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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말년의 슬픔을 껴안는 '이사라 시집'

등록 2025-05-13 18:55:31  |  수정 2025-05-13 18: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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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기억이 먼저 사라지기 전에 / 우리 / 헐렁하게 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

시집의 제목이자 마지막 시 '텅 빈 주머니처럼 헐렁하게'의 결말에서, 이사라 시인은 삶의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었던 감정 하나를 꺼내든다. 쪼그라든 뇌, 남은 기억, 그리고 더 이상 메울 수 없는 상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말한다.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 살아가고 있는 자인데.”

시집 '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출판사 강)는 198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래 40여 년을 시와 함께해온 이사라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이다. 그간 '미학적 절제'와 '억제된 슬픔'의 대명사로 불려온 시인이 이번엔 한껏 자신을 헐겁게 풀어낸다.

 누군가의 유언을 되새기며, 떠나간 이들을 조용히 배웅하며, 그리고 마침내 자신조차 “사라질 것”이라 고백하는 이사라의 시편은 삶의 말미에서 도달한 진실의 어투를 품는다.

특히 「안에서 만져지는 몽글몽글한 슬픔」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어서 / 나에게 미안해 // 겨우겨우 살아내서 미안해.”

감정을 절제하던 예전의 시인이라면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을 문장이지만, 이번 시집에서 이사라는 그 슬픔을 ‘만지고 또 만지’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문학이 나아가는 방향 중 하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예민해지는 슬픔의 결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를 ‘말년의 양식(late style)’이라 불렀다. 삶의 조화와 안정 대신, 비타협과 불협, 뜻밖의 감정과 구조로 이뤄진 예술적 시선 말이다. 이사라의 이번 시집은 그 ‘말년의 양식’이 어떻게 우리말 시 속에서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또한 이번 시집은 시인이 이전에 펴낸 '시간이 지나간 시간', '가족박물관',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등과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간다. 선형적인 시간 인식에서 벗어나, 파편화된 기억과 교차하는 감정들이 현재에 겹쳐지는 방식은 여전히 이사라의 고유한 시적 시간감각이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 흐르는 감정의 어조는 확실히 달라졌다. “너와 사는 동안 / 순간순간 / 울컥했다”고 말하고, “그게 다 사랑 때문이야”라고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그는 이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시인  이사라의 동생은 서울 이화익갤러리 대표 이화익 큐레이터다. 시집의 표지 그림은 홍승혜 작품이다. 동생이 미술을 통해 형상화하는 ‘빛’과 ‘기억’이 있다면, 언니 이사라는 시로 그것들을 붙잡는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 붙인 제목은, 어쩌면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온 자매가 공명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꽉 조이지 않고, 느슨하게, 그러나 뜨겁게 사랑하기.

하나둘 떠나고 익숙한 것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그는 말한다.
“이 틈을 메우려 애쓰며 나의 몸을 소진하지 말자.”
그러니 더 헐렁하게. 그리고 조금 더 몽글몽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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