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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근 큐레이터로 통역된 추상 '네모'…윤형근·정상화·비니언·휘트니

등록 2025-06-12 16:07:52

리만머핀 서울서 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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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머핀 서울 '네모'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미국과 한국의 추상회화 거장들이 ‘네모’라는 단순한 도형 아래 만났다. 하지만 이 전시는 단순한 그룹쇼가 아니다.

리만머핀 서울이 한국 기획자 엄태근과 손잡고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는 동서양, 윤형근·정상화·맥아서 비니언·스탠리 휘트니라는 네 명의 작가가 연결된다.

12일 서울 이태원 리만머핀 서울서 펼친 전시 제목 ‘네모(Nemo)’는 순우리말로 사각형을, 라틴어로는 ‘아무것도 아닌 자’를 뜻한다. 이중적 의미는 이번 전시의 기획 취지와 맞닿아 있다.

엄태근 큐레이터는 “추상은 비어 있지 않다. 그 안엔 개인의 서사와 시대의 상흔이 축적돼 있다”고 했다.

엄태근은 뉴욕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큐레이터이자 평론가로, 동시대 추상회화의 언어를 한국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번역해내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는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형식 너머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리만머핀이라는 글로벌 갤러리와 함께 구현한 대형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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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 엄태근 큐레이터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네 작가의 공통점으로 "형식에 대한 치열한 사유, 정체성과 시대에 대한 성찰, 그리고 감정의 물성을 추상 언어로 변환해낸 점"을 꼽았다. 단순히 사각형을 반복하는 작업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각각의 '네모'는 한 사람의 삶, 하나의 시대, 하나의 공동체를 담고 있다.
"‘네모’는 단순한 도형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과 겹침을 통한 저항이기도 하며, 균열을 품은 침묵이며, 그 틈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고백이기도 하다. 네 개의 점이 선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형체가 이루듯, 각각의 ‘네모’, 그리고 개별적인 작품들은 하나의 구조를 이루며 보편적인 감정과 이름 없는 기억들을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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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머핀 네모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작가 네 명, 네 개의 시선
윤형근은 고통과 침묵의 시대를 거쳐온 한국 현대사의 정신적 초상이다. 그는 푸른색과 갈색을 반복해 바르며 "하늘과 땅의 문"을 그렸다. 색은 그에게 상징이자 묵언이다.

정상화는 ‘벗기고 칠하는’ 단색화의 물성 실험을 통해 추상이 갖는 물리적 저항을 보여준다. 사각형은 그에게 노동이자 수행이었다.

스탠리 휘트니는 재즈의 즉흥성과 색의 리듬을 격자 구조 안에 담아낸다. 단순해 보이는 구조 속에서 폭발하는 감각은 도시의 리듬, 혹은 인종적 삶의 진폭과 닮아 있다.

맥아서 비니언은 자신의 출생증명서, 가족 사진을 회화 안에 겹겹이 덧입힌다. 그리드는 정체성과 이력, 사회적 위치가 감춰지고 드러나는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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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머핀 네모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큐레이터의 언어로 통역된 추상
'네모: Nemo'는 작가들의 작품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 사이의 공통된 언어를 발굴하고, 그 언어가 오늘의 관람자와 어떻게 공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획자의 통역이 전시의 구조를 이룬다.

엄태근은 “동시대 추상이 단순한 미학적 운동이 아니라 감정, 기억, 사회, 정체성을 꿰뚫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전시는 8월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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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한남동으로 확장 이전한 리만머핀 서울 건물 전경.

한편 리만머핀은 1996년 라쉘 리만과 데이비드 머핀이 뉴욕에 설립한, 세계적인 갤러리로 미국, 유럽, 아시아로 지리적 확장을 도모해 왔다. 현재 갤러리는 뉴욕, 서울, 런던에 상설 전시 공간을 두고 있고 홍콩, 상하이, 싱가포르, 팜비치에도 팀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리만머핀은 새로운 시장의 성장 기회에 발맞춰 아스펜과 팜비치, 타이베이, 베이징 및 밀라노에 시즌별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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