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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에 건립된 이성자 아틀리에 ‘은하수’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내 작업을 평면에서 입체로 옮긴 것.”
남프랑스 언덕 위, 지중해가 언뜻 내려다보이는 고즈넉한 마을 투레트쉬르루프(Tourrettes-sur-Loup)에 자리한 이성자(1918~2009)의 아틀리에 ‘은하수(Rivière Argent)’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주목할 만한 현대건축물(Architecture Contemporaine Remarquable)’로 지정됐다.
이성자 화백 유족에 따르면 16일(현지시간) 오전 11시, 현지에서 공식 현판식이 열렸다. 프랑스 문화부(DRAC), 지역정부(PACA), 투레트 시청이 공동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문화·예술·외교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 아틀리에는 이성자가 직접 설계에 참여해 1993년 완공한 공간으로, 프랑스 정부가 한국 작가의 작업 공간을 공식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첫 사례다.
은하수 입구의 돌기둥 위로 'Architecture Contemporaine Remarquable'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은색 기념패가 놓였다. 지정 과정에 참여했던 지역정부 문화청 건축·유산 담당관 에브 루아(Eve Roy)와 에밀리 아비주(Emilie Avizou), 그리고 카트린 바라드(Catherine Barade) 투레트 시 부시장 등이 나와 기념패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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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 화백의 장손 신평재씨가 프랑스 문화부 대표 루아씨로 부터 기념패를 전달받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이성자 화백 유족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음과 양, 회화와 건축의 경계를 넘다
'은하수'는 원형의 건물을 반으로 쪼개 마주 보게 한 독특한 구조로, 동양철학의 음양(陰陽) 사상을 건축적으로 형상화한 공간이다.
‘양’의 건물은 해가 잘 드는 회화 작업실, ‘음’의 건물은 저녁의 판화 작업을 위한 장소로 설계됐다. 두 건물 사이에는 인공 시냇물이 흐르는데, 이는 ‘은하수’라는 이름처럼 두 세계를 이어주는 시각적·상징적 매개체가 된다.
프랑스 문화부 담당관은 “거주와 작업을 넘어서 예술 그 자체를 담은 공간”이라며 “건축과 자연, 동서양,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맥락이 어우러진 현대건축의 대표작”이라고 평가했다.
겉보기엔 간결한 현대 건축이지만, 내부에는 한국식 창호, 자개장, 목가구 등 이성자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구성이 숨어 있다. 회화의 세계관이 그대로 공간 안에 구현된, 예술과 삶의 일치를 추구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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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패 전달식이 열린 이성자 화실 은하수 내부. *재판매 및 DB 금지 |
◆‘우주의 풍경’을 품은 장소, 문화유산이 됐다
이성자의 아틀리에는 단순한 작업실이 아니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우주의 상징, 시간의 여백, 별의 흔적들이 모두 이 공간에서 비롯됐다.
프랑스 문화부의 결정은 이 아틀리에를 한 작가의 예술적 성취를 넘어, 동양과 서양, 한국과 프랑스를 잇는 상징적 장소로서 조명한 순간이다.
한국 측에서는 주프랑스 대한민국대사관 신석홍 공사가 참석해 “한불 수교 140주년을 맞아 이성자의 공간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문화교류의 상징적 결실”이라며 의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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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 화실 은하수 입구에 부착될 프랑스 문화부에서 수여한 기념패 *재판매 및 DB 금지 |
◆“단지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창작의 현장으로”
앞으로 이성자의 ‘은하수’는 단순한 보존 공간을 넘어, 전시·교육·체험이 어우러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가족 대표로 현판식에 참석한 손자 신평재 씨는 “할머니의 유산을 정적으로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태어난 창작의 정신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밝혔다.
프랑스 관광청은 은하수를 새로운 문화유산 루트의 거점으로 포함시킬 계획이며,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파리한국문화원, 이성자기념사업회 등과 연계한 국제 문화행사도 추진된다.
“나는 슬프지 않다. 내가 서 있는 곳 발끝에 내 고향이 있다.”
이성자가 생전에 남긴 말처럼, 그가 생을 마감한 남프랑스 투레트의 언덕은 이제 단지 이방의 장소가 아니라, 한국적 예술혼이 남긴 또 하나의 ‘은하수’로 새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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