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 이 정도는 해야지"…아트선재센터, SF 영화 세트장 전시 화제 입구는 흙더미로 봉쇄되고, 가벽은 철거됐다. 콘크리트 뼈대가 드러난 전시장에 거대한 고철 덩어리와 거꾸로 자라는 식물들이 매달렸다. 케이블과 쇠사슬이 얽힌 구조물은 불안정하게 공중에 매달려 있고, 강당과 화장실, 통로까지 폐허처럼 변모했다. 마치 미래의 폐허 도시를 재현한 SF 영화 세트에 들어선 듯한 풍경이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개인전 '적군의 언어'전이 관객을 압도하며,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30주년 맞아 껍질을 벗은 미술관 아트선재센터는 개관 30주년을 맞아 과감히 전관을 해체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흰 벽을 걷어내고, 온·습도 제어 장치를 멈추며, 흙과 불, 식물 같은 자연 요소를 끌어들였다. 보존의 공간이던 미술관은 생명체와 기계,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조각적 생태계로 탈바꿈했다. 전시는 2022년 시드니, 2023년 헬싱키, 2024년 바젤을 거쳐 이어진 연작 '상상의 종말'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낯선 유적처럼 보이는 기괴한 조각들은 먼 미래에서 발굴한 파편 같으며, 관객을 서늘한 기운으로 압도한다. ◆디지털에서 실재로…'타임 엔진' 비야르 로하스는 비디오 게임 엔진과 인공지능, 가상 세계를 결합한 도구 '타임 엔진'을 통해 조각을 생성한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생성된 가상 조각은 아르헨티나 작업실에서 금속·콘크리트·소금·자동차 부품 같은 재료로 구현된다. 작가는 “세계가 스스로 물질을 만들어내고, 나는 그것을 현실로 옮긴다”며 창작 행위의 존재론을 전복한다. 그의 조각은 멸종과 계승, 붕괴와 재생이 교차하는 경계적 상태를 구현한다. 전시 제목 '적군의 언어'는 인간 진화 과정에서 타자와의 공존, 오늘날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타자와의 만남을 비유한다. 비야르 로하스는 “우리는 이미 AI와 공존하고 있으며, 그 과정이 어쩌면 스스로의 소멸을 준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SF 영화 같은 현장 실제 전시는 영화적이다. 천장 가득 뒤엉킨 덩굴과 금속 파편, 흙더미와 기계 잔해, 비닐로 덮인 극장의 좌석까지 - 관람자는 예술 공간이 아닌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트장에 들어선 듯한 경험을 한다. 비야르 로하스는 리얼 DMZ 프로젝트(2014),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6), 광주비엔날레(2018, 2021) 등 한국과 꾸준히 호흡해 왔다. 이번 전시 역시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스튜디오 멤버 11명이 6주간 현장에서 제작해 완성됐다. 오는 9월 6일에는 아트선재센터 한옥정원에서 작가와의 아티스트 토크도 예정돼 있다. 아트선재센터의 30주년 전시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미술관 자체를 해체하고 낯선 생태계로 재구성한 사건이다. 폐허로 변신한 미술관은 미래의 폐허 도시를 닮은 SF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고, 관객은 그 속에서 인간 이후의 세계와 조우하는 감각적 경험을 체험한다. 관람객 사이에서는 “미술관이 이 정도 전시는 해야지”라는 반응이 터져 나오고 있다.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미술관 자체가 전시의 주체가 된 순간이다. 전시는 2026년 2월 1일까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1980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나, 유목적인 작업 방식으로 세계 곳곳을 무대로 활동한다. 그는 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해 집단적·협업적 과정을 거쳐 대규모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을 완성한다. 위압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취약한 형태의 작업은 조각·드로잉·영상·문학·행위의 흔적을 혼합하며, 멸종 위기에 처했거나 이미 사라진 인류의 조건을 탐구한다. 그의 관심은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포스트-인류세의 시간 속에서 다종 존재 간의 경계를 추적하는 데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미술관(2022), 마이애미 배스 미술관(2022), LA현대미술관(2017), 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2017),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2017) 등이 있다. 또한 파리 피노 컬렉션(2024), 제12회 광주비엔날레(2018), 카셀 도쿠멘타 13(2012), 뉴뮤지엄 트리엔날레(2012),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 아르헨티나관(2011) 등 세계 주요 비엔날레와 그룹전에 참여해왔다. 2025/09/03
프리즈·키아프서울 개막…아르코, 전국 시각·다원예술 프로젝트 소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정병국, 이하 아르코·ARKO)가 '2025대한민국미술축제'(9월 1~30일) 기간을 맞아 전국에서 다양한 시각·다원예술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올해 아르코는 '시각·다원 예술창작산실/주체 지원사업'을 통해 총 98건의 예술 프로젝트를 선정, 주요 기관과의 협력 전시를 마련했다. ◆코엑스몰 스크린, '다공의 도시'로 물들다 대표적으로, 공간 틸라와 박소현 기획자가 함께 준비한 '다공의 도시: 바람이 오는 곳'이 키아프·프리즈 기간(9월 7일까지) 삼성동 코엑스몰 내외부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중견 작가 염지혜, 임민욱, 정연두, 최찬숙의 영상 작업을 대규모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건 이례적이다. 특히 국제 미술인들이 집결하는 시기에, 시민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공 공간에서 무료로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예술의 의의가 부각된다. 임민욱 '열한 개의 얼굴을 지닌 도래인': 십일면관음상의 이미지를 차용해 도시와 공동체를 성찰하고, 염지혜 '마지막 밤, 여전히 밤'은 불안과 절망의 잔상을 이미지 사유로 풀어낸다. 정연두 '오감도–미디어 월 버전'는 까마귀의 시선으로 현대 도시인의 삶을 투영하고 최찬숙 '텀블 투 더스트': 회전초와 도시 스크린의 빛을 병치해 재배치의 감각을 구현한다. 오프닝 이벤트는 3일 오후 3시10분, 삼성역 6번 출구 아티움 미디어 앞에서 열린다. 관람객들은 QR을 통해 작품 사운드까지 체험할 수 있다. 영상은 매일 15시21분, 17시21분 두 차례 고정 상영되며, 이외 시간에는 랜덤 송출된다. ◆ACC·파라다이스재단 협업도 아르코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과 손잡고 오민의 라이브 렉처 퍼포먼스 '동시, 렉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는 ACT Festival 2025의 주제 '뉴로버스: 깨어있는 우주를 항해하며'에 맞춰 의식·감각·기술·신체를 탐구한다. 또한 파라다이스문화재단과 협력해, 아르코 선정작가인 유영주 '불가능한 스위트 스팟', 노경택 '미지의 행위들'을 '2025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장충'에서 재구성한다. 전시는 오는 9월 19일부터 28일까지 315서울과 하나은행 하트원에서 개최된다. ◆9월, 다채로운 협력 전시 아르코의 지원을 받아 국내 주요 미술기관에서도 전시가 잇따른다. ▲아트선재센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일민미술관 '형상 회로: 동아미술제와 그 시대', ▲공간형 '형 누나 언니 오빠',▲YPC SPACE 'Pink',▲김세중미술관 '시, 조각, 빛, 그리고 찬미', ▲통의동 보안여관 '내가 사는 피부'등이 주목된다. 정병국 아르코 위원장은 “아르코는 문화예술지원의 구심점으로서 다양한 기관과 자원을 연계해 예술 실험을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자세한 정보는 아르코 통합 플랫폼 '더아츠(thearts.arko.or.kr)'와 각 기관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2025/09/03
'프리즈 서울 2025' 개막…화이트 큐브, 트레이시 에민 청동 조각 주목 세계적인 갤러리인 영국 화이트 큐브(White Cube)가 3일부터 6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제4회 '프리즈 서울2025'에 참가한다. 2023년 6월 서울 강남 도산대로 호림아트센터 1층에 서울 분점을 개관한 갤러리다. 이번 부스(A20)에서는 툰지 아데니-존스(Tunji Adeniyi-Jones), 대런 아몬드(Darren Almond), 에텔 아드난(Etel Adnan),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모나 하툼(Mona Hatoum), 마르게리트 위모(Marguerite Humeau), 로버트 어윈(Robert Irwin),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 미노루 노마타(Minoru Nomata), 박서보(Park Seo-Bo), 얀 보(Danh Vo) 등 굵직한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한다. 특히 트레이시 에민의 Without conscience(2014)이 주목된다. 청동으로 제작된, 다리를 뻗은 채 엎드린 여성 형상은 인간 존재의 취약성과 수용의 순간을 환기한다. 완결되지 않은 형태는 불완전 속에 깃든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에텔 아드난의 Parc en Été (2021)는 어린 시절 접한 페르시아 융단에서 영감을 얻은 태피스트리 작품. 색과 형태를 직관적으로 직조해 아드난 특유의 시적 추상을 구현한다. 이사무 노구치, Atomic Haystack는 ‘원자’와 ‘건초더미’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병치해 인류가 다루는 힘의 잠재적 위력을 성찰케 한다. 노구치의 개인전은 오는 9월 12일부터 10월 18일까지 화이트 큐브 홍콩에서 열린다. 로버트 어윈, #6 x 8’ (2015)도 색채가 더해진 형광관 설치를 통해 미묘한 공간적 변화를 유도, 관람자의 지각을 재구성하며 점진적이고 몰입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한편, 전속 작가인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의 서울 첫 개인전은 화이트 큐브와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이 공동 개최하며, 뮤지엄 산 전시와도 연계된다. 화이트 큐브는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원화·조각·설치·태피스트리까지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라인업으로, 고 박서보를 비롯해 동시대성과 역사성을 함께 보여주는 국제적 위상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2025/09/03
'프리즈 서울' 개막…'묘법' 박서보 색채, LG OLED로 부활 단색화 거장 고(故) 박서보(1931~2023)의 색채가 디지털 빛으로 되살아난다. 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하는 세계적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2025' 특별전 'PARK SEO-BO X LG OLED TV: 자연에서 빌려온 色'이 공개된다. 올해로 4년째 프리즈 서울의 공식 헤드라인 파트너로 참여하는 LG전자의 전시로, 한국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을 첨단 기술과 결합해 소개해왔다. 2022년 아니쉬 카푸어, 2023년 김환기, 2024년 서세옥에 이어 올해는 ‘묘법(描法)’의 창시자 박서보를 주목했다. ◆박서보 ‘자연에서 빌려온 色’ 생선 '묘법 대가'로 유명했던 박서보는 반복적 행위를 통한 수행적 회화를 통해 자연과의 교감을 시각화했다. 후기 작업인 ‘색채 묘법’ 시리즈에서는 단풍의 붉은빛, 유채꽃의 노랑, 풀잎의 초록, 감의 주황, 진달래 분홍 등 자연의 색을 정신적 체험으로 전환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색채 감각이 LG OLED TV의 선명한 디스플레이와 AI 기술을 통해 '디지털 묘법’으로 재현된다. 서울대학교 박제성 교수가 인공지능과 협업해 제작한 미디어 아트 '자연의 시, 시의 색'은 박서보가 자연에서 마주했던 색의 울림을 확장시킨다. ◆미디어 아트와 원화의 공존 전시장에는 97인치 OLED TV 8대로 구성한 T자형 설치를 비롯해 총 16여 대의 최신 OLED TV 작품이 배치된다. 박서보의 원화와 이를 디지털로 재해석한 미디어 아트가 교차 전시되며, 관람객은 절제에서 생동으로 이어지는 색채의 여정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이동식 TV ‘스탠바이미2’ 25대로 구현한 ‘컬러 월’에서는 박서보 작업 세계에 담긴 25가지 자연의 색을 감상할 수 있다. ◆글로벌 스크린에 울려 퍼지는 단색화 LG는 이번 프로젝트를 서울을 넘어 세계 무대로 확장했다. 8월 25일부터 9월 6일까지 뉴욕 타임스스퀘어, 런던 피카딜리 광장, 서울 시청, 광화문 등 세계 주요 도시 전광판에 박서보 미디어 아트 영상이 상영된다. 단색화의 색채가 글로벌 광고판 위에서 현대적 감각으로 부활하는 순간이다. LG전자 오혜원 MS 경험마케팅 상무는 “LG OLED TV가 박서보의 세계로 들어가는 창이 되어, 디지털 세대의 감성을 통해 그의 유산을 새롭게 조명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자연에서 빌려온 색’이 디지털 감각으로 재탄생하는 현장을 제시한다. 박서보의 색채가 OLED 화면 위에서 부활한 프리즈 서울은 다시 한 번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을 세계와 잇는 무대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프리즈 서울 2025' 특별전은 6일까지 열린다. 2025/09/03
김수자, 거울과 보따리 한국적 초현실로…SK 선혜원 개방 첫 전시 ‘보따리 작가’ 김수자(68)가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한옥에서 ‘호흡’한다.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였던 전통 한옥 선혜원(鮮慧院)이 문을 열고 첫 전시로 김수자를 초대해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 1.0’을 선보인다. 포도뮤지엄(총괄디렉터 김희영)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세계적으로 활동해온 김수자의 작품이 한국 전통 건축물에 설치되는 첫 사례이자, 그의 서울 복귀전이다. 지난 7월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 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한 김수자는 회화와 바느질,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집과 정체성, 그리고 인류 보편의 문제를 사유해 온 세계적 작가다. 1990년 첫 개인전 이후 ‘이동’과 ‘몸’을 주제로 전통 보자기와 영상, 설치,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왔다. ◆선혜원, 또 다른 보따리 2일 서울 삼청동 선혜원에서 만난 김수자는 “선혜원은 또 다른 보따리”라고 말했다. “‘경흥각의 문을 여는 순간, 이건 두말할 것 없이 거울 작업이라 내가 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통 건축과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1990년대 양동마을에서 시작된 보따리 작업 이후, 그는 줄곧 건축 속 새로운 설치를 꿈꿔왔다. “보따리의 건축적 해석이 이번 ‘호흡’의 출발점”이라는 설명처럼, 건축 자체는 하나의 보따리로 재해석되고 관객은 그 안에서 자연스레 퍼포머가 된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경흥각 바닥을 거울로 채운 '호흡–선혜원'(2025)은 수백 년 된 소나무로 만든 한옥의 천장, 서까래와 지붕을 반사시키며 실제와 허상이 겹쳐지는 체험을 만들어낸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관객은 거울 위를 걸으며 발 딛고 선 자리가 또 하나의 하늘이 되고, 자기 자신조차 허공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압도감을 마주한다. 조선시대 왕실의 품격을 간직한 전통 한옥 전각 경흥각은, 김수자의 거울 설치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흐르며 사유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작가는 “한옥 공간의 거울 작업은 외국인 관객이 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전통 건축이 품은 시간성과 거울 설치가 만들어내는 초현실적 압도감은 세계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한국적 초현실’이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을 ‘거울 왕국’으로 만들었던 '호흡'과는 또 다른 울림이다. ◆보따리, 기억의 껍질 김수자는 “거울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자기 자신은 비추지 않는다.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매체”라며, 이를 ‘펼쳐내는 바늘(Unfold Needle)’에 비유했다. 덮는 보따리와 펼치는 바늘 사이에서 인간은 감춤과 드러남 사이를 호흡한다. 그는 “‘호흡’은 결국 인간의 허스크(husk), 즉 몸의 기억과 삶의 흔적을 담는 껍질”이라며 “보따리와 호흡은 물질과 비물질, 기억과 시간, 삶과 패션(의복), 그리고 몸을 하나의 구조로 묶는 작업”이라고 덧붙였다. 삼청원 지하 복도에 놓인 3개의 '보따리', 독일 마이센 도자기와 협업한 '연역적 오브제–보따리'(2023), 평면 작업 '땅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2023) 등은 이러한 철학을 확장한다. 소박한 보따리는 결국 이주와 디아스포라, 삶의 전환기를 담아내는 이동식 보금자리다. 감싸는 행위는 곧 시간과 이동, 만남에 대한 명상이 된다. “숨 쉬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하는 증거다.” 김수자가 선혜원에서 펼친 '호흡'은 결국 우리 삶의 근원적 리듬을 되묻는다. 3일 개막하는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이어진다. ◆선혜원은?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로 출발해 인재 교육의 장으로 쓰이다, 2025년 4월 그룹 연구소 겸 컨벤션 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SK는 역사적 공간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선혜원 아트프로젝트’를 출범했고, 김수자의 개인전이 그 첫 무대를 장식했다. 무엇보다 SK가 전통 한옥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대 예술과 접목해 대중에게 개방한 것은 기업 문화공간의 모범적 사례로 읽힌다. 전통과 현대, 사적 공간과 공공의 영역을 이어주는 플랫폼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낸 셈이다. 한편 이번 김수자 전시는 ‘프리즈 서울’ 기간 지역 연계 행사 ‘삼청나잇’과도 연결된다. 4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선혜원을 야간 개방해 한옥의 정취 속에서 전시를 즐길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이 예정돼 있다.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열린다. 네이버에서 ‘선혜원’을 검색해 예약하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2025/09/02
“돌은 돌이 아니다"…국제갤러리, 갈라 포라스-김 개인전 “돌은 돌일 뿐인가, 아니면 우리가 부여한 이름의 산물인가.” 국제갤러리 K1에서 개막한 갈라 포라스-김(Gala Porras-Kim, 41)의 개인전 '자연 형태를 담는 조건(Conditions for holding a natural form)'은 이 간단하지만 무거운 질문에서 출발한다. 전시장 바깥에는 습기를 작품의 주체로 끌어들인 드로잉 연작 '신호(Signal)'가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에서 습기는 작품의 적으로 간주되지만, 작가는 역으로 이를 창작의 조건으로 소환한다. 전시 기간 내내 모인 물방울은 흑연에 적신 천을 타고 패널 위로 흘러내리며, 날씨와 계절, 관람객의 움직임까지 시각화한다. 보존의 대상이던 습기가 곧 기록의 도구가 된다. 안쪽 공간에서 관객을 맞는 것은 수석(壽石·水石)을 그린 드로잉이다.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수석은 ‘동물 모양의 돌’, ‘신성한 돌’, ‘균형 잡힌 돌’처럼 세밀한 분류 속에서 감상돼 왔다. 포라스-김은 이 규범을 벗어나 여러 이미지를 재편집해 새로운 배열로 제시한다. 벽을 가득 채운 드로잉은 박물관 도록처럼 객관적 기록의 얼굴을 띠지만, 동시에 분류라는 언어의 자의성을 드러낸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드로잉 옆에 실제 수석을 병치해 놓았다는 것이다. 관람객은 실물과 그림을 오가며,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는 감각이 사실은 이름과 제도의 틀에 갇혀 있음을 깨닫는다. 조선 후기 책거리 형식을 참조한 전시 연출은 소장과 기록, 분류와 해석의 욕망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갈라포라스-김은 런던과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유물과 오브제가 제도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수집·인식·해석되는지를 탐구해왔다. 휘트니 비엔날레(2019), 제13회 광주비엔날레(2021), 제34회 상파울루 비엔날레(2021) 등에 참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리움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런던 테이트 모던 등 주요 기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는 돌을 다시 본다. 그것은 단순한 물체이자 동시에 해석과 이름의 산물이다. '돌은 돌이 아니다'라는 역설은 곧,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전체에 대한 질문이 된다. 돌은 결국, 우리 시선의 언어로 빚어진 풍경이다. 전시는 10월 26일까지. 관람은 무료. 2025/09/02
'돗자리 작가' 故 강서경 유작 400여 점, 이화여대에 기증 ‘돗자리 작가’로 불린 현대미술가 고 강서경(1977~2025· 前 이화여대 교수)의 유족이 유작 400여 점을 모교 이화여자대학교에 기증했다. 이화여대는 2일 “고인이 작고하기 전 박물관에 맡겼던 일부 작품을 포함해 총 400여 점의 작품을 기증받았다”며 “국내 대학이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유작을 일괄 기증받은 것은 이례적”이라고 밝혔다. 지난 4월 향년 48세로 별세한 고인의 유족은 “기증 작품이 이화여대의 학문과 예술 교육 발전을 위한 자산으로 쓰이길 바란다”고 전했다. 학교 측은 전담 위원회를 신설해 작품 보관·활용 방안을 마련하고, 전시와 심포지엄을 통해 고인의 예술적 기여를 조명할 계획이다. 강 교수는 이화여대 동양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수학했으며, 모교 동양화전공 교수로 재직했다. 접착제 없이 실의 마찰만으로 구조를 세운 설치작 '그랜드마더 타워'로 2018년 스위스 아트바젤에서 ‘발로아즈 예술상’을 수상했고,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회화와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전통과 동시대를 이은 시도가 특징적이다. 조선시대 악보 ‘정간보’에서 착안한 '정井' 연작, 궁중무용 ‘춘앵무’를 모티프로 한 화문석 연작 '자리', 회화의 단위를 재설정한 '모라' 연작 등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섬세하게 탐구했다. 암 투병 중에도 2023년 리움미술관 개인전 '버들 북 꾀고리', 2024년 국제갤러리 개인전 '마치 MARCH'를 열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향숙 이화여대 총장은 “고 강서경 교수는 예술을 통해 전통과 오늘을 잇고 시대를 사유하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며 “그의 유작은 이화의 교육과 예술적 상상력에 영감을 주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25/09/02
국제갤러리서 루이즈 부르주아…피빛 드로잉·은빛 강철에 묶인 연인 매혹 '인간은 풀려야 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끝내 얽혀 있어야 하는 존재인가.' 피처럼 번진 붉은 손 드로잉이 사방을 둘러싼다. 잡으려는 듯, 밀어내려는 듯, 닿을 듯 말 듯한 손들이 공기를 가르며 뻗어 있다. 그 한가운데 은빛으로 뒤엉킨 조각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 팔다리는 매듭처럼 얽혀 있고, 그 끝에서 네 개의 발이 내려온다. 발은 ‘둘’임을 드러내지만 전체는 하나로 묶여 있다. 부르주아의 세계는 결국 존재론적 매듭을 말한다. 사랑과 불안, 결속과 구속, 친밀과 고립이 동시에 얽힌 상태다. 국제갤러리에서 2일 개막한 루이즈 부르주아 개인전 'Rocking to Infinity'는 호암미술관 대규모 회고전의 압축판이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이 작은 공간에서도 충분히 강렬하다. 전시 제목은 작가의 글에서 가져온 문구로, 아이를 품에 안아 달래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지닌 안정감과 친밀함을 상징한다. 이번 전시는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일곱 번째 개인전으로,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어지는 특별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날 전시 설명에 나선 루이즈 부르주아 재단의 필립 라랏-스미스(Philip Larratt-Smith) 큐레이터는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고, ‘두 사람(couple)’이라는 주제가 부르주아 작업에서 핵심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K3 전시장에서는 직물 작업과 드로잉이 네 벽을 가득 둘러싸며 강한 몰입감을 만든다. 붉은 과슈로 두 손이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장면을 다양하게 변주한 연작이 대위법처럼 배치됐다. 위쪽의 손과 나선, 아래쪽의 텍스트와 신체 드로잉은 서로 다른 악보처럼 울린다. 라랏-스미스 큐레이터는 “부르주아가 예술가가 되기 전 수학을 공부했다”며 “나선은 심장의 박동 같기도 하고, 은하의 궤적 같기도 하다. 부르주아는 나선을 안으로 말리면 공포, 밖으로 퍼지면 자유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파리에서 태어나 평생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부르주아는 종종 한 문장 안에서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썼다. 언어처럼 그녀가 집착한 또 다른 상징은 붉은색이었다. 그는 붉은색을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액체, 출산과 상처의 기억”으로 여겼다. 그래서 드로잉과 조각, 글자 작업까지 다양한 매체에서 붉음을 반복적으로 불러냈다. 붉은색은 이번 전시의 공통 언어다. ‘ROUGE’라는 글자 드로잉이 선언처럼 걸려 있고, 임신한 여인의 실루엣과 아이를 품은 나체 드로잉까지 모두 피처럼 번진 붉음으로 물들어 있다. 전시장 중앙에는 세 점의 주요 조각이 자리한다. 분홍 대리석으로 포개어진 손을 형상화한 'Untitled (No. 5)'(1998), 두 언덕이 나선형 무한대(∞) 형태를 이루는 'Fountain'(1999), 은빛 매듭 속에 남녀가 뒤엉킨 'The Couple'(2007–2009). 모두 관계와 시간, 불안을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시각화한 작품들이다. 한옥 공간에서는 드물게 공개되는 ‘커피 필터 드로잉’이 눈길을 끈다. 생활용품을 캔버스로 전환한 이 실험은 가사(domestic)와 여성의 삶을 은유하는 동시에 르네상스 ‘톤도(tondo)’ 회화를 연상시킨다. 1994년에 제작된 이후 단 한 차례만 공개됐던 이 드로잉은 부르주아 작업에서 보기 드문 원형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떠올렸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필립 라랏-스미스 큐레이터는 “성모와 아이를 주제로 한 톤도처럼, 부르주아의 원형 드로잉에는 모성과 회귀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며 “동시에 원형은 시계의 이미지와 겹쳐 시간의 흐름을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번 전시는 나선–순환–영원의 구조 속에서 인간 존재를 매듭짓는다. 붉은색은 피와 생명, 욕망과 불안을 동시에 의미하며, 손과 신체는 관계의 결속을 드러낸다. 부르주아는 인간을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그러나 끝없이 되풀이되는 순환으로 그려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내면과 삶의 서사를 깊이 있게 마주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키아프리즈’ 기간에 서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붉은색과 은빛 매듭의 심리적 우주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며, 여전히 존재론적 질문을 현재형으로 울려 퍼지게 한다. 전시는 오는 10월 26일까지. 관람 무료. 2025/09/02
익산역서 '고군산섬잇길 사진전' 3~24일 개최 전북자치도 군산시가 K-관광섬 육성사업의 하나로 추진하는 '고군산섬잇길 사진전'이 익산역에서 열린다. 2일 시에 따르면 익산역은 전북권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 하루 수만 명이 오가는 장소다. 시는 이번 전시를 통해 K-관광섬 사업과 고군산군도를 자연스럽게 알리고 여행객들에게 설렘과 감성을 전할 계획이다. 전시는 3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진다. 작품은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말도·명도·방축도 주민들이 직접 필름카메라로 촬영한 100여 점이다. 아날로그 특유의 따뜻한 질감과 주민들의 시선이 더해져 특별한 감동을 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붕 위에 말린 생선, 계절 들꽃, 석양이 물드는 일몰, 섬마을 풍경 등 진솔한 생활상과 인물이 담겨 고군산군도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시는 관람객 참여형 SNS 이벤트도 마련했다. 전시작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어 개인 계정에 #K관광섬 #고군산섬잇길 #익산역사진전 해시태그와 함께 올리면, 주민 사진으로 제작한 한정판 필름 엽서를 받을 수 있다. 시 관계자는 "이번 사진전은 전문가가 아닌 주민들의 눈과 손으로 완성된 점에서 의미가 크다"면서 "앞으로도 주민과 상생하며 다양한 행사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고군산 섬잇길은 2023년 문체부가 선정한 K-관광섬 사업지로, 섬 사이를 잇는 해상 트레킹 코스를 중심으로 편의시설 확충하고, 주민 역량 강화와 홍보 마케팅 등을 추진해 명품 해양관광지로 도약할 계획이다. 2025/09/02
호반문화재단, 알레산드로 시치올드르 국내 첫 개인전 호반그룹 호반문화재단은 경기 과천시 호반아트리움에서 이탈리아 현대미술 작가 알레산드로 시치올드르(Alessandro Sicioldr)의 개인전 '고요한 빛, 황홀의 틈'을 국내 최초로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이탈리아 프리모 마렐라 갤러리(Primo Marella Gallery)와의 협업과 주한이탈리아문화원이 후원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내년 1월4일까지 열린다. 시치올드르는 고전 회화 기법에 몽환적 상상력을 결합한 작품 세계로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가 손쉽게 생산되는 시대에 그는 수천 번의 붓질로 작품을 완성하며 회화의 본질을 되묻는다. 또한, 산업과 기술, 효율성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시치올드르는 느림과 관조의 시간을 통해 관람객을 작품 속 몰입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번 전시에는 총 35점의 작품이 소개되며 이 중 33점은 국내 최초 공개되는 신작이다. 대표작 'Lo Sposalizio'는 서로 다른 현실을 마주한 두 인물을 통해 내면의 균형을 성찰하게 한다. 전시는 이날 오프닝 리셉션을 시작으로 오는 4일에는 작가와의 대화 프로그램이 열릴 예정이다. 호반아트리움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익숙한 시선과 사고에서 벗어나 회화라는 매체가 던지는 본질적 질문과 마주할 기회"라며 "느림과 관조 속에서 작품을 음미하고 상상과 사유의 시간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