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RM 특별전·이건희 컬렉션 순회전에 '뮷즈' 뜬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의 박물관상품 브랜드 뮷즈를 미국과 영국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됐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오는 3일부터 내년 2월 7일까지 방탄소년단(BTS) RM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과 함께 선보이는 특별전 'RM X SFMOMA: Between You and Me'와 연계해 뮷즈 39종을 SFMOMA 뮤지엄숍에 공급한다고 1일 밝혔다. 약 11만 달러(약 1억4932만원) 상당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마음 시리즈)', 달항아리·청자·나전·보자기 등을 활용한 상품이다. 또 이날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영국박물관에서 개최하는 고(故)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 기증품 국외순회전 '한국: 2000년 창의의 여정'에도 뮷즈 18종을 공급한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올 연말 홍콩고궁박물관의 실크로드 문화교류와 불교미술 특별전 관련 상품도 선보일 계획이다. 정용석 재단 사장은 "앞으로도 해외 현지 전시와 관람객의 관심을 반영한 상품으로 세계 곳곳에 한국 문화유산의 매력을 알리겠다"고 전했다. 2026/10/01
4년 만에 문 여는 경기창작캠퍼스…2027년 입주형 레지던시 재개 4년간 재정비에 들어갔던 경기창작캠퍼스 입주형 레지던시가 다시 문을 연다.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창작캠퍼스의 공간 재정비와 운영체계 개편을 마치고 10월 ‘프리 레지던시’를 시작으로 레지던시 운영을 재개한다. 2027년부터는 20여 명 규모의 6개월 과정 정규 입주형 레지던시를 본격 운영한다. 경기창작캠퍼스 레지던시는 2009년 ‘경기창작센터’로 문을 열어 2021년까지 약 390명의 국내외 예술가가 거쳐 갔다. 민정기, 김훈, 김을, 임선이, 송상희, 양정욱, 민성홍, 이완, 정아람 등이 이곳에서 창작과 연구 활동을 했다. 2022년부터 시설 노후화에 따른 공간 재정비에 들어갔다. 총 3840㎡ 규모의 시설을 손보고 작업실과 주거공간을 분리했다. 창작스튜디오 1동에는 생활공간 17개와 공용공간 3개, 2동에는 작업실 16개와 공용공간 5개를 조성한다. 새 공간은 오는 2~5일 3박4일간 열리는 ‘프리 레지던시’를 통해 먼저 공개한다. 약 20명의 예술가가 실제 머물며 창작과 학습, 지역 탐색과 교류 프로그램을 경험한다. 정규 입주형 레지던시는 올해 말 오픈콜을 거쳐 2027년 재개한다. 20여 명의 예술가를 선발해 6개월간 운영한다. 프로젝트형 단기 레지던시와 멘토링 특화 프로그램도 병행한다. 새 레지던시는 작업실과 숙소 제공을 넘어 교육과 리서치, 창작, 발표와 유통까지 연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입주 작가들의 전시와 작품 판매 연계를 모색하고 국내외 레지던시와의 교류도 확대할 계획이다. 정재우 경기문화재단 지역문화본부장은 “지난 4년간 공간을 새롭게 조성하는 동시에 지금의 예술가에게 필요한 레지던시의 역할을 고민해왔다”며 “예술가의 활동이 지역과 국내외의 새로운 기회로 이어질 수 있도록 창작지원 기능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2026/10/01
벽에서 나온 지용일의 회화 ‘대면’…영은미술관서 개인전 그림이 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나무틀은 비틀리고 천은 찢어졌다. 반듯한 사각형의 캔버스 대신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전시장 바닥과 벽에 기대어 서 있다. 회화인가, 조각인가. 영은미술관이 영은창작스튜디오 13기 입주작가 지용일의 개인전 ‘대면(Encounter)’을 오는 18일까지 제2전시장에서 개최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경험에서 출발해 ‘회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신작을 선보이는 전시다. 지용일의 회화는 캔버스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완성된 캔버스를 사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지지대가 되는 나무틀을 직접 짜고 비튼다. 그 위에 덧대는 천도 찢거나 뒤틀어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작품에는 정해진 앞과 뒤가 없다. 한쪽 면을 벽에 붙여 감상하는 일반적인 회화와 달리 여러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림을 이미지를 담는 평면이 아니라 시간과 행위가 축적된 하나의 ‘사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작업의 출발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경험이 있다. 작가는 같은 풍경이라도 미디어 화면을 통해 보는 것과 직접 눈으로 마주하는 것은 다르다고 느꼈다. 자연을 직접 보고 지각하면서 마음속에 뭉쳐진 ‘상(象)’을 작품으로 옮긴다. 2010년대 중반부터 디지털 이미지를 인화해 설치와 회화 작업을 해온 지용일은 2023년부터 ‘상(象)’ 연작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영은창작스튜디오 입주 기간 제작한 신작을 중심으로 선보인다. 황마 혼방과 목재에 아크릴릭과 혼합 젯소를 사용한 작품들은 캔버스라기보다 피부를 가진 구조물처럼 보인다. 2026년작 ‘저 끝으로 밝게 넘어가는 길게 스르르 뻗친’은 높이 270㎝에 이르는 대형 작품이다. 지용일은 작가노트에서 “화면이 눈을 통해 몸에 와 닿고, 내면에 덩어리진 상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회화라 호명한 사물의 시간을 쌓는다”고 밝혔다. 2026/10/01
계란 껍질과 옻칠로 만든 보금자리…박지은 개인전 ‘텅에’ 생명을 감싸던 계란 껍질이 화면 위에서 다시 ‘보금자리’가 된다. 옻칠한 화면에는 집이 들어서고, 그 주변으로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놓인 풍경이 펼쳐진다. 옻칠과 전통 재료를 바탕으로 작업해온 박지은 작가의 개인전 '텅에(Nest)’가 서울 갤러리 진선에서 열리고 있다. 풍경 작품 25점을 선보인다. ‘텅에’는 어린 새들의 보금자리인 둥지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작가는 이 말에서 출발해 누구나 돌아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정서적·심리적 공간으로 의미를 확장했다. 작품을 만드는 재료부터 ‘둥지’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박지은은 옻칠 기법과 함께 계란 껍데기인 난각 등 자연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생명을 보호했던 알껍질은 화면에서도 보호와 안식의 이미지를 만든다.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집 역시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집이면서 기억 속 고향이고, 때로는 아직 가보지 못한 이상향이다. 저마다 마음속에 하나쯤 품고 있는 ‘돌아갈 곳’을 풍경으로 옮긴 셈이다. 동덕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박지은은 지필묵을 중심으로 동양적 조형 언어를 탐구하다 2008년 옻칠을 접한 뒤 작업의 재료와 표현 영역을 확장했다. 현재 전북 완주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우진문화재단 청년작가, 가송문화재단 작가, 이랜드문화재단 작가 등에 선정됐으며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 전북도립미술관, 포스코 등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10월24일까지. 2026/10/01
국중박·美 클리블랜드미술관, '지옥의 시왕' 선보인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어떻게 그렸을까. 영혼이 사후 연옥을 거쳐 극락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가 열린다.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CMA)은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오는 11일부터 내년 1월 3일까지 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특별전 '지옥의 시왕: 중세 한국의 사후세계'를 개최한다. CMA 소장 '시왕도(제4 오관왕)', '장도집', '지장보살도' 등을 만날 수 있다. 시왕도는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을 그린 불화로, 왕과 권속과 함께 망자가 형벌을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시왕은 제1 진광왕, 제2 초강왕, 제3 송제왕, 제4 오관왕, 제5 염라왕, 제6 변성왕, 제7 태산왕, 제8 평등왕, 제9 도시왕, 제10 오도전륜왕을 의미한다. '예수시왕생칠경'에 따르면 망자는 사후 7일마다 진광왕부터 태산왕까지 끌려가 심판받는다. 100일째에는 평등왕, 1년째에는 도시왕, 3년째에는 오도전륜왕에게 심판받은 후 다음 생을 선고받는다. '시왕도'를 대표로 전시는 죽음, 연옥, 극락까지 연결된 3개 주제로 구성됐다. 신앙이나 도덕에서 나아가 자연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후세계에 몰두하게 된 점을 조명한다. 1300년대 제작된 '시왕도' 10폭이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기도 하다. 이 외에도 재미교포 아니카 이와 박찬경 등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입장료는 전시 단일 관람 기준 성인 17달러(약 2만3000원), 65세 이상 및 단체(10명 이상) 15달러(약 2만원), 대학생·어린이 8달러(약 1만800원) 등이다. 2026/10/01
"선선해진 날씨, 실내서 즐기는 여유" 유통가, 전시로 소비자 '눈길' 선선한 가을을 맞아 유통업계가 다양한 전시를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백화점 야외광장에 대형 조형물을 설치하는가 하면 한글날을 앞두고 서울 도심 곳곳에서 미디어아트를 선보이고, 향과 소리 등을 활용한 체험형 전시도 마련했다. 쇼핑 공간과 브랜드 접점에 문화·예술 콘텐츠를 더해 가을 나들이에 나선 고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와 경험을 제공하려는 모습이다. 1일 업계에 따르면 갤러리아백화점은 서울 명품관에서 아트 플랫폼 프린트베이커리와 협업해 문형태 작가의 '캐러셀(Carousel)' 전시를 진행한다. 명품관 이스트 야외광장에는 높이 8m의 대형 조형물 '슬리핑 프린세스(Sleeping Princess)'가 들어섰다. 작가의 신작 입체 작품을 바탕으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을 대형 풍선 조형물로 구현했다. 야간에는 내부에 조명이 들어와 낮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실내 전시는 명품관 웨스트 5층에서 이어진다. 평면회화 14점과 입체 작품 7점 등 원화 신작 21점과 에디션 9종을 한자리에 모았다. 메인 작품인 '퍼펙트 픽처(PERFECT PICTURE)'를 비롯해 흑백 중심의 '모노시리즈'와 다양한 입체 신작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 작품은 모두 구매할 수 있다. 원화는 현장에서 가격을 확인할 수 있으며 판화와 오브제 등 에디션 작품은 120만~160만원대, 세라믹 에디션 작품은 30만원대다. 전시는 이날까지 진행한다. 신세계면세점은 한글날을 맞아 서울 도심을 전시장으로 꾸민다. 문화예술 프로젝트 'K-리플렉션(K-Reflection)'의 일환으로 홍인숙 작가와 협업한 미디어아트 '한지에 담은 안녕'을 선보인다. 이번 작품은 홍 작가의 한글 조형 작업을 3차원(3D) 공간과 움직임을 더한 미디어아트로 재구성했다. 한글 '안녕'을 모란꽃과 푸른 폭포의 획으로 형상화하고 소나무와 봉황, 호랑이, 제비, 구름 등 전통적인 길상 요소를 입체적으로 배치했다. 작품은 명동과 삼성동, 광화문 등 서울 주요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신세계면세점 명동점 10층 아이코닉존에서는 다음달 30일까지, 광화문 미디어파사드에서는 이달 31일까지, 삼성동 코엑스아티움 외벽미디어에서는 이달 14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국내외 관람객을 위한 QR 기반 다국어 인공지능(AI) 전시 안내도 제공한다. 별도 앱 설치 없이 원하는 언어로 전시와 작가 정보를 확인하고 작품에 대해 실시간으로 질문할 수 있다. 9일부터 31일까지 명동점에서는 작품 속 한글 '안녕'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이벤트도 진행한다. 가을 나들이 명소인 에버랜드에서도 이색 전시가 열린다. 아모레퍼시픽의 바디케어 브랜드 해피바스는 이날부터 한달간 에버랜드 아메리카 어드벤처지역 특별 체험관에서 '2026 거품멍전(展)'을 개최한다. 2022년 시작해 올해 5회째를 맞은 거품멍전은 거품을 매개로 휴식과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꾸민 체험형 전시다. 올해는 '달콤한 잠, 포근한 꿈'을 주제로 프리미엄 바디케어 라인 '달잠(DALZAM)'과 연계했다. 관람객은 ASMR 콘텐츠를 들으며 휴식을 취하고 달잠의 파우더리 라벤더 향과 제품을 체험할 수 있다. 거품 폭포를 감상하고 직접 비눗방울을 만들어보는 공간도 마련해 향과 소리, 촉감을 두루 활용했다. 전시장 내 미션을 수행한 방문객에게는 달잠 견본 2종 등을 증정하며 제품 구매 고객을 위한 현장 이벤트도 마련한다. 유통업계가 가을철 전시 콘텐츠를 확대하면서 쇼핑 공간의 역할도 넓어지고 있다. 상품 구매를 넘어 작품을 감상하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통해 가을 나들이객의 발길을 끌고 브랜드와 고객 간 접점을 넓히려는 전략이다. 2026/10/01
세계가 RM을 바라봤다, RM은 한국미술로 시선을 돌렸다[박현주 아트클럽] 윤형근 옆에 도널드 저드가 선다. 김환기의 푸른 점화는 이브 클랭의 파란 스펀지를 만난다. 한국미술을 서양미술에 기대 설명하기 위한 비교가 아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난 작품을 동등한 자리에 세우고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방식이다. 이 낯선 작품들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사람은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김남준)이다. 미술품을 수집해온 RM이 자신의 컬렉션을 처음으로 미술관에 본격 공개한다. 단순한 ‘BTS 스타의 소장품전’은 아니다. 자신이 사랑해온 한국 근현대미술을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SFMOMA) 소장품과 나란히 세워 작품과 작품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RM은 이번 전시를 “꽤 긴 자기소개”라고 했다.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돈과 삶, 노력, 심지어 집의 벽까지 내어주며 만들어온 컬렉션만큼 그 사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집의 이유를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저도 가끔은 제가 왜 이 모든 것들을 모았는지 잘 모르겠다”며 한 섹션의 제목을 ‘I Don't Know, But I Like It’이라고 지었다고 했다. RM에게 가장 중요했던 질문은 두 가지였다. “이것이 정말 나를 움직이는가?” 그리고 “2026년 바로 지금 이 작가와 이 작품이 여전히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가?”였다. SFMOMA는 오는 10월3일부터 내년 2월7일까지 ‘RM x SFMOMA: 비트윈 유 앤드 미(Between You and Me)’를 연다. SFMOMA에 따르면 RM과 미술관 소장품을 합쳐 약 180점이 출품되며, 이 가운데 약 140점이 RM의 개인 컬렉션이다. 미국에서 열린 한국 근현대미술 전시 가운데 손꼽히는 규모다. RM의 이름은 소장자에 머물지 않는다. 전시 공식 크레디트에 ‘큐레이터 RM(김남준)’으로 이름을 올렸다. SFMOMA의 아메리카 카스티요 큐레토리얼 프로젝트 매니저와 김효은 회화·조각 부문 어시스턴트 큐레이터가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작품 선정부터 전시장 글과 작품 설명에도 RM의 손길이 닿았다. 한국어와 영어 오디오 가이드를 직접 녹음하고 전시장에 흐르는 음악도 골랐다. ◆RM이 사랑한 윤형근, 방 하나에 16점 RM의 컬렉션 중심에는 한국 근현대미술이 있다. 윤형근과 장욱진, 유영국, 김창열, 박래현, 권옥연, 김윤신, 도상봉 등 여러 세대의 한국 작가들이 포진한다. 16점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이며 윤형근의 작품 세계가 전시실 하나를 채운다. 윤형근에게 청색은 하늘이고 엄버는 땅이었다. 두 색이 만나고 갈라지는 화면을 그는 ‘천지문(天地門)’으로 설명했다. 한 작가가 평생 밀고 간 색과 화면의 세계가 방 하나를 채운다. 그러나 전시는 한국미술을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세워놓지 않는다. RM의 소장품과 SFMOMA 컬렉션을 서로 마주 보게 한다. 윤형근의 ‘Burnt Umber & Ultramarine’(2001)은 미국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도널드 저드의 ‘To Susan Buckwalter’(1964)와 함께 전시된다. 두 사람은 1991년 실제 만나 교류했고, 저드는 이후 윤형근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는 데 힘을 보탰다. 김환기의 ‘26-I-70’과 ‘15-VII-70 #181’ 등 푸른 점화는 이브 클랭의 파란 스펀지 조각 ‘Éponge(SE251)’과 만난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작업했던 두 작가가 푸른색을 통해 무한과 우주를 향했던 시선이 한 공간에서 교차한다. 도상봉의 ‘개나리’와 조르조 모란디의 ‘꽃’도 함께 놓인다. 일상의 소재를 절제된 색과 형태로 바라본 두 화가의 정물이 국경을 넘어 마주한다. 누가 누구를 설명하기 위해 불려온 것이 아니다. 한국미술과 서구미술을 나란히 세워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닮은 점과 다른 점, 실제 인연과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게 한다. RM의 컬렉션은 이 지점에서 개인의 소장품을 넘어 하나의 시선이 된다. ◆“피카소는 아는데 우리 작가는 몰랐다” RM에게 미술 수집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8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술 수집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2018년 BTS 미국 투어 중 찾았던 시카고미술관을 꼽았다. 교과서에서 봤던 서양미술을 실제로 마주한 그는 피카소와 반 고흐는 알면서 정작 한국 작가들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국 작가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 관심은 윤형근과 장욱진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RM은 “제 컬렉션에는 한국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많다”며 “한국 밖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도 있을 텐데 조금 더 나은 관점과 감각을 보태고 싶은 마음으로 수집해왔고, 그 과정이 이번 전시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그동안 RM이 찾은 미술관과 전시를 팬들이 따라가는 ‘RM 투어’가 생겼다면 이번에는 방향이 달라진다. 세계의 관객들이 RM의 시선을 따라 한국미술을 만난다. RM은 “제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수집을 나누는 자리”라며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모은 컬렉션만큼 그 사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꽤 긴 자기소개가 될 것 같다”고 했다. RM 개인의 미술 사랑을 미국 미술관의 대규모 전시로 확장하는 데 기업과 기관도 힘을 보탰다. 삼성전자가 주요 후원사로 참여하고 한국국제교류재단(KF)도 전시를 지원한다. 빅히트뮤직과 하이브, 하이브 인사이트는 전시 파트너로 함께한다. RM이 이번에 세계에 들려주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그가 사랑해온 한국미술이다. 윤형근과 김환기, 유영국은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들의 그림이 훗날 세계적인 K팝 스타의 컬렉션이 되어 미국 미술관에서 세계와 다시 만나는 날을. 노래 한 곡이 그랬듯 그림 한 점도 한 나라를 알린다. 세계가 RM을 바라보게 만든 K팝. 이제 RM은 그 세계의 시선을 한국미술로 돌려놓는다. 자신에게 쏟아진 세계의 시선을 자신이 사랑하는 문화로 돌려놓는 것. 스타의 영향력은 이럴 때 품격이 된다. 2026/10/01
"고려불화 외길 50년은 숙명"…혜담스님이 펼친 '천년의 장엄' "숙명적이 아니었을까요. 운명이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월제혜담 스님이 반세기 동안 고려불화 연구와 재현에 매달린 이유다. 스님에게 비단 위에 부처를 그리는 일은 그림을 완성하는 작업이자 부처를 모시는 수행이었다. 3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제1미술관에서 개막한 계태사 고려불화학술연구소 특별전 '월제혜담 스님 붓끝으로 나투신 천년의 장엄, 고려불화대전’은 그 오랜 수행의 결실을 펼쳐 보이는 자리다. 이번 전시는 강원 속초 계태사 주지인 혜담 스님이 고려불화 도상과 재료, 전통 제작기법을 연구하며 다시 구현해 온 작품들을 모았다. 고려 불교 미술의 정수인 고려불화의 맥을 50여 년간 이어온 혜담 스님의 역작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대규모 전시다. 이날 개막식은 개식 선언을 시작으로 삼귀의,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등 정중한 의례와 의식으로 시작됐다. 행사에는 수덕사 문장 설정 스님과 쌍계사 회주 덕운 스님, 보문종 총무원장 인구 스님을 비롯해 주호영 국회의원, 윤재웅 동국대 총장, 류완하 동국대 WISE캠퍼스 총장, 이병선 속초시장 등이 참석했다. 축사에 나선 쌍계사 회주 덕운 스님은 고려불화가 지닌 깊은 정신적 가치와 혜담 스님의 평생에 걸친 노고를 높이 평가했다. 덕운 스님은 "혜담 스님은 반세기 동안 부처님의 수행 모습과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의 세계를 진실한 마음으로 불화에 담아냈다"며 "국내뿐 아니라 중국, 베트남, 태국, 일본, 나아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초청 전시까지 마치며 고려불화의 위상을 세계에 알린 스님의 위대한 작업에 깊은 감동과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밝혔다. 대표 작품은 높이 5m 안팎의 수월관음보살상, 오백나한상, 아미타삼존상이다. 수월관음보살상은 520×283㎝, 오백나한상은 550×310㎝에 이른다. 아미타삼존상은 전통 도상과 화면 구성을 바탕으로 새롭게 조성한 대작이다. 금니로 표현한 문자와 문양을 화면 구성에 결합했다. 여러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낸 변상도와 불·보살상, 나한상도 함께 소개한다. 월제혜담 스님은 50년 동안 고려불화 외길을 걸어온 소회를 밝혔다. 스님은 "고려불화 복원에 전념해 온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숙명이자 운명이었다"며 "고려시대에는 그림 자체를 부처님으로 모시고 기도했기에 '불화'라기보다 '화불(畫佛)'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스님이 비단 한 폭을 대하는 마음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같은 천이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옷이 되거나 걸레가 되지만, 스님에게는 부처를 모시는 바탕이 된다. 스님은 "부처님을 모시는 천으로 생각하고 거기다 부처님을 새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에 나가거나 다른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50여년 동안 한결같이 화불 조성에 힘을 쏟았다. 스님은 그 시간이 "인간의 어떤 능력이라든가 한계를 초월한 그런 운명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계태사 고려불화학술연구소에 따르면 스님은 비단 뒤에서 색을 입히는 배채와 섬세한 선묘, 천연 안료의 중첩, 금니 문양 등 고려불화의 전통 표현기법을 연구하며 재현작 500여점을 제작했다. 국내외에서 80여 차례 전시를 열며 그 성과를 알려왔다. 스님이 바라보는 고려불화에는 붓을 든 사람뿐 아니라 그림을 이루는 재료의 몫도 있다. 스님은 식물성·동물성 재료와 돌가루, 금속가루 등을 언급하며 "고려불화는 인간의 힘만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공덕으로 이렇게 고려화불이 탄생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세기 성과를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일에는 현실적 제약도 따랐다. 당초 연구소는 재현작 130여 점을 출품한다고 안내했지만, 혜담 스님은 전시장 공간이 부족해 준비한 작품을 모두 걸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관람객에게 바라는 것은 고려불화를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만 바라보지 않는 일이다. 스님은 청자와 금속활자, 고려대장경과 함께 고려불화를 이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꼽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를 통해 우리 역사를 더 깊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계태사 고려불화학술연구소가 주최·주관하는 전시는 내달 12일까지 이어진다. 관람료는 무료다. 전시 주요 작품과 관련 자료를 수록한 '월제혜담 스님 붓끝으로 나투신 천년의 장엄, 고려불화 대전집'도 출간될 예정이다. 2026/09/30
방탄소년단 RM "지루한 부자 돼버린 걸까 죄책감…'모르지만 좋아해서' 나눕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디딘 땅을 온전히 믿지 못할 때, 예술은 발판이 아니라 차라리 그가 잠시 기대어 숨을 고르는 난간이 돼주곤 한다. 세계의 가장 높은 무대 위에 서면서도 끝내 '부유(浮游)의 감각'을 떨쳐내지 못했던 한 청년에게, 그림과 조각은 그렇게 삶을 지탱하는 침묵의 기둥이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 서서 여러분께 이야기하는 이 순간에도 저는 늘 어딘가를 표류하고 떠다니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미국에 있을 때도 그렇고 제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아시다시피 썩 유쾌한 감정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감정 때문에 미술에 많이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글로벌 슈퍼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이자 한 사람의 집요한 감상자, RM(32·김남준)이 마이크 앞에 섰다. 환호와 조명이 쏟아지는 스타디움이 아니라, 흰 벽과 고요한 공기가 내려앉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의 전시실 앞이었다. 소속사 빅히트 뮤직(하이브)과 미국 서부 유력 일간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등에 따르면 RM은 29일(현지시간) 오후 SFMOMA에서 열린 특별전 'RM x SFMOMA: 비트윈 유 앤 미(Between You and Me)'의 비공개 미디어 프리뷰 리셉션의 연사로 나섰다. 미술관 설립 이래 최초의 K-팝 아티스트 협업이자, 그가 수년 동안 모아온 140여 점의 개인 소장품을 공공 미술관이라는 열린 장소에 처음으로 내어놓는 자리였다. 이날 그는 완성된 권위를 과시하기보다, 여전히 자신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미완의 혼란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편을 택했다. 정돈된 문장 뒤로 숨는 대신 자신의 결핍과 망설임을 그대로 꺼내놓는 태도였다. "공동 큐레이터로서는 오늘이 제 데뷔인데요. 긴장되네요. 우선 저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사람입니다. 아마 나중에 아시게 될 거예요. 이 연설문을 한 열 번 정도 고친 것 같아요. 그런데 늘 그렇듯 고치면 고칠수록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RM은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모으는 걸 좋아했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명은 'rkive'다. 자신의 활동명 RM의 첫 글자 'R'에 '아카이브'(archive·파일 저장고)를 합했다. 그의 음악 작업실 이름이기도 하다. RM은 이어 예술을 소유하는 일 뒤편에 드리운 내밀한 죄책감, 그리고 그 사적인 벽을 허물어 공공의 시선 앞에 세우기까지의 윤리적 번민을 차분히 털어놓았다. "죄책감도 느껴집니다. '내게 필요하지도 않은 이렇게 많은 것들을 정말 짊어지고 살아야 하나?', '결국 그냥 지루하고 돈 좀 있는 사람이 돼버린 건가?' 뭐,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것들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돈과 삶, 노력, 심지어 집의 벽까지 내어주며 만들어온 컬렉션만큼 그 사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꽤 긴 자기소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집의 벽을 내어준다는 것은 결국 자기 세계의 가장 내밀한 여백을 타자의 시선과 온기에 내맡기는 일이다. 현지 유력 언론 역시 스타라는 거대한 외피를 벗고 그 취약한 고백의 자리에 선 한 개인을 포착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이날의 공기를 전하며 "평소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무대 위의 퍼포머가 비공개 미디어 프리뷰에서 긴장감을 떨쳐내며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솔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짚었다. 현장의 열기 또한 조용한 파동을 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초청받은 언론과 관계자만 입장할 수 있는 비공개 행사였음에도, RM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한 수십 명의 방탄소년단 아미(ARMY)가 미술관 밖 거리를 메우고 줄을 섰다"며 런던에서 개막 주간을 보기 위해 날아온 열성 팬들의 목소리를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풍경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RM은 휴가 등 틈이 날 때마다 국내외 여러 미술관을 순례해 온 소문난 미술 애호가다. 과거 국내에선 경주엑스포대공원 솔거미술관 등을, 해외에선 뉴욕 근교 미술관 디아 비컨(Dia Beacon), 텍사스의 치나티 파운데이션·로스코 예배당·휴스턴 미술관, 워싱턴 D. C. 인근 글렌스톤 미술관 등을 방문했다 이후 팬덤 아미들이 미술관을 잇따라 방문하며 각 지역의 미술관과 해당 지역 활성화에 적잖은 도움을 줬다. 혼자만의 조용한 응시가 타인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문화적 파동으로 번져나간 셈이다. RM은 카우스(KAWS)와 무라카미 다카시 등 세계적인 현대 작가들뿐만 아니라 이대원·김종학과 같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깊이 있게 모아온 '열렬한 수집가'이기도 하다. 단순히 작품을 그러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해외에 있는 한국 문화재 보존 및 복원에 써달라"며 각각 1억 원씩 총 2억 원을 기부하는 문화재 지킴이로서의 소명도 묵묵히 실천해왔다. 2022년 미국 미술 전문매체 아트넷 뉴스가 그를 '혁신가 35인'으로 선정하며 '투자자(The Investors)' 카테고리에 포함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에게 예술은 감상의 취미를 넘어 삶의 태도를 벼리는 엄격한 나침반이었다. 그의 솔로 정규 1집 '인디고(Indigo)'(2022)의 첫 트랙 '윤(Yun)'은 '한국 단색화의 거목(巨木)' 윤형근 화백의 나직한 육성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다. "그는 말했지 늘, 먼저 사람이 돼라 / 예술 할 생각 말고 놀아 느껴 희로애락"이라는 노랫말처럼, 기교나 명성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품과 인간됨을 먼저 묻던 거장의 가르침은 RM이 예술을 대하는 윤리적 밑바탕이 됐다. 이번 전시의 단초 역시 군 복무 중이던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RM은 2025년 6월 전역하기까지 복무의 시간 틈틈이 미술관과 대화를 나누며 전시를 벼렸다. "당시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는 제안이라면 어떤 것이든 반가웠을지 모른다"는 특유의 담담한 유머를 곁들이면서도, 그는 '아웃사이더'로서 마주해야 했던 치열한 노동의 순간을 회고했다. "미술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자유로운 것 같아요. 대신 작품 설명을 100단어 안에 맞추는 훈련은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었죠.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그 순수함 때문에 수백 장의 작품 설명을 쓰고 지우고 또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언어를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정직한 문장 하나를 남기는 일. 전시는 오는 10월3일부터 내년 2월7일까지 미술관 7층에서 열린다. RM의 소장품 140여 점과 SFMOMA 소장품 36점 등 총 180여 점이 8개 섹션으로 나뉘어 펼쳐진다. 윤형근, 박래현, 장욱진, 권옥연, 김윤신, 도상봉 등 식민과 전쟁, 급격한 근대화의 상흔 속에서도 묵묵히 붓을 들었던 한국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마크 로스코, 아그네스 마틴, 앙리 마티스, 조지아 오키프, 김환기, 백남준의 명작들과 한 공간에서 마주 본다. 국경과 시대를 건너뛴 작품들이 서로의 그림자를 비추며 자연, 기억, 실존이라는 인간 본연의 화두로 수렴된다. RM은 SFMOMA의 아메리카 카스티요(América Castillo), 김효은 공동 큐레이터와 함께 작품 선정과 전시 구성 등 큐레이션 전반에 직접 참여했다. RM은 또한 큐레이션뿐만 아니라 전시장 벽면의 국·영문 해설 글을 직접 썼고, 제 목소리로 양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녹음했으며, 공간을 채울 배경음악까지 정성스레 골랐다. 이론의 무게에 짓눌리기보다 자신의 직관을 온전히 신뢰하기로 한 한 섹션에는 '아이 돈 노, 벗 아이 라이크 잇(I Don't Know, But I Like I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른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진정한 애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태도다. "마찬가지로 저는 늘 스스로의 한계를 느낍니다. 때로는 제 자신이 굉장히 자랑스럽다가도 또 굉장히 부끄러워져요. 그 사이를 계속 오갑니다. 결국 저는 저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가장 중요했던 질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이것이 정말 나를 움직이는가?'였고, 또 하나는 '2026년 바로 지금 이 작가와 이 작품이 여전히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가?'였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소모되는 시대에 저는 과거 몇몇 예술가들의 태도가 오히려 오늘날 더 깊이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응시하고 '나 이상이 될 수 없다'는 명제를 통과한 자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화려한 수사나 맹목적인 과시가 증발한 자리에서, 그가 붙든 것은 결국 예술가들이 삶을 대하던 '태도' 그 자체였다. 이날 질의응답에서 관람객들이 이 공간에서 무엇을 건져 올리길 바라느냐는 물음에 그는 다시 한번 담백한 진심을 건넸다. "이 전시는 저에 대한 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저를 조금 더 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전시가 꽤 많은 부분에서 제 자신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느끼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 전시를 보러 가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지 그냥 느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전부에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시작한 긴 자기소개는, 결국 소유를 덜어내고 자신을 비워 타인과 예술이 만나는 너른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로 맺어지고 있었다. 2026/09/30
비석 위에 우뚝 선 한글…일중 김충현 ‘한글 비’ 첫 전시 궁체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비석에 새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서간문과 소설 필사에 적합한 글씨여서 멀리서 읽기 어렵고, 글씨를 크게 키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서예가 일중 김충현(1921~2006)은 다른 한글 글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등 옛 판본의 글자에 전서와 예서의 필획을 접목했다. 직선적인 형태와 굵고 가는 획의 변화로 멀리서도 힘 있게 읽히는 글씨. 이른바 일중의 한글 ‘고체(古體)’가 탄생했다. 김충현이 평생 써온 한글 비문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살펴보는 전시가 열린다. 사단법인 일중선생기념사업회는 김충현 서거 20주기를 맞아 30일부터 10월19일까지 서울 백악미술관 전관에서 추모전 '빛 아래 선 한글'을 개최한다. 김충현의 대표적인 한글 비 탁본을 모아 선보이는 첫 전시다. ◆광복 후 첫 한글 비부터 200여 개 김충현은 광복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한글 비의 역사를 이끈 서예가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글 서예 교본을 저술했던 그는 해방 후인 1947년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시작으로 1996년 절필할 때까지 200여 개의 한글 비문을 썼다. 특히 그의 한글 서예에서 중요한 변화는 1958년 ‘옥포 대승첩 기념탑명’에서 나타났다.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한글 서체인 ‘고체’를 처음 선보였다. 고체는 단순히 새로운 모양의 글씨를 만들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비석이라는 매체가 새로운 글씨를 요구했다. 궁체는 가까이에서 읽는 편지나 책에는 적합했지만 거대한 기념비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충현은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같은 고판본의 글자에 전서·예서의 필획을 더해 직선적이고 힘 있는 서체를 만들었다. 한문 비석에서 전서·예서의 머리글자와 해서의 본문이 담당했던 역할을 한글의 고체와 궁체로 옮겨온 셈이다. ◆비석에 새겨진 현대사의 장면들 이번 전시에는 글씨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충현의 회고록 '예에 살다'에 기록된 당시 이야기를 해당 작품과 함께 소개한다. 특히 이승만 정부 시기 한글 표기 정책을 둘러싼 이른바 ‘한글파동’ 속에서 제작된 ‘사육신비’ 관련 일화와 민영환 동상에 새긴 글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등 한글 비를 둘러싼 당대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전시 제목 ‘빛 아래 선 한글’은 광복과 함께 한글이 공적인 기념비의 문자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역사를 가리킨다. 올해는 한글날 제정 100주년이기도 하다. 전시는 김충현의 한글 비를 연대순으로 따라가며 한글이 책과 편지 속 글씨를 넘어 거리와 광장, 기념비 위에 새겨지는 공공의 문자로 확장된 과정을 보여준다. 2026/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