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말년의 슬픔을 껴안는 '이사라 시집' “기억이 먼저 사라지기 전에 / 우리 / 헐렁하게 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 시집의 제목이자 마지막 시 '텅 빈 주머니처럼 헐렁하게'의 결말에서, 이사라 시인은 삶의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었던 감정 하나를 꺼내든다. 쪼그라든 뇌, 남은 기억, 그리고 더 이상 메울 수 없는 상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말한다.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 살아가고 있는 자인데.” 시집 '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출판사 강)는 198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래 40여 년을 시와 함께해온 이사라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이다. 그간 '미학적 절제'와 '억제된 슬픔'의 대명사로 불려온 시인이 이번엔 한껏 자신을 헐겁게 풀어낸다. 누군가의 유언을 되새기며, 떠나간 이들을 조용히 배웅하며, 그리고 마침내 자신조차 “사라질 것”이라 고백하는 이사라의 시편은 삶의 말미에서 도달한 진실의 어투를 품는다. 특히 「안에서 만져지는 몽글몽글한 슬픔」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어서 / 나에게 미안해 // 겨우겨우 살아내서 미안해.” 감정을 절제하던 예전의 시인이라면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을 문장이지만, 이번 시집에서 이사라는 그 슬픔을 ‘만지고 또 만지’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문학이 나아가는 방향 중 하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예민해지는 슬픔의 결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를 ‘말년의 양식(late style)’이라 불렀다. 삶의 조화와 안정 대신, 비타협과 불협, 뜻밖의 감정과 구조로 이뤄진 예술적 시선 말이다. 이사라의 이번 시집은 그 ‘말년의 양식’이 어떻게 우리말 시 속에서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또한 이번 시집은 시인이 이전에 펴낸 '시간이 지나간 시간', '가족박물관',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등과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간다. 선형적인 시간 인식에서 벗어나, 파편화된 기억과 교차하는 감정들이 현재에 겹쳐지는 방식은 여전히 이사라의 고유한 시적 시간감각이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 흐르는 감정의 어조는 확실히 달라졌다. “너와 사는 동안 / 순간순간 / 울컥했다”고 말하고, “그게 다 사랑 때문이야”라고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그는 이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시인 이사라의 동생은 서울 이화익갤러리 대표 이화익 큐레이터다. 시집의 표지 그림은 홍승혜 작품이다. 동생이 미술을 통해 형상화하는 ‘빛’과 ‘기억’이 있다면, 언니 이사라는 시로 그것들을 붙잡는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 붙인 제목은, 어쩌면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온 자매가 공명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꽉 조이지 않고, 느슨하게, 그러나 뜨겁게 사랑하기. 하나둘 떠나고 익숙한 것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그는 말한다. “이 틈을 메우려 애쓰며 나의 몸을 소진하지 말자.” 그러니 더 헐렁하게. 그리고 조금 더 몽글몽글하게. 2025/05/13
'박지성 장모' 오명희, 자개의 빛으로 우주를 짓다[문화人터뷰] "내 그림은 별빛처럼 잠깐 반짝이지만, 우주의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고요한 블랙홀, 눈부신 은하계, 그 사이의 무한한 공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여정이다. 이 작품들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독과 경외감, 그리고 그 모든 것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희망의 파편을 담고 있다" 13일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만난 오명희(69)화백은 천상 화가였다. "작업은 제 구원"이라며 "세상에 ‘오명희’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저는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 말처럼 밀도가 높은 작품은 그의 영혼을 갈아 넣은 흔적이다. 원형 캔버스 위에 펼쳐진 옻칠과 자개, 금박의 화면은 강렬한 생기를 품고 있다. 자개 조각들은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흩어지고, 그 중심에서 퍼져 나오는 정제된 에너지에 이끌리듯 화면에 빠져들게 한다. 서울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피어나는 빛, 봄의 숨결 Aether in Bloom'은 ‘에테르(Aether)’ 시리즈와 ‘제니스(Zenith)’ 시리즈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전시 작품과 작업 세계관을 들어봤다. ◆이번 개인전 ‘피어나는 빛, 봄의 숨결’은 어떤 영감에서 시작되었나요? 처음엔 자연을 그렸어요. 스카프가 날아가는 장면을 그리다가, 어느 순간 그 스카프가 새가 됐죠. 그런 변화처럼 제 작업도 확장됐어요. 2022년 베니스에서에 전시했을 때, 한국 여성들의 삶-특히 첩 이야기, 달 이야기, 가족 사진 같은 것들이 생각났어요. 당시 유럽문화센터(ECC)의 초청으로 베니스 팔라조 모라에서 열린 특별전에 참여했는데, 한국전쟁 종식 이후 여성 해방기의 집단적 기억을 주제로 한 작업을 선보였죠. (이 전시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찾은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괴로워하셨어요. 어느 날 밤, 달이 유난히 밝았는데 어머니가 우물가에 계셨어요. 뭔가 술렁이는 분위기였고, 이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 달 밤의 감정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벙어리 처녀를 아버지 방에 들인 날이었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기억이 제 작업의 발단이 됐어요. ◆대표작 ‘에테르(Aether)’ 시리즈에는 어떤 상징과 서사가 담겼나요? 우리 집 가족사진 속에 큰할머니와 작은할머니, 두 명의 할머니가 나란히 있는 걸 보면서 흥미를 느꼈어요. 여성의 삶을 이야기로 풀고 싶었고, 나혜석 같은 신여성에서 전통적인 어머니상, 마릴린 먼로까지 시대와 정체성이 다른 여성들을 작업 속에 담았죠. 마릴린 먼로가 6.25 전쟁 당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눈 오는 날 끈나시를 입고 열심히 공연을 했대요. 따뜻한 봄 같은 순간이죠. 자서전을 보면 무대 공포증도 있었고, 백치미로 몰려서 괴로움도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걸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참 감동이었어요. 제 그림은 화사하지만, 예쁘다고만 보면 공감 못 해요. 그 안엔 삶의 애증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있어요. 나이로비 국립뮤지엄에서 기생을 주제로 작업한 것도 그런 맥락이죠. 돌출된 달을 표현하고 싶어 우리 전통 노래인 강강수월래를 떠올렸어요. 강강수월래 노래를 하듯 자개를 빙빙 돌려서 작업했죠. 부조 형태의 원형 바탕이 된 그곳에 달도 있고 빛이 있죠. 최근엔 자연을 직접 손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옻칠을 장갑 낀 손으로 그리기도 해요. 이제 제 작업은 달에도 스톤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우주의 광물질을 자개와 색으로 구현했어요. 설악산 비룡폭포에서 정기를 받은 느낌, 산청의 바위에서 에너지를 받는다는 신념 같은 것도 제 작업에 녹아 있어요. ◆전통 재료인 옻칠, 자개, 금박을 회화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공예적인 요소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인 건 2008년부터예요. 자개는 어릴 때부터 집에 자개 장이 있어 친숙했고, 실은 제가 화려한 것을 좋아해요. 아름답고 공들이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데, 근래에 들어 공예적인 것을 끌어들인 것을 잘했다는 생각이에요. 한국적이고 여성적이고 저와 딱 맞는 작업이죠. ◆작업 과정에 있어 어려운 점이나 시스템 구축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요? 옻칠장은 따로 없어서 말리는 게 정말 고역이에요. 말리다가 미칠 때도 있어요(웃음). 도와주는 제자가 두 명이 있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와서 같이 해요. 이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에요. 직업병처럼 어깨가 아파서 시술도 다섯 번이나 받았어요. 하지만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에 자부심 있어요. 세계적으로 작업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크고, 도와주는 시스템이 필요해요. 쿠사마 야요이 같은 시스템이 부러워요. 작가로서 슬럼프도 있었어요. 학교(수원대학 미술대학 교수) 가야지, 애 셋 키워야지, 그림도 그려야지… 시간이 없어서 화랑에서 작품 달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철렁했어요. 한때는 팔리는 게 싫기도 했고요. 그래서 일본 동경예술대학 객원교수로 가면서 작업세계가 달라지는 계기가 됐어요. 살랑이는 커텐처럼 내리는 벗꽃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때 금박도 배웠지요. 일본에서 시간을 가지고 좀 쉬고, 다시 힘을 얻었죠. 애들 기를 때 너무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짬을 내 15분 동안 집중해서 그리니까 많이 그리더라고요. 그래서 전 학생들한테도 “15분만 집중하면 많이 그릴 수 있다”고 말해요. 정말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작품에는 기억과 시간의 층위, 존재에 대한 철학이 느껴집니다. 저는 제 나름의 달을 그려요. 그러다 보면 별도 그리고 스톤도 그리게 돼요. 거기서 오는 기운이 있어요. 우주에서 오는 좋은 에너지라고 할까요. 그게 ‘우주적 시간’이에요. 오로라처럼 흔한 이미지가 아니라, 훨씬 깊은 감각이죠. 남편과 함께 설악산에 자주 가요. 눈이 와도 가요. 그 산에 어떤 에너지가 있어요. 그걸 느끼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그 감각이 작업에도 들어가는 거죠. ◆박지성 선수의 장모님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로서 부담은 없으셨나요? 솔직히 말하면, 작가로서는 불편해요. 물론 '박지성 장모'라는 수식어 때문에 언론에서 다루기도 하지만 말을 더 조심하게 되죠. 저는 현실감도 없고, 계산이 없는 사람이에요. 박서방이 와도 밥 차리기 전까지는 작업을 해요(웃음). 애틋하게 사랑하지만 돌봄은 잘 못 해요. 그래서 미안함도 항상 있고요. 우리 사위는 표현을 잘 안 해요. 그런데 제 작품 중에 좋아하는 그림이 있다고 딸을 통해 들었는데 기분이 좋았어요. ◆앞으로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주제나 방향이 있다면요? 저는 몸집은 작지만 스케일이 있는 큰 작가예요. 더 큰 작업, 입체로 확장하고 싶어요. 지금은 '스톤'에 꽂혀 있어요. 그냥 돌이 아니라, 오만에서 봤던 반짝이는 광물질, 그걸 그리고 싶어요. 그림이 없었다면 삶이 버거웠을 거예요. 어릴 땐 만화를 그리느라 밤을 새웠고, 블라우스가 새까매질 정도로 그림을 그렸어요. 어떤 선생님이 저한테 “그림 안 그렸으면 무당이 됐을 사람”이라고 했는데, 진짜 맞는 말 같아요. 스카프가 날아가고, 구름 위에서 까르르 웃고, 신명나게 춤추는 그 장면. 그게 뭔지 알 것 같거든요. 한편 이화익갤러리와 오명희 화백과의 인연은 2024년 아부다비 아트에 참여하면서다. 길이 4m정도의 대형 작품을 포함한 3-4점의 오 화백 작품은 모두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의 여류작가로서 정체성을 갖고 K아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이제 세계에서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기억과 우주의 에너지’를 동시에 껴안는 화면, 정제된 공예적 노동과 깊은 감정선이 교차하는 회화 앞에서 관람자는 눈앞에 펼쳐지는 ‘빛의 우주’를 천천히 항해하게 된다. 전시는 31일까지. 2025/05/13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은…"조선시대 아닌 '지금, 대한민국' 이야기" "조선시대가 아닌 대한민국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2025 오사카·간사이 세계 엑스포 한국관 전시 총감독을 맡은 고주원 서울예술대 교수는 한국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로 '과거가 아닌, 현재의 대한민국'을 꼽았다. 고 감독은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오사카 엑스포에서 취재진을 만나 "한국이 한복과 고궁, 국악으로만 표현되는 게 아니라 가장 동시대적이고 트렌디한 우리의 정서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13일 오사카 엑스포 개막과 함께 첫선을 보인 한국관의 외부 벽면은 가로 27m, 세로 10m의 대형 미디어파사드로 꾸며져 있다. 이를 통해 '당신이 꿈꾸는 한국'을 주제로 서울 경복궁과 전주 한옥마을, 부산 광안대교, 제주 성산일출봉 등의 영상으로 한국을 소개한다. 내부 로비에서는 한국의 자연과 야경, 체험을 다룬 영상을 선보인다. 한국관 건물은 연면적 1994㎡, 전시면적 1044㎡ 규모로 부지에 비해 건물 자체가 크진 않다. 대신 전시 공간을 3개로 크게 나눠 동시 수용 인원을 늘렸다. 총 관람 시간은 20분으로, 100명이 동시에 입장해 1, 2, 3관을 순차적으로 함께 관람하게 된다. 고 감독은 "한국을 어떻게 표현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며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첨단 기술을 문화 역량으로 표현하는 게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그 안에 기술 요소들이 많지만 사람들이 정서적인 기술로 느끼도록 하는 게 이번 전시 연출의 핵심"이라고 짚었다. 1관은 '소리와 빛을 모아 모두가 하나되어'다. 관람객들은 전시관에 입장하기 전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게 된다. '행복', '건강', '돈' 등 관람객이 내놓은 대답들은 녹음이 되고, 이렇게 모인 목소리는 인공지능(AI)을 통해 음악으로 완성, 1관에서 40개의 스피커를 통해 나온다. 느리게 시작됐던 음악은 점점 더 빨라지고, 조명도 함께 맞물리며 화려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관람객들이 입장할 때마다 녹음을 하고 전시가 시작되기 때문에 전시마다 이 목소리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황폐화된 도시에서 생명의 회복으로'를 주제로 하는 2관은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콘크리트와 일상에서 활용되던 물품들이 전시됐다. 2관에서도 체험이 이뤄진다. 사람의 키만 한 파이프에 관람객이 숨을 불어 넣으면 수소연료전지를 통한 화학 반응으로 전기 에너지가 생산되고 그 잔여물로 천장에서 비눗방울 같은 거품이 떨어진다. 고 감독은 "한국을 나타내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콘크리트 사회'가 있다"며 "2관은 콘크리트 사회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씨앗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3관은 '같은 시간 속의 선율'로 2040년 미래 한국에 사는 한 여고생과 할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음악극을 3면 대형 멀티스크린으로 보여준다. 케이팝과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연예인은 출연하지 않는다. 고 감독은 "현 세대와 미래 세대를 연결해주는 소재로 케이팝을 사용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한국관'하면 케이팝을 연상한다. 그런데 또 유명인을 출연하게 되면 국가관이 연예인에게 의존하게 되지 않나. 그래서 대국민 오디션을 통해 출연진을 선발해 구성했다"고 말했다. 한국관을 찾는 관람객 중 약 70%는 일본인이고, 나머지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로 이뤄지고 있다. 하루 평균 1만2000명이 한국관을 방문하고 있어, 목표로 잡은 총 관람객 120만명을 쉽게 넘어설 전망이다. 고 감독은 국제 무대에서 '현재'의 한국이 가진 매력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역사와 전통이 뭔가' 하면 대한민국을 이야기하지 않고 조선시대를 이야기한다"고 지적한 고 감독은 "'전통'을 풀이하면서 더 이상 조선시대가 아닌 대한민국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누구도 대한민국을 상징화하거나 키워드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늘 지금 유행하는 문화상품인 케이팝이나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번을 계기로 한국관이 한복과 고궁, 국악으로만 표현되는 게 아니라 지금의 가장 동시대적이고 트렌디하게 가고 있는 우리의 정서를 전 세계가 다 공유하는 이미지로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2025/05/13
김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소장품 기획전…6월15일까지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이 다음달 15일까지 '불로 피운 광고, 성냥이 남긴 김제의 흔적'을 주제로 기획전을 연다고 13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광고용 성냥 128점을 통해 성냥의 문화적, 상업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1980~1990년대 김제에서 제작된 홍보용 성냥 11점이 눈길을 끈다. 금만산업사, O.B홀, 일번지다방, 봉봉다실 등 지역 업체의 이름이 담긴 성냥들은 지역 상업과 생활문화의 생생한 흔적이다. 성냥은 19세기 후반 일본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 1886년 인천 제물포에 성냥공장이 세워지며 대량 생산이 시작됐다. 이후 부엌과 사랑방, 선물용까지 우리네 일상 깊숙이 스며들었다. 광복 이후 성냥은 광고 매체로도 변모했다. 음식점, 다방, 여관 등은 소형 성냥갑에 이름과 주소를 새겼다. 간편하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었다. 동시에 성냥을 수집하는 문화도 자연스레 형성됐다. 하지만 라이터와 가스레인지, 디지털 광고의 등장으로 성냥은 점점 자취를 감췄다. 이제는 박물관이나 수집가의 손에서야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정성주 시장은 "이번 전시는 생활용품에 머물렀던 성냥이 시대의 기록자였음을 보여준다"라며 "지역 업체의 홍보 성냥은 지역사와 현대 생활사 연구에 귀중한 자산"이라고 했다. 2025/05/13
물 아래, 경계에 선 사물들…울라 폰 브란덴부르크 韓 첫 개인전 전시장은 파란 커튼으로 둘러싸인 미로 같다. 부드러운 천으로 구성된 이 공간은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며, 관람객을 고요한 심연으로 이끈다. 커튼 위로 투사되는 5채널 영상 '아무도 중간을 그리지 않는다'(2019)는 부채, 리본, 셔츠, 구겨진 천, 메리 제인 슈즈 같은 사물들이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장면을 담는다. 현실과 꿈, 무의식의 층위를 넘나드는 이 영상은 관람객을 깊은 몰입의 상태로 이끈다. 독일 출신 작가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50)의 국내 첫 개인전 '물 아래 그림자(Shadows under water)'가 14일부터 서울 삼청동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열린다. 전시는 물과 그림자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현실과 무의식, 존재와 부재, 꿈과 기억 사이의 경계를 탐구한다. 전시장에는 시아노타입 신작 평면 5점과 클로린 작업(2020) 5점, 5채널 영상과 블루 커튼 설치 작업이 유기적으로 구성돼 있다. 커튼은 작가의 이전 전시에서 사용된 천을 재활용해 제작됐다. 빛바랜 시간의 흔적 위로 영상이 투사되며, 공간은 하나의 감각적 장치가 된다. 폰 브란덴부르크는 독일 카를수르에 예술대학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한 뒤,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했다. 현재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연극적 접근방식과 고전문학, 표현주의 연극, 프로이트 이전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다매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회화, 설치, 영상, 텍스타일을 넘나드는 그의 작업은 반복과 상징을 통해 ‘심리적 무대’를 구성한다. 작가는 “물은 무의식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영상 속 사물들은 자아의 잔재처럼 부유하며, 화면은 점점 어두워지다 블랙아웃된다. 시작도 끝도 없는 흐름 속에서 관람객은 사물과 감정, 존재와 흔적 사이에 서 있게 된다. 전시는 7월 13일까지. 2025/05/13
'2025 SeMA-하나 평론상' 공모…상금 2000만원 서울시립미술관(관장 최은주)이 '2025 SeMA-하나 평론상' 공모를 시작한다. 이번 평론상은 '새로운 언어, 선명한 문제의식, 미래 감각'을 갖춘 차세대 미술 평론가를 발굴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다. 'SeMA-하나 평론상'은 국공립 미술관에서 제정한 국내 최초의 미술 평론상으로, 2015년부터 격년제로 시행해 올해 6회를 맞았다. 하나금융그룹이 후원, 곽영빈, 김정현, 남웅, 문정현, 장지한, 이진실, 이연숙, 장한길 등 총 8명의 수상자를 배출해왔다. 응모 자격에는 제한이 없다. 블라인드 방식의 3차 심사를 통해 평론 역량만으로 수상자를 결정한다. 응모자는 미발표 평문 1편(200자 원고지 70매 이내)과 응모신청서를 오는 7월 21일부터 8월 11일까지 이메일로 제출하면 된다. 수상자에게는 상금 2000만 원과 함께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 프로그램과 연계한 후속 연구 기회가 주어진다. 수상자는 2026~2027년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해당 결과는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2025/05/13
국립한글박물관, 경북 구미서 '어린이 나라' 순회전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 잡지 '어린이'를 주제로 한 기획특별전 '어린이 나라'를 오는 20일부터 7월 20일까지 경북 구미에서 개최한다고 13일 밝혔다. 구미시문화예술회관과 공동으로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지난 2023년 열린 국립한글박물관 특별전 '어린이 나라'의 지역 순회 전시다. 총 3부로 구성된 전시에서는 잡지 '어린이'를 비롯해 동시대 발간된 잡지 '소년', '학생' 등을 소개한다. 또 어린이라는 개념의 정착, 어린이 문화의 형성 과정, 어린이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1부에서는 1920~30년대 잡지 '어린이'의 편집실 공간을 재현해 잡지의 창간 배경, 제작 과정, 참여자 등을 소개한다. 이어 2부는 어린이 선언문의 내용을 전시하며 3부에서는 잡지에 실린 문학 작품, 한글의 역사 등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강정원 국립한글박물관 관장은 "산업과 예술이 공존하는 문화산업도시 구미에서 개최하는 이번 전시가 구미시민의 문화향유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전시 기간 중 개최되는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를 위해 구미를 방문하는 많은 세계인에게 한글과 한글문화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2025/05/13
한 땀 한 땀 수놓은 여성의 역사…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 꽃도 풍경도 아니다. 전시장 한가운데 둥글게 걸린 8개의 태피스트리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기생, 임금 삭감에 맞서 옥상에 올라간 여성 노동자, 그리고 호미를 들고 항일 운동에 나섰던 제주 해녀의 모습이 수놓아져 있다. 1960~70년대 산업현장에서 가족 생계를 책임졌던 어린 소녀들의 모습도 있다. 미술가 홍영인(53)이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혀졌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되살려냈다.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7월 20일까지 열리는 '다섯 극과 모놀로그'는 홍영인의 첫 국내 미술관 개인전이다. 영국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그는 태피스트리, 조각,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를 통해 근현대 여성사의 다양한 장면들을 예술적으로 엮어낸다. 특히 이번 전시는 총 다섯 개의 이야기(‘다섯 극’)와 작가의 독백(‘모놀로그’)을 중심으로 구성돼, 하나의 공연처럼 전개된다. 40미터에 달하는 대형 태피스트리는 작가가 직접 재봉틀로 바느질한 것이다. 작가는 2000년대 중반 동대문에서 바느질을 배우며 섬유·봉제 산업에서 일했던 여성들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그림은 중세 유럽에서 전쟁 이야기를 천에 수놓던 태피스트리 방식에서 착안했고, 바깥쪽은 여성 인물들의 서사, 안쪽은 동물 문양과 기하학적 패턴으로 채워졌다. 작품 곳곳에는 짚과 천으로 만든 조각들이 설치돼 있다. 머리에 짐을 받치던 전통 용구인 ‘똬리’, 제주 굿에서 쓰이던 도구 ‘기메’ 등을 재해석한 형태로, 퍼포먼스에서 연주나 몸짓의 소품으로 쓰인다. 전시 기간 중 다섯 차례 열리는 퍼포먼스에서는 드러머 1명과 퍼포머 4명이 함께 소리와 움직임을 통해 ‘제례’ 형식의 공연을 펼친다. 퍼포먼스는 5월 24일, 6월 14·28일, 7월 12일 오후 2시에 예정돼 있다. 어두운 방에 설치된 신작 사운드 '우연한 낙원'(2025)도 눈길을 끈다. 홍영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AI 기술로 분석해, 그 음성을 두루미의 울음소리처럼 변환했다. 작가의 독백이 인간의 언어를 넘어 동물의 소리로 바뀌는 실험적 작업이다. 홍영인은 “이번 전시장은 무대처럼 구성했다”며 “그동안의 작업을 하나로 정리하고, 다시 전하는 선언 같은 전시”라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에도 동물과 인간, 중심과 주변, 권력과 노동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다양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태피스트리, 사운드, 퍼포먼스는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이번 전시는 그의 작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몸짓, 리듬, 소리 등 몸과 감각으로 경험하도록 구성된 공간은 관람자에게도 참여와 해석을 유도한다. 역사에서 지워졌던 이름들은 이곳에서 다시 말을 건다. 2025/05/13
파독 2세 화가의 회화적 증언…헬레나 파라다 김, 개인전 한복을 입은 여성들. 얼굴은 흐릿하고 표정도 없다. 하지만 옷의 주름과 무늬는 또렷하다. 익명의 얼굴 뒤에 숨은 삶의 흔적, 헬레나 파라다 김의 회화는 그 흔적을 좇는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초이앤초이 갤러리는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작가 헬레나 파라다 김의 개인전 '빛이 머무는 시간'을 오는 16일부터 연다. 2016년 2인전 이후 9년 만의 서울 전시이자, 첫 개인전이다. 작가는 파독 간호사였던 한국인 어머니와 스페인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일 쾰른에서 자랐고,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피터 도이그에게 수학하며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받았다.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다층적 감수성은 그의 작업 세계의 핵심이다. 대표작 ‘스텔라 마리스’는 조선시대 혼례복인 활옷에 르네상스 회화의 도상을 겹쳐 놓은 작품이다. 봉황과 연꽃으로 수놓은 활옷 중앙에,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성모와 아이’가 배치된다. 서양과 동양, 종교와 전통, 모성과 다산이라는 상징이 한 화면에서 교차한다. '간호사와 학' 작품은 1970년대 독일 쾰른에서 촬영된 작가의 어머니와 동료 한국인 간호사들의 단체사진에서 영감을 받았다. 창덕궁에 소장된 김은호 화백의 병풍 작품이 배경이 된 이 작품은 한국의 파독 노동자들의 역사를 교포 2세의 시선으로 증언하며 동시에 한 역사 속에서 개인과 가족, 집단이 겪어야 했던 운명을 함축하여 보여준다. "작가는 작품에서 한복을 입은 인물들의 얼굴을 흐리게 처리하거나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보다 한복이라는 의복 자체의 문화적 상징성과 미학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다." 초이앤초이 갤러리 최진희 대표는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한복들은 대부분 실제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와 함께 독일로 왔던 이모들, 비슷한 처지의 간호사 동료들이 소유했던 것들로 그녀들 개개인의 삶을 내포하고 있다"며 "파라다 김의 회화는 동서양 미술의 언어와 디아스포라의 서사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전했다. 2025/05/13
'백동 공예'의 법고창신…박여숙×이경노 두 번째 ‘간섭 프로젝트’ 한 장인의 손끝에서, 수백 년을 건너온 조선의 감각이 다시 깨어난다. 백동 위에 새겨진 낡고 단단한 선들, 덤덤한 아름다움은 오히려 ‘지금’을 말한다. 서울 이태원 박여숙화랑이 13일부터 6월 13일까지 선보이는 '두 번째 박여숙 간섭 이경노 백동 공예전'은 K공예의 ‘법고창신’을 만나볼 수 있다. 2018년 이후 7년 만에 열리는 이경노 장인의 개인전이자, 박여숙 대표와 함께하는 두 번째 ‘간섭 프로젝트’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경노는 전통 금속공예의 깊은 뿌리를 현대 조형 언어로 확장하는 작업을 지속해 온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인 중 한 명이다. 1970년대 고가구 공장에서의 실무 경험을 시작으로, 서울시 무형유산 입사장 최교준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전통 금속 기술을 사사받았다. 이후 1987년 국가 지정 문화재수리기능자로 활동을 시작하며 문화재 복원과 전승 공예의 최전선에서 기술적 완성도를 높여왔다. 박여숙의 ‘간섭 프로젝트’를 통해 이경노는 전통 금속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조형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2015년 박여숙 대표가 이탈리아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뮤지엄에서 선보인 ‘한국 공예의 법고창신’ 전시에 출품을 계기로 만난 이경노는 '백동 장인'으로 새롭게 부활했다. 박여숙 대표는 "그의 작업 세계는 전통 금속공예의 기법적 정수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이를 단순한 재현이 아닌 창의적 재해석의 대상으로 삼는 데서 차별성을 가진다"고 소개했다. 이경노 '백동 공예'작업은 단조(鍛造)와 ‘조이’ 방식으로 구리와 니켈을 섞은 백동을 빚고, 한자와 한글 문양을 선각(線刻)으로 새겨 넣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전통 단조 기법은 단순한 힘의 작용이 아니라, 망치질 하나하나에 따라 물성에 맞는 정교한 조정을 필요로 하는 섬세한 과정이다. 단단한 금속을 마치 유연한 재료처럼 다루며, 입체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갖춘 조형성을 보여준다. 이경노는 동과 철, 백동 등 다양한 금속 재질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기법의 정수를 단순한 재현이 아닌 창의적 해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번 전시에는 희자문 팔각함, 나비문자 삼층합, 십장생 서류함 등 전통 문양과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백동 공예 작품들이 소개된다. 일부는 조선 후기의 한글 문양을 응용해 금속 위에 시대의 언어를 새겨 넣었다. 덤덤하고 수수한 감각은 금속의 차가움과 맞닿으며 묘한 긴장을 자아낸다. 공예평론가 김세린은 “동과 철은 시대를 이끄는 물성이자, 생활 속에서 문화가 된 물질”이라며 “이경노의 작업은 조선의 생활문화에서 길어낸 전통 공예의 기술과 감각을 오늘의 조형 언어로 번역한 사례”라고 평했다. 박여숙 대표는 “조선 공예는 유난스럽지 않다. 덤덤하고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 녹아든다”며 “그 안에 한국 미학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2025/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