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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스미스소니언 미술관∙박물관 중 가장 마지막에 개관한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전경. 바로 옆으로 미국의 상징인 워싱턴 모뉴먼트가 보인다.] *재판매 및 DB 금지 |
[워싱턴=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미술관 정원은 늘 가득 차 있다. 미술관에 들르지 않더라도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야외 전시장으로 곧잘 활용된다. 만약 그 공간이 비어 있다면 이 또한 특정한 의도가 있게 마련이다. 이 미술관 앞마당엔 흔한 조각 하나 없다. 대신 누구나 앉아 쉴 수 있는 낮은 돌의자와 버지니아 참나무(Live Oak)가 이곳 저곳에 심어져 있다. 미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엔 버지니아 참나무가 있었다. 그래서 ‘증인 나무’(witness trees)라고도 불린다. 스미스소니언 미술관∙박물관 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의 풍경이다.
◆1915년 시작…2016년에 결실
‘미국 흑인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처음 대두된 것은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5년 미국 흑인 시민권자들이 현재 미국 역사에서 흑인의 기여를 기리고 알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16년엔 이를 바탕으로 의회에 청원이 이뤄졌고, 1929년 칼빈 쿨리지 대통령이 박물관 건립을 허가했다. 민간에서 50만 달러를 모으면 국가에서 5만달러를 지원해주겠다는 계획도 함께 발표됐다. 그러나 대공황과 함께 찾아온 경제침체에 건립계획은 흐지부지 되고 만다. 이후 1980년대에 미키 릴랜드, 존 루이스 하원의원이 참여해 매 회기마다 박물관 건립계획을 제출하고, 마침내 스미스소니언 재단에서 2016년 미술관을 개관했다.
박물관 하나를 놓고 100년 넘는 줄다리기가 있었던 셈이다. 장고 끝에 탄생한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은 워싱턴 D.C. 내셔널 몰에서도 워싱턴 모뉴먼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워싱턴 모뉴먼트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들를 수 밖에 없는 위치다. ‘Black lives matter’(흑인도 중요하다)운동을 들지 않더라도 미국정부가 인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건국과정에서 흑인의 기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기린다는 의미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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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1929년 건축가 E. R. 윌리엄스가 제안한 미국 흑인 박물관 빌딩 모형. *재판매 및 DB 금지 |
◆노예선에서 버락 오바마까지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중간적 형태다. 우리는 박물관/미술관을 나누고 다루는 영역도 다르지만 영어권에서는 ‘뮤지움(museum)’ 하나로 표현한다. 미술작품만을 선보이는 곳을 ‘fine art museum’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않고 있다.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은 그 이름처럼 역사와 문화 전체를 아우른다. 6개층인 박물관은 지하에서 위로 올라가며 관람할 수 있도록 동선을 안내하는데, 노예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온 아프리칸들의 삶을 사료로 살펴보면서 마지막엔 흑인 음악, 대중문화, 시각예술까지 이어진다. 과거에서 시작해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구조다.
과거를 다루는 지하전시장은 미국 흑인의 역사를 따라간다. 배에 실려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경로, 물건을 적재하듯 사람을 차곡차곡 쌓아 날랐던 노예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해 살아남은 흑인들에게 펼쳐진건 삶이 아니라 삶보다 못한 환경이었다. 면화농장이나 사탕수수 농장 등 대규모 플렌테이션에 동원된 것이다.
초창기 미국이 유럽과 무역하며 부를 쌓을 수 있었던 데에는 노동 가치가 한없이 ‘0’에 수렴하는 노예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미국 흑인들이 그나마 나은 대우를 받기 시작한 건 두 번의 전쟁이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통해 군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민간 봉기와 그 때마다 이뤄진 국가의 진압, 시간이 흘러 수정헌법이 만들어지고 참정권이 보장됐고 마침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꽉 짜여진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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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David Hammons, African-American Flag 전시 전경. 1990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블랙 USA’전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으로 흰색, 빨강, 파랑을 사용하는 미국 국기를 빨강, 초록, 검정으로 바꾸었다. 검정색으로 바뀐 흰 별은 백인과 흑인으로 읽힌다. *재판매 및 DB 금지 |
◆‘미국흑인다움’이란 무엇인가
지하가 ‘역사’에 집중했다면 지상 전시장은 ‘문화’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미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해, 이곳을 고향으로 삼은 ‘미국 흑인’들의 정체성이 그 중심 테마다. 오프라 윈프리, 마이클 조던, 루이 암스트롱, 윌리엄스 자매 등 스타들을 위시해 ‘흑인다움’이 공유하는 가치-희망, 신앙, 회복력-를 강조한다. 시각예술 섹션에서도 이 같은 시도는 이어진다.
현재 기획전은 ‘심판: 항의, 저항, 회복력’(Reckoning: Protest. Defiance. Resilience)으로 내년 여름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사진, 회화, 조각 등 100여점 흑인 작가 작품을 통해 미국에서 계속되는 인종차별, 억압 시스템을 살펴본다. 헌법에 명시된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누리기 위해 거리에 나섰던 행동이 사진으로 남았고(Zun Lee, Black lives matter), 체포되어 찍힌 머그샷을 섬세한 콩테 스케치로 담아냈다(Thomas Lava, Euretta F. Adair). 현 사회는 섬유 한 가닥처럼 힘없고 약한 이들이 무쇠처럼 강하고 힘있는 이들을 지탱하고 있음을 꼬집는가 하면(Barbara Chase-Riboud, Tantra 1),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인 미국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흑인들의 희생도 있었음을 성조기의 흰 별을 검은 별로 대체해 은유한다(David Hammons, African-American Flag).
박물관은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은 ‘심판의 시기’로 불린다. 조지 플로이드와 다른 흑인이 경찰의 손에 사망한 사건을 목격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시위로 이어졌고, 이는 미국인 모두의 일상에 영향을 미쳤다”며 “전시는 우리가 잃은 이들을 추모하는 한편 반항에서 수용으로, 애도에서 희망과 변화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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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명상정원 전경.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주는 시각적 쾌적함에 물소리가 더해져 명상을 이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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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로비에 걸린 라시드 존슨의 회화 ‘Bruise Painting Message to Our Folks’(2023). *재판매 및 DB 금지 |
◆아픈 역사를 목격한 그 나무
억압과 저항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고 나면 한동안 강력한 이미지들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지하에 마련된 ‘명상정원’(contemplative court)에서 쏟아지는 물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명상(을 가장한 멍 때리기)을 하고 나서야 로비와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엘리베이터 위 빈 공간엔 하우저앤워스의 전속작가 라시드 존슨(47)의 대형 회화가 걸려있다. 작가의 대표작인 멍(bruise) 그림 시리즈로 반복되는 격자 안에 크게 뜬 눈과 직사각형 입을 가진 추상적 인물이 반복된다. 2020년 코로나19 봉쇄와 BLM운동에 대응하며 탄생한 이 시리즈는 급변하는 사회가 내포한 불안과 불확실성 안에서 성찰과 치유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메인 입구엔 워싱턴 D.C.에 기반을 둔 추상 거장인 샘 길리엄(Sam Gilliam)의 작품도 걸려있다.
밖으로 나서면 미국의 상징으로 꼽히는 워싱턴 모뉴먼트가 보인다. 서쪽 하늘을 향해 찔러 넣는 형태의 탑은 국가가 생기던 시절 서쪽 개발을 향한 의지를 다분히 담고 있다.
박물관 건물의 외관엔 3단 패널이 감싸고 있는데, 패널의 문양은 루이지애나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흑인 노예 장인이 만들었던 철제공예품에서 따왔다. 패널 뒤로 보이는 워싱턴 모뉴먼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누군가의 아픈 시간을 담보했음을 분명히 한다. 정원엔 풀과 나무만이 자리잡았다. 박물관은 벽을 쌓아 영역을 나누고 메시지를 담은 조형물을 놓는 대신 내셔널몰의 드넓은 잔디와 연결성을 택한 것이다. 이곳의 나무는 버지니아 참나무로 불리는 라이브 오크다. 미국 남동부 해안이 원산지인 라이브 오크는 겨울에도 그 잎이 지지 않아 ‘라이브’(live)라는 이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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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
수 세기 전 노예였던 미국 흑인들은 라이브 오크 아래서 휴식을 취했고, 회의와 종교 예배를 위한 모임장소로 쓰였다. 남북전쟁중 메리 스미스 피크(Mary Smith Peake)는 흑인들의 교육을 금지하는 버지니아 주 법에도 불구하고 라이브 오크 아래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버지니아 햄프턴 대학교의 출발이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의 존스섬에 있는 ‘엔젤 오크’는 미시시피 동쪽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꼽힌다. 높이만 65피트(약 20미터)에 달해 그 나이를 짐작케 한다. 1910년과 20년대 민권운동가이자 교사였던 셉티마 클락(Septima P. Clark)은 학생들을 데리고 유색인종이나 백인 모두 방문할 수 있었던 ‘통합 장소’인 엔젤 오크로 현장학습을 떠나기도 했다.
‘증인 나무’(witness tree)라는 단어가 있다. 미국의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사건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이는 나무에 붙이는 명칭이다. 수령은 기본 수백년, 총 몇 그루가 있는지 정확히 집계 되진 않지만 일부 증인 나무는 ‘증인 나무 보호 프로그램’에 포함돼 의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제 박물관 앞의 라이브 오크는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의 변화를 또 목격할 것이다. 두 번째 트럼프 정부가 예정된 2024년 가을,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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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미국의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사건을 목격한 증인나무 ‘라이브 오크’. 같은 수종이 박물관 정원에 자리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