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목, 동양화는 그를 만나 비로소 진화했다 "변화가 많다. 현대 수묵화의 진화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전시다." 한국화가 이종목(58) 이화여대 교수가 2008년 이후 7년 만에 여는 개인전은 '한국화가'라는 고정관념을 깬다. 먹으로 화선지에 자연을 그린 전통적 의미의 수묵화 전시가 아니다.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젊은 작가의 추상화 전에 온 듯하다. 무지개 색으로 낙서한 듯한 그림, 그리다 만 듯 칠하다 만 듯한 그림들이 걸려있다. 검은 빛만 품고 있는게 아니라 파랗고 붉은 다양한 색채가 휘감기듯 칠해져 있다.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렸다. '그리다 만 것 같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그림은 '딱 이거다'가 아니다. 그 찰나, 그 순간 역동적인 에너지가 운행되고 있다는 표현이다." 이 교수는 "내 작품은 바위나 거대한 산맥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힘을 담아낸 것"이라며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들여다 보면 산과 나무, 계곡이 존재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설명 덕분일까, 막 그리고 막 칠한 듯한 그림은 보면 볼수록 모양을 달리한다. 한 호흡으로 이뤄진 붓질과 오방색의 변주는 꿈틀대는 듯 에너지를 뿜어낸다. "크로키 사생을 수 만 장 하자 체화돼 나온 결과물"이다. "동양화가는 서양화가보다 4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강조했다. "기법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미술감독, 영화 '취화선'의 작품 제작에 참여하며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진 작가다.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같은 대학원(동양화 전공)을 졸업한 후 독일, 일본, 호주 등지에서 19차례나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에는 그도 수묵과 색채를 다양하게 사용했다. 도시, 인물, 자연풍경과 더불어 과감한 재료를 도입해 물성과 질감과 동세를 강조한 '새' 시리즈를 선보였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흐름은 동양화의 한계를 절감케했다. "일반 산수화를 그리는 것이 답답했다". 1992년부터다. "이 시대 한국화가로서 변화를 꾀하고 싶다"는 욕심은 '동양화의 초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기본으로 돌아가 자연을 직접 마주하자." 중국 대륙을 육로로 횡단했고 인도, 일본에도 머물렀다. 동양의 문화를 몸으로 체득하자는 심산이었다. "우리 미술을 꽃 피우려면 우리 미술의 원형 전개 과정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책에 의존하면 아무런 힘이 안 된다"고 짚었다. 실험과 연작의 세월이 이어졌다. 직접 자연을 대하면서 작품에서 장식 요소가 빠져나갔다. '또 다른 자연–겨울산' 연작이 발표됐고, 물이 가지는 순수한 매력을 유장한 수묵 미학으로 풀어낸 '물처럼' 연작에 몰두하기도 했다. 마주한 산(山)과 물(水)의 경계를 10여년 동안 넘나들면서 작가는 자연과 인간이 내외적 시공간을 초월하면서 자유로운 절대 개체로 존재하는 '이너 사이트(Inner Sight)' 연작도 내놓았다. 이후 우주 삼라만상이 과학질서와는 또 다른, 서로 상반된 에너지의 결합방식으로 무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 경이로운 모순의 신성함을 홀리 패러독스(Holy Paradox) 시리즈에 쏟아냈죠. 살아있는 생명력이 펼쳐지는 현상을 화폭에 담아낸 게 이때부터입니다." 이번 전시는 오랜 기간 주창해온 '모필 수묵미학'의 정체성이 발현된 결과다. 현장에서 직면하고 체화된 작업은 손끝에서 절로 나온다. 붓으로 색을 쓰면 회화가 되지만 글씨로 쓰면 서법이 된다. '서화'의 통합 과정이 입체물로 튀어나왔다. 지난 한 해 안식년 기간 '도자기의 성지' 중국 징더전(景德鎮)에서 작업한 세라믹 인장작업이다. "도자기 작업이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 전시장에 나온 도자 작품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매끈하거나 모양이 있는 게 아니라 삐뚤삐뚤 쓴 글씨처럼 알수 없는 형태다. "경덕진에서도 이상하고 신기하게 보더라고요. 동양화가라고 하니 이해를 하더군요" 독특한 모양으로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인장 작업은 알고보면 한국의 자연을 담은 입체화된 산수화다. 작품 바닥에는 모두 그림같은 전각이 새겨져 있다. 낙관으로도 사용한다. "인장예술은 동양화를 동양화답게 만드는 요소다. 문자를 벗어나 이미지를 드로잉 했다. 인장을 찍는다는 행위를 확대 해석하면 조각품이 된다". 세로로 길게 바닥까지 늘어뜨린 대형 서예작품도 걸렸다. 서체를 가늠할 수 없는 한문이 묘한 리듬감과 조형성을 드러낸다. 노자에 나오는 말, '중묘지문'이라고 했다. '허다한 묘한 것들이 나오는 문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중국, 한국에도 없는 서풍"이라며 "난장판 같지만 자연스런 호흡으로 다가오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전시는 일타삼피다. '워터페이스(Waterface)'를 타이틀로 그림, 서예, 세라믹 등 3개 장르를 선보인다. 주제는 하나다. 수묵의 정신. 결국 동양화가 추구하는 '기운생동'이다. 다양한 매체와 재료를 실험해 나온 작업은 화조와 서예가 하나로 통합된 과정을 추구한다. "글로벌한 시대에 한국적인 것을 내세우는 것은 촌스럽다. 동서양이 결합한 작업을 맘껏 하고 싶다. 이번 작업은 그래서 보람있다." 막 그리고, 막 한 것 같은데도 생명력이 감도는 이번 전시는 곧 21세기 현대 수묵화의 진화 현장이다. 거문고 현을 뜯는 소리가 어우러져 작품을 감상하면 묘한 긴장감도 전해진다. 전시는 30일까지. 02-725-1020 [email protected] 2015/10/19
화가돼버린 미녀탤런트 김혜진, 애이불비 사모곡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림자가 짙다. 알고 보면 '외로움 덩어리'다. 갓 두살때 떠난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평생의 '그리움과 기다림'이다. 지난해 응어리진 '그 엄마'를 화폭에 풀어낸 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떠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기다림'시리즈였다. 전시기간 변화가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울고 갔고, 그녀에게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오히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견뎌낸 저의 삶을 관람객들이 대신 울어주는 듯했어요. 작품 완성도의 기쁨보다 관람객의 모습에서 제가 오히려 치유받았어요." 화가로 변신한 탤런트 김혜진(40)이다. 드라마 '아이리스'에 김태희의 친구로 나와 주목받았다. 김혜진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나와 우리의 아픔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토닥여줄 작품을 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21일부터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초대전으로 여는 개인전은 대규모로 꾸민다. '본 투 비(Born to Be)'를 주제로 회화, 조각 등 100점을 선보인다. "처음엔 160평 전시공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감으로 작용했었다"는 김혜진은 "하지만 유년기의 아픈 기억과 추억이 작품을 통해 보다 성숙된 자아를 만들어 내게 된 값진 경험을 얻었다"고 만족스러워 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에도 슬픔이 담겼다. 떠나간 엄마를 그리며 기다림과 그리움 속에 홀로서기를 한 자전적 이야기다. 커다란 하이힐 구두를 신은 '울엄마가 안 와요' 조각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림과 조각으로 내놓은 작품은 정성으로 가득하다. 엄마의 잔상을 더듬어 상처와 위로, 치유를 한 점 한점 찍어 완성했다. 모든 작품에는 어릴 적부터 삶의 잣대를 깊게 해준 '명심보감'을 새겼다. 작품들은 '거울 같은 광택'으로 반짝인다. "작업을 하면서 거울 속에 투영된 내 모습까지 하나가 되어 이상하게도 슬픔과 치유가 동시에 밀려왔었어요. 엄마~ 하고 부르면 목이 메이는 그런 설움 같은…." 작품들에서는 "존재하면서 부재하고, 비어 있으면서 차 있는 것"을 강조했다.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투영되는 것으로 끊임없이 변이하며 채워진 공간"으로 치환되는 작품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있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거울에 투영된 형태들은 무언가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원시적 상태를 연상시킨다.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과는 달리 빛의 반사와 굴절을 이용해 공간을 새롭게 인식시켜 짜릿한 공간감까지 선사한다. 벌써 6회 개인전이다. 홍익대 미대 출신으로 연기자 데뷔 전부터 전시를 해왔고 아트디렉터로도 활동한 바 있다.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 등 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기획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김윤섭 미술평론가는 "작가는 그동안 보여준 대형 설치작품, 구상과 비구상의 다양한 표현기법을 활용한 회화들로 '작가로서의 팔색조 재능'을 충분히 증명해보였다"면서 "화가의 삶을 선택한 그녀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펼쳐 보일 것인가를 더 궁금하게 만들어 줄 전시"라고 소개했다. 조각가로서의 면모도 드러낸다. 12점의 조각 중 테마의 중심작인 '모(母)'상은 '2015 한국구상조각대전 특별기획 초대작가전'에도 출품 제의를 받았다. "제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작품들과 함께 삶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전시가 되었으면 합니다." 전시는 11월3일까지. 02-733-1981 [email protected] 2015/10/18
빨간 산수화가 이세현의 일장춘몽 '레드, 개꿈' 어머니의 유해를 뿌린 섬이 부동산 개발로 사라졌다. 거제도가 바로 보이는 바다 옆, 통영의 섬이었다. 영국 유학 중에 접한 소식은 충격이었다. 한국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안타까운 풍경으로 각인됐다. 2006년 런던 첼시예술대학 대학원 졸업전을 두 달 앞두고 작업이 시작됐다. 한국의 산천을 붉은색으로만 캔버스에 담아냈다. '붉은 산수'(Between Red)가 탄생한 시기다. 당시는 세계 미술시장이 호황을 누렸던 때이기도 했지만 졸업전에 선보인 작품이 모두 팔리면서 유명해졌다. 인생역전의 순간이다. 런던 미술시장에서 먼저 알려진 후 2007년 국내 미술시장에서도 빠르게 유명세를 탔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와 '붉은산수 작가'가 된 서양화가 이세현(48)이다. 붉은색 때문에 국내에선 '빨갱이 그림이냐'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지만, 붉은색만큼이나 강렬하게 각인된 작품은 작업실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중국 현대미술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던 세계적인 컬렉터 울리 지그도 그의 작품 10여점을 가지고 있다. 국내 경매시장에서 낙찰이 잇따랐고 런던, 밀라노, 뉴욕에서 전시가 이어졌다. 그의 작품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미국), 올 비주얼 아트(영국), 제임스 유 컬렉션(중국) 등 세계 곳곳에 소장돼 있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그림은 '불타는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들여다 보면 인간에 의해 파괴된 디스토피아다. 멀리서 보면 풍경화 같지만 쓰러져 가는 건물과 포탄의 흔적들이 삽입되어 한국의 아픈 기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전통적인 한국의 산수화와 서양의 원근법이 결합됐다. 유학시절 '유럽의 유화' 벽에 부딪힌 흔적이다. '이 거대한 미술사적 전통을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작가는 결국, 우리의 전통에서 찾았다. 겸재 정선(1676~1759)이나 표암 강세황(1713~1791)을 비롯한 조선 시대의 대가들의 작품에서 자신의 고민을 해결했다. 작품은 이세현의 '관념 산수화'로 분류된다. 산수화는 종종 자연 그 자체를 그리는 풍경화라고 오해되지만 유가, 도가 등 철학적 사유에 근거하여 그리는 이의 관념 속 세상을 담는 것이다. 동양에서 산과 언덕, 강과 바다, 풀과 나무라는 산수는 도가 구현된 물상으로, 나아가 최고의 인격이 발휘되기에 적합한 공간으로 여겨져 왔다. 색깔은 붉은색 하나다. 전통적인 산수화에 사용되던 먹색과는 거리가 멀다. 정치적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한국인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붉은색'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북이 분단된 현실을 표현하고 싶었다.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을 끼고 본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보초를 서며 바라보는 풍경은 어떤 움직임이나 위험을 감시하기 위한 행위였다. 하지만 야간 투시경을 통해 본 단색 풍경들은 온통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했다. 마음 속에 알지 못할 슬픔과 아픔이 느껴진 그때 그 풍경이다. 동시에 두려움과 공포도 함께 일었다."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러운 금기와 신성시된 핏빛의 붉은 색을 택한 이유다. '붉은 산수'는 사실적이면서 초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의 말처럼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비현실적인 풍경이며, 그 안에 절대 들어갈 수 없는 풍경이다." 화면 곳곳에 군함, 포탄과 쓰러져 가는 건물 등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정체와 편린들이 실록처럼 기록됐다. 어릴 적 바라본 고향인 거제의 섬, 군대에서 보았던 DMZ, 뉴스를 통해 보는 한국의 비극적 사고 장면들이다. 처음에는 녹색으로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단지 아름답고 평범한 풍경화처럼 보였다. 좀 더 복합적이고 모순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붉은색으로 바꿨다." '붉은 산수'로 미술시장에서 독보적인 브랜드가 됐지만 지난한 시절을 건너왔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2004년 영국으로 가기 전까지 '무명의 설움'을 견뎌야했다. 조각·설치·드로잉 등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지만 17년간 한 점도 못 팔았다. 30대엔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다. 알코올 중독자로까지 치닫게 했다. 붓을 버리고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드로잉부터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또 다시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왔고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적도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대학 때부터 단 한 번도 그림만 그린 적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포기하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미친 듯이 오직 그림을 그리자고 결심했다. "적어도 한 2년 정도만이라도 나에게 기회를 주고, 그래도 별다름이 없으면 그때는 진짜 포기하자." 그렇게 불혹이 넘은 나이에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국 유학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초기엔 유럽인의 사회와 문화, 정치, 철학, 삶과 죽음, 현실과 역사를 적절하게 반영하는 작업들이 매우 부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유럽인들에게 잘 맞는 옷일 뿐이라는 걸 절감했다. "내가 똑같이 입을 수는 없는, 본질부터 다른 것이었어요. 유럽 현대 미술을 따라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작업을 해온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웠죠" 10일부터 경기 파주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에서 신작 개인전을 열고 있다. 2012년 학고재갤러리에서 선보인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 '분재' 추상 작품이 아니다. 다시 '붉은 그림'을 소개한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특별기획전에 주변 인물을 등장시켜 광주의 역사적 아픔을 표현했던 것을 계기로 새로운 이야기를 더 확장해내고 있다. 이전 붉은 산수에서는 인물을 제외한 풍경 자체만으로 현실을 비판했다면, 이번 작품에는 이야기 주체로 다양한 계층의 동시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전시 제목은 '레드-개꿈'. 도가적 의미의 '일장춘몽'을 담았다. "부귀영화는 덧없고 세상살이는 한바탕 봄날 꿈과 같으니, 야심을 가진 사람들속에도 초연하게 인생을 보내겠다"는 표현이다. 그에겐 예술은 "일종의 기침 같은, 참거나 피할 수 없는 일상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엔 포르노 잡지나 인터넷에서 찾은 근육질의 몸들이 한국 지형들과 연결되며 누운 '붉은 산수'도 처음으로 소개됐다. 1층부터 3층까지 유려한 뮤지엄 전관에 회화와 드로잉 100여점을 걸었다. 대하 역사 드라마같은 그림이다. 작가의 삶을 중심으로 한국의 정치 사회 및 역사적 현상들이 다큐멘터리처럼 담겨있다. 10년간 이어져서일까, '붉은 그림'은 모두 같아보인다.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색이다. 붉은색만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나의 내면의 풍경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다." 전시는 12월20일까지, 5000원. 031-955-4100 [email protected] 2015/10/13
하종현 화백 "면벽수행하듯 40년 단색화 몰두" 박현주 기자= "나같은 작가가 아직도 대한민국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러운 일 아니냐. 크하하하하"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만났던 하종현 화백(80)은 당시에도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이 때만 해도 '단색화'가 뜨지 않았던 때다. 하종현 화백에게는 '단색화가'라는 타이틀보다는 '한국추상미술 대표작가'라는 수식어가 달려있었다. 그땐 하 화백 특유의 '자뻑'(자기 도취)발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말은, 씨가됐다. 2년 후인 2014년 팝아트 일색이던 미술판이 달라졌다. 팔순을 앞둔 그는 그의 말대로 '대한민국 미술의 자랑'이 됐다. 세계미술시장에서 '한국의 단색화'가 재조명되면서 하화백의 주가도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러브콜이 잇따랐다. 2014년 9월에 열린 국제갤러리 '단색화의 예술전'이 시작이었다. 그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블럼&포갤러리의 한국 단색화 대표작가 6인전에 이어, 10월 영국 런던의 프리즈 마스터스에 출품됐고, 미국 뉴욕 맨해튼 블럼&포갤러리에서 한 달간 개인전을 열었다. '단색화' 모노크롬, 즉 단색으로만 그림을 평생 그려온 하종현 화백을 비롯해 박서보, 정상화 등 단색화 1세대들이 늦바람이 났다. 국내외 경매시장에서도 단색화 열풍이 불어 작품값도 껑충 뛰었다. 국내에서는 최근 2년 새 최고 10배까지 올랐다. 하종현 화백의 작품은 지난해까지 100호(160.2×130.3㎝) 크기가 점당 3000만~4000만원에 거래됐지만 최근 경매시장에서 1억원을 호가한다. '단색화'는 한국미술의 브랜드가 됐다. 이제 일본 모노하(物派·ものは)와 거리를 두고 ‘Dansaekhwa’란 영어표기까지 정해지며 한글 용어 그대로 ‘단색화’로 표기된다. "그래요. 살아있을 때 이런 걸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17일부터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하 화백은 여전히 활기찼다. 이번 개인전엔 검은 그을음 연기를 씌운 새 기법으로 제작한 신작을 선보인다. 그는 “팔순의 내 나이에 실험적인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면서 "한 곳에 머물지 않도록 내 나름의 새로운 시도를 하며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베니스비엔날레서 연 단색화 특별전에 참여한 후 여름내내 작품제작에 몰두했다는 그는 다리를 절뚝거렸다. 계단 오르기가 쉽지않아 국제 갤러리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그는 ""허리가 아파요. 그래도 조금 있으면 나을 거에요. 좋아서 아픈 거니까"라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역발상으로 성공했다. 남들이 다 캔버스 앞에서 색을 칠할 때, 그는 캔버스 뒤에서 물감을 밀어냈다. 특히 그와 한몸처럼 단짝이 된 '마대'는 그의 힘을 받아줬다. 밀어낸 물감은 마대를 비집고 나와 각각의 모습으로 독특한 형태의 '추상화'를 만들어냈다. 세상에 같은 것은 없다. 그림도 마찬가지. 뒤에서 물감을 밀어내면 오일에 따라 달라진다. 동글동글 밀려 태생적으로 스스로 기어나온 형태 그대로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정하면서 나오는 거"라는 인생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모 원망할 것 없어. 운명은 개척해야지. 내 작품에서 자기(물감) 스스로가 나온 그 모습 그대로를 고치지 않고 살려주는 게 어디야." 도전과 실험정신이 그를 밀어붙였다. 1962년 신상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앵포르멜 회화작업으로 화단에 등장했다. 이후 1969년에 창립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장으로 활약하며 실험의 선봉에 섰다. 당시 용수철, 철사, 철조망 등을 사용한 작업을 발표하면서 1970년대를 유린했던 군사정권에 저항했다. 이후 1974년부터 '접합'연작시리즈에 40년간 몰두해왔다. 캔버스 뒷면에서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방식의 파격적 방법론에는 작가가 기질적으로 추구해 온 기성형식에 대한 저항적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단색화 태동기부터 화면의 앞뒤를 구분하는 관행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해온 바 있다. 마대와의 40년 작업은 가난에서 시작됐다. 한국전쟁 후 발견한 재료였다. "미국에서 밀을 수송할 때 배밑에 깔려있던 마대를 미국사람들이 탈탈 털고 뚤뚤 말아 남대문 시장에서 팔았지. 캔버스 살 돈이 없을 때 남대문 돌아다니다가 뒤져서 샀는데 거칠고 질긴 게 맘에 들더라고" 그는 "작품 하나 하나를 뜯어서 보지말고 큰 덩어리로 봐달라"고 했다. 작품은 물질과 물감이 행위와 섞여 덩어리로 만들어지는 총체적인 결과물이다. 그가 추구하는 색의 경향 역시 자연적인 성향을 띤다. 그가 취하는 흙색이나 검정색은 단순히 검은 톤의 색채가 아니라 어두워진 톤, 곧 기와가 오랫동안 비를 맞고 세월이 지나 퇴색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우리 색채'다. 그는 자신의 작품은 '정복이 아니라 공존'이라고 말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었지만, 내 색깔은 우리나라 정서와 같은 색깔이다. 마대하고 만났을 때 서로 튀지않고 사이좋게 이야기하지 않나. 보세요. 크게 보면 마대도 내 작품의 하나로서 참여하고, 물감도 참여하고 작가의 행위도 아주 겸손하게 이뤄져 있어요" '마대와 물감, 행위'가 삼위일체된 작품은 편안하면서도 금욕적이다. 세계미술계에서 단색화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 유진상은 "페인팅은 발린 상태다. 물감을 어떻게 바르느냐가 중요하다. 캔버스의 구조와 맞물려 서양에서 너무 많은 담론으로 작용해왔다"면서 "유럽과 미국에서조차 소홀하게 다뤄지게 된 페인팅의 문제를 한국 작가들이 아직도 붙잡고 다루고 있다는 것에 서구인들이 놀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베니스비엔날레 때 서구인들이 몰려든 이유는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한국작가들이 하고 있고, 또 그 당시에 활동하던 작가들이 여전히 활동하면서 단순하지만 이론으로 정제되어 있고 수준이 높아 서구인들, 특히 모든 미술관에서 컬렉션을 해야하는 아이템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단색화 덕분에 미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서구인들도 돌아선 모노크롬, 그 단색화를 계속해 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 화백은 "생각해보면 우리 단색화가들이 정말 위대하다"며 운을 뗐다. "다른데서(모노하등)는 그룹이다해서 이념으로 해왔지만, 한국에서는 작가들이 작품과 일체가 되기위해 고뇌를 하면서 작업을 해온 것 같다"면서 "서구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게 같은 시대를 살아왔지만 엄청나게 화가로서의 자기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림이 같아 보인다고?. 내가 추구하는 변화는 나이를 먹었다고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야" 고정관념을 깨고 추상회화의 새로운 장을 마련한 그는 "마대보다 자신이 더 질기고 강하다"며 껄껄 웃었다. "'마대와 물감,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면 합일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면벽수행 하듯 40년을 살아온 것 같아. 왜냐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지. 이젠 지금쯤 죽어도 원이 없어. 사리가 많이 나올 것 같으니까. 하하하" 전시는 10월 18일까지 이어진다. [email protected] 2015/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