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관장 "미술관 법인화 여부 빨리 결정해라" 국립현대미술관 새해 첫 전시가 불발됐다. 2월 서울관에서 열 예정이었던 '앤디 워홀'은 무기한 연기됐다. '외국인 관장 1호'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의 체면은 구겨졌다. 지난해 12월 취임 1주년때 앤디워홀, 리처드 해밀턴, 파블로 피카소 등 서양의 근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전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기대했던 '마리 관장표'전시는 1년간 기다린 보람도 없이 김빠진 모습이다. "임기중 목표는 계약서에 적힌대로 국립현대미술관을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던 마리 관장(51)에게 무슨일이 있는 걸까. "2017년은 본격적으로 내게 부여된 미션을 수행하겠다"고 했고, '히딩크'처럼 성공했으면 한다는 그였다. '열정의 나라' 스페인에서 온 그가 조용하다. 22일 서울관에서 마리 관장을 만났다. -'2017년과 2018년 전시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했는데, 결과는 다르다 ▲부임후 1년간 조직 체계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뒀다. 미술관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해 개선점을 제안했고, 개선된 상황이다. (지난 1월 과천관 서울관 덕수궁관 3개관을 통합, ‘하나의 미술관(원 뮤지엄)’ 으로 조직개편했다. 서울관, 과천관에 분리돼 있던 학예분야와 행정지원(기획운영) 분야를 융합해 업무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취지다.) 이제야 포커스를 옮겼다. 전시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조직과 프로그램의 질적 제고는 맞물려 있는 연계된 주안점이라 할수 있다. 전시는 관람객이 보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관람객들은 조직이 어떤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수는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프로그램이 중요한 반면 성공적으로 시행이 되려면 조직체계가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잡혀있어야 된다. 즉 전시 프로그램의 성패가 조직체계에 달려있기 때문에 지난 한해 동안은 조직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개선점을 마련하고 제안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시기였다. 2017년은 실질적인 열매, 결실을 볼수 있는 해가 될 것 같다. -전시 계획 발표에 ‘뜬구름같다’는 반응도 있었다.'앤디워홀', '이집트 전', '피카소'라니… '뻔한 블록버스터' 전시 아닌가 하는 실망이 있었다. ▲이집트 전시는 뻔한 전시가 아니다. 비서구권에서 펼쳐진 놀라운 단면을 이집트가 보여주고 있다. 뻔하다는 이유를 꼽자면 피라미드 등으로 알려진 것 때문에 편견을 가질수 있다. 이제 서구예술에서 벗어나 아시아만의 예술의 특성에 집중할 필요할 있다. (‘예술이 자유가 될 때: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1938~1965)’ 전 4월부터 7월까지 덕수궁관에서 열린다)1930년대 이후 이집트의 전위예술운동을 보여줄 전시는 이집트가 근대독립국가로 성장한 뒤 활성화한 아방가르드예술운동의 궤적을 통해 제3세계의 미술이 어떤 방식으로 서구의 예술운동과 연관을 맺고 독자적으로 발전해나갔는지를 보일 예정이다. 이집트 초현실주의 미술의 놀라움을 발견할 것이다. 기대해달라. -첫 전시로 내세운 '앤디워홀'전은 왜 무기한 연장됐나 ▲앤디워홀은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 취합해서 고퀄리티의 전시를 하려고 했었다. 앤디 워홀이 1978년 제작한 ‘그림자들’ 연작 102점을 한꺼번에 보여주려고 했다. 많은 비용이 들기 마련인데, 합리적인 비용으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적인 차원에서 부담이 컸다. 경기불황이 맞물려가기 때문에 무기 연기 할 수밖에 없었다. 알려진 것 처럼 상하이에서 순회전'이 그대로 오는 전시가 아니었다. 그 전시는 이미 1월 15일 끝나고 뉴욕 디아파운데이션으로 돌아갔다. 다시 추진할수도 있겠지만 아직 결정된게 없다. (느닷없는 폭탄발언)'피카소전'은 취소 됐다. 2018년 전시였는데, 아예 취소됐다. -이쯤되면 ‘마리관장의 굴욕‘이다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앤디워홀은 '그림자' 시리즈를 들어오는 것이었다면, 피카소전은 미술관에서 기획하는 대형 전시였다. 아쉽게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근현대미술 거장들의 전시를 하는것은 대규모 관객을 유치하거나 이미지 제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피카소전시는 알려진 그림을 가져오는게 아니라, 미술관에서 자체 기획을 해서 MMCA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진 전시를 추진했는데 어쩔수 없이 취소됐다. 하지만 얻은 교훈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어떤 부분에서 개선이 필요한지, 어떤 것을 시정해야 되는지를 알게됐다. -개선과 시정해야 되는 것은 무엇인가 ▲국립미술관으로서 한계점이 있다. 행정적인 규제로 인한 제약이 없어져야 한다. 유수의 기관과 협업을 해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행정적인 규제가 심하다. 절대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문제, 이러한 행정규제는 미술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행정기관, 공공기관의 규제다. 오랫동안 규제들이 진일보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정부 공공기관이, 해외 기관과 협업하는데 한계가 있다.현재 상태로는 국가 미술관 국가 박물관만 일을 할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한계가 있다.(한계를 강조했다) -'뭣이 중헌지'를 모른것 같다. 1년동안 뭘했나. ▲우선 추진한건 조직체계를 면밀히 살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부적인 규제등을 온전하게 보고를 받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따지고보면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을 어떤 부분은 허비하기도 하고 지연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규제를 알아야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우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피카소, 가장 대중적이면서 기대되는 전시였는데 아쉽다 ▲전시를 연기하고 취소된 건 정말 아쉽지만, 막상 그 당시에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미술관이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현실에 맞게 계획을 시정하고 변경하는 것이 관장으로서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그런 대규모 전시를 열기에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기다렸다가 재정비하고 준비해서 좋은 전시를 여는게 좋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앤디워홀 라우센버그등 팝아트 대가들, 미술사 중요한 작가들 전시를 유치하려면 500만~600만불이상이 든다. 그런데 미술관이 감당할수 있는 금액은 미화로 80만달러밖에 안된다. 수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어떻게 질 높은 전시를 유치할 것인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마리 관장은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취소된 전시도 있지만 관람객들이 매우 즐겁게 즐길만한 전시가 많다. 2017, 2018, 2019년 고퀄리티의 전시가 대기하고 있다. 4월 이집트전을 시작으로 10월 페미니즘과 연결된 '신 여성전'이 있다. 신 여성전은 역사 사학자 대중문화 작가등이 연구에 참여해서 햇수로 3년만에 준비한 전시다. 세계 곳곳도 마찬가지만 한국도 남성지배적인 사회다. 성역할이 근대 예술이나 대중문화에서 대변되는 역사로만 보여왔는데, 성 역할, 여성의 역할이 어떤식으로 변화됐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김은호·김인승·나혜석·이인성·이쾌대·장우성·천경자 등이 그린 200여점의 작품과 관련 자료를 선보인다. -굳이 지적하자면 국제적인 전시기획가로서 '마리 관장의 글로벌 컬러'가 안보인다 ▲할말이 있다. 해외 주요 미술관은 주요 전시는 3~4년전에 사전 기획한다. 우리 미술관은 1년 정도 미리 기획하는 상황이다. 다른 유수 기관들이 사전 기획한다는 걸 고려했을때, 우리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어려움이 예측된다. 네트워킹을 한다든지 해외미술관과 공동 프로듀싱을 하기까지 사전기획 체계가 셋팅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이 내가 가장 크게 힘들게 싸우고 있는 부분중 하나다. 중요한 건 우리 미술관도 3~5년 사전 기획이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는게 중요하다. -한진해운 파산으로 서울관에 주요 대형 전시로 열던 '대한항공박스프로젝트'가 폐지됐다. ▲ 미술관의 재원 마련하는 것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재원의 출처를 다양하게 하는게 중요하다. 한 곳에 의존하는게 아니라 후원처의 상황에 따라 계획하는게 중요하다. 향후에는 자체적으로 수익 위주로 돌아갈수 있게끔 자유롭게 전시를 기획하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시행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런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게 해야한다. 2016년에 목표를 가지고 일했던 것이 비용이 많이 들지라도 모두가 즐길수 있는 대중문화, 대중예술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미술관 수익을 위해, 또한 기부나 후원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나 ▲ 사실. 수익을 다양화할 여러방법이 있다. 감히 경험이 많다고 이야기할수 있다. 내가 이전에 일하던 기관에 공공섹터 부분에서 큰 경제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타격으로부터 공공기관을 보호하는 법을 체득했고 그런 방법을 알고 있다. 큰 해결책은 민간재원을 통해서 기관을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보호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단지 공공재원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공공재원 민간재원을 섞어서 해하는데, 한국은 잘 안되고 있다. 공공기관이 결국 추구해야할 지향할 미래상은 민간공공재원을 섞는거다. 후원자를 늘리고 티켓 할인 멤버쉽 도록판매등 수익원을 늘리고 재원 활성화 방안은 많이 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 이건 이미 해외유수 기관에서 행하고 있는 기법들이고 솔류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좋은 해외 사례들을 차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술경영지원센터도 이것과 관련 세미나도 열고 있는데 정부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재원 마련에 노력을 기해야 한다.(미술관은 '관장은 정기적으로 후원회를 미팅하고 기업의 오너등을 자주 만난다고 했다.) -조직개편에도 반영됐는가 ▲ 이번 개편을 통해서 재원문제를 담당하는 전담부서를 신설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고객 서비스 및 공공프로그램 연구·출판·미디어·커뮤니케이션 기능 강화를 위해 기획운영단에 고객지원개발팀과 소통홍보팀을, 학예연구실에 연구기획출판팀을 신설했다. 고객지원개발(디벨로먼트)팀은 패트론 관리부터 후원 마케팅을 담당한다. 경제가 불황이라고 하지만 유럽에 비하면 한국경제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는건 희소식이다. 경험은 많지 않지만 미술관은 현재,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늘 들어서 지겹겠지만 미술계 '히딩크'로 불린다. 기대감이 크다는 이유다 ▲ 하하. 하지만 난 히딩크와는 다르다. 아시다시피 히딩크 감독은 누가 선발을 뛸지 바로 지명을 했는데, 미술관은 복잡 다난한게 있어서 관장이 직접적으로 간여하기가 어려운점이 있다. 히딩크는 행정규제가 없이 자유롭게 선수를 기용했다는 점이다. 그 큰 차이점을 알아달라. -문체부 산하기관이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 법인화를 할지 말지를 빨리 결정해달라는거다. 미술관 법인화는 필요하다. 문체부와 정부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을 법인화할지 안할지에 대한 정확한 결정을 내려달라. 하려면 구체적인 계획을 빨리 수립해야 한다. 안할거면 상황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 (2009년부터) 법인화를 하자고 이야기는 나왔는데 모호하고 구체적이지 않다. 쉬운건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미술관의 현안이자 이슈다. 현재 미술관이 주요한 변혁의 때를 맞아서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 이런 흐름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 다이내믹하고 활발하고 신속한 변화를 이끌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속한 빠른 변화는 성급한 결정이 아니라 명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실질적인 결과물을 내는 거다. 왜냐하면 '마리 관장이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는 여론이 있기 때문이다. -규제에 발목이 묶여 있다는 것인가 ▲ 미술관은 문체부 산하기관이다. 문체부가 주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물론 현재 정치적인 상황이 어렵고, 정리되고 기다려야 되는 시기가 있다는 건 이해한다. 법인화는 복잡한 문제이니까. 하지만 현재와 같은 규제나 제약이 존재하는 한 내가 취임 당시에 계약한 주어진 미션을 완수하는게 어찌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다시 한번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이런 행정적인 규제와 제약속에서 일하지 않았다는 점을 한번 더 말하고 싶다. -문체부 반응은 ▲묵묵부답이다. 내가 보니 법인화 있어서는 충분한 소통을 하면서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서 나아가는 것 같지 않다. 마치 '금기어'처럼 느껴진다. 생산적인 논의의 결과물이 안나온다. 문체부가 정부를 좀 더 설득을 하고(법인화가 무엇인지, 왜 좋은지, 어떤 의미를 띄게 되는지)설명할수 도 있는데(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게 아니니까)그런 부분에서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침묵) 사실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변화될 부분이긴 때문에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건 국회나 공공기관에서 예산을 1년 단위로 주는데, 이 부분도 공공재원으로 부터 독립적인 형태로 나아가가서 민간재원을 확대할수 있는 방향으로 전진해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목표중의 하나다. 그래서 법인화가 중요하고 그 과정이 될 것이다. -미술관 법인화 왜 해야하나 ▲행정적이거나 조직적인 제약들로 훨씬 자유로워질수 있다. 자유는 경제적인 것과 독립된 기관으로 나가는 조직적인 자유를 포함한다. 물론 법인화가 만병통치약이다 말할수 없지만 미술관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80%를 해결할수 있다. -법인화 문제, 언뜻 들으면 핑계라고 할수 있다 ▲아 분명한 건, 행정적인 규제와 제약이 있다고 해서 관장으로서 받은 미션들을 성공할수 없다거나 성공하지 못하게 놔두는건 아니다. 오히려 미술관의 확신에 찬 계획을 내부와 외부 관계자를 설득하고 한데 모을수 있어야 한다.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고 대중에게도 미술관을 설득하는게 중요한 부분이다.어쨌든 외국인 관장으로서 주어진 미션이 있다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변화의 초점에 맞춰서 계속 나아갈 것이다. -정치적으로,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나라가 어려운 시기다. ▲그럼에도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 중요한 기회의 때에 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술관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아시아에서 1위 미술관을 지향하는데 그 목표에는 근접해 있다. 고민해봐야 하는 질문이 있다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심오하게 변화를 꾀하고자 하느냐’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그는 별자리가 황소자리라고 했다.(고집이 세다는 의미로 들렸다) 또 자신의 '마리' 이름을 한자로 변환하면 ‘말의 힘’ , ‘마력’이라고 설명했다. 마리 관장은 "현재 힘든 상황이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포기하지 않고. 나의 갈길을 집중해서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 이름이 마리, 마력인 만큼, 미술관에 변화를 이끄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1년전 '안녕하세요'를 하던 마리 관장은 이제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그는 "앞으로 서울시립미술관장, 한국미술협회장,한국화랑협회장들을 만날 것"이라면서 "늘 열린마음으로 미술인들과 의견을 나누고, 협력할게 있으면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조만간, 몇 달안에 깜짝 놀랄만한 한국어를 구사할 것"이라며 "할일이 많다"며 활짝 웃었다. ‘외국인 관장 1호' 마리 관장 임기는 2018년 말 까지다. 그가 임명됐을때 ‘한국말, 한국현대미술을 이해할 듯 할 때쯤 임기가 끝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관, 서울관, 덕수궁관의 3관 체제로 2018년 청주관이 개관하면 4관 체제의 거대한 조직이 된다. 잠자던 '미술관 법인화' 문제를 깨워야 할때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통령 대행 체제이고, 문체부도 장관없이 대행 체제다. [email protected] 2017/02/23
국격을 대변하는 그림…'한국미술사의 절정' 절정(絕頂). 최고의 경지에 달한 상태를 뜻한다. 절정은 도전이고 파괴적이다. 절정에 오른다고 하고, 치달은다고 한다. 절정의 끝은? 결국 추락이거나 꺾임이다. 지난해 연말, 절정으로 치닫던 탄핵정국이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가운데, 주춤하던 미술시장에 '미술품의 절정'을 맛볼수 있는 전시가 개막한다. 원래 작년 11월 30일 하려고 했지만 '촛불혁명'의 시국때문에 미뤄진 전시다. '한국미술사의 절정'전이 15일부터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린다. 유독 '절정'이라는 글자를 키운 도록도 눈길을 끌지만, 전시 제목에 '절정'이라고 단 것도 독특하다. 노화랑 노승진 사장(69)이 '야하다'고 하며 '절정'을 '클라이막스'라고 영어로 말하자, 전시를 기획한 미술사학자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65)가 '오르가즘'이라며 껄껄 웃었다. 제목만 보면 섹시한데, 알고보면 품격있다. 다른길을 가던 노 사장과 이 교수는 미술인들로서 의미있는 재능기부에 나섰다. '가장 한국적인 명작'이란 대의 아래 지난 13년전 2004년 의기투합했다. 당시 노화랑에서 '20세기 7인의 화가들'이란 전시를 하면서다. '가장 한국적인 명작' 2탄격으로 기획한 이번 '한국미술사의 절정'전은 40년 전통 노화랑의 '문화 사회공헌'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명작'을 선보인다는 취지로 마련한 이 전시는 상업화랑이라는 노화랑의 면모를 달리하고 있다. 화랑은 그림을 파는 곳이지만, 이번 전시는 판매하고는 거리가 멀다. 모두 개인소장자들이 대여한 전시로, 우리 한국미술을 남녀노소 누구나 가까이서 볼수 있게한다는 취지다. 관람료도 없다. 이태호 교수는 "공사립미술관에 소장된 작품 못지않은, 개인 소장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전시장을 채운다"며 "16점으로 꾸민 소규모이지만 한국미술사의 절정에 걸맞는 대형전시"라고 자부했다.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이렇게 '호들갑일까'. 전시에 나오는 18세기 달항아리, 겸재 '박연폭도', 단원 김홍도의 '죽하맹호도', 이중섭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 박수근 '독서하는 소녀', 김환기 '산월'과 '무제'등 전시작품 총 16점은 국내 명품중의 명품이다. 모두 개인소장품으로, 미술관 박물관도 아닌 화랑에 대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알차고 학구적인 전시기획과 40여년 전통 노화랑의 신뢰 덕분이다. 그 마음을 아는 노 사장은 소장자들을 위해 보험가액만 400억대의 보험을 들었다. 국내 상업화랑에서는 이례적인 일로, 노화랑은 "전시기간 작품의 안전을 위해 야간 경비도 세울 것"이라고 했다. 일단 전시는 지난 300년간 한국미술사의 대표 거장 다섯명을 뽑았다. 민족의 자존감으로 내세울만한 18세기 조선미(겸재 단원)와 그 조선미를 토대로 삼은 20세기 세 화가(이중섭 박수근 김환기)가 주인공이다. 전시 간판은 겸재 정선이 말년인 1750년대 그린 '박연폭도(朴淵瀑圖)' 다. 정선의 3대 명작(금강전도·인왕제색도·박연폭도)가운데 유일한 개인소장품이다. 국내 전시장에 이 그림이 나온 것은 7년 만이다. 이태호 교수는 "30년전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그 폭포소리의 위력에 그만 뒤로 넘어질뻔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고, 소장자는 '지금도 여전히 폭포물보라에 온몸이 젖는 듯하다'고 한다. 과장같지만, 그림을 보면 문외한이라도 좀 이해가 된다. 시원하게 쫙 흐르는 폭포가 압도적이다. 우레와 같다는 폭포 소리의 리얼리티를 적절히 이미지화한 것으로 현장에서 온몸으로 느낀 순간의 감명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세로로 1m가 조금 넘는 그림의 실제 길이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성미 넘치는 겸재의 박연폭도는 '인왕제색도' 보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걸작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한국미술사에서 회화예술의 최고 절정을 빛낸 작품으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도 일컫지만 현재 100억대에서 300억대까지 작품값이 논의중으로 알려졌다. 호랑이보다 더 사실적인 단원 김홍도의 '죽하맹호도'도 뽐낸다. 송하맹호도(삼성미술관 리움소장)에 비해 호랑이의 크기가 작지만 동작의 위세와 섬세한 묘사가 빼어난 걸작이다. 소리없이 움직이는 꼬리와 등을 세워 경계를 취한 호랑이의 자세는 생동감 넘친다. 2011년 '화원-조선시대 화원대전'(삼성미술관 리움)에 출품되어 주목받았다. 그림 상단 오른쪽 공간에는 '세상 사람들이 간혹 호랑이를 그릴 때 개처럼 비슷하게 될까 우려한다. 이 그림은 도리어 진짜 호랑이가 자괴감을 갖게 한다'는 자신감이 써있다. 또 '조선이 서호산인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리고, 수월옹 임희지가 대나무를 그리고, 능산도인 황기천이 평을 쓴다'고 밝혀놓았다. 대나무와 호랑이를 짝지은 죽호도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소재다. 이태호 교수는 "그림 화평에 보면 김홍도 앞에 '조선'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미루어 '죽하맹호도'는 통신사와 관련하여 일본에 건너간 그림으로 짐작되지만 그런 내력을 밝혀줄 근거를 찾지 못했다"며 "본래 호랑이 그림은 궁중의 세화로서 악귀를 막는 벽사를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는 2점의 백자 달항아리도 출품된다. 한점은 이 48.2cm, 지름 50cm의 균형잡힌 몸매를 과시하는 대호다. 살짝 주저앉은 둥근 형태에 연푸른 기운도 감도는 유백색이 단아하며 아름다운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건너간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2007년 3월 이 달항아리가 환수문화재로 귀국하면서 주목받았다. 서울 청담동 프리마호텔 이상준 사장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받아, 프리마호텔의 유명브랜드가 된 백자대호다. 다른 한점은 47cm높이로 프리마호텔 소장품보다 일그러짐이 심하다. 굽받침을 보완해서 세울 정도로 아랫부분이 심하게 주저앉았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 감상 재미가 있다. 이태호 교수는 "백자 대호를 보면 어릴적 끌어안았던 어머니 엉덩이 같은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면서 "달항아리야말로 우리나라 문화재중 가장 한국적이고 조선미의 대표작"이라고 극찬했다. '백자사랑'하면 김환기를 빼놓을수 없다. 김환기는 도자사 연구자인 고 최순우 관장이나 정양모 관장보다도 제일 먼저 달항아리를 높이 평가할 만큼, 그 가치를 일찍이 예찬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에는 '이조 항아리'라는 시를 통해 달항아리를 노래했다. '조형미의 극치이자 조형의 전위'에 위치한 예술이라며 달항아리를 극찬한 김환기는 자신의 작품에 항아리를 녹여냈다. 1950~1960년대 그림에 달항리는 누드여인과 등장하기도 하고 달이나 산, 구름, 매화등과 조화를 이루며 늘상 주요자리를 차지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김환기의 작품은 5점중 1960년경 제작한 '산월'이 눈길을 끈다. 두툼하고 거친 질감의 유화작품으로 커다란 블루문을 담았다. 컴퍼스가 아닌 손으로 둥그스름하게 그렸기에 완벽한 원형이 아니어서 오히려 친근하고 약간 좌우로 넓적한 모양새는 김환기가 사랑했던 백자항아리의 넉넉함을 연상시킨다. 훤한 보름달도 푸르게 그린, 푸른 색감을 주조로 한 화면은 미묘하면서 신비롭다. '흰소' 이중섭은 이번 전시에서 동물과 사람이 없는 봄풍경 그림으로 색다르게 다가온다. 1950년대 중반 통영시절에 남긴 그림으로 그동안 '벚꽃과 새'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그림이다. 이태호 교수는 "이그림을 자세히 보니 벚꽃이라기보다 핑크색 꽃잎과 함께 자란 연두색 새싹들이 복사꽃을 닮아 있다"면서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 제목을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라고 고쳐 사용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지난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서 소 그림을 제치고 '유화 작품중 가장 인상깊은 작품'으로 꼽혔다. 현재 이중섭전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전시중이지만, 이 그림만은 서울에 남아 노화랑에 전시하게 됐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작품은 1950~60년대 전성기의 걸작 소품들이 나왔다. 특히 1955년작 '독서하는 소녀'는 박수근의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붉은 저고리에 짙은 갈색치마를 입고, 그 아래는 흰 버선이 살짝 보인다. 우툴두툴한 백새조 질감 바탕에 올린 색이 굉장히 화사하다. 색채화가로서의 박수근을 새롭게 보게 한다. ◇달항아리부터 김환기 추상까지 관통하는 건 '조선미' 이번 전시는 조선후기 '조선미'와 근현대 '한국미'를 한자리에 놓고 한국미술의 동질성, 정체성을 확인해보려는 속 뜻이 깔렸다. 겸재, 단원, 달항아리에 이어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의 작품에 조선미, 한국미의 미감이 자연스럽게 스미듯 이어진 건 중국과 일본에서도 따라하지 못한 우리 근현대미술의 백미이자 독보적인 한국미술이라는 자부심이 담겼다. 지난 300년은 한국미술사에서 그야말로 절정을 창출한 시기였다. 한국미술사의 전체 흐름중에서 가장 조선적인 것, 혹은 한국적인 것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가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현재 최고의 값을 형성하고 있는 점으로 볼때 우리나라 문화사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유산으로 최고의 부른 이룬 시기임이 틀림없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 조선말기와 일제 식민지 기간이 커다란 공백기로 남는다. 우리가 겪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기준삼아 돈으로 환전한다면 민족적인 재산을 엄청나게 잃은 시기라 할수 있다. 이 혼란기를 딛고 1950~70대에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가 한국미술사의 절정으로 제 2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절정을 끝으로 미술사는 하강기다.1960년대 70년대 민주화 운동과 군파시즘 시절,새로운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 앵포르멜이나 추상주의 단색화물결이 이어졌다.1980년 5월 민주화항쟁이 계기가 되어 민중미술이 맹위를 떨쳤고, 2000년대초 팝아트와 극사실주의 대세로 미술시장을 흔들었다. 이후 다시 단색화 물결로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해외에 알리고 있다.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어찌보면 우리시대는 절정을 찍은후 지금은 하강기의 어느 지점일듯 싶다.이는 한국사회가 퇴행 몰락한다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기 때문"이라며 "작년부터 열리고 있는 광화문 광장의 열기를 호흡하며 과연 우리가 이 하강기를 딛고 또 하나의 절정기를 맞이할까를 그려보곤 했는데,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지금 이 같은 우리 '한국미술 절정'의 작품들을 톺아보면서 민주주의 사외화 문화의 격조가 상승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번 전시 놓치면 안된다'고 강조하는 이태호교수에 물었다. ◇왜 꼭 봐야하는가? "국립현대미술관은 '겸재'전을 안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김환기'전을 안한다. 근현대가 나눠져 서로가 다른 것은 안본다. 이렇게 양쪽에서 분리해서 할 전시를 상업화랑 노화랑에서 묶은 것이다. 18~19세기, 20세기 미술을 통합한 전시이기도 하다. 한국 미술사는 물론 국내 정치현실이 하강기이지만 우리 민족의 국격이 이 정도로 훌륭하고 품격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이번 전시 작품은 국격을 대변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꼭 봐야 한다." 전시는 28일까지. [email protected] 2017/02/12
김용익 "'땡땡이', 데미언허스트보다 내가 먼저다" 지난 9월 1일부터 11월 6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40년 화업 회고전을 연 김용익 화백(69)이 다시 상업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일민미술관 전시는 70년대 단색화 시기부터 2010년대 공공미술 이후까지 이어지는 그의 작품 100여점을 선보여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미술가로서 고뇌했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어 주목받았다. 특히 40년 남짓 진행해 온 작품 활동의 결과를 수장한다는 취지의 '관 시리즈' 신작을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시신을 염하고 장례를 치르는 듯한 작품은 관 형태의 나무 상자에 봉인하고 그 위에 고인의 명복을 비는 도상과 글을 덧붙이는 제의적 행위에 집중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회고전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신작전이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했다. 더욱이 신작은 '땡땡이' 시리즈다. 이미 90년대 초 태동한 작품이다. 국제갤러리는 "지난 2년간의 신작 30점을 선보인다"며 "단색화 이후 세대의 실천적 미술과 경향을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단색화 흐름을 탄 상업화랑의 발빠른 마케팅으로 보였다. 지난 10월 열린 KIAF에 국제갤러리에 출품된 '땡땡이' 작품은 인기를 끌었고 팔려나갔다. 그는 "한두 달 전부터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다"면서 "감개무량하지만 느닷없이 온 행운이라 불안하기도 하다"고 했다. 22일 김용익 화백을 전시장에서 만났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했다. 젊음과 늙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스키니한 자주색 바지와 달리 웃옷은 정장 느낌이 났다. 짙은 회색 목폴라와 재킷엔 자주색빛 행거칩이 꽂혀있다. 이번 전시는 메이저 화랑에서의 개인전은 생애 처음으로, 갤러리 전시는 10년만이다. 2015년부터 2016년에 제작된 '모더니즘의 묵시록', '얇게 더 얇게', '20년이 지난후'등 90년대 땡땡이 연작의 소회를 드러낸 1층과 달리 2층에는 '유토피아'연작이 걸렸다. 땡땡이 색감이 화사하고 부드러운게 특징이다. 그의 작품설명은 미술과 철학을 넘나들었다. '땡땡이 시리즈'에 대한 '우문현답'이 이어졌다. ▶김용익 화백:"'유토피아' 작품을 통해 아련한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고단하고 힘들고 울화통이 터지고 분노에 가득찬 삶을 대처하는 방법은 터트리는 방법이다. 뒤집어 엎는 것, 그것은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취했던 태도다. 도저히 불가능한 세계를 꿈꾸어보는 것, 그것을 '유토피아적 아방가르드'라고 부른. 21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꿈꾸었던 세계가 완벽한 꿈으로서 이상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다. 유토피아는 이루어지질 수 없다는 것과, 또 고단한 삶에서 견디기 위한 방법으로서 이상향을 꿈꾸어보는. 좌절과 절망을 교묘하게 겹쳐진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게 이번 작품의 의도다." ▲기자: '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김용익 화백:"원의 의미? 하하. 일단 그리기가 쉽다. 간단하지만 쉽고 완벽한 형태가 나온다. 왜 원을 사용하게 됐는가? 두가지 의도를 가지고 했다. 처음엔 페인팅을 해놓고, 그걸 원으로 가렸다. 또 나무판에 페인팅을 마치 추상표현주의 잭슨폴락이나 드쿠닝 처럼 흉하게 모사하고 구멍을 뚫어버리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묵시록'이 제목으로 어울릴 정도로, 새까맣게 원으로 가린적도 있다. 왜? 원과 원 사이에 구멍으로 뒤가 살짝 보인다. 제 작품에서 예술가로서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완벽하게 다 가리는게 래디컬하게 나가는게 아니라, 항상 못 미친다는 것, 유보조항을 달고 있다. 과격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보여줬던, 전복적이고 폭력적 아방가르드가 아닌 예술가다. 거기서 나온 원이 '전유'되면서 변주를 보이고 있다." ▲기자:'데미헌 허스트 작품 같다'는 인식이 있다. (허스트는 90년대 후반부터 매튜 바니와 더불어 세계 예술계 최고의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색색 땡땡이'시리즈는 한점쯤은 소장해야 컬렉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2008년에는 세계영향력있는 아티스트1위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김용익 화백:"너무 나이브한 질문이다.(그는 살짝 발끈했다) 데미언 허스트하고 아무 상관없다. 그 사람은 동그라미에다 물감을 기계적으로 몇 %로 섞은 원색이다.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중요한 것은 데미언 허스트보다 내가 먼저했다는 거다. 나는 89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기자: 구사마 야요이, 데미언 허스트등 왜 화가들은 땡땡이를 그리는가. ▶김용익 화백:"영원한 유행이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누구랑 비슷한 얘기는 상당히 나이브한 얘기다. 나의 맥락을 읽어줄수 있는게 중요하다. 결국은 데미언 허스트보다 먼저했다는 거다.(그는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데미언 허스트보다 내가 먼저했다." ▲기자: 작품에 연필로 휘갈기듯 사인이 되어있다. 이유가 있는 건가. ▶김용익 화백: "저안에 있는 어쩔수 없는 본능적인 것,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를 더럽히는 의미다. 나의 예술에 대한 원상흔 같은 것이다." ▲기자:(2층 전시장 벽 구석엔 연필로 그린 그림이 있다) 왜 이걸 그린 건가. (땡땡이와는 다른, 구름과 나무가 있는 풍경그림이다) ▶김용익 화백:"2016 11월 22일 벽에 그렸다. '잉여 욕망'이다. 사실 작품을 한다는 것 자체도 발표한다는 것 자체도 이미 라캉 식의 얘기로 하자면 '상징 질서'에 속하는 거다. 내가 작품을 해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상징 질서와 규율과 훈육 으로 이뤄진 세계속에 나를 올려놓는 것이다. 밑바닥에는 '상징 질서'속에 올라올수 없는 욕망이 있다. 담기지 않은 잉여욕망이 없으면 개별 인간들의 삶도 불가능하다. 예술가는 더 심하게, 전시라는 상징틀로 잉여욕망이 많은 사람이다. 그 잉여 욕망의 그 끄트머리를 제시해본 것이다. 이것이 무엇이냐 물어도 대답 안 할 것이다." ▲기자:'미술이 창작의 시대가 아니고 편집의 시대'라고 정의했다. 지난 회고전에 수장의 시대로 마감했다. 그런데 이번 신작은 90년대 땡땡이로 회귀했다.무슨 이유인가. ▶김용익 화백:"90년대로 전유했다는 것이다. 옛날 작업을 재전유하고 있다는 프로세스, 현실이 중요한 것이다. '의미 없는 옛날 작업의 반복이네' 이렇게 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의미가 있는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다. (김화백이 흥분감을 보였다. 큐레이터가 치고 들어왔다) ▶국제갤러리 전민경 팀장: "이번 전시와 지난 회고전은 다른 접근이다. 광주·부산비에날레에서 각국 미술계 관장 큐레이터들이 와서 단색화 이후의 세대 작가로서 김용익의 작품을 보면서 역사성을 읽어보게 되고, 원자체가 갖는 의미, 재전유라는 개념들이 서구에서는 익숙한 개념과 연결이 됐다. 이해가 됐고 공유가 된 지점이 컸다. 개념적인 지점, 평면회화의 이 시기에 연작을 더 보여준다는 의미가 크다." ▶김용익 화백:"아, 저 말을 하니까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화중의 하나가 '예술은 진보하고 혁신하고 발전하는 것'이라는 것은 20세기 만들어진 모더니즘 신화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느다. 예술은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 시대착오를 통해서, 시대착오가 진보일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또 필요하다. 세상이 바뀌면, 누군가가 앞서가지만 돌아보면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다. '시대착오', 20세기 굳어진 수렴되지 않은 지점이 있다는 것을 나는 내면화 시키고 있다.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 다시 말하자면 "그래서 어쩔래?" "그런데 뭐가 문제야?", 예술은 아나크로니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수 있는 거다. 그게 내 대답이다." 그는 이번 신작은 "땡땡이 그 자체가 아니라 조합, 패턴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했다. '재전유'를 강조했다. "진보와 새로움은 모더니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편집이라는 말에 나온다. 그동안 글을 많이 쓰고, 책도 많이 썼다고 했다. ▶김용익 화백:"창작의 불가능성, 창작은 사실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 작가의 경우 자기 복제의 연속으로 이뤄지는게 창작의 일부다. 아무것도 없던 것에 새롭게 이뤄지는 것 창작은 사실상 말자체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예술에 대한 내 신념이다.오래전 부터 글을 썼다. 창작의 불가능성에 대한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 있다." (다시 큐레이터가 설명했다) ▶국제갤러리 전민경 팀장: "이전에 '원'이 들어간 작업은 사회비평적인 성향을 풍긴다. 흠집내기, 외부에서 폭력을 가하는게 아니라 균열을 통해서 뭔가를 비틀어 보는 개념이라면, 이번 '원'의 개념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유토피아'라고 한 것 같다. 차별화된 지점을 봐줘었으면 한다." ▶김용익 화백:"나를 조현증 환자로 보면 된다. 왔다갔다 하는 사람으로 보면 된다. 질문에 갇히면 안된다.무시하고 나가야 한다. 조현증처럼…그 질문에 갇혀서 설명하려고 하면 안된다. 그러면 예술가는 껍데기밖에 안된다." ▲기자: 스스로 개념미술가로 정의하고 있으니까 개념을 명확히 알고 싶고, 설명을 해달라는 얘기였다. ▶김용익 화백:"나한테 미술비평가나 이론가를 기대하면 안된다. 납득이 안가면 안가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진행되면 된다. 내가 올마이티도 아니고…, 하지만 도전적인 질문은 자극적이고 좋다. 이런 논쟁을 즐긴다. 대학에서 오랫동안(30여년간)학생들과 생활했다. 가장 못견디는 것은 아무 질문도 없다는 것이다. 도전적인 질문이 나와야 재미있고, 무시하고 선생의 권위를 무너뜨려야 좋은 것이다." ▲기자:그동안 단색화에서 민중미술로 공공미술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김용익 화백:"그런 질문 많이 받았는데, 이제 너무 피곤하네, 자료로 참고해달라." 그는 질문을 할때마다 가까이 다가와서 한쪽 귀를 바짝 댔다. ▲기자:귀가 안좋으세요? ▶김용익 화백:"왼쪽이 안들린다. 오래전에 병을 앓아서 오른쪽도 조금 들린다." 이번 김용익의 국제갤러리 개인전은 그의 모습처럼 반반이다. ‘가벼움’과 ‘얇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신작들은 얇은 질감과 가벼운 색채로 재전유됐다. 이전 비판적이던 '모더니즘의 묵시록'은 시대착오가 됐지만, 비판적 서사는 다시 모순된 유토피아를 꿈꾼다. 여유와 여운이 주는 나이탓일 수도 있다. 시대착오가 진보일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 '틀린 것이 옳다'는 모순이 예술가 심보로 보인다. ‘밝고 가뿐함’과 ‘아련한 공허감’이 공존하는 전시다. ▲기자:그렇다면 '김용익의 땡땡이'는 무엇인가. ▶김용익 화백:"무엇이냐고 물어봤더니 아무 대답도 안하더라. 이게 내 답이다. 하하하." 팔순에 봄날을 맞은 단색화가들처럼 상업과는 거리가 멀었던 칠순의 김용익 화백도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몰라보거나 잘 보지못했던 '김용익 땡땡이의 반란'이다. 이 전시 이후 해외 전시에 잇따라 초대됐다. 런던과 서울, 상하이에서 열린 아트페어에서 솔드아웃 여세를 몰아 12월에는 미국 마이애미 아트바젤에도 나간다. 내년 5월에는 뉴욕에서 개인전도 예정돼 있다. 전시는 12월 30일까지. [email protected] 2016/11/22
'숯의 화가' 이배 "가난해서 택한 재료, 이젠 유럽서 우리문화 환기" 바베큐를 굽거나, 천연 가습제로 쓰는 일상용품인 '숯'의 위대한 변신이다. 김춘수의 시 '꽃'처럼 '다만 새까만 탄소 덩어리에 불과했던 숯은 화가의 손이 닿자 예술'이 됐다. '숯'이라는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이 독특한 작품은 유럽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파리 페르네브랑카 파운데이션(2014), 생테티엔 현대미술관(2011), 베이징 투데이 아트미술관(2009)등 프랑스 뉴욕 중국 등 유수 미술관에서 50여회 초대전이 열렸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며 1995년 국내 미술계에 소개된 작품은 2000년 가장 권위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2013년 한국미술비평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하며 한국 화단에서도 인정 받았다. 지난해에는 유럽 최대의 동양예술품 박물관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숯’이라는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을 통해 ‘한국 회화’를 국제무대에 선보이며 가장 ‘동양적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 도불한 후 파리, 뉴욕, 한국을 오가며 활동 하고 있는 이배(60 본명 이영배)화백이다. 이 화백은 지난 10여년 전부터 최근까지 검정과 '크림 빛' 흰색의 서체적 추상회화들을 주로 선보여왔다. 2000년대 초 '숯' 자체를 이용한 재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검은 숯가루와 숯덩어리를 공중으로 던지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고, 그 이후 아크릴 미디엄과 검은 안료를 사용해 밀랍을 연상시키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입체적인 회화를 선보였다. 압권은 숯을 잘라 캔버스 화면에 붙이는 ‘이수 뒤 푸'(Issu du Feu)다. ’불의 근원'이라는 뜻의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절단한 숯 조각을 나란히 놓아 접합 한후 표면을 연마하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수백개 숯의 단면이 화면을 가득 메워 다양한 방향의 각도에 따라 각각 다른 빛으로 반짝인다. 마치 숯 덩어리 묶음 작품을 단면으로 잘라놓은 모습을 띈 것 같기도 한데 나무 결 같기도하고, 나무테 같기도 한 세밀하고 섬세함이 돋보인다. 또 숯가루를 짓이기고 아크릴을 녹여 화면에 두껍게 붙이는 '랜드 스케이프'(landscape) 시리즈도 인기다. 숯의 본질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다양한 조각적 형태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아크릴 미디엄이 섞인 숯가루로 모티브를 그린후 그리는 과정을 반복하면 2차원의 단순한 평면이 아닌 3차원적인 입체감으로 조용한 울림을 선사한다. 또 소용돌이같기도 하고, 떠다니는 부호 같기도 한 서체같은 추상화는 개념에 집중한 듯한 시간의 깊이와 여유가 느껴진다. '숯의 화가'로 유명하지만, 처음부터 숯 작업을 한 건 아니었다. 물감을 버리고 '숯'을 재료로 선택한 건 가난 때문이었다. 홍익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대 프랑스로 건너갔다. 1991년 '소나무 협회'를 창립하는등 화단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지만 경제적으로 힘이 들었다. 물감 살돈이 늘 부족했다. 과거 그의 작품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쏟아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층층히 유화물감을 축적시키는 작업이었다. 당시 그는 유화물감과 캔버스등의 과중한 재료비를 감당해 낼 길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물감대신 목탄으로 이것 저것 드로잉 하는 것에 만족하는 상황에 이르렀을때 우연히 그의 작업실 근처에서 헐값으로 판매하는 숯포대를 발견하면서 눈이 떠졌다. 이 화백은 "어릴때부터 그림을 배우면서 뎃생을 한다던지 할때 주로 목탄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런 기억의 한 일부분으로 숯이 나한테 첫번째로 관심을 끌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숯이 어떤 화학적인 재료가 아닌 자연으로부터 왔다는 것과 어릴때 시골(경북 청도)에서 태어났고 성장하며 자연에서 자라왔던, 성장기 속에 잠재해있던 감성이 잘 만난 것이라고나 할까요." '한국인'이라는 원천을 일깨우며 이배를 일으킨 숯은 이배와 함께 부활했다, 검게 타버린 숯의 소멸에서 영원으로 나아갔다. 그는 "숯은 모든 물성, 모든 물질의 마지막 모습"이라며 "검정색의 깊이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숯은 얼핏보기에 아주 빈약하고 상당히 하찮은, 우리의 일상에서 늘 볼 수있는 재료입니다. 이 하찮고 일상적인 하나의 재료일지라도 숯에 어떤 예술적인 감성을 넣었을때 그것이 역동적으로 상당히 화려하고 아주 부유하고 굉장히 찬란하게 발광하며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숯'을 사용하기 시작한 초창기 관심은 우선 사람의 인체였다. 메마르고 접착력이 없는 숯으로 화면위에 인체를 그려내는 것은 수십 번 반복되는 덧칠을 요구하는데, 덧칠과정에 숯가루를 접착시키기위한 방법도 고안했다. 송진으로 된 아교나 수용성 미디엄을 사용하게됐다. 이 접착용제의 사용으로 숯이 무엇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화면에 직접적으로 붙게 되어 스스로 의미체로 탄생했다. 숯 조각 하나하나를 붙이는 일은 엄청난 노동과 끈기를 요하는 작업이다. 특히 2000년에 나온 숯 조각 하나하나를 붙이는 ‘이수 뒤 푸' 시리즈는 노동 집약적이다. "바베큐용 숯의 절반을 쪼개어 그 절반을 캔버스 화면에 마치 모자이크를 붙이듯하는 이 작업은 오랜시간이 걸립니다." 작업을 하다보면 '숯 검정'이 되기 일쑤다. 단순하게 붙이기만 하는게 아니다. "저는 이 숯을 어떻게 붙이느냐를 계산합니다. 숯이 가지고 있는 특성, 나무가 가지고 있는 재질과 마지막으로 남은 탄소의 재질, 효과등을 생각해 모양에 따라 퍼즐을 맞추듯이 붙여나가지요. " 그는 작업을 하면서 "카오스를 정렬한다"고 했다. "큰 의미에서 보면 숯은 자연으로부터 왔고, 굉장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카오스적인 재질을 갖고 있다"면서 "이런 카오스적인 재질을 내 생각과 내 개념을 어떻게 잘 접목시키는가를 퍼즐처럼 맞추는 게 작업의 의미"라고 전했다. 숯은 상징적 의미가 강할 뿐 아니라 고유한 한국문화를 재발견하게 하는 재료다. 이 화백 작업에서의 숯은 일차적 질료외에 검정이라는 동양적 감성을 2차적 질료로 아우르고 있다. 그는 "모든 색을 포용한 검은 색에는 한 가지의 검은 빛깔이 아닌 백가지의 색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검정색,흑백의 작업이지만 '단색화가'라는 인식을 허문다. "숯은 사실 단색으로 보이지만 숯에는 수 많은 색깔이 있고 거기에는 색의 수 많은 다양성이 포함 되어있습니다. 숯이 불로 부터 왔다라는 그런 의미를 더 생각하면 모든 색을 흡수하고있는 것이 숯이고 또 숯 그 자체만으로도 검정톤의 수 많은 뉘앙스가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숯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숯으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숯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이것을 가지고 예술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블란서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예술은 현실과 이상을 엮는일'이라고 했는데 그말에 공감합니다." "화가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선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예술은 우리의 연약한 상상력을 북돋는 일'이기도 하지요.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예술이 무엇인지 알기위해서 어쩌면 내가 예술을 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면에서 이 화백은 "한국사람으로서 숯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양사람이 숯을 가지고 하는 작업과 제가 하는 작업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숯은 서양이 보는 단순히 어떤 물성의 세계를 가진게 아닙니다. 동양의 먹의 문화권은 동북아시아의 중국과 한국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수묵의 세계가 숯에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서구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현대 사회에서, 또한 도시문명 안에서, 동양인으로서 이 자연에 대한 물성을 나의 문화권과 연결 관계를 어떻게 맺을수 있을까라는 것이 내 작업의 화두입니다." 검은색의 근원 '숯'은 동양 문화요소에서 '이배 의 숯'이라는 새로운 조형언어로 치환됐다. '숯'은 영어로는 차콜(charcoal)로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china)와 좋다는 콜(coal)의 합성어로 알려져있다. 중국에서 숯을 약으로 먹는 것을 알고, 서양인이 복용해본후 몸이 좋아져서 나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유럽에서 '숯'은 이배의 '이수 뒤 푸'(Issu du Feu)이거나 '랜드 스케이프'(landscape)로 불린다. 이 배 화백이 지난 18일 부산 조현화랑에서 13년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숯을 재료로 한 2000년대 초기 회화중 대표작 10여점과 신작을 선보인다. 이 화백에게 숯은 물질로서 숯을 지나 회화적 수단인 동시에 그의 회화의 본질이자 귀결점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숯이 융화된 '검은 색'의 위용을 보여준다. 블랙홀같기도 한 검은색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어가게 한다. 우연히 발견한 재료지만, 작품은 우연에 의한 것은 없다. 많은 숙고를 거치고 오랫동안 데생을 통해 탐구한 결과물이다. '서예에 가까운 획, 곡선 혹은 부호들을 연상시키는 형태들은 오직 검은 색을 구현하기 위해서만, 검은 색에 육체를 부여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극도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형태, 놀라운 에네르기를 내포한 작업은 단순한 회화에서 벗어났다. 특히 그 자체로 항균·흡착·습도·정화 효능까지 스며 실용적이면서도 독창적인 현대미술의 참 맛을 전한다. 이 배 화백은 "'숯'작품을 단순히 기법적인 부분이나 하나의 특이한 재료로만 보지 말아달라"고 조심스런 당부를 전했다. "숯 작업은 우리 문화의 깊은 토양에서부터 비롯 된 것입니다. 1970년대에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 마샬 맥루한이 쓴 '미디어는 메세지다'라는 책을 대학시절에 읽은 적 있습니다. 그것은 '숯'이라는 하나의 재료가 곧 '문명권의 메세지'로서 의미화 시킬수 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제 작품을 보시는 분들에게 '숯 작품'이 우리 문화에 대한 근간을 환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시는 2017년 1월 8일까지 이어진다. [email protected] 2016/11/20
50년째 엄마등에 매달린 아이 백영수 화백 '창가의 모자','산동네의 모자', '들판의 모자', 아이는 엄마등에 꼭 붙어있다. 아이를 업어서일까. 엄마의 얼굴은 모두 가로로 된 계란형으로 기울어져 있다. "엄마는 사랑입니다. 아름다움이지요." 유난히 등에 꼭 매달려 엄마와 한 몸같은 그림, '창가의 모자' 앞에서 백영수 화백이 느릿느릿 말했다. "아이하고 엄마는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아이는 엄마 품을 생각하고 엄마는 아이를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 "아이가 50년째 엄마 목에 매달려 있는거에요" 백화백의 그림자가 된 부인 김명애 여사는 "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 같다"고 대신 말했다. 백화백이 두살때, 엄마는 남편을 잃었다. 오빠가 있는 일본으로 아이를 데리고 간 엄마의 나이는 고작 스물살도 안됐다. "그렇다보니 엄마 사랑을 잘 못받지 않았나 싶어요." 백화백이 유독 '모자상'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 부인은 "모성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고 넌지시 얘기했다. "이전에도 싸리문가에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있는 그림, 백일몽을 그렸었어요. 이후 1971년 딸을 낳고 달라진 것 같아요. 1976년부터 모성을 표현하고 싶어하더라고요." 고개를 왜 가로로 하고 있냐고 묻자 백화백은 "생각하는데 똑바로 있으면 이상하잖아"라고 했다. 부인은 "이 사람은 그림속 아이처럼 늘 몽상에 젖어 있고, 자기세계에 충실한 사람"이라며 남편을 힐끗 보고 웃었다. 50년째 '모자상'에 매달려 있는 그는 이제 엄마 등 대신 휠체어에 앉아 있다. 올해로 95세, "다른 사람은 다 죽었는데 나만 운이 좋아 살아있다"는 그는 1947년 결성된 '신사실파'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작가다. 백화백은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나 1940년 일본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 사이토요리 선생에게 유화를 배웠다. 1944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귀국, 목포고등여학교와 목포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다.1946년 25세에 조선대학교 총장으로부터 미술과 창설을 의뢰받는 등 남도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7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등과 함께 '새로운 사실을 표방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해방후 최초로 추상적 경향의 화풍을 추구했다. 1950년대 후반 격정적인 화풍을 지난 앵포르멜과는 달리 대체로 서정적인 추상의 세계로, 신사실파는 한국 추상회화 형성과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70년대 당시 화가들의 로망은 파리였다. 백화백도 경기 의정부 집을 남겨두고 1977년 파리로 날아가 '재불화가'로 30년간 살았다. 나라 인종 구분이 없는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담긴 '모자상'은 파리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블란서 요미우리 전속작가로 생활비 걱정없이 살았으니까요." 2011년, 34년만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백 화백이 귀국 비행기에서 연필로 그린 그림은 세월이 흘러도 아이같은 순수함이 넘친다. 여전히 엄마등에 업혀있는 아이, 입가에 수염이 자랐다. 백화백은 수염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이게 나야"라고 했다. 그림속 인물은 얼굴을 가로로 (모로)돌린채 아련한 애수가 흐른다. 2012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화업 70주년 개인전을 연후 4년만에 개인전을 연다. 구순이었던 그때와 달리 화백은 몸이 부쩍 쇠약해졌다. 귀도 어두워졌고, 입도 어눌해져, 혼자서 걷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리는건 잊지 않았다. 종이만 있으면 색연필로, 연필로 그린 그림은 더 단순해지고 순해졌다. 부인은 백순을 바라보는 아니 엄마등에 매달린 아이가 내려온 것처럼 쪼그려 앉아 천진난만한 세계에 빠졌다고 했다. 지난해 목욕탕에서 넘어진후 거동이 불편해졌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앉아있는 곳 어디서나 꾹꾹 눌러 그림을 그린다. 항상 주머니만한 빈노트와 색연필을 꺼내 천천히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린다. 그리는게 지겹다싶으면 종이상자를 펴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른걸 만들어냈다. 색감이 고운 작은 종이박스는 그의 장난감이 됐다. 그래서 빨간 말같은 콜라주작업도 탄생했다. 하지만 흰 종이에 여전히 그려지는 건, 엄마와 아이가 붙어있는 그림이다. 그림을 본 윤진섭 평론가는 "한마디로 놀이의 세계에 푹 빠져 이해를 초월한 탈속의 세계에 도달 한 듯 하다"고 전했다. "빨강 파랑 노랑 녹색등 몇가지 색펜으로 사각형 가장자리를 뺑 둘러 점을 찍은 작품은 여백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무심의 경지는 아마 그처럼 인생 경론의 극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면 얻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 무심의 경지야 말로 백영수가 70여년의 화업을 통해 체득한 달관과 체념의 결과일 것이다." "백화백의 드로잉전을 했으면 좋겠어요." 부인의 바람이 아트사이드 이동재 사장에 전해졌다. 이동재 사장은 "올 초 백화백님과 그림을 보는 순간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소외된 작가 발굴과 지원은 화랑의 역할"이라고 했다. 단색화와 팝아트로 쏠림현상이 심한 화랑가다. 특히 중소상업화랑에서 잊혀지고 있는 근현대작가를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이례적이다. "지난해에 사인을 잊어버렸어요. 한글로 쓰는 백.영.수를 잃어버린 듯해요. 이를 악물고선 선 하나를 긋는데 부들부들 떨면서 그리더라고요. 그런데 전람회를 한다니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 올초까지 그린 드로잉, 콜라주를 액자에 담아 40여점을 걸었다. 20일 전시장에서 만난 백영수 화백과 김명애 여사는 아이가 된 듯했다. 휠체어에 앉아 무심한 표정의 백화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너무 고맙고, 기분이 좋아요. 화가가 좋은 전람회하는 것 만큼 좋은 일이 어디있습니까?" 또 느리면서도 또박또박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더 사랑해주세요." 전시는 23일부터 10월 23일까지 열린다. [email protected] 2016/09/21
'회화란 무엇인가' 신성희의 '마대 페인팅' '마대'(麻袋)도 몰랐을 것이다. '쌀자루'거나 '흙자루'같은 비루한 처지였지만, 어느새인가 예술품 재료로 등극해 일명 '금수저'가 됐다. 요즘엔 보기 힘든 '희귀한 자루'기도 하다. 단색화 선두로 팔순의 하종현 화백을 봄날을 맞게 한 것은 '마대 페인팅'이다. 누런 마대에 물감을 밀어넣어 배어나온 '접합'시리즈. 1974년, 가난 때문에 택한 재료였지만 '마대'는 하종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마대의 보은'이 빛난 건 40년후다. 2014년부터 하종현의 '마대 페인팅'은 '한국의 단색화'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였다. '마대 자루'가 화가를 만나 '신분 세탁'이 된 셈이다. 상남자처럼 굵고 거친 삼실로 짠 '마대'의 생김새 덕분이었다. 그런데, 하종현 화백 말고도 '마대'에 반한 작가가 또 있었다. 하 화백이 한창 마대 작업을 하던 그 시기인 1970년대 중반, 신성희 화백(1948~2009)도 캔버스가 아닌 올이 성근 마대위에 마대를 그리며 본격적인 마대 작업에 주력했다고 한다. 채색 캔버스를 잘라 엮는 일명 '누아주'(nouage)작가로 유명한 신성희의 다른 면모다. 캔버스에 색점, 색선, 얼룩 등을 그리고, 그 바탕을 잘라 그 띠로 엮고 묶어 그물망을 만드는 누아주(프랑스 어로 ‘맺기’‘잇기’라는 뜻) 시리즈는 신성희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적인 입체구조를 만들어내는 '누아주'는 '회화적 조각' 또는 '조각적인 회화'로 평면 회화에 대한 물음과 도전, 회화를 넘어서 회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화를 넘어선 '누아주'. 그 시작은 성경구절과 같다. '시작은 미약 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1970년대 흔하게 보였던 '마대'였다. 신성희 화백이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주력했던 '마대 시리즈'가 첫 공개됐다.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이 '표면과 이면'을 타이틀로 그동안 공개 된 적이 없었던 캔버스 뒷면을 그린 작품 등 '마대 페인팅' 3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파리로 건너간 80년부터 82년까지 '마대 위에 캔버스 뒷면'을 그린 작품은 최초 공개다. 거친 마대 캔버스와 그 위에 쌓아 올린 물감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극사실모노크롬 이다. 미니멀리즘을 대변하는 신성희의 초기작 중에 중요한 '마대 시리즈'는 실물의 마대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됨으로써 표면적인 회화형식에 대한 신성희의 독창적인 해석을 엿볼 수 있다. 신성희의 첫 마대작업은 1974년경으로 파악된다. 당시는 국제적으로는 각종 포스트미니멀리즘이 유행하고 극사실주의가 대두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미니멀리즘과 이우환과모노하의 영향으로 단색화가 주도해가던 때다. 강태희 미술사가에 따르면 "특히 근대적인 미술 전통을 타기 하고 가공하지 않은 물질을 소재로 특정한 상황과 관계를 검증한 모노하의 미학과 논리는 이우환의 존재를 매개로 우리나라 미술계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던 시기"다. 결과적으로 '캔버스의 물성 자체를 주목'하는게 당시 트렌드였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물질이 화면에 부가되거나 결합되는 양상이 생기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마대의 앞 뒤 면을 활용하여 모노크롬과 물성을 결합시킨 하종현의 선도적인 작업은 여러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인 자극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신성희가 캔버스 대신 마대를 택한 것은 당시 분위기상 자연스런 일이었지만, 일차적으로는 '강렬한 물성과 공기가 통하는 성긴 조직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신성희는 하종현과는 다른 방법을 취했다. 하종현이 마대를 바탕으로 모노크롬 화면을 그리는 대신 신성희는 마대 자루에서 나온 '올'을 극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 위에 물감을 쌓았다. 페인트의 물성으로 화면은 상당한 입체감과 부피감을 지니게 되면서 '새로운 종류의 단색조 화면'을 탄생시켰다. 처음 한동안은 얇은 캔버스에 마대의 느낌이 나는 극사실모노크롬 작업들을 했고, 마대 위에 그린 마대의 올이 두드러지는 본격적인 마대작업은 제목이 '회화'로 바뀌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신성희의 마대 페인팅은 진짜 올인지, 그림인지 헛갈리는 작품이다. 첫 마대작업은 특별히 거칠고 너플너플한 마대의 올이 강조되고 하단부는 물감이 칠해지지 않은 채 마대의 결이 노출되어 있다. 올을 그리기보다는 물감이 올과 함께 뭉쳐있는 듯한 느낌이다. '확장 Expansion' 은 마대 페인팅의 초기 작품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한 동안은 얇은 캔버스에 마대의 한올 한올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업을 했다. 작품은 마대가 풀려나간 흔적보다 마대에서 풀려나온 실이 더 길게 확장되어 있다. 신성희는 '확장'이후 본격적으로 마대 작업에 몰입했다. 이후 마대 작업의 작품 제목을 '회화'라고 붙였다. 마대 특유의 재질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반복적인 붓질을 가했던 정교함이 특징이다. 실제 마대 위에 그려낸 마대의 이미지와 부분적으로 비워둔 여백, 음영 또는 직선의 이미지를 대비시킴으로써 실상과 허상을 교차시키고 '회화는 결국 착각, 환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강태희 미술사가는 "평면 캔버스에 그려진 자연스러운 3차원의 이미지는 일루전을 전제하기에 모더니즘 미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반성의 대상이었고 극사실주의 역시 이런 추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면서 "마대 위에 마대를 재현하는 것은 실재와 허상, 대상과 재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회화의 영역과 그 문법을 점검하는 근본적인 일에 속한다"고 했다. "당시 착시에 대한 관심이 대두된 것은 일본과 미국에서 극사실주의 미술이 등장한 것과 시기적으로 비슷했는데 대내외적인 이런 경향이 신성희로 하여금 평면과 입체 사이에 개입하는 일루전이나 착시와 인식의 관계에 깊이 천착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 1971년 대학 졸업 후 10여 년을 국내 화단에서 활동한 신성희는 1980년 프랑스로 건너가 마대 작업의 장중한 모노크롬을 버리고 채색한 캔버스 천을 좁게 잘라 캔버스에 박아서 붙이거나 또 캔버스 틀에 엮는 작업으로 전진해갔다. “나는 화폭에 무엇을 갖다놓는 문제에 앞서 장소의 문제를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갖다놓고 싶은 것은 대체로 3차원적인 형상인데 비해 놓여질 곳은 캔버스나 종이 같은 2차원적 평면이기 때문이며 이 두개의 상반된 개념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1983년, 신성희 작가노트 중에서) 신성희의 '마대 페인팅'은 '단색화 같다', '단색화다'는 트렌드를 넘어섰다. 회화가 가진 화면의 평면성 물질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끊임없이 실험하고 탐구 했던 1970년대의 '마대 작업'은 21세기에도 '회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email protected] 2016/08/23
데미언 허스트 조수였던 '대작' 작가의 반란 폭염때문일까. 커다란 가슴을 드러낸 홀딱 벗은 여인들이 장악한 호러물같은 그림이 다 팔려나갔다. 한국에 처음 온 영국 작가 데일 루이스(35)의 그림이 시원하게 홈런을 날렸다. 지난달 27일 독일에서 온 초이앤라거 갤러리가 서울 첫 개관전으로 선보인 작가다. 전시 개막하기도 전에 8점이 '솔드아웃'됐다. 작은 그림도 아니다. 가로 4m 세로 2m로 '함부로 애틋하게' 소장할 수 없는 크기다. 여체의 심란한 형상들과 기괴한 자세로 뒤엉켜 있는 사람들의 포즈와 장면들로 딱 보면 헉하는 그림이어서 더 놀랍다. 독일에 이어 서울에 첫 분점을 낸 초이앤라거 갤러리도 깜짝 놀랐다. 파리와 영국 독일을 오가는 이 갤러리 대표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팔기보다 "이런 그림도 있다 보여주자"고 선택한 작가였다. 전조 증상은 있었다. 지난 3월 부산에서 연 '아트부산'에서 였다. 거대한 그림을 펼치던 중이었다. 꽃그림과 단색화 등 '보기 좋은 그림들'속에서 루이스의 그림은 좀 민망하기까지 했다. 빨간 입술색이 피흘리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맨몸에 괴상한 자세로 춤추는 듯한 그림을 벽에 거는 순간이었다. "이 그림 파는 거예요?" "아~. 네." 딱 2점만 가져온 그림, 다시 안에 있는 그림을 꺼내야 하나 생각이 스칠때, 손님이 다시 물었다. "또 다른 그림 있어요?" 그렇게 '보여주자'고 가져온 그림을 순식간에 팔았고, 서울 첫 개관전에 데일 루이스를 자신있게 들이댄 것. 단색화에 꽂혀있는 한국시장에서 모험을 건 배짱이었다. '호러물'같은 그림이지만, 알고보면 달라진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풀꽃' 싯귀처럼 이 그림이 그렇다. 개관전에 선보인 대표작 ‘HOPE STREET’를 보자. 중앙에 있는 거대한 여인이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공격을 받고 있다. 여인의 얼굴에 길다란 빨간혀를 내밀고 핣는 남자의 손은 이미 여인의 가슴에 올라가 있다. 늑대같은 얼굴을 한 형상은 여인의 머리카락를 잡아채고 있고, 주변에는 모든것이 발기된 듯 솟아있다. 전체적으로 신산스럽고 섬뜩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그림, 뼈대있다. 피렌체의 궁정화가 브론지노가 그린 매너리즘의 대표작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Venus, Cupid, Folly and Time)’에서 비롯됐다. 우아하고 고혹한 자태를 뽐내는 원작의 비너스가 '불길해보이는 여인'으로 변신했다. 폭력적이고 성(性)적인 현시대를 그로데스크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중세 시대 그림에서 따온 작품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백인, 남성,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재해석됐다. 사회의 냉혹함과 악의적 요소들을 화면에 드러내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블랙코미디스럽다. 아크릴, 오일, 오일 스프레이를 이용한 대형 회화에는 현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선과 악, 혼란과 무질서 부조리 등을 거침없는 붓질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미 세계적인 컬렉터인 사치컬렉션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작가는 영국에서 유망주로 부상중이다. 작가 이력이 흥미롭다. 세계적인 스타작가 데미언 허스트의 '조수'였다고 한다. 허스트는 죽음과 부패를 표현한 포름알데히드 설치작품으로 터너상을 수상한후 영국 현대미술의 부활을 이끈 작가다. 2008년 10월 런던 소더비에서 열린 그의 신작 경매에서 223점의 작품 중 218점이 낙찰돼 2280억원이 넘는 수익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영국 미술시장을 발칵 뒤집고, 세계 미술시장을 점령한 허스트는 알고보면 '대작 작가'다. 그는 장인정신을 거부한다. '누가 만드느냐' 보다 '어떤 컨셉으로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한 작가다. 데일 루이스는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을 '대작(代作)'하다 그만뒀다. 6개월간 일하면서 차가운 공장에 와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허스트는 자기 작품을 전혀 손도 대지 않았다. 작품이 완성되면 와서 서명만 했을 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데일 루이스는 "나의 작품은 나만의 개인적인 창조물이어야 했고 나 만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30명의 조수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는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이것이 나의 창작력을 거의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다. 남의 그림을 그려주던 '대작'의 후유증은 컸다. 그 경험은 회화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스페인의 발렌시아에 가서 1년간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붓을 잡은 건 런던으로 돌아와 라킴 쇼 (Raqib Shaw)의 스튜디오에서 다시 조수 일을 시작하면서였다. 그곳은 허스트의 스튜디오와는 딴판이었다. 4년 반동안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데일 루이스는 "그곳에서 나만의 스타일과 목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미술계의 비지니스 측면을 보면서 현재 활동할 수 있는 준비 작업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했다. '대작'(代作)하다가 '내 작품은 내 손으로 그리겠다'며 시작된 '대작'(大作)은 그래서 힘이 넘친다. 즉흥적이고 직접적이다. 순발력있게 리듬감을 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작가도 한국에서 자신의 그림이 다 팔렸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하다. 그림 8점은 영국에서 돌돌 말아와, 한국에서 '왁구'했다. 그림을 바닥에 펼쳐놓고 캔버스 틀에 맞춘 작업도 직접 했다. 이쯤되면 영국에서 온 '대작'작가의 반란이다. '대작'과 '위작(僞作) 논란으로 숨죽인 국내 미술시장에선 이례적인 현상이다. 몇몇 블루칩 작가에게만 치우쳐 있던 미술 소비 풍조에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걸까. 아트마켓의 글로벌화에 발맞춰 국내 컬렉터 기호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걸까. 초이앤라거갤러리 최선희 대표는 솔드아웃된 작품앞에서 "일종의 본능적인 느낌아니냐"고 했다. "한국이나 외국 컬렉터들이나 다양한 작품을 많이 봐온 컬렉터들은 그림을 알아보는 힘이 있다"는 것. 그림 8점이 팔렸다고 웬 호들갑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일에서 온 신생갤러리가 영국 신예작가를 데려와 '기괴한 그림'을 다 팔았다는 건 한국화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화랑은 유망한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게 가장 기본적인 순기능이다. 하지만 수년전부터 경매시장의 활기로 화랑은 생기를 잃은지 오래다. 경매장이 컬렉터와 작품을 끌고 갔다고 한탄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위작'으로 술렁여 국내 화랑가는 개점휴업상태다. 인사동 한 화랑주는 화랑 운영도 어려워 월마다 '돌려막기'로 연명하고 있다고 할정도다. 단색화 열풍으로 다른 그림은 팔리지도 않는 상황이다. 작가 발굴은 언강생심이라는게 화랑들의 목소리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신생갤러리 초이앤라거를 보면 희망도 보인다. 국내 미술시장도 어느덧 국제적 트렌드에 민감한 시장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데일 루이스' 현상이 새로운 활기를 찾는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점차 다양해져 가는 수요자(컬렉터)기호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선, 화랑이 얼마나 부지런히 작가발굴에 나서고, 작가의 잠재된 비전을 제시하는냐에 달렸다. 손가락만 빨고 있다간 외국에서 온 화랑, 외국 작가에 우리 작가 자리마저 빼앗길것 같은 우려다. 잘 팔린 단색화도 잊고, 잘나가는 경매장도 잊고 위작의 파장도 잊고, 화랑은 심기일전할때다. 작가가 살아야 화랑도 산다. 팔리는 그림만 팔아서는 승산없다. 화랑 운영,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영화 대사로만 따라할 말이 아니다. [email protected] 2016/08/02
K옥션 '54억' 최고가 낙찰, 누가 가장 이득일까 인생도 '타이밍', 경매도 '타이밍'이다. 54억. 국내 미술품 최고가를 낙찰시킨 K옥션 이상규 대표(55)는 의외로 덤덤했다. 미술시장에서 '조용한 성품'으로 알려진 이 대표는 '일희일비'않는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원칙주의자다. 은행원 출신(신한·하나)이다. 2005년 당시 서울옥션 김순응대표의 러브콜로 미술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후 2012년 K옥션 대표가 됐다. 6월 28일 경신한 '54억'은 서울옥션의 후발주자인 만년 2위 K옥션의 설움을 떨쳤다. 2005년 창립후 10년만에 맛본 쾌거다. 국내 미술품경매사는 서울옥션과 K옥션 양대 경매사 체제로 2곳의 독과점 시장이다. 엎치락 뒤치락 하지만, 경매사의 원조이자 코스닥 상장사인 서울옥션을 쉽게 제칠수 없는 상대다. 이상규 대표가 덤덤한 이유는 '2등의 여유'이기도 하지만 길게 내다 본 믿음때문이다. 장사의 최대 전략은 신용과 의리라고 본다. 앞서 달리는 서울옥션 덕분이기도 하다. 지난 4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의 작품이 48억6750만원에 팔리면서 위기는 기회가 됐다. 양대 경매사의 질주로 좋은 작품을 가진 개인 소장가는 아쉬울게 없다. 다만 타이밍이 문제. 서울옥션이 보유한 최고 낙찰가 작품보다 더 큰 대작을 소유한 사람에 '설득의 미학'이 작용했다. 264cm×208cm크기에 역대 보기드문 푸른 전면 점화. K옥션 이상규 대표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K옥션에 들어온 작품. 놓치면 안된다. 추정가 45억짜리에 걸맞게 호가의 위상도 필요했다. '1억으로 올라가냐, 5000만원씩 올라가냐'고민했다. 위작혼란과 불황인 미술시장 상황으로 1억씩 오르기는 눈총을 받을 것 같았다. 5000만원씩 올라가자. 문제가 생겼다. 한번도 말해본적 없는 금액. 스페셜리스트(경매사)는 발음이 꼬였다.45억5000만원, 오천만원씩 올라갑니다. 50억, 50억5000만원. K옥션 손이천 경매사는 "50억이라는 숫자를 해보지 않아 입에서도 익숙치 않았고, 오천만원씩 올리는 숫자도 발음이 어색해 맹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28일 경매당일, 42번째 김환기'무제 27-VII-72 #228'가 올라왔을때, '감'이 왔다고 했다. '이 작품 팔립니다' 말은 안했지만, 이미 경매장에서 누군가의 에너지가 강하게 나왔다는 것. 45억으로 시작, 45억5000만원, 50억, 5000만원씩 호가한 작품은 순식간에 50억이 됐고, 경매장은 숨을 죽였다. '스타와 주인은 마지막에 온다'고 했던가. 3~4번의 경합이 이어지자 현장에서 누군가 여유있게 패드를 들었다. 순식간에 54억에 멈춘 상황. 경매사는 그와 눈을 떼지 못했고, 그도 패드를 내리지 않았다. 결국 그 현장 응찰자에게 낙찰됐고, 망치를 탕탕 내리쳤다. "경매의 묘미죠. 아무도 예측못합니다. 늘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이죠" 이상규 대표는 "이 작품이 낙찰될 걸로 자신했지만, 이렇게 가슴 졸이며 지켜봤던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54억. 낙찰로 김환기의 작품도 최고가를 경신했지만, K옥션도 경매사의 역사를 다시썼다. 국내 최고 낙찰가 보유 경매사가 됐기 때문. 양대 경매사의 최고가 싸움은 섭외부터 시작된다. 얼마나 좋은 작품을 먼저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추정가를 높게 부른다고, 희귀작품이라고 다 팔리는 건 아니다. 이번에 같이 출품된 채색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세상에 첫 공개된 희귀 보물급인데도 유찰됐다. 그래서 '때(時)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최고 낙찰가 기록을 보유한 회사는 얼마나 이득이 있을까. 경매 출품작은 팔고 사는 사람이 10%씩 수수료를 내야한다. 옥션사는 수수료 장사다. 54억이니까 일반적으로 5억4000만원씩 11억8000만원을 버는 셈이지만, 이렇게 정확할순 없다. 이상규 대표에 따르면, '파는 사람'이 최고다. 팔려고 내놓기 까지 '설득과 기다림의 미학'은 돈으로 환산된다. 아쉬울게 없는데 작품을 내놓은 소장가에게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 일종의 서비스다. 결국 54억의 최종 승자는 '판 사람'이다. 경매장에서 패드를 든 사람은 당연히 '심부름꾼'이다. 배팅은 이미 계산된 전략이고, 자신있게 패드를 든 건 '아바타'이기 가능하다. 패드를 든 사람은 안다고 한다. 패드의 '미친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음을. '진짜 사는' 사람은 그래서 경매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미술시장을 흔든 54억짜리 작품. 낙찰금액은 지불됐을까?. K옥션은 답대신 이렇게 말했다. "수십억에 달하는 작품값은 단박에 입금이 안됩니다. 아, 할부는 아닙니다. 약 3주간 기다립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바로 현금결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K옥션 상반기(4회) 경매실적은 지난해보다 따뜻하다. 이번 54억 최고 낙찰로 363억9278만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상반기(4회)매출 실적은 297억3391만원이었다. [email protected] 2016/07/04
'위작시비' 이우환 작품값은 떨어졌을까? "13점은 틀림없는 내 작품". 이우환화백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떨떠름'하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위작'이라고 결론냈던 국과수와 민간 감정위원들만 황당한게 아니다. 이를 바라보는 미술인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웬지 석연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 인천공항에서부터의 행보도 도마에 올랐다. '대한민국이 나한테 왜 이러냐"며 버럭버럭 화를 내는 화백의 모습에 '실망했다'고 했다. '명상적이고 고급스러운' 작품과 달리 거친 말과 태도에 깜짝 놀랐다는 사람들이 많다. '위작논란'속에 세계적인 화가이자, 원로 화백의 여유감을 기대하는건 무리라는 입장도 있다. 작가만 보면 끝날줄 알았던 위작의혹은 이제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진행중이다. '13점은 내 작품'은 이 화백의 어떤 작품보다 '강력한 퍼포먼스'로 남았다. ◇“아무 일도 안했는데 언론이 논란을 키웠다”? 이 화백은 '위작 논란'을 키운건 언론이라고 비난했지만 그 논란을 자초했다. 2년전부터다. 미술시장에서 '위작' 논란이 솔솔 나올때 화백은 "내 고유의 호흡으로 그리기에 모방하기 어렵다”며 자신했고, 기자도 경찰도 만나지도 않았다. '위작의혹'을 언론이나 경찰에 밝혀달라는 대신, 자신이 직접나서 '진위 감정서'를 써주며 그림을 유통시켰다. 급기야 '위조된 감정서'까지 붙은 작품이 K옥션 경매에서 5억원대에 낙찰되면서 미술시장에서만 떠돌던 '위작의혹'은 '국민 사건'으로 확대됐다. 3일간 진행된 화백이 직접한 '감정'도 보자. 첫 날 하루 '판단이 안선다'며 보류했다가, 하루 쉬고 다음날(29일)다시와 '13점은 모두 내 작품'이라고 했다. 그 다음날(30일) 이례적으로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딱 보면 안다, 작가들은 1분만 봐도 내건지 아닌지 안다'며 '내 말을 믿어달라'고 했다. 음모론도 피웠다. 화가는 "경찰 1명이 살그머니 13점중 4점은 위작이라고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 4점은 위작범이 그렸다는 그림이다. 하지만 화백은 그 그림도 '분명, 틀림없는 내 그림'이라고 했다. 화백은 "내 작품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럴수 있냐"며 마치 경찰이 사건을 조작하려고 회유한 것 같은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당연히 경찰은 발끈했다. 뒷통수를 맞았다는 분위기다. 경찰에 따르면 화백은 감정 과정에서 확대경을 쓰지 않았으며 작품을 살핀 시간도 10초 내외에 그쳤다. 2분의 단독 면담은 있었지만 회유 사실은 없었다고 강력 부인했다. 때문에 "위작으로 지목받은 13점은 '저만의 호흡, 리듬과 색채로 만든 분명한 저의 그림'"이라는 주장도 힘을 못낸다. 서성록 한국미술품평가원 감정위원장은 한 방송에 나와 "현재로선 위작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뒀다. 그는 "이 13점의 작품이 진품이라면, 이것이 어디에 출품됐고, 누구한테 넘어갔고, 작품 제작 목록을 작가 측에서 제공해야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경찰의 의뢰로 감정에 참여했던 최명윤(69)국제미술과학연구소장은 “진품이라는 이 화백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2012년부터 이우환 그림 가짜가 유통된다는 심증을 갖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면서 "한국과 일본에 5개 정도의 위조조직이 있다"고 밝혔다. 이 말을 뒷 받침하는 건 현재 위작범으로 붙잡힌 현모씨는 지난달 일본에서 잡혀왔다는 사실이다. 미술시장관계자들은 화백이 하루 쉬고 다시 한 감정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다. 모 화랑과 입을 맞춘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수억대를 지불한 컬렉터들의 안위와 작품값을 보호하려는 의도라는 소리가 더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작품값은 어떨까. 한동안 국내 미술품 양대경매사의 표지그림까지 장식하던 이우환 그림은 지난해부터 앞표지에서 자취를 감췄다. 단색화 열풍으로 '동기 화백'들(박서보 하종현 정상화 등) 작품값이 치솟을때도, '이우환'이름은 보도자료에도 잘 등장하지 않았다. 시장에서 '위작 논란중'인만큼 경매사들의 신중 마케팅이었지만, 경매장에서는 이우환의 '조용한 흥행'은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우환 작가 최고가는 2012년 홍콩 경매에서 기록된 1977년 작 '점'으로 21억3000만원이다. 이우환의 작품값은 떨어졌을까?. 따져보니, 희한하게도 더 올랐다. 뉴시스가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함께 경매에 나온 이화백의 출품작수와 낙찰수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이우환 작품은 위작시비에 휘말린 시점에서도 여전히 강세를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작시비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2015년에는 한 해 낙찰총액이 117억5000만원으로, 2014년 86억원에 비해 급상승한 수치다. 이는 과거 가장 호황기였다는 2006~2008년의 낙찰총액(약 337억) 연평균에 육박하는 것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예술도 '메이킹'이다. 미술시장도 '노이즈 마케팅'이 유효함을 증명한 셈이다. 매도와 매수가 활발하다. 2014년부터 2016년 올 상반기까지 평균 80% 이상의 낙찰률을 기록했다. 2014년 105점이 출품 74점이 팔렸고, 위작시비가 정점에 올랐던 2015년에 140점이 출품되어 124점이 팔려 낙찰률 88.57%를 기록했다. 국내 미술시장이 가장 활황이었던 2006년 2007년때보다 높은 낙찰률이다. 2006년에 55점이 나와 40점(72%), 2007년 157점중 120점(76%)이 낙찰됐다. 2007년은 물감만 묻으면 팔린다는 국내 미술시장 호황기였다. 올해 상반기에도 낙찰총액이 약 33억원으로 낙찰률은 90%에 육박한다. 반면,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아직 전체를 따지기는 힘들지만 상반기 이우환 출품작은 39점으로 매우 저조한 편"이라며 "이는 위작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의 후폭풍이 크게 작용한 것같다"고 풀이했다. 하지만 39점중 34점이 낙찰됐다는 것은 프로비너스(작품출처)만 확실하다면 여전히 매세가 있다는 점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위작의혹'으로 사건의 추이에 따라 관망세가 이뤄지고 있음도 보여준다. 실제로 출품작품수와 낙찰수만을 비교해보면, 가장 호황기인 2007년(157-120-76%)과 2015년(140-124-89%)이 큰 차이가 없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투명성과 신뢰도가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 지 짐작되며, 이번 위작시비의 향방이 시장에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 요소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김영석 이사장은 “이우환 작품의 평균 호당가격을 살펴보면 작년 기준 1000만원이 웃돈다. 이 역시 가장 호황기였던 2006~2008년의 호당 평균가(1129만원)에 어느 정도 근접하고 있다”며 “오히려 불안정한 틈을 타고 일부 전문 컬렉터들은 확실한 출처만을 골라 좋은 조건으로 이우환 작품을 수집하려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또한 최근 몇 년간 국제무대에서 큰 활약을 보인 시점과도 맞물려 있어, 이우환 화백 개인의 작가적 역량이 국내 경기변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설명이다. 유명 작가에게 위작 논란은 숙명이다. '국민화가' 이중섭,박수근도 시달렸다. 천졍자는 25년째 위작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비싼 작품값'때문이다. 명품도 '짝퉁'때문에 골치다. 수천만원 에르메스백은 수백만원짜리 짝퉁백이 있다. '그 돈 주고 그런 가방을 왜 사냐'고 하지만,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그게 진품이 아니라는 건 자신들은 안다. 제대로 된 진품은 제값을 주고 사도 아깝지 않다고 한다. 컬렉터들도 화랑주도 안다. 진품은 절대 싸게 팔지도, 싸다고 사지도 않는다. '똑같아 보이고', '좋아보이는' 위세로 허세를 감춰도 양심은 속일수 없다. '13점은 틀림없는 내 작품'이라며 '묻지마 진품'을 외친 이우환 화백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앞으로 작업 하면 얼마나 하겠냐. 나는 답답하고 고통스러워 죽겠다"고 했다. "국제적으로도 작품거래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술시장에 떠도는 말이있다. '진위'감정만 하면 감정나고, 이름때문에 '우환'이 생겼다고. 그래서 정부에게 화살을 돌린다. 단색화 작가들처럼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에서 큰 호평을 받는 작가의 경우 작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대의적인 차원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원로작가나 작고작가의 경우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 작품량이 적지 않다. 최소 1000여 점에서 1만 여점도 넘을 수 있다. 이번 이우환 화백의 경우처럼 위작시비나 객관적인 재평가 과정을 위해서라도 관련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채널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이다. [email protected] 2016/07/02
'한강의 기쁨' 잡은 조영남의 무염치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낭보가 터진 날, 조영남 '대작(代作)' 논란은 씁쓸하다. 세계 권위의 맨부커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대작(大作)'의 영광이 '대작'에 묻혔다. 문단의 기쁨을 미술이 휘저어놓은 셈이 됐다. 이는 '염치의 문제'다. 미술계는 진중권 교수가 앤디워홀을 예를 들며 개념미술이나 미술사적으로의 접근은 과분하다는 반응이다. 진 교수가 "앤디 워홀은 '나는 그림 같은 것을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 것처럼 워홀은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는다"고 당당히 밝혔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조영남의 작품을 구입했었다는 한 컬렉터는 "그가 10만원주고 그려온 그림"이라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A씨가 8년간 작품의 90%를 그렸다"는 폭로가 어쩌면 핵심이다. 조영남은 감췄다. 10만원을 주고 그리면서, 자신이 혼자 그린 것처럼 하고 판매를 한 것이 문제다. 네티즌이나 미술계 반응이 싸늘한 이유다. 조영남이 “화가들은 조수를 다 쓴다. 오리지널은 내가 그린 것으로 내가 갖고 있고 그걸 찍어 보내 주면 똑같이 그려서 다시 보내 주는 게 조수”라고 해명했지만, 그는 전시를 열때나, 인터뷰에서도 조수와 함께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적이 없다. 문제가 터지자 "무명 화가 A씨에게 세밀하고 디테일한 작업을 요구한 것은 맞지만, 대부분 A씨가 그렸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만 강조하고 있다. 미술시장에서 유명 작가들이 조수를 쓰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다. 공급과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현대미술의 흐름'이다. 차별화된 작품, 그 작가만의 창조된 작업의 한 과정으로도 본다. 노동력만을 제공하고 합당한 대가를 제공하며, 수십명의 조수를 두고 있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는다. 어찌보면 혼자만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닌 '일자리, 고용 창출'도 하고 있는 셈이다. '미술계에서 관행'이라고 하지만 조영남의 경우는 다르다. 방송에 나와 시시콜콜 사생활을 드러내며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 조수 자랑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노래로 따지고 보면 '립싱크'다. 가수가 리사이틀을 하는데, 똑같이 생긴 사람에게 10만원을 주고 몰래 무대에 서게 한 것과 같은 모양새다. 조영남은 스스로 가수 겸 화가라며 '화수'라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화가는 아니다'는게 화상, 작가들의 생각이다. 반면 조영남의 '화투그림'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조영남표' 작품이다. 별볼일 없는 일상 용품을 화폭에 올려놓는 순간, 미술작품이 됐다. '레디메이드(ready-made)' 미술의 창시자 마르쉐 뒤샹(1887~1978)도 박수칠만한 작품이다. 그래서 '콘셉트 있는 작품'이라는 두둔도 있다. 뒤샹은 '회화는 망했다'며 변기를 전시장에 갖다놓고 오직 사인 하나만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바꿨다. 복제의 복제, 기성품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놓은 이 변기는 현대 자본주의, 대량 생산 시대, 화가의 손을 해방시킨 장본인이다. 개념미술의 탄생이다. 조영남은 방송에 '화투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자주 노출시켰다. 다시 말해, 조영남 대작 논란은 '염치의 문제'다. 조영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그린 것 처럼 하고 그림을 팔았다. 매니저 외에는 그 누구도 10만원을 주고 그려온 그림이라는 걸 몰랐다. "하청을 줘 내가 손보고 팔았다"고 그 과정을 표현했다면,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조영남을 잘 안다는 한 전시기획자는 "대작이 법적으로 문제없지만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했다. '잘했다, 잘못했다' 개념이 아니라 "장르(가수화가)를 넘나들면서 직접 못 그리면 그리지를 말아야지"라고 지적했다. '화가'와 '연예인 화가'는 이마트와 화랑의 차이와 비슷하다. 인테리어 작품은 이마트에서 살수 있다. 현재 완성되어 있는 '상품'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화랑, 미술관에서 작품 구입은 그 작가의 미래의 비전과 가치까지 사는 것이다. 작가들은 '예술에 혼을 바친다'. 10년, 20년 무명을 견디고, 목숨걸고 작업을 한다. '연예인 화가'들은 유명세만으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작가들에게 상실감을 제공했다. '수백만~수천만원짜리 작품이 '솔드아웃'됐다고 기사로 도배되며 진짜 화가들의 기를 꺾기도 했다. 이번 사태는 가수겸 화가의 자업자득이다. 몰래 '대작'한 그림을 두고 '미술계 관행이냐 사기냐'는 논쟁의 가치도 없다. 돈 문제, 감정 문제가 있다면 법에서 해결할 문제다. [email protected] 2016/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