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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운틴과 낙서, 그 존재의 마찰면[박현주 아트에세이⑫]

등록 2026-01-08 18:38:24  |  수정 2026-01-08 21: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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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월 8일 한여름의 호주 시드니 블루마운틴.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세자매봉 전망대에 모여, 유칼립투스 숲이 만들어낸 ‘푸른 산(Blue Mountains)’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2026.01.0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시드니=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산은 높지 않았다.
날카롭게 솟지도, 극적으로 찢어지지도 않았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야생지대, 사암 급경사면과 폭포수가 열기를 식혀주는 열대우림 계곡.
블루마운틴의 능선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누워 있었던 것처럼
평평하고 조용했다.

그 순간, 깨닫는다.
이곳의 산은 형태가 아니라 시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한국의 산이 의지처럼 솟아 있다면,
이곳의 산은 체념처럼 펼쳐져 있다.

밀어 올린 힘이 아니라
끝없이 깎이고 남겨진 결과.
시간이 포기하지 않고 반복한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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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월 한 여름의 블루마운틴 전경. 2026.01.0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블루마운틴은 ‘파란 산’이라는 뜻이다.
산 전체의 약 85%를 차지하는 91종의 유칼립투스 숲에서
휘발된 수분과 정유 성분이 공기 중에서 빛을 산란시키며,
산은 멀리서 푸른 안개처럼 보인다.

우리는 산을 그릴 때
삼각형을 그리고 초록색을 칠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수평선을 긋고 파란색을 칠한다고 한다.

이 장대한 고원은
3억 년 전 바다와 사막을 오가며 쌓인 모래가
사암층이 되고,
5000만 년 전 대륙의 압력으로 솟아오른 뒤
비와 강이 집요하게 깎아내리며 완성된 풍경이다.

땅이 더 허물어지고
협곡이 더 깊어지면
언젠가는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처럼
황량하고 야성적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호주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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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월 한 여름의 블루마운틴 세자매봉 전경. 2026.01.0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가장 유명한 풍경,
세자매봉(The Three Sisters)에는
늘 이야기가 붙는다.

사랑과 금기,
전쟁과 이별,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세 자매의 전설.

인간은 언제나
자연에 이야기를 덧씌운다.
이름을 붙이고,
사연을 주입하고,
풍경을 기억 속으로 편입하려 한다.

그러나 산은
그 전설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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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월 한 여름의 블루마운틴 전망대 난간에 새겨진 낙서. 2026.01.0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관망대 난간에 다가가자
페인트가 벗겨진 쇠 표면 위로
수많은 이름들이 긁혀 있다.

이니셜, 날짜, 하트,
지워진 말과 덧칠된 말들.

낙서라 부르기엔
너무 필사적이다.

“나 여기 왔다.”
“나는 이 풍경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실존력은
페인트를 벗기고,
금속을 깎고,
바위를 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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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박현주 미술전문기자]1월 한여름의 호주 시드니 블루마운틴 링컨바위(Lincoln’s Rock). 전망대 바위 표면에 관광객들이 남긴 수많은 이름과 낙서가 새겨져 있다. 2026.01.0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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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박현주 미술전문기자]1월 한여름의 호주 시드니 블루마운틴 링컨바위(Lincoln’s Rock). 전망대 바위 표면에 관광객들이 남긴 수많은 이름과 낙서가 새겨져 있다. 2026.01.0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링컨바위(Lincoln’s Rock) 바위벽에도
수십 년의 흔적이 겹겹이 남아 있다.
자연의 층위 위에
인간의 층위가
아주 얇게 얹혀 있다.

지워지지 않지만,
결코 지배하지도 못하는 선.

여기가 바로
인간 존재의 마찰면이다.

우리는 자연을 바꾸지 못한다.
다만 자연에 닿는다.
그리고 그 접촉의 순간에
자기 이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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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박현주 미술전문기자]1월 한여름의 호주 시드니 블루마운틴 절벽. 수억 년에 걸친 시간의 층위가 그대로 드러난다.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찬란한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고,
바람은 설명 없이 지나간다.

유칼립투스 숲은 말이 없고,
계곡은 여전히 깊다.

전설은 끝났고
사랑도 전쟁도 지나갔지만,
산은 계속된다.

바람도, 빛도, 시간도
그저 계속된다.

아마 인간이
자연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일지도 모른다.

완성하지 않는 것.
결론 내리지 않는 것.
다만 스치고, 남기고, 떠나는 것.

블루마운틴에서 다시 알게 된다.
위대한 것은
남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인간의 사랑이란,
그 거대한 지속 앞에서
자기 흔적을 한 번 남겨보려는
아주 작은 용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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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박현주 미술전문기자]1월 한여름의 호주 시드니 블루마운틴 링컨바위 절경. 절벽 끝에 몸을 맡긴 커플이 사진을 남긴다. 이곳은 링컨바위 코스의 하이라이트다. 낙서보다 더 용감한, 인간의 몸짓이다.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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