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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에서 48년 만에 공개한 부채 그림. 김정희 절지 형식 '지란병분'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하다. 남은 먹으로 장난하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영지 버섯과 난초꽃을 꺾어다 놓고 그린 절지 형식의 부채 그림(지란병문)이다.
투박해 보이지만 '추사의 스타일'이 그대로 남아있다. 영지버섯은 짙은 먹으로 울퉁불퉁 우람하게 표현하고,난 꽃은 담묵으로 날아갈 듯 날렵하게 그려냈다. 최완수 미술사학자는 "영지와 난 꽃이 각각 두 대씩 좌우로 배치되니 철저한 음양 대비와 음양 조화의 화면 구성 원리를 실감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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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부채그림전에 선보인 김홍도-기려원류. *재판매 및 DB 금지 |
단원 김홍도(1745~1806)의 '기려원유'는 가로 78cm, 세로 28cm의 거대한 부채 그림이다. '옷은 흙 먼지와 술 자국에 찌들고 멀고 먼 유람길에 나그네 시름 풀 곳 없다'로 시작하는 '말 타고 멀리 유람하다'는 글이 써 있다. 그림 옆에는 단원 김홍도가 46세 때인 '1790년 4월에 그렸다'는 관서가 있고, 오른쪽 끝에는 강세황(1713~1719)이 같은 해 썼다는 글이 쓰여있다.
조선시대 최고 화가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와 단원 김홍도의 '부채 그림'을 비교해볼 수 있는 '선면서화도' 23점이 최초 공개됐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2025년 봄 특별전으로 펼치는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전에 선보인다. 간송 컬렉션 형성 과정을 밝히는 세 번째 전시로 올해 봄 전시는 서화의 ‘형식’에 주목했다.
간송미술관은 "2024년 봄 전시 '보화각 1938'과 가을 '위창 오세창' 전시를 통해 간송미술관의 시작인 보화각의 설립과 간송 컬렉션의 정체성을 살펴보았다면 2025년을 관통하는 주제는 간송 컬렉션의 ‘유형(형식)’으로, 이번 '선우풍월'에서는 간송 컬렉션의 방대한 서화작품 중에서도 독특한 형식인 ‘선면(扇面) 서화’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밝혔다.
"부채는 여름을 견뎌내는 일상 생활용품으로 여겨지지만, 우리 선조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였다. 이상적인 인물과 아름다운 산수, 다양한 동식물을 그려 넣어 풍류가 되기도 했고, 친밀한 벗과 정담을 나누는 서신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부채는 풍부한 문학적 언어와 아름다운 그림이 담겨있는 예술품인 동시에, 이번 전시의 제목처럼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이기도 하다."
그동안 국보 보물을 쏟아내며 전시때마다 관객몰이를 해온 간송미술관의 올해 봄 전시는 국보나 보물 없이 잔잔한 분위기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전영우 이사장은 "1977년 5월 부채를 중심으로 선면 전시가 열린 바 있었지만 흑백 도판의사용, 작품 해제의 부재 등 선면 작품에 관한 정보가 제한되어 아쉬움도 많이 남았었다"면서 "이번 전시에 소개하는 유물들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총 133점의 선면 서화 중에서도 조선과 근대미술의 역사를 수놓은 54건 55점의 대표작품들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여러 인물의 풍부한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유물들로 이루어졌다"며 '부채는 계절을 타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선조들에게는 하선동력이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부채를 선물하여 시원한 바람으로 무더위를 물리치도록, 겨울에는 달력을 선물하여 새롭게 다가오는 한 해를 계획하도록 계절 선물을 주고 받았던 풍속을 말합니다."
전인건 관장은 "그 중에서도 여름 생색에는 부채라는 말이 있듯이 여름 선물로 사랑받은 부채는 단순히 실요적인 기능을 넘어 글씨와 그림을 넣음으로써 소유자의 품위와 위상을 드러내는 미술품이 되기도 했다"며 이른 더위가 시작되는 계절,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 전시에서 부채에 담긴 아름다운 선면 회화를 감상하며, 마음에 청아한 바람이 깃드는 여유를 느껴보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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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부채 그림과 부채 글씨를 통해 간송 걸렉션의 서화를 '형식'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특별전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 기자간담회를 7일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갖고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5.04.07. [email protected] |
◆반세기 만에 만나는, 간송미술관 부채 展
이번 전시는 1977년 5월 간송미술관 개관 6주년 기념으로 열렸던 부채 전시 이후, 48년 만에 개최되는 선면(부채) 서화 특별전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당시에는 선면 서화 48점만이 공개되었고, 흑백 도판과 낙관 및 제화시 판독 위주의 도록으로 제작되어 컬렉션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후에도 부채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지 않았던 연유로 간송 컬렉션 속 선면 서화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최초 공개 23점, 추사 김정희와 단원 김홍도의 선면서화
간송미술관은 이번 전시에서 소장하고 있는 총 133점의 선면 서화 중 엄선된 54건 55점의 대표작품을 처음으로 해제하여 선보인다.
이 중 23건 23점은 최초로 공개되며, 대중에게 친숙한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우봉 조희룡의 부채 그림과 글씨를 비롯해 오세창, 안중식, 조석진 등 근대 서화 거장들의 작품도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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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부채 그림과 부채 글씨를 통해 간송 걸렉션의 서화를 '형식'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특별전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 기자간담회를 7일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갖고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5.04.07. [email protected] |
◆조선과 청조의 선면화…청대 여인들 규방 문화도 소개
전시가 시작되는 2층 전시실에서는 조선과 청대의 선면화 총 24건 25점을 소개한다. 조선 후반기 회화의 경향과 흐름을 보여주는 산수화, 사군자, 화훼영모화 등 다양한 화목의 조선 선면 서화가 전시되어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두루 전한다. 더불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한 추사학파(秋史學派)와 인연을 맺은 청나라 문사들의 그림과 글씨, 그리고 청나라 여인들의 규방 문화를 보여주는 작품들도 함께 선보인다.
2층에는 냉금지(冷金紙)로 꾸며진 빈 선면편(扇面片) 1건 1점을 시작으로 조선의 선면 서화 14건 14점, 중국의 선면 서화 9건 10점이 진열된다. 냉금지는 금이나 은, 놋쇠, 구리 등의 금속조각을 붙여서 장식한 종이다.
◆조선 선면 서화 총 14건 14점 중 6건 6점 최초 공개
19세기 문인화가 진재(眞齋) 한용간(韓用幹, 1783~1829)이 중국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경관을 옮겨 그린 <서호육교(西湖六橋)>와 혜천(惠泉) 윤정(尹程, 1809~?)이 중국 강남 지방의 절경을 담은 '삼오팔경(三吳八景)' 산수화는 모두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두 작품은 조선 문인들이 꼭 가보고 싶어 했던 중국의 명승을 부채에 재현하고 향유했던 문화의 한 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인과 서화가 간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 부채 제작 현상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18세기의 문인화가 단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이 그림을 그리고 지기(知己)인 공보(功甫) 이양천(李亮天, 1716~1755)의 시를 적어 자신의 벗인 백효(伯孝) 홍낙순(洪樂純, 1723~1782)에게 선물하기 위해 제작한 '추색소단(秋色蕭壇)'이 그 예로,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작품이다.
한편, 19세기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고 불린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화풍이 변화되는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배치된 작품도 흥미롭다. 그의 묵란화가 크게 변하게 되는 전라도 유배 이후 시기에 그려진 '분분청란(芬芬靑蘭)'을 앞서 제작된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짙게 받은 '난생유분(蘭生有芬)'과 함께 진열하여 조희룡의 묵란화 변화 과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2층에 함께 전시되는 중국의 선면 서화는 대부분 추사학파에 속하는 인물들과 묵연(墨緣)을 맺은 청나라 문사들 간 증답(贈答)의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총 9건 10점 가운데 7건 8점이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 공개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청나라의 저명한 문사 성원(星原) 옹수곤(翁樹崐, 1786~1815)이 조선의 문신 심상규(沈象奎, 1766~1838)에게 보낸 '연연분록(年年分綠)'(1813)과 청나라 조정 관료인 여관손(呂倌孫, 1811~1858)이 이상적의 인품과 학식을 높이 평가하며 증정한 '채란(彩蘭)' 등이 있다.
청나라 여인들이 부채를 통해 서로의 시사(詩詞) 문학을 공유하는 규방 문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들도 있다. 금색 종이에 단정한 해서체로 적은 원추여사(畹秋女史, 연대미상)의 '제허전(帝許專)'과 중국 여인 100명을 소재로 한 몽화여사(夢花女史, 1841~?)의 오언절구 연작시를 담은 '백미인시(百美人詩)'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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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부채 그림과 부채 글씨를 통해 간송 걸렉션의 서화를 '형식'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특별전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 기자간담회를 7일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갖고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5.04.07. [email protected] |
1층 전시실에서는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되는 근대 선면 서화 29건 29점을 선보인다.
첫 번째 유형은 20세기 초 근대 서화계의 기반을 다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인 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 활동했던 서화가들의 작품 25건 25점이다. 이 중 6건 6점은 최초 공개 작품이다.
작가들이 전형필에게 선물한 작품도 볼 수 있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간송과 교유했던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1875~1953), 향당(香塘) 백윤문(白潤文, 1906~1979), 제당(霽堂) 배렴(裵濂, 1911~1968),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 1921~1993)가 전형필에게 선물한 4건 4점의 작품들이다. 간송 전형필이 당대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맺었던 깊은 인적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 각 서화가의 당시 서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오는 9일부터 5월 25일까지 간송미술관에서 열린다. 매일 2회 운영 되어온 전시 작품 설명 사전 도슨트 프로그램을 3회로 확대하여 운영한다. 관람료는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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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 2025년 봄 전시로 부채그림전을 여는 간송미술관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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