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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자수를 다 망쳐?"…섬유예술 혁신한 이신자 [박현주 아트클럽]

등록 2023-09-21 16:49:01  |  수정 2023-11-09 09:40:40

태피스트리(tapestry)작가 효시·한국 1세대 섬유예술가

국립현대미술관, '이신자, 실로 그리다' 회고전 22일 개막

1950년~ 2000년대 작품 90여 점·아카이브 30여 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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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참석하여 전시장을 돌아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그때는 손꾸락으로 했냐 발꼬락으로 했냐고 했어"

이젠 한국 섬유예술의 거목이 된 '태피스트리(tapestry)' 1세대 작가 이신자(대한민국 예술원 회원)는 여전히 앞선 모습이다.

2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만난 이신자 화백은 1930년생, 아흔 셋의 나이가 무색했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채 세련미를 풍겼다.  자수를 파격적인 '섬유 예술'로 진화시킨 혁신가답게 할머니 모습이 아니었다. 검정 원피스에 나무를 형상화한 작품 브로치를 달고 기하학 무늬가 수놓은 검정 스타킹에 구두를 신어 쨍쨍한 각선미를 과시했다. 청력 기능이 약간 떨어졌지만 기억력은 생생했다.

"선생님이 없었어. 혼자 하다보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니까…자수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욕했죠. 대한민국 다 망친다고."

1950년대 당시, 한 땀 한 땀 섬세하게 수를 놓은 자수가 보편적인 시대, 이신자의 자수는 그야말로 황당했다. 듬성듬성, 투둑투둑 엉성하게 실을 꿰매고 붙이듯 한 작업은 혹평 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대한민국 자수는 이신자가 다 망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파격은 신세계를 열었다. 자수인들이 보기에 듬성하고 웃기는(?)자수 병풍 작품과 천을 투박하게 이어붙인 아플리케 작품으로 1956년(제5회)과 1958년(제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30세에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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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갖고 주요 전시작을 선보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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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참석하여 전시장을 돌아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1965년 신문회관에서 연 1회 개인전은 '실과 바늘을 사용해서 만든 그림 같이 보인다'는 언론의 호평 속에 주목 받았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바탕은 창호지 구긴 것 아니면 나무 망사 등 천에만 의존하던 옛법을 버렸고 실도 명주실 아닌 노끈,푸대자로, 올 등 굵기와 질을 골라가며 변화 많게 사용하고 있어 이 현재 자수는 실과 바늘을 사용해서 만든 그림같이 보인다. 수법이 무척 재미있고 창의적이다"라고 썼다.

"그 시절에 자수는 그저 화가들의 그림을 받아서 놓는 게 대부분이었거든."
 
이신자 화백은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사실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잘 몰라서 모든 것(재료)을 다 쓰니 그렇게 됐다"며 "선생님이 있었거나 자수학과 출신이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자수 같은 작업을 하지만 그는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이다. "1970년대에 외국에서 가서 보니까 패티스트리가 굉장히 눈에 들어온게" 시작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대신 저렇게 짜는 걸 해봐야 되겠다 해서 한 거죠."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떠냐, 저떠냐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아쉽기는 했지요. 모든 것은 내 스스로가 했어요. 실도 털실 몇 가지 종류밖에 없어 애들 옷 사서 그거 풀어서 쓰기도 하고…직조기가 없었으니까 못 박아서 그냥 그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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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갖고 주요 전시작을 선보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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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갖고 주요 전시작을 선보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국립현대미술관(관장 김성희)은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를 22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최한다. 태피스트리, 염색, 드로잉 등 새로운 표현과 재료를 사용한 작품을 재조명한다.

작가 이신자는 1970년대 섬유예술이라는 어휘조차 없던 시절에 ‘태피스트리’ (tapestry)를 국내에 소개하는 효시적 역할을 하며, 한국 섬유예술의 영역을 구축하고 확장한 주역이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초기작부터 2000년대 작품 90여 점과 드로잉, 사진 등의 아카이브 30여 점을 통해 이신자의 작업 세계관을 살펴볼 수 있다.

1965년 첫 개인전때 놀라움을 선사한 '실로 그린 그림' 같은 신기함은 여전하다. 옛날 '이걸 손가락으로 했냐'는 비난은 이젠 "이걸 진짜 손으로, 어떻게 했냐"는 감탄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파괴적 혁신'은 열정과 성실함이 힘이다.

"나는 그냥 잔 적이 없어요. 다음 작품을 뭘 할까? 그러면 어떤 천을 쓸까? 이러한 방법을 할까? 머릿속으로 해보고는 생각이 나면, 일어나서 스케치를 해두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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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갖고 주요 전시작을 선보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초기 작업에는 전통적인 섬유 소재 대신 밀포대, 방충망, 벽지, 종이와 같이 일상의 재료와 한국적 정서가 담긴 평범한 소재가 활용됐다. 작품은 거칠지만 자유롭고 대담한 시도들을 엿볼 수 있다. '장생도'(1958), '도시의 이미지'(1961), '노이로제'(1961) 등 크레파스나 안료를 칠하고, 천을 덧대는 기법인 아플리케(appliqué)를 하여 캔버스의 바탕을 새롭게 바꾸어 나가며 한국 섬유미술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냈다.

"태피스트리라는 게 뭔지도 잘 몰랐어요. 그냥 실을, 물감으로 생각해서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1972년 국전에 출품한 '벽걸이'(1971)는 국내에 처음 선보인 태피스트리 작품으로 전통적인 태피스트리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독특한 재질감과 입체적 표현을 만들어냈다. 이후 작품에는 강렬한 색상의 대비로 신비감을 더하고, 간결하지만 대담한 기하학적 구성이 독특하다. 거대한 크기에 담아낸 작품은 '실로 그린 추상화'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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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갖고 주요 전시작을 선보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한국 섬유미술의 개화기’라 일컬을 만큼 국내 섬유 미술계가 새 국면을 맞이한 1984~1993년대 작품은 설치미술까지 나아갔다.  '숲의 왕자'(1987)와 같은 의상 디자인과 무대막 등의 작품은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표현 방법이 압권이다.

19m에 이르는 대작 '한강, 서울의 맥'은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고자 3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이다.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한강의 물줄기를 중심으로 올림픽 주경기장, 63빌딩, 워커힐 등 서울의 일부를 구상적으로 다루되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흑과 백이 결합된 회색 톤에 스푸마토(sfumato)풍으로 빛을 은유하듯 이미지를 투영했다. 붓 대신 손으로 태피스트리 수묵화를 그려내며, 아주 세밀한 명암 표현으로 태피스트리 고유의 특성을 제대로 살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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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갖고 주요 전시작을 선보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동시대 예술로 보면 어쩌면 한물간 구닥다리 작품이지만 실물로 보는 작품은 경이롭다. 이 화백의 작업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전시는 인간의 손길이, 편견없는 생각이 고정관념을 깨고 세상을 한 단계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매일 꾸준하고 순수한 반복의 행위가 어떻게 예술혼으로 이끄는지, 그 지난한 고통을 뚫고 희열을 맛 본 작품의 위대함을 전한다.

회고전은 이신자의 작품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4부로 나누어, 각 시기별 한국 섬유미술사의 변천사와 작가의 작품세계의 변모상을 함께 살펴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작품의 뒷면까지 볼 수 있는 입체적인 전시 연출로 작품 속을 거닐며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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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갖고 주요 전시작을 선보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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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국 섬유예술의 1세대 작가 이신자가 21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 언론공개회에 참석하여 전시장을 돌아보고 있다. 2023.09.21. [email protected]

평생 고된 노동같은 수작업을 해온 작가는 고령의 나이에도 식지 않은 열정을 보였다. "아직 작업할 수 있는 의욕이 있다"며 "건강하면 젊은 사람들이 하는 작업을 지금도 하고 싶다"고 했다. "섬유미술은 회화와는 달리 재료에서 오는 독특함이 있잖아요. 따뜻하잖아요. 왜 섬유 작업을 하냐고 물어보는데, 난 참 포근하고 좋거든." 전시는 2024년 2월18일까지. 관람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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