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르의 화가들' 로트렉·수잔 발라동 서울 온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를 수놓았던 툴루즈 로트렉과 수잔 발라동의 작품이 서울에 온다.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한 '툴루즈 로트렉 & 수잔 발라동: 몽마르트르의 화가들'이 오는 11월7일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열린다. 문화콘텐츠 전문기업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와 머니투데이가 마련한 이번 전시는 19세기 말 파리 몽마르트르와 '벨 에포크' 시대를 집중 조명한다. 로트렉과 발라동을 비롯해 쥘 셰레, 테오필 알렉상드르 스테인렌 등 31명 작가가 남긴 작품 110여 점을 선보인다.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은 19세기 말 파리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와 무도장, 그곳을 오가던 인물들을 독특한 선과 색채로 그려낸 프랑스 화가다. 물랭루주를 비롯한 파리 밤문화와 공연예술을 담은 회화와 포스터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는 로트렉의 고향인 프랑스 알비의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 소장품이 한국을 찾는다. 유화를 비롯해 초기 드로잉과 판화, 로트렉 특유의 '에상스(Peinture à l'essence)'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 등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에상스는 유화 물감의 기름기를 걷어내고 테레빈유로 묽게 희석하는 기법이다. 유화임에도 수채화처럼 빠르게 말라 즉흥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로트렉은 흡수력이 높은 판지에 파스텔이나 잉크 드로잉을 덧입히며 유화의 깊이와 드로잉의 생동감을 결합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수잔 발라동(1865~1938)의 생애와 작품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집중 조명한다. 가난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난 발라동은 곡예사와 모델을 거쳐 화가가 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남성 화가들의 모델로 관찰의 대상이었던 그는 직접 붓을 들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지난해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발라동 회고전이 열리는 등 국제 미술계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발라동과 로트렉의 작품을 한 공간에서 선보여 두 작가가 주고받은 영향과 당시 몽마르트르의 시대상도 살펴본다. 발라동의 아들이자 화가인 모리스 위트릴로가 전성기인 '백색시대'에 그린 풍경화도 출품된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공개된 공식 포스터에는 로트렉의 1898년작 '화장하는 푸풀 부인'과 발라동의 1916년작 '곡예'가 각각 사용됐다. '화장하는 푸풀 부인'은 로트렉이 36세로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제작한 작품이다. 카바레 스타들을 화려하게 포착했던 초기·중기 작품과 달리 한 인물의 내면에 깃든 고독과 슬픔을 절제된 붓질로 담았다. 발라동의 '곡예'는 곡예사와 모델을 거쳐 화가가 된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곡예사의 역동적인 몸을 과감한 색채와 구도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는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가 '마리 로랑생: 색채의 황홀'(2017), '매그넘 인 파리'(2019), '앙리 마티스: 라이프 앤 조이'(2021), '라울 뒤피: 색채의 선율'(2023)에 이어 3년 만에 선보이는 '프렌치 아티스트 시리즈'다. 이 전시는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을 비롯해 몽마르트르 미술관, 와이즈먼 & 미셸 컬렉션,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협력한다. 전시 포스터 공개와 함께 얼리버드 티켓 판매도 시작했다. 5일부터는 카카오톡과 네이버, 티켓링크를 통해 4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2026/09/05
세계적 큐레이터 오브리스트, 광주 ACC 또 찾아온 이유 세계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2년 만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을 다시 찾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따르면 오브리스트는 4일 ACC 복합전시 1관에서 열리고 있는 제2회 'ACC 미래상' 수상자 김영은의 개인전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이동하는 소리'를 관람했다. 오브리스트는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동시대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큐레이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영국 미술전문지 아트리뷰가 선정하는 '파워 100'에서 2009년과 2016년 1위에 올랐다. 그가 ACC 미래상 전시를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24년 9월에는 제1회 ACC 미래상 수상자인 김아영의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를 관람했다. 올해는 김영은의 신작에 주목했다. 전시는 115개의 스피커를 통해 아시아의 이동과 이주를 소리로 풀어낸다. 오브리스트는 전시를 본 뒤 "전시장에서의 청각적 경험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며 "각기 다른 국가에서 전해지는 소리가 이 전시장에 함께 모인다는 것이 21세기에 중요한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ACC 미래상'은 융복합 예술 분야에서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한 작가를 발굴·지원하는 ACC의 대표 전시다. 김상욱 ACC 전당장은 "제1회 ACC 미래상에 이어 2회 전시에도 세계적인 큐레이터가 찾아 영광스럽다"며 "ACC에서 만든 창제작 작품과 선정 작가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5일에는 독일과 벨기에, 싱가포르, 아르헨티나, 인도, 인도네시아, 키르기스스탄, 헝가리, 멕시코 등의 외신 기자단이 ACC를 방문할 예정이다. 2026/09/05
젊은 작가 키우던 20년 사다리 사라진다…금호미술관 38년 만에 폐관 젊은 작가를 20년 넘게 키워온 사다리 하나가 사라진다. 한국 현대미술의 신진작가 등용문 역할을 해온 금호미술관이 38년 만에 문을 닫는다. 미술관은 전시만 여는 곳이 아니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찾아내고 작품을 펼칠 공간을 내주며 미술계에 첫발을 디딜 수 있도록 뒷받침한다. 특히 기업이 운영하는 사립미술관의 신진작가 지원은 기업의 이윤을 문화예술로 환원하는 메세나의 중요한 역할이다. 금호미술관은 그 일을 오래 했다. 그러나 그 역할도 이제 끝을 앞두고 있다. 금호문화재단은 4일 "중장기 사업 운영 방향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2027년 7월을 끝으로 금호미술관 운영을 비롯한 미술사업을 전면 종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재단은 사업 역량을 선택·집중해 문화예술 지원을 지속가능하게 이어가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폐관 때까지 예정된 전시와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진행한다. 금호미술관은 1989년 서울 관훈동에 문을 연 금호갤러리가 전신이다. 당시부터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소개하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1996년 경복궁 앞 사간동에 지상 4층 건물을 신축해 이전하면서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젊은 작가 지원은 2004년 '금호영아티스트'를 시작하면서 하나의 제도로 자리 잡았다. 만 35세 이하 작가를 대상으로 평면과 입체, 다중매체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역량 있는 신진작가를 발굴했다. 선정된 작가에게는 미술관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개인전 기회가 주어졌다. 2024년까지 95명의 작가가 이 프로그램을 거쳤다. 작가에게 미술관 개인전은 상업화랑 전시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작품 판매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작업세계를 규모 있게 펼칠 수 있다. 큐레이터와 전시를 만들고 비평과 연구를 거치며 작가로서 자신의 언어를 다듬는 기회이기도 하다. 금호미술관의 지원은 전시에서 끝나지 않았다. 2005년 경기도 이천에 금호창작스튜디오를 설립해 젊은 작가들에게 작업공간을 제공했다. 입주 작가들은 창작공간뿐 아니라 전시와 비평 워크숍, 외부 기관과의 교류, 출판 등의 지원을 받았다. 금호미술관은 신진작가 발굴에만 머물지 않았다. 중견·원로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집중 조명하는 전시도 꾸준히 열었다. ‘감’ 연작으로 유명한 오치균은 2016년 금호미술관에서 30여 년간 그린 뉴욕 풍경 100여 점을 선보였다. 조각가 정현은 2001년 금호미술관 개인전을 계기로 폐침목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2018년 17년 만에 다시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20년 김보희 개인전 'Towards'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에도 관람객들이 줄을 서며 화제를 모았다. 김보희의 작품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전시로도 주목받았다. 미술관 운영 환경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구조 변화와 함께 달라졌다. 1989년 금호갤러리 개관 때부터 미술관을 이끌어온 박강자 전 관장은 2019년 물러났다. 이후 관장 자리는 공석으로 유지됐다. 박 전 관장은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누나다. 재단은 앞으로 클래식 음악가 발굴과 육성에 역량을 집중한다. 금호영재콘서트를 비롯해 젊은 음악가에게 고악기를 무상 대여하는 금호악기은행, 금호솔로이스츠, 금호매니지먼트스쿨 등의 사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한편 현재 금호미술관에서는 박혜수 개인전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10월 18일까지 이어지며 작가와의 대화와 강연 등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2026/09/05
'네 삶을 바꿔야'…개막 광주비엔날레 변화·실천 화두(종합) 아시아 최대 규모 미술 축제 '제16회 광주비엔날레'가 72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한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와 광주비엔날레재단은 4일 오후 6시 개막식을 시작으로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본격 운영에 나선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로, '변화'와 '실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개인의 삶에서 신체와 사회, 역사, 나아가 우주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다양한 모습과 가능성을 동시대 예술로 풀어낸다. 전시 제목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호 추 니엔 예술감독과 박가희·브라이언 쿠안 우드·최경화 큐레이터는 릴케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가 겪는 인식의 전환처럼 개인의 삶에서 사회와 역사, 우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전시장에 풀어냈다. 이번 전시는 광주비엔날레 본전시관 한 곳에 집중됐다. 관람객은 '분자와 나', '신체와 관계', '풍경과 배움', '우주와 변화', '공기와 발화' 등 5개 전시실을 차례로 지나며 변화의 속성과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제주돌문화공원이 보존해 온 화산탄과 용암종유, 용암석순 등 제주 화산암도 전시 작품으로 선보인다. 순간적인 분출과 냉각, 수천 년에 걸친 풍화의 시간을 함께 품은 화산암을 통해 빠른 변화와 느린 변화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제임스 T. 홍의 영상 작품 '사과'를 매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전시관 외벽 세 면에 투사한다. 세계 정치인과 권력자들의 공식 사과를 담은 영상을 통해 책임과 반성의 의미를 묻는다. 전시 기간 전체 운영 시간인 496시간 동안 김선익의 사운드 작품 '공장의 불빛'을 재생해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간의 흐름을 소리로 연결한다. 이밖에 오월어머니집 회원들이 그린 회화 322점 등으로 개인의 기억이 공동의 역사로 확장되고 돌봄과 연대의 실천이 또 다른 변화의 힘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날 오후 6시 열리는 개막식에는 민형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호 추 니엔(Ho Tzu Nyen) 예술감독을 비롯한 예술인과 시민 500여 명이 참석한다. 개막식은 개막 선언과 환영사, 호 추 니엔 예술감독의 전시 소개, 개막 공연(퍼포먼스) 영상 상영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민형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은 "광주비엔날레는 지난 30년 동안 시대가 던진 질문에 예술로 답을 찾아왔다"며 "수많은 작품이 인간과 생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넓히고, 평화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호 추 니엔 예술감독은 "이번 전시는 공간적으로 확장되는 전시가 아니라 더 깊은 내면으로 향하는 여정"이라며 "변화의 다양한 규모와 영역을 함께 생각하고 배운 과정을 광주시민과 관람객에게 선보이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우리 삶과 사회 속 변화를 다시 생각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시각과 가능성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는 오는 5일부터 11월 15일까지 72일간 비엔날레전시관을 비롯한 광주 곳곳에서 펼쳐진다. 본전시와 파빌리온, 전시 연계 프로그램 등을 통해 세계와 지역, 예술과 일상을 잇는 다양한 예술의 장을 선보인다. 본전시에는 22개국 작가 43명(팀)이 참여한다. 2026/09/04
중국관 철수까지…논란 속 문 연 광주비엔날레, 줄이고 밀도 높였다(종합) 돌은 아주 천천히 변한다. 화산은 한순간 폭발해 지형을 바꾼다. 사람의 얼굴도 매일 달라지지만 우리는 그 변화를 좀처럼 알아채지 못한다. 변화에는 하나의 속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5일 개막하는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You Must Change Your Life)'는 이 서로 다른 변화의 속도를 좇는다. 대만관 명칭 논란에 이어 중국관이 개막을 앞두고 철수하면서 정치적 파장이 커졌지만, 정작 본전시는 조용하고 느리다. 분자에서 시작해 신체와 관계, 풍경과 사회, 우주를 거쳐 마지막에는 보이지 않는 공기로 돌아온다. 4일 언론에 미리 공개된 전시를 돌아보면 이번 비엔날레의 선택은 분명하다. 많이 보여주는 대신 오래 보게 한다. 43명(팀)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한곳에 모았다. 작품을 빽빽하게 몰아넣지도 않았다. 작품과 작품 사이에 여백을 두고 관객이 한 작업에 머무를 시간을 확보했다. 최근 국제 비엔날레가 참여 작가와 장소를 경쟁적으로 늘려온 흐름과는 다른 선택이다. 호추니엔 예술감독이 말한 ‘확장의 논리 대신 집중의 강도’가 전시장에 들어서자 비로소 구체적인 공간으로 읽힌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릴케의 한 문장서 시작된 비엔날레 호추니엔은 4일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전시의 출발을 개인적인 경험에서 찾았다. 2024년 말 큰 프로젝트를 끝낸 그는 소진돼 있었다. 매일 작업실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아폴론의 고대 토르소’를 읽었다. 머리가 사라진 고대 조각을 바라보며 쓴 시는 한 문장으로 끝난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호추니엔은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고 회고했다. 공허했던 미래가 다시 열리는 듯했고 “다시 꿈꿀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이 명령의 열린 성격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라는 답은 없다. 그는 이를 “프로그램 없는 요구(a demand without a programme)”라고 표현했다. 이 질문은 전시장 전체를 관통한다. 개인의 변화는 어떻게 다른 사람과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는가. 변화는 반드시 거대한 사건으로만 찾아오는가. ◆돌에서 몸으로…변화에는 하나의 속도만 없다 첫 전시실에서 만나는 제주 화산암은 그 질문에 가장 원초적인 답을 내놓는다. 오랜 시간 압력을 견딘 지층이 어느 순간 폭발하고, 분출된 암석은 다시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식고 깎이고 풍화한다. 같은 화산암도 저마다 다른 모양을 갖는다.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너무 느려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진행되기도 한다. 호추니엔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예로 든 것도 이 때문이다. 얼굴은 매일 달라지지만 매일 보기 때문에 오히려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다. 전시는 여기에서 신체와 관계로, 다시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으로 시야를 넓힌다. 한국 자연미술의 선구자 임동식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들과 산, 농촌의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관찰하고 기록한다. 인간과 자연이 오랜 시간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남화연의 신작 ‘순이’(2026)는 또 다른 시간으로 들어간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이순이의 기록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말과 문서, 이미지와 침묵의 서로 다른 층을 따라가며 역사에서 지워졌던 여성들의 몸과 공동체를 현재로 불러낸다. 한쪽에는 깨지기 쉬우면서도 단단한 도자 조형물이 놓였다. 전시는 변화를 단순한 해방이나 진보로 말하지 않는다. 고통을 견디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며 만들어진 관계 역시 변화의 한 모습으로 제시한다. ◆권력의 기념비를 뒤집고, 밤바다에서 삶과 죽음을 보다 변화는 개인과 자연을 넘어 역사와 권력의 풍경으로도 번진다. 이탈리아 작가 로셀라 비스코티의 ‘문제의 두상들’은 파시즘 시대 권력의 기념비를 뒤집는다. 1942년 로마 만국박람회를 위해 제작됐지만 공개되지 못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베니토 무솔리니의 거대한 두상을 실리콘으로 떠냈다. 단단하고 영구적이어야 할 권력자의 기념비는 뒤집히고 잘린 채 바닥에 놓인 푸른 껍질로 바뀌었다. 영원할 것 같던 권력도 결국 형태를 잃는다. 인도 작가 소흐랍 후라의 ‘해안’에서는 밤바다가 삶과 죽음, 파괴와 재생이 뒤섞이는 무대가 된다. 타밀나두 해안에서 열린 종교 축제를 촬영한 영상과 56점의 사진이 마주한다. 파괴와 재생을 동시에 상징하는 여신 칼리를 통해 인간의 삶에서 자연과 우주로 시선을 넓힌다. 춤도 변화를 만든다. 호주 작가 벤지 라(Bhenji Ra)의 33분 영상 ‘비라달리, 지평선에서 춤추다’(2024)는 필리핀 남부 술루 군도의 타우수그 전통에서 출발한다. 춤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다. 몸짓은 조상의 기억을 불러내고 사람과 사람,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언어가 된다. 이렇게 전시의 시선은 계속 줌인하고 줌아웃한다. 한 사람의 몸을 들여다보다 도시와 역사를 바라보고, 다시 자연과 우주까지 물러선다. ◆게임 같은 화면 속 윤회…루양의 ‘도쿠’ 4전시실 ‘우주와 변화’에 들어서면 스케일은 더 커진다. 중국 상하이 출생으로 도쿄에서 활동하는 루양의 ‘도쿠: 창조자(DOKU the Creator·2025)’는 관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게임 엔진과 3D 애니메이션, 인공지능을 활용한 61분36초짜리 영상이다. 작가를 본뜬 아바타 ‘도쿠’가 여러 세계를 횡단한다. 인간의 몸과 의식, 죽음과 윤회라는 불교적 세계관에 인공지능 시대의 창조자라는 질문을 겹친다. 게임이나 SF 영화 같은 압도적인 화면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빠른 반응을 얻을 만한 작품 중 하나다. 하지만 화려한 디지털 이미지가 향하는 질문은 오래됐다. 나는 누구인가. 몸이 달라져도 같은 존재인가. 누가 누구를 창조하는가. 바로 옆의 제주 화산암이 수만 년의 시간을 품고 있다면 루양의 디지털 세계는 순식간에 몸과 세계를 갈아치운다. 서로 전혀 다른 속도의 작업을 한 전시 안에서 만나는 것이 이번 비엔날레의 묘미다. ◆더 많은 작품 대신 ‘집중의 강도’ 이번 비엔날레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43팀을 한곳에 모은 선택이다. 이날 뉴시스가 참여 작가를 줄이고 한 전시장에 집중한 것이 국제 비엔날레의 거대화와 규모 경쟁에 대한 비판이냐고 묻자 호추니엔은 기존 비엔날레의 확장이 세계화 과정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빠짐없이 봐야 한다는 관람의 ‘불안’을 이야기했다. 한 장소에서 각각의 작가와 작품에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줄 수 있는 방식을 실험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실제 전시를 돌아보면 이 선택은 상당 부분 성공적이다. 작가 수가 적다고 전시가 작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 사이의 여백이 각각의 작업을 또렷하게 만든다. 다섯 전시실도 서로 끊어진 주제전이라기보다 하나의 시선이 이동하는 과정처럼 이어진다. 다만 영상 작업의 비중이 높고 긴 작품도 적지 않다. ‘집중의 강도’를 온전히 경험하려면 관객 역시 상당한 시간을 내줘야 한다. 작품 수를 줄였다고 관람의 피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주까지 갔다가 다시 한 번의 ‘숨’으로 그리고 마지막 5전시실 ‘공기와 발화’에 이르면 전시가 다시 몸으로 돌아온다. 재클린 키요미 고그의 신작 ‘어긋난 BPM(R로즈 변주곡)’의 투명한 구조물들이 천천히 부풀었다 가라앉는다. 송풍기와 피드백 시스템이 공간을 움직인다. 관객이 그 사이를 지나가면 전시장 전체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거대한 몸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전시실은 전시의 에필로그다. 분자에서 출발해 몸과 풍경을 지나 우주까지 확장됐던 시선이 공기와 호흡이라는 가장 가까운 감각으로 돌아온다. 돌처럼 단단한 것에서 시작한 전시가 손에 잡히지 않는 공기로 끝난다. 그 순간 호추니엔이 말한 ‘변화’도 조금 선명해진다. 변화는 혁명이나 재난처럼 한순간 세계를 뒤엎는 사건만이 아니다. 돌이 깎이고 얼굴이 늙고 관계가 쌓이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동안에도 세계는 계속 달라진다. ◆“정치 앞에서 예술은 약해 보여도…” 공교롭게도 이처럼 느린 변화를 이야기하는 비엔날레는 개막 직전 가장 빠르고 거친 현실의 변화와 맞닥뜨렸다. 대만관 명칭을 둘러싼 정치적 검열 논란에 이어 중국관이 철수했다. 호추니엔은 이날 정치적 논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정치의 세계 앞에서 예술은 때때로 약하고 무력해 보인다”면서도 “나는 예술에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 힘은 긴 시간에 걸쳐 작동하고 우리의 제한된 주의 집중 시간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와 ‘일리아스’를 통해, 르네상스를 미켈란젤로를 통해 기억하는 것처럼 예술은 인간의 삶에 보다 깊고 느리며 지속적인 방식으로 반응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오늘 예술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정치적 논란은 빠르게 번졌다. 그러나 이번 전시가 선택한 시간은 느리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릴케가 100여 년 전 던진 문장은 정치와 검열 논란 속에서 문을 여는 광주비엔날레 스스로에게도 돌아오는 질문이 됐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는 22개국 43명(팀)이 참여해 300여 점을 선보인다. 5일부터 11월15일까지 72일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다. 2026/09/04
개막식 앞둔 광주비엔날레…중국인 단체, '대만관' 항의 집회 전남광주에 거주 중인 중국인들이 광주비엔날레 재단의 파빌리온 프로젝트 '대만관' 명칭 승인에 반발하며 항의 집회를 열었다. 지역에 거주 중인 중국인들로 구성된 광주전남중국평화통일위원회는 4일 오후 전남광주 북구 운암동 광주비엔날레 주전시장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비엔날레 파빌리온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만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시관 명칭을 '대만관'으로 변경한 데 대해 항의하고 있다. 집회 과정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라",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 있다", "정치적 조작을 반대한다", "잘못된 조치를 시정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발했다.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명칭에서 비롯된 양안 갈등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전시에 참여하는 30개국의 작가들이 광주지역 국공립·사립 전시관 등 공공시설 등 23곳에 작품을 전시하고 관련 활동을 벌이는 기획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만 작가들은 당초 자국이 운영할 파빌리온 전시관 명칭을 '대만관(Taiwan Pavilion)'으로 협의해왔지만 광주비엔날레 측이 지난 6월부터 기관명인 'NTMoFA'로 변경했다며 반발했다. 일부 작가와 국내외 미술계에서도 "정치적 검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광주비엔날레 측은 "국가관과 기관관을 구분하는 운영 원칙과 계약에 따른 행정적 조치일 뿐 외부 개입이나 정치적 검열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급기야 지난달 18일부터 예정됐던 작품 반입과 설치까지 지연되면서 개막 차질 우려도 제기됐다. 결국 광주비엔날레 측은 지난달 25일 국립대만미술관의 전시관 명칭 변경 신청을 받아들여 '대만관'으로 변경하고 지난 2일에는 광주비엔날레 재단 명의의 사과문도 발표했지만, 전날 중국 파빌리온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철수 의사를 밝히면서 양안 갈등으로 번졌다. 이에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개막식인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해 송구하고 안타깝다"며 "중국관이 끝까지 함께하기를 바랐지만 철수로 이어져 아쉽다. 논란이 본 전시에 영향을 주고 중국과의 외교 문제로 번질까 우려했는데 결국 불편한 관계가 됐다"고 고개숙였다. 2026/09/04
“중국관 철수 안타깝다”…윤범모 “파빌리온 제도 전면 재검토” “협약은 국립대만미술관과 광주비엔날레재단, 기관과 기관이 맺은 것입니다.”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가 제16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을 뒤흔든 ‘대만관(Taiwan Pavilion)’ 명칭 논란과 중국관 철수 사태에 대해 입을 열었다. 중국관이 결국 철수한 데 대해서는 “송구하고 안타깝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대만관 명칭을 둘러싼 ‘정치적 검열’ 비판에는 선을 그었다. 윤 대표는 4일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중국관이 끝까지 함께하기를 원했는데 결국 전시 철수로 이어져 아쉽다”며 “이런 사태까지 오게 된 데 대해 송구하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논란은 국립대만미술관(NTMoFA)이 참여하는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명칭에서 시작됐다. 대만 문화부와 참여 작가들은 당초 ‘Taiwan Pavilion’으로 협의했지만 광주비엔날레재단이 지난 6월부터 공식 홍보물에서 ‘NTMoFA’로 변경했다며 반발했다. 일부 참여 작가와 국내외 미술계에서는 이를 ‘정치적 검열’이라고 비판했다. 재단의 설명은 달랐다. 이날 뉴시스와 만난 윤 대표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재단이 정치적 판단으로 ‘Taiwan’ 명칭을 삭제한 것이 아니라, 애초 국립대만미술관과 맺은 협약에 따른 행정적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윤 대표는 “처음 신청할 때는 대만의 작은 규모 기관이었고 이후 국립대만미술관으로 바뀌었다”며 “국립대만미술관 역시 기관이다. 재단이 공식적으로 체결한 협약도 국립대만미술관과 광주비엔날레재단 간의 기관 대 기관 협약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광주비엔날레재단은 논란이 불거진 지난달 25일에도 같은 입장을 밝혔다. 지난 1월 체결한 협약서의 계약 당사자가 ‘Taiwan Pavilion’이 아닌 NTMoFA였고, 국가관과 기관관을 구분하는 원칙에 따라 공식 홍보물에 기관명을 표기했다는 것이다. 재단은 당시 “전시 내용이 아니라 파빌리온 참여 주체와 공식 홍보물 표기에 관한 행정적·협약적 이견”이라며 작품 선정과 설치 방식, 작가와 큐레이터의 표현에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대만 참여 작가들의 문제 제기에 광주지역 예술가들까지 가세하면서 논란은 ‘정치적 검열’과 ‘표현의 자유’ 문제로 확산됐다. 대만 문화부도 ‘Taiwan Pavilion’ 명칭 복원을 공식 요구하면서 파장은 커졌다. 이후 재단은 지난달 25일 NTMoFA의 명칭 변경 신청을 받아들여 ‘Taiwan Pavilion’ 사용을 승인했다. 윤 대표는 애초 명칭을 변경하지 않으려 했다는 입장이다. 기관 간 협약에 따른 표기인 만큼 이를 정치적 검열로 볼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논란이 국내외 미술계로 확산되면서 결국 대만 측의 명칭 변경 요구를 받아들였다. 대만과의 갈등이 봉합되자 이번에는 중국이 반발했다. 다이빙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달 27일 민형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을 만나 대만 국가관 명칭 승인에 유감과 우려를 나타냈다. 다음 날 중국관 전시팀은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서 진행하던 작품 설치를 중단했다. 중국관 전시팀은 결국 지난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전시 철수를 공식 선언했다. 중국 측은 ‘대만관’이라는 명칭 사용이 “정치적 요소가 예술 영역에 개입하는 상황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대만 측은 ‘Taiwan’을 지운 것을 정치적 검열이라고 비판했고, 중국 측은 ‘Taiwan Pavilion’을 허용한 것을 정치의 예술 개입이라고 비판했다. 재단은 정반대 방향에서 동시에 ‘정치적 개입’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 셈이다. 윤 대표가 이날 “예술과 정치를 겹쳐 보지 말아야 한다”고 선을 그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윤 대표는 논란이 본전시에 영향을 미치고 중국과의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밝혔다. 다만 중국 측이 주장한 ‘정치적 요소의 예술 개입’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는 직접적인 판단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예술과 정치를 겹쳐 보지 않았으면 한다”며 광주비엔날레는 예술 행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파빌리온 운영 제도도 대폭 손질한다. 윤 대표는 국가관과 기관관을 나누는 현재 방식에 대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며 “신청하는 국가와 기관이 너무 많아 재단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올해도 수십 곳이 참가를 신청했지만 광주 시내에서 이를 모두 수용할 전시 공간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제도를 대폭 개선해야 한다”며 국가관과 기관관을 어떻게 구분할지, 참가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선정할지 등을 연구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파빌리온 자체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2018년 시작한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은 본전시와 별도로 국내외 미술·문화기관들이 광주 곳곳에서 전시와 교류 프로그램을 펼치는 프로젝트다. 규모가 빠르게 커지면서 2024년에는 22개 국가관과 9개 기관·도시가 참여했다. 이번 사태는 빠르게 몸집을 키워온 파빌리온의 운영 방식에도 숙제를 남겼다. 국가와 기관의 경계가 얽힌 국제 미술행사를 어떤 원칙으로 운영할 것인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한편 제16회 광주비엔날레는 대만관 명칭과 중국관 철수 논란 속에 5일 개막한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You Must Change Your Life)’를 주제로 11월15일까지 열린다. 22개국 43인(팀)이 참여해 300여 점을 선보인다. 2026/09/04
대만관·중국관 논란 속 ‘변화’ 묻는 광주비엔날레…호추니엔 “예술에는 힘이 있다” 폭발하듯 한순간에 일어나는 변화가 있는가 하면, 너무 느려 알아차리지 못하는 변화도 있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는 그 서로 다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간다. 올해는 몸집부터 줄였다. 43인(팀)의 작가를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한 곳에 모았다. 더 많은 작가, 더 많은 장소, 더 많은 작품으로 몸집을 불려온 국제 비엔날레의 ‘확장의 논리’ 대신 한 작가와 작품을 오래 바라보는 ‘집중의 강도’를 택했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가 5일 개막한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You Must Change Your Life)’를 주제로 오는 11월15일까지 72일간 펼쳐진다. 호추니엔 예술감독은 4일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전시의 출발점을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찾았다. 2024년 말 대형 프로젝트와 전시를 끝낸 그는 소진돼 있었다. 모든 것을 써버린 듯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실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아폴로의 고대 토르소’를 읽었다. 머리가 사라진 고대 조각상을 마주한 화자의 시선은 부서진 몸통을 따라간다. 불완전한 조각은 점점 살아 움직이는 존재처럼 다가온다. 시는 강렬한 한 문장으로 끝난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호추니엔은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고 회고했다.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지만 자신의 가능성이 다시 확장되는 듯했고, “다시 꿈꿀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문장의 강력함만이 아니었다.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면서도 어떻게, 무엇으로 바뀌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 ‘프로그램 없는 요구(demand without a programme)’라는 점이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은 광주에 도착하면서 집단의 질문으로 확장됐다. 호추니엔은 “빛의 도시이자 민주주의와 변화의 도시인 광주에 이 문장을 심으면 개인적인 경험이 집단적인 차원으로 열리게 된다”며 나의 변화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집단적 변화와 연대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무엇인지 묻게 됐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 변화는 전시장에 놓인 제주 화산암을 만나 시간의 문제로 확장된다. 하나의 화산암에는 지하에서 축적된 긴 시간과 순간적인 폭발, 다시 오랜 냉각과 풍화의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호추니엔은 “변화에는 하나의 속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며 “변화는 폭발적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느리고 지속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변화의 크기도 하나가 아니다. 분자에서 신체로, 인간관계에서 정치공동체로, 풍경에서 우주까지 서로 다른 규모에서 변화는 동시에 일어난다. 전시는 이 변화의 스케일을 따라 5개 전시실로 이어진다. ‘분자와 나’, ‘신체와 관계’, ‘풍경과 배움’, ‘우주와 변화’, ‘공기와 발화’다. 작은 분자에서 몸으로, 몸에서 관계와 사회로, 다시 풍경과 우주로 시야가 확대된다. 그러나 단순한 ‘줌아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규모는 끊임없이 포개진다. 멀리 있는 우주가 다시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고, 거대한 사회와 역사는 한 사람의 삶으로 돌아온다. 박가희 큐레이터는 ‘풍경과 배움’을 설명하며 “우리가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제로 누가, 무엇이 만들어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정치와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과 인과,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시간,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이 겹쳐 있다. 시선을 줌인하고 줌아웃할 때 하나의 풍경을 함께 만들어온 서로 다른 시간과 관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비엔날레를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실천(practice)’이다. 변화는 혁명이나 재난, 위기처럼 극적인 사건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운동과 노동, 훈련과 반복처럼 매일 되풀이하는 행위 속에서도 일어난다. 같은 행동을 반복해도 몸과 기술, 환경이 달라지면서 차이는 쌓인다. 이 때문에 호추니엔은 개별 작품 하나보다 작가가 수년에서 수십 년 동안 이어온 작업의 궤적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한 작가가 여러 전시실에 반복해 등장하는 이유다. 그는 일반적인 전시가 작가와 작품을 하나의 ‘점(point)’으로 제시한다면 이번 전시는 작가의 오랜 실천을 ‘선(line)’으로 따라가려 했다고 설명했다. 변화 역시 한 번의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되는 하나의 궤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비엔날레의 규모 자체도 바꿨다. 올해 참여 작가는 43인(팀). 전시장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한 곳에 집중했다. 호추니엔은 “비엔날레는 종종 더 많은 작가, 더 많은 장소, 더 많은 작품이라는 확장의 논리와 연결돼 왔다”며 “우리는 다른 종류의 강도, 즉 주의와 집중의 강도를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뉴시스가 “이러한 선택이 오늘날 국제 비엔날레의 거대화와 규모 경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느냐”고 묻자 그는 기존 대형 비엔날레들이 세계화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과 성과를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자신 역시 수많은 비엔날레를 다니며 모든 작품을 봐야 한다는 일종의 ‘불안(anxiety)’을 경험했다고 털어놨다. 이번에는 한 장소에 집중해 작가와 작품에 충분한 시간을 내어주고, 관객의 지속적인 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다른 모델을 시도했다는 취지다. 공교롭게도 ‘변화’를 내건 이번 비엔날레는 개막 직전부터 현실 정치의 격랑과 맞닥뜨렸다. 대만관 명칭을 둘러싼 갈등이 중국관 철수로 번지면서 이날 기자간담회에서도 관련 질문이 쏟아졌다. 대만 측은 앞서 ‘Taiwan’ 명칭을 삭제한 것을 정치적 검열이라고 비판했다. 반대로 중국 측은 ‘Taiwan Pavilion’ 명칭 사용을 문제 삼으며 결국 전시에서 철수했다.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중국관 철수까지 이어진 데 대해 “송구하고 안타깝다”고 밝혔다. 윤 대표는 재단과 국립대만미술관이 국가가 아닌 기관 대 기관으로 협약을 체결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파빌리온 제도도 대폭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파빌리온 자체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호추니엔은 파빌리온 문제와 본전시는 구분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정치적 공방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정치와 예술이 작동하는 서로 다른 시간을 이야기했다. “정치의 세계 앞에서 예술의 힘은 약하고 무력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술에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힘은 즉각적인 것이 아니다. 긴 시간에 걸쳐 작동하고 인간의 짧은 주의 집중 시간을 넘어서는 힘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와 『일리아스』를 통해 고대 그리스를 떠올리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통해 르네상스를 기억하듯 예술은 인간에게 느리고 깊게, 오래 지속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설명이다. 호추니엔은 “우리는 오늘 예술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다”며 이번 비엔날레 역시 관객의 주의를 늦추고 예술에 대한 감각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강조했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정치·검열 논란으로까지 번진 광주비엔날레에도 묵직한 질문으로 남았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는 5일부터 11월15일까지 72일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에는 22개국 43인(팀)의 작가가 참여해 3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는 5일부터 11월15일까지 72일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다. 2026/09/04
호추니엔 감독 "광주비엔날레, 집단 변화·연대 역사 공유" 제16회 광주비엔날레가 예술과의 만남이 촉발하는 개인의 내면적 변화를 공동체와 사회, 나아가 우주적 차원의 변화로 확장한다. 호추니엔(Ho Tzu Nyen)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은 광주의 민주주의와 연대의 역사 위에서 '삶을 바꾼다'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묻고 분자부터 신체와 관계, 풍경, 정치공동체, 우주에 이르는 변화의 다양한 속도와 규모를 펼쳐 보이겠다고 밝혔다. 호추니엔 예술감독은 4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제16회 광주비엔날레의 구상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론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며 "2024년 말 대규모 프로젝트와 전시를 마친 뒤 몹시 지치고 공허한 상태였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고 돌이켰다. 당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읽은 릴케의 시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 시는 관람자가 예술작품과 마주한 순간 그 강렬함에 압도되는 경험을 다룬다. 시의 마지막 구절인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지만 그 문장을 만난 순간 내 역량이 확장되는 듯했다"며 "무언가가 다시 가능해지고 다시 꿈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감독은 이 경험이 강렬하면서도 철저히 내면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이 문장이 변화의 방향을 미리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삶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왜 바꿔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며 "그 문장이 지닌 엄청난 힘과 함께 이러한 개방성이 가장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감독은 광주비엔날레를 구상하면서 이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한 관람자와 한 예술작품 사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에서 태어난 문장을 광주라는 장소로 옮기면 그 의미 역시 달라질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빛의 도시이자 민주주의와 변화의 도시인 광주에 이 문장을 심으면 개인적인 경험이 집단적인 차원으로 열리게 된다"며 "나의 변화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의 집단적 변화와 연대의 역사,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는 이 같은 변화의 성격을 화산과 화산암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전시장 곳곳에는 제주에서 가져온 화산암이 등장한다. 화산이 분출할 때 공중으로 솟구친 물질은 중력과 회전, 열과 냉각의 작용을 거친다. 이후 땅에 떨어질 무렵 각자의 형태를 갖춘다. 감독은 이 같은 생성 과정을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과 시간,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로 제시했다. 그는 "화산암을 만들어낸 지질학적 압력을 생각하면 돌 하나하나의 내부에서 서로 다른 시간과 힘이 공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며 "그 안에는 축적과 격렬한 변화, 냉각과 침식, 풍화의 시간이 모두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변화는 하나의 의도나 방식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단절이나 파열처럼 폭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고 지속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며 "변화가 발생하는 규모 역시 분자에서 신체, 인간관계와 정치공동체, 풍경과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덧붙였다. 감독은 이 같은 구상을 5개 전시실을 통해 풀어낸다. 전시는 '분자'를 시작으로 '신체와 관계' '풍경과 배움' '우주와 변화' '공기와 발화'의 영역을 차례로 다룬다. 전시의 흐름은 미시적 세계에서 거시적 우주로 단순히 시야를 확대하는 구조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 다른 규모와 차원의 변화가 겹치고 포개지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각 전시실의 규모는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중첩되고 연결된다"며 "제16회 광주비엔날레는 개인의 삶을 바꾸는 예술적 경험이 어떻게 공동체의 변화와 타인에 대한 책임, 공유된 세계에 관한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제16회 광주비엔날레는 4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11월15일까지 광주 북구 운암동 주전시장과 도심 곳곳에서 열린다. 2026/09/04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 "파빌리온 중국관 철수 '송구'"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가 중국 작가들의 제16회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전시관 철수 사태에 대해 행정적 난맥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윤 대표는 4일 제16회 광주비엔날레 개막 기자회견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해 송구하고 안타깝다"며 "중국관이 끝까지 함께하기를 바랐지만 철수로 이어져 아쉽다"고 밝혔다. 윤 대표는 대만 측과 재단이 기관 간 협약을 맺었지만 대만 측이 이후 국가관인 '대만 파빌리온'으로의 명칭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논란이 본전시에 영향을 주고 중국과의 외교 문제로 번질까 우려했는데 결국 불편한 관계가 됐다"며 "민망하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파빌리온 운영 체계도 전면 손질하겠다고 했다. 윤 대표는 "국가관과 기관관을 나누는 현행 방식은 큰 의미가 없다. 수십 개 기관의 신청을 재단과 광주의 전시 공간이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며 "합리적인 운영 방식을 마련하기 위해 제도를 대폭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호추니엔 예술감독도 "파빌리온은 비엔날레 본전시와 완전히 별개"라며 중국 측의 압박과 명칭 논란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 대신 예술의 본질을 강조하며 원론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그는 "정치적 논란이나 충격적인 사건에 관심이 쏠리기 쉽지만 예술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을 변화시킨다"며 "간담회 자리는 본전시를 이야기하기 위해 마련된 만큼 논란이 이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만 중국 측의 명칭 재고 요구 등에 어떻게 대응할 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번 논란은 제16회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립대만미술관의 전시 명칭을 둘러싼 갈등에서 시작됐다.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전시에 참여하는 30여개국 작가들이 광주지역 국공립·사립 전시관 등 공공시설 등 23곳에 작품을 전시하고 관련 활동을 벌이는 기획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만 작가들은 당초 자국이 운영할 파빌리온 전시관 명칭을 '대만관(Taiwan Pavilion)'으로 협의해왔지만 광주비엔날레 측이 지난 6월부터 기관명인 'NTMoFA'로 변경했다며 반발했다. 일부 작가와 국내외 미술계에서도 "정치적 검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광주비엔날레 측은 논란 끝에 대만관으로의 명칭 변경을 수용하고 사과문을 내놓았지만, 함께 파빌리온에 참여하기로 했던 중국 측이 반발하면서 작가들의 철수로 이어졌다. 2026/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