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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기운'에 빠진 장인정신…김수수 '색면 추상'[박현주 아트클럽]

등록 2024-03-09 01:01:00  |  수정 2024-03-14 15:58:03

용광로 시뻘건 불 현장서 보고 매료…뜨거움 넘은 강렬한 열기 감흥

불꽃 열기 색면 추상에 담아…20번 이상 반복 색칠 노동집약적 작업

북경 중앙미술학원 출신·대한민국미술대전 최연소 대상 수상

서울 인사동 갤러리H 1~3층 전관서 13~24일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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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색면 추상화가' 김수수 작가가 14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H에서 개인전 '불과 불티'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김 작가 작품(불)의 모티브는 '용광로에 대한 인상'에서 시작되었다. 2024.03.1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처음엔 무식했어요.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오기로 작업했죠."

2018년 중국 최고의 미술종합대학인 북경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신문을 보다 뛰쳐나갔다.

"뜨거운 기운이 지면을 뚫고 나오는 듯한 용광로의 열기를 직접 보고 싶었어요. 그 길로 신문 속 공장에 달려갔는데 일반인 통제구역이라 위험하다고 거절을 당했고 사진 찍는 것도 거부해 낙담했죠."

평소 숫기도 많고 말이 없는 편이지만, 뜨거운 아우라를 내는 불빛을 잡고 싶은 욕심이 컸다. 중국 유학 시절 몸에 베인 현장 확인 습관이 발동됐다. 항상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남기던 '사실주의 훈련' 덕분이다. 간식을 사 들고 가 몇 날 며칠 현장 근로자들을 설득을 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꼭 필요하다." 결국 문이 열렸다. 그렇게 마주한 용광로의 '불'은 신비롭고 황홀했다.

"용광로가 열리면서 뜨거운 열기가 온 천지에 터져 나오는 광경과 불의 색이 주변 환경과 융합되는 장면…와우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허공과 바닥을 순식간에 하나의 기운으로 아우르는 불의 기운. 가슴속에서 진심 뜨거운 감흥이 올라왔다. 그 '불의 색'은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정신이 데인 것 같은 강렬한 충격도 잠시,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거리낌 없이 불을 조율하는 직원들의 모습에 또 깜짝 놀랐다. "불길이 뜨거운데 여러 쇳덩이를 넣고 녹인 뒤 다시 새로운 쇳덩이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더라고요."

불의 형상을 담기 위해 현장에서 스케치를 수없이 했고, 불의 기운과 불을 다스리는 '장인 정신'을 화폭에 녹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불의 기운에 집중하고 사족을 다 빼자 결국 추상이었다. 이렇게 나온 '불' 작업은 2018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비구상 부분에서 대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517점이 응모한 미술 대전에서 뽑은 대상(1명)은 27세 최연소 작가의 수상으로도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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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수. Fire(불) 91x65cm Oil on canvas 2023 *재판매 및 DB 금지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며 작업합니다."

화가 김수수(31)는 'MZ 작가' 중 '색면 추상화'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팝아트와 풍경화를 주로 작업하는 요즘 화가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내공 가득한 작품을 보고 중견 작가로 오해하다 앳된 얼굴의 작가를 만나면 깜짝 놀란다.

꽃 중의 최고의 꽃 '불꽃'에 빠져버린 그는 불꽃을 숭고함의 뿌리로 본다. 자신을 압도한 불꽃의 모습을 구상화로 표현하지 않고 영혼을 갈아넣은 듯한 추상화로 보여주는 이유다.

언뜻 '사각형의 색면 추상'의 거장 마크 로스코의 작품과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알고 보면 아하~한다. 붉은 용광로가 입을 벌린 모양을 검은 사각의 화면에 담은 것. 그 안에 붉은색의 불꽃과 타고 남아 재가 되는 과정을 회색과 흰색의 대비로 전한 모습이다.

“용광로를 마주한 순간 오로라처럼 온갖 색깔의 열기를 내뿜는 장면에서 인생의 필름이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그는 "그 찰나의 느낌들을 가장 단순하며 강렬하게 옮긴 것이 지금의 그림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마크 로스코가 색채의 미감에 주목했다면, 제 그림엔 불을 대면한 이들의 순결한 노동의 참 의미를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용광로에서 느낀 강렬한 기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때의 강렬한 불빛의 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로지 '불의 기운'을 전달하는데 집중했다. 용광로 문은 단순미로 살렸다. 뜨거운 불길이 일렁이는 문이 닫히고 열리는 모습을 사각의 형태에 가둠과 동시에 불길의 모습은 쓸어 내리는 듯한 붓질로 표현했다.

특히 검고 검은 바탕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은 각고의 실험 결과다. 현장을 반영한 재료의 고민에서 탄생했다. 용광로 공장에서 볼 수 있는 금속성의 거친 느낌을 내고 싶었다. 여러 재료의 실험을 거쳐 유화 물감과 탄소, 흑연을 혼합해 그 느낌을 살려냈다. 탄소와 흑연을 이용하면 그림 표면이 미세하게 반짝이는데, 화려한 반짝임보다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와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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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수수 작가가 직접 제작한 2m 길이의 붓으로 한번에 작업하는 장면.

허투루 나오는 작품은 없다. 탄탄하고 꼼꼼한 붓질로 완벽성이 돋보인다. 작은 먼지나 티끌도 허락하지 않는다. 한 작품의 바탕 색만 20번 이상을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그 위로 올린 색층도 수없이 반복하며 두께감의 무게와 함께 매끈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 작품에도 노동, 그러니까 장인 정신을 담고 싶었어요."

마치 용광로 앞에서 근무하는 직원처럼, 하루 종일 반복적인 일을 똑같이 수행한다.

작품은 크기와 상관없이 단번에 한 붓으로 최종 마무리하는 일필의 채색기법이 압도적이다. 단 번의 붓 터치를 위해 여러 개의 붓을 이어 2m가 넘는 특별한 붓을 직접 제작해서 사용한다. 그렇게 한번에, 또 반복해서 칠해진 화면은 곱고 진한 색감으로 단정함도 뽐낸다.

오기로 시작한 작업은 수행이 되고 있다.

전업 작가지만 회사원처럼 오전 7시 작업실로 출근해 퇴근을 반복하며 붓 질과 씨름한다. 밥 먹는 시간 외엔 모든 시간의 그물망을  그림 작업으로 채운다. 지난 2년 간 400점을 그려낼 정도로 '일 벌레'다.

"한 때 뭔가 보여줘야겠다며 오기로 작업하며 스스로 짐이 되기도 했어요. 이렇게 살다 안되겠다 싶어 불교 공부를 했어요. '내려 놓기'를 배우며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 하려는 마음조차 내려 놓으니 진정한 원동력이 생기더라고요. 매일 하는 그림 작업은 제 일이자 취미입니다. 그림 그리는 일이 무엇보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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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Flakes of Fire(불티) 91x65cm Oil on canvas 2023     오른쪽 Flakes of Fire(불티) 91x65cm Oil on canvas 2023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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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수, Flakes of Fire(불티) 91x65cm Oil on canvas 2024 *재판매 및 DB 금지


올해 홍익대 대학원 회화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그는 신작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오는 13일부터 24일까지 홍익대가 서울 인사동에서 운영하는 갤러리H 1~3층 전관에서 40여 점을 선보인다. '불'시리즈에 이은 신작 '불티' 시리즈와 디지털라이징 전문가 어라운즈 이창민 대표와 함께한 디지털 아트 영상 작업도 공개한다.

새 작품 '불티' 시리즈는 단어 그대로 용광로에서 터져 나오는 불티와 재에서 영감을 받았다. 점 사이에 선이 존재하고 점과 선이 면이 되어 공간을 이루는 작업이다. 불티의 상승 이미지가 완벽히 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보인다.

"'불티' 에서도 '불' 작업에서 행한 수십 번의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노동의 숭고함을 전달하려 노력했어요. 첫 초심을 갖게 한 노동자들의 땀을 작품에 옮기기 위해 수많은 노동의 시간을 넣으려 집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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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수 Flakes of Fire(불티) 91x65cm Oil on canvas 2024 *재판매 및 DB 금지

"용광로 안에서 들끓는 쇠의 모습을 인생의 다양한 현상들에 결부시켜 그 요체를 뽑아내는 작업은 현대미술에서 강조되는 개념적인 측면, 철학의 영역에 발을 담근 것이다."(미술평론가 윤진섭)

시간의 나이테를 쌓아가듯 온 몸과 마음을 녹인 그야말로 작가의 삶이 육화(肉化)된 '김수수 색면 추상'이 진지하고 묵직한 에너지를 전하는 배경이다.

"제가 용광로를 처음 봤을 때의 그 강렬한 느낌을 제 작품을 통해 관람객도 느끼신다면 바랄게 없습니다."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묵묵히 배경을 칠하고 칠하기를 거듭하며 반복의 힘을 기른 그는 침묵에 익숙한 고요한 분위기다. 화가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극한 직업이다. 쇳덩이도 녹이는 용광로의 강렬한 불꽃이 결국 불티로 날리며 사라지는 것을 담아내며 최고의 긴장감을 경험한 그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다.

“결국 제 작품은 쉼 없이 반복되는 조형적 행위를 거쳐 추상과 구상, 허상과 실상의 경계를 극복한 인생의 긴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커다란 용광로 안에서 분출하기도 하고, 녹아내리기도 하는 모습이 생멸하는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온갖 감정들로 때가 묻고, 많은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덕지덕지 굳은살로 뒤덮인 우리의 삶도 일 순간에 덧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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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색면 추상화가' 김수수 작가가 14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H에서 개인전 '불과 불티'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김 작가 작품(불)의 모티브는 '용광로에 대한 인상'에서 시작되었다. 2024.03.14. [email protected]




김수수 작가는 화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왔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중국으로 유학, 북경 중앙미술대학교 유화과를 졸업(2017)한 후,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 회화과 석사 졸업(2021), 올해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졸업을 앞두고 있다. 2014년 제4회 대한민국 호국미술대전 대상, 2018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최연소로 대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고, 2019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처음으로 20대 작가에게 내준 대형 개인전을 개최해 주목 받았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