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

[박현주 아트클럽]데미언 허스트 조수였던 '대작' 작가의 반란

등록 2016-08-02 11:11:06  |  수정 2017-11-14 10:52:20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Hope Street , 2016, Oil acrylic and spray paint on canvas, 200x400cm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폭염때문일까. 커다란 가슴을 드러낸 홀딱 벗은 여인들이 장악한 호러물같은 그림이 다 팔려나갔다.

 한국에 처음 온 영국 작가 데일 루이스(35)의 그림이 시원하게 홈런을 날렸다. 지난달 27일 독일에서 온 초이앤라거 갤러리가 서울 첫 개관전으로 선보인 작가다.

 전시 개막하기도 전에 8점이 '솔드아웃'됐다. 작은 그림도 아니다. 가로 4m 세로 2m로 '함부로 애틋하게' 소장할 수 없는 크기다. 여체의 심란한 형상들과 기괴한 자세로 뒤엉켜 있는 사람들의 포즈와 장면들로 딱 보면 헉하는 그림이어서 더 놀랍다.

 독일에 이어 서울에 첫 분점을 낸 초이앤라거 갤러리도 깜짝 놀랐다. 파리와 영국 독일을 오가는 이 갤러리 대표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팔기보다 "이런 그림도 있다 보여주자"고 선택한 작가였다.

 전조 증상은 있었다. 지난 3월 부산에서 연 '아트부산'에서 였다. 거대한 그림을 펼치던 중이었다.  꽃그림과 단색화 등 '보기 좋은 그림들'속에서 루이스의 그림은 좀 민망하기까지 했다. 빨간 입술색이 피흘리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맨몸에 괴상한 자세로 춤추는 듯한 그림을 벽에 거는 순간이었다.

"이 그림 파는 거예요?"
"아~. 네." 딱 2점만 가져온 그림, 다시 안에 있는 그림을 꺼내야 하나 생각이 스칠때, 손님이 다시 물었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Mothers ruin, 2016, Oil acrylic and spray paint on canvas, 200x400cm
"또 다른 그림 있어요?" 그렇게 '보여주자'고 가져온 그림을 순식간에 팔았고, 서울 첫 개관전에 데일 루이스를 자신있게 들이댄 것. 단색화에 꽂혀있는 한국시장에서 모험을 건 배짱이었다.

 '호러물'같은 그림이지만, 알고보면 달라진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풀꽃' 싯귀처럼 이 그림이 그렇다.

 개관전에 선보인 대표작 ‘HOPE STREET’를 보자. 중앙에 있는 거대한 여인이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공격을 받고 있다. 여인의 얼굴에 길다란 빨간혀를 내밀고 핣는 남자의 손은 이미 여인의 가슴에 올라가 있다. 늑대같은 얼굴을 한 형상은 여인의 머리카락를 잡아채고 있고, 주변에는 모든것이 발기된 듯 솟아있다.

 전체적으로 신산스럽고 섬뜩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그림, 뼈대있다. 피렌체의 궁정화가 브론지노가 그린 매너리즘의 대표작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Venus, Cupid, Folly and Time)’에서 비롯됐다.

 우아하고 고혹한 자태를 뽐내는 원작의 비너스가 '불길해보이는 여인'으로 변신했다. 폭력적이고 성(性)적인 현시대를 그로데스크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중세 시대 그림에서 따온 작품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백인, 남성,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재해석됐다. 사회의 냉혹함과  악의적 요소들을 화면에 드러내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블랙코미디스럽다. 아크릴, 오일, 오일 스프레이를 이용한 대형 회화에는 현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선과 악, 혼란과 무질서 부조리 등을 거침없는 붓질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미 세계적인 컬렉터인 사치컬렉션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작가는 영국에서 유망주로 부상중이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Pinot Grigio, 2016, Oil acrylic and spray paint on canvas, 200x400cm
작가 이력이 흥미롭다. 세계적인 스타작가 데미언 허스트의 '조수'였다고 한다. 허스트는 죽음과 부패를 표현한 포름알데히드 설치작품으로 터너상을 수상한후 영국 현대미술의 부활을 이끈 작가다. 2008년 10월 런던 소더비에서 열린 그의 신작 경매에서 223점의 작품 중 218점이 낙찰돼 2280억원이 넘는 수익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영국 미술시장을 발칵 뒤집고, 세계 미술시장을 점령한 허스트는 알고보면 '대작 작가'다. 그는 장인정신을 거부한다. '누가 만드느냐' 보다 '어떤 컨셉으로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한 작가다.

 데일 루이스는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을 '대작(代作)'하다 그만뒀다. 6개월간 일하면서 차가운 공장에 와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허스트는 자기 작품을 전혀 손도 대지 않았다. 작품이 완성되면 와서 서명만 했을 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데일 루이스는 "나의 작품은 나만의 개인적인 창조물이어야 했고 나 만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30명의 조수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는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이것이 나의 창작력을 거의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다.

 남의 그림을 그려주던 '대작'의 후유증은 컸다. 그 경험은 회화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스페인의 발렌시아에 가서 1년간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붓을 잡은 건 런던으로 돌아와 라킴 쇼 (Raqib Shaw)의 스튜디오에서 다시 조수 일을 시작하면서였다. 그곳은 허스트의 스튜디오와는 딴판이었다. 4년 반동안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데일 루이스는 "그곳에서 나만의 스타일과 목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미술계의 비지니스 측면을 보면서 현재  활동할 수 있는 준비 작업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했다.

 '대작'(代作)하다가 '내 작품은 내 손으로 그리겠다'며 시작된 '대작'(大作)은 그래서 힘이 넘친다. 즉흥적이고 직접적이다. 순발력있게 리듬감을 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작가도 한국에서 자신의 그림이 다 팔렸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하다. 그림 8점은 영국에서 돌돌 말아와, 한국에서 '왁구'했다. 그림을 바닥에 펼쳐놓고 캔버스 틀에 맞춘 작업도 직접 했다. 

 이쯤되면 영국에서 온 '대작'작가의 반란이다. '대작'과 '위작(僞作) 논란으로 숨죽인 국내 미술시장에선 이례적인 현상이다. 

 몇몇 블루칩 작가에게만 치우쳐 있던 미술 소비 풍조에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걸까. 아트마켓의 글로벌화에 발맞춰 국내 컬렉터 기호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걸까.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박현주 기자 = 데일 루이스 작가가 영국에서 가져온 거대한 그림을 캔버스틀에 맞춰 끼고 있다.
초이앤라거갤러리 최선희 대표는 솔드아웃된 작품앞에서 "일종의 본능적인 느낌아니냐"고 했다. "한국이나 외국 컬렉터들이나 다양한 작품을 많이 봐온 컬렉터들은 그림을 알아보는 힘이 있다"는 것.

 그림 8점이 팔렸다고 웬 호들갑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일에서 온 신생갤러리가 영국 신예작가를 데려와 '기괴한 그림'을 다 팔았다는 건 한국화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화랑은 유망한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게 가장 기본적인 순기능이다. 하지만 수년전부터 경매시장의 활기로 화랑은 생기를 잃은지 오래다. 경매장이 컬렉터와 작품을 끌고 갔다고 한탄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위작'으로 술렁여 국내 화랑가는 개점휴업상태다. 인사동 한 화랑주는 화랑 운영도 어려워 월마다 '돌려막기'로 연명하고 있다고 할정도다. 단색화 열풍으로 다른 그림은 팔리지도 않는 상황이다. 작가 발굴은 언강생심이라는게 화랑들의 목소리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신생갤러리 초이앤라거를 보면 희망도 보인다. 국내 미술시장도 어느덧 국제적 트렌드에 민감한 시장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데일 루이스' 현상이 새로운 활기를 찾는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점차 다양해져 가는 수요자(컬렉터)기호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선, 화랑이 얼마나 부지런히 작가발굴에 나서고, 작가의 잠재된 비전을 제시하는냐에 달렸다. 손가락만 빨고 있다간 외국에서 온 화랑, 외국 작가에 우리 작가 자리마저 빼앗길것 같은 우려다. 

 잘 팔린 단색화도 잊고, 잘나가는 경매장도 잊고 위작의 파장도 잊고, 화랑은 심기일전할때다. 작가가 살아야 화랑도 산다. 팔리는 그림만 팔아서는 승산없다. 화랑 운영,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영화 대사로만 따라할 말이 아니다.

[email protected]