많았다. 간호 보조원 생활 1년이 지났다. 한국에서 간호사들이 200명이나 들어오는 날이었다. 간호장은 겨우 독일어를 뗀 노은님을 데리고 공항으로 그들을 마중 가면서 "힘있고 일할만한 사람 3명만 골라오라"고 했다. "그때 알았어요. 우리는 수출품이라는 것을..." 독감이 걸렸다. 병석에 누워 출근을 못한 그녀에게 독일 간호장이 찾아왔다. 침대 밑에 숨겨둔 스케치북이 드러났다. "네가 그렸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묻자, 쭈빗거리며 말했다. "네. 병원 근무 외에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그렸어요." 그림을 배운적은 없었다. 독일에 오기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 초상화를 몇번 그려본게 다였다. 간호장은 '사랑'이었다. 1972년 함부르크 시립병원 회의실에 '노은님 그림'을 전시했고 그게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전시 뉴스가 함부르크 지역신문 1면에 났고, 함부르크 국립미술대 교수인 한스 티만(1910~1977)의 눈에 들어왔다. 티만은 바우하우스 출신이자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의 제자로 유명한 화가였다. 노은님이 굵게 쌍꺼풀진 눈을 밑으로 내리며 천천히 말했다. "티만이 그랬어요. 화가로 30년, 교수로 30년 살면서 이렇게 재주있는 사람은 처음봤다"고. "무조건 붙이고, 지원하라". 티만은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에 입학 추천서를 써줬다. "독일은 학비가 필요없지만 티만 교수덕분에 4년동안 계속 생활비를 받고 공부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도 다양한 곳에서 수상을 하고, 예술지원금을 받고 살아 여적지 왔기때문에 경제적인 것에 신경도 안쓰고 관심도 없어요." 나뭇잎과 새를 마음대로 그렸다. 유치원생이 그린 것 같아 창피했던 그림인데 티만 교수는 ‘이게 진짜 그림’이라고 늘 칭찬했다. '3년 계약' 파독 간호사는 한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세상에 없던 그림을 그리는 동양 화가'가 됐다. 독일의 대표적인 미술평론가인 아넬리 폴렌은 “동양의 명상과 유럽의 표현주의를 잇는 다리”라고 극찬했다. ◆현재: 순수의 세계...미헬슈타트 시립미술관에 '노은님 영구 전시관' 한국 여성작가로서는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 최초로 정교수로 임용되어 20여 년간 독일 미술 교육에 기여했다. 또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작품이 수록된 국제적인 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기적은 계속된다. 오는 11월 독일 미헬슈타트의 시립미술관에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영구 전시관도 개관한다. 유럽의 권위 있는 공립미술관이 한국 미술가를 위한 영구 전시실을 내주기는 처음이다. 미헬슈타트 출신 인문학자 니콜라우스 마츠(1443~1513)와 유대학자 젝켈 룁 봄저(1768~1846), 책 디자이너 프리츠 크레들(1900~1973)와 이름을 나란히 하게됐다. 동심이 깃든, 순박한 그림, 아름다운 색감의 물고기를 그리는 화가로 유명하다. "난 독일사람도 아니고, 뭐가 잘못된 게 아닌가 했어요. 그런데 미헬슈타트시 시장이 전화를 걸어와 시립미술관에 기념할 만한 ‘작가의 방’을 만드는데 세계적 미술기관 소속의 선정위원들이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가나아트센터에서 연 전시는 이 기념비적 사건을 맞아 기획된 전시다. '갤러리 현대 작가'로 알려진 것과 달리 "나는 피카소가 아니니 어디든 오라고 하면 간다"며 "대형 회화를 전시하고 싶었는데, 그 뜻이 가나와 맞았다"고 했다. "큰 그림을 많이 그려서인지, 작은 그림 그리기가 더 어려워요." 가나아트는 펑창동 가나아트센터와 이태원 가나아트 한남의 두 전시 공간을 모두 내줬다. 자연과 생명을 주제로 한 1980~90년대의 대형 회화, 그의 예술관을 다룬 바바라 쿠젠베르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테라코타 조각, 신작 회화 등 100여점을 전시, 노은님의 순진무구한 작업을 총망라해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노은님의 70회 개인전이다. 단 한 번의 붓질로 완성된 '뛰는 동물'(1984), 보는 이에 따라 나뭇가지 혹은 사슴의 뿔로도 보이는 형상의 '나무가 된 사슴'(2019), 어둠 속 동물들의 연회를 그린 듯한 '밤중에'(1990) 등의 회화 속 생명체들은 단순하고 거친 선들로 그려졌지만, 일필휘지의 붓놀림이 만들어 낸 원초적인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여 있는 전시는 그야말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노은님은 "생각이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그냥 시작하면 저절로 붓이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림 그리는 일도 낚시와 같아요. 어느 날은 많이 잡히고, 어느날은 안 잡히는 것처럼, 그림도 어느 날은 잘 그려지고, 어느날은 하나도 안그려져요. 한번도 뭘 그리겠다고 그려본 적은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종이에 붓하고 점하나 찍어도 그날 하루가 충분해요." ◆미래: 상어같은 여자 “오직 그림..이렇게 살고 있어 감사" 독일에서 50년째. 함부르크 사람들은 노은님을 ‘상어 같은 여자’라고 한다. "자기들은 피라미라며···"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적게 먹으면 가는 똥 싸고 많이 먹으면 굵은 똥 싸는 거'다. "대학을 졸업하고 5년 가량은 1년에 20회씩 전시했어요.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전시를 왜 이리 많이 하냐고." 미친듯 그림만 그리던 20대는 번민과 방황의 늪에 빠져 있었다. '사람은 왜 살아야 하나?' 16년간 이 물음에 끌려다녔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부러울 정도였어요. 자유를 꿈꿨어요. 한국에 있던 16살때 부터였는데, 내가 누군가 알고 싶고,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인가라는 생각이 서른이 넘어도 계속 됐어요." "독일, 해외에 와서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디로 가서 살아야하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어떤 힘'에 대한 의문이었다. "저는요 항상 궁금한게 있었어요. 우연, 당연, 필연이라는거요. 애기가 왕실에 태어나면 '왕자'가 되고 '임금'이 되고 거지가 아들을 낳으면 거지로 사는지...왜 똑같이 사람을 만들어놓고 누구는 이렇게, 저렇게 되는지가 궁금했어요. 또 누가 이렇게 만들어놓고 처음부터 이렇게 살게 만드는지가..." 파독 간호사로 함부르크 항구 근처 시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큰 배를 항구에 정박시키기 위해 작은 배가 밧줄로 이를 끌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저 큰 배를 움직이는 힘이 어떻게 작은 배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그리고 그러한 힘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 생각은 80년대 화살표 방향으로 그려진 '생명의 시초'에 드러난다. 우주의 시작, 즉 태초란 이러했을 것이라는 작가의 상상력이 담긴 작품으로, 200호의 대형 화면을 가득 채운 화살표들은 각각의 방향으로 흐르는 힘의 양상을 표현한 것이다. 힘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면서 자신은 "나뭇잎에 매달려 나뭇잎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16년동안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벽을 쌓고 방황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새벽에 일어났는데 하나도 막힘이 없더라고요. 시원하게...어머, 웬일인가. 갑자기 몸이 편한걸 느꼈어요" 서른 두살때였다. "모든게 내러티브(Narrative)하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은거죠 .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것을요." '우주의 만물 섭리'를 알았다. "그 이후 여적지 한번도 그렇게 '인생이 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맘대로 살고 있어요. 병도 없고요. 16년간 고생한 보람이기도 한 것 같고, 고생 과정이 있어야 깨닫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운명', '팔자'가 있다고 믿는다. "받아들이니까 모든게 술술 풀리더라고요." "항상 고민하고 번민한 때를 돌이켜보니 남들과 비교를 많이 한거에요. 저 사람은 남자도 있고 돈도 많고, 나는 없는게 더 많은 사람이라고... 제일 멍청한 짓을 한거죠."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지구에서 동식물은 다 똑같이 살아간다는 것을 느꼈다”는 그녀는 "단순하면서도 편한 원시적인(primitive) 것을 좋아해 어느 나라를 가든 민속박물관을 먼저 찾아간다”고 했다. 대학시절부터 아프리카등 세계 여행을 다녔다. 아프리카는 4번이나 다녀왔다. 검은 색과 알수 없는 형상이 '아프리카 미술'을 떠올리게 하지만 검은색은 가장 칠하기 쉬운 색이고, 알수 없는 형상은 점이 이어져 선이 되고, 선이 이어져 새가 되고 꽃이되는 자연스런 행위라고 햇다. "세계를 다녀보니, 동양 서양 모든 사람들은 문화교류 없이도 똑같은 생활습성을 갖고 있어요. 예술가로 살아가는게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가기위해 본능적으로 뭘 만드는 거에요." 힘의 근원인 '생명'은 물, 불, 공기, 흙. 4대원소가 꼭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작품안에는 새이면서 물고기이고, 벌레같은 불가사의한 형상들이 자유롭게 이어지고 뭉쳐지고 풀어진다. 동물과 식물, 인간 혹은 사물들을 실제와 같이 재현하거나 만들어내려는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체험이 짬뽕이 되서 그림속에서 나와요. 어떤때는 뭘 그렸는지도 몰라요." 노은님이 즉흥적으로 '몸으로 쓴 한편의 시'다. “영적인 손님”이 찾아와 마치 잉태의 과정과도 같이 작품이 탄생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작업에만 몰두해 있다가, 더 이상 못하겠다 싶을 때, 뭔가 살아있는 것이 불쑥 나타나요. 내가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 순간에요. 그리고는 이 손님은 금방 사라져요. 임신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죠.그 사이 나는 마치 바위나 강, 혹은 꽃이나 들판처럼 산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에요." 그래서일까. 그림은 순수한 세계로 이끈다. 말하지 않아도 ‘좋은 그림이다’고 느낀다. 21세기 현대인들을 그림으로 힐링시키는 노은님은 자신을 "구제된 사람"이라고 했다. 작가 말대로 팔자인걸까.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는걸까. 아니면 편견없이 대한 '독일인의 사랑'의 힘이었을까. "인복이 많죠.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세계를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우연히 나를 도와준 사람이 많아요. 너무 너무 신비스러운 세계, 그 속에서 내가 살고 있어요. 이렇게 살수 있어 감사하다는 마음밖에 없어요." 가나아트센터 전시는 8월18일까지. 테라코타가 있는 가나아트 한남 전시는 8월4일까지. 2019/07/22
'시대의 반항아' 이건용 단색화 지운다 캔버스 앞에 서 뒤로 팔을 길게 뻗는다. 팔이 닿는 만큼 그리고, 또 그린다. 옆으로 위로 옆으로 옆으로 아래로 아래로...온 몸을 고정한채 양 팔만 이용해서 그릴수 있는 만큼 선을 그려낸다. 얼굴은 찡그려지고, 꽁꽁 묶인 몸이 움직이는 것 처럼 우스꽝스럽던 행동은 '나비효과'의 시작이 됐다. 1976년 시도했던 일명 '거꾸로 그림'이 날개를 달았다. 한 사람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듯한 이미지로 재현됐지만 그림이 아니다. "자기 몸이 그은 흔적"이다. 또 있다. 이번엔 캔버스 앞이다. 여러 물감이 섞인 붓을 들고 양팔을 모아 허공에 휘두르면 거대한 '하트 모양'이 생겨난다. 빛의 속도로 행해진 양팔의 움직임에 정신없이 섞인 물감이 강렬하게 모습을 발산하지만, 이 또한 그림은 아니다. 국내 행위미술 1세대 대표작가 이건용(77)은 "인체에서 아름다운 선이 나왔을 뿐이다"고 했다. 그 몸의 흔적, 선이 만든 그림이 미술계를 강타하고 있다. '바야흐로 국내 미술계는 이건용 시대'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단색화를 대체한다'는 분위기다. 실제로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40여년전 그가 행했던 퍼포먼스, 즉 그의 '신체 드로잉'이 강렬하게 꿈틀대고 있다. 지난 3월 열린 세계적인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홍콩과 미술품 경매사 서울옥션, 필립스 경매사등에서 작품이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가고 있다. 양 팔을 크게 휘둘러 하트 모양을 그린 ‘드로잉의 방법 76-3-2010’은 추정가를 웃도는 약 1억4000만원에 낙찰되면서 아트페어 부스마다 '이건용' 작품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최근 하트 모양이 인기라면서 밑에까지 굵게 그려달라고 주문하는 컬렉터까지 있더라고요." 이건용도 스스로 놀랍다. 세상이 변했다. '하트 모양', 추상화같은 '신체 드로잉'은 저항의 산물이다. “1970년대 사회 체제와 당대 권력이 모든 담론을 장악하던 시대에, 신체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그리겠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 시대는 통제시스템에 의해서 압축 성장하는 시기였다. 권력이 끌고 가는 시대에 전복하고 거부하는 예술의 수단으로 신체드로잉을 선택했던거다" 1970년대 그가 온 몸으로 발언한 '행위 미술'은 '불온 미술'이었다. 군사정권 시대, 젊은 작가들을 억압했고 그도 '불온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체제 억압적인 시대에서 그가 거꾸로, 또는 지워가며 ‘그리다’라는 행위는 정부에 대한 도발이었다. "나는 당시 온건했지만 당대의 정부 기관은 눈치가 빨랐다. 나를 불러다가 테러도 했고, 구두발로 무릎을 밟아 10년간 고생을 했다."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ST(Space and Time)의 창립자이자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선구자인 이건용은 70년대 스타 작가였다. 전통적인 회화의 방법론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실험을 통한 조형적 해체를 추구하며 한국 현대사회의 기성문화를 비판했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 1979년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참가한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건용 덕분에 한국 행위미술이 역사를 만들었다. 1975년 발표한 '동일면적'과 '실내측정'을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약 5년여에 걸쳐 40개가 넘는 행위미술 작품을 발표했다. 이는 당시의 그 어떤 작가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행위미술 작품을 발표한 것이었고, 동시에 한국 행위미술의 지지부진한 전개를 일순간에 전환∙정착∙확장시킨 것이었다. 이건용의 행위예술은 '논리적 이벤트'라고 명명되며 한국 행위예술 발전의 모태가 됐다. 그의 반골 기질은 여전하다. "말하자면, 그런 현상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철학에 반기를 들면서다. 이 세계를 사는 주체가, 세계를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 문제에서 '지각'이라는 말을 끄집어낼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과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학에 푹 빠졌다. 넘버링으로 되어 있는 그의 작품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마주다. (작품 제목을 구분하자면, 76-2는 뒤로 놓고 그림, 76-3은 하트모양의 작품이 제목으로 제작년도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작품으로 보이지만 연구가 낳은 분석적인 결과다.(중학교때부터 프랑스 독일문화원등 해외 문화원을 찾아다니며 미술자료를 섭렵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명제를 만드는 것은 경험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사실로 그려낼수 있는가 초점을 맞추고 연구한 것이다. 그 사람의 철학 논고를 보면, 넘바링을 붙여서 큰 넘버에 다시 넘버를 붙여 글을 써나간다. 나는 그걸 고등학교때 봤다." 목사였던 아버지 영향도 있다. "당시 아버지 서재에는 책이 1만여권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딱 한번 이사할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에 빠진 나는 어느 대학교에서 언어학회가 열리면 (고등)학교를 결석하고 그 학회에 갔다. 어른처럼 보이려고 아버지 옷을 입고 빵떡모자를 쓰고 가기도 했다." 대학 시절(홍익대 서양화과 졸업)엔 '괴물'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수업시간마다 질문이 많아, 진도가 안나간다고 이경성(전 국립현대미술관장)교수가 붙여줬다. 당시 어머니도 그랬다. "난 걔가 모자라는지 넘치는건지 모르겠어. 속상해 죽겠어, 이상한 질문만 하고..." 억압과 통제의 시대, '청개구리' 같은 작가의 기발함과 저항정신이 녹아있는 작품은 어느새 자본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모양새다. '하트 모양'을 주문하는 것 처럼, '이건용 스타일'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페이스 갤러리 측은 "컬렉터들이 헛갈려 한다. 그러면서 대표작이 뭐예요?"라고 묻는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건용은 담담하다. 처음부터 그림 양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00가 팔렸다'더라는 것은 미술을 양식으로 생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대다수 작가들이 그 작품이 팔리면 형태와 색깔을 바꾸는 것이죠. 또한 미술애호가들도 모든 문화 양태가 못생겼더라도 왜 그런 사유를 하고 있고, 사유의 내용이 무엇이라는 것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세련된 형태를 따라가는 겁니다. 선진국에서 있었으니까 양식 스타일을 받아들여서 흉내내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은 세계 어느 작가도 구현해낸 적 없는 기법이다. 뿌리고 던지고 찢고 붙이기는 했지만, 캔버스 뒤에서 손을 앞으로 넘겨 펜이 닿는 만큼만 그리는 기법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함이다. 이건용은 여전히 "예술의 매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라고 강조한다. "나는 그린다라는 문제를 특수한 기술이라던가, 테크닉이라던가, 어떤 내용의 신화를 보여주는게 아니다. 대상을 닮게한다는데 관심이 없다. 그린다는 실제적인 문제, 지각의 문제를 말한다. 신체가 평면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최초의 일은 선이다. 그게 회화의 본질이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16년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 전시 이후부터다. 국립군산대학교 교수로 군산에서 활동하며 묻혀있다, 유난히 존재감을 보인건 지난해 중국 베이징 798예술구에서 연 개인전이다. 첫 중국 개인전이자 세계 미술시장에 눈도장을 찍는 기회였다. 세계 유명 화랑 페이스 갤러리에서 초대한 전시였다. 인파가 몰려와 전시 당시 798예술구에서 큰 화제가 됐다. 중국보다 20여년 앞섰던 한국의 행위 미술 대부의 전시를 직접 볼수 있다는 것과 상업성이 짙어진 중국미술계에서 못느꼈던 '예술의 신선함'으로 중국인들을 홀렸다. 작가는 화랑이 키운다. 결국 '어느 화랑이 손을 대는가'가 관건이다. 특히 세계 유명 화랑이면 단박에 주가가 달라진다. 단색화도 그렇게 부풀었다. 국내 미술관에서 키워 화랑이 띄웠고, 국제화랑이 해외 비즈니스 마케팅을 하면서 가치가 올라갔다. '단색화만 그림이냐'는 비아냥이 들릴 정도로 열풍을 일으켰지만, 4년 만에 국내외 시장에서 '꺼져가는 촛불'이 되고 있다. 국내 상업화랑들이 판매 마케팅에만 치중하면서 ‘거품’ 논란을 부추킬때, 단색화 이후 작가를 찾은 건 해외 화랑이다. "왜 이건용이냐고요? 한국에 지사를 내고 나서 한국 작가 연구를 많이 했어요. 이미 단색화는 국내외 화랑들에서 전시를 많이 하고 있었고, 다른 작가를 찾아야겠다고 나섰죠. 제일 이야기가 많이 나온게 이건용 작가였어요. 현재 세계 미술계는 60~70년대 아방가르드 미술을 주도한 작가를 눈여겨 보고 있다는 것도 작용했고. 그렇게 베이징 페이스에서 전시했는데 반향이 뜨거웠죠. 중국 미술계는 어떻게 이런 작업을 70년대에 했는지 놀라면서 신비롭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페이스 서울 이영주 디렉터는 "이건용은 한국의 대표작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세계 미술시장에서도 더 알고싶다고 해서 앞으로도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페이스 갤러리는 1960년 뉴욕에서 설립, 가고시안 갤러리와 전세계 현대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화랑이다. 아시아에서는 베이징,홍콩에 이어 2017년 페이스 서울을 오픈했다. 페이스 갤러리의 한국작가 전속은 이우환 화백이 유일하다. 페이스 베이징에 이어 서울에서 이건용의 두번째 개인전이 5일부터 열린다. '現身 현신'을 제목으로 행위예술가로서의 그의 사진, 회화, 조각 등 40 여년에 걸친 그의 작업을 선보인다. 우리는 모든 문화안에서 지나치게 당대의 스타일과 양식, 사유의 스타일에 매몰되게 살고 있다. 40년전 그리는 것과 그리지 않는 것. 만드는 것과 만들지 않은 것에 천착해온 그의 반항이 '자본주의 미술'에 균열을 내고 있다. 쪼그리고 앉아 둥근 원을 그린후 여기 저기 거기를 외치던 그의 '달팽이 걸음' 다시 시작됐다. 공유하고 있고 관계론적으로 관계항이 성립될때 장소가 의미를 띈다는 내용인데, 당시엔 저게 작품인가 했다. 또 나무를 뿌리 채 가져다 놓기도 했다. "그러니까 최고의 지성인들도 그때 그 작품을 봤을때 이게 과연 작품인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 작품같지 않은 것은 '현신(現身)'이 됐다. 몸으로 펼치는 신(scene)은 극대화된 자아의 존재감이다. 이건용의 퍼포먼스가 40여년만에 다시 획기적인 작품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다. 페이스 서울 개인전은 8월24일까지 이어진다. 2019/06/04
단색화 '묘법' 박서보 '지칠줄 모르는 자신감' "이 그림은 치유와 수신을 동시에 경험하는 거지. 이거는 내가 절대로 팔지 않을거야. 1000만 달러를 준대도 안팔아." 단색화가 거장 박서보 화백(88)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올해 새롭게 그렸다는 신작 '묘법(描法)No.190227’앞에서 큰 소리 쳤다 "앞으로 이 그림은 내가 시장에 내놓지 않을 거야. 왜? 내가 꼭 어느 놈(?)하고 한번 붙어보고 싶은 생각이야. 그게 가능해졌어" 싸리 빗질한듯한 화면에 회색과 분홍색이 섞여 묘한 색감을 발산하는 작품이다. 조수도 안시키고 직접 10시간씩 제작해 한쪽 다리가 장작개비처럼 마비될 정도로 몰두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몸 반쪽을 움직이기 힘들어진 뒤 "그 기본을 잊고 치유를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2015년 심근경색으로 3차 수술까지 받았다.) '한번 붙어보고 싶은' 이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떠들썩하게 전시중인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82)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호크니는 지난해 미국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수영장의 두 사람’이 9030만달러(한화 1019억)에 팔려 전 세계 생존작가 작품중 가장 비싼 작가다. 박 화백은 1983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국제 종이회의에 참석, 호크니, 라우센버그와 함께 앉아 세미나를 열기도 했을 정도로 한국 현대미술계의 스타였다. '1000만 달러를 준대도 안판다'는 박 화백의 자신감은 빈 말이 아니다. 지금은 황당하게 들리지만, 분명 실현 될 가능성도 있다. 10여년전 박 화백이 100만 달러, '밀리언 달러 작가'가 된다"고 했을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실제화됐다. 2017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묘법'이 14억7400만원에 팔려 작가 최고가를 기록했다. 작품이 비싸게 팔려야 대접받는 시대, 박서보의 '묘법'은 2012년부터 마법을 부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의 단색화'전이 열리면서 기폭제가 됐다. 그동안 미니멀리즘, 모노크롬 추상화로 알려진 그림이 '단색화'로 존재감을 찾으면서 박서보는 더욱 빛이 났다. (비슷해보이는 추상 미술, '미니멀리즘이 우유이면 단색화는 곰탕'이라는 해석도 있다. 불과 7년년전, 서양의 모노크롬과 일본의 모노하와 비슷해 이 두 사조속에 편입된 듯 애매한 모양세였던 단색화는 'Dansaekhwa'로 영문이름까지 정해졌다) 그의 말처럼 "어느날 기가 막힌 시대가 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영국의 세계적인 화랑에서 전람회를 해봤으면 했는데, 전람회를 해달라고 요청이 온거야. 그런데 그 메일이 스팸에 들어가 모르고 있었어~. 그쪽에서는 무시한줄 알았대. 나중에 조수가 찾아냈는데, 심장이 떨려서 죽겠더라고. 좋아서. 하하하" 진정하고 메일을 보냈다. "관심있습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왔는데, "관심이 아니라 할거냐 안할거냐."하더라고. "하겠다 했지. 그쪽에서 그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와 그림을 쭉 보고 갔어" 그렇게 2016년 영국 런던 화이트 큐브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데이미언 허스트와 트레이시 에민 등 영국 스타 작가뿐 아니라 전 세계 거장들의 작품을 취급하는 세계 최고의 화랑에서 연 한국 작가 초대전은 한국 미술계의 쾌거이자 일대 사건이었다. 이후 세계 최고 화랑들의 러브콜이 이어져 파리 페로탕 갤러리, 국립 그랑팔레미술관, 도코갤러리, 홍콩 아시아소사이티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붓을 놓는다'는 팔순 이후부터 후끈한 봄날이 이어진 '행복한 화가'다. "화이트 큐브 전시때 내가 못팔게 한 초기 작품이 오픈전에 솔드아웃 된거야. 그때 동경화랑사장이 1980년대에 100호가 300만원에도 안팔리던게 300배 정도 비싼값에 팔렸다고 하더라고. 그때 뉴욕 타임즈에도 기사가 났어. 박서보 그림이 화이트 큐브에서 솔드아웃됐다고. 또 뉴욕의 잡지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당신이 죽기전에 내 작품값이 1000만달러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기사로 썼더라고. 허허허" 실제로 그의 작품값은 10년전보다 최고 20배 정도 상승했다.박서보 화백은 평균 호당가격이 10여년 전보다 10배 올라 50만원이었던 호당가격은 2015년 400만원을 넘겼다. 100호 크기이면, 기본 4억선에 거래되는 셈이다. 16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만난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박 화백이 한번 입을 열면 5시간은 이어진다는 전설이 미술계에 전해진다. '한국미술=박서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실제로 박서보는 그 이름 석 자만으로 미술시장에서 그대로 통하는 ‘바코드’ 같은 고유명사다. 지칠줄 모르게 옛 이야기를 발산하는 박화백은 그의 그림으로 둘러싸인 전시장에서 희열과 환희 사이, 쾌감 가득한 모습이었다. “지난날 아날로그 시대엔 그림은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발산하는 그림이었지만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는 스트레스를 빨아들이는 치유하는 그림이어야한다"는 것. "이미지가 강하면 보는 사람이 부담된다"며 금년 봄에 개발했다는 '공기 색' 작품은 부드러운 회색이 도드라진다. "훅 불으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운데 날아가지는 않는 것"같은 색감을 만들려 노력했다고 했는데, 부들부들한 느낌으로 '먹빛처럼 주변의 빛과 공기를 흡수하여 깊이감을 드러낸다' 그는 "그림은 치유의 도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를 70여년간 익숙하게 살았고, 디지털 시대를 10여년을 낯설게 살며 많은 고민을 했다. 21세기 디지털시대는 스트레스 병동과도 같다. 총기 난사 무차별 살인등 이런 게 모두 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처럼 작가가 자기 생각을 쏟아 놓은 작품을 사람들이 사다가 걸어놓으면, 이는 예술이 또 다른 방식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과 같다. 21세기 작업은 흡인지처럼 보는 이의 스트레스와 불안한 심리를 빨아들여야 하며, 이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에서 그림의 역할이다." 그가 50여년간 천착해온 '묘법'은 그 자신을 수행의 길로 이끌었다. 1960년대 옵아트, 팝아트를 수용한 '유전질‘ 시리즈 이후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의 문제를 고민했다. 반복적인 행위, 무념무상으로 나온 화면의 구조화가 특징이다. '묘법'은 우연찮게 발견됐다. 1967년 둘째 아들이 그리고 지우고 또 쓰는 글씨 연습을 보고, '체념의 미학'을 발견하면서다. "어느날 아들 녀석이 국어 공책에 숙제를 하면서 공책 네모 안에 닭자 하나를 써넣으려고 하는 걸 우연히 봤어요. 그 주먹만한 손으로 연칠을 잡고 네모 안에 예쁘게 글자를 집어 넣어야 하는데, 획 하나를 집어넣으면 다른 획이, 네모 밖으로 삐져나오고 몇번을 시도하다가 에라 안되는 구나 하고 신경질을 부리면서 쓴 글자를 죄다 직직하고 연필로 지워버리더라구요. 그걸 보고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프레임에 뭘 넣는다는게 불가능한거구나 하는 생각이요"(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케이트 림과 인터뷰중) 연필로 비슷한 선을 무한히 긋는 ‘묘법(描法)’ 연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기도 아닌', '글쓰기도 아닌' 것.(초기 작품은 미국 추상주의 작가 싸이 톰블리(1928~2011)의 낙서같은 선묘 작업과 비슷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후에는 캔버스를 물감으로 덮은 뒤 연필로 선을 긋고 다시 물감으로 지우고 선을 긋는 행위의 반복으로 이어졌다. 지우는 행위의 반복과 그 과정 자체가 작품이다. 한국적인 정서가 녹아있는 말이지만 만약 외국어로 번역로 하자면 쉽지않은 말이다. 영문 제목은 미술평론가 방근택의 권유로 프랑스어로 '글을 쓰다'는 의미의 명사 ‘에크리튀르(écriture)’라고 쓰기 시작했고, 1970년 명동화랑 개인전에 나온 작품의 명제가 된 후 지금껏 같은 방식의 명제를 사용하고 있다. 자기 억제가 심한 작품과 관련 외국에서 '한국의 정치상황과 관련이나 독재성에 대한 항거인가'라는 질문도 받지만 "시대로부터 받아온 상처들이 내재적으로 풍겨나온 것이지 정치적인 데모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의 산물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박서보의 '묘법'에 대해 박 화백의 후배인 한국추상미술 세계적인 거장 이우환은 1974년 '현대미술'지에 '이미지를 그리지 않으려는 뼈아픈 저항을 했다'고 분석했다. "아무것도 표현할 것이 자기 속에 없다는 것은 차츰 그것을 포기, 추방, 혹은 억누르며 표현이란 이미지를 단념시키는 작업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행위가 순수한 행위 자체로 정화하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 추상미술거장 박서보 화백에 전시장을 아낌없이 내줬다. 18일부터 '박서보: 지칠줄 모르는 수행자'를 타이틀로 서울관 1, 2전시실에 1950년대 ‘원형질’ 부터 2000년대 ‘후기 묘법’, 2019년 신작까지 총 160여 점을 선보인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끌어온 박서보의 삶과 작품세계를 한 자리에 조망한 대규모 회고전이다. 전시명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는 현대인의 번민과 고통을 치유하는 예술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묘법을 지속해 온 수행자와 같은 그의 70여 년 화업을 지칭한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박서보는 ‘묘법(描法)’연작을 통해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또한 평론가, 행정가, 교육자로서 평생을 한국 현대미술을 일구고 국내․외에 알리는 데 힘써왔다.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56년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과 함께 '4인전'을 통해 반국전 선언을 발표, 한국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이끌며 앵포르멜, 단색화의 기수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해온 미술가로 평가받는다. 1957년에 발표한 작품 <회화 No.1>으로 국내 최초 앵포르멜 작가로 평가받았다. 이후 물질과 추상의 관계와 의미를 고찰하며, 이른바 ‘원형질’, ‘유전질’ 시기를 거쳐 1970년대부터 ‘묘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한국 추상미술의 발전을 주도했으며 현재까지 그 중심에서 역할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박 화백이 "1000만달러를 줘도 안판다"는 2019년 신작 2점이 최초 공개되며, 1970년 전시 이후 선보인 적 없는 설치 작품 '허상'도 볼 수 있다. 또한 국내․외 전문가들이 박서보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국제학술행사’(5월 31일), ‘작가와의 대화’(7월 5일 예정), ‘큐레이터 토크’(7월 19일) 등이 열린다. 미술관 1층 식당에서는 박서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박서보 특별 메뉴’도 선보인다. ‘자연에서 온 건강한 메뉴’ 한 계절국수 2종과 음료, 디저트 등을 전시 기간 동안 즐길 수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박서보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이번 전시는 한국적 추상을 발전시키며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 큰 족적을 남긴 박서보의 미술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서보 화백은 “가장 치졸한 색을 가장 아름답게 쓸 줄 알아야 진짜 화가”라고 했다. 거무스레한 먹빛과 누리끼리한 '묘법' 작품속에 2000년대 초반 단풍 절정기의 풍경을 경험한 후 그려낸 화려한 색이 들뜨지 않은 세련미와 생동감을 발산한다. “그림에서 비운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경지다. 이제 탐욕이나 잡스러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 어떤 자극적인 얘기에도 흥분하지 않고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산다." 그림 그리는 희열을 만끽해 나온 박서보의 그림은 세상에 둘도 없는 '한국의 그림'이다. 같은 듯 모두 다르게 그린 그림이 말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하고, 또한 변하면 추락한다'. 전시는 9월1일까지. 2019/05/16
산꼭대기 뮤지엄 산...예술×명상 '힐링의 SAN' 낮 12시 45분, 그곳에 빛이 있었다. "몸과 긴장을 풀어주고, 휴식할수 있는 '쉼 명상'을 시작합니다. 등을 대고 누운 상태로 두 다리는 어깨너비로 넓게 벌려주시고, 몸을 최대한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제 두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시작합니다. 코를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코 또는 입으로 숨을 내쉽니다....이 시간은 나와 온전히 있어주는 시간입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휴식하고...지금서 부터 안내해 드리는 몸 부위마다 숨을 마시면서 최대한 힘을 주고 수축시켰다가 내쉴땐 완전히 힘을 풀고 이완하며 몸에 쌓인 긴장감을 풀어내겠습니다. 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긴장을 풀어서일까. 두 눈을 서서히 뜨자 보이는 공간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둥근 천장을 가로지른 채광이 그대로 들어와 두줄기 광선검처럼 둘러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회색 콘크리트 공간인데 안온함과 고요함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해발 275m 산자락, 돌무덤 같아 보여 꺼림칙했던 느낌이 순식간에 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강원도 원주 산꼭대기 미술관' 뮤지엄SAN(관장 오광수)이 다시한번 '기분 좋은 만남'을 선사하고 있다. 2013년 개관, 그 자체만으로 '힐링'이 되는 미술관은 개관 5주년 기념으로 '명상관'을 오픈했다. 명상관에 어울리는 명상 오디오가이드를 제작해 30분 간격으로 상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뮤지엄 산을 지은 일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새롭게 설계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 명상을 하는 이들의 정신은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설계 스토리를 전한 안도의 말처럼 명상관은 '빛의 풍경'이 환상적이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안도의 대표작 '빛의 교회'(1989)를 연상시킨다. 40평 면적의 돔 공간으로, 노출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내부로 들어서면 천정 중앙을 가르는 아치형의 천창을 통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 그림자가 고요함과 투명함을 더한다. 이미 건축가들과 명상인들에게 입소문이 났다. 지난 1월 개관했는데 2000명 넘게 방문했다. '명상관'은 오광수 관장 철학에서 나왔다. "프랑스 어느 예배당에서 명상관을 갔는데 여행을 하면서 하는 명상이 너무 좋았다"는 한 마디 말이 씨앗이 됐다. 뮤지엄 곳곳에 명상적인 공간을 남겨놓은 안도는 이 이야기를 듣고 반색했고 흔쾌히 설계를 맡았다. "미술관은 더 이상 미술 전시만 하는게 아니다. 사회적 역할, 복합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겼다. 뮤지엄 산은 '소통을 위한 단절'이 슬로건이다. 자연의 품에서 건축과 예술이 하모니를 이룬 공간은 마치 무릉도원 같다. 꽃과 나무, 조각품이 돌과 물위에 반사하며 계절별로 매력을 뽐낸다.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면 깊은 산속에 감춰져 있는 모양새다. 지난 2013년 원주 오크밸리 골프장 안에 개관한 뮤지엄 산은 산자락 꼭대기에 있다. 전체길이 700m, 대지면적 7만1172㎡ 규모다. 개관 당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빛과 공간의 마술사'로 꼽히는 미국 설치예술가 제임스 터렐관도 오픈해 화제를 모았다. 그림 전시만이 아닌 뮤지엄 산처럼 휴식과 자유를 선사하는 미술관 운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재벌그룹이 만드는 미술관은 힘이 있지만, 기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을 달리한다. 삼성리움미술관이 예로 2017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이후 기획전을 취소해 현재까지 잠정 보류상태다. 뮤지엄 산이 명상관까지 오픈하며 관람객에게 진정한 힐링을 제공하는 배경이 있다. 지난 1월 타계한 한솔그룹 창업주 고(故) 이인희 고문의 남다른 문화사랑 덕분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 장녀다. 국내 미술시장에서 '국내 1호 아트 컬렉터'라 불릴 정도로 문화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이 고문이 1995년 문화 예술계 후원을 위해 사재 40여억원을 출연해 한솔문화재단을 세웠다. 뮤지엄 '산'은 이인희 고문의 필생의 역작으로, 생전 휠체어를 타고 자주 방문, 관람객들을 보며 행복한 모습을 지었다는 후문이다. 개관했을때는 또 하나의 '재벌 미술관'이라는 시선도 있었다. 이인희 고문이 40년간 수집한 컬렉션때문에 미술관이 지어졌다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미술관은한솔그룹이 8년에 걸쳐 지어 이인희 고문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개관했다. 이 고문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매년 상반기 하반기 기획전과 상설전을 펼치고 있다. 한솔그룹이 운영하는 미술관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한 건 개관후 이듬해다. 2013년 한솔뮤지엄으로 문을 열었다가 2014년 현재의 이름인 뮤지엄 산(SAN)으로 변경했다. 공간과 예술, 자연이 융화되는 미술관을 지향한다는 뜻으로 스페이스(Space)-슬로우(Slow), 아트(Art), 네이처(Nature)의 앞글자를 땄다. 한솔그룹과는 별개로 독립 미술관으로 나아가겠다는 변화다. 이 고문은 사후 120억원대 주식을 한솔문화재단에 기증했다. 재단이 문화 예술 발전을 위해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정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평소 고인의 뜻이 반영됐다. 실제로 한솔그룹이 골프장 '한솔오크밸리'를 매물로 내놓았지만 오크밸리 안에 위치한 뮤지엄 산은 매각 대상에서 제외됐다. 뮤지엄 산 측은 "이인희 고문의 뜻을 이어가는 한편 자립 미술관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계획이다. 산속에 있는 미술관답게 툭 터진 자연속에서 휴식과 자유가 절로 누려진다. 물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카페 테라스는 연초록 잎들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나무들과 함께 소란스럽다. 삼삼오오 앉은 여인들의 '아~ 행복하다'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미술관인데, '한국관광 100선'에 4년째 선정됐다. 완연한 봄인 4~5월이면 상춘객이 늘어 주말에는 1000여명는 넘는 관람객이 북적인다. 연간 17만명, 지금까지 누적 관람객이 140여만명에 이를 정도로 자연 속에서 휴식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봄 기획전 '기하학 단순함 너머전'과 이인희 고문의 소장품전인 한국미술의 산책:추상화전도 열리고 있다. 개관 6년차, 뮤지엄 산의 명물도 변하고 있다. '제임스 터렐관'보다 '명상관'으로 발길이 이어진다. "잠시 살펴봅니다. 처음 명상을 시작했을때보다 호흡이 조금 더 편안해졌는지, 마음이 조금 더 개운해졌는지,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쉬어갈수 있는 명상의 시간을 마련한 자신 스스로에게 고마움을 표현해 줍니다. 또 오늘도 역시 열심히 살아준 나의 몸을 향해 수고했다, 고맙다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나의 몸과 마음을 향해 진심으로 말해 줍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힘들지 않고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깊은 숨을 완전히 마시고 길게 내쉬고 천천히 준비되면 두 눈을 서서히 떠줍니다." '불나는 세상', 복잡 복잡 혼란스런 도시의 번잡에서 2시간만 벗어나면 된다. '다른 곳에는 없는 꿈 같은 뮤지엄(dreamlike museum like no other)'. 그 곳에 빛이 있다. 2019/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