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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아트클럽]'호모데우스' 같은 윤석남...팔순 자화상

등록 2018-08-31 09:00:00  |  수정 2018-09-10 10:27:36

국내 '페미니즘 미술 대모' 40여년간 여성의 삶 대변

英 테이트미술관 '아시아 페미니즘 대모'로 연구도

'민화풍 첫 자화상' 학고재갤러리서 9월 4일부터

백발로 현재를 살아가는 당당한 자신감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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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윤석남 작가가 9월 4일부터 학고재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에 자신의 자화상을 선보인다. 군더더기 없는 순수하면서도 담대한 색이 돋보이는 자화상은 책가도와 함께 여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 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HOMO DEUS)로 바꾸는 것이다."

 전 세계 베스트셀러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가 지난해 출간한 '호모 데우스'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화가(예술가)를 '호모 데우스' 같다면 무리일까. 하지만 이 사람을 직접 본다면 수긍할 수도 있을 것 같다.

 1939년생. 팔순이 된 화가 윤석남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나이 팔십 먹었다고 허리가 꼬부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런 고정관념은 버리세요"

 30일 서울 학고재 갤러리에서 만난 윤석남은 '팔순 할머니'라는 이미지를 깜박 삭제시켰다.

 할머니처럼 절대 안보이는 스타일이다. 줄무늬 남방에 진바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린 옷차림. 지금 20~30대가 입어도 무방한 패션이다.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의 옷을 입어 부담스럽고 어색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다. 20년은 젊어 보이는, 60대라고 해도 믿을 외모다. 노화를 제대로 극복했다. 그는 "내 주변엔 이런 사람 많다"면서 "고정 관념을 깨라"고 다시 지적했다. 

  대개 화가들은 또래 보다 젊어보인다.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안에 있는 것을 쏟아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남자 화가들은 대기만성형이다. "친구들이 은퇴하고 뒷방 신세 될때 여전히 현역"이라며 혈기 왕성하다. 젊어서 못 본 빛도 찬란하게 쏟아져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딱 적용된다. 3~4년전 단색화 열풍으로 뜨겁게 부상한 팔순의 화가들이 예다.
 
  국내 '페미니즘 미술 대모'로 불리는, 팔순의 윤석남의 행보도 국내 미술사에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외모 뿐만 아니라 작업 열정이 만개했다.

 최근 영국 테이트 미술관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되면서 '아시아 페미니즘의 대모'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부장적인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반기를 드는 페미니즘 움직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로 꼽혔다.

 국내외 미술계 러브콜도 이어졌다. 오는 11월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열리는 단체전에 참여하고, 2019년에는 아트바젤 홍콩에 참가한다. 이에 앞서 오는 9월 4일부터 서울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제 24회 개인전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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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지난 40여 년 동안 어머니라는 주제로 여성의 문제를 다루어 온 작가 윤석남이 작가 활동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주제로 전시를 펼친다.

◇ 독학으로 그린 그림, '페미니즘 미술 대모'가 된 윤석남
 
 만주에서 태어나 6살 때 한국으로 온 윤석남은 한국 현대여성의 삶을 대변한다. '석남'이라는 이름은 아들을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졌다. 6남매, 둘째인 그의 이름 덕분인지 밑으로 남동생 셋이 태어났다.

 10살에는 화가, 그 이후엔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미스 윤'이 됐다.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후 50여 년전 직장 생활을 했다. 직업은 회사 타이피스트. 컴퓨터 등장으로 타이피스트가 사라졌지만 50~60년대 최고의 직업이었다.

 회사에서 악명이 높았다. '일개 타이피스트가 인사를 안한다'는 수군거림이었다. "남성 중심 회사였다. 복도를 지나가면 얼굴 마주칠까봐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는 윤석남은 "남자한테 정말 인사하기 싫었다"고 했다. 그렇게 8년을 견뎠고, 회사를 그만뒀다.

 결혼 때문이었다. "그 당시 여자는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 두는 게 원칙같은 세상"이었다. 결혼도 하고 먹고 살만한데  30대 초반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그때는 남편이 꽤 돈을 번 중산층 가정이었다. "남들 보기엔 행복한데 나는 불안하고 불운하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다.

 "그게 왜 그런지 이유도 없이 그랬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데 내면은 상충되는 감정. "먹고 사는 게 해결이 되니까, 그전 까지는 노동을 무지 많이 했는데...그런 게 왔을까?"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럼에도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할까. 살아 있는 의미가 뭐지?" 고민은 10년간 이어졌다.  어느 날 남편에게 "그림을 해야겠다"고 하니 "하슈~누가 말려?"했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주부로, 남편의 아내로, 딸을 둔 어머니로서 한계를 벗고 나를 찾기 시작한 그림이었다. "그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내가 살아있었을까?"라며 그림을 천직처럼 여겼다.

 나이 마흔이었다. 붓을 잡고, 그림 그리러 간다며 미국으로 1년간 유학도 다녀왔다. 뉴욕(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 생활은 테크닉보다 눈을 뜨게 해줬다.

 그림은 당시 미대 모 교수 작업실에서 드로잉과 회화 교습을 두달 간 배운게 전부다. 이후 아파트 방을 터서 작업실을 만들었다. 습작의 대상은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가 단골 모델이었다. 2년간 밤낮없이 미친 듯이 그린 후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단순한 취미로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을 드로잉이나 조각적 설치, 회화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고발'해 낸 작품이었다. 독학으로 깨우쳐 거칠게 나온 그림은 '여성에 대한 관습적 인식에 역행'하면서 '선구적 페미니스트'로 떠올랐다.

 "페미니즘 작가? 난 전혀 아니었다. 1979년도 4월 처음으로 전시를 했는데, 그때는 여성주의 페미니즘 말 자체도 어색했다."

  단지 "정말 살기위해서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여성으로 살기위해."
 
 1985년 작가 김인순과 김진숙과 함께 ‘시월모임’전을 연 것이 '페미니즘 작가'로 등극한 계기가 됐다. 당시 ‘시월모임’전은 관훈미술관에서 열렸는데, 그의 작품 '무제'는 민중미술의 맥락 내에서 해석됐다. 일을 하고 있는 노인의 얼굴이나 손을 부분적으로 투박하게 그린 작품이었다.

 윤석남은 "그 전시때 한국의 여성문화운동팀과 만났다. 그때 비로소 내가 왜 그렇게 발버둥쳤는지를 알게 됐다"고 했다.

  "나는 여성으로서 몸소 그걸 느낀거고, 그들은 공부를 한거였다. 그때부터 나도 서양의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내가 왜 이런 의식을 하게 된 것일까에 대한 자각이 뼈에 다가왔다. 아마 그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흐지부지 살지 않았을까하는 공포심이 있다."

 ◇늘 엄마 생각 '어머니'는 윤석남 힘의 원천
 
 "나이 마흔에 그림을 시작하면서도 내 자신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서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39세에 남편을 잃고 아이가 여섯딸린 어머니는 향년 95세까지 질곡의 삶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윤석남은 "나의 어머니는 이조시대때 여성의 삶을 가지고 계셨다. 자신은 굶을 지라도 거지가 지나가면 불러다가 밥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며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존경하는 존재다. 늘 엄마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윤석남의 출세작이다. 1980년대 작업 시작 당시부터 어머니를 모델로 인물, 초상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인물화는 '어머니' 연작으로 이어졌다. 투박한 나무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 회화적이기도 하고 조각적이기도 하며, 나무를 이어붙인 콜라주처럼 보이면서도 입체감과 평면성을 동시에 지닌 당시에는 기이하고 독특한 작품이었다.

 작가 개인의 어머니로 비춰졌지만, 점차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상징성과 보편성을 띤 ‘어머니’로 아이콘화되었다. '어머니' 시리즈로 1996년 여성 최초로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고, 1996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설치 작품을 선보여 국제적인 여성작가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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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30일 오전 서울 학고재 갤러리에 전시한 '핑크룸' 앞에서 윤석남 작가가 포즈를 취했다.

 50살이 넘으면서 "나도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도전한게 '핑크 룸' 연작이다. '있어빌리티한' 중산층 가정의 주부의 반란을 꾀하는 작품이다. 

 온통 핑크로 도배되어 현란하다. 핑크색 구슬이 깔린 바닥위에 핑크색 쇼파, 핑크색 한복 치마를 두른 여인의 형상이 거울과 마주한 작품.벽 주변에는 핑크색 종이로 오려붙인 다양한 모습이 정렬되어 붙어 있다. (붓을 잡고 종이를 오려 둘째, 셋째 손가락이 굽어 있다)

 "핑크색은 아름답지만 내 작품의 색은 '형광 핑크'다. 아름다운 게 아니라 날카롭고 불안한게 느껴져 선택한 색이다. 내 삶이 그랬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데 내면은 불안한, 혼란스웠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탈리아풍 3인용 핑크색 쇼파는 의자 다리에 동물의 긴 발톱이 달린 듯 서 있다. 작가는 "화려해보이지만 의자의 쇠 발톱이 나의 불안한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핑크룸'은 작가의 불안감에서 나왔지만 사회적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으로 읽혔다. 핑크를 강요하는 유년 시절의 기억에 맞서는, 사회적 통념을 해체시키는 예술적 제언으로 파고들어 '페미니즘 대표 작가'로 더욱 자리매김하게 된 작품이다.

 미술비평가인 정연심(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는 "윤석남은 '여성의 시각'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온 여성들에 대한 억압된 기억을 개인적 서사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며, 특히 '핑크룸'의 경우 "여성의 방은 흔히 규방 문화를 상징하는 듯한데, 윤석남은 여성을 실내의 공간, 가정이라는 공간에 가둠으로써 여성을 공공의 장소로, 개방된 공간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던 한국의 현실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 것"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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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작가 윤석남의 작품은 여성에 대한 그만의 성찰이 현실 앞에 쉬지 않고 변화해온 흔적들이다. 어머니와 언니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나무 작품으로 형상화한 설치작품 앞에선 작가.


◇어머니에서 이제 내 이야기로... '자화상' 전시

 학고재갤러리 신관에 펼친 개인전은 민화를 응용한 채색 기법으로 완성했다. 윤석남 작가가 40여년만에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 신작 전시이자, 채색화로 선보이는 첫 전시다. 민화풍의 자화상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지각했던 그림이 아니라, 마음과 감성에 호소하는 민화의 특징을 이용한다. 서양의 추상 회화보다는 우리 전통과 문화에 더 긍지를 갖고자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기존에 사용하던 매체를 뛰어넘는 시도를 선보인 신작들은 현역 작가로서 윤석남의 힘을 보여준다. 그동안 김만덕, 허난설헌, 이매창 등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은 역사적 여성 인물을 작품 속에 등장시켜왔다.

  40년 동안 여성 이야기만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자꾸만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을 그리려고 했지만 절대 그려지지 않았다"면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속에서 스러져 간 한국여성을 끌어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혼을 끄집어내서 하고 싶은데 아직 능력밖인지 안되고 있다"며 뜸을 들이는 중이라 했다.  "10여년 전 최초 여성노동가를 작업해보라고 해서 작업은 했지만, 발표는 하지 않고 있다. 감정이입이 확 되지 않는데 가짜로 그림을 그릴 순 없다"고 했다.

   2015년 이후 윤석남은 민화에 큰 관심을 가졌다. 지금까지 나무 위에 여성들의 모습을 묘사해온 윤석남의 새로운 시도다.  "민화가 버려진 보물 같다"며 "서민들의 소소한 생활과 감정이 있는 그대로 느껴진다"고 했다.

 "물고기가 공중을 새처럼 날아다니고... 있을 수가 없지만 얼마나 자유스럽나. 이조 시대 때 억압된 상태에서도 불구하고 밝은 그림이 나온건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채색화에 빠졌"다는 그는 "채색화를 그리기 싶어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팔순의 나이에도 팔순 같지 않고 할머니 같지 않은 윤석남의 '동안' 비결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기위해 40년째 매일 1시간 30분씩 걷기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 외엔 그림 때문에 늘 바쁘게 움직인다. 서울 집에서 경기도 화성 작업실을 매일 출퇴근 하며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팔순이 된 올해에도 '내가 누구인지' 자신을 초상화로 그려내고 몰두했다.

  '페미니즘 대표 작가'로 가부장적인 문화를 깨고 왔지만, 아직 변화는 멀었다고 했다. 젊은 여성들을 만나보면 의식적인 면에서 독립적이지만 직장, 결혼 문제로 고민이 많아 답답하다고 했다.

 자신은 다시 태어나면 "결혼은 안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이 30대 중반에 결혼 안한다고 했을 때 만세를 했다"며 두 팔을 들어올려보였다. 50대 후반인 딸은 사진작가로 현재 미혼이다.

 "자기가 싫다는데 왜 강요를 하냐요?. 비애국적이지만 딸에게도 너 하나 안한다고 나라는 망하지 않아"라고 했다고 전했다.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묻자 간단했다. "그냥 너 답게 살아."

그러면서 "아니, 꼭 결혼을 해야 돼요?"라고 반문했다.  여느 팔순의 할머니들과는 다른 반응이다. 그가 다시 물었다. "내가 이상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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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윤석남, 자화상 Self-Portrait, 2018, 한지 위에 분채 Color pigment on hanji, 142x49cm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 이후의 존재라면, 윤석남은 '페미니즘 미술 대모'로 여성들을 행복하고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호모데우스'같은 예술가다. 

 한국의 여성 미술가로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40여년간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남성 미술가들이 주목해주지 않았던 소소한 이야기, 여성들이 차별당한 이야기, 그냥 피식 웃게 하는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로 여성들과 공감하며 이끌어왔다.  여성작가로 성공한 거 아니냐고 하자, "그런게 성공이 아니라, 작가로서 끝까지 지속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했다.

 이번 개인전은 윤석남이 타인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 마주하고자 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여든이 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작업 뒤에 서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이자 여성 그 자체로 자신을 작업 속에 나타나려고 시도했고, 그 시도를 전시 주제로 잡아 처음 선보이는 것이 이번 전시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진정 바로보자'는 의지로 보인다. 침묵을 깨고 일어나기 시작한 여성들을 응원한다.

  자화상은 '자신과의 대화법'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 윤석남 자신의 당당한 모습이 돋보인다. ‘인형' 같은 여성이 아니라, 자신감 넘치는 '여성 본연'을 만날 수 있다. 투명하고 생동감이 굽이치는 백발의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전시는 10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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