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자식'에서 환골탈태한 오치균 "밥이 문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의 이 명대사가 좀 생각나는 전시가 있다. '사랑'을 '사람'으로만 바꿔보면 딱이다.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이럴수가 있나 싶을 정도다. '어둠의 자식'에서 환골탈태했다. 4일 금호미술관에서 개막한 오치균의 '뉴욕 1987~2016'전은 극과 극이다. 뉴욕1~2기(1987~1995년대)와 뉴욕 3기(2014~2016)은 흑백TV에서 Full HD 컬러TV급으로 변환된 화면이다. "왜 이렇게 봤나. 지금은 상상이 안되는데, 그때는 이렇게 까맣고 어둡게 보였어요". 30년전 뉴욕에 간 오치균의 삶은 고되고 퍽퍽했다. 뉴욕에 살았지만, 여유가 넘치는 센트럴파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하로 다니며 거지들(홈리스)만 눈에 들어왔다. "저게 나다" 검은 화면에 뭉뚱그려진 형상을 그려놓고 살았다. 1987년 브루클린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시기부터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1990년까지 4년간 그린 초기 뉴욕시리즈는 빛과 차단되어 있다. 거대도시 뉴욕에서의 고독한 삶은 어둠속에 갇혔다. 전시장 3층 한 벽면을 차지한 ' figure(피규어)'시리즈는 기묘하고 착잡한 심정을 전한다. 자신을 그린 인체는 동물처럼 원초적인 모습으로 좌절과 분노의 감정에 싸인 모습들이다. 지하철 플랫폼을 담은 'Subway'와 지하철역사 한 모퉁이에 사물도 인간도 아닌 것 처럼 늘어져 있는 'homeless' 그림도 어둡고, 참 어둡다. 4일 전시장에서 만나 오치균은 들떠 있었다. 큐레이터가 작품을 설명할때마다 부연 설명을 하겠다며 나섰다. 검은 동그란 선글라스를 껴 레옹같던 이전 모습이 아니다. 안경도 없이 온 얼굴을 드러낸 그는 자주 웃었고 말도 많았다. "근심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내에요. 이건 제 딸이죠" 80년대 후반 "어떻게 살거냐며 째려보는 아내를 그린 그림"앞에서 미소를 진 그는 "그때는 공부하고, 일하고, 사는게 급급해서인지 모든게 어둡게 보였고, 찌질한 사물들이 모두 나 같았다"고 했다. '고독이 춤추던' 뉴욕 1기 시기를 지나면 1993년~1995년까지의 뉴욕 2기 시기는 변화된 관심사를 보여준다. 개인전을 준비하기 위해 방문한 뉴욕에서 체류가 길어지며 거주하게 된 시기로 이때는 경제적 안정과 생활의 여유가 뒷받침된 때다. 어둔 내면세계의 정서가 지배적이었던 뉴욕 1기와 달리 뉴욕의 마천루들이 만들어내는 지평선과 빌딩숲을 그린 '엠파이어 스테이트' 시리즈, 특히 눈이 쌓이 겨울 도시풍경을 그린 '설경'시리즈는 음울한 도시가 아닌 자연으로서의 뉴욕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이 시기의 작품들도 회색조, 청록색등 음울한 색감은 여전하다. HD급 컬러TV로 변한 것 같은 작품은 2014년부터 시작된다. 같은 풍경, 같은 장소인데, 보는 눈이 달라졌다. 색을 밝혔다. 맥시멀리즘이다. 경쾌해진 색감과 마티에르는 뉴욕의 공원과 거리 풍경을 일렁이듯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보통 작가들이 젊었을때, 분출하고 색을 많이 쓰는데 나는 철도 더 없어지고 왜 이러나라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뉴욕에 가서 프랭크 스텔라 전시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 분이 나와 같더라고요. 초창기에는 까맣게 미니멀리즘으로 그리다가 지금은 입체로도 그리고 표현의 절정을 보이는 작품을 보면서 위로로 받았어요". 그는 이번 금호미술관 전시를 준비 하면서 스스로 놀랐다고 했다. "분명, 느낀 그대로 그린 것인데, 비교해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나무가 있어도 나무를 빼고 그렸고 보이지도 않았어요. 평론가들이 '문명에서 자연으로 돌아왔다'고 하겠지만, 그런걸 생각하고 그리지는 않았아요." 같은 건물을 그린 그림이다. 20년전에는 네모 창문을 획일적으로 그려낸 건물을 화면에 건조하게 담아냈다면, 뉴욕 3기 2014년에 그림 그림은 노란 잎들이 풍성한 커다란 나무가 건물을 가리고 앞으로 등장해있다. 이렇게 보이게 된 이유는 '여유감'때문이라고 했다. "뉴욕의 지하철이 그때는 어둡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정말 밝게 보이더라니까요. 지금까지 암흑속에 살았으면 어떻게 하나. 문제는 마음인 것같다. 지금은 '마음의 장막이 걷혔다'고 표현했다. 그는 '돈은 숫자일 뿐'이라고 했지만, 돈은 모든 걸 돌려놓는 힘이 세다. 오치균은 "먹고살아야 했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관심이 달라졌다"면서 "달리 보이는 세상이 재미있다"고 했다. 시선이 달라진건 2년전부터다. 2013년 가을경 괜히 센티멘털해졌다. 바쁘게 지나온 7~8년을 뒤돌아봤다. '뉴욕 가을은 어땠나?'.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그래서 떠났어요. 센트럴파크에 갔더니 단풍이 흐드러졌어요. 왜 그전에 이런게 안보였을까. 여유가 생기니까 같이 동화되는 것 같아요". 이후 뉴욕에서 2년간 '신나게' 그림을 그렸고, '색기'가 넘치는 '뉴욕 3기'가 탄생했다. 절실함보다 여유감이 넘쳐서 일까. 이 그림은 '오치균스럽지 않아' 좀 낯선 느낌이다. 두터운 질감이 툭툭 칠해진 같은 기법인데 너무 화려해서 생경하다. '인상파 그림'과 같다. 한걸음 떨어져 보면 풍경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물감의 격렬한 흔적만 몸서리쳐져 있다. 오치균 그림은 '핑거 페인팅'이다. 붓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그린다. 다른 작가와 큰 차별화다.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찍어 바르는 '임파스토' 제작방식이다. 30년째 붓이 된 손은 의외로 곱다. "작업하기전에 핸드크림을 많이 바른다"는 그는 "손으로 하는게 운명인 것 같다"며 반질반질한 손바닥을 보여줬다. 오치균은 2007년부터 미술시장에 돌풍을 일으킨 작가다. 그의 암울한 '뉴욕 2기'시기 그림들과 90년대 후반 어두운 그림들은 화랑가와 경매시장을 강타했다. 생존한 국내 작가 중 가장 작품 값이 비싼 작가 중 한명이다. 일단, 경매장에 그의 이름만 나오면 품절사태가 벌어졌다. 2007년부터 유명해졌다. 1998년작 ‘사북의 겨울’(108×162㎝)이 2007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6억181만원(약 503만1500홍콩달러)에 낙찰되면서다. 국내미술시장에서 '오치균=사야할 그림'이 됐다. 2013년 '전두환 전 대통령 컬렉션' 경매에 나온 10점도 모두 팔려나가 화제가 됐다. 작품은 꾸준한 인기다. 지난 2015년 9월 K옥션 경매에서 감(145.5×97cm)이 1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금호미술관 전시는 그를 겸손하게 하고 있다. "30년전 '홈리스'그림을 보따리로 싸와 개인전을 했었는데 다시 '뉴욕 시리즈'로 전시하게 되서 묘한 기분"이라면서 오치균은 '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말 어려운 시기를 겪어오며 깨달은건 "밥을 우선 먹어야 한다"는 것. "밥이 해결 안되면 힘들어집니다. 기분이 행복하면 슬픈걸 봐도 관심이 안가듯, 너무 슬프면 아무리 햇빛이 맑아도 우울하잖아요. 부자 화가가 되어서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작품에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운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라며 "밥 이 해결된 요즘은 자유롭게 그림에 집중할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제가 저에게 두가지 칭찬하고 싶어요. 첫째, 그림을 그리면서 밥을 먹고 살고, 밥 걱정을 안하게 된 것. 두번째는 몸이 약하게 태어나 이도 빠지고, 원시시대 같으면 40대에 죽었을 몸인데, 죽을때 쯤에 운동을 하고 노력(술담배 끊고)해 20대처럼 건강해진 것. 이 두가지가 자랑스러워요". 스키니 흰바지와, 짧은 봄버점퍼를 입은 오치균은 "20대에 빌빌 거리다가 회춘했다"며 활짝 웃었다. 올해 6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모습으로'화백'이라고 쓰기가 민망한 작가다. "제가 성공할수 있었던 건, 매니아 컬렉터들 덕분입니다. 어려운 시기, 넘어질려고 할때 나타나 그림을 사주던 매니아들이 있었어요. 돈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었지만 정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이런 분들이 우리 미술을 받쳐주고 있지 않나. 이번 전시를 하면서 그분들이 생각났어요. 정말 고맙고 힘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뉴욕 시리즈'를 통해 그의 30년간의 작업과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영원한 것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를 살려낸 어두운 그림부터 화려하게 변한 100여점을 선보인 전시에는 유명한 '감', '산타페'시리즈는 없다. 전시는 4월 10일까지.02-720-5114 [email protected] 2016/03/04
"1250도 가마에서 녹아내리기 일쑤였죠" 오주현의 '한복 도자인형'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2013년 12월 18일 한겨울, 서울옥션 경매는 뜨거웠다. 검찰에 압류된 전두환 전 대통령 컬렉션이 쏟아져 세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야드로' 인형이 주가를 높였다. 스페인 수제 도자기 인형 야드로(LLADRÓ)의 도자기 35점이 모두 팔려나갔다. 추정가 700만~900만원짜리 인형은 2000만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았다. 인형 하나에 수천만원에 팔리자 '야드로' 인형은 일반인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 '천사' '신부', '여인'등 다양한 모습을 한 '도자 인형' 야드로는 에디션 개념으로 한정 생산해 희소가치도 높다. 덕분에 스페인의 국력이 된 도자기다. "왜 우리나라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도자기 인형이 없을까?" '야드로'로 떠들썩할 당시, 서울 명동 한 공방에선 도예가 오주현(48)이 꿈을 키우고 있었다. "내가 세계적인 한국 전통 도자인형을 만들겠다"는 사명감은 더 힘을 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만든 도자기 나라인데 못할 것 없지 않은가'. '야드로또한 조선 도자 기법이 바탕이 아닌가" 2008년부터 흙과 불의 담금질은 기본, 한국 전통복식 연구에 들어갔다. 흙과 안료의 배합, 굽는 방식, 한복의 색감등 인내와 수련시간은 모질게 이어졌다. 한복만의 미감, 여인들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위해 궁중 대례복부터 기녀의 화려한 복식까지 섭렵했다. 또 조선시대 풍속에 나타난 동작, 생활양식까지 연구해 도자인형의 생생한 율동까지 재현했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를 모조리 찾아내어 율동의 자태를 연구했어요.우리 한복은 색감이 화려해야 맛이 나더라고요. 파스텔톤으로는 미감이 발현되지가 않았어요". 끝없는 실험과 실패로 얻어낸 결과였다. 일반적인 도자기 색소로는 우리 전통 옷의 색을 찾기가 싶지 않았다. 전통한복은 천연염료를 사용한 오방색이 딱 들어맞았다. “조선시대의 복식은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 특징이에요. 신분에 따른 복식규범도 엄격했어요." 하지만 이를 전부 도자에 녹여내는 것이 과제였다. 흙은 고온에도 잘 견디는 백자 흙을 사용했다. 작업은 눈을 뗄수 없을 정도로 노동집약적으로 이뤄진다. 자연스러운 발색을 위해 흙에 안료를 발라 굽는다. 구운 도자위에 색을 칠해내는 게 아니라 원하는 색을 얻기위해 안료를 바르고 굽는 과정을 반복한다. “제 작품은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는 도자인형이에요. 전통도자기인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를 굽는 소성온도와 같아요. 초벌, 재벌, 삼벌 작업은 보통이지요” 흙과 불의 싸움이다. 갈라지거나 파손되는 것은 기본, 가마 속 고온에서 얇게 빚어진 인형들이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기본적으로 1250도의 고온에서 구워지는 작업은 계산한다고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다. "흙과 불로 옷을 짓는다고 생각해요. 10개를 가마에 넣으면 2~3개를 겨우 건지지만 그렇게라도 완성된 작품이 나오면 그 희열감이란 이루 말할수 없지요" 연습, 또 연습의 연속은 불꽃의 미학과 융성했졌다. 불속에서 나온 인형은 조선시대 여인들을 환생시켰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 갈듯 치마폭이 찰랑거리고, 색동옷 저고리는 색색깔로 반짝반짝 빛난다. 보통 화산 용암의 온도는 1000~1200도이고, 철은 1539도, 구리나 금은 1080도 내외에서 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도자기는 1200~1300도 이상의 온도를 견뎌내고 탄생된다. 운석이나 우주선이 대기권을 통과할 때 발생하는 온도로, 도자기야말로 최첨단 과학의 결실이나 마찬가지다. 천 옷처럼 진 주름은 정말 도자기인가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틀로 찍어내서는 이런 느낌을 낼수 없다. 달걀형의 머리에 쪽진 머리, 단아한 모습의 한복인형들은 시대의 여인상을 담아냈다. “조선시대 복식인형을 만들다 보면 감정이입이 돼 나도 모르게 어느 시점에선가 조선 사람이 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왕비가 대례복을 입었을 때와 벗었을 때의 섬세한 심리, 혼례를 앞둔 신부의 복잡 미묘한 감정까지, 여자로서의 느낌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아울러 춤과 노래 등 예능을 겸했던 기생과 무희의 삶과 애환마저도 표현하려고 했지요.” 작가는 도자기 인형제작에 골몰 할 때면 스스로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인형 놀이가 제일 좋다"는 작가는 어린시절 흙이나, 천으로 인형들을 만들며 놀았다고 한다. 지점토로 처음 만든 인형이 한복을 입은 빨래터의 아낙이었는데 하얀 한복에서 강한 느낌을 받았던게 평생의 일로 이어진 계기가 됐다. 8년의 내공이 쌓인 도자기 인형을 공개한다. 오는 16일부터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오주현작가의 '흙으로 조선의 옷을 짓다'개인전을 펼친다. 승무를 추는 인형부터 궁중대례복을 입은 인형들까지 전시장에는 80여점을 선보인다. 상업적 공예상품이 아니라, 그간에 만나볼 수 없었던 작가주의적 순수미술품으로써의 도자기 인형 전시라는 점이 큰 의미를 갖는다. 독일의 마이센이나 스페인의 야도르 도자기인형부터 중국의 당나라 채색도자 인형들처럼 국제적인 인지도를 지닌 도자인형이 그동안 우리나라엔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오주현의 '도자기 인형'은 기존의 관광상품 진열대에 놓인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일 정도의 작품성이 돋보인다. 한복 특유의 화려한 색감의 조화나 복식문화, 신분을 고려한 몸짓의 차이가 느껴진다. 반면 모든 작품들의 얼굴이 하나의 표정으로 통일된 점이나 다소 소극적인 율동미의 동세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디테일이 강해야 명작이다. 마치 같은 시대에 양반탈과 각시탈, 하회탈 등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신분의 특징을 포착한 것처럼, 도자기 인형작품 역시 인물의 특징에 따라 좀 더 구체적이고 차별화된 표정이나 동세를 가미한다면 더욱 매력적인 작품으로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고온을 조절해서 곱고 부드러운 색감의 한복 도자기 인형의 탄생이 놀랍다. 옛날 전통적인 미학의 재현에만 머무르지 말고, 한국인의 폭넓은 감성과 표정을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담아낸 도자기의 작품세계로 확장된다면 'K-아트', 'K-doll', 한류문화의 새로운 성장동력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어린시절 '야드로 인형'에 매료됐던 작가는 이제 '야드로'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조선시대의 복식을 겸비한 유일한 도자기 인형작가로 날개를 단 작가는 "세계 최고의 도자기 인형 작품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면서 2016년 새해 희망찬 욕심을 내고 있다. "우리 도자인형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복식을 세계에 소개하는 역할도 하고 싶어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전시는 23일까지. 02 734-1333 [email protected] 2016/02/14
유홍준 "백번 말하지만 민중미술전 아니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패션만 돌고 도는게 아니다. 그림도 유행을 탄다. 30년전 흥했던 미술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미술시장에 불고 있는 '민중미술'이다. 세계미술계에서 주목한 '단색화'이후 '한국현대미술'의 새 브랜드 런칭 과정속에 민중미술이 제시되는 상황이다. 60년만에 80대의 화백들이 봄날을 맞았듯, 30년후인 2016년 '민중미술'이 다시 호황을 누릴수 있을까. 시동은 가나아트센터가 걸었다. 일단 '민중미술'이라는 말은 뺐다. 대신 '리얼리즘의 복권'이라는 타이틀로 28일 서울 인사동 가나 인사아트센터에서 '민중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신학철(72)·임옥상(66) ·황재형(64) ·민정기(67) ·고영훈(64) ·권순철(72)· 이종구(62) ·오치균(60) 8명의 작품이 걸린다. 고개를 갸우뚱하게하는 작가도 있다. 민중미술 작가이거나 아니거나, 아니라고 해도 보기엔 민중미술 작가로 인식되는 작가들이 반반 섞였다. 전시자문을 맡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67)를 만났다. 그는 "재향군인회에 온 것같다"면서 흥분감을 감추지 않았다. 왜 지금, '민중미술'이냐고 물었다. "30년 되니까 이게 좋은 줄 아는거다. 띄워야 한다. 내 영혼이 바쳐져 있는 건데…" 유 교수는 80년대 민중미술의 태동이 된 '현실과 발언'과 민족미술협의회에서 작가들과 함께 활동했었다. 민중미술과 단색화의 차이는 평론가가 작가와 함께 컸다는 점이다. 유 교수는 "10여년간 민중미술 작가들과 함께 민중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등 잔인한 비판을 했었다"고 말했다. 작가와 평론가가 뭉친 건 정치적인 상황때문이었다. 폭압정치 속에서 말로 못하는 소리를 그림이 냈다. 유 교수는 "평론이라고 하는 것이 18세기에는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의 재단비평이었지만, 현대미술로 오면 무브먼트속에서 이론을 제시하는 같은 창조자"라고 했다. "현재 단색화가 각광받는건 미니멀리즘이 한국적으로 토착됐다는 점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서구의 현대미술이 80년대에 예술적 배반을 하고 딴데로 튀어버렸다. 모노크롬을 하던 작가들이 쫓아갈수가 없어졌다. 포기할수 없으니까 그동안 해왔던 것에 자기를 집어넣어서(수행같은 작업) 한 것이 한국적으로 된 것"이라고 요약했다. 유 교수는 "80년대 한국미술을 이야기하기전에 서구의 미술을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서구사회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일면서 슈나벨, 펜크 딕스, 키퍼등이 '리얼리즘의 복권'을 보여줬다. 이런 미술이 일어났을때 미국 뉴욕뮤지엄(모마)에서도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3층 구석진 끝방에 '아메리카 컨템포러리 페인팅 룸'이 생겼고, 전시 제목은 '고뇌의 시대'였다. 우리나라도 서구미술의 변화와 연관된다. 당시 미술계는 단색조 작가, 상업화랑 인기작가가 있었고, 국전 작가, 대학교수 작가가 있었다. 이런 제도권을 뚫고 조형적 반항으로 등장한 게 '리얼리즘 작가'다. 리얼리즘은 '현실을 어떻게 그림으로 담을수 있을까. 작품으로 구현될수 있을까'가 시작이었다. 문학에서 신경림의 농무, 황석영의 객지가 나오면서 이론이 피어났고 미술에서 신학철과 오윤이 나타났다. 유 교수는 "오윤은 대학때부터 리얼리즘전을 추진했다가 정부의 반대로 전시를 열지 못하기도 했다. "86년 오윤이 사망하면서 민중목판화의 풍성함은 더 살아나지 않았는가" 유 교수는 "민중미술은 민주화 과정 속에서 일어났던 미술인들의 자생적인 예술적 분출양식"이라고 했다. "'리얼리즘'상당수는 민중미술작가"라고 했다. "그림의 현실을 어떻게 담아내야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민중미술'은 매스컴이 만들어준 개념이다" 유 교수는 "근대 서양미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우리미술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단색화'가 영문으로 'Dansaekhwa'로 고유명사화 됐 듯, 민중미술도 'Minjung Art'로 영문이름을 가지고 있다. 1984년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의 환갑때 열린 한국의 현대미술 세미나에서 탄생했다. 유교수는 "당시 민중미술을 발표하면서 성완경 평론가가 '피플스아트'라고 했지만 그 자리에서 '민중아트'로 정해졌다"면서 "한국말과는 달리 영어로 쓰니 멋있는 용어가 됐다"고 말했다. 80년대 후반, 386세대의 등장으로 민중미술은 이념적으로 진화했다. 시위현장의 걸개그림으로, 노동의 현장으로 들어간 민중미술은 아이러니해졌다. 정작 현실속으로 들어갔지만 일반적으로 괴리감은 커졌다. 또한 정부의 탄압도 거셌다. 유교수는 "'불온'하다는 개념이 덧칠해진 민중미술은 퇴보를 보였다. 작가들도 서로 우리가 진짜 민중이다, 아니다로 오지게 싸우기도 했었다"면서 "세월이 지나고 보면 80년대 민중미술은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 성공 과정속에서의 예술적 정신이었고, 표현이었다"고 회고 했다. '민중미술'은 이제 '한국적 리얼리즘'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 당시 함께했던 평론가의 힘으로, 유교수는 이들을 '리얼리즘의 복권'으로 복귀시켰다. "그동안 멸시받은 것만해도 억울해 죽겠다. 작품을 보고 이야기하자" 유 교수는 "그동안 못 그린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부담스러웠는데, 이번 작품들에 맞짱뜰 수 있으면 나와봐라"면서 청년이 된 듯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종구화백이 김대중과 정주영을 그린 4m 짜리 대작 및 8명의 주요 작품 100점을 선보인다. '민중미술'로 인식된 작품들이 있지만 유 교수는 "이 전시는 100번 이야기하지만 민중미술전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유 교수가 "가나아트와 토론을 하고 작가를 넣었다 뺐다"하며 선정된 작가들은 '유홍준 취향'이라고 했다. '유홍준 취향'은 " 잘 그려야 한다. 이미지가 확실해야 한다". "깨지든 겹치든 비약을 하든 예뻐야 하고, 메시지는 약해도 상관없다"는 것. 유 교수는 이들 8명의 공통점을 7가지로 정리했다. '1. 전업작가, 2 대작에의 도전, 3.사회성이 없다(임옥상 빼고), 4.우직, 정직 고지식(임옥상 빼고), 5, 테크닉 달인들, 6 정통 따블로 작가들, 7 서구사조등 남 눈치 안본다'는 점을 들었다. 굳이 민중미술과 리얼리즘 작가를 분류하자면 이렇다. 주관의 개입이 강한 민중미술작가는 신학철 임옥상 민정기 황재형이다. "민정기하고 황재형은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넣어야 한다" 는 유 교수는 "이번 전시에 나오는 고영훈은 (민중미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치균도 상관없다"고 선을 그었다. 유 교수는 "리얼리즘속에 민중미술이 들어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리얼리즘에는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중미술이 있고, 묵묵히 리얼리즘을 고수한 화가들이 있는 것이다". 신학철은 역사의 맥박과 혼이 있고, 임옥상은 대상의 현실적 해석이 탁월하다. 황재형은 막장의 풍경과 인생을 그려 현장감이 넘치고, 민정기는 실경 산수를 통해 현실과 소외를 드러낸다. 권순철은 근원을 찾아가는 해체감이, 오치균은 거친 대상의 이미지의 승화로 어떻게 그려도 멋진 그림이 나온다. 이종구는 농촌과 농민 고향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아 전통 리얼리즘을, 고영훈은 고서위에 돌 혹은 시계와 삽등의 오브제를 융합시킨 극사실 하이퍼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엽기가 판을 치고 이미지가 범람하는 21세기, '민중미술'은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정치인들이 해골 아래 뭉쳐진 신학철의 그림과 당시엔 전시에서 철거됐다는 붉게 웅덩이가 파진 논바닥 그림은 더이상 자극적이지도,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예술은 시대가 낳는다. 30년전 '불온을 품어 멸시받았다'는 작품은 '한국 미술'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 진출'을 꿈꾼다. 전시를 주최한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키를 쥐었다. "80년대 이런 현실적인 그림은 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일본도 없고, 중국도 1995년 이후에야 나온다. 족보상에서 우리가 15년이상 앞서있는거다. 우리는 이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다. 민중미술이 무엇인가. 한국의 '리얼리즘 예술'이라는 말로 정리할수 있다. 이번에 리얼리즘 복권 전을 준비하면서 국내보다 외국에 어떻게 보여줄까를 고심했다" 이호재 회장은 "세계미술시장에서 단색화가 뜬데 이어 한국 리얼리즘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서 "그래서 이번 전시도록은 영어판과 중국어판을 제작한다"고 밝혔다. 가나아트가 '민중미술'이라는 군불을 피우고, '리얼리즘'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불안정한 사회적 인식에 갈등의 구조는 언제나 잠재되어 있다. 민중미술의 작품을 또 다시 드러낸다는 것은 '현물로써의 민중미술'을 선보이는 것 외에도 '시대를 대변하는 정신성과 그 파장을 다시 깨우는 역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민중미술은 정치적이면서 선동적인 성향이 강하다. 편향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세대를 넘어 다시한번 충돌을 일으키는 효과도 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민중미술' 개념을 받아들이는 인식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민중미술이라는 용어보다, 리얼리즘 개념을 더욱 강조한 이번 전시는 세계 미술시장을 겨눈 가나아트의 새로운 돌파구 찾기로 보여진다. 모든 것은 만들어진다. 혁신도 마케팅 싸움이다. 전시는 2월 28일까지. 02-720-1020 [email protected] 2016/01/27
연예인같은 마리킴과 학고재의 온고지신 박현주 기자=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칠 것이다" 팝아트 황제 앤디 워홀(1928~1987)의 명언으로 전해지는 이 말은 21세기 미디어시대에 딱 들어맞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뜨고 연예인이 각광받는 이유다. 보증이 필요없는게 '유명세'다. 미술판도 '유명세'가 유효하다. 스타 작가, 수상 작가가 '인기 작가'라는 타이틀의 사다리를 타면, 재크의 콩나무처럼 쭉쭉 올라간다. 이미 미술판도 머니게임화됐기 때문이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는 세상은 이미 과거로 묻혔다. 화가도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워야 하는 시대다. 제프쿤스나, 데미안 허스트등 해외 유명작가들은 스스로가 기업화되어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 소비하며 가치를 창출한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이중적인 시선이 강하다. '나댄다'는 곱지않은 반응이 더 우세하다. '그림은 그리지 않고…' '그림이나 그릴 것이지'라는 전제가 깔린다. 사례가 있다. 연예인같은 화가로 '낸시랭'이 떴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번개처럼 반짝했다가, 미디어에서 어느순간 사라졌다. 엉뚱발랄함은 화가라서 매력을 더했다. 하지만 '유명세' 댓가는 크다. 대중이 주고 뺏는 인기는 신기루다. 하지만 스타는 계속 탄생한다. 최근 미술판에 '연예인같은 화가'가 다시 등장해 주목받고 있다. 눈이 큰 ‘아이돌(Eyedoll)’ 그림으로 뜬 마리킴(38)이다. 2007년 미술시장 호황때 떠오른 그림은 팝아트의 대세라는 흐름을 탔다. 특히 국내 굴지의 화랑인 가나아트 이옥경사장이 '좋아한다'는 입소문은 '만화같은 그림'의 기를 살렸다. 가나아뜰리에 입주작가로 장흥아트파크에 입성해 '가나 작가'로 꼬리표가 붙기도했다. '만화같은 그림'은 무한복제가 가능했다. 그녀가 만든 ‘아이돌(Eyedoll)은 터미네이터처럼 어디든 적용되어 눈을 뜬다. 이 그림이 힘을 낸 건 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으면서다. 지난 2011년 YG엔터테인먼트의 그룹 2NE1의 앨범 표지와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단박에 '아이돌'은 마리킴까지 '아이돌'로 올려놓았다. 양현석 사장에 이어 연예인이 좋아하는 그림으로, 연예인과 어울리면서 작가도 연예인같은 모습으로 진화했다. 덕분에 '성형중독'이라는 소문도 붙어있다. 자신의 '눈 큰 그림'처럼 변신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마리킴은 의외로 유쾌했다. "이뻐서 그런가봐요" 하며 깔깔거렸다. "관리는 잘하고 있다"는 말로 일축한 그녀는 "그렇게 보이는게 재미있어 좋다"면서 "사실, (김수현등) 배우들과 스캔들을 일으키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며 웃어 넘겼다. 마리킴은 화장품업체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면서 연예인들과 사진을 찍고, 패션쇼 행사장에도 등장해 포토라인에 서 종종 미디어에 노출된다. '반전의 미학'을 노린다고 했다. "날라리인 것 같은데 알고보면 '그림을 이렇게 많이 그리고 있었네!"라는…. '이상한 애'였다고 했다. 고교시절엔 늘 책상에 엎드려 잠만 퍼자는 학생이었다. 만화책과 하이틴 소설을 밤새 보고, 정작 학교에선 잠만 잤지만, 그 시절이 자양분이 됐다. 그림으로 떴지만 실상은 미대출신이 아니다. 고교 졸업후 호주로 유학와 멜버른 RIMT대학에서 멀티미이어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크리에이티브미디어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이돌'그림으로 "여자 요시토모나라, 포스트 무라카미, 포스트 앤디워홀이라는 소리도 들었다"며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같은 그림, 아닌가'하고 치부하기엔 판이 커졌다. 마리킴의 개인전이 학고재에서 13일부터 열린다. 4년만의 개인전이다. 디아섹같은 프린트가 아닌 붓질이 흔적이 있는 회화 170여점이 걸렸고, 영상연출 전공을 입증할 미디어아트도 선보인다. 페인팅을 고수하는 건, 복제가 가능한 자신의 그림처럼 회화도 재생산이 가능하기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회화는 딱 1점,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사진과 프린트들은 복제된 것이기에 유일하지 않다는 편견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번 전시에서 회화이지만 이 작품들은 복제이며 동일하기에 개성이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합니다"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다"는 그녀는 이번 전시를 아예 외계로 가는 길로 안내한다. 전시 제목 'SETI'는 나사(미 항공우주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외계 지적 생명체 탐색(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프로젝트의 약자다. 마리킴은 "이번 전시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고 설명했다. "대부분 복제된 것처럼 본능적으로 살다가 죽는 우리 인류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나 라는 질문을 품고 전시를 기획했다”면서 "아이돌의 창세기-현재-미래의 변천사를 보여준다"며 알쏭달쏭한 지구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않고 이어갔다. 성형을 해도 변하지 않는건 눈빛, 눈동자다. 마리킴의 아이돌이 생명력을 얻는건 '큰 눈'이기도 하지만 눈동자에 그려진 '초끈이론' 때문이다. 최신 과학의 입자이론으로 무장한 화려한 눈빛은 우주 행성의 상상과 신비함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개념이 있다"는 마리킴은 "필연적으로 내가 왜 '아이돌'을 그려야야하는지 이유를 찾고 싶었다"며 감각적인 작품에 스토리텔링된 개념을 입혔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오마주한 영상도 선보여 가벼운 전시의 완성도를 높였다. 전쟁의 폐해와 잔여물이 존재하는 지구라는 행성에 더는 생존이 불가능해진 아이돌이 광활한 우주의 세계로 떠나는 과정을 담아냈다. 지난해 학고재 상하이에서 개인전을 통해 국제적 성장 가능성을 증명한 마리킴은 가나를 떠나 학고재와 전속을 맺었다. 학고재는 새해 첫 전시를 마리킴에 내줬다. 잘록한 허리에 손을 얹고 작품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화가로서의 마리킴은 미술계에서 아직 낯선모습이다. 반면 큰눈과 화려한 색의 생기발랄한 그림덕에 학고재는 '온고지신'이다. 전통적인 화랑의 이미지를 벗은 분위기다. 독과 득을 품은 유명세는 리스크와의 싸움이다. 마리킴은 영악한 듯하다. 2016년 거침없는 행보를 시작한 그녀는 "유명한 작가보다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영화광 만화광답게 스파이더맨의 명대사를 영어로 쏟아냈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른다)"라며 "더 유명해져 좋은 일을 많이하고 싶다"고 했다. 영어 이름같지만 마리킴은 '김마리' 본명이다. 자신을 '코리언오스트레일리언'이라고 했다. 외계인같은 마리킴의 도발이 미술판의 보수적인 흐름을 바꿀지는 관심에 달렸다. 전시는 2월 24일까지. [email protected] 2016/01/12
'꽃미남 작가' 이강욱 '금의환향' 아라리오갤러리서 개인전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금의환향(錦衣還鄕)이다. 미술시장 스타작가 이강욱(39)이 7년간 공백을 깨고 화려하게 귀국했다. '5초만 보면 감이 온다'는 세계적인 100대 컬렉터이자 아라리오뮤지엄을 설립한 김창일 회장이 러브콜했다. 지난해 영국에서 돌아온 이강욱은 국내와 상하이에 갤러리를 둔 아라리오갤러리의 전속작가가 됐다. 긍정적으로 화랑의 시스템과 탄탄한 컬렉터가 구축된 갤러리에서 날개를 제대로 펼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의미다. 특히 내수시장이 한정돼 있는 만큼 해외 진출 무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탄탄대로가 열릴 전망이다. 2009년 영국 런던으로 유학가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작가는 작품도 변했다. 이강욱을 브랜드화한 '세포 그림'은 더욱 미시적이고 거시적으로 진화했다. 장식적이던 '큐빅'은 사라졌다. 오로지 '그리기'의 개념이 무장되어 '회화의 본질'을 탐색하게 한다. 6일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만난 이강욱은 "영국에서 '추상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고민했다"고 전했다. "6세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영국에 오니 '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있지?'와 '내가 왜 페인팅만을 하고 있지?'라는 물음이 다시 생겨나더군요" 몸의 일부를 확대해 보기도하며 실험적이고 상상적이던 작가의 사고는 구체화됐다. "이전에는 왜 하는지, 내용이 무엇인지 등의 서브젝트(문제)가 중요했다. 하지만 상대적 개념들은 차이가 있는게 아니라 일관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대 힌두 철학의 텍스트인 우파니샤드'에 몰입하면서다. 그는 "보편성과 개별성, 미시적 공간과 거시적 공간 등 수없이 많은 우주의 대립적 요소들이 역설적으로 서로 닮아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로 연결될 가능성을 지님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왜 회화적 방법을 고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화면으로 옮겨졌다. '회화 자체'에 대한 관심은 '행위'로 드러났다. 반복적인 행위가 남긴 흔적들은 캔버스위에 시각적 결과물로 고착되고, 화이트를 기반으로 한 여러 색상들은 색으로서 존재하기보다 하나의 개별적 '톤'으로 자리했다. 그렇게 나온 신작을 그는 '제스처(Gesture)'로 타이틀을 달았다. 타원과 드로잉으로 된 무제와 달리 '제스처'는 하나의 점과 색면의 융합이다.'스밈과 우러남'이 돋보인다. 외국에서 꽃핀 한국인의 정서로 보인다. 스펀지로 살짝 찍어낸 옅은 색면과 수많은 점들이 박힌 화면은 웅성웅성 무한공간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미술비평가 정연심(홍익대)교수는 "극도의 노동을 요하는 세밀화처럼 보이지만, '추상처럼' 보이는 신추상의 세계"라고 평했다. 하지만 '국내외의 추상화가들이 대부분 '주제의 배제'라는 명목으로 스토리를 제거하였던 역사적 맥락과는 상반된 부분'이라고도 했다. "작가가 그린 신추상은 우연한 감정을 울림을 표현한 것도 아니고, 내적 필연성에 따라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글을 써내려가듯이 독백조의 이야기가 리듬을 따라 자리잡은 '회화적 공간'"이라는 분석이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이강욱은 대한민국회화대전 대상(2001), 동아미술상(2002), 중앙미술대전 대상(2002)을 휩쓸며 주목받았다. 2006~2007년 후끈 달아올랐던 국내 미술시장에서 '라이징 스타'로 부상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이 구상과 극사실회화로 '용호상박'할때도 그의 추상화는 낭중유추였다. 반짝이는 비즈와 함께 이뤄진 '선 드로잉', 일명 '세포 그림'은 폭발적이었다. 국내는 물론 일본 스페인 아르코아트페어등에 출품하면 매진을 기록했다. 작품은 '드로잉'이 극대화된 추상화다. 구체적인 형상은 없지만 색연필로 알갱이처럼 그린 점들과 반복되는 무수한 곡선들이 실타래처럼 이어졌고, 타원이 무한 증식한다. 유려한 리듬감이 흐르는 화면은 통제와 절제가 균형을 이뤘다. 단지 선과 색면이지만 세련됨이 빛나는 이유다. 제스처와 무한형상의 감각적 향연이 펼쳐진 귀국 신작전은 벌써부터 요란하다. "단색화를 계승하는 새로운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꽃미남 작가'로도 유명한 작가는 더 윤곽이 뚜렷해지고 눈빛이 강렬해졌다. 이번 개인전을 위해 작업에 몰두 한 탓인지 7~8kg이 빠졌다고 했다. 병신년 새해, 깊이있게 돌아온 '이강욱표 추상회화'가 미술시장의 시동을 걸고 있다. 수많은 타원과 알갱이같은 점들이 모여 무한 확장하는 작품은 직접 봐야 실감난다. 전시 타이틀은 '역설적 공간:신세계'다. 7일부터 3월6일까지. 02-541-5701 [email protected] 2016/01/06
'설경' 김종학화백 "죽는 순간까지 그림 그릴거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겨울이 실종된 시대다. 눈이 펑펑쏟아지지도 않고, 추위도 예전만 못하다. 포근한 날씨가 이어져 '엄동설한'이라는 말도 '진짜 옛말'이 되고 있다. 이제 겨울도 그림에서나 볼수 있는 계절이 되는 걸까. 하지만 '설경'그림도 많지않다. 미술시장에서는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화려한 꽃그림이나 초록의 짙푸른 봄 여름풍경과 달리 '겨울 그림'은 인기가 없다. 인생의 끝자락처럼 보이는 '겨울 그림'은 생동감보다는 우울함과 스산함을 전하기때문이다. 풍경화로 국내 미술시장 블루칩작가는 단연 김종학 화백(80)이다. 40여년전 설악산으로 들어가 담아내온 '설악풍경'은 미술시장을 흔들었다. 2007년엔 없어서 못팔 정도였고, 경매시장에서는 작품값이 억대로 치솟으며 낙찰이 무섭게 이어졌다. 모두 자연이 화폭에서도 미칠듯 꿈틀거리는 '봄 여름' 풍경이었다. 당시에도 '설경'은 '설악풍경'에 비해 주가를 높이지 못했다. 하지만 병신년 새해, 여든이 된 김 화백이 다시 보여주는 '설경'은 느낌이 다르다. 설악의 요동치는 내면을 하얀눈으로 덮어버린 풍경은 설경은 '숭고한 자연의 골격'을 보여준다. "자연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같은 계절의 같은 장소에서 만난 자연일지라도 지금과 나중의 모습이 또 다르다. 마흔에 보았던 설악과 여든을 앞둔 지금의 설악은 다르게 보인다. 사람들이 모두 다르게 생겼듯이 같은 종의 꽃도 열심히 쳐다보면 다 다르다. 그래서 자연의 품에 안겨 가까이에서 잘 들여다 보아야 한다. 사십대 이후부터 계속 그려운 설악은 김 화백의 영감의 원천이다. "설악에서는 문만 열어도 천지가 그림의 소재이고 영감의 원천이었다. 겨울의 내리는 눈은 정말 아름다웠고 눈 내린 풍경은 고하고 적막했다. 그렇게 겨울이 나에게 다가왔고 겨울이 오면 겨울을 그리고 있다.” 김 화백은 "“자연이 잉태해 주어야 화가는 새 생명인 작품을 만든다”며 "겨울은 가장 아름다운 절기"라고 극찬했다. 김 화백이 50년의 화업중 처음으로 '설경'만을 모아 부산 조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지난 2011년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연 회고전 이후 4년만에 펼친 전시다. 설경은 작가의 인생의 시기와 비슷하게 비춰진다. 감정 기복에 영향을 받지않고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필력은 젊은 시절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춤을 추듯 그려나간 이전 필력 보다 천천히 눈위를 걸어가는 듯 떨리는 필력은 더 농후하고 짙다. 설악의 바위산이 장엄하게 표현된 두터운 마티에르는 붓으로 그려나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직접 모래를 안료와 섞어 무심하게 바른 행위는 물감으로 표현될수 없는 질감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도전이 엿보인다. "난 나이를 느끼지 않고 50대 정도로 내 나이를 착각하며 지낸다.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일요일 하루만 쉬고 매일 5시간 이상 꾸준히 그림을 그린다." 김 화백은 "대작을 그리는 것이 재미있다"며 "붓을 휘두르고 싶다"고 했다. "휘두르는 만큼 그 만한 감동을 준다. 예전처럼 10m를 늘여놓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나는 그럴수 있다고 믿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릴거다. 그렇게 죽는게 화가로서는 최고의 죽음이라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도 난 화가가 될 것이다." 1964년부터 해마다 이어온 이번 개인전에는 가로 2m가 넘는 대형작품부터 소반에 그려진 소품까지 각 작품마다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다양한 겨울풍경이 40여점이 전시됐다. 자연의 선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펼쳐나간 뽀족한 산맥과 아무도 밟지 않은 산골짜기가 흰눈에 덮여 ‘순수(純粹)의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겨울은 끝이 아니라 다음에 돌아올 봄을 준비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계절이다. 김종학 화백의 '설경'전은 2월14일까지 이어진다. 051-747-8853 [email protected] 2016/01/05
권옥연 4주기…이병복 여사 "그림 보이는걸 왜 그리 불안해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생(生)과 사(死) 사이에는 후회만 있다. "녹음이라도 해놓을 껄. 에휴~" 원로 무대미술가 이병복(88·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여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땐 TV를 켜놓고 집이 떠나가라 노래를 불러서 정신병자라고 했어요" 큰 딸인 화가 권이나(61)도 그 말을 거들었다. "그림을 그릴때건 언제나 늘 TV를 끄지를 않았어요. 주책처럼 깐소네를 테너 흉내를 내면서 부르시는데, 굉장히 잘했어요. 그런데 그 육성을 녹음한 게 없네요. 그래서 참 아쉬워요" 파리에 사는 딸이 엄마와 한 자리에 앉은 건 그렇게 노래를 부르곤 했던 아버지 권옥연(1923~2011)때문이다. 권옥연의 대를 이어 그림을 그리는 딸 권이나는 '엄지 손가락' 조각가로 유명한 세자르의 수제자로도 유명하다. 타계한 지 올해로 4주년, 권옥연 화백의 묵직한 그림이 세상에 다시 말을 걸고 있다. 가나문화재단(이사장 김형국)이 사후 첫 대규모 회고전을 마련했다. 11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권 화백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 미완성 작품까지 총 50여점을 선보인다. 권옥연은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이자 초현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미술계에서 음악을 사랑한 '멋쟁이 화가'로 유명하다. 기골이 장대한 '상남자'스타일이지만 흥이나면 어디서건 노래를 부르는 로맨티스트였다. 특히 청회색조의 애수에 찬 그림은 그를 더욱 신비롭게 했다. 생전에 그는 '구라파 가수'였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날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한 그에게 "안경때문인지 멋지다"고 하자, "리어카에서 1만원 주고 산 것"이라며 기분이 좋아진 그는 안경을 한쪽 손에 들고 즉석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제껴 웃음을 선사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이는 평생 '다섯살 아이'로 살았어요" 이병복 여사는 "남편으로 빵점 이하였다"면서 원망같은 그리움을 쏟아냈다. "어떤 남자였냐고?. 영원히 내 차지도 아니고, 남편인지, 동거자인지, 애기아버지인지… . '그이', '그 사람'밖에는 안되요" 옛날 일이 생각난 듯 정색을 하던 이 여사가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선언을 하더라고요. 여보, 난 다섯살이야. 다섯살 넘으면 그림 못 그려.어휴 그걸 자랑이라고 해?. 그렇게 '에고'(ego)를 부렸어. 작업실에도 얼씬 못하게 했어" 낭만파 '멋쟁이 화가'의 반전이 드러났다. "작업실은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야. 아마 쓰레기통도 그런 쓰레기통이 없을 걸. 작업실에 오솔길이 생기다가 3년이면 포화상태가 돼. 청소를 안해서 쥐도 돌아다니고, 냉장고엔 곰팡이도 피어있더라고." 청소도 소용없이 된 작업실은 3~4년마다 옮겼다. 새로 이사간 화실엔 가족도 못오게 했다. "그렇게 그림보는 걸 자신 없어하고 불안해하고,남한테 뵈는 걸 싫어하더라고. 그때는 자존심 상해서 (작업실)에 가고 싶지도 않았어요" "한 스무번은 이사를 했을거야. 내가 60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았어." 권 화백은 함흥 권진사댁 5대독자였다. 어릴적 조부로부터 서예를 배웠고 바이올린에 심취한 부친을 통해 음악적 영감을 익혔다. 그래서인지 권 화백의 작품은 동양적인 깊이감과 음악적인 리듬감이 융합되어 중후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독창적 화풍을 이뤘다는 평가다. 고흐의 작품을 보고 '딱 고흐다', 이건 '박수근 작품이다'라고 하는 것 처럼 청회색조의 색만 봐도 '권옥연이다'고 할 정도다. 함축적인 자연풍경의 소재부터, 일상의 정물이나, 이국적인 여성상 그리고 추상까지 다양한 조형세계를 선보였다. 특히 중간 계열인 청색, 회색, 녹색 등을 여러 번 덧칠해 절제된 색감과 상념에 빠진 듯한 인물화로 유명하다. 저음이 잦아드는 억제된 화면이다. 그는 스스로 색을 누르려 애썼다. 암회색, 녹회색·청회색으로 덮여 있는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알 수 없는 진한 슬픔이 파고든다. 생전 인터뷰때 그는 "전쟁을 겪고 비극적인 시대를 살아낸 탓일까. 그러고 보면 난 구식"이라면서 "요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왜 대담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었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에서 처음 미술을 접하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42년 일본으로 가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1957년에 이병복 여사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 여사는 당시 일본에서 물감을 잔뜩 사서 파리행 비행기를 타던 시절을 기억해냈다. "그땐 내가 건방진 여편네였어. '한국의 피카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 돈이 없을때니까 주머니 많은 바바리코트에 물감을 사서 넣을대로 넣었다. 무거워서 입기도 걷기도 힘들어 들춰메고 공항대에 섰다. "결국 세관에 걸려 그 바바리를 안고 사무실까지 들어갔는데 사정을 들은 관리가 열심히 공부하라며 그냥 보내줘 비행기를 탈수 있었지." "남편은 뭐하고 있었냐고?. 저 멀리서 딴청을 피던 인간이 비행기를 타니까 '와 진짜, 간다~'며 만세까지 부르더라고. 그게 남편이라는 사람이에요. 에휴 말해 뭐해~" 파리 아카데미 뒤 페에서 공부하던 권화백은 상징주의, 후기인상주의, 앵포르멜, 초현실주의 등 동시대의 주요 미술사조를 접했다. 당시 권위있는 추상미술전이었던 레알리떼 누벨에 초대되기도 했다. 문학적 은유와 음악적 선율이 숨쉬는 그의 작품을 두고 초현실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은 "당신이야말로 진정을 현실을 넘어섰다"며 "동양적 쉬르알레리즘"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브르통이 제안한 파리 개인전을 뒤로한 채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 곁을 지켜야 한다는 장남의 책임감이었다. 1960년 38세에 귀국한 그는 국내외에 전시에 참가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국전에 추천작가에서 파리, 도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초대된 'K-아트' 원조다. 당시 절제된 색채를 바탕으로 한 풍경과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명백한 구상형태의 인물화지만 지칭하는 대상이 없는 그림 속 인물들은 그의 추상화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권옥연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번 전시에는 이 여사가 직접 권화백의 작업실을 재현했다. 60년만의 정리다. '쓰레기장 같던 작업실'은 말끔해졌다. "사진을 보면서 상상하면 돼요" 이젤과 의자, 물감, 굳어진 붓들, 그리다 만 그림들을 그대로 가져다놓았다. 벽에는 40대의 늠름하게 서있는 권화백 사진을 인쇄해 붙였다. 이 여사는 그가 '에고'를 부린 것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림밖에 모르는 그 철저함이 부럽고,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고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1/10 일이라도 닮아야 하는데 안되는 거는 안됩디다." 같은 예술가로서 부러웠다. "존경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면서 이걸로 버텨왔다"고 했다. 무대미술가 1세대인 이병복 여사는 무대미술과 의상을 하나의 예술로 끌어올린 연극계 원로다. 1966년 극단 '자유'를 창단해 100여 편의 작품을 공연했다. 옆에 있던 딸 권이나 작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평소 대사를 끄집어냈다. 어머니가 먼저 "그것도 그림이야?"라고 샐쭉하면, 아버지가 맞받아쳤다. "연극? 난 창피해서 초대장도 아무한테나 못줘~" 티격태격,서로의 작품세계를 칭찬하기보다 빈정대기 일쑤였다. 이 여사는 "우리는 서로 작품을 봐주면서 냉정했다"며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고, 나중에 생각하면 맞는 말이란 말이죠. 그래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살았나보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이 일치한건 남양주에 세운 '무의자박물관'이다. 40대부터 허물어가는 궁집과 한옥 9채를 매입해 조성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화끈한 민족입니까. 우리도 보따리 안싸들고 우리공간에서 우리 정체성있는 무대도 만들고 공연도 하고 전시도 하는 복합문화공간을 꾸민 것인데, 남편이 뚝 떠나, 이제 자식들에게 짐으로 남겠됐어요." 2011년 11월 '무의자문화재단'을 출범시켰지만 이루지 못한 꿈이 됐다. 권화백은 그 한달후 12월 16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여사는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남편이 왜 그렇게 그림을 남한테 보이기 싫어했는지를" 알게 됐다. "얼마나 부담스럽고 두렵고 겁나고 그랬을까. 이제사 그 의미를 알수 있을 것 같아요. 저야 무대 뒤에서 기어다니면서 죽을 판 살판 일을 끝내고 막이 내리면 때려부셔서 모든게 폐기물이 되는데, 물론 다시 보이지를 못하니 불행하기도 하지만 엄격한 두 눈동자로 보는 사람들앞에 안나타날 수 있는게 다행스럽기도 하네요." 별세하기 1년전 기자와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권화백은 "그림 그리는게 무섭다"고 했다. 미술시장에서 명품으로 인기가 있던 시기로, 그림값은 호당 500만원이 넘었다. '여인' 인물화 소품은 현재도 2000만원선을 웃돌게 팔리고 있다. 주머니에 늘 붓펜을 가지고 다니던 그는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추사 김정희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추사는 정말 완벽한 예술가"라면서 "내게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감성을 키워준 정신적인 멘토"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전했다. "파리에 유학해서 그림 그리다가 답답할 때면 슬라이드로 만들어간 추사 글씨를 환등기로 비춰보곤 했지. 추사 글씨는 공간 배열, 글씨의 획 하나하나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완벽한 조형언어야. 그 자체가 이미 완벽한 그림의 요소를 갖추고 있지. 아마 내 그림에도 그런 영향이 스며 있을 거야." 그는 말하면서도 백지에 '無衣子(무의자)'를 습관처럼 쓰곤 했었다. 그의 호였다. '無衣子'라는 호는 그의 거짓없고 일관된 삶을 그대로 전한다. '벌거벗은 아들'이라는 뜻의 호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어 거짓없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명성보다는 예술에 헌신했다. 2001년 79세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로 선정됐고, 82세에 마니프 대상을 수상했다. 2009년 한국미협 ‘올해의 미술상’ 명예공로상을 수상했지만 함께 수여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은 끝내 고사한 일은 미술계에 회자되고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같고, 한량처럼 보이다가도 우울함과 쓸쓸함이 감돌았다. 마지막이 된 2010년 인터뷰때 슬퍼보인다 하자 "자식을 앞세운 슬픔은 이루 말할수 없다. 어떤 슬픔과도 비교할수 가 없다"며 먹먹한 속내를 처음으로 털어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이 여사는 "며칠전 눈보라가 대단했을때 테라스에서 한창을 울었다"고 했다. "우리 아들 세상 떠나기전 날씨가 그랬거든요. 이 에미하고 아버지밑에서 기 한번 못 펴고, '두 권력밑에 깔려서 기 한번 못폈다' 그렇게 절실하게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휙 들었거든요. 아버지 추모전 한다고 하니까 온 것 같아서. 유난스런 부모 만나는 것도 자식팔자고....19년 정도 됐네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던 이 여사가 다시 힘을 내 말했다. "그래도 화가는 좋다. 죽고난 후에도 좋든 나쁜든 자기 작품이 한자리에 모여서 전시가 되니까 그런 기회를 가질수 있다는게 참 부럽네요" 차분한 청회색의 풍부한 질감과 세련된 풍미가 돋보이는 권옥연 회고전을 여는 가나문화재단은 '권옥연 화집'도 발간할 계획이다. 단색화 이후 다시 봐야할 명작으로 꼽힌다. 개막일인 11일 오후 5시, 이병복 여사는 남편의 회고전을 위해 씻김굿과 살풀이춤 공연을 펼친다. 2016년 1월 24일까지.02-720-1020 [email protected] 2015/12/11
그 그림, 안 판다고 했지만…김환기 '점·선·면' "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1955년 3월 그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작정한 다음부터는 마음이 편안하다"면서 "혹시 전람회장에서나 그 밖의 어느 기회에 내 그림의 가격을 물어 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 그림은 안 팝니다' 이렇게 똑똑히 대답하는 것이, 또 대답하고 나서 내 마음은 어찌나 통쾌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60년후 세상은 달라졌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나오기만 하면 팔리는' 그림이 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도 등극했다. 지난 10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그의 작품(19-Ⅶ-71 #209)은 47억2000만원에 팔려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바꿔놓았다. 1974년 7월 25일 뇌일혈로 별세한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樹話) 김환기다. 그 해 7월 7일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뉴욕의 한 병원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약 한 달 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미학도, 철학도, 문학도 아니다. 그저 그림일 뿐이다. 이 자연과 같이, 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림일 뿐이다." 작고할 때까지 그는 점점 '점'에' 빠졌다. 화면 전체에 가득한 점들은 서양 기법을 연마한 후에 동양의 수묵적 느낌으로 추상을 대한 것이다. 유화의 번짐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고, 흡수성이 강한 코튼을 바탕면으로 선택했다. 코튼 캔버스를 매서 바닥에 놓고 아교칠을 한 다음, 물감을 한폭 완성에 필요한 만큼 풀어 유리병에 준비 한 후, 점을 찍고 그 하나하나를 사각형으로 돌려 싸기를 반복했다. 대작을 완성하는데 4주 정도가 걸리고, 1년에 평균 10 폭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큰점, 작은점, 굵은점, 가는점, 작가의 무드에 따라 마음의 점을 죽 찍는다. 붓에 담긴 물감이 다 해질때까지 주욱 찍는다. 그렇게 주욱 찍은 작업으로 화폭을 메운다. 그 다음 점과 다른 빛깔로 점들을 하나하나 둘러싼다.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부인 김향안 여사의 회고) 1960년대부터 1974년까지는 그의 작품의 전성기다. 국내 경매 낙찰가중 최고가로 기록된 푸른 점화 '19-Ⅶ-71 #209'도 뉴욕시기에 제작된 1971년 작품이다. 1970년에 제작해 출품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제 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타면서 국내 미술인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1974년에 그가 그린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전의 작품에서 보이는 깊이 빨아들이는 푸른색에서 회청색으로 변했고 뉴욕 시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우울한 느낌을 준다. 이때 그는 아픈상태였고, 그 해 세상을 떠난다. 큰 키에 선비같은 모습, 멋쟁이 화가였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수화 김환기 형이 기세했다는 전갈을 듣는 순간에도 나는 '멋'이 죽었구나, '멋쟁이'가 갔구나 하는 허전한 생각을 먼저 했었다"면서 "그의 껑청거림이나 음정이 약간 높은 웃음소리나 말소리의 억양도 멋의 소산이라고 할 만큼 그는 한국의 멋으로만 투철하게 60평생을 살아나간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면(안좌면)에서 부농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잠시 서울 중동 중학에 진학하기도 했으나 1931년에 일본에 가 도쿄의 니시키시로 중학을 다녔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 들어가 졸업했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뉴욕에서 별세했지만 그는 '한국 사람, 한국 작가'였다.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1970년 1월27일 일기)이라며 눈에 밟힌 우리 강산을 화폭에 쏟아냈다. '우리 강산'을 등지고까지 뉴욕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고 작품을 발전시켜보고 싶은 열정이 그를 강하게 했다. 그때 나이 52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이라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미련 없이 버리고 예술적 도전을 위해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 사실만으로도 김환기가 자기 예술의 완성을 위한 열정이 얼마나 강했나를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국제무대의 중심지에서 지낸 작가로 한국의 전통미와 현대적 조형미의 균형을 생애 전반에 고루 선보인 점은 김환기를 대가로 올려놓는 '궁극의 힘'이다. 유홍준 미술평론가(전 문화재청장)은 2012년 갤러리현대에 열린 대규모 회고전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전 때를 기억해냈다. 김환기의 딸이 '10만 개의 점'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장면이다. 딸은 "우리 아버지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서 저 10만 개의 점을 찍었다니 이국에서 느꼈을 아버지의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이 일어 눈물이 절로 흐른다고 했다". 유홍준 미술평론가는 "만약에 김환기가 점이 아니라 산, 강, 달, 마을, 나목, 매화, 학, 백자 달항아리, 그리운 얼굴들을 반복적으로 표현했다면 따님의 눈시울이 붉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며 "함축적인 점이기 때문에 감정이 그렇게 북받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부녀지간의 사적인 교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김환기의 예술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했던 내 눈시울도 절로 붉어지고 있었다"고 '점화'에 대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말년 추상작품은 21세기에 더욱 빛을 내고 있다. 명품은 시대를 막론하고 세련미와 디테일을 숨길 수 없다. 동서양의 감성이 탑재된 그의 작품은 국내외의 고른 팬층을 확보하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경매장에서 말고, 수화 김환기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마음놓고 편하게 볼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김환기의 절정'인 1960년대부터 1974년 작고할 때까지 뉴욕에서 작업한 22점이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 걸렸다. 시간이나 음향을 느끼게 하는 뉴욕 초기작품, 선으로 면을 분할하며 화면을 실험한 십자구도, 무수한 색점을 찍으며 만들어 낸 점화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뉴욕시대의 작품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많은 개인 소장자들의 협조로 이뤄졌다. 1999년 박명자 현대화랑 사장이 '김환기 25주기 회고전'을 열면서 '김환기=현대화랑'으로 인식됐다. 다양한 색채와 선, 면, 점 등이 눈에 띄는 이번 전시에는 김환기의 절친한 선배이기도 한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따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나와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만 '과거형 화가'다. 그런데 이 시대, 왜 '김환기'일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언제나 어제 그린 것을 보는 것만 같은 감동이 일어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든 명화는 현재형으로 다가온다"고. 전시는 2016년 1월10일까지. 5000원. 02-2287-3591 [email protected] 2015/12/06
흰개미 사육 강석호 & 불탄 집창촌 청소 김도희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영혼의 미술관' 책에서 말했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그렇게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힘을 일깨워준다. 나아가 우리의 한 번뿐인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 있는 상상력과 포부를 제시해준다"고. 이런 측면에서 이 두 명의 작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너무 거창하게 소개하는 것 아니냐'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근래에 보기 드문 작업이고, 또는 상업화랑에서는 좀처럼 시도할 수 없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서울 통의동 진화랑 신민 큐레이터는 스스로 "뿌듯하고 통쾌한 전시"라고 했다. 단색화와 팝아트 일색인 미술시장에 찬물을 끼얹는 전시이기도 하다. 진화랑에서 '한계와 조건'을 타이틀로 한 지붕 2인전을 열고 있는 강석호(35), 김도희(37) 작가다. 독특함과 신선함으로 무장했다. '실험과 체험'이 둘의 차이다. 강석호는 흰개미를 사육해 작품을 만들었고, 김도희는 온몸이 부서져라 움직여 작업했다. 둘다 서양화과 출신으로 그 '한계와 조건'을 밀어붙였다. 사진과 영상 설치물로 나온 작품은 '인내와 끈기'가 힘이 됐다. 삶의 '흔적'을 쫓아가며 "없이 살아왔지만 작가로서 행복하다"는 둘을 만났다. "도대체 왜 저렇게 사는 거야"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지만 두 작가는 "예술가는 감춰져 있거나 무관심하지만 의미있는 것들을 노출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흰개미 1500만마리를 사육한 남자, 강석호 산에 올라갔다. 썩은 나무, 죽은 나무를 자르면 어김없이 우글거렸다. 흰개미떼다. 벌써 5년 전이다. 그렇게 모아온 흰개미들은 '삶의 모토'가 됐다. 반면 흰개미들은 억울하다. 영문도 모른채 새로운 통치자에 의해 길들여졌다. 흰개미들은 아크릴박스에 고서화와 함께 들어갔다. 처음엔 얇은 종이로 된 성경 책을 먹었고 점점 두꺼운 종이로 된 책들을 삼켰다. "흰개미라는 자연이면서, 생물이면서, 사회이기도 한 존재와 인간의 정보를 담고 있는 기록물이자 문명의 압축판인 책이라는 물질, 그 두가지를 그냥 툭 한꺼번에 던진거죠." '사각사각…', 어두운 밤이면 흰개미들 소리가 들렸다. 책을 갉아먹는 소리, '상대적 절대자'가 된 작가는 뿌듯했다. '살아있구나.'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리했다. 위기도 있었다. "작업초기였죠. 책이 나무로 만든거니까 흰개미들이 살 수 있을 것이란 판단으로 처음부터 컬러 도판으로 된 책들을 먹였어요. 그랬더니 일주일만에 완전히, 깨끗하게 한 마리도 없이 전멸했어요." 적응이 진화였다. 흰개미들은 적응이 빨랐다. "세대주기가 짧으니까 적응이 진화로 바로 이어지는게 보였어요. 그런데 진화가 생존확률은 높일지는 몰라도 생명체의 안전성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더라고요." 과학자가 말하는 '임계전이'처럼 생태계가 재편되고 생존했던게 멸종하는 것을 눈으로 몇번씩이나 확인했다. "임계점을 지나면 제가 아무리 상황을 바꿔주려고 해도 두 달이면 언제 흰개미가 살았냐는 듯이 모든 흔적이 지워져 버렸죠." 그걸 보며 작가는 인간사회 시스템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것도 변할 수 있다. 견고한게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도시가 점점 증식하는 그런 과정 자체가 임계점에 점점 다가가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다. "우두머리가 중심인 인간 사회와 달리 흰개미 사회는 공생, 공존할 수 있는 절대다수가 중심이 되는 사회지만 임계점에 도달해서 한 번 무너지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거든요." 지난한 작업이었다. 흰개미들은 책속에서 생사와 번식을 반복하며 1500만마리로 늘었다. 5년 간이나 이어진 '흰개미 프로젝트'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두려워지고, '어떻게 감상될까' '이 부분은 고쳐야 하지 않을까'로 뒤숭숭해지곤 했다. 하지만 '흰개미들의 삶'은 작가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지난해 런던 사치갤러리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호평을 받았고, 올초 일본 도쿄아트페어에서는 작품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흰개미 프로젝트'는 '트랜스 소사이어티' 프로젝트로 이름 붙여졌다. 흰개미 사회가 건설되는 것만큼 책들은 지워져 나갔지만 '아름다운 변이'였다. 얇은 종이부터 두꺼운 패션잡지까지 갉아먹게 된 흰개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번 전시는 흰개미와 예술가가 합체된 궁극의 컬래버레이션이다. 흰개미가 이룩한 작은 문명을 통해 인간의 삶과 인체의 유한성을 새삼 느껴볼 수 있다. 누렇게 변한 책에 자연스럽게 내어진 '우둘투둘한 길'들이 추상화가 되었다. 흰개미가 살기 위해, 또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전진한 '삶의 흔적'이 강렬한 사진 작업 19점과 흰개미들의 일상을 영상으로 담은 작품등을 선보인다. ◇검게 불탄 집창촌을 청소한 여자, 김도희 "새 수건드릴테니 걸레 좀 주시겠어요?" 큰 화재로 10년 이상 방치된 미아리 집창촌 건물에 우연히 들어간 후 "꼭 그렇게 해야만 했다." 집창촌을 돌며 이모와 삼촌들에게 수건을 걸레로 바꿔 불탄 집을 청소했다. 검은 집, 검은 재가 눈처럼 앉은 방안은 고양이 발자국뿐이었다. 맨손으로 바닥을 닦고 또 닦아내도 검은 집은 검었다. 집창촌 사람들은 '미친×'으로 여겼고 시선은 따가웠다. 하지만 작가는 "뭔가 응어리를 풀어내는, 억눌린 것들을 토해내는 과정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극기체험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딱 버티고 앉아서 확인하고 싶은 것, 나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물컹물컹하고 이상한 그걸 꺼내서 내 시간에 일치시켜 놓고 보고 싶은 그런 충동이 있었다"고 했다. 전시장엔 그렇게 '검은 집'을 청소한 걸레를 널어놨다. 아무리 빨아도 회색으로밖에 돌아오지 않는 걸레들은 구멍이 나고, 너덜너덜해진 채 전시됐다. 특히 전시장에는 '신음 소리'가 울린다. 영상에는 작가가 검은 집 바닥을 걸레질을 하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노동의 고통 소리'가 묘하게 울려퍼진다. 극한 체험에 나선 작가는 낯설고 은폐된 공간에서 이미지로 전해지는 처연한 슬픔과 함께 삶의 강력한 의지를 만났다. 창문에 떨어진 씨앗 하나가 10년 사이에 나무가 되었지만 깊이 박히지 못한 뿌리는 시멘트 바닥에 혈관처럼 이어져 건물을 잠식하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이 나무사진도 걸렸다. "청소를 하고 있으면 해질녘 또각또각하는 하이힐 발자국 소리와 함께 이모~하고 부르는 앳된 목소리가 들려요. 처음엔 뭐가 저리 좋을까 했지만, 그녀도 나도 하나의 벽에 가린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회화(홍익대 서양화과)를 전공하면서 늘 시각성에 답답함을 느꼈다"는 작가는 "색깔을 고민하게 되고 위치를 고민하게 되는 그 과정이 너무 싫었다"면서 "몸으로 움직이는 작업을 하는 건 '실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가치를 말하기 위해선 고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제 작업이나 선택하는 매개물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직설적이고 야만적으로 읽히기도 할거예요. 하지만 저는 추상적 개념의 공간적 나열이나 가상의 스펙터클을 도피처로 제공하지 않고 세계에 대한 실제감을 회복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온몸으로 부딪혀 작품세계를 구축해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잡은 설치작가 김수자, 이불에 이은 '발칙한 여성작가'의 출현은 아닐까. 격렬한 몸의 행위를 통해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그녀는 '생동하는 예술가'다. 검고 깊은 눈동자를 가진 작가는 "어떤게 예술이고 어떤 태도가 예술가로서의 태도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며 그걸 잊지 않고 작업하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했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냐고요? 일단 내년에도 작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게 솔직한 바람이에요. 하하." 전시는 13일까지. 02-738-7570 [email protected] 2015/12/01
'한지 향불' 화가 김민정, 결국 한국여자…24년만의 금의환향 '서양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늘 궁금했다. 1991년 이탈리아 밀라노행 비행기에 올랐다. "보따리에 종이를 둘둘 말아 넣어갔지요." 24년 전 한국을 떠나 이탈리아에 살며 '한지 향불화가'로 돌아온 김민정(52)이다. "르네상스가 꽃피웠던 이태리가 궁금했는데, 결국 저는 한국 여자더라고요." 서양화가 시작된 본토에서 유학했지만 그녀의 작업은 한국적이기 그지 없다. 한지에 향불로 태워 구멍을 낸 작품이다. 색지를 여러 겹 이어붙이고 오려붙인 작업은 '한지 단색화'로 보일 정도다. 작품 '도배(DOBAE)'는 말 그대로 캔버스에 도배한 것 이다. 향불로 뽕뽕뽕 구멍을 내 한지를 동그랗게 오려 점점점 이어붙였다. 불에 그을린 종이의 가장자리는 먹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갈색 음영을 발산하며 공간을 확장한다. "정서적으로 슬플 때 한 작업이에요. 왜, 도배를 하면 새집에 이사 온 것 같은 느낌이잖아요. 한지를 오려붙여나가면 머릿속이 비워졌죠." 이방인은 이방인이다. 떠나온 곳에도, 머무는 곳에도 속해지지 않는다. 그리움만 더 멍울진다. "그 사람도 내 생각을 할까,등등 보고싶은게 많았어요." 한지 향불 작업은 그리움을 태워나갔다. 또 그리움을 더 각인시키기도 했다.도배 작업에는 시골 어머니와 이웃과 친지 할머니들의 인상이 담겼다. "10년 전이었어요. 우연히 서랍 정리를 하다가 향불로 구멍을 뚫은 한지를 뭉텅이로 발견했죠. 제가 부탁한 것이었는데 잊어버리고 살았던 거죠." '아, 이거다'하고 한지를 오려서 붙이다보니 할머니들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꼼꼼한 할머니 것은 구멍이 촘촘히 박혔고, 말이 급한 할머니 것은 구멍이 듬성듬성 크게 뚫려있다. 어머니가 모아준 한지들을 캔버스에 붙인 '도배' 작품은 색도 없고 기교도 없지만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엄숙한 느낌을 자아낸다. 예향 광주 출신인 그녀는 8세 때부터 서예를 배웠고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한지 애착'이 있다. "한지를 만지면 살결같아요." 이탈리아에 살면서 한지를 100㎏씩 한국에서 공수해왔다. "어딜 가도 한지를 둘둘 말아 다녀요. 제 작업은 향불만 있으면 되고, 어디서든 작업할수 있으니까요." 반복의 반복, 무념무상으로 이끄는 작업은 스스로 치유가 됐다. 향불이 탈때 숨 조절이 되면서 명상으로 나아가게까지했다. 작게 태워진 구멍을 보다 크게 태워진 구멍으로 덮어가기를 거듭하는 작품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채움과 비움의 관계가 양가적이면서도 동시에 순환적일수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선 익숙한 재료와 기법이지만 인위적인 의도를 최소화하여 무(無)에 가까워진 작업은 유럽에서 극찬을 받고 있다. "그리스인 컬렉터가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서가 안정된다, 잠을 편하게 자게 할 수 있는 작품이라며 침대방에 걸었다고 했을 때 가장 기뻤어요." 지난 5월 베니스에서 연 개인전에서는 작품이 솔드아웃, 화제를 모았다. "한국의 단색화가 인기를 끈 덕도 있어요. 단색화가들과 30여년의 차이는 있지만 끈질기게 해나가는 제 작업도 비슷한 것 같아요. '포스트 단색화'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5일 서울 OCI 미술관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개막했다. 홍익대 회화과 80학번으로 동기인 한국화가 문봉선이 "이제 한국에서 전시해도 될 것 같다"며 주선했다. '결'을 주제로 갈색의 향불 작업에서 오방색이 화려한 콜라주 작품 등 30여점을 선보인다. 시작도 끝도 없는 카오스같은 세상, 한지와 먹을 놓지 않고 순환과 생성을 무한반복해온 그녀는 다시 처음으로 왔다. "작업할땐 몰라요, 왜 하는지도. 하지만 나이 50이 되어서야 완성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동안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덴마크 코펜하겐 등 유럽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시해왔지만 이번 전시는 어느 때보다 설렌다. 한국 데뷔전이다. "특별할 것 없는, 겨우 종이를 가지고 이제껏 저러고 있었나 질책하지 말고 '열심히 하고 있었구나'하고 봐주세요." 14일 오후 3시 미술관에서 작가와의 대화시간이 열린다. 전시는 12월27일까지. 02-734-0440 [email protected] 2015/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