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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인식, 'Work 63A'(1963)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유리를 깨고, 동판을 자르고, 물감을 캔버스 뒤에서 밀어냈다. 그림을 그리는 대신 재료의 성질을 드러내고, 같은 행위를 끝없이 반복했다.
1960~7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작가들이 미술의 오랜 관습을 뒤집은 방식이다.
재일 작가와 한국 작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현대미술의 변화를 이끌어온 과정을 살펴보는 전시가 광주에서 열린다.
광주미술관은 하정웅미술관에서 '2026 하정웅컬렉션전 Ⅱ-사물의 재발견: 재일 작가와 한국 현대미술'을 11월 29일까지 개최한다.
곽인식, 세키네 노부오, 이우환, 곽덕준, 김구림, 문승근, 손아유,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최명영 등 11명의 회화·드로잉·판화·사진 60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재일한국인 기업가이자 문화예술 후원가인 하정웅 명예관장이 기증한 작품을 한국 현대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정웅은 1993년부터 2018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작품 2603점을 기증했다. 그동안 컬렉션은 재일 작가들의 삶과 디아스포라, 역사적 희생자를 위로하는 '기도의 미술'을 중심으로 소개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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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네 노부오, 달그림자(금색), 1989 *재판매 및 DB 금지 |
이번에는 작가들의 삶을 넘어 작품 사이의 연결에 주목한다.
특히 재일 작가와 한국 작가의 관계를 어느 한쪽이 영향을 준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동시대의 교류로 바라본다.
곽인식은 일본을 방문한 한국 작가들과 교류했고, 이우환은 박서보를 비롯한 한국 작가들과 긴밀하게 소통했다. 재일 작가 문승근과 손아유 역시 한국 미술계와 교류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 일본의 모노하(物派), 한국 실험미술, 단색화는 사물의 물성과 행위를 새롭게 바라보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20세기 후반 미술사의 주요 흐름으로 재평가받고 있는 이들 미술 운동의 접점이 하정웅컬렉션에 담겨 있다는 것이 전시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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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덕준, 포드 곽, 1974 *재판매 및 DB 금지 |
전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1부 '사물과 관계, 모노하의 태동'에서는 곽인식과 세키네 노부오, 이우환, 곽덕준의 작품을 소개한다.
곽인식은 일본에서 모노하가 본격화하기 전인 1960년대 초부터 유리를 깨고 동판을 잘라 이어 붙였다. 출품작 'Work 63A'(1963)에는 깨진 유리의 균열이, 'Work 65B'(1965)에는 동판을 자르고 다시 이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이우환의 'From Line'(1980)은 화면 위쪽에서 시작한 푸른 선들이 아래로 내려오며 점차 옅어지는 작품이다. 붓에 묻은 물감이 소진될 때까지 한 번에 선을 긋는 행위를 반복해 시간의 흐름을 드러낸다.
곽덕준의 '대통령과 곽' 연작도 눈길을 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표지에 등장한 대통령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이어 붙여 권위와 사회적 기준을 풍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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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승근, 활자구, 1974 *재판매 및 DB 금지 |
2부 '개념과 행위, 매체의 확장'에서는 김구림, 문승근, 손아유의 실험을 살펴본다.
문승근은 한자 활자를 박은 공을 종이 위에 굴려 무늬를 만들었다. 글자를 전달하던 활자가 읽을 수 없는 흔적으로 바뀌는 작품 '활자구'(1974)다.
손아유는 선을 긋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며 화면에 남는 흔적과 빈 공간을 탐구했다.
광주미술관은 하정웅컬렉션을 통해 문승근 작품 112점과 손아유 작품 174점을 소장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국내에 덜 알려진 재일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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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아유 신체풍경, 1969.1986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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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현, 접합 85-8 *재판매 및 DB 금지 |
3부 '반복과 축적, 단색화의 수행'에서는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최명영의 작업을 소개한다.
박서보는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연필로 선을 그었고, 정상화는 캔버스를 접고 떼어낸 뒤 빈자리를 다시 메웠다. 하종현은 마포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냈으며, 최명영은 연필 획을 반복해 화면을 채웠다.
작업 방식은 달랐지만 모두 사물의 물성과 행위 자체를 회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윤익 광주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디아스포라와 '기도의 미술'로 조명되어 온 하정웅컬렉션을 현대미술사 안에서 새롭게 읽어 보려는 시도"라며 "재일 작가와 한국 작가들이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 낸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점을 전시장에서 만나 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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