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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사는 화가의 '통찰의 맛'...강요배 '풍경의 깊이'

등록 2020-09-10 12:04:11  |  수정 2020-09-10 12: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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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풍경의 깊이 강요배. 책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어떻든 여기 한 권의 글 모음이 있다.
내 인생 45년간의 생각들이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에 쓰인, 많지 않은 글들이다.
한데 모인 글을 보니 살아온 시간에 따라, 내가 여러 사람의 나로 나뉘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이 든 내가 청장년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젊은 나는 미숙했으나 지금의 나보다 먼저 살았다.
젊은 나들이 있었기에 뒤따르는 지금의 내가 있다. 또 달리 보면,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어린 나를 속에 안고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이를 겹겹으로 둘러싸 온 인격체가 지금의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기에 지금의 나는 젊은 나들을 긍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든 나쁘든, 한 화가의 인생에서 펼쳐진, 생각의 여로가 투명 구슬 속처럼 환히 들여다보이는 결과물이 나왔다. 감사하다.”(화가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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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2018년 5월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연  화가 강요배.  [email protected] 2018.05.27.

“한 화가의 인생에서 펼쳐진, 생각의 여로가 투명 구슬 속처럼 환히 들여다보이는 결과물”. 그의 말처럼 이 책 '풍경의 깊이'는 화가 강요배(68)의 '통찰의 맛'을 느껴볼수 있다. 작가 작품을 담은 '도록 같은 책'과 달리, 그림과 산문을 엮은 첫 '예술산문'책이다.
 
자연과 역사, 민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삶과 세계를 응시하며 강렬한 필치로 미적 영감을 표현해 온 화가 강요배의 예술 세계를 보여 주는 글 모음이자 그림 모음이며, 사유의 모음이다.

작품을 그리는 시간보다 사유하는 시간이 더 길 때도 많다는 화가 강요배는 "1년 또는 다년간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며, 그림만으로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자신을 더 확실히 하고자 글을 써 왔다"고 한다.

 '4.3 화가'로 미술계에서 민중미술계열로 유명한 화가'로 알려진 것에서 나아가 화가로서의 인간 존재에 관한 그의 모습이 담겼다.

화가 강요배는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간을 기념해 소설가 현기영이 연재한 '바람 타는 섬'에 함께할 그림을 그리면서 주목받았다. '제주 민중 항쟁사' 연작은 〈동백꽃 지다〉(1991)라는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작품으로 이어지며, 강요배는 4·3 항쟁의 화가로 불리게 된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고향의 역사를 탐구하는 일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생존의 지평과 그 복판을 흐르는 인간 뜻을 읽어 내는 문제였다. 4.3 항쟁의 역사는 그의 이름에 오롯이 남아있다. '요배'는 본명으로 평범한 이름이면 불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버지가 어려운 이름을 골라 지었다고 한다.

강요배는 그림을 통해 아픈 역사가 계속 기억되고 이야기되길 바랐다. 서울에서 고등하교 미술 교사를 하다, 1992년 제주로 귀향했다. 섬의 바람과 나무를 벗하며 그 땅에 새겨진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작품은 점차 깊어졌다.

작품의 방법론을 치열하게 고민했고, 기억과 시간을 응축한 ‘상’象으로 그림을 그리기에 이른다. "‘추상’이 “애매모호하게 흐리거나 기하 도형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흘러가는 ‘사건’을, 어떤 기氣의 흐름을 추출하는 것”이라고 추상의 의미를 갈파했다. 결국 핵심, 골격을 중시하며 명료화하는 것이 ‘추상’의 진정한 의미라는 주장이다.

강요배는 나이가 들면서 좀 어눌해지고 어설퍼지고 잘 잊어버리고 실수도 많이 하면서 생각이 좀 단순해진다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온갖 화려한 기법을 동원하는 게 좋았지만, 점점 어수룩하고 소박한 것이 좋아지고 세밀한 것에 대한 집착을 많이 놓게 된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도 일흔 살이 넘어서야 어린아이처럼 서툰 듯한 글씨체가 나온 거다."

그는 자신 역시 아직도 미완인,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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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풍경의 깊이 강요배 책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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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한 독자에 제공하는 '풍경의 깊이' 책 첫표지에는 강요배의 이름이 날짜와 함께 연필로 적혀있다. 2020.9.10.  [email protected]

책 '풍경의 깊이'는 후원자가 131명이 참여한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됐다. 오는 11일 출간에 앞서 펀딩에 참여한 독자에게 작가의 친필 사인본을 먼저 선보였다.

책에는 화가 강요배가 그린 2000여 점과 그림에 담긴 뜻을 표현한 수많은 글과 말 가운데 작가의 시대 정신과 깊이를 읽을 수 있는 130점을 선정해 묶었다.

사진가 노순택의 강요배 인터뷰도 실려 있다. 30여 년 만에 중견 사진가가 되어 강요배를 만난 노순택은 그의 작품을 “바람에 부서지는 뼈들의 파도”처럼 보인다고 했다. 379쪽, 돌베개 펴냄, 3만8000원.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