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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진에 봉인한 존재와 부재의 틈…학고재, 유리 첫 개인전

등록 2025-11-21 16:50:45  |  수정 2025-11-21 17: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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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하는 것들을 뭉쳐 만든 슬픔, 2025, 투명 레진, 시든 꽃, 종이드로잉, 외할머니의 목걸이에서 나온 구슬, 아크릴, 16x4.5x24c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투명한 레진 속에서 시든 꽃이 눌리고, 드로잉 종이가 떠다니고, 오래된 구슬이 미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유리(31)의 신작 ‘잔존하는 것들을 뭉쳐 만든 슬픔’은 기억의 파편을 봉인한 ‘책’의 형태로, 남겨진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통과하며 어떤 감정의 결을 만들어내는지 조용히 보여준다.

학고재가 오는 12월 20일까지 여는 유리의 개인전 ‘투명한 고리’는 작가가 학고재에서 선보이는 첫 개인전이다. 회화와 오브제 설치 등 신작 50여 점을 통해 그가 최근 집중해온 ‘연결성’의 사유가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2018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2021년 첫 개인전을 연 뒤 다섯 번째 개인전이다.

전시 제목인 ‘투명한 고리’는 단단히 고정된 고리가 아니다. 끊어질 듯 유지되고, 흐르고 스며드는 관계의 은유다. 유리 작가가 오래 탐구해온 핵심 주제는 ‘존재와 부재의 연속성’이다.

장례식장의 초와 생일 케이크의 초가 같은 형태를 띠듯, 하나의 사물은 서로 다른 감정과 세계를 동시에 지닐 수 있다. 작가는 이처럼 이중적 의미가 교차하는 경계의 틈에 주목해왔다. 그 틈은 언제나 언어가 닿지 못하는 여백이며, 감정의 미세한 변화를 담아내는 자리다.

신작 ‘잔존하는 것들을 뭉쳐 만든 슬픔’은 이러한 사유를 가장 응축한 작품이다. 시든 꽃, 오래 쓴 드로잉 종이, 외할머니의 목걸이에서 떼어낸 작은 구슬, 사적인 기억의 조각들은 레진 속에 봉인된 순간 더 이상 개인적 파편에 머물지 않는다.

사라진 것의 그림자, 버려진 것의 질감, 남겨진 것의 체온이 투명한 표면 아래 겹겹이 침전하며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기도, 되감기도 한다. 정지와 흐름, 부재와 잔존이 같은 결 안에서 겹치는 순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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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가능성과 영원의 염원, 2025, 나무블럭에 조각 후 아크릴, 유채, 투명 레진, 빨간 실, 아크릴 물감, 실크천, 42x22x30.5cm.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에는 또 다른 신작 ‘상실의 가능성과 영원의 염원’도 포함된다. 이 작품은 조각된 나무 블록과 투명 레진, 붉은 실, 아크릴 물감 등이 결합되며, 서로 다른 재료가 층위를 이루어 하나의 다층적 신체처럼 구성된다. 형상을 이루는 선과 색, 그리고 레진 속에 봉인된 이미지의 파편들은 시간적 층위가 뒤엉킨 ‘내면의 단면도’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파괴된 조각과 재조합된 구조가 공존하며, 제목처럼 상실과 영원의 지속을 동시에 암시한다.

두 작품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태도가 아니라, 감지할 수 없는 것을 감각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유리는 “모든 관계의 근원은 부재에서 비롯된 이어짐”이라고 말해왔다. 이번 전시는 그 문장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결과물처럼 보인다. 끊어지는 대신 흐르는 고리, 사라지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남는 흔적, 언어보다 먼저 도착하는 감각, 그 미세한 떨림이 유리의 작업 전체를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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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언어들의 책 #7, 나무블럭에 조각 후 아크릴, 유채, 20.5x5x30.5cm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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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와 외부를 연결짓는 방법 2, 2025, 캔버스에 유채, 193.9x97cm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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