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개 유리구슬로 한옥에 거미줄…모나 하툼 “마법 같았다” 1200개의 투명한 유리구슬이 한옥 서까래 아래 거대한 거미줄을 쳤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이슬 맺힌 별자리처럼 아름답다. 한 층 올라가 내려다보는 순간 풍경은 달라진다. 반짝이는 거미줄은 누군가를 붙잡는 덫처럼 다가온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모나 하툼(74)의 'Web'(2025)이다. 서울 삼청동 선혜원에 사소하고 연약한 것들이 시간을 견뎌 만든 풍경이 펼쳐졌다. 포도뮤지엄은 2일부터 10월31일까지 선혜원 아트프로젝트 2.0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를 개최한다. 지난해 김수자의 장소특정적 설치작업 '호흡―선혜원'에 이은 두 번째 프로젝트다. 올해는 모나 하툼과 최성임(49), 김윤수(51) 등 여성 작가 3명이 참여한다. 하툼은 포도뮤지엄과 인연이 있는 작가다. 앞서 제주 포도뮤지엄 전시에 참여해 국내 관객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번에는 제주가 아닌 서울의 한옥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번 전시는 작가를 먼저 선정하고 제목을 나중에 정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디렉터는 1일 기자들과 만나 모나 하툼과 최성임, 김윤수를 먼저 선정한 뒤 세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공통점을 찾아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하툼과의 기존 인연을 이어가는 한편 최성임과 김윤수는 여러 작가를 리서치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찾아냈다. 오랫동안 작업해왔지만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덜 알려진 두 한국 작가를 세계적인 작가 하툼과 나란히 세운 것도 이번 전시의 눈에 띄는 지점이다. 유리와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블, 빵끈, 비닐, 종이 골판지. 서로 다른 세 작가를 잇는 것은 쉽게 지나치거나 버려지는 재료다. 여기에 잇고, 감고, 자르고, 쌓는 반복적인 손의 움직임과 시간이 더해지며 전혀 다른 형태와 물성이 만들어진다. ◆한옥에 거미줄 친 모나 하툼 전시의 시작은 선혜원의 중심 전각인 경흥각이다. 서까래 아래 하툼의 'Web'이 공간을 가로지른다. 수제 투명 유리구를 가느다란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블로 연결한 대형 설치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거미줄은 집이면서 덫이다. 몸을 숨기고 보호하는 공간인 동시에 먹이를 붙잡는 사냥의 장치다. 보호와 포획, 안식과 위험이라는 상반된 성질이 하나의 구조 안에 공존한다. 오래된 한옥에 자신의 거미줄이 펼쳐진 모습을 본 하툼은 만족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툼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작품은 어떤 공간에 설치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진동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과거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거친 공간에 설치했을 때는 작품이 마치 “화성에서 온 외계인처럼” 낯설게 보였다고 했다. 선혜원에서는 달랐다. 그는 “웅장한 한국 전통 한옥의 건축 방식과 자연에서 유래한 재료, 장엄한 기둥과 서까래, 자연 풍경과 함께 작품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며 “그 어느 때보다 더 마법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Web'의 유기적인 구조가 선혜원의 자연스러운 환경에 가벼움과 연약함을 더하면서 이질적으로 충돌하기보다 조화를 이룬다는 설명이다. 1952년 레바논 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계 난민 가정에서 태어난 하툼은 1975년 런던에 머물던 중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런던을 기반으로 퍼포먼스와 영상, 조각과 대형 설치를 넘나들며 집과 신체, 경계와 권력, 개인과 세계의 불안정한 관계를 탐구해왔다. 1995년 터너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18년 프리미엄 임페리얼 조각상을 수상했다. 올해는 독일 함부르거 반호프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하툼은 '흔들리는 것들의 안부'라는 전시 제목에도 공감을 표했다. 그는 “인간 존재의 위태로움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위태로움을 아름답게 전달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모두의 연약함과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결국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식빵끈이 6.2m ‘황금이불’로…최성임 작가 로비 바닥에는 거대한 황금빛 이불이 펼쳐졌다. 최성임의 '황금이불'(2026)이다. 멀리서는 금빛 돗자리나 직물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재료의 정체가 드러난다. 식빵 봉지를 묶는 금색 빵끈이다. 왜 하필 식빵끈일까. 최성임은 이날 “식빵끈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기보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주변에 보이는 재료가 나의 소재가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이불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내 몸과 가장 먼저 맞닿는 풍경이고, 잠들기 전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는 풍경이자 내 몸보다 더 큰 세계라고 생각했다.” 미술을 위한 특별한 재료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장 가까운 일상의 사물을 작업으로 끌어들였다. 최성임은 “엄청난 선언이나 전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에 일상이 완전히 뒤집혀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황금이불'은 이번 전시 제목에 맞춰 처음 만든 작업도 아니다. 2015년 처음 발표한 초기 작업을 발전시켜 선혜원 공간에 맞게 새롭게 제작했다. 특히 로비를 한옥의 대청마루처럼 안과 밖이 만나는 경계로 봤다. 자신의 몸과 맞닿는 ‘이불’이라는 사적인 세계를 안과 밖이 넘나드는 공간으로 확장했다. 가로 6.2m, 세로 4.8m 규모의 포도뮤지엄 커미션 신작이다. 식탁에서 사용되고 버려지는 금색 빵끈을 하나하나 이어 만들었다. 최성임은 네 아이를 키우며 가사와 돌봄, 창작을 병행해왔다. 생활 가까이에서 발견한 재료를 모으고 연결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1977년생으로 이화여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판화를 전공했다. 회화에서 출발해 조각과 설치로 작업 영역을 넓혀왔다. ◆“왜 발인가”, 땅을 딛고 존재하는 인간…김윤수 작가 지하 1층 회랑에는 푸른 결정체 같은 작은 형상들이 놓였다. 김윤수의 '바람의 표면'(2011~2018)이다. 유모차를 덮는 방풍막으로 사용하는 얇은 파란색 PVC 비닐에 여러 사람의 발바닥 윤곽을 그리고 오려낸 뒤 반복해서 쌓았다. 처음에는 거의 투명했던 비닐이 수없이 포개지면서 깊은 푸른빛과 부피를 얻는다. 처음의 발 모양은 흐려지고 낯선 풍경으로 변한다. 작업은 자신의 발에서 시작해 지인과 주변 사람들의 발로 확장됐다. 왜 하필 발일까. 김윤수는 이날 “우리는 머리나 손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만 발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게 발은 인간이 땅과 만나는 지점이다. 한 발을 딛고 두 발로 서기 위해서는 대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발을 작업에 끌어들였고, 이후 주변 사람들의 발을 수집하며 작업을 확장했다. 2층 하린당에서는 김윤수의 초기 골판지 작업을 만날 수 있다. '바람(투명한 사유에 관한 조각)'(2001)은 멀리서 보면 거대한 토기나 나무 조각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면 반전이 일어난다. 재료는 골판지다. 가늘게 자른 골판지를 오랜 시간 감고 이어 붙였다. 쉽게 눌리고 휘어지는 종이는 반복되는 손길을 따라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굽어지면서 뚜렷한 부피와 존재감을 얻었다. 1975년생 김윤수는 중앙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바람과 빛, 움직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비물질적 요소를 조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해왔다. ◆58년의 선혜원 기억 위에 쌓인 시간 작품이 놓인 선혜원 자체도 시간을 품은 공간이다. SK 창업 회장의 사저였던 이곳은 1968년부터 그룹의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 공간으로 사용됐다. 지난해 새로운 문화공간 선혜원으로 재탄생했다. 현대 건축과 세 채의 한옥이 어우러진 구조다. 온지음 집공방이 한옥 공간의 기획과 설계를 맡고 SKM과 조병수 건축사사무소 등이 협업했다. 올해는 선혜원 개관 이래 처음으로 하린당과 경흥각 2층을 공개하고 전시 영역을 전체 전각과 층으로 확장했다. 관람객은 경흥각에서 'Web'을 아래에서 올려다본 뒤 로비와 지하 1층 회랑, 2층 하린당을 거친다. 마지막에는 경흥각 2층에 올라 다시 'Web'을 내려다본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거미줄과 위에서 내려다본 거미줄은 다르게 보인다. 아래에서는 거미줄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하지만, 위에서는 거대한 그물의 형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보는 위치가 달라지자 같은 작품도 달라졌다. 유리구슬은 거미줄이 되고, 식빵끈은 황금빛 이불이 됐다. 얇은 비닐은 푸른 덩어리로 쌓이고, 골판지는 단단한 조각처럼 몸을 일으켰다. 흔하고 연약한 재료들이 선혜원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얻었다. 전시는 10월31일까지.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이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무료 관람은 네이버 예약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3일 프리즈 서울 연계 행사 ‘삼청 나잇’에는 오후 6~9시 야간 개장하고 크로스오버 그룹 블랙스트링의 공연도 열린다. 2026/09/01
“바젤리츠는 100% 예술가…매일 마지막 날처럼 그렸다” “마지막 전시실은 바젤리츠를 위한 채플(예배당) 같습니다.” 지난 4월 세상을 떠난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2026)의 장남 다니엘 블라우(64)가 서울 광화문 세화미술관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블라우는 게오르그 바젤리츠 사무국·아카이브(Büro & Archiv Georg Baselitz) 대표를 맡고 있다. 29일 뉴시스와 만난 블라우는 “아무런 기대나 선입견 없이 전시를 봤는데 뜻밖에 굉장히 훌륭했다”며 “특히 마지막 전시실은 정말 가슴이 아플 정도로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독일에서 날아와 아버지 바젤리츠의 사후 첫 한국 미술관 전시를 찾은 그는 마지막 전시실을 한동안 바라봤다. 이곳에는 바젤리츠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그린 ‘골드 페인팅’이 검은 벽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블라우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그림은 죽음을 앞둔 노화가의 쇠잔한 그림이 아니었다. 평생 덜어내고 또 덜어낸 끝에 남은 회화의 정수였다. 블라우는 마지막 그림을 물에 떨어뜨린 라임 시럽 한 방울에 비유했다. “물에 라임 시럽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라임 주스가 됩니다. 마지막 그림도 그런 에센스와 같습니다. 한 방울만 남겨 놓으면 나머지 공간은 우리의 상상력이 채우는 것이죠.” ◆“매일 그날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렸다” 바젤리츠는 죽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88세까지 계속 그리게 했을까. 블라우의 대답은 단순했다. “바젤리츠는 100% 예술가였습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 작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의식했느냐는 질문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죽음과 삶의 유한성은 말년에 갑자기 등장한 주제가 아니었다. 블라우는 ‘바니타스(Vanitas)’와 독일어 ‘Vergänglichkeit’를 언급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삶의 덧없음과 유한성이다. 어린 시절 전쟁이 끝난 뒤 목격한 패잔병의 모습부터 말년 거울 속 자신의 늙은 몸까지, 죽음과 소멸은 바젤리츠의 작업을 평생 관통했다. 젊은 시절에는 미술사와 외부 세계에서 죽음의 형상을 끌어왔다. 88세가 된 뒤에는 거울만 봐도 그것이 눈앞에 있었다. 주제는 평생 이어졌다. 그러나 그림은 끊임없이 변했다. 두꺼운 물감과 거친 붓질에서 출발해 마지막에는 하나의 선까지 덜어냈다. ◆“내가 세뇌돼서 좋은 건가, 정말 좋은 그림인가” 세계적인 거장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이었을까. 블라우는 “바젤리츠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복권과도 같았다”고 웃었다. 그러나 행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렬한 예술가, 강한 인물과 매일 함께하고 작업실에서 자란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세뇌’와도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그림을 볼 때마다 자신을 의심했다.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세뇌됐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말 좋은 작품이기 때문인가.’ 1980년대 결혼해 집을 떠난 뒤에도 그는 아버지의 작업실을 자주 찾았다. 갈 때마다 새로운 작품이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놀랐습니다. 바로 판단할 수 없었어요. 며칠 동안 곱씹고 소화한 뒤에야 작품의 질을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블라우는 바젤리츠가 하나의 성공한 방식에 안주하는 작가가 아니었다고 했다. ◆“세상의 오해보다 그림이 막히는 게 더 힘들었다” 바젤리츠는 생전 숱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아들이 본 아버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술가는 사회의 바깥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관객이 자신이 하는 일을 모두 이해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어요. 열린 마음으로 작품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몇 명만 있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쟁과 충돌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토론을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로 받아들였다. 정작 바젤리츠를 괴롭힌 것은 자기 그림이었다. 바젤리츠가 평생 싸운 상대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 그림이었다. 그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방법도 미술이었다. 옛 거장의 판화와 아프리카 미술을 수집하고 바라보며 자신의 작업에서 잠시 벗어났다. ◆다섯 살 아들의 우주는 ‘커피 한 잔’ 미술사에서 1969년은 바젤리츠가 형상을 거꾸로 그리기 시작한 해로 기록된다. 하지만 다섯 살 아들에게 그것은 사건이 아니었다. 당시 가족은 U자 형태의 농가에 살았다. 주거 공간에서 아버지의 작업실까지 가려면 계단을 내려가 마당을 건너고 다시 바깥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어머니 엘케는 어린 블라우에게 종종 아버지에게 가져다줄 커피를 맡겼다. “그때 내 모든 세계, 내 우주는 컵 안의 커피를 쏟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가득 찬 컵을 들고 출발했지만 추운 마당을 지나 작업실에 도착하면 커피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절편 회화를 그리고 형상을 거꾸로 그리고 있었다. 세상은 훗날 그 그림을 파격이라고 불렀지만 어린 아들에게는 그냥 아버지의 그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봤던 ‘나뉜 소 두 마리’도 기억했다. “나는 소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냥 소 그림이 좋았습니다. 왜 이렇게 분절돼 있는지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죠.” 블라우는 바젤리츠의 ‘거꾸로’를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기발한 장치나 단절로 보지 않았다. “아주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전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시장에 걸린 한 작품을 예로 들었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검정과 흰색, 빨강이다. 한참 들여다본 뒤에야 그 속에서 인물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색만 보입니다. 그것만으로 이미 훌륭한 그림이에요. 나중에 형상을 발견하지만 사실 그 형상이 없어도 그림은 훌륭합니다.” 무엇을 그렸느냐보다 그림 자체를 먼저 보게 하는 것. 바젤리츠에게 형상은 어쩌면 그림을 시작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충격은 ‘거꾸로’가 아니라 바젤리츠의 미술 자체” 그렇다면 블라우는 언제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의 거꾸로 그림을 파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답은 예상 밖이었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거꾸로 그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젤리츠의 미술 자체가 논쟁적이었습니다.” 성공은 늦게 찾아왔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미술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일해서 돈을 벌었죠.” 엘케는 1970~80년대 독일 보름스에서 여성 패션 매장을 운영했다. 당시 지역에서는 흔치 않았던 프랑스 디자이너의 옷 등을 소개한 아방가르드한 가게였다. 엘케는 동시에 바젤리츠가 평생 가장 많이 그린 인물이기도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것과 평생 아내를 그린 것이 관계가 있었느냐고 묻자 블라우가 웃었다. 바젤리츠가 아들에게 ‘내 그림에서 엘케는 이런 존재’라고 특별히 설명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자기 작품에 대해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평생 함께 살았고, 평생 그렸다. ◆그림 뒤집기 전에 이미 ‘영웅’을 뒤집었다 이날 인터뷰에 함께한 세계적인 갤러리스트 타데우스 로팍은 ‘거꾸로 그린 화가’라는 수식어만으로 바젤리츠를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습니다.” 로팍이 꺼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제로 아워(Zero Hour·Stunde Null)’다. 바젤리츠가 화가로 출발한 독일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이었다. 건물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정신과 가치, 기존 질서까지 무너졌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말할 만큼 예술의 존재 이유 자체가 근본적으로 질문받던 시대였다. 로팍은 “바젤리츠는 그 ‘제로 아워’에서 독일 미술이 어디로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가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가 특히 중요하게 꼽은 것은 거꾸로 회화보다 앞서 등장한 ‘영웅들(Heroes)’ 연작이다. 전쟁 직후 독일에서 ‘영웅’은 쉽게 꺼낼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나치와 전쟁, 국가주의의 기억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바젤리츠는 ‘영웅’을 그렸다. 다만 그의 영웅은 승리자가 아니었다. 병들고 망가졌다. 누더기를 걸쳤다. 황폐한 땅 위에 선 패잔병 같은 인간이었다. 로팍은 이를 “자신이 속한 나라, 그 시대의 인간적 조건에 대한 정치적 발언”이라고 표현했다. 바젤리츠는 그림을 거꾸로 뒤집기 전에 이미 ‘영웅’이라는 관념부터 뒤집고 있었던 셈이다. 로팍은 “기존의 영웅주의를 의심하고 뒤집으면서 폐허 속에서도 예술이 다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인간의 조건과 예술의 조건을 다시 정의한 화가”라고 평가했다. ◆“바젤리츠 재단 설립 계획 없다” 바젤리츠 사후 별도의 재단이 설립될 것이라는 관측에는 선을 그었다. 재단 설립이 어느 정도 진행됐느냐는 질문에 블라우는 “금시초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아버지가 생전에 자신의 작품과 유산을 관리하는 체계를 이미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별도의 재단을 새로 설립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대신 가족은 바젤리츠가 생전에 구축한 조직과 아카이브를 이어받아 관리하고 있다. 법적인 형태의 재단은 아니지만 작품의 제작 기록과 소장 이력, 프로비넌스(소장 경로) 등을 관리하고 관련 문의에 대응하는 등 사실상 재단이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설명이다. 카탈로그 레조네 작업도 주요 과제다. 바젤리츠는 생전 아카이빙에 강한 관심을 갖고 이를 담당할 인력과 조직까지 갖춰 놓았다고 전했다. 작가는 떠났지만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기록되고 관리될지까지 준비해 놓은 셈이다. ◆그림은 미술사에, 버섯 사랑은 아들에게 미술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들만 기억하는 바젤리츠의 모습을 하나만 들려달라고 했다. 블라우는 1970년대 기숙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 당시 동독에서 휴가를 받아 서독을 방문한 할아버지도 함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자마자 꺼낸 이야기는 그림이 아니었다. “트러플을 찾았다. 우리 찾으러 가자.” 집으로 돌아온 이들은 곧장 근처 숲으로 향했다. 바젤리츠는 나무 아래로 몸을 낮추고 들어가 냄새를 맡으며 트러플과 버섯을 찾아다녔다. 세계적인 화가가 아니라 버섯을 찾아 숲을 헤집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버섯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 취향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저도 버섯과 트러플을 좋아합니다.” 블라우가 웃었다. 미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그림을 뒤집는 법을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 버섯을 좋아하는 마음을 물려받았다. 세계는 게오르그 바젤리츠를 ‘거꾸로 그린 화가’로 기억한다. 아들에게 그는 추운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버지였고, 숲바닥을 헤집으며 트러플을 찾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자기 그림보다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려 했던 ‘100% 예술가’였다. 한편 19년 만의 한국 미술관 개인전이자 바젤리츠 사후 첫 한국 전시인 세화미술관의 바젤리츠전은 하루 평균 500~600명이 찾고 있다. 전시는 12월27일까지 열린다. 2026/08/29
떠나지 않았다면, 그 집을 알았을까…서도호 '회향'[박현주 아트에세이 ㉝] 아버지는 집을 지었다. 아들은 집을 떠났다. 그리고 떠난 아들은 평생 집을 만들었다.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서도호의 ‘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가 자란 곳은 부모가 지은 한옥이었다. 모두가 서양식 아파트를 선망하던 1970~80년대였다. 부모는 거꾸로 한옥을 택했다. 철거되는 옛집의 목재와 창호, 철물을 모았다. 장인을 찾아 집을 지었다. 어린 서도호는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그 집을 떠나는 데는 하루가 걸렸지만, 그 집을 다시 만나는 데는 평생이 걸릴 줄은. 서도호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뉴욕에서 살았고 다시 런던으로 옮겼다. 멀어지자 집이 보였다. 떠나지 않았다면, 그 집을 알았을까. 그는 떠나온 집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벽과 복도, 계단과 문, 전등 스위치와 손잡이까지 떠냈다. 재료는 얇고 반투명한 천이다. 빛이 스며든다. 무거운 건축이 가벼워졌다. 접을 수 있게 됐다. 가방에 넣을 수 있게 됐다. 국경도 건널 수 있게 됐다. 집을 떠난 사람이 집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집은 그를 따라 세계를 떠돌았다. 2018년 런던 웜우드가 육교 위에는 한옥 한 채가 먼 곳에서 날아온 듯 내려앉았다. 땅에 뿌리내려야 할 집이 낯선 도시의 공중에 비스듬히 걸렸다. 사람이 이주하자 집도 이주했다. 하지만 서도호가 옮긴 것은 집만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에서 만든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긴 뒤 그 안에 들어가면 옛날로 되돌아가는 듯한 ‘프루스트 효과’를 느낀다고 했다. 몸은 지금 이곳에 있는데 기억은 그때 그곳으로 간다. 공간을 옮겼는데 시간이 따라왔다. 그래서 그의 투명한 집은 묘하다. 사람은 없는데 사람이 있다. 시간은 지났는데 시간이 남아 있다. 집은 사라졌는데 집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다. 떠나온 집. 다시는 들어갈 수 없는 방. 이제는 없는 사람과 함께했던 자리. 공간을 기억하면 시간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사람이 걸어 나온다. 집은 건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을 지나간 시간. 함께 살았던 사람. 그때의 나. 물론 오늘 우리에게 집은 그렇게 낭만적인 공간만은 아니다. 집은 자산이고 계급이며 때로는 한 사람의 삶을 가르는 숫자가 됐다. 누구에게는 여러 채의 집이 재산이고, 누구에게는 한 채의 집조차 평생 닿기 어려운 꿈이다. 그런데 서도호의 집에는 가격이 없다. 평수도, 시세도 없다. 남는 것은 그곳을 지나간 시간과 사람의 흔적이다. 서도호의 집이 세계 어디에서나 낯설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서울의 한옥이 세계의 낯선 도시에 펼쳐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서도호만의 집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떠나온 고향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부모의 집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이 된다. 가장 개인적인 기억이 가장 보편적인 기억을 건드린다. 한옥에는 국적이 있다. 그러나 그리움에는 국적이 없다. 우리는 떠나는 것을 흔히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에는 멀어져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고향이 그렇다. 부모가 그렇다. 젊음이 그렇다. 가까이 있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이루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거리는 상실을 만든다. 그러나 거리가 시야를 만든다. 서도호는 이번 서울 전시에 ‘회향(回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30년 넘게 세계를 이동하며 집과 기억을 좇아온 작가가 다시 자신의 시작을 바라본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떠나온 집도 예전의 집이 아니다. 그 집을 떠났던 사람 역시 그때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사는 일이 아니라 다시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집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지겨웠던 하루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늘 곁에 있던 사람도 어느새 기억 속에 있다는 것을. 하지만 삶은 지나간 장면을 다시 보여주지 않는다. 때로 예술이 그 일을 한다. 사라진 집을 다시 세우고, 흘러간 시간을 불러오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서도호의 투명한 집 앞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어쩌면 그의 집만이 아니다. 저마다 떠나온 집이다. 그곳에는 아직, 한때 그 집에 살았던 내가 있다. 2026/08/29
검은 물감도 닦지 않았다…화가의 품위 ‘윤형근의 집’ 윤형근은 떠났지만, 그의 바닥은 아직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바닥에 검은 물감이 그대로다. 닦아내지 않았다. 윤형근(1928~2007)이 작업하며 흘리고 밟고 지나간 흔적이다. 검푸른 물감은 40여 년의 시간을 건너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작업실 바닥에 얼룩처럼 남아 있다. 검은 물감이 흩뿌려지고 문질러지고 겹쳐졌다. 새집처럼 복원하지 않았다. 윤형근이 평생 그림을 밀어붙인 시간이 그대로 눌어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위에 그가 쓰던 작업 도구와 시대별 대표작을 놓았다. 그 앞에 서니 윤형근의 그림이 어디에서 나왔는지가 보였다. 캔버스에 내려앉은 검푸른 기둥만큼이나 말이 없고 거칠다. 그림을 그렸던 방과 밥을 먹고 잠들었던 집이 한 건물 안에 있다. 삶과 작업 사이에 문턱이 없었던 화가의 집이다. 윤형근이 살고 작업했던 서교동 주택이 ‘윤형근의 집(Yun Hyong-keun House)’으로 문을 연다. 윤형근 에스테이트가 보존·복원해 오는 9월1일부터 일반에 처음 공개한다. 1층 작업실과 2층 주거 공간을 생전 모습에 가깝게 되살렸다. 가구와 기물의 위치까지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했다. 미술관을 새로 지은 게 아니다. 살던 집을 남겼다. 관의 지원 없이 오롯이 유족이 보존해 문을 여는 ‘윤형근의 집’은 작가 이름을 내건 기존 기념미술관과도 결이 다르다. 화가가 살고 작업한 집 자체를 남겨 그의 시간을 함께 들여다보게 했다. 빨간 벽돌, 나무 바닥, 소목장을 통해 제작한 갈색 집기들. 집 자체가 윤형근의 미감이다. 이 집의 시간은 김환기에서 시작한다. 터는 윤형근의 장인이었던 수화 김환기가 1963년 국민주택으로 분양받았다. 윤형근은 1967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 1983년 기존 주택을 헐고 동생 윤도근 당시 홍익대 건축과 교수에게 설계를 맡겨 지금의 집을 지었다. 이후 20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족과 살며 그림을 그렸다. 설계를 동생에게 맡겼지만 집에는 윤형근의 미감이 깊숙이 들어갔다. 공간의 기능과 형태부터 재료 선택까지 직접 관여했다. 높은 층고와 노출 배관, 전면 유리에는 서구 모더니즘 건축의 간결함이 있다. 목재 천장과 문창살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배어 있다. 자연광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1층 작업실 한쪽 벽 전체를 유리창으로 냈다. 윤형근은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다. 청색과 엄버(Umber)를 섞은 검푸른 안료를 마포나 린넨에 스며들게 하며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화면을 수직으로 가르는 짙은 색면과 안료가 천에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번짐은 그의 작품을 상징하는 조형 언어가 됐다. 윤형근에게 그림은 삶과 분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었다.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작업실 옆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관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한두 장은 거짓말해서 이렇게 만들 수도 있어도 가장 높은 품격을 가진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 아닌가.” 그가 끝내 붙잡은 단어는 ‘품위’였다. “모든 욕심 다 버려야 천진무구한 세계로 들어가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야. 근데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은 해야지.” 그리고 말했다. “그게 인간의 목적인 것 같아.” 완성에 도달했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그곳을 향해 가겠다는 고백이었다. 윤형근의 화면이 갈수록 단순해진 것도 이 삶의 태도와 겹친다. 색은 줄고 형상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검푸른 안료가 화면을 타고 번지고 스며든 흔적이다. 그가 말한 ‘천진무구한 세계’는 무엇을 더 그리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더 버릴 것인가에 가까웠다. “진리에 사는 거. 진리에 생명을 거는 거. 그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잘 그린 그림보다 먼저 바로 서야 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업실 바닥이 압권으로 다가온다. 그곳에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며 살아낸 시간이 남아 있다. 윤형근의 말처럼 작품이 한 사람의 흔적이라면 검은 물감으로 뒤덮인 이 바닥 역시 거대한 ‘윤형근의 흔적’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작가 윤형근’은 ‘생활인 윤형근’으로 이어진다. 가족이 사용했던 거실과 부엌, 안방이 남아 있다. 가구와 도자기, 오디오부터 추사 김정희의 현판, 도널드 저드의 조각까지 그의 취향과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물건들이 원래 자리를 지킨다. 아내 김영숙을 기리는 방에는 그의 그림과 수집품, 김환기·김향안과 주고받은 삶의 흔적도 남았다. 장인이었던 김환기는 윤형근의 정신적 지주였다. 1974년 촬영된 사진 한 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형근이 김환기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 사이에 서 있다. 장인이자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와 윤형근, 그리고 다시 후손으로 이어지는 기억은 이 집에서 한 가족의 역사를 넘어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장면이 된다. 윤형근의 아들 윤성열은 부모의 삶을 이렇게 기억했다. “두 분은 그렇게 다르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겉모습과 생활이 따로 가지 않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사셨던 것 같아요. 생활과 작업을 따로 떼기 힘들었고 그 믿음이 작품에서도 같았습니다.” ‘윤형근의 집’이 흥미로운 이유다. 그림을 걸어놓은 또 하나의 전시장이 아니다. 윤형근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았기에 그런 그림이 나왔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윤형근의 집 개관과 맞물려 PKM갤러리에서는 26일부터 10월3일까지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reimagine Yun Hyong-keun)’가 열린다. 초기부터 말년까지 주요 작품을 한 흐름으로 펼친다. 뉴욕 저드 파운데이션에서도 10월8일부터 내년 1월9일까지 윤형근 개인전이 이어진다. 과거 도널드 저드의 초대로 열린 윤형근 개인전 출품작 가운데 6점을 다시 한자리에 모은 전시다.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에 따르면 윤형근과 저드는 1991년 만나 깊은 교류를 시작했다. 저드가 윤형근의 작업실을 방문한 뒤 미국 텍사스 말파 전시를 제안했다. 말파 전시 직전 저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전시는 예정대로 열렸다. 두 작가가 떠난 뒤에도 인연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윤형근의 집’ 개관 행사에는 저드의 아들 플래빈 저드가 참석한다. ‘윤형근의 집’은 9월1일부터 10월17일까지 예약제로 운영한다. 한 회당 8명만 들어갈 수 있으며 전 회차 도슨트 투어로 진행한다. 관람료는 2만원. 2026/08/25
사인 남기지 못한 ‘백색 묘법’ 3점 한자리에…박서보미술관 개관 생전 박서보(1931~2023)는 자신의 미술관이 생기면 거대한 백색 ‘묘법’ 세 점을 걸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이 서울 연희동에서 현실이 됐다. 새로 문을 연 박서보미술관 3층 전시장에는 그가 직접 골랐던 대형 백색 ‘묘법’ 세 점이 벽을 떠나 나란히 서 있다. 미처 사인도 하지 못한 미완의 완성작이다. 사방에서 스며드는 자연광에 따라 한지의 골과 백색의 깊이가 시시각각 달라지며 압도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2023년 세상을 떠난 박서보가 끝내 보지 못한 자신의 이름을 건 미술관이다.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을 이끈 박서보는 생전 자신의 이름을 건 미술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고향인 경북 예천에서 추진된 미술관 건립은 중단됐고, 3년 전 제주에서는 박서보미술관 기공식까지 열렸지만 현재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제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의 첫 삽을 뜨며 환하게 웃었던 박서보는 2023년 10월14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그해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뒤에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작업을 이어갔던 그였다. 병원으로 향하며 작품을 두고 “배접해 놔라”고 한 말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됐다. ◆연희동 주택가에 스민 '박서보미술관' 18일 언론에 미리 공개된 박서보미술관은 그가 생전 생활하고 작업했던 연희동 작업실 바로 옆에 들어섰다.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약 2000㎡ 규모로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최문규 교수가 설계했다. 약 3년에 걸쳐 완공됐다. 공식 개관은 21일이다. 건물은 박서보의 작품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흰색과 회색을 중심으로 절제된 공간을 만들고 곳곳에 작은 정원을 들였다. 전시장마다 자연광과 정원이 스며들어 묵직한 건축에 숨통을 틔운다. 담백하지만 웅장하다. 작품과 자연, 건축이 한 공간에서 호흡한다. 특히 3층 높이 8m의 정사각형 공간 ‘큐브(cube)’가 압권이다. 반투명 유리를 통과한 자연광이 거대한 백색 묘법 세 점의 표면을 훑는다. 정면에서는 절제된 흰 화면이지만 옆으로 움직이면 한지의 골이 만든 깊이와 그림자가 살아난다. 박서보에게 흰색은 단순한 백색이 아니었다. 표백된 순백이 아니라 조선 백자의 회백색처럼 자연에서 온 색에 가까웠다. 짙은 회색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흰색 물감을 반복적으로 겹쳐 올렸다. 그래서 그의 백색에는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래 어둠이 있고, 그 위로 빛이 올라온다. ◆‘박서보만 보여주는 박서보미술관’ 아니다 미술관의 방향은 개관전부터 분명하다. 개관전은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박서보와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흐엉 도딘(Huong Dodinh·1945~)의 작품 42점을 선보인다. 박서보 25점, 호앙 도딘 17점이다. 전시는 내년 1월3일까지다. 두 사람의 그림은 색감부터 태도까지 묘하게 닮았다. 나란히 놓였는데도 좀처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흐엉 도딘은 광물 안료를 수십 차례 겹쳐 쌓으며 빛이 화면 안에서 드러나는 회화를 구축해온 작가다. 두 사람의 재료와 방법은 다르다. 박서보가 물에 불린 한지 위에 선을 반복해서 긋고 밀어내며 화면을 비워갔다면 호앙 도딘은 안료를 거듭 쌓아 올린다. 한 사람은 선을 반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색을 쌓는다. 그러나 반복과 절제를 통해 화면에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회화는 만난다. 두 작가의 인연은 박서보가 세상을 떠나기 약 3개월 전 시작됐다. 이전까지 서로의 작업을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은 언어도 문화적 배경도 달랐지만 작품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호앙 도딘은 박서보가 생전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가 됐다.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두 사람이 ‘비움’이라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창작은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전시는 지하 2층 ‘SPACE Ø’에서 시작해 지상 2층 ‘SPACE 2’, 3층 ‘SPACE 3’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두 작가의 작품에서 출발해 박서보의 흑색·색채 한지묘법을 거쳐 마지막에는 두 작가의 백색 계열 작품이 만난다. 검정에서 색으로, 다시 백색으로 향하는 동선은 박서보 회화의 변화와 함께 ‘비움이 어떻게 충만이 되는가’를 공간적으로 보여준다. ◆젊은 작가 발굴·여성작가 조명…교육·연구자 지원 박서보미술관은 한 작가의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에 머물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개관전에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흐엉 도딘을 선택한 것도 이 같은 방향과 맞닿아 있다. 유명 작가를 박서보와 병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직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작가, 특히 여성 작가들에게 적극적으로 문을 열겠다는 구상이다. 박서보가 생전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던 태도를 미술관 운영으로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박승호 이사장은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며 박서보가 권위나 관행보다 가능성과 재능을 보고 새로운 작가들에게 길을 열어주려 했던 정신을 강조했다. 미술관은 박서보의 작품과 자료를 연구·보존하는 한편 국내외 작가를 소개하고 교육·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박서보재단은 현재 작품 보존·관리와 아카이브 구축, 전시·출판 등을 진행하고 젊은 창작자와 연구자 지원사업도 펼치고 있다. 박 이사장은 “박서보가 돌아갔음에도 그의 정신이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로 미술관의 방향을 설명했다. ◆정원이 있는 미술관…“아버지가 가장 좋아했을 공간” 그렇다면 박서보 자신이 살아 있었다면 새 미술관의 어느 곳에 가장 오래 머물렀을까. 박 이사장의 답은 작품 앞이 아니라 ‘정원’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박서보에게 행복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는 일이었다. 작업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곳이 자연이었고, 그는 정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버지가 계셨어도 특별한 말씀은 안 하셨을 겁니다.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곳에 가서 한 10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계셨다면, 그게 아마 최고의 칭찬일 것 같아요.” 미술관 1층, 유리 너머로 나무와 풀들이 펼쳐진 공간을 바라보며 박 이사장이 말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여기 앉아 계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한편 연희동 주택가에 자리한 미술관은 개관에 앞서 이웃 주민들을 초청해 바비큐 파티를 연다. 개관 첫날인 21일에는 호앙 도딘과 박승호 이사장이 참여하는 ‘전시 토크’를 개최한다. 9월부터 12월까지 박서보의 일기와 편지를 따라 자신의 문장을 써보는 ‘마음을 채우는 글쓰기’, 명상과 앰비언트 음악, 차와 그림을 함께 경험하는 ‘마음을 비우는 드로잉’ 등 연계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입장료는 5000원. 2026/08/18
해머링맨 세화미술관에 바젤리츠 왔다…1500억 규모 사후 첫 개인전
“한국 사람들이 제 작업에 놀라거나 흥미를 느낄지 무척 궁금하네요.”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거꾸로 회화’로 잘 알려진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2026)가 한국 관객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20년 만의 한국 개인전을 앞두고 지난 4월 세화미술관이 진행한 영상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아시아 문화와는 꽤 거리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어찌 보면 그래서 멀면 멀수록 더 좋은 법”이라고 말했다.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거리를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여러 난관이 있겠지만 제 말뜻이 온전히 전달되었으면 한다”고도 했다.
이 인터뷰 3주 뒤인 4월30일, 바젤리츠는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분주하다. 지난 5월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특별전에서 세계 미술인들을 만난 데 이어, 이제 생전에 준비한 한국 전시로 관객을 맞는다.
해머링맨이 있는 서울 광화문 세화미술관에서 12일 개막한 바젤리츠 전시는 그의 약 60년에 걸친 회화와 드로잉, 조각 46점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 39점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1966년 초기작부터 2026년 신작까지, 세화미술관 소장품 10점을 비롯해 바젤리츠 스튜디오와 타데우스 로팍 등에서 작품을 모았다. 전체 출품작의 보험가액은 약 1500억원이다.
국내 미술관에서 바젤리츠를 집중 조명하는 것은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게오르그 바젤리츠: 러시안 페인팅’ 이후 19년 만이다.
작가 사후 열리는 이번 전시는 애초 유작전이 아니었다. 세화미술관은 1년여 전부터 바젤리츠 스튜디오와 작품을 협의했고, 미술관 관계자들이 직접 작가를 찾아 인터뷰까지 촬영했다.
안미희 세화미술관장은 “인터뷰를 마치고 귀국한 지 약 3주 뒤 작가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살아 계실 때 작품 세계를 보여드리는 전시로 준비했는데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유작전이자 회고전이 됐다”며 “생전 작가 측과 모든 협의를 마친 상태여서 전시는 무리 없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거꾸로 화가' 왜 평생 거꾸로 그렸나
바젤리츠는 1969년부터 인물과 풍경을 거꾸로 그리기 시작하며 이른바 '거꾸로 그림'을 자신의 독자적인 회화 언어로 구축했다. 흔히 관객에게 그림을 다르게 보게 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됐지만, 정작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제 의도는 꼭 관람객과 접촉하는 데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보다는 저 자신을 위한 어떤 가능성이나 능력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죠.”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은 당대의 지배적인 미술 흐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 것인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추상미술 역시 그에게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가진 미술이었다.
그는 회화를 지배해온 규칙과 관습부터 의심했다. 특히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방향 자체를 “대단히 자의적”이라고 봤다. 이미지를 뒤집음으로써 익숙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찾았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과는 무관하게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이미지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자문함으로써 기존의 규칙과 맹목적인 추종을 깨뜨리려 했죠.”
그는 “현실에 반기를 드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반기를 세상에 내보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며 “반기를 드러내려면 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생각은 형상이 되어야 했다. 이미지를 뒤집는 것은 그가 찾아낸 방법이었다.
하지만 당시 자신의 ‘뒤집힌 이미지’가 다른 화가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대부분 그저 장난으로 치부했다”고 말했다.
그의 삶 역시 기존 질서와 순탄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본명은 한스 게오르그 브루노 케른이다. 1938년 독일 작센 지방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분단을 경험했다. 동베를린에서 미술을 공부하다 서베를린으로 옮겼고, 1961년 고향의 이름을 따 게오르그 바젤리츠로 개명했다.
그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독일, 그리고 독일인이라는 사실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독일 신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바젤리츠는 20세기 후반 독일 미술의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한 핵심적인 작가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그는 전쟁의 상흔과 독일 분단의 역사와 기억을 파편화된 신체와 뒤집힌 형상이라는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풀어냈다.
2층 전시장 초입에서 눈길을 끄는 절편 회화(Frakturbilder, Fracture Paintings)의 대표작 '나뉜 소 두 마리 I'(1966)부터 그의 회화에서 영웅과 독수리 같은 국가적 상징이 온전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위 아래가 나뉜 '소 두 마리 I'는 캔버스를 분할하고 대상을 절단해 익숙한 시각 질서를 전복한 작품이다. 나치가 악용한 목가적 이미지를 해체하며 전쟁의 폭력을 은유하고, 1960년대 ‘영웅’ 연작은 승리자가 아니라 황폐한 풍경에 홀로 남겨진 상처 입은 남성을 의미한다. 독일을 상징하는 위엄 있는 독수리 역시 날아오르는 대신 거꾸로 추락하듯 화면에 매달린다.
독일의 분단을 직접 경험한 세대인 그는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국을 바라보며 전쟁과 예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바젤리츠는 “제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며 “공산 체제에서 자란 나로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동포끼리 침략하고 정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면에서 세상은 여태껏 달라진 것이 없다”면서도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동시대 회화가 유럽 회화와 비교되고, 서로 경쟁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전쟁과 정치적 격변이 자신의 작업에 중요한 동력이 됐다고 돌아보면서도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렇게 끔찍한 정치 체제를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앞으로는 달라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나타난 금빛
이번 전시에서 분위기가 가장 크게 바뀌는 곳은 마지막 공간이다.
3층 전시장 중앙에는 해골을 연상시키는 검은 조각도 놓였다. 아프리카 조각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으로, 말년에 반복했던 해골 이미지와 늙어가는 육체가 겹쳐진다.
검은 통로에는 일부러 작품을 걸지 않았다. 빈 공간을 지나 독수리 연작을 거치면 어둠 속에서 황금빛 ‘골드 페인팅’이 떠오른다. 자연스럽게 추모의 공간 같은 숭고함이 감돈다.
그러나 이를 죽음을 예감한 노년의 작업으로만 읽기는 어렵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검은 공간의 추모 분위기가 강해지자 바젤리츠 스튜디오 측에서도 “너무 죽음을 상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미술관은 무게를 덜어내면서도 생애 마지막 작품을 만나는 공간의 긴장은 남겼다.
바젤리츠는 마지막까지 새로운 재료와 색, 회화의 가능성을 시험했다. 신체적 한계 앞에서도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그는 손이 닿지 않는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작업을 이어갔다. 화면에는 물감뿐 아니라 휠체어 바퀴와 보행 보조기의 자국까지 남았다. 늙어가는 몸의 흔적 자체가 회화의 일부가 된 셈이다.
말년에 붙잡은 금색 역시 생의 종착점을 알리는 색이라기보다 기존의 자기 회화에서 다시 한번 벗어나기 위한 선택에 가까웠다. 그는 “검은색은 미학적 의도의 시작이고, 금색은 그 과정의 끝”이라고 말했다. 금색은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선택은 아니었다.
영상 인터뷰에서 금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에게도 대담하고 ‘뻔뻔한’ 선택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작업을 거듭하면서 금색이 최근 몇 년간 자신의 회화에서 “사실상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노년에 이른 거장은 역설적으로 가장 화려한 금빛 위에 나이 들어가는 인간의 연약함과 삶의 무게를 담담히 드러냈다. 화면의 빈 공간도 커졌다. 금빛 화면에 그려진 것은 자신과 평생의 동반자 엘케의 늙은 몸이다. 인물들은 여전히 거꾸로 매달려 있지만 젊은 시절의 육중한 신체는 사라지고 가느다란 선으로 간신히 형체를 유지한다.
전시장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을 돌아보며 말했다.
젊은 바젤리츠에게 회화가 교란하고 뒤집어야 할 대상이었다면 노년의 바젤리츠에게 회화는 더 이상 전략으로 통제할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자신이 예술을 움직이는 데서 예술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쪽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한 거장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는다. 60여 년 동안 자신이 만든 회화의 규칙마저 다시 의심해온 화가가 끝내 어디까지 나아갔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이 전시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슈퍼 얼리버드 티켓은 판매 2분 만에 매진됐고, 1차 얼리버드 티켓도 일주일 만에 모두 소진됐다. 세화미술관 개관 이래 가장 높은 사전 예매율이다.
바젤리츠전을 계기로 미술관 공간도 손봤다. 사무실을 전시장으로 바꾼 2층 공간은 천장을 노출해 층고를 높였고, 굿즈숍은 초록 나무가 액자 그림처럼 보이는 창가로 옮겼다. 1층 안내데스크도 정비해 건물 안에서 미술관의 존재감을 높였다.
태광그룹 세화예술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세화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내년 개관 1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방향도 모색한다.
안미희 관장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국내에서 많이 보여지지 않은 작가들의 전시를 1년에 한 번 정도는 기획할 것”이라며 “바젤리츠를 시작했으니 이 정도 수준은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바젤리츠 전시는 미술관 밖 광화문 거리까지 이어진다. 태광그룹 빌딩 입구에서 또 한 명의 바젤리츠가 기다린다.
이 건물의 상징인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맨’이 서 있는 입구 오른쪽에는 검은 인물이 길쭉한 두 다리로 서 있다. 바젤리츠가 젊은 시절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만든 청동 조각 ‘친구(Friend)’다.
1965년 스물일곱 살의 자신을 2024년 여든여섯의 바젤리츠가 다시 불러냈다. 자신의 과거를 다시 그렸던 ‘리믹스’ 연작처럼, 노년의 작가가 젊은 자신과 다시 마주한 작품이다. 낯선 검은 인물 앞에서 오가는 시민들은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작가는 떠났지만 광화문 거리에서는 두 다리가 짱짱한 젊은 바젤리츠와 마주하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전시 기간 연계 프로그램도 열린다. 9월1일에는 바젤리츠의 유족 다니엘 블라우와 미술사학자 윤희경이 작가의 작업 세계와 미술사적 의미를 주제로 대담한다. 오디오가이드는 가수 빈지노가 맡았다.
전시는 12월27일까지 열린다.
2026/08/12
“내가 오디세이”…강요배 “그림은 모르는 나를 끄집어내는 일” “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림이 무엇이냐'고 묻자 화가 강요배(74)가 내놓은 답이다. 그는 이제 눈앞의 풍경을 그대로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물감을 묽게 풀어 흘리고, 캔버스를 눕혀 우연히 번지는 흔적까지 받아들인다. 오래 생각하지만 그리는 시간은 짧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10분도 길죠. 생생한 맛이 좋아요. 옛날에는 찐득찐득하게 그렸는데 지금은 설렁설렁합니다.” [[[[:newsis_inyoung_center_end:]]]]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12일 개막하는 개인전 '소소, 반색'은 그렇게 가벼워진 강요배의 붓을 보여준다. 학고재에서 4년 만에 여는 개인전으로, 제주 작업실 주변의 나무와 열매, 새와 고양이부터 바람과 바다, 전쟁터의 해바라기와 심해의 혹등아귀까지 28점을 선보인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중심에서 제주 4·3의 비극을 그렸고, 이후 고향 제주로 돌아가 30여 년간 섬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온 화가의 시선이 이제 작고 미미한 존재들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강요배는 이를 작품 세계의 '전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멀리 보던 사람이 가까이 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11일 전시장에서 만난 강요배는 4년 전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백발과 수염은 더 희어졌지만 눈에는 장난기가 돌았다. 이전에 제주의 땅을 오래 걸은 사람의 질감이 짙었다면, 지금은 바람을 오래 통과한 사람처럼 불필요한 것이 빠진 모습이다. 그림도 닮았다. 예전의 제주 풍경이 자연의 기운을 끌어올려 쏟아냈다면, 신작은 붙잡으려는 힘마저 조금 놓아준다. 꽃과 나무, 파도는 '내가 이것을 그렸다'고 주장하기보다 화면 위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듯하다. ◆“설명 듣기 전에 국물부터 맛봐야” 이번 전시에서 강요배가 가장 경계한 것은 뜻밖에도 '설명'이었다. “음식 먹을 때 국물 한 숟갈 딱 먹어보고 '맛있다'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설명 듣기 전에 먼저 맛보는 거죠.” 그림 앞에서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부담부터 버리라는 얘기다. 하늘을 보고 “하늘 잘 그렸네”, 나무를 보고 “좋네” 하는 첫 감각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강요배는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미학까지 끌어왔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개념이나 설명이 끼어들기 전 직관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음식의 ‘첫맛’에 비유했다. 작품 제목 역시 정답을 알려주는 설명서가 아니다. “말에는 뉘앙스가 있잖아요. 이미지하고 말이 서로 보완하기도 하고 강조하기도 하고, 큰 덩어리로 확장해서 생각하게 하기도 해요.” 그래서 제목 하나도 함부로 붙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림을 먼저 맛본 뒤 제목과 연결해 상상력을 넓히는 것이 그가 바라는 감상법이다. ◆폭포에서 파도로…제주의 영등바람까지 전시장 입구에서는 '대서'와 '소서'의 폭포가 관람객을 맞는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의 움직임은 500호 대작 '창파'에 이르러 거대한 파도의 운동으로 확장된다. 이어지는 '영등바람'은 입춘 무렵 제주의 바다와 땅을 휩쓰는 북서풍을 그렸다. 제주에서는 음력 2월 바람의 신 영등할망을 맞아 해신제를 올린다. “영등할망이 한림 쪽에서 들어와 보름 동안 한라산을 돌아다니다 우도 쪽으로 나갑니다. 그때 해녀들은 일을 안 하고 굿을 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어떻게 그렸느냐고 묻자 대답은 간단했다. “바람만 그리면 되니까요.” 물을 많이 섞은 물감을 흘리고 캔버스를 눕혀 말린다. 물감이 어디로 흐르고 어떤 얼룩을 만들지는 작가도 완전히 알 수 없다. “우연도 받아들여야죠. 어떻게 나타날지 잘 몰라요.” 그 우연까지 그림의 일부가 된다. 꼼꼼하게 완성도를 쌓아 올리는 방식과는 반대다. “세필을 들고 점처럼 하루 종일 그리는 체질은 아니에요. 금방 후딱후딱 됐으면 좋겠어요.” ◆제주 마당의 새와 고양이까지 시선은 거대한 제주 풍광에서 작업실 마당으로 좁혀진다. '열매 한 알'에는 나무에 열매가 수없이 달려 있는데도 하나를 두고 다투는 새들이 등장한다. 그 사이로 빨간 열매 하나가 떨어진다. 왜 하필 싸우는 새들이냐고 물었더니 강요배는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왜 서로 그러는지. 자리 다툼 같은 건가. '여기는 나 혼자 독차지한다'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붙어서 툭툭 싸워요.” 거창한 의미는 붙이지 않았다. 제주 작업실 뜰에서 본 장면이다. 고양이도 등장한다. 키우는 고양이냐고 묻자 또 특유의 답이 돌아왔다. “왔다 갔다 해요. 쫓지도 않고 챙기지도 않고. 도망도 안 가고, 그렇다고 아끼지도 않아요. 그냥 내버려 둡니다.” '소소, 반색'이라는 전시 제목 그대로다. 작고 사소해서 지나치기 쉬운 존재를 붙잡거나 소유하지 않고, 그저 반갑게 바라본다. ◆제주 동백에서 우크라이나 해바라기로 그러나 강요배의 시선은 제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신작 '해바라기-쿠르스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TV 영상에서 출발했다. “눈이 하얗게 쌓인 해바라기밭이 나오는데, 전사들이 거기 숨어 있다가 죽기도 하고…. 드론으로 다 보이잖아요. 눈밭에 있는 해바라기를 그려본 거죠.” 직접 본 풍경은 아니다. “관찰해서 그린 게 아니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서 그린 거예요.” 이 작품은 강요배의 제주 4·3 연작 '동백꽃 지다'(1991)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당시 그는 흰 눈 위로 떨어지는 붉은 동백 한 송이에 제주 4·3의 죽음을 담았다. 35년이 흐른 지금, 설경 위에는 동백 대신 전쟁으로 말라비틀어진 해바라기가 서 있다. 불혹을 앞둔 화가가 고향의 비극을 동백으로 그렸다면, 70대 중반의 화가는 세계의 전쟁을 해바라기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는 작품에 '전쟁'이나 '평화'라는 정답을 붙이는 것 역시 경계했다. 왜 그 장면에 끌렸느냐고 묻자 말했다. “나도 그걸 모르겠어요. 자기가 모르는 것에 끌리는 게 재미있는 거예요.” 모른다고 했지만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4·3의 비극을 파고들었던 청년기부터 그의 그림에는 시대의 폭력과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는 반골의 시선이 있었다. 제주 동백에서 쿠르스크의 해바라기로 대상은 달라졌지만, 시대의 상처에 반응하는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심해에서 올라온 낯선 생명 '혹등아귀'도 TV에서 우연히 본 이미지에서 시작됐다. 수심 수백에서 수천m의 심해에 사는 혹등아귀는 커다란 입과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기괴한 생명체다. 화면 속 물고기는 검은 심해에서 튀어나올 듯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절대악처럼 보인다'는 말에도 강요배는 해석을 관객에게 돌렸다. “그건 그림 보는 분들이 해석해주는 거죠.” 자신이 왜 그 생명체에 끌렸는지조차 작가가 모두 알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내 뒤통수를 내가 잘 모르잖아요. 본 적도 없고. 옆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볼 수 있죠.” 강요배에게 작가는 작품의 모든 것을 알고 관객에게 정답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작가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가 그림을 통해 올라오고, 관객은 그것을 다시 자기 방식으로 발견한다. “옆에서 잘 봐주는 사람이 좋은 감상자예요. 내가 모르던 걸 봐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거죠.” 그에게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작가의 뜻을 받아 적는 일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옛날에는 찐득찐득, 지금은 설렁설렁” 8년 전 전시에서 강요배는 '추상(抽象)'을 두고 “마음속에서 상(象)을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제주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한 뒤 기억 속에 남은 '강렬한 요체'를 화면으로 끌어낸다고 했다. 군더더기를 버리고 단순화해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 그림이라고도 했다.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예전에 그림은 군더더기를 버리는 일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은요?' “간략해야 생생하니까.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점점 압축되고 요약되면서 명료해지고 무게감을 갖게 되죠.”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말을 살짝 뒤집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까지 무거울 필요가 있나 싶어요.” 그래서일까. 최근 그림에는 빠른 필치와 묽은 물감, 번짐과 흘러내림이 많아졌다. 나무를 바짝 당겨 보고, 무청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화면 밖으로 형태를 잘라내기도 한다. 군더더기를 버려 본질에 도달하려 했던 화가는 이제 그 본질이라는 것조차 움켜쥐려 하지 않는 듯하다.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이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잘 그려서 전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랑하려고 그리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려보면 금방 느껴요.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도 마음속에서 같이 따라 올라오는 게 굉장히 재미있어요.” 그에게 그림은 자신을 표현하는 일보다 자신에게 아직 보이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에 가까워졌다. ◆“내가 오디세이”…20년 방랑 끝 제주로 강요배는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스무 살 무렵 섬을 떠나 서울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교사 생활을 했으며, 1980년대에는 민중미술 운동과 제주 4·3 연작에 몰두했다. 그러다 1992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 제주로 돌아갔다. “내가 오디세이예요.” 그는 자신의 삶을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 빗댔다. 오디세우스가 오랜 방랑 끝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듯 자신도 육지에서 “20년을 헤매다가” 제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오디세이'를 두고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그의 작업을 돌아보면 묘하게 겹친다. 제주를 떠난 뒤 고향의 비극인 4·3을 공부했고, 다시 섬으로 돌아온 뒤에는 땅과 바다, 바람을 30년 넘게 그렸다. 그런데 섬으로 돌아온 그의 그림은 오히려 세계로 넓어졌다. 4·3의 동백은 우크라이나 전쟁터의 해바라기로 이어지고, 제주 바다를 바라보던 눈은 인간의 시선이 닿기 어려운 심해의 혹등아귀까지 향한다. ◆요즘은 '난중일기'…74세에 찾아온 이순신 독서광인 강요배는 최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빠져 있다. 막걸리를 몇 잔 마시자 이야기는 어느새 국밥에서 칸트의 미학을 건너 이순신에게 다다랐다. 특히 이순신이 어머니를 기록한 대목에서 오래 머문다고 했다. “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했더라고요. 하늘 천(天) 자를 써요. 어머니를 하느님처럼 생각한 거죠. 그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를 극진하게 생각하는 그와 맞닿은 문구다. 왜 일흔을 훌쩍 넘긴 지금 '난중일기'일까. “사람한테 오는 주된 테마 같은 게 있어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밀어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지금 한번 봐야겠다' 하는 때가 오는 거죠.” 그림이 다가오듯 책도 때가 되면 사람에게 다가온다는 얘기다. 독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국 미술에 대한 비판으로 번졌다. 그는 한국 근현대미술이 서구에서 만들어진 '인상주의' '추상' '전위' 같은 미술사의 코드를 배우는 데 지나치게 익숙해졌다고 지적했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머리를 채우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보는 공부를 해야 해요.”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서양미술 자체가 아니다. 남이 만든 언어를 자기 눈보다 먼저 놓는 태도다. 그림 앞에서 설명부터 읽지 말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먼저 보고, 느끼고, 판단할 것.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도 결국 자기 눈으로 세계를 보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전 전시 때 만난 60대의 강요배는 마음속에 남은 강렬한 기억의 요체를 끄집어내는 것이 '추상(抽象)'이라고 했다. 이제 일흔이 넘은 그가 끄집어내는 것은 자연의 형상만이 아니다. 자신도 아직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다. “자기 그림 앞에서는 속일 수가 없어요. 그림을 그려서 좋아요. 나를 알게 되니까.” 전시는 9월12일까지. 2026/08/11
"팔자 좋은 과수원 화가?"…이대원을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다(종합) 사과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했다. 분홍과 흰 꽃잎은 서로 다른 빛을 머금고, 풀잎은 초록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의 초록으로 살아 움직였다. 검은 벽을 가득 채운 대형 화면은 덕수궁을 하나의 거대한 풍경으로 바꾸었다. 가까이에서는 촘촘한 붓질이 추상처럼 다가오고, 몇 걸음 물러서면 석양이 스며든 우리 산천이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왜 이대원을 '과수원 화가'로만 기억했을까. 국립현대미술관(MMCA) 덕수궁에서 6일 개막하는 '이대원(1921~2005):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다. 그동안 '과수원 화가'라는 익숙한 수식어로 기억됐던 이대원을 한국적 현대회화를 평생 탐구한 문화적 지식인이자, 한국 자연의 빛과 계절을 가장 깊이 그려낸 화가로 다시 읽는 전시다. 전시는 1933년 초기작부터 말년의 5m 대형 '농원' 연작· '담'까지 유화 120여 점과 아카이브 100여 점, 평생 수집한 고미술품을 통해 약 70년에 걸친 화업을 총망라했다. 이대원과 장욱진, 유영국의 스승이었던 일본인 화가 사토 구니오의 희귀 회화 '설정(雪庭)'도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의 이 한 문장이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를 압축한다. 5일 전시장에서 만난 배 학예연구사는 "이대원은 한국 작가로서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한국적 현대회화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평생 고민한 화가"라며 "소재뿐 아니라 양식과 기법, 미감까지 한국적으로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지난 2년간 전시를 준비하며 "행복했다"는 배 학예연구사는 작품을 연구하고 수집하는 과정에서 '팔자가 좋은 화가', '행복한 화가'라는 익숙한 이미지가 이대원의 본질을 가려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고 했다. 그는 "이대원은 화가인 동시에 한국 최초의 상업화랑인 반도화랑 운영자였고, 홍익대 미대 초대 학장과 총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화홍보대사 등을 맡으며 한국 근현대미술의 토대를 만든 문화적 지식인"이라며 "그동안 '과수원 화가', '색채의 화가'라는 수식어에 가려 그의 회화를 너무 피상적으로 읽어왔다"고 말했다. 전시 제목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고고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김원룡은 생전 이대원을 두고 "팔자가 제일 좋은 화가"라고 평했고, 그의 그림에는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배 학예연구사는 "이 말을 단순히 그의 삶이 순탄했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대원은 화랑을 경영하고 대학을 이끌며 한국 미술계를 위해 쉼 없이 일했고, 그렇게 얻은 경험과 책임을 자신의 화면으로 되돌려 놓았다"며 "그의 밝은 화면은 순진한 낙관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오랜 관찰과 축적, 절제를 거쳐 얻어낸 회화적 질서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전시는 화려한 색채나 대중적 인기보다 그 화면이 어떤 탐구와 축적 끝에 만들어졌는지 70년 화업 전체를 다시 살펴보려는 전시"라며 "이대원을 단순히 밝은 풍경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한국 현대회화의 조형 언어를 구축한 작가로 새롭게 읽고자 했다"고 말했다. ◆ 법대 출신, 5개 국어를 구사한 문화적 지식인 '과수원 화가', '색채의 마법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 이대원을 따라다닌 수식어다. 그러나 그는 미술대학 대신 법학을 선택한 화가였다. 청운공립보통학교 시절 유화를 처음 접한 그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를 만나 서양미술과 조선 공예를 함께 배웠다.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와 공예부에 입선하며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부친의 반대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회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후 화가를 넘어 한국 미술계의 기반을 만든 문화적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959년부터 약 8년간 한국 최초의 상업화랑인 반도화랑을 운영하며 국내 화랑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고, 5개 국어를 구사하며 박수근·김환기·장욱진·유영국 등을 해외에 소개했다. 홍익대 미술대학 초대 학장과 총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화홍보대사 등을 맡으며 미술교육과 문화외교에도 큰 역할을 했다. ◆ 열두 살 '백일홍'에서 5m '농원'까지 이번 전시는 이대원의 시작도 새롭게 조명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인 1933년작 '백일홍'을 처음 공개했다. 열두 살 소년이 그린 작은 정물화지만 강렬한 색채 대비와 두터운 물감, 형태의 단순화가 이미 드러난다. 훗날 '농원' 연작으로 이어질 색채 감각의 출발점이다. 초기작 '북한산' 역시 실제 풍경을 재현하기보다 계절의 감각을 색채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번 연구를 통해 그동안 '북한산'으로 알려졌던 작품의 원제가 '가을 산'이었음도 새롭게 확인됐다. 전시장에는 스승 사토 구니오의 작품도 함께 놓였다. 이대원은 생전에 "사토 선생은 틀에 박힌 미술교육에서 벗어나 피카소와 입체파를 이야기해준 매우 진보적인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스승의 작품을 함께 배치하면서 그의 조형 감각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번 회고전의 백미…'빛을 보는 공간' 이번 전시의 백미는 단연 2전시장이다. 검은 벽 위를 가득 메운 대형 '농원' 연작들이 사방에서 관람객을 감싼다. 흑경(黑鏡)처럼 연출한 바닥은 그림을 또 하나의 풍경으로 확장시킨다. 화면과 반영이 겹치면서 현실과 시간, 공간이 하나로 포개지는 듯한 압도적인 몰입감을 만든다. 작품 앞 벤치에 앉으면 연출의 의도가 더욱 선명해진다. 가까이에서는 수없이 겹친 색점과 붓질이 추상처럼 보이지만, 몇 걸음 물러나면 사과나무와 배꽃, 연못과 들판이 하나의 풍경으로 완성된다. 공간 디자인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다수 맡아온 김용주 디자인기획관이 담당했다. 작품을 단순히 나열하는 대신 회화 속 빛을 공간 전체로 확장시키며 이대원의 색채를 새롭게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이대원의 그림은 가까이에서 보면 추상이고, 멀리서 보면 풍경이다. 무엇보다 그의 흰 꽃은 하나의 흰색이 아니다. 미색과 분홍빛, 푸른 기운을 머금은 수많은 흰색이 서로 겹쳐 살아 있는 빛을 만든다.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빛이 머무는 순간을 그려낸 회화다. 전시장에는 그가 평생 수집한 목가구와 도자기, 민예품도 함께 전시된다. 생활과 예술이 하나였던 그의 미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자화상이다. 입구를 장식한 대표작 '담(秘苑)'도 눈길을 끈다. 가로 5m가 넘는 이 작품은 미국 주재 한국대사관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액자를 해체하지 않은 채 항공편으로 국내에 옮겨왔다. 이대원은 1986년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에 작품이 설치되는 과정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현지를 찾을 만큼 이 작품을 각별히 아꼈다. 멀리서 보면 흰 담과 나무가 어우러진 고요한 풍경이 먼저 다가온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흰 담은 하나의 흰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미색과 분홍빛, 푸른 기운을 머금은 여러 흰색이 서로 섞이지 않은 채 나란히 놓여 화면 전체에 깊이를 만든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 같은 색채의 운용은 색실 하나하나가 고유한 색을 유지하는 전통 자수의 방식과 닮아 있다"며 "어두운 옻칠 바탕 위 자개가 저마다의 빛을 내듯, 이대원의 색 역시 서로 뒤섞이지 않으면서 화면 안에서 깊이 있는 울림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이대원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외교통상부 문화홍보대사로 활동하며 한국 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데 힘썼다. 외교부는 그의 작품 2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담' 역시 오랜 기간 재외공관에 걸려 한국 회화의 아름다움을 전해왔다. ◆"농원 화가가 아니라 한국의 빛을 그린 화가" 이번 회고전을 보고 나면 한 가지 생각이 바뀐다. 이대원은 사과나무를 그린 단순한 '과수원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시간을 그린 화가였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그리고 그 사이 이름 붙이기 어려운 계절의 결을 색으로 기록했다. 그래서 그의 흰 꽃은 모두 다른 흰색이고, 그의 초록은 모두 다른 초록이다.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전시 제목과 달리, 이번 회고전은 오히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이대원을 몰라봤다는 사실을 가장 슬프게 한다. 전시장을 나서는 컬렉터들 사이에서는 "진작 이대원을 샀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이대원을 '과수원 화가'라는 한 줄의 수식어 안에 가둬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전시는 잊힌 화가를 복원하는 전시가 아니다. 한국 자연의 빛과 계절을 가장 찬란한 색으로 현대회화에 새긴 거장을 비로소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K-아트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금, 이대원의 회화는 한국 현대미술의 또 다른 뿌리를 새롭게 증명한다. 전시는 11월 8일까지 열린다. 2026/08/05
사라진 절판본…열린 미술관은 무엇으로 신뢰를 지킬까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지금도 한 권의 책을 기다리고 있다. 유영국 탄생 110주년 회고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장에 열람용으로 비치했던 절판본 『유영국: 삶과 창조의 지평』(오광수)이 전시 기간 중 사라졌다. 외부 기관에서 어렵게 빌려온, 재발행도 불가능한 절판본이었다. 최근 미술관은 안내문을 통해 "가져가신 분은 꼭 돌려주시기 바란다"고 호소했고, 관계자는 "다들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사라진 것은 책 한 권이지만, 이 사건은 참여형 미술관이 안고 있는 새로운 과제를 드러냈다. 최근 미술관은 작품을 바라보는 공간에서 작품을 경험하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기록을 읽고, 작품을 만지고, 전시장에 오래 머무는 시간까지 전시의 일부가 되는 시대다. 지난달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에서 열린 마틴 파 전시는 사진집 90권을 자유롭게 펼쳐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당시 손현정 학예연구사는 "분실 위험도 있었지만 책을 직접 보여주는 것 자체가 전시의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위험을 알면서도 자유 열람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책을 읽는 경험 자체가 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여와 개방은 새로운 책임도 함께 요구한다. 지난 4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만질 수 있도록 설치한 고사리 작가의 작품 '건져올린 돌' 일부가 전시 도중 사라졌다. 이번에는 절판본이다. 대상은 달랐지만 두 사건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열린 미술관은 무엇으로 신뢰를 지킬 것인가. 귀한 책을 누구나 펼쳐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위험을 감수한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운영의 허점이었을까, 아니면 포기할 수 없는 전시 철학이었을까. 미술관은 원래 사람을 믿는 공간이다. 관람객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전제하지 않는다. 그 신뢰 위에서 우리는 작품을 보고, 책을 읽고, 예술을 경험한다. 물론 신뢰는 관리의 반대말이 아니다. 절판본처럼 대체 불가능한 자료라면 복제본을 활용하거나, 원본은 관리자가 있는 열람 공간에서 공개하는 방식도 검토할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역시 관람객 증가에 맞춰 안전관리 인력을 추가 배치하고, 자유 열람 도서와 전시물 관리 교육을 강화했다고 밝혔다. 참여형 전시의 취지를 유지하면서도 운영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고민은 이제 한 미술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미술관은 더 많이 열릴 것이다. 작품을 만지고, 기록을 읽고, 공간에 오래 머무는 전시는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미술관이 고민해야 할 것은 얼마나 개방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개방을 어떻게 오래 지켜낼 것인가다. 좋은 전시는 관람객을 신뢰한다. 좋은 운영은 그 신뢰를 오래 지켜낸다. 그 믿음은 제도 위에서 더 오래 살아남는다. 신뢰와 무방비는 같은 말이 아니다. 사라진 것은 절판본 한 권이었다. 그러나 미술관이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열린 미술관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의 방식이다. 2026/08/01
호크니는 빠지고, 도라에몽은 시작가…미술시장이 보내는 신호 그림이 안 팔린다? 미술시장은 숫자로 움직이지만, 분위기는 사건으로 읽힌다. 국내 양대 경매사의 7월 경매는 지금 한국 미술시장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드러냈다. 서울옥션에서는 시작가 5억 원에 출품된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이 경매 직전 철회됐다. 케이옥션에서는 추정가 3억7000만~8억 원에 나온 블루칩 작가 유영국의 '산'이 출품 목록에서 빠졌다. 최고 추정가 11억 원으로 관심을 모은 무라카미 다카시의 '도라에몽'은 최저 추정가를 밑도는 시작가 6억6000만 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7월 경매 낙찰률도 녹록지 않았다. 서울옥션은 55.75%, 케이옥션은 58%를 기록했다. 출품작 10점 가운데 4점 이상이 유찰됐다는 의미다. 개별 경매 결과만으로 시장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출품 취소와 추정가 하회 낙찰, 50%대 낙찰률이 동시에 나타난 것은 시장이 보내는 하나의 신호로 읽힌다. 지금 시장은 사려는 사람만이 아니라, 파는 사람도 조심스러워진 시장이다. 기대한 가격에 낙찰되지 않거나 유찰 가능성을 우려해 출품을 미루거나 철회하는 위탁자도 늘고 있다. 시장이 위축되면 신중해지는 것은 컬렉터만이 아니다. 매도자 역시 시장을 관망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매 결과는 출품작 구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케이옥션 관계자는 "경매마다 모인 작품에 따라 결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며 "지난해부터는 특히 고가 낙찰작의 유무가 시장 분위기를 좌우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최근 경매 결과를 전달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과거에는 총 낙찰액과 낙찰률 등 시장 전체를 보여주는 지표가 강조됐다면, 최근에는 대표 출품작이나 고가 낙찰 사례를 중심으로 시장 분위기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장의 상징적인 거래가 주목받는 흐름이지만, 전체 시장의 체력을 읽을 수 있는 지표의 중요성 역시 여전히 크다. 현재 한국 미술시장은 대내외 악재가 겹치며 침체 국면이 장기화하고 있다. 주식시장으로 자금이 쏠리고 부동산 시장의 불확실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고금리·고물가로 실질 구매력이 감소하면서 미술품 소비심리도 위축됐다. 여기에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겹치며 투자자들은 위험자산보다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시장 구조 역시 돌아볼 시점이다. 해외 메이저 경매사들은 뉴욕·런던·홍콩 메이저 세일에 최고가 작품과 수요를 집중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반면 국내 경매시장은 매달 메이저 경매와 온라인 경매가 이어진다. 활황기에는 거래 기회를 넓히는 장점이 있지만, 침체기에는 한정된 수요가 여러 경매로 분산되면서 출품 확보와 낙찰률 모두 부담을 안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래량 경쟁이 아니라 시장의 체질을 다지는 일이다. 작품가격심의에 참여하는 미술시장 전문가는 단기적인 유동성에 기대온 양적 확장에서 벗어나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우선 1차 시장인 갤러리는 미술사적 가치와 이력이 검증된 근현대 작가와 중진 작가를 꾸준히 재조명하며 작품의 가치를 축적하는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1000만 원 이하 중저가 작품과 판화 시장을 활성화해 새로운 컬렉터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커뮤니티 프로그램 등을 통해 컬렉팅 저변을 넓혀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 활용해 국내 수요층은 물론 K아트에 관심을 보이는 해외 신흥 컬렉터를 확보하는 노력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변화는 국내만의 현상도 아니다. 한국미술품감정센터가 발간한 '아트마켓 2026'은 올해 미술시장을 움직일 핵심 키워드로 '선택적 회복(Selective Recovery)', '비대칭 시장(Asymmetric Market)'의 심화, 중동·아프리카·동남아시아 신흥시장의 부상, Z세대 컬렉터의 본격 등장, 인공지능(AI)의 시장 침투, 비공개 거래(Private Sales)의 확대를 꼽았다. 시장은 언제나 순환한다. 유명 작가가 세상을 떠나면 작품값이 오른다는 말도 이제는 공식이 아니다. 미술시장은 이름보다 수요와 심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호크니의 경매 출품 취소와 도라에몽의 시작가 낙찰은 시장의 위기를 단정하는 사건이 아니다. 다만 지금 한국 미술시장이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신호다. 침체기일수록 중요한 것은 거래량보다 시장의 체질을 다지는 일이다. 시장은 숫자로 회복되기 전에 먼저 분위기가 바뀐다. 202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