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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A, 2025 신년 기획전 《필(筆)과 묵(墨)의 세계: 3인의 거장》전 전시 전경. (左)겸재 정선 <수송영지도(壽松靈芝圖, 소나무와 영지버섯)>과 (右)윤형근 <Umber-Blue> 전시전경 ⓒ 이미지 S2A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18세기 겸재 정선, 19세기 추사 김정희, 20세기 윤형근. 최고들의 만남이다."
을사년 새해, 유홍준(전 문화재청장·이애주문화재단 이사장)명지대 석좌교수가 기획자로 나선 전시가 눈길을 끌고 있다. 글로벌세아그룹이 운영하는 S2A 신년 기획전으로 4일 개막한 '필(筆)과 묵(墨)의 세계: 3인의 거장'전은 ‘명작은 명작끼리 통한다‘라는 격언의 진리를 보여준다. (S2A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그림 김환기 우주(132억)를 소장하고 있는 김웅기 회장이 2022년 개관한 문화예술공간이다.)
누리끼리하고 거무스름한 그림들, 한자로 도배 된 글씨들로 자칫 올드해 보일 수 있는 전시지만, 시대를 초월한 명작의 힘에 매료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형미술은 ‘필과 묵’의 세계다. 이 전시회는 이런 관점에서 한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3인 거장, 조선 시대 회화의 겸재 정선, 조선 시대 서예의 추사 김정희, 현대추상 미술의 윤형근의 예술 세계를 한자리에서 조명하고 감상하고자 이 전시회를 마련했다."(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전시 '필(筆)과 묵(墨)의 세계'는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장대한 조형 세계를 펼쳐 보인다. 겸재 정선의 '연강임술첩', 추사 김정희의 '대팽고회', 윤형근의 'Burnt Umber' 등 40여 점의 주요 작품이 출품됐다. 특히 겸재의 '연강임술첩'은 10년만에 대중 앞에 공개되는 작품으로 진경산수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정형화된 관념산수(觀念山水)에 머물던 조선 시대 회화의 흐름을 벗어나 조국 산천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그린 진경산수(眞景山水)의 길을 개척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개성적인 서체로 서예를 높은 차원의 조형 세계로 끌어올린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다. 윤형근(1928~2007)은 우리나라 현대 추상 미술이 추구한 단색조(單色調)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세계가 주목하는 K 아트의 선봉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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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겸재 정선의 수송영지도(壽松靈芝圖, 소나무와 영지버섯)을 설명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겸재 정선: 사실정신(寫實精神)
겸재가 구사한 필과 묵의 기법은 대단히 섬세하고 다채롭다. 이번 전시에서 10년 만에 다시 공개된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임술년 연천강에서의 뱃놀이)'과 '서울 백운동(白雲洞)', '평해 월송정(越松亭)', '낙화암(洛花岩)' 등은 겸재 진경산수의 명품들이다.
유 교수는 "겸재 정선은 대상을 정확하게 또는 감동적으로 그렸다"면서 "겸재가 우리나라 산천의 풍광을 포착한 진경산수는 회화의 사실정신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조형세계"라고 했다.
유 교수는 "특히 겸재는 우리나라 산천 곳곳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아주 사랑하여 그의 산수화에서 무리 지어 있는 소나무 모습들이 거의 반드시 나온다"면서 "이 겸재의 소나무 표현법은 중국의 화본에는 나오지 않는 겸재만의 독특한 수지법(樹枝法)이어서 애칭으로 ‘겸재 소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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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우화등선(羽化登船,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1742, 종이에 수묵담채, 95.7x34.5cm ⓒ 이미지 S2A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겸재 노년의 명작으로 꼽히는 대작 '연강임술첩'은 놓치면 안된다. 양천현령을 지내던 67세(1742, 임술년) 때 경기도 관찰사, 연천군수 등과 셋이서 임진강(연강)에서의 뱃놀이를 한 뒤 이를 기념하여 모두 세 벌을 그려 나누어 가진 것 중 겸재 소장본이다.
"연천 임진강의 풍광을 장대한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그린 이 진경산수화는 흑백 대비가 강렬하고 듬직한 무게감이 감돌아 겸재의 박진감 있는 필법과 묵법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강변의 정자와 마을, 그리고 나룻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세세히 묘사해 더욱 현장감이 살아나고 있다."(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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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전시전경 ⓒ 이미지 S2A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추사 김정희: 입고출신(入古出新)
추사의 서예는 개성적이고 다양하다. 특히 추사는 쥐수염 붓인 '서수필(鼠鬚筆)'을 애용해 '살아있는 붓놀림'의 정점을 보여준다.
유 교수는 "필획의 구사로 이루어지는 서예는 그 자체로 추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추사는 옛 비문 글씨의 예서(隷書)체를 적극 도입하여 현대 조형으로서 서예의 세계를 아름답고도 다양하게 전개했다"면서 "추사의 조형 세계는 고전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오는 입고출신의 창작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며 옛날 선비의 글로 설명을 대신했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조선시대 문인유최진(柳最鎭, 1791-1869)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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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유홍준 교수가 옛 간찰을 직접 보여주며 추사의 글씨를 설명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추사의 작품 세계는 간찰(簡札, 편지), 시고(詩稿, 원고), 편액(扁額, 횡액 현판), 대련(對聯, 쌍폭작품) 등 다양한 형식을 띠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각 형식의 대표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유 교수는 "간찰은 본격적인 서예 작품은 아니지만 서예가의 체질적인 서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품 못지않은 서예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했다.
추사의 간찰은 이번 전시에 장년 시절(39세)에 황주목사에게 보낸 편지, 노년의 제주도 유배 시절(55~64세) 제주목사 장인식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 최만년(70세) 과천 시절 석동(石童)에게 보낸 편지 등 4점이 출품되어 추사체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를 본받아 쓴 '반야심경(般若心經)' 등이 선보여 추사의 작지만 칼 날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글씨 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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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_반야심경(般若心經)_종이에 먹_28.2x26.6cm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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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유홍준 교수가 편액 '사서루(賜書樓)'를 설명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예와 달리 소외 받던 편액이 이번 전시에서는 존재감을 보인다. 전서·예서·행서가 어우러지면서 현대적인 조형이 느껴져 명품으로 꼽혀온 '은지법신(銀地法臣)'과 ‘임금에게 하사받은 책이 있는 서재’라는 뜻인 '사서루(賜書樓)'가 올려다보게 한다.
유 교수는 "사서루는 규장각 선비였던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서재 이름인데 글씨의 대담한 구성으로 일찍부터 추사의 명작으로 꼽혀 왔으며 그 원작품이 전하고 있다"고 했다.
추사의 편액은 나무판에 새겨 건물과 서재에 현판으로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 나무에 새긴 편액은 모각(模刻)이 가능하여 추사의 명작들이 많이 복각(復刻)되었다. 이 때문에 나무 편액은 비록 유일품으로 가치를 지니지는 않지만, 오래된 목판 편액들은 추사 글씨의 아름다움과 멋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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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유홍준 교수가 윤형근 작품 앞에서 45년 전 취재하다 의심했던 윤형근의 진심을 이젠 이해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윤형근:순수조형(純粹造形)
"기법적으로 윤형근은 현대 미술에서 ‘필과 묵’, 그중에서도 묵법(墨法)을 가장 극대화한 화가였다."
한국 미술 거장 중의 거장 겸재와 추사 사이에 윤형근을 끼어 넣은 유 교수는 "단색조 회화로 규정된 그의 그림은 '사짜'가 없다"며 윤형근 그림의 진정성을 꼽았다.
윤형근은 BTS의 RM이 좋아하는 화가로도 유명하다. RM이 2022년 발표한 정규앨범 1집 'Indigo'에 윤형근의 육성을 담은 곡 'Yun'을 첫 번째 트랙으로 선보인 바 있다.
윤형근의 작품 세계는 ‘엄버 블루(Umber-Blue)’로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단순한 그림이다. 면포(또는 마포)에 다색(Umber)과 청색(Blue, 또는 Ultramarine)을 섞어 큰 붓으로 푹푹 찍어 내려 그으면서 화면을 분할했다. 면포와 물감사이에 나타나는 그 미묘한 번지기로 순수 추상 미술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청색은 하늘을, 다색은 땅을 상징하여 윤형근 자신은 이를 ‘천지문(天地門)’이라고 했다.
유 교수는 45년 전인 1979년, '계간미술' 기자로 근무할 당시 윤형근을 취재하며 만났던 설(說)을 풀었다.
"당시로서는 크게 유명한 화가도 아니고 그의 작업은 난해한 추상화의 하나로 생각되어 「오늘의 작가 연구」란에 소개하는 글을 쓴 것이다. 그때 윤형근의 언급 중에 좀 심한 비약이다 싶기도 한 것과 심한 자화자찬 같다고 생각되기도 한 것 두 가지는 내 글에 반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지금 와 되새겨 보니 그것은 윤형근 예술의 뿌리를 말하는 중요한 예술적 고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한 것은 추사체에 대한 그의 언급이었다. “내 붓질의 뿌리는 추사 김정희에 있어요. 추사의 필, 정확하게는 획을 긋는 법에서 배웠다오."
그때 나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추사의 필획과 윤형근의 ‘엄버 블루’는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윤형근은 정말로 추사에 매료되어 있었다. 윤형근이 추사에 심취하게 된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추사체에서 영향받은 것이 진심이었음을 누누이 말해왔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의 화실엔 추사의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유홍준)
또 하나는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수화 김환기(1913~1974)와 비교해 말한 것이었다.
유 교수는 당시 윤형근이 “장인어른에게 작업한 것을 보여드려도 좀처럼 칭찬을 듣지 못했는데 내가 현대 문학에 ‘엄버블루’로 표지화 그린 것을 보고는 처음으로 내 작업을 칭찬했어요.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하셨죠. 그때 이후 수화 어른은 하늘을 그렸지만, 나는 땅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죠"라고 했는데 "그때는 윤형근이 아직 유명한 때가 아니어서 장인의 명성을 빌려서 자신을 지나치게 미화시켜 말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윤형근의 진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유 교수는 윤형근의 추상 미술은 필과 묵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며 최대한의 조형 효과를 나타내는 순수 조형의 정신을 보여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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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A, '필(筆)과 묵(墨)의 세계, 3인의 거장' 전시장 입구. *재판매 및 DB 금지 |
"한자리에서 대련하는 3인 거장의 작품은 ‘필과 묵’의 세계가 아름답고, 신비롭고, 다채롭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한다."
작품 설명을 하던 유 교수는 작품마다 '멋있다'는 말을 연신 쏟아내며 녹슬지 않은 입담을 자랑했다. 18세기, 19세기 20세기 최고의 화가들을 한자리에 만나게 한 그는 자신은 '21세기 최고의 해설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세상이 물구나무 서도 문화는 문화 그대로 가야 한다"며 혼란한 시국 속에도 전시를 열고 관람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3인의 거장을 묶은 이번 전시는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예술 세계가 혼연히 어울리는 감동이 있다"며 "감히 말하자면 이는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K 아트의 뿌리"라고 자부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오는 8일, 22일 유홍준 교수의 강연이 열린다. 유 교수의 작품 설명은 흥미진진하고 유익해 오래된 그림들이 생기를 띠고 마무리 시간이 되면 한국 미술의 힘을 절로 느끼게 한다. 전시는 3월22일까지. 관람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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