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

백현진 ‘배우로 번 뱃심, 화가의 자유가 됐다’ [박현주 아트클럽]

등록 2026-02-03 15:16:16

“가수·배우·화가 모두 본업…그리기는 평생 할 일”

PKM갤러리서 5년 만의 개인전, 여백이 만든 해방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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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3일 PKM갤러리에서 백현진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2026.20.03.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언어로 할 수 있었으면, 화가가 안 됐겠죠.”

배우이자 가수인 화가 백현진(54)은 작품 설명을 거의 하지 않는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로 닿지 않는 상태를 기록하기 위해 그는 그림을 그렸고, 음악을 만들었으며, 연기를 해왔다. 그에게 시각예술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언어 이전의 감각을 붙잡아 두는 방식이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 별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Seoul Syntax’는 그런 태도의 연장선에 있다. 2021년 전시 ‘말보다는’ 이후 5년 만에 열린 이번 전시는, 작가가 나고 자란 도시 ‘서울’을 배경으로 삼지만 도시의 풍경을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서울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리듬과 어긋남, 규칙과 오류의 공존을 작가 고유의 ‘문법(syntax)’으로 풀어낸다.

“문법이라는 게 사실 규칙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오류도 있고, 어긋남도 포함돼 있고요. 저는 늘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3일 오전 전시장에서 만난 백현진은 변한 듯 아닌 듯, 그러나 분명히 더 맑아진 상태로 작품 앞에 서 있었다. ‘모범택시’의 갑질 회장, 직장인 백부장의 얼굴은 그 자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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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of Bek Hyunjin_ Seoul Syntax *재판매 및 DB 금지


◆ 번아웃 이후, ‘덜 그리는’ 그림
이번 전시에 소개된 페인팅과 드로잉은 이전 작업에 비해 눈에 띄게 비워져 있다. 밀도 높은 화면 대신 여백이 늘어났고, 붓질은 한층 느슨해졌다. 그는 이를 스타일의 변화라기보다 몸의 변화라고 설명한다. 특히 누런 장지에 그린게 눈길을 끈다.

“젊었을 때는 덜 그리면 불안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덜 그리는 그림이 제 몸에 가장 맞아요. 물리적으로도 그렇고요.”

작품의 상당수는 2025년 노르웨이에 머물며 전시를 준비하던 시기에 시작됐다. 북유럽의 날씨와 개인적인 사정이 겹치며 감정이 깊게 가라앉았고, 그 상태로 서울에 돌아와 작업실에 머물며 붙잡고 있던 그림들이다.

“아,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번아웃이구나 싶었어요.”

오십견이 찾아왔고,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몸에 맞는 속도를 다시 배웠다. 평생 함께 갈 업으로서의 그림은 더 이상 몰아붙이는 일이 아니라, 조율하는 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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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k Hyunjin. Stop, 2025 *재판매 및 DB 금지


◆ 제목은 의미가 아니라 ‘별명’
작품 제목은 가볍다. ‘PW’, ‘멈춤’ 같은 단어들은 명확한 의미를 지시하지 않는다. 패스워드(password)일 수도, 페이퍼워크(paperwork)일 수도 있다.

“제 작품에서 제목은 중요하지 않아요. 의미라기보다는 친구들 별명 붙이듯이 붙여놓는 거죠.”

그는 먼저 그림을 그리고, 그다음에야 언어가 아주 조금 개입된다고 말한다.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관객 각자가 보이는 만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 ‘전방위 예술가’라는 말에 대하여
백현진은 배우·미술가·음악가를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이 표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전방위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직업이 세 개인 거죠. 다 동등해요.”

오히려 이 ‘혼업’ 구조가 자신에게는 하나의 안전망이 됐다고 말한다. 배우로 벌어들인 수입이 미술 작업의 배심이 되어주고, 미술에서의 성과가 음악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는 이를 “의도하지 않은 분산 투자”에 비유한다.

“한 바구니에 계란을 다 담지 않은 셈이죠. 운이 좋았어요.”

유명 배우가 되며 생긴 ‘뱃심’은 그에게 자유를 줬다. 돈 걱정 없이, 시장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세 개의 업은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떠받치는 하나의 포트폴리오 시스템처럼 작동하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분명 멀티 인간, 멀티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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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of Bek Hyunjin_ Seoul Syntax *재판매 및 DB 금지


◆ PKM과의 오래된 인연, 그리고 오해에 대하여
백현진과 PKM갤러리의 인연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그는 2004년 첫 전시 이후, 2010년대 초반부터 다시 관계를 맺고 꾸준히 작업을 이어왔다. 당시 그는 배우로서의 성과도, 시장의 주목도 없던 시기였다.

“젊었을 때는 진짜 가난했어요.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PKM과 인연을 맺기 전, 그는 아라리오 프로젝트를 통해 5년간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지원을 받았다. 배우 이전, 오롯이 시각예술가로서의 시간이었다.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는 “단편 영화를 만들고 직접 출연하며 음악 작업을 병행해도, 이를 ‘비주얼 아티스트가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분리해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 번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포괄적인 예술가로 봤던 거죠.”

그럼에도 그는 종종 ‘배우로 유명해진 뒤 미술을 한다’는 오해를 마주한다. 그는 이 질문에 담담하다.

“제가 배우로 시장에서 성과가 생긴 건 사실 5년도 안 됐어요. 정확히 말하면 ‘모범택시’ 이후죠. 그전에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배우 이전에 그림이 있었고, 명성 이전에 작업이 있었다. 지금의 그는 그 모든 시간이 겹쳐 만들어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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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k Hyunjin, Portrait. PKM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백현진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대만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해왔다.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일민미술관, 아트선재센터를 비롯해 상하이 민생현대미술관, 쿤스트할레 빈, 노르웨이 베스트포센 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기관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로 선정됐다.

또한 인디밴드 1세대인 ‘어어부 프로젝트’와 프로젝트팀 ‘방백’의 멤버이자 솔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해왔으며, 영화 ‘북촌방향’, ‘경주’, ‘브로커’와 드라마 ‘무빙’, ‘모범택시’ 등에 출연한 배우로서도 전방위적인 예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배우의 몸, 화가의 전환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한 뒤 작업실로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모범택시’에서의 빌런 연기는 신체적으로도 큰 소모를 남겼다.

“너무 화가 많은 역할을 하고 오면 바로 붓을 들지는 않아요. 그 모드를 최대한 지우려고 하죠.”

작업복을 갈아입고, 공간을 바꾸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훈련이 됐다. 연기, 음악, 미술은 서로를 방해하기보다 각자의 회로를 정리해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 AI 시대, 또 하나의 ‘나’
최근 그는 AI와의 협업 가능성도 탐색 중이다. 챗GPT와 제미나이를 유료로 사용하며, 스스로 묻고 답하던 사고 과정을 AI와 나눈다. 계기는 책 ‘듀얼 브레인’이었다.

“AI가 못하는 걸 내가 해야지, 이런 생각은 아니에요. 그냥 나 하나가 더 생긴다고 가정해보는 거죠.”

그는 AI를 대체가 아닌 확장의 도구로 다룬다. 혼자 생각할 때와 둘이서 오갈 때, 전혀 다른 사유의 경로가 열린다고 했다.

◆ “그냥 봐주세요”
배우로서의 인지도를 따라 전시장에 들어오는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얄미우면서도 백현진다운 시니컬한 말이다.

“재미없으셨으면 미안하고요.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상회화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그는 안다. 하지만 그림도 결국 많이 본 사람일수록 더 재밌게 볼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 내면의 두께를 쌓는 일
1972년생인 그는 오십을 넘겼지만 여전히 아이 같은 천진함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세상에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응의 깨달음도 함께 있다. 장자·노자의 무위자연처럼, 그는 정해진 마음으로 사는 것을 경계하며 자신을 운용한다.

“지금은 분노나 우울을 최대한 지우고, 내가 앞으로 보고 싶은 그림이 뭔지 생각하면서 그려요. 담담해지려고 계속 훈련 중이에요. 아마 이건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일 거예요.”

그는 이미 2년 전부터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2~3년 뒤 또 하나의 개인전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멈추지 않기 위해, 그는 지금도 내면의 함량을 키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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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of Bek Hyunjin_ Seoul Syntax *재판매 및 DB 금지


◆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시작된 그림들
‘Seoul Syntax’는 백현진이 지금의 자신을 살아내는 방식에 대한 조용한 기록이다.

모든 위대함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 그는 어린 시절 만화와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넘기던 그때처럼, 다시 가장 원초적인 자리로 돌아간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나 유명한 배우 됐지’ 이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하는 거죠.”  

전시는 3월 21일까지. 관람은 무료.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