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터렐, 17년 만의 귀환…“빛은 제게 일용할 양식입니다” “저는 결국 한 사람의 예술가일 뿐입니다. 제가 하려는 일은 단 하나, 한 조각의 빛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빛의 조형가’로 불리는 미국 작가 제임스 터렐이 서울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다. 11일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빛의 사제’라는 별칭답게 철학적이고 구도자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덥수룩한 흰 수염, 낮은 목소리, 그리고 단정한 눈빛. 터렐은 퀘이커교도다. ‘내면의 빛’을 삶의 신조로 여기는 이 전통은 그가 평생 빛을 탐구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면도를 하지 않는 삶의 태도처럼, 그의 작업은 꾸밈 없이 감각과 인식의 본질을 응시한다. 그는 60여 년간 탐구해온 빛 작업에 대해 “빛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질량과 파동성을 지닌 하나의 사물”이라며 “빛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빛 그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빛은 일용할 양식이다”라고 표현하며, 소리처럼 저장되거나 전송될 수 없는 '빛의 물질성'에 주목했다. 특히 “빛을 소중히 대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그의 강조는 오늘날의 과잉 조명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페이스갤러리는 오는 14일부터 9월 27일까지 서울 전관에서 제임스 터렐 개인전 'The Return'을 개최한다. 2008년 이후 17년 만의 서울 개인전이자, 갤러리 설립 65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프로젝트다. 전시에는 신작 '웨지워크(Wedgework)'를 포함해 장소특정적 설치작 5점, 판화, 드로잉, 사진, 조각 등 총 25여 점이 소개된다. 어둠 속 공간에 교차 투사되는 빛의 평면은 공간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외에도 유리 구조물로 구성된 '글라스워크(Glassworks)' 시리즈, 천문학적 관찰에서 비롯된 사진 및 드로잉, 그리고 장기 프로젝트 '로든 크레이터(Roden Crater)' 관련 작업들이 전시된다. 이 프로젝트는 애리조나 사막의 분화구를 천문 관측소이자 예술 공간으로 전환하는 작업으로, 터렐은 이를 50년 넘게 지속해왔다. 터렐은 전시장 내에서 혼란감이나 구토를 느끼는 관람자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빛의 인식은 소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색을 맥락 속에서 인지하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구성합니다. 어지러움이나 방향 감각 상실은 새로운 인식을 열어주는 자극일 수 있습니다.” 그는 “현실과 사이버 공간의 경계가 흐려진 지금, 지평선이 사라진 세상에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빛은 무언가를 비추는 동시에 가리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밝은 도시의 밤은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들죠”라고 덧붙였다. 터렐은 빛을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닌, “영적인 재료이자 감각적 물질”로 보았다. “빛은 음악처럼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는 그 빛을 ‘먹고’ 살아갑니다. 일반 조명이 아닌, 모닥불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뇌파의 빛이 중요합니다. 인간도 밤의 헤드라이트 앞에 멈춰 선 사슴처럼, 빛에 감응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그는 “빛을 묘사하는 회화의 전통을 넘어, 빛 그 자체를 다루는 조형을 하고 싶었다”며 “1967년부터 빛을 투사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LED 등 기술의 진화 덕분에 이제야 비로소 원하는 형태로 구현할 수 있게 됐다. 오래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웃었다. 제임스 터렐은 194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심리학과 수학을 전공하고 인지심리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조종사 자격증을 지닌 그는 항공 관제와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지각’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예술에 투영해왔다. “빛은 사물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작품을 소장하려는 이들이 자주 묻는 질문을 소개했다. “제가 갖게 되는 건 도대체 뭔가요?”라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답한다. “이곳을 지나가는 빛을 소유하게 되는 거죠.” 예술에 대해선 담담했다. “예술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 일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선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한국은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팝 음악부터 클래식,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경계를 확장해가는 아시아의 강력한 중심이죠.” 그의 한국 사랑은 개인적 인연과도 맞닿아 있다. 터렐의 부인은 한국의 추상화가 이경림 씨로, 두 사람은 예술과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현재 강원 원주의 ‘뮤지엄SAN’에는 터렐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전용 전시관이 운영 중이며, 전남 신안군 노대도에는 세계 최초의 섬 위의 제임스 터렐 미술관이 건립 중이다. 한편 이번 전시는 무료 관람이 가능하지만, 3층 전시는 네이버를 통한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갤러리 측은 “8월 중순까지 토요일 예약은 이미 마감된 상태”라며,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고 밝혔다. 이는 관람객이 명상하듯 작품에 몰입하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빛을 드러내는 작업, 나아가 빛 그 자체를 감각하게 하는 예술. 제임스 터렐의 ‘지각 예술’은 이번 여름, 서울에서 다시 한번 은은하게 발광하고 있다. 2025/06/11
정선 '화훼영모화' 부활…21세기 문화보국을 묻다 대구 간송미술관에서 '화훼영모화첩'을 마주한 순간, '21세기 문화보국'이란 무엇인가를 곱씹게 된다. 겸재 정선의 손끝에서 피어난 작은 생명들은, 단지 자연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 민족의 기억을 되살리는 회화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꽃과 동물, 곤충을 소재로 한 화훼영모화에서도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탁월한 작품세계를 보여줬다. 그중 말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8폭짜리 ‘화훼영모화첩’은 갈대꽃 위의 호랑나비, 가지밭의 두꺼비, 수박을 훔쳐 먹는 들쥐 등 자연 속 생명들을 생생하게 포착해낸 수작이다. 이 화첩이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대구간송미술관 개관 기념전 ‘화조미감’을 통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단에 그려진 이 그림들은 그동안 장황(표구) 없이 8장 낱장으로 보관돼 있었다. 미술관 측은 두루마리나 족자처럼 말아서 보관할 때 생기는 손상 유형이 없었던 점, 각 그림의 크기가 가로 20.8cm, 세로 30.5cm로 크지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해 이 그림들이 원래 병풍이나 화첩의 형태일 것으로 추정했다. 최종적으로는 각 그림에서 비슷한 형태로 벌레먹음(충해)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폭마다 각각 다른 형태로 충해가 나타나는 병풍보다는 화첩이었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수리·복원팀은 또 그림들의 충해가 두 장씩 데칼코마니 형태로 닮은 꼴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낱장으로 보관됐던 그림들이 사실은 호랑나비와 매미, 두꺼비와 개구리, 고양이와 쥐, 암탉과 수탉 등 서로 연관된 소재들이 짝을 이뤄 화첩의 좌우에 배치됐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작품에 사용된 안료와 기법도 과학적으로 분석됐다. A4 용지 정도의 작은 화폭이지만, 석록(말라카이트), 석청, 진사, 금 등 당대 최고급 안료들이 다양하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금이라도 참개구리 부분의 노란색은 연백(납을 부식시켜 만든 안료)을 바탕으로 그 위에 금을 덧입혀 표현한 반면, 두꺼비의 배 부분은 석황 안료에 금을 더하는 방식으로 색감을 달리했다. 이러한 세부 표현은 단순히 정선의 공력 있는 ‘기술’을 입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화첩은 그의 만년기 회화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감각과 조형 언어, 그리고 자연의 세부에 부여한 시적 질서를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중요한 사례다. 단순한 화조 묘사 이상으로, 화면 전체에 흐르는 리듬과 안료의 운용은 정선이 회화를 통해 감각과 상징의 조화를 어떻게 설계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복원은 단순히 훼손된 그림을 되살리는 기술적 작업이 아니었다. 미술사적, 과학적, 문화사적 해석이 동반된 총체적 복원이자 재발견의 과정이다. 각 그림의 짝을 복원한 충해 분석부터 고급 안료의 사용, 섬세한 색감 조절 기법까지 이 화첩은 정선 만년기의 예술 감각을 다층적으로 되살려낸 기록이자, 그 회화적 사유를 구체화한 흔적이다. 이 복원 작업은 미국 금융사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후원으로 가능했다. 세계 유수 미술관과 함께 진행하는 ‘예술작품 보존 프로젝트(Art Conservation Project)’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BoA는 지난 2019년 간송미술관 측에 참여를 제안했고, 간송은 이 화훼영모화첩을 복원 대상으로 제출해 총 6800만 원을 지원받았다. 루브르박물관의 ‘사모트라케의 니케’, 보스턴미술관의 반 고흐 작품 등과 함께 이 프로젝트에 한국 작품이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내 문화재가 세계 보존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 것은 상징적이다. ‘문화보국’이라는 오래된 이상이 국제적 공감대를 얻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복원을 마치고 공개된 '화훼영모화첩'은 8월 3일까지 '화조미감'전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화조화를 모은 이번 전시에서는 보물로 지정된 단원 김홍도의 '병진년화첩',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의 '초충도' 병풍, 조선 중기의 대표적 화가인 이징(1581∼?)의 세련된 궁정 취향 수묵화조도인 '산수화조도첩' 등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조선 시기별 미감을 담은 화조화 37건 77점을 소개한다.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스승 오세창에게 들었던 말, 문화보국(文化保國). 일제강점기, 전형필이 생애를 걸고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 했던 이 정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오늘날의 문화보국은, 무너진 것을 단지 되살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복원된 유산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 의미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전하며, 다음 세대와 함께 나누는 일까지를 포함한다.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생생히 되살아난 겸재 정선의 ‘화훼영모화첩’은 오늘날 ‘문화보국’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다.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이 지속 가능한 미래로 이어지기 위해선, 이제 그 무게를 함께 나눌 동행이 필요하다. 예술가만이 아니다. 관객, 시민, 제도, 그리고 기업까지. 이제 모두가 함께 써 내려가야 할 '문화보국'의 다음 문장이다. 2025/06/10
“샤갈은 유행에 흔들리지 않았다" 장윤진 학예사와 대화 "샤갈은 유행에 흔들리지 않았다." 7년 만에 귀환한 '마크크 샤갈 특별전:비욘드 타임'은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다. 시간과 차원을 초월한 영혼의 회귀다. 샤갈(1887~1985)은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시적인 화가로 불린다. 러시아 비텝스크에서 태어난 유대인 화가로, 파리 베를린 뉴욕 예술살렘 등을 오가며 국경과 언어, 시대를 초월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초록 말을 탄 신부와 꽃다발을 든 광대, 붉은 사랑과 푸른 꿈, 화려한 꽃의 향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고 스러져가는 사람들, 그 위를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의 이미지까지.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러시아혁명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샤갈은 작품마다 전하지 못한 회한을 남겼다. '색채로 쓴 영원의 순간'은 그의 서사를 더욱 간절하게, 그리고 아련하게 만든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 열린 이번 샤갈 특별전은 회화, 드로잉, 석판화, 스테인드글라스 등 총 170여 점의 작품이 관객을 기다린다. 특히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미공개 원화 7점은 이번 전시의 중심이다. 개인 수집가로부터 직접 협의해 국내로 들여온 이 작품들은, 오직 이번 전시에서만 볼 수 있는 단 한 번의 진경(眞景)이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천장화와 이스라엘 하다사 메디컬 센터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재현한 몰입형 미디어아트 공간도 주목할 만하다. 해외에서 기획·제작된 이 설치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방식이며, 관객은 빛과 색으로 구성된 샤갈의 세계를 더욱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배우 박보검이 참여한 오디오가이드는 전시 개막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이탈리아·프랑스 큐레이터와 함께 샤갈 전시를 공동 기획한 예술의전당 장윤진 학예사는 “연대기보다 감정의 흐름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샤갈이 말한 ‘빛의 언어’, ‘감정의 기록’은 지금 여기, 서울에서 어떻게 다시 이야기되고 있을까. "무엇보다 새로움에 초점을 맞췄다"는 장 학예사의 시선에서, 이번 전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들어봤다. ◆국내에서 7년 만의 샤갈 특별전시다.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기획했나. 샤갈은 한국에서 이미 많은 사랑을 받는 거장이다. 전시도 여러 차례 열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샤갈의 또 다른 모습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이 컸다. 먼저 첫 번째로, 그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일곱 점의 원화를 공개하는 전시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두 번째로, 샤갈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회화 작품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작품 영역이 있다는 점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 가져올 수 있는 단순한 회화를 넘어서 더욱 깊이 체감할 수 있도록 몰입형 미디어 공간을 함께 연출했다. 예술의전당이 오페라극장이 있는 공간인 만큼,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극장 천장화와 같은 작품을 재현하거나, 샤갈의 작품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모티프로 한 연출로 몰입감 있는 전시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번 전시 키워드이자 제목 ‘비욘드 타임(Beyond Time)’은 어떤 의미인가. 샤갈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다루지 않는 작가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화면 안에서 뒤섞이고, 감정과 기억이 자유롭게 흐른다. 처음에는 연대기적 회고전을 구성해볼까도 했지만, 곧 그것이 샤갈의 언어와 맞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연대기보다는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구성을 택했다. 전시제목 '비욘드 타임'은 샤갈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화면 위에 겹쳐 놓듯 공존시키며 보여준 독특한 시간의 개념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바로 이와 같은 ‘샤갈’의 시간 개념을 따르고자 했다. 주제와 이미지가 교차하고 반복되면서 느껴지는 작가의 감정에 한층 더 이입할 수 있는 감상이 될 수 있도록 관람의 흐름을 구성했다. ◆동시대 전시가 많은 가운데, 지금 이 시점에 샤갈을 다시 소개하는 이유는. '서거 40주년’이라는 숫자만 보면 과거의 인물 같지만, 사실 샤갈은 꽤 ‘현대적인 예술가’다. 그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대전, 망명과 유대인 정체성이라는 복잡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이다. 그럼에도 놀랍도록 일관된 예술 세계를 구축했고, 시대의 변화나 유행에 흔들리지 않았다. 망명생활, 심지어 금전적 성공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스럽게 작업하는 게 오히려 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시대적 흐름과 담론을 바탕으로 한 오늘날의 많은 전시 중에서 오히려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이는 샤갈의 작품들은, 시간을 초월한 확고함을 기반으로 현재의 관람객들에게 자기만의 세계를 확립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이번에 '새롭다'는 '몰입형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됐나. 전시를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현대적' 요소들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었다. 몰입형 공간은 해외측 큐레이터 폴 슈나이터와 설계자 가엘 르네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오페라극장이라는 요소는 예술의전당에도 상징적이기에, 한가람미술관 1층 전시실 내부의 특징인 높은 공간감을 살려 제작하게 되었다. 샤갈이 1960년 하다사 병원 스테인드 글라스 헌정 연설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에게 스테인드 글라스 창은 내 마음과 세상의 마음 사이의 투명한 벽이다.” 샤갈이 빛을 통해 살아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던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 같은 경우는, 아무리 판화로(평면작품으로) 가져와도 그 공간의 현장감을 표현할 수 없었기에 미디어 프로젝션과 사운드를 이용한 현장감을 조성하여 회화와는 또 다른 감상을 전시 내에서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이번 전시는 이렇게, 방법으로서의 미디어 연출과의 접목을 통해 샤갈이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을 관객이 더 공감하고 체감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에 7점이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어떤 작품인가. 이번에 공개된 7점은 강렬할 컬러감을 보여주는 대형 회화도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판화를 완성하기 위한 스케치로서의 페인팅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스키스(스케치)로 보존되었던 것이라 그 동안 이 회화 자체가 드러난 적은 없었다. 1920~1930년대의 시기는 시각예술품의 배급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쇄술과 에디셔닝 제작의 방법은 예술가에게 단 하나의 클라이언트를 위한 회화작품 보다 더 널리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새로운 작품 활동의 플랫폼이었다. 샤갈의 입장에서는 최종 결과물인 판화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그려내었던 원화를 이번 전시에서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초기 스케치에 해당하는 회화와 판화를 함께 나란히 보면서 작가의 창작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독특한 감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가장 주목할 작품 중 하나는 '꽃병(The Jug with Flowers, 1925)'이다. 이번 전시의 마지막 섹션에 전시된 이 작품은 가장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생동감을 보여준다. 강한 붓터치, 아직 마르지 않은 듯한 물감의 질감,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아는 ‘샤갈 블루’와는 또 다른 색채의 깊이가 담겨 있다. 샤갈에게 ‘꽃’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라 정체성과 감정, 생명력의 상징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넘어 때로는 작가의 정체성, 생명력, 한편으로는 자화상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주요 오브제다. 이런 삶의 전반을 아우르는 꽃을 주제로 하는 작품 중에서도 특히 이 초기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 그림을 그린 이후의 샤갈의 작품 속에 펼쳐질 수 많은 감정의 흐름과 상상력의 세계를 예견하는 작품인 것 같아 그가 걸어갈 예술적 여정을 미리 엿본 듯한 감회가 새롭다. ◆170점 작품이 많다. 관람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감상법이 있다면.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1920년대 작품부터 1980년대 작품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의 작품들을 보여드리고 있다. 전시는 연대기 순서가 아닌 샤갈의 정신 구조를 따라 8개의 섹션으로 구성됐다. 기억, 주요 의뢰작, 파리, 영성, 색채, 지중해, 기법, 꽃이라는 주제를 통해 샤갈 예술의 다층적 구조를 읽어내도록 유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젊은 시기의 작품인 1920년대 작품은 가장 마지막 섹션에, 그리고 가장 노년의 작업이었던 80년대 작품은 첫 섹션에 위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상하는데 전혀 앞뒤 작품과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시간을 따라가는 전시가 아니다. 샤갈의 감정을 따라가듯, 느리게, 천천히, 이미지와 색채의 반복과 변주를 느껴보셨으면 한다.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려 하기보다, 이미지가 불러오는 기억과 감정을 믿고 따라가다 보면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이야기가 불쑥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샤갈은 그렇게, 아주 조용하게 마음에 말을 거는 작가다. 전시는 9월 21일까지 열린다. 2025/05/27
'되어보는 회화’…김남표, 감각의 수행자 “나는 그 대상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되려는 사람이다.” 존재를 감각하고, 그 감각을 물질로 환원하는 고유한 행위. 김남표(55)는 ‘지독한 회화주의자’다. 그에게 회화는 형상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 실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수행이다. ‘그린다’는 행위에 오롯이 몰두해온 그는 아카데믹한 구성에서 초현실적인 화면까지, 인상주의적 색채에서 극사실주의적 묘사까지 회화사의 다양한 문법을 끌어안고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낸다. 16일 성남큐브미술관 반달갤러리에서 개막하는 개인전 '누가 회화를 두려워하랴'는 그의 30년 회화 여정을 집약한 장면이자, 동시대 회화의 의미를 다시 묻는 조용한 반성문처럼 다가온다. ◆ '누가 회화를 두려워하랴' 전시 제목 '누가 회화를 두려워하랴'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 바넷 뉴먼의 작품에서 착안했다. 회화의 본질과 숭고에 대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질문하고자 하는 김남표의 태도가 제목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화면 위에서 오직 손과 감각, 물감과 시간만으로 말한다. 기술과 매체가 무한히 확장된 시대에도 그는 끝까지 ‘묵묵히 존재하는 것’을 택했다. 회화의 형식과 언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언제나 회화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향해 되묻는다. 김남표는 회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되어보는 것’이라 말한다.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듯, 그는 풍경과 존재를 감각하며 그 안으로 진입한다. ◆ 풍경을 응시하며, 감각으로 바꾸다 이번 전시의 중심축은 ‘Instant Landscape’ 연작이다. 산과 바다 등 자연 풍경을 주제로 한 회화 작품 30여 점이 소개된다. 2007년부터 이어져온 이 연작은 풍경을 다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이 된 순간의 감각을 환기하는 작업이다. 산과 바다, 수평선과 채광, 미세한 온도와 바람의 감각까지-그의 대형 회화는 찰나의 경험을 화면 위에 ‘붙잡아두는 숭고’를 보여준다. 프랑스 파리 시테 레지던시에서 제작한 드로잉과, 제주에서 채집한 실경 수채화는 유화의 밀도와는 또 다른 투명한 감성으로 다가온다. 회화의 물성은 곧 감정의 물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 안엔 빛보다 빠른 감각의 결이 흐른다. 산과 바다, 수평선과 채광, 바람의 온도와 소리까지-감각이 지나간 자리들이 즉흥적으로 발현된다. 한 번 본 그의 바다는, 이후의 바다를 바꾸어 놓는다. 어느새 ‘김남표의 바다’가 되어 감각의 잔상처럼 눈에 맺힌다. ◆‘색으로 공을 긁다’…'김남표식 실존 회화' 김남표의 회화는 관념을 말하지 않는다. 극사실의 밀도와 초현실의 감각이 교차하지만, 그의 회화는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작품에는 고요함 속의 필사적인 감각이 있다. 지금 이 시대에 회화를 끝까지 믿는다는 것-그 자체가 어떤 예술보다 급진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보는 이를 멈춰 세운다. 물감이 덕지덕지 얹힌 화면, 면봉과 손끝으로 그려낸 형상은 과잉의 물성으로 밀고 들어와, 때로는 ‘촌스럽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존재의 결핍, 그리고 실존의 울림이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형상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형상이라는 그 말처럼, 김남표의 회화는 색(形)을 통해 공(空)에 이른다. 김남표 그림은 단지 시각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물질에서 실존으로 이행하는 통로이며, 김남표는 그 물질의 덩어리 속에서 실존의 고유성을 긁어내는 화가다. 그에게 회화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론적 언어다. 손끝의 촉각, 반복 불가능한 감각의 구조, 그 모든 것이 회화의 숙명이 된다. 김남표는 말한다. “존재를 감각하고, 감각을 물질로 환원하는 그 고유의 행위가 회화다.” 회화는 끝나지 않았다. 김남표는 여전히, 물감과 손으로 실존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회화를 믿는다. 그 믿음은 어떤 첨단 기술보다 묵직하고, 어떤 유행보다 고집스럽다. 그의 화면 앞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회화를 두려워하랴.” 전시는 7월 13일까지. 2025/05/16
빛을 통과하는 몸…존재를 조각한 '안소니 맥콜'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것.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것. 빛과 시간의 경계에서, 안소니 맥콜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이미지는 물리적 경험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예술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 미디어아트의 살아 있는 전설, 안소니 맥콜(Anthony McCall·78)이 서울 푸투라서울(Futura Seoul)에서 아시아 최초 개인전 'Anthony McCall: Works 1972–2020'을 연다. 전시는 5월 1일부터 9월 7일까지 열린다. 28일 서울 삼청동 푸투라서울에서 직접 작품 설명에 나선 맥콜은 진지했다. 빛, 소리, 시간, 공간을 조각 하는 그는 "관객이 직접 내 작품 속을 걷고 통과하며 몰입형 체험을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전시장은 웅장한 파도 소리로 열린다. 5개의 바리톤 반구형 스피커가 전시장 바닥을 따라 12m 길이로 설치됐다. 단순한 기계 장치 같은 설치물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점차 속도와 볼륨이 증가한다. 천천히 시작해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공간을 채워 몸의 감각을 깨운다. 맥콜은 "순수한 소리 파동이 눈에 보일 정도로 이동한다"고 설명했다. 이 파동은 청각을 통해 별 것 없는 공간을 새롭게 감각하게 만든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지하 공간에서 펼쳐진다. '솔리드 라이트(Solid Light)'시리즈의 최신작 'Skylight'(2020)가 압도적이다. 빛, 안개, 소리, 시간으로만 이루어진 설치 작품이다. 2층에서 내려다보며 만나는 3개의 삼각 빛 기둥은 마치 SF영화의 한 장면처럼 '미래로 가는 비행선' 착륙장 같기도 하다. 안개 속에 투사 된 것 같은 빛은 3차원 공간 속 입체적 조각을 만들어 신비한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2020년 소형 버전으로 제작됐던 이 작품은 이번 푸투라 전시에서 처음 실물 크기로 공개됐다. 쏟아지는 삼각형의 '빛의 커튼'을 가르며 걸어 들어가는 순간, 안다. 몸으로 시간을 가르고, 공간을 조각하는 행위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빛은 투명한 유리처럼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허공을 휘젓는 손끝에서 부서지는 듯한 감각. 그 허망한 순간, 소리의 울림이 온 몸에 들어선다. '빛'과 '어둠' 사이의 긴장감은 존재론적 울림을 던진다. 폭풍우 소리,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는 마치 원시 동굴 속에 있는 듯 묘한 불안감과 떨림을 자극한다. 빛 속의 '나'라는 존재와 빛 밖의 '너', 타자의 존재를 선명하게 각인하며 인간 관계의 상호작용을 시각적으로 눈뜨게 한다. "예술은 물리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안소니 맥콜은 지난 50여 년 동안 시네마, 설치, 조각, 드로잉,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확장 시네마(Expanded Cinema)’라는 혁신적 예술 영역을 구축했다. 빛과 시간을 주요 재료로 삼고, 관객 참여로 완성되는 구조를 제시했다. 1970년대 초, 뉴욕의 어두운 다락방. 맥콜은 필름 영사기를 이용해 연기 속에 빛을 쏘아 공기 중 입체적인 형태를 만들어냈다. 대표작 'Line Describing a Cone'(1973)에서는, 빛이 천천히 원을 그리며 자라나고, 관객이 그 궤적을 따라 움직이며 작품을 완성한다. 그러나 초기 작업은 기술적 제약에 부딪혔다. 전시장 공기가 지나치게 깨끗해, 원했던 빛의 조각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던 것. 맥콜은 1970년대 후반부터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예술 작업을 잠시 중단했다. 1990년대 후반, 디지털 프로젝터와 헤이즈 기계의 개발은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2001년 휘트니 미술관 전시를 시작으로, 휘트니 비엔날레, 퐁피두센터, 서펜타인 갤러리, 구겐하임 빌바오 등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 그의 작업은 재조명됐다. 푸투라 서울 전시에서는 ‘솔리드 라이트’ 시리즈 외에도, 초기 실험 영화, 드로잉, 아이디어 스케치, 아카이브 자료가 함께 소개된다. 맥콜은 빛이라는 비물질을 조형의 재료로 삼게 된 계기는 "빛으로 조각 해야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닌 영화 때문 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영화에 매료됐던 그는 "'영화의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영화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수반하는 과정에서 나온 작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1970년대 당시 미니멀 개념 미술이 대세였는데 형태의 단순화에 고민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영화는 영화인데, 관객이 스크린 쪽으로 등지고 감상하는 영화를 착안했다. 스크린 쪽으로 돌리는 빛을 쓸 수밖에 없었다. 빛을 쓰다 보니 투사가 되고 입체'가 생기는 것을 보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게 '솔리드 라이트' 시리즈가 탄생했다." 생계 문제로 그래픽 회사를 운영하며 20년 간 쉬는 과정에서 시대의 변화도 느꼈다. '소리'가 기존의 작업 방식에서 해방을 시켜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매체의 순수성을 위해서 소리를 배제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그는 "이제 그 시대는 갔다. 이전 추상적이고 기하학적 작업을 해왔다면 지금은 서사를 드러나게 해주는데 소리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맥콜은 "이번 푸투라 서울 전시에 1972년 작품 3개를 선보였는데, 과거의 그때 시절로 돌아가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었다"면서 "다시 소리를 입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해서 새 작품을 하는데 꾸준히 하고 있다"고 했다. 푸투라 서울의 수직 구조(천장고 10.8m)를 살린 전시 공간은 빛과 시간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현재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도 전시를 진행 중인 맥콜은 "테이트모던 전시가 원 뿔을 그리는 솔리드 라이트 시리즈의 수평적인 연대기적 확장이라면, 푸투라는 수직적 작업과 퍼포먼스를 기록한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결이 다른 전시"라고 소개했다. "푸투라는 수직 구조의 작품을 전시하기 아주 좋은 공간"이라며 "푸투라가 전시 제안을 해왔을 때, 기회를 꽉 잡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바로 응했다"고 덧붙였다. 디지털 시대의 속도에 맞서, 맥콜은 "느림의 미학"을 지향한다. 이는 "철학적 사유보다는 조각이라는 매체 때문"이라며 "빠르게 소비하는 시대에, 천천히 탐색하고 관조하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빛 기둥'은 천천히, 16분에 걸쳐 미묘하게 움직이며 3차원 공간에서 빛의 형태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단순히 보는 것을 넘는다.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빛을 '조각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꾼 맥콜은, 시간까지 '흐르는 감각'으로 경험하는 마법을 부린다. 오늘날 설치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몰입형 작품'이, 이미 50년 전 맥콜에 의해 구현됐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다. 빛과 시간과 소리, 먼지까지 입체적인 체험을 선사 하는 이 전시는, 21세기를 앞서 도달한 예술가 안소니 맥콜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예술은 이미지가 아닌 경험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빛의 조각가' 안소니 맥콜은? 1946년 영국 세인트 폴스 크레이(St Paul’s Cray)에서 태어나 뉴욕 맨하탄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1973년 'Line Describing a Cone'(원뿔을 그리는 선) 으로 시작된 '고체 빛 (solid-light)' 설치 작품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다. 맥콜의 작품은 파리 퐁피두 센터 (2004), 런던 테이트 브리튼 (2004),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2007),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2007-8), 밀라노 앵거 비코카 (2009), 스톡홀름 근대미술관 (2009), 포르투갈 포르투 세랄베스 (2011), 베를린 함부르거반호프현대미술관 (2012), 스위스 생갈렌 미술관–로크레미제 (2013), 암스테르담 아이 필름 뮤지엄 (2014), 스위스 루가노 예술문화센터 (2015), 뉴욕 파이오니어 웍스 (2018), 헵워스 웨이크필드 (2018),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2019), 그리고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2024) 등에서도 전시되었다. 2008년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 재단 펠로우십, 2014년 The Berlin Prize, American Academy in Berlin 펠로우십, 2015년 Arts and Letters Award in Art,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Letters, 2024년 내셔널 아카데미 오브 디자인 회원으로 선출됐다. 2025/04/28
정연두, 밀가루로 우주를 만들다 '실재하지 않는 연주, 만져지지 않는 사운드. 정연두는 공기로 세계를 조율한다.' 무대가 있다. 연주자도 있다. 관객도 있다. 하지만 공연은 없다. 전시장에 펼쳐진 것은 실제 공연처럼 보이지만, 모두 사전에 녹화된 영상이다. 정연두의 신작은 벽에 박힌 영상 속 연주자들을 통해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연출한다. 25일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개막한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은 영상, 사진, 조각, 퍼포먼스를 넘나드는 신작으로, 작가 특유의 다정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국제갤러리에서 2008년 이후 처음 열리는 개인전이다. 블루스와 발효, 음악과 이미지로 익숙한 질서와 논리를 넘어, 설명할 수 없는 세계와 조우하려는 시도를 펼친다. 전시는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는 여섯 명의 뮤지션이 각기 다른 조명과 배경 속에서 몰입한 채 연주하는 다채널 영상 설치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마주 보지 않고, 함께 연주하지 않지만, 각자의 리듬으로 하나의 합주를 이룬다. 작곡가 레이 설(Ray Soul)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12마디 블루스 구조를 차용한 이 연주에는 단 두 가지 약속만 주어진다. 67bpm의 느린 템포와 간단한 코드. 작가는 연주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을 모아 비동시적 협주로 재구성한다. 그 사운드는 곧 불가피한 현실을 살아가는 개별 존재들의 리드미컬한 몸짓으로 확장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블루스의 리듬을 따라 다섯 개의 장면이 펼쳐진다. 첫 장면에서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손끝에 맞춰 빛을 발하는 항아리를 마주하게 된다. '아픈 손가락’이라는 이 작품은 아름다운 음악 뒤편에 숨은 고통을 시각화하며, 항아리 내부에는 만화경처럼 색색의 빛이 일렁인다. 벽에 걸린 러시아어 텍스트는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의 사연에서 비롯된 노래다. “BTS, 블랙핑크는 나의 사랑. 하지만 한국 여자가 되는 건, 안타깝게도 나에겐 불가능해.” 작가는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인터뷰하고, 그 사연을 가사로 바꿔 블루스 멜로디 위에 실었다. 이 이야기는 인도네시아산 바틱(Batik) 천 위에 손으로 쓴 글귀로 번역되고, 치자·강황·자초 등 천연 염료로 염색된 천 위에 새겨진다. 전시장은 음악뿐 아니라 발효의 리듬으로도 구성된다. 막걸리의 기포가 터지는 박자에 드럼이 울리고, 사워도우 반죽이 부푸는 리듬에 맞춰 색소폰이 숨을 쉰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우주’처럼 보이는 사진 이미지다. 검은 대리석 위에 밀가루를 흩뿌려 만든 이 장면은 마치 은하계의 탄생처럼 보인다. 오르간과 퍼커션 연주자가 음악에 맞춰 밀가루를 뿌리고, 영상 속에서는 그 가루가 빛을 받아 별처럼 떠다닌다. 소망하듯 두 손을 비비고 박수를 치며 만들어낸 장대한 우주는, 실은 빵을 만들기 위한 밀가루라는 점에서 정연두 특유의 가벼움과 무거움, 장난기와 엄숙함이 교차하는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 가벼운 밀가루가 그려낸 장엄한 우주는, 전시장 전체에 깔린 역설의 정수이자 ‘가볍고도 무거운 삶’을 함축하는 시적 장면이다. 또 작가는 메주를 담그는 대신, 그 위에 사람의 기억과 시간을 띄웠다. 사진 연작 '바실러스 초상'은 메주 속 바실러스균이 피워낸 하얀 거품을 클로즈업해, 마치 사람의 초상처럼 보여주는 작업이다. 관람객들 사이에서는 “메주의 재발견”이라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보이지 않는 균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감정의 박테리아와도 닮았다. 우주와 블루스와 메주균을 연결하는 장면은 우주의 질서를 되묻는 ‘치유의 리듬’처럼 다가온다. 조용히 스며들고, 시간 속에서 발효되며, 결국 삶의 일부가 되는 존재. 정연두는 이번 전시에서 그 발효의 과정을 통해 신의 리듬에 가까운 삶의 움직임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작가에게 이번 작품에 어떤 메시지가 관통하느냐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방식. 논리보다 믿음, 치유보다 리듬.” 전시는 종교적 경계와 감각의 흐름까지 건드린다. 작품 곳곳에서 불교 경전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양한 인연이 얽힌 존재감. 이것과 저것의 관계 맺기, 비어 있음의 충만함, 닿을 수 없는 감정의 밀도. 혼자 음율에 빠져 온 몸을 전율하듯 연주하고, 중얼거리듯 노래하고, 얼굴이 벌개져도 불고 부는 색소폰리스트처럼 부단히 반복하는 영상이 보여준다. 이것이 삶이라는 것을. 이 전시는, 설명할 수 없어도 끝내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의 ‘피치 못할’ 풍경을 조용히 응시한다. 전시는 7월 20일까지. 관람은 무료. ◆정연두 작가는? 1969년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골드 스미스 칼리지 미술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작가는 퍼포먼스가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사진, 영상, 설치 등 미디어 작업에 주력해 왔다. 주로 현대인의 일상에서 작업의 소재를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에 주목하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국립현대미술관 ‘2007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 국립현대미술관(2023), 울산시립미술관(2022), 미국 웨스트 팜 비치 노턴 미술관(2017), 아트선재센터(2017), 프랑스 비트리 쉬르 센 맥발 미술관(MAC VAL)(2015), 일본 아트 타워 미토(2014), 플라토 미술관(2014), 중국 상하이 K11 아트 스페이스(2013), 미국 뉴욕 PERFORMA 09(2009) 등이 있다. 2025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2024년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기념전, 2021년 광주비엔날레, 2016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등에 참여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도쿄도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시애틀 미술관, 맥발미술관 등에 작가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25/04/25
"우주 탐사,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DDP에 착륙한 톰 삭스 수공으로 쌓아올린 우주, 흔적의 미학. 톰 삭스는 “예술은 남기는 것”이라며, 손끝으로 우주를 다시 조립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착륙한 그의 세계는, 기술과 감정, 유머와 시스템이 교차하는 거대한 탐사의 장이다. 뉴욕 출신 아티스트 톰 삭스(Tom Sachs)는 2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천 겹의 합판과 테이프, 나사와 드릴로 쌓아올린 그의 작품처럼, 그의 말도 날것 그대로였다. 전세계 미술계에서 현재 가장 혁신적인 아티스트로 주목받는 톰 삭스는 합판, 박스, 테이프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산업 재료를 활용해 대중문화와 기술, 디자인의 상징적인 주요 산물을 브리콜라주(Bricolage∙손에 닿는 대로 아무 것이나 사용하는) 기법으로 정교하게 재제작하는 아티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25일부터 9월 7일까지 DDP 전시1관에서 열리는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29: 톰 삭스 전’은 그의 대표작 ‘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Space Program: INFINITY)’를 중심으로, 총 2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이다. [[[[:newsis_inyoung_left_start:]]]]“화성은 잊어라.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 톰 삭스 [[[[:newsis_inyoung_left_end:]]]]전시는 작가가 2007년부터 구현해온 '스페이스 프로그램' 시리즈의 주요 작업들과,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를 질문하는 신작 멀티미디어 설치작 'Faith'까지 아우른다. 이 전시는 NASA의 우주 탐사 프로그램을 브리콜라주 방식으로 구현한 대형 설치 프로젝트로, 핸드메이드로 구성한 우주선과 격리실, 채굴장비, 관제센터 등 가상의 탐사 세계가 펼쳐진다. 달, 화성, 유로파, 베스타 등 과거의 탐사 미션에 더해, 이번엔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라는 새로운 설정이 가세했다. 탐험은 우주의 끝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향한 여정이 된다. 전시는 총 9개 주요 섹션으로 구성된다. 입구의 정화실(RISCAR)을 시작으로, 채굴지(DIG SITE), 유물관(Astrobiology & Museum), 격리실(Quarantine), 체험형 Lunar Lander까지 이어지며, 관람객은 조각과 설치, 멀티미디어가 결합한 몰입형 우주를 탐험한다. 가장 깊숙한 곳엔 클라이맥스인 미션 관제센터(MCC)와 신작 'Faith'가 기다린다. 관람객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로서 미션을 수행하고 ID카드를 발급받으며 톰 삭스 스튜디오의 일원이 된다. 이날 한국 기자들을 만난 톰 삭스는 “우주를 탐사하는 일은 결국 인간 자신을 탐색하는 일”이라며, 질문의 방향을 안쪽으로 돌렸다. 예술과 과학, 집착과 유머, 기술과 아날로그 감각을 뒤섞은 이번 전시는 그의 작업 세계가 응축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는 톰 삭스의 최신 대표작을 망라한 전시다. 톰 삭스는 1960~70년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 ‘아폴로 프로그램’에 매료됐고, 더 나아가 일상 생활과 소비재에 등장하게 될 선구적인 신기술을 위한 인큐베이터로써 NASA의 지속적인 역할에 관심을 가져왔다. 다양한 우주선 모델과 우주에서 사용하기 위해 신소재로 제작한 신발, 그의 몰입형 우주 프로그램인 등 우주 관련 작업을 다수 구현했다. 그는 "굉장히 오래 선보이는데 엔터테인먼트와 다르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이 자리에서는 지구에서 화성으로 떠나려고 한다. 우리의 미션은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구를 망가뜨렸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로 가는 것도, 새로운 터전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서 찾은 자원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준비 기간만 18개월이 걸렸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관계자는 “전시의 구성부터 작품의 위치 등을 작가와 세밀하게 협의해 준비했다.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가 열리는 DDP는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여성 최초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건축물로, 마치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다. 삭스는 “이 건물 자체가 자하 하디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곳은 우주선과 같은 건물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선이 DDP 옥상에 착륙하는 모습을 생각해 봤고, 그 상상이 이번 전시의 작품으로도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스튜디오 운영 방식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우리가 서로를 지지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손으로 만드는 예술의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의 29번째 프로젝트이자, 7년 만의 대형 복귀작인 이번 전시는 단지 우주를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다. DIY와 브리콜라주, 탐사와 환상, 시스템과 유머가 충돌하는 이 거대한 핸드메이드 우주는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한편 이 전시에서는 톰 삭스의 개성이 담긴 굿즈도 만나볼 수 있다. 휴대용 현미경, 레이저 줄자 등 ‘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Infinity)’ 작품 속 우주 탐사 과정에 실제 활용된 도구를 비롯해 작가가 직접 디자인한 티셔츠 등 총 101종의 굿즈를 전시장 내 아트샵에서 구매할 수 있다. 또한 전시 기간 동안 톰 삭스와 글로벌 브랜드가 협업해 제작한 한정판 아이템도 순차적으로 깜짝 공개할 예정이다. ◆톰 삭스? 196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1987년 런던 건축협회 건축학교에서 공부한 작가는 1989년 버몬트 주 베닝턴 대학교를 졸업했다. 조각, 회화, 도자기, 산업 및 그래픽 디자인과 영화 제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가는 “나는 피카소 작품과 화장실 청소 도구 사이에 어떠한 가치 차이도 없다고 생각한다”며 “예술이든, 일상용품이든, 우주선이든 관계없이, 가장 깊이 있고 진정한 관계를 맺으며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을 이해하고자 모든 것에 대해 탐험한다”고 했다. 35년 이상 활발한 활동을 이어 오고 있는 톰 삭스의 작품은 전 세계 유수 미술관을 통해 소개됐다. 초기 전시회에서 작가는 전화번호부와 강력 접착테이프로 사무가구 제조사인 놀의 사무용 가구를 만들었고, 이후 폼 코어와 글루건만을 사용해 르 코르뷔지에의 1952년 주택 집합체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재창조했다. 주요 프로젝트로 자신의 버전으로 다시 만든 아폴로11 달 착륙선과 항공모함 USS 엔터프라이즈의 다리와 맥도날드 감자튀김 부스를 그대로 재현한 모델이 있으며, 이는 현재 아스트룹 피언리 현대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2025/04/24
'젊은모색 2025' 동시대 감각과 철학이 갱신된 현장 “놀이 같지만 깊이 있다.” 마치 애니메이션 속 장면처럼 선명한 색감의 캐릭터들이 벽면을 가득 메운다. 입구부터 시선을 잡아끄는 건 컬렉티브 ‘업체leobchae’의 설치 작업. QR코드와 데이터, 웹3 그래픽이 얽힌 이 현란한 화면은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 아니다. 기술과 종교, 자본과 알레고리가 버무려진 동시대적 언어다. 놀이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작품들은 자아 탐구와 사회 비판, 기술 비평이라는 깊이를 드러낸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23일 개막한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는 1981년 ‘청년작가전’으로 시작한 이래 22회를 맞은 장수 신진작가 전시다. 2025년판 ‘젊은 모색’은 특히 세대 교체 이후의 첫 전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번 전시는 39세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 펼치는 감각의 총합이다. 자아 탐구에서 출발해 사회 구조와 기술 비판, 공동체의 의미까지 주제를 확장시킨 작업들은, 개성 있고 생기발랄한 시각 언어로 동시대 감각을 재해석한다. 디지털 네이티브 감각이 오롯이 반영됐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이번 전시의 작가들은 영상과 설치작업'기반으로 작업하지만, 결국은 자아 이야기로 이어진다”며 “매체는 변해도 작가의 성격이 드러나는 독특한 스토리가 오래간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다섯 개 섹션으로 나뉘며, 회화·설치·영상·사운드·게임·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20명(팀)의 작가가 참여했다. , 권동현×권세정, 김을지로, 김진희, 다이애나랩, 무니페리, 상희, 송예환, 야광, 업체eobchae, 이은희, 장한나, 정주원, 조한나A, 조한나B 등 20인(개인 및 팀). 이들은 모두 미술관 내부 학예연구사와 외부 전문가의 추천 및 자문을 통해 선정됐다. 전시 입구를 장식한 ‘업체leobchae’의 캐릭터 회화와 디지털 영상은 관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위키피디아식 구성, 블록체인 구조, 성인 캐릭터의 서사로 포장된 웹3 서사는 디지털 기술과 신앙의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을 시각화했다. “근엄한 것을 유머로 바꾸는 것이 젊은 작가들의 힘”이라는 설명처럼, 게임과 만화, 인터넷 언어를 차용한 전시는 유희와 비판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든다. 특히 기술과 자본에 대한 논의는 이번 전시의 주요 흐름이다. 다이애나랩의 ‘티끌’, 상희의 VR형 게임 설치, 김을지로의 생물학적 3D 애니메이션은 기술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들이 어떻게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때로는 전복시키는지를 탐색한다. 상희 작가는 “게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동과 동행을 주제로 한 감각의 속도 실험”이라며 “관객이 직접 조작자로 개입하는 구조”를 강조했다. 김을지로는 3D 그래픽으로 재현한 생물체를 통해 공생의 불가능성과 인류의 불확실한 미래를 그려낸다. 상희는 관람객이 직접 VR 게임 속에서 타인과 속도를 조율하며 ‘행진’을 경험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들의 시선은 다층적이다. 정주원은 회화에 나무껍질과 사람의 피부를 연결해 자연과 인간의 시간을 탐구했고, 김진희 회화는 집 안이나 발코니, 방 안의 책상 등 사적인 공간에서의 일상과 감정을 집중적으로 드러낸다. 관객을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초대하고, 개인적인 공간에서의 일상을 통해 사소한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한다. 다이애나랩은 소수자와 함께 만든 설치작품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경계’를 드러낸다. 야광(김태리·전인)은 테마파크 ‘다크 라이드’ 형식을 통해 노동자의 공포를 비유했고, 업체leobchae는 데이터와 신앙을 겹친 웹 기반 작업으로 블록체인 사회의 믿음을 시각화했다.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형식의 작업도 주목할 만하다. 조한나A의 '우리 단지'는 여수의 석유화학단지를 배경으로, 폭발 사고와 기억을 영상과 드로잉으로 풀어냈다. 노동자의 목소리, 가족의 인터뷰, 작가 자신의 성장기까지 섞인 이 작업은 ‘트라우마의 지층’을 가시화하며 감정의 시간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은희의 '섬섬옥수'도 산업혁명 시기의 직업병 문제가 오늘날의 전자 기술 산업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조명한다. 다양한 역사적 자료와 함께 산업 재해 피해자들의 발화와 행위를 기록한 퍼포먼스 등으로 구성된다. 각 시대의 최첨단 산업과 기술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모순적이고 취약한지를 질문하며, 오늘날의 기술 세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전시의 큰 흐름은 '나로부터 출발해 우리로 확장되는' 감각의 여정이다. ‘함께 하기’, ‘기술 너머’ 등 섹션으로 구분된 구성은 각 작가들의 작업이 자기 안의 감정에서 시작해 사회와 동시대의 조건을 포착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준다. 이번 ‘젊은 모색 2025’의 작가들 상당수는 국내에서 학부를 마친 뒤 독일, 특히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 세대다. 베를린 아트씬의 실험성과 개방성을 경험한 이들은 ‘나’로부터 출발해 ‘우리’로 향하는 동시대적 고민을 글로벌한 시각으로 풀어낸다. 자전적 이야기에서 사회 구조, 기술 비판까지 폭넓게 확장된 주제들은 한국 현대미술이 더 이상 국지적이지 않음을 증명한다. 이들은 로컬의 감각과 글로벌한 언어를 동시에 장착한, 지금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세대다. 전시장 곳곳에선 작가들이 연출한 '게임의 룰'에 따라 관객이 직접 참여하거나 헤드셋을 착용해 서사를 경험한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익숙한 작가들은 애니메이션, 웹툰, 시뮬레이션, 다큐, 웹사이트, 실시간 리더보드 등 친숙한 매체를 활용해 ‘현대의 알레고리’를 제시했다. 이를 두고 김성희 관장은 “생동감 있고 한국적 감성이 살아있는 작업들이라 해외 수출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오는 10월 5일까지 약 6개월간 장기 운영하며, 프리즈 서울(9월) 기간에 맞춰 해외 미술 관계자들의 방문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미술관은 “이 전시를 통해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히겠다”고 밝혔다. ‘젊은 모색 2025’는 단순한 신진작가전이 아니라, 동시대 감각과 철학이 갱신되는 현장이다. 기술과 자본, 환경, 관계, 자아 등 청년 작가들은 이 모든 것을 ‘지금, 여기’의 언어로 끌어왔다. 한국 동시대미술의 차세대 주역들이 세계 무대로 나아갈 첫 비전이, 바로 이 전시에 담겼다. 2025/04/23
시간을 건너온 '록의 전설' 패티 스미스, 남산 '피크닉' “예술가도 행동하는 혁명가다.” 자유로운 그래피티 정신을 품은 록의 전설이 서울에 왔다. 미국 록 밴드의 대모이자 시인이자 예술가인 패티 스미스(78)가 서울 남산 피크닉(Piknic)에서 전시를 연다. 사운드워크 컬렉티브와 협업한 시, 사운드, 영상, 오브제를 아우르는 몰입형 전시로, 아시아에서는 처음 공개된다. ‘끝나지 않을 대화’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패티 스미스와 사운드워크 컬렉티브가 10여 년간 주고받은 서신과 예술적 교감을 바탕으로 한 시와 소리의 프로젝트다. 조지아 트빌리시 사진 및 멀티미디어 박물관(2023), 콜롬비아 메데인 현대미술관(2024), 오나시스 재단(2024), 미국 쿠리만주토 갤러리(2025)를 거쳐 아시아 순회전의 시작점으로 서울이 선택됐다. 이어 오는 4월 26일부터 6월 29일까지는 일본 도쿄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한다. 18일 피크닉 전시장에서 마주한 전설은 여전히 록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양 갈래로 흰 머리를 땋고, 청바지를 워커 안에 집어넣은 마른 노인은 똑바로 서 있었다. '록의 전설'이라는 이름이 시간 속에서 현재형으로 존재함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1975년 1집 '호시스(Horses)'로 데뷔한 스미스는 펑크록 가수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른 '로큰롤의 대모'로 불린다. 남성 누드사진작가이자 미국의 현대사진작가인 고 로버트 메이플소프(1946~1989)와 동거하며 그의 뮤즈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시를 쓰다 로큰롤에 우연히 빠진 스미스는 절묘한 시대적 감각을 음악 세계에 반영하며, 다른 예술 장르나 예술가와 함께 작업하는 일을 평생 해오고 있다. 이 전시에서 '전설'이라는 이름은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용한다. 콘텐츠보다 이름이 먼저 설명되고, 감상보다 경외가 먼저 작동한다. 관람객은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수용'하거나 '해석'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전시는 기억, 자연, 기후 위기, 혁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체르노빌 어린이 합창단의 목소리를 담은 사운드, 멸종 동물의 이름을 읊는 낭송 영상, 육필 노트와 자연물을 활용한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의 아카이브가 전시장 곳곳에 배치돼 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대형 산불, 동식물의 대량 멸종 등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조망하는 동시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파올로 파솔리니, 마리아 칼라스, 표트르 크로포트킨 등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탐구한다. 총 8편의 비디오 작품은 딥티크(Diptych) 형식의 스크린 배열로 서로 작용하며 새로운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시와 낭송은 반복되고, 정치적 선언은 명확하며, 자연물을 수집한 드로잉과 유물은 상징처럼 배치된다.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려는 태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관객에게 사유의 시간을 건네기보다는, 명확한 관점을 전달하고 그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는 구조다. 패티 스미스는 여전히 '혁명'을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강렬하고 단단하며, 육필 노트와 드로잉, 사운드 조각, 멸종 동물의 흔적들은 진정성 있는 작업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비디오와 사운드, '혁명'이라는 단어는 이제 무거운 울림보다는 그저 흐르는 시간처럼 인식된다. 기후 위기와 재난이 일상이 된 현대인에게, 결국 전시 공간을 압도하는 것은 이름이다. '패티 스미스'라는 존재가 전시 전체의 동력이자 이유다. 문제는 그 이름이 오늘의 관객에게 얼마나 새롭고, 또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다가오는가 하는 점이다. 피크닉 4층 정원에는 한국 비무장지대(DMZ)에서 채집한 장소 특정적 설치 신작도 있다. 드로잉 작품 아래 작은 돌멩이가 누른 전단지는 캠페인 문구를 담은 '삐라'처럼 배치돼 있으며, 관객이 한 장씩 가져갈 수 있다. 패티 스미스가 직접 쓴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는 한글 메모와 사인이 함께 적혀 있다. 이번 전시는 스미스와 사운드워크 컬렉티브의 수년간 협업의 결실이다. 이 그룹의 창립자인 스테판 크래슬러(Stephan Crasneanscki)와 스미스는 약 10년 전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예술과 문학, 소리와 언어를 넘나드는 협업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 내한해 직접 설명에 나선 패티와 스테판은 '피크닉 공간' 전시에 완전 만족한 모습이다. 이번 전시가 서울에 올 수 있었던 데는 한 개인의 오랜 팬심이 큰 역할을 했다. 피크닉 김범상 대표는 1995년 뉴욕에서 열린 패티 스미스의 시 낭송 공연을 단 몇 줄 차이로 보지 못했다. 그 아쉬움이 30년이 지나, 자신이 만든 공간에 직접 '전설'을 초청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래된 열정의 잔광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전시일 수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면 자연스레 패티 스미스의 이름을 다시 검색하게 된다. 1988년작 ‘피플 해브 더 파워(People Have the Power)’를 들으며 전시를 곱씹게 된다. 전시는 7월20일까지. 관람료 1만5000원. 2025/04/19
두 딸 울린 '검은 그림'…최병소 '무제' 숭고미 모나미(365)볼펜이 무기다. 불확실한 세상으로부터의 자발적 고립은 무심의 경지로 나아갔다. 긁고 긁고 또 긁어 암흑 천지가 되기까지 몽당연필도 가세했다. 볼펜의 경계를 쌓고 메운 연필과의 협업은 어둠의 세계를 비추는 한줄기 빛이다. 연필심(흑연)이 내는 광택은 아우라를 발산한다. 40년 간 '긋는 행위'를 멈추지 않은 그는 예술의 세계에 도달했다. 어릴 적 화가였던 아버지를 자랑하지도 못했다. 늘 신문지를 볼펜으로 긁기만 하던 아버지. 그렇게 나온 검은 그림을 보고 친구들은 "김이야?"라고 묻기도 했다. "이젠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17일 '볼펜 작가'로 불리는 최병소(82)화백의 개인전을 앞두고 만난 큰 딸과 둘째 딸은 '아버지'라는 단어만 내놓고도 울컥했다. "커서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항상 고독하게 마음을 누르면서 작업하는 게 보이니까…그 감정들이 와 닿더라고요." 아버지의 작업을 도와주며 매니저처럼 일한다는 둘째 딸 최윤정씨는 "아버지는 볼펜으로 긁기 작업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치유한 것 같다"면서 "여전히 재미있고 편안하게 볼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오는 24일 서울 성북동 우손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을 여는 최병소 화백은 최근 거동이 불편해져 공식 석상에 나오기 힘든 상태라고 한다. 두 딸이 대신 기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둘째 딸은 "아버지는 일기 쓰듯이 작업한다"면서 "'나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서 작업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고 전했다. '어떤 작가냐'는 물음에 "고독한 작가이고 작품을 열심히 하는 작가"라고 답했다면서 아버지는 "많은 생각들과 모든 사심들을 지워나가는 힘든 노동이지만 볼펜 긁는 소리에 희열감을 느낀다고 했다"는 것. 아버지의 고집스런 예술 세계가 이어진 건 어머니의 힘이 컸다. 중매로 만난 부모는 처음엔 외갓집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돈을 못 버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사위로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미술 하는 사람'을 받아들였다. 맨날 긋고 긁는 남편을 위해 어머니가 생계를 맡았다. 미싱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2녀 1남을 키우고 아버지의 예술을 추켜세웠다. 1990년대 어느 날 아버지 전시회가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데리고 사위가 그린 그림을 보러 전시장에 나온 외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림이 어디 있는데, 이 뭐꼬?" 하는 친구들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검은 그림'. 아무것도 없는 그림의 반란은 2000년대 이후 시작됐다. 볼펜이라는 재료와 무심한 작업 과정에 놀란 파리의 한 갤러리가 초대전을 연 데 이어 2015년 아트바젤홍콩에서 작품이 팔리면서 알려졌다. 특히 국내 미술시장에 단색화 붐이 일면서 '검은 그림'도 꿈틀대며 대박을 치기 시작했다. 최 화백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와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70년대 후반 대구 현대미술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회화의 조형성과 의미 구조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지속해 왔고, 신문, 잡지, 인쇄물 등 대중매체를 활용한 ‘지우기와 긋기’행위를 통해 작업의 방법론을 정립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평면 작업을 넘어서, 언어 구조와 권위의 해체, 이미지 생산 메커니즘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적 개입으로 작동한다. 1990년대부터 이어진 작업은 '삶의 투지력'을 보여준다. 신문지 표면을 볼펜으로 수없이 긋고 덧칠해 볼펜의 흔적조차 연필로 또 지워낸 작품은 자유롭다. 종이에서 뱀의 허물처럼, 나무의 껍질처럼, 또는 무엇이든 쟁취하며 경계를 넘어선다. 득도하듯 나온 그림은 배우 유아인, 방탄소년단 RM이 소장해 더욱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최 화백은 2010년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했다. 2024년 미국에 진출,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의 ‘서베이(Survey)’ 섹터에 소개되며 '수행의 그림'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이스턴 미시간 대학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최병소의 '긋기' 작업은 '무위의 세계'다. 신문지, 볼펜, 연필, 노동의 행위 모든 것을 통합한다. 관념에 갇히지 않고 지루함에서 탁월함으로 건너간 그는 안다. 황금보다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우손갤러리 서울에서 여는 '최병소의 무제'전은 6m의 검은 빛을 내는 '볼펜 그림'을 비롯해 검은 바탕에 영어로 'NOW', 'HERE'를 긁어낸 글자 회화와 손가락 길이의 종이 박스 작품도 선보인다. 얽매임을 벗은 검은 화면, 그 안에 쌓인 시간과 사유의 흔적이 '아름다움'의 개념을 조용하고도 묵직하게 흔든다. 전시는 6월 21일까지. 2025/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