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리얼리즘…황재형 개인전 단색화로 더 이상 신선한 충격이 보이지 않던 미술시장에 경악할 만한 작품이 등장했다. 황재형 화백(65)이 '십만개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신작이다. '탄광촌 화가'로 유명한 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 국내 손꼽히는 정통 리얼리즘 구상 작가의 반전이다. 국내미술시장을 이끈 팝아트 작가들이 청바지, 쌀, 면봉, 실타래,크리스탈등 다양한 재료로 작업한 것은 애교다. 물감이 아닌 오로지 머리카락 한올한올로 완성한 작품은 놀라움과 기괴함으로 다가온다. 엉키고 뭉친 머리카락으로 수놓은 인물과 풍경은 더 이상 인물화나 풍경화가 아니다. 황재형표 체험 삶의 현장내음이 진득하다. 전시를 기획한 가나아트센터는 머리카락을 재료로 온전한 그림을 제작한 것은 세계 최초라는 입장이다. 이전 유태인의 머리카락으로 옷을 만들고 침대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는 디자인 차원에 속했다. '10만 개의 머리카락'을 타이틀로 오는 14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7년만의 개인전을 연다. 전시 제목은 사람의 머리에 나는 모발의 평균 숫자다. 전시를 앞두고 만난 황재형 화백은 의연했다. '작품이 오싹하다'고 하자 "배타적이서 그렇다"며 편견에 젖은 기자의 타성을 나무랐다. 그는 "머리카락은 이미 피자 비스킷 햄버거에 시스틴으로 들어가 있어 우리가 이미 먹고 있다"면서 "머리카락을 혐오스러워 한다는 것은 이 시대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민중의 모습을 거친 질감으로 승부했던 유화물감을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황 화백은 "머리카락은 살아있는 현존체이자 생명력"이라면서 "왜 인간은 머리카락처럼 살수 없나요?"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머리카락에 깃든 '평등의 미학'을 말했다. "한 인간의 머리카락의 숫자가 10만개정도 난다고 합니다. 하루에 100개가 빠져도 끄덕없는 머리카락을 인간은 지니고 있죠. 10만여개의 머리카락이 아무 불평없이, 아무때나 동일하게 나지는 않아요. 한날 한시에 태어나는 머리카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이 탈모되지도 않아요. 원형탈모도 차츰차츰 빠집니다.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불평등이 체화된 인간의 몸뚱이에서 그렇게 평등한 머리카락이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10만개의 머리카락이 인간 생명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표징"이라고 강조했다. "머리카락을 뚝 떼서 분석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떤 역사를 가져왔는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그는 "사람들은 머리카락 혐오증이 걸렸는지 쓰레기통에 확 버리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다. "내 것도 타인의 머리카락도 성스러운 존재로서 귀하게 여길수 밖에 없는 선물로, 후대에 물려줘도 좋을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무한한 표현재료 확장을 보여주는 작품은 '일상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예술이 된 머리카락'은 태백의 미용실을 순례하면서 모았지만 차츰 주변사람들이 나누어줬다. "머리카락을 준 지인들은 완성한 작품을 보고 놀라기도 하면서 기뻐하더군요. 무엇보다 자신이 참여한다는 생각때문에 들뜨시기도 하고…잘 해주세요라고 하더군요. 해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 머리카락이 다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력 그 자체이기 때문에 저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지요라고요." 머리카락을 준 지인들이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고 판매까지 한다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아직 (그렇게까지 태백 지인들)자본화되어 있지 않다"며 에둘러 표현했다. 탄광촌 광부와 그 가족들의 고단한 삶의 여정을 캔버스에 담은 작가지만 그들의 참된 삶을 온전히 담을 수 없어 미안한 감정이다. 그들의 영혼이 담겨있는 머리카락을 이용한 작업은 작가 자신에게도 위로를 주었고, 붓과 색채를 이용한 작업보다 더욱 생생한 표현력의 힘이 됐다 . 황재형은 자신의 그림과 현실이 하나임을 증명한 작가다.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1982년 이종구·송창 등과 조직한 ‘임술년(壬戌年)’의 창립동인으로 모순된 사회현실에 저항한 1980년대 민중미술 대표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대학시절 반 고흐의 초기작 감자를 먹는 광부가족에 마음을 빼앗겼다.1988년 돌연 태백으로 내려갔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16년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야학교사, 공장등을 전전하다 오지 태백으로 들어간 그는 막장에 들어갔다. 탄광촌에서 살며 석탄을 캤다. 하지만 그는 화가였다. 당시 길가, 풀섶, 하천등 아무데서나 풀썩 앉아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똥물 화가’로 불렀다. 삶의 현장에서 길어낸 작품들은 그를 '광부 화가'로 등극시켰다. 시커먼 광부의 초상중 ‘한숟가락의 의미’는 경외감을 전하며 새로운 '민중미술'의 길을 열었다. 탄광촌과 탄광사람들을 재현하는 그는 현실의 삶속에서 민족의 역사를 조명한다. 10년전 탄광촌 선탄부들의 목욕장면을 훔쳐본 후 화가로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했다. 문틈 사이로 마주한 '알몸의 현장'은 그를 해탈하게 했다. "비누칠과 샤워로 시커먼 물이 흘러내리는 몸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어요. 인간의 피부가 아주 싱싱하게. 물비늘처럼 아름답게 보이더군요. 특히 남편이 죽은 다음에 건강한 노동으로 가족들과 미래를 다지고 있다는 것, 그 현장, 그 몸, 그 몸의 아름다움, 그 몸의 진실을 증거하고 싶은 마음에 문을 열고 싶었죠." 욕탕문앞에서 욕망이 양심과 대결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꼭 그렇게 해야겠어, 상상해서 그려" vs "현장의 디테일은 다르지. 정말로 확연하게 보고 싶다" 30분간 문을 잡고 실랑이 하던 그는 결국 무릎 끓고 울고 말았다. "내가 이런 현장을 팔지 않아도 될 만큼 직관력이 있다면 화가로 살 것이고, 선탄부들 음모까지 그리면서까지 인간의 진실을 꼭 그린다면 나는 화가로서 재능이 없을수 있어. 그렇게 인식될때까지 한없는 나의 퇴페성에 눈물을 짜냈어요." 그는 "중요한 건 이 시간까지 그 부끄러움은 삭혀지지 않고 있다"면서 "타인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득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했는데 그것들을 삭혀주는 것이 바로 머리카락의 생명성이었고, 그래서 머리카락으로 작업하게 된 계기"라고 고백했다. 묵직하게 말을 잇던 그가 느닷없이 종이박스를 열어 액자를 꺼내 보였다. 길고 가느다란 액자에는 한 여인이 꽃무덤앞에서 사진을 찍은 모습으로 날카롭게 깨진 유리가 동시에 들어있다. 광부 화장실에서 놓여있던 거울이었다. 이사를 가면서 버리고 간 것을 황 화백이 '절도'한 물건이다. 사진속 여인은 1968~1969년 정도 스타일로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순수한 심성을 봤다"며 액자를 애지중지 다뤘다. "'일반인들이 예술이더라'. 그게 가슴을 쿵 쳤다"고 했다. 무슨뜻이냐고 하자 황순원 선생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면서 했던 말로 대신했다. '우리가 정작으로 예술로 드러내야 할 건 누이의 누런 이다.' "제가 찾고 싶었던 건 바로 삶속에서 이런 순수함, 순수한 심성, 인간정신입니다. 나의 그림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익명의 개인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입니다. 내 눈의 실핏줄이 터지는 까닭입니다." '십만개의 머리카락'으로 제작한 작품앞에서 또 한번 반전이 일어났다. '털보' 황 화백이, 쓰고 있던 중절모를 잠시 들어올리자 민머리가 반짝였다. "제가 대머리라서 타인의 머리카락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하하" 징그럽고 혐오감을 유발하지만 희귀함을 탑재한 머리카락 작품이 얼마나 팔릴지도 주목되고있다. 황 화백 유화 작품값은 100호 경우 4000만원~5000만원선이다. 전시는 2018년 1월 28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12/11
곰팡이 덕분에 혁신…최영걸 '성실한 순례'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많이 먹고 '그림도 사본 사람이 많이 산다.' 미술시장 화상들의 얘기다. 하지만 이젠 작가들도 할 말이 생겼다. '그림도 팔아본 사람이 안다.' 그림은 전시했다고, 또 판매했다고 끝난게 아니다. 미술작업은 끝나지 않는 게임이다. 그건 '그림을 팔아본 사람'이 안다. 한국화가 최영걸(50·추계예대 교수)은 그걸 10년만에 알았다. 6년만에 여는 개인전을 앞두고 만난 그는, 그 '앎'을 공개했다. 모든 건 계기가 있다. 올해 어느 날이었다. 해외 컬렉터 초대로 홍콩 완차이 엠파이어 호텔을 갔다. 호텔 주인은 최영걸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의 그림을 걸기위해 호텔을 리노베이션 할 정도로 극강의 애정을 보였다. 로비엔 최영걸 그림으로 도배됐다.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두각을 보인 그의 그림을 엠파이어 호텔 회장이 해마다 사들였다고 한다. 기쁨도 잠시, 작가는 고민에 직면했다. 호텔 주인인 컬렉터가 그를 한 점의 그림앞으로 데려갔다. 앗~. 곰팡이 자욱이 보였다. 보수된 상태였지만 완벽히 안지워있었다. 컬렉터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방법이 있느냐" 물었다. "그림을 제작하는 입장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는데, '올게 왔다'는 기분이었죠." 곰팡이는 기후 탓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홍콩은 겨울에도 습도가 80~90%가 될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번도 못봤던 현상이었어요. 10여년간 단 한번도 이런 문제와 마주친적은 없었거든요." 알고보니 동양화가 많은 홍콩 현지작가들도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배접을 할때 풀이 문제인지, 종이인지, 손때문인지, 곰팡이 포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기 때문에 답답했다. "복원전문가를 찾아갔죠. 그런데 그도 답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있고난 후 곰팡이와 전쟁이 시작됐다. '어떻게 방지할수 있을까' 고민은 재료의 실험으로 이어졌고 실마리가 보였다. 답은 안에 있었다. 고정관념을 바꾸니 무한하게 펼쳐졌다. 화선지를 잠시 물려두고 서양 재료로 다가섰다. 수채화 용지와 캔버스에 그리면 되는 일이었다. (배접할때)풀을 안쓰는 종이가 없을까? 의문으로 택한 재료였다. 2000년대 초반 한국화의 새로움을 선사하며 스타작가가 됐던 최영걸은 재료의 변화로 한번 더 혁신 플랫폼을 강화했다. "새로운 재료를 시도해보는 계기가 된거죠." 곰팡이가 스승인 셈이다. 17일부터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6년만에 여는 개인전은 그 비밀을 담아 확장된 재료로 만든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타이틀은 '성실의 순례'로 유럽의 성당과 외국인들의 일상 풍경을 담아냈다. 서구의 풍광을 최영걸 기법으로 그려냈다. 달라진게 있다면 우리 산하의 풍경을 촘촘하게 탐구하던 작가의 시선이 국내를 벗어났다는 차이다. 하지만 '최영걸표' 밀도감은 더 강력해졌다. 해상도 높은 사진처럼 가까이서 밀착해봐도 깨지지 않는 화상도를 자랑한다. 흑백으로 담아낸 유럽의 성당의 내부와 외부 모습은 유구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길거리 다리위에서 연주하는 흑인밴드의 모습도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시간의 향기를 품어낸다. 고대 유적지의 한 귀퉁이에서 잠들거나 문설주에 앉아 있는 개와 고양이, 관광지에서 흔하게 볼수 있는 비둘기 같은 동물까지 화폭에서 실제감을 발휘한다. 최영걸은 전시 타이틀처럼 '성실한 순례자'같은 화가다.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즉각 반응을 나타내는 말이 있다. 대체 어떻게 그려요? 이렇게 그리면 얼마가 걸려요?" 어떻게 그리나. 먼저 사진을 찍고(이전에는 현장에서 스케치했지만) 풍경을 고르고 컴퓨터로 작업 한다. 이전에 디자이너로 일했기때문에 쉽게 하는 일이다. 스케치는 갈필로 형태를 잡고 톤을 입힐때 수묵을 묽게 해서 올린다. 먹과 바늘같은 세필을 이용해 치밀함과 대결한다. 5mm 세필로 그리다가 점점점 작은 1mm 붓으로 마무리를 한다. 시간은? 적게는 2주, 많게는 두달정도까지 갈때도 있다.하지만 이또한 정확치는 않다. 시간을 재고 하는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화랑은 그의 더딘 작업때문에 기다림의 미학에 빠진다. 벌써 3년전부터 전시를 하자고 했던 일이었다. 6년만에 여는 이번 전시는 그래서 시작이 좋다. 목빠진 컬렉터들이 전시를 열자마자 그림을 사고 있다. 물론 전시때마다 작품은 모두 팔렸다. 13년째 작가와 화랑이 전속 의리를 맺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번 2011년 개인전 이후의 작품 변화를 보여주려는 시도에서 비교적 폭넓은 내용과 형식의 작품들이 제시되고 있다. 작가가 외국여행을 통해서 경험한 순간의 표정들이 작가의 세련된 필치를 반영해주는 먹이나 수채 물감으로 독특하게 표현된 작품들이 눈에 띤다. 터키와 러시아 그리고 스페인 등의 이국적인 공간에서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표정들이 정성스럽게 화면에 내려앉은 작품들은 최영걸의 창작 과정에서 늘 그래왔듯이 성실한 손 노동이 압권이다. 재료의 변화가 있지만 여전한 건 우리 색, 먹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모노톤 사진 같은 그림, 굳이 먹을 써서 그려야만 할까. 우문을 던지자 그는 "먹을 통제한다"고 했다. 잉크나 수채화물감하고는 다른 성질이 있죠. 그을음. 물감은 닦이면 닦여요. 수정이 가능하죠. 그런데 먹은 닦이지가 않아요. 맨 처음 먹색은 그 위에 발라도 올라옵니다. 요즘 사람들은 색상만 보고 판단하죠. 단색의 느낌으로 받아들인다고나 할까요." 그는 서울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학창시절 전통화와는 달리 사진같은 수묵화를 그려 교수는 물론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했다. "먹하면 발묵이라고 생각하는 데 틀린 생각이에요. 발묵은 번지는게 아니라 유동적인 상태, 머금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겁니다." 그러려면 종이가 두껍고 번지지 않아야 한다. 그는 "청나라때 쓰던 종이는 지금 화선지처럼 번지지 않았다. 번지는 효과가 있는 화선지는 명나라 말기에 만들어졌다"며 "발묵을 먹의 특징적으로 생각하는건 잘못됐다"고 바로잡았다. 그는 "먹은 인류가 발명해온 안료중 하나"라며 먹을 예찬했다. "영구불멸하죠. 먹이 잉크와 블랙 물감과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어요. 물론 일반적으로 차이를 못느끼겠지만 전문가들이 보면 미묘한 차이를 알아챕니다. 먹이 갖고 있는 동양화의 상징성이 있어요." "먹을 왜 쓰냐고요? 안료자체가 가지는 성질도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수묵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 있어요." 10년 넘게 이어진 '하이퍼리얼리즘 수묵화'는 이제 재료의 탄탄함을 장착했다. 고도의 노동집약적인 생산물인 작품은 재료의 변화로 영원성까지 담보하게 됐다.(물론 컬렉터 A/S 차원이 있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전남 구례 산수유 마을 풍경을 담은 그림이 예다. 산수유 그림은 그의 시그니처같은 작품인데, 이번 작품은 색감의 재료가 달라졌다. 노란색. 일반적으로 전통 물감은 등황(등나무 진)을 쓰는데 이는 식물성 안료다. "그런데 빛에 취약합니다. 직광이 떨어지면 몇년안에 색이 바래버리죠. 그래서 바꾼 것이 '카드뮴 엘로우' 독일에서 나오는 물감을 쓴겁니다." 그는 "전통을 잇는다 해서 전통 그대로 하는게 아니라 우수한 걸 구입해서 쓴다"고 했다. "동양화 서양화라는 말이 존재하잖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 입장에서 이 카테고리가 부담일수 있고 득이 될수 있지만 중요한 건 서양과 동양사이에서 우리 세대(386)는 낀 세대입니다. 사고방식은 동양이 유지되고 있는 묘한 느낌이 있어서 저도 그런 고민에 끼인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결과물인거죠." 한국화가로서 재료에 대해 할말이 많다. 그가 한지를 쓰다 수채화물감이나 캔버스로 화폭을 바꾼 이유다. "한지는 문제가 중성화처리가 안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서양은 비앙코지 경우 면이 100% 50%인 경우도 있는데 중성처리가 되어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황변을 방지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뜻이죠." 한지는 질겨 삵지 않지만 황변이 온다. 누래지는 것은 화가나 컬렉터가 바라는 게 아니다. "중성화처리를 하면 화이트를 화이트대로 유지할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 연구개발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안타까워요" 전통재료 업체가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화선지 값이 3배가 올랐다. "수요가 없기때문인데, 종이 만드는 회사도 문을 닫고 한지를 떠내는 발이 중요한데 발을 만드는 분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제가 장지를 가져다 쓰는 곳이 있는데 힘들어요. 120호 종이를 10년전에 주문했는데 최근까지 소량만 받았어요.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전통화를 전공했다고 전통재료를 쓰는게 아니라 좋은 재료를 쓰기 위해 개발하고 차용한다. 그는 "동양화하는사람은 어쩔수 없이 서양화 공부를 해야한다"면서 "현대미술은 포스트모던 이후 이제 동양적인 사고나 형식이 차용된 경우가 많다"며 한국화가로서 자부심을 보였다. 중학생때 아버지가 출장길에 사다준 관광용 두루마리 그림 때문에 그는 화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이태리 신부에서 중국 궁정화가가 된 낭세녕(1688∼1766)의 그림이었다. 서양인이 중국 재료로 비단에 그린 그림. 동서양 기법이 섞인 묘한 정물화는 그를 동양화 전공으로 이끌었다. 낭세녕의 그림을 보고 꿈을 꿨고 중국 국보 1호 장택단의 그림에서 좌절했지만 최영걸은 한국화 대표작가로 승승장구세다. 무명의 한국 작가를 쏘아올린 건 크리스티 홍콩경매사다. 2008년 홍콩 크리스티 5월 경매에서 그의 최고 낙찰가(41만5000 홍콩달러)를 기록했다. 2012년에는 그의 '봄을 찾아서(finding spiring)'가 추정가 20만 홍콩달러(2976만원)를 웃도는 37만5000 홍콩달러(5581만원)에 낙찰되면서 해외컬렉터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해마다 경매에 출품되어 '크리스티가 사랑하는 작가'로도 불린다.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한국화 시장의 물꼬를 다시 튼 작가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 아트마켓을 무대로 뜨거운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다. 작품값도 상승세다. 현재 전시에 나온 산수유 풍경 '화양연화'(150호 규모)의 경우 4500만원에 판매한다. '그림 좀 팔아본 작가' 최영걸은 동서양이 결합된 퓨전같은 그림, '낭세녕의 그림'을 닮아가고 있다. 먹을 버리지 않고 '피땀눈물'같은 집요한 열정으로 한국화에 천착하고 있는 것은 그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소명감이죠. 한국화에 관심이 적은 시대속에서 현대적으로 재석하고 접목시켜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새로운 한국화'라는 말도 애매하지만 제 그림은 한국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도록 거부감없이 다가서고자하는 그림입니다. 먹과 종이의 확장된 표현력과 재료의 실험도 현대 생활에 밀착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한국화의 한계를 더 극복하고 싶어요." 전시는 12월 7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11/17
낙서 같은 그림…73세 오세열의 '무구한 눈' '물들어 올 때 노 저어라' 속담이 있다. 좋은 기회가 찾아올 때 이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현재 미술시장에서 오세열 화백(73·목원대 명예교수)이 딱 그렇다. 지난 2016년부터 주가가 치솟고 있다. 개인전이 잇따르고 작품 판매도 호조세다. 지난 2~3년간 단색화 열풍이 이어지면서 그 이후 한국미술을 이을 작가로 떠오르면서다. 지난 2월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연 뒤 아트바젤 홍콩, 키아프 등 국제 아트페어에서 컬렉터들의 '필수템'으로 꽂히며 소장품 목록에 올랐다. 크리스티 홍콩, K옥션 등 국내외 미술경매 시장에서도 추정가를 뛰어넘는 낙찰가를 기록하는 등 뚜렷한 성장세를 보였다. 현재 100호 크기 작품값은 6000만원선이다. 지난해 외국에서 5번의 전시를 치른 후 올해 벌써 4번째 개인전을 연다. 대개 화가들이 2~3년만에 한번씩 여는 개인전과는 이례적인 행보다. 1975년 조선화랑에서 데뷔전을 한후 2015년까지 10번의 개인전을 연 것과 맞먹는 횟수다. 최근 2년만에 화가로서 40년 세월을 보상받는 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잦은 전시는 화가에게 '양날의 검'이다. 작품의 희소성 가치를 미안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전시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또 개인전을 앞두고 만난 오 화백은 되레 반문했다. "'어떤 물건을 사는데 그 물건이 어디에 가면 있다'하고 '그 물건이 어디에 가야만 구할 수 있다', 어떤게 좋겠어?" 빤히 쳐다보자 그가 답했다. "'어디에 가야만 구할수 있다'가 좋지 않아? 사실, 자주 전시하는 것도 작가의 이미지에 도움은 안돼. 작가 자신이 관리를 철저하게 냉혹하게 해야하지" 그는 "전시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야"라며 읊조리듯 말하다 입을 다물고 팔짱을 꼈다. 그 순간 복화술처럼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래 흥얼거려~. 신경안써도 돼. 나는 꽃하고도 대화해. 아침에 가면 첫 인사를 하지. 너 잘있었니? 어제보다 춥다. 너도 춥겠다. 하하하" 계면쩍은 듯한 표정으로 힐긋 상대를 바라보는 그는 그의 그림같았다. 한쪽눈만 동그랗게 두드러진 그림속 인물, 혼자 서있는 그 사람 모습이었다. 오 화백은 오는 18일부터 학고재화랑에서 '무구한 눈'을 타이틀로 또 개인전을 연다. 지난 2월 오브제로 만든 작품을 선보인 전시와 달리 이번 개인전은 인물화만 32점 모았다. 그의 '인물화'가 미술시장에서 가장 인기라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림속 인물이 나를 닮았네." 그는 40년 넘게 다른 사람을 상상하며 특징과 분위기를 그렸는데 결국 돌아보니 "타인의 초상화가 아니라 자화상 같다"고 했다. ‘인물’은 오세열의 40년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다. 인물을 중심으로 숫자 그리고 오브제로 소재를 발전시키며 작품 세계를 넓혀 왔다. 이번 전시는 197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인물화 32점을 시대별로 살펴볼 수 있다. 어둡던 옛날 그림과 달리 최근 신작은 밝아지고 단순해진 차이가 보인다. 낙서같고 아이가 그린 것 같은 그림이다. '못그렸다'고 하자 "성공했다"고 했다. "못그리는 그림처럼 그렸다"면서 껄껄 웃었다. "옛날부터 똑같이 그리는 것, 사진보고 그리는 것 싫어했다. 이미지를 나름대로 상상해서 그린 것이다" 오세열의 인물은 1980년대에 칠판에 백묵으로 낙서한 듯, 벽을 긁어낸 듯 거칠게 등장했다. 표현적인 필치로 그려진 인물과 어둡고 차갑게 가라앇은 배경의 조화가 강렬한 인상을 표출한다. 1990년대의 인물화에는 색채를 도입했다. 이 시기부터 인물 형상이 더욱 부각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부터 최근작에 이를수록 이러한 특징이 더욱 두드러진다. 배경은 아예 검은색이거나 노란색, 빨간색 등 높은 채도의 단색이다. 인물의 형상은 배경으로부터 눈에 띄게 분리되어 물고기처럼 유영하거나, 화면에 가로눕는 등 변화된 동세를 보이고 있다. 인물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그는 "그냥 사람"이라고 딱 잘라말했다. 모든 그림은 즉흥적으로 그렸다. 표정을 자세히 그리지 않는다."구상도 하지 않아. 에스키스한게 아니라 떠오르는대로 상황에서 작업하다보면 엉뚱한 그림이 항상 나오지. 처음부터 이런 모습 이런 분위기를 그리려고 한게 아니라 그리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거야." 화면속 사람은 가늘고 길다. 오 화백은 "그런 형상을 좋아한다"고 했다. 살펴보면 인물은 직선이 만들어냈다. 그가 "직선이 있으니 어떠냐"고 또 반문했다. '차가워보이고 질서정연해 보인다'고 하자 "내 성격이 그렇다고 했다. 부드러울것 같지만 차갑고 냉정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림은 '화가의 영혼의 지문'이다. 오 화백은 요즘 "행복하다." "딴게 아니고 원하는 작업을 할수 있다는 것. 이전엔 생활이 어려워서 그릴수 없었는데… 이젠 삶의 질도 좋아졌다. 내가 원하던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작업한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3년전 대전에서 올라와 양평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컬렉터가 힘을 보탰다. "어느날 우연히 만났는데 지원하고 싶다고 해서, 조건이 맞았다. 거기까지만 알아라." 그 컬렉터는 지금까지 물심양면 그를 도와주고 있다. 이전 그림에 팔다리가 없거나 신체가 부자연스런 인물이었다면 2017년 신작들은 발이나 손이 정상적으로 돌아와있다. 색도 밝아지고, 물감층도 두터워졌다.(돈을 벌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벤자민(영화 벤자민의 시간을 거꾸로간다)처럼 되고 있다. 일흔살이 넘어가면서 더 어려지고 있다. 백발이 성성하지만 마음도 그림도 자꾸 '어린애스러워'지고 있다. "70대라고 70대같은 그림을 그리는게 아니라 점점 더 어린 사람이 그린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어. 내 나이가 연상이 되지 않는 그림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지" 실제로 이전 그림과 비교하면 요즘 그림은 더 아이 같아졌다. 어린이가 칠판에 그린 듯한 그림처럼 보인다. 전시 타이틀 '무구한 눈'은 그래서 정해졌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무구(無垢, innocent)의 시선'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김복기 평론가가 썼다. '무구한 눈'은 곰브리치(Ernst Gombrich)가 “무구한 눈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에서 따왔다. 모든 지각은 많든 적든 이미 코드(code)화되어 있다. "무구한 눈은 단순히 유년시절로의 회귀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으로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예술가란 과거와 시원으로 퇴행하는 재능보다 미래와 종말로 전진'하는 재능을 가진 존재다. 따라서, 현대예술에서 '무구한 눈'은 마땅히 어린이의 눈이라는 좁은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려지고 화려한 색을 좋아도 하지. 그게 이치야. 나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 이번 전시에는 노란색과 주황색등 화려한 색으로 치장한 그림이 많다. "나이 먹으니 화사한 색이 좋다면서도 그래도 검은색, 블랙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이번 신작에도 검은 칠판같은 그림을 대표작으로 내세웠다. '검은색 자부심'이 있다. "똑같은 색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내가 쓰는 블랙은 그 속에 엄청난 색이 들어있지. 곰삭은 색이라는 표현이 맞을꺼야. 내 '블랙'은 다른 사람하고는 달라." 검은색 그림은 바삭해보인다. 유화인데 유화같지 않다. 기름기가 없다. "기름기를 빼는 건 작업하는 내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지. 그건 요리사의 레시피 비밀처럼 영업비밀이야. 그런데 나는 윤나는걸 싫어해. 건조하걸 좋아해. 그래서 작품도 영향을 받나봐." 그림속 인물은 눈만 강조되어 있다. 단추로 붙이기도 한다. "얼굴에서 눈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사람마다 눈 모양이 다르잖아. 눈을 잘못뜨면 인상쓴다고 하고...그냥 즐겁게 작업하는 거야, 즐겁게" 그림은 숫자가 있는 것도 특징이다. 그는 "숫자로 보이지만 하나의 드로잉"이라면서 "그렇다고 막 쓰는 건 아니다"고 했다. "왜 썼냐고? 어렸을때 몽당연필 연습시키잖아. 누구든지 그런 추억이 있을거야. 생각해봐 숫자는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떠나서는 살수 없어. 싫든 좋든 숫자에 의해서 울고 웃고, 행복하고 불행하지. 모두 숫자에 매달리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들한테 어떤 느낌을 주기위해서 썼지." 모든 작품은 제목이 없다. "보는 사람의 폭을 넓혀주려고 안단거야. 작품을 보면서 동시에 제목을 보면 연결시켜서 감상하잖아. 작가의 의도가 빗나가는거야. 관람자를 해방 시키기위해 제목을 안붙인거야. '무제'도 제목이 될 수 있는데, 그것도 없애야한다. 내 작품은 어떻게 감상하든 상관없다." 오 화백은 예술을 매개로 현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후기 산업 사회를 살아낸 세대의 사람이다. "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인간은 불행해졌고 물질적인 것에만 매달리다 보니 정신적인 것이 소멸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번뇌와 해탈은 한 몸이다. 멍한 듯 표정 없는 얼굴, 큰 동작 없이 움츠린 신체. 미숙한 듯 보이지만,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림은 역설적으로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불완전한 인물들 주위로 단추, 장난감등의 천진한 오브제를 늘어놓고 숫자나 낙서 같은 기호들을 새기는 건 그의 따뜻한 마음의 조각들이다. 보는 순간 딱 끌리는 그림. 본능과 무의식의 세계로 단박에 끌어들이는 작품은 그의 유년 기억이 힘이다. "어렸을때 낙서를 많이했어. 새로 도배한 벽 위에 연필로 신나게 그렸지. 그럴때마다 얼마나 호되게 혼났는지 몰라~ 그런데 나는 지금도 흰벽만 보면 그리고 싶어. 여백만 있으면 그리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구쳐. 허허허" 전시는 12월 17일까지. [email protected] ◇오세열 화백=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미술부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69년 서라벌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4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구상 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낸후 1976년 제 3회 한국일보사 한국미술대상 최고상을 수상했다. 30대에 조선화랑, 진화랑 등 당대 최고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39살에 유럽의 대표 아트페어 피악 (Fiac, 1984)에서 남관,박서보, 김기린,이우환 등과 함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때 프랑스 미술계 평론가들에게 높은 평을 받았고 작품이 판매돼 더욱 주목받았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작품이 팔린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프레데릭 R. 와이즈만 예술재단등 국내외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2017/11/16
무채색에 깔린 '사느냐 죽느냐'…이봉열 화백 '공간 여정' “감정을 배제하는 쪽으로 나가보자…, 어떤 때는 아무것도 없는 벽면을 보아도 무언가가 와 닿는 것이 있거든. 살면서 느끼는 것이 많이 있는데, 그 삶의 느낌에서 오는 거라고 해야겠지. 예술이라는 게 직접적인 것 보다는 뭔가 절제된 것, 없는 것 안에서 발견하는 거지.” 이봉열(80)화백 개인전이 '공간 여정'의 타이틀로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에서 25일부터 열린다. 단색화 열풍으로 뒤돌아본 현대화랑의 원로 작가 발굴 전시다. '단색화 대가'로 우뚝 선 박서보·정상화 화백처럼 이봉열화백도 면벽수행하듯 단색과 그리기에 천착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1957~1963)으로 1961년 국전에서 수상하면서 당시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1972년 34세에 국전 추천작가상을 수상하고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한 '스타 작가'였다. 1970년대 파리 유학시절에 한국의 창호문양에서 영감을 받아 기하학적 분할을 기반으로 하는 ‘격자 구조’에 관심을 갖고 구성적 추상 작업을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는 점차 격자구조에서 벗어나 격자를 해체하는 형태가 나왔고 1990년대부터 2000년대 그리고 2017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자를 완전히 벗어나 화면과 작가를 일체화하는 작업을 하며 예술혼을 이어왔다. “그 전까지 구성적인 질서를 찾으면서 한계를 느꼈어. … 그래서 되도록이면 더 추상적으로 풀어보자, 틀에 묶이기 보다는 마음대로 하면서.” 이번 전시는 이봉열 화백이 현대화랑에서 27년만에 여는 전시로 7회 개인전이다. 1982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인연이 이어져 1990년 4회 개인전을 연바 있다. 오랜만에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 현대화랑은 이 화백의 1970년대 격자구조 작품들과 1980년대의 서정적 기하추상 작품, 흔적을 화면에서 지워내는 1990년대 작품 이후 최근의 작품까지 20여점을 전시한다. '형태없는 작품'을 통해 팔순의 화백이 보여주는 것은 "살아서 회화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준다. "그의 캔버스는 이제 이어질 듯 끊어지고, 나타날 듯 소멸되는 것들, 선인 듯 선이 아닌 듯한, 터치와 제스처의 중간, 미(美)와 실존의 모호한 경계 자체가 된다."(심상용 평론가) 그림인 듯 아닌 듯 간명한 단색화같은 이 그림에 대해 심상용 미술평론가는 "이 회화는 과거에 속박되지도 미래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는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그저 끊임없이 이전과 이후의 사이에서 서성이는, 매 순간 가장 기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내려지는 결정들만을 따름으로써 묵묵히 실존을 입증하는 숙연한 현재가 있을 뿐"이라고 평했다. 정병관 미술평론가는 "이 화백의 그림은 말레비치(Kazimir Malevich)가 ‘세계는 공허하고 표현할 것이 없다’고 하던 심정과 일치한다"고 했다. "백색 위에 백색 그림을 네모꼴로 그려놓았지만, 그 윤곽이 세계를 한정시키는 일밖에 한 일이 없다. 이봉열은 말레비치의 사각형도 그리지 않는다. 햄릿이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한 영원히 주저하는 심정이 화폭 위에 깔려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의 화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다는 대답이 나오기 일쑤"라면서 "오히려 그림 앞에서 명상을 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이타주의(利他主義)’의 심성을 기르는 것이 낫다"고 했다. 명상이 예술가와 감상가의 마음을 비우는 겸허함을 가르쳐 준다면, 예술은 종교에 접근되는 선한 마음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차원에서 이 화백의 작품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지우고 버리고 절제된 무채색으로 나온 그림같지 않은 그림의 진가는 직접 봐야 느낀다. 묵묵히 실존을 입증하는 내공이 담긴 좋은 그림은 말이 필요없다. 한번에 딱, 몸이 반응한다. 물론, 그날 컨디션과 타이밍도 중요하다. 전시는 11월26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10/24
32m 그림에 담긴 인간 실존과 소외…오원배 개인전 박현주 기자 =전시장 1층 벽면을 감싼 32m그림. 마치 전체주의 병영이나 산업 현장에 유폐된 듯한 군상이 담겼다. 거대한 파이프와 가스통, 담벼락 아래 위축된 인간의 모습은 기계보다 더 기계적인 몸짓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한편에선 매끈한 금속체 인조 인간이 환희에 찬 모습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있다. 전시장 일부에 직접 안료를 흩뿌린 거친 현장 페인팅이 생동감을 더한다. 화가 오원배(64·동국대 교수)가 '화가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전시를 펼친다. OCI미술관(관장 김경자) 초대로 11월 2일부터 개인전을 연다. 미술관 1, 2, 3 전시장 전층에 40여년간 천착해온 화업을 공개한다. 폭 32m의 대작을 비롯하여, 800호, 500호 이상 크기 신작으로 압도한 전시장은 파워있는 화가의 면모를 발휘한다. 집단화된 인간의 통제된 신체와 인조 인간의 자율성이 강한 대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통해 이 시대 ‘휴머니티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2층 전시장에서는 인간 소외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배경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계단, 온기 하나 없는 공장의 철골 구조, 일거수일투족을 뒤쫓는 감시의 시스템 등 그림 속 적막한 사회의 모습은 기계적 시스템과 인간의 도구화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하여 균질한 톤으로 꿰어진다. 3층에는 작가가 일상 속에서 꾸준히 그려온 드로잉 40여 점을 선보인다. 평상시 생활 곳곳에서 마주치는 주변 인물과 소소한 사건을 면밀히 기억하고,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하여 화폭으로 옮긴 것으로, 삶의 매 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상상을 특정한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이미지화한 것이다. 선 몇 개로 단순하게 표현하거나, 대상을 기호화하거나, 재료 자체의 속성이 드러나게끔 한 작업으로 드로잉은 오원배에게 관찰의 기저이자, 변화를 추동하는 원동력임을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기능적 효율을 극대화하는 사회 구조가 어떻게 인간을 도구화하고 집단 명령의 체계를 형성해 가는지, 그리고 과학과 기계 문명의 발달이 어디로 치닫게 되는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각종 기계와 인공지능을 개발했지만 결국 그 기계들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인간과 기계의 전도된 관계를 그려내며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라는 시대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3개 층의 전시 구성은 삼계(三界;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계관을 은유적으로 담고 있다. 작가가 5년 만에 선보이는 대규모 개인전인 이번 전시는 그의 회화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또한 후학을 양성하면서도 놓치않고 평생 그려온 '오원배 회화'의 모습을 한자리에서 느껴볼수 있다. 전시는 12월 23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10/24
나무에 시간을 담았다···김덕용 '오래된 풍경' 나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 김덕용의 ‘오래된 풍경’ 전이 열린다.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는 11일부터 김덕용 신작 회화 25점을 선보인다. 작가의 17번째 개인전이다, 작가는 작품에 시간의 축적을 담는다. 오래된 나뭇결 위에 옛날 풍경을 담아내 아련한 추억과 따스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오래된 가구나 문짝 등의 나무판을 깎고, 다듬어서 그 위에 단청기법으로 그리거나 자개를 이용한 작품은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해 해외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종이가 아닌 나무에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재료의 근본'에 접근하겠다는 의지였다. 동양화를 전공하며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수많은 목조 건물을 새롭게 발견했다. 세월의 더께가 쌓인 목조건물에서 포근함과 안락함을 느꼈고, '나무'라는 재료로 관심이 옮아갔다. 이번 전시에서 김덕용은 전통 건축의 조형을 응용해 차경으로서의 풍경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는 "손때가 묻은 오래된 사물들은 시간의 기록이 담겼다"며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지지만 이번 전시는 마치 목수처럼 각 조각을 연결시켜 옛날 그 날, 그 순간을 떠올리고 싶었다"고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창문은 차경을 위한 프레임일 뿐만 아니라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통로다. 매화, 산수유, 백일홍 등은 작가가 어릴 적 살던 집 안방에서 창밖으로 보이던 풍경들이며, 지금도 그가 즐기고 찾아다니는 풍경들이다. 차경을 통해 옛 선인들을 만나고, 그들을 자신의 그림에 불러들인다. '결-자미화(紫微花)'에서는 대청마루에 누워 자신이 좋아하는 배롱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다 낮잠에 들었을 안평대군을 상상하고, '관해낙조(觀海落照)'에서는 정자에 앉아 책을 읽다 노을빛이 저무는 다도해를 바라보았을 다산 선생의 쓸쓸한 마음에 감정을 이입했다. 오래된 나무와 반짝이는 자개가 어우러진 작품은 수많은 시간을 담금질한 장인 정신을 전한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작품속 풍경이 고즈넉하다. 조용하게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전시는 31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10/11
임옥상 "난 투사가 아니다···그래서 흙덩어리를 던졌다" 의외다. 30호 캔버스 108개를 연결한 대형 그림 '광장에, 서'는 거침보다 부드러움으로 스며든다. 작년 광화문 광장에서 '이게 나라냐'며 격렬하게 응집된 '촛불 시위'를 담아낸 작품인데, 그동안 (봉기 도발하는) '임옥상 스타일'과는 다른 분위기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집회를 흙으로 그려내고, '데미언 허스트 땡땡이'같은 원형 패턴으로 촛불파도를 묘사했다. 마치 폭풍우가 지나고 모든 것이 잠잠해지며 아스라함으로 파고들며 여운을 전한다. '민중미술가 1세대' 딱지가 붙은 '원조 블랙리스트' 임옥상(67)화백이 변한 것일까. 22일 개인전을 앞두고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임 화백은 "난 투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민중미술 작가'로만 묶지 말고, 그냥 임옥상으로 봐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가 걸어온 길은 철저하게 '리얼리즘 미술가'다.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시각언어'로 정권에 대항했다. 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현실과 발언'의 창립 멤버였고, 미술의 사회 참여를 위해 다방면에서 활동해왔다. “미술은 전통에 기반을 두되 역사 의식과 현실 인식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그림에서 보여줬다. 환갑이 지나고 고희가 가까운 나이 탓일까. 그는 여유감이 넘쳤다. "기본은 변하지 않았지만 연륜이 있으니까···파마를 해서 그런가"라며 눙쳤다. 가로 1620cm, 대작중 대작 '광장에, 서'를 108개의 캔버스에 담아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에겐 쉬워보이는 작품인데, "갈피를 못잡았다. 촛불을 어떻게 작업을 할수 있을까, 자꾸 미뤄, 이호재 회장(서울옥션)이 세번이나 찾아와 아직 안그렸냐"고 채근할 정도였다. 실제 사건의 복사판, 새로운 걸 제시하지 못하는 작업은 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이미 사진을 통해서 훨씬 더 잘 보여줬는데, 그걸 중복되는, 중복언어는 할수 없지 않나"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새롭게 쳐다볼수 있어야 하지 않나. 임옥상은 또다른 풍자를 할수있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 작업 의지는 성공한 듯 보인다. 장대한 파노라마로 전개된 '촛불' 작품은 전시장에 들어와 '기념비적인 역사 기록화'로 위상을 전한다.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얼굴 찌푸리게하는 작품이 아닌 누구도 공감할수 있는 새로운 '민중미술 스타일'로 보인다. 임 화백 스스로도 만족했다. 작업할때는 너무 커서 한번에 볼수 없었는데, 전시장에 세팅을 하고 조명을 켜니 와우~감탄이 절로 나왔다면서 "자기 감동이 없으면 제 것이 아니다. 자기 감동을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민중미술가'로만 보는 것은 "오해다"라며 자신은 "좌우도 아니고 아나키스트"라고 했다. 대부분 "임옥상은 왜 자기 이야기가 없냐"며 '사적인게 없고 공적인거만 있어 매력 없다고들 한다"며 민중미술가로 굳어진 프레임의 안좋은 예를 설명했다. "나는 남녀의 상열지사를 굉장히 좋아하고 누드도 그리는데, 보는 사람들은 내 의지와 달리 해석한다"고 했다. 남녀가포옹한 그림을 만들면 "임선생 드디어 남북이 만났군요"라는 반응을 보이는데, "완전히 선입견으로 나를 보는 거다"며 답답해했다. 하지만 그 틀은 자신이 만들어왔다. 지난 30여년간 임옥상은 전시장 밖으로 뛰쳐나가 주로 거리에서 광장에서 작업을 해왔다. 퍼포먼스,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벽화도 제작했고, 사회적 정치적 집회에서 현장작업을 거칠게 해왔다. 요즘 듣는 말이 있다고 했다. "임옥상의 최대 위기"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독재든 뭐든 정부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성장한 작가라는 인식때문. "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 용기있고 행동하는 작가인데, '민주화가 됐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진담반 농담반같은 말들이 꽂히고 있다. 그는 "그렇다면 내가 한쪽 편들기 내지는 가담한다는 건데, 예술가로서 그게 말이되냐"며 "인간 임옥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예술가는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마치 대립각을 세워서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온다고 보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임 화백은 "노무현정부때도 기대한 것이 있어서인지 제일 불편했고, 김대중 정부때도 마찬가지였다"면서 "정권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다만 정권을 세우는데에는 일조를 했다"고 자부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그는 "엄청난 변화가 있지만 권력은 다스리지 않으면 맘대로 튄다"며 "결국 권력은 민중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배반할수 밖에 없다"고 했다. "고삐를 바짝 조여야합니다. 연은 연줄이 있기때문에 높이 나는 것이죠. 노무현정부도 느슨한 연줄을 갖고 있는 바람에 정권도 놓치지 않았나, 깨어있는 시민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술가가 필요하다"는 그는 "잠들지 않는 깨끗한 영혼, 임옥상은 위기가 아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민중 작가로 불러주는건 영광스럽지만 부끄러운게 많다"고 고백했다. 그러기에는 제대로 하는 것이 없고, 해놓은 것이 없다는 그는 이제 민중미술가에서 공공미술가로, 커뮤니티 아트 마을미술가로 진화중이다. 미술의 공공성과 공익성에 관심을 갖고 1996년 광화문 지하철역 '광화문의 역사' 작업을 시작으로 다양한 공공미술 작업을 선보였다. 또한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집중하여 대중의 참여와 소통을 이끌어내는 문화 활동가로서 폭넓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창신동에 '창신소통공작'에 이어 새로운 개념의 어린이 놀이터를 개관할 예정이다. 변한 듯 아닌 듯하지만 분명한건 여전히 현실정치에 안테나를 세우고 정력적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점이다. 23일부터 여는 개인전 '바람 일다'는 2011년가나아트센터 개인전 이후 6년만이다. 작품들은 정치 사회적 소재들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풍자·비판·상징화한다. 전시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트럼프, 아베 등 국내외 14인의 국가 원수들의 초상을 대형 가면으로 만든 설치작품 '가면무도회'로 시작한다.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사건과 용산 화재 참사를 주제로 물과 불의 대립을 보여주는 드로잉 작품도 나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윌리엄 모리스', '존 버거', '자화상 I' 등 흙과 지푸라기를 섞어 그린 초상화 작품들이 눈에 띈다. 또한 민들레 꽃씨로 제작한 노무현과 문재인 두 전/현직 대통령의 초상화도 전시됐다. 한편 '여기, 흰꽃'과 '여기, 무릉도원'은 북한산의 산세를 흙 바탕에 선묘로 재현하고, 작품 하단은 만발한 꽃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실제 풍경을 풍유적으로 번안한 일종의 관념적 실경화이자 현대판 무릉도원으로서 이 작품들은 암울한 현재를 극복하고 희망찬 내일로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의 신세계를 향한 작가의 꿈을 대변”한다. 촛불이 바꾼 나라, 변화된 정부덕분일까. 정권에 대항하며 핏대를 올리던 이전 모습과 달리 임 화백은 이번 전시에서 '흙 작업'에 집중해달라고 주문했다. '민중미술'보다 '흙을 왜 썼나'하는 함의가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국, 인간은 땅위의 존재다. 하지만 땅위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착각할때가 있다. 도시에 살면서 땅, 흙을 밟지 못하고, 유리되어 살고 있다. 흙의 정신을 잊어버리면 삭막할수 밖에 없다. 내가 흙으로 작업을 한 것은 흙에 대한 관심과 흙과 친할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기본 문명의 방향을 옮겨야겠다는 의지다. 흙을 제일 느끼고 감촉할수 있는 방법은 농사다. 하나의 생명을 기르고 보람을 느끼고 생명을 감촉할수 있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번에 흙덩어리를 던졌다." 전시는 9월 17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08/22
김정숙 여사, '푸른그림', 그리고 정영환 세상은 변덕스럽다. 어제와 오늘을 천지차이로 바꾼다. 무명에서 유명이 되는 것도 한순간이다. 이 화가도 그렇다. '푸른 그림'을 그린지 17년만에 세상이 달라졌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지난 6월 29일 오후, 그 화가의 판을 바꿨다. 그날 TV에서 김정숙 여사 패션이 화제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방미에 오른 김 여사가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선보인 의상은 흰색과 푸른색의 조화였다. 한·미 양국간 신뢰에 바탕해 첫 정상회담의 성공을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은 의상은 '영부인의 품격'을 선사했다는 호평이 이어지면서 급기야 옷에 그려진 '푸른 그림'이 누구 것이냐에 초점이 모아졌다. 청와대가 국내 회화 작가 작품이라고만 공개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그날 떠올랐다. 뉴시스가 단독 보도(김정숙여사 패션외교···'푸른색 그림' 누구인가 봤더니 정영환 작가')하면서 세상에 그의 이름 '정영환'이 새겨졌다. 서울지역 작가도 아니고 미술시장 스타작가도 아니어서 쉽게 알아보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독특한 색 덕분이었다. 아트페어에 간간히 선보였던 그림은 푸른색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날 그도 어리둥절했다. 방미 행사에 자칫 누가 되지 않을까 나서기를 꺼려했고 조심스러워했다. 영부인과는 개인적 인연도 없고, 패션 디자이너의 선택이었다며 부끄러워했다. 인생은 타이밍이고 기회도 타이밍이다. 결국 '하늘을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작품은 미술시장 대세인 팝아트도 아니다. 어쩌면 푸른색 한가지 색이기에 지난 2~3년간 열풍이던 '단색화' 영향을 받은 그림이냐고도 할수 있다. 하지만 모노크롬화의 여파인 단색화와는 결이 다르다. 물론 단색화가 추구하는 몰아일체, 정신성과 연관을 짓는다면 꿰어맞출 수는 있다. 그 '푸른 그림'을 2010년부터 현재까지 17년째 묵묵히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푸른 그림 제목은 '그저 바라보기(just looking)'. 나무 풍경은 푸른색 안경을 쓰고 본 것처럼 온통 파랗다. 푸른색에 묻혔지만 나무들의 존재감이 돋보인다. 나뭇잎 하나하나를 일일이 묘사한 구상화로, 반복이 이뤄낸 붓질의 내공이 전해진다. 나무의 푸르름, 자연의 녹색을 푸른색으로 바꾼건 차별화가 생명인 화가의 본능같은 일이기도 했지만 희망과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보기' 시리즈가 탄생한 건 아버지 덕분이다. 15년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와 간호하는 어머니를 위해 경기도 양평 산이 있는 곳에 작은 집을 마련해드리면서다. "산과 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힘을 내었으면 하는 희망"과 "내게 던지는 위로"를 그림에 담았다. 위로와 안정감, 성공과 희망 등의 뜻말을 담은 푸른색에 온전히 색의 감정을 담자 그림은 달라졌다. '그린'을 '블루'를 바꿨을 뿐인데 친밀했던 풍경과 자연은 생경해졌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감정을 연결했다. 희망과 슬픔이 교차하고 낯설면서도 신비롭고, 서늘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수원대 미대를 졸업하고 화가가 되기까지 삶의 무게를 견뎌왔다. 예고에서 미술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입시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었다. 지치고 힘들고 시간이 빠듯했지만 붓을 놓지 않았다. 늦은 밤 미술학원 한켠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자신과 싸웠다. '오늘 선택한 것의 결과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그림에 대한 갈망은 '푸른 숲'으로 이어졌고 스스로 힐링했다. '푸른 그림'은 어제의 그림이 아니다. '패션 외교'후 대접이 달라졌다. 그룹전이 초대 개인전으로 바뀌고 아트페어에도 초대 부스 개인전으로 명칭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기쁜건 작품을 더 많이 보일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 화가 정영환은 "이제 그 이슈 보다는 제 작업에 더욱 관심을 가져주는게 감사하다"면서 "작업에만 몰두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림은 ‘그저 바라보기'다. 그림 앞에선 말이 필요없다. 그의 푸른 그림 '그저 바라보기'는 휴식같은 풍경으로 반사한다. 희망과 위로를 담고 수행하듯 그려온 그림은 이제 응원이 필요하다. '푸른 그림의 전설'이 시작됐다. 8월2일부터 9월 5일까지 서울 마포 삼진제약 건물 2층에 위치한 벽과나사이 갤러리에서 정영환 6회 개인전이 열린다. [email protected] 2017/07/31
이효리 '다이아몬드'와 문형태 '다이아몬드' '그대는 이미 다이아몬드 맑고 영롱한 다이아몬드 깨트릴 수 없는 다이아몬드 사라지지 않은 영원한 다이아몬드' 이효리가 4년만에 발표한 신곡 '다이아몬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노래라고 알려지면서 반응이 뜨겁다. 손석희 앵커가 "가사를 보니 뭉클하다"고 말해 더욱 주목받고 있는 노래다. 예술가들의 텔레파시일까. 이 노래를 압축한 듯한 그림이 전시장에 걸려 주목받고 있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35회 개인전을 열고 있는 문형태(43)의 '다이아몬드' 작품이다. 미술시장 스타작가답게 이 그림은 걸리자 마자 팔렸다. 동그란 빨간 딱지를 붙이고 전시되어 한발 늦은 컬렉터들의 속을 쓰리게 하고 있다. '다이아몬드' 작품은 보는 순간 마음을 부풀게 한다. 그깟 손가락이 아니라 보름달같은 여자 얼굴에 '다이아 반지'를 왕관을 씌우듯 끼워준다. 남자의 얼굴에는 뿌듯함과 경건함마저 감돈다. 기분을 좋아지게 그림이지만 '낭중유추(囊中有錐·주머니에 든 송 곳)'다. 그림은 상처와 고통, 모든 결핍된 것들의 이야기다. 작가는 "왕관과 머리를 쓰다듬는 뾰족한 다섯 손가락, 별과,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모든 것들은 날카로운 끝을 가지고 있었다"며 "반짝이면서도 날카로운 것들, 선과 악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들은 내게 친구, 연인, 가족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했다. 만화같고, 동화처럼 보이는 문형태의 그림은 미술시장의 '다이아몬드'같은 존재감이 있다. 여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다이아몬드처럼 컬렉터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보기만 해도 사고 싶다'는 마법이 걸릴 정도로 전시만 열면 그림은 순식간에 팔려나간다. 조지콘도, 피카소 같은 입체파의 탈을 쓴 듯한 만화같은 그림은 묘한 마력을 풍긴다. 어른같기도 아이같기도 한 캐릭터들의 천진난만함과 생동감이 돋보인다. 살펴보면 눈코입이 세로로 달리고 몸통이 분리되어 기괴하지만 유쾌하게 마음을 터지게 하는 건 기발한 상상력이다. 이번 전시 타이틀은 유니콘(Unicorn)이다. 반짝거리면서 날카롭고, 온순함과 포악함이 공존하는 선과 악을 동시에 상징하는 의미로 작가의 복잡한 생각을 '유니콘'으로 묶었다. 작가는 "모든 종류의 기억이란 상처였고 우리를 자라게 한다"며 "가족이, 친구가, 당신이, 제게는 제가 만드는 작업들이 저를 아프게 하는 동시에 튼튼히 자라게 하는 유니콘들"이라고 했다. "저는 작업을 할 때 '가난'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느끼는 쌀쌀한 추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고독하게 만들며 때로 그래서 더 다정하고 사랑하게 만듭니다. 본능적인 감정을 이해받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미술시장에 데뷔한지 10년. 무명에서 '완판작가'로 등극했다. 조선대 서양화과를 졸업후 서울로 올라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딴짓을 했다. 홍대 놀이터 앞에서 직접 디자인한 액세서리를 팔았고, 웹디자이너, 그래픽디자이너로도 살았다. 2007년 기회를 잡았다. 첫 개인전을 연 후 '문형태' 이름이 떠올랐다. 어둡고 거칠지만 묘한 그림, 극사실화가 판을 치던 미술시장에 균열을 내며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작업하던 그의 살림살이도 나아졌다. 그림이 팔려나가면서 작업실은 커졌고 쾌적해졌다. "저는 항상 작업만큼 쉬운 것은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화가에게 그림만큼 쉬운 일은 없습니다. 허세의 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살면서 매일 한 점 이상의 작업을 했다. 해매다 개인전을 열었고 러브콜 오는 기획전 그룹전(150여회)을 마다하지 않고 참여했다. "마치 국내 컬랙터에게 모두 소품 하나씩을 소장하게 만들자는 오기"였다. 마르기도 전에 팔려나가 화랑가에서 '마팔'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림은 변한듯 안변한듯 썸을 탔다. 10년동안 늘 작업이 한결 같을수도 없는일이다. 하지만 "작업이 어두울때도 밝을때도 더하거나 모자랄때도 변함없이 사랑받았다"며 "작가가 사랑하는 작가라는 칭찬도 들었고, 유행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강력한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자랑"이라는 자부심도 있다. "영감은 어디에서 얻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너에게'라는 완벽한 답변을 드릴 수 있다"는 작가는 "내가 그리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까지 단언하기란 힘이 들지만 결국 저에게 영감을 주고 경험을 주는 수많은 타인들에 의한 얘기"라고 했다. "고민은 늘 작업실 밖으로부터 오며 그것들은 결국 '관계'에 대한 것들입니다. 저는 한달에 한 두 번도 외출하지 않는 집돌이입니다. 가끔 외부로 나오면 인지도나 인기에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어색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에 흔들리는 시기는 지났다지만 외부에서 건드리는 손짓들에 늘 무감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견뎌왔고, 살아내며 단단해졌다. 강산도 변하게 하는 10년 세월은 힘이 세다. 무언가 도사리는 듯 거칠고 오싹한 화폭은 이제 부드러워졌다. 색감도 밝아지고 깊어졌다. "살이 쪘다고들 하더군요." 화려하면서도 무거운 독특한 색감은 흙물 덕분이다. 황토를 섞은 물을 먼저 캔버스에 바른 뒤 마르면 흙을 걷어내고 흙물이 노랗게 든 캔버스에 크레파스로 밑바탕을 그린다. 캔버스에 흙물을 바르는 이유는 알고보면 비장하다. 작품들과 미리 작별 인사를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이모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기본 명제를 떠올려 자신이 죽은 뒤 곳곳에 남아 떠돌아다니게 될 작품과 미리 인사를 하려고 이런 작업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혼돈은 질서의 분신'이다. 인물과 풍경이 풍경이 합체된듯 복잡하게 엮여진 작품은 허공에서 시작된다. 무엇을 그릴지, 계획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는다. 연필로 끼적이다가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고 구체화된 그림은 기괴하면서도 익살스러운 강렬한 이미지로 드러난다. 보는 순간 그림맛에 빠지게 하는 '문형태표 그림'은 동심을 넘어 '일상의 위대함'을 전한다. "작품의 메시지요? 간단합니다. '사랑'입니다.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길은 오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가볍거나 즐겁거나 그로데스크한 그림들은 모질게 짜증내는, 진짜 가족같은 사랑의 오묘함을 표현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딱 소장하기 좋은 10호(310만원)크기 회화와 드로잉 오브제 등 75점이 전시됐다. 8월 19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07/05
시간의 먼지를 털었다···이진용 '컨티뉴엄' 딱 보면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이다. 사전적으로 따져보면 '극도로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 리얼리즘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그림'. 그러나 이 그림, 보기와 다르다. 하이퍼리얼리즘의 탈을 쓴 니힐리즘(nihilism·허무주의)이다. 사진을 확대한듯 한 고서화는 바짝 다가서고 꼼꼼히 보아야 붓질을 느낀다. 또 마치 금속활자같은 돌방석처럼 보이는 작품은 페이크(fake)의 진수다. 그림이나 '활자 조각'은 눈의 감각을 의심할 정도로 진짜 같아, '아 이게 뭐야' 하는 놀라움과 허무감을 동시에 전한다. 하지만 현대미술시장에서 이런 그림 흔하다. 이미 사진같은 그림은 넘치고 넘쳐 신기함이 마비될 정도다. 이 작업을 한 작가도 그걸 충분히 안다. "이 세상에 새로운 건 없다"는 것과 "더 이상의 감동을 만드는 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오는 30일부터 서울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4년만에 개인전을 여는 이진용(56)작가다. 그는 완벽하게 정제된 자신의 작품같았다. 검은 니트셔츠에 나란히 달린 단추 3개를 목까지 모두 잠근 반듯한 체형과 말간 얼굴이었다. "그는 스스로 화가처럼 보이는게 두렵다"고 했다. "거울을 볼때 수염이 있고 힘들어 보이면 내가 힘든가라는 생각이 들어 싫다"면서 "항상 노는 사람처럼, 미련한 선비처럼 보이고 싶다"고 했다. ◇반복과 반복의 에너지 극사실화처럼 보이는데, 작가는 "어떤 형상을 그리려고 한게 아니"라고 했다. 니힐리즘처럼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 물음 조차도 답을 할 수 없는, '사람이 할수 없는 일'을 한 것"이라고 했다. 아리송한 말로, 작가가 입을 열자 작품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명확하게 보이던 오래된 책들과 활자 조각이 먼지 바람이 이는 것처럼 흩어지는 형세를 보였다. '이진용:컨티뉴엄(CONTINUUM)'이라는 전시 타이틀이 답이다. '반복'은 그의 화두다. 책으로 활자로 형상이 나타났지만 이는 그저 수없이 쌓이고 쌓인 시간과 노력의 결과물로 뭉친 에너지라는 것. "사물의 본질, 진실을 그리고 싶었는데, 그걸 만질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요.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려고 하고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은 것 같은 작업이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뭘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작업한다고 했다. "일상적으로 먹고 자는 생활로는 이 같은 작업을 할 수 없어요. 사람이 할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내 작업입니다." 그는 "뭘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순간 피곤하지고 스트레스를 받는데,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알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계라는 게 너무 싫다"고 했다. 작품은 귀신에 홀린듯 나온다. 일반적으로 먹고자고놀고해서는 이런 작품이 나올수 없다고 했다. '책(Hardbacks)시리즈'는 선을 긋고, 지우고, 다시 긋고, 닦아내고, 다시 긋고, 다시 지워 시간과 색이 축적되고 누적되어 나왔다. 선 하나만 그어도 7~8시간 걸린다.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상상속의 이미지가 붓질의 반복으로 나온 것이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손으로 만져질 듯 생생하다. "매일매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1년에 열심히 한들 몇점을 만들겠어요?" 월화수목금토요일까지 중노동을 반복한다.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뭘하고 있는지를 내 스스로가 모르게" 작업하며, 오로지 일요일만큼은 '믿음의 세계'에서 쉰다고 했다. "제 책을 보세요. 따지고 보면 왜 한장한장 그려야 합니까? 왜 굳이 한 선을 숨도 안쉬고 그려야 할까요? 굳이 한장한장을 그릴 필요는 없는거잖아요?" 반문하듯 묻던 그는 다시 되돌이표로 돌아갔다. "하지만 저에게는 반드시 한장의 개념의 중요합니다. 그 작은 빈도,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수 있는 건 미세한 빈도잖아요. 그게 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반복은 그를 살게 하는 힘이다. ◇먼지 색에 매료···누적과 축적의 고행 8살 무렵, 사찰에서 그는 깨달았다. 처마위에 있는 먼지가 제일 궁금했던 아이는 처마위로 올라가 급기야 손으로 먼지를 만졌다. "몇백년된 누적된 빛, 그 색이 너무 매력적"이었다는 아이는 그때부터 "걸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여겼다. 어린시절은 기행 소년이었다. 백과사전 3개를 통째로 외우고, 교탁 옆 노란 주전자를 똑같이 그려 '천재 소년 화가'로 불렸다. 중학교 1학년때인 13세때부터 든 붓질은 44년째 날마다 이어지고 있다. 부산 동아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아크릴, 유화, 나무조각, 돌 조각, 에폭시, 꼴라주등 다방면의 작업을 했다. 관심이 가는 소재나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걸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재료나 기법을 연구했다.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제작과 파기를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시도했던 여러 경험들이 지금의 작가를 만들어 냈다. 어떠한 직업도 가져본 적 없이 화가로 살면서 부산에 5개의 작업실을 가졌고, 즐거운 놀이처럼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림말고 그가 집착하는 것은 30년 넘게 수많은 골동품과 차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집품인 목판활자와 열쇠, 화석, 책 등은 작품으로 나온다. 과거의 작가는 누구보다 잘 그리고 누구보다 잘 표현하는 것을 지향했으나 요즘은 그런 부분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수도승들이 수행을 하듯 작품 하나하나에 반복적 행위와 고도의 집중을 통해 마치 굴러오는 돌을 다시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하루 하루 날마다 같은 작업을 잇고 있다. "활자 작업은 2012년 아라리오갤러리를 나오면서 시작됐어요. 작업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 제주도에 내려가 유배하는 심정으로 2년6개월간 서랍작업을 한 이후 육지로 나왔는데, 할만하구나하는 마음의 평정심이 생겼지요." '활자 시리즈'는 2014년 학고재 상하이에서 첫 선을 보인후, 다시 작업을 거쳐 이번 전시에 180여점을 선보인다. 골동품 수집광인 그가 25년전부터 중국을 들락거리며 모아온 400~500년된 중국 목판활자를 똑같이 만들어냈다. 마치 금속활자처럼 단단해보이는 활자 시리즈는 반복과 빈도의 에너지를 전한다. 작은 활자가 모여 커다란 원의 파장을 이루며 우주를 만들어내는 듯 연출됐다. 눈이 아니라 오감으로 봐야하는 작품, 결국 작품의 메시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으로 번져나간다. "붓을 든지 44년만에 이제야 제가 해야 할일을 알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제 작품은 '막연한 설레임'으로 만드는 빅뱅입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저는 무언가를 관람객에게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마치 고분을 발굴하듯 '4년간의 고행'을 통해 나온 이번 개인전은 '시간의 먼지를' 턴 듯하다. 일반적으로 30여점을 보이는 개인전과는 판이 다르다. '컨티뉴엄'을 주제로한 '책' 연작(Hardbacks Series)과 '활자(Type)' 작업 220여점을 학고재 신관과 본관에 걸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훈련된 일이다. 특히 화가의 작업은 "천재적인 순발력이 아니라 꾸준히, 아주 미세한 빈도의 에너지가 있어야 만들어진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보여주는 전시다. 7월30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