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반항아' 이건용 단색화 지운다 캔버스 앞에 서 뒤로 팔을 길게 뻗는다. 팔이 닿는 만큼 그리고, 또 그린다. 옆으로 위로 옆으로 옆으로 아래로 아래로...온 몸을 고정한채 양 팔만 이용해서 그릴수 있는 만큼 선을 그려낸다. 얼굴은 찡그려지고, 꽁꽁 묶인 몸이 움직이는 것 처럼 우스꽝스럽던 행동은 '나비효과'의 시작이 됐다. 1976년 시도했던 일명 '거꾸로 그림'이 날개를 달았다. 한 사람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듯한 이미지로 재현됐지만 그림이 아니다. "자기 몸이 그은 흔적"이다. 또 있다. 이번엔 캔버스 앞이다. 여러 물감이 섞인 붓을 들고 양팔을 모아 허공에 휘두르면 거대한 '하트 모양'이 생겨난다. 빛의 속도로 행해진 양팔의 움직임에 정신없이 섞인 물감이 강렬하게 모습을 발산하지만, 이 또한 그림은 아니다. 국내 행위미술 1세대 대표작가 이건용(77)은 "인체에서 아름다운 선이 나왔을 뿐이다"고 했다. 그 몸의 흔적, 선이 만든 그림이 미술계를 강타하고 있다. '바야흐로 국내 미술계는 이건용 시대'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단색화를 대체한다'는 분위기다. 실제로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40여년전 그가 행했던 퍼포먼스, 즉 그의 '신체 드로잉'이 강렬하게 꿈틀대고 있다. 지난 3월 열린 세계적인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홍콩과 미술품 경매사 서울옥션, 필립스 경매사등에서 작품이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가고 있다. 양 팔을 크게 휘둘러 하트 모양을 그린 ‘드로잉의 방법 76-3-2010’은 추정가를 웃도는 약 1억4000만원에 낙찰되면서 아트페어 부스마다 '이건용' 작품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최근 하트 모양이 인기라면서 밑에까지 굵게 그려달라고 주문하는 컬렉터까지 있더라고요." 이건용도 스스로 놀랍다. 세상이 변했다. '하트 모양', 추상화같은 '신체 드로잉'은 저항의 산물이다. “1970년대 사회 체제와 당대 권력이 모든 담론을 장악하던 시대에, 신체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그리겠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 시대는 통제시스템에 의해서 압축 성장하는 시기였다. 권력이 끌고 가는 시대에 전복하고 거부하는 예술의 수단으로 신체드로잉을 선택했던거다" 1970년대 그가 온 몸으로 발언한 '행위 미술'은 '불온 미술'이었다. 군사정권 시대, 젊은 작가들을 억압했고 그도 '불온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체제 억압적인 시대에서 그가 거꾸로, 또는 지워가며 ‘그리다’라는 행위는 정부에 대한 도발이었다. "나는 당시 온건했지만 당대의 정부 기관은 눈치가 빨랐다. 나를 불러다가 테러도 했고, 구두발로 무릎을 밟아 10년간 고생을 했다."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ST(Space and Time)의 창립자이자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선구자인 이건용은 70년대 스타 작가였다. 전통적인 회화의 방법론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실험을 통한 조형적 해체를 추구하며 한국 현대사회의 기성문화를 비판했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 1979년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참가한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건용 덕분에 한국 행위미술이 역사를 만들었다. 1975년 발표한 '동일면적'과 '실내측정'을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약 5년여에 걸쳐 40개가 넘는 행위미술 작품을 발표했다. 이는 당시의 그 어떤 작가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행위미술 작품을 발표한 것이었고, 동시에 한국 행위미술의 지지부진한 전개를 일순간에 전환∙정착∙확장시킨 것이었다. 이건용의 행위예술은 '논리적 이벤트'라고 명명되며 한국 행위예술 발전의 모태가 됐다. 그의 반골 기질은 여전하다. "말하자면, 그런 현상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철학에 반기를 들면서다. 이 세계를 사는 주체가, 세계를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 문제에서 '지각'이라는 말을 끄집어낼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과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학에 푹 빠졌다. 넘버링으로 되어 있는 그의 작품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마주다. (작품 제목을 구분하자면, 76-2는 뒤로 놓고 그림, 76-3은 하트모양의 작품이 제목으로 제작년도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작품으로 보이지만 연구가 낳은 분석적인 결과다.(중학교때부터 프랑스 독일문화원등 해외 문화원을 찾아다니며 미술자료를 섭렵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명제를 만드는 것은 경험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사실로 그려낼수 있는가 초점을 맞추고 연구한 것이다. 그 사람의 철학 논고를 보면, 넘바링을 붙여서 큰 넘버에 다시 넘버를 붙여 글을 써나간다. 나는 그걸 고등학교때 봤다." 목사였던 아버지 영향도 있다. "당시 아버지 서재에는 책이 1만여권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딱 한번 이사할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에 빠진 나는 어느 대학교에서 언어학회가 열리면 (고등)학교를 결석하고 그 학회에 갔다. 어른처럼 보이려고 아버지 옷을 입고 빵떡모자를 쓰고 가기도 했다." 대학 시절(홍익대 서양화과 졸업)엔 '괴물'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수업시간마다 질문이 많아, 진도가 안나간다고 이경성(전 국립현대미술관장)교수가 붙여줬다. 당시 어머니도 그랬다. "난 걔가 모자라는지 넘치는건지 모르겠어. 속상해 죽겠어, 이상한 질문만 하고..." 억압과 통제의 시대, '청개구리' 같은 작가의 기발함과 저항정신이 녹아있는 작품은 어느새 자본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모양새다. '하트 모양'을 주문하는 것 처럼, '이건용 스타일'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페이스 갤러리 측은 "컬렉터들이 헛갈려 한다. 그러면서 대표작이 뭐예요?"라고 묻는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건용은 담담하다. 처음부터 그림 양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00가 팔렸다'더라는 것은 미술을 양식으로 생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대다수 작가들이 그 작품이 팔리면 형태와 색깔을 바꾸는 것이죠. 또한 미술애호가들도 모든 문화 양태가 못생겼더라도 왜 그런 사유를 하고 있고, 사유의 내용이 무엇이라는 것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세련된 형태를 따라가는 겁니다. 선진국에서 있었으니까 양식 스타일을 받아들여서 흉내내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은 세계 어느 작가도 구현해낸 적 없는 기법이다. 뿌리고 던지고 찢고 붙이기는 했지만, 캔버스 뒤에서 손을 앞으로 넘겨 펜이 닿는 만큼만 그리는 기법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함이다. 이건용은 여전히 "예술의 매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라고 강조한다. "나는 그린다라는 문제를 특수한 기술이라던가, 테크닉이라던가, 어떤 내용의 신화를 보여주는게 아니다. 대상을 닮게한다는데 관심이 없다. 그린다는 실제적인 문제, 지각의 문제를 말한다. 신체가 평면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최초의 일은 선이다. 그게 회화의 본질이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16년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 전시 이후부터다. 국립군산대학교 교수로 군산에서 활동하며 묻혀있다, 유난히 존재감을 보인건 지난해 중국 베이징 798예술구에서 연 개인전이다. 첫 중국 개인전이자 세계 미술시장에 눈도장을 찍는 기회였다. 세계 유명 화랑 페이스 갤러리에서 초대한 전시였다. 인파가 몰려와 전시 당시 798예술구에서 큰 화제가 됐다. 중국보다 20여년 앞섰던 한국의 행위 미술 대부의 전시를 직접 볼수 있다는 것과 상업성이 짙어진 중국미술계에서 못느꼈던 '예술의 신선함'으로 중국인들을 홀렸다. 작가는 화랑이 키운다. 결국 '어느 화랑이 손을 대는가'가 관건이다. 특히 세계 유명 화랑이면 단박에 주가가 달라진다. 단색화도 그렇게 부풀었다. 국내 미술관에서 키워 화랑이 띄웠고, 국제화랑이 해외 비즈니스 마케팅을 하면서 가치가 올라갔다. '단색화만 그림이냐'는 비아냥이 들릴 정도로 열풍을 일으켰지만, 4년 만에 국내외 시장에서 '꺼져가는 촛불'이 되고 있다. 국내 상업화랑들이 판매 마케팅에만 치중하면서 ‘거품’ 논란을 부추킬때, 단색화 이후 작가를 찾은 건 해외 화랑이다. "왜 이건용이냐고요? 한국에 지사를 내고 나서 한국 작가 연구를 많이 했어요. 이미 단색화는 국내외 화랑들에서 전시를 많이 하고 있었고, 다른 작가를 찾아야겠다고 나섰죠. 제일 이야기가 많이 나온게 이건용 작가였어요. 현재 세계 미술계는 60~70년대 아방가르드 미술을 주도한 작가를 눈여겨 보고 있다는 것도 작용했고. 그렇게 베이징 페이스에서 전시했는데 반향이 뜨거웠죠. 중국 미술계는 어떻게 이런 작업을 70년대에 했는지 놀라면서 신비롭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페이스 서울 이영주 디렉터는 "이건용은 한국의 대표작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세계 미술시장에서도 더 알고싶다고 해서 앞으로도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페이스 갤러리는 1960년 뉴욕에서 설립, 가고시안 갤러리와 전세계 현대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화랑이다. 아시아에서는 베이징,홍콩에 이어 2017년 페이스 서울을 오픈했다. 페이스 갤러리의 한국작가 전속은 이우환 화백이 유일하다. 페이스 베이징에 이어 서울에서 이건용의 두번째 개인전이 5일부터 열린다. '現身 현신'을 제목으로 행위예술가로서의 그의 사진, 회화, 조각 등 40 여년에 걸친 그의 작업을 선보인다. 우리는 모든 문화안에서 지나치게 당대의 스타일과 양식, 사유의 스타일에 매몰되게 살고 있다. 40년전 그리는 것과 그리지 않는 것. 만드는 것과 만들지 않은 것에 천착해온 그의 반항이 '자본주의 미술'에 균열을 내고 있다. 쪼그리고 앉아 둥근 원을 그린후 여기 저기 거기를 외치던 그의 '달팽이 걸음' 다시 시작됐다. 공유하고 있고 관계론적으로 관계항이 성립될때 장소가 의미를 띈다는 내용인데, 당시엔 저게 작품인가 했다. 또 나무를 뿌리 채 가져다 놓기도 했다. "그러니까 최고의 지성인들도 그때 그 작품을 봤을때 이게 과연 작품인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 작품같지 않은 것은 '현신(現身)'이 됐다. 몸으로 펼치는 신(scene)은 극대화된 자아의 존재감이다. 이건용의 퍼포먼스가 40여년만에 다시 획기적인 작품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다. 페이스 서울 개인전은 8월24일까지 이어진다. 2019/06/04
단색화 '묘법' 박서보 '지칠줄 모르는 자신감' "이 그림은 치유와 수신을 동시에 경험하는 거지. 이거는 내가 절대로 팔지 않을거야. 1000만 달러를 준대도 안팔아." 단색화가 거장 박서보 화백(88)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올해 새롭게 그렸다는 신작 '묘법(描法)No.190227’앞에서 큰 소리 쳤다 "앞으로 이 그림은 내가 시장에 내놓지 않을 거야. 왜? 내가 꼭 어느 놈(?)하고 한번 붙어보고 싶은 생각이야. 그게 가능해졌어" 싸리 빗질한듯한 화면에 회색과 분홍색이 섞여 묘한 색감을 발산하는 작품이다. 조수도 안시키고 직접 10시간씩 제작해 한쪽 다리가 장작개비처럼 마비될 정도로 몰두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몸 반쪽을 움직이기 힘들어진 뒤 "그 기본을 잊고 치유를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2015년 심근경색으로 3차 수술까지 받았다.) '한번 붙어보고 싶은' 이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떠들썩하게 전시중인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82)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호크니는 지난해 미국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수영장의 두 사람’이 9030만달러(한화 1019억)에 팔려 전 세계 생존작가 작품중 가장 비싼 작가다. 박 화백은 1983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국제 종이회의에 참석, 호크니, 라우센버그와 함께 앉아 세미나를 열기도 했을 정도로 한국 현대미술계의 스타였다. '1000만 달러를 준대도 안판다'는 박 화백의 자신감은 빈 말이 아니다. 지금은 황당하게 들리지만, 분명 실현 될 가능성도 있다. 10여년전 박 화백이 100만 달러, '밀리언 달러 작가'가 된다"고 했을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실제화됐다. 2017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묘법'이 14억7400만원에 팔려 작가 최고가를 기록했다. 작품이 비싸게 팔려야 대접받는 시대, 박서보의 '묘법'은 2012년부터 마법을 부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의 단색화'전이 열리면서 기폭제가 됐다. 그동안 미니멀리즘, 모노크롬 추상화로 알려진 그림이 '단색화'로 존재감을 찾으면서 박서보는 더욱 빛이 났다. (비슷해보이는 추상 미술, '미니멀리즘이 우유이면 단색화는 곰탕'이라는 해석도 있다. 불과 7년년전, 서양의 모노크롬과 일본의 모노하와 비슷해 이 두 사조속에 편입된 듯 애매한 모양세였던 단색화는 'Dansaekhwa'로 영문이름까지 정해졌다) 그의 말처럼 "어느날 기가 막힌 시대가 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영국의 세계적인 화랑에서 전람회를 해봤으면 했는데, 전람회를 해달라고 요청이 온거야. 그런데 그 메일이 스팸에 들어가 모르고 있었어~. 그쪽에서는 무시한줄 알았대. 나중에 조수가 찾아냈는데, 심장이 떨려서 죽겠더라고. 좋아서. 하하하" 진정하고 메일을 보냈다. "관심있습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왔는데, "관심이 아니라 할거냐 안할거냐."하더라고. "하겠다 했지. 그쪽에서 그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와 그림을 쭉 보고 갔어" 그렇게 2016년 영국 런던 화이트 큐브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데이미언 허스트와 트레이시 에민 등 영국 스타 작가뿐 아니라 전 세계 거장들의 작품을 취급하는 세계 최고의 화랑에서 연 한국 작가 초대전은 한국 미술계의 쾌거이자 일대 사건이었다. 이후 세계 최고 화랑들의 러브콜이 이어져 파리 페로탕 갤러리, 국립 그랑팔레미술관, 도코갤러리, 홍콩 아시아소사이티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붓을 놓는다'는 팔순 이후부터 후끈한 봄날이 이어진 '행복한 화가'다. "화이트 큐브 전시때 내가 못팔게 한 초기 작품이 오픈전에 솔드아웃 된거야. 그때 동경화랑사장이 1980년대에 100호가 300만원에도 안팔리던게 300배 정도 비싼값에 팔렸다고 하더라고. 그때 뉴욕 타임즈에도 기사가 났어. 박서보 그림이 화이트 큐브에서 솔드아웃됐다고. 또 뉴욕의 잡지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당신이 죽기전에 내 작품값이 1000만달러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기사로 썼더라고. 허허허" 실제로 그의 작품값은 10년전보다 최고 20배 정도 상승했다.박서보 화백은 평균 호당가격이 10여년 전보다 10배 올라 50만원이었던 호당가격은 2015년 400만원을 넘겼다. 100호 크기이면, 기본 4억선에 거래되는 셈이다. 16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만난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박 화백이 한번 입을 열면 5시간은 이어진다는 전설이 미술계에 전해진다. '한국미술=박서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실제로 박서보는 그 이름 석 자만으로 미술시장에서 그대로 통하는 ‘바코드’ 같은 고유명사다. 지칠줄 모르게 옛 이야기를 발산하는 박화백은 그의 그림으로 둘러싸인 전시장에서 희열과 환희 사이, 쾌감 가득한 모습이었다. “지난날 아날로그 시대엔 그림은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발산하는 그림이었지만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는 스트레스를 빨아들이는 치유하는 그림이어야한다"는 것. "이미지가 강하면 보는 사람이 부담된다"며 금년 봄에 개발했다는 '공기 색' 작품은 부드러운 회색이 도드라진다. "훅 불으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운데 날아가지는 않는 것"같은 색감을 만들려 노력했다고 했는데, 부들부들한 느낌으로 '먹빛처럼 주변의 빛과 공기를 흡수하여 깊이감을 드러낸다' 그는 "그림은 치유의 도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를 70여년간 익숙하게 살았고, 디지털 시대를 10여년을 낯설게 살며 많은 고민을 했다. 21세기 디지털시대는 스트레스 병동과도 같다. 총기 난사 무차별 살인등 이런 게 모두 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처럼 작가가 자기 생각을 쏟아 놓은 작품을 사람들이 사다가 걸어놓으면, 이는 예술이 또 다른 방식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과 같다. 21세기 작업은 흡인지처럼 보는 이의 스트레스와 불안한 심리를 빨아들여야 하며, 이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에서 그림의 역할이다." 그가 50여년간 천착해온 '묘법'은 그 자신을 수행의 길로 이끌었다. 1960년대 옵아트, 팝아트를 수용한 '유전질‘ 시리즈 이후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의 문제를 고민했다. 반복적인 행위, 무념무상으로 나온 화면의 구조화가 특징이다. '묘법'은 우연찮게 발견됐다. 1967년 둘째 아들이 그리고 지우고 또 쓰는 글씨 연습을 보고, '체념의 미학'을 발견하면서다. "어느날 아들 녀석이 국어 공책에 숙제를 하면서 공책 네모 안에 닭자 하나를 써넣으려고 하는 걸 우연히 봤어요. 그 주먹만한 손으로 연칠을 잡고 네모 안에 예쁘게 글자를 집어 넣어야 하는데, 획 하나를 집어넣으면 다른 획이, 네모 밖으로 삐져나오고 몇번을 시도하다가 에라 안되는 구나 하고 신경질을 부리면서 쓴 글자를 죄다 직직하고 연필로 지워버리더라구요. 그걸 보고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프레임에 뭘 넣는다는게 불가능한거구나 하는 생각이요"(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케이트 림과 인터뷰중) 연필로 비슷한 선을 무한히 긋는 ‘묘법(描法)’ 연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기도 아닌', '글쓰기도 아닌' 것.(초기 작품은 미국 추상주의 작가 싸이 톰블리(1928~2011)의 낙서같은 선묘 작업과 비슷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후에는 캔버스를 물감으로 덮은 뒤 연필로 선을 긋고 다시 물감으로 지우고 선을 긋는 행위의 반복으로 이어졌다. 지우는 행위의 반복과 그 과정 자체가 작품이다. 한국적인 정서가 녹아있는 말이지만 만약 외국어로 번역로 하자면 쉽지않은 말이다. 영문 제목은 미술평론가 방근택의 권유로 프랑스어로 '글을 쓰다'는 의미의 명사 ‘에크리튀르(écriture)’라고 쓰기 시작했고, 1970년 명동화랑 개인전에 나온 작품의 명제가 된 후 지금껏 같은 방식의 명제를 사용하고 있다. 자기 억제가 심한 작품과 관련 외국에서 '한국의 정치상황과 관련이나 독재성에 대한 항거인가'라는 질문도 받지만 "시대로부터 받아온 상처들이 내재적으로 풍겨나온 것이지 정치적인 데모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의 산물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박서보의 '묘법'에 대해 박 화백의 후배인 한국추상미술 세계적인 거장 이우환은 1974년 '현대미술'지에 '이미지를 그리지 않으려는 뼈아픈 저항을 했다'고 분석했다. "아무것도 표현할 것이 자기 속에 없다는 것은 차츰 그것을 포기, 추방, 혹은 억누르며 표현이란 이미지를 단념시키는 작업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행위가 순수한 행위 자체로 정화하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 추상미술거장 박서보 화백에 전시장을 아낌없이 내줬다. 18일부터 '박서보: 지칠줄 모르는 수행자'를 타이틀로 서울관 1, 2전시실에 1950년대 ‘원형질’ 부터 2000년대 ‘후기 묘법’, 2019년 신작까지 총 160여 점을 선보인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끌어온 박서보의 삶과 작품세계를 한 자리에 조망한 대규모 회고전이다. 전시명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는 현대인의 번민과 고통을 치유하는 예술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묘법을 지속해 온 수행자와 같은 그의 70여 년 화업을 지칭한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박서보는 ‘묘법(描法)’연작을 통해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또한 평론가, 행정가, 교육자로서 평생을 한국 현대미술을 일구고 국내․외에 알리는 데 힘써왔다.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56년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과 함께 '4인전'을 통해 반국전 선언을 발표, 한국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이끌며 앵포르멜, 단색화의 기수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해온 미술가로 평가받는다. 1957년에 발표한 작품 <회화 No.1>으로 국내 최초 앵포르멜 작가로 평가받았다. 이후 물질과 추상의 관계와 의미를 고찰하며, 이른바 ‘원형질’, ‘유전질’ 시기를 거쳐 1970년대부터 ‘묘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한국 추상미술의 발전을 주도했으며 현재까지 그 중심에서 역할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박 화백이 "1000만달러를 줘도 안판다"는 2019년 신작 2점이 최초 공개되며, 1970년 전시 이후 선보인 적 없는 설치 작품 '허상'도 볼 수 있다. 또한 국내․외 전문가들이 박서보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국제학술행사’(5월 31일), ‘작가와의 대화’(7월 5일 예정), ‘큐레이터 토크’(7월 19일) 등이 열린다. 미술관 1층 식당에서는 박서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박서보 특별 메뉴’도 선보인다. ‘자연에서 온 건강한 메뉴’ 한 계절국수 2종과 음료, 디저트 등을 전시 기간 동안 즐길 수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박서보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이번 전시는 한국적 추상을 발전시키며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 큰 족적을 남긴 박서보의 미술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서보 화백은 “가장 치졸한 색을 가장 아름답게 쓸 줄 알아야 진짜 화가”라고 했다. 거무스레한 먹빛과 누리끼리한 '묘법' 작품속에 2000년대 초반 단풍 절정기의 풍경을 경험한 후 그려낸 화려한 색이 들뜨지 않은 세련미와 생동감을 발산한다. “그림에서 비운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경지다. 이제 탐욕이나 잡스러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 어떤 자극적인 얘기에도 흥분하지 않고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산다." 그림 그리는 희열을 만끽해 나온 박서보의 그림은 세상에 둘도 없는 '한국의 그림'이다. 같은 듯 모두 다르게 그린 그림이 말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하고, 또한 변하면 추락한다'. 전시는 9월1일까지. 2019/05/16
산꼭대기 뮤지엄 산...예술×명상 '힐링의 SAN' 낮 12시 45분, 그곳에 빛이 있었다. "몸과 긴장을 풀어주고, 휴식할수 있는 '쉼 명상'을 시작합니다. 등을 대고 누운 상태로 두 다리는 어깨너비로 넓게 벌려주시고, 몸을 최대한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제 두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시작합니다. 코를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코 또는 입으로 숨을 내쉽니다....이 시간은 나와 온전히 있어주는 시간입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휴식하고...지금서 부터 안내해 드리는 몸 부위마다 숨을 마시면서 최대한 힘을 주고 수축시켰다가 내쉴땐 완전히 힘을 풀고 이완하며 몸에 쌓인 긴장감을 풀어내겠습니다. 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긴장을 풀어서일까. 두 눈을 서서히 뜨자 보이는 공간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둥근 천장을 가로지른 채광이 그대로 들어와 두줄기 광선검처럼 둘러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회색 콘크리트 공간인데 안온함과 고요함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해발 275m 산자락, 돌무덤 같아 보여 꺼림칙했던 느낌이 순식간에 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강원도 원주 산꼭대기 미술관' 뮤지엄SAN(관장 오광수)이 다시한번 '기분 좋은 만남'을 선사하고 있다. 2013년 개관, 그 자체만으로 '힐링'이 되는 미술관은 개관 5주년 기념으로 '명상관'을 오픈했다. 명상관에 어울리는 명상 오디오가이드를 제작해 30분 간격으로 상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뮤지엄 산을 지은 일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새롭게 설계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 명상을 하는 이들의 정신은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설계 스토리를 전한 안도의 말처럼 명상관은 '빛의 풍경'이 환상적이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안도의 대표작 '빛의 교회'(1989)를 연상시킨다. 40평 면적의 돔 공간으로, 노출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내부로 들어서면 천정 중앙을 가르는 아치형의 천창을 통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 그림자가 고요함과 투명함을 더한다. 이미 건축가들과 명상인들에게 입소문이 났다. 지난 1월 개관했는데 2000명 넘게 방문했다. '명상관'은 오광수 관장 철학에서 나왔다. "프랑스 어느 예배당에서 명상관을 갔는데 여행을 하면서 하는 명상이 너무 좋았다"는 한 마디 말이 씨앗이 됐다. 뮤지엄 곳곳에 명상적인 공간을 남겨놓은 안도는 이 이야기를 듣고 반색했고 흔쾌히 설계를 맡았다. "미술관은 더 이상 미술 전시만 하는게 아니다. 사회적 역할, 복합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겼다. 뮤지엄 산은 '소통을 위한 단절'이 슬로건이다. 자연의 품에서 건축과 예술이 하모니를 이룬 공간은 마치 무릉도원 같다. 꽃과 나무, 조각품이 돌과 물위에 반사하며 계절별로 매력을 뽐낸다.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면 깊은 산속에 감춰져 있는 모양새다. 지난 2013년 원주 오크밸리 골프장 안에 개관한 뮤지엄 산은 산자락 꼭대기에 있다. 전체길이 700m, 대지면적 7만1172㎡ 규모다. 개관 당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빛과 공간의 마술사'로 꼽히는 미국 설치예술가 제임스 터렐관도 오픈해 화제를 모았다. 그림 전시만이 아닌 뮤지엄 산처럼 휴식과 자유를 선사하는 미술관 운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재벌그룹이 만드는 미술관은 힘이 있지만, 기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을 달리한다. 삼성리움미술관이 예로 2017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이후 기획전을 취소해 현재까지 잠정 보류상태다. 뮤지엄 산이 명상관까지 오픈하며 관람객에게 진정한 힐링을 제공하는 배경이 있다. 지난 1월 타계한 한솔그룹 창업주 고(故) 이인희 고문의 남다른 문화사랑 덕분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 장녀다. 국내 미술시장에서 '국내 1호 아트 컬렉터'라 불릴 정도로 문화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이 고문이 1995년 문화 예술계 후원을 위해 사재 40여억원을 출연해 한솔문화재단을 세웠다. 뮤지엄 '산'은 이인희 고문의 필생의 역작으로, 생전 휠체어를 타고 자주 방문, 관람객들을 보며 행복한 모습을 지었다는 후문이다. 개관했을때는 또 하나의 '재벌 미술관'이라는 시선도 있었다. 이인희 고문이 40년간 수집한 컬렉션때문에 미술관이 지어졌다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미술관은한솔그룹이 8년에 걸쳐 지어 이인희 고문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개관했다. 이 고문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매년 상반기 하반기 기획전과 상설전을 펼치고 있다. 한솔그룹이 운영하는 미술관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한 건 개관후 이듬해다. 2013년 한솔뮤지엄으로 문을 열었다가 2014년 현재의 이름인 뮤지엄 산(SAN)으로 변경했다. 공간과 예술, 자연이 융화되는 미술관을 지향한다는 뜻으로 스페이스(Space)-슬로우(Slow), 아트(Art), 네이처(Nature)의 앞글자를 땄다. 한솔그룹과는 별개로 독립 미술관으로 나아가겠다는 변화다. 이 고문은 사후 120억원대 주식을 한솔문화재단에 기증했다. 재단이 문화 예술 발전을 위해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정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평소 고인의 뜻이 반영됐다. 실제로 한솔그룹이 골프장 '한솔오크밸리'를 매물로 내놓았지만 오크밸리 안에 위치한 뮤지엄 산은 매각 대상에서 제외됐다. 뮤지엄 산 측은 "이인희 고문의 뜻을 이어가는 한편 자립 미술관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계획이다. 산속에 있는 미술관답게 툭 터진 자연속에서 휴식과 자유가 절로 누려진다. 물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카페 테라스는 연초록 잎들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나무들과 함께 소란스럽다. 삼삼오오 앉은 여인들의 '아~ 행복하다'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미술관인데, '한국관광 100선'에 4년째 선정됐다. 완연한 봄인 4~5월이면 상춘객이 늘어 주말에는 1000여명는 넘는 관람객이 북적인다. 연간 17만명, 지금까지 누적 관람객이 140여만명에 이를 정도로 자연 속에서 휴식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봄 기획전 '기하학 단순함 너머전'과 이인희 고문의 소장품전인 한국미술의 산책:추상화전도 열리고 있다. 개관 6년차, 뮤지엄 산의 명물도 변하고 있다. '제임스 터렐관'보다 '명상관'으로 발길이 이어진다. "잠시 살펴봅니다. 처음 명상을 시작했을때보다 호흡이 조금 더 편안해졌는지, 마음이 조금 더 개운해졌는지,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쉬어갈수 있는 명상의 시간을 마련한 자신 스스로에게 고마움을 표현해 줍니다. 또 오늘도 역시 열심히 살아준 나의 몸을 향해 수고했다, 고맙다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나의 몸과 마음을 향해 진심으로 말해 줍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힘들지 않고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깊은 숨을 완전히 마시고 길게 내쉬고 천천히 준비되면 두 눈을 서서히 떠줍니다." '불나는 세상', 복잡 복잡 혼란스런 도시의 번잡에서 2시간만 벗어나면 된다. '다른 곳에는 없는 꿈 같은 뮤지엄(dreamlike museum like no other)'. 그 곳에 빛이 있다. 2019/04/19
103세 김병기 화백 "색채에 대한 욕망이 인다" "100살이 넘었는데 그림 그리고 전시하고, 세계에 없는 일이야. 역사상 없는 일이야." 3년만에 다시 만난 그는 '살아있음의 위엄'을 강렬하게 드러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내가 할수 있게 됐나. 우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러분께 감사하다." 1916년 평양 출생의 그는 2019년 4월 10일 103세 생일에 개인전을 열었다. 김병기 개인전 '여기, 지금(Here and Now)'.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3년만에 여는 전시다. 신작 회화 20점을 선보인다. 여전했다. 목소리엔 힘이 넘쳤고 기억력도 좋았다. "당신 기사를 읽고 매우 좋았다. 지금도 가끔 읽는다"며 손을 맞잡고 반가워했다. 3년이나 흘러 혹시나 몰라보리라 했던 생각을 무색하게 했다. 상상도 하지 못한 현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103세에도 김 화백의 정정함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그저 '살아있는 노인'이 아니었다. 화가로서, 현재 진행형이다. 미술사를 꿰뚫으면서 논리적으로 작업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은 '장수 시대' 이보다 더 드라마틱할수 없는 예술가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나는 추상을 통과하고, 오브제를 통과하고 다시 수공업적이고 원초적인 선으로 돌아왔다." 1934년 일본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アバンギャルド洋畵硏究所)에 입소, 그곳에서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을 접한후 추상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후, 1939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김 화백은 ‘50년 미술협회’를 결성하고, '피카소와의 결별'(1951)이라는 글을 발표, 제8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커미셔너로 참여하는등, ‘추상화가 1세대’ 로서의 전위적인 행보를 이어왔다. 1965년부터 미국에서 활동하다 70이 넘어 국내화단에 복귀했다. 팔순에는 로망이었던 파리에서 1년간 작업활동을 했고, 2017년 101세에 국내 최고 권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걸어온 김 화백은 이번 전시에 '그리기의 중요성'과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담벼락을 그린 그림은 선이 면이 되어 나왔다. 결국은 다 선이다. 점이 연결되면 선이 되고 선이 연결되면 면이 되고 면이 입체를 만들고 색채가 된다" 그것이 "회화의 조건"이라고 했다. 김 화백은 "이제 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며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강조해 달라"고 주문했다. "너는 뭐하고 있느냐" 묻냐고 한다면."나는 추상을 넘어, 오브제를 넘어 원초적인 수공업적인 상태에서 선에 도달했다. 그런 상태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추상을 넘었다는 것, 오브제를 넘은 것도 굉장한 이야기다. 원초적인 상태에서 그린다고 하는 것을 내 자신이 하며, '그린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추상을 넘었다는 말은 보통 중요한 말이 아니다"며 강조했다. "20세기는 양식을 만든 시대였고, 21세기는 그 양식을 부수기도 한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라고들 한다. 나는 나대로 동양성을 가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려고 한다." 그는 "추상화가처럼 작품 활동을 했지만 사실 나는 체질적으로 형상성을 떠날 수 없었다. 형상과 비형상은 동전의 앞뒷면에 불과했다"고 설파했다. 결국 회화는 현실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형상만을 그대로 재현한 회화는 모방된 장식품에 불과하다. 비시각적이지만 실재하는 것들, 인간의 감정이나 관념들과 같은 정신적인 것들 또한 화면에 구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형상과 정신의 교감이 화면에 나타나야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 타이틀 '여기, 지금'은 그가 미국에서 접한 장 푸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çois Lyotard, 1924~1998)의 글 '포스트모던의 조건(Laconditionpostmoderne)'(1979)에서 따온 것이다. 리오타르는 바넷 뉴먼(1905~1970)의 '영웅적이고 숭고한 인간(VirHeroicusSublimis)'(1950-51)을 예시로, ‘여기,지금(Here and Now)’이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지금(now)’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현재의 시간, 의식적으로는 알 수 없는 시간을 말한다.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김 화백은 "질문 하라"며 잠시 말을 멈췄다. 3년전 '그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아직도 모르겠다"고 했던 그는 이번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원초적인 동시에 영원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린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거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거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그림, 추상을 한 사람인데 눈에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3년전부터 그린 '누드'화가 보여준다. 화면엔 역삼감형이 중앙에 그려져있다. 김 화백은 "역삼각형은 내가 옛날부터 그려온 형상으로 불안함이 있지만 깊이가 있는 것"이라며 "몬드라인이 이야기하는 수직과 수평을 항상 의식한다"고 했다. '역삼각형의 나부'를 제목으로 단 그림은 실제 여성 누드를 보고 그렸다. 그는 "젯소에 목탄으로 자꾸 그렸다, 지웠다, 그렸다, 지웠다를 3년간 했더니 누드 그림이 천근만근 무거운 캔버스가 되었다"면서 "우리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고 했다. "역삼각형속에 그린 것은 어려운 상태를 극복해 나온 것을 뜻한다. 우리나라가 이 만큼 된 것은 우리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한 것이다. 한국 여성은 똑똑했다. 당신은 할머니의 할머니의 하나의 분신이다. 한국여성이 세계에서 제일 이쁘다. 점수 받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작가와 캔버스는 일심동체. "코끝이 짜릿해지고 눈물이 핑돈다. 작품이 완성됐다"는 신호다. 이번 전시에 내건 신작은 노란색, 빨간색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그는 "그동안 오랜기간 다크 브라운을 썼다. 그래서 화면이 시커멓게 됐는데, 지금은 색채에 대한 내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컬러플한 작품...아..앞으로?" 라고 말하던 그는 잠시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더듬었다. "지금 내가 몇살인데...앞으로?..."라고 말하다, 껄껄 웃어제쳤다. "한국은 백색이 좋다고 일본인이 이야기 했다"며 단색화에 대한 지적도 했다. "단색화는 한가지 색으로 덮는거다. 단색화의 내용은 있지만, 신라 고려 이조 시대에 직공들이 한 정신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 단색화의 주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전개시켜나가는게 예술가다. 한국이 색채적으로 단순한 나라가 아니다. 우리 의상을 봐라. 얼마나 칼라플한가." 말은 청산유수처럼 이어졌다. "인상파는 태양광선에서 오는 색채고, 우리는 오방색에서 온다. 북현무(玄武), 남주작(朱雀), 동청룡(靑龍), 서백호(白虎), 이게 오방색이다. 가운데는 황색이다. 우리나라는 칼라플하게 살아왔다. 그걸 살려야 한다. 무시하면 전통에 어긋난다. 우리 산수를 보세요."라며 잠시 말을 고른 그는 강원도 산불 이야기를 꺼냈다. " 강원도 불 붙을때 MBC가 강원도를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난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인줄 (알았는데) 몰랐어. 그렇게 아름다운 산하가 다른 나라에는 없다. 우리는 축복받은 나라에 살고 있다. 여러분이. 칼라를 살려야 한다." 김 화백은 언술(言述)의 고수다. 적확(的確)하면서도 함축 또한 깊다.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은 "말이 곧 도(道)라 했다. 말이 통하니 이 또한 도통(道通)이다. 굳이 구분해서 말하면 김화백은 ‘일상형 도통’"이라며 "당신에겐 자기구원형 도통이 지난 반생의 과제였다. 김화백은 프랑스 미술가 뒤샹(MarcelDuchamp)을 롤 모델로 삼았던바, 그가 말하던 뒤샹의 작가정신은 <위대한 유리> 작품 이력에 잘 담겨 있었다 했다"고 소개했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합리 또는 이성의 세계고, '영원하다 할 수 없는 도'는 불합리 또는 감성의 세계인데 반대 둘이 일치한다는 미학이 김화백 자신이 지향해왔던 바'다." 김 화백의 그림을 비평가들은 촉지(觸知, haptics)적이라고 불렀다. 직선이 수직으로 수평으로 또는 사각(斜角)으로 먼저 포치(布置)한 것을 근거로 삼각, 역삼각, 직사각의 평면이 생겨난다. 그 사이로 한없이 자유로운 무수한 붓질이 사선을 이루면서 그림의 역학 구조를 만들어낸다. 마스킹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 내는 방식으로 빈 여백을 만든다. 이는 하나의 선으로 구현되어 조형적이면서도 비조형적인 화면을 구사한다. 짧고 강렬한 필선이 그어지고 나누어진 추상과 구상, 그 틈새에 있는 그의 작업은 선적이면서 회화적인 추상화다. 그에게 있어 여백과 선에 의한 분할된 공간은 무위의 개념이자, '지금'이다. 늘 자신의 작업이‘무(無), 허(虛), 공(空)과 같다’ 말한다. 그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하는 0의 공간을 실현하고자 한다 "예술에 있어 ‘1+1’의 답은 2가 아니다. 3도 되고, 5도 되는,모든 게 다 되는 세계다. 복합성의 예술,그것은 창의적 복합이다. 2는 절충이다.예술에 있어 제일 나쁜 게 절충이다.노자의 세계는 0이다. 나는 노자 철학을 존중한다." 사선을 긋는 그의 붓놀림은 이젠 자유로움의 몸짓이다. 순수의 세계다. "나는 모든 것을 통과한 뒤의 종합적인 단계가 지금의 내 세계다." 이중섭·김환기·유영국등 생전 친했던 작가들 이야기가 다시 나왔지만 그는 "그런 이야기를 할때 나를 들러리처럼 취급하는 것은 불만이다. 그들이 한국미술을 높이 끌어어올린 것은 맞지만 이미 간 사람들"이라면서 "나는 나대로 주역이다. 조역이 주역처럼 나오는 영화들 있지않나. 난 그런 사람이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장거리 선수"라며 '지금 여기 살아있는 화가'라는 자부심을 전했다. 103세. 생일에 펼친 개인전은, 2016년 개인전 이후에 제작된 신작들이 공개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요즘 마음이 약해져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실은 마음이 복합적이다. 그림 몇장 가지고 생일을 맞아서 전람회를 하는 것에 대한 약함이 있다. 100살이 넘어 전시를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세계에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월적인 것과 약함이 교차상태에 있다. 그런데 나는 노인이 되어서 그런지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에 부정의식이 있다. 어느새 내가 그렇게 되어있다. 현대미술의 허위성에 반발하는, 저항하는 자신을 발견한다....개념미술, 남는게 뭐냐, 변기만 남고 TV박스만 남았다. 길게 이야기하면 복잡해진다. 또 질문해라. 하하하." 아직도 무한히 할말이 많은 그는 대화를 즐겼다. 결국 그림도, 예술도 '살아있는 자의 것'이다. 산 자가 그린 '여기, 지금'을, 또 산 자에 지금을 연결하는 것이 예술이다. 103세 화백, 김병기의 '지금, 여기'가 감각을 일깨운다. 인생은 희로애락 칵테일, 삶은 기쁨이다. 우리 모두에게 건배를 전한다. 전시는 5월12일까지. 2019/04/12
이정재·정용진·BTS가 놓치지 말아야 할 청전×소정 "작품 가격은 너무 속상해서 얘기 안할래요."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76)은 50년전, 소녀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때, 박수근 청전 선생 작품값이 같았어요. 아휴 그런데, 지금은..." 박 회장은 1960년대 국내 최초 화랑인 반도화랑 직원으로 박수근 청전 소정등 지금은 블루칩 작가들이 된 작가들과 깊은 인연을 가졌다. 반도화랑을 운영했던 故 이대원 화백의 권유로 청전(이상범)화실에서 매난국죽을 배웠고, 1965년 결혼했을땐 청전이 '설경'을 축의금 대신 선물했다. 그림은 화가를 닮는다. "고른 작품처럼 청전은 변함이 없었고, 소정은 들쭉날쭉했어요." 박 회장은 "소정(변관식)은 남성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쳤어요. 그림이 딱 그 작가"라며 "우리나라 서양화의 '국민화가가 박수근'이라면, 한국화의 국민화가는 청전-소정"이라고 확신했다. 옆에 함께 한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도 동의했다. 이 교수는 "해방된 후 대부분의 작가들은 일제시대 화풍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필획을 쓰는 우리 전통적인 필법을 50~60년대 부활시켜 근대적인 수묵화단을 일신시켰다"면서 "특히 소정 변관식은 박력있고 강렬한 화법으로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제백석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고 강조했다. 송희경 이화여대 초빙교수도 "청전 이상범은 후배 산수화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가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독창적인 한국적 산수 풍경화를 창출한 한국 근현대기 최고의 동양화가"라며 "한반도 역사 이래 한국인의 정서를 지필묵으로 가장 잘 표출한 산수화가로 평가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국민화가 박수근'과 '중국의 피카소' 제백석에도 뒤지지 않는 그림 실력이지만, 그들은 왜 유명세가 덜할까. '그래서 얼마?'인지부터 따져묻는 작품값에 반하는 시대이니, 일단 그림 가격부터 살펴보자. 국민화가 박수근의 호당(18×14 cm-엽서 크기)가격은 2018년 기준 약 2억8800만원으로 국내 최고가격이다.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빨래터'(1950·37㎝×72㎝)가 최고 낙찰가 기록을 세우면서다. 비교는 안돼지만 중국 제백석(1864∼1957)의 작품은 2011년 베이징의 한 미술 경매에서 4억2550만위안(약 718억원)에 낙찰돼 그해 피카소, 클림트 작품을 제치고 최고가 미술품 경매가를 기록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중국의 피카소'로 별칭이 붙은 배경이다. 그가 82세였던 1946년 그린 '송백고립도·전서사언련'으로 이 그림은 제백석이 장개석에게 선물로 준 그림으로 알려졌다. 청전과 소정의 작품값은? 박수근이나, 단색화가들에 비하면 1/10 수준이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2018년 기준 발표한 작품값에 따르면 서양화 40호크기 전지(100×72.7㎝)기준이 1억원선이다. 낙찰총액 상위 20위권에는 조선시대와 근현대 한국화 작가는 없다. 국내 미술시장에서 서양화 부문 최고 그림값은 85억원(김환기의 빨간 점화 ‘3-II-72 #220’)까지 치솟았지만 근대 한국화는 80년대 부터 제자리 걸음이다. 박명자 회장이 얼굴 표정을 샐쭉하며 "작품값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시쳇말로 'X값'으로, 그래서 '지금이 구입 적기'라고도 한다. 청전-소정은, 겸재(정선),단원(김홍도)이후 이어진 한국화 양대산맥이자 역대급 라이벌중 라이벌 화가다. 둘은 2살 터울로 겸재, 단원 등 조선 시대 대가들의 전통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보다 독창적인 화풍으로 각자 고유의 양식을 구축하여 20세기 한국 산수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청전은 스승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소정은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晉)에게 배운 전통화풍과 당시 유행하던 일본화법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조선화 정립을 위해 이른 시기부터 노력했다. 1911년 개설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서 청전은 심전의 학생으로, 소정은 소림의 외손자로 처음 만나 친분을 다졌고, 이후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태어난 해로 보면 조선인으로, 1970년대까지 살면서 전통수묵화에 우뚝한 업적을 쌓았다. 동시대를 같이 살며 한국화가로 활동했지만 둘은 완전히 반대였다. 먹을 쓰는 법, 붓을 잡는 법, 그림 그릴 때 팔을 놓는 방식, 화면구성 등 모든 면에서 대조적으로 다르다. 청전은 담묵(淡墨)과 담채(淡彩)의 섬세한 변화를 즐겼던 데 반해, 소정은 먹을 상당히 강하고 짙게 썼다. 청전이 차분한 서생 같은 기질이라면 소정은 반골 기질로 야성이 넘친다. 청전은 1897년 충남 공주 출신으로, 1904년 서울 돈화문으로 이사했다. 1914년 서화미술회 화과 입학후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 사사했다. 소정 변관식과 함께 1923년 한국 최초 전통 회화 단체인 ‘동연사’를 조직했다. 1925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10회 연속 특선을 거듭하면서 화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작가 활동을 하는 동시에 1927년부터 향후 10년 동안 동아일보의 미술 기자로 활동했고, 광복 후 1949년부터 1961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 지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사경 산수화’를 만들어냈다. 한국의 산천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그리면서 중국 송대의 화법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1945년 해방 이후 현재 ‘청전 양식’이라 불리는 쌀알을 찍는 듯한 미점법(米點法)으로 산과 언덕을 안정된 구조로 전형화시켰다. 작품은 완숙기에 들어서면서 외진 산골과 언덕 풍경의 적막함, 소박함과 한국적 산양의 평범함을 따뜻하면서도 푸근하게 담아냈다. 1972년 서울 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75세에 별세했다. “말하자면 청전은 평범하고도 스산스러우며 또 서민적인 한국의 자연을 그림 속에서 모싯발처럼 섬세하게가 아니라 굵은 삼배발처럼 가식 없이 굴탁없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청전의 산수는 한국의 그러한 자연 속에서 굳건한 뿌리는 내리고 거친 비바람에 미동도 하지 않는 땅에 붙은 가지들,그리고 순리대로 자라난 평범한 나무들과 짓이겨도 살아나고 또 무성해지는 억새 번등이들을 감발한 무딘 발로 딛고 걸어가듯 그는 서울의 20세기 화단 위에 그 독자적인 한국산수 정립의 고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소정은 1899년 황해도 옹진군 출신으로 1910년 외조부인 서화가 소림을 따라 서울 송동(현 혜화동)에 상경했다. 1914년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가 관립으로 설립한 공업전습소의 도기과를 거쳐 외조부가 교수로 있던 서화미술회에 출입하며 동양화를 공부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남화의 대가로 알려진 고무로 스이운에게 사사했다. 청전과 함께 1923년에는 ‘동연사’를 조직했고 서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참여할 정도로 한국 화단에서 초기에는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으나 평생 제도권 미술계 바깥에서 야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부터 작가는 전국을 유람하며 실경산수를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하여 먹을 말려가며 쌓아가는 적묵법(積墨法), 선위에 묵점을 찍어 깨트리는 파선법(破線法)을 사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형성해 나갔다. 8년 동안 금강산을 사생하고 30년 이상 다양한 명소들을 변주하며 그려온 만큼 ‘금강산의 화가’로 불린다. 1976년 2월 18일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소정의 산수가 변화가 많고 극적인 장면 설정이 많은 것이 다름 아닌 금강산의 경관에서 온 감화라고 할 수 있다면, 육중한 필법 역시 금강산의 암벽에서 오는 감흥의 직접적인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소정의 작품은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진한 먹색에서 비롯된다. 먼저 엷은 먹으로 대상의 윤곽을 잡고 이 위에 점차 짙은 먹을 중첩시켜 가는 묘법-그 자신이 말한 적묵법이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게 한다. 소정의 산수는 거친 대빗자루로 쓱쓱 문지른 것 같은 필법과 물기가 없는 갈필의 구사가 유독 눈에 띈다. 어쩌면 이 갈필과 거친 붓질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자연이 지니는 대기를 절묘히 묘파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이 같은 기법속에 단순한 대기뿐 아니라 한 시대의 공기라고 할 수 있는 문화적 질료까지 함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오광수 미술평론가 뮤지엄 산 관장) "두 분 모두 그림을 많이 그리셨어요. 1000여점 정도 될 겁니다. 이번 전시는 70년(청전), 72년(소정) 현대화랑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고 1985년 동산방화랑과 공동으로 기획전을 연 이후 34년만에 두 분을 제대로 모시는 전시입니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이 아들 도형태 대표가 운영하는 갤러리 현대와 공동으로 '한국화의 두 거장 청전-소정' 전시를 10일부터 연다. 1970년 4월 4일 오후 4시에 문을 연 현대화랑의 50주년 기념 전시이자 한국 미술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들의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전시다. 2010년 '국민화가 박수근'전을 시작으로 이중섭, 장욱진, 김환기, 유영국, 이성자의 대규모 전시를 진행했다. 이번 전시는 오래되고 진부하다는 수묵화-한국화의 이미지를 깬다.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과 개인 컬렉터들에게 대여해온 청전과 소정의 작품들은 '정말 좋다'라는 마음속 진동이 울린다. 두 화백의 초기작부터 작고할 때까지의 대표적인 작품 각 50점씩, 총 100여점을 전시했다. 현대화랑 1층은 청전의 50, 60년대 대표작들로 선보인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을 표현한 '효천귀로'는 이번 전시를 통해 대중들에게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은은하게 스민 먹색과 감각적인 필치만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이상범의 산수화가 선사하는 찬란한 고요의 순간은 시간을 초월한 거장의 예술혼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값진 선물이다"(송희경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초빙교수) 갤러리현대 1층과 2층에서는 소정의 작품이 전시됐다. 추수를 마친 늦가을 농촌의 풍경을 담은 '농촌의 만추' 비롯하여 '진양촉석루'와 '설경산수' 등을 공개해 60년대에 즐겨 사용하였던 '적묵법'의 화풍을 가까이서 살펴볼수 있다. 지하 1층에는 '지금은 갈수 없는 곳' 금강산 진경을 그린 대표작 '내금강보덕굴', '내금강진주담'과 1977~1978,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 회화 유럽 순회전'에 출품된 '외금강삼선암추색' 등이 소개된다. 1937년경 재야작가로서 금강산에 들어가 살다시피 하며 무수히 많은 스케치를 제작한 소정의 박진감과 생동감 넘치는 금강산 그림은 한국적 수묵화의 경지를 보여준다. 청전과 소정의 대표 작품 100점이 수록된 각 화집도 발간된다. 마로니에북스에서 2010년부터 출간하고 있는 ‘마로니에북스: 한국의 화가’ 시리즈의 일곱 번째, 여덟 번째 화집이다. 한국화의 멋을 국내외에 널리 알릴수 있는 이번 전시는 국공립미술관도 외면하는 수묵화를 상업화랑에서 대규모로 선보여 주목고 있다. (지난해 노화랑에서도 청전과 소정 전시를 선보였는데 소품 위주였다) 수묵화는 현대미술에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국립현대미술관이 마련한 기획전시에서 전통회화 분야가 6%가 되지 않았다는 발표도 있었다. 미술전문가들은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는 전통회화에 대한 애정이 유지되거나 근현대 중국화, 일본화 작가들이 대접을 받는 실상과 비교하면 더욱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중국도 근대는 부끄러운 역사다. 하지만 근대 역사속 수묵화를 높이 받들어주고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인데도 수묵화, 전통적인 것을 앞으로 내세워서 국가 문화 전략으로 삼는다. 우리나라는 수묵화를 방기하고, 근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한국문화의 고유성과 민족의 자존감이 존재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씁쓸한 일이다." 최근 홍콩에서 열린 아트바젤 홍콩은 8만8000여명이 관람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 자리에는 국립현대미술관 홍보대사이자 미술컬렉터로 알려진 배우 이정재와 연인인 대상그룹 임세령 전무,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배우 정우성, 공효진, 하지원,박서준, 최진혁등 연예인과 기업인들이 방문 눈길을 끌고, 행사가 더욱 주목됐다. 수억 수십억짜리 작품이 거침없이 팔렸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비드 호크니전도 전시로는 첫 '실검'에 오르는 등 화제다. 지난해 생존 작가 중 경매 낙찰 최고가(한화 1019억원)를 기록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로도 주목받았지만, BTS(방탄소년단) 리더 RM이 미술관을 찾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줄서서 보는 전시'가 되고 있다. 그 비싸게 낙찰(더 첨벙)된 작품도 없고, 관람료도 시립미술관 역대 최고 비싸지만 관람객이 이어지고 있다. 청전과 소정도 가치로 치자면 100억대가 넘는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공짜 전시도 아니다. 상업화랑이지만 관람료 3000~5000원을 받는다. (무료와 유료 전시의 차이는 관람해본 사람은 안다) 갤러리는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이다. 구매자들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예술작품을 연결하는 임무다. 그래서 '전시장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주요 능력은 판매 수완이 아니라 고객의 내면에 무엇이 부족한지 진단하는 능력'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림 장사가 아니라 감정, 위상, 유대감을 판다. 화랑과 미술관은 문화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50년째 현대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박명자 회장은 청전 그림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요즘 시대에 청전의 그림을 보면 돌돌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편안해져요. 저~기 지게 지고 일하고 있는 사람이 청전 자신이에요. 내가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지, 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예술작품은 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래서 그들이 본 것을 우리도 세심하게 보는데 있다. 한땀 한땀 진실한 열정을 바친 작품은 본능을 일깨운다. 우리가 놓쳤던, 지나쳤던 일상의 진정한 가치에 경의를 표하는 힘이 있다. "현재 화단의 서양 현대미술과 닮은꼴 경향들이 지닌 무미건조함이나 소란함에 비하면, 수묵화 계통의 전통형식은 한층 인간주의적이고 친환경적이다. 청전과 소정의 수묵산수화는 민족예술로 뿐만 아니라, 그 묵향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허브 공간을 제공해준다. 한국 현대문화사의 정말 귀중한 가치다."(이태호 미술사학자·서울산수연구소장) 무엇이 낫고 못하다가 아니다. 글로벌AI시대, '국뽕'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 그림, 진짜 한국 그림'을 못 보고 놓칠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가 우리 것을 높이 사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우리 것을 높이 사주지 않는다" 전시는 6월16일까지. [email protected] 2019/04/07
봄 몰고은 '옛날 그림'의 마력...'도상봉·장욱진'展 제대로 '그림 맛'을 전한다. 매끈하고 사진같은 '요즘 그림'이 아닌 텁텁한 물감 맛이 진득한 '옛날 그림'이 새 봄을 몰고 왔다. 도상봉(1902~1977), 장욱진(1917~1990)의 사후 첫 2인전이 열린다. 서울 인사동 노화랑(대표 노승진)이 6일부터 펼치는 이 전시는 우리 '근현대 대가'의 면모를 뽐낸다. 도상봉과 장욱진은 국내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이다. 국내 주요 컬렉터들의 빼놓을수 없는 그림으로 생전 인기를 구가했고, 이젠 비싼 가격표를 달고 경매장이나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이 됐다. '한국미'가 바탕인 공통점이 있지만, 도상봉과 장욱진의 화법은 완전히 다르다. '라일락'꽃 그림으로 유명한 도상봉이 정직하고 섬세하게 정물과 풍경을 그렸다면, '아이같은 그림' 장욱진은 사물을 최대한 생략해 유쾌한 동화처럼 담아냈다. '그림 맛'이 다른 배경이 있다. 도상봉은 서양화 도입기의 기술적인 과정으로서 아카데믹한 훈련을 쌓은 모범형이다. 장욱진은 초창기 서양화 과정을 지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성장한 일탈형의 예술가다. "도상봉이 모범형의 대표적인 작가란 것은 당시 아카데미즘의 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미술학교(현 동경대학 예술학부) 교육 시스템에 영향을 충실히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에 비하면 장욱진은 한국인의 일본 유학이 보편화되었던 30년대 후반에 해당되는 경우로서 미술수업의 초기적 현상을 벗어나 비교적 자유스럽게 미술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시기에 미술가로서의 길에 들어선 경우다."(오광수 미술평론가) 독보적인 화풍을 구축한 두 명의 화가는 우리나라 서양화의 근대화 시점과 같이 한다. 도상봉은 함경남도 홍원읍 남당리 출생, 함경보통학교를 나온 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서 공부했다. 일본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했지만, 1년 후 동경미술학교로 옮겨 미술공부를 했다. 나비넥타이를 즐겨했던 그는 새로운 유화기법을 알리고자 ‘숭삼화실’이란 이름의 유화교실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기도 하였고, 해방 후에는 숙명여대에 잠시 재직하기도 했다. 정적이고 고전적인 화풍과 달리 미술의 대 사회적 저변확대와 제도 마련에 열정을 가졌던 운동가적인 면모를 갖춘 화가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55년부터 대한미술협회 위원장,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전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며 미술계 제도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백자와 라일락을 소재로 다룬 정물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감을 화폭에 담으려는 깊은 관조(觀照)'를 보여 준다. 백자 항아리와 그 속에 꽃이 가득히 꽂힌 심플한 구도로 화면을 채웠다. 그래서 '한국 인상파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과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고전적 사실주의와 한국적 아카데미즘의 원형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같은 그림' 장욱진은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의 거장 중 한 명이다. 아카데믹한 예술영역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조형의 진폭을 보여줬다. 충청남도 연기 출신이다. 양정고보 3학년으로 편입했고, 조선일보 주최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수상을 계기로 집안 어른의 후원을 받아 1939년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1944년에 졸업한 이후 귀국하여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1952년까지 동인전 활동을 했다.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맡았으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잠깐 재직하기도 했지만 덕소, 수안보 등 조용한 시골을 찾아 평생 작업에만 매달렸다. 그는 일상의 풍경과 소재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압축하여 표현했다. 까치, 가족, 새, 나무, 마을, 아이 등 지극히 소박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순수함과 선함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초연한 예술세계를 정립했다. 점차 스며드는 듯한 묽은 안료의 구사와 이에 걸맞은 자유분방한 표현이 특징으로 순발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포착되어 그려졌다. 먹물의 농담과 붓의 움직임, 결의 모양에 따라 모필의 일회성을 표현함으로써 장욱진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생전 '나는 심플하다'고 주장했는데 절제와 요약에서 말년에 자유와 해방으로 나아갔다. 그림은 풋풋한 기운 속에 해학이 넘치는 장면이다. 마을 앞으로 난 길에는 아이와 강아지가, 때로는 소와 새가 등장한다. 마을의 노인이 나타나고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가족들의 모습등 자연과 인간이, 인간과 동물이 어떤 위계나 어떤 차별도 없이 어우러지는 '귀의의 세계'가 펼쳐진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도상봉이 우리의 백자를 자신의 화면 속에 부단히 들였다든가 장욱진이 우리 전 시대의 풍경을 되살려놓았다는 단순한 사실만이 아니라 이들은 예술을 관류하는 소박함과 격조, 균형과 자유의 구현이란 정서의 공감에서 우리 미술을 한층 풍부히 가꾼 독창적인 작가들"이라고 평가했다. 도상봉·장욱진의 명작중 명작 20점이 모인 이 전시는 40년 인사동 터줏대감 노화랑 노승진 대표의 연륜이 빛을 냈다. 미술관이 아닌 상업화랑에서 흔치 않은 기획전으로 '근현대 대가-비싼 작가' 작품 섭외는 신용과 인맥의 힘이다. 보험가액만 30억치다. 이 전시는 그림이 안팔려 불황이라는 국내 화랑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대표 그림'인양 유명해진 단색화만 그림이 아니다. 작품값에 밀려 사라지는 옛날 작가와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의 아름다움을 재조명해야 할 때다. 미술은 감각을 깨운다. 기계에 의존하는 시대에도 손 맛 그림이 죽지 않는 이유다.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대세가 아니다. 그림은 정서를 회복하게 하고 옛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한다. 죽은 그림도 살려내는게 화랑의 임무다. 화폭을 터트릴듯 만개한 라일락, 천진한 동심의 세계가 빼꼼히 고개 내민 봄을 일어서게 하고 있다. 전시는 20일까지. 관람은 무료. [email protected] 2019/03/03
안병광 회장의 서울미술관 '미술관 부심' 2인자라면 서러울 남자가 있다.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 설립자 안병광(62) 유니온 약품 회장이다. 조선 말기 왕족 정치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을 품고 있는 미술관이다. 2012년 8월, 4만9500㎡(1만5000평) 지상 3층 지하 3층 규모로 개관했다. 원래는 유니온 약품 사옥 부지를 지으려 했지만 문화재인 석파정 때문에 미술관을 짓게 됐다. 개관 전시에 이중섭 유화 '황소'(1953)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6000만원에 팔렸던 그림으로 안 회장이 국내 'VVIP 컬렉터'라는 사실이 공개되어 주목받았다. 이 때문에 세무조사를 받았다. '그림 산 게 죄가 아닌데' 가슴앓이를 했다. '비싼 황소가 있는 미술관'이지만 '석파정 미술관'으로 더 유명하다. 겸재 인왕산 그림속으로 들어온 듯한 석파정은 보는 그대로 사진작품이 된다. 빼어난 풍광이 압권으로 미술관 관람객이 꼭 찾는 공간이다. 그래서 건물 주변도 신경쓴다. 수백 년 나이를 자랑하는 모과나무, 회화나무, 산수유 등은 안동, 영주, 구례 등에서 공수했다. 사랑채, 별채, 안채 등 건물 4채로 구성된 석파정 한옥엔 안 회장 부부가 산다. 폐가로 변해가던 150년된 고택을 65억원에 인수해 2년간 20억원을 들여 보수 공사를 했다. "문화재를 지킨다"는 자부심이 크다. 최근 석파정 아래에 또 하나의 미술관을 지어 개관했다. 총면적 990㎡(300평)에 지상 3층 규모로, 통유리창인 2층 전시장은 석파정이 그림처럼 담긴다. 신관은 청년 작가들에게 기회를 더 제공할 예정이다. 전시장도 벽을 툭 터서 작가들이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게 설계했다. 큐레이팅 욕심도 냈다. "미술관을 유한 마담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감성적인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초심을 살렸다. 신관 개관전은 안 회장이 직접 기획했다. 김환기 이우환 정상화 박서보 김창열 서세옥 곽인식의 대형 작품을 건 '거인' 전시는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진다. 경매사에서 극진히 대접할 만한 고퀄리티 작품들이다. 당장 팔아도 수억, 수십억은 받을만한 작품값도 튕겨진다. 특히 김환기의 푸른 점화 '십만 개의 점 04-VI-73 #316'이 미술관 설립이래 첫 공개돼 눈길을 끈다. 김환기 작품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한국 회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명작이다. 층고 5m로 200호 대작들이 여유롭게 걸렸다. 국내 최고 화가들의 대형 회화는 그림 보는 맛을 제대로 전한다. 달항아리(이천도예명장 권영배)도 함께 어우러져 우리 전통도자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한다. 모두 안 회장이 구입한 소장품이다. 미술품 경매시장은 2000억대로 판이 커졌지만 국내 컬렉터들은 베일에 싸여있다. 기업의 비자금 조성 등 돈세탁 이미지 때문이다. 이런면에서 안 회장의 비싼 소장품 공개는 이례적이다. 툭 까놓고 '나 이런 작품 있다'고 하는 자랑이다. 색안경을 끼게 할 빌미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대놓고 작품 공개는 '팔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미술관 운영은 '행복 끝 고통 시작'이다. 소장품 전시와 입장료만으로 유지하기 힘들다. 미술관 개관 후 2~3년도 채 못가서 카페나 음식점으로 변하는 이유다. 서울미술관도 개관 후 3년간 34억원 적자가 났다. 미술관 등록도 안해 정부 지원금도 받지 못한다. 소장품은 500여점이 넘어 미술관 등록 요건은 충분하지만 '자력 갱생'하겠다는 의지가 크다. 미술관으로 등록이 되면 전기세 감면이난 세제혜택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원금에 의존하다보면 자립도가 떨어지고, 요건에 맞춰야 할 간섭으로 정부나 지자체 눈치를 보게 된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큰 손 컬렉터'가 미술관 설립 등, 사회적 공공역할에 적극적으로 기여 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석파정은 권력과 권세의 상징이었다. 갑과 을의 비굴함이 뒹구는 정치와 이념의 공간이었다. 그런 땅을 문화공간으로 바꾼건 30년간 컬렉터로서 누린 기쁨을 나누고픈 마음에서다. '미술품은 공공재'라는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그림의 힘을 안다. 강렬한 경험 덕분이다. 1983년 26살 제약회사 골찌 영업사원 시절, 비를 피해 들어간 액자가게 처마 밑에서 이중섭 '황소' 그림을 보면서다. 뼈만 앙상하게 남았는데도 앞으로 세차게 전진하려는 '황소'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주머니에 있던 7000원을 털어 사진으로 인화된 '황소'를 사면서 이런 꿈을 꿨다. "내가 돈을 벌면 이런 그림 한 점 샀으면 좋겠다." 1988년 의약유통업체 유니온약품을 설립, 연간 매출 5000억원대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7년 후인 2010년 52세때 '진짜 그림' 황소를 낙찰받았고, 미술관 건립도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림은 사람들을 부른다. 1년에 2회 다양한 기획전으로 주목받았다. 개관 7년, 연간 15만명이 관람하는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미술관 사업은 사익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물건을 파는 장사가 아니다. 돈이 많아서, 그림이 많아서 할수 있는 사업도 아니다. 자기만족으로 시작한 '자존감의 끝판왕'사업이지만 결국 사회 공헌 소명감이 없으면 실현하기 힘들다. 어찌보면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현대의 독립투사들'이다. 백범 김구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文化)의 힘"이라고 했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제약회사 꼴찌 직원에서 사장이 되고 컬렉터가 되어 미술관을 만든 그는 '문화의 힘'을 안다. "서울미술관을 통해 문화강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경기 침체속 몸집을 불려 따가운 시선도 있다. '황소'가 키운 뚝심으로 버텨왔다. 관람객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는 그가 행복한 모습으로 이 노래를 들려줬다. '알몸으로 태어나서/옷 한 벌은 건졌잖소/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email protected] 2019/01/23
무서운 신예 화가 김수수 "용광로에서 인생 봤다" 2019년 기해년, 60년 만에 찾아온 황금돼지해, 누구보다 원대한 꿈을 갖고 힘찬 날갯짓을 하는 젊은 작가를 만났다. 올해로 스물여섯 살, 화가로 공식 데뷔하는 무서운 신예다. 오는 15일 서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2018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수수 작가다. '불-침묵의 언어'를 타이틀로 색면 추상화 50여점을 전시한다. 조선일보미술관이 20대 작가에 전시장을 내준 건 처음있는 일이다. 공간(150평)이 큰 탓에 그동안 중견 원로작가들이 주로 전시했다. 초대전이 아닌 대관전이지만 이 미술관에서 전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윤진섭 미술평론가가 서문을 써주신 게 힘이 됐어요. 운이 좋았고요"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인 윤진섭은 한국의 '단색화'를 세계미술시장에 알린 평론가다. 단색화(Dansaekhwa)의 영어 단어를 고유명사로 만들었다. 비평가인 그가 서문(작품평)을 썼다는 건 작품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평론가 윤진섭은 "20대 중반 젊은 나이에 굴지의 공모전에서 그의 작품이 주목받고 구상과 비구상 작품을 넘나드는 광폭(廣幅)의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특히 "캔버스에 담아낸 내용은 나이에 비해 노숙하며 세련됐다. 덧없는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환기시켜 준다"고 평했다. 김수수 작가는 지난해 하반기에만 국내를 대표하는 공모전인 2018 단원미술제 본상과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그림은 '불'의 연작이다. 시리즈 제목과 달리 뜨거움보다는 서늘한 추상화다. 작품은 적, 청, 황, 흑, 백 등 오방색이 한 화면에서 다양한 변주를 이루고 있다. 음과 양 등 상반된 ‘극과 극의 하모니’를 시각화시켰다. 국내 미술시장에 열풍을 일으킨 '단색화'와는 결이 다르지만, 젊은 작가의 흔치않은 색면화여서 주목된다. 현재 국내 젊은작가들은 대개 팝아트, 극사실화 작업을 하고 있는 추세다. 곱고 진득하게 칠해진 추상화 앞에서 그는 "불의 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2년전 한 일간지 신문의 기사를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장면에 꽂혔어요. 화면을 꽉 채울 만큼 엄청난 불길을 마주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묘한 흥분감이 일었죠. 무작정 사진 속의 장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충남 논산 연무읍 알루텍 공장에 있는 용광로였다. 단단했던 쇳덩이들이 벌건 쇳물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물처럼 녹아내려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장면은 그를 얼어붙게 했다. "용광로가 열리면서 뜨거운 열기가 온 천지에 터져 나오는 광경과 불의 색이 주변의 환경과 융합되는 장면은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멈춘채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온갖 감정들로 때 묻고, 많은 관계 속에 상처받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로 덕지덕지한 우리의 삶도 일순간에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용광로 안에서 들끓는 쇠의 모습에서 우리의 인생을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용광로에서 본 인생의 흥망성쇠와 생멸에 대한 순환의 법칙, 그 감흥은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졌다. “물과 흙이 불을 만나 단단한 도자기가 되고, 아무리 단단한 돌이나 쇠라도 불을 만나 다시 원형의 본체로 녹아내리는 모습을 최대한 압축하면서 단순미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시뻘건 용광로 앞에서 직접 체험한 '불'은 빛의 색인 오방색으로 파생됐고, 온종일 쇳덩이를 때리는 노동자처럼 그도 '그림 노동자'가 됐다. "용광로에서 본 감동은 불의 색감과 장인정신을 뿜어내는 노동자들의 모습입니다. 용광로의 문이 열리면서 허공과 바닥을 순식간에 하나의 기운으로 아우른 벌건 '불'색은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감흥을 전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시뻘겁고 뜨거운 용광로에서 거리낌 없이 불을 조율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야말로 장인정신을 느꼈습니다. 용광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저 또한 쇳덩어리를 매일 두드리는 노동자들의 행위와 같아지더라고요" '불'을 화폭에 담기 위해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아침 7시, 직장인 처럼 작업실로 출근해 하루종일 화폭과 씨름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이 평등하고 곱게 쌓이게 하는 건 시간이 약이었다. "작품을 보면 몇시간씩 작업하냐고 물어보는데, 실은 잘 모르겠어요. 낮과 밤, 몇시간의 구분은 제게 무의미해요." 무엇을 그렸는지 어려운 추상화지만 알고보면 쉽다. 작품속 붉은색과 흰색은 쇳덩이와 흰 재이기도 하고, 불이기도 하다. 검은 것(고체)이 붉은 상태(액체)를 거쳐 흰색(기체)으로 변환되는 과정은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쇠퇴해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순환과정을 색으로 표현했다. 용광로의 불을 통해 인생의 요체를 깨달은 작가의 색면화에 대해 윤진섭 평론가는 '후기 단색화'로 규정했다. "김수수의 색면회화는 가령 미국의 거대한 대지성을 암시하는 바넷 뉴먼(Barnet Newman)의 색면회화(Color Field Painting)가 지닌 숭고미의 표출과는 다르다. 수없이 바탕색을 칠하는 행위의 반복성은 건조의 기다림에 따른 시간의 추이, 즉 시간성이 개입돼 있는 바, 이 부분은 전기 단색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반복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들끓는 불의 이미지를 단색으로 잠재우기 위해 붓도 제작했다. 대형 붓 5~6개를 묶은 2m가 넘는 붓으로 단번에 긋는 작업을 수행한다. 화면 전체를 한 번의 붓질로 덮는 ‘전면일필법(全面一筆法)’이 특기다. 대략 10호(53×45cm) 이하의 소품이든, 100호(162×130cm) 이상의 대작이든 예외는 없다. “화면의 크기에 따라 일필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편편한 붓 여러 개를 나란히 붙인 특수한 붓을 자체 제작해서 사용합니다. 비록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서양화이지만, 마치 화선지에 일필의 흔적으로만 완성하는 동양 전통회화의 ‘일필휘지 기법과 생략의 ‘여백정신을 염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마지막 완성 단계에서 발휘되는 내리긋기의 간결하고 단순한 미학은 작품의 명상적 깊이를 더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작품의 주제를 ‘몰아(沒我)’로 삼았다. "굳이 ‘자기를 잊고 있는 상태’ 혹은 ‘자신을 숨기거나 특성을 없애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들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색조로 절제된 미감을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몰아일체의 작업은 감정 싸움의 승리에서 나온다. 그는 "혼자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힘든 건 감정 다스리기"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붓이 어긋나면 화가 나요. 그런데 또 잘 그려지면 기분이 막 좋아지고. 여러가지 감정들이 있는게 처음에 힘들었어요. 왜 갑자기 화가 났다가 기뻤다가 하는지, 그런 기분에 또 화가 났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계속 생각했어요. 화가 나면 화가 난 만큼, 기쁘면 기쁜 만큼 표현하니 그런 기분이 상쇄돼서 편안한 상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에 감정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어요." 용광로에서 발견한 인생, 끊임없는 붓질은 수행(修行)이었다. 몰입을 통해 평정심을 찾고 숙고하며 성장한 덕분일까. 20대 중반인 그는 "이젠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편하다"며 원로 화백같은 말을 내뱉었다. '화가'가 되기 위해 달려온 길은 치열하다. 최근 '서울대 의대'를 가기 위한 입시 교육 현실을 다룬 방송 드라마 'SKY 캐슬'이 보여주듯 '요즘 애들'의 자기관리는 부모의 배경과도 연관있다. 김 작가도 중학교때부터 입시미술을 공부했다. 이미 초등학교 4학년때 '제5회 전국학생 사생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경력을 관리했다. 1993년생 외동아들이다. "커서 뭐가 될래?" 물으면 ‘화가’였다. 3살 때부터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친구였다. “그것만 있으면 온종일 그림만 그렸던 것 같아요” 화가이자 미술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이기도 했다. 전시장에서 그림을 보는건 숙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때 대학 선택 갈림길에 섰다. 유학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한국 보다, 미국이나 중국의 대학교로 진학하고 싶었다. 미술계에 있는 아버지 지인들은 중국을 추천했다. 2011년 중국 북경중앙미술대학 유화과에 입학했다. 1950년 개교한 중앙미술학원은 청화대학 미대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입학하고 싶은 1순위 미대다. "10명이 정원이었는데 싱가포르인, 저 한국인 2명을 빼고는 모두 중국인 학생이었어요." 처음으로 부모와 떨어진 삶의 생애 처음으로 고생과 직면케 했다. '그림'과 '언어'는 가장 힘든 숙제였다. 중국에서 내로라 하는 그림 실력으로 입학한 친구들의 작업태도는 한국보다 더 치열했다. "모두 오늘만 살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분위기입니다" 덕분에 자극이 됐다. 하루 14시간씩 그림에 몰두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중국 친구때문이기도 했다. 가난한 친구는 학교가 최고의 연습실이었다. 모델과 재료가 제공되고 이젤이 있는 학교를 떠나면 안되는 친구의 간절함은 그에게로 옮겨왔다. 특히 유화과 교실은 한국과 달리 천장에 등이 없다. 자연광으로만 그림을 그린다. 방학때는 화가의 집에서 중국어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다. 오로지 그림을 위한 유학생활은 공모전에서 두각을 냈다. 한국에서 군대를 마치고 시도한 공모전에서 대상(2014년 제4회 대한미국 호국미술대전)을 수상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중국에서도 학기중인 3학년때 2016년 홍군대장정 80주년전 3등상 (중국 북경 중국미술관)을 수상했다. 2017년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온 건, 미국 유학 준비 때문이다. 그 사이 도전한 공모전은 화가의 길을 굳게 다지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지난 1년간 그린 작품만 200여점에 달한다. "제게 그림은 여러 생각들을 동시에 품고 있는 정중동(靜中動)의 제 고요한 심연을 옮기는 과정입니다." 단순한 그림이지만 ‘한 번의 붓질’로 쓸어내려 완성시키기까지 스스로를 담금질했다. 단단한 쇳조각이 불을 만나 물처럼 본연의 형체를 벗어버리듯, '불' 연작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을 녹여냈다. 생애 첫 개인전을 앞둔 그는 "아직도 덤덤하다"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다. “화면에 무엇인가 구체적인 상황이나 형상을 표현한다기보다,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절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평소 화면을 마주하고 잠시 눈을 감거나, 심호흡을 자주 했는데,이는 감정을 절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습관이었습니다. 관람객들이 제 작품을 보고 그 사소한 감정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괜찮다'라든지, 어? 나도 그리겠는데'라는 그런 반응도 제게 무척 소중함으로 다가올 거예요. '기대하지 말자'라고 마인드 컨트롤 하고 있는데 전시가 다가오니까 설레네요. 하하" 100세 시대, 비교적 일찍 화가로 데뷔하는 그에게 그림은 '소확행'(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다. 고행과 수행사이 젊은 작가가 탄생시킨 침묵의 언어’, 단순한 추상 회화가 전한다. “노동은 소중하고 반복은 힘이 세다”는 것을. 빠르게 변하는 세상속 끈기도 재능이다. 삶은 과정의 연속,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자신이다. 준비된 사람이 운도 기회도 잡는다. 전시는 21일까지 [email protected] 2019/01/11
'소변기' 뒤샹전 서울 오게 한 '기증의 힘'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5년 여름, 스물일곱살 뒤샹은 전쟁에 휩싸인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이미 1913년 아모리쇼에서 입체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로 명성을 얻은 후여서 예술가의 스튜디오가 밀집해있던 브로드웨이가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뉴요커가 된 그는 예술가·작가·지식인 무리로 늘 북적이는 컬렉터 루이스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 모임에 합류했다. 체스를 잘했던 그는 이 그룹에서 스타로 부상했고 아렌스 버그 부부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아파트와 스튜디오를 제공하며 물심양면 지원했다. 뒤샹은 '작가가 손수 만든 것'을 중시하는 기존의 관념에 반기를 들었다.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면서 자신의 작업방식도 바꾸겠다고 다짐한다. 서른살 때, 세상을 뒤집었다. 그때 뒤샹은 뉴욕의 현대 미술을 위해 예술가가 운영하는 포럼인 독립예술가협회 창립멤버였다. 젊고 패기만만한 독립예술가협회가 민주주의와 수용성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수호하는지를 시험했다. 1917년 4월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는 협회 첫 전시 '앙데팡당'전에 이름을 감추고 철물점에서 구입한 화장실 소변기를 출품했다. 작품 제목을 '샘'이라 쓰고, 'R. Mutt'라고 검정 물감으로 서명을 했는데, 이 사인은 뉴욕 변기 제조업자인 리처드 머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전시 감독들은 이게 작품이냐며 갑론을박을 벌였고, 급기야 '변기' 출품과 관련 투표까지 하기 이르렀다. 당시 협회 위원이자 뒤샹의 후원자인 수집가 아렌스 버그는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며 변기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조직위원회측은 “그것은 전혀 미술품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샘'을 전시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대중들에게는 실제로 한번도 보이지 않은채 '변기'는 그야말로 핫이슈가 됐다. '본래의 자리에 있으면 매우 유용한 물건이겠지만, 어떤 정의에 의해서도 그것은 예술작품이라 할수 없다'며 치워진 변기는 후원자이자 옹호론자인 아렌스버그 부부 덕분에 부활했다. 전시장에서 치워진 '굴욕 변기'를 아렌스 버그 부부가 사들였고, 또 잃어버리면서 복제의 복제가 시작됐다. 뒤샹은 새로 변기를 구입해 서명하고 아렌스 버그에 다시 제공했는데, 이때 변기는 '오브제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지킨 것'이라고 해석됐다. 원작과 복제품의 차이는 무엇인가. 뒤샹이 쏘아올린 이 질문은 20세기 현대미술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변기'는 개념미술의 원조가 됐다. 일반적인 상점에서 산 기능적인 물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미술의 맥락에 들어온 뒤샹표 '레디메이드(ready-made)'의 발명이었다. 소변기 '샘'의 위력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영국미술가 500명이 ‘지난 20세기 100년간 후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20세기 작품’ 1위로 뽑은 작품이다. '위대한 천재 예술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팝아트 황제'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두 폭'을 누른 뜻밖의 결과였다. '이게 작품이냐'며 쓰레기 취급됐던 소변기는 몸값도 올렸다. 1917년 굴욕시기를 거쳐 82년이 지난 199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1700만 달러에 낙찰됐다. 뒤샹의 작품 중 최고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이 소변기는 1917년 제작된 바로 그것도 아니고 1964년에 새로 만든 8번째 에디션(복제품)이었다. 20세기 현대미술사 혁명을 이끈 그 소변기 '샘'을 실물로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에서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1일 마르셀 뒤샹전이 개막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현대미술사 최대 논란을 일으킨 남성용 소변기 '샘'부터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 첫번째 레디메이드(ready-made) 작품 '자전거 바퀴' 등 150여점을 직접 볼 수 있다. 소변기 '샘'은 유리관에 쌓여 성전처럼 모셔졌다. 그 당시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대체 저것이 왜 예술이란 말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뒤샹은 '세상의 모든 회화는 보완된 레디메이드이고 동시에 아상블라주 작품'이라고 했다. 제품 쓰임새의 차이,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을 가져와 새로운 제목과 관점 아래 그 쓰임새가 사라지도록 한 것, 뒤샹이 그걸 해냈다. 화가의 전통적 역할에 대한 거부였다. 손재주를 작품에서 배제해 아이디어 자체를 전면에 내세운 레디메이드는 예술의 지적인 가치를 앞세운다. 쓰임새를 지닌 물건에서 벗어나 제조 상품들을 바라보는 경험, 예술적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시킨 것이다. 변기 '샘'을 계속 바라보면 뒤샹과 생전 함께 활동하며 그를 질투했던 피카소가 "그들(현대미술가)은 뒤샹의 가게를 약탈해 포장만 바꿀 뿐"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한다. 변기 제목이 '샘'인 것도 아이러니다. 현대미술이 샘솟듯 변기는 20세기 미술의 화수분이 됐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유산은 로버트 라우센버그, 제스퍼 존스, 리처드 해밀턴 앤디워홀, 제프쿤스등 팝아티스들을 비롯해 신사실주의와 플럭서스와 연관된 작가들에 의해 계승됐다. '키네틱 아트' 또한 뒤샹의 기계적인 실험을 발전시킨 장르다. 미디어아트 선구자 백남준은 평생 넘어서야 할 벽으로 뒤샹을 꼽으며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아트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이뤘다"고 할 정도였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게 하고, 작가 사후에도 세계 순회전을 할수 있는 건 후원자 덕분이다. 뒤샹의 후원자이자 수집가인 아렌스버그 부부의 공이 크다. 그들은 뒤샹 작업에 관여하기도 했고 수많은 작품을 구입했다. 화가에서 레디메이드 발명가로, 설치가로 조각가로 사진작가등으로 변신할 수 있게 후원한 월터 아르센 버그는 어떤 사람일까. 마르셀 뒤샹 회고록에 따르면 "아르센 버그는 하버드 출신으로 충분히 먹고 살 돈이 있는 시인이었다. "단테를 위해 그는 책 한권을 썼는데, 물론 자비 출판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출판하고 싶어하는 츨판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 재단 또는 이와 유사한 것을 하나 설립했는데, 세익스피어 연극을 쓴 사람이 사실은 베이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죽고난 뒤에도 비서들이 계속 세익스피어의 암시를 찾는 연구를 할 수 있게 돈을 남겼다. 과학적으로 전혀 유효하지 않은 연구였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1950년대 아렌스버그 부부는 회화 조각등 '뒤샹 컬렉션' 200여점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때도 뒤샹과 함께 작품을 기증할 미술관을 선정했다고 한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필라델피아 미술관 티모시럽 관장은 "그 이유는 그리스 신전처럼 생긴 미술관 전경 덕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뒤샹은 신전처럼 보이는 필라델피아미술관을 보고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이 미술관이 내 작품을 영구히 보존할수 있을 것 같다는 서신을 보냈고 이후 기증이 결정됐다" 실제로 뒤샹은 자신의 작품이 한 기관에 소장되기를 원해 작품의 복제, 전시, 소장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한다. 이 과정에서 뒤샹은 작품 설치 쿠레이팅 과정에 참여했고, 그의 최후의 작품인 '에탕 도네'는 뒤샹 사후 1969년 이래로 필라델피아 미술관에만 전시돼왔다. "예술가라면 진정한 대중이 나타날 때까지 50년이고 100년이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대중만이 제 관심사입니다."(마르셀 뒤샹) 티모시럽 관장은 "1954년 10월 아렌스버그 부부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기증한 모던 아트 컬렉션이 대중에 첫 선을 보인후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뒤샹 미술관'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샹 작품의 집대성이라 할 아렌스버그 컬렉션 기증은 필라델피아 미술관 역상에 이정표가 되는 대사건이었다. 덕분에 필라델피아미술관은 모던아트에 관심있는 예술가와 학자들의 성지가 됐다"고 자부심을 보였다. 1875년 펜실베이니아 미술관으로 설립된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938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같은 규모로 미국의 7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기증의 힘으로 이뤄진다. 티모시 럽 관장은 "25만점의 소장품은 80%가 컬렉터들의 기증품"이라며 "서유럽 고전회화인 존슨 컬렉션과, 근대회화의 아렌스 버그 부부 컬렉션, 타이손 컬렉션 등을 유치한 이후 모마미술관 못지않은 방대한 근대미술관으로 부상했다"고 소개했다. 이번 '마르셀 뒤샹전'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대표 컬렉션이 해외로 나온 첫 사례다. 일본 한국 호주등 아시아 순회전을 결정한 것과 관련, 티모시 럽 관장은 "아시아 예술가 100명이면 100명 모두 뒤샹의 작업에 영향받았다고 하더라"면서 "아시아에서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더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과 일반 대중들이 책에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차이가 있어 이렇게 우리가 직접 나섰다"며 뿌듯해 했다. 그는 "뒤샹의 대표 작품뿐만 아니라 수많은 드로잉과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 등 그의 아카이브를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은 처음"이라며 "한국인들은 행운"이라고도 했다.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키는 건 수집가(컬렉터)라는 말이 있다. 화랑이 작가를 발굴하지만, 결국 작가를 키우는 건 컬렉터다. 컬렉터가 있어야 작가도 살고 화랑도 살고, 그래야 미술시장에 피가 돈다. 특히 미술관에 작품 기증은 국가를 위한 일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이 '뒤샹 미술관' 성지가 되어 세계 관광객과 예술인들을 이끄는 것처럼 미술관 수준은 소장품이 가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관 예산이 관건이지만 해결책은 ‘미술품 기증’이 꼽힌다. 우리나라는 국민 1인당 소득 3만달러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미술품 수집가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않다. 물론 불법 상속의 목적이나 비자금 조성에 이용되는 사회적인 이슈들로 미술품 컬렉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킨 배경도 있다. 개인컬렉터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은 2018년 현재 등록된 작품 8200점중 기증작품이 3786점으로 46%를 차지하고 있다. 연평균 50~100점이 기증되며 해마다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소장품 예산도 늘고 있다. 2013년 31억에서 2017년 61억, 올해 2018년 74억원이었다. 반면 지난 5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 화백의 '붉은 점화'(1972년) 6200만 홍콩달러(약 86억3000만원)낙찰된 것과 비교하면 정부 미술관 소장품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미술품 기증·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 정책이 절실하다. 미술품 기증이 가장 활발한 미국은 기증 미술품 시가 기준해 최소 30%, 최대 90% 가깝게 세제혜택을 제공한다고 알려졌다. 1917년부터 민간기부와 민간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기부가 비영리단체를 통해 공공복지를 위해 쓰일 경우 세금을 대신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미술관 기증 미술품의 평가액만큼 세금을 공제해 주는 법률’인 언더우드 관세법(underwood tariff)의 시행으로 미술관에 대한 기부 및 기증사례가 급증했다. 미국 정부의 문화예술지원을 위한 ‘기부금 세제지원 제도’의 성공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미국 정부의 ‘문화와 예술 분야의 육성정책’은 재벌 견제용으로도 적극 활용될 만큼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뒤샹 사후 50년에도 그의 대표작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한국을 찾은 것처럼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에 대한 기증문화가 활성화되어야 할 시점이다. 미술품은 결국 국가자산으로 보존되고 후대에 물려지는 운명이다. 미술품 '소장'(수집)으론 한 명을 만족할 수 있지만, 기증은 수 만, 수백만명을 만족시킬 수 있다. 현대미술사 흐름을 바꾸고 고정관념을 깬 수천, 수억짜리 작품을 한자리에서, 단돈 4000원에 볼 수 있게 하는 '미술품 기증의 힘'이다. 전시는 2019년 4월 7일까지. [email protected] 2018/12/21
마리 관장 "3년간 행복했다...뒤샹전 보러 올 것" 21세기형 신인류 노마드족(Nomad). 스페인에서 온 남자 이야기다. 1966년 스페인 이비사 섬에서 태어났다. 어업과 농업에 의존하는 섬에서 아버지는 트럭기사로 일했다. 한때 관광지에서 히피들이 몰려 살았던 지역으로 그는 농촌과 히피, 두 세계 사이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1930년대부터 철학자 발터 벤야민과 예술가 볼프강 슐츠, 라울 하우스만, 윌 파버 등 유명인이 방문할 정도로 독일 프랑스 관광객이 많았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에 모두 떠나버렸고 섬은 히피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10대 후반이었던 1980년대는 여름철 가장 인기 있는 클럽 지역으로 부상했다. 나이트클럽 열기가 여전히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비사섬은 지금도 신나는 음악과 365일 파티가 열리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어린시절 프랑코 독재 경험과 민주화 과정을 거쳤고 바르셀로나로 유학을 갔다. 바르셀로나대학에서 철학·교육학을 전공했다. 스무세살때부터 노마드가 시작됐다. 그를 계속 이동시킨 건 미술이다. 처음 간 곳은 브뤼셀. 1989년 벨기에 브뤼셀 현대건축박물관 큐레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비테 드 빗 현대미술센터 예술감독, 베니스비엔날레 스페인관 큐레이터로 지냈고 2008년부터 2015년까지 7년간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철학·교육학을 전공했지만 어린시절 드나들었던 미술관 덕분이다. 고향 이비사 섬에는 1969년 건축된 스페인 제2의 현대미술관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1987년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미술에 빠져들었고 업으로 삼게 됐다. "당시 나에겐 예술이 로큰롤보다도 매력적이었다." 유럽권에서만 이동하던 그가 지구 한바퀴를 돌았다. "안냥하십니까. 저는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2015년 12월 14일, 서울에 등장한 그의 첫 인사였다. 한국말이었다. 파격과 충격을 몰고온 국립현대미술관장. 국내 첫 외국인 관장 입성이었다. 그가 오기전 미술관은 1년 2개월간 표류상태였다. 전임 관장은 학예사 부당 채용으로 직위해제됐고 미술관은 학연과 지연 수렁속에 빠져있었다. 유럽에서도 '외국인 관장'이었던 그는 한국 첫 '외국인 관장'이라는 부담감은 크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미션을 줬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만들어라' 3년이 흘렀다. '미술계 히딩크'로 화제였지만 기대와 기대사이 실망도 컸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고 했던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의 명언처럼 그도 말을 남겼다. "나는 더 일하고 싶다" "미술관장의 3년 임기는 짧다. 제가 한국에서 뗀 첫 발걸음이 두 번째 발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한다" 좌절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9월 11일 '연임 불가' 통보를 했다. 이후 다시 미술관장 공모가 진행됐고 16명이 응모, 12월 현재 3명(김홍희 이용우 윤범모) 후보로 압축된 상태다. 많은 매체들이 '떠나는 마리 관장'을 타이틀로한 인터뷰를 쏟아냈다. 벌써 한국을 떠난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마리 관장은 여전히 근무중이다. "이미 할 말은 다했고 떠나는 마당에 더 할말이 없다"는 그와 지난 6일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겸재 정선 그림같은 인왕산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관 집무실. 외국인 관장이 앉아있는게 이젠 자연스럽다. 책꽂이에는 전시 도록이 이전보다 많이 들어찼다. 오는 20일 언론에 공개후 22일 개막하는 마르셀 뒤샹(1887~1968)도록이 벌써 꽂혀있다. 개막일에도 나와지 못해 눈총받았던 그간 전시 도록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그러니까. 3년 걸렸다." 그가 말했다. "일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성과를 내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다"면서도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은게 있다"고 했다. "앞으로 미술관은 긍정적인 성과를 낼수 있고, 더 큰 훌륭한 전시로 보여질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만 본다면 과천관에서 연 사진 문명전,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의 대규모 전시가 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미술관 직원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가 이미 긍정적인 성과로 보여지고 있다." "물론 언어부문이 개선돼야 하는게 먼저 보이겠지만 관장이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떤 점을 잘 해왔나 강조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며 전시 이야기로 이어졌다. 큐레이터 출신 마리 관장은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마르셀 뒤샹'전은 '마리표 전시'가 열매맺은 결과다. 2016년 여름부터 추진했다. 지난해 봄 개막예정인 앤디워홀전과 추진중인 피카소전이 자금 문제로 엎어지면서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준비했다. 기대가 실망이 될때 비난이 쏟아진다. 예산과 내부 구조적인 문제가 컸지만 시행착오는 교훈을 선사한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굵직한 전시를 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 작가를 보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중요한 세계 유명 미술거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마르셀 뒤샹은 현재의 현대미술의 모습이 된 토대가 된 인물로 20세기 개념미술 선구자다. 뒤샹은 미술의 창조와 해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뒤샹 사후 5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 전시는 한국 첫 전시이자 아시아태평양지역 역대 최대 전시다.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 150여점이 들어온다. 대표작인 '샘'과 뒤샹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진 '에탕 도네'가 디지털로 구현된다. "뒤샹의 가장 훌륭한 컬력션을 모아놓은 전시이기 때문에 어느 전시보다 중요도가 특별히 높다." 이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마리 관장의 네트워크 힘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과는 20년이상 가깝게 지내온 기관이다. 그래서 순회전이 일본에서 개최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으로 가져오게 됐다. 이동 경로에 있어서 자금적인 메리트가 있겠다 생각했고 제안했고 성사됐다. 한국은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대형 전시를 기획해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리 추진된 만큼 운송료와 보험료도 절반으로 줄였다. 같은 지역의 기관과 파트너쉽을 맺고 외부 기업으로부터 후원도 받았다. "향후에도 해외순회전을 같이 주최하고 끌어오는 협업하는 기관이 늘어난다면 미술계 중심이 미국 유럽쪽이 아닌 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올 가능성이 크다"는게 그의 전망이다.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문명전' 예를 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미국 사진재단과 기획한 대규모 사진전으로 국내 전시이후 해외 순회전을 한다. 중국 베이징 올렌스 현대미술센터(2019년),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2020년), 프랑스 마르세유 국립문명박물관(2021년) 등 10여개 유명 미술관으로 들어간다. "우리 미술관이 시작의 발을 떼고 주최하고 수출하는 전시다. 이런 점에서 전시를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밖으로 내보내는 전시 수출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가능해진 것이다. 또 수준 높은 도록도 해외 서점에 유통할수 있게 됐다. 그래도 3년 걸렸다" 마리관장이 스위스 출신의 사진 전문 기획자 윌리엄 유잉(전 로잔 엘리제 사진미술관장)과 “10년 전부터 구상한 전시"로 사진을 통해 인류 문명을 해석한 전시는 호평을 얻고 있다. 또 현재 전시중인 단색화 거장 윤형근 전시도 이탈리아 순회전을 추진중이다. 이쯤되면 그에게 주어진 '세계속의 한국 미술관' 미션은 절반의 성공이다. 3년간 그는 매 전시때마다 나와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기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어 "아름답고 훌륭한 전시다. 많이 홍보해 달라"는 주문까지 할 정도로 문장이 늘어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독일어·이탈리아어·네덜란드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해 "한국어도 금방 배울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지만 언어장벽은 높았다. '마리 관장은 말이 안통해 안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마리 관장은 "한국어 발음은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한국어가 복잡한 면도 있지만 한국어를 익히지 못한 가장 큰 장애물은 따로 있다"며 한국어를 많이 배우지 못한게 큰 아쉬움이라고 했다. "3년 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모든 관심과 정신이 미술관에 쏠려야 할 정도로 업무량이 많았다. 사실 이 나이에 새로운 언어에 습득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런 걸 쏟을수 있을만큼의 여분의 시간이 많지 않았다.나의 모든 뉴런 세포가 미술관에만 집중했다. 하하" 한국에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월요일 출근했다 정신차리고 나면 금요일 저녁이고, 토요일에 힘들었다 쉬다가 일요일 보내면 월요일 아침이 지났다. 한번 눈을 감았다 뜨면 금요일에 와있고 한국에서는 다른곳에서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미술관 세계회를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했다. 실제로 외국인 관장이 오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은 국제적인 미술관으로 시동을 걸었다. 외국 작가 참여 전시가 늘고 세계 미술계 유명 큐레이터들이 집결했다. '슈퍼휴머니티’, ‘미술관은 무엇을 연구하는가’ 같은 국제심포지엄을 통해 지적 담론을 생산하는 기관이자 현대미술과 문화에 대한 이슈를 토론하는 플랫폼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내수용에서 수출용으로 미술관의 변화는 '외국인 관장'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빨리빨리' 성과 분위기속에서 조기 사임설 위기도 있었다. 한국미술 국제화와 관련 성과가 미미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때마다 마리 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업무 프로세스 혁신에 힘썼고, 이를 기반으로 훌륭한 전시와 프로그램을 선보이겠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 언론사에 2번(2017~2018년 전시 라인업에 대한 해명과,연임불가 통보받았다는)이나 공개 편지를 보내는등 소통 강화에도 적극적이었다. 미술관에서 40여개나 열렸던 전시를 줄였다. "퀄리티를 높이고 학예사들이 충분히 연구하고 준비할 시간을 줘야한다"는 취지로 학예직의 전문역량을 강화하고 전시를 보다 내실화했다. 마리 관장 취임후 2016년 29개, 2017년 27개, 2018년 25개 전시를 기획 추진, 새로운 해외 전시들이 잇따랐다. '예술이 자유가 될 때: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 '신여성 도착하다'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리처드 해밀턴', '역사를 몸으로 쓰다', '아크람 자타리', '문명: 우리가 사는 방법'전에서 '마르셀 뒤샹'전등까지 이어진다. 관람객수가 해마다 늘어났다. 2015년 208만명에서 2016년 221만명, 284만명(2017)을 돌파했다. 해외 전시만 많이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그런 의견을 들을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미술을 해외미술계와 단절시킨다는 의미일까?” 다양한 곳에서 일해왔지만 모든 기관들이 해외 전시를 보여주면 지역내에는 충분한 관심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역내 미술계에 속해있거나 소외받았다고 느끼는 경우다. 그는 단호했다."그런 의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한국사회는 해외미술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할 것이고, 또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바도 아닐 것"이라면서 "해외미술계와 연관성이 떨어지고 고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방향은 아니다"라고 잘랐다. 그래서 미술관장직 3년은 짧다는 주장이다. 소장품의 질적 개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3년에 한 번씩 기관장을 교체하면 일관된 수집정책을 수립할 수 없다. 공공미술관은 아주 느린 속도로 소장품 규모를 키워가야 하는 동시에 분명한 가이드라인과 목적이 수반되어야 한다"며 "또한 소장품의 수로 미술관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성과를 평가하기에 3년은 정말 너무 짧다. "영국 테이트 미술관은 니콜라스 세로타 관장이 27년 재임했다. 미술관은 장거리 마라톤 주자이지 단거리 스프린터가 아니다." 결정권과 재량권을 가진 히딩크와 달리 미술관 규정에 갇혀 제약을 받았다는 아쉬움도 있다. "축구는 경기 하나하나에 대한 전략이 중요하지만 미술관은 장기 기획과 연구, 안정성과 연속성이 중요하다. 후임 관장에게는 목표를 성공시킬 수 있는 시간과 도구가 주어지길 바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지난 3년은 제 커리어에 있어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기였다. 매우 소중하고 활기찬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세대의 유럽인들은 교과과정에서 아시아에 대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새로운 발견과 끊임없는 배움이 잇따랐던 3년이었다." "3년동안 매우 행복했다"며 미술관 직원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국립미술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매우 큰 행운이었다" 가장 행복했던 때는 미술관에 처음 일을 시작해서 모든 직원들을 만나고 3개관을 둘러보았을 때였다. "3년간 함께 진행했던 모든 전시가 매우 보람 있었다. 가끔 나의 요청이 쉽지 않았을텐데 현실화시켜준 노력에 대해 감사드린다. 제가 직원들을 통해 많이 배웠던 것 만큼 직원들도 나를 통해서 뭔가를 배웠길 바란다. 더불어 어떤 순간, 관계에 있어서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니 만큼 이해해 달라. 결과가 항상 중요하다고 말한 만큼 그 부문을 크게 봐달라" 그러면서 "후임 관장이 와서 우리가 함께 이뤄놓은 베이스를 끝까지 잘 즐길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남겼다. 연임은 불발됐지만 마리관장은 3년 임기를 모두 채운 관장으로 기록된다. 지난 10여년간 개방형 직위제 이후 임명된 국립현대미술관장들은 부침이 심했다. 불명예 퇴진이 잇따랐다. 2003년 임명된 김윤수 전 관장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임기를 1년 남겨 두고 2008년 해임됐고 대우전자 CEO 출신 배순훈 전 관장(2009~2011년)은 임기 4개월을 앞두고 자진 사퇴했다. 정형민 전 관장(2012~2014년)은 임기를 마치고 서울관 개관 작업을 위해 1년 연장된 상태에서 직위해제됐다. 1969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반백년이 흘렀다. 과천관 덕수궁관 서울관에 이어 청주관이 개관한다. 국립현대미술관 2018년 예산은 724억원, 학예인력 135명의 거대 미술관이다. 아시아의 원로 격인 근현대미술관이자 아시에서도 규모가 큰 미술관으로 꼽힌다. 덩치는 커졌지만 조직구조는 80년대에 머무르고 있다. 미술계는 현대미술을 홀대한다는 입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직이 차관급인 반면, 국립현대미술관장직은 국장급이다. '임기제 고위공무원 나급’으로 미술관에 파견나온 문체부 기획단장과 같은 급수다. 연봉은 각종 수당을 합쳐야 1억원 안팎이다. 연봉으로만 따지면 '미술계 히딩크'로 불릴수 없는 구조다. 히딩크는 2002년 월드컵 축구 감독으로 10억원 안팎을 받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위상과 권한, 임기 등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대와 홍대 파벌 구원투수로 왔던 그는 이제 다시 '미스터 션샤인(이방인)'으로 떠난다. 임기 만료일은 오는 13일. 이미 글로벌 헤드헌팅 업체에서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장직 러브콜을 해오는 상태지만 모두 미뤄뒀다. 한국을 떠난 이후에 진지하게 이야기하자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미술관 업무를 정리하는 것과 향후를 대비하는 것을 같이 진행할수 없다"는 이유였다. 아쉬움속 미련을 털어서일까. 애정이 넘친다고 하자 "계약직이니 업무에 충실한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자신이 추진한 마르셀 뒤샹전을 뒤로 하고 떠나는 그는 "개막은 못보고 가지만, 내년 2월 한국에 방문해 꼭 관람할 것"이라고 했다. 오는 17일 취업비자 만료로 부인과 함께 스페인행 비행기를 탄다. 첫 외국인 관장으로 한국 미술계에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킨 그는 "한국을 떠난 다음 목적지는 버케이션(vacation)"이라며 눈을 찡긋했다. "한국 예술은 매우 우수하고 흥미롭습니다. 한국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제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 예술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했기를 바랍니다. 감싸함니다." [email protected] 2018/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