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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 1998년 이후’ 리움미술관 입구에 선보인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과 최근작 '롱 테일 헤일로: CTCS #1'.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전시 종료를 약 2주 앞둔 리움미술관의 ‘이불: 1998년 이후’가 다시 한 번 관람 포인트를 환기한다.
은빛 비행선에서 유토피아의 폐허, 작가의 스튜디오를 수직으로 펼친 공간까지, 이불의 지난 30여 년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주요 장면 네 곳을 다시 짚어본다. 전시는 2026년 1월 4일까지다.
◆1. 거대한 은빛 비행선과 긴 역사의 여운
전시장의 입구인 슬로프 공간에는 길이 17m에 달하는 은빛 비행선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과 최근작 '롱 테일 헤일로: CTCS #1'이 설치돼 전시의 상징적 포문을 연다. 두 작업은 블랙 콘크리트의 육중한 매스와 글라스 커튼월의 개방성이 공존하는 렘 콜하스 건축과 어우러지고 충돌하며, 리움 전시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은 1937년 힌덴부르크 참사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 체펠린(Zeppelin)을 참조한 작업이다. 기술적 진보를 향한 인류의 열망과 좌절을 동시에 품은 이 비행선은 콘크리트 공간 속에서 거대하지만 취약하고, 아름답지만 불안정한 몸체를 드러낸다. 반짝이는 표면으로 시선을 끄는 이 존재는 끝내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운명을 은유한다.
이에 대비되는 '롱 테일 헤일로: CTCS #1'은 검고 단단한 물성으로 전시의 시작과 끝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자리한다. 2024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을 위해 제작된 작품 중 하나로, 이번 전시에 포함된 가장 최근작이다. 동시에 신체와 유기체, 기계와 건축의 하이브리드적 요소, 고대 조각과 미래주의, 큐비즘에 이르는 미술사적 참조가 응축돼 지난 30여 년의 작품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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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오바드〉, 2007, 알루미늄 구조, LED 조명, 전기 배선, 크리스털 및 유리 비즈, 400 × 300(지름) cm, 《이불: 1998년 이후》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서울, 2025. 모리 미술관 소장. ⓒ Lee Bul. 사진: 전병철. 리움미술관 제공. [오른쪽] 〈오바드 V〉, 2019, 비무장지대(DMZ) 철거 초소에서 수집한 주조강, 옵티움 뮤지엄 아크릴, 전자 디스플레이 보드, LED 조명, CPU, DC-SMPS, 디머, 전기배선, 400 x 300(?) cm, 작가 및 BB&M 제공. ⓒ Lee Bul. 사진: 전병철. 리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2. '오바드': 유토피아를 향한 꿈들에 보내는 이별의 송가
블랙박스 입구로 들어서면 거대한 탑 형태의 작업 '오바드'를 마주하게 된다. 유토피아적 이상과 좌절, 이데올로기 문제를 성찰하는 ‘오바드’ 연작의 첫 작업으로, 4m 높이의 알루미늄 타워 구조를 지닌다. 이 작업은 블라디미르 슈코프가 설계한 세계 최초의 하이퍼볼로이드 타워(1896), 인류 최초의 핵실험에 사용된 트리니티 테스트 타워(1945) 등 19~20세기 기술 문명의 상징적 구조물들을 참조한다.
각 층을 이루는 고리 구조물에는 근대의 비전과 문명의 덧없음을 성찰하는 에스페란토어 문구가 LED로 점멸한다. 제목 ‘오바드(Aubade)’가 새벽의 이별 노래를 뜻하듯, 명멸하는 단어들은 실현되지 못한 유토피아적 꿈들에 보내는 이별의 송가처럼 울린다.
그라운드갤러리에는 '오바드 V'(2019)가 이어진다. 이 작품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철거하기로 합의됐던 DMZ 감시 초소의 폐자재로 제작됐다. 녹슨 구조물 내부에는 앞으로 백만 년간 지속될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에 관한 문구가 LED로 점멸한다. 우주적 질서를 담담히 지시하는 이 문장은 화해와 충돌을 반복하는 인간사의 덧없음과 대비된다. 결국 '오바드 V'는 지속될 이데올로기의 그림자와 화해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유령비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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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몽그랑레시를 위한 모형〉, 2005, 석고, 철망, 목재, 실리콘, 아크릴 물감, 크리스털 및 합성 비즈, 알루미늄 막대,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 포멕스, 62.8 × 121.8 × 102.8 cm (베이스 포함), 개인 소장. ⓒ Lee Bul. 사진: 전병철. 작가 제공. [오른쪽] 〈몽그랑레시: 바위에 흐느끼다…〉, 2005, 폴리우레탄, 포멕스, 합성 점토, 스테인리스 스틸 및 알루미늄 막대, 아크릴 패널, 합판, 아크릴 물감, 바니시, 전기 배선, 조명, 280 × 440 × 300 cm, 《Lee Bul: From Me, Belongs to You Only》 전시 전경, 모리미술관, 도쿄, 2012. ㈜하이트진로 소장. ⓒ Lee Bul. 사진: Watanabe Osamu. 모리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3. '몽그랑레시' 연작의 서문
그라운드갤러리 입구에서 만나는 작은 모형은 전시에서 놓치기 쉬우나 중요한 작업이다. 이불은 2005년 뉴질랜드 고벳-브루스터 미술관 레지던시를 통해 ‘몽그랑레시’ 연작의 첫 작업을 발표했으며, '몽그랑레시를 위한 모형'은 대형 설치에 앞서 제작된 선행 작업이다. 대각선 맞은편에는 같은 해 제작된 '몽그랑레시: 바위에 흐느끼다…'가 함께 전시돼 있다. 작가가 ‘서문’이라 부른 이 두 작업은 연작의 초기 형태이자 이후 작업을 예고하는 알레고리적 지형도다.
'몽그랑레시를 위한 모형'은 눈 덮인 황무지 위에 모더니즘 건축의 폐허가 뒤엉킨 풍경을 연상시킨다. 공중에서 끊기는 고속도로, 낭떠러지 위에 선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수정산의 형상은 유토피아적 비전의 붕괴를 암시한다.
'몽그랑레시: 바위에 흐느끼다…'에는 휴 페리스가 상상한 미래의 고층건물 ‘철학의 중심’ 타워가 산처럼 솟아 있다. 그 안에는 구성주의와 바우하우스의 잔재가 얽혀 있고, 아야 소피아 성당의 뒤집힌 복제품이 병치된다. 전광판에는 토머스 브라운의 『호장론』에서 인용한 문장이 점멸하며, 폐허인지 건설 현장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풍경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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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 1998년 이후'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5 ⓒ Lee Bul. 사진: 전병철. 리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4. 수직으로 펼쳐진 스튜디오
그라운드갤러리의 15m가 넘는 벽면을 채운 스튜디오 섹션은 작가의 사고 과정을 수직으로 펼쳐 보이는 공간이다. 이불에게 드로잉과 모형은 단순한 사전 단계가 아니라 예술 실천의 근간이다. 드로잉은 현실의 제약을 넘어 상상을 확장하는 사고의 아카이브이며, 모형은 이를 삼차원으로 시험하는 실험실이다.
이번 전시에는 ‘몽그랑레시’ 연작의 초기 구상을 담은 드로잉과 다양한 재료로 제작된 모형이 다수 포함돼 있다. 완성된 대형 설치와 나란히 배치된 이 자료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아이디어가 작품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리움미술관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이불: 1998년 이후'에는 수많은 작품이 비위계적으로 접속되며 예측 불가능한 풍경을 이룬다”며 “그 풍경은 물리적이면서도 심리적이고 상상적인 여정을 가능하게 한다”면서 “관람객은 메트로폴리스의 폐허와 벙커, 타워와 거울 미로, 은빛 비행선과 가상의 공간을 횡단하며 다층적인 시공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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