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고창신한 韓國畵...박대성,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 한국 미술계에서 수묵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소산 박대성(73)화백의 개인전이 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 열린다. 가나문화재단이 펼치는 이 전시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깊은 뜻을 그림으로 알리는 전시이기도 하다. 박대성 화백은 빈사상태인 한국전통화의 맥박을 뛰게하는 심장같은 존재다. 국내미술시장 수묵화의 대가로 고희가 넘어서도 왕성한 활력을 자랑한다. 1972년 대만 공작화랑에서 개인전을 연이후 1984년 가나화랑 개관화 함게 전속화가가 된 박화백은 독창적인 화풍에 힙입어 리얼리티 현대미술 대세속에서도 수묵화의 위엄을 떨쳐왔다. 전통화의 위기속에 박 화백의 생존전략은 새 것을 받아들인데 있다. 옛것에 머물지 않고 현대화단의 세계적 조류인 모더니즘에 올라탔다. 1994년 현대미술을 탐구하기 위해 뉴욕 소호에서 1년간 거주했는데, 이때의 경험은 2000년대부터 박대성의 작품에 나타나는 추상성에 영향을 미쳤다. 뉴욕에서 현대미술을 접하며 오히려 우리 전통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는 이후 ‘서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1999년 경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작가는 이러한 ‘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김생, 김정희, 모택동, 갑골종정 등의 작품을 통해 ‘서’의 연마에 매진, 2000년 이후 작업의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서’에 대한 관심은 ‘서’자체의 조형적 탐구로 이어지면서 작품 안에서 이전과 눈에 띄게 다른 선의 변화로 나타난다. 여전히 자연풍경을 담아냈지만 선 자체가 힘찬 기(氣)를 내뿜고 필획의 힘이 돋보이면서 화면은 기운생동(氣韻生動)과 긴장감을 전한다. 이러한 조형성은 그가 찾은 한국화의 해답이기도 하다. 박 화백이 서의 필법을 회화에 사용함으로써 극도로 날카롭고 긴장감있는 느낌을 주고자 한 것은 ‘서’로 단련된 필획이 그림의 획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중국의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새로운 수묵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한 박화백은 대만 고궁박물원의 송•원•명 시대의 그림이 지닌 장대한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서(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 화백이 수묵화의 대가가 된 것은 서파와 학파에 휩쓸리지 않은 덕도 있다. 그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부모를 여의고 자신의 왼쪽 팔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림이 좋았던 작가는 묵화부터 고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연습을 거듭하는 고행의 길을 걸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익히던 그는 집안어른의 소개로 18세 때부터 서정묵의 문하에서 5년간 그림을 배웠고 이후 이영찬 화백과 서울대 동양화과 박노수 교수의 조언을 받으며 공부했다.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열린 국제 미술대전에서 1965년 첫 입선을 시작으로 6년 연속 입상하며 한국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1974년 1년간의 대만 유학기간 중 대만 고궁박물관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그림을 매일 두점씩 볼 수 있는 참관증을 받았고 이때의 공부는 그의 작업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천부적인 감각과 소재 선택의 탁월함으로 한국화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시키며 작업을 이어간 그는 79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하고 동양화단에서 이변을 일으켰다. 이제 소산 박대성 화백은 한국화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수묵을 현대화 한다는 점에서, 겸재에서 소정과 청전으로 이어지는 실경산수의 계보를 잇는 한국화의 거장으로 회자된다. 박화백이 즐기는 모티브는 소나무다. 솔 사랑은 작업장에서도 돋보인다. 소나무 천지인 경주 남산자락에서도 포석정과 가까운 삼릉계(三陵溪) 솔밭이 특히 아름다워 유명 사진작가의 작업현장이 되곤 하는데, 박 화백의 화실은 바로 그 국립공원 경계에 있다. 덕분에 삼릉의 상징인 그 잘 생긴 솔들이 화실 마당 안으로도 우람하게 밀고 들어와 자란다. 그 특권에 보답하듯, 집 마당의 솔을 열심히 그려놓고선 '솔거의 노래'(종이에 수묵, 500 x 436cm, 2015) 제목으로 현재 경주 솔거미술관에서 선보인 '남산자락의 소산수묵'(2017.9.12.-2018.3.25) 개인전 대표작으로 걸렸다. "미술관의 천정 높이까지 닿은 두 그루 소나무는 멀찌감치 바라보면 그 크기가 압도적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세세하고 정밀하게 수많은 솔잎을 그려낸 작가의 내공에 기가 죽는다"는 반응이다. 이번 전시는 자연 풍경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사물의 본질을 찾는데 주력한 작업들을 볼 수 있다. 폭이 5m에 이르는 대작들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긴장감과 힘찬 기운을 쏟아내는데 이는 크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운생동이 활약하는 현대적 수묵화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은 "소산의 산수화는 언뜻 동양화기법 가운데 특히 조감법(鳥瞰法)의 과감한 도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내 보기론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하늘에 닿을수록 더 거대해지고 짙게 검은 빛깔을 뿜어냄은 큐비즘의 극치"라고 극찬했다. "극사실주의의 한 경지이면서도 특유의 서예를 보태서 동양의 서화일치의 한 경지를 환기 시켜주고 있는 이번 전시가 한국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일깨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를 타이틀로 한 이번 전시에는 서예작품과 함께 경주 불국사 시리즈 등 신작 100여점을 선보인다. 한국화의 갈길을 찾은 박 화백은 "이번 전시는 내 일생을 다 보여주는 전시"라고 했다. 3월4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2/07
에폭시 레진이 품은 '21세기 단색화'...김현식 개인전 이 작품은 직접 봐야 진가가 빛난다. 화면 이미지보다 실물이 더 신기하고 아름답다. 수많은 선긋기로 완성한 색색의 작품에 대해 해외평론가들은 "동양적 신비로움"을 언급했고, '미니멀 아트'로 다가섰다가 독특한 기법에 호기심과 감동을 표한다. 매끈하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작품, 그림을 보면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말끔하게 칠한 회화에 두꺼운 투명 코팅 처리를 해 놓은 것 같은 작품의 비밀은 '에폭시 레진'(epoxy resin)덕분이다. 공업용 투명 접착제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유리액자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도 있다. 에폭시 레진 위에 빼곡히 색선을 긋는 반복적 행위로 물감과 레진이 만나 작품은 회화를 넘어 착시를 일으키는 반입체로까지 보인다. 5년전부터 런던, 브뤼셀, 아트마이애미, 아트 뉴욕, 아트 파리스등 해외에서 입소문을 탄 작품은 2016년 상하이 학고재갤러리에 개인전을 연 이후 '김현식'의 이름을 제대로 알렸다. 국내에서 '머리카락' 작품으로 유명세를 탔던 작가의 위대한 변신이었다. 서울 삼청로 학고재는 여세를 몰아 7일부터 김현식의 개인전을 연다. '빛이 메아리치다(Light Reverberates’)를 타이틀로 총 46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상하이 전시 이후의 신작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자리다. 대표적인 연작으로 꼽을 수 있는 ‘Who Likes Colors?’와 함께, 영국의 동화 '퍼시 더 핑크 Percy the Pink'(2003)에서 제목을 차용한 ‘퍼시 더 컬러 Percy the Color’ 연작을 새롭게 선보인다. 각 연작마다 형태와 색상 등에 다양한 변주를 시도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작가 김현식은 "이 전시를 통해 평면으로부터 입체적인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싶다"고 했다. 평면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겠다는 의도다. 그가 에폭시 레진에 집착한 건 "나만의 그림, 나만의 작업을 하겠다"는 욕망이었다. 1992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후 유화로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곧 좌절했다. 다 비슷비슷한 그림에 자신보다 더 테크닉이 뛰어났다. 회화 전공자로서 평면을 놓고 싶지 않았던 그는 투명 접착제류인 에폭시 레진을 발견하면서 차별화를 꾀했다. 10여년간 시행착오를 겪었다. 초기엔 작품 소재 자체를 레진에 통째로 담그기도 했다가 레진의 특성을 파악했다. 레진의 얇은 층을 여러 겹 쌓아 굳히고, 그 위에 송곳으로 긁은 드로잉 선(線)을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그 다음 팬 선들에 원하는 색을 입히고 닦아내면 상감기법처럼 무수한 선들이 색으로 변환된다. 이 과정을 대략 10여 회 이상 반복해야 완성된다. 웬만한 크기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진 적어도 1만 번 이상의 송곳 선 긋기를 거쳐야 한다. 30년 넘게 지속된 에폭시 레진과의 싸움은 김현식을 '사이 공간'으로 오가게 했다. 레진에 중첩된 수많은 드로잉 선들은 평면에서 입체로, 외피에서 내면으로 나아가게했다. 2차원적인 평면회화가 수천, 수만 가닥의 선들로 3차원 공간을 품을 수 있게된 '통찰의 예술'로 진보한 것. 수많은 색선(色線)으로 이뤄진 작품은 생동하는 색채의 울림을 전한다. '단색화'의 '21세기 버전'같다. 무념무상의 행위속에 한가지색으로 나온 단색화의 개념과 맞닿아있는 셈이다. 작가의 작품을 처음부터 지켜봐오고 전시 서문을 쓴 홍가이 박사는 "그가 빚은 화면 속 무수한 틈새들이 시간을 붙잡아두는 것 같다"며 "미세한 사이의 틈새들이 ‘적막의 울림’을 만들어낸다"고 평했다. 국내에서는 8년만에 개인전을 연 김현식은 "작업을 통해 보이는 것 너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화가로서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는 여정의 입구를 관객에 제시하겠다"는 의지로 "스스로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는 여행가와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촘촘히 그어진 색선들 사이 사이로 반사되는 빛과 그림자가 기존의 색채에 깊이감과 공간감을 더한다. 바라보는 각도와 거리에 따라, 빛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의 색상이 시시각각 변한다. 균일한 두께로 그어진 반입체적 선들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위 아래로 교차하며 운율을 만들어내는 작품은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의 입구를 마주한 듯한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투명한 레진 표면에 그림자가 비쳐 작품 프레임 속으로 한 걸음 들어선 듯한 착각마저 든다. 2006~2007년 국내미술시장 활황때 '김현식 머리카락' 작품에 꽂혔던 컬렉터라면 놓치지 말아야할 전시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신한 것 같지만, 결국 초기에 선보인 머리카락의 흔적을 떨칠수 없다. 굽이쳐 흐르던 머리카락이 '스트레이트 퍼머'를 한듯 탱탱하고 찰랑찰랑 해진 듯한 느낌이다. 전시는 3월4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2/07
'회화의 시녀'는 옛말...정재규 '조형 사진-일어서는 빛' 19세기 '회화의 시녀'로 불렸던 사진은 20세기 전성기를 구가했다. 사진은 버라이어티하게 영역을 확장하며 위세를 보였다. 10여년전 국내에서도 '그림같은 사진' 열풍이 불었다. 배병우·민병헌등 사진작가들의 존재감을 드높였고 작품도 유례없이 고가에 팔려나갔다. 하지만 '회화의 권력'은 뛰어넘지 못했다. 반짝 강등세를 보였던 사진 시장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며 다시 회화의 부상을 알렸다. 구상에서 추상, 추상은 단색화로 인기몰이 하며 미술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사진이 주줌하고 있는 가운데 '조형 사진'이 등장 눈길을 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가 기획한 조형사진 작가 정재규의 개인전이 열린다.2월 2일부터 '조형 사진-일어서는 빛'을 주제로 사진과 설치 작품 100여 점을 전시한다. 사진은 '회화의 시녀'가 아니라 '회화의 동반자'라는 의미가 보인다. 작품은 설치 조각까지 넘본다. 작가는 한국의 고건축이나 조형물, 예를 들어 경주 불국사의 극락전, 대웅전, 석가탑, 다보탑, 돌사자상 등을 찍은 사진들을 자르고 재배열해 화면을 만들어낸다. 가나아트 김나정 큐레이터는 "사진을 찍고 인화한 이미지들을 자르고 조합하는 행위는 화면 속 정해진 시공간의 이미지뿐만이 아닌, 작가의 사적인 기억과 역사적 사건이 개입된 ‘시간의 올짜기’"라고 소개했다. 사진을 자르고 엮은 '조형사진'의 시작은 24년전 경주를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국립 경주 박물관 뜰에서 머리가 없는 불상(佛像/無頭石佛)들 약 50여 구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접하면서다. "예기치 못한 이 끔찍한 장면 앞에서 나도 모르게 얼른 사진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끔찍한 불두 참수의 사건을 기록한다거나 다른 이에게 보이고자 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것은 순간적인 나의 반사 작용 같은 것으로서 참혹한 모습이지만 여전히 조화롭고 완전한 조형미를 갖춘 불상들을 또 다르게 볼 수 있는 한 방식 혹은 또 다른 시선의 한 선택이기도 했다."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서 보이는 머리 없는 불상들은 여전히 부동(不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셔터의 소리와 함께 나는 불상의 그 참수 현장에 있는 듯한 인상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작가는 "과거의 한 순간과 현재의 한 순간이 사진 촬영의 한 순간에서 서로 겹쳐지고 교차되는 듯 했다"며 "한여름 고요한 경주 박물관 뜰에서 동시성(同時性)에 대한 기이한 사진적 체험을 했다"고 밝혔다. 197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는 당시프랑스, 이씨ㅡ레ㅡ물리노의 아뜰리에로 되돌아와 머리 없는 불상들의 사진 이미지 절단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이미지들을 자르면서, 자르는 순간 순간들이 이번에는 경주 박물관 뜰에서의 그 촬영 순간과 겹쳐지고 교차되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 되었다. 잘려져서 다시 배열된 머리 없는 불상 이미지의 표면은 사진적 사건을 위한 또 다른 장소( 또 다른 정원)로 여겨졌다는 것. 197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1977년 제10회 파리비엔날레 참여를 계기로, 1978년부터 파리에서 살고 있다. 1980년대에 파리 1대학에서 수학하며 러시아 전위 미술 운동가인 말레비치의 절대주의(Suprematism)와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화 등 서양 미술이론 연구에 전념했고, 1990년 초부터 이론 연구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조형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사진을 잘라 엮어낸 '조형 사진'은 복제가능성과 복수성을 부정하고 순간성과 기록성이라는 정체성도 해체됐다. '이미지가 가지는 시공간 구조'에 집중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포장용 크래프트지 위에 수묵작업과 함께 복제된 이미지를 자르고 붙여 다양한 기호들을 조합하여 미술사를 재해석한 작품을 보여준다. 크래프트지 위에 동양의 수묵 기법으로 선을 그린 작업은 중국 명청대의 화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또한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만 레이 등 서양 미술가들의 작품을 사진과 크래프트지를 5~10mm 폭의 띠로 잘라 '올짜기 기법'의 조형사진과 설치작품도 선보인다. 누구나 사진작가인 이 시대에 정재규의 '조형 사진'은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찍기만 열중했지 왜 엮을줄을 몰랐을까' 라는 생각과 '별것 아닌데'라는 마음이 교차한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예술가들의 차이는 시간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소설가들이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데, 미술가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 평을 쓴 장-루이 푸아트뱅 미술평론가(소설가)는 "정재규의 작품은 느림에 대한 찬사"라고 했다. "끝없는 인내는 조형작가 정재규의 일상적인 작업에서도 핵심"이라는 그는 "무한히 느린 시간으로서, 마치 맹점처럼 잊혀졌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시간의 힘'을 정재규의 작품이 우리들에게 환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평했다. 전시는 3월4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1/31
삼성 리움? 롯데 '롯데뮤지엄' 개관..댄플래빈 '위대한 빛' 삼성 미술관 리움이 지난해부터 개점 휴업 사태속 재벌그룹 미술관이 다시 등장했다. 롯데그룹 롯데문화재단이 롯데월드타워 7층에 26일 개관한 롯데뮤지엄이다.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롯데월드타워(555m, 123층)에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미 국내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을 내세우는 곳이 있다. 한화그룹이 63빌딩 60층에 운영하는 63아트미술관이다.) 롯데월드타워 7층 1320㎡(약 400평)을 미술관으로 꾸몄다. 전시공간은 심플한 자연미가 특징인 건축가 조병수(60)가 설계했다. 초고층 미술관인 모리미술관과 협업해 기존 3m였던 층간 높이를 5m까지 올려 시공하는 등 1년여 간 심혈을 기울여 세계적 수준의 현대 미술 전시공간으로 완성했다.타 워 내부 공간을 최대한 기능적으로 해석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예술작품들이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새로운 예술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이태원 부자들 저택속에 위치한 삼성 리움이 럭셔리한 이미지를 과시하는 반면 롯데뮤지엄은 백화점안에 있어 부담감의 거리는 좁혔다. 롯데측도 "상업시설과 오락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잠실지역에서 대한민국의 예술적 위상을 보여주는 새로운 문화 랜드마크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 세계 시각문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기획 전시를 매년 3~4회 개최하겠다는 의지다. 국내 최고 미술관 리움의 휴업 상태로 국내에 세계 유명 작가의 굵직한 전시가 뚝 끊긴 가운데, 롯데뮤지엄의 개관전은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새해, 롯데월드타워 '카운트다운 불꽃쇼'로 '라이트 아트'의 팡파레를 울린 롯데는 '빛'에 꽂했다. ◇롯데뮤지엄 개관...라이트 아트 댄 플래빈 국내 첫 전시 개관전도 ‘빛 예술’이다. 미국 '라이트 아트' 거장 댄 플라빈(1933~1996)의 대규모 기획전을 펼친다. ‘빛’을 통해 변화되는 시공간을 창조한 댄 플래빈의 혁신적 예술세계를 소개한다.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뉴욕 디아 아트파운데이션(Dia Art Foundation)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는 댄 플래빈이 창조한 ‘위대한 빛’을 타이틀로 달았다. 플래빈은 ‘형광등’을 미술에 도입하여 ‘빛’의 시공간을 창조했다. 이번 전시는 댄 플래빈의 초기 작품 14점을 한국에 소개하는 첫 번째 대형 전시다. 플래빈의 독창성은 쉽게 구할 수 있는 형광등을 공간에 설치해 관람자가 그 공간을 직접 경험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1963년부터 벽면에 2.4m 형광등을 설치해 형광등의 무한한 가능성을 살려냈다. 하나의 오브제이자 회화적 효과를 내는 색채로서 형광등의 존재감을 발견해냈다. 이후 여러 개의 형광등을 반복적으로 배치하여 빛에 의해 공간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환영을 만들어넀다. 이 전시에는 그의 대표작 40m길이의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Green Barrier'가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인다. 거대한 녹색의 빛은 전혀 다른 공간을 경험하게 한다. 전시 마지막길에 348개의 형광등으로 만들어진 초록색 장벽이 압권이다. 초록빛을 따라가다 보면 실제 공간에 대한 감각은 제거되고 원근법이 파괴된 새로운 공간의 유희를 경험할 수 있다. 그의 초록색 관심은 피에트 몬드리안 덕분이다. 플래빈은 빨강,파랑,노란색을 사용한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 피에트 몬드리안이 빠뜨린 녹색을 사용했다. 몬드리안이 제외한 기본 색의 하나인 초록색을 기분 좋은 색이고 밝으면서 부드러운 색으로 보고 거대한 장벽 작품의 주 색채로 활용했다. ◇'형광등 빛 예술' 댄 플래빈 1933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미 공군으로 복무했고 1954년 한국 오산의 제5공군본부에 주둔하면서 기상정보를 수집하는 기상병으로 근무했다. 1956년 뉴욕으로 돌아간 플래빈은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수학했다. 1961년 뉴욕의 저드슨 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고 ‘아이콘icons’라는 전자적인 빛으로 된 콜라주 형태의 부조 시리즈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이후에는 오직 형광등만을 사용한 작품이 등장하는데 이 들 중 하나가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1963년 5월 25일의 사선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라는 작품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1963년 5월 25일'은 플래빈이 이 작품을 완성한 날 일 뿐만 아니라 이후 그의 빛 작업에 있어 새로운 출발점을 의미하고 있다. 이후 댄 플래빈은 1976년 시카고 현대미술관, 오타와에 있는 캐나다 내셔날 갤러리, 1989년 독일 바덴바덴의카를스루에 주립미술관에서 전시했다. 2004년 디아 아트 파운데이션은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와 공동으로 댄 플래빈 순회전을 개최했고 1982년 댄 플래빈 인스티튜트를 설립하고 댄 플래빈이 디자인한 공간에 작품을 영구 설치했다. 물질이 내뿜는 빛에 의해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의 경험은 새로운 예술의 시작을 알리는 댄 플래빈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다. 그는 집안을 밝히는 형광등을 ‘미니멀리즘 설치예술'로 승화시켰다. 산업사회의 재료, 기성품을 대변하는 형광등을 예술에 도입해 자본주의에 대항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댄 플래빈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넘어선 20세기 미술문화를 대변한다. 댄 플래빈은 “나는 조명기구를 주의 깊고 면밀하게 구성한다면 전시장의 공간이 분리되고 조정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생전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2.4m 길이의 형광등을 모퉁이에 수직으로 설치하면 모서리 공간을 물리적인 구조와 빛, 이중으로 생긴 그림자 등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형광등으로 만든 '빛 예술'은 단순하지만 예기치 못한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공간과 시각적 경험의 간극속에 빛이 주는 신성함, 초월성 등 공간에 퍼져나가는 댄 플래빈의 빛은 황홀한 순간을 선사한다. 결국 예술은 마술이다. 관람료 7000~1만3000원. [email protected] 2018/01/25
'피카소가 시기한 조각가' 자코메티 '걸어가는 사람' 검은 커텐을 제치고 들어서는 순간 숨이 막히는 전율이 온다. 쏟아지는 빛 조명속에 드러난 '걸어가는 사람'은 이 전시의 백미다. 1m88cm 큰 키가 돋보이는 이 '걸어가는 사람'은 자코메티의 '탑(TOP)오브더 탑(TOP)'이다. 알려진 그의 청동조각이 아니라 '석고 조각'이라는 존재감이 강렬하다. '20세기 미술의 상징'이라는 수식어 때문일까. 마치 무덤속에서 살아나온 듯 뼈만 남은 듯한 외모지만, 소름끼치는 아우라를 전파한다. 컴컴한 동굴속에 있는 듯한 공간속에 울림이 큰 음향연출로 명상센터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다. '걸어가는 사람'은 좌대에 올려져 360도 회전하듯 감상할수 있다. 바닥에는 방석도 깔려있어 앉아서도 볼수 있다. 알베트로 자코메티 특별전을 기획한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이사는 "무엇보다 그의 눈을 보라"고 주문했다. 미이라 같은 '걸어가는 사람'은 부릅뜬 두 눈이 인상적이다. 어떤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고 실패를 벗 삼아 두 눈을 부릅뜬 채 세상을 으이하는 슬픔속 인간의 위대함이다. 이 작품은 자코메티 자신이다. 1901년생 자코메티는 끔찍한 전쟁을 겪은후 "인간은 그래도 살아내야만 하기에 끝없이 걸어나가야 한다"는 자신의 스토리를 이 작품에 불어넣었다. '가늘고 긴 조각'은 자코메티 브랜드다. "작은 조각을 포기하지 못하고 높이를 키우다보니 가늘고 긴 형상이 탄생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온 석고 원본, 1m88cm 걸어가는 사람은 처음으로 거대하게 키운 작품이다. 1958년 뉴욕 체이스 맨하탄 프라자의 공공장소를 위한 프로젝트로 진행되어 1960년에 완성됐다. 부스러질것 같은 앙상한 형체지만 '걸어가는 사람'은 자코메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수천억원의 작품값이 이를 증명한다. '걸어가는 사람'(청동)은 2010년 마지막 경매에서 1200억원에 낙찰되면서, 이전 최고 경매가인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을 누르고 세계 경매신기록을 세웠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석고 원본'은 실거래가의 3배이상 책정된 3800억원에 이른다.) 피카소는 생전에도 자코메티에 굴욕을 당했다. 그는 자코메티의 작품 능력을 시기할 정도로 부러워했다. 피카소가 구현하지 못한 조형적인 새로운 언어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모사 전문가'일 정도로 사물을 분석하고 분해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자코메티처럼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인물을 근원적 존재로 표현해내지는 못했다. 피카소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자코메티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예술가인줄 알았는데 천재에 불과했네."라고. 피카소는 죽을 무렵까지 자코메티에 집착했다. 그는 죽기 직전 누구를 만나고 싶냐는 물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딱 한사람, 자코메티를 만나고 싶다"고 한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에서 처음...'알베트로 자코메티'특별전 새해, 세계적인 거장의 조각전이 미술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알베트로 자코메티(1901~1966)전시가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21일부터 열린 이 전시는 국내에서 보기드문 조각전이다. 파리의 자코메티 재단과 협업으로 코바나 컨텐츠와 국민일보 30주년 기념전으로 마련됐다. 작가의 상징적인 작품 '걸어가는 사람'의 유일무이한 원본 석고상이 아시아 최초로 공개돼 주목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초기 시절부터, 말기의 작품 120여 점 이상을 조명한다. 고향 스위스 스탐파에 있는 그의 아버지 작업실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보낸 마지막 기간(1960~1965) 동안의 그의 예술적 성취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또한 작가가 죽기 바로 직전 작업한 가장 마지막 작품인 '로타르 흉상'도 함께 선보인다. 작가가 평생을 통해 깨달은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이 녹여져 마치 작가 자신을 빚어 놓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죽기 전 해탈한 구도자의 면모가 보여지는 듯하다. 인간존재의 의미와 비장한 존엄성까지 한눈에 보여주는 '로타르 흉상'과 '걸어가는 사람'은 자코메티의 위대한 통찰이 느껴지는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꼽혀, 이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전시다. ◇코바나컨텐츠의 3번째 세계적인 작품전 "이번 자코메티 서울 조각전은 무엇보다 특별합니다. 테이트 모던 전시와 상하이 유즈미술관에서도 공개되지 않은 '걸어가는 사람' 석고원본을 전시하기 때문입니다. 석고 원본 작품은 아시아 최초 공개라 더욱 그 의미가 특별합니다."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는 "얼마전 일본 국립신미술관에서 열린 자코메티 회고전에서도 전 작품이 청동 작품이었는데 반해 이번 서울 전시는 석고 원본 15점을 비롯해 자코메티의 말기 전성시 걸작선으로 선정된 작품"이라며 전시의 자부심을 보였다. 이번 전시 작품 평가액은 사상 최대인 2조 1000억원에 이른다. 지난 마크로스코 전시(2조5천억원)에 이어 국내에서 쉽게 유치하기 어려운 전시다. 이 전시를 유치하기까지 프랑스 파리를 집처럼 드나들었다. 일본 전시를 그대로 가져오려고 했으나 코바나컨텐츠의 애초 목표인 '순회전은 없다'로 의지를 다졌다. '전혀 다른 전시'를 추진하기 위해 "석고 원본에 집착했다"는 김 대표는 "이전에 진행한 전시(마크로스코, 르코르뷔지) 덕분에 자코메티 재단이 신뢰감을 보였다"고 했다. 재단은 '걸어가는 사람' 은 20세기 상징작품이라 빌려주는 것을 꺼려했다. 테이트 모던에도 대여해주지 않은 작품이지만 코바나컨텐츠의 집책에 가까운 열정에 손을 들었다. 자코메티 재단측의 "한국은 전쟁의 위험이 있는데 욕심내지 마라. 로타르 좌상 원본까지 대여는 빅뉴스다"는 충고까지 들을 정도였다. 김건희 대표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코메티 전시를 유치한 것에 자랑스럽다"면서 "그만큼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는 역사적인 전시로 남을 것 같다"고 자신했다. 전시 사업 횟수로 10년째를 맞은 코바나 컨텐츠는 국내 미술 전시기획가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2008년 '까르티에 보석'전으로 시작한 코바나 컨텐츠는 '마크리브'전, '점핑위드러브'(15만 관람)에 이어 '마크 로스코'(2015. 25만 관람), 르코르뷔지에(2017. 20만 관람)전시로 히트했다. 김 대표는 "이전 전시때도 설마 진짜가 오겠어? 라는 의심과 불신의 우려가 있었지만 전시후에는 신선하고 대단하다는 평가와 반응이 좋아 대체로 성공했다"면서 "코바나컨텐츠는 '문화로 정신을 깨우는 기업'으로 사람들에게 문화 가치를 주고 정신을 새롭게 할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길고 앙상한 조각...자코메티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날 젊은 소녀를 그리고 있는 동안 뭔가가 떠올랐다. 영원히 살아남을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선'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결국 죽음과 살아있는 개인을 구별해주는 것은 시선이다." 1958년 57세인 자코메티는 몽파르나스 술집에서 만난 스무살도 안된 매춘부 카롤린과 사랑에 빠졌다. 세계적인 명성이 높은 부유한 조각가와 카롤린은 어울리지 않은 상대였지만 그녀는 자코메티의 중요 모델이 되어 주었다. 카롤린 작품을 통해 자코메티가 삶의 마지막 시기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준다. 부스러질 것 같은 연약함과 앙상함, 마치 불교에서 다비식을 한 듯한 수없이 반복된 '붙임 모습'인 자코메티의 조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해골같은 모습에서도 부릅뜬 듯한 두 눈이 각인된 '걸어가는 사람'에 대해 생전 자코메티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걸어다닐 때면 자신의 몸무게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가볍게 걷는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어떤 경우든 죽은 사람보다도, 의식이 없는 사람보다고 가볍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 것, 그 가벼움이다." 어디로 가는지, 그 끝도 알수 없는게 인간의 숙명이고 고독이다. '걸어온 사람'들이 '걸어가는 사람'을 만나 58년간 공감하고 있는 이유다. 움직여 걸어가는 것, 결국 '인간의 실존'의 문제이니까. 전시는 4월 15일까지. 8000~1만6000원. [email protected] 2018/01/04
새해 또 단색화?…윤진섭×리안갤러리 '한국의 후기단색화' '단색화' 창시자인 미술평론가 윤진섭이 다시 '후기 단색화'전을 기획해 눈길을 끈다. '한국의 후기단색화'전을 타이틀로오는 5일부터 서울 통의동 리안갤러리에서 펼친다. 윤진섭 평론가와 리안갤러리가 1970년대부터 단색조 작업을 꾸준히 해온 11명의 작가들을 뽑았다. 대부분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의 제자들로, 이번 전시에는 김근태, 김이수, 김춘수, 김택상, 남춘모, 법관, 이배, 이진우, 장승택, 전영희, 천광엽의 '단색화 같지만 다른(개념의)단색화'를 보여준다. '단색화'라는 고유 명칭은 윤진섭 미술평론가가 처음으로 썼다. 지난 2000년 광주비엔날레에 특별전으로 연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 영문판 도록에 '단색화(Dansaekhwa)'를 쓰면서 우리나라 '모노크롬(monochrome)'화가들을 '단색화가'들로 구분한게 시작이었다. 이후 '단색화'는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전에서 존재감을 가졌지만 유명세는 덜 했다. 2년후 국제갤러리가 단색화작가들을 마케팅하면서 'K팝' 같은 한류 열풍을 몰고왔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서 '단색화 특별전'을 비롯해 소더비 크리스티등 세계적인 경매사에서 수십억대에 낙찰되며 '한국 그림' 돌풍을 일으켰다. '단색화'는 말 그대로 한 가지 색으로 그린 그림인데, 서양의 모노크롬 미니멀 아트나 색면추상과 다른 평가다. 50~60년대 서양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모노크롬이 쇠퇴한 반면, 한국의 단색화는 50~60년만에 세계미술시장에 급부상했다. 1950~60년대 서양 모노크롬에 매료됐던 젊은 화가들이 나이 70~80세가 되어서야 빛을 본 단색화는 '힐링의 시대' 타이밍이 맞았다. 바르고 뜯고 덧칠하며 오랜세월 수행하듯 반복의 미학이 빚어낸 작품은 곰삭은 깊이로 '명상적인 작품'으로 부상했다. 반면 '단색화'는 색 그대로 극단적이었다. 세계미술시장에서 인기를 얻자 한국미술시장을 점령하면서 쏠림 현상을 심화시켰다. 오로지 '단색화'뿐인 것처럼 팝아트와 다색화를 무산시킨 단색화는 시장 논리에 편승했다. 상업적인 붐으로 '단색화=돈'이 됐고, 미술관 갤러리 경매사마다 쏟아진 단색화, 단색화에 진부해질 정도였다. 실제로 2014년부터 약 3년간 국내외적으로 선풍을 일으켰던 단색화는 2017년부터 둔화된 조짐이다. 유명화랑, 미술관에서 1세대 단색화가들이 초청을 받거나, 옥션의 동향이나 전시와 관련된 소식을 뉴스로 다루었던 것에 비하면 주춤한 기색이 역력하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국내외의 컬렉터, 기관, 미술품투자자들이 선호하는 70~80년대의 작품들이 물량적 측면에서 이젠 어느정도 고갈 될 단계에 온 것 같다"고 지적했다. 팔릴만큼 팔렸다는 의미다. 반면 상업적 붐에 걸맞는 담론의 부재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담론의 창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단색화의 붐업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민간에서보다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보다 건강한 한국 단색화의 형성을 위해서는 전기 단색화에 이어 후기 단색화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의 형성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단색화가 시장적인 측면에서만 이슈가 되고, 미술사적으로는 사장되는 것은 아쉬움이 크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번 '한국의 후기 단색화'전은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후기 단색화'는 어떻게 분류되는 것일까. 윤진섭 평론가는 "후기 단색화작가들이란 70~80년대에 한국미술의 현장에서 모더니즘 미술을 직접 체험했던 작가군(群)을 지칭하는 것으로 현재 50~60대의 연령에 도달한 세대가 여기에 속한다"면서 "전기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의 제자벌에 해당하는 이들은 한국의 근현대화(1960 이후)의 과정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라고 소개했다. 한국에서 수행하듯 그림만 그렸던 단색화가들과는 결이 다르다. 후기 단색화가들은 유교적 생활윤리보다는 합리주의적 사고가 몸에 배어 있다. 일본어 보다는 영어의 구사가 더욱 자연스럽다. 유럽과 미국등 서구 사회에서 미술을 전공한 유학세대가 많은 것도 후기 단색화 작가들의 특징이다. 단색화로 보이지만 작품에도 차이가 있다. 1세대 단색화 작가들처럼 예술을 수양이나 수신의 과정 혹은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후기 단색화가들은 예술을 의식의 표현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특히 한국이 산업사회에 접어들기 시작한 70~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이들은 독자적인 재료와 매체 실험을 통해 단색화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해봐야 할 이유가있다. 지난 3~4년간 한국 미술 열풍을 일으킨 단색화를 잇는 이번 전시는 '후기 단색화'라는 전시명이 '단색화' 개념으로만 한정 지어질 우려도 있다. 하지만 미술시장에서 시들해진 단색화의 무관심보다 상업갤러리의 이같은 노력은 건강한 한국 현대미술 생태계 조성에 긍정적인 신호로 보인다. 미술애호가와 컬렉터는 물론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다양하고 깊이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진화를 살펴볼수 있는 기회다. 윤진섭 평론가는 "이 전시는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의 단색화'전 이후 본격적으로 후기 단색화를 조명한 전시로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향후 후기 단색화의 흐름과 향방을 가늠해 볼수 있을 것"라고 자신했다. 전시는 2월24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01/03
이우환 작품이 불러온 '위작죄' "나만의 호흡, 리듬과 색채로 만든 분명한 나의 그림"이 뒤통수를 쳤다. "틀림없는 내 그림"이라는 화가의 주장과 달리 1년후인 지난 8월 이우환 작품 위작범과 화상은 중형을 피할수 없었다. 위작을 그려 팔아넘긴 화상은 징역 7년, 위작을 진품처럼 그린 위작범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이 화상등 컬렉터들을 속여 판 작품값은 총 52억원어치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이 화백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등을 모사한 총 9점이었다. 위조한 작품을 팔아넘긴 이들의 죄목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범상 사기죄였다. 하지만 앞으로 위작범은 '위작죄'로 처벌된다. 기존에는 형법상 사기죄, 장물죄, 사서명위조죄등이 적용됐었다. 정부가 '미술품의 유통 및 감정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의결하면서 위작죄가 신설됐다. '위작죄'가 적용되면 위작 미술품을 제작·유통한 자는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을 받는다. 상습범에게는 최고 10년형 또는 1억5천만 원 벌금의 중벌이 가해진다. 또 계약서나 미술품 보증서를 거짓으로 작성해 발급한 자 또는 허위 감정서를 발급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된다. 기존 사기죄(10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 벌금)보다 징역형은 낮지만 벌금을 더 높였다. 상습범은 3배까지 중벌해 사기죄보다 더 높은 처벌이 될 수 있다. 양벌 규정도 적용된다. 법인의 대표자나 고용인이 위반행위를 한 경우 그 법인 또는 개인에게 벌금형 양벌이 가능해진다. 사기죄에서 위작죄 신설은 개인에서 공공으로 확대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위작을 사유재산으로 놓고 사기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으로 처벌했다면, 새 법안은 사회 신뢰와 공공질서에 위해를 가한 것의 처벌이라는 점에서의 의미가 있다. 위작문제는 미술시장 존폐에 관한 문제다. 이런 차원에서 시장 자율에 맡겼던 정부가 칼을 빼든건 당연한 이치다. 위작은 화가 개인뿐만 아니라 시장 전체 결국 국격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우환 위작 논란'이 뜨거웠던 건 그의 작품이 내수용이 아닌 해외용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2007년부터 급부상한 '이우환 그림'은 삼성의 후원을 받아 2014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개인전을 열 만큼 세계 미술계의 러브콜을 받았다. 'K-아트'의 선봉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존재감을 과시했었다. 이우환 화백이 "틀림없는 내 작품'이라며 위작 논란에서도 그가 외친 건 "국제적으로도 작품거래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는 항변이었다. 백남준 이후 세계적인 작가로 등극한 이우환 화백에게 떠들썩한 위작 사건은 그야말로 '나라 망신'이라는 자괴감이었다. 위작논란으로 (내수용이었던)박수근·이중섭 그림이 사그라든 것과는 차이가 크다. 이우환 그림은 작품값이 떨어지지 않았고 경매시장에서도 낙찰총액이 급상승했다. 위작시비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2015년에는 한 해 낙찰총액이 117억5000만원을 기록했다. 2014년부터 매년 평균 80% 이상의 낙찰률을 보이며 올해도 이우환 작품은 강세다. 다만 위작이 나왔던 '선으로부터', '점'으로부터 시리즈는 매물이 자취를 감췄고, '바람 시리즈'가 고가 낙찰을 기록하고 있다. 선들이 휘몰아치는 '바람'은 따라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바람 시리즈'는 12월 열린 국내 양대 경매사 겨울 경매에서 2배이상 낙찰되며 눈길을 끌었다. 현재까지 이우환 작가 최고가는 2012년 홍콩 경매에서 기록된 1977년 작 '점'으로 21억3000만원이다. '위작 논란'만 불거지지 않았어도 '김환기 독주'를 막을 '블루칩 작품'이었다. 위작 사건이 터지면 불신의 벽은 높아진다. '믿을수 없다'는 불안감은 '큰 손'들을 해외로 뺏기는 꼴이 된다. 국내미술시장 규모는 3965억원(2016년)이다. 지난 11월 15일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5000만달러(약 4900억원)에 낙찰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 한점 값도 안되는 수치다. 이런 가운데 관세청에 따르면 기업이 해외에서 사들인 미술품은 3700억원에 달한다. 2015년보다 81% 증가했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7억2300만달러) 이후 최대다. 2016년부터 해외미술품이 증가한 것과 관련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위작 사태의 영향으로 컬렉터들이 국내 시장을 외면하고 해외미술품시장에서 직접 구매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술품은 최고의 사치품이다. '부자들의 놀이'라고 할 만큼 알고보면 '머니 게임'이다. 미술의 대중화가 됐다고 하지만 미술의 벽은 예술보다 높다. 올해 2월 화랑협회장이 된 이화익 회장은 "화랑이 돈세탁 창구로 여겨지는 이미지를 씻어낼 것”이라며 10여년간 이어온 화랑협회장 취임 일성을 재생했다. 국내 미술문화수준이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림은 수백억이 넘는 돈을 주고 손에 넣었더라도 '일시적 점유'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소장품 1만여점을 지역의 공공미술관에 기증한 유명 컬렉터 하정웅은 "미술품 기증은 다 함께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미술품은 결국 공공재이자 국격을 대변한다. 각국의 문화전쟁은 진품과 작품값에서 승부를 가른다. 서울옥션 이호재 회장은 "비싼 값에 거래된다는 건 나라의 격(格)이 올라가는 것이고 나라의 자존심, 국가 브랜드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세계화 정보화속에서 컬렉터들은 더 스마트해지고 있다. 화상의 꼼수, 진작같은 위작도 쉽게 통하지 않는 냉정한 시대다. 이번에 정부가 빼든 '위작죄' 시행은 자구책이 아니라, 국내 미술시장을 키울 수 있는 마지막 해법일 수도 있다. [email protected] 2017/12/27
Hi,POP 거리로 나온 미술과 르메르디앙 서울 #1917년 뉴욕 한 전시장. 제목은 '샘(Fountain). ‘R. Mutt(마르셀 뒤샹)'라고 사인만 되어 있던 남성용 소변기가 세계 미술사를 바꿀줄은 누구도 몰랐다. 전시에 출품됐지만 천박하고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돼 전시 뒷편에서 숨죽였던 '변기'는 제목 '샘'처럼 터져 도발했다. 하얀 벽에 걸려 고고함을 내뿜던 그림의 권력에 찬물을 끼얹은 셈으로 기존 예술의 개념을 완전히 전복시켰다. 요즘말로 미술의 적폐청산이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변기'는 전시장에 나와 '개념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쏘아올렸다. 제품과 작품 사이에서 '미술이 별거냐'며 파격과 함께 각성시킨 건 '일상이 예술'이라는 것. 뒤샹의 '샘' 이후 미술세계는 다시 '팝 아트'로 뒤집혔다. #1955년 로버트 라우센버그 '콤바인팅 페인팅' 이 나왔다. 이때 주목할 점은 신문, 거울, 침대 등 일상의 사물이 작품의 주재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이 라우센버그의 사물 활용법을 평면으로 재흡수했고, 이들이 사용한 벤데이(Ben day) 인쇄방식과 실크스크린 기법은 미술사를 경쾌하게 변신시켰다. 진득한 물감과 붓질로 그리던 초상화나 풍경을 프린트해내며 '단 한점뿐'이라는 희귀성까지 침범하며 미술의 권위를 끌어내린 것. 특히 무한 복제가 가능한 반복으로 세계 미술계를 '팝아트 왕국'으로 재편한 건 앤디워홀이다. 작가공장(팩토리)을 차리고 예술노동자를 고용하며 깡통 수프캔부터 마릴린먼로등 유명 초상화까지 색색으로 찍어냈다. 기존의 미술에선 '참을수 없는 가벼움'으로 경박스럽게 보이는 팝아트지만 현재까지 동시대 현대미술작가들을 지배하고 있다. 국내미술시장을 이끈 스타작가들 모두 앤디워홀의 후예들이다. 전설이 사라지면 유명세가 대체한다. '미술이 별거냐'며 일상용품처럼 찍어낸 그때 그 시절 작품들은 희귀품으로 천정부지로 치솟은 작품값을 자랑한다. 앤디 워홀의 ‘실버 카 크래시’는 2006년 1억5000만달러에 낙찰됐고 워홀을 추종한 장 미셀바스키아, 키스해링의 작품도 수십억에서 수천억대에 거래된다. #2017년 르 메르디앙서울 호텔 입구에 위치한 M컨템포러리. 팝아트 대표작가 5인의 주요 작품을 전시한 'Hi- 팝아트'전이 15일 개막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중심으로 앤디 워홀, 키스 해링,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버트 인디애나 등 대표 팝 아티스트의 다양한 작품 160여점을 선보인다. 현재 89세인 로버트 인디애나를 빼고 사망해 ‘팝아트 전설'이 된 이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M컨템포러리 강필웅 디렉터는 “미국 팝아트 거장들의 향연을 볼 수 있는 이번 전시를 위해 각국의 개인 소장된 작품 중 엄선해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공동기획사 코메디아팅(ComediArting Srl)의 Maria Dolores Duran Ucar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의 아티스트들은 20세기 후반 생동하는 뉴욕에서 예술에 대한 새로운 길을 연, 미국 팝 아트의 위대한 주인공인만큼, 대중문화에서 시작된 예술이 최상위 미술이 되기까지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시는 각 작가들의 개인전처럼 꾸몄다. 로버트 라우센버그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을 지나 로버트 인디애나, 키스 해링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팝 아트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활동 시기와 독자적인 주제 의식을 고려하여 각각의 특색이 드러나는 공간으로 연출했다. 1960년대 팝아트 운동이 일어난 시점부터 미국 팝아트 운동의 부흥을 이끈 대표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삶과 당대의 문화를 피부로 느껴볼 수 있다. 31세,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키스해링의 마지막 작품인 '종말 시리즈' 8점은 국내에서 첫 공개되는 작품이다. 빅뱅 승리와 배우이자 가수인 유준상이 오디오 가이드로 작품설명을 해준다. #팝 아트가 살아남은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18세기 인상파 화풍의 풍경만이 예술이라는 것이 아닌 일상의 사물, 공간,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번 전시가 보여주는 건 '일상이 어떻게 예술이 되어 미술관 벽에 걸릴 수 있게 되었는가'다. 어디선 본 듯한 '팝아트의 화려함과 단순함'이 그동안 얼마나 우리의 뇌구조를 지배해왔는지도 깨닫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편,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흐려놓은 팝아트의 진수를 볼수 있는 이번 전시는 '호텔 미술관'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팝아트가 말하고자 했던 ‘Life is Art’를 실천한다는 점에서다. 미술관에서만 보는 비싼 미술품이라는 통념을 깨고 이번 전시는 M컨템포러리 전시장에서 르 메르디앙 호텔 1층 로비까지 이어져 '일상과 하나인 예술'을 보여준다. 호텔은 숙박만 하는 곳이 아닌 '문화 아지트'로의 변신이다. 거대한 거리 미술관 처럼 외벽을 장식해 강남의 거리문화도 작품화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림, 그래도 어렵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 나온 '팝아트 황제' 앤디워홀의 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내 그림과 영화와 나를 보면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어요” 또 콤바인의 혁신성을 보인 '팝아트의 대부' 로버트 라우센 버그 말도 들어보자. "그림은 생활과 예술의 결합이다. 나는 그것을 구분하는 사이에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전시에 나온 작품은 에디션이 있는 만큼 판매도 한다. 2018년 4월 15일까지. 입장료 1만2000~1만6000원. [email protected] 2017/12/14
머리카락 리얼리즘…황재형 개인전 단색화로 더 이상 신선한 충격이 보이지 않던 미술시장에 경악할 만한 작품이 등장했다. 황재형 화백(65)이 '십만개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신작이다. '탄광촌 화가'로 유명한 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 국내 손꼽히는 정통 리얼리즘 구상 작가의 반전이다. 국내미술시장을 이끈 팝아트 작가들이 청바지, 쌀, 면봉, 실타래,크리스탈등 다양한 재료로 작업한 것은 애교다. 물감이 아닌 오로지 머리카락 한올한올로 완성한 작품은 놀라움과 기괴함으로 다가온다. 엉키고 뭉친 머리카락으로 수놓은 인물과 풍경은 더 이상 인물화나 풍경화가 아니다. 황재형표 체험 삶의 현장내음이 진득하다. 전시를 기획한 가나아트센터는 머리카락을 재료로 온전한 그림을 제작한 것은 세계 최초라는 입장이다. 이전 유태인의 머리카락으로 옷을 만들고 침대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는 디자인 차원에 속했다. '10만 개의 머리카락'을 타이틀로 오는 14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7년만의 개인전을 연다. 전시 제목은 사람의 머리에 나는 모발의 평균 숫자다. 전시를 앞두고 만난 황재형 화백은 의연했다. '작품이 오싹하다'고 하자 "배타적이서 그렇다"며 편견에 젖은 기자의 타성을 나무랐다. 그는 "머리카락은 이미 피자 비스킷 햄버거에 시스틴으로 들어가 있어 우리가 이미 먹고 있다"면서 "머리카락을 혐오스러워 한다는 것은 이 시대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민중의 모습을 거친 질감으로 승부했던 유화물감을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황 화백은 "머리카락은 살아있는 현존체이자 생명력"이라면서 "왜 인간은 머리카락처럼 살수 없나요?"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머리카락에 깃든 '평등의 미학'을 말했다. "한 인간의 머리카락의 숫자가 10만개정도 난다고 합니다. 하루에 100개가 빠져도 끄덕없는 머리카락을 인간은 지니고 있죠. 10만여개의 머리카락이 아무 불평없이, 아무때나 동일하게 나지는 않아요. 한날 한시에 태어나는 머리카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이 탈모되지도 않아요. 원형탈모도 차츰차츰 빠집니다.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불평등이 체화된 인간의 몸뚱이에서 그렇게 평등한 머리카락이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10만개의 머리카락이 인간 생명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표징"이라고 강조했다. "머리카락을 뚝 떼서 분석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떤 역사를 가져왔는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그는 "사람들은 머리카락 혐오증이 걸렸는지 쓰레기통에 확 버리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다. "내 것도 타인의 머리카락도 성스러운 존재로서 귀하게 여길수 밖에 없는 선물로, 후대에 물려줘도 좋을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무한한 표현재료 확장을 보여주는 작품은 '일상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예술이 된 머리카락'은 태백의 미용실을 순례하면서 모았지만 차츰 주변사람들이 나누어줬다. "머리카락을 준 지인들은 완성한 작품을 보고 놀라기도 하면서 기뻐하더군요. 무엇보다 자신이 참여한다는 생각때문에 들뜨시기도 하고…잘 해주세요라고 하더군요. 해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 머리카락이 다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력 그 자체이기 때문에 저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지요라고요." 머리카락을 준 지인들이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고 판매까지 한다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아직 (그렇게까지 태백 지인들)자본화되어 있지 않다"며 에둘러 표현했다. 탄광촌 광부와 그 가족들의 고단한 삶의 여정을 캔버스에 담은 작가지만 그들의 참된 삶을 온전히 담을 수 없어 미안한 감정이다. 그들의 영혼이 담겨있는 머리카락을 이용한 작업은 작가 자신에게도 위로를 주었고, 붓과 색채를 이용한 작업보다 더욱 생생한 표현력의 힘이 됐다 . 황재형은 자신의 그림과 현실이 하나임을 증명한 작가다.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1982년 이종구·송창 등과 조직한 ‘임술년(壬戌年)’의 창립동인으로 모순된 사회현실에 저항한 1980년대 민중미술 대표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대학시절 반 고흐의 초기작 감자를 먹는 광부가족에 마음을 빼앗겼다.1988년 돌연 태백으로 내려갔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16년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야학교사, 공장등을 전전하다 오지 태백으로 들어간 그는 막장에 들어갔다. 탄광촌에서 살며 석탄을 캤다. 하지만 그는 화가였다. 당시 길가, 풀섶, 하천등 아무데서나 풀썩 앉아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똥물 화가’로 불렀다. 삶의 현장에서 길어낸 작품들은 그를 '광부 화가'로 등극시켰다. 시커먼 광부의 초상중 ‘한숟가락의 의미’는 경외감을 전하며 새로운 '민중미술'의 길을 열었다. 탄광촌과 탄광사람들을 재현하는 그는 현실의 삶속에서 민족의 역사를 조명한다. 10년전 탄광촌 선탄부들의 목욕장면을 훔쳐본 후 화가로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했다. 문틈 사이로 마주한 '알몸의 현장'은 그를 해탈하게 했다. "비누칠과 샤워로 시커먼 물이 흘러내리는 몸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어요. 인간의 피부가 아주 싱싱하게. 물비늘처럼 아름답게 보이더군요. 특히 남편이 죽은 다음에 건강한 노동으로 가족들과 미래를 다지고 있다는 것, 그 현장, 그 몸, 그 몸의 아름다움, 그 몸의 진실을 증거하고 싶은 마음에 문을 열고 싶었죠." 욕탕문앞에서 욕망이 양심과 대결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꼭 그렇게 해야겠어, 상상해서 그려" vs "현장의 디테일은 다르지. 정말로 확연하게 보고 싶다" 30분간 문을 잡고 실랑이 하던 그는 결국 무릎 끓고 울고 말았다. "내가 이런 현장을 팔지 않아도 될 만큼 직관력이 있다면 화가로 살 것이고, 선탄부들 음모까지 그리면서까지 인간의 진실을 꼭 그린다면 나는 화가로서 재능이 없을수 있어. 그렇게 인식될때까지 한없는 나의 퇴페성에 눈물을 짜냈어요." 그는 "중요한 건 이 시간까지 그 부끄러움은 삭혀지지 않고 있다"면서 "타인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득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했는데 그것들을 삭혀주는 것이 바로 머리카락의 생명성이었고, 그래서 머리카락으로 작업하게 된 계기"라고 고백했다. 묵직하게 말을 잇던 그가 느닷없이 종이박스를 열어 액자를 꺼내 보였다. 길고 가느다란 액자에는 한 여인이 꽃무덤앞에서 사진을 찍은 모습으로 날카롭게 깨진 유리가 동시에 들어있다. 광부 화장실에서 놓여있던 거울이었다. 이사를 가면서 버리고 간 것을 황 화백이 '절도'한 물건이다. 사진속 여인은 1968~1969년 정도 스타일로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순수한 심성을 봤다"며 액자를 애지중지 다뤘다. "'일반인들이 예술이더라'. 그게 가슴을 쿵 쳤다"고 했다. 무슨뜻이냐고 하자 황순원 선생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면서 했던 말로 대신했다. '우리가 정작으로 예술로 드러내야 할 건 누이의 누런 이다.' "제가 찾고 싶었던 건 바로 삶속에서 이런 순수함, 순수한 심성, 인간정신입니다. 나의 그림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익명의 개인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입니다. 내 눈의 실핏줄이 터지는 까닭입니다." '십만개의 머리카락'으로 제작한 작품앞에서 또 한번 반전이 일어났다. '털보' 황 화백이, 쓰고 있던 중절모를 잠시 들어올리자 민머리가 반짝였다. "제가 대머리라서 타인의 머리카락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하하" 징그럽고 혐오감을 유발하지만 희귀함을 탑재한 머리카락 작품이 얼마나 팔릴지도 주목되고있다. 황 화백 유화 작품값은 100호 경우 4000만원~5000만원선이다. 전시는 2018년 1월 28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12/11
곰팡이 덕분에 혁신…최영걸 '성실한 순례'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많이 먹고 '그림도 사본 사람이 많이 산다.' 미술시장 화상들의 얘기다. 하지만 이젠 작가들도 할 말이 생겼다. '그림도 팔아본 사람이 안다.' 그림은 전시했다고, 또 판매했다고 끝난게 아니다. 미술작업은 끝나지 않는 게임이다. 그건 '그림을 팔아본 사람'이 안다. 한국화가 최영걸(50·추계예대 교수)은 그걸 10년만에 알았다. 6년만에 여는 개인전을 앞두고 만난 그는, 그 '앎'을 공개했다. 모든 건 계기가 있다. 올해 어느 날이었다. 해외 컬렉터 초대로 홍콩 완차이 엠파이어 호텔을 갔다. 호텔 주인은 최영걸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의 그림을 걸기위해 호텔을 리노베이션 할 정도로 극강의 애정을 보였다. 로비엔 최영걸 그림으로 도배됐다.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두각을 보인 그의 그림을 엠파이어 호텔 회장이 해마다 사들였다고 한다. 기쁨도 잠시, 작가는 고민에 직면했다. 호텔 주인인 컬렉터가 그를 한 점의 그림앞으로 데려갔다. 앗~. 곰팡이 자욱이 보였다. 보수된 상태였지만 완벽히 안지워있었다. 컬렉터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방법이 있느냐" 물었다. "그림을 제작하는 입장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는데, '올게 왔다'는 기분이었죠." 곰팡이는 기후 탓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홍콩은 겨울에도 습도가 80~90%가 될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번도 못봤던 현상이었어요. 10여년간 단 한번도 이런 문제와 마주친적은 없었거든요." 알고보니 동양화가 많은 홍콩 현지작가들도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배접을 할때 풀이 문제인지, 종이인지, 손때문인지, 곰팡이 포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기 때문에 답답했다. "복원전문가를 찾아갔죠. 그런데 그도 답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있고난 후 곰팡이와 전쟁이 시작됐다. '어떻게 방지할수 있을까' 고민은 재료의 실험으로 이어졌고 실마리가 보였다. 답은 안에 있었다. 고정관념을 바꾸니 무한하게 펼쳐졌다. 화선지를 잠시 물려두고 서양 재료로 다가섰다. 수채화 용지와 캔버스에 그리면 되는 일이었다. (배접할때)풀을 안쓰는 종이가 없을까? 의문으로 택한 재료였다. 2000년대 초반 한국화의 새로움을 선사하며 스타작가가 됐던 최영걸은 재료의 변화로 한번 더 혁신 플랫폼을 강화했다. "새로운 재료를 시도해보는 계기가 된거죠." 곰팡이가 스승인 셈이다. 17일부터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6년만에 여는 개인전은 그 비밀을 담아 확장된 재료로 만든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타이틀은 '성실의 순례'로 유럽의 성당과 외국인들의 일상 풍경을 담아냈다. 서구의 풍광을 최영걸 기법으로 그려냈다. 달라진게 있다면 우리 산하의 풍경을 촘촘하게 탐구하던 작가의 시선이 국내를 벗어났다는 차이다. 하지만 '최영걸표' 밀도감은 더 강력해졌다. 해상도 높은 사진처럼 가까이서 밀착해봐도 깨지지 않는 화상도를 자랑한다. 흑백으로 담아낸 유럽의 성당의 내부와 외부 모습은 유구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길거리 다리위에서 연주하는 흑인밴드의 모습도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시간의 향기를 품어낸다. 고대 유적지의 한 귀퉁이에서 잠들거나 문설주에 앉아 있는 개와 고양이, 관광지에서 흔하게 볼수 있는 비둘기 같은 동물까지 화폭에서 실제감을 발휘한다. 최영걸은 전시 타이틀처럼 '성실한 순례자'같은 화가다.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즉각 반응을 나타내는 말이 있다. 대체 어떻게 그려요? 이렇게 그리면 얼마가 걸려요?" 어떻게 그리나. 먼저 사진을 찍고(이전에는 현장에서 스케치했지만) 풍경을 고르고 컴퓨터로 작업 한다. 이전에 디자이너로 일했기때문에 쉽게 하는 일이다. 스케치는 갈필로 형태를 잡고 톤을 입힐때 수묵을 묽게 해서 올린다. 먹과 바늘같은 세필을 이용해 치밀함과 대결한다. 5mm 세필로 그리다가 점점점 작은 1mm 붓으로 마무리를 한다. 시간은? 적게는 2주, 많게는 두달정도까지 갈때도 있다.하지만 이또한 정확치는 않다. 시간을 재고 하는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화랑은 그의 더딘 작업때문에 기다림의 미학에 빠진다. 벌써 3년전부터 전시를 하자고 했던 일이었다. 6년만에 여는 이번 전시는 그래서 시작이 좋다. 목빠진 컬렉터들이 전시를 열자마자 그림을 사고 있다. 물론 전시때마다 작품은 모두 팔렸다. 13년째 작가와 화랑이 전속 의리를 맺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번 2011년 개인전 이후의 작품 변화를 보여주려는 시도에서 비교적 폭넓은 내용과 형식의 작품들이 제시되고 있다. 작가가 외국여행을 통해서 경험한 순간의 표정들이 작가의 세련된 필치를 반영해주는 먹이나 수채 물감으로 독특하게 표현된 작품들이 눈에 띤다. 터키와 러시아 그리고 스페인 등의 이국적인 공간에서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표정들이 정성스럽게 화면에 내려앉은 작품들은 최영걸의 창작 과정에서 늘 그래왔듯이 성실한 손 노동이 압권이다. 재료의 변화가 있지만 여전한 건 우리 색, 먹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모노톤 사진 같은 그림, 굳이 먹을 써서 그려야만 할까. 우문을 던지자 그는 "먹을 통제한다"고 했다. 잉크나 수채화물감하고는 다른 성질이 있죠. 그을음. 물감은 닦이면 닦여요. 수정이 가능하죠. 그런데 먹은 닦이지가 않아요. 맨 처음 먹색은 그 위에 발라도 올라옵니다. 요즘 사람들은 색상만 보고 판단하죠. 단색의 느낌으로 받아들인다고나 할까요." 그는 서울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학창시절 전통화와는 달리 사진같은 수묵화를 그려 교수는 물론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했다. "먹하면 발묵이라고 생각하는 데 틀린 생각이에요. 발묵은 번지는게 아니라 유동적인 상태, 머금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겁니다." 그러려면 종이가 두껍고 번지지 않아야 한다. 그는 "청나라때 쓰던 종이는 지금 화선지처럼 번지지 않았다. 번지는 효과가 있는 화선지는 명나라 말기에 만들어졌다"며 "발묵을 먹의 특징적으로 생각하는건 잘못됐다"고 바로잡았다. 그는 "먹은 인류가 발명해온 안료중 하나"라며 먹을 예찬했다. "영구불멸하죠. 먹이 잉크와 블랙 물감과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어요. 물론 일반적으로 차이를 못느끼겠지만 전문가들이 보면 미묘한 차이를 알아챕니다. 먹이 갖고 있는 동양화의 상징성이 있어요." "먹을 왜 쓰냐고요? 안료자체가 가지는 성질도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수묵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 있어요." 10년 넘게 이어진 '하이퍼리얼리즘 수묵화'는 이제 재료의 탄탄함을 장착했다. 고도의 노동집약적인 생산물인 작품은 재료의 변화로 영원성까지 담보하게 됐다.(물론 컬렉터 A/S 차원이 있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전남 구례 산수유 마을 풍경을 담은 그림이 예다. 산수유 그림은 그의 시그니처같은 작품인데, 이번 작품은 색감의 재료가 달라졌다. 노란색. 일반적으로 전통 물감은 등황(등나무 진)을 쓰는데 이는 식물성 안료다. "그런데 빛에 취약합니다. 직광이 떨어지면 몇년안에 색이 바래버리죠. 그래서 바꾼 것이 '카드뮴 엘로우' 독일에서 나오는 물감을 쓴겁니다." 그는 "전통을 잇는다 해서 전통 그대로 하는게 아니라 우수한 걸 구입해서 쓴다"고 했다. "동양화 서양화라는 말이 존재하잖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 입장에서 이 카테고리가 부담일수 있고 득이 될수 있지만 중요한 건 서양과 동양사이에서 우리 세대(386)는 낀 세대입니다. 사고방식은 동양이 유지되고 있는 묘한 느낌이 있어서 저도 그런 고민에 끼인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결과물인거죠." 한국화가로서 재료에 대해 할말이 많다. 그가 한지를 쓰다 수채화물감이나 캔버스로 화폭을 바꾼 이유다. "한지는 문제가 중성화처리가 안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서양은 비앙코지 경우 면이 100% 50%인 경우도 있는데 중성처리가 되어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황변을 방지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뜻이죠." 한지는 질겨 삵지 않지만 황변이 온다. 누래지는 것은 화가나 컬렉터가 바라는 게 아니다. "중성화처리를 하면 화이트를 화이트대로 유지할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 연구개발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안타까워요" 전통재료 업체가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화선지 값이 3배가 올랐다. "수요가 없기때문인데, 종이 만드는 회사도 문을 닫고 한지를 떠내는 발이 중요한데 발을 만드는 분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제가 장지를 가져다 쓰는 곳이 있는데 힘들어요. 120호 종이를 10년전에 주문했는데 최근까지 소량만 받았어요.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전통화를 전공했다고 전통재료를 쓰는게 아니라 좋은 재료를 쓰기 위해 개발하고 차용한다. 그는 "동양화하는사람은 어쩔수 없이 서양화 공부를 해야한다"면서 "현대미술은 포스트모던 이후 이제 동양적인 사고나 형식이 차용된 경우가 많다"며 한국화가로서 자부심을 보였다. 중학생때 아버지가 출장길에 사다준 관광용 두루마리 그림 때문에 그는 화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이태리 신부에서 중국 궁정화가가 된 낭세녕(1688∼1766)의 그림이었다. 서양인이 중국 재료로 비단에 그린 그림. 동서양 기법이 섞인 묘한 정물화는 그를 동양화 전공으로 이끌었다. 낭세녕의 그림을 보고 꿈을 꿨고 중국 국보 1호 장택단의 그림에서 좌절했지만 최영걸은 한국화 대표작가로 승승장구세다. 무명의 한국 작가를 쏘아올린 건 크리스티 홍콩경매사다. 2008년 홍콩 크리스티 5월 경매에서 그의 최고 낙찰가(41만5000 홍콩달러)를 기록했다. 2012년에는 그의 '봄을 찾아서(finding spiring)'가 추정가 20만 홍콩달러(2976만원)를 웃도는 37만5000 홍콩달러(5581만원)에 낙찰되면서 해외컬렉터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해마다 경매에 출품되어 '크리스티가 사랑하는 작가'로도 불린다.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한국화 시장의 물꼬를 다시 튼 작가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 아트마켓을 무대로 뜨거운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다. 작품값도 상승세다. 현재 전시에 나온 산수유 풍경 '화양연화'(150호 규모)의 경우 4500만원에 판매한다. '그림 좀 팔아본 작가' 최영걸은 동서양이 결합된 퓨전같은 그림, '낭세녕의 그림'을 닮아가고 있다. 먹을 버리지 않고 '피땀눈물'같은 집요한 열정으로 한국화에 천착하고 있는 것은 그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소명감이죠. 한국화에 관심이 적은 시대속에서 현대적으로 재석하고 접목시켜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새로운 한국화'라는 말도 애매하지만 제 그림은 한국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도록 거부감없이 다가서고자하는 그림입니다. 먹과 종이의 확장된 표현력과 재료의 실험도 현대 생활에 밀착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한국화의 한계를 더 극복하고 싶어요." 전시는 12월 7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