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억 대 프리즈 vs 8만 명 키아프…두 서울 아트페어의 명암 아트페어는 미술품을 모아놓고 세계 각국 갤러리들이 벌이는 전쟁터다. 자본주의의 최전선, 그 판은 결국 상위 2%가 좌우한다. ‘얼마에 팔렸나’라는 머니게임은 파워 작가를 거느린 메가 갤러리들의 잔치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자신 있게 판매 리스트를 내걸고, 동시에 작가를 알리는 데도 게으르지 않다. 서울은 지난 4~5일간 두 얼굴을 보여줬다. 프리즈 서울은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미국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품이 약 62억 원에 판매됐고, 현장에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딸 말리아가 직접 찾아와 응원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이벤트’로 소비된 셈이다. 특히 하우저앤워스는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브래드포드, 루이즈 부르주아, 이불 등 전속 작가들이 한국 미술관과 갤러리를 동시에 누비며, 미술관·갤러리·아트페어 3박자를 맞춘 전략적 행보를 펼쳤다. 이는 컬렉터를 겨냥한 철저한 맞춤 공략이자, 서울을 동시대 미술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신호다. 공식 매출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글로벌 메가화랑들의 수십억 원대 거래가 이어지며 총 1000억 원 이상이 오간 것으로 관측된다. 나흘간 7만 명이 몰리며 프리즈 서울은 ‘세계 미술 캘린더’에 확실히 이름을 올렸다. 5일간 열린 키아프는 해외 화랑 비중을 30%까지 끌어올리며 국제 아트페어로서 면모를 강화했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대만, 미국, 태국, 스페인 등 다양한 국가의 갤러리들이 참여해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8만2000명의 관객과 활발한 중저가 거래로 선전했지만, 여전히 프리즈의 그늘과 ‘체급 차이’라는 현실은 드러났다. 홍보에서도 온도차가 뚜렷했다. 프리즈 서울은 공격적 마케팅을 이어간 반면, 키아프는 알리기를 주저하는 ‘조심 마케팅’으로 분위기를 갈랐다. 행사 전 공동 기자회견에 이어 프리즈는 개막 직후 사이먼 폭스 CEO가 한국 기자들과 만나 판매 열기와 향후 전략을 강조했다. 반면 키아프는 VIP 응대에 치중하며, ‘프리즈 뒤를 따라가는 듯한 뒷북 이미지’를 남겼다. 사이먼 폭스는 “김혜경 여사의 방문은 매우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한국 미술 시장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정부에 간접적으로 먼저 화답했다. 이어 “미술 시장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전반적으로는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며 고가 매매 성과를 부각시켰다. 프리즈 서울 관련 기사는 개막 직후부터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공동 개최에서, 한국 화랑 30곳이 프리즈 서울에 입성한 것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는 프리즈의 치밀한 ‘서울 침공 전략’으로도 읽힌다. 12곳만 키아프에 동시 참가했고, 나머지 18곳은 키아프를 포기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프리즈 부스비는 1억5000만 원대, 키아프는 최대 8000만 원 선. 불황 속에서 두 곳을 모두 치르기엔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럼에도 화랑들이 프리즈를 택하는 건 글로벌 무대가 주는 ‘프리미엄 효과’ 때문이다. ‘빈익빈 부익부’ 속 한국 미술시장의 구조적 문제도 여전하다. 작품 판매 가격이 공개되는 순간 세무 추적을 우려해 갤러리들은 노출을 꺼린다. 화랑협회 측 역시 “구매자가 특정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가격 공개를 회피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프리즈는 판매 여부나 가격을 전면적으로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고급스러운 관례’로 포장한다. 글로벌 메가화랑들은 개별 세일즈 리포트를 언론에 흘리며 초고가 매매를 경쟁적으로 알린다. ‘얼마에 팔렸다’는 정보가 곧 뉴스가 되고, 다시 마케팅으로 환원되는 구조다. 한국화랑협회 이성훈 회장은 “프리즈 서울에서는 초고가 매매가 주목받았지만, 키아프는 국내 화랑 중심이라 수십만~수백만 원대 거래가 많아 화랑에는 실질적 도움이 된다”며 “올해는 부스 퀄리티가 높아지고 동선도 쾌적했다”는 평가를 전했다. 불황 속에서도 두 아트페어가 선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미술 소비가 ‘구매’에서 ‘경험’으로 전환되면서, 프리즈의 셀럽 효과와 키아프의 대중 관람객 유입이 흥행을 이끌었다. 아트바젤 홍콩의 불안정 속에 서울이 아시아의 새로운 허브로 자리 잡으며 해외 갤러리와 컬렉터의 발길도 집중됐다. 여기에 LG와 KB금융 등 기업 후원이 맞물려 시장의 버팀목이 됐다. 소비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VIP 프리뷰로 문을 열고, 셀럽과 세계 미술계 인사 명단을 공개하며 ‘위상이 높아진 행사’임을 과시했다. 특히 영부인과 연예인 방문 소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긴 줄이 늘어섰다. 전시장 앞 풍경은 이제 작품을 향한 경배라기보다, ‘맛집 줄’을 닮아 있었다. 미술은 더 이상 소유만의 영역이 아니다. 1인 가구의 확산, 스마트폰 속 무한한 이미지, 1만 원짜리 포스터와 굿즈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시대. 경험을 산다는 감각이 시장의 새로운 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트페어 피로감’은 뚜렷하다. 전 세계 도시마다 페어가 쏟아지고 풍경이 비슷해지면서, MZ세대는 ‘대형 쇼핑몰’ 같은 인식 속에 매력을 잃고 있다. 프리즈 서울이 막을 내리기도 전에 뉴욕에서는 아모리쇼가 개막했고, 컬렉터들은 다시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프리즈 서울은 이제 아트바젤 홍콩이 쥐고 있던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을 서서히 대체하고 있다. 2022년 키아프와 공동 개최로 출범해 서울을 글로벌 미술시장의 한 축으로 끌어올리며 관광까지 아우르는 문화 행사로 성장했다. 코엑스가 리모델링에 들어가지만, 프리즈와 키아프 모두 내년에도 코엑스 개최를 확정하며 서울을 중심 무대로 고수했다. 그러나 공동 개최는 내년 단 한 번만 남았다. 사이먼 폭스 프리즈 CEO는 “서울이 아시아 미술 허브로 도약하며 5년, 10년 이상 지속되기를 바란다”며 서울을 떠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미 약수동에 ‘프리즈 하우스’를 개관해 1년 내내 상설 전시를 열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면 키아프는 “회원들과 투표를 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원론적 답변만 반복하며 향후 행보를 저울질하고 있다. 세계 미술시장이 75조 원 규모로 추산되는 가운데, 1조 원 남짓한 한국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무대에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도 프리즈 서울의 성과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프리즈는 서울에 맞춰 전략적으로 튜닝됐다”며 “이제 프리즈 없이는 키아프가 공생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프리즈가 서울을 세계의 지도 위 축제로 새겨 넣을 때, 키아프는 여전히 계산기만 두드리며 그 곁을 서성인다. 아트페어는 그림을 보기만 하는 전시장이 아니라, 자본이 충돌하는 전쟁터다. 언제까지 우리는 ‘빈익빈 부익부’라는 낡은 위로에 안주할 것인가. 그 순간 권력은 외부 플랫폼에 집중된다. 이제 문제는 감상이 아니라 거버넌스다. 키아프가 가격·세금·홍보에서 표준을 세우지 못한다면, 내년 이후 서울 미술의 서막은 프리즈가, 본문은 해외 메가화랑이 써 내려갈 것이다. 서울은 빛났지만, 내일의 서술자가 프리즈만 된다면 한국 미술은 곧 들러리에 머물 것이다. 2025/09/08
김수자, 거울과 보따리 한국적 초현실로…SK 선혜원 개방 첫 전시 ‘보따리 작가’ 김수자(68)가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한옥에서 ‘호흡’한다.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였던 전통 한옥 선혜원(鮮慧院)이 문을 열고 첫 전시로 김수자를 초대해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 1.0’을 선보인다. 포도뮤지엄(총괄디렉터 김희영)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세계적으로 활동해온 김수자의 작품이 한국 전통 건축물에 설치되는 첫 사례이자, 그의 서울 복귀전이다. 지난 7월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 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한 김수자는 회화와 바느질,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집과 정체성, 그리고 인류 보편의 문제를 사유해 온 세계적 작가다. 1990년 첫 개인전 이후 ‘이동’과 ‘몸’을 주제로 전통 보자기와 영상, 설치,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왔다. ◆선혜원, 또 다른 보따리 2일 서울 삼청동 선혜원에서 만난 김수자는 “선혜원은 또 다른 보따리”라고 말했다. “‘경흥각의 문을 여는 순간, 이건 두말할 것 없이 거울 작업이라 내가 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통 건축과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1990년대 양동마을에서 시작된 보따리 작업 이후, 그는 줄곧 건축 속 새로운 설치를 꿈꿔왔다. “보따리의 건축적 해석이 이번 ‘호흡’의 출발점”이라는 설명처럼, 건축 자체는 하나의 보따리로 재해석되고 관객은 그 안에서 자연스레 퍼포머가 된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경흥각 바닥을 거울로 채운 '호흡–선혜원'(2025)은 수백 년 된 소나무로 만든 한옥의 천장, 서까래와 지붕을 반사시키며 실제와 허상이 겹쳐지는 체험을 만들어낸다. “위와 아래가 맞붙는 황홀한 경험.” 관객은 거울 위를 걸으며 발 딛고 선 자리가 또 하나의 하늘이 되고, 자기 자신조차 허공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압도감을 마주한다. 조선시대 왕실의 품격을 간직한 전통 한옥 전각 경흥각은, 김수자의 거울 설치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흐르며 사유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작가는 “한옥 공간의 거울 작업은 외국인 관객이 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전통 건축이 품은 시간성과 거울 설치가 만들어내는 초현실적 압도감은 세계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한국적 초현실’이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을 ‘거울 왕국’으로 만들었던 '호흡'과는 또 다른 울림이다. ◆보따리, 기억의 껍질 김수자는 “거울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자기 자신은 비추지 않는다.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매체”라며, 이를 ‘펼쳐내는 바늘(Unfold Needle)’에 비유했다. 덮는 보따리와 펼치는 바늘 사이에서 인간은 감춤과 드러남 사이를 호흡한다. 그는 “‘호흡’은 결국 인간의 허스크(husk), 즉 몸의 기억과 삶의 흔적을 담는 껍질”이라며 “보따리와 호흡은 물질과 비물질, 기억과 시간, 삶과 패션(의복), 그리고 몸을 하나의 구조로 묶는 작업”이라고 덧붙였다. 삼청원 지하 복도에 놓인 3개의 '보따리', 독일 마이센 도자기와 협업한 '연역적 오브제–보따리'(2023), 평면 작업 '땅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2023) 등은 이러한 철학을 확장한다. 소박한 보따리는 결국 이주와 디아스포라, 삶의 전환기를 담아내는 이동식 보금자리다. 감싸는 행위는 곧 시간과 이동, 만남에 대한 명상이 된다. “숨 쉬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하는 증거다.” 김수자가 선혜원에서 펼친 '호흡'은 결국 우리 삶의 근원적 리듬을 되묻는다. 3일 개막하는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이어진다. ◆선혜원은?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로 출발해 인재 교육의 장으로 쓰이다, 2025년 4월 그룹 연구소 겸 컨벤션 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SK는 역사적 공간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선혜원 아트프로젝트’를 출범했고, 김수자의 개인전이 그 첫 무대를 장식했다. 무엇보다 SK가 전통 한옥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대 예술과 접목해 대중에게 개방한 것은 기업 문화공간의 모범적 사례로 읽힌다. 전통과 현대, 사적 공간과 공공의 영역을 이어주는 플랫폼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낸 셈이다. 한편 이번 김수자 전시는 ‘프리즈 서울’ 기간 지역 연계 행사 ‘삼청나잇’과도 연결된다. 4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선혜원을 야간 개방해 한옥의 정취 속에서 전시를 즐길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이 예정돼 있다. 전시는 10월 19일까지 열린다. 네이버에서 ‘선혜원’을 검색해 예약하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2025/09/02
분홍빛 ‘강령: 영혼의 기술’…오컬트인가, 인식의 실험인가 서울시립미술관 중앙홀에 들어서자, 관객을 맞는 것은 거대한 도상의 충격이다. 18세기 유럽에서 마녀를 요괴이자 악마를 출산하는 존재로 그려낸 그림(요하나 헤드바 재현작)이 벽면을 채운다. 말의 다리를 가진 여성의 괴기한 신체, 불길처럼 치솟은 머리와 기괴한 표정은 단숨에 시선을 붙든다. 최은주 관장은 “당대 여성에 대한 차별의 기록”이라며, 일부 작품에는 ‘보호자 동반’ 표시를 붙였다고 설명했다. 25일 개막한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은 누군가의 표현대로 “귀신을 불러들이는 전시”다. 제목부터 불안과 금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1층 전시장은 검은 공간으로 갈라져 이어지다 곧 분홍빛으로 전환된다. 벽과 바닥을 감싼 분홍색 벽면에 맞춰 푹신한 카펫까지 같은 색으로 깔려, 강렬한 분홍빛이 전시의 처음과 마지막을 포위한다. 지난해 선정되어 전시를 기획한 3명의 예술감독은 “색은 경험의 매개체다. 색은 언어에 앞서 직접적으로 소통된다. 전시에서 색은 작품을 연결하고 공간을 정의하며 전환을 나타내고 의미를 생성한다. 색은 단순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다”고 설명했다. 2024년, 역대 두 번째 공모를 통해 초대된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예술감독팀은 뉴욕에서 작가, 기획자,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는 안톤 비도클 (Anton Vidokel), 할리 에어스 (Hallie Ayres), 루카스 브라시스키스 (Lukas Brasiskis)다. 분홍색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과잉의 의미를 띠어왔기 때문이다. 무속과 불교의 상징으로, 때로는 서울시 캐릭터 해치의 색으로 소비됐으며, 최근에는 ‘주술 정치’ 논란 속에서 일본 종교와 연결되며 정치적 함의를 덧입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분홍빛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긴장을 호출하는 장치이자, 환대와 불안을 동시에 품은 신호로도 읽힌다. 전시는 그 분홍빛을 앞세워 관객을 ‘강령’의 현장으로 끌어들인다. ‘강령(Seance)’은 원래 영매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의식을 뜻한다. 19세기 말 서구의 심령술 붐 속에서 테이블에 둘러앉아 손을 잡고 영을 부르던 세션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감독들은 이 의미를 뒤틀었다. 억압된 지식, 주변부의 전통, 잊힌 역사, 정치적 죽음까지 불러내는 더 넓은 은유로서, 현실과 비현실, 과학과 영성, 합리와 신비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른 인식틀을 여는 통로’로 강령을 재해석했다. "이번 '강령: 영혼의 기술'은 하나의 질문, '현대미술과 동시대 미술의 발전에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경험은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에서 출발했다." 안톤 비도클 예술감독은 “신세대 예술가들이 샤머니즘, 점성술, 테크노 신비주의 등 기존 지식 체계 바깥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며 “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응답”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맥락도 의식했다. “특정 주술가와 대통령의 관계가 있다는 언론 보도를 면밀히 주시해왔다”는 것이다. 주술 정치의 흔적이 여전히 생생한 이 땅에서 ‘강령’이라는 주제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순수한 것은 없다”며 모든 영적 실천이 치유와 해방의 가능성과 동시에 파괴와 억압의 위험을 안고 있음을 강조했다. 할리 에어스 감독은 “이번 전시는 한국 샤머니즘만을 주목하지 않는다”며, 세계 여러 지역의 영적 실천을 함께 살펴보고 그것이 국가주의적 프로젝트에 오용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했다. 동시에 상업화된 소비를 넘어 또 다른 해석 가능성을 제안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임을 분명히 했다. 루카스 브라시스키스는 ‘영혼의 기술’을 자본주의적·추출주의적 기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근대성의 전개는 과학과 영적 실천의 틈을 넓혔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 틈을 다시 연결하는 시도입니다. 영적 실천을 또 다른 기술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마지막 블랙박스 작업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태국 감독 아노차 수이착폰은 2010년 시위 도중 국가 폭력으로 숨진 청년들을 불러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그의 장편영화 리허설 장면입니다. 과거의 장면을 서울로 불러오며 정의와 치유를 모색하는, 강령적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긴장이 발생한다. “오직 이성으로만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들의 전제는 계몽주의적 틀을 흔들며 예술적 상상력을 확장한다. 하지만 AI까지 발달한 과학문명의 시대에 이는 자칫 “이성을 버리고 미신과 주술에 빠지는 태도”로 비칠 위험이 크다. 한국 사회가 이미 ‘주술 정치’라는 경험을 겪은 만큼, 그 오해는 더욱 예민하다. 그렇다면 관건은 이것이다. 예술이 영적 세계를 탐구하면서도 어떻게 지적이고 비판적인 힘을 유지할 수 있는가. 마녀의 괴상한 형상, 불타는 석상, 자동기술 드로잉, 사이버 마녀 선언문… 장면들은 강렬하지만 설명은 부족하다. 기획자들은 다원성과 리서치를 강조했지만, 일반 관객에게 남는 건 난해함의 피로일 수 있다. ‘연구 전시’는 곧 ‘배제의 장치’가 된다. 전시는 총 11개의 소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대미술의 혁명적 실천과 동시대 미술의 계보를 잇는 영적 실험의 역사를 영화,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 드로잉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통해 조명한다. 전시에 초대된 참여 작가는 50명(팀)이다. 다시 분홍으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공간에서 브라이언트 3세의 의례적 조끼와 아노차 수이착폰의 정치적 희생 소환은 분명 울림을 남긴다. 그러나 동시에 질문이 뒤따른다. 이 소환은 서울이라는 맥락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맞닿아 있는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은 과연 귀신을 부르는 의식인가, 아니면 우리가 외면해온 지식과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행위인가. 감독들이 말하는 억압된 영적 상상력과 이단적 지식의 복권을 통해, 이번 전시가 위기의 시대에 다른 인식의 방식을 제시하려는 실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실험이 얼마나 널리 읽히고, 얼마나 설득력 있게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술은 종교의 어머니”라는 선언으로 전시 기획을 시작한 예술감독들은 이렇게 말했다. “강령으로 무대화된 이번 전시는 마법을 걸고, 매혹하고, 전달하고, 방해하길 원한다. 익숙한 지각의 논리에서 한 발짝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고, 알고, 존재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포털이 되고자 한다.” 예술은 시대의 산물이다. 해석도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순수한 색은 없다”는 말처럼, 다양한 해석의 연결고리로 열려 있다. 서울은 지금, '강령'의 무대다.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낙원상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청년예술청에서 11월 23일까지 이어진다. 2025/08/25
“성급한 컬렉터를 노린다”…미술 사기 매뉴얼 미술 시장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 뒤편에는 어떤 덫이 숨어 있을까? “싸게 준다”는 말은 달콤하지만, 그 순간부터 이미 사기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진짜 좋은 그림은 가격을 깎지 않는다는 말처럼, 미술품 거래 세계에서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은 어쩌면 가장 냉정한 진실이다. 국제 미술 플랫폼 아트시(Artsy)가 최근 발표한 '5 Art Scams Every Art Buyer Should Know-and How to Avoid Them'은 미술 시장에 만연한 사기 유형 다섯 가지를 조목조목 짚으며, 수집가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예방책을 제시했다. 한국에서도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이우환 등 거장들의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만큼, 이번 가이드는 국내 미술 애호가들에게도 의미심장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술 사기는 ‘시장 구조의 투명성’ 문제와 직결된다. 결국 수집가·갤러리·경매사 모두가 프로비넌스 검증, 감정 시스템 보강, 계약 절차의 투명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 다시금 확인된다. ◆위작(Forgeries) 가장 전형적이고 치명적인 사기 유형이다. 작가 친필처럼 꾸며진 위작이나, 조작된 감정서를 동원해 작품을 정당화한다. 미술 시장에서는 작품의 진위 여부 하나가 수십억 원을 오가는 가치를 좌우하기 때문에, 위작은 거래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실제 사례로 2024년 이탈리아에서는 클림트, 달리 등 거장 이름을 도용한 위작 2100여 점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추정 가치만 약 2억6500만 달러. 위작은 단순한 개인 피해를 넘어 시장 신뢰를 송두리째 흔드는 범죄다. ▶예방책: 작품의 프로비넌스(provenance, 소장 이력)를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발급한 감정서를 확인하고, 작가·갤러리가 제작한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와 대조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피싱(Phishing)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덫이다. 유명 갤러리를 사칭한 이메일이나 SNS 계정을 통해, 마치 진품을 급매로 내놓은 것처럼 속인다. 이메일 주소가 미묘하게 다르거나, 맞춤법·문체가 어색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피카소 원화를 단독 판매한다”거나 “은행 계좌를 긴급 변경했다”는 식의 공지 메일이 있다. 실수로 송금했다가는 작품도 돈도 한순간에 사라진다. ▶예방책: 이메일만 믿지 말고 반드시 전화를 통한 교차 확인을 거쳐야 한다. 송금 계좌는 반드시 구두로 확인할 것. 작은 ‘레드 플래그’라도 보이면 즉각 거래를 중단하는 것이 상책이다. ◆가짜 구매자(Fake Buyers) 이번에는 반대로 ‘사는 쪽’을 사칭하는 경우다.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당신의 작품을 원한다”는 제안이 들어오면 솔깃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국의 한 작가는 유명인을 사칭한 사기꾼에게 작품을 넘겼다가, 수년 뒤 그 작품이 경매장에서 엉뚱한 이름으로 등장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예방책: 유명 인사를 내세운 거래일수록 제3자의 검증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계약서 서명, 결제 조건, 대리인의 신원 등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조건이 지나치게 유리하다면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 ◆미끼 상품 & 바꿔치기(Bait-and-Switch) 존재하지 않는 작품을 미끼로 계약을 유도한 뒤, 엉뚱한 작품을 강매하는 유형이다. “원래 주문한 은색 작품은 품절이니, 대신 파란색 작품을 가져가라”는 식이다. 혹은 결제 단계에서 “7만 달러”라던 금액이 “8만 달러”로 교묘히 바뀌는 수법도 있다. ▶예방책: 반드시 갤러리나 판매처에 직접 방문해 작품을 확인해야 한다. 계약서에는 작품명, 이미지, 크기, 가격을 상세히 명시하고, 사후 변경이 불가능하도록 조항을 넣는 것이 안전하다. ◆가격 사기(Pricing Scams) 판화나 에디션 작품에서 특히 빈번하다. 같은 에디션임에도 유통처·출판사에 따라 가격을 과도하게 부풀리거나, 운송비·세관비 명목으로 추가 금액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거래에서는 작품보다 부대 비용이 더 커지는 황당한 상황도 발생한다. ▶예방책: 공식 유통처 시세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운송·보험·세금 내역은 투명하게 증빙을 요구하고, 지나치게 ‘싼 가격’에는 반드시 의심의 눈초리를 가져야 한다. ◆결론: 성급함이 가장 큰 적 아트시는 이 모든 사기 유형의 공통분모를 이렇게 정리한다. “Due diligence, due diligence, due diligence(꼼꼼한 확인)”. 사기꾼들이 노리는 건 늘 ‘성급함’이다. 진정한 컬렉터라면 좋은 작품 앞에서조차 성급해지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신뢰할 수 있는 갤러리·경매사와 거래하고, 의심되는 순간 거래를 멈추는 것이 최선의 방어다. 미술품은 부동산이나 주식보다 더 예민한 자산이다. 작품 하나가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러니 “싸게 준다”는 말이 들리는 순간, 오히려 더 비싸게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림은 ‘가격’으로 사는 게 아니라 ‘진가’로 사는 것임을 잊지 말자. 결국 예술에서 가장 값진 태도는, 가격을 깎는 게 아니라 눈을 높이는 일이다. 2025/08/22
작가와 갤러리 50:50?…불문율의 그림자 “작품을 만든 이는 작가인데, 왜 절반밖에 가져가지 못하는가.” 수십 년간 미술 시장을 지탱해온 ‘50:50 룰’. 작가와 갤러리가 판매 대금을 똑같이 나누는 불문율이 흔들리고 있다. 논쟁은 미국에서 먼저 불붙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한국 시장에도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 분배 구조는 여전히 정당한가. 8월은 늘 뉴욕 미술계가 숨 고르는 달이지만, 올해의 정적은 유난히 무겁다. 미국 아트딜러협회(ADAA)의 대표 행사 The Art Show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페어는 단순한 거래의 장을 넘어, 130년 역사의 비영리 기관 헨리 스트리트 세틀먼트를 위해 지금까지 38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해온 사회적 플랫폼이었다. 그 공백은 곧장 작가, 갤러리, 커뮤니티, 나아가 미술 생태계 전체에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이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페어 취소’가 아니다. 갤러리 비즈니스 모델의 불안정성, 그리고 무엇보다 관행처럼 유지돼온 ‘50:50’ 수익 배분 구조가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사실 ‘50:50’은 한국 화랑시장에서도 오랜 불문율이었다. 작가는 갤러리의 몫을 의심 없이 인정했고, 화랑은 전시 공간과 홍보, 컬렉터 네트워크 제공을 명분 삼아왔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는 다르다. 인스타그램과 온라인 뷰잉룸을 통해 직접 고객을 만나고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는 신진 작가들에게 이 질문은 더욱 예리하다. “갤러리의 기여가 정말 절반에 해당하는가?” 정준모 미술비평가는 이 구조의 뿌리를 짚는다. 그는 “작가들이 수십 년간 각자도생하다가 70줄에 들어서야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면, 그제야 화랑이 절반을 가져가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레오 카스텔리가 젊은 야스퍼 존스와 라우센버그를 발굴해 전 생애를 함께하며 ‘5:5 구조’를 만들어낸 사례를 언급하며, “우리 화랑들은 과연 그 자격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물론 국내 화랑들이 KIAF, 프리즈 서울 등 국제 아트페어 참가 비용을 감당한다는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정 비평가의 지적처럼, 실질적 지원과 관리가 부재한 구조에서 ‘절반의 몫’은 점점 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정 대표는 50:50 구조의 기원 자체를 문제 삼았다. “사실 5:5가 굳어진 건 1990년대 말, 점잖은 화랑들을 중심으로 전속제가 시행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전속 개념도 없이 단기 전속이나 일회성 계약에도 5:5를 적용하는 건 무리지요. 외국은 20~30년에 걸친 전속 관계 속에서 ‘윈윈’하며 만들어진 구조인데, 한국 화랑들은 국제적 관례라는 이유로 분배 문제만 국제 룰을 들이대는 겁니다. 말이 안 되죠. 해외 화랑들은 작가의 미술관 전시를 위해 로비하고 펀딩을 하며, 고객들을 미술관 후원회에 가입시키는 등 온갖 일을 다 합니다.” 국내 화랑들이 KIAF, 프리즈 서울 등 국제 아트페어 참가 비용을 감당한다는 논리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정 대표의 지적대로 실질적 지원과 관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절반의 몫’을 주장하는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 발상에 가깝다. 같은 초대전 타이틀을 달고 열리는 개인전이라도, 갤러리의 투자와 지원 수준은 제각각이다. 한 전시기획자는 이렇게 꼬집는다. “제대로 된 초대 개인전은 ‘도어 투 도어’를 기본으로, 작업실에서 전시장 설치와 반출까지 갤러리가 책임집니다. 개막식 케이터링, 홍보, 도록 제작, 고객 초청 및 관리, 부대 행사, 사후 관리까지 모두 지원하는 것이죠. 그런데 일부 갤러리는 단순히 공간 제공과 엽서 제작만 해놓고도 50% 배분을 요구합니다. 이는 공정하지 못한 사례입니다.” 그는 이번 논의가 단순히 분배 구조의 재검토를 넘어, “제대로 된 지원 체계를 지키는 갤러리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 그리고 컬렉터의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 중견 작가 김남표는 단호했다. “갤러리는 본질적으로 공익이 아니라 비즈니스입니다.” 해외 갤러리가 더 낫다는 환상도 일축한다. “외국에는 갤러리를 견제할 컬렉터가 있지만 한국에는 없습니다. 사실은 갤러리보다 컬렉터가 더 심하죠. (작가인) 우리는 갤러리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어디서든 미술가는 이 조건을 견뎌왔고, 예술은 그 속에서 꽃을 피워왔습니다.” 신생 화랑들은 오랜 ‘룰’을 따르면서도 균열을 내고 있다. 개관 5년 차 호리아트스페이스 김나리 대표는 현실을 짚는다.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화랑은 한 달 전시에 평균 2000만 원을 지출합니다. 결국 작가와 화랑의 역할 분담이 먼저이며, 판매금 배분도 그 비중에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실제로 세계 미술시장은 점점 더 ‘유연한 계약 모델(flexible contract model)’을 모색하는 추세다. 첫째, '슬라이딩 스케일(scaling model)'이다. 신진 작가일수록 갤러리의 투자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갤러리 몫을 높게, 반대로 경력이 쌓이고 시장에서 입지를 확보한 작가일수록 작가 몫을 늘리는 방식이다. 고정된 산식 대신 성장 단계별 분배 구조를 설계하자는 제안이다. 둘째, 매니지먼트형 갤러리 모델이다. 단순히 작품을 판매하는 ‘중개상’이 아니라, 아티스트의 장기적 커리어를 관리하는 파트너로 기능할 때 비로소 50%라는 몫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전시 기획, 국제 무대 진출, 미술관 네트워크까지 아우르는 전방위 지원이 전제돼야 한다는 의미다. 셋째, 디지털 판매 플랫폼이다. 온라인 뷰잉룸과 SNS 채널이 확산되면서 갤러리의 독점적 권위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 작가가 직접 판매망을 구축하는 방식은 더 이상 미래형 가설이 아니라, 이미 시장에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다. 결국 논점은 ‘누가 더 가져가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가’다. 단순한 산식은 이미 무력해지고 있다. 화랑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작가의 동반자인가, 아니면 단순한 유통업자인가. 이 질문은 최근 불거진 ‘미술서비스업 신고제’ 논란과도 맞닿아 있다. 내년부터 시행될 신고제와 ‘재판매 보상청구권(추급권)’은 이 질문을 더욱 예리하게 던질 것이다. 예술 생태계는 단순한 장부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작가와 화랑의 동행, 제도의 뒷받침, 컬렉터의 책임이 삼각형처럼 맞물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미술시장은 여전히 ‘룰’을 두고 공방 중이다. 한국화랑협회 이성훈 회장은 “어영부영 시행되면 한국 화랑은 고사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50:50은 오랫동안 불문율처럼 지켜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 자체가 다시 질문이 된다. 이는 단순히 작가와 갤러리 사이의 ‘돈 문제’가 아니라, 누가 미래 미술 생태계의 주체가 될 것인가를 가르는 더 큰 물음이다. 예술은 시대의 거울이자, 경제의 풍향계다. 그리고 지금, 그 풍향은 확실히 바뀌고 있다. 작가와 갤러리의 싸움은 이미 구시대의 프레임이다. 진짜 경쟁자는 알고리즘과 데이터다. 5:5라는 산식은 더 이상 정의도, 설득력도 되지 못한다. 바뀌지 않는 쪽이 먼저 시장에서 퇴장할 것이다. 2025/08/18
포도뮤지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김희영 “사랑은 혁명적 에너지” 천장에서 내려온 철근 구조물 속, 1.6톤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모나 하툼(Mona Hatoum)의 'Remains to be Seen'은 전시 첫 장면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붕괴 직전의 건축 잔해 같으면서도, 그 사이를 지나치는 순간 마치 우주를 떠도는 작은 운석처럼 초현실적인 세계로 끌어들인다. 제주 서귀포 포도뮤지엄이 9일 개막한 특별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We, Such Fragile Beings)은 '와우'로 시작해 ‘우와’로 끝나는 감동의 여정을 선사한다. 전시의 출발점은 1990년, 보이저 1호가 64억 km 떨어진 심우주에서 촬영한 지구의 모습이었다. 칼 세이건이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 명명한 그 사진 속 지구는 먼지알갱이보다 작았다. 이 전시를 기획한 포도뮤지엄 김희영 총괄디렉터는 “가끔씩 우주의 스케일을 떠올리는 건 생각의 분모를 키우는 일”이라며, 일상에 갇힌 시선을 우주적 거리로 확장해 보자고 제안한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 당신이 아는 모든 이가 하나의 점 위에 있습니다.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는 64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진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사진 속 지구는 한낱 작고 창백한 푸른 점이었습니다. 그 작은 점 위에서 인류는 태어나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미워하다 결국 사라집니다. 우리는 때로 눈앞의 현실이 너무도 절대적으로 느껴져 일상에 압도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광활한 우주와 비교하면, 인간의 삶은 찰나보다 짧고, 먼지처럼 미미한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 겸허한 인식에서 출발했습니다."(김희영 총괄디렉터) [[[[:newsis_inyoung_center_end:]]]] 이 전시는 무겁고 파격적으로 시작하지만, 작가들의 시선 속에서 아름다움과 희망을 발견하고 폭력에서 치유로 나아가는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총 13명. 제니 홀저(Jenny Holzer), 로버트 몽고메리(Robert Montgomery), 모나 하툼(Mona Hatoum), 마르텐 바스(Maarten Baas), 사라 제(Sarah Sze), 애나벨 다우(Annabel Daou), 라이자 루(Liza Lou), 쇼 시부야(Sho Shibuya), 수미 카나자와(Sumi Kanazawa), 송동(Song Dong) 등 세계적 작가들과 함께 부지현, 이완, 김한영 등 국내 작가들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제1전시실: '망각의 신전' 전시는 의도적으로 불편한 현실부터 직시하게 한다. ‘망각의 신전’이라 이름 붙인 첫 공간은 증오와 폭력이 반복되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지만 작품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베니스비엔날레와 카셀 도쿠멘타를 석권한 모나 하툼, 권력 언어를 해부해온 제니 홀저(Jenny Holzer)가 문을 연다. 하툼은 난민의 시선으로, 홀저는 소셜미디어의 날 선 언어를 296개의 금속판에 각인해 현대사회의 민낯을 고고학 유물처럼 드러낸다. 라이자 루(Liza Lou)는 남아공 줄루족 여성과 함께 인종차별의 상징인 철조망을 수백만 개의 비즈로 덮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옥'을 만들어냈다. 애나벨 다우(Annabel Daou)는 시민 대화에서 길어 올린 일상의 언어로 분열 너머의 공통분모를 '우리'로 통합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2전시실 '시간의 초상' 두 번째 전시실은 시간을 ‘흘러가는 추상’이 아니라, 얼굴과 표정을 가진 구체적 존재로 불러낸다. 네 명의 작가인 수미 카나자와, 마르텐 바스, 사라 제, 이완은 저마다 다른 언어로 시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수미 카나자와(Sumi Kanazawa)는 연필로 빽빽하게 뒤덮인 신문 수백 장을 커튼처럼 이어 붙였다. 하루하루의 흔적이 켜켜이 쌓이며, 반복은 곧 시간의 질량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덜란드 디자이너이자 작가 마르텐 바스(Maarten Baas)는 이번 전시를 위해 시계바늘을 끝없이 조립하는 노동자들의 영상을 선보인다. 끊임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와 손놀림 속에, 초 단위의 칸막이에 갇힌 현대인의 초상이 겹쳐진다. 사라 제(Sarah Sze)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꿈속에서 공유하는, 놀랍도록 닮은 무의식의 풍경을 섬세하게 시각화한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도, 잠든 순간 펼쳐지는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직물처럼 이어진다. 이완은 560개의 흰 시계가 제각각 다른 속도로 째깍거리는 설치를 통해 각자가 체감하는 시간의 불협을 물리적으로 드러낸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처음 선보였던 이 작업은 빠르든 느리든 유일하게 동일한 진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고요하게 각인시킨다. ◆테마공간: 유리 코스모스, 우리는 별의 먼지다 포도뮤지엄의 시그니처인 테마공간이 이번 여정에도 고유의 호흡을 불어넣는다. ‘유리 코스모스’는 밤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수백 개의 유리 전구가 촘촘히 매달린 은하다. 이 전구들은 다양한 폭력의 생존자들과 치유자들이 함께 숨을 불어 만들어낸 유리 구체들이다. 관객이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기둥 센서에 숨을 불어넣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전구가 빛을 띠고, 그 빛이 연쇄처럼 번져 모든 전구가 차례로 깨어난다. 숨은 빛이 되고, 빛은 색이 된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하나둘 켜질 때마다 어둠 속에서 새로운 은하가 태어난다. 그 찰나의 장면은, 개인의 상처와 집단의 치유가 서로를 비추며 또 다른 세상을 함께 빚어낼 수 있음을 조용히 증언한다. 이어지는 ‘우리는 별의 먼지다’는 관객을 우주 한가운데로 이끈다. 거울로 둘러싸인 반원형 공간에 들어서면 LED 패널 수백 개가 벽을 감싸고, 붉은빛이 스며드는 가운데 먼 곳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울린다. 보이저 ‘골든 레코드’의 인사말이 55개 언어로 흐르고, 일출과 석양, 대지와 도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는 영상이 파도처럼 번져간다. 거울 속의 자신은 끝없이 복제되어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무수한 점들 속에 스며든다. 별의 먼지로 태어난 우리가, 서로를 비추는 작은 빛이 될 수 있음을 이 공간은 찬란하게 속삭인다. ◆3전시실:기억의 거울 3전시실은 포도뮤지엄의 ‘ACA in PODO’ 프로젝트로,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의 세계가 은하처럼 모였다. 부지현, 김한영, 송동, 쇼 시부야. 네 명의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서로 다른 언어와 질감으로 던진다. 부지현의 폐집어등은 바닷바람이 멈춘 듯한 하얀 바다를 만들어내고, 김한영의 화면에는 수천, 수만 번의 붓질이 축적한 시간이 빛의 알갱이처럼 박혀 있다. 송동은 베이징 철거 현장에서 건져 올린 낡은 문들을 기대어 세워 서로의 무게를 지탱하게 하고, 쇼 시부야는 뉴욕타임스 매일의 뉴스 위에 인간사의 격렬한 소란과 회화적 평온함을 봉인했다. 모두가 작은 일상의 반복이 품은 위로와 회복의 힘을 이야기하며, “부서진 세상에도 아름다움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은 우리의 소소한 시선 속에 숨어 있다”는 명료한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김한영(70)화백의 화면은 멀리서 보면 단색화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전혀 다른 우주가 열린다. 기름을 거의 쓰지 않은 유화 물감을 붓끝으로 찍어내며 쌓은 뿔 모양의 물감 입자들이 캔버스 위에서 별자리처럼 솟아올라, 트위드 천 같은 결을 직조한다. 김희영 디렉터의 입시미술 스승이기도 한 그는 “10년 전부터 이어온 작업이 이번 전시의 주제와 이렇게 맞물릴 줄 몰랐다”며 환하게 웃었다. ◆야외정원 새 조성 "LOVE IS THE REVOLUTIONARY ENERGY THAT ANNIHILATES THE SHADOWS AND COLLAPSES THIS DISTANCE BETWEEN US.” 야외 정원에는 로버트 몽고메리의 LED 문구가 낮에는 흰빛, 밤에는 환한 빛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2022년 루브르 박물관 튈르리 정원에서도 선보였던 이 한 문장은, 이번 전시의 여정을 관통하는 숨은 축이다. “사랑은 어둠을 소멸시키고, 우리 사이의 거리를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에너지다.” 이는 단순한 휴머니즘의 표어를 넘어, 복잡한 시대와 관계의 맥락에서 묘한 울림을 남긴다. 사랑이 때로는 한 개인의 운명을 바꾸고, 때로는 거대한 구조마저 흔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광고판을 시로 파괴하는 아티스트’로 불리는 몽고메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와 루브르 박물관 등 세계 무대에서 활동해온 영국 작가다. 그의 문장은 온라인에서 2억 회 이상 공유되며, 국경을 넘어 위로와 치유의 불빛을 전해왔다. 결국 이 한 줄은,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의 여정을 끝까지 걸어온 관객에게 사랑이야말로 가장 작지만 동시에 가장 거대한 힘임을 조용히 새겨 넣는다. ◆김희영 세계관 '공감'의 서사 김희영의 큐레이션은 유한한 삶 속에서도 이어지는 생명의 맥박을 감정의 진폭으로 직조한다. 2021년 시작된 ‘공감’ 시리즈의 네 번째 장인 이번 전시는, 7km로 축약한 지구 역사 속에서 불 사용 이후 인류의 시간이 1cm도 안 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압도적 시간 비율 속에서 인간은 한 줌의 ‘별의 먼지’이자, 결코 사소하지 않은 존재임을 빚어낸다. 김희영의 전시는 단순히 재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주제에 맞는 작가와 작품을 찾아내고, 설득해 한 방향으로 이끄는 기획력은 돈만으로 살 수 없는 영역이다. 유명 작가들의 작업을 ‘이 전시여야만 하는 자리’로 불러오는 힘, 그리고 때로는 불편한 시선에도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단단한 태도가 김희영을 전시 기획자로 올려세운다. ‘공감’ 시리즈는 매번 주제를 달리하지만, 그 뿌리에는 변하지 않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김희영은 이를 위해 매 전시마다 다른 장르와 국적, 세대의 작가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의 언어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낸다. 이번 전시는 우주적 시선에서 인간을 바라보되, 발걸음을 멈춰 서로를 비추는 ‘작은 빛’의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한층 확장된 스케일과 깊이를 품었다. 그의 전시는 예술성과 대중성의 경계 위에서, ‘인스타각’을 부르는 오늘의 감각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김희영이라는 이름이 만든 세계관이자, 관객이 함께 살아내는 시간의 기록으로 남는다. 광활한 우주 속, 부유하는 별의 먼지로 태어난 우리는 왜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가. 이 질문의 끝에서, 이번 전시는 서로의 빛이 될 가능성이 고요하지만 환하게 피어난다. 테마공간의 마지막, 벽면에 새겨진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가 조용한 명령처럼 남는다. ◆SK 제주 포도뮤지엄…100만 명 방문 2021년 개관한 포도뮤지엄은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이 총괄 디렉터를 맡아 전시를 펼치고 있다. ‘혐오’, ‘소수자’, ‘노화’처럼 무겁고 예민한 사회적 주제를 감각적으로 풀어내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향한 공감을 이끌어왔다. 덕분에 ‘제주에 가면 꼭 들러야 할 뮤지엄’으로 자리매김했고, 제주의 미술 문화 지형을 새롭게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4년간 누적 방문객은 100만 명을 넘어섰다. 서울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수준의 기획 전시를 선보이는 이곳은, 원래 SK㈜ 자회사 휘찬이 ‘다빈치박물관’으로 운영하던 제주 루체빌리조트 내 전시장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 탄생했다. 지상 2층·지하 1층, 연면적 2653㎡(804평) 규모에, 순수 전시공간만 440평에 달한다. 메인 전시장 1층은 층고 5.4m로, 대형 설치 작업도 거뜬히 품는다. 올해는 관람 경험을 확장하기 위해 주변 환경도 새로 단장했다. 앞뜰과 뒷뜰에 잔디 마당과 야외 공연장을 조성하고, 포도호텔로 이어지는 호젓한 산책로를 열었다. 야외 정원에는 로버트 몽고메리, 우고 론디노네, 김홍석의 조각 작품이 자리하며, 소나무 숲에는 덴마크 아티스트 그룹 ‘수퍼플렉스’의 그네가 곧 설치된다. 이번 전시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은 2026년 8월 8일까지 1년간 이어진다. 관람료 6000~1만 원. 2025/08/10
韓 현대미술, 한한령 넘다…박종규, 광동미술관 ‘외국인 생존 작가’ 첫 전시 “박종규는 동양 철학의 허무와 서양 정보 논리의 이진 체계를 시각 언어로 통합해온 작가입니다.” 중국 광저우 광동미술관 왕샤오창(王绍强) 관장은 박 작가를 ‘시각철학의 실천자’라 칭하며, 이번 전시를 “기술과 신체, 기억과 시간,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시대에, 사라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현존하는 존재들을 다시 감각하는 자리”라고 평가했다. 5일 광동미술관에서 개막한 박종규(59)의 개인전 '비트의 유령들'은 단순한 해외 초대전이 아니다. 광동미술관 개관 이래, 외국인 생존 작가로서는 최초로 바이에탄관 2층 전관을 단독 사용하는 대형 기획전이자, 한한령 이후 사실상 멈춰 있던 한국 현대미술의 중국 진출에 다시 불을 지핀 신호탄이다. 이날 뉴시스와 단독으로 만난 왕샤오창 관장은 “이번 전시는 단순한 작가 초청을 넘어선, 동아시아 예술 네트워크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1997년 개관한 광동미술관(Guangdong Museum of Art)은 중국 제3의 도시 광저우를 대표하는 공공 미술기관이다. 본관·바이에탄관·동산관 등 총 세 개의 전시관을 운영하며, 전체 건축 면적은 약 70,000㎡로,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기준 약 20,000㎡)의 3배를 웃돈다. 박종규의 전시가 열린 바이에탄관은 2021년 새롭게 개관한 신관으로, 중국 내 최신 미술관 건축 양식과 운영 시스템을 반영한 전시 플랫폼이다. 박 작가는 2층의 두개 공간 400여 평을 가득 채워 디지털 노이즈 기반의 회화와 미디어 설치작업을 대규모로 선보인다. 300호 크기의 대형 회화 20여 점, 영상 설치 40여 점을 포함해, 시트지와 물감을 겹겹이 쌓아 제작한 캔버스, LED 전광판, 몰입형 영상 룸 등이 관객을 맞이한다. [[[[:newsis_inyoung_center_start:]]]]“광동미술관은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술관 중 하나예요. 그런 공간에서, 살아 있는 한국 작가로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다는 건 정말 큰 영광이죠. 중국에서 한국 작가가 국가급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것 자체가 아주 드문 일이니까요.” [[[[:newsis_inyoung_center_end:]]]]전시장에서 만난 박종규 작가는 "제 인생에 있어 뜻깊은 전시이고 한국 작가로서도 매우 뜻깊은 전시”라며 감개무량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한국도 중국을 좀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고, 중국도 한국을 그렇게 크게 보지 않는 면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3년에 걸쳐 세 차례의 심사를 통과해 이 전시를 열 수 있었다는 건, 제 인생에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박 작가의 이 말은 단순한 해외 전시를 넘어 양국 문화 교류의 실질적인 가능성과 예술 외교의 장을 열었다는 자부심으로 읽힌다. 전시장 전체는 온통 하얀색으로 꾸며져, 마치 가상세계에 발을 디딘 듯한 비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박종규 작가는 “현실에서 살짝 떠 있는 느낌이었으면 했다”며 의도적인 연출이라고 했다. “인간이 만든 공간이라기보다는, 마치 비인간적인 정제된 세계를 상상하며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의도는 조명과 바닥 연출에도 직접 반영됐다. “실제로 처음엔 조도를 더 밝게 설정했어요. 하지만 미술관 쪽에서 어린이 관객들의 시각 적응 문제로 인해 현재 조도는 당초 계획보다 절반 정도인 45% 수준으로 조정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흰 바닥 위를 걸을 때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걷게 되는 경험을 이끌어내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은, 이번 전시가 '감각을 리셋하는 시각적 플랫폼’임을 시사한다. 광동미술관 개관 이래, 외국인 생존 작가로서는 처음 열리는 개인전. 폭우가 쏟아지던 평일 낮임에도 전시장은 북적였다. 아이 손을 잡은 부모들, 연인, 노년의 관객들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작품 앞에 오래 머물렀다. 전시제 ‘비트의 유령들’이라는 낯선 개념과 달리, 중국 관객들은 이 ‘비가시적 회화’를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중국은 QR코드에 사는 나라예요. 그래서 이 전시는 본능적으로 이해된다"는 한 관람객의 말처럼 디지털 감각에 훈련된 도시인들은 박종규의 유령들을 ‘감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전시장을 찾은 한 20대 남성 관람객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마치 잡음 같은 노이즈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게 시각 언어로 전환되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끊어진 선들, 파열된 단편들이 결국 하나의 시간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경험이었어요.” 그는 작품을 “손끝으로 느껴지는 전자파장 같았다”고 덧붙이며, “소리의 파동 같기도 하고,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그냥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시간과 감각을 체험하는 전시같다"고 했다. 다른 20대 여성 관람객은 “이런 현대적인 방식의 한국 작가 전시는 처음"이라며 "확실히 독특하고 개념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미술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감각으로 연결해주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걸 느꼈다"는 그녀는 이번 전시가 갖는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도 덧붙였다.화가이자 평론가인 왕샤오창 관장은 이번 전시 서문을 직접 쓰고 박종규를 “회화, 설치, 미디어아트를 넘나드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 작가”라고 소개하며, 특히 ‘비트 스트림(bitstream)’ 개념을 박 작가 작업의 핵심 키워드로 짚었다. 그는 "데이터 전송의 리듬을 뜻하는 이 용어는 인간 지각과 존재의 기본 단위로서의 상징으로, 이번 전시에서 디지털 신호, 심장 박동, 의식의 흐름 등 다층적 생명의 리듬을 아우른다"며 이렇게 분석했다. “박종규는 '팬텀(phantom)', 즉 기술사회에서 점차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존재 상태를 조명한다. 디지털 파편으로 구성된 이미지 안에서 관객은 ‘조용히 뛰는 심장’을 볼 수 있고, 지연된 시간의 간극에서는 ‘사라진 몸이 남긴 움직임의 잔향’을 들을 수 있다.” 이 전시는 3년 전부터 준비돼 왔다.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서구 바깥의 감각 회로를 확장해온 박종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 전시가 무산된 뒤 중국과의 협력에 집중했다. 한한령 이후, 중국 국립미술관의 벽을 넘은 첫 번째 한국 작가가 된 박종규는 자신의 회화가 국경을 넘어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준다. “앞으로 우리는 두 개의 세상을 살아야 해요. 현실과 가상.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들. 그것이 제가 말하는 유령입니다.” 중국 첫 진출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박종규는 올해 하반기, 이집트·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더욱 확장할 예정이다. 한편 박종규 작가는 계명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했다. 대구시립미술관과 후쿠오카시립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 아모리쇼 포커스 섹션 선정, 러시아 모스크바국립아카데미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미술관, 멕시코 국립미술관, 쿠바비엔날레 등 국제 무대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제3회 하인두예술상을 수상했다. 광동미술관 박종규 개인전은 오는 10월 8일까지 계속된다. 2025/08/05
박남희 관장 “AI 시대, 백남준은 이미 예언자였다” “진짜 AI는 인간을 닮아야 해요. 백남준은 이미 거기까지 본 사람이죠.”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려는 듯 밀려드는 시대,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오히려 ‘감각’과 ‘상상’을 호출한다. 개관 17주년을 맞은 지금, 그는 인지도와 물리적 한계를 넘어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 ‘연결과 확장’이라는 백남준의 정신을 동시대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박남희 관장을 만났다. 부임 2년 차인 관장은 취임 직후부터 아트센터의 물리적·인지적 한계를 냉정하게 짚었다. “서울에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 협소한 전시 공간, 부족한 예산… 모든 게 센터 활성화의 걸림돌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였습니다. 기업과 지자체를 설득했어요. ‘백남준을 품은 경기도, 그 경기도가 앞장서야 하지 않겠냐’고요.” 현대자동차와의 공동 전시 프로젝트 ‘트랜스-로컬 시리즈’를 통해 3년간 6억 원을 확보했고, 용인시와 함께 9억 원 규모의 기획전 '백남준의 도시'도 성사시켰다. 그는 “단순한 예산 유치가 아니라, 백남준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협력 기반을 만든 일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시 공간 협소…1700여평 별관 추진" 하지만 원형 동선과 피아노 형태의 구조는 전시의 유연성을 떨어뜨린다. 이에 박 관장은 별관 신축을 추진하고 있다. 원래 3400평이었던 부지로 현재 센터 전시공간은 약 700평에 불과하고, 피아노 형태 건축물의 구조상 작품 설치에 제약이 많다. 박 관장은 별관 신축을 공식화하며, 경기도와 함께 3단계 실행계획을 추진 중이다. "기존 부지 옆 언덕에 전용 전시관을 짓고, 현재 건물은 연구와 아카이브 중심으로 재편할 계획입니다. 2032년 탄생 100주년을 목표로 삼았어요.” “21세기 유산 공동체 시대, 기술과 예술이 융합된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백남준이 그렸던 경계 없는 예술, 초연결성, 다성성은 지금이야말로 실현 가능한 언어예요.” 그는 또한 “센터의 가장 큰 과제는 인지도 격차와 인프라의 빈틈”이라며, SNS, 생활형 홍보, 무장애 산책로 조성, 교육 다양화 등 체류형 공간 개선 전략을 강하게 밀고 있다. “젊은 세대가 미디어아트를 이해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것보다, 이곳에 왔기 때문에 백남준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백남준은 예언자였다” “향후 100년 안에, 백남준처럼 예술을 통합적으로 실천한 인물은 다시 없을 겁니다.” "음악에서 출발해 시각예술, 미디어, 무용, 문학, 철학까지… 백남준은 예술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린 ‘총체 예술가’였어요. 더 나아가 동양 철학과 서양 과학(양자역학, 이진법, 라이프니츠 사상)을 넘나들며, 지금-여기의 문제를 통과해 미래를 예감했다. “현재의 기술 조건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실험했고, 그 예술은 늘 소통의 구조를 가졌어요.” 챗GPT와 인간을 비교하는 시대, 박 관장은 백남준의 예술이 “기계와 인간 사이의 간극을 여전히 유효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박남희 관장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기술의 진보보다 더 중요한 건 인간의 직관이며, AI 시대일수록 예술은 더욱 ‘백남준적’이어야 한다는 확신이다. “예술의 미래는 과거에 있어요. 백남준은 예언자였어요. 백남준의 예술은 기술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동시에 인간 그 자체를 드러내는 일이었죠.” 백남준아트센터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미디어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1932~2006)의 예술세계를 기념하고 연구·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경기문화재단 산하의 미술관이다. 2008년 10월 8일 경기도 용인에 문을 열었으며, 지상 3층·지하 2층 약 5600㎡ 규모로 다양한 전시, 교육, 연구를 진행해왔다. 상설전, 기획전 외에도 ‘백남준 예술상’, 방대한 아카이브,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백남준의 예술정신을 동시대에 잇고 있다. 아트센터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정체성 아래, ‘21세기 예술 플랫폼’으로의 진화를 본격화하고 있다. 백남준이 예언한 초연결성과 다성성은 오늘날 더욱 실현 가능한 언어가 되었다. 박 관장은 이 철학을 바탕으로,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 통신사, 정원, 도서관, 은행, 대중예술가 등 예술 밖의 주체들과의 협업은 물론,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한 연대와 교류도 이어간다. 이를 바탕으로 아트센터는 더 많은 실험, 더 많은 연결, 더 많은 참여, 더 많은 공유가 이뤄지는 ‘열린 무대’를 지향한다. 전시, 교육, 체험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동시대 예술의 플랫폼으로 기능하기 위한 실천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의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비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 말은 2002년, 백남준이 경기도와 미술관 건립을 확정하며 직접 도면 위에 남긴 문장이다. ◆"미술관은 소란스러워야…별관 신축 추진” 박 관장이 구상 중인 아트센터의 미래는 ‘조용한 보존 공간’이 아니다. “삼대가 슬리퍼 끌고 놀러 와 전시 보고, 근처 맛집도 들르는 곳, 그게 바로 백남준이 살고 싶던 집이었을 거예요.” “저는 이 공간이 백남준을 기리는 기념관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실험실이 되기를 원해요.” 백남준아트센터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조용한 기관으로 여겨졌지만, 박 관장 부임 이후 전시는 물론 관람객 수, 국제 협력까지 전방위 확장을 꾀하고 있다. 2024년 기준 관람객은 18만 700명을 돌파했고, 올해 상반기만 해도 전년 대비 276% 상승한 12만여 명이 센터를 찾았다. “우리가 백남준을 더 자주, 깊이, 그리고 친근하게 보여줄 공간이 부족했습니다. 당초 3단계로 계획된 센터가 1단계만 완공된 채 멈췄기 때문이죠.” 2032년 백남준 탄생 100주년을 목표로, 국제적 건축가와 함께 랜드마크성 별관을 신축하고, 보이는 수장고·대중 체험 공간·교육시설 등 미래형 인프라를 갖춘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다가오는 2026년 서거 20주기, 그리고 2032년 탄생 100주기를 향해 박 관장은 장기 로드맵을 실현해가고 있다. 현재 센터는 동선의 불편함, 진입로 부재, 외관 혼잡 등 현실적 과제를 안고 있다. 그는 리모델링과 공간 확장, 관람 환경의 대대적 전환을 통해 ‘살아 있는 미술관’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26년 20주기 전시 “창고 속 백남준 꺼내 바람이라도 쐬게 하자” "컬렉터치고 모두가 한두 점씩은 가지고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없었어요. 내년엔 밖으로 꺼내볼까 합니다.” 2026년 백남준 20주기를 맞아, 아트센터는 ‘외부의 백남준’을 모아 전시할 계획이다. 소장자와 갤러리들이 보유한 백남준 작품을 빌려와, ‘백남준이 다시 말하기 시작하는 공간’을 연다는 구상이다. 특히 박 관장은 내년 백남준 서거 20주기를 전환점으로 삼고, 전 세계 유관기관과 연계한 대규모 국제 행사들을 준비 중이다. 2026년에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현대미술관,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미술관과의 공동 전시도 예정돼 있다. 백남준의 목소리를 되살리기 위한 학술심포지엄, 단행본 출간, 연구서 번역 프로젝트도 병행된다. “해시태그는 #NamJunePaikVox. 백남준의 목소리가 언제 어디서나 들리게 하는 거죠. 그를 다시 부른다는 건, 예술이 다시 시작된다는 뜻이니까요.” 그는 '백남준예술학'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제 적인 백남준예술학회를 만들고 백남준의 예술사적 가치를 재논의해야 한다는 의지도 보였다. “다른 나라들은 관련 학교도 있는데, 왜 우리는 백남준 이름을 내건 학회나 교육기관이 없느냐는 생각을 했어요. 국제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왔을 때 그들이 연구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백남준은 단순히 ‘세계적인 미디어 작가’로는 다 담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국가 차원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지원과 장기적인 비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예술상, 이름만 남기지 않기 위한 개편 박남희 관장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백남준예술상’의 리뉴얼을 꼽았다. 2009년 제정된 이 상은 2024년부터 새로운 철학 아래 재정비되었다. “예술가의 이름이 붙은 상이라면, 단순히 작품성만이 아니라 그 예술가가 가진 철학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백남준은 예술가이자 철학자였고, 전쟁과 차별에 반대하며 세계를 연결하려 했죠. 그런 정신을 되살리는 상이 되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리뉴얼된 예술상은 '미술사에 족적을 남기는 혁신’과 함께, ‘인류 평화에 기여한 예술’이라는 가치를 함께 기준으로 삼는다. 그 상의 새로운 첫 수상자는 1936년생의 미국 작가 조안 조나스(Joan Jonas). “조나스는 여성과 생태를 주제로 오랫동안 작업해왔고, 백남준처럼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며, 탈권위적이고 연결적인 예술 세계를 보여준 인물이에요. 예술의 혁신성과 윤리성을 모두 갖춘 존재였죠. 오는 11월 그의 전시를 개최합니다." 앞으로도 이 상은 백남준 이후의 예술정신을 계승하는 예술가들, 그리고 예술을 통해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인물들을 꾸준히 조명할 계획이다. ◆ 예산과 제도의 벽, 그 너머로 하지만 백남준아트센터가 안고 있는 행정적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현재 센터는 경기문화재단 산하 7개 미술관 중 하나로, 기관별 특성과 무관하게 일괄적으로 예산과 인력이 배정되는 구조에 놓여 있다. 2024년 기준 센터의 연간 예산은 약 30억 원. 국제적 교류와 미디어 전문성을 지닌 기관으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각 미술관은 저마다 다른 정체성과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똑같은 기준으로 예산과 인력을 배분받는 건 문제가 있죠. 백남준아트센터는 국제 교류와 미디어 중심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기관입니다. 그 특성에 맞춘 별도 기준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박 관장은 이 문제를 단순한 ‘불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행정적으로 준비하고 제도화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설득하고 변화시켜야 할 과제라고 생각해요. 반드시 가야 할 길입니다.” ◆"나는 Park Namhee…백남준 딸" 박남희 관장은 2023년 가을부터 이 센터의 5대 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종종 자신을 '백남준의 딸'이라 부른다. 영어 이름 ‘Namhee Park’은 백남준(Nam June Paik)과 어딘지 닮아 있다. “제가 영어로는 Park Namhee잖아요. 백남준 선생님은 Nam June Paik. 첫 글자에 두 개가 같다는 건 이건 운명이죠.” 그는 백남준의 딸 같은 존재라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와 함께 일하며,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팀장 면접에서 낙방했지만 이후에도 백남준을 놓지 않았다. 홍익대 예술학 박사 출신으로, 청주공예비엔날레(2013), ACC 교육사업본부장(2016~2020), 제주비엔날레 예술감독(2022), 가파도 AiR 총감독(2023) 등을 거친 실험예술 기획자다. 미디어아트에 대한 오랜 애정과 리더십으로, 취임 2년 차를 맞은 지금, 센터를 새로운 도약의 길로 이끌고 있다. “그의 이름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처음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십수 년을 돌고 돌아 준비했죠.” 그의 말처럼, 박 관장의 이력은 단순한 커리어를 넘어선 일종의 '사적 소명'에 가깝다. 백남준의 정신을 해석하고, 동시대에 이어가기 위한 다층적 실천이었으며, 그 총합이 지금의 관장직으로 이어진 셈이다. “연임에 대해서요? 책임감이 큽니다. 아직 다 못 했어요. 전시, 별관, 글로벌 네트워크… 무엇보다 백남준이라는 이름이 오늘날의 기술과 감각, 그리고 인간의 윤리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박 관장은 임기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연임에 대해 묻자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2000년, 일주아트하우스 시절 ‘미디어아트연구모임’을 주도하며 이 분야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때부터 백남준은 그의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의 화두였다. “운 좋게도 지금, 그 오랜 주제와 함께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요. 백남준은 ‘정보초고속도로’를 예견하며 언제나 새로움을 향해, 고정된 방식을 벗어났죠. 그런 백남준을 연구하고 알리는 일은 저에게 ‘일생일대의 만남’ 같은 일입니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 전시장 1층, 백남준이 남긴 말이 있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지금 미래를 투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장은 여전히 관람객을 붙잡는다. “시간을 눈으로 보게 하고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백남준의 이 말처럼, 박남희 관장 역시 지금 이곳에서 시간을 축적하고 있다. 그에게 백남준아트센터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다. 하나의 ‘시간 실험실’이다. 백남준이 그랬듯, 그는 시간 속에 무언가를 묻고, 키우고, 기다리는 방식으로 이 기관을 운영하고자 한다. 그러니 ‘임기’는 시간의 끝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에 가깝다. 관장직을 맡으며 가장 힘든 점은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연구자로서의 삶을 꿈꾼다. “계속 연구하고 싶어요. 전시도 하고, 책도 쓰고 싶고요.” 박남희가 지키려는 것은 단지 한 예술가의 이름이 아니다. 그가 지키는 것은 그 예술이 남긴 질문, ‘기술 너머의 인간성’이다. 실험성과 대중성을 아우르는 기획, 포용적 감상의 교육, 미디어아트의 미래 생태계 조성까지. 이제 ‘박남희’라는 이름도 ‘백남준의 시간’을 함께 빚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되고 있다. “백남준이 열어준 미래를 지속하고, 더 깊고 넓게 지키기 위해 백남준아트센터는 차분하면서도 활발하게 그의 예술적 유산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일부이자 미래에게 건네줄 ‘지구의 오늘’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그 태도와 방법을 익혀가는 터전. 바로 여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백남준아트센터의 존재 이유겠지요.” 2025/08/03
또 외국인 감독…한국 비엔날레 리더십의 ‘불편한’ 공식 “언제까지 한국의 비엔날레에서 한국 큐레이터들은 역차별을 받아야 하죠?” 익숙하면서도 아픈 질문이다. 모 미술비평가의 이 물음은, 국제적 위상을 자랑하는 한국의 비엔날레에서 정작 한국인 큐레이터는 배제되는 현실을 다시 꺼내 묻는다. 최근 부산비엔날레가 2026년 전시감독으로 아말 칼라프(Amal Khalaf)와 에블린 사이먼스(Evelyn Simons)라는 두 해외 큐레이터를 선정했다. 조직위는 이들이 “사회적 실천과 도시문화, 지역성과 예술 간 관계를 탐구해온 역량 있는 감독”이라며, 여성 큐레이터 듀오이자 중동과 유럽의 복합문화적 배경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했다. 둘은 ‘불협하는 합창(Dissident Chorus)’이라는 주제로 부산 전역을 무대로 한 도시형 융합 전시를 예고했다. 한국 대표 비엔날레에서 반복되는 외국인 감독 인선은, 이제 불편한 공식처럼 여겨진다. 부산비엔날레는 최근 수년간 외국인 공동감독 체제를 이어왔다. 2024년 뉴질랜드 출신 베라 메이와 벨기에의 필립 피로트, 2018년에는 프랑스의 크리스티나 리쿠페로와 독일의 요르그 하이저가 지휘했다. 광주비엔날레도 다르지 않다. 2024년 프랑스 미술평론가 니콜라 부리오, 2026년에는 싱가포르 출신 작가 겸 큐레이터 호 추 니엔이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이쯤 되면 일종의 ‘공식’처럼 굳어진다. 한국의 주요 비엔날레들이 경쟁적으로 외국인 감독을 초빙해온 흐름은 낯설지 않다. 최근 10년 간의 주요 국제 비엔날레를 살펴보면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서울시립미술관) 모두 외국인 큐레이터에게 지휘봉을 맡긴 사례가 대부분이다. ‘글로벌 감각’과 ‘국제적 네트워크’를 이유로 내세운 선택들이지만, 정작 ‘한국의 컨텍스트’를 반영하는 데 있어 오작동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국제화는 중요하다. 낯선 시선이 만드는 창의적 균열과 세계적 연결성은 비엔날레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국제화’가 언제부터인가 ‘로컬의 부재’를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2024 광주비엔날레'다. 당시 예술감독은 프랑스 스타 기획자 니콜라 부리오. 그는 한국 전통예술 ‘판소리’를 모티프로 삼았지만, 정작 그것을 ‘판과 소리(Pan & Sound)’로 번안하며, 한국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감각으로 제시했다. 한국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타자의 해석으로 로컬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비엔날레 리더십의 편향은 예술계 전체의 구조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왜 한국의 비엔날레에서는 한국인 큐레이터가 주도하지 못하는가? 한국 예술의 동시대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보조적 위치에 머물러야 할까? 한국감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6년 부산의 윤재갑, 2021년 광주의 이숙경, 2022년 부산의 김해주 감독. 그러나 이들 역시 테이트 모던 등 유럽 미술계와 중국 미술계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결국 ‘국제 네트워크’가 가장 강력한 선정 기준이라는 점만을 재확인하게 된다. 국제적 인지도가 없는 한국인은 비엔날레 감독으로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전례는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한국감독과의 불협화음도 있었다. 2016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이었던 윤재갑 (중국 하우아트뮤지엄 관장)은 전시 이후 집행위원장과의 갈등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하며 “비엔날레의 독립성과 공공성이 무너졌다”며 연임 반대를 호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는 "국내외에서 많은 조직과 행사를 경험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들이 사무국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폭로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13년에는 심사 1순위였던 한국인 전시기획자 김성연을 제치고 2위였던 프랑스 큐레이터 올리비에 캐플랑이 전시감독으로 낙점되면서 공정성 논란이 일었다. 당시에도 "왜 한국 비엔날레에 한국 감독은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제기됐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외국인 감독 인선을 ‘국제성’이라는 명분 아래 반복되는 외국인 의존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국내에도 리서치 기반의 독립 큐레이터들이 왕성히 활동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좀처럼 비엔날레 리더십의 전면에 나서지 못한다. 이건, 구조적 배제다. 물론 외국인 감독 체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왜 한국 비엔날레에는 한국 감독이 없죠?”라는 질문은 점점 더 뼈아프게 돌아온다. "우리나라의 큐레이터들을 키울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럴 기회를 외국인들에게 내 주는 것이 아쉽다. 외국인이 맡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은 아예 못할 거라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역차별이 문제다." 비엔날레는 세계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세계’에 한국 기획자의 언어와 감각이 배제된다면, 그것은 세계성이 아니라 외면성이다. 외국인 감독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양한 관점과 글로벌 협업이 중요한 오늘날, 국적만으로 자격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흐름이 유독 ‘한국인만 배제되는’ 구조처럼 반복될 때, 그것은 단지 우연이나 실력 차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로컬에서 출발해 큐레토리얼 실천을 축적해온 이들은 좀처럼 ‘공식’의 바깥에 있다. 지방 미술관, 독립공간, 지역 페스티벌에서 묵묵히 현장성과 지역성을 탐구해온 큐레이터들은 매번 자격 밖으로 밀려난다. 기획자로서의 감각과 안목은 ‘국제 전시 이력’이라는 자격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사장된다. 30년 전 창립 멤버로 참여했던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다시 돌아온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제 진입에 방점을 찍어온 30년을 넘어, 이제는 K-미술문화의 정체성을 구축할 때다.” ‘광주 정신’과 ‘예향’의 지역 정체성을 예술로 승화시키겠다는 그의 말은, 로컬 리더십 복권의 선언처럼 들린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비엔날레는 한국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시점이다. 동시대성과 지역성, 두 축을 아우를 한국형 큐레이션과 미학적 자존감이 절실하다. 비엔날레는 시민 세금으로 치러지는 공공행사다. 그러나 기획 방향, 작가 선정, 예산 집행의 과정에서 ‘공공성’보다 ‘브랜딩’과 ‘글로벌화’가 우선되는 건 아닌가. 그리고, 늘 제기되는 질문 하나. “왜 한국의 유능한 큐레이터들은 해외 비엔날레에서만 러브콜을 받을까?” 정작 자국의 비엔날레에서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한국 큐레이터들. 그래서 ‘국내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건, 비엔날레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국제성의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한국 큐레이터는 아직,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 채 문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다시 우리 뿌리를 확인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세계가 공명할 수 있는 지역성이다. 로컬의 언어를 믿고 존중하는 일. 그 지점에서 비엔날레의 미래는 시작된다. 언제까지 한국의 비엔날레에서, 한국 큐레이터들은 무대 밖에 있어야 하나? 이 질문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 우리가 던져야 할 가장 동시대적인 ‘큐레이션’이다. 2025/07/29
윤범모·유홍준 70대 문화기관장의 귀환…경륜인가, 회귀인가 최근 문화계에 익숙한 이름 두 사람이 다시 공공문화기관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에,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됐다. 두 사람 모두 70대 중후반. 문화행정의 경험과 상징성을 갖춘 이들의 귀환은 문화계에 경륜과 안정감을 더할 수 있을까. 아아니면 세대교체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신호일까. 광주비엔날레를 이끌게 된 윤범모(74) 대표는 민중미술 연구를 기반으로 오랜 시간 미술사학자로 활동해왔다. 1995년 비엔날레 창설 당시 특별전 큐레이터로 참여했던 그는, 이번 선임을 통해 30년 만에 다시 같은 무대에 섰다. 국립현대미술관장, 다수의 비엔날레와 대형 전시 기획자로서의 경험은 비엔날레의 정체성 강화라는 재단 측 기대와 맞닿아 있다. 윤 대표는 문재인 정부 시절 국현 관장으로 임명됐으며,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자진 사퇴한 이력도 있다. 2023년 3월, 그는 “시절이 바뀐 지금 내 소임도 끝난 듯해 떠납니다. 할 말은 많지만 참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정권 변화에 따른 간접적인 압박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유홍준(76)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문화재청장을 지낸 뒤,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2022년 대선 당시에는 이재명 후보 캠프에서 K-문화강국위원장을 맡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그는, 문화유산 해설의 대중화에 기여한 대표적 미술사학자다. 이번 박물관장 선임에서도 그의 상징성과 국민적 신뢰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분야에서 뚜렷한 전문성과 이력을 가진 이들의 귀환을 단순히 ‘회전문 인사’로만 보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70대 남성’, ‘국공립기관 경력’, ‘미술사학자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는 현재 공공기관 리더십의 구조가 얼마나 협소한지 또한 보여준다. 동시대 미술계는 급변하는 감수성과 다층적 요구에 응답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젠더 감수성, 탈중심성, 생태 윤리, 기술·미디어 변화 등 새로운 시대적 화두와 감각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리더십이 절실하다. 단지 ‘경험 있는 리더’가 아니라, ‘다르게 듣고 말할 수 있는 리더’가 요구되는 시대다. 특히 공공문화기관의 수장은 단지 행정가가 아니라, 시대와 감각을 매개하는 공적 리더여야 한다. 이제 막 임기를 시작한 두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지난 경험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듣고, 다시 말하는 능력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복귀한 두 기관장은 모두 평론가·전시기획자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윤범모 대표는 국공립관과 비엔날레에서 기획 경험을 쌓은 대표적 현장형 기획자이며, 유홍준 관장 역시 미술평론가이자 문화유산 해설을 통해 대중적 기획과 해석의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일각에서는, 공공문화기관 수장에게 필요한 역량은 기획자형 리더보다 ‘CEO형’ 리더십이라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국립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수백억 원 규모의 조직을 운영하는 기관장의 역할은 단순한 전시 기획이나 방향 제시를 넘어, 기부 유치, 조직 운영, 문화마케팅, 인력 관리 등 총체적 공공경영 능력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과도한 전시 개입은 오히려 전문 학예인력의 자율성과 조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결국 이번 인사는 단지 '누가 다시 왔는가'가 아니라, '그 자리에 무엇이 요구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기관장의 귀환은 세대교체나 경륜의 문제가 아닌, 역할과 리더십 구조에 대한 본질적 재점검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변화하는 문화생태계 안에서, 이들의 리더십이 단절이 아닌 연결, 반복이 아닌 전환으로 작동하길 기대한다. 경륜은 의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감각과 호흡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경험은 금세 과거가 되어버린다. 202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