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억 불렀던 그 청년, 신홍규 "뉴욕서 한국작가 발굴 보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스물일곱살 청년은 거침없다. 세계미술시장 한복판 뉴욕에서 '젊은 갤러리스트'이자, 아트바젤, 아모리쇼 등 세계 유명아트페어에서 VVIP로 대접받는다. "불과 3년만에 모든 스토리가 다 써진셈이죠" 2013년 뉴욕 맨해튼에서 3개의 신갤러리(shin-gallery.com)를 운영하고 있는 신홍규 대표다. 지난달 31일 서울에서 만난 그는 "3일전에 생일이 지나 미국나이로 26세가 됐다"고 했다. 소년같은 앳된 모습이 보였다. 최근 아트바젤홍콩을 관람하고, 한국을 방문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거나, 대학원에 다니거나, 취업에 성공한 신입사원정도쯤 되는 나이다. 그의 말처럼 '3년만에 써진 이야기'. 어떻게 미국에서 유명해지고, 미술시장에서 대접받는지, 일단 그 배경을 먼저 소개한다. (그는 이 이야기를 하지않았다. 자신의 '자서전에 쓰겠다'며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선 알려주지는 않았다.) '신홍규'라는 이름 석자가 떠오른건 2015년 11월 9일이다. 이날 한화로 1972억원에 팔려 세계 미술품경매 최고 낙찰가 2위에 오른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때문이다. 당시 뉴욕 록펠러 플라자에서 열린 크리스티경매는 뜨거웠다. '누워있는 나부'에 7명이 경합하며 예상가인 1158억원을 훌쩍 뛰어넘었는데, 누군가 1623억(1억4000만달러)를 불렀다. 경매장은 잠시 깜짝 놀란듯 숨을 죽였고, 젊은 청년, 그가 새주인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다시 1억7040만달러(1972억원)를 전화로 부른 중국인 컬렉터 류이첸이 작품을 낙찰받았다. 판세가 뒤집혔지만, 작품값을 올리며 숨죽이게한 젊은 청년에게 집중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그 청년을 밝혀냈다. 뉴욕의 젊은 미술품 딜러로 알려진 한국인 청년 신홍규였다. 이미 지난 2013년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경매에서 1억 달러를 불러 경매사에서 주목받고 있던 그는 모딜리아니와 WSJ덕에 뉴욕 미술계에서 '한국인 청년 아트딜러'로 유명해졌다. 진심이든 허세든 어쨌든 '배짱'전략이 통한 셈이다. '재벌집 자식이네', '스폰서가 있어 대행만 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1600억, 정말 구입하려고 했던 것이냐고 묻자 "그 이야기는 자서전에 쓸 것"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이 이야기가 담긴 책은 이미 쓰고 있고 올해안에 나올 것"이라면서 이 책은 자신이 정한 목표중의 하나라고 햇다. 자신이 살아온 첫번째 이야기를 25세에 내고, 두번째는 50세에 내겠다는 것이다. 타깃이 분명하면 흔들림이 없다고 했던가. 지난 3년간 뉴욕 미술계에서 주목받아온 덕분인지 자신감이 넘쳤다. 울산 출신으로 어릴때부터 명화수집을 했다. 중학교때부터 '우키우예 판화'를 수집하다 만난 이준 리움부관장과는 아직도 친분을 유지한다고 했다. 고등학교때 미국으로 유학왔고, 이후 미국 댈라워에이 대학에서 미술품복원을 전공, 2015년 졸업했다. 아트딜러, 갤러리스트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하면 저것보다 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학 2학년때인 어느날 첼시거리를 걷고 있었다. 수많은 골동품이 즐비한 벼룩시장을 보며 지나갔다. 어릴적부터 명화를 봐오고, 대학에서 복원을 공부하고 있어서인지 작품의 기법과 관리상태가 눈에 띄었다. 그러다 한 갤러리에 들어갔다. 작품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엘 그레코 회화, 로트렉 드로잉보다 비싸다니…'. "현대미술품값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젊은작가들이 많이 활동하는 맨하튼 로우이스트사이드로 갔다. 60여평 공간에 신 갤러리 간판을 달았다. "부모님이 보증을 서 3억을 대출받았어요." 한국인으로서 한국작가를 발굴하겠다는 의지가 쎄졌다. '좋은 작가'가 있다는 일본으로까지 날아가 현경 작가를 발견했다. 홍콩크리스티 스타작가 김동유 작가의 제자였다. 패션을 공부하러 일본에 유학온 현경은 교토시립예술대학 대학원 미술연구과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박사까지 마친 후였다. 모리미술관 큐레이터에 뽑혀 샌프란시스코 전시에 참여할 정도로 유망주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면 어떻겠냐". 신 대표의 배짱이 시작됐다. 느닷없는 제안이었는데 현경 작가도 받아들였다. 기세등등하게 뉴욕에서 펼친 현경의 개인전은 의외였다. 유명 평론가들이 매체에 글도 썼는데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아트페어도 갔다. 한점도 안팔렸다. "반응은 좋은데 판매가 안돼요. 한점도 안팔리니 다시 포장해오려니까 너무 슬프더라고요." 당시 대학교 2학년 학생이기도 했던 신대표는 대학 수업도 해야할 처지여서 시간은 금쪽같았다. "왜 판매가 안돼지?"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작가 작업실도 따로 없었다. 갤러리 지하 미팅룸이 작업실이됐다. "현경작가가 3개월간 미친듯이 작업했어요. 5점이 나왔는데 이 다섯점이 현경작가는 물론 신갤러리를 살리게 됐죠." 사텐이라는 천을 전기 인두로 녹이고 겹치고 녹이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평면작업은 회화라기보다 조각에 가깝다. 작품에 드러나는 얼굴형태는 슬픔, 기쁨, 즐거움 등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데 어우러진 샤머니즘적인 에너지를 전해 작품을 보고 눈물흘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레이디 가가와 함께하는 프로듀서들이 현경작품을 본후 콜라보레이션전이 열렸고, 이후 작품은 날개를 단다. 프레드릭 와이즈만 아트파운데이션, 브룩클린 뮤지엄 등에서도 구입해갔다. 현경의 작품값을 올리게 된것도 신대표의 도박같은 배짱이 움직였다. 소더비 경매에 출품했다. 추정가 1만5000불이었던 작품은 5만불에 팔렸고, '동양에서 온 여자 작가'작품이라는 매스컴보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 한점은 그 경매에서 구입을 못했던 타이완 컬렉터(아시아 작품을 수집하는)가 갤러리에 와서 직접 구매해갔다. 이후 현경 작가는 유명세를 탔고, 미국 뉴욕미술계의 유망 작가로 활동판을 넓혔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한국 작가'를 발굴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해졌다. 2년전 미국에서 서울 종로의 한 작업실을 찾아왔다. 5평짜리 공간, 그곳에서 젊은 작가가 미친듯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린다'는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근민 작가(33)였다. "그림은 기괴했지만 제 마음을 움직였어요. 그 자리에서 드로잉이 얼마냐고 하자 5만원이라고 하더군요. 한국에서는 이런 그림 안좋아한다면서." 드로잉 3점을 15만원에 산후, 그에게 물었다. "뉴욕에서 전시하지 않을래요?" 정신착란증세가 있어 매일 약을 먹고, 환각상태에서 본 기억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그의 작품은 뉴욕에서 기를 폈다. 지난 3개월간 연 전시는 아트포럼지에 소개되며 화제가 됐다. 특히 현경 작가로 주목받은 후여서 신갤러리의 전시기획은 뉴욕 매체에서 자주 다뤘다. 이근민 개인전은 드로잉 퍼포먼스 쇼 형태의 전시로 선보였다. 7m 벽에 종이를 붙여놓고 날마다 그려나가는 작업과 전시분위기에 "앤디워홀, 바스키야가 작업하는 것 같은 모습"이라는 평을 받았다. 완성된 작품은 아모리쇼에 출품해 판매했다. 작가들도, 신대표도 신이났다. 신 대표는 자신의 '특별한 직감'을 믿는다. "정말 좋은 작품앞에 가면 가슴이 뛴다"면서 현경과 이근민의 작품도 특별함이 있었다고 했다. 무명의 젊은 작가를 발굴하며 '나비효과'까지 누린 그는 3곳의 전시장을 내고, 다양한 장르로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뉴욕미술계에서 독특한 전시기획으로 평론가들의 눈길도 사로잡고 있다. 지난해에는 'Salon de Mass-age'라는 이름을 내걸고 마사지업소처럼 전시장 내부를 꾸민 뒤 홍보해 아트넷 등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젠 아트포럼 아트넷 월스트리트저널 등에서 한달전부터 연락이 와요. 무슨 전시를 하느냐고." 절로 된 것은 아니다. 처음엔 세계 유명 매체에 무작정 메일을 띄었다. 한국에서만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작가 발굴도 중요하지만, 큐레이션을 어떻게 하느냐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에요. 전 틀을 깨뜨리면서도 재미을 추구합니다." 뉴욕미술계에서 주목받은 후 디카프리오 등 유명 배우나 세계적인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행보도 넓어지고 있다. 그는 미국 중국의 작가들이 확장되는 것은 커넥션의 힘이라고 봤다. "작가와 갤러리스트들은 서로서로 추천도 하면서 상생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해나갑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은 좀 다르다고 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뚝 끊긴다"며 발전안보다는 '이것아니면, 저것이다'는 극단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트페어에서 VVIP로 초대받아 굵직한 미술품도 수집한다는 그는 "세계적인 아트페어나 미술관 파티에서 한국인 컬렉터는 볼수가 없다"면서 "아트페어에 오면 VVIP컬렉터들은 작품을 선점하기위해 리스트를 보느라 수다떨 시간은 많지 않다"고 했다. 그는 작가와 함께 여는 전시가 무엇보다 즐겁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전시를 할수 있을까. 새로운 작가는 어디 있을까'가 늘 고민이다. 지난주 한국에 와 홍익대에서 특강을 했는데 "한국은 젊은 작가가 살아가기 어려운 분위기"라는걸 느꼈다면서 한국 화랑이 왜 젊은 작가를 발굴하지 않는지, 단색화로만 쏠려있는 미술시장이 의아하다고 했다. 그는 강의에서 "젊은 우리끼리 뭉쳐야 한다. yba가 스타트한 것처럼, 꿈을 크게 가져달라고 했다"면서 "우리가 미래다' 혼자서만 하면 안되는 세상"이라고 했다. 친구와 경쟁하는 것은 좋지만 팀이 되어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라고 조언했다는 것. '미술품의 의사'가 되기위해 '미술품복원'을 공부했지만 이제 그는 '세계적인 갤러리스트'를 꿈꾼다. 리움미술관을 보면서 '호텔 로비'같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는 무겁고 권위있는 미술관보다 스토리가 있고 재미있는 미술관, 살아있는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보였다. 이미 계획을 세웠다. 40세에 한국 경주에 레지던시가 있는 미술관을 짓겠다고 했다. "해외의 인맥을 활용해 30대 스타작가들을 경주로 오게할겁니다. 외국의 핫한 작가들이 한국에서 작업하며 강연도 하고 프로젝트도 해, 결국 한국의 작가를 세계에 알리는 허브를 만들계획입니다." 특히 "서울작가뿐만 아니라 지방작가들도 교류할수 있게 고여있는 물들을 순환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미술판에 뛰어든지 3년, 겁없는 청년의 질주가 이어질지 주목되고 있다. 현경, 이근민에 이어 뉴욕에서 새롭게 날개를 필 새로운 작가는 누가 될까. '젊은 피'답게 그는 '하면된다'는 사심없는 무대포 정신이 강하다. "왜요?. 제가 해봤고 해냈기 때문이죠." 두려움없이 행동하는 그의 열정이 운명의 만남을 주선하고있다. hyun@newsis.com 2016/04/04
'실그림' 손인숙 작가 "한국에선 반대했지만 파리에서 환대 "'한국 자수의 문화적 침략'이다" 지난해 9월 프랑스 르몽드신문 문화면에 한국에서 온 전시가 대서특필됐다. 프랑스 파리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전시된 '실그림 작가' 손인숙(64)의 작품때문이었다.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된 이 전시는 프랑스인들을 매료시켰다. 유럽에서 가장 큰 동양미술관으로 콧대높은 기메박물관은 이례적으로 지하철역마다 '실 그림'전시 현수막을 잇따라 내걸고 적극 홍보도 펼쳤다. 기메박물관은 이집트 종교와 고미술품, 그리고 아시아 국가를 소재로 1889년 설립됐다. 이곳 한국관에는 소더비 경매에서 13억원에 팔린 고려시대 작품 '수월관음도' 등이 전시돼있다. 전통자수 기법으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손인숙의 '실그림'작품은 '한국 여인의 엘레강스-신비스러움'을 프랑스에 선사하며 화제가 됐다. '꼭 봐야할 전시'로 꼽히며 '독창적이고 아름답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지난 3월 17일까지 6개월간 이어진 전시는 다시 러브콜을 받았다. "우리도 전시하고 싶다"며 프랑스 니스에 위치한 동양미술관이 작품을 잡았다. 기메박물관에서 전시된 250점 그대로 니스 동양미술관으로 옮겨 오는 5월부터 프랑스 남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해외에서 먼저 알아보고 있다. '자수의 품격'을 높이고 금의환향한 '실그림 작가' 손인숙씨를 서울 개포동 예원 실그림문화재단에서 만났다. "서른아홉살때 이사온 아파트에요. 이곳에서 수행하듯 작업을 한 곳이기도 하죠" 60여평 아파트에 둥지를 튼 예원 실그림문화재단 전시장에 들어서면 깜짝 놀란다. 한땀 한땀 '실로 그린 그림'은 상상 그 이상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수'의 모습이 아니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기본, 거대한 산수화처럼 펼쳐진 10폭 병풍과 자개빛깔처럼 수를 놓은 옷장까지 익숙한 자수의 개념을 깨트린다.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작품을 만들수 있을까." 작품을 보고 매료된 이기수 전 고려대총장은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았다. 이 이사장은 "이런 작품이 5000여점이나 있다고 해 더욱 감동 받았다"고 했다. '알파고 시대', 바늘에 실을 꿰어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60년간 욕심안내고 작업만 해왔어요. 고통스럽지않았냐고요?. 힘은 들었지만 고통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7살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 덕분이다.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어머니는 '전인교육'의 선봉자였다. "그림을 그려도 나만의 그림을 그리게했지요. 항상 칭찬했어요. 잘못됐다고 야단치지도 않으셨죠." 10살때부터 바늘을 잡았다. '실로 그리는 그림'에 미쳤다. 뒤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십장생도, 병풍등으로 꽃피는 자수는 세월이 갈수록 시공간을 초월했다. 이화여대에 '자수과'가 있다는 것도,어머니를 통해서였다. 72년도에 자수과에 입학한 후에도 작업 욕심은 하늘을 찔렀다. '풍경화'과제가 나오면 남들이 1점 할때 20점을 했다. 당시 표구를 맡기면 동산방화랑 박주환 사장은 "이 학생은 큰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어린시절부터 어머니는 나중에 '문화가 힘'이 되는 세상이 된다고 하셨어요." 손 작가는 어머니의 말을 직심으로 들었다. 대학 졸업후 개인전도 잇따라 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욕심내지 말라, 창작하는데 영혼을 다하라. 교수도 하지말고 인간문화재하지도 말라." 는 말을 깨달았다. 마흔때부터 몰두하고 칩거했다. 수틀은 우주였다. 고통을 바늘에 꿰어서 한땀 함땀 꿰어 그려나갔다. 특정시대나 화풍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손끝에서 나오는 '손인숙표' 예술로 점점 진화해갔다. '기회는 준비된자에게 온다'고 했다. 환갑이 지나 열린 프랑스 전시는 우연히 시작됐다. 2013년 겨울,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피 마카리우 이사장과 프랑스 장식미술관 올리비아 가베 관장이 한국에 왔다. 한불 전시기획자이자 실크로드 한불대표이사인 김효정 박사가 자리를 주선했다. "좋은 작품이 있는데 한번 보러가자". 둘은 "그럼 딱 30분만 보자"라고 했다. 리움· 대림미술관에 갈 계획이었다. 자수, '실그림'을 본 두명의 외국인은 이후의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오전 9시30분에 들어와 오후 4시에 나갔다. 마카리우 기메박물관 이사장은 "다른 곳에서 이런걸 봐본적이 없다"며 극찬했다. 특히 자수로 그려나간 산수화 병풍 앞에서 “이건 사람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움직인 것 같다. 빛을 잡아다가 밀어 넣은 것 아니냐”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파트 전시장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소피 마카리우 이사장이 말했다. "전시 한번 해봅시다." 다니엘 올리비에 전 주한 프랑스 문화원장이 징검다리가 됐다. 작품을 본 그도 '실그림'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올리비에는 "자수도 모르고 미술작품도 많이 알지못하지만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느꼈다"면서 "주한 문화원장으로서 한국 작가를 발굴하고 후원하는게 내 역할이고 소명"이라고 후원자로 나섰다. "한국의 많은 작가들이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를 하는데 민간인들의 교류는 많지 않았지요. 한국민들이 갖고 있는 성품과 삶을 프랑스에 알려주고 싶었지요."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생겼다. 민간교류 차원에서 지원을 받기위해 정부에 후원을 요청하면서다. '한불 상호교류의 해' 조직위원회에서 '중국 자수'라고 반대했다는 것. 다니엘 원장과 소피 이사장은 당황했다. "중국자수? 한국자수" 우리는 모른다. '미인도'를 새롭게 볼수 있게 한 한국의 전통문화 자수를 예술로 승화한 한국 여인의 규방문화를 알리고 싶다"며 전시를 추진했고, 결국 다니엘 전 주한 프랑스 문화원장이 한불수교 130주년 공식행사 인증을 따냈다. 김효정 박사는 "프랑스측에 정말 감사했다"면서 "손인숙의 작품을 통해 조선시대 여인들의 삶, 이전과 삶과 현대의 삶을 보여주는 '한국의 안방'을 타이틀로 전시를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옛 귀족의 저택을 개조한 기메박물관에서 전시는 병풍 걸개 장식 복식 노리개 보자기등으로 웅장하면서도 화려하게 한국여인의 삶과 문화를 한눈에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작품이 한국을 떠나기까지 정작 작가는 마음 고생을 했다. "프랑스 전시에 갈 생각을 안했었다"는 작가는 "어머니 다음으로 숙제를 풀어준 사람이 이기수 전 고대총장"이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이 된 이기수 전 고대총장은 "안가면 안된다. 후원받게 해주겠다"며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한·불수교 130주년 특별전을 성황리에 마치고 온 다니엘 올리비에 전 주한 프랑스 문화원장은 "손인숙 작품은 한국적이고 여성적이다.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적인 감각을 느꼈다"면서 "어제에도 맞출수 있고, 미래에도 뭔가 줄수 있는 영감을 주는 '영원성'이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자수'가 그냥 '자수 정도'가 아닌 이유다. 보는 순간 중독세를 보이는 작품은 실을 통해 오늘을 재현하고 미래로 나아간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손인숙 작가를 '전통 장인'이 아닌 '예술가'로 평가한다. 한땀 한땀 실로 꿴 풍경화 산수화는 본을 떠 그린 게 아니다. 새로운 창조가 들어가 있다. '자수'와 다른점이다. 붓대신 바늘과 실로 그린 그림이다. 색색의 실로 그린 그림이어서 더욱 신비롭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실의 꼬임도 다르다. 마치 빛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반짝인다. '실로 그린 그림'만 있는게 아니다. '손인숙 표', 그를 예술가로 칭하는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에 있다. 그림에 맞게 제작된 액자, 그림속 인물들이 매듭으로 나와 하나로 완결된 궁극의 콜라보레이션이다. "35년 넘게 장인들과 손발을 맞춰 호흡해왔다"는 작가는 "내 작품은 피와 땀으로 만든 작품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이 많다"고 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허투루는 없다. 액자 뒷면도 배를 갈라서 잠금장치를 하고, 2년정도 삭인 풀을 쓴다. 액자 고리(장석)도 액자에 맞게 맞출 정도다. "이 또한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습관이에요. 잘못되면 항상 다시하게 했지요. 장인들과 많이도 실랑이 했지만 제 작품은 정직합니다. 고집스럽다고 하지만 정직하게 살고 싶어요." 전통문화가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장인들도 맥이 끊겨, 대를 잇지 못한다. 전수받기도 힘들지만, 생계로 먹고 살기는 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문화 융성'을 국정기조로 내세웠지만 여전히 문화예술인들은 배고픈 실정이다. '실그림'예술로 한국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전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기수 예원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은 '대한민국 헌법'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 이사장은 "헌법 제 1장 9조를 보라"며 손바닥만한 77쪽짜리 '대한민국 헌법 책'을 건넸다. '제 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민족문화이 창달에 노력하여야한다.' 고 적혀있다. 그는 '헌법 전도사'다. 국회의원을 만나면 헌법 46조를 읽어보라고 한다"면서 "최근 김무성 의원을 만나 국회에서 헌법 130조 전문을 다 읽고 이를 지키는 의원이 되겠다고 맹세를 해야한다고 주문했다"면서 "국회의원은 물론 국민들은 대한민국 헌법을 읽고 대한민국의 가치를 제고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말고 국민의 행복을 위한 기본을 지키자는 것.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도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며 '문화의 힘'을 강조했다. 이제 '문화 콘텐츠'는 미래성장 동력이다. 문화대국 프랑스에서 환대받고 온 손인숙 작가는 평생 해온 실그림 작업을 문화유산을 만들겠다는 욕심이다. 이미 박물관건축 허가도 받았다. 세계 10대 박물관에 작품을 기증할 계획도 있다. 손 작가는 "세계 곳곳 박물관에서 한국관은 중국, 일본관보다 초라하다는 소리를 20년 전부터 들어왔다"며 "이제는 '실그림'으로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 영혼을 바쳐 작업했기때문에 자부심이 있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국민들께 나누어준다는 생각으로 해왔지요." '실그림'은 바늘과 실로 무한세계를 넘나든다. 환갑이 훌쩍 지나 세계미술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손인숙 작가는 더 열정이 넘치고 있다. "작업요? 멈출수 없죠. 항상 새로운 컨텐츠로 보는 사람들에게 물음표를 주고 싶어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마법같은 '실그림'은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서 만나볼 수 있다. 010-2380-4153 hyun@newsis.com 2016/03/30
'100세 화가' 김병기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백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가요 '100세 인생' 노래가 뜬 건 '100세 시대'이기 때문이다. 노래 가사처럼 '팔십세에 저 세상에서 데리로 오거든 자존심 상해서 못간다고 전해라'는 세상이 됐다. 지난해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소설로 영화로 나와 웃음폭탄을 선사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설같은 일이 국내 미술판에 벌어졌다. 만으로 100살된 노인이다.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개인전을 여는 화가다. 이 '100세 화가'도 '창문넘어~100세 노인' 알란 같다. 세상 밖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 인생의 참맛을 겪은 알란처럼 그도 그렇게 세상밖을 떠돌며 살다, 50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일어나게 될일은 일어날 일, 미리 쓸데없이 걱정해봐야 소용없다" 는 알란 처럼 과거나 현재의 불행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이중섭?. 김환기? 모두 친구였지. 그런데 죽은 사람이야기를 뭐하러 해. 그들은 옛날사람이야. 과거라고" "나는 오늘의 세한도를 그리는 사람이야." 1916년생. 올해로 만 100세가 된 김병기 화백은 "난 100세 노인이 아니야. 그렇게 쓰면 안돼~." 라며 "난 오늘을 그리는 작가"라고 강조했다. 18일 만난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햄이 든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붉은 와인을 마셨다. "주스같아서 요즘 자주 먹는데 맛이 있다"며 한잔을 권했다. 100세를 살면서 기쁨과 슬픔, 환희, 고독등 힘든 일을 겪고 지나왔지만 그는 젊은이 못지 않다. '살아있는 20세기의 역사'라고나 할까. 100세에도 붓을 놓지 않은 화백으로 기록될 국내 화단의 최고령 화백이다. 인터뷰가 길어지자 매니저가 나와 "어젯밤도 샜는데, 피곤하시지 않냐"고 물었다. 개인전을 위해 아직 못다한 그림을 그리는 중이라고 했다. 김 화백은 "생각이 젊은 사람과 이야기하니 즐겁다"며 "새로운 생각을 하면 늙지않는다"며 말을 이었다. 노란 넥타이, 조끼까지 갖춘 검은 양복을 입은 그는 화가보다 지식인같다. "옛날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손사래를 쳤지만, 100세 노인의 인생 역정이 궁금했다. 1916년 4월 10일 평양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본에서 유화를 배워 한국에 서양화의 씨앗을 심은 화가중 한 명인 김찬영(1893~1960)이다. 집안엔 화집과 미술잡지 화구들이 널려있었다. "아랫목 위에 늘 놓여있던 여인 그림을 보며 미술가의 꿈을 키웠다" 어린시절 '책읽는 소년'으로 통했다고 한다. 아버지, 형들이 보던 문학책과 미술잡지에서 프랑스의 인상파, 상징주의에 눈을 떴다. 열여섯살, 어머니가 사준 물감과 화구를 들고 그림을 그렸고, 열여덟살인 1933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석고상 데생수업은 지루했다. 2년후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다시 입소했다. 피카소 등과 어울려 전위 미술을 하다 귀국한 미술계 총아 후치타 쓰쿠하루가 선생이라는 이유였다. 거기서 김환기를 만났고, 이중섭 유영국등과 함께 새로운 미술세계를 접했다. 1948년 월남해 한국 추상미술의 정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월남 전에는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을, 후에는 한국문화연구소 선전국장과 종군화가단 부단장 등을 지냈다. 서울대 강사, 서울예고 설립 초기 미술과장으로도 일했다. 인생 변화는 1965년 한국미술협회 3대 이사장일때 왔다. 당시 한국 최초 국제전 심사위원이자 상파울루 비엔날레 커미셔너로 김창열, 정청섭, 박서보 작품을 들고 나가 한국의 모노크롬을 세계에 알렸다. 이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행을 택했다.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실체를 본바닥에서 체험하고 싶었다" 뉴욕을 거쳐 사라토가에 정착했다. 한국인은 커녕, 미국인도 많지않은 미국의 동서부 시골에 틀어박혀 외로움과 고독감에 직면했다. 그렇게 대자연을 그리면서 선과 선의 엇갈림으로 표상되는 추상화 작업을 50여년간 펼쳐왔다. 고독함은 그리움이었다. "잠시도 한국인이 라는 생각 떠난 적 없었다. 그리움 이상으로, 내게 정신적인 문제의 초점은 동양적 사고에 와 있다"는 걸 직감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후 "한국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싶었다."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나섰다. 지난 3월 평창동 주택 겸 작업실을 김화백에게 마련해줬다. 이날 인터뷰중에도 들라클르와, 세잔, 피카소, 앤디워홀, 김정희의 그림세계를 넘나들었다. 또 가장 좋아한다는 블란서 시인 폴 발레리와 아폴리네르의 시를 또박 또박 외우기도 했다. 특히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를 암송한 그는 이 시 때문에 파리를 가고 싶어했는데, 80세에 꿈을 이뤘다고 했다. 1996년 파리에 있는 가나화랑 레지던시 '씨테'에 1년간 머물며 작업했다. "미술이야기, 작품이야기만 하고 싶다니까." 하루에 작업량은 얼마나 될까.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그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낮에도 밤에도 그리고 안 그릴때도 있고, 신명이 나면 새벽 3시까지도 그리지." 피카소를 불러왔다. "피카소는 밤에 그린다고 하더라. 영감이 떠올랐다고. 나도 젊어서는 피카소처럼 밤에 그렸어. 낮에는 잘 수 밖에 없었지." 김 화백은 "그런데 그거 다 옛날 이야기야. 지금은 '무의'하지 않는 노자 철학에 흥미를 느껴. 뒤샹은 그림은 안그리고 채스만 뒀다고 해. 그게 그림을 하는 것이야. 삶을 편하게 하는게 일을 안하는 것이 아니거든. '무의의 철학' 난 뒤샹의 사고에 공감하는 것이 있어" 다시 노자 이야기로 갔다. "나는 뒤샹과 달리 노자의 '도가도비상도 (道可道非常道)'에 감동을 받아. 현재의 미술이 어떤 양식에 빠져있거든. '말할 수 있는 도(道)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라'는, 도(진리)는 말로써 한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에 관심이 있어." "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환경에 살고 있다"면서 그는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 즉 극한 상황을 반영할 줄 알아야 새로운 무엇이 나온다. 그림도 그렇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세계에서 화가로 가장 유명한 피카소도 93세에 생을 다했다. 백푸더퓨처 영화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기억력은 물론 자신의 작품을 하는 이유를 논리적인 사고로 풀어낸다. 일반적인 우리나라 할아버지 모습이 아니다. 놀라움과 신기함이 교차해 건강비결을 물었다. "부정 의식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는 거지." "부정 의식을 오래 두지 말고 긍정으로 바꿔야해. 부정적인 생각을 오래하면 병이 된다고." "건강에 대해서는 묻지 마라. 작품이야기를 하자." 화폭에 그려진 그림은 날카롭다. 부벽준(산수화에서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측필을 이용해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같다. 무엇을 그린건지, 쉽게 알수 없다. 그는 "나는 추상주의자도, 추상을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며 완전한 추상도, 형상도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그림을 두고 추상성을 통과한 뒤에 나온 '형상성'이라고 했다. 예민하고 날카롭게 등장하는 선들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형태들, 빠른 붓자국이 반복된다. 그는 "덧칠한 선이 아니라 순결하게 내려 긋는 선"이라고 했다. 물감의 색면이 만들어낸 평면성은 입체적으로 보인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선과 선사이로 인물들이 보이기도 한다. 최근작 '공간 반응'이 눈에 들어왔다. 양쪽에 직각으로 내려진 빨간 선이 화면을 강렬하게 분할시키고, 날카로운 선들은 검은 화면을 리듬감 있게 연출하고 있다. "이 그림?.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거야." 작품 '공간 반응'은 "북한의 상태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 디아스포라(이산 유대인)로 살아온 또 분단 국가에 살고 있는 현실감이 다가왔다. "나는 평양사람이야. 북한이 다 굶어죽지않고 그런것하고 있어서 놀라움이 있지." 그는 북한이 수소폭탄을 만들고 로켓을 쏘는 것을 보며 이 작품을 그렸다고 했다. "싸움나면 다 죽는다. 한미연합군사훈련도 평화유지를 하려고 하는거지. 북한을 칠수도 없어. 북한이 좋다고는 할수 없지만, 생명에 위협을 주는 일을 누구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린거야." 16세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림. 횟수로 84년간 화가로 살아오고 있다. '그림이 무엇이냐'고 묻자 "허허~내 질문이 바로 그 질문"이라고 했다.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 그러면 '무엇을 그리고 있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살아있는자의 위엄'을 보였다. "나는 사는 시간, 현실하고 관계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그걸 그리고 있지." 그러면서 "예술은 인간을 진화시킨다"고 했다. "인간의 정신적인 작용이 진화로 만들고 있다"는 김 화백은 "예술이 학문과 더불어 인간을 진화시키는 건 하나의 '팩트'"라고 했다. '진화'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물건을 여기로 옮긴다는게 아니야. 그건 진화하고는 직접 관계는 없어. 무역업자가 여기 물건을 저기로 옮기는 건 진화하고는 관계가 없지. '방법에 대한 연구', 그게 진화와 관계있다고. 학문과 과학이 진화했지. 연구하면 그 다음 학설을 만들고 박사가 되고 그게 진화화는거야." 하지만 "예술은 진화하는게 아니야. 변화하는거지. 그리스의 작품이 르네상스보다 낡은건가?. 낡은게 아니라 변화한거잖아," 2년전인 99세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순간을 뜨뜻미지근하게 보내면 안 되고 적극적으로 뜨겁게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는 '나이많은 사람이 늘 하는 소리거니…'했다. '동시대, 오늘을 살고 있는' 김 화백은 뜨겁게 살아왔다. 오는 25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 바람이 일어나다' 개인전을 연다. 전시 타이틀은 '항상 새로운 것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 첫 구절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에서 따왔다. 1947년 죽음을 각오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끝없이 되뇌였던 시 구절이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김 화백의 구작과 신작 50여점을 전시한다. "바다가 세로로 보인다고~. 또 산을 그리다보면 뚱딴지가 되기도 하지. 우리 시대는 무한히 많은 메타포에 살고 있어. 뭐가 보이네, 안보이네, 내 그림을 유치하게 보면 안돼. 더 이상 손댈수 없어 미완성채로 두려고 해. 미완성이 완성이야." 전시는 25~5월 1일까지. 02-720-1020 hyun@newsis.com 2016/03/20
이강소 "내 작품은 '단색화'가 아니다" "내 그림의 표현은 내가 흥분해서 그린 희로애락이 아니다. 감정을 자제해 희로애락을 없앤 상태에서의, 그냥 즉각적인 제스처다." 일명 '오리작가'로 유명한 이강소(73)화백이 "나는 단색화가가 아니다. 내 작품도 단색화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2012년 이후 뜬 '단색화가'로 분류되어 국내외에서 주목받아온 것과는 상반된 말이다. 박서보 하종현 정상화 정창섭을 이어 '단색화가'로 꼽히는 그는 지난 6일 프랑스 케르게넥미술관에서 개막한 단색화 특별전에도 참여했다. 이 화백은 "어떻게, 그렇게 됐지만, 나는 처음부터 출발이 단색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회화과 출신으로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현대미술 태동기를 함께 써왔다. 실제로 혁신적인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으로 국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화백은 단색화의 시초인 서구의 '모노크롬'과 일본의 '모노하'를 비교하며 "'단색화'의 의미를 두는 순간 약점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단색화'는 현재 '단색화'로 봄날을 누리고 있는 '박서보 화백이 시작이다. 이강소 화백은 "박 화백이 1975년대 작품을 발표하면서 '내 작품은 모노크롬이다"고 주장했지만 "'단색화'라고 확실히 규정된 것은 아니다" 고 했다. 단색화는 '마케팅 수단으로 메이킹'됐다. 이 화백은 "일본에는 모노하 그룹이 있어서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전시되는 것에 비해 한국에는 집약된 이념이 없이 좀 뭣하지 않나"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단색화' 탄생배경을 집약했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씨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단색화전을 하자고 해서 시작이 됐고, 이어 국제갤러리가 해외에서 선보이면서 오늘날 '단색화'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덕분에 팔순의 화백들이 '단색화'로 봄날을 맞고, 'K-팝'처럼 한국미술이 세계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게됐다. 하지만 "이게 문제"라는 게 이화백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현대미술은 단색화전이 중심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낳게 한다는 것이죠. 나는 단색화라는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모노크롬 작업은 1970년대 중반부터 활성화됐다. 이 화백은 "현재 단색화가가 주목받는 것은 한국적인게 어떤 것이냐라는 것"이라면서 "70년대 활동 세대들의 작업은 상당히 다양하다. 작가들을 더 조명하지 못해서 그렇지, 조명하다보면 좋은 작가가 많다. 개개인의 좋은 작업이 많다"고 '단색화'로만 구분된 현 미술계에 대해 지적했다. 서구인들이 한국의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이 화백은 '문명의 전환'때문이라고 논리를 펼쳤다. "미니멀인 서구미술이 모더니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300년~400년에 걸친 모더니즘 관습이 단번에 깨질순 없기 때문이죠. 이 화백은 '과학자'같은 면모를 보였다. "과학(화학)은 모든 사물이나 우주가 연관되어 있는 유기적인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을 증명해왔어요. 20세기를 흐르는 동안에 아인슈타인, 양자물리학등 화학의 변화는 엄청납니다. 우리 존재는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죠." '모너니즘'은 '개인이 있다'고 증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리차드 세라가 쇳덩이를 놓는 것, 재스퍼 존스가 캔버스를 앞에 있게 하는 것 등은 '보는 사람의 존재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 화백은 "미니멀 아티스트들이 물감을 물체화시키는 것, 이것도 내 앞에 있도록 하는 작업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모더니즘을 훼손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탁자에 있던 스푼을 집어든 이 화백은 "이 스푼도 스푼이 아니고, 내가 스푼으로 보기때문에, 스푼의 모양으로 입자가 모여서 인식되기 때문"이라며 "과학이 증명한 것은 '사물은 이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봄으로 해서 즉각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더니즘의 사고방식을, 과학은 부정을 하는데, 관습을 탈피못하고 있는게 기계론적인 사고입니다. 분해하고, 분석하고… 이런점이 잘 드러나는게 팝아트죠." 하지만, '전통적인 관습'은 '과학이 증명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 "산수화를 생각해봐요. 그림속에서 즉각적으로 기운이 돋아나고 교류를 합니다. 베개를 베고 누워봐도 산속을 걸어 다닐수 있어요.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를 하고 파악을 하게되잖아요?" 이 화백은 "우리가 살아온 관습은 내가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살아온게 아니라, 같이 공존하면서 그 구조속에서 살아온 것"이라며 '우리의 전통'을 극찬했다. 나이탓이 아니다. "서양(서구)사람들이 한국의 현대미술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런측면에서 한국의 현대미술은 상당히 전망이 밝지요. 단색화는 출발이지 끝이 아닙니다. 앞으로 무궁무진한 작가들이 나올 것입니다." 이 화백의 작품은 현대적이면서 전통적이다. 그림인듯 서예인듯하다. ‘허’(Emptiness)시리즈는 춤을 춘다. '텅빈 충만'이다. 서예의 일필휘지를 연상케 할 만큼 즉흥적이면서도 율동감 있는 선(線)의 세계를 보여준다. 빈 여백이 주는 기운의 흐름이 강렬하다. 이 화백은 "내 작업은 관객이 순간순간 환상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푸근한 미소를 띄면 말을 이었다. "나를 '오리 작가'라고 그러잖아요?. 허허허. 그런데 나는 오리를 잘 그려서 관객에서 잘 보이게 하는게 아닙니다." "실은 내가 그린게 오리인지 거위인지 나도 잘 몰라요. 획을 막 긋고 전혀 상관없는 오리를 집어넣고, 집을 넣고, 보트를 그리는 것. 이건 구체적으로 관습에 맞는 화면을 만드는게 아니라 무책임하게 집어넣는 거거든요." 이렇게 그리는 이유가 있다. "보는 사람이 그냥, 멋대로의 환상을 갖게 되는거죠. 이건 동시성도 없는 것이에요" 이 화백은 "피카소는 동시성은 있다고 앞뒤로 이상한 그림을 그렸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면서 "내 그림은 보는 사람이 즉시 시공간을 인지하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겉으로 오리같고, 힘이 있는 표현적인 그림인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 구조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1973년 명동화랑에서 연 이강소의 첫 번째 개인전은 파격이었다. 전시장에 낡은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놓고 '막걸리집'을 열었다. 이 화백은 "그때 당시는 어떻게 평면을 벗어나고, 갤러리를 벗어나고 전통 조각을 벗어나려는 아주 자유로운 '형식의 개발시대'였다"고 회상했다. "대지예술이다, 바람예술이다 온갖 헤프닝등 사진 비디오등 미술의 영역이 다양하게 확산되는 시기였지요." 그 시절, 젊은작가 이강소는 '평면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야망을 가졌다. '막걸리집 형식'을 평면에 혹은 입체에 대입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 "그런 컨셉으로 하면 될 것이다 했는데 안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온거지요." 그가 첫 개인전때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하는 자세가 있다. '열린 세계'다. "나는 개인으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그때도 관객이 들어와서 마시든 뭘 하든,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었어요. 작가가 개입한 것은 늘어놓았다는 것뿐입니다. 모두가 관객 자신이 판단하고 경험하고 그런 기회를 주는 것, 그게 제 작업의 시작입니다." '단색화'가 아니라고 하지만, 단색화의 수혜자인 이 화백의 개인전이 프랑스에서 지난 4일 개막했다. 프랑스의 유명 큐레이터인 로랑헤기가 관장으로 있는 생테티엔 근현대미술관에서 초대한 전시다. 이 미술관은 2007년 박서보, 2011년 정상화등 단색화가들의 전시를 연바 있다. 자기억제를 통한 절제적 엄숙함과 단색화적인 우아함에 매료되었던 유럽관객들에게 한국의 추상회화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강소의 작업은 자유로운게 특징. 회화에서 사진 조각의 영역까지 넘나든다. "모든 것은 환상"이라는 이 화백은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조화를 위해 예술가는 사고전환을 빨리 할수 있다"며 "실패, 실패하면서 살아가는게 예술가인데, 젊어서 한 것을 늙을때까지 지속하는 건 바보 예술가"라고 말했다. 이성 중심의 작업보다 직관이나 감성을 중시하는 작업이다. 시공간 초월, 자유로움이 더욱 돋보이는 건 조각이다. 세라믹으로 만든 조각은 일반적으로 보면 '이상한', 실패한 작품같다. 던져져 뭉개지고 묵사발된 것 같다. 이 화백은 "흙을 던지는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요즘은 매일 던진다"면서 "옛날에 던진것하고 지금 던진것하고 다르다. 그게 이상해요. 다시 보면 상대가 안된다"며 허허 웃었다. "단색화가로 규정짓지 마세요. 저요?. 모더니즘을 탈출하려는 작가로 봐주세요~하하하" hyun@newsis.com 2016/03/14
'어둠의 자식'에서 환골탈태한 오치균 "밥이 문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의 이 명대사가 좀 생각나는 전시가 있다. '사랑'을 '사람'으로만 바꿔보면 딱이다.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이럴수가 있나 싶을 정도다. '어둠의 자식'에서 환골탈태했다. 4일 금호미술관에서 개막한 오치균의 '뉴욕 1987~2016'전은 극과 극이다. 뉴욕1~2기(1987~1995년대)와 뉴욕 3기(2014~2016)은 흑백TV에서 Full HD 컬러TV급으로 변환된 화면이다. "왜 이렇게 봤나. 지금은 상상이 안되는데, 그때는 이렇게 까맣고 어둡게 보였어요". 30년전 뉴욕에 간 오치균의 삶은 고되고 퍽퍽했다. 뉴욕에 살았지만, 여유가 넘치는 센트럴파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하로 다니며 거지들(홈리스)만 눈에 들어왔다. "저게 나다" 검은 화면에 뭉뚱그려진 형상을 그려놓고 살았다. 1987년 브루클린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시기부터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1990년까지 4년간 그린 초기 뉴욕시리즈는 빛과 차단되어 있다. 거대도시 뉴욕에서의 고독한 삶은 어둠속에 갇혔다. 전시장 3층 한 벽면을 차지한 ' figure(피규어)'시리즈는 기묘하고 착잡한 심정을 전한다. 자신을 그린 인체는 동물처럼 원초적인 모습으로 좌절과 분노의 감정에 싸인 모습들이다. 지하철 플랫폼을 담은 'Subway'와 지하철역사 한 모퉁이에 사물도 인간도 아닌 것 처럼 늘어져 있는 'homeless' 그림도 어둡고, 참 어둡다. 4일 전시장에서 만나 오치균은 들떠 있었다. 큐레이터가 작품을 설명할때마다 부연 설명을 하겠다며 나섰다. 검은 동그란 선글라스를 껴 레옹같던 이전 모습이 아니다. 안경도 없이 온 얼굴을 드러낸 그는 자주 웃었고 말도 많았다. "근심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내에요. 이건 제 딸이죠" 80년대 후반 "어떻게 살거냐며 째려보는 아내를 그린 그림"앞에서 미소를 진 그는 "그때는 공부하고, 일하고, 사는게 급급해서인지 모든게 어둡게 보였고, 찌질한 사물들이 모두 나 같았다"고 했다. '고독이 춤추던' 뉴욕 1기 시기를 지나면 1993년~1995년까지의 뉴욕 2기 시기는 변화된 관심사를 보여준다. 개인전을 준비하기 위해 방문한 뉴욕에서 체류가 길어지며 거주하게 된 시기로 이때는 경제적 안정과 생활의 여유가 뒷받침된 때다. 어둔 내면세계의 정서가 지배적이었던 뉴욕 1기와 달리 뉴욕의 마천루들이 만들어내는 지평선과 빌딩숲을 그린 '엠파이어 스테이트' 시리즈, 특히 눈이 쌓이 겨울 도시풍경을 그린 '설경'시리즈는 음울한 도시가 아닌 자연으로서의 뉴욕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이 시기의 작품들도 회색조, 청록색등 음울한 색감은 여전하다. HD급 컬러TV로 변한 것 같은 작품은 2014년부터 시작된다. 같은 풍경, 같은 장소인데, 보는 눈이 달라졌다. 색을 밝혔다. 맥시멀리즘이다. 경쾌해진 색감과 마티에르는 뉴욕의 공원과 거리 풍경을 일렁이듯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보통 작가들이 젊었을때, 분출하고 색을 많이 쓰는데 나는 철도 더 없어지고 왜 이러나라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뉴욕에 가서 프랭크 스텔라 전시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 분이 나와 같더라고요. 초창기에는 까맣게 미니멀리즘으로 그리다가 지금은 입체로도 그리고 표현의 절정을 보이는 작품을 보면서 위로로 받았어요". 그는 이번 금호미술관 전시를 준비 하면서 스스로 놀랐다고 했다. "분명, 느낀 그대로 그린 것인데, 비교해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나무가 있어도 나무를 빼고 그렸고 보이지도 않았어요. 평론가들이 '문명에서 자연으로 돌아왔다'고 하겠지만, 그런걸 생각하고 그리지는 않았아요." 같은 건물을 그린 그림이다. 20년전에는 네모 창문을 획일적으로 그려낸 건물을 화면에 건조하게 담아냈다면, 뉴욕 3기 2014년에 그림 그림은 노란 잎들이 풍성한 커다란 나무가 건물을 가리고 앞으로 등장해있다. 이렇게 보이게 된 이유는 '여유감'때문이라고 했다. "뉴욕의 지하철이 그때는 어둡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정말 밝게 보이더라니까요. 지금까지 암흑속에 살았으면 어떻게 하나. 문제는 마음인 것같다. 지금은 '마음의 장막이 걷혔다'고 표현했다. 그는 '돈은 숫자일 뿐'이라고 했지만, 돈은 모든 걸 돌려놓는 힘이 세다. 오치균은 "먹고살아야 했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관심이 달라졌다"면서 "달리 보이는 세상이 재미있다"고 했다. 시선이 달라진건 2년전부터다. 2013년 가을경 괜히 센티멘털해졌다. 바쁘게 지나온 7~8년을 뒤돌아봤다. '뉴욕 가을은 어땠나?'.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그래서 떠났어요. 센트럴파크에 갔더니 단풍이 흐드러졌어요. 왜 그전에 이런게 안보였을까. 여유가 생기니까 같이 동화되는 것 같아요". 이후 뉴욕에서 2년간 '신나게' 그림을 그렸고, '색기'가 넘치는 '뉴욕 3기'가 탄생했다. 절실함보다 여유감이 넘쳐서 일까. 이 그림은 '오치균스럽지 않아' 좀 낯선 느낌이다. 두터운 질감이 툭툭 칠해진 같은 기법인데 너무 화려해서 생경하다. '인상파 그림'과 같다. 한걸음 떨어져 보면 풍경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물감의 격렬한 흔적만 몸서리쳐져 있다. 오치균 그림은 '핑거 페인팅'이다. 붓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그린다. 다른 작가와 큰 차별화다.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찍어 바르는 '임파스토' 제작방식이다. 30년째 붓이 된 손은 의외로 곱다. "작업하기전에 핸드크림을 많이 바른다"는 그는 "손으로 하는게 운명인 것 같다"며 반질반질한 손바닥을 보여줬다. 오치균은 2007년부터 미술시장에 돌풍을 일으킨 작가다. 그의 암울한 '뉴욕 2기'시기 그림들과 90년대 후반 어두운 그림들은 화랑가와 경매시장을 강타했다. 생존한 국내 작가 중 가장 작품 값이 비싼 작가 중 한명이다. 일단, 경매장에 그의 이름만 나오면 품절사태가 벌어졌다. 2007년부터 유명해졌다. 1998년작 ‘사북의 겨울’(108×162㎝)이 2007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6억181만원(약 503만1500홍콩달러)에 낙찰되면서다. 국내미술시장에서 '오치균=사야할 그림'이 됐다. 2013년 '전두환 전 대통령 컬렉션' 경매에 나온 10점도 모두 팔려나가 화제가 됐다. 작품은 꾸준한 인기다. 지난 2015년 9월 K옥션 경매에서 감(145.5×97cm)이 1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금호미술관 전시는 그를 겸손하게 하고 있다. "30년전 '홈리스'그림을 보따리로 싸와 개인전을 했었는데 다시 '뉴욕 시리즈'로 전시하게 되서 묘한 기분"이라면서 오치균은 '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말 어려운 시기를 겪어오며 깨달은건 "밥을 우선 먹어야 한다"는 것. "밥이 해결 안되면 힘들어집니다. 기분이 행복하면 슬픈걸 봐도 관심이 안가듯, 너무 슬프면 아무리 햇빛이 맑아도 우울하잖아요. 부자 화가가 되어서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작품에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운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라며 "밥 이 해결된 요즘은 자유롭게 그림에 집중할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제가 저에게 두가지 칭찬하고 싶어요. 첫째, 그림을 그리면서 밥을 먹고 살고, 밥 걱정을 안하게 된 것. 두번째는 몸이 약하게 태어나 이도 빠지고, 원시시대 같으면 40대에 죽었을 몸인데, 죽을때 쯤에 운동을 하고 노력(술담배 끊고)해 20대처럼 건강해진 것. 이 두가지가 자랑스러워요". 스키니 흰바지와, 짧은 봄버점퍼를 입은 오치균은 "20대에 빌빌 거리다가 회춘했다"며 활짝 웃었다. 올해 6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모습으로'화백'이라고 쓰기가 민망한 작가다. "제가 성공할수 있었던 건, 매니아 컬렉터들 덕분입니다. 어려운 시기, 넘어질려고 할때 나타나 그림을 사주던 매니아들이 있었어요. 돈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었지만 정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이런 분들이 우리 미술을 받쳐주고 있지 않나. 이번 전시를 하면서 그분들이 생각났어요. 정말 고맙고 힘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뉴욕 시리즈'를 통해 그의 30년간의 작업과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영원한 것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를 살려낸 어두운 그림부터 화려하게 변한 100여점을 선보인 전시에는 유명한 '감', '산타페'시리즈는 없다. 전시는 4월 10일까지.02-720-5114 hyun@newsis.com 2016/03/04
"1250도 가마에서 녹아내리기 일쑤였죠" 오주현의 '한복 도자인형'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2013년 12월 18일 한겨울, 서울옥션 경매는 뜨거웠다. 검찰에 압류된 전두환 전 대통령 컬렉션이 쏟아져 세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야드로' 인형이 주가를 높였다. 스페인 수제 도자기 인형 야드로(LLADRÓ)의 도자기 35점이 모두 팔려나갔다. 추정가 700만~900만원짜리 인형은 2000만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았다. 인형 하나에 수천만원에 팔리자 '야드로' 인형은 일반인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 '천사' '신부', '여인'등 다양한 모습을 한 '도자 인형' 야드로는 에디션 개념으로 한정 생산해 희소가치도 높다. 덕분에 스페인의 국력이 된 도자기다. "왜 우리나라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도자기 인형이 없을까?" '야드로'로 떠들썩할 당시, 서울 명동 한 공방에선 도예가 오주현(48)이 꿈을 키우고 있었다. "내가 세계적인 한국 전통 도자인형을 만들겠다"는 사명감은 더 힘을 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만든 도자기 나라인데 못할 것 없지 않은가'. '야드로또한 조선 도자 기법이 바탕이 아닌가" 2008년부터 흙과 불의 담금질은 기본, 한국 전통복식 연구에 들어갔다. 흙과 안료의 배합, 굽는 방식, 한복의 색감등 인내와 수련시간은 모질게 이어졌다. 한복만의 미감, 여인들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위해 궁중 대례복부터 기녀의 화려한 복식까지 섭렵했다. 또 조선시대 풍속에 나타난 동작, 생활양식까지 연구해 도자인형의 생생한 율동까지 재현했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를 모조리 찾아내어 율동의 자태를 연구했어요.우리 한복은 색감이 화려해야 맛이 나더라고요. 파스텔톤으로는 미감이 발현되지가 않았어요". 끝없는 실험과 실패로 얻어낸 결과였다. 일반적인 도자기 색소로는 우리 전통 옷의 색을 찾기가 싶지 않았다. 전통한복은 천연염료를 사용한 오방색이 딱 들어맞았다. “조선시대의 복식은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 특징이에요. 신분에 따른 복식규범도 엄격했어요." 하지만 이를 전부 도자에 녹여내는 것이 과제였다. 흙은 고온에도 잘 견디는 백자 흙을 사용했다. 작업은 눈을 뗄수 없을 정도로 노동집약적으로 이뤄진다. 자연스러운 발색을 위해 흙에 안료를 발라 굽는다. 구운 도자위에 색을 칠해내는 게 아니라 원하는 색을 얻기위해 안료를 바르고 굽는 과정을 반복한다. “제 작품은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는 도자인형이에요. 전통도자기인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를 굽는 소성온도와 같아요. 초벌, 재벌, 삼벌 작업은 보통이지요” 흙과 불의 싸움이다. 갈라지거나 파손되는 것은 기본, 가마 속 고온에서 얇게 빚어진 인형들이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기본적으로 1250도의 고온에서 구워지는 작업은 계산한다고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다. "흙과 불로 옷을 짓는다고 생각해요. 10개를 가마에 넣으면 2~3개를 겨우 건지지만 그렇게라도 완성된 작품이 나오면 그 희열감이란 이루 말할수 없지요" 연습, 또 연습의 연속은 불꽃의 미학과 융성했졌다. 불속에서 나온 인형은 조선시대 여인들을 환생시켰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 갈듯 치마폭이 찰랑거리고, 색동옷 저고리는 색색깔로 반짝반짝 빛난다. 보통 화산 용암의 온도는 1000~1200도이고, 철은 1539도, 구리나 금은 1080도 내외에서 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도자기는 1200~1300도 이상의 온도를 견뎌내고 탄생된다. 운석이나 우주선이 대기권을 통과할 때 발생하는 온도로, 도자기야말로 최첨단 과학의 결실이나 마찬가지다. 천 옷처럼 진 주름은 정말 도자기인가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틀로 찍어내서는 이런 느낌을 낼수 없다. 달걀형의 머리에 쪽진 머리, 단아한 모습의 한복인형들은 시대의 여인상을 담아냈다. “조선시대 복식인형을 만들다 보면 감정이입이 돼 나도 모르게 어느 시점에선가 조선 사람이 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왕비가 대례복을 입었을 때와 벗었을 때의 섬세한 심리, 혼례를 앞둔 신부의 복잡 미묘한 감정까지, 여자로서의 느낌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아울러 춤과 노래 등 예능을 겸했던 기생과 무희의 삶과 애환마저도 표현하려고 했지요.” 작가는 도자기 인형제작에 골몰 할 때면 스스로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인형 놀이가 제일 좋다"는 작가는 어린시절 흙이나, 천으로 인형들을 만들며 놀았다고 한다. 지점토로 처음 만든 인형이 한복을 입은 빨래터의 아낙이었는데 하얀 한복에서 강한 느낌을 받았던게 평생의 일로 이어진 계기가 됐다. 8년의 내공이 쌓인 도자기 인형을 공개한다. 오는 16일부터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오주현작가의 '흙으로 조선의 옷을 짓다'개인전을 펼친다. 승무를 추는 인형부터 궁중대례복을 입은 인형들까지 전시장에는 80여점을 선보인다. 상업적 공예상품이 아니라, 그간에 만나볼 수 없었던 작가주의적 순수미술품으로써의 도자기 인형 전시라는 점이 큰 의미를 갖는다. 독일의 마이센이나 스페인의 야도르 도자기인형부터 중국의 당나라 채색도자 인형들처럼 국제적인 인지도를 지닌 도자인형이 그동안 우리나라엔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오주현의 '도자기 인형'은 기존의 관광상품 진열대에 놓인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일 정도의 작품성이 돋보인다. 한복 특유의 화려한 색감의 조화나 복식문화, 신분을 고려한 몸짓의 차이가 느껴진다. 반면 모든 작품들의 얼굴이 하나의 표정으로 통일된 점이나 다소 소극적인 율동미의 동세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디테일이 강해야 명작이다. 마치 같은 시대에 양반탈과 각시탈, 하회탈 등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신분의 특징을 포착한 것처럼, 도자기 인형작품 역시 인물의 특징에 따라 좀 더 구체적이고 차별화된 표정이나 동세를 가미한다면 더욱 매력적인 작품으로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고온을 조절해서 곱고 부드러운 색감의 한복 도자기 인형의 탄생이 놀랍다. 옛날 전통적인 미학의 재현에만 머무르지 말고, 한국인의 폭넓은 감성과 표정을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담아낸 도자기의 작품세계로 확장된다면 'K-아트', 'K-doll', 한류문화의 새로운 성장동력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어린시절 '야드로 인형'에 매료됐던 작가는 이제 '야드로'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조선시대의 복식을 겸비한 유일한 도자기 인형작가로 날개를 단 작가는 "세계 최고의 도자기 인형 작품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면서 2016년 새해 희망찬 욕심을 내고 있다. "우리 도자인형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복식을 세계에 소개하는 역할도 하고 싶어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전시는 23일까지. 02 734-1333 hyun@newsis.com 2016/02/14
유홍준 "백번 말하지만 민중미술전 아니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패션만 돌고 도는게 아니다. 그림도 유행을 탄다. 30년전 흥했던 미술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미술시장에 불고 있는 '민중미술'이다. 세계미술계에서 주목한 '단색화'이후 '한국현대미술'의 새 브랜드 런칭 과정속에 민중미술이 제시되는 상황이다. 60년만에 80대의 화백들이 봄날을 맞았듯, 30년후인 2016년 '민중미술'이 다시 호황을 누릴수 있을까. 시동은 가나아트센터가 걸었다. 일단 '민중미술'이라는 말은 뺐다. 대신 '리얼리즘의 복권'이라는 타이틀로 28일 서울 인사동 가나 인사아트센터에서 '민중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신학철(72)·임옥상(66) ·황재형(64) ·민정기(67) ·고영훈(64) ·권순철(72)· 이종구(62) ·오치균(60) 8명의 작품이 걸린다. 고개를 갸우뚱하게하는 작가도 있다. 민중미술 작가이거나 아니거나, 아니라고 해도 보기엔 민중미술 작가로 인식되는 작가들이 반반 섞였다. 전시자문을 맡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67)를 만났다. 그는 "재향군인회에 온 것같다"면서 흥분감을 감추지 않았다. 왜 지금, '민중미술'이냐고 물었다. "30년 되니까 이게 좋은 줄 아는거다. 띄워야 한다. 내 영혼이 바쳐져 있는 건데…" 유 교수는 80년대 민중미술의 태동이 된 '현실과 발언'과 민족미술협의회에서 작가들과 함께 활동했었다. 민중미술과 단색화의 차이는 평론가가 작가와 함께 컸다는 점이다. 유 교수는 "10여년간 민중미술 작가들과 함께 민중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등 잔인한 비판을 했었다"고 말했다. 작가와 평론가가 뭉친 건 정치적인 상황때문이었다. 폭압정치 속에서 말로 못하는 소리를 그림이 냈다. 유 교수는 "평론이라고 하는 것이 18세기에는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의 재단비평이었지만, 현대미술로 오면 무브먼트속에서 이론을 제시하는 같은 창조자"라고 했다. "현재 단색화가 각광받는건 미니멀리즘이 한국적으로 토착됐다는 점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서구의 현대미술이 80년대에 예술적 배반을 하고 딴데로 튀어버렸다. 모노크롬을 하던 작가들이 쫓아갈수가 없어졌다. 포기할수 없으니까 그동안 해왔던 것에 자기를 집어넣어서(수행같은 작업) 한 것이 한국적으로 된 것"이라고 요약했다. 유 교수는 "80년대 한국미술을 이야기하기전에 서구의 미술을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서구사회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일면서 슈나벨, 펜크 딕스, 키퍼등이 '리얼리즘의 복권'을 보여줬다. 이런 미술이 일어났을때 미국 뉴욕뮤지엄(모마)에서도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3층 구석진 끝방에 '아메리카 컨템포러리 페인팅 룸'이 생겼고, 전시 제목은 '고뇌의 시대'였다. 우리나라도 서구미술의 변화와 연관된다. 당시 미술계는 단색조 작가, 상업화랑 인기작가가 있었고, 국전 작가, 대학교수 작가가 있었다. 이런 제도권을 뚫고 조형적 반항으로 등장한 게 '리얼리즘 작가'다. 리얼리즘은 '현실을 어떻게 그림으로 담을수 있을까. 작품으로 구현될수 있을까'가 시작이었다. 문학에서 신경림의 농무, 황석영의 객지가 나오면서 이론이 피어났고 미술에서 신학철과 오윤이 나타났다. 유 교수는 "오윤은 대학때부터 리얼리즘전을 추진했다가 정부의 반대로 전시를 열지 못하기도 했다. "86년 오윤이 사망하면서 민중목판화의 풍성함은 더 살아나지 않았는가" 유 교수는 "민중미술은 민주화 과정 속에서 일어났던 미술인들의 자생적인 예술적 분출양식"이라고 했다. "'리얼리즘'상당수는 민중미술작가"라고 했다. "그림의 현실을 어떻게 담아내야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민중미술'은 매스컴이 만들어준 개념이다" 유 교수는 "근대 서양미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우리미술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단색화'가 영문으로 'Dansaekhwa'로 고유명사화 됐 듯, 민중미술도 'Minjung Art'로 영문이름을 가지고 있다. 1984년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의 환갑때 열린 한국의 현대미술 세미나에서 탄생했다. 유교수는 "당시 민중미술을 발표하면서 성완경 평론가가 '피플스아트'라고 했지만 그 자리에서 '민중아트'로 정해졌다"면서 "한국말과는 달리 영어로 쓰니 멋있는 용어가 됐다"고 말했다. 80년대 후반, 386세대의 등장으로 민중미술은 이념적으로 진화했다. 시위현장의 걸개그림으로, 노동의 현장으로 들어간 민중미술은 아이러니해졌다. 정작 현실속으로 들어갔지만 일반적으로 괴리감은 커졌다. 또한 정부의 탄압도 거셌다. 유교수는 "'불온'하다는 개념이 덧칠해진 민중미술은 퇴보를 보였다. 작가들도 서로 우리가 진짜 민중이다, 아니다로 오지게 싸우기도 했었다"면서 "세월이 지나고 보면 80년대 민중미술은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 성공 과정속에서의 예술적 정신이었고, 표현이었다"고 회고 했다. '민중미술'은 이제 '한국적 리얼리즘'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 당시 함께했던 평론가의 힘으로, 유교수는 이들을 '리얼리즘의 복권'으로 복귀시켰다. "그동안 멸시받은 것만해도 억울해 죽겠다. 작품을 보고 이야기하자" 유 교수는 "그동안 못 그린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부담스러웠는데, 이번 작품들에 맞짱뜰 수 있으면 나와봐라"면서 청년이 된 듯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종구화백이 김대중과 정주영을 그린 4m 짜리 대작 및 8명의 주요 작품 100점을 선보인다. '민중미술'로 인식된 작품들이 있지만 유 교수는 "이 전시는 100번 이야기하지만 민중미술전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유 교수가 "가나아트와 토론을 하고 작가를 넣었다 뺐다"하며 선정된 작가들은 '유홍준 취향'이라고 했다. '유홍준 취향'은 " 잘 그려야 한다. 이미지가 확실해야 한다". "깨지든 겹치든 비약을 하든 예뻐야 하고, 메시지는 약해도 상관없다"는 것. 유 교수는 이들 8명의 공통점을 7가지로 정리했다. '1. 전업작가, 2 대작에의 도전, 3.사회성이 없다(임옥상 빼고), 4.우직, 정직 고지식(임옥상 빼고), 5, 테크닉 달인들, 6 정통 따블로 작가들, 7 서구사조등 남 눈치 안본다'는 점을 들었다. 굳이 민중미술과 리얼리즘 작가를 분류하자면 이렇다. 주관의 개입이 강한 민중미술작가는 신학철 임옥상 민정기 황재형이다. "민정기하고 황재형은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넣어야 한다" 는 유 교수는 "이번 전시에 나오는 고영훈은 (민중미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치균도 상관없다"고 선을 그었다. 유 교수는 "리얼리즘속에 민중미술이 들어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리얼리즘에는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중미술이 있고, 묵묵히 리얼리즘을 고수한 화가들이 있는 것이다". 신학철은 역사의 맥박과 혼이 있고, 임옥상은 대상의 현실적 해석이 탁월하다. 황재형은 막장의 풍경과 인생을 그려 현장감이 넘치고, 민정기는 실경 산수를 통해 현실과 소외를 드러낸다. 권순철은 근원을 찾아가는 해체감이, 오치균은 거친 대상의 이미지의 승화로 어떻게 그려도 멋진 그림이 나온다. 이종구는 농촌과 농민 고향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아 전통 리얼리즘을, 고영훈은 고서위에 돌 혹은 시계와 삽등의 오브제를 융합시킨 극사실 하이퍼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엽기가 판을 치고 이미지가 범람하는 21세기, '민중미술'은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정치인들이 해골 아래 뭉쳐진 신학철의 그림과 당시엔 전시에서 철거됐다는 붉게 웅덩이가 파진 논바닥 그림은 더이상 자극적이지도,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예술은 시대가 낳는다. 30년전 '불온을 품어 멸시받았다'는 작품은 '한국 미술'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 진출'을 꿈꾼다. 전시를 주최한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키를 쥐었다. "80년대 이런 현실적인 그림은 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일본도 없고, 중국도 1995년 이후에야 나온다. 족보상에서 우리가 15년이상 앞서있는거다. 우리는 이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다. 민중미술이 무엇인가. 한국의 '리얼리즘 예술'이라는 말로 정리할수 있다. 이번에 리얼리즘 복권 전을 준비하면서 국내보다 외국에 어떻게 보여줄까를 고심했다" 이호재 회장은 "세계미술시장에서 단색화가 뜬데 이어 한국 리얼리즘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서 "그래서 이번 전시도록은 영어판과 중국어판을 제작한다"고 밝혔다. 가나아트가 '민중미술'이라는 군불을 피우고, '리얼리즘'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불안정한 사회적 인식에 갈등의 구조는 언제나 잠재되어 있다. 민중미술의 작품을 또 다시 드러낸다는 것은 '현물로써의 민중미술'을 선보이는 것 외에도 '시대를 대변하는 정신성과 그 파장을 다시 깨우는 역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민중미술은 정치적이면서 선동적인 성향이 강하다. 편향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세대를 넘어 다시한번 충돌을 일으키는 효과도 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민중미술' 개념을 받아들이는 인식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민중미술이라는 용어보다, 리얼리즘 개념을 더욱 강조한 이번 전시는 세계 미술시장을 겨눈 가나아트의 새로운 돌파구 찾기로 보여진다. 모든 것은 만들어진다. 혁신도 마케팅 싸움이다. 전시는 2월 28일까지. 02-720-1020 hyun@newsis.com 2016/01/27
연예인같은 마리킴과 학고재의 온고지신 박현주 기자=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칠 것이다" 팝아트 황제 앤디 워홀(1928~1987)의 명언으로 전해지는 이 말은 21세기 미디어시대에 딱 들어맞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뜨고 연예인이 각광받는 이유다. 보증이 필요없는게 '유명세'다. 미술판도 '유명세'가 유효하다. 스타 작가, 수상 작가가 '인기 작가'라는 타이틀의 사다리를 타면, 재크의 콩나무처럼 쭉쭉 올라간다. 이미 미술판도 머니게임화됐기 때문이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는 세상은 이미 과거로 묻혔다. 화가도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워야 하는 시대다. 제프쿤스나, 데미안 허스트등 해외 유명작가들은 스스로가 기업화되어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 소비하며 가치를 창출한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이중적인 시선이 강하다. '나댄다'는 곱지않은 반응이 더 우세하다. '그림은 그리지 않고…' '그림이나 그릴 것이지'라는 전제가 깔린다. 사례가 있다. 연예인같은 화가로 '낸시랭'이 떴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번개처럼 반짝했다가, 미디어에서 어느순간 사라졌다. 엉뚱발랄함은 화가라서 매력을 더했다. 하지만 '유명세' 댓가는 크다. 대중이 주고 뺏는 인기는 신기루다. 하지만 스타는 계속 탄생한다. 최근 미술판에 '연예인같은 화가'가 다시 등장해 주목받고 있다. 눈이 큰 ‘아이돌(Eyedoll)’ 그림으로 뜬 마리킴(38)이다. 2007년 미술시장 호황때 떠오른 그림은 팝아트의 대세라는 흐름을 탔다. 특히 국내 굴지의 화랑인 가나아트 이옥경사장이 '좋아한다'는 입소문은 '만화같은 그림'의 기를 살렸다. 가나아뜰리에 입주작가로 장흥아트파크에 입성해 '가나 작가'로 꼬리표가 붙기도했다. '만화같은 그림'은 무한복제가 가능했다. 그녀가 만든 ‘아이돌(Eyedoll)은 터미네이터처럼 어디든 적용되어 눈을 뜬다. 이 그림이 힘을 낸 건 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으면서다. 지난 2011년 YG엔터테인먼트의 그룹 2NE1의 앨범 표지와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단박에 '아이돌'은 마리킴까지 '아이돌'로 올려놓았다. 양현석 사장에 이어 연예인이 좋아하는 그림으로, 연예인과 어울리면서 작가도 연예인같은 모습으로 진화했다. 덕분에 '성형중독'이라는 소문도 붙어있다. 자신의 '눈 큰 그림'처럼 변신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마리킴은 의외로 유쾌했다. "이뻐서 그런가봐요" 하며 깔깔거렸다. "관리는 잘하고 있다"는 말로 일축한 그녀는 "그렇게 보이는게 재미있어 좋다"면서 "사실, (김수현등) 배우들과 스캔들을 일으키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며 웃어 넘겼다. 마리킴은 화장품업체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면서 연예인들과 사진을 찍고, 패션쇼 행사장에도 등장해 포토라인에 서 종종 미디어에 노출된다. '반전의 미학'을 노린다고 했다. "날라리인 것 같은데 알고보면 '그림을 이렇게 많이 그리고 있었네!"라는…. '이상한 애'였다고 했다. 고교시절엔 늘 책상에 엎드려 잠만 퍼자는 학생이었다. 만화책과 하이틴 소설을 밤새 보고, 정작 학교에선 잠만 잤지만, 그 시절이 자양분이 됐다. 그림으로 떴지만 실상은 미대출신이 아니다. 고교 졸업후 호주로 유학와 멜버른 RIMT대학에서 멀티미이어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크리에이티브미디어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이돌'그림으로 "여자 요시토모나라, 포스트 무라카미, 포스트 앤디워홀이라는 소리도 들었다"며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같은 그림, 아닌가'하고 치부하기엔 판이 커졌다. 마리킴의 개인전이 학고재에서 13일부터 열린다. 4년만의 개인전이다. 디아섹같은 프린트가 아닌 붓질이 흔적이 있는 회화 170여점이 걸렸고, 영상연출 전공을 입증할 미디어아트도 선보인다. 페인팅을 고수하는 건, 복제가 가능한 자신의 그림처럼 회화도 재생산이 가능하기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회화는 딱 1점,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사진과 프린트들은 복제된 것이기에 유일하지 않다는 편견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번 전시에서 회화이지만 이 작품들은 복제이며 동일하기에 개성이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합니다"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다"는 그녀는 이번 전시를 아예 외계로 가는 길로 안내한다. 전시 제목 'SETI'는 나사(미 항공우주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외계 지적 생명체 탐색(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프로젝트의 약자다. 마리킴은 "이번 전시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고 설명했다. "대부분 복제된 것처럼 본능적으로 살다가 죽는 우리 인류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나 라는 질문을 품고 전시를 기획했다”면서 "아이돌의 창세기-현재-미래의 변천사를 보여준다"며 알쏭달쏭한 지구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않고 이어갔다. 성형을 해도 변하지 않는건 눈빛, 눈동자다. 마리킴의 아이돌이 생명력을 얻는건 '큰 눈'이기도 하지만 눈동자에 그려진 '초끈이론' 때문이다. 최신 과학의 입자이론으로 무장한 화려한 눈빛은 우주 행성의 상상과 신비함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개념이 있다"는 마리킴은 "필연적으로 내가 왜 '아이돌'을 그려야야하는지 이유를 찾고 싶었다"며 감각적인 작품에 스토리텔링된 개념을 입혔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오마주한 영상도 선보여 가벼운 전시의 완성도를 높였다. 전쟁의 폐해와 잔여물이 존재하는 지구라는 행성에 더는 생존이 불가능해진 아이돌이 광활한 우주의 세계로 떠나는 과정을 담아냈다. 지난해 학고재 상하이에서 개인전을 통해 국제적 성장 가능성을 증명한 마리킴은 가나를 떠나 학고재와 전속을 맺었다. 학고재는 새해 첫 전시를 마리킴에 내줬다. 잘록한 허리에 손을 얹고 작품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화가로서의 마리킴은 미술계에서 아직 낯선모습이다. 반면 큰눈과 화려한 색의 생기발랄한 그림덕에 학고재는 '온고지신'이다. 전통적인 화랑의 이미지를 벗은 분위기다. 독과 득을 품은 유명세는 리스크와의 싸움이다. 마리킴은 영악한 듯하다. 2016년 거침없는 행보를 시작한 그녀는 "유명한 작가보다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영화광 만화광답게 스파이더맨의 명대사를 영어로 쏟아냈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른다)"라며 "더 유명해져 좋은 일을 많이하고 싶다"고 했다. 영어 이름같지만 마리킴은 '김마리' 본명이다. 자신을 '코리언오스트레일리언'이라고 했다. 외계인같은 마리킴의 도발이 미술판의 보수적인 흐름을 바꿀지는 관심에 달렸다. 전시는 2월 24일까지. hyun@newsis.com 2016/01/12
'꽃미남 작가' 이강욱 '금의환향' 아라리오갤러리서 개인전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금의환향(錦衣還鄕)이다. 미술시장 스타작가 이강욱(39)이 7년간 공백을 깨고 화려하게 귀국했다. '5초만 보면 감이 온다'는 세계적인 100대 컬렉터이자 아라리오뮤지엄을 설립한 김창일 회장이 러브콜했다. 지난해 영국에서 돌아온 이강욱은 국내와 상하이에 갤러리를 둔 아라리오갤러리의 전속작가가 됐다. 긍정적으로 화랑의 시스템과 탄탄한 컬렉터가 구축된 갤러리에서 날개를 제대로 펼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의미다. 특히 내수시장이 한정돼 있는 만큼 해외 진출 무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탄탄대로가 열릴 전망이다. 2009년 영국 런던으로 유학가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작가는 작품도 변했다. 이강욱을 브랜드화한 '세포 그림'은 더욱 미시적이고 거시적으로 진화했다. 장식적이던 '큐빅'은 사라졌다. 오로지 '그리기'의 개념이 무장되어 '회화의 본질'을 탐색하게 한다. 6일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만난 이강욱은 "영국에서 '추상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고민했다"고 전했다. "6세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영국에 오니 '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있지?'와 '내가 왜 페인팅만을 하고 있지?'라는 물음이 다시 생겨나더군요" 몸의 일부를 확대해 보기도하며 실험적이고 상상적이던 작가의 사고는 구체화됐다. "이전에는 왜 하는지, 내용이 무엇인지 등의 서브젝트(문제)가 중요했다. 하지만 상대적 개념들은 차이가 있는게 아니라 일관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대 힌두 철학의 텍스트인 우파니샤드'에 몰입하면서다. 그는 "보편성과 개별성, 미시적 공간과 거시적 공간 등 수없이 많은 우주의 대립적 요소들이 역설적으로 서로 닮아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로 연결될 가능성을 지님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왜 회화적 방법을 고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화면으로 옮겨졌다. '회화 자체'에 대한 관심은 '행위'로 드러났다. 반복적인 행위가 남긴 흔적들은 캔버스위에 시각적 결과물로 고착되고, 화이트를 기반으로 한 여러 색상들은 색으로서 존재하기보다 하나의 개별적 '톤'으로 자리했다. 그렇게 나온 신작을 그는 '제스처(Gesture)'로 타이틀을 달았다. 타원과 드로잉으로 된 무제와 달리 '제스처'는 하나의 점과 색면의 융합이다.'스밈과 우러남'이 돋보인다. 외국에서 꽃핀 한국인의 정서로 보인다. 스펀지로 살짝 찍어낸 옅은 색면과 수많은 점들이 박힌 화면은 웅성웅성 무한공간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미술비평가 정연심(홍익대)교수는 "극도의 노동을 요하는 세밀화처럼 보이지만, '추상처럼' 보이는 신추상의 세계"라고 평했다. 하지만 '국내외의 추상화가들이 대부분 '주제의 배제'라는 명목으로 스토리를 제거하였던 역사적 맥락과는 상반된 부분'이라고도 했다. "작가가 그린 신추상은 우연한 감정을 울림을 표현한 것도 아니고, 내적 필연성에 따라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글을 써내려가듯이 독백조의 이야기가 리듬을 따라 자리잡은 '회화적 공간'"이라는 분석이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이강욱은 대한민국회화대전 대상(2001), 동아미술상(2002), 중앙미술대전 대상(2002)을 휩쓸며 주목받았다. 2006~2007년 후끈 달아올랐던 국내 미술시장에서 '라이징 스타'로 부상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이 구상과 극사실회화로 '용호상박'할때도 그의 추상화는 낭중유추였다. 반짝이는 비즈와 함께 이뤄진 '선 드로잉', 일명 '세포 그림'은 폭발적이었다. 국내는 물론 일본 스페인 아르코아트페어등에 출품하면 매진을 기록했다. 작품은 '드로잉'이 극대화된 추상화다. 구체적인 형상은 없지만 색연필로 알갱이처럼 그린 점들과 반복되는 무수한 곡선들이 실타래처럼 이어졌고, 타원이 무한 증식한다. 유려한 리듬감이 흐르는 화면은 통제와 절제가 균형을 이뤘다. 단지 선과 색면이지만 세련됨이 빛나는 이유다. 제스처와 무한형상의 감각적 향연이 펼쳐진 귀국 신작전은 벌써부터 요란하다. "단색화를 계승하는 새로운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꽃미남 작가'로도 유명한 작가는 더 윤곽이 뚜렷해지고 눈빛이 강렬해졌다. 이번 개인전을 위해 작업에 몰두 한 탓인지 7~8kg이 빠졌다고 했다. 병신년 새해, 깊이있게 돌아온 '이강욱표 추상회화'가 미술시장의 시동을 걸고 있다. 수많은 타원과 알갱이같은 점들이 모여 무한 확장하는 작품은 직접 봐야 실감난다. 전시 타이틀은 '역설적 공간:신세계'다. 7일부터 3월6일까지. 02-541-5701 hyun@newsis.com 2016/01/06
'설경' 김종학화백 "죽는 순간까지 그림 그릴거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겨울이 실종된 시대다. 눈이 펑펑쏟아지지도 않고, 추위도 예전만 못하다. 포근한 날씨가 이어져 '엄동설한'이라는 말도 '진짜 옛말'이 되고 있다. 이제 겨울도 그림에서나 볼수 있는 계절이 되는 걸까. 하지만 '설경'그림도 많지않다. 미술시장에서는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화려한 꽃그림이나 초록의 짙푸른 봄 여름풍경과 달리 '겨울 그림'은 인기가 없다. 인생의 끝자락처럼 보이는 '겨울 그림'은 생동감보다는 우울함과 스산함을 전하기때문이다. 풍경화로 국내 미술시장 블루칩작가는 단연 김종학 화백(80)이다. 40여년전 설악산으로 들어가 담아내온 '설악풍경'은 미술시장을 흔들었다. 2007년엔 없어서 못팔 정도였고, 경매시장에서는 작품값이 억대로 치솟으며 낙찰이 무섭게 이어졌다. 모두 자연이 화폭에서도 미칠듯 꿈틀거리는 '봄 여름' 풍경이었다. 당시에도 '설경'은 '설악풍경'에 비해 주가를 높이지 못했다. 하지만 병신년 새해, 여든이 된 김 화백이 다시 보여주는 '설경'은 느낌이 다르다. 설악의 요동치는 내면을 하얀눈으로 덮어버린 풍경은 설경은 '숭고한 자연의 골격'을 보여준다. "자연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같은 계절의 같은 장소에서 만난 자연일지라도 지금과 나중의 모습이 또 다르다. 마흔에 보았던 설악과 여든을 앞둔 지금의 설악은 다르게 보인다. 사람들이 모두 다르게 생겼듯이 같은 종의 꽃도 열심히 쳐다보면 다 다르다. 그래서 자연의 품에 안겨 가까이에서 잘 들여다 보아야 한다. 사십대 이후부터 계속 그려운 설악은 김 화백의 영감의 원천이다. "설악에서는 문만 열어도 천지가 그림의 소재이고 영감의 원천이었다. 겨울의 내리는 눈은 정말 아름다웠고 눈 내린 풍경은 고하고 적막했다. 그렇게 겨울이 나에게 다가왔고 겨울이 오면 겨울을 그리고 있다.” 김 화백은 "“자연이 잉태해 주어야 화가는 새 생명인 작품을 만든다”며 "겨울은 가장 아름다운 절기"라고 극찬했다. 김 화백이 50년의 화업중 처음으로 '설경'만을 모아 부산 조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지난 2011년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연 회고전 이후 4년만에 펼친 전시다. 설경은 작가의 인생의 시기와 비슷하게 비춰진다. 감정 기복에 영향을 받지않고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필력은 젊은 시절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춤을 추듯 그려나간 이전 필력 보다 천천히 눈위를 걸어가는 듯 떨리는 필력은 더 농후하고 짙다. 설악의 바위산이 장엄하게 표현된 두터운 마티에르는 붓으로 그려나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직접 모래를 안료와 섞어 무심하게 바른 행위는 물감으로 표현될수 없는 질감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도전이 엿보인다. "난 나이를 느끼지 않고 50대 정도로 내 나이를 착각하며 지낸다.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일요일 하루만 쉬고 매일 5시간 이상 꾸준히 그림을 그린다." 김 화백은 "대작을 그리는 것이 재미있다"며 "붓을 휘두르고 싶다"고 했다. "휘두르는 만큼 그 만한 감동을 준다. 예전처럼 10m를 늘여놓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나는 그럴수 있다고 믿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릴거다. 그렇게 죽는게 화가로서는 최고의 죽음이라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도 난 화가가 될 것이다." 1964년부터 해마다 이어온 이번 개인전에는 가로 2m가 넘는 대형작품부터 소반에 그려진 소품까지 각 작품마다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다양한 겨울풍경이 40여점이 전시됐다. 자연의 선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펼쳐나간 뽀족한 산맥과 아무도 밟지 않은 산골짜기가 흰눈에 덮여 ‘순수(純粹)의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겨울은 끝이 아니라 다음에 돌아올 봄을 준비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계절이다. 김종학 화백의 '설경'전은 2월14일까지 이어진다. 051-747-8853 hyun@newsis.com 2016/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