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모색 2025' 동시대 감각과 철학이 갱신된 현장 “놀이 같지만 깊이 있다.” 마치 애니메이션 속 장면처럼 선명한 색감의 캐릭터들이 벽면을 가득 메운다. 입구부터 시선을 잡아끄는 건 컬렉티브 ‘업체leobchae’의 설치 작업. QR코드와 데이터, 웹3 그래픽이 얽힌 이 현란한 화면은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 아니다. 기술과 종교, 자본과 알레고리가 버무려진 동시대적 언어다. 놀이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작품들은 자아 탐구와 사회 비판, 기술 비평이라는 깊이를 드러낸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23일 개막한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는 1981년 ‘청년작가전’으로 시작한 이래 22회를 맞은 장수 신진작가 전시다. 2025년판 ‘젊은 모색’은 특히 세대 교체 이후의 첫 전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번 전시는 39세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 펼치는 감각의 총합이다. 자아 탐구에서 출발해 사회 구조와 기술 비판, 공동체의 의미까지 주제를 확장시킨 작업들은, 개성 있고 생기발랄한 시각 언어로 동시대 감각을 재해석한다. 디지털 네이티브 감각이 오롯이 반영됐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이번 전시의 작가들은 영상과 설치작업'기반으로 작업하지만, 결국은 자아 이야기로 이어진다”며 “매체는 변해도 작가의 성격이 드러나는 독특한 스토리가 오래간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다섯 개 섹션으로 나뉘며, 회화·설치·영상·사운드·게임·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20명(팀)의 작가가 참여했다. , 권동현×권세정, 김을지로, 김진희, 다이애나랩, 무니페리, 상희, 송예환, 야광, 업체eobchae, 이은희, 장한나, 정주원, 조한나A, 조한나B 등 20인(개인 및 팀). 이들은 모두 미술관 내부 학예연구사와 외부 전문가의 추천 및 자문을 통해 선정됐다. 전시 입구를 장식한 ‘업체leobchae’의 캐릭터 회화와 디지털 영상은 관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위키피디아식 구성, 블록체인 구조, 성인 캐릭터의 서사로 포장된 웹3 서사는 디지털 기술과 신앙의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을 시각화했다. “근엄한 것을 유머로 바꾸는 것이 젊은 작가들의 힘”이라는 설명처럼, 게임과 만화, 인터넷 언어를 차용한 전시는 유희와 비판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든다. 특히 기술과 자본에 대한 논의는 이번 전시의 주요 흐름이다. 다이애나랩의 ‘티끌’, 상희의 VR형 게임 설치, 김을지로의 생물학적 3D 애니메이션은 기술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들이 어떻게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때로는 전복시키는지를 탐색한다. 상희 작가는 “게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동과 동행을 주제로 한 감각의 속도 실험”이라며 “관객이 직접 조작자로 개입하는 구조”를 강조했다. 김을지로는 3D 그래픽으로 재현한 생물체를 통해 공생의 불가능성과 인류의 불확실한 미래를 그려낸다. 상희는 관람객이 직접 VR 게임 속에서 타인과 속도를 조율하며 ‘행진’을 경험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들의 시선은 다층적이다. 정주원은 회화에 나무껍질과 사람의 피부를 연결해 자연과 인간의 시간을 탐구했고, 김진희 회화는 집 안이나 발코니, 방 안의 책상 등 사적인 공간에서의 일상과 감정을 집중적으로 드러낸다. 관객을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초대하고, 개인적인 공간에서의 일상을 통해 사소한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한다. 다이애나랩은 소수자와 함께 만든 설치작품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경계’를 드러낸다. 야광(김태리·전인)은 테마파크 ‘다크 라이드’ 형식을 통해 노동자의 공포를 비유했고, 업체leobchae는 데이터와 신앙을 겹친 웹 기반 작업으로 블록체인 사회의 믿음을 시각화했다.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형식의 작업도 주목할 만하다. 조한나A의 '우리 단지'는 여수의 석유화학단지를 배경으로, 폭발 사고와 기억을 영상과 드로잉으로 풀어냈다. 노동자의 목소리, 가족의 인터뷰, 작가 자신의 성장기까지 섞인 이 작업은 ‘트라우마의 지층’을 가시화하며 감정의 시간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은희의 '섬섬옥수'도 산업혁명 시기의 직업병 문제가 오늘날의 전자 기술 산업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조명한다. 다양한 역사적 자료와 함께 산업 재해 피해자들의 발화와 행위를 기록한 퍼포먼스 등으로 구성된다. 각 시대의 최첨단 산업과 기술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모순적이고 취약한지를 질문하며, 오늘날의 기술 세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전시의 큰 흐름은 '나로부터 출발해 우리로 확장되는' 감각의 여정이다. ‘함께 하기’, ‘기술 너머’ 등 섹션으로 구분된 구성은 각 작가들의 작업이 자기 안의 감정에서 시작해 사회와 동시대의 조건을 포착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준다. 이번 ‘젊은 모색 2025’의 작가들 상당수는 국내에서 학부를 마친 뒤 독일, 특히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 세대다. 베를린 아트씬의 실험성과 개방성을 경험한 이들은 ‘나’로부터 출발해 ‘우리’로 향하는 동시대적 고민을 글로벌한 시각으로 풀어낸다. 자전적 이야기에서 사회 구조, 기술 비판까지 폭넓게 확장된 주제들은 한국 현대미술이 더 이상 국지적이지 않음을 증명한다. 이들은 로컬의 감각과 글로벌한 언어를 동시에 장착한, 지금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세대다. 전시장 곳곳에선 작가들이 연출한 '게임의 룰'에 따라 관객이 직접 참여하거나 헤드셋을 착용해 서사를 경험한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익숙한 작가들은 애니메이션, 웹툰, 시뮬레이션, 다큐, 웹사이트, 실시간 리더보드 등 친숙한 매체를 활용해 ‘현대의 알레고리’를 제시했다. 이를 두고 김성희 관장은 “생동감 있고 한국적 감성이 살아있는 작업들이라 해외 수출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오는 10월 5일까지 약 6개월간 장기 운영하며, 프리즈 서울(9월) 기간에 맞춰 해외 미술 관계자들의 방문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미술관은 “이 전시를 통해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히겠다”고 밝혔다. ‘젊은 모색 2025’는 단순한 신진작가전이 아니라, 동시대 감각과 철학이 갱신되는 현장이다. 기술과 자본, 환경, 관계, 자아 등 청년 작가들은 이 모든 것을 ‘지금, 여기’의 언어로 끌어왔다. 한국 동시대미술의 차세대 주역들이 세계 무대로 나아갈 첫 비전이, 바로 이 전시에 담겼다. 2025/04/23
시간을 건너온 '록의 전설' 패티 스미스, 남산 '피크닉' “예술가도 행동하는 혁명가다.” 자유로운 그래피티 정신을 품은 록의 전설이 서울에 왔다. 미국 록 밴드의 대모이자 시인이자 예술가인 패티 스미스(78)가 서울 남산 피크닉(Piknic)에서 전시를 연다. 사운드워크 컬렉티브와 협업한 시, 사운드, 영상, 오브제를 아우르는 몰입형 전시로, 아시아에서는 처음 공개된다. ‘끝나지 않을 대화’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패티 스미스와 사운드워크 컬렉티브가 10여 년간 주고받은 서신과 예술적 교감을 바탕으로 한 시와 소리의 프로젝트다. 조지아 트빌리시 사진 및 멀티미디어 박물관(2023), 콜롬비아 메데인 현대미술관(2024), 오나시스 재단(2024), 미국 쿠리만주토 갤러리(2025)를 거쳐 아시아 순회전의 시작점으로 서울이 선택됐다. 이어 오는 4월 26일부터 6월 29일까지는 일본 도쿄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한다. 18일 피크닉 전시장에서 마주한 전설은 여전히 록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양 갈래로 흰 머리를 땋고, 청바지를 워커 안에 집어넣은 마른 노인은 똑바로 서 있었다. '록의 전설'이라는 이름이 시간 속에서 현재형으로 존재함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1975년 1집 '호시스(Horses)'로 데뷔한 스미스는 펑크록 가수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른 '로큰롤의 대모'로 불린다. 남성 누드사진작가이자 미국의 현대사진작가인 고 로버트 메이플소프(1946~1989)와 동거하며 그의 뮤즈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시를 쓰다 로큰롤에 우연히 빠진 스미스는 절묘한 시대적 감각을 음악 세계에 반영하며, 다른 예술 장르나 예술가와 함께 작업하는 일을 평생 해오고 있다. 이 전시에서 '전설'이라는 이름은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용한다. 콘텐츠보다 이름이 먼저 설명되고, 감상보다 경외가 먼저 작동한다. 관람객은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수용'하거나 '해석'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전시는 기억, 자연, 기후 위기, 혁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체르노빌 어린이 합창단의 목소리를 담은 사운드, 멸종 동물의 이름을 읊는 낭송 영상, 육필 노트와 자연물을 활용한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의 아카이브가 전시장 곳곳에 배치돼 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대형 산불, 동식물의 대량 멸종 등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조망하는 동시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파올로 파솔리니, 마리아 칼라스, 표트르 크로포트킨 등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탐구한다. 총 8편의 비디오 작품은 딥티크(Diptych) 형식의 스크린 배열로 서로 작용하며 새로운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시와 낭송은 반복되고, 정치적 선언은 명확하며, 자연물을 수집한 드로잉과 유물은 상징처럼 배치된다.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려는 태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관객에게 사유의 시간을 건네기보다는, 명확한 관점을 전달하고 그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는 구조다. 패티 스미스는 여전히 '혁명'을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강렬하고 단단하며, 육필 노트와 드로잉, 사운드 조각, 멸종 동물의 흔적들은 진정성 있는 작업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비디오와 사운드, '혁명'이라는 단어는 이제 무거운 울림보다는 그저 흐르는 시간처럼 인식된다. 기후 위기와 재난이 일상이 된 현대인에게, 결국 전시 공간을 압도하는 것은 이름이다. '패티 스미스'라는 존재가 전시 전체의 동력이자 이유다. 문제는 그 이름이 오늘의 관객에게 얼마나 새롭고, 또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다가오는가 하는 점이다. 피크닉 4층 정원에는 한국 비무장지대(DMZ)에서 채집한 장소 특정적 설치 신작도 있다. 드로잉 작품 아래 작은 돌멩이가 누른 전단지는 캠페인 문구를 담은 '삐라'처럼 배치돼 있으며, 관객이 한 장씩 가져갈 수 있다. 패티 스미스가 직접 쓴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는 한글 메모와 사인이 함께 적혀 있다. 이번 전시는 스미스와 사운드워크 컬렉티브의 수년간 협업의 결실이다. 이 그룹의 창립자인 스테판 크래슬러(Stephan Crasneanscki)와 스미스는 약 10년 전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예술과 문학, 소리와 언어를 넘나드는 협업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 내한해 직접 설명에 나선 패티와 스테판은 '피크닉 공간' 전시에 완전 만족한 모습이다. 이번 전시가 서울에 올 수 있었던 데는 한 개인의 오랜 팬심이 큰 역할을 했다. 피크닉 김범상 대표는 1995년 뉴욕에서 열린 패티 스미스의 시 낭송 공연을 단 몇 줄 차이로 보지 못했다. 그 아쉬움이 30년이 지나, 자신이 만든 공간에 직접 '전설'을 초청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래된 열정의 잔광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전시일 수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면 자연스레 패티 스미스의 이름을 다시 검색하게 된다. 1988년작 ‘피플 해브 더 파워(People Have the Power)’를 들으며 전시를 곱씹게 된다. 전시는 7월20일까지. 관람료 1만5000원. 2025/04/19
두 딸 울린 '검은 그림'…최병소 '무제' 숭고미 모나미(365)볼펜이 무기다. 불확실한 세상으로부터의 자발적 고립은 무심의 경지로 나아갔다. 긁고 긁고 또 긁어 암흑 천지가 되기까지 몽당연필도 가세했다. 볼펜의 경계를 쌓고 메운 연필과의 협업은 어둠의 세계를 비추는 한줄기 빛이다. 연필심(흑연)이 내는 광택은 아우라를 발산한다. 40년 간 '긋는 행위'를 멈추지 않은 그는 예술의 세계에 도달했다. 어릴 적 화가였던 아버지를 자랑하지도 못했다. 늘 신문지를 볼펜으로 긁기만 하던 아버지. 그렇게 나온 검은 그림을 보고 친구들은 "김이야?"라고 묻기도 했다. "이젠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17일 '볼펜 작가'로 불리는 최병소(82)화백의 개인전을 앞두고 만난 큰 딸과 둘째 딸은 '아버지'라는 단어만 내놓고도 울컥했다. "커서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항상 고독하게 마음을 누르면서 작업하는 게 보이니까…그 감정들이 와 닿더라고요." 아버지의 작업을 도와주며 매니저처럼 일한다는 둘째 딸 최윤정씨는 "아버지는 볼펜으로 긁기 작업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치유한 것 같다"면서 "여전히 재미있고 편안하게 볼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오는 24일 서울 성북동 우손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을 여는 최병소 화백은 최근 거동이 불편해져 공식 석상에 나오기 힘든 상태라고 한다. 두 딸이 대신 기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둘째 딸은 "아버지는 일기 쓰듯이 작업한다"면서 "'나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서 작업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고 전했다. '어떤 작가냐'는 물음에 "고독한 작가이고 작품을 열심히 하는 작가"라고 답했다면서 아버지는 "많은 생각들과 모든 사심들을 지워나가는 힘든 노동이지만 볼펜 긁는 소리에 희열감을 느낀다고 했다"는 것. 아버지의 고집스런 예술 세계가 이어진 건 어머니의 힘이 컸다. 중매로 만난 부모는 처음엔 외갓집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돈을 못 버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사위로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미술 하는 사람'을 받아들였다. 맨날 긋고 긁는 남편을 위해 어머니가 생계를 맡았다. 미싱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2녀 1남을 키우고 아버지의 예술을 추켜세웠다. 1990년대 어느 날 아버지 전시회가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데리고 사위가 그린 그림을 보러 전시장에 나온 외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림이 어디 있는데, 이 뭐꼬?" 하는 친구들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검은 그림'. 아무것도 없는 그림의 반란은 2000년대 이후 시작됐다. 볼펜이라는 재료와 무심한 작업 과정에 놀란 파리의 한 갤러리가 초대전을 연 데 이어 2015년 아트바젤홍콩에서 작품이 팔리면서 알려졌다. 특히 국내 미술시장에 단색화 붐이 일면서 '검은 그림'도 꿈틀대며 대박을 치기 시작했다. 최 화백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와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70년대 후반 대구 현대미술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회화의 조형성과 의미 구조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지속해 왔고, 신문, 잡지, 인쇄물 등 대중매체를 활용한 ‘지우기와 긋기’행위를 통해 작업의 방법론을 정립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평면 작업을 넘어서, 언어 구조와 권위의 해체, 이미지 생산 메커니즘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적 개입으로 작동한다. 1990년대부터 이어진 작업은 '삶의 투지력'을 보여준다. 신문지 표면을 볼펜으로 수없이 긋고 덧칠해 볼펜의 흔적조차 연필로 또 지워낸 작품은 자유롭다. 종이에서 뱀의 허물처럼, 나무의 껍질처럼, 또는 무엇이든 쟁취하며 경계를 넘어선다. 득도하듯 나온 그림은 배우 유아인, 방탄소년단 RM이 소장해 더욱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최 화백은 2010년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했다. 2024년 미국에 진출,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의 ‘서베이(Survey)’ 섹터에 소개되며 '수행의 그림'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이스턴 미시간 대학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최병소의 '긋기' 작업은 '무위의 세계'다. 신문지, 볼펜, 연필, 노동의 행위 모든 것을 통합한다. 관념에 갇히지 않고 지루함에서 탁월함으로 건너간 그는 안다. 황금보다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우손갤러리 서울에서 여는 '최병소의 무제'전은 6m의 검은 빛을 내는 '볼펜 그림'을 비롯해 검은 바탕에 영어로 'NOW', 'HERE'를 긁어낸 글자 회화와 손가락 길이의 종이 박스 작품도 선보인다. 얽매임을 벗은 검은 화면, 그 안에 쌓인 시간과 사유의 흔적이 '아름다움'의 개념을 조용하고도 묵직하게 흔든다. 전시는 6월 21일까지. 2025/04/17
PKM갤러리로 들어온 '시한폭탄맨' 샘바이펜 "변화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알려진 샘바이펜(SAMBYPEN·본명 김세동·33)이 길거리를 벗어났다. 국내 5대 화랑인 PKM갤러리와 전속을 맺고 개인전을 펼친다. 11일 PKM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얼떨떨한 모습을 보였다. "커머셜(브랜드 협업)작업을 하며 자유롭게 살면서도 언젠가 큰 갤러리에서 작가로서 전시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와서 무서운 것도 있었어요." 야망이 있던 그는 "'내가 준비가 됐나' 하는 생각도 길게 했고, 어느 정도 확신이 들어 전속 결정을 하게 됐다"며 설렘의 마음을 전했다. 묶이기 싫어 '전속은 안 한다'는 '요즘 작가'들과 달리 샘바이펜의 계약도 이례적이지만, 그동안 중견 작가들의 미술관급 전시를 기획해온 PKM갤러리의 새로운 변화도 주목된다. 윤형근, 유영국, 구정아, 백현진 등 국내 유명 작가들과 올라퍼 엘리아슨, 토마스 루프, 호르헤 파르도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의 개인전을 열며 PKM은 기획 화랑으로서 면모를 과시해왔다. 스트리트 아트(거리 예술)장르인 그래피티 아트티스를 수용한 건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갤러리의 행보로 보인다. 그림만이 아닌 다양한 작업으로 컬래버레이션 할 수 있는 마케팅 장점도 있다. "3년 간 작가를 지켜봤다"는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지난해 전속을 하고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오히려 작가에 시너지를 느꼈다"고 했다. "10년을 현장에서 일하면서 브랜드 협업도 많이 하고 캐릭터도 만들어서 인지 커뮤니케이션도 잘되고, 작가의 확고한 의지와 고집도 있어 준비하는 과정이 좋았다"는 것. 박 대표는 "샘바이펜과의 전속은 미술 시장 확장"이라는 의미다. "요즘 제너레이션이 생각하는 미술을 더 넓게 보기 위한 것"으로 "작가와 전속을 맺는 요건인 '유지 가능성'과 '발전 가능성'인데, 샘바이펜에 부합했다"고 말했다. "작가 본인이 갖고 있는 타고난 탤런트와 함께 엉덩이 질리게 작업으로 끌고 나가는 지구력이 필요한데, 이 작가한테 2가지가 보였어요. 자유로움을 유지하면서 팝아트 영역에서 단단하고 큰 작가로 보다 나은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 관계성을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 '미쉐린 타이어 캐릭터'로 주목 받은 작가는 원래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었다. 패션계에서 일하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당연히 패션디자이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막상 대학을 가니까 옷을 쇼핑하는 걸 좋아하지, 옷을 만드는 것은 적성이 아니더라고요."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을 다니다 중퇴하며 방황을 했던 그는 욕망의 자신을 찾았다. 한국에 돌아온 24세부터 '스트리트 아트'에 빠져들었다. 주변에 있던 인디 뮤지션 친구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을 하나 팔면 빨리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무모한 생각'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이끌었고, '마스코트 굿즈' 돈벌이를 하면서도 매년 개인전을 열었다. 2015년 미쉐린 기업의 마스코트를 풍자한 작업을 선보인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도쿄, 홍콩, 라스베가스, 마이애미 등에서 다수의 전시를 개최했다. 미술 전시 뿐 아니라 나이키, 포르쉐, 어도비, KB국민카드 등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와 협업하고 상품과 벽화, 공공미술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가며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그런데 작품이 알려지면서 최근 몇 년 간 큰 슬럼프가 왔다. "내 작업이 계속 SNS에 공개될 때마다 너무 창피하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에 오로지 돈벌이가 되는 수단이 되니까 거기서 오는 이상한 감정들이 있었다"면서 "과감하게 커머셜(기업 브랜드)작품을 중단하고 2년 전부터 작업에 집중해보자 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했다. 안목있는 갤러리에 상업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은 1992년생 작가는 날개를 달면서 작업의 변화도 왔다. "상업씬과 비슷한데 이번 전시에 평면 작업들이 새롭게 나왔어요. 이전 커머셜 작업할 때는 외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개인 작업으로 풀고, 그걸 모아서 개인전을 했는데, 이번엔 준비 과정이 완전 달랐어요. 주제를 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무엇일까 생각을 하고 작업을 하니 깊이 있는 사고와 함께 저한테는 하나로 묶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택했던 '미쉐린 캐릭터'라는 지름길의 댓가는 이제 극복했다. "스스로 관리가 안될 정도로 일이 많았고 그걸 쳐내느라 힘들었어요. 어마어마한 돈은 못 벌었지만 제 나이에 먹고 싶은 거 시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벌어보긴 했어요. 그렇게 부딪히면서 배웠던 것들, 그 경험이 이번 전시까지 이끌어 온 것 같습니다." 미쉐린에서 '시한폭탄맨'으로 변신한 그의 캐릭터가 PKM갤러리를 활기차게 하고 있다. 4년 전 '사과 박스' 뇌물을 보고 떠올린 빨간색 폭탄 머리를 한 '시한폭탄맨'의 '노는 판'이 커졌다. 에드워드 호퍼나 에두아르 마네 등 고전 명화와 심슨 가족, 포켓몬스터, 꼬마유령 캐스퍼 등의 만화 캐릭터들과 함께 천연덕스럽게 자리 잡은 채 말을 건넨다. 오는 12일부터 PKM갤러리에서 펼치는 샘바이펜의 개인전 'LAZY'는 이전 전시와 달리 러그 등 다양한 굿즈도 판매한다. 현대인의 ‘게으름’의 심리를 주제로 한 신작 페인팅 18점과 함께, 화면 속 도상을 활용한 아트 상품, 전시 주제에서 영감을 받은 젊은 뮤지션들의 음원도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특히 샘바이펜의 생각의 결과물인 입체적인 페인팅 'Wall' 시리즈가 최초로 소개된다. 펜 드로잉과 컴퓨터 그래픽스, CNC 가공, 물감칠을 거쳐 탄생한 작품은 불안한 삶을 뚫고 나온 젊은 작가의 투지력을 보여준다. 회화의 영역에 진입한 낙서 같은 작품은 경계에서 도발한 발칙함이 돋보인다. 작업은 노동집약적이다. 쌓아 올린 미디엄을 스프레이와 물감으로 도색했다가 갈아내기를 반복하고, 다시 세필로 그리는 방법을 통해 거리의 외벽을 연상케 하는 회화를 완성했다. 그 안에는 풍화된 글자와 그림, 다이너마이트와 탱크, 귀여운 동식물 캐릭터가 공존한다. 풍선껌의 판박이 스티커처럼 화면 여기저기에 붙은 'FAKE'라는 단어는 ‘순수 예술이 진짜 순수한가’에 대한 작가의 질문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전시는 5월17일까지. 2025/04/11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독립문' 쓴 김가진을 아시나요? '우뚝 선 너의 몸, 바라는 게 없는 듯하나, 바짝 마른 너의 몸, 걱정 담긴 듯하구나. 하늘에 닿는 홍수의 소용돌이에서, 누구와 배를 함께 탈까. 재야와 정부에서 백발만 머리에 가득하구나.(광무 9년(1905) 동지에 육십 늙은이 동농)' 일본 화가 덴카이(田慶)가 유화로 그린 '김가진 초상'(1905년, 71.4×105.5cm, 동농문화재단 소장)을 본 김가진(1846~1922)이 초상화에 스스로 지은 시는 대한제국의 당당함 속에 을사늑약 이후 깊게 드리운 망국(亡國) 근심을 전한다. 대한제국 2등 칙임관 대례복을 입고 있는 김가진의 초상화는 조선왕조에서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수립을 꽃과 색, 훈장으로 주체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금사(金絲)로 수놓은 활짝 핀 무궁화가 4개, 흰색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손과 흰색 장식털을 두른 대례모, 오른쪽 가슴에는 훈2등 팔괘장, 목 아래에는 훈3등 팔괘장, 왼쪽 가슴에는 황제망육순등극10주년기념장을 비롯해 3개의 기념장을 패용하고 있다. 실제 '고종실록'에도 김가진을 1901년 훈3등, 1905년에 훈2등에 서훈해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1886년(고종 23년) 41세에 문과병과에 급제한 김가진은 1887년(고종24)에 주차일본국서리판리대신(駐箚日本國署理辦事大臣)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공사관의 판사 대신으로 승진하여 1890년까지 일본에서 4년간 주일공사관의 참찬관과 공사로서 조선의 자주외교를 주도했다. 지금은 잊힌 인물이 되고 있지만 그의 흔적은 '독립문'에 남아있다. '독립문' '獨立門'.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표방한 상징으로 김가진이 한글 한자로 직접 쓴 것이다. 독립문 완공 후 김가진이 ‘제국독립문(帝國獨立門)’이 새겨진 먹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 한글에 대한 선각자적인 인식과 면모를 보여준다. 김가진의 후손들도 '독립문', '獨立門'휘호 당시의 탁본작품을 집에서 대대로 소장 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김가진은 1918년 창립된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畫協會)고문으로도 활동했다. 안중식·조석진·오세창 등 예술인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 단체는 서화 협회전 개최, '서화협회회보' 발간 등을 통해 전통 회화를 계승하면서 주체적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다. 김가진에게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망국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치열한 고민과 독립을 향한 간절한 염원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이번 전시는 김가진과 후손들의 다양한 관계 인물망을 통해 개인 → 가족 → 대한민국의 역사가 독립과 통일로 하나 됨을 실증하고 있다." 경기도박물관이 '광복80 –합合' 특별전 3부작 중 제 1부인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를 펼친다. 이동국 관장은 "김가진의 시문(詩文)과 글씨, 사진, 그림을 중심으로 충절가문, 독립전쟁에 투신한 동시대와 후대 인물들의 작품 120여 점을 종횡, 대각으로 그물망처럼 엮었다"고 밝혔다. 오는 11일 개막하는 이 전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이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기획됐다. '합(合)'을 모토로 독립완성과 통일성취의 미래를 역사에서 찾는 3부작 특별전을 연중 개최한다. '김가진' 전시에 이어 '여운형 : 남북통일의 길'(7.17~10.26), '오세창 : 문화보국'(11.27~‘26.3.8)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시리즈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전시 이 전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약육강식의 혼란이 거듭되었던 시대에 개화선각자이자 혁신관료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로(國老 큰 어른)로 독립전쟁에 투신한 동농 김가진(1846~1922)의 정치와 예술 일체의 세계를 동시대 인물들과 함께 조명했다. 이동국 관장은 "김가진이 남긴 수많은 글과 글씨에는 척사(斥邪)와 개화(開化), 제국(帝國)과 민국(民國), 망국(亡國)과 건국(建國), 중국으로부터의 독립(獨立)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중 과제가 교차하는 시대 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한 고뇌와 실천이 녹아있다"고 했다. 이동국 관장은 "예술에 있어서도 김가진은 서화협회 고문으로서 오세창, 안중식, 정학교 등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야말로 정치와 예술의 모든 길이 김가진으로 사통팔달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엮는 정신 줄은 다름 아닌 마음 그림, 즉 심화(心畫)로서 ’서(書)‘라고 하는 언어"라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전시는 ▲충절혈맥(忠節血脈), 개화선각(開化先覺)으로 ▲대한제국대신(大韓帝國大臣) ▲예술과 정치의 일치(政藝一致) ▲임정국로(臨政國老)등 4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선보인다. ▲겸재 정선이 그린 '백운동도' ▲김윤식, 김옥균, 김가진, 서재필 등 개화파들의 합작 '시축' ▲김가진이 만든 '주일공사관 외교서신 암호규칙 초고와 완성본', '암호 편지' ▲명성왕후가 영의정 심순택에게 휘호한 '옥골빙심(玉骨氷心)'과 김가진이 쓴 '이병직 묘표' ▲김가진이 휘호한 '독립문' '獨立門' 현판 ▲일본 화가 덴카이의 '김가진 초상' ▲을사늑약 때 자결한 민영환을 추모하는 '김가진의 만장' ▲‘수죽향(水竹鄕)’ 건설을 노래한 자작 행서 '칠언시' ▲김가진이 직접 짓고 쓴 '대동단大同團 선언서' ▲김구가 김의한에게 써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등을 소개한다. 이 가운데 조선민족대동단이 1919년 11월 발표한 제2의 독립선언서로 불리는 '대동단선언'이 눈길을 끈다. 대동단은 3·1운동 직후에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로 김가진이 총재를 맡았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항일 무장조직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고, 대동신보(大同新報)등의 선전물을 비밀리에 제작·배포하여 민중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본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총재인 김가진은 1919년 10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당시 75세였던 김가진이 직접 짓고 쓴 이 선언서는 상해로 망명한 뒤 11월 28일에 일어난 이른바 ‘제2차 독립 만세 운동’ 때 배포되었다. 단군과 고구려의 자손인 우리 민족의 자주(自主)를 선포하고, 일본의 폭압을 규탄하며 혈전(血戰)을 불사하겠다는 내용이 의친왕 이강, 김가진, 전협, 백초월(白初月), 나창헌, 이신애, 염광록(廉光祿) 등 33인의 조선 민족 대표 이름으로 적혀 있다. 1921년 북간도군정서 고문으로 활동했던 그는 1922년 77세에 영면했다. 상하이 홍차오로 만국공묘에 안장됐다. 이번 전시는 김가진과 후손들의 다양한 관계 인물망을 통해 개인과 가족의 역사를 통해 대한민국 근대사를 거시적으로 조망한다. 특히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 →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개화선각자와 혁신관료로 일이관지(一以貫之) 해낸 김가진이 청(淸)과 일(日)로부터 '독립'이라는 2가지 과제를 어떻게 풀어 나갔는지 보는 더없이 중요한 기회다. 이동국 관장은 "민주공화주의자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백의종군하여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으로 독립전쟁 현장에 투신하는 김가진의 정예일치의 철학과 실천은 광복 80년 우리 앞에 놓여 진, 하지만 박약해질 대로 박약해진 남북통일 과제 해결의 등불"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광복회 후원으로 진행된다. 오는 25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특강이 열린다. 전시는 6월29일까지. 2025/04/11
"겸재 정선'展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 10선' "간송미술관 덕분입니다." 국내 최초 최대 규모로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전시를 기획한 조지윤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10년 만에 한 풀이를 했다. 조선 회화사를 이야기할 때 '진경산수화' 거장 겸재 정선(1676~1759)을 빼놓을 수 없는 일. 언젠가 꼭 한번 치러야 할 전시지만, 국내 최초의 고미술 미술관 간송미술관 때문에 멈칫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문화유산 지킴이로 나선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이 평생 모은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과 청자 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 등 1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은 겸재 정선의 최고작이 소장되어 있지만 미술사 연구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조 실장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4년 전. 2021년 간송문화재단이 대구간송미술관을 건립하면서 작품 대여의 문이 열렸다. 이번 전시에 간송미술관은 보물 등을 포함해 진품명품 79점을 호암미술관에 내보냈다. 오는 4월 2일부터 6월 29일까지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펼치는 전시는 그야말로 '겸재 정선'의 축제다. 이건희컬렉션으로 유명한 '인왕제색도', '금강전도'(개인소장) 국보 2건을 비롯해, '풍악내산총람(간송문화재단)', 금강내산(간송미술문화재단)등 보물 10건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였다. 특히 ‘인왕제색도’는 국내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기회다. 고서화 보호를 위해 5월 6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돌아간다. 이후 이건희컬렉션 해외 순회전에 출품, 11월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박물관을 시작으로 3년 간 해외에 머무른다. 호암미술관과 간송미술관의 협력으로 이뤄낸 전시는 의미가 크다. 간송 전형필(1906~1962)과 호암 이병철(1910~1987)의 '문화보국(文化保國)’의 정신을 일깨우며 그동안 다각적으로 조명해왔던 겸재 정선의 광대한 회화 세계를 일시에 조망하게 한다. 겸재 정선은 18세기 조선 회화의 전성기를 이끈 화가다. 중국 화보의 모방에 그쳤던 문인화를 떨치고 우리나라의 경관을 개성적인 필치로 그려낸 진경산수화 (眞景山水畵)를 정립, 당대는 물론 후대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담아내며,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자산이 됐다. 조지윤 실장은 "현 시대 대중적으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도 겸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이 전시는 정선이 남긴 위대한 회회적 성취는 물론 '문인 화가'로서 자부심으로 18세기 조선을 살고 간 한 예술가의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총 165점이 모인 이번 전시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지만, 보험가액만 수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국내 고미술 경매 사상 첫 '보물'이자 최고가인 34억 원에 낙찰돼 화제가 됐던 '퇴우이선생진적첩'(삼성문화재단 소장)도 선보인다. 'K 아트 원조'이고, '진경 산수화 걸작'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너무 많은 작품 때문일까? 300여 년의 세월의 더께를 쓰고 고풍스러워진 그림들은 현대인들을 쉽게 매혹하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전시장에서 누렇게 변한 그림들은 '은근의 미학'을 전한다. 지나치게 거칠고 화려한 현대미술에 찌들어 있는 시대속에 '자연 순 맛', 한국 전통 고유의 미감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전시다. 조지윤 실장은 "전시를 기획하고 보니 정선의 총체적인 예술세계는 문인 의식과 집안에 대한 자부심까지 볼 수 있었다"며 문인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한번 봐서는 모른다. 천천히 여러 번 관람하는 것"을 당부했다. 겸재 정선의 역대급 그림 165점이 쏟아진 이번 전시에서 조 실장이 추천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 10점을 작품 설명과 함께 소개한다. ◆①국보 금강전도: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담채 130.8 x 94.5cm(개인소장) 금강산은 정선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많이 그린 주제다. 정선은 평생 여러 차례 금강산 일대를 여행했고, 수많은 금강산 진경산수화를 남겼는데, 이 작품은 그 중에서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금강전도'는 겨울 금강산인 개골산을 그린 것으로,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가 모두 한눈에 들어오도록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정선은 뾰족한 암산과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을 오로지 점과 선 만으로 뚜렷하게 대비시켜 표현했다. 이처럼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그린 전도(全圖) 형식의 그림은 금강산을 그릴 때 오랫동안 애호했던 형식이다. 일종의 회화식 지도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 금강산의 경치와 명소를 상상하는 와유(臥遊)의 목적으로 널리 그려졌다. 당시 사람들은 금강산을 직접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 작품을 머리맡에 두고 마음 편히 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②국보 '인왕제색도': 조선, 1751년, 종이에 수묵 79.2 x 138.2cm(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회장 기증) 정선이 76세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쌓아 온 진경산수화의 대가 다운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인 대작이다. 정선은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개이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인왕산의 모습을 실감 나게 묘사하였다. 물기가 남아 있는 거대한 암벽을 진한 먹으로 중첩시키고 다른 산들은 빠른 필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여 인왕산의 육중한 골격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다. 양감이 풍부한 암벽의 처리, 농묵으로 능란하게 처리된 소나무들, 걷히는 비구름 밖으로 돋보이는 굴곡이 심한 산봉우리, 생동하는 전체의 경관 등에서 완숙한 경지에 오른 정선의 필치를 그대로 엿볼 수 있다. ◆③보물 '풍악내산총람' 18세기 중엽, 비단에 채색 100.8 x 73.8 cm(간송미술문화재단) 이 그림은 단발령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금강산의 독특한 지형적 특징을 섬세한 필치와 색채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거친 암산(岩山)은 녹색 바탕 위로 흰색이 더해져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듯한 모습을 보이며, 깎아지른 듯한 암봉들은 날카롭고 기묘한 형상을 띤다. 반면, 수풀이 울창한 토산(土山)은 부드러운 붓 터치와 짙푸른 색채, 길쭉한 점 형태의 나무 표현으로 생동감을 더한다. 또한 단순한 자연 경관 묘사를 넘어, 금강산의 조화로운 음양을 절묘하게 담아낸다. 험준한 바위산과 부드러운 흙산이 조화를 이루고, 그 사이로 자리 잡은 사찰과 암자, 형형색색의 단풍이 어우러지며 금강산의 깊은 가을 정취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정선이 64세 무렵, 채색을 다루는 데 완숙한 경지에 오른 정선의 대표작으로 '금강전도'와 또 다른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인왕제색도와 교체 후 5월7일부터 전시한다) ◆④보물 '금강내산'(해악전신첩)1747년, 비단에 수묵담채, 32.6 x 49.6 cm(간송미술문화재단) '해악전신첩'은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 즉 금강산과 동해 바다의 초상화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711년 정선의 오랜 벗 이병연은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에서 현감으로 재임하던 중 스승인 김창흡과 정선을 초청하여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고 김창흡과 이병연은 시로, 정선은 그림으로,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그 감상을 표현했다. 이때의 그림과 시가 합쳐져 (전)'해악전신첩'(1712년)을 만들었다. 아울러 이 화첩은 '신묘년풍악도첩'과 함께 정선이 화단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해악전신첩'은 소실되었는데, 겸재가 72세에 금강산을 여행하고 노대가의 솜씨로 그려낸 것이 1747년에 제작된, 동일한 명칭의 (후)'해악전신첩'이다. 이 화첩에는 21면의 그림과 78세로 생존해 있던 이병연이 쓴 시, 당대 명필인 홍봉조가 쓴 김창흡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필법은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되었고, 화면 구성은 생략과 강조가 자재롭게 구사되어 각 화면의 주제가 더욱 부각되어 정선 진경산수화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⑤보물 '사선정(해악전신첩)' 1747년, 비단에 수묵담채 32.5 x 25.1cm(간송미술문화재단) '사선정'은 강원도 고성군의 삼일포 또는 삼일호 라고도 부르는 호수 중앙의 큰 바위섬에 건립된 정자이다. 이 섬은 신라 때 국선 4명이 이곳에 왔다가 그 경치에 홀려 3일 동안 돌아가는 것도 잊고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선은 '신묘년풍악첩'(1711년), '관동명승첩'(1738년), '해악전신첩'(1747년), '관동팔경도'(1751년경) 등에서 이 삼일호를 그렸으며, 72세에 그린 '해악전신첩'의 '사선정'은 정선의 화면 구성의 대담성, 필법의 완성도, 대상의 추상화 등이 가속화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선도의 바위나 그 위쪽 문암봉 등의 바위를 조개껍질처럼 표현하거나, 사선정 아래 우뚝 솟은 바위는 합장하고 서 있는 사람처럼 그리는 등의 필법이 눈에 띈다. ◆⑥청풍계(장동팔경첩),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33.7 x 29.5cm(간송미술문화재단) 장동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일대로, 정선이 태어나 평생 평생 살았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정선은 장동의 모습을 진경산수화로 정립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 장동의 여러 명소를 그림으로 담아내었다. 정선이 76세경인 1756년에 제작한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의 '장동팔경첩'은 정선이 노년기에도 화법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더욱 원숙해진 필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선은 80대 초반에 제작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장동팔경첩'도 남겼다.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에 해당하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곳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던 선원 김상용이 살던 곳이다. 김상용은 당시 세도가이자 정선의 후원자였던 장동 김씨 가문의 선조였다. 이 그림은 태고정에 초점을 맞춰 늠연당과 청풍지각 등 건물을 오른쪽으로 배치하고, 만송강과 창욱봉을 왼쪽에서 대응하게 했다. 장맛비 그친 여름날의 경치인 듯 주변의 수림과 바위들이 물기에 젖어 온통 짙푸르게 표현됐다. ◆⑦보물 '압구정(경교명승첩)' 1740~1741년 비단에 채색 20.0×31.0cm(간송미술문화재단)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은 1740년 65세의 나이로 양천현(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일대) 현령(종 5품)으로 발령받았다. 이듬해인 1741년 2월에 겸재의 친구이자 뛰어난 시인이었던 이병연이 겸재에게 편지를 보내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는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의 약속을 제안하였다. 이 약속대로 겸재가 양천현령 시절(1740–1745) 한강을 비롯하여 서울의 빼어난 경치와 다양한 고사를 그려 만든 화첩이 '경교명승첩'이다. '압구정'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의 옛 모습으로, 강변을 따라 높은 언덕이 줄지어 있고, 주변으로 기와집, 초가집이 곳곳에 그려져 있다. 가장 끝 언덕 위 높이 지어진 큰 기와집이 압구정으로 권신 한명회(1415-1487)가 건립한 정자이다. 압구정 앞 강 건너는 중종 때부터 독서당(젊고 총명한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던 집)을 두었던 두무개이고, 그 뒤로 짙은 녹색으로 그린 산이 남산이다. 남산의 정상에는 큰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한국 전쟁 때 까지도 이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압구정 주변의 산 언덕은 연둣빛으로 칠하고 초록으로 덧칠해 높은 언덕의 그늘을 표현하고, 먼 산들은 군청색을 옅게 칠해 서울 주변의 산들을 그윽하게 그렸다. 다만 남산은 멀리 있지만 짙푸른 소나무 숲을 강조하기 위해 짙은 녹색으로 그려 다른 산들과 구별되게 했다. ◆⑧박생연,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98.2× 35.8cm(간송미술문화재단) 개성 대흥산 대흥산성 밖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박연폭포이며, 박생연은 박연폭포의 다른 이름이다. 박연폭포는 돌 항아리같이 생겼는데, 너럭바위가 연못 중심에 솟구쳐 올라와 있어, 도암(島巖)이라고 한다. 박진사라는 사람이 이 연못 위에서 젓대를 불었더니 용녀가 그것에 감동하여 물속으로 끌어들여 남편으로 삼았기 때문에 박연이라 하며, 그 어머니가 와서 울다가 아래 연못에 떨어져 죽으니 고모담이라 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박연폭포가 거대한 암석이 층층이 쌓여서 천길 벼랑을 이룬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폭포 좌우에 기암괴석이 자리잡고 있어 폭포가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데, 특히 폭포 우측에 솟구쳐 오른 암봉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접으며 내려 앉는 박진감 넘치는 자태라서 화면에 긴장감을 주고 있다. 폭포는 바탕색을 그대로 두면서 그 위에 호분을 덧칠하여 가을 물의 흰빛을 강조해 놓았다. 폭포 아래쪽에 범사정이 있고 그곳에서 갓 쓴 선비 세 사람이 두 명의 시동을 거느리고 단풍 든 폭포를 감상하고 있다. 마치 폭포의 소리까지 들리는 듯한 실감나는 작품이다. ◆⑨보물 '여산초당' 18세기 비단에 채색 125.5 x 68.7cm(간송미술문화재단) 이 작품은 당 나라의 시인 백거이(772-846)의 여산초당을 그린 것이다. 「여산초당기」에 묘사된 여산초당은 북쪽엔 향로봉, 동쪽엔 폭포가 있으며, 남쪽 네모난 연못에 백련이 피어있고, 개울 따라 늙은 소나무와 삼나무가 있어 그 키를 알 수 없다 했다. 겸재 정선은 이 글을 읽고 시정과 화흥이 넘쳐 이 그림을 그린 듯 하다. 초당에 앉은 백거이의 모습은 정선이 자주 그리던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의 모습으로 붉은 난간을 두른 초당에 앉아 백련이 핀 연못과 벌레 쪼러 거니는 단정학을 바라보고 있다. 초당 뒤편의 대나무, 주변의 소나무와 향나무, 동구의 소나무도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려 놓았다. 혹시나 백거이의 여산초당임을 잊을까 봐 동구 밖의 동자는 중국풍의 멜대를 어깨에 메고 초당으로 오르는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둥근 돌이 쌓여 있는 듯 표현하는 반두준, 와운준과 수직 절벽의 필법, 대담하고 짙푸른 수목 등이 정선 특유의 화법이라서, 그가 진경화풍을 확립해 정형산수에 응용하는 단계인 70대 중반 이후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⑩우화등선·연강임술첩서문 홍경보 27.6 x 94.6 cm 개인소장 경기도 관찰사였던 홍경보(1692-1744)는 1742년 임술년에 이 화첩의 제작을 기획하였다. 임술년은 과거 북송대 지식인인 소식의 '적벽부'가 집필된 해(1082)이다. 홍경보는 동일한 임술년인 1742년에 소식의 행적을 따라 정선과 신유한(1681-1752)을 초청하여 임진강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또한 그는 이 때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정선에게는 그림을, 신유한에게는 글을 요청하였다. '연강임술첩'은 홍경보의 서문을 시작으로 정선의 두 그림과 신유한의 '의적벽부'로 완성되어 총 세 벌이 제작되었으며, 현재 두 벌 만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정선의 관직 생활과 함께 주변인들과의 교유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전시에는 겸재본, 홍경보본 두 벌을 최초로 동시에 전시한다. 우화정은 경기도 삭녕 임진강 상류에 위치한 정자이다. 이 정자는 1667년에 삭녕군수였던 이산뢰(1603-1671)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이름은 소식이 저술한 「(전)적벽부」의 ‘날개가 돋혀 신선으로 오름이라’ 이라는 구절에서 차용되었다. 이 구절은 우화정 아래의 포구에서 배에 오르는 장면이 묘사된 '우화등선' 작품명에도 응용되었다. 정선은 강에 잇닿은 절벽을 짙은 먹과 거친 부벽준으로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반면 절벽 뒤로 봉긋 솟아있는 토산은 느슨한 필치의 피마준과 미점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대조는 강에 인접한 절벽을 부각시켜 이 행사의 주된 목적인 '적벽부'의 재현을 연상하게 한다. 2025/04/01
"지구가 위험하다"…'자연국가' 최재은 '아름다운 경고' "지구가 위험하다. 바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늦는다." 숲 회복 'DMZ 프로젝트'를 10년째 이어오고 있는 설치 미술가 최재은(72)이 "지구를 지키는 일에 절실하게 작업하고 있다"며 관심을 촉구했다. 20일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자연국가'개인전을 연 최재은은 "자연은 인간이 필요 없지만 인간은 자연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며 "자연 생명에 주권을 찾아주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숲이 망가지고 있다. 'DMZ'는 누구의 땅도 아닌 상징적인 공간이다. 생태계가 주인이지 않나. 생명체들과 멸종위기종들이 편하게 살 수 있게 그들의 주권을 찾아주고 싶다." 작가 최재은은 "그렇다고 계몽가는 아니다"라며 "예술가이니까 작업으로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연국가' 최재은은 누구? 국제갤러리 K2와 K3에서 펼친 최재은 개인전 '자연 국가' 전시는 아름다운 경고다. 조각, 설치, 건축, 사진,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로 생명의 근원과 시간, 존재의 탄생과 소멸, 자연과 인간의 복합적인 관계를 사유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1970년대 중반 도쿄로 건너간 최재은은 도쿄의 소게츠 아트 센터에서 ‘이케바나(生け花)’의 문법을 수학,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으로 미술에 입문했다. 1985년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가 설계한 소게츠 아트 센터 내 실내 정원 'Heaven'을 13톤의 흙으로 덮고 그 위에 씨앗을 뿌린 '대지(Earth)'를 선보이며 첫 개인전을 개최 주목받았다. 생명의 흐름과 시공간성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시각화한 작업이다. 이후 1986년부터 시작된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World Underground Project)'를 통해 자연 생명과 순환에 대한 '프로젝트 작업'은 최재은을 상징화 했다. 종이를 오랜 시간 땅 속에 묻었다가 꺼내어 종이에 축적되는 시간의 흔적으로 생명과 순환에 대해 고찰하는 작업은 종이 속 미생물의 소우주를 관찰하는 등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시도로 확장됐다. 특히 2015년부터 진행해 온 '대지의 꿈(Dreaming of Earth)'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DMZ의 숲을 회복하기 위해 전문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한 구체적 해결 방안과 실천적인 방법론들을 작업의 형태로 구축해 오고 있다. ◆국제갤러리 개인전…자연에 집중한 '숲의 빛과 소리' 이번 전시를 통해 최재은은 ‘숲’의 생명력을 다채롭게 해석해냈다. K2의 1층을 수놓은 '숲으로부터' 회화 연작은 기발하다. 매일 숲을 산책하는 작가의 일상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영어 흘림채로 써 있는데 대화하듯 읽히고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분홍색과 황토색, 옅은 갈색으로 보이는 캔버스는 자연적인 소리가 담겼다. 작가가 거주하는 일본 교토의 동네 숲을 산책하며 주워 모은 낙엽과 꽃잎을 재료로 물감의 안료를 만들고 캔버스에 칠했다. 숲 속을 거닐면서 들었던 바람소리, 새소리, 빗소리 등 다양한 소리들을 들리는 그대로 음차해 흑연으로 적었다. 'Sar r r r r'(2025)는 늦가을 낙엽이 ‘사르르’ 떨어지는 소리이며, 'Hu u u u'(2025)는 숲 너머의 먼 산에서 들려오는 산울림 소리다. 한글로 '쉿!'도 써 있어 입에 손을 대고 '쉿'하게 한다. K2의 2층 전시장 안쪽에서 만나는 영상 작품 'Flows'(2010)는 명상으로 이끌며 자연에 집중하게 한다. 거대한 고목의 밑동을 느리게 360도 회전하며 17분 동안 보여주는 작품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이 남기는 자연 변화의 움직임을 전한다. ◆10년 간 'DMZ 프로젝트'…"종자 볼 기부 하세요" K3 전시장에는 작가가 지난 10년 간 진행해 온 ‘DMZ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대지의 꿈'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최재은의 DMZ 프로젝트는 '자연국가(Nature Rules)'의 단계로 진입해 한반도 비무장지대의 생태 회복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작가는 "DMZ 내부의 생태 환경은 애초 가졌던 환상과는 달리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며 "‘생태 현황 분석도’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오랜 기간 남북의 군사적 개입으로 인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지역의 숲이 파편화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비무장지대의 생태 현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각 구역 생태계의 복원을 위한 식재의 종류와 양을 정리하는 데만 수 년이 걸렸다. 작가는 여전히 수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비무장지대에 나무 종자를 품은 직경 3~5 cm의 자그마한 ‘종자 볼(seed bomb)’을 빚어 드론으로 뿌리겠다는 야심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회복될 수 있는 이 땅의 미래를 함께 꿈꾸고 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작가는 "이번 전시를 보면서 종자 볼 기부를 해 달라"고 바랐다. 말린 꽃잎으로 제작한 병풍 안에 컴퓨터가 한 대씩 놓여 있다. 관람객은 작가가 만든 웹사이트에 들어가 DMZ의 지도를 살펴보며 자신이 원하는 구역에 맞춰 ‘종자 볼 기부 약속’을 등록할 수 있다. 100원에 한 개의 종자 볼을 기부할 수 있어 DMZ의 숲을 회복하는 과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전시는 5월 11일까지. 관람은 무료. 2025/03/20
렘브란트 충격→'돌가루 화가' 김근태 '담론' "나는 보이지 않는 사유의 끝을 향해 걸어간다." 젊은 시절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에 빠졌던 그는 '언어의 변화'를 느끼며 항상 변해간다는 것, 그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물 흐르듯이 돌고 '자꾸 변해가는 것', 하지만 또 '변해가는데 그렇지 않은 것'. 그 시작된 지점이 어디일까 궁금해 했던 그는 "일생을 그 부분을 찾아가는 작업에 집중한 것 같다"고 했다. 작품 제목을 ‘담론(Discussion)’으로 지은 이유기도 하다. "오랜 세월 알게 모르게 공부를 해왔는데 '시작 점'은 분명히 있어요. 제 작업을 어떻게 본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그 '시작 점'을 찾아가는 거꾸로 가는 세계에 있는 것 같아요. 몸이 좀 더 젊어지면 좋겠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몸은 자꾸 세월을 지나가고 있지만 정신은 되레 처음 출발점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덤벙 '돌가루 화가' 김근태 "예술은 자신에 솔직해지는 것이다." 나이 고희를 넘긴 화가 김근태는 이제야 '수분각위(隨分覺位: 이제 조금씩 되어간다)'라고 했다.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0년대부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담론' 주제로 연작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돌가루와 러버(rubber)를 사용해 직접 제작한 석분 물감으로 작업한다. '돌가루'를 무기로 도자의 표면 같은 ‘숨’ 연작, 유화 물감의 두꺼운 마띠에르로 이루어진 ‘결’ 연작을 만든다. "외국 그림만 멋있다며 우리 것 김홍도, 정선의 그림 가치를 몰랐다. 우리의 도공들, 석공들이 스승이다. 만나 뵙지 못했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를 드린다." 13일 서울 통의동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만난 그는 물감의 흔적만 있는 그림처럼 모호하고 추상적인 언어로 말을 쏟아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담은 것이 그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0번 넘게 밑 칠을 하고 '덤벙 분청'처럼 물감을 쓱 빼내듯 칠한 붓 질은 수행의 선조들인 도공, 석공들에 대한 오마주(hommage)가 담겼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 많은 변곡점도 있고 어려움도 많이 있었겠지만 어느 순간에 다 그걸 포용하고 안에서 끌어들이면서 오로지 작품으로만 다 승화 시켰고 만들어낸 것에 대한 감사함, 이 분들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림은 잘 그리는 걸로 해결되지 않는다" 40대인 1993년 처음 간 유럽 여행에서 본 '렘브란트 자화상'은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을 가했다. "학창시절 이미지로만 봤던 진짜 그림은 에너지가 너무 달랐다. 렘브란트의 충격, 그 감성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유럽의 역사, 지식이 축적된 걸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건 아니구나. 내 옷은 아니었다는 것을…" "서구 모더니즘에 바쳤던 20년 작가 인생의 붕괴였다"는 그는 "화가는 결국 사람, 사람의 마음을 그리는 존재"라고 자각했다. 3~4년을 그림을 못 그리고 방황하던 시절, 경주 남산에서 알아차렸다. "남산의 유적들을 보면서 아 이거구나. 내가 찾던 것을 알겠더라. 그래서 석굴암을 다시 가봤는데, 가서 보니까 알겠더라. 설명은 못하겠다. 그 당시도 지금도 못하겠지만 알겠더라. 몇 시간 사이에 전체 흐름이 눈에 펼쳐졌다. 3~4개월 만에 이루어진 일로 이후 사비나갤러리 개인전에서 돌 가루 작업이 처음 나왔다. 그때가 1997년이었다." 천 년 전, 이천 년 전 이름 모를 석공이 돌을 다듬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돌 가루를 물감에 개어 쓰는 방식을 실험했다. 경주 남산의 탑들과 도자기를 관찰한 후, 석분과 접착제를 물감과 혼합하여 분청 사기의 질감을 구현하는 지금의 기술적 방법에 이르게 되었다. 각 작품은 평면의 캔버스를 채우는 붓 놀림의 미묘한 차이와 섬세한 깊이로 구현된 변주와 화음을 통해 무한한 이미지로 그때 그때 탈바꿈한다. ◆'숨결' 순수한 붓질의 감각 "나 답게 살고 싶다. 나 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 젊은 시절 뭔가 항상 허전하고 채워지지 않았던 걸 비움으로써 '선(禪)의 세계'를 찾은 그는 오직 그리는 행위의 에너지에 몰입했다. 여백인 듯 여백 아닌 듯 화면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붓 질은 그의 '숨'과 '결'로 호흡한다. '숨'이란 제목의 작품들은 주로 화면을 수평으로 분할 하는 백색과 황토색의 매끈한 표면을 가진 연작으로 나타난다. '결'은 분할된 영역 대신 푸루시안 블루, 바이올렛, 흰색, 검은색 등의 단색조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지르는 붓질의 흔적을 강하게 드러낸다. 김근태는 이 두 연작을 묶어 '숨결'이란 덩어리로 묶어 놓았다. "숨을 쉬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강렬한 욕망에 속한다. 숨을 쉬지 않으면 생명을 연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붓질의 흔적들은 자연스러운 무의식 속에 나온다. 행위의 연속된 시간 속에서 단호한 한 순간을 놓치면 안된다. 생각이 들어가는 순간, 붓도 욕망에 취한다. "요즘 그림이 너무 날씬해지는 것은 아닌가? 괜히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 아닌가?" 그래도 이런 마음을 가다듬고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간다. 단번에 스윽~ 숨을 쉬듯 덤덤하게 그리는 이유다. ◆"그림이 좀 모자라면 어때요?" 거친 붓질과 투박한 물감의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여유를 보이는 작품은 서양화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이번 리안갤러리에서 공개된 물감이 덕지덕지 두꺼운 '검은 그림'(Discussion 130x250cm)과 '하얀 그림'(Discussion 160x130cm)은 '사물의 실체는 파악하기 어렵다'는 소동파의 '여산진면목'이 담겼다. "작업실에 인접해 있는 북한산 암벽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다. "암벽은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세계로 나를 초대한다. 이름 모를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그 시간과 깊이에 숨이 막힌다. 암벽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는 순간, 바람 소리와 구름 한 점이 나를 벗어나게 한다.” 숨 막히는 암벽의 느낌을 물감의 질감으로만 표현한 작품은 시간의 깊이를 새겨 놓은 듯하다. (유화 물감 마르기는 몇 십년이 걸린다. 하지만 밀도감 질감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유화 물감을 그대로 짜 캔버스에 올려놓고 기름기를 쫙 빼서 만든 '검은 그림'은 "안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상태를 더 존중한 마음, 그 암벽의 감흥을 계산 없이 그린 것"이라고 했다. 화면의 표면을 온통 뒤덮고 있는 이 질감은 마치 동양화에서 산이나 암석의 표현할 때 쓰는 '부벽준(斧劈皴)'을 닮았다. 도끼로 나무를 찍어내었을 때 생기는 수직의 단면을 층층이 쌓아 올린 듯하다. 하지만 그는 "이 또한 부벽준을 의식 한 것은 아니다"며 '회화가 단지 그림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 시킨다. "경험이 많아 다른 것은 안 보려고 하는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겹겹이 쌓인 것을 한방에 벗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는 작품"이라며 "환하게 진면목이 드러난 자기 모습으로 '그래, 인생이 이런 겁니다. 악수하고 술 한잔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선문답 같은 말을 했다. 무심의 경지에 오른 김근태는 다시 '담론의 세계'에서 소통을 원한다.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변주 되고 있는 '담론'은 이번 리안갤러리에서 초심으로 돌아간 설렘의 감정이 있다. "내 그림을 부닥쳤을 때 어떤 마음일까? 궁금합니다. 그런 의문점을 던져 주는 장치를 한 게 제 그림의 태도입니다. 관람객들이 작품 앞에서 '이게 뭐지 도대체?, 내가 생각했던 건 이거였는데 다르네?, 왜 이게 있지? 왜 하얗지? 두께가 두껍지? 라는 반응을 기대합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건드리고 같이 호흡하고 싶어요. 제 그림을 보는 분들이 대화하고자 한다면 기꺼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전시는 4월 30일까지. 2025/03/14
유선태 '동시적 풍경'…추구미는 '화이부동'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림이 조각이 되고, 조각이 그림이 되는 작품. 유선태 작가는 이를 두고 ‘동시적인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상반된 개념, 자연과 오브제를 한 화면에 배치하는 ‘동시적 풍경’의 '추구미'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상태다. 두 요소 간의 순환과 조화를 이루는 작업 세계다. '말과 글' 오브제 풍경 작가로 유명한 유선태(67)가 5년 만에 귀환했다. '자연을 담은 오브제, 오브제를 담은 자연'을 타이틀로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Space 97’과 ‘공예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회화와 오브제 작품 총 40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말과 글'의 새로운 시리즈인 ‘우연과 필연’을 최초로 공개했다. 유선태의 '동시적인 풍경'은 크게 '말과 글'과 '문'에서 나타나며, 이번 전시에서 두 시리즈 모두 감상할 수 있다. 2006년 시작된 '말과 글'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저서 『말(Les Mots)』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 지어진 것으로 작가가 우연히 본 창밖 풍경에서 출발했다. "작업을 하던 어느 날 앞뜰의 나무 주위에 나뭇잎이 가득 떨어진 모습을 보았는데 이때 나무에 달린 잎은 '말', 떨어져 낙엽이 된 잎은 '글씨'와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잎이 떨어져 거름이 되고 다시 새잎이 돋아나는 것처럼 '말은 글이 되고 글은 다시 말이 된다는 느낌. 이러한 발견 후 말과 글의 관계처럼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찾아서 작품으로 옮겼지요." '말과 글' 시리즈에는 대표적으로 책이 들어있다. 책은 인쇄 활자, 즉 글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초기 '말과 글'에서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책은 자연과 가장 대비되는 오브제다. 인간의 곁에 오랫동안 존재하면서 인간에 대한 것들을 기록한 문명의 결과가 책이다. 작품에는 침묵하는 듯이 닫혀 있거나, 때로는 활짝 펼쳐진 채로 날개 단 듯 부유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신작에도 수십 권의 책이 차곡차곡 쌓여 마치 개선문처럼 하나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작가는 "스스로 존재하여 우연적인 자연과 달리 책은 필연적"이라며 "이 작품을 '말과 글', 그 중에서도 ‘우연과 필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newsis_inyoung_left_start:]]]]"각각 우연과 필연을 상징하는 자연과 책을 하나의 화면에서 다룸으로써 약간의 긴장을 만드는데, 이와 동시에 책과 자연은 모두 인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책을 통해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하나의 문처럼 쌓여 있는 책의 기둥들 사이로 자연의 풍경이 보이고 그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통과하며 자연으로 향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은 두 대상 간의 조화를 이루려는 표현이다. " [[[[:newsis_inyoung_left_end:]]]]유선태는 홍익대학교 대학원 졸업 후 1980년대 초 파리로 건너가 국립 8대학에서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랜 유학기간 동안 동서양의 감성을 절묘하게 혼합한 화법을 고안하며 작업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유학 시절부터 평면과 입체를 동시에 시도한 유선태는 매체의 경계를 허무는 조형 실험을 거듭한 끝에 2006년 '말과 글' 연작을 시작하며 그림과 오브제가 순환하는 작업 세계를 만들었다. "애초에 예술이란 것도 인간이 규정한 것일 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드러냄과 표현만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기성의 관념이나 위계, 범주를 거부하는 작가의 태도가 작업에서 엿보인다. 유선태는 오브제에 풍경을 덧그리기도 한다. 푸른 하늘과 숲이 울창한 풍경이 그려진 첼로, 세계지도 대신 단풍으로 물든 산이 그려진 지구본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전 골동품 오브제를 껴 놓은 작품은 너무 장식적이어서 흠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오브제를 보는 순간 작품이 떠오른다. 나는 뼈 속까지 장식적"이라며 "프랑스 유학시절 벼룩시장에 만난 '골동품'이 작품의 영감이 됐다"고 했다. (골동품)오브제는 '멈추지 않는 시간을 도입한 것"이라는 것.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말과 글'의 ‘온실 시리즈’도 첫 선을 보였다. 자신만의 아뜰리에를 꿈꾸며 ‘나의 아뜰리에’ 시리즈를 그렸던 유선태는 그 희망대로 독립적인 아뜰리에를 갖게 되었고, 이제는 나만의 온실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린다. 시공간을 오가는 작품은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뫼비우스띠처럼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자연과 건축, 외부와 내부, 순간과 영원, 말과 글, 오브제와 자연물 등이 하나로 엮어진다. 자전거를 탄 작가의 모습은 가로 막힌 것처럼 보이는 두 대상을 오가며, 소녀상이 보고 있는 거울에는 소녀의 얼굴이 아닌 풍경이 비쳐 입체와 평면의 순환이 이뤄졌음이 드러난다. 하나의 풍경에서 또 다른 풍경이 생성되고 중첩되는 건 그의 '쌍둥이 기질'이 담겼다. 본능적으로 또 다른 하나를 항상 생각한다는 그는 화가로, 형은 의사로 살고 있다. 오브제와 그림이 분별이 없는 작품은 마치 입체화 같은 환영에 빠지게 한다. 화려한 색채와 정면승부한 자신감, 식물을 화폭에 부활시킨듯한 붓질의 정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찰나의 순간을 찬란하게 빚는 예술가로서 '끊임없는 호기심'이 식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전시는 30일까지. 2025/03/08
"떳떳하다"…'목탄화 끝판왕' 이재삼 자부심 "저도 고흐를 빙자해 먹고 사는 사람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의 답은 의외였다. "고흐가 그 수많은 사람을 제치고 왜 고흐를 이야기하는가. 이전 종교나 귀족, 황제들에 기생하는 게 서양의 미술이었다면 개인의 역사를 이야기 한 처절한 화가다." '검은 그림' 목탄 작업을 하면서 깨달았다. "학교 다닐 때 봤던 건 예술의 역사가 아니구나. 예술은 한 인간의, 자기 삶에 대한 절박한 절실함이 묻어나느냐, 아니냐에 따른 것이다. 그걸 알면 행해야지." '목탄 회화''선구자 이재삼(65)은 수행자다. 음지에서도 마디 마디 쑥 크는 대나무처럼 반듯하고 흑과 백이 분명한 그림처럼 예술 신념이 확고했다. 주로 소묘나 밑그림에 사용되는 목탄을 회화의 경지에 이르게 한 '밤의 시인'으로도 불리는 그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어떻게 그렸는지 모를 정도로 불가사의한 '검은 그림' 앞에서 그의 비범한 열정을 들어봤다. "과연 나는 재능이 있는가?" 이 화두는 깨우침으로 나아갔다. "대학 졸업 후에 그림은 배우거나 가르쳐서 작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미술계 화단에도 정치판, 사회판이 존재하므로 이 울타리를 넘어서서 초연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 땅에 작가처럼이 아닌 작가로서 산다는 게 무엇인가?" 37세에 혼란스럽게 시작된 고민은 그를 다시, 그림 앞에 앉혔다. "아이들은 유치원 다니고 작업실도 유지해야 하는데…" 그를 치열하게 몰아세웠다. "어떻게 작업을 해야 잊혀지지 않는 작가가 되는 것일까?" 직업의 사춘기가 왔다. "로컬(지역)작가라고 인식하는 시간이 있었다. 세상은 컨템포러리 아트를 만들어 스타를 양성시키고 자국 문화에 대해 현대성을 이야기한다. 어느 날 그것이 내 옷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초등학교때 크레파스, 중학교때 수채화, 고등학교 때 석고데생, 대학 때 개념미술, 대학원 때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말로 작업을 대변하기 바빴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한국 사람이 그리는 한국 회화는 어떨까. 동양화가 아니라…" 그렇게 나이 마흔 줄 '목탄 회화'로 이재삼을 갈아 넣었다. 왜 '목탄 회화'인가. "목탄 회화를 시작하기 이전 5년 간 큐빅 공간을 해석하는 설치미술을 했었다. 당시 버려진 나뭇가지, 썩은 나무에 드로잉을 하는 작업을 했다. 그때 블랙의 미학에 천착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젊은모색전에 전시도 했지만 내 것이 아니었다. 말빨이 더 필요했다. 논리와 협업 도 해야 했다. 조수를 써야 하고 기획자, 평론가가 공유되어야 했다. 헤게모니에서 발을 빼니 미술이 보이더라. 내가 해야 할 일이." 명분은 따로 있었다. 한국 화가 자존심이다. "영국 프랑스 미술관 박물관에서 본 오일 페인팅에 질리고 의기소침해졌다. 르네상스 이전까지 물감이 문화이고 중국은 먹이 문화였다." 따지고 보니 "물감도 먹도 재능이나 재주를 보여주기 위한 매체였다." 그는 자유를 택했다. 모든 자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재료를 탐구했다. 온갖 검정색을 위한 흑연, 갈탄, 그렇게 목탄이 다가왔다. "목탄은 일반적인 미술재료가 아니라, 숲의 영혼을 환생시키는 신성한 도구다. '목탄 회화'는 인간 초월의 경지다. 목탄은 바르는 순간 날리는 분진 가루이면서 둔탁한 재료다. "제가 태생이 끙끙 앓느니 아예 죽지 뭐 스타일이다." 목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년을 칩거하면서 목탄을 회화의 세계로 끌어올렸다. 인물을 표면에 내세우는 목탄의 기법을 승화 시켰다. 왜 '검은 그림'인가. "어느 날, 자연에 대한 것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 왜? 나무를 그리고 싶어하지?" 모든 것은 안에 있다. "제가 강원도 영월 출신이다. 그냥 살아온 게 아니더라. 내 심장, 가슴 밑바닥에 숨어 있던 나무, 숲 병풍이 각인 된 것이 솟구쳐 올라와서 그림으로 나타난 거다." 1960년생으로, 어린 시절은 가로등도 없는 시대였다. "외갓집이 영월에 살았다. 부모님은 이모집이 농사지을 때면 초등학생인 나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땐 버스가 없으니 10리, 20리를 걸어 다녔다. 일을 마치고 땅거미 지을 무렵에 나와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은 깜깜한 밤, 달밤을 걸었다. 제 어린 시절 그 기억, 그것이 튀어나왔다." 검은 그림 '달빛 녹취록'은 극도의 쾌감이다. "이재삼의 몸에서, 인식의 두께가, 그림의 상상의 두께가 나타났다. 저한테는 운명이고 필연적 목탄의 달빛 정경이다." 편리하고 가벼운 시대에 이토록 어렵게 미치도록 작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newsis_inyoung_left_start:]]]]"내 성향과 내 유전자에 대한 추적이다. 결국은 세상에 보이기 위한 게 아니라 던져 놓았을 때 세상이 알아주든 아니든 상관없다. 작가는 최소한의 소명 의식이 없다면 세상이 먼저 안다. 잔머리는 필요없다. 작가는 작가끼리 사짜인지 아닌지 알아본다.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어쩌면 작은 종교 같은 예술 속에서 떳떳하고 싶다." [[[[:newsis_inyoung_left_end:]]]]그는 "형식적인 칭찬이 오가는 전시는 비극적"이라고 했다. "예술은 해야만 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사람이 작가다. 그림은 직업인이 아니다. 업보다." 작가로서 예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싫다고 했다. 뒤에 '술'자가 붙는다는 것. "술책, 기술. 그런 부분 보다는 자기의 그 모습에 '끝판왕'으로 가는 사람. 그리고 세상에서 한발 짝 물러나는 사람이 예술가"라는 입장이 단호했다. "작가에게 성공은 없다. 성취만 있을 뿐"이라는 그는 화가로서 자부심이 넘쳤다. "예술가는 세상을 향해 활을 당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 안에 활을 당기는 사람이다. 나는 육체의 주름보다 영혼의 주름에 민감한 작가다." 2018년 제3회 박수근미술상을 수상했다. 칩거와 몰두, 온전히 그림에 내 맡긴 삶. 하지만 그도 흔들린다. "1년에 몇 번 주기가 온다. 암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로컬리티하다고 (미국)모마 미술관을 가지 말란 법 없지 않나? (그곳에서 전시할 것이라는)그 암시가 없으면 못 산다." 유언 같은 말도 남겼다. "자식한테 부끄럽지 않고 싶다. 내 작품이 쓰레기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 화가로서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도리다." "쨍쨍한 태양을 거부하고 칠흑 같은 밤을, 밤의 감성 향수를 화면에 그리는 작가 이재삼입니다." 19일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이재삼 '달빛녹취록 2020-2024'세계가 열렸다. 작가가 지난 4년 간 작업한 결과물을 최초로 공개하는 전시다. 20여 년간 달빛에 매료되어 밤의 풍경을 탐구해 온 그의 예술적 여정이 집약된 '달빛' 연작의 완결판이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몰입감에 말문이 막힌다. '오십 줄에 작정하고 시작한 도전, '구차한 말이 필요 없는 그림'은 웅장함과 동시에 화가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특히 2층에 선보인 달빛과 물안개에 젖은 왕버들나무는 압권이다. 높이 5.4m, 가로 22.7m 캔버스 21개의 압도적인 규모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김제 종덕리의 왕버들나무(수령 약 300살)는 달빛과 물빛에 일렁이며 숭고함을 드러낸다. 수백 년 동안 호수나 물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왕버들나무는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집념의 작가 모습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3층까지 개방된 미술관 공간을 활용해 5미터 높이에서도 달을 볼 수 있어 전시장 전체를 달빛으로 감싸는 분위기로 연출됐다. "손으로 만져봐도 된다. (목탄이)떨어지거나 묻지 않는다"며 그는 캔버스 검은 화면을 탕탕 쳤다. 전시는 ‘수중월(水中月)’, ‘심중월(心中月)’, ‘검묵의 탄생’ 3가지 섹션으로 선보인다. 각 섹션은 달빛이 머무는 물, 달빛이 비추는 내면, 목탄을 통해 구현된 검은색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연결된다. 드로잉도 없이 즉흥적 재즈처럼 나온, 헌신의 노동집약적 화면은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예술은 말이 필요없다. 오로지 목탄으로만 풀어낸 '달빛 녹취록'은 '검묵'의 신비함을 오감으로 느끼게 한다. 물보라가 치는 듯한 폭포의 입체감과 빽빽한 이파리 속 팔색조가 머리를 내밀고, 대나무 숲 속 고양이가 빼꼼 얼굴을 내민 '숨은그림찾기' 같은 재미도 선사한다. 서울 시내에서도 1시간 가량 걸리는 외진 미술관이지만 시간이 아깝지 않게 한다. 압도적인 대규모 회화와 공간적 연출로 몰입도를 극대화한 '진심의 미술관' 경험도 할 수 있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열린다. 2025/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