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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 이 정도는 해야지"…아트선재센터, SF 영화 세트장 전시 화제

등록 2025-09-03 09:31:50  |  수정 2025-09-03 11:00:24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개인전 '적군의 언어'전

미술관 자체를 해체한 30주년 프로젝트

흙더미, 고철, 덩굴…폐허로 변신 압도적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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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아트선재센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Adrián Villar Rojas) 개인전 '적군의 언어'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입구는 흙더미로 봉쇄되고, 가벽은 철거됐다. 콘크리트 뼈대가 드러난 전시장에 거대한 고철 덩어리와 거꾸로 자라는 식물들이 매달렸다. 케이블과 쇠사슬이 얽힌 구조물은 불안정하게 공중에 매달려 있고, 강당과 화장실, 통로까지 폐허처럼 변모했다. 마치 미래의 폐허 도시를 재현한 SF 영화 세트에 들어선 듯한 풍경이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개인전 '적군의 언어'전이 관객을 압도하며,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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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아트선재센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Adrián Villar Rojas) 개인전 '적군의 언어'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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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아트선재센터 1층 전시장. 흙더미로 가득한 공사장 폐허 같은 분위기다.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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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아트선재센터 1층 전시장. 흙더미로 가득한 공사장 폐허 같은 분위기다. *재판매 및 DB 금지


◆30주년 맞아 껍질을 벗은 미술관
아트선재센터는 개관 30주년을 맞아 과감히 전관을 해체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흰 벽을 걷어내고, 온·습도 제어 장치를 멈추며, 흙과 불, 식물 같은 자연 요소를 끌어들였다. 보존의 공간이던 미술관은 생명체와 기계,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조각적 생태계로 탈바꿈했다.

전시는 2022년 시드니, 2023년 헬싱키, 2024년 바젤을 거쳐 이어진 연작 '상상의 종말'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낯선 유적처럼 보이는 기괴한 조각들은 먼 미래에서 발굴한 파편 같으며, 관객을 서늘한 기운으로 압도한다.

◆디지털에서 실재로…'타임 엔진'
비야르 로하스는 비디오 게임 엔진과 인공지능, 가상 세계를 결합한 도구 '타임 엔진'을 통해 조각을 생성한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생성된 가상 조각은 아르헨티나 작업실에서 금속·콘크리트·소금·자동차 부품 같은 재료로 구현된다.

작가는 “세계가 스스로 물질을 만들어내고, 나는 그것을 현실로 옮긴다”며 창작 행위의 존재론을 전복한다. 그의 조각은 멸종과 계승, 붕괴와 재생이 교차하는 경계적 상태를 구현한다.

전시 제목 '적군의 언어'는 인간 진화 과정에서 타자와의 공존, 오늘날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타자와의 만남을 비유한다. 비야르 로하스는 “우리는 이미 AI와 공존하고 있으며, 그 과정이 어쩌면 스스로의 소멸을 준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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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아트선재센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Adrián Villar Rojas) 개인전 '적군의 언어'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SF 영화 같은 현장
실제 전시는 영화적이다. 천장 가득 뒤엉킨 덩굴과 금속 파편, 흙더미와 기계 잔해, 비닐로 덮인 극장의 좌석까지 - 관람자는 예술 공간이 아닌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트장에 들어선 듯한 경험을 한다.

비야르 로하스는 리얼 DMZ 프로젝트(2014),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6), 광주비엔날레(2018, 2021) 등 한국과 꾸준히 호흡해 왔다. 이번 전시 역시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스튜디오 멤버 11명이 6주간 현장에서 제작해 완성됐다. 오는 9월 6일에는 아트선재센터 한옥정원에서 작가와의 아티스트 토크도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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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아트선재센터 김선정 대표가 전시를 설명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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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지하 극장은 모두 비닐로 의자를 감싸 폐허의 공간처럼 보여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재판매 및 DB 금지


아트선재센터의 30주년 전시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미술관 자체를 해체하고 낯선 생태계로 재구성한 사건이다. 폐허로 변신한 미술관은 미래의 폐허 도시를 닮은 SF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고, 관객은 그 속에서 인간 이후의 세계와 조우하는 감각적 경험을 체험한다.

관람객 사이에서는 “미술관이 이 정도 전시는 해야지”라는 반응이 터져 나오고 있다.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미술관 자체가 전시의 주체가 된 순간이다. 전시는 2026년 2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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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전시장 입구에 어떤 안내 표식도 없어, 밖에서 유리창 너머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들여다보는 관객들의 모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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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2일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가 전시 설명을 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1980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나, 유목적인 작업 방식으로 세계 곳곳을 무대로 활동한다. 그는 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해 집단적·협업적 과정을 거쳐 대규모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을 완성한다. 위압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취약한 형태의 작업은 조각·드로잉·영상·문학·행위의 흔적을 혼합하며, 멸종 위기에 처했거나 이미 사라진 인류의 조건을 탐구한다.

그의 관심은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포스트-인류세의 시간 속에서 다종 존재 간의 경계를 추적하는 데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미술관(2022), 마이애미 배스 미술관(2022), LA현대미술관(2017), 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2017),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2017) 등이 있다. 또한 파리 피노 컬렉션(2024), 제12회 광주비엔날레(2018), 카셀 도쿠멘타 13(2012), 뉴뮤지엄 트리엔날레(2012),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 아르헨티나관(2011) 등 세계 주요 비엔날레와 그룹전에 참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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