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

[박현주 아트클럽] 하종현 화백 "면벽수행하듯 40년 단색화 몰두"

등록 2015-09-21 17:00:16  |  수정 2019-05-31 01: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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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하종현 화백이 검은 그을림(연기)을 이용해 만든 신작전이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단색화 1세대… 해외미술관서 러브콜 잇따라
마대 뒤에 물감 밀어 올린 '접합' 작업 인기
100호 크기 1억원 호가…1년 전보다 10배
팔순에도 실험 계속…국제갤러리서 신작전

【서울=뉴시스】박현주 기자=  "나같은 작가가 아직도 대한민국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러운 일 아니냐. 크하하하하"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만났던 하종현 화백(80)은 당시에도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이 때만 해도 '단색화'가 뜨지 않았던 때다. 하종현 화백에게는 '단색화가'라는 타이틀보다는 '한국추상미술 대표작가'라는 수식어가 달려있었다. 그땐 하 화백 특유의 '자뻑'(자기 도취)발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말은, 씨가됐다. 2년 후인 2014년 팝아트 일색이던 미술판이 달라졌다. 팔순을 앞둔 그는 그의 말대로 '대한민국 미술의 자랑'이 됐다. 세계미술시장에서 '한국의 단색화'가 재조명되면서 하화백의 주가도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러브콜이 잇따랐다. 2014년 9월에 열린 국제갤러리 '단색화의 예술전'이 시작이었다. 그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블럼&포갤러리의 한국 단색화 대표작가 6인전에 이어, 10월 영국 런던의 프리즈 마스터스에 출품됐고, 미국 뉴욕 맨해튼 블럼&포갤러리에서 한 달간 개인전을 열었다.

 '단색화' 모노크롬, 즉 단색으로만 그림을 평생 그려온 하종현 화백을 비롯해 박서보, 정상화 등 단색화 1세대들이 늦바람이 났다. 국내외 경매시장에서도 단색화 열풍이 불어 작품값도 껑충 뛰었다. 국내에서는 최근 2년 새 최고 10배까지 올랐다. 하종현 화백의 작품은 지난해까지 100호(160.2×130.3㎝) 크기가 점당 3000만~4000만원에 거래됐지만 최근 경매시장에서 1억원을 호가한다. '단색화'는 한국미술의 브랜드가 됐다. 이제 일본 모노하(物派·ものは)와 거리를 두고 ‘Dansaekhwa’란 영어표기까지 정해지며 한글 용어 그대로 ‘단색화’로 표기된다. 

 "그래요. 살아있을 때 이런 걸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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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하종현화백이 캔버스 대신 마대를 40년째 사용하며, 마대뒤에서 물감을 밀어낸 역발상 기법으로 '한국 단색화'의 자랑이 된 '접합'시리즈를 설명하고 있다.
17일부터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하 화백은 여전히 활기찼다.

 이번 개인전엔 검은 그을음 연기를 씌운 새 기법으로 제작한 신작을 선보인다. 그는 “팔순의 내 나이에 실험적인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면서 "한 곳에 머물지 않도록 내 나름의 새로운 시도를 하며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베니스비엔날레서 연 단색화 특별전에 참여한 후 여름내내 작품제작에 몰두했다는 그는 다리를 절뚝거렸다. 

 계단 오르기가 쉽지않아 국제 갤러리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그는 ""허리가 아파요. 그래도 조금 있으면 나을 거에요. 좋아서 아픈 거니까"라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역발상으로 성공했다. 남들이 다 캔버스 앞에서 색을 칠할 때, 그는 캔버스 뒤에서 물감을 밀어냈다. 특히 그와 한몸처럼 단짝이 된 '마대'는 그의 힘을 받아줬다. 밀어낸 물감은 마대를 비집고 나와 각각의 모습으로 독특한 형태의 '추상화'를 만들어냈다.

 세상에 같은 것은 없다. 그림도 마찬가지. 뒤에서 물감을 밀어내면 오일에 따라 달라진다. 동글동글 밀려 태생적으로 스스로 기어나온 형태 그대로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정하면서 나오는 거"라는 인생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모 원망할 것 없어. 운명은 개척해야지. 내 작품에서 자기(물감) 스스로가 나온 그 모습 그대로를 고치지 않고 살려주는 게 어디야."

 도전과 실험정신이 그를 밀어붙였다. 1962년 신상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앵포르멜 회화작업으로 화단에 등장했다. 이후 1969년에 창립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장으로 활약하며 실험의 선봉에 섰다. 당시 용수철, 철사, 철조망 등을 사용한 작업을 발표하면서 1970년대를 유린했던 군사정권에 저항했다. 이후 1974년부터 '접합'연작시리즈에 40년간 몰두해왔다. 캔버스 뒷면에서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방식의 파격적 방법론에는 작가가 기질적으로 추구해 온 기성형식에 대한 저항적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단색화 태동기부터 화면의 앞뒤를 구분하는 관행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해온 바 있다.

 마대와의 40년 작업은 가난에서 시작됐다. 한국전쟁 후 발견한 재료였다. "미국에서 밀을 수송할 때 배밑에 깔려있던 마대를 미국사람들이 탈탈 털고 뚤뚤 말아 남대문 시장에서 팔았지. 캔버스 살 돈이 없을 때 남대문 돌아다니다가 뒤져서 샀는데 거칠고 질긴 게 맘에 들더라고"

 그는 "작품 하나 하나를 뜯어서 보지말고 큰 덩어리로 봐달라"고 했다. 작품은 물질과 물감이 행위와 섞여 덩어리로 만들어지는 총체적인 결과물이다. 그가 추구하는 색의 경향 역시 자연적인 성향을 띤다. 그가 취하는 흙색이나 검정색은 단순히 검은 톤의 색채가 아니라 어두워진 톤, 곧 기와가 오랫동안 비를 맞고 세월이 지나 퇴색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우리 색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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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현 화백
그는 자신의 작품은 '정복이 아니라 공존'이라고 말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었지만, 내 색깔은 우리나라 정서와 같은 색깔이다. 마대하고 만났을 때 서로 튀지않고 사이좋게 이야기하지 않나. 보세요. 크게 보면 마대도 내 작품의 하나로서 참여하고, 물감도 참여하고 작가의 행위도 아주 겸손하게 이뤄져 있어요"

 '마대와 물감, 행위'가 삼위일체된 작품은 편안하면서도 금욕적이다. 세계미술계에서 단색화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 유진상은  "페인팅은 발린 상태다. 물감을 어떻게 바르느냐가 중요하다. 캔버스의 구조와 맞물려 서양에서 너무 많은 담론으로 작용해왔다"면서 "유럽과 미국에서조차 소홀하게 다뤄지게 된 페인팅의 문제를 한국 작가들이 아직도 붙잡고 다루고 있다는 것에 서구인들이 놀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베니스비엔날레 때 서구인들이 몰려든 이유는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한국작가들이 하고 있고, 또 그 당시에 활동하던 작가들이 여전히 활동하면서 단순하지만 이론으로 정제되어 있고 수준이 높아 서구인들, 특히 모든 미술관에서 컬렉션을 해야하는 아이템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단색화 덕분에 미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서구인들도 돌아선 모노크롬, 그 단색화를 계속해 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 화백은 "생각해보면 우리 단색화가들이 정말 위대하다"며 운을 뗐다.  "다른데서(모노하등)는 그룹이다해서 이념으로 해왔지만, 한국에서는 작가들이 작품과 일체가 되기위해 고뇌를 하면서 작업을 해온 것 같다"면서 "서구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게 같은 시대를 살아왔지만 엄청나게 화가로서의 자기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림이 같아 보인다고?. 내가 추구하는 변화는 나이를 먹었다고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야"

 고정관념을 깨고 추상회화의 새로운 장을 마련한 그는 "마대보다 자신이 더 질기고 강하다"며 껄껄 웃었다.

 "'마대와 물감,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면 합일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면벽수행 하듯 40년을 살아온 것 같아. 왜냐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지. 이젠 지금쯤 죽어도 원이 없어. 사리가 많이 나올 것 같으니까. 하하하"  전시는 10월 18일까지 이어진다. 02-735-8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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