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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석, 인생공부-고백(1220), 2023, Acrylic, paper on canvas, 122x122cm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 그림, 보고도 안 믿긴다. 가까이서 보면 오돌토돌 수많은 점이 박혔다.
알고보면 더 놀랍다. 정말? 이걸? 주사기로? 감탄도 기겁하게 한다.
주사기 통에 아크릴 물감을 넣고 밀어냈다. 1~2mm 작은 점들이 수만 번, 수십만 번 찍혀 환영을 만들어냈다. 19세기 후반 등장한 점묘화 창시자 쇠라도 울고 갈 '마이크로 점묘화'다.
윤종석(52)작가. 미술시장에서 이미 ‘주사기 화가’로 유명하다.
전생에 주사기였을까? 아니면 주사기를 만든 사람이었을까?
“무의식의 틀을 깨고,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해방 시켰을 때, 비로소 새로운 앎(知)의 탐구가 시작된다.”(미셀푸코 '지식의 고고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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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석, 긴 호흡(0808), 2023, Acrylic, paper on canvas, 80x122cm *재판매 및 DB 금지 |
◆붓으로 점 찍다 '주사기'로 신세계
주사기로 점 찍기 달인이 된 건 허무와 절망에서 시작됐다. 대학원 시절 마티에르나 오브제 표현 기법에 집중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걸 내 거라고 할 수 있나? 물감 덩어리들만 턱턱 붙어 있는데,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죠."
처음에는 붓으로 점을 찍었다. 밋밋하고 단순했다. "이것 저것 다른 도구들을 시도해본 끝에 찾은 게 바로 주사기였어요."
2000년에 시작한 '주사기 회화'는 옷으로, 늑대로, 꽃으로 일상을 채집하며 진화했다. 수행보다 더한 고행스럽게 작업하는 건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면서다.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다 내적인 결단을 내렸죠. 그 모든 덧없음을 작업에 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예술에 적당히는 없다. 수도자처럼 작업한다. 작품은 수십만 개 이상의 점이 태동한 결과다. 정직한 노동의 대가는 유려함을 선사한다. "점은 켜켜이 쌓인 과거를 밟고 살아가는 현재의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자 제 스스로 여러 단계의 질문을 풀어가며 내면을 알아가는 심리 테스트와도 같습니다.”
깨알보다 작은 점은 하찮음을 위대함으로 올려 세운다. 시간을 잡은 수많은 점이 만든 화면은 그래서 빛나게 강렬해 눈길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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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석, 시작이면서 끝으로 가는 여정에 올라타다(0808), 2023, Acrylic, paper on canvas, 117x91cm *재판매 및 DB 금지 |
◆'표면의 깊이' 이후 2년...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제 작업은 세상에 대한 감정적 반응입니다."
2021년 ‘표면의 깊이’ 전시 이후 2년 만에 나온 신작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서 영감 받았다.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가 촬영한 ‘0.12화소에 불과한 작은 점의 지구 사진’이다.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라는 칼 세이건의 말에 공감했다.
그도 작은 점에서 살아온 모든 이의 인생을 수많은 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미지와 형상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점으로 된) 선(線)은 시공간을 잇는 ‘반복된 윤회의 선’이기도 하다.
윤종석 작가는 "우리는 과거의 흔적을 딛고 살아간다. 화면에 어우러진 제각각의 모티브는 현재의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며 "점은 현재의 우리를 과거와 미래로 연결해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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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석, 여자의 일생(0907-어머니), 2023, Acrylic, paper on canvas, 255.7x318.6cm *재판매 및 DB 금지 |
◆윤종석의 점...:"세상에 대한 감정적 반응"
이번 전시에는 한쪽 벽면 전체를 꽉 채운 특별한 대작이 눈길을 끈다. 가로 3m가 넘는 '여자의 일생(0907-어머니)작품은 작가가 처음 시도한 역작이다.
제목대로 어머니의 일생을 한 폭에 담았다. 나뭇가지처럼 뻗은 황금 줄기에 여러 모양의 저울이 달렸고, 곳곳에 어머니와 연관된 소재들이 얹어져 있다. "운동회에서의 독보적인 달리기 실력은 바통, 유독 좋아하신 동백꽃과 평소 즐기셨던 소주잔, 식당 일을 오래 하셨던 고단한 삶의 일상은 요리용 칼 등으로 표현했어요."
이번 작품은 형상이 확실했던 2년 전과 달리 형체가 흐트러졌다. 시간의 흐름, 감정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인생을 의미한다. 20년 넘게 이어온 '주사기 점묘법'이 본능적인 감각으로 자유롭게 발휘된 자신감이다.
청색 빛이 스민 검은색으로 칠한 전시장 벽면도 인상적이다. 어두운 밤하늘의 우주 속에 작품이 빛나고 있는 듯 연출한 것으로 모든 것을 작가에 내어준 분위기다. 2m~3m 넘는 대작들을 건 상업화랑에서 흔치 않은 미술관 같은 전시다. 전시 무대가 적은 50대 작가들의 새로운 도전을 재조명하는 취지로 "작가적 역량이 커질 때 K아트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도 담보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겼다.
환상적인 그림,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뚫고 나왔다. '유한 인생 게임'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주사기 점묘화'가 지루한 일상에 따끔 주사를 놓는다. 전시는 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4월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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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석 작가 *재판매 및 DB 금지 |
◆'주사기 화가' 윤종석은?
1970년 대전 출생으로 한남대학교 미술교육과, 동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일본·이탈리아·중국·싱가포르 등에서 20여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2006 화랑미술제 Best Top 10 작가 선정, 롯데화랑 유망작가 지원 프로그램 선정, 대한민국청년비엔날레 청년미술상,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및 특선, 대전광역시 초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중국 베이징 아트사이드스튜디오, 장흥가나스튜디오, 프랑스 파리씨떼 예술공동체, 대만 타이페이 아티스트빌리지 등의 레시던시 프로그램에 초대되어 참여했다. 작품은 코오롱, 하나은행, 외교통상부, 두바이왕실, 벤타코리아, ㈜파라다이스 아트센터 쿠, 가나아트센타, 대전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보바스 기념병원. 골프존 문화재단, 제주현대미술관, 스텐다드 차타드 은행,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수원시립미술관, 롯데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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