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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극장서 보는 으스스한 전시…아트선재센터, '혀 달린 비'

등록 2024-04-03 10:25:41  |  수정 2024-04-08 10:36:20

세실리아 비쿠냐, 차학경, 김언희에서 출발

나미라, 제시 천, 차연서 등 5인 여성작가 그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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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 극장형 전시로 선보이는 아트선재센터 '혀 달린 비'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어둡고 껌껌한 지하 극장 안은 으스스하다. 흑백 영화가 상영되고 한편에선 객석 의자를 넘나드는 여인과 곰 인형을 태우는 장면이 반복된다. 여자가 내는 소리는 마치 심령술사가 무언가를 불러내는 것 같은 분위기다.

아트선재센터가 처음으로 펼친 극장형 전시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4일 개막한 '혀 달린 비'는 故 차학경의 제의 공간처럼 보인다. 세실리아 비쿠냐, 차연서, 제시 천, 나미라, 차학경의 작품을 선보인다. 극장 객석 의자에 앉아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무대에 올라가 직접 살펴볼 수도 있다.





전시를 기획한 문지윤 아트선재센터 프로젝트 디렉터는 "이번 전시는 젠더적 상황이 야기하는 트라우마로 인해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며, 기억의 통로를 뚫어 내기 위한 시적 발화의 힘과 해방적 말하기의 가능성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전시 제목에서 사용된 '혀 달린'이라는 표현은 김언희 시인의 '보고 싶은 오빠'에서 빌려왔다. 이는 비쿠냐의 ‘비’와 결합되어 시 언어에 내재한 몸-감각을 강조하는 트리거로 작동한다.

"'혀’는 먹고 마시고 사랑을 나누기 위해 사용되는 동시에 이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언어를 발화시키는 수단으로 이중적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혀는 시 언어의 변혁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참여 작가들의 공통된 주제 의식을 표현하는 상징어로 제시된다."

칠레 출신 시인이자 미술가 비쿠냐(76)가 재미 예술가였던 차학경(1951~1982)에게 헌정한 '소리로 꿈꾸는 비 (Rain Dreamed by Sound)'가 이번 전시 기획의 출발점이었다.

극장(아트홀)을 가득 채우는 비쿠냐의 사운드 설치 작업은 차학경의 영혼을 위로하는 헌시이자 노래다. 칠레와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비쿠냐와 차학경은 시와 퍼포먼스를 통해 페미니즘, 샤머니즘, 모계적 전통과의 연결을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차학경은 어린 시절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계 미국인으로 언어적, 문화적 분열과 회복의 과정을 글쓰기와 퍼포먼스, 영상 설치 작업을 했다. 1982년 시이자 소설인 '딕테(Dictée)'를 발표하고 미국 문화예술계에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 강간 살해당했다. 비쿠냐가 작품에서 말하는 ‘비’는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젠더 폭력의 잔존하는 악몽에 파동을 일으키고, 마른 땅에 단비와 같이 고통받는 영혼을 정화시키는 힘의 상징으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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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학경, <몽골에서 온 하얀 먼지> 영화 스틸 이미지, 1980. 16mm, 30분. ⓒ 버클리 미술관 & 태평양 영화 보관소, 차학경기념재단 기증 *재판매 및 DB 금지


비쿠냐와 차학경 사이의 대화와 위로는 세대를 넘어, 나미라, 제시 천, 차연서로 연결된다.

비쿠냐의 사운드 작품이 끝나면 무대 뒤 백스테이지에 설치된 나미라(41)의 비디오 작업 '테트라포비아(TETRAPHOBIA)'가 상연된다. 건축과 현상학에서 착안한 나미라의 영상 작품은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차학경의 미완성 필름 '몽골에서 온 하얀 먼지(White Dust from Mongolia)'에서 영감을 받았다. 텅 빈 영화관의 관객석을 타고 넘어 무대 위로 등장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은 차학경이 '몽골에서 온 하얀 먼지'를 위해 마지막 장면으로 구상한 이미지였다.

버클리 미술관의 협조로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몽골에서 온 하얀 먼지'는 차학경이 1980년 한국에서 촬영한 필름이다. 작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완성되지 못하고 유작이 된 이 필름은 일본 식민 통치를 피해 만주로 건너간 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바탕으로 만주에 사는 실어증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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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천의 '탈언어화의 악보' *재판매 및 DB 금지


비쿠냐의 사운드 작품과 나미라의 비디오 작품 사이에 설치된 제시 천의 '탈언어화의 악보(천지문 and Cosmos, no. 042823)'는 드로잉 설치 작업과 함께 차연실의 콜라주 작품은 차학경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을 전달한다. 극장 객석 중간 천장에 달아놓은 그림들은 마치 '제의의 공간'처럼 이 전시를 관통한다. 예술이 죽음과 상실에 대한 치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작업이다.

전시연계 프로그램이 풍성하다. 오는 25일 제시 천 작가가 기획한 여성 상모돌리기 퍼포먼스가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이번 전시의 영감을 주었던 김언희 시인에 대한 유사 비평서 '미친, 사랑의 노래'에 대한 북토크도 준비되어 있다.  관람료 1만원. 전시는 5월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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