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지구독대여자' 정정엽…"보잘것없는 존재들의 충만한 생명력"

등록 2026-06-17 00:01:00

나방·벌레·감자싹·팥으로 풀어낸 여성과 생명의 서사

갤러리밈서 500호 대작 '텃밭' 등 신작 23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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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생존기 9, 2026, 나무위에 판넬, 122cm*122c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벌레 한 마리도 지구와 독대하는 충만함이 있다."

여성주의 미술의 대표 작가 정정엽(64)이 개인전 '지구독대여자'를 통해 나방과 벌레, 감자싹, 팥과 콩 등 낮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의 생명력을 화폭에 펼쳐 보인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여성의 성장 과정을 담은 '소녀생존기' 연작과 나방 시리즈, 500호 대작 '텃밭' 등 신작 23점을 선보인다.

정정엽은 1980년대부터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시각을 바탕으로 회화와 설치, 퍼포먼스 작업을 이어온 작가다. 이중섭미술상(2022)과 고암미술상(2018)을 수상했으며, 콩과 팥, 나물, 벌레 등 일상 속 평범한 존재들을 통해 생명공동체와 공존의 문제를 탐구해왔다.

이번 전시는 두려움 속에서도 세상과 독대하기 위해 성장하는 여성의 서사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생명력을 나란히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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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생존기 8, 2026, 나무판넬 위에 아크릴,  소녀생존기 10, 2026, 나무판넬 위에 아크릴,  나방-미산리103, 2026, 나무 판넬 위에 아크릴, 90x53cm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 제목인 '지구독대여자'는 두려움과 불안을 통과하며 세상과 마주하는 여성의 성장 서사를 담고 있다. 작가는 밤을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억압과 편견, 무의식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바라본다.

이번 전시의 핵심 연작인 '소녀생존기'는 두려움을 극복하며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여성들의 몸짓을 나무 패널 위에 펼쳐낸 작업이다. 물방울과 불꽃, 고생대 식물 이미지가 어우러진 화면은 성장의 통과의례이자 내면의 정화 과정을 암시한다.

전시장에서는 나방과 벌레, 푸성귀를 소재로 한 신작들도 만날 수 있다. 500호 대작 '텃밭'은 화면 가득 채운 채소와 뱀, 벌레들을 통해 대지에서 길어 올린 야생의 생명력을 드러낸다. 작가는 인간 중심적 시선에서 벗어나 나방과 벌레 역시 지구 생태계를 함께 이루는 존재임을 강조하며 생명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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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2026,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194x390cm *재판매 및 DB 금지


감자싹 연작은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축이다. 작가는 먹거리로 소비되던 감자를 스스로 생명을 발현하는 주체로 재해석한다. 화면 속 감자싹은 인간의 혈관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태초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나방과 벌레처럼 소외된 존재들이 지닌 생명력과 공존의 가치를 상징한다.

오랫동안 팥과 콩을 주요 소재로 다뤄온 정정엽은 신작 '씨앗-풍경' 연작에서 붉은 팥을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날아오르게 한다. 작가는 팥 한 알 한 알을 생명의 에너지가 응축된 존재로 바라보며, 여성의 노동과 일상이 거대한 예술적 주체로 드러나는 전복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정정엽은 "두렵지만 온전히 지구와 독대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세상의 여린 생명들과 마주하는 몸짓을 작품에 담고자 했다"며 "나무의 결을 따라 붓질하며 소녀와 벌레, 나방 등 여린 생명들과의 독대를 그려냈다"고 밝혔다.

전시는 8월 12일까지 열린다. 관람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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