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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깊은 곳, 2023, Single-channel video, stainless steel structure, polycarbonate, preserved moss, branches, artificial plants, 65" TV,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하나의 전시에 두 개의 입구가 있다. 정문을 통해 들어설 수도, 정원을 지나 후문으로 향할 수도 있다.
서울 욕산구 가나아트 한남에서 31일부터 열리는 그룹전 'The Garden of Forking Paths'는 관람자가 어느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시의 첫 장면이 달라지는 구조를 갖는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구기정의 디지털 설치가, 후문을 통과할 경우 송수민과 서동욱의 회화가 각각 전면에 배치된다.
정소영의 조각은 전시장 중심에 배치되어, 두 개의 진입 경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간과 감정의 흐름을 매개한다.
전시 제목은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동명 소설에서 따왔다.
소설 속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정원’은 시간이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모든 선택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개념을 제시한다.
4인의 작가들의 작업은 단일한 서사나 시각을 지양하고, 복수의 시간, 감정, 경험이 공존하는 현실을 다층적으로 제시한다.
◆이미지의 경계를 교란하는 시선…구기정
구기정은 실재와 가상이 혼재된 이미지 구조를 통해, 인간의 지각과 시각 시스템의 형성과정을 비판적으로 탐색한다.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깊은 곳'(2023)은 건조된 식물과 디지털 이미지를 결합한 디지털 테라리움 형식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 중심적 시선을 드러낸다. 'The Transparent Visual Apparatus'(2025) 연작에서는 LED 기판, 3D 렌더링 이미지, 모니터 등의 장치를 통해 시각 경험이 기술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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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민, 폭발과 낙서, 2025, Acrylic on canvas, *재판매 및 DB 금지 |
◆일상 속 재난의 감각을 새기다…송수민
송수민은 일상과 재난, 개인의 삶과 사회적 위기 사이의 교차 지점을 회화로 표현한다.
'Explosion and Doodles'(2025)는 아이의 낙서, 미사일 궤적, 화산재 이미지 등이 중첩된 화면을 통해 감정과 불안, 위기의 감각을 복합적으로 구성한다. 캔버스를 긁거나 사포질하는 제작 행위는 삶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새기며, 회화를 감각의 기록으로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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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욱, 서울 두 사람, 2025, Oil on canvas, 130.3 x 162.2 cm *재판매 및 DB 금지 |
◆반복과 침묵의 정서적 풍경…서동욱
서동욱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정서의 미묘한 흐름과 침묵의 상태에 주목한다.
고립된 인물들은 악기 연주나 TV 시청과 같은 단순한 행위를 반복하며 무기력과 고독의 시간을 견뎌낸다. 그의 회화 속 ‘멜랑콜리’는 단순한 우울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감정의 진동과 침묵 속에서 구성되는 정서적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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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영, 응결 2, 2023, Aluminum casting, 30 × 45 × 0.5 cm *재판매 및 DB 금지 |
◆장소와 시간의 흔적을 조각하다…정소영
정소영은 장소에 축적된 시간과 경계의 흔적을 조각의 언어로 형상화한다.
'이미륵의 거울'(2024)은 독립운동가 이미륵의 망명 경로를 따라 압록강을 바라보며 제작된 작업으로, 강의 흐름과 은거울의 반사 표면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장치를 구성한다. '응결'(2023) 연작은 컵 아래 맺힌 물자국을 알루미늄으로 주조해, 소멸과 잔류 사이의 긴장을 응고된 형태로 시각화한다.
하나의 이야기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 전시는 단일한 메시지를 제시하기보다는 관람자의 선택과 감각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되는 서사를 통해 현실의 복합성과 시간의 중첩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보르헤스가 상상한 정원처럼, 이 전시는 현실 또한 끝없이 갈라지는 길 위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킨다. 전시는 8월 24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