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가고시안은 갤러리가 아니라 은행”

등록 2025-11-05 01:01:00

신간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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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미국의 저널리스트 비앙카 보스커는 ‘잠입’의 달인이다. 와인 산업의 은밀한 세계를 파헤친 베스트셀러 '코르크 도크'로 이름을 알린 그녀가 이번엔 미술계를 향했다.

신작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Get the Picture·알에이치코리아)'는 제목처럼 장난스럽지만, 내용은 놀랍도록 진지하다.

보스커는 갤러리의 막일을 거들고, 아트페어 파티장을 어슬렁거리며, 미술관 경비원으로까지 일하며 예술의 내부로 들어간다.

그녀의 잠입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다. 캔버스를 밑칠하고, 작품을 운반하며, 조명을 설치하는 반복적인 노동 속에서 ‘작품을 보는 법’을 배운다.

작가 지나 말렉이 건넨 “작품이 보여주는 다섯 가지를 생각해 보라”는 조언처럼, 보스커는 눈앞의 감각을 하나씩 기록하며 ‘이해’보다 ‘느낌’으로 다가가는 법을 익힌다.

 그녀가 깨달은 건 명확하다. 예술은 머리로 푸는 게 아니라, 몸으로 다시 배우는 것이다.

책은 미술계를 미화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 안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가고시안은 갤러리가 아니라 은행”이라는 문장은, ‘순수’를 포장지 삼아 자본을 순환시키는 미술 시장의 현실을 드러낸다. 돈과 명성, 욕망이 얽힌 세계. 그러나 보스커는 그 속에서도 창작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작품을 많이 파는 갤러리가 곧 ‘훌륭한’ 갤러리는 아니었다. 잭이 속한 그룹에서 갤러리에 대한 최상급 칭찬은 ‘순수하다’는 표현이었다. 순수한 갤러리는 돈을 설사처럼 대한다. ‘엄연한 현실이긴 하나 끔찍하다.
설사병이 났어도 티는 내지 마라’는 식이다. 순수파는 명성을 쌓은 다음 그것을 점차적으로 화폐로 바꾸는데, 이 과정은 얼핏 보면 우발적인 듯해도 실은 고도로 계산된 절차다.
가고시안(직원 300명, 소속 작가 280명, 갤러리 공간 19곳, 추정 연 매출 10억 달러)은 순수하기는커녕 갤러리라고 부를 수도 없다. 한 작가는 가고시안을 ‘은행’이라고 비웃었다…‘알록달록한 회화 작품’은 ‘쉬운 돈벌이’의 다른 말이었고 침을 흥건히 튀기며 그런 작품을 경멸하는 사람들까지 있다."(70~71쪽)
그녀가 만난 예술가들은 불안하고, 때로는 광기에 가까웠다. 여성 작가가 “곧 엄마가 된다”는 이유로 작품을 외면당하는 장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 않는 큰 그림이 거래에서 제외되는 현실. 모두 예술이 시장의 틀에 갇혀 있는 증거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창작하고, 감동하며, 예술의 이유를 찾아 나선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초기 인류는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실로 모든 것을 무릅썼다. 지금으로부터 30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 아프리카 사람들은 노란 오커, 검은 망간 같은 안료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도 담자색 안료인 경철석을 구하겠다고 뱀, 사자, 표범, 하이에나 등등 치명적인 위협이 득시글거리는 계곡을 가로질러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다녀왔다.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그 색이 예뻐서였다.
인간은 색채를 향한 욕망 때문에 독살, 도굴, 살생을 저질렀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갓 도축한 고기의 불꽃 같은 빨간색을 얻으려고 죄수를 시켜 진사(황화 제이수은)를 캤는데, 독성이 너무도 강한 이 물질을 캐라는 건 사실상 사형 선고였다."(334쪽)

보스커는 예술의 기원을 과학과 연결짓는다. 색을 얻기 위해 맹수를 피해 수백 킬로미터를 걸었던 구석기 시대 인류의 이야기, 그리고 “예술은 삶을 압축하지 않는 장치”라는 통찰은 오래 남는다. 우리의 뇌가 현실을 단순화하도록 진화했다면, 예술은 그 단순화를 거부하고 세상을 다시 느끼게 하는 힘이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예술계의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면서 동시에 감각을 되찾는 안내서다. 예술은 어렵지 않다. 다만, ‘다시 보는 법’을 잊었을 뿐이다.

보스커는 말한다. “예술은 오로지 당신이 보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그 한 문장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우리가 작품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잠시 스파이가 된다.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새롭게 엿보는 스파이 말이다.

"고흐는 그 유명한 〈해바라기Sunflowers〉를 그릴 때 당대의 최신 안료였던 크롬산 납으로 만든 노란색 물감을 썼는데, 이 안료가 쉽게 변색된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밝혀졌다. 그래서 처음엔 밝은 노란색이었던 꽃잎이 진짜 꽃처럼 갈색으로 변했다.
1960년대에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는 형광색 줄무늬가 인상적인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그렸다.
그가 사용한 밝은 주황색, 출입 금지 구역을 표시하는 테이프 같은 노란색은 벌써 색이 바래고 있다. 한 보존사에 따르면 이 작품은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우윳빛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멋진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의 눈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변화한다. 상하고, 썩고, 내려앉는다. 어떻게 보면 벽에 붙어 있는 글은 그런 변화를 그때그때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설명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조명 속에서, 바로 이날, 바로 이 시각, 바로 이 투어에서 작품을 만나는 것임을 이제 여러분도 알 테다."(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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