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매달린 ‘황금의 영웅들’…바젤리츠, 베니스에 남긴 마지막 회화 울림 황금빛 화면 위에 거꾸로 매달린 늙은 육체가 떠 있었다. 발끝은 하늘을 향했고, 주름진 얼굴은 바닥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하이힐을 신은 여체도, 뒤엉킨 노년의 누드도 모두 중력에서 이탈한 채 금빛 평면 위를 부유했다. 금빛 화면 속 여성은 성화 같았지만 동시에 무너진 욕망의 초상에 가깝다. 형태는 유지하고 있지만, 선들은 뼈와 기억의 잔향처럼 떨린다. 발끝에 남겨진 하이힐은 더 이상 유혹의 기호가 아니다. 쇠락해가는 육체 끝에 가까스로 매달린 욕망의 흔적처럼 남아 있다. 독일 화가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2026)가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것은 결국 인간의 육체였다. 찬란함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존재의 흔적이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조르조 마조레 섬의 폰다치오네 조르조 치니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Eroi d’Oro(황금의 영웅들)’는 아름답고도 쓸쓸하다. 전시 개막 직후 바젤리츠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전시장 입구에는 “화가로서의 활동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일종의 결론, 혹은 지난 세월 작업의 종합(synthesis)을 만들고 싶었다”는 바젤리츠의 문장이 적혀 있다. 전시 설명이라기보다 거의 유언에 가깝다. 이번 전시는 바젤리츠가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도달한 회화의 언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금빛 캔버스들이 먼저 관람객을 압도한다.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황금빛 회화들은 제단처럼 떠 있다. 그러나 그 안의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 채 뒤집혀 있다. 삐걱거리는 선으로 남은 노년의 육체 위로 원색의 붓질이 상처처럼 얹혔다. 숭고와 쇠락, 성화와 해체가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한다. 공간을 지워버린 황금빛 화면은 쇠약해진 육체와 끝내 사라지지 않는 회화의 에너지를 동시에 드러낸다.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평생 이미지를 거꾸로 그려온 화가다. 1969년부터 인물을 뒤집어 그리기 시작한 그는 회화를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어떻게 그리는가’의 문제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이번 연작에서 뒤집힌 육체는 더 이상 형식 실험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삶 전체를 거꾸로 응시하는 노년의 자화상에 가깝다. 특히 이번 전시를 지배하는 것은 ‘금빛’이다. 그러나 바젤리츠는 이를 숭고의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설치된 인터뷰 영상에서 그는 “금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다. 빨강이나 파랑 같은 하나의 색일 뿐”이라며 “금빛 배경은 공간성을 지우고 천상의 구체(celestial sphere), 혹은 무(無)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금빛 배경은 원근과 장소를 제거한다. 화면 속 인간은 현실 공간 위에 서 있지 않다. 마치 나무판에서 도려낸 성상(icon)처럼 허공 위에 떠오른다. 바젤리츠는 비잔틴 이콘과 고대 미라 초상화를 언급하며 “금빛 배경은 인물의 공간성을 흐리게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번 연작은 단순한 회화라기보다 성화의 구조 안에 현대 인간의 불안한 육체를 밀어 넣는다. 검은 벽 안에서 황금빛 대작들은 제단처럼 떠 있고, 뒤집힌 인간들은 천국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 매달린 존재처럼 흔들린다. 전시 제목 ‘황금의 영웅들(Eroi d’Oro)’ 역시 역설적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승리한 영웅이라기보다 추락 직전의 인간 군상이다. 앙상한 드로잉 선은 늙은 육체의 흔적처럼 떨리고, 폭발하듯 남겨진 붓질은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은 생의 에너지처럼 남아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내 엘케와 자신의 누드를 그린 연작이다. 젊음의 육체가 아니다. 주름지고 처진 몸이다. 그러나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그 육체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거대한 금빛 화면 위에 늙고 쇠락하는 육체를 걸어두었다. 바젤리츠는 영상 인터뷰에서 이번 연작을 “지난 60년간 이어온 수많은 실험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진짜 금빛 바탕 위에 가능한 한 섬세하고 완전한 드로잉을 그리고 싶었다”며 “아내와 나 자신의 누드, 혹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렸다”고 말했다. “인간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져가는 순간조차 이미지가 될 수 있다.” 그의 말년 회화는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휠체어에 앉은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영상에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그는 건강 문제와 고령 때문에 베니스 전시에 직접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다. “베니스에 직접 가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 전시가 폰다치오네 치니에서 열리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끝까지 자기 존재보다 회화를 먼저 둔 그의 말은 유언처럼 남았다. 바젤리츠는 황금빛 화면 위에 가장 유한한 인간을 남기고 떠났다. 어쩌면 황금빛은 영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인간에게 잠깐 허락된 마지막 빛이었는지 모른다.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전시장을 감싸는 공기는 묘하게 장례 의식처럼 느껴진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 열린다. 한편 바젤리츠의 생전 마지막 대규모 전시 중 하나로 주목받는 회고전은 오는 8월 서울에서도 이어진다. 흥국생명 빌딩 내 세화미술관은 바젤리츠의 주요 회화와 조각 작업을 아우르는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2026/05/08
베니스 산마르코에 뜬 이우환…伊 개념미술 거장 보에티와 나란히 전시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병행전시로 열린 ‘Lee Ufan’은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의 심장부, SMAC Venice에서 펼쳐진다. 일본 모노하(Mono-ha)의 사상적 기둥이자 한국 단색화의 핵심 작가인 이우환의 70여 년 작업세계를 압축한 대규모 회고전이다.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한복판. 관광객과 셀카봉, 비둘기 떼와 수상버스의 소음 사이를 지나 산마르코 아트센터(SMAC Venice)에 들어서면 갑자기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다. 2층의 8개 공간에 선보인 이번 전시는 회화와 설치,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신작을 통해 이우환이 평생 탐구해온 ‘관계(Relatum)’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펼쳐낸다. 흰 캔버스 위 몇 개의 붓질, 모래 위 수천 개의 철막대, 서로 키스하듯 놓인 돌 두 개가 공간 전체의 공기를 바꾼다. 전시는 SMAC Venice의 8개 전시실 전체를 사용해 초기 ‘From Point’, ‘From Line’ 연작부터 대표 설치 ‘Relatum’ 시리즈, 최근 회화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작업 세계를 조망한다. 단순한 회고전이라기보다, '관계'라는 이우환의 사유를 공간으로 번역한 하나의 거대한 환경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재구성된 설치 작업도 눈길을 끈다. ‘Relatum (formerly Iron Field)’(1969/2026)다. 모래 위에 수천 개의 철막대가 수직으로 꽂혀 거대한 금속의 들판을 만든 설치다. 멀리서 보면 갈대숲 같고, 가까이 다가가면 금속의 차가운 긴장이 피부에 닿는다. 이우환은 1960년대 후반부터 회화와 병행해 조각 작업을 전개하며 자신을 '창조자'보다 “매개자(mediator)”로 규정해왔다. 자연과 인공 재료의 만남을 통해 존재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핵심 개념이다. ‘Relatum’이라는 단어 역시 중요하다. 이우환은 1972년 이후 자신의 조각 작업에 모두 ‘Relatum’이라는 이름을 붙여왔다. 사물과 요소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철학적 용어다. 작품은 완결된 조형물이 아니라 관계가 발생하는 장(field)으로 진동한다. 특히 이번 베니스 버전은 2019년 미국 디아 비컨(Dia Beacon) 전시 이후 처음 다시 구성된 설치다. 베니스의 건축 구조에 맞춰 새롭게 재배치되며 공간 전체와 긴밀하게 호흡한다. 이우환의 회화 역시 공간과 함께 작동한다. 긴 회랑형 구조를 따라 이어지는 흰 캔버스 위 검은 붓질은 단순한 점과 선이 아니다. 반복과 멈춤, 생성과 소멸의 시간성을 드러내는 흔적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붓 끝의 떨림이 남아 있고, 멀리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침묵처럼 떠오른다. 최근작에서는 변화도 감지된다. 검은 점과 선 중심의 화면에서 벗어나 붉은 기운이 스며드는 색의 농담이 등장한다. 화면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번져드는 붉은 색면은 마치 빛이 피어나는 순간 같다. 형태를 설명하기보다 존재의 온도를 남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제시카 모건은 외신 인터뷰에서 “이우환 작업 전체의 궤적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며 “그는 예술가이자 철학자”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번 전시는 조형보다 ‘사이(interval)’를 보여준다. 이우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채움보다 비움이고, 형상보다 거리다. 돌과 철판, 벽과 캔버스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이 작품의 본체가 된다. 베니스라는 도시와도 묘하게 맞물린다.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베니스는 늘 존재와 부재 사이를 흔들리는 공간이다. 이우환의 작업 역시 충돌보다 공존, 소유보다 관계를 향한다. 그래서 화려한 비엔날레 현장 속에서도 그의 전시는 가장 조용한 장소가 된다. 이우환은 돌을 조각하지 않는다. 대신 돌이 “돌로 존재하는 상태”를 드러낸다.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배치를 통해 새로운 감각의 관계망을 생성한다. 이번 전시는 이우환이 왜 여전히 세계 미술계에서 동시대적인 작가인지를 보여준다. 이미지 과잉 시대에 그는 가장 적은 것으로 가장 깊은 울림을 만든다. 수많은 작품이 관객을 향해 소리치는 비엔날레 현장에서, 그의 작업은 오히려 침묵으로 말을 건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SMAC Venice가 이우환 개인전과 함께 이탈리아 개념미술의 거장 알리기에로 보에티(Alighiero Boetti) 전시를 나란히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두 전시는 같은 공간 안에서 병치되며 서로 다른 문화권의 두 작가가 공유하는 사유의 결을 드러낸다. 보에티는 지도, 언어, 질서와 우연의 구조를 탐구했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핵심 작가다. 반면 이우환은 점과 선, 돌과 철판 같은 최소한의 요소를 통해 존재와 관계를 사유해왔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작가 모두 ‘만드는 행위’보다 세계와의 관계 맺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맞닿는다. 실제로 전시장 입구에는 보에티와 이우환의 전시 포스터가 나란히 걸려 있다. 베니스 한복판에서 동서양 현대미술의 두 축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베니스의 물빛과 침묵 사이에서 펼쳐진 이우환의 ‘관계의 철학’은 오는 11월 22일까지 이어진다. 2026/05/08
“올해 베니스 가장 도발적 병행전시”…폰다치오네 프라다 ‘헬터 스켈터’ 미국 현대미술의 문제적 작가로 꼽히는 아서 자파와 리처드 프린스를 함께 조명한 전시가 베니스에서 공개됐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출신 낸시 스펙터(Nancy Spector)가 기획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폰다치오네 프라다(Fondazione Prada)는 이번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병행전시로 ‘헬터 스켈터: 아서 자파와 리처드 프린스(Helter Skelter: Arthur Jafa and Richard Prince)’를 선보인다. 전시는 베니스 산타 크로체 지역 카 코르네르 델라 레지나(Ca’ Corner della Regina)에서 9일부터 11월 23일까지 열린다. 전시 제목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는 혼란과 폭주 상태를 뜻하는 표현으로, 미국 사회의 불안과 폭력성, 이미지 소비 구조를 암시한다. 원래 영국 놀이공원의 미끄럼 놀이기구를 뜻하는 말로, 이후 혼란과 폭주의 상태를 의미하는 대중문화 용어로 확장됐다. 비틀스(The Beatles)의 1968년 동명 곡과 찰스 맨슨 사건 등을 거치며 미국 사회의 불안과 폭력, 혼돈의 상징처럼 사용돼왔다. 또한 이번 제목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를 참조한다. 당시 전시는 미국 사회의 인종과 폭력 문제를 다뤘지만 흑인 작가 배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외신들은 이번 전시를 두고 “올해 베니스에서 가장 도발적인 병행전시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전시는 사진, 영상, 설치, 회화 등 50여 점으로 구성된다. 두 작가는 영화, 뉴스, 광고, SNS, 대중문화 이미지를 차용하고 변형하며 미국 사회의 욕망과 권력, 인종과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아서 자파는 흑인 정체성과 미국 시각문화의 폭력성을 영상과 사운드로 풀어내는 작가로 주목받고 있으며, 리처드 프린스는 광고와 대중 이미지를 재촬영(rephotography)하는 방식으로 현대 이미지 소비 구조를 비틀어온 작가다. 폰다치오네 프라다는 베니스 산타 크로체 지역 그랜드캐널 변의 18세기 바로크 양식 건물 카 코르네르 델라 레지나(Ca’ Corner della Regina)를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720년대 건축된 이 팔라초는 과거 비엔날레 현대미술 아카이브(ASAC) 공간이었으며, 프라다 재단이 2011년부터 베니스 전시장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2026/05/07
칠판 위에 쌓인 ‘깊은 시간’…김명희 “삶과 그림은 필연적 관계” “나는 디아스포라보다 앰뷸런트(ambulant)에 가깝다.” 화가 김명희에게 이동은 떠돎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뉴욕과 춘천 내평리를 오가며 작업해온 그는 정착과 귀속 대신 ‘이동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선택했다. “내 그림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닌 현실의 문제, 특히 ‘Dislocation’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이다.” 김명희가 2003년 작가 노트에 남긴 이 문장은 삶과 그림의 관계를 압축한다.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가 7일 개막한 개인전 ‘깊은 시간’은 그렇게 반세기 동안 축적된 삶과 작업의 시간을 조망한다.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명희는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해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수학했다. 1970년대 남성 중심 미술계 속에서 여성 작가 그룹 ‘표현’ 활동에 참여하며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했고, 이후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삶과 작업을 병행해왔다. 1990년 춘천 내평리 폐교에서 발견한 칠판은 그의 작업 세계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작가는 칠판을 단순한 지지체가 아니라 ‘소거와 축적’이 반복되는 시간의 표면으로 확장했다. 김명희의 ‘칠판 회화’는 쓰고 지우는 행위가 반복되는 칠판의 물성을 통해 시간의 축적과 소거를 드러낸다. 어두운 표면 위에 쌓이는 오일 파스텔의 점과 선, 세밀하게 묘사된 인물과 자연의 형상은 이미지가 떠오르고 사라지는 기억의 층위를 환기한다. 영상이 결합된 대형 칠판 작업은 정적인 회화를 넘어 호흡과 움직임까지 포착하며 삶의 지속성을 암시한다. 2003년과 2012년에 이어 갤러리현대에서 세 번째로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1980년대 목탄 드로잉부터 칠판 회화, 영상 결합 작업, 신작까지 40여 점을 선보인다. 삶과 역사, 개인의 경험과 집단 기억이 교차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미니 회고전 형식이다. 김명희는 “씨앗을 제자리에 심고 태양과 비를 기다리며 가꾸는 것은 내 몫이다. 삶과 그림의 필연적 관계”라고 말해왔다. 그는 “내 안목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며 “극단적인 여성주의와는 조금 다르다”고 했다. 이번 전시는 내평리 풍경, 자화상, 군상, 지도 연작과 더불어 김명희의 삶을 조명하는 장우진 감독의 다큐멘터리 일부도 함께 소개한다. 특정 사조나 경향에 자신을 귀속시키기보다 삶과 작업의 연속성 속에서 독자적인 시간을 구축해온 김명희는 최근 한국 여성미술 서사를 다시 쓰는 흐름 속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민중미술과 단색화 중심의 미술사 바깥에서 자신만의 궤적을 구축해온 ‘늦게 읽히는 작가’라는 점에서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열린다. 2026/05/07
베니스서 V&A 유물 흔든 갈라 포라스-김 “보존은 또 다른 손실” 유물은 원래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박물관에 들어가는 순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응용예술관(Applied Arts Pavilion)에서 한국계 콜롬비아 작가 갈라 포라스-김(Gala Porras-Kim)은 그 역설을 다시 드러냈다. 어두운 전시장 안,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A)의 마리오네트 인형들은 그림자를 배경으로 천장 아래 미세하게 흔들렸다.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르세날레 응용예술관 전시장에서 만난 갈라 포라스-김은 “이번 작업의 핵심은 기관이 어떻게 손실(loss)을 정의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라며 “손실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A)과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작가는 V&A 소장품과 보존 시스템을 연구하며 유물이 어떻게 ‘역사적 대상’으로 규정되고 관리되는지를 추적했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보존 과학에서 말하는 ‘손상의 10가지 요인(decay agents)’이었다. 물과 태양광, 열, 지진 같은 물리적 손상뿐 아니라 ‘해체(dissociation)’라는 개념이 작업의 출발점이 됐다. 그는 “‘해체’는 사물이 가진 메타데이터(metadata)를 잃어버리는 상태”라며 “사람들이 더 이상 그 대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많은 유물은 박물관 컬렉션이 되기 전 원래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며 “기관이 그것을 오직 역사적 유물로만 규정하는 순간, 이전 기능과 의미는 오히려 손상된다”고 말했다. 전시장 한쪽의 거대한 커튼 설치는 실제 1950년대 V&A 직원의 절도 사건에서 출발했다. 당시 직원은 박물관 소장 패브릭을 훔쳐 자신의 집 커튼으로 사용했다. 갈라 포라스-김은 오히려 그 사건에서 유물의 “원래 기능”을 발견했다. “그 패브릭은 원래 커튼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죠. 훔치고 잘라 커튼으로 만든 행위는 어쩌면 원래 운명으로 되돌린 과정일 수도 있어요.” 잘게 찢어진 패브릭 조각들은 이후 보존 전문가의 보강(backing) 작업을 거치며 새로운 흔적과 패턴을 갖게 됐고, 그는 그 구조를 다시 이미지로 재구성했다. 또 다른 공간에는 그림자와 함께 흔들리는 마리오네트 모빌 작업이 설치됐다. 움직임보다 그림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인형은 원래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움직이면 손상됩니다. 그 역설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는 “미세한 움직임을 그림자를 통해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V&A에는 인형의 움직임을 점검하고 리허설하는 공간이 있다고 한다. 인터뷰 도중 갈라 포라스-김이 2층 바닥을 직접 뛰어 움직임을 만들자 천장 아래 매달린 마리오네트들이 크게 흔들렸고, 벽면에 드리운 그림자 그림 역시 함께 출렁이며 전시장에 묘한 입체감을 만들어냈다. 이번 비엔날레 주제 ‘인 마이너 키즈(In Minor Keys·단조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잠시 웃으며 말을 골랐다. “달콤쌉싸름한 감정이 있어요. 기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가장 큽니다.” 올해 본전시는 지난해 타계한 카메룬 출신 큐레이터 코요 쿠오(Koyo Kouoh)가 생전 구상한 프로젝트다. 갈라 포라스-김은 “초청 작가 모두가 ‘코요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전시를 준비했다”며 “이번 전시는 화려하거나 직접적이지 않지만 우리가 시간을 들여 바라봐야 하는 기저의 과정(underlying processes)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어 “유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며 “언젠가 내 작업 역시 같은 시스템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면 미래의 보존 방식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갈라 포라스-김의 작업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한국계 작가’라는 정체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작업은 박물관이라는 제도와 보존 시스템 자체를 정면으로 질문한다. 그는 “제 작업 세계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기관의 본질적인 고민과 깊이 맞닿아 있다”며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기관과 사람이 함께 시간을 통과해온 과정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1984년생인 갈라 포라스-김은 콜롬비아·한국·미국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작가다. 유물과 오브제가 제도적 맥락과 분류 체계 속에서 어떻게 수집·인식·해석되는지를 탐구해왔으며, 문화기관의 보존 관행과 박물관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작업에 담아왔다. 드로잉·조각·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자연적 요소와 문화 오브제의 존재론적 복합성을 탐구하며, 박물관적 관습과 보존의 개념에 균열을 내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제갤러리 전속 작가로 활동 중이며, 리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파울러 미술관, MUAC 등에서 전시했다. 한편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는 지난해 타계한 카메룬 출신 큐레이터 코요 쿠오가 생전 구상한 ‘인 마이너 키즈(In Minor Keys·단조로)’를 주제로 열린다. 본전시에는 111명(팀)의 작가가 참여하며, 한국 작가로는 갈라 포라스-김을 비롯해 제주에서 활동하는 요이(Yo-E Ryou), 한국계 미국 작가 마이클 주가 초청됐다. 1895년 시작된 베니스비엔날레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로 꼽힌다. 올해는 99개 국가관과 31개 공식 병행전시가 베네치아 전역에서 펼쳐진다. 공식 개막은 9일이며 전시는 11월 22일까지 이어진다. 2026/05/07
5억년 화석 진동시킨 마이클 주 "검은 건반처럼 감정을 울리고 싶었다”[문화人터뷰] “이번 작업은 연결성과 또 다른 형태의 균형에 관한 프로젝트입니다. 기술을 통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균형이죠.”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된 한국계 미국 작가 마이클 주(60)는 5억 년 된 화석에 다시 진동을 불어넣었다.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르세날레 전시장에서 그의 설치작업은 낮게 흔들리고 있었다. 금속 구조물에 매달린 거대한 화석판들은 미세한 떨림을 이어갔고, 관람객들이 귀를 가까이 대자 사람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마이클 주는 이번 비엔날레 본전시에 두 개의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사회·생태·디지털 시스템이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연결되는 방식을 탐구한 작업들이다. 세계 각국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참여한 아르세날레 본전시장 안에서도, 움직이는 화석과 해양 생태계 영상이 결합된 그의 작업은 강한 시각적 존재감을 드러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이번 작업은 서로 다른 시스템과 움직임, 그리고 생태적 제스처에 관한 것”이라며 “중심보다 환경과 맥락,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비엔날레에는 진동과 소리를 다루는 작업들이 많다”며 “공동체와 시스템, 생태계의 메아리를 이야기하지만 과거처럼 직접적인 방식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기 있는 작업들 중 일부는 사회의 가장자리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며 “생태계처럼 우리는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중심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맥락 자체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있다”고 말했다. 대표작 ‘That Which Evaporates All Around Us’는 실제 화석판으로 구성된 모빌 형태의 설치다. 화석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채집된 바다나리(crinoid) 화석으로, 마이클 주가 20여 년 동안 미술관·박물관·광부·개인 소장가 등을 통해 수집한 것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분쟁과 이동의 대상이 되어온 땅이 5억 년의 시간을 품고 있다면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며 “흩어진 화석층을 다시 하나의 꽃밭처럼 모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업의 전환점은 2013년 허리케인 샌디였다. 뉴욕 작업실이 침수되면서 화석들이 다시 물속에 잠긴 장면을 본 순간이었다. 그는 “5억 년 만에 화석들이 다시 물속으로 돌아간 것을 보며 작업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각 화석판 아래에는 골전도 변환기(transducer)가 장착됐다. 화석은 각기 다른 밀도와 공명 주파수로 진동하며 고유의 소리를 낸다. 작가는 이를 “지진 같은 진동장(field)”이라고 표현했다. 작품 속 희미한 음성은 그의 어머니 목소리다. 1948년 여덟 살이던 어머니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 오며 러시아 군인의 감시를 피해 다리를 건넜던 기억을 손자에게 들려주는 녹음이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건 그 다리가 실제 피란 당시 건넜던 장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기억은 정확한 장소보다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마이클 주는 “이 작업은 기억과 위치,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움직이는 화석이 저울이나 천칭에 매달린 듯 보인다는 질문에 그는 “맞다. 불안정한 균형(precarity)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며 “지금 세계 시스템 전체가 그런 상태에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또 다른 작업은 NFT와 블록체인, AI 시스템을 활용한 생태 프로젝트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성된 형태들을 실제 산호 연구 프로젝트와 연결했다. 그는 “AI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시스템 안에 무엇을 심었는가”라며 “정보를 하나의 씨앗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계속 성장하고 진화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작업에는 하와이 해양 연구소와 협업한 3D 프린트 산호 연구도 포함됐다. 디지털 데이터로 생성된 구조체를 바다에 넣어 실제 산호가 자라나는 과정을 관찰한 프로젝트다. 마이클 주는 “이건 단순한 예술 프로젝트라기보다 연구에 가깝다”며 “생태 시스템이 어떻게 성장하고 연결되는지 탐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AI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시스템 안에 무엇을 심었는가”라며 “정보를 하나의 씨앗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계속 성장하고 진화한다”고 했 다. 이번 작업에는 하와이 해양 연구소와 협업한 3D 프린트 산호 연구도 포함됐다. 디지털 데이터로 생성된 구조체를 바다에 넣어 실제 산호가 자라나는 과정을 관찰한 프로젝트다. 마이클 주는 “이건 단순한 예술 프로젝트라기보다 연구에 가깝다”며 “생태 시스템이 어떻게 성장하고 연결되는지를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따라다닌 ‘한국계 미국인(Korean American)’이라는 정체성 질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과거에는 한국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개념 역시 설명되기 어려웠다”는 마이클 주는 “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익숙한 존재가 되면서 이제야 비로소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이제 서구적 맥락 안에서도 독창적이고 실제적인 맥락을 보여줄 수 있게 됐다”며 “디아스포라 한국인들도 더 역동적인 대화에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비엔날레 주제 ‘인 마이너 키즈(In Minor Keys·단조로)’에 대해 그는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멜로디보다 감정과 영혼을 울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해석했다. 이어 “내 작업 역시 사회의 가장자리와 보이지 않는 환경을 다룬다”며 “우리는 생태계 안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중심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맥락 자체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1966년 미국 뉴욕 이타카에서 태어난 마이클 주는 생물학과 과학 연구를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과 아시아를 오가며 활동 중이며, 예일대와 컬럼비아대 미술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국제갤러리 전속 작가로 활동 중인 그는 과학과 종교, 자연과 인간의 개입, 사실과 허구, 죽음과 생태 등을 교차시키며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시스템과 인식 구조를 탐구해왔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의 구조와 시스템을 시각화하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마이클 주는 2006년 광주비엔날레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브루클린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한편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는 지난해 타계한 카메룬 출신 큐레이터 코요 쿠오가 생전 구상한 ‘인 마이너 키즈(In Minor Keys·단조로)’를 주제로 열린다. 본전시에는 111명(팀)의 작가가 참여하며, 한국 작가로는 마이클 주를 비롯해 제주에서 활동하는 영상작가 요이(Yo-E Ryou), 한국계 콜롬비아 작가 갈라 포라스-김이 초청됐다. 1895년 시작된 베니스비엔날레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로 꼽힌다. 올해는 99개 국가관과 31개 공식 병행전시가 베네치아 전역에서 펼쳐진다. 공식 개막은 9일이며 전시는 11월 22일까지 이어진다. 2026/05/07
2026 베니스비엔날레 개막…국제갤러리 마이클 주 본전시 참여 한국계 미국 작가 마이클 주가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초대된 자신의 설치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대형 파이프 구조물과 해양 생태 영상, 산업 잔해를 결합한 이번 작업은 인간 문명과 자연, 폐허와 재생의 순환 관계를 탐구한다. 올해 본전시에는 111명(팀)의 작가가 참여하며, 한국 작가로는 요이(Yo-E Ryou), 한국계 미국 작가 마이클 주, 한국계 콜롬비아 작가 갈라 포라스-김이 초청됐다. 2026.05.06. [email protected] 2026/05/07
일본관 땅 밑까지 파고들었다…베니스 한국관 ‘해방공간’ 비 내린 베네치아 자르디니 끝자락. 한국관에서 뻗어나온 붉은 동(銅) 파이프 한 줄기가 수풀 아래를 지나 일본관으로 스며들었다. 국경처럼 나뉜 국가관 사이를 가르는 대신, 혈관처럼 연결됐다.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는 올해 가장 먼저 ‘공간’을 건드린 전시다. 일본·러시아·독일관 사이 자르디니 끝자락에 자리한 한국관은 단순한 전시장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경계와 긴장, 개방성과 불안정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구조적 상징처럼 보인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한국관과 일본관은 처음으로 국가관 협업을 선보였다. 일본관 전시 ‘달 아기, 풀 아기(Moon Babies, Grass Babies)’와 연계해 최고은 작가의 설치작품 ‘메르디앙(Meridian)’ 일부가 일본관 부지까지 이어졌고, 두 국가관 경계 역할을 하던 수풀을 가로지르며 연결 구조를 만들었다. 한국관 안으로 들어가면 유리 천장을 통과한 빛과 벽·기둥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동파이프, 4000개의 반투명 오간자 원형 조각으로 이어진 가림막이 얇은 막 같은 풍경을 만든다. 빛을 머금은 직물 구조는 보는 각도에 따라 세포막이나 껍질처럼 보였고, 안과 밖의 경계 역시 느슨하게 흐려졌다.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 한국관에서 공개된 이번 전시는 최빛나 예술감독과 최고은·노혜리 작가가 참여했다. 전시 제목인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는 해방 직후의 정치적 의미를 넘어, 경계와 이동, 불안과 공존이 교차하는 상태 자체를 공간 감각으로 풀어낸다. 역사적이고 개념적인 제목과 달리 입구부터 관람객의 시선을 붙드는 건 최고은 작가의 설치작품 ‘메르디앙’이다. 수도설비용 동파이프를 활용한 작업은 한국관 내부를 관통해 일본관 부지까지 이어진다. 벽과 기둥, 천장 틈새를 비집고 지나가는 금속 배관은 혈관과 신경망처럼 공간 전체를 휘감는다. 일본관 쪽 땅바닥으로 파고든 동파이프는 마치 거대한 침처럼 보였다. 수풀 아래를 지나 일본관 방향으로 이어진 붉은 선은 침술의 바늘처럼 공간의 경계를 관통했다. 서양 관람객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이, 동양 관객들은 그 금속 관의 흐름을 오래 바라봤다. 동양 의학의 경락을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막힌 혈을 뚫고 기의 흐름을 순환시키는 침술의 제스처처럼 읽힌다. 국가관의 경계를 넘어 일본관까지 이어지는 파이프는 닫힌 구조보다 이동과 침투, 연결의 감각을 드러낸다. 최고은 작가는 “한국관의 여러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마치 막혀 있는 혈을 뚫는 것 같은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최빛나 감독은 “작업의 출발점은 한국관 건축 구조 자체였다”고 말했다. 과거 옥상으로 이어지던 나선형 계단이 철거되면서 동선이 끊기고, 실린더 공간이 창고처럼 사용되기 시작한 점에 주목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국관을 하나의 신체로 보았을 때 혈이 막힌 부분처럼 느껴졌다”며 “보이지 않던 인프라 구조를 열고 흐름을 복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창고처럼 쓰이던 2층 화장실 공간까지 처음 개방해 관람객들이 위층에서 1층 전시장과 바깥 풍경까지 내려다볼 수 있도록 했다. 작가는 기둥 내부를 열어 화장실 배관과 전기 시설 등 한국관을 유지하는 인프라를 노출시켰다. 기능적 구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하나의 조각적 장면으로 전환한 셈이다. 특히 동파이프를 반으로 갈라 벽과 기둥을 관통시키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기능적으로는 파손된 상태지만, 조각적으로는 오히려 유연하고 유기적인 선으로 변형된다. 최빛나 예술감독은 이번 한국관을 “한국이라는 나라의 어떤 화신 같은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자르디니 끝자락의 비정형 구조, 안과 밖이 뒤섞인 동선, 오랫동안 ‘불리한 공간’으로 평가받아온 조건 자체를 오히려 ‘해방공간’의 감각으로 읽어냈다는 것이다. 최 감독은 “해방이라면 오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공격이라고 보셔도 된다”며 “‘야, 나가자’라는 제스처로 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혜리 작가의 설치작품 ‘베어링(Bearing)’ 역시 공간 전체를 유기적으로 확장한다. 약 4000개의 오간자 직물 조각이 휘어진 벽면을 따라 반투명 막처럼 펼쳐지며 공간 사이에 느슨한 경계를 만든다. 빛을 머금은 직물 구조는 보는 각도에 따라 세포막이나 얇은 껍질처럼 보였다. 작품은 애도, 기억, 돌봄, 전망 등 여덟 개 스테이션으로 구성됐다. 노혜리는 “연약한 오간자가 모여 둥지 같은 구조를 만든다”며 “한국관의 피부이자 보호막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특히 ‘베어링’을 수행하는 ‘베어러(bearer)’는 일본관 전시의 주요 요소인 아기 인형을 매일 한 차례 한국관으로 데려와 여덟 개 스테이션을 순환한다. 국가관 경계를 넘어 이동하는 이 퍼포먼스는 돌봄과 이동, 공존의 감각을 하나의 의례처럼 수행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설치작품 ‘더 퓨너럴(The Funeral)’도 전시장 안에 선보였다. 농부 김후주, 작가 겸 가수 이랑, 사진작가 황예지, 예술가 크리스티앙 니얌페타 등 다양한 분야 참여자들의 작업도 함께 배치됐다. 빛과 비, 바람이 스며드는 유리 천장 구조 역시 이번 전시의 중요한 일부다. 안과 밖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 않은 한국관 특유의 구조는 이번 전시에서 오히려 개방성과 흐름의 감각을 강화했다. 최 감독은 “관람객들은 우선 감각적으로 반응한 뒤 의미를 궁금해한다”며 “접근하기 어렵다기보다 아름답고 유려하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범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해방공간’은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동시대 감각으로 확장해 국제 미술 현장과 연결하려는 시도”라며 “수행과 협업, 네트워크로 확장되는 전시 형식 역시 한국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개막식 오후 열린 공동 퍼포먼스는 이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보기 어려웠던 풍경을 연출했다. 일본관이 한국관 개막 퍼포먼스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담장 수풀 경계를 넘어 한국관으로 들어온 일본관 관계자들은 “오메데또(축하합니다)”와 “축하합니다”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일본관은 “한국관으로 가보라”며 양국이 함께하는 퍼포먼스를 안내하기도 했다. 일본관의 아기 인형 작업 역시 한국관으로 이동했다. 각각 3·1절과 5·18에 태어난 설정의 아기 인형은 두 팔을 들어 만세 자세를 취한 채 한국관 내부를 순환했다. 이범헌 위원장은 “오늘 퍼포먼스는 매우 뜻깊은 장면이었다”며 “서울과 도쿄가 서로를 초대하는 등 앞으로도 양국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일본관과 경계를 허물고 베니스비엔날레 사상 처음으로 국가관 협업을 펼친 모습은 훈훈했지만, 한국관을 둘러싼 현장의 분위기는 또 다른 방식의 긴장감을 드러냈다. 바로 옆 일본관을 비롯해 독일·프랑스관 등이 거대한 스케일과 압도적 설치로 관람객을 사로잡는다면, 한국관은 상대적으로 작은 공간 안에서 틈과 연결, 흐름의 감각에 집중한다. 공간도 작품도 전반적으로 잔잔하고 낮은 호흡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해방공간’이라는 제목 역시 거대한 선언이라기보다, 한국관이 놓인 물리적·역사적 조건 자체를 드러내는 표현처럼 읽힌다. 실제 한국관은 태생부터 경계의 공간이었다. 자르디니 공원 끝자락, 독일관과 일본관 사이 옛 화장실 부지에 세워진 한국관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 가운데 26번째로 뒤늦게 들어섰다. 당시 베니스비엔날레 재단은 국가관을 더 이상 늘리지 않겠다는 방침이었지만, 1993년 백남준의 황금사자상 수상 이후 한국관 건립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백남준은 당시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이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한 한국관은 숲 사이에 UFO가 내려앉은 듯한 곡선 구조와 유리 천장으로 완성됐다. 안과 밖이 뒤섞이고, 빛과 비, 나무 그림자까지 내부로 스며드는 독특한 구조다. 한편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는 지난해 타계한 카메룬 출신 큐레이터 코요 쿠오(Koyo Kouoh)가 생전 구상한 ‘인 마이너 키즈(In Minor Keys·단조로)’를 주제로 열린다. 본전시에는 111명(팀)의 작가가 참여하며, 한국 작가로는 요이(Yo-E Ryou), 한국계 미국 작가 마이클 주(Michael Joo), 한국계 콜롬비아 작가 갈라 포라스-김(Gala Porras-Kim)이 초청됐다. 1895년 시작된 베니스비엔날레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로 꼽힌다. 올해는 99개 국가관과 31개 공식 병행전시가 베네치아 전역에서 펼쳐진다. 세계 미술의 올림픽이자 국제정세의 축소판처럼, 전쟁의 그림자 역시 비엔날레 현장에 드리워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단됐던 러시아관은 올해 제한적으로 다시 문을 열었지만 거센 반발과 시위가 이어졌다. 이스라엘관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섰고, 이란은 불참을 선언했다. 러시아와 이스라엘 참여 문제는 심사위원단 전원 사퇴까지 불러오며 이번 비엔날레의 정치적 긴장감을 드러냈다. 공식 개막은 9일이며 전시는 11월 22일까지 이어진다. 2026/05/07
2026 베니스비엔날레 개막…"러시아는 집에 가라" 연막탄 터졔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개막 행사 도중 러시아관 앞에서 컬러 연막 퍼포먼스가 펼쳐지자 관람객과 취재진이 몰려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논란 속에 다시 문을 연 러시아관 주변에서 열린 이날 이벤트는 예술과 정치가 교차하는 비엔날레 현장의 긴장감을 드러냈다. 러시아관 앞에서는 수많은 예술가와 활동가들이 전쟁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다. 핑크색 복면을 두른 시위대는 “No Putin, No Russia”를 반복했고, ‘Russia, Go Home(러시아, 집에 가라)’이라고 적힌 수건과 깃발이 곳곳에서 흔들렸다. 핑크색과 노란색, 파란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러시아관 주변에는 경찰과 경비 인력이 배치됐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는 지난해 타계한 카메룬 출신 큐레이터 코요 쿠오(Koyo Kouoh)가 생전 구상한 ‘인 마이너 키즈(In Minor Keys·단조로)’를 주제로 열린다. 본전시에는 111명(팀)의 작가가 참여하며, 한국 작가로는 요이(Yo-E Ryou), 한국계 미국 작가 마이클 주(Michael Joo), 한국계 콜롬비아 작가 갈라 포라스-김(Gala Porras-Kim)이 초청됐다. 1895년 시작된 베니스비엔날레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로 꼽힌다. 올해는 99개 국가관과 31개 공식 병행전시가 베네치아 전역에서 펼쳐진다. 세계 미술의 올림픽이자 국제정세의 축소판처럼, 전쟁의 그림자 역시 비엔날레 현장에 드리워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단됐던 러시아관은 올해 제한적으로 다시 문을 열었지만 거센 반발과 시위가 이어졌다. 이스라엘관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섰고, 이란은 불참을 선언했다. 러시아와 이스라엘 참여 문제는 심사위원단 전원 사퇴까지 불러오며 이번 비엔날레의 정치적 긴장감을 드러냈다. 공식 개막은 9일이며 전시는 11월 22일까지 이어진다. 2026/05/06
한쪽 눈으로 그려낸 12년의 색, 향기와 만나다…소영 작가 '향기마을' 전시 장애 예술가의 작품과 향기를 결합한 전시 프로젝트 '향기마을 캠페인' 시즌2가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다. 아트매니지먼트 기업 시스플래닛은 프리미엄 퍼스널케어 브랜드 쿤달(KUNDAL)과 협업한 '향기마을 캠페인' 시즌2 전시를 오는 17일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데오 쿤달 플래그십스토어에서 진행한다고 6일 밝혔다. '향기마을 캠페인'은 장애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브랜드 공간과 연결해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확장하는 프로젝트다. 지난해 이은규 작가에 이어 올해는 시스플래닛 소속 소영(1997년생) 작가가 참여했다. 소영 작가는 한쪽 눈의 실명과 신체적 제약 속에서도 12년간 작업을 이어오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왔다. 시스플래닛 측은 "비틀린 선과 흔들리는 색채 안에 작가만의 정직한 리듬과 감각이 담겨 있다"며 "삶의 지속성과 진정성을 증명하는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전시 공간에서는 소영 작가의 원화를 비롯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쿤달 협업 제품도 함께 선보인다. 샴푸와 바디미스트, 디퓨저 등으로 구성된 제품군은 시각적 이미지와 향의 감각을 연결해 전시 경험을 확장했다. 관람객 참여형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한쪽 눈을 가리고 평소 사용하지 않는 손으로 채색하는 컬러링 체험을 통해 작가의 시선과 작업 방식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네이버 해피빈 펀딩과도 연계된다. 소영 작가의 작품을 활용한 아트 키링과 리미티드 에디션 판화, 드로잉북, 쿤달 협업 바디미스트 등이 리워드로 구성됐다. 수익금은 작가의 지속적인 창작 활동과 교육 지원에 사용될 예정이다. 시스플래닛 오윤선 대표는 "세상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예술가들의 가능성을 사회와 연결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 소영의 진정성 있는 삶과 작업이 더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26/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