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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9일 서울 국제갤러리 K3 전시장에서 다니엘 보이드가 자신의 신작 앞에서 작업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작품 뒤편의 점무늬 패널을 통과한 햇빛이 바닥 위로 흘러들며, 보이드 특유의 ‘점 우주’를 전시장 전체로 확장시킨다. 2025.12.09.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빛은 이 전시의 침묵된 협력자다.
프레임 안에 갇혀 있던 점들은 햇빛이 스며드는 순간, 비로소 자기 세계를 확장한다.
검은 구멍은 더 이상 벽에 매달린 이미지가 아니다. 점들은 바닥을 따라 흘러내리고, 허공에서 흔들리고, 보는 이의 발끝까지 밀려들어 관람자를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호주 출신 작가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의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는 바로 그 순간, 점들이 세계를 다시 쓰는 장면을 목격하게 하는 전시다.
국제갤러리가 K3와 한옥 공간에서 펼친 이번 전시는, 서구 근대사가 밀어낸 시선들을 빛과 점의 구조로 다시 호출한다.
보이드의 ‘점-공백’ 회화는 기억의 단위들을 해체해 새로 배열하며, 관람자의 눈이 이동하는 경로 자체를 하나의 서사적 장면으로 전환한다. 점 하나가 질문이 되고, 공백 하나가 반전이 되는 방식으로 세계는 조용하지만 견고하게 흔들린다.
보이드는 케언즈 원주민 혈통을 가진 작가로,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 속에서 지워진 시선과 기억을 ‘점(dot)’이라는 독자적 조형 언어로 복원해온 인물이다.
보이드의 작업 세계는 2011년 런던 자연사박물관 레지던시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장됐다. 당시 그는 호주 최초의 수인(囚人) 선단과 관련한 유물, 박물관이 축적해온 식민의 기록들을 면밀히 연구했다. 이 경험은 ‘누가 기록하고, 무엇이 지워지는가’라는 질문을 그의 작업 중심에 놓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이후 보이드는 식민주의, 지식 체계, 문화적 가치의 위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토대로 서구 낭만주의가 구축한 권력 구조와 신화적 서사를 끊임없이 해체·재구성해왔다. 그의 점(dot) 회화는 바로 그 질문들을 시각적 언어로 번역해온 방식이자, ‘보이지 않는 역사’를 다시 부르는 그의 지속적 탐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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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갤러리 K3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설치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재판매 및 DB 금지 |
이번 전시는 2025년 신작 30여 점을 중심으로 보이드가 지속적으로 파고든 식민주의, 지식 체계, 신화의 권력 구조를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지난 2021년 이후 국제갤러리에서 세 번째로 열리는 개인전이다.
전시 제목 ‘Finnegans Wake’는 제임스 조이스의 동명 소설에서 차용했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고 반복되는 조이스의 구조처럼, 보이드의 작업도 하나의 진실 대신 복수의 시선이 공존하는 세계를 지향한다.
◆ “점은 포자이며, 빛의 떨림입니다”
9일 전시장에서 만난 보이드는 자신의 점(dot)을 이렇게 정의했다.
“저에게 점은 생태적이고 우주론적인 언어입니다. 포자처럼 확산하고 생성하는 존재죠. 빛과 구조물이 만나 떨림을 만들고, 그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새로운 생성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점의 반복이라는 형식 때문에 쿠사마 야요이를 연상하는 관람객도 있다. 이에 대해 그는 “형태적으로 비슷해 보일 수는 있지만, 개념적 기반은 전혀 다릅니다. 저는 점을 통해 언어와 우주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어요”라며 조심스레 선을 그었다.
하지만 곧 그는 두 작업이 공유하는 한 지점을 조심스럽게 인정했다.
“쿠사마 작업의 무한 개념과 제가 말하는 포자적·우주론적 언어는 확산과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 무한을 심리적 반복이나 내면의 패턴이 아니라, 언어·역사·우주가 얽힌 구조로 보고 있습니다.”
즉, 쿠사마가 ‘내면의 무한’을 감각의 반복으로 구축했다면, 보이드는 ‘우주적 무한’을 점·빛·언어의 관계 속에서 다시 사유한다는 의미다.
이번 전시의 진짜 주인공은 캔버스가 아니라, 작품 뒤편에서 밀려드는 자연광이다.
햇빛이 스크린을 통과해 바닥 위로 흩어지는 순간, 점들은 보이드의 말처럼 ‘떨림’이 되고, 이미지는 벽에서 풀려나 공간 전체를 점령하는 생명체가 된다. 점은 더 이상 회화의 표면에 갇힌 기호가 아니라, 관람자의 발끝과 그림자 위에서 자라나는 사건이 된다.
그 순간이야말로 보이드가 말하는 "기록되지 않은 세계가 흔들리며 드러나는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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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제갤러리는 9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K3와 한옥 공간에서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의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가의 신작은 소개하고 있다. 2025.12.09. [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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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호주 케언즈 원주민 혈통인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 작가가 9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5.12.09. [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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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보이드 〈Untitled (BCJCVET)〉 2025 Oil, acrylic and archival glue on paper mounted to canvas 80 x 8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Joshua Morris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재판매 및 DB 금지 |
◆ 만화 한 컷을 뒤집어 세계를 다시 쓰는 방식
이번 신작의 핵심 기반은 1958년 호주 정부가 제작한 학습 만화 'The Inland Sea'다.
호주 대륙 어딘가에 내해가 존재한다는 허구적 신화를 교육 도구로 사용한 사례로, 식민주의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만든 대표적 시각 기제다.
보이드는 이 만화의 장면들을 캔버스로 가져와 원본 이미지 일부를 덮고, 지우고, 수천 개의 점으로 해체한 뒤 다시 배열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누가 기록했고,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전시장 K3의 중심에는 유럽 탐험가와 원주민 가이드의 관계를 다룬 대형 회화 'Untitled (LOTAWYCAS)'가 자리한다. 그 맞은편에서는 보이드 작업의 핵심 모티브인 ‘렌즈’가 설치작품 'Untitled (PCSAIMTRA)'로 확장된다.
취조실에서 사용하는 단방향 거울을 활용해 관람자의 시선을 다시 반사시키는 구조다.
“거울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건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선택적 서사가 어떻게 기록을 지배하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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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제갤러리는 9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K3와 한옥 공간에서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의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가의 신작을 소개하고 있다. ‘렌즈’가 설치작품 'Untitled (PCSAIMTRA)'. 2025.12.09. [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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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국제갤러리 한옥공간에 전시된 다니엘 보이드 전시 전경.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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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보이드 〈Untitled (BCWYWFM)〉 2025 Oil and archival glue on paper mounted to board 30.5 x 23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Joshua Morris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재판매 및 DB 금지 |
◆ 한옥 공간: 점과 여백으로 재구성된 원주민의 노래
한옥 공간에서는 악보 형상의 회화들이 조용한 긴장감을 품고 걸려 있다.
‘Aboriginal Nonsense Song’, ‘A Corrobboree’ 등 작품들은 원주민의 노래가 서구적 악보 체계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왜곡과 상실의 잔향을 은유한다.
나란히 배치된 원주민 소녀의 얼굴과 새의 실루엣은 식민의 역사에서 비롯된 위협과 긴장을 드러내며, 검게 지워진 학습 만화의 콜라주는 ‘진실의 공백’을 다시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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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다니엘 보이드 전시 작품. *재판매 및 DB 금지 |
이미지를 파편화하고 그 조각을 재구성하는 보이드의 방식은, 그가 최근 탐구해 온 신화적 형상에서도 이어진다.
이면화 'Untitled (TDLRHTY)'와 'Untitled (BBBPTM)'에는 이번 전시의 상징적 매개인 바다를 지배하는 신 포세이돈이 등장하고, 'Untitled (STGLWOAGLM)'과 'Untitled (FWIGSKWIK)'에는 서구 낭만주의가 구축한 미(美)의 전형인 아폴론의 이미지가 자리한다.
이를 통해 보이드는 백인 우월주의가 생산해온 시각적 규범과 신화화된 ‘진실’에 균열을 내고, 그 자체를 다시 질문하는 시각적 전략을 드러낸다. 전시는 2026년 2월 15일까지. 관람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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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호주 케언즈 원주민 혈통인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 작가가 9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5.12.09. [email protected] |
◆ 다니엘 보이드 작가는?
1982년 호주 케언즈에서 태어나 현재 시드니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지난 10여 년간 그는 호주 현대미술을 넘어 국제 미술계에서 가장 활발히 논의되는 작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주요 개인전은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 ‘RAINBOW SERPENT (VERSION)’(2023),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미술관 ‘Treasure Island’(2022), 국제갤러리 ‘Treasure Island’(2021), 캐리지웍스 ‘VIDEO WORKS’(2019) 등이다. 단체전은 제16회 샤르자 비엔날레(2025), 오카야마 아트 서밋(2022), 서울시립미술관 ‘UN/LEARNING AUSTRALIA’(2021), 보고시안 파운데이션 ‘Mondialité’(2017),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All the World’s Futures’(2015)에 참여했다.
2014년 불가리 미술상 수상. 2022년 아치볼드 프라이즈 최종 후보. 건축사무소 에디션 오피스와 제작한 기념비적 조각
'For Our Country'(2019)는 ACT Architecture Awards 2020에서 4관왕을 기록했다.
작품은 캔버라 호주 국립미술관, 태즈메이니아 박물관 및 미술관,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미술관, 런던 자연사박물관, 파리 카디스트 등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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